마10:29-3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His Eye Is on the Sparrow

참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Why should I feel discouraged
Why should the shadows come
Why should my heart feel lonely
And long for heaven and home
When Jesus is my portion
A constant friend is He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I know He watches over me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I know He watches me

I sing because I'm happy
I sing because I'm free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I know He watches me (He watches me)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I know He watches
I know He watches
I know He watches me

I sing because I'm happy
I sing because I'm free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I know He watches me (He watches me)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I know He watches me (He watches me)
He watches me
I know He watches Me



작사 : Civilla Martin / Charles Gabriel

© Universal Music Publishing Group





https://youtu.be/ku2RUdcku_w

His eye is on the sparrow 

by Se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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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a24ae9cbab46a7a6b4035990b759078_1528448714_3.jpg“퀘렌시아”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입니다.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구역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소는 투우사와 혈전을 벌이다가 쓰러질 만큼 지쳤을 때 바로 이 피난처 구역인 ‘퀘렌시아’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힘껏 에너지를 모읍니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을 모을 수 있고 쉼을 가질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회복의 장소이자 ‘퀘렌시아’입니다. 곤충의 퀘렌시아는 나뭇잎의 뒷면이고, 땅 두더지의 퀘렌시아는 땅굴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퀘렌시아가 필요합니다. 일에 지쳐 휴식이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억장이 무너질 때, 그때가 바로 나만의 ‘퀘렌시아’를 찾아가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의 ‘퀘렌시아’는 어디입니까?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퀘렌시아’는 바로 가정입니다. 아무런 부끄럼 없이 얘기도 하고, 핀잔도 받고, 인정받기도 하고, 쉬면서 치료받고 회복되는 그런 감사와 기쁨을 주는 곳입니다. “가정은, 가족은 그런 겁니다.” 어느 한분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동생이 중학교 2학년이었던 시절입니다. 집 근처에 학교가 있어 걸어 다녔던 저와는 달리 동생은 학교가 멀어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늘 엄마가 주시는 차비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차비를 들고 집을 나선 동생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괘씸했습니다. 그래서 쫓아가 따져 물었더니 “가족의 평화를 위하여”라는 이상한 말만 하고 씩 웃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어김없이 엄마는 동생에게 차비를 주었고, 그 모습을 본 저는 "엄마 차비 주지 마세요. 버스는 타지도 않아요. 우리 집 생활도 빠듯한데 거짓말 하는 녀석한테 왜 차비를 줘요!" 하며 동생이 얄미워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먼 길을 걸어 다니는 동생이 안쓰러우셨는지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에게 차비를 쥐어주며 "오늘은 꼭 버스 타고 가거라"라고 당부하시며 보냈습니다. 그 차비가 뭐라고 전 엄마한테 왜 내 얘긴 듣지도 않냐며 툴툴대기 일쑤였습니다. 며칠 후, 학교 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주방으로 얼른 뛰어가 보니 놀랍게도 맛있는 불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워 고기는커녕 끼니 챙겨 먹기도 힘든 상황이어서 더욱 기쁨은 컸습니다. 저는 얼른 들어가 고기를 한 쌈 크게 싸서 입에 넣으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날은 무슨 날... 네 동생이 형이랑 엄마 아빠 기운 없어 보인다고, 그 동안 모은 차비로 고기를 사왔구나" 그 먼 길을 가족이 오순도순 고기를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뻐할 진정 가족의 평화를 위해 걷고 또 걸었다고 했습니다. 성인이 되고 불고기라도 먹는 날이 면, 그날 동생의 모습이 생각나 대견함에 눈시울이 붉어지곤 합니다. 가족은 그런 것 같습니다. 형이 못하면 동생이, 동생이 부족하면 형이, 자식에게 허물이 있으면 부모가, 부모님이 연세가 들면 자식이. 그렇게 서로 감싸며 평생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 가족은 그런 것 같습니다.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라. 물론 많이 싸우겠지, 하지만 항상 누군가 곁에 있잖아,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잖아”(트레이 파커). “가정은, 가족은 그런 겁니다.” 세상을 살아갈, 이겨낼 사랑의 그런 추억을 주는 곳입니다. 어머니날에 나온 어머니들의 반격. "꽃 한송이로 퉁칠 생각하지 말아라!“ 그 안에는 그래도 내 아들들, 내 딸들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가슴에 전해집니다.


얼마 전 서울여자대학교 사랑의 엽서 공모전에서의 대상작입니다. -나에게 티끌 하나 주지 않은 걸인들이 내게 손을 내밀 때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전부를 준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나한테 밥 한번 사준 친구들과 선배들은 고마웠습니다, 답례하고 싶어서 불러냅니다. 그러나 날 위해 밥을 짓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드라마 속 배우들 가정사에 그들을 대신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일상에 지치고 힘든 어머니를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골방에 누워 아파하던 어머니 걱정은 제대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친구와 애인에게는 사소한 잘못 하나에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잘못은 셀 수도 없이 많아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가정은, 가족은 그런 겁니다.”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 인생의 크고 작은 깨달음이 있는 곳, 바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는 그 용서와 화해, 쉼과 위로 그리고 사랑과 평화가 경험되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족입니다. 가정의 달을 지나며 다시 한번 삶에 채워봅니다. “가정은, 가족은 다 그런 겁니다.”


은희곤 목사 (참사랑교회) pastor.eun@gmail.com

ⓒ 미주크리스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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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선교 비사 *


지금부터 100년 전 한 젊은 선교사 부부가 미국 선교부에서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이 젊은 선교사 부부는 충남 공주를 선교 기반으로 하여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공주에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면서 한국식 이름을 우광복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올리브와 로저라는 두 딸을 낳았습니다.


 

1906년 2월 논산지방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비를 피해 상여간에서 잠시 쉬었는데 바로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하고 그 장례용품을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선교사님이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졸지에 선교사님 부인은 과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2년후 선교사님의 부인이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 공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주에 큰 교회들을  세우는데 기여를 하고 47년간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딸이 풍토병에 걸려 죽었는데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는 11살에 죽어서 공주땅  영면동산에 묻힙니다.

 

우광복은 공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나오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됩니다


 

그때가 바로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지 장군이 군정관으로 한국을 신탁통치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할 사람이 필요 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선교사 아들 우광복입니다 우광복이 하지의 참모가 되어 한국 정부수립에 관여 합니다.

 

그때 하지가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합니다.

 


우광복은 어머니와 상의한 후 어머니가 추천해 주는 50명을 하지 장군에게 소개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중 48명 거의 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정부 수립될 때 요소요소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서 나라를 세웁니다.

 

특별히 문교부 장관에 기독교인이 임명되어 미신 타파를 시작했습니다 
국방부장관이 기독교인이 되어 군대 안에 군목제도의 토대를 마련하여 한국군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헌 국회 국회의원 거의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30일 이승만은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주문합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원통한 일을 풀어 버림)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며이모든말씀을우리주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기도하나이다. 아멘

 


이때 기독교인이 전국민의 5프로 안 되는 때 였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사모님이 추천해준 50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10년만에 500만이 되고, 20년 만에 1000만성도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적이 어떻게 가능 했습니까?  
미 군정 시절 우광복이 추천한 50명부터 시작했습니다.

 

우광복에게 누가 50명을 추천했습니까? 바로 우광복의 어머니,  이역만리 타국에서 남편을 잃어 버리고 두 딸을 잃어 버렸는데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사모님 때문입니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 일기로 소천했는데,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묻혀있는 공주 영면동산 내 동생 곁에 나를 묻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아마도 한평생 동안 한국에서 풍토병으로 죽은 동생이 가슴에 살아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 우광복의 묘가 동생 옆에 나란히 있습니다.

 

이러한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내나라와 내민족이 정신차리고 다시한번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국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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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처음부터 전인(The whole man)에 대한 신유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해 왔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선포하라 명령하신 복음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의 선언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헌법 제12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신유는 복음의 필수부분이다.  질병에서 놓임 받는 것은 속죄 안에서 제공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이다.(사 53:4-5, 마8:16-17, 약5:14-16). 이 선언에 포함된 모든 사실과 양상을 여기에서 모두 다루는 것이나, 이에 관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성명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것임을 보이고저 한다. 


복음의 필수부분 


  예수와 제자들의 사역을 관할해 볼 때 신유는 과외로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신유는 예수가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자로, 약속된 메시야로 그리고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오신 것을 증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요10:37, 28). 성경은 예수의 신유의 사역과 그의 구원하며 용서하시는 사역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실제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의 권 위에 대한 증거이다.(막2:5-12). 반복적으로 그의 치유의 기적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병행하며 똑같은 동정을 보여준다.(마4:23, 9:35-36)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온 것은 그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병고침을 받기 위함이었다.(눅5:15, 6:17-18)  그는 아무도 거저 보내지 아니하시고(마12:15, 14:14) 그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기형된 것과 불구된 것과 상처받은 것을 고쳐주셨다.(마15:30,31, 21:14) 그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으며 귀신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마4:24) 예수는 질병이 자주 죄의 결과 임을 인정하셨고(요5:14), 또는 사단의 활동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셨다.(눅 13:16) 그러나 또한 예수는 질병이 항상 죄의 직접적인 결과만은 아님을 인정하셨다.(요9:2,3) 이것은 때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 다.(막2:12)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하게 하신 사역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요9:2,3) 이것은 치료하시는 주 혹은 위대한 의사로서 하나님의 계시한 구약과도 일치한다.(출15:26, 시103:3, 여기서 이 두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 분사들은 그것이 치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가리킨다.) 예수는 신유가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과 계획의 중요한 부분임을 보이셨다.   


치유는 또한 예수를 약속된 메시야와 구세주로서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의사로서 예수는 이사야 53:4의 예언은 성취하셨는데 이 구절은 히브리어를 보면 매우 강조적이다. 즉 “그는 진실로 우리의 아픔을 자신이 짊어지셨고 (들어서 가져 가셨고), 우리의 고통을(무거운 짐으로서) 옮기셨다.” (여기서 ‘질고 ’라는 말은 아픔이나 질병과 같은 단어이며 ‘슬픔’이라는 말은 욥 33:19 에서 사용 된 육체적 고통과 같은 단어이다.)   


마태는 이를 예수의 치유사역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아픔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마8:17 을 문자적으로 직역한 것임). 이사야는 이것을 예수의 구속사역과 연계시키고 있다.(사53:5)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즉 “그가 채 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의 문맥과 벧전 2:24,25 의 적용은 특히 치유 혹은 죄로부터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 53:4 의 육체적 아픔에 대한 강조점을 볼 때 이 문장은 우리의 죄나 제멋대로 행한 것에 대한 영적 및 육체적 결과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인지 아닌지 혹은 자신처럼 메시야 앞에 보냄을 받은 자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행하는 메시야적인 사역에 주의를 환기 시킴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셨다. 치유는 복음의 필수 부분이며 중요한 증거였다.(사 61:1,2, 눅4:18, 7:19-23). 신유는 계속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필수 부분이었다. 예수는 12제자와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며 아픈 사람을 고치게 하셨다.(눅9:2, 10:9) 오순절 이후 많은 기사와 이적이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졌다.(행2:43) 누가는 사도행전을 예수께서 사도들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통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의 장으로 취급하였다.(행 1:1,8 2:4)   


그러나 기적은 사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약속은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다시말하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본질과 목적에 맞게 구하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것이었다.(요14:12-14) 하나님은 빌립과 같은 집사를 사용 하셔서 복음을 전하며 치유하게 하였고(행8:5-7), 아나니아와 같은 무명의 제자를 통하여 사울(바울)을 치유하게 하셨다.(행9:12-18) 마가는 신자들의 사역에서 치유를 지지하고 있다.(막6:13, 9:38,39, 16:15-18)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덕을 세우기 위한 성령의 나타남 중에 포함되며(고전12:7),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는 것과도 관련된다.(고전12:3)   


율법 아래서는 제사장이 관심의 대상인데 그 사역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이 위대한 대제사장은 무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히4:14,15)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속한다. 히브리어 성경 안에 나타난 속죄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구속과 회복을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흘리셨는데 속죄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문자적 으로 속죄소)로 세우셨다.(롬3:25)   


속죄소(Mercy seat)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6장에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제사 장이 일년에 한번 속죄제물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기 위하여 들어갔다. 속죄소는 법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금으로 입힌 부분이다. 법궤안에 십계명을 적은 돌판이 있는데 이 계명은 바로 사람들이 어긴 하나님의 법이었다. 율법을 어기면 심판을 초래하고 결국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죄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시고 자비와 축복을 주실 수 있다. 속죄의 원래 목적은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었다.(레 16:30, 롬5:11 여기서 “속죄”라는 말은 롬11:15 이나 고후15:18,19 에서 “화목 ”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과와 벌에서 속죄를 통하여 면제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대한 심판을 사람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보내셨다. 그때 모세는 아론을 회중 가운데로 보내여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더니 그 전염병이 그치게 되었다.(민16:47,48) 우리는 또 한 이스라엘의 수효를 계수할 때 그들의 구속과 그들에게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속전으로 반세겔을 내야 했음을 읽을 수 있다.(출30:12,15) 이 와같이 속죄를 아픈 것을 포함한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다.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구속을 위하여 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속죄를 제공하셨다.(롬3:25, 시65:3, 78:38, 79:9, 롬3:21-28) 이 속죄는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음이 호세아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는데 호세아는 그의 아내가 노예시장에 팔리게 되었을 때 상당한 값을 지불하고 그의 아내를 도로 샀다.(호3:1-5, 13:4, 14:4) 이것은 구리뱀 사건에 의하여 더욱 설명 되고 있다. 즉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살기 위하여 바라보는 것뿐이었다.(민 21:9)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요3:14-16) 거기서 예수께서 전인(Whole man)을 위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속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구속과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롬3:24, 엡1:7, 골 1:14, 히9:15)   


다시 말하거니와 속죄는 죄의 결과를 위하여 드려진다. 질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역시 죄 때문에 세상에 질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께서 오셔서 멸하고자 하시는 마귀의 일들 가운데 있으며(요일3:8), 이와 같이 속죄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오실때까지 우리 몸의 구속을 아직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롬8:2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받게 된다.(고전 15:42-44, 51-54) 그러므로 구속과 속죄 사이의 병행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롬 8:23에서 말씀하시는 구속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구속과 관련지어서 이제 죄의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할 때 우리 몸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15:51-43, 고후5:1-4, 요일3:2) 신유는 이러한 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복음의 모든 축복과 같이 속죄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또 사53:4 은 구체적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 안에서 죄뿐 아니라 속죄가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신유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신자들의 특권 


  구원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처럼(엡2:8), 모든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도 그의 은혜 혹은 공로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을 받을 만한 존재도 아니다. 신약에서 어느 누구도 치유해 줄 것을 당연한 자세로 청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구하기 위하여 예수께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로서 치유를 바라보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은혜스러운 특권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졌다. 신자의 특권으로서 치유의 약속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제외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히5:8, 벧전2:19,21, 4:1214, 19)   


또한 우리는 신유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법칙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대용물 (substitute)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 잠시동안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셨다.(막6:31) 이드로는 모세가 자기의 책임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으면 탈진하게 될 것을 보았다.(출18:18) 또한 신유는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모세는 그가 죽을 때까지 힘이 쇠하여지지 아니하고 눈도 밝았었다.(신34:7) 그러나 이러한 특권이 다윗왕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왕상1:1-4) 전도서 12:1-7 에 잘 묘사된대로 점진적인 노화현상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임하는 공통적인 경험이다. 치유는 여전히 노인에게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유된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과 같이 노화되어 간다. 우리는 아직 몸의 구속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인내로 기다리면서 신음하며 고통중에  탄식하고 있다.(롬8:2125) 우리가 이 몸을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몇 번씩 치유를 받든지 상관없이 만일 예수께서 더디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맛 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낙심 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촉진시키고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소생시키시므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롬8:11) 사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후4:16)   


실제로 신유의 특권을 보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이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혈루증을 치료받은 여인에게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막5:34)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복음을 듣는 것이 앉은뱅이의 마음에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불어 넣어준 것을 보고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였다.(행14:9,10) 마음의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은 (롬12:2, 골3:10)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로마 백부장의 큰 믿음에서도 볼 수 있으며(마8:5-13) 부스러기라도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볼 수 있다.(막7:24-30, 마15:28)   


신유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사렛과 변화산 기슭에서 불신앙이 그 역사를 방해했던 사실을 통해서 증명된다.(막6:5,6, 막17:14-20) 거기서 예수께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계신다.(막 9:29) 기도는 구약에서 중요한 치유의 수단 중 하나였다. 많은 시편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예언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약 5:15 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큰 믿음은 주님의 단순한 말씀을 통하여 치유를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적은 믿음이나 약한 믿음을 가진 자로부터 등을 돌리시지 않으셨다. 병든 자들이 믿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음을 종종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다. 어떤 사람은 만져 주셨고(막 1:41, 8:22),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막1:31, 눅14:4) 혹은 그의 손을 그들에 게 얹으셨다.(막6:5, 8:25, 눅4:40, 13:13)   


그는 여러 가지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데 그중의 어떤 것은 믿음을 요구하였으며, 어떤 것은 순종을 요구하였다.(막7:33, 8:23)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옷이나 그를 만지는 것이 믿음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막3:10, 5:28, 6:56, 눅6:19) 베드로의 그림자로 그 당시 같은 효과가 있었다. (행5:15) 또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마찬가지였다.(행19:12) 그러나 믿음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도록 돕는데 사용된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수많은 수단이 사용된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에 어떤 수단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약5:14도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여기서 아픈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치유하게 하는 것은 기름 (성령의 상징)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그 일을 저도 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요14:12-14, 16:23,24)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의 특성과 성격을 나타낸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이 우리가 그것을 우리 안에 가지게 된다.(요15:7) 그리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과 일치하며, 우리는 우리의 의도하는 바를 구할 수 있고 그것을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치료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정시키려고 한다.(특히 출15:26 의 약속인 치료 혹은 건강의 언약) 그러나 백부장의 종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 대한 치료는 치료가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특권임을 보여준다. 사실 치료를 갈망하며 예수께 반응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의 죄를 아직 다루시기도 전에 치유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의 경우, 요5:2-9, 14) 어떤 사람은 신유를 의학적인 치료와 충돌되거나 경쟁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의사는 자기 기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주님이 위대한 의사이심은 사실이다. 또한 아사왕이 병들었을 때에 저가 여호와 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아사왕을 정죄한 것도 사실이었다.(대하6:12) 그러나 아사는 이미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동으로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그는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부하였다.(대하:16:7) 강조점은 그가 의사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 의사는 이방인 의사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기를 거부한데 있는 것이다.  의사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렘8:22)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약용으로 사용한 것을 말씀하셨다.(눅10:34)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되었을 때 우리는 그녀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아오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여졌 다는”(막5:26) 것을 듣는다.  만일에 그 여자가 의사에게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여기에서 예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안하시고 그 여자가 표현한 그 믿음을 받으시고 그것에 대하여 그 여자를 칭찬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의사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는 또한 열명의 문둥이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보내셨다.(눅 17:4) 율법 하에서는 제사장이 진단, 격리, 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레 13:2 이하, 14:2이하, 마8:4) 이와같이 예수께서는 병을 진단하는 사람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주님의 대리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치료는 즉각적이든, 점진적이든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막8:24) 이와는 달리 성경에서 치료된 사람들이 치료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신유를 간증하지 않았다.   


오늘날 신유에 대한 남용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선포를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도들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3:6)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유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안에 두신 성령의 나타냄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12:4-11, 28,29)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은사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덕을 위하여 몸의 지체들을 통하여 수행되어질 수 있다.(지혜의 말씀이 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신유의 은사가 사람을 치료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신선한 지혜의 말씀이 각각 필요에 따라 주어지듯이 신선한 신유의 은사가 성령에 의하여 각각 아픈 사람에 대하여 주어진다.)   


우리는 또한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환경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치유의 기적이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을 보게된다.  이것을 특별한 기적이 바울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던 경우인 것과 같다.(행19:11) 우리는 신유에 관하여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왜 어떤 사람은 치유를 받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이어서 표적이 따르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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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명상센타의 성폭행 세션?



‘힐링’ 미명하에 수행자들에 가혹행위한 J명상센터
MBC 시사매거진 2580“성폭행 세션 문제 등 경찰 수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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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에 위치한 J 명상센터


MBC 시사고발 프로그램 시사매거진 2580이 한 명상센터에서 일어난 비정상적 ‘성폭행·학대’ 등의 문제를 2016년 7월 10일 다뤄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 경남 하동에 위치한 J명상센터


피해자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 센터에서 수행하는 과정이 ‘지옥’과도 같았다고 폭로했다. 이혼의 아픔을 가졌다는 수행자에게 센터에서는 “당신은 ‘창녀 파동’으로 인생이 힘들다”며 “파동을 배출하고 회복하기 위해선 ‘성폭행 세션’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세션을 진행하는 비닐 하우스에선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이 피해자의 방에는 남자 1명, 여자 2명이 들어왔다고 한다. 죽비로 주요 부위를 찌르는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게 피해자측의 주장이다.

  

▲ 피해자들은 성폭행 세션이란 이름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다른 수행자도 “센터측에서 부모님이 성폭행을 경험해서 너 또한 수치심이 있고 트라우마가 있다며 성폭행 세션을 진행했는데 학대 행위가 중단되지 않더라”며 “가해자 역할 하는 사람들도 수행자인데 그들은 이 세션을 수행법이라고 생각해 죄의식이 없었다”고 폭로했다.

  

▲ 두피를 절개할 때 사용했다는 예리한 도구


이외에도 이 명상센터에선 사람의 관념에서 나쁜 파동이 들어온다며 그 관념을 빼내는 수행의 방법으로 집단폭행·감금·신체 절개 등 상상할 수도 없는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한다. 죽비로 머리의 열을 빼야 한다며 정수리 때리기, 밧줄로 포승을 해 9시간을 묶는 감금 행위, 나쁜 관념을 빼내야 한다며 수행자들에게 칼을 나눠줘 두피를 절개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절개 후에는 부항으로 피를 빼내기도 했다고 한다.

  

▲ 두피 절개 후 피를 뽑는 모습


  

▲ 치유를 위해 명상센터를 찾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피해자측은 영혼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명상센터에서 수행이란 이름으로 지옥과도 같은 억압과 공포감을 경험했다. 반대로 수행원을 관리·감독하는 디렉터들은 우월한 지위를 갖고 “(치유를 위해)내 얘기를 믿고 따라오라”며 치유라는 미명하에 강요·폭력을 행사한다는 지적이었다. 피해자들은 가혹·학대 행위를 당하고도 자신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직접 찾아갔다는 자책감 때문에 문제점을 고발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일부 수행자 중에는 치유를 받으러 갔다가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병을 얻어 입원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한편 피해자측의 입장에 대해 J선가측은 성폭행 세션은 정확한 명칭이 성트라우마 세션으로서 성적인 문제로 발생한 트라우마를 없애고 대응책을 키우기 위한 역할 극이었다고 반론했다. 집단폭행이나 밧줄 묶기 같은 경우도 강제성은 없었고 수행자가 요청했을 경우에 행해지는 역할극이었다고 반박했다.

  

▲ 설립자를 비롯해 전 대표 등이 경찰 수사 대상이 되고 있다.


  

▲ J명상센터의 주요 관계자의 강연 모습


이 명상센터에 대해 경찰은 설립자는 물론 전 대표, 수행 마스터 등을 상대로 수사를 펼치고 있다. 혐의점은 약사법, 의료법 위반 외에 성폭행 문제 등이고 이 단체로 인한 피해자는 1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강경호 목사(한사랑가족상담연구소 대표)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MBC 시사매거진 2580의 J명상센터 고발 프로를 봤다”며 “문명이 발달할수록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명상·기수련·단수련 등 정신세계를 다루는 단체들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고 내다봤다. 강 목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단체들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명상센터나 기·단 수련원의 경우 종교성을 갖는 경우가 많고 현대인들의 상처나 치유를 불법적이고 왜곡적으로 해결하려는 경우까지 발생하는 선례가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단요가 스캔들에서 비판 보도된 이승헌 씨


한편 한국사회에 명상센터·기 수련 단체들이 끼친 충격적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2010년 1월 13일에는 SBS 시사고발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전남 광주의 ‘H수련원’에서 벌어진 집단 성관계·마약 등의 문제를 폭로했었다. 2010년 3월 6일에는 ‘단요가’, ‘단월드’, ‘단학선원’으로 알려진 이승헌 씨와 관련한 문제를 ‘단요가 스캔들’이란 제목으로 방영했었다. 힐링이란 미명하에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치유·영성·명상·수련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훈련을 주의 깊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http://www.jesus114.org/?ckattempt=1


제자도와 복종운동


최근에 성령의 부어주심은 예수가 신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로 많은 옛날의 장애물들이 무너졌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갈급함이 일어났다. 매일같이 기도와 성경공부란 목적으로 새로운 모임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모임들 중 어떤 모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가진 지도자가 없다. 많은 경우에 이 사람들이 속해 있는 전통적인 교회의 목사들은 너무나 바쁘든지, 아니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상담하거나 도와주는데 유익한 오순절 경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훈련시키고 지도력을 개발하기 위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공인된 목적을 갖고 유명한 성경교사들이 목양, 제자도 그리고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조장하고 있다. 옛적 충성으로부터 이탈된 많은 사람들과 자신들을 인도해 줄 사람이 없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 좋은 결과처럼 보이는 것으로 진공사태를 메꾸어주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어 왔다. 파괴적이고 분파적인 많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성경과 교회와 신자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과 연관해 이러한 운동의 주장을 조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성경


이러한 교사들 모두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심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행위에 대한 영감된 오류가 없는 법칙으로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면 성경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고 모두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상황에 적용되어야 하며 우리의 매일의 필요와 문제에 대하여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현재 말해진 말 즉 레마에 보증되지 않은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와 동등하다고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과 통역같은 성령의 은사가 신자들에게 구체적인 도움과 격려 그리고 안내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조사해 보거나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적인 의도에 의해서 그 말들을 판단하는 대신에 선택된 구절을 영해하거나 비유를 해석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합리화 할 때는 위험하게 된다.


그 한 예가 요한복음 10 장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요한복음 10:1-6 에서 예수께서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 다른 데로 넘어가는 도적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림을 바꾸시고 평이한 말로 말씀하셨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요 10:7,8) 또한 선한 목자와 같이 그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자 하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나는 문이다”라는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모든 사람이 문(door)인 목동(undershepherd)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목동이 절도와 강도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을 빼앗고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교사로부터 보호한다고 가르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목동이 그의 양을 평생동안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상당하고 안내하는 일에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새로운 개종자가 누군가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며, 진리로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이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지할 경우 그는 성경을 찾아보기를 그칠 것이며 거짓 교사에 저항하기 위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는 거짓교사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은 그 해결책이 신자를 보호해 줄 인간 목자를 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딤전 6:12)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방패와 성경의 검을 사용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굳게 서야 한다.(엡6:10-18)


요한복음 10 장을 더욱 세밀하게 조사해 보면 예수께서 문이 되신 것 같은 의미로 어느 사람이 문이라고 하는 개념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모든 양의 문이시다. 참된양은 그리스도 외에 어느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양들이 그를 알고, 그 분만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은 양들의 필요를 아신다. 그분은 그 양의 음성을 듣고 안다. 이와같이 요한복음 10 장을 취하여 개종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인간 목자를 끼어 넣는 근거로 사용하거나 인간 교사를 문으로 만들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교리를 억지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목자들)이 양무리를 쳐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늑대가 그 가운데로 들어가 양떼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 장로들이나 목동들 안에서도 사람들이 일어나 성경을 왜곡하고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즉 그들은 얼핏 좋은 선생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에 가서는 자기를 좇는 자들을 늘리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할 것이다. 이와같이 신자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 목자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는 성령의 인도아래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오직 성령만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교회

이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은 교회에 대한 이 운동의 자세에서 볼 수 있다. 그 지도자들은 그들이 새로운 교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현존하는 교회와 목자들을 존중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성 교회와 목사들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어떻게 애쓴다 할지라도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목자제도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교단을 세우고 있다. 

이것과 일치하여 이들 중 어떤 교사들은 그들의 역할과 교회의 역할은 더 이상 복음적이지 못하지만 이 지상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은 우리가 이 시대에 순수한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지만 추구할 때까지 곡식 중에 가라지도 있게 마련이다. 다니엘서 2 장, 데살로니가후서 1 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지상에 이루어지기 전에 현재의 세상질서를 파괴하는 심판이 필요하다. 현 시대에 교회의 복음적 목적을 무시하는 이러한 후천년설의 주장을 피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관계에서 새로운 제자도의 질서에 대한 모형을 찾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시기 전에 유대주의 배경 안에서 행한 것이었음을 잊고 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 안에서 교회의 모형에 대한 안내를 구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든 상황에 대한 필요를 채워 주는 다양한 모형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함께 교회안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을 선호하여 민주주의적인 자세가 내리막길을 가는 경향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다른 교회들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는 것처럼 추측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사도들은 단지 그 자격요건을 말해 주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일곱명을 선택하여 뽑아줄 것을 부탁하였다.(행 6:3,5) 행 14:23 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교회에서 장로들을 안수하였는데(한글 성경에는 “택하여”라고 번역된:역자주) 안수에 대한 헬라어의 뜻은 “손을 들어 선택하다 혹은 뽑다”라는 의미가 있다. 고후 8:19 에서 “택함”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주어이므로 행 14:23 에서의 “뽑다”라는 말과는 같은 뜻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동사가 바울과 바나바가 장로에 대한 자격을 설정한 후에(딤 3:1-7 에서와 같이) 선거를 행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다고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신약에서 한 가지 고정된 형태의 조직보다는 다양한 조직을 본다. 조직의 목적은 항상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역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 조직을 위한 조직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른 교회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내었을 때 그것은 관심을 보여주고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나바가 도움이 필요했을 때 조언을 듣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을 주의해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그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려와 함께 일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바나바의 권위 아래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둘 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위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바나바는 기쁜 마음으로 바울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바나바와 다투었으며(행 15:36-41)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사람들과 베드로와 다른 일로 인하여 다투었다.(갈 2:11-14) 그의 권위는 말씀이었으며 성령과 말씀에 의하여 인도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결례를 행하라는 야고보의 요청에 바울이 응한 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었다.(행 21:17-26)

성경은 사랑 안에서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문제이다. 성경은 또한 지도력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계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기업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벧전 5:3) 바울과 그 일행은 다른 개종자들의 믿음에 대하여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돕는 자였으며 이 개종자들은 그들 자신의 믿음으로 서는 것이 기대 되었다.(고후 1:23,24) 베드로는 (벧전 5:5) 젊은이들이 순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바로 이어서 모든 사람이 서로 복종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덧붙이고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 위에 함부로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각 사람이 사단에 대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

신자의 위치와 관련하여 이 목자운동(Shepherding movement)의 경향은 성경을 지나치게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으며 너무나 광범위하게 비유화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신자가 어리석은 양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문맥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는 극단적인 비유를 취한다. 성경에 신자는 양으로 비유되는데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리스도는 그를 인도하며 먹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그는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각자와 함께 계시면서 주님께서 하시던 일들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시다. 또한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이 신자를 세우는 일에 사용된다.(롬 12:4-8, 고전 12 장, 엡 4:11-13)

이 목자운동의 강조점은 신자 자신이 목자를 발견하여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엡 4:16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지지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우리가 마디 혹은 줄을 통하여 몸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또한 비유의 인간적인 측면을 너무강조한 것이다. 이 문맥은 모든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의 일치에 이를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도 여러 가지 교회의 풍조에 밀려 이리 저리 방황하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써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몸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이 올바른 위치에 있게되면 각 부분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아서 몸은 자라게 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된다. 

요한복음 15 장에서 예수는 포도나무이다. 모든 가지는(모든 신자) 직접 그와 연결되어 있으며 직접 그의 생명을 받는 것이지 다른 가지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체 몸에 대한 다양한 사역의 한 부분으로서 교회 안에 목사와 교사를 두셨다(엡 4:11) 이러한 사역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 교회의 머리되신 분의 지혜로운 공급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크리스챤이 인간 목자를 떠나서는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든지 혹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고 한다면 신자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히 4:14-16)

이와 관련하여 목사는 사람들의 모든 계획과 결정사항을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목자는 그 사람을 덮어줄(cover)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용어는 사람들을 오도한다. 성경은 “덮는다”(cover)는 말을 피의 대속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것이며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관계를 비교함으로써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역자에 대한 나이먹은 사역자의 관계였을 뿐이지 목자와 신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한 모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비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복종의 비유이지 한 사람에 대한 신자의 비유가 아니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결론

아마도 현재의 목자-제자 복종운동은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서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자유분방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권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인 말씀의 권위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자들을 우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그들을 귀히 여기라는 바울의 충고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살전 5:12)

비인격적인 우리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작은 모임의 밀접한 교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은 개교회 안에서 목자의 지도를 받아 지도자 훈련을 통하여 제공될 수 있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 나타난 것 같이 인간 지도자를 따름으로 해서 생기는 분파작용은 피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필요가 한 사람이나 한 교회가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개 교회 안에서 사역과 은사의 다원화를 요구하고 있다. (고전 12 장) 또한 성경은 아볼로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람을 데려올 수 있음을 말해준다.(행 18:27,28) 또 다른 사람을 훈련받기 위해 성경 학교에 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분파를 조장하는 죄는 가장 심각한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롬 16:17,18, 딛 3:9-11) 오늘날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려고 한다면 보다 큰 몸으로서의 연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일치된 노력은 많은 지역 교회 간의 협력의 효과에 대한 증언이다. 각각 개별적으로 일하는 소수 집단들이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수행되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셔야 한다. 그분만이 양의 위대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언약은 그의 피로 맺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히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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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심판


영원한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입장을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 선언”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제 15 항, 마지막 심판 : 악한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그들의 행한 대로 심판받는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마귀와 그 사자들 그리고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영원한 심판으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인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마 25:46, 막 9:43-48, 계 19:20, 20:11-15, 21:8)


여기서 우리는 심판이 마귀와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며, 둘째 사망이라 불리는 불못에 있는 것임을 주목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정의하고 설명을 하고자 한다. 


악한 자는 사단과 운명을 같이 나눈다.


성경은 불못이 사람을 위해 예배된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 되었다고 말씀한다.(마 25:41)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선하셨다. 첫번째 하늘과 땅은 좋게 창조되었다.(창 1:31). 율법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주어졌다.(신 6:24)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벧후3:9) 사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선을 위하여 모든 일에서 역사하신다.(롬 8:28)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단이 앞으로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을 더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불못에 그를 가두어 놓으실 것이다. 사단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의 운명을 같이 나눌 것이다.(요 16:8,11)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사단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요 8:44)


사단이 받는 벌을 함께 받는 사람들은 “악인”이라고 한다.(마13:49,50) 이것은 그 행동이 악하고 가치 없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자이며(믿음이 부족하여 비겁하게 행한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며, 흉악한 자들이며(혐오스럽고 진저리나는 사람), 살인자들이며, 행음자들이며, 술객들이며(마술을 사용하는 사람과 마약을 쓰는 사람), 우상 숭배자들이며,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이다.(계 21:8, 마 8:12, 13:41,42, 22:13, 23:15, 25:30,33, 눅 13:27, 계 21:27, 22:15 참조)


바울은 이것을 구원에 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와 복음을 계속적으로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자라고 요약하고 있다.(살후 1:8)


악한 자의 심판은 끝이 없다.


“근본진리의 선언”에서 주어진 첫 번째 성경 인용문인 마25:46 에서 “영(헬라어, anonion)벌”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절대적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영원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서 예수께서 똑같은 말을 “영생(헬라어, aionion)” 이라는 말에서 사용하는데 여기서 이것은 직접적이면서도 정확하게 전자와 병행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생명이 영원한 것처럼 그 벌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악인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어떤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마 25:41 에서 그 벌은 “영원한(헬라어, anionion)불”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악인이 죽은 후에 가는 중간상태를 하나의 불로서 특정짓고 있다. (Hades, hell, 눅 16:23,24)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있을 불과 구분해야 한다. 눅16 장에서 예수의 말씀은 악인이 의식이 있는 상태이며,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영원한 불은 예수께서 게헨나 혹은 “불의 게헨나”라고 부르셨던 것과 같은 것이다.(마 5:22,29,30, 10:28, 18:8,9, 23:15, 막 9:43,45,47, 눅 12:5) 이 불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꺼지지 않는 특성을 가졌다. 이것은 그 불이나 벌이 끝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가르친다. 그 형벌은 불과 마찬가지로 영원하다. 만일에 불이 악인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라면 불이 영원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같은 불을 “풀무불”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13:42,50),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가는 비참한 후회는 “멸망의 자식”으로서 영원한 파멸에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였다.(요 17:12, 행 1:16-20) 예수께서는 이렇게 울며 이를 가는 것을 “바깥 어두운데서” 일어나는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마8:12, 22:13, 25:30) 이 어두움은 최종적인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새 예루살렘의 빛이신 어린 양과의 분리를 가리키는 것이다.(계 21:23)


또 다른 신약성경 구절은 영원한 벌은 영원한 심판으로 언급한다. 즉 영원토록 유효한 심판이라는 뜻이다.(히 6:2) 여전히 다른 구절은 “침륜”(문자적으로 파괴, 사망, 분리를 의미함) 그리고 “멸망”(영원한 사망) 이라고 말한다.(딤전 6:9) 이러한 “영원한 멸망”(혹은 분리)은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의 분리이다.(살후 1:9) 이러한 구절들에서 “사망”이라는 단어는 영적 사망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죄인은 현재도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이며, 그리스도와 분리되었거나 그리스도가 없는 자이다. (엡 2:1,12) 영원한 심판은 최종적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둘째사망


성경은 이렇게 최종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둘째사망”이라고 부른다. 요한계시록에서 불못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계 20:14) 예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게헨나)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눅 12:4,5)고 경고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게헨나를 둘째 사망과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육체적인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죽음은 상태나 종류에 있어서 판이하게 다르다. 육체적임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이 몸에서와 우리의 생활환경에서의 분리라고 한다면, 둘째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와 새 창조에서 맛보게 될 생명으로부터 최종적이고 영원한 분리이다.

이 둘째 사망에 던져지는 사람 중에는 짐승의 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있다. (계 14:9-11) 이 사람들은 천사들과 그리스도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즉 봇물에 갇혀서 새로운 창조물과 격리되어 있지만 나사로가 음부(Hades)와 아브라함 몸 사이에 있는 깊은 구렁을 건너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들이 거부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눅 16:23) 그들은 결코 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그 고난의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로다.”(계 14:11)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원히 성도들에게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 중 어느 것도 최종적인 심판이 선언된 뒤에 복구시키거나 회복시키는 것을 약속하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볼못이나 게헨나와 관련하여 신성한 기관은 나타나 있지 않다. 불은 막 9:44,48 의 구더기와 병행하고 있다. 그것은 깨끗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형벌로서의 붙인 것이다. 거기에는 또 다른 기회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를 흔들어 깨워“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며 외치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고후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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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의 첫번째 조항은 성경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축자적으로 영감되었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무오하고 권위 있는 행위와 믿음의 규범이다.”(딤후3:15-17, 벧1:21, 살전2:13) 이러한 원리를 고수하는 교회나 개인은 안전한 기초 위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이탈될 때에는 언제든지 그 결과는 실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믿음과 행위의 권위있는 규범으로 여겨야 하지만 특히 부흥운동이 확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흥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자주 교회에게 무시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상기 시켰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극단적인 곳으로 나가기가 쉽다.  어떤 사람은 부흥의 교리를 거부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지나친 열심으로 성경의 가르침의 범위를 넘어가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극단은 해로우며 그리스도의 대의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부흥의 결과로서 그 동안 강조 되어온 진리 중 “지체사역 ”(Body ministry)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러한 진리를 잘못 적용하거나,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극단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지체사역의 타당성 


  지체사역에 관한 진리는 원래 성경적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교회는 사람의 몸과 비교된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과 그리고 동료 신자들과 가지는 살아있으며 친밀한 관계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5:30) 성경은 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엡4:15, 5:23,32, 골1:18) 몸은 하나이며 그것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전12:26, 엡2:16, 4:4) 그러나 몸이 하나인 반면 그 몸은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다.(고전12:14) 그리고 이 지체들은 서로를 돌본다(고전12:25,26) 지체들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역하며(엡4:15,16) 그것을 보전하며 섬기는 것을 추구한다.   


비록 몸의 지체들이 다르며 직분, 사역, 기능에 있어서 다르다 할지라도(롬 (12:4) 여전히 몸의 일부이다.  지체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고전12:18) 우리가 지체사역에 대하여 말 할 때는 이에 대한 교회의 전 사역을 생각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돕기 위해서 교회에 주신 사람들의 사역을 포함하는데 이들의 사역의 실제이다.  즉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엡4:7-16참 조) 그것은 또한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는데 각각의 신자는 성령의 은사나 혹은 영적 사역의 다른 모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지체 관계에 대한 언급이 빈약하지만 지체사역이 다음과 같은 상호 인격적 기능을 포함 하는 것은 명확하다.  즉 위로와 격려하는 것(고후1:4, 살전4:18, 5:11), 권고하는 것(히3:13, 10:25), 기도하는 것(엡6:18), 사랑하는 것(요일93:23), 대접하는 것9벧전 4:9),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는 것(벧전4:10), 충고하는 것(롬 15:14, 골3:16)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지만 개념의 양극화, 강조, 실시 등이 때때로 나타나는 것 같다.  한 극단은 몸의 지체들에 의한 표현과 참여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다른 극단은 성령의 참된 움직임보다는 인간의 개성과 지도에 의존하는 인위적인 참여를 개발하는 경향이 있다. 


지체사역을 제한하는 것의 위험성 

  

교회가 마땅히 조심해야 할 위험성들 가운데 하나는 신자들의 사역을 제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몇몇 영역에서 그리스도 몸의 모든 지체들로 하여금 섬기고 표현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성령의 나타남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공중 예배 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이것은 지체들이 유용한 기능을 완전히 거부당하는데까지 이르는 극단으로 나갈 수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만 너무나 많은 정력을 낭비한다.  목사들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고 대부분의 지체들은 소극적이다.  장려하는 강조점은 지체들의 영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활동들이 세속적인 마음을 향하여 돌려졌다.  때대로 그냥 계속되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경향도 있다.  원대한 프로그램에 고정되는 것은 개인의 창조성을 대신하고, 정통은 현실을 대신하게 된다.

 

지체사역을 남용하는 것의 위험성 


  지금은 성령의 바람이 자유롭게 부는 시대이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흥 이전의 조건을 돌아보면서 영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에 대하여 조직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교회 조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조직된 교회나 교파적인 교회를 피하고 그러한 조직을 한쪽에 젖혀두는 경향이 있다.  가라지를 태우려는 열심 때문에 알곡까지 날리게 된다.  전통은 신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주류에서 벗어난 소위 지체사역의 접촉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들은 이 나라의 이쪽에서 저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변칙적인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서는 조직적인 예배를 위하여 면밀하게 준비하는 것 대신에 소위 지체사역이 기다리는 형태의 모임(waiting-type meeting)을 연습하는 것으로부터 개발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예배시에 언어적인 은사가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아직도 어떤 사람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비록 지도자가 그룹 중에서 개인들에게 요청해야 하지만, 성령의 모든 은사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사람들은 지도자에 의하여 개인들에 관한 소위 예언을 하도록 지시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지체사역의 다른 형태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과 잘못을 고백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상호 간의 관계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 성경적인 민감도 훈련 기술(sensitivity-training techniques)에 근사한 때가 여러번 있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유감스럽게 벗어난 것들 중 하나는 목사의 지도력과 조직 그리고 보다 조직화된 예배를 거부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목회의 은사(엡 4:11)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강조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성경적인 경험을 유지하도록 도우려는 다른 신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지체사역에 있어서 균형의 필요 

  

잘못된 것을 다루는 일 중에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떠났거나, 명확히 부정하는 경우가 아니라 진리의 어느 관점을 부적당하게 혹은 지나치게 강 조함으로써 생기는 경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우려고 시도하는 지도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자칫 오해받기가 쉽다.   문제가 존재하는 곳에서 신자들은 이러한 자세를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지체들에게 예상되는 것이다.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안에서 관용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의 가치 있는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엡4:1-3).   


하나님은 그의 목적에 따라서 교회 안에 목사의 은사를 두셨다.(엡4:11-16). 만일 양이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루 전반적으로 공급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양떼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목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행동하는 제멋대로 구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목사-교사 직분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만일에 소그룹 개념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까지 목회사역이 연장될 수 있다면 목사의 역할은 무엇이며,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신약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지도자라고 명확히 가르친다.  그들은 독재자가 아니라 종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되거나 제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주 안에서 그들 위에 있는 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살전 5:12,13, 딤전5:17-19, 히13:7,17)   


우리는 교리적인 탈선을 피하기 위하여 또한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가 때때로 남용되어진다.  성경은 항상 모든 관계에서 믿음과 행위에 대한 권위여야 한다.  우리는 몸의 각 지체가 교회성장에 있어서 채워야 할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성경이 가르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남용이 존재할 때 목사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교회 봉사를 조사해야 하며, 이러한 불법 행위를 조장하는 잘못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적절한 가르침을 제공해야 하며 그들의 봉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성경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 제기된 그리스도 몸 안에서의 목회의 정당성 여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체들이 교회 안에 두어진,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지도력의 한계를 넘어서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 조장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연합이 항상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때까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엡4:3,13) 위하여 모든 부분에 대하여 성실한 노력이 있 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며 기능을 발휘할 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사역을 이루어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운동(movement)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의 성경적 기능에 우리 자신들을 새롭게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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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추석떡 미리 보냅니다

워낙 떡이 많아 미리 보내지 않으면

다 못 먹을것 같아 일찍 보냅니다.

두고 두고 저장했다가 1년 내 내 드십시요.

떡 맛있게 잡수시며 오늘 하루 화이~팅.


































































































































































출처:  http://m.cafe.daum.net/s977/HAxo/25937?svc=cafeapp



 

다음 글은 과거 월광교회 안수집사님이셨고

 

 현재 온누리교회 안수집사요
고려대 교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나누어 읽고 기도했으면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수도권에 있는 대학 교수이자, 대형교회 중직자입니다.
저는 지난 십 수 년 동안 대학에서 교육, 연구하고, 교회를 다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은 시간을 내서 봉사활동을 하는,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평안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이런 생활이 강제적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더 이상의 평화로운 예배 생활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찬양 드릴 곳도, 예배드릴 곳도 없어지는 것,
즉 교회가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정부 들어서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조차 선생이 맞거나 성추행을 당할 정도로 권위가 무너졌을까?
왜 정부는 무슬림 난민에 집착하고 있을까?
왜 북한 인권에는 침묵하고 동성애자들의 인권은 중시하는가?
왜 동성애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일으키는 AIDS 같은 문제는 보도조차 못하게 막고 있는가?
왜 동성애자 행사가 서울,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벌어지고 숫자를 늘려가고 있을까?
그리고 왜 장관, 장관급으로 임명되는 인사들이 모두 친동성애자들 일까?
왜 차별금지법을 그렇게 악착같이 통과시킬려고 하는가?
왜 정부는 애국가와 국민의례를 싫어하고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할까?

 

왜 대통령은 2018년 개헌에서 국민을 사람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바꾸려 했을까?

 

 별 차이 없을 것 같은 단어를 왜 헌법이라는 최고의 법에서 바꾸려고 했을까?
왜 2018년 초,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자유라는 말이 모두 사라졌을까?
왜 학생들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교과서로만 배우고 있을까?
왜 이모부를 고사포로 난사하고,

 

이복 형을 독살한 김정은의 인기가 70%일까?
이런 일들이 너무 이상했었는데

 

여러 정보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진행 되어 온 놀라운 사실까지도요.
그 근본은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1) 공산주의를 최초로 제안한 칼마르크스(1818-1883)는 예언을 했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노동자는 국가를 무너뜨리고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국가(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하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자신의 국가를 위해서 총을 들고 나가 싸웠습니다.
2) 공산주의자(이하 좌익)들이 마르크스 예언 실패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결국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를 ‘서구문명’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서구문명은 ‘기독교(주로 개신교)’와 ‘자유민주주의의 시장경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려면 개신교와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좌익들은 ‘개신교’를 놔두면 절대로 공산주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3) 동시에  시스템만 바꾸어서는 공산주의국가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천재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 라는

 

 좌익이 개발한 ‘기동전과 진지전’의 전략을 택합니다. 

 

 즉 사람을 바꾸어야만 공산주의 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언론, 종교 등

 

사회전반에서의 헤게모니를 이용해

 

서구문명을 무너뜨리는 전략을 선택 합니다.

4) 1968년도에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일어납니다.
 68혁명은 좌익들이 일으킨 개혁운동으로 기치는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입니다.

 


 


 

 즉 “모든 금지하는 것을 없애고, 새로운 기준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있던 모든 기준, 모든 도덕, 모든 가치를 뒤집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지금까지 개신교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포스트 모더니즘 (Postmodernism=PM)이라고 부르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사상은 세계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몇 번 들었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5) 공산주의의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가 ‘

 


 

개인의 소유욕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실패했다는 것을 좌익들이 깨달았습니다.
 좌익들은 인간의 본성인 ‘소유욕’ 대신에 ‘성(sex)욕’을 택합니다.
 즉 (공산주의+성욕)으로 서구 문명을 무너뜨리려는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6) 버클리 대학의 쥬디스 버틀러는 (공산주의+성욕)에 좋은 이론을 제공하였습니다.
 Queer theory(1990)라는 이 이론은 ‘나의 성(sex)은

 

 내가 정한다’는 이론인데 sex 대신에 젠더(gender)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즉 ‘나는 남자다’라고 주장하면 아무리 여자라도 남자로 인정해야 하고,
 ‘나는 여자다’라고 주장하면 실제로는 남자도 여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생물학적인 성(sex)은 사회적인 억압자에 의해서 강제로 결정되기 때문에

 

틀린 것이다’는 말도 안되는 이론인데,

 

 LGBT(동성애자들) 에게는 복음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성정체성을 자신이 정한다니,

 

동성애자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7) 이제 우리나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좌익들이 3)안토니아

 

 그람시의 전략을 수 십년 동안 몰래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언론, 종교 등에 스며들었습니다.
 정권을 잡은 지금은 대놓고

 

우리나라 전체를 정책과 법률을 이용하여 바꾸고 있습니다.

8) 유럽 교회를 초토화시키고,

 

미국 교회를 무너뜨린 차별금지법이 우리나라에서

 

2007년, 2010년, 2012년에 법안으로 제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깨어있는 개신교도들의 적극적인 방어로 무산되었습니다.

 

특히 전 법무부 장관이신 김승규 장로님이 목숨을 걸고 이 법을 막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누군가가 교회를 위해 희생하신 것입니다.  
9) 현 정부와 여당은

 

 ‘혐오표현 규제법안’ 을 2018.2.13.에 입법예고하였습니다.
김부겸 의원 등 20인이 제안한 법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 발언을 금지한다’입니다.  
이 법이 통과되었으면 교회에서

 

 “동성애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 라고 발언하면

 

범법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규제되는 것입니다.
이 법안도 해당지역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노력으로

 

아직 통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2018년) 초에 개헌을 시도 했습니다.
   국민을 사람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국민을 사람으로:

 

 난민과 이민자들에게도 국민세금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무슬림을 들여와 개신교를 죽이는 동시에

 

여당을 지지하는 세력을

 

오랫동안 통치하겠다는 뜻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자유 민주주의 대신 사회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자유 시장경제를 안 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동성애를 보호하겠다는 뜻입니다.

 

양성평등은 남자, 여자의 평등을 뜻하지만,

 

성평등은 6)번 쥬디스 버틀러가 주장한

 

수 십 가지의 성을 모두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성에는 레스비언, 게이, 양성, 트랜스 젠더를

 

포함하여 젠더 플루이드

 

 (gender fluid: 아침에는 여자,

 

 저녁에는 남자)라는 이상한 것들도 포함합니다. 
   하지만 이 개헌도 무산되었습니다.
   절대로 그냥 무산된 것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11) 이도 저도 안 되니까, 현 정부가 시행한

 

 방법이 국가인권기본계획(NAP)입니다.
   즉 법을 못 바꾸니까,

 

일단 청와대(행정부)가 할 수 있는

 

 ‘정책’으로 밀고 가는 것입니다.
   2017년도에 이미 결정된 NAP 정책을 폐기하고,

 

동성애 찬성 단체들만 모아서

 

 몰래 18번 회의한 후

 

입법 예고 기간 어기면서 발표한 정책입니다.
   교수들과 학부모 대표가 삭발을 하고,

 

몇몇 목사님들이 혈서를 썼고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지만,

 

청와대는 싹 무시하고 NAP를 통과시켰습니다.
   NAP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인권의 주체는 사람:

 

무슬림과 난민을 이용, 개신교를 파괴하고

 

여당지지를 높이는 목적
b) 차별금지에 관한 기본법:

 

 차별 금지법 입법 준비
c) 성인지 정책, 성 주류화: 동성애를

 

일반적인 ‘상식’으로 만들기 위한 국민 세뇌 목적
d) 인권차별 혐오적 방송내용 심의 강화

 

‘동성애 반대’를 막겠다는 목적
e) 대체 복무제: 이단 확산으로 개신교 약화 목적
f) 군인원 자문위원회: 동성애 보호,

 

 군형법(항문 성교금지) 폐지를 위한 초석
g) 성평등 문화 확산: 동성애 문화의 확산이 목적.
h) 문화 다양성 존중: 이주민, 난민, 무슬림 영입
i) 인권친화적 교과서: 학생들을

 

어릴 때부터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 사상 세뇌
j) 아동 청소년 대상 성 인권 교육: 청소년들의 성해방.
12) 이런 좌익들의 정책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공산주의 실현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좌익들은 자신들이 공산주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하지만

 

배후에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약 70여 년 전 사탄 숭배자

 

(엘리스 베일리(1880-1949))가

 

사탄에게 직접 지령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받은 지령으로 10대 전략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목적은 기독교 가치제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여

 

이 땅에서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사탄에게 앨리스 베일리가 작성한 10대 전략입니다.
뒤에는 연관된 우리나라 법과 진행 중인 문제들을 적었습니다.
       사탄의 개신교 파괴 10대 전략
a) 교육 시스템에서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학생인권조례, 차별금지법
b) 아동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축소하라: 학생인권조례
c) 기독교적 가정 구조를 파괴하라: 동성애, 차별금지법
d) 프리섹스 사회를 만들라, 낙태합법화 하라:

 

간통법 폐지, 낙태법
e) 평생 결혼의 개념을 파괴하라: 동성애
f) 동성애를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동성애
g) 예술의 품격을 떨어뜨려라:

 

저질 또는 좌익지지 영화, 연극, 노래
h) 미디어를 활용, 반기독교적 가치를

 

선전하라: 영화, 연극, 노래, 아이돌, 공익광고
I) 종교 통합 운동을 일으키라: WCC
j) 각국 정부가 이 내용을 법제화하게 하라: 차별금지법
13) 지금 개신교가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2018.8.29. 수요일에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센터에서

 

1차 차별금지법 토론이 있었습니다.
   토론이라면 차별금지법 찬성 측과 반대 측을 다 불러야 하는데,

 

철저하게 찬성하는 측만 불러서 급하게 토론을 했습니다

 

. 그리고 인권위원회 측에서

 

 참석한 조** 과장은 계속 법률적인 조언을 해 주었고,

 

꼭 읽으세요 정말 중요한 내용입니다

 

동시에 차별금지법을 매우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는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는 모양새입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미국을 보면 예측할 수 있습니다.
a) 교회에서 ‘동성애는 죄다’라고 이야기하면

 

 ‘성 평등’에 어긋나는 범법행위가 됨.
b) 길거리에서 전도하면

 

 ‘종교 평등’에 어긋나는 범법 행위가 됨.
c) 동성애자가 ‘결혼 케이크 만들어주세요.’ 라고 했을 때

 

‘동성애자에게는 못 만들어준다’라고 하면

 

 ‘차별 행위’, 즉 범법 행위임.
d) 아이들에게 ‘교회 가자’라고 말하면

 

 ‘종교 평등’에 어긋나는 범법행위가 됨.
e) 성경도 차별금지법을 위반한 ‘불법 출판물’이 될 수 있음.
14) 목사님, 현재 정말로 교회가 위험한 상황입니다.
   이런 급박한 때에 제발 침묵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영국은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때,

 

 ‘한 줌도 안 되는 동성애자들이 무엇을 하겠어.’

 

하고 방치하였습니다.

 

그 결과 차별금지법은 아무 저항 없이 통과되었고,

 

영국 교회는 초토화 되었습니다

 

안드레아 윌리암스 영국 변호사 간증

 

‘기독교인의 지옥으로 변해가는 영국’ 참조)
   물론 주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15) 주님은 10여 년 전에 이미 이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좌파 수장(종교 자유 정책 연구원 대표,

 

 종자연)으로 개신교를 몰아붙이던

 

이정훈 울산대 교수를 성령으로 회심시키셨습니다.
   ‘현대판 사도 바울’이라고 불리는 그는 성(性)을 이용한

 

대규모 좌익의 공격(Gender mainstream, GM)이

 

있을 것이라 오래 전에 예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정훈 교수는 말합니다.
   ‘나는 언제든지 죽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죽으면 주님 곁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한 명의 법대 교수가

 

개신교 수호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또한 부산대 물리과 교수인 길원평 교수도 목숨을 걸고

 

40일 째 법무부 앞에서 텐트생활로 동성혼 합법화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약국에 있어야 할 김지연 약사도 목숨을 걸고

 

 반동성애를 외치고 있습니다.
16) 현재 정부와 여당 국회의원은

 

 대부분의 대형 교회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무슨 짓을 하든지 반응도 없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완전히 무시하고 교

 

회 탄압법(사회복지법, 차별금지법)들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 할까요?

 

저들을 몰아달라고요?
 물론 기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실지’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기도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사탄의 세력이 밀려오는데

 

주님이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미디안이 기드온을 공격해 올 때도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300명의 군사로

 

수많은 적을 대적해 나가 싸웠습니다.
 먼저 기도를 했지만, 나중에는 행동 하였습니다.
 암몬과 모압 자손이 여호사밧 왕을 치러 왔을 때,

 

 왕은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기도 후에 다음날 찬양대를 앞세운 후,

 

 군대를 끌고 나갔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였기에 싸우려고 군대를 끌고

 

 나가는 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기도로 끝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군대를 끌고 나간 것입니다.
 그 믿음을 아시고 주님은

 

 미리 전쟁을 끝내 놓으셨습니다.
17]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대한민국 교회는

 

 풍전등화의 상황입니다.
   암몬과 모압 자손이 예루살렘을 둘러싼 형상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만 드리고 성 안에만 있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제발 일어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사탄의 세력에게 우롱당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만 우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의 우매함으로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렵니까?
18] 국가인권기본정책(NAP) 반대 집회에

 

성도들의 참석을 독려해 주십시오.
   난민 반대 집회에 성도들을 참석을 독려해 주십시오.
   성도들에게 NAP의 문제점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십시오.
   차별금지법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씀해 주시고,

 

 반대해 주십시오.
   동성애에 대하여 제발 침묵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교회들이 연합하여 같은 의견을 내 주십시오.
19] 우리들은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에 대하여

 

회개를 했습니다.
   옳지 않은 일을 했다고,

 

 그래서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현재의 우리가 그때로 돌아가면

 


 

 신사참배를 거부할까요?
   우리가 과연 신사참배를 항거하다가

 

 돌아가신 주기철 목사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그때 교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냥 잠시만 고개 숙이는 거야. 마음으로는 숙이는 게 아니야.

 

우리는 주님만을 섬기고 있어.

 

 몇 초만 눈 딱 감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 주님도 이 정도는

 

이해 하실 거야. 탄압 받으면 교회를 유지할 수도 없잖아.
   ‘신사 참배를 막아 주세요.’ 라고

 

열심히 기도하면 주님이 막아 주실거야.‘

 

   정부는 현재 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문대통령은 극렬 동성애 옹호자를

 

 국가인권위원장으로 임명하였고,

 

‘민정수석이 뜨끔할 쓴 소리도 해달라’며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취임사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2018.9.5.)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또한 극렬 동성애 옹호자인 여성 의원을

 

추천한 상황입니다.
   교육부 장관으로 추천된 여성 의원도 동성애 옹호자입니다.
   이와 같이 정부는 지금 ‘차별 금지법’의 제정을 위해

 

전방위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보고만 있다면, 조용히 신사참배를 하던

 

 교회와 우리가 무엇이 다를까요?               
   만일 우리가 정부의 탄압이 두려워,

 

 아버지께 우리의 뜻을 올리는 기도만 드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버림받은 자일지도 모릅니다.
20] 지금이 마지막 때라서 쓸데없는 저항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지 아니하실지라도

 

 대통령이여 우리가 대통령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대통령이 세우시는 법(금신상)에도 반대하여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감사합니다.

 


참고 자료] 

 

 유튜브 무신론자 홍지수 작가

 

(서울대 트루스 포럼 27회)
         유튜브 이정훈 교수 간증
         유튜브 히즈 코리아 TV 이호 목사
         유튜브 안드레아 윌리암스 “기독교인의

 

 지옥으로 변해가는 영국에서...”
         젠더주의 도전과 기독교 신앙, 김영한, 두란노


<말씀; 출애굽기 34장 13-14절)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찌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모세가 깎아 만든 돌판 두 개를 들고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구름을 타고 강림하셔서 은혜를 베푸실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또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서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돌 같은 우리 마음을 쪼개고 깎은 마음판을 끌어안고 올라갑시다. 
시내산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갑시다. 
거기에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거기에서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하신 이적을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깎은 돌판 두 개를 안고 올라간 모세에게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옛날(창세기 15장)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송아지와 염소를 쪼개라(브릿트) 하셨고 하나님은 그 사이를 지나시며 쪼개셨습니다. 언약, 곧 ‘브릿트’를 ‘브릿트’ 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언약‘과 ‘쪼개다’라는 말은 발음이 비슷합니다.) 
언약은 원래 혼자서는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약속은 쌍방이 함께 해야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약속하시고 이루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시면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쪼개는 브릿트를 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언약의 브릿트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복을 주시면서 선악과 열매는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쌍방계약의 형식을 갖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고, 신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나 연약하고 악한 존재인지요? 
그 간단한 선악과 먹지 말라는 약속도 못 지킨 죄인의 습성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남아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 하고 있습니다. 

돌판 두 개를 들고 올라간 모세 앞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나타내지 않으셨던 놀라운 일들을 모세와 백성들에게 행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모세와 백성들이 지켜야 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가장 처음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테니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헐고 깨뜨리고 쪼개며 거기에 절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질투”, 히브리어로는 ‘카나’입니다. 그리 어감이 좋은 단어가 아닙니다. 
남을 시기하거나 남녀간 사랑싸움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질투’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시며 자신의 이름을 “질투의 하나님, 엘 카나”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라니요. 이 말씀을 듣는 모세가 얼마나 황공하고 민망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미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성경을 읽어나가노라면 하나님의 질투를 나타내는 수많은 말씀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투는 시기나 욕심, 혹은 심술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전부를 걸고 사랑하시는 존재들인 우리를 향하신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선언인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질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금방 우상숭배로 돌아가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희미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도 진노도 불같이 뜨거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흐리멍덩한 할아버지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절대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지으셨고 불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측정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요만큼만 사랑하자, 요기까지만 사랑하자, 하고 금을 긋고 한계를 정해놓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스톱도 될 수 없고, 제한될 수도 없고, 조절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님, 자매님,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그 사랑을 받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기에 하나님의 질투 또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량없이 사랑하는 우리가 다른 신이나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체면불구하고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음을 다 하여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그 새파란 질투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깎고 쪼개어 양손에 들고 갈보리 언덕을 오릅시다. 
질투처럼 끓어오르는 우상숭배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피와 물로 다 쏟아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그곳에 말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크고 두려운 이적을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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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8:11절 말씀)

주께서 아모스를 통하여 말씀해 주신 그날이 바로 오늘일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웹
상에 글을 기고하는 대부분의 필진이 모두 목사님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 이야기나 도깨비 이야기, 혹은 기복사상,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인양 크게 확대시켜 궤변을 늘어 놓을지라도 이 말세지 말을 살아가는 성도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성도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입니다. 주님의 종들이라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가르쳐야 마땅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편견을 버리고 말씀에 굳게 서서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항상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오래 전, 어느 블로그에 들어 가보니 (, 주님)이라는 필명으로 다음과 같은 댓글이 올라와 있어서 가슴을 앓고 기도하던 중, 주께서 밝히 보여 주시는 것을 나누려고 여기 퍼다 놨습니다.

 

(_플로리다 부흥은 밥 존스 목사님 릭 조이너 목사님 체안 목사님 존 아놋트 목사님 등 많은 목사님들이 주님의 임재 하심과 역사 하심을 증언하고 실제 집회 현장에서는 타드 밴틀리가 선배 목사님들에게 예의를 표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 받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하늘에 구름 십자가가 나타나고 검은 독수리 3마리가 출현하고.. 수많은 기적과 이사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

 

여기를 보십시오. 타드 벤틀리가 선배 목사들에게 예의를 표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 받는 때에, 하늘에 구름이 십자가 형태로 나타나고 검은 독수리 3마리가 출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독수리입니다. 그 사람은 독수리가 주는 성서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그들의 안수 시간에 그 위를 맴돌고 있었다면 이것은 정말 벤틀리와 그의 선배?들이 말세에 일어날 거짓 선지자들이란 표식임을 성서 적으로 확실히 검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자 보십시다. 마태복음 24장은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씀해 주신 주님의 경고입니다. 그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지요? 거기에 무엇이라고 말씀을 했나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24:27-28절 말씀)”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 라고 하신 말씀이 상징적 의미인 줄만 알았는데…, 문자적으로도 사실이 그러한 것을 알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죽은 지 이미 오래된 자들의 영과 교제하는 자들이기에, 독수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 획도 틀리지 않고 다 이루어지는 진리입니다!

 

2. 구름이 십자가의 표식으로 변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역시 주검의 표식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 달리신 우리의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십자가, 그 자체는 우리에게 주검의 표식,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 나타난 그 십자가가 꼭 예수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극악한 모든 죄인들에게 내리는 형벌이 바로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십자가 중에서 우리가 신성시해야 할 십자가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고로 십자가 형태의 구름마저 나타났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는 “이 악한 거짓 선지자들을 보아라, 이들이 있는 곳에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검으로 이끌고 가는 주검의 영령들의 잔치 자리이니 조심하라! 내가 너희들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느냐?”고 하시는 주님의 경고임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주는 표식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3. 수많은 기적과 이사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명 오, 주님께서는 벤틀리의 집회 장소의 특성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말씀이 결여 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 ~카더라" 에 의존하는 분임을 알 수있습니다. 이 역시 말세지 말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들의 표식일 뿐, 구원의 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24:24절 말씀)" 하고 경고해 주고 있으며 정확히 그런 사건들이 증표로 나타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 ~표적과 기사 + 말씀결여 = , 주검을 가져다 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표식이다 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

 

작금의 사태를 보니,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프다 못해 메어집니다. 이 모두가 다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먹이지 않고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고 부흥(인간적 욕심)에만 신경을 곤두세워 어느 교회가 부흥이 되고 있다고 하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고, 어느 프로그램이 좋다고 하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다니더니 오늘에 와서 이런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결론 적으로 같은 장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24:45-46)”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종들에게 충성과 불충성을 재는 척도는 "얼마나 큰 기적을 이르켰느냐? 교회를 얼마나 크게 부흥시켰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충성되고 지혜있게 생명의 양식을 얼마나 잘 나누어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 사상과 명예심을 부추기며 사람의 교훈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다 두어 당신과 당신의 사역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사탄의 간악한 흉계를 간과하지 마십시오!!!

 

지금 사람이 많이 몰려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박태선이나 문선명, 전주 율리아에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갔지요. 전주 율리아는 자신의 소변을 "율피"라고 은가루 금가루를 뿌린 후, 이것을 마시면 병이 났는다고 주님이 말씀했다고 속이니까, 신부님께서도 그 기적의 치유수 '율피'를 받아 마시드군요.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이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면 일어 날수록 더욱 피해야하고 더욱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쥐약 주위를 뱅뱅 맴도는 쥐가 제일 먼저 쥐약을 줏어먹지요. 안 그렇습니까?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배운다고 하십니까? 각종 프로그램에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없습니다. 교회가 나가야할 방향은, 첫째도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 둘째도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는 것, 셋째도 보혜사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 뿐입니다!

 

현대는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갈입니다. 말씀 속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믿고, 전하는 사람만이 영원히 갈하지 아니하는 생수가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 나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글/최송연

 

 

🍃자기 몸을 적당히 괴롭혀라
너무 귀하게 모시지 말라


"편안함을 추구하면
몸이 망가진다."

대추나무에 대추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염소를 매어 놓는다고 한다.

묶어 있는 염소는 특성상 잠시도 그냥 있지 않고 고삐를 당기며 나무를 흔들어 괴롭힌다.

그러면 대추나무가 잔뜩 긴장하면서 본능적으로 대추를 많이 열도록 하여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몸도 그냥 편히 두면
급속히 쇠퇴하고
질병과 노화에 취약해진다.

좀 섬소하게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굽혔다 펴기도 하고 흔들어 주고

 문질러 주고 비틀어주기도 하여야
생기가 더욱 발랄해진다.

노자의 에는
이러한 논리를 귀생(貴生)과
섭생(攝生)으로 설명한다.

귀생, 즉 자신의 생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오히려 생이 위태롭게 될 수 있고,

섭생, 자신의 생을 억누르면 생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선섭생자, 이기무사지(善攝生者, 以基無死地) -

 "섭생을 잘 하는 사람은 죽음의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물질의 풍요와 삶의 편리함이
내 몸을 한없이 귀하게 대접하는 오늘날의 귀생이 오히려
화와 병이 될 수 있고,

내 몸을 적당히 고생시키는 섭생이 건강한 생을 위해 이롭다는 역설이 귀에 들어 온다.

"몸은 귀하게 여길수록
건강은 더욱 나빠진다."

명심 또 명심하세요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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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먼저 
                      최송연

마음속에
꽃을 심지 않았는데
그대 입술이 어떻게
향기로운 말을 할 수 있겠나요

마음속에
소망이 없는데
그대 눈이 어떻게
별빛으로 반짝일 수 있겠나요

사랑한다
입으로 말하면 뭘 해요
그대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있지 않다면...

무엇이건
성급히 밖으로
나타내려 하지 말고
마음에 먼저 품고
인내로 숙성시켜야 제맛이 나죠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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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닉쥬(messianic jew)-이스라엘의 기독교인들


이스라엘 안에는 예수를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이름하여 메시아닉쥬(messianic jew)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인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소수라고?”

그렇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지만 불행하게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극히 적다. 왜 그럴까? 구약성서를 뒤져보면 ‘이스라엘’이 야곱의 또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어떤 기이한 사건을 통해서였다. 어느 날 밤 야곱은 낯선 사람과 씨름을 하게 된다. 구약성서에서 이 부분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세기32:25~28)

야곱의 아버지는 이삭이고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 씨름을 하고 이긴 뒤 축복을 받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인데, 이것이 이스라엘의 기원이 되는 것은 장차 야곱에게서 나올 열 두 명의 아들 곧,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단, 납달리, 갓, 아셀, 요셉, 베냐민 이렇게 열두 명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지파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신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고 훗날 메시아를 보낼 것을 예비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 속에서 보호받고 구원의 언약을 준 민족이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자 유대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하게 된다.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받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로 이스라엘 땅에 온 것은 이미 2012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예언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8:14)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대략 육백만의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만 사천 명 정도의 메시아닉쥬만이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인 것을 믿고 있다. 나머지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고 몇 십만에 달하는 과격파 정통유대교인들은 신약성경 자체를 믿지 않으며 구약에서 선지자 모세가 기록한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인 토라를 읽으면서 아직까지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그들은 메시아닉쥬들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방해할 뿐만 아니라 2007년 3월에는 메시아닉쥬의 가정집에 폭탄테러까지 감행했다. 그들의 위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교회 앞에 진을 치고 앉아서 예배하러 오는 메시아닉쥬들을 비난하거나 자신들이 믿는 신념에 대해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들의 외침은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냐는 것과 예수쟁이들은 유대인의 사회를 문란하게 하지 말고 이방인의 나라로 떠나버리라는 식이다.


예수가 이스라엘 땅에 오셨을 때에도 그들의 선조들은 똑같은 말을 했다. 과격파정통유대교인들의 선조는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다. 신약성서에는 이들이 예수를 어떻게 비방하고 학대하며 끝내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했는지 그 과정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 조상들의 무지와 몽매함을 그대로 답습하고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 그들이 예수를 믿는 같은 유대인인 메시아닉쥬를 바퀴벌레 보듯 하면서 박해하고 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저들은 메시아닉쥬를 십자가에 매달수도 없고, 당국에 고발해서 구속시킬 수도 없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천 년 전 그들의 선조가 예수에게 저질렀던 잔악성의 불꽃이 활활 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닉쥬의 숫자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들 가운데 80%는 성령을 체험하거나 예수를 환상이나 꿈으로 보고 은혜를 받아 교인이 된 사람들이라는 보고가 있다. 나 역시 그런 성령의 불같은 체험을 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듯이 저들도 성령으로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24:10~14)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고한 예수를 고발하여 법정에 세운 뒤에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했다. 이 일 일어난 시기를 전후로 이스라엘은 나라를 이미 잃고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한 뒤에 1948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 찾기까지 오랫동안 유대인은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유대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정통하다. 그들은 여호아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정시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구약에서 명시한 율법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며 절기를 지키고 음식마저도 하나님께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음식을 피한다. 그들은 구약성서에 명시된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종교인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구약성서는 유대인의 구원자로 오실 분에 대해서 이미 예언하고 있고,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분을 보내셨다. 신약성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가득한 데 그들은 그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신약성서 전부를 부인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 자체를 불경한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것이다. 창세기 원죄(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게 된 죄), 조상죄(우리선조들이 지은 죄), 자범죄(살면서 개개인이 지은 죄)등 인류의 죄 문제를 대속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존재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전 세계에 흩어짐으로 인해서 오히려 이방 나라들에게 복음을 퍼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정작 예루살렘은 이방나라의 종교인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아직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대왕국을 지탱했던 상징적인 건축물인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다. 예수께서 이미 성전을 가리키며 말씀하신 그대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태복음 24:2)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기 위해서 숱한 전쟁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손에 의해 무너뜨려진 성전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다시 지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이백 년 동안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바로 예루살렘 성지를 그리스도교가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방신이 점령한 예루살렘은 건재하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사십 일 동안 나타나신 뒤에 다시 하늘로 올려 질 때에 제자들은 예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어느 때인지 묻는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1:7~8)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짐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교는 세계만방으로 널리 퍼졌다. 세계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를 믿는 국가와의 대결과정을 통한 전도와 선교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이방 나라에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장대한 계획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때가 온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국가는 재 창건 되었고 그 안에 올바른 복음을 듣고 예수가 그리스도 되신 사실을 믿는 유대인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는 오늘을 보면 그렇다. 이스라엘에 그리스도교가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사도행전1:5) 예수그리스도가 다녀간 이후로 그를 믿는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리라는 말씀이시다. 사실상 초대교회인 마가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모두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오늘날의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된다. 즉, 내 몸속에 보혜사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이다. 보혜사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복음14:26)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이 내주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메시아닉쥬의 대부분이 이런 성령체험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안에서 그리스도 교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위험한 일이며 목숨을 건 신앙이다. 그러나 만 사천 명의 교인들이 이스라엘의 정통유대교 교권을 무너뜨리고 진정한 복음 위에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이스라엘에 복음이 전파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날이 바로 예수가 재림하는 심판의 날이 되리라고 본다. 그날은 분명 오늘날이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내 자신의 교만과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내가 마치 신과 동등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과 이익추구에만 혈안이 된 탐욕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요한복음12: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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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인' ....나이와 건강 🌻 


➡️ 

70세 고개 넘으면… 

건강 관리법 완전히 새로 배워라.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최근 노인을 두 단계로

구분하려는 시도가 한창이다.


65~74세를

'준(準)고령인'이라 하고

75세 이상을 

'고령인'으로 하자는 내용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75세를 기준으로 제안한다.

 

일산 백병원 

가정의학과 양윤준 교수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75세 이후로

 신체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고

 

80세 부터는 

앓는 질환이 갑자기 늘어난다"며 

"75세 전후로 

신체 상태와 건강 관리법이

확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혈압·혈당 관리, 

75세 이후 '느슨하게'


65~74세 노인은 

혈압·혈당 목표를

중장년층과 비슷한 수준으로

강하게 잡는다. 

체중 감량, 운동 역시

강도 높게 하도록 권장한다. 


반면 

75세 이상은 

느슨하게 관리하도록 한다.

혈당 수치보다는 저혈당 등 

부작용을 예방하는 것이 우선이다. 


미국 당뇨병 학회 

가이드 라인에 따르면 

당화혈 색소

(3개월간 혈당 조절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 정상 6.5% 이하)를


▲건강한 노인은 6.5~7.0% 

▲쇠약한 노인은 8.5% 이하 

▲매우 쇠약한 노인은 9.0% 이하를

목표로 삼는다. 


분당 서울대 병원 

내분비내과 임수 교수는

"집안일·목욕 같은 일상생활을

 혼자서 무리 없이 한다면 건강한 노인, 


누군가의 도움이 

약간 필요하면 쇠약한 노인,


혼자서는 불가능하면 

매우 쇠약한 노인으로 구분한다"며 


"일상 생활 수행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75세 전후"라고 말했다. 


비교적 젊고 

건강한 75세 미만 노인은


살을 빼고 과식을 피해야 하지만

고령이면서 쇠약해진 75세 이상 노인은

고기 등 단백질을 되도록 많이 먹으면서

체중이 줄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 고혈압도 비슷하다. 

고령 환자의 적절한 

목표 혈압에 대한 결론은 

아직 확실히 나지 않았지만

진료 현장에서는 나이가 많을수록

목표 혈압을 높게 정하고 있다. 


65~74세는

140/90(㎜Hg)미만, 

75세 이상은 

150/90 또는 160/100 미만으로 

관리하는 식이다. 


서울시 보라매 병원

가정의학과 오범조 교수는

"고령 환자의 혈압을 

너무 강하게 관리하면 

저혈압 등 부작용으로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콜레스테롤, 

나이 들어선 적절히 높게


이상 지질혈증의 경우

고령일수록 되려 유병률이 낮다.

 2016년 국민건강영양조사를 보면 

60~69세의 이상지질혈증 환자 비율은 

전체의 37.6%지만, 

70세 이상에선 23.9%다. 


섭취하는 음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입맛이 바뀌고

치아가 나빠져 

고기 등 기름진 음식을 꺼린다.


75세 이후로 

콜레스테롤 수치가

떨어진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오히려 

75세 이후엔 

콜레스테롤 수치를 적절히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콜레스테롤은 혈관 벽의 주요 재료다. 


너무 줄어들면 

혈관 벽이 약해져 

뇌졸중·심근경색 위험이 높아진다. 


또한 콜레스테롤은 

호르몬의 주요 재료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 각종 호르몬의 

분비량이 감소한 상태에서 

콜레스테롤 섭취마저 줄어들면 

신체 균형이 더 빠르게 무너진다.


나이 들수록 

과체중일 때 치매 위험 낮아져


이러한 이유로 의사들은 

75세 이후 부터는 

고기·과일 등을 충분히

먹으라고 권장하고 있다. 


75세 미만은 

체중이 적을수록, 

75세 이상은 

약간 과체중이어야 사망률이 낮다. 


임수 교수는 

"75세 이후의 과체중은 

신체 기능 저하로부터 

일종의 완충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체질량지수(BMI) 기준

 23~25가 적당하다"고 말했다.


체중이 

치매에 미치는 영향도 

75세를 전후로 확연히 다르다.

 

75세 미만에선 과체중·비만이, 

75세 이후론 저체중이 

치매 위험을 높인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노인 68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60~69세의 경우 

비만일 때 치매 위험이 

정상 체중보다 70% 높았지만


70세 이상에선 오히려 3%, 


80세 이상에서는 

비만일 때 치매 위험이 

22%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65~74세는 팔·어깨 부상, 

75세 이상 다리·고관절 골절 주의


낙상(落傷)을 입더라도

65~74세는 손목·팔·어깨처럼

상체에 부상이 집중된다.


 75세 이상은 

다리·고관절 골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어깨 관절 치환술을 받은 노인은 

65~74세가 3만3121명, 

75세 이상이 2만2621명이었다. 


반면 고관절치환술은

65~74세가 5287명, 

75세 이상이 1만3532명이었다. 


양윤준 교수는 

"75세 이상은 

근육량이 더 적고 

반응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넘어지면 손을 짚어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 들수록 

 골다공증이 더욱 심해져 

 같은 충격이라도 

 골절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암은 

75~80세에 발병률이 가장 높다. 

그러나 

75세 이전에 

많이 발생하는 암도 있다.


여성의 유방암·갑상선암이다.

 

국립암센터 

김열 암 관리사업부장은

 "이유는 모르지만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에선

40~60대 젊은 유방암 환자가

많다"고 말했다.  


✔장마철에 

     더욱 건강 챙기세요〰️🎶

<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몬타니즘 >


박해는 누가 보더라도 교회에 치명적인 해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박해는 교회 밖에서 왔으며, 복음을 드러내 놓고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박해보다 더 심각한 위협이 2세기 교회에 있었는데, 이는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형태로 찾아왔다.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영지주의, 말시온의 가르침, 몬타니즘

영지주의는 처음부터 완전한 이사상이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의 가르침에 유입되었다. 말시온과 몬타누스는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는데 이들의 가르침이 훗날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다.


<< 영지주의(gnosticism) >>

복음이 전해지자 세상은 구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철학은 지식인들의 마음에 만족을 주었지만, 대중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제국의 종교는 냉담했고, 성격상 종교적이기 보다는 제국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었다. 자연종교는 제국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갈급한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민간에 널리 퍼진 것이 신비종교들이다. 신과 연결시켜주는 비법을 알려준다며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2세기에 강력한 세력을 이루며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던 종교 사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이다. 

이 용어는 신, 인간, 구원에 대한 참 지식을 제공해 준다는 뜻이다. 영지주의 사상은 인도, 바빌론, 페르시아 지역에서 유래했다. 이 사상은 그리스 철학의 기본 사상과 유사하다.

영지주의에 심취된 자들은 기독교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흥미를 가졌다. 그들은 예수와 그분의 메시지를 자기들 종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영지주의는 동양 종교, 그리스 사상, 기독교 사상을 혼합한 종교이다. 


1. 영지주의의 문제

그리스와 동양의 모든 종교들은 매우 크고 기본적인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다. 
이들은 신은 절대로 물질 세상과는 그 어떤 관련도 맺지 않는다고 믿었다.
악은 물질에서 나오는 것이며, 신은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로 부터 멀떠 떠나 계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악한 물질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선한 신과 관계할 수 있을 것인가? 
신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악은 무엇인가? 
신이 선할진대, 영적 세계에 무슨 잘못이 벌어져서, 신의 후손인 인간이 악하게 된 것일까? 
인간은 악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영지주의자들이 물었던 것들이다.  

그들은 구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자들이다. 
인간이 어떻게 다시 신과 교제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떻게 하면 순수한 영혼들의 세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이런 물질적 실재에서 벗어나려면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가?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기독교 안에 존재한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은 특별히 좋아했다. 그분과 그분의 행적을 영지주의자들은 매우 중요시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방세계의 사상과 기독교적인 요소를 혼합시켰다.
영지주의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영지주의가 복음에 지극히 해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인간, 악, 그리고 구원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알아보자.

영지주의는 확신한 것으로 한가지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어떤 것이 영적인 세계를 악하게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사람들의 영혼들이 그들의 순수한 영적 존재로 부터 타락하여 물질에 갇히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답한다. 인간 타락의 원인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마련된 것에 대하여 묻고 답한다.

영적 세계에 관련하여 하나의 그노시스(gnosis,지식)을 제시한다. 부조화한 곳에 그노시스가 들어와서, 조화를 회복하고, 회복된 조화의 결과로 인간이 구원된다는 것이다.

이 지식은 영적 세계에서 온 계시이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 비밀스런 그노시스에서, 영지주의란 이름이 생겼다.
이 지식, 곧 그노시스를 다른 말로 하면, 신화이다. 


2. 플레로마(Pleroma)

- 영지주의는 원래 혼자 존재한 유일신을 믿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 그는 '알려지지 않는 아버지'(Unknown Father), 아비스(Abyss), 태어나지 않은 자(Unbegotten)라고 다양하게 불렸다. 
- 때로 그는 Silence라는 여성을 동반자로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그는 혼자 남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Mind와 Truth라고 불리는 존귀한 남자와 여자,이 두 Aeons(신적존재들)을 생산한다. 
- 이들은 다른 두 커플을 생산한다. Word-Life와 Man-Church를 말이다. 
- 이들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Silence는 함께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함)와 같이 플레로마(Pleroma), 혹은 신적 존재들이 거하는 Fullness를 만든다. 
- 그들은 그곳에서 연이어 생산을 한다. Word-Life는 다른 10명의 Aeons을 생산한다. 그래서 총 18명이 된다.
- Man-Church가 12명의 Aeons를 낳는다. 그래서 총수가 30이 된다. 
- 영지주의자들은 30명의 Aeons에 대한 가르침을 신약성경에서 따왔다. 
- 포도원에 보낸 일꾼들의 비유에서, 어던 이는 첫 시간에 보내지고, 다른이들은 삼시에, 나머지는, 육시, 아홉시, 열한시에 보내진다. 
- 이들 숫자를 더하면 삽십이 된다. 더우기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가 삽십세이시다. 이런 우화적인 성경적용은 많은 그리스도인에서 매우 심오한 것으로 인상을 남겼다.
- Man-Church에게서 태어난 마지막 Aeon은 Wisdom이라고 이름한 여성이다. 
- 그녀는 알지못하는 아버지를 사모하였다. 그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자, 그녀는 매우 낙심하게 된다. 
- 그녀는 근심하는 가운데, 그녀의 남성 파트너의 도움이 없이, 불확실이라는 뜻을 가진 Achamoth라는 이름의 자식을 낳는다. 
- Achamoth는 Pleroma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떨어져 나온다. 
- Wisdom은 자기가 한일을 보고, 심히 슬퍼했고, 극도로 불안해 졌다. 다른 모든 Aeons도 그녀와 함께 슬퍼했고 급거 그들은 Mind와 Truth에게 그녀를 도와달라고 청한다. 
- 그러자 두 명의 다른 Aeons를 생산해 냈는데, 그 이름은 Christ와 Holy Spirit이다. 이 둘은 Wisdom을 슬픔에서 구해준다. 
- 이렇게 해서, 플레로마에 조화가 회복되었다. 이를 감사하여, 모든 Aeons 30명이 함께 또 다른 Aeon을 생산하여 그 이름을 Jesus라고 하였다. 
- 이런 일이 플레로마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또한 플레로마 밖인, 자연계에도 사건을 일으켰다.


3. 창조, 악, 그리고 구원

- Achamoth는 Demiurge(그리스어로, 일꾼이란 뜻, 특별히 세상을 만든, 창조자를 가리킴)라 이름하는 후손을 낳았다.
- Achamoh는 모든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열등한 기원과 무가치한 특성 때문에, 물질은 악하다. 
- Demiurge는 이 물질에 형태와 모양을 주었다. 그는 그러므로 적합한 창조자이다. 그로 부터 또한 인간들의 영혼들이 나왔다. 
- Demiurge가 Achamoth를 통하여 Wisdom과 관계를 맺은 이래, 그녀는 비록 Demiurge가 이것을 모르고 있지만, 플레로마로 부터 Demiurge를 조정한다. 
- Wisdom의 영향력으로 Demiurges는 선이라는 영적 요소들을 가진 존재로 인간들을 창조한다. 
- Wisdom은 또한 Aeon Jesus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도록 하였다.
- 예수가 사는 날동안 그는 이런 지식을 그가 선택하신 자들에게 밝히 보여 주었다. 
-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에 의해서 선한 사람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가 살았던 지상의 몸에서 격리되어 천상의 Aeon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Aeon Jesus는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
- 이런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선택된 사람들인데, 죽음으로써, 그들은 몸에 포함되어 있는 악한 물질로 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 그들은 자기들에게 영적 존재를 부여했던 플레로마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모든 물질은 마침내 무질서와 멸망에 굴복하게 된다.
- 이는 매우 단순화 시킨 그림 언어로서, 부조화가 어떻게 플레로마에 들어왔는지, 그 결과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원래 조화가 마침내 회복되는지 보여준다. 
- 이것은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160년경에 죽은 대표적인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가르침이다. 이처럼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 사상과 그리스 사상, 그리고 동양 사상을 혼합시켰다.


4. 영지주의와 기독교

교회는 영지주의를 거부한다.

A. 지존하신 하나님을 알며,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B. 세상의 창조는 열등한 신적 존재의 행위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C. 물질계는 악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D. 구속자는 하나님도 인간도 아니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으셨다고 가르친다. 그는 인간처럼 보일 뿐, 실제 인간은 아니다.
E. 오직 영적인 존재로 태어난 일부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F. 부활이 없이 때문에

영지주의는 2세기 중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가 사그러들었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의 저술들은 영지주의의 쇠퇴에 공헌하였다. 

교회의 조직이 강하지 않았을 때, 감독들은 오직 지역에서만 그 권위가 인정되었다. 아직 교회에서 성경이 정경으로 인정되지 않은 때였다. 교회의 교리도 아직 공유되지 못했다. 

영지주의의 위협으로 인하여 교회의 정치, 성경의 정경화, 교리의 정립이 시급해 졌다.


<< 말시온주의 >>

약 140년경에 말시온(Marcion)이라는 한 그리스도인이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해안도시, 시노페(Sinope)에서 로마로 왔다. 그는 부유한 선박 건조업자였고, 종교심이 깊은 자였으며, 신학적 재능이 있던 자였다. 로마에서 그는 Cerdo라는 영지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이레니우스(Irenaes)에 따르면, Cerdo의 주요 교리는 이러하다.

율법과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알려졌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으셨다. 한 분은 또한 의롭고, 다른 한 분은 자비롭다.

말시온은 구약과 신약을 이런 가르침에 따라서 읽었다. 말시온은 영지주의와 관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교회는 근본적으로 유대교를 따라가는 종교라고 믿었다. 말시온은 영지주의가 교회에 위험한 것이란 매우 좋은 예가 된다. 


1. 구약과 신약

말시온의 신학에는 이온들(Aeons)이 신적 존재에서부터 나왔다는 식의 영지주의적 신화를 설명하는 대목은 없다. 말시온의 전체 가르침은 구약과 신약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 두 언약에 대하여 그는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말시온의 관점이 특이하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은 Cerdor가 말한 것처럼 열등한 하나님이 영감을 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하신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Unknown Father)의 계시이시다. 

말시온에 따르면 신약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약에는 너무 많은 유대인들의 사상들과 영향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신약 정경을 만들었다. 그것은 누가복음과 디모데서와 디도서를 뺀 바울의 서신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이 서신들이 기록자들에 의해서 직접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에서 편집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바울의 서신들을 빼버린 것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그 사도가 존경한다고 했기 때문이라며 그와 관련된 모든 내용들을 삭제한 것인데, 창조에 관여한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도가 예언서에서 인용한 구절들 또한 삭제했는데, 그가 삭제한 내용은 주님의 도래에 대하여 미리 예언자들이 말한 내용들이다.

비슷한 편집 과정이 누가복음에도 적용되었다. 말시온이 자기만의 경전에 몇 가지 책들을 선정한 이유는 분명하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거절하였고, 오로지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말시온은 세상을 창조하고 율법을 주신 열등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열등한 하나님은 의롭고, 복수심에 불타며,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은 실수를 하신다. 그래서 그 열등한 하나님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가르쳤다. 

반면에 선한 하나님은 자비, 용서, 그리고 사랑을 가르치며 실행하신다. 

이들 두 하나님은 말시온의 가르침에는 완전히 구별된다. 두 하나님 사이에는 관련성이 없다. 말시온은 두 하나님 사이에 어떤 관계도 설정해 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 이스라엘과 교회는 완전히 분립되어 있다. 구약, 율법, 그리고 이스라엘은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신약, 복음,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선한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2. 말시온의 그리스도

말시온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상과 상응한다. 그는 티베리우스(주후 29년) 황제 15년에 갑자기 등장하셨다. 그는 그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의 육체는 물질이 아니고, 겉으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는 하늘에서 직접 오셨고, 인간의 역사나 부모를 가지지 아니한다. 

그의 선하고 의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창조자 하나님은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다. 그의 몸은 사실 물질 혹 신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고통을 받지 아니하였다. 창조자 하나님은 십자가에 의로운 그리스도를 달리게 함으로써 그가 자기 자신의 구약 율법을 깨뜨려 버리게 된 것을 부인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부당한 일에 대한 대가로, 그는 그리스도에게 구원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주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값을 지불하신 것이 분명하다. 

말시온의 다른 가르침에 있어서도 그 같은 관점으로 일관된다. 물질은 악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는 여전히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을 것이며, 죽은 자의 부활도 없다. 그리스도, 선한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여기서 사는 동안 순전히 영적인 것이다. 창조된 세상이 회복되는 일이란 결코 없다. 


3. 말시온의 영향

말시온은 교회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가 있게 했다. 이들로 인하여 창조주와 구원주는 하나이시며, 꼭 같은 하나님이시란 진리가 선언되었다. 이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은 창조주시며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어 있다.

말시온은 로마 교회에 의해서 출교를 당했다. 그는 그 자신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2세기에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의 숫자가 상당하였다. 그 세력이 7세기까지 지속되다가 이후로는 사라지게 되었다.



<< 몬타니즘(Montanism) >>

몬타니즘이라고 불리던 운동이 기독교 내부에 있었다. 교회의 신조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 그리스도를 믿었다. 영지주의와 말시온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렇지만 이 종교 운동은 교회가 수용하지 않았다. 몬타니즘은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이해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1. 초기 역사

몬타니즘은 소아시아 중심부인 프리기야(Phrygia)에서 주후 156년에 일어났다. 이 사상은 황홀경을 가져오는 소위 “영적인 것”을 강조한다. “황홀경”(ecstasy)은 문자적으로 정신이 육체를 벗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즉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경험을 말한다.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이교도 제사장은 금식, 고행, 춤, 환상, 그리고 예언을 한다. 몬타누스(Montanus)란 사람은 그런 프리기야 지방에서 이교도 사제 출신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는 이방종교를 포기했지만, 그는 자기가 받아들인 새로운 종교를 옛 종교의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런 그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방식은 보편적 교회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두 여인과 연합했는데, 막시밀라(Maximilla)와 프리스킬라(Priscilla)였다. 이 들은 몬타누스를 돕기 위해 자기 남편들을 떠났다. 처음에 이들은 보편 교회 안에서 일했으나, 곧 그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기자 교회 조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2. 가르침

몬다누스는 자기를 통해서 파라클레토스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가르쳤다. 훗날 그는 예언자인 몬타누스와 자기를 돕던 두 여인을 통해서 파라클레토스가 오셨다고 말했다. “새로운 예언”은 이제 실제가 되었다. 새 예루살렘은 곧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페푸자(Pepuza)라고 불리는 도시 근교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금식할 것이며, 자기들의 세상 직업을 버릴 것이고, 종말을 기다리기 위하여 페푸자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몬타니즘이 확장되면서, 여타 교리와 실행 지침이 첨가되었다. 사람은 오직 한번만 결혼할 것이며, 영적인 이유로 인하여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영적 은사들을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순교를 장려했으며, 순교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죄라고 하였다. 세 명의 지도적인 예언자들인 몬타누스와 두 여인은 죄들을 사해 줄 수 있고,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여자도 교회에서 직분을 맡을 수 있다.


3. 몬타니즘과 보편교회

교회의 지도자들은 몬타니즘을 반대하였다. 예언과 영적 은사를 강조하자 그런 것을 소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의심하였다. 세 지도자가 죄를 용서하고, 성령을 소유한 여타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감독들을 심히도 자극했다. 그들은 교회를 자기들의 권한 아래 두고자 하였다. 몬타누스의 추종자들은 세상과 온전히 구별될 것을 가르쳤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가능하면 열리기를 원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몬타니즘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급속히 퍼져갔다. 소아시아를 휩쓸고, 유럽과 북아프리카까지 들어갔다. 박해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종말의 표로써 몬타니즘을 환영하였다. 교회의 삶이 세속화가 되면 될수록 몬타니즘은 더욱 받아들여졌다. 몬타니즘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엄격한 모습으로 되돌아 가자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북아프리카의 위대한 신학자인, 터툴리안(Tertullian)도 속해 있었는데, 그는 207년 경에 몬타누스 추종자가 되었다.


4. 쇠퇴

시간에 흘러, 몬타누스가 설교하기 시작한지 50년 정도 지났을 때, 몬타니즘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새 예루살렘이 페프자에 내려오지 않았다. 상당히 많은 예언들이 불발되었다. 초기와는 달리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몬타누스, 막시밀라, 그리고 프리스킬라가 죽었다. 

초창기 몬타니즘은 엄력한 그리스도인의 삶, 금식, 세상과의 분리, 매일 매일 그리스도께 죄를 고백함, 믿음으로 인한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207년 터툴리안이 몬타누스 교회에 가입했을 때만 해도 그러했다. 작은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그 강력한 운동은 멈추게 되었다. 보편 교회 안에 존재하는 보수적인 모임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그 결과 몬타누스 교회가 계속해서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점차 숫자가 줄어들다가 550년경 이후에는 자취를 감췄다.


5. 영향

영지주의와 말시온 주의같이, 몬타니즘은 보편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결국 예언을 장려하지 않았고, 비상식적인 영적인 능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로 인하여 교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교회의 치리와 신생하는 모든 신앙 운동들에 대한 판단을 위해 성경의 정경화가 더욱 요청되었다. 몬타니즘은 교회에서 영적 은사의 남용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다. 한편 교회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열린 마음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 신약성경의 정경화 >>

사도들의 죽음으로 무엇이 복음이며,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살아있는 권위의 목소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이제 구전과 기록된 전승에 살아 있었다. 영지주의와 말시온주의자들이 이런 전승에 등장하였다. 약 140년경에, 말시온은 그 전승을 확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바울만을 오로지 참 사도적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받아 들였다.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말시온의 가르침에 아주 적합한 듯이 보인다. 그는 자기의 신학적 입지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신약 정경화를 위한 첫번째 시도로 알려져 있다. “정경”(canon)이란 그리스어로 ‘표준’ 또는 ‘잣대’란 의미이다. 당시 캐논은 진리라고 여겨지는 경건한 서신들의 모음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말시온이 정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어떤 책들과 서신들을 복음을 위해서 권위있는 책으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속 사도들이 인용한 많은 글들과 참조 문헌들이 오늘날 정경화가 완료된 신약성경에서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구약 성경과 같이 ‘경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문헌이 당시에 완벽하게 수집되지 못했다.

1. 초기 모음들

2세기에 일련의 모음글들이 존재하였다. 영지주의에 대한 답변과 부분적으로 말시온에 대한 대답을 담은 문헌이 상당수 존재했다. 후에 신약성경이 된 모음들이 점차 증가했고, 교회들에 널리 퍼졌다. 사실 처음에 여러 개의 문헌들로 존재하던 모음들이 오늘날 신약성경이라고 불리는 한 묶음의 성경이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모음들이 앞부분에 복음서가, 그런 다음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들이, 일반서신들과 계시록의 순으로 묶여졌다. 이런 발전 과정에서 신약성경에 현재 존재하는 책들 대다수가 이미 초기 때부터 모두 교회에 의해서 받아들여 졌다. 일부는 몇 몇 교회에서는 받아들여졌지만, 다른 곳에서는 의심을 받았다. 몇 책은 처음에는 받아들여졌지만, 후에 거절된 것도 있다. 

신약성경의 가장 초기의 목차는 무라토리안 프라그멘트 (Muratorian Fragment)라고 알려진 고대 사본의 조각에 포함되어 있다. 이탈리안 학자인 루도피코 무라토리(Ludovico Muratori)가 이것을 발견하였다. 1740년에 그는 8세기 기독교 신학 문서에서 그 조각을 발견하였다. 이 조각은 170년 경에 쓰여진 것인데 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들, 요한 1서, 요한 2서, 유다서, 그리고 계시록이었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3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베드로 묵시록 (Apoclypse of Peter)와 후기에 거절된  한 권의 예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의 신약 성경에 있는 대다수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 외에도, 다른 모음집들이 있었다. 허메(Hermas)의 목자서, 바나바 서신서, 디다케, 히브리인의 복음서, 솔로몬의 지혜서, 바울 행전 등 다양한 목차가 수록되어 있었다.


2. 정경의 권위

200년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초대교회에서 정경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a. 어떤 책이 정경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표준은 “사도성”(apostolicity)이었다. 사도들이 썼든지, 아니면 사도와 가까운 사람이 쓴 책이어야 했다. 마가복음(마가는 베드로의 조력자였다), 누가복음(누가는 바울의 조력자였다)이 그러기 때문에 정경에 포함되었다. 같은 이유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3서, 유다서 그리고 계시록은 그 책에 대한 사도들의 저작권이 확실치 않아서 정경으로 인정하는데 지체되었다. 바나바의 서신, 허마의 목자서, 솔로몬의 지혜서 등 은 사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정경에서 제외 되었다.

b. 오늘날 우리가 가진 신약성경의 전목록을 처음으로 확립한 사람은 367년에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이다. Augustine의 지도하에 북아프리카의 힙포 레기우스(Hippo Regius, 393)과 Carthage(397)에서 개최된 두 번의 공의회(synods)에서 현존하는 신약성경과 흡사한 공식적 정경하가 이루어졌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아프리카의 예를 따랐다. 

c. 정경은 근 3백년동안 논쟁을 거듭해야 했다. 이는 최종적으로 입증된 책들만 모든 교회가 수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정경은 아다나시우스의 공적인 선언이나, 중요한 공의회의 결정에 의한 결과로 확정된 것이 아니다. 이들 공식적인 선언은 단지 교회가 이 책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랜 동안 받아 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다. 신약 성경의 책들이 정해지고 교회가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d. 정경을 가지고 교회는 믿음과 설교의 기초의 근거로 삼았다. 교회의 신앙에 대해 이단들이 도전을 해왔기 때문에 정경화가 이루어 졌다. 그 성경상 사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권위를 가진다. 성령께서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의 완전성을 말씀해 오셨고, 성경의 영적인 탁월성과 적절성을 증거해 오셨기 때문에 긴 세월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38202%BF%A1%BC%AD

[출 34: 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그 곳에 성지순례를 가보지 못 했지만 어느 글에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아침 6시에 해 뜨는 광경을 보려면 새벽 3시에 호텔을 출발해야 한다고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시내산이 성경의 그 시내산인지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튼 시내산은 상당히 높아서 올라가는데 3시간 가까이 걸린다는 이야기지요. 지금은 길이 나 있지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갈 때는 길이나 있었겠습니까? 그 산을 80세 넘은 모세가 무거운 돌판 두 개를 안고 넘어지고 자빠지며 기어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돌판을 깎아 만드는 것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당한 크기의 넓적한 돌을 골라 찾아야 했을 것이고 정과 망치로 두들기며 밤새도록 땀 흘리며 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산꼭대기에 도착하기 위하여 아직 어두운 새벽에 나서서 험한 산길을 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 그런 의문을 가져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주신 오리지널 돌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린 것은 불경스럽고 지나친 행동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아무 말씀 않으시고 모세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하나님이 주신 돌판은 소용없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계약)도 무효가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아침 일찍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명하십니다. 왜 처음처럼 하나님이 돌판을 직접 주시지 않고 모세더러 깎으라 하셨을까요? 처음엔 하나님이 주셨지만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다음엔 인간이 스스로 깎고 다듬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자 해도 주실 수 없도록 타락한 것이 인간의 부패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두들기고 쪼개고 깎고 다듬어야 합니다. 죄인 스스로 겸비하여 마음을 쪼개고 깎고 울며 통회하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깎은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 그 앞에서 하나님은 반포하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6절)
우리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십니다.
배반하여 죄로 더러워지고 부패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부르시고 그 피로 죄를 씻으라고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깎고 울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자기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제 하나님께서 돌판이 아닌 우리 마음판에 말씀을 새기시기를 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그 마음판에 말씀이신 주님을 새긴 자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린도후서 3:3)”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십자가의 주님을 새겨야 할 곳은 돌판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우리 가슴, 우리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조각목으로 법궤를 만들고 두 돌판을 그 법궤에 담도록 하셨습니다.
조각목 법궤를 황금으로 싸고 지성소에 두셨으며 그룹천사가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성소 안의 법궤와 그 안에 담긴 돌판을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의미만이 아닙니다.
조각목은 광야에 버려진 것 같은 보잘것없는 나무요 돌은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흔하디흔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듬은 조각목 법궤와 깎아서 말씀을 새긴 돌판은 하나님께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스스로를 깎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새긴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황금으로 싸서 영화롭게 하시고 지성소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시고 그룹천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그 자녀들을 이같이 귀하게 여기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깊이 새기려면 우리의 모나고 거친 마음을 두드리고 쪼개고 깎고 다듬어서 끌어안고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야 합니다.
이른 아침 거룩한 시간에 홀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깎고 다듬은 돌판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새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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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단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 엡 2:2>로서 '자기권세'를 지키기 위해 공중 아래 사는 자들을 유혹하고 협박합니다. 바로 <세상 풍조를 따른 자들>이 되도록 합니다.


세상 풍조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등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채우는 쪽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마치 덫에 올려 놓은 미끼처럼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는 자들을 크게 몇 가지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가장 첫번째 "1차 그룹"은 <스스로 좋아서 세상풍조>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사단을 따르는 자들로서 좋고, 하고 싶고, 뒤지고 싶지 않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풍조를 따르는 맨" 마지막 그룹"은 <불안과 두려움, 위협>이 있기에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의 대다수가 넌크리스챤들이 아니라 교회당을 다니는 기독교인들로 가득할 것이란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공중권세를 포기해야 하기에 사단은 절대적으로 <주님의 재림>을 막습니다. 그래서 신랑되신 주님을 맞이할 <신부>와도 같은 성도들이 준비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맨 마지막 방법이 바로 불안과 염려, 두려움과 위협을 가하는 것인데 이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살아가고 있는 모든 영역들(공중 아래 있는 모든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가 되면 될수록 "깨어 있음"이란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의 특징이며 진짜 그리스도인, 리얼 크리스챤의 대표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에 세상 풍조를 따르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서 깨어 있음으로 이를 거역하고 돌파하는 자들,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자들로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오늘 하루도 "깨어 있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위해 사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힘겨운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세상 풍조를 거스르기로 작정한 자>라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마 24:6)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라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예수님 또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내 삶의 이유이기에 신부요 용사된 자로서 깨어 기도하며 오늘도 복음을 살아냅시다.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 사랑>으로 일어섭시다. 마라나타!



글: 김영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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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행복이나 축복 등을 주제로 한

이런저런 집회나 행사를 자주 여는 것을 본다.


사실 행복이나 축복등의 내적 가치들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때 비로소 

그 가치로써의 진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내적 가치를 

삶의 목적으로 두고 

인간이 자의로 추구하려고 하면 

그 가치는 진리안에서 바른 가치가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명자로써의 삶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진짜 목적이고,


그 방향성에 의한 삶을 살아가는 속에서

위로부터 그런 가치들이 부어주신다면 

그때 비로소 행복이나 축복 등의 가치는 

진리안에서 진정한 가치로써 발현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그 가치를 

목적으로 두고 추구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런 가치를 기반으로 한 

미혹이 누룩처럼 틈타게 되고 

겉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지금 대다수 교회들을 보면

대세적 흐름들이 그러한 것을 본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행복이나 축복 등의 가치가 목적이 되어버려서

많은 교인들을 이땅의 삶에만 관심을 두게 하는

전체적인 포커스가 그렇게 맞춰져 있다.


사랑, 축복, 연합, 은혜, 위로, 행복, 인권, 평화 등등....


이런 무형의 가치들은 

그냥 보면 무조건 선해보이지만

반드시 말씀에 근거한 진리적 기준을 

중심으로 두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이런 선한 모양 때문에 

사람들을 혹하게 만드는 미혹의 수단이 된다.


결국 이런 무형의 가치들에 

인본적 사상이 더해지면,

이 시대에 가장 악독한 미혹의 수단이 된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땅에서의 삶에 머물게 하는

행복, 축복 등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버리면 

미혹의 수단이 되고,


교회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배도하게 하는

사랑, 연합 등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버리면

미혹의 수단이 되버린다...


초림하신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다시 오실 주님은

죄인이 아닌 의인을 구원하시고,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그 죄인은 

불신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통칭한다.


이땅에서의 행복과 축복만 간구하고 추구하면서

사명자로써의 목적을 져버린 자들에게 

하나님은 돌이켜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끝내 돌이키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결국 토하여 내치실 것이다.


알곡과 쭉정이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나뉘어지고 있다!



글: 엘샤다이

머릿수가 많은게 좋아서
매주일 머릿수를 카운트한다

머릿수를 좋아하는가?
영혼을 사랑하는가?
다윗 왕이 머릿수 좋아했다가
혼쭐이 난적 있다

머릿수가 많아도
한 영혼밖에 없어도
하나님 보시는 것은 같다
머릿수가 많다고
오히려 돌아가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한 영혼을 더 찾고 계신다

머릿수가 많아도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머릿수를 채우려 하지 말고
하나님 사랑하는 영혼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자


해처럼달처럼/차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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