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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공이 제법 높은 무당과 댓글로 의견을 나눈적이 있었다

무녀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높은 신기를 자랑하였다

- 성당에서 찬송가 부르다가 강한 신기가 내려 왼쪽으로 세번 돌면서 /몸으로 신령이 들어오는 경험을 하고 무당이 되었다

- 산에서 밤 11시 30분부터 새벽 3시까지 천신기도를 하는데 신령이 잠을 거의 안재운다

- 신령이 금식기도 시키고 수행을 시키는데 나는 죽은 사람과 통신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수행을 많이 해서 영이 맑아져야 신기가 강해진다

<신령 : 한국 민속신앙에서 섬기는 미신의 대상으로 천지신령 또는 천지신명이라고 한다>

- 나는 천지신명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하늘님)께서 도와주신다

- 목사도 스님도 매매나 이사할 때 점사(무당이 점을 치는 행위)보러 온다

- 천지신명이 돈을 벌게 해 주신다

- 조상귀신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무당과 주로 토론한 내용은

① 무당이 섬기는 신령의 정체가 무엇이냐?

돌아다니는 조상귀신은 없으며 신령은 귀신의 영이다

귀신을 섬기면 그 영혼이 죽어서 어디로 가겠느냐? 질문했고

​→ 무당은 말하기를 "지옥은 인간 마음이나 생각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도 그래서 자아를 깨우치고 스스로 번뇌에서 벗어나라! 한거다
하나님도 인간을 사랑하시니 함부로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다"

② 무당님의 그 열심만은 인정해 주고 싶다

그런데 귀신을 달래고 기도해서 영력을 얻으시는데 그 영이 어둠의 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 않는가?
당장의 유익이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이 어찌 귀신을 섬기겠는가?

우리는 더러운 귀신의 영이 아니라 거룩한 성령을 섬긴다

​→ ​나는 귀신도 보이고 죽은 영혼과 소통도 한다

목사,신부,스님들은 그렇게 못한다, 그들은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영이 맑고 영력이 높은 무당은 신령이 잠도 못자게 하고 기도를 많이 시킨다 

 

③ 아무 영이나 믿으면 안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우주를 떠다니다가 환생한다고 하는데 그럼 우주가 생기기전에는 어디에 있었느냐?
조상귀신과 접신하는 것은 다 귀신들이 속이는 것이다
무당님은 살아생전에 돈 많이 버는 것이 삶의 목표인듯 한데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히려 죽은 이후 영생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돈 좀 벌고 지옥에 들어가면 무슨 유익이냐?

회개하고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영발을 자랑하는 무당과의 대화를 통해 무당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무당도 신기를 높이기 위해 저렇기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맑은 영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구나

소위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당이나 스님들의 참선, 수도사를 떠오르게 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수행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득도하고 공력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제안하였다

무당도 하루에 3~4시간을 기도하는데 목사님들은?

진짜 무당과 목사님이 대결하면 영적싸움에서 지는 것은 아닐지...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원인을 묻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다

무당의 하는 일 중에 천국이나 극락을 안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현생에서 복 받는 것이며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면 짜증을 낸다

만약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 곳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는 조상신을 잘 섬기는 것이다

다분히 불교적인 속성과 잘 어울리며 불상을 차려 놓기도 하지만 기독교적 요소는 배제된다


그리고 무당들이 기도에 정진하는 이유는 접신이 잘되어 점사가 영험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무당은 하루에 12시간씩 기도하기도 하는데 선호하는 기도장소는 유명한 산들이다

결론적으로 무당은 신령(더러운 귀신,사탄)에게 기도하는 것이고 기독교인은 성령(거룩한 그리스도의 영)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다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과 무당의 차이는 무엇일까?

귀신들린 사람이 더러운 귀신의 피해자라면 무당은 귀신의 조력자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귀신의 영을 받은 무당도 저렇게 자랑하는데 우리는 성령을 조롱하는 자들도 있다

신접한 사울의 사례

 성경에도 무당(엔돌의 신접한 여인, 영매자)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라오게 한 적이 있었다(삼상 28장)

무당이 불러 올린 영이 실제 사무엘의 영인지, 강신술에 의한 사탄의 영인지는 불확실하다(그의 영이 땅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은 이전에 율법을 주시면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고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19:31)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본문은 이해하기 힘든 난제에 속한다

현대의 신자들 중에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는 이유로 만약 무당을 찾아간다면 자신을 더럽히는 가증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엔돌의 접신 사례처럼 접신한 영의 말이 맞을 가능성도 있다 하더라도 더러운 영과 교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를 들어 조상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다 저주를 받거나 재앙이 임하면 누가 제사를 지내겠는가?

하지만 현생에서는 그들도 복을 받으며 형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에 대해 결과가 갈라지는 것은 사후에 심판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사울처럼 하나님께서 금지시킨 방식을 찾아가는 행위는 결국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게 만든다

기독교인이 점을 보는 행위는 제사와 마찬가지로 귀신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https://blog.naver.com/acoloje/221450230761


문명이 발달하고 세상이 살기 좋아질수록 약삭빠르고 강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순박하던 인심은 사라지고, 정직하면 손해보고, 착하면 빼앗기는 살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남이 더 가져가면 내 몫이 줄어들거나 없어진다는 제로섬 경제논리 속에, 1등이 되어야만 살아남는다는 무한경쟁체제 속에, 인간사회는 날이 갈수록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의 살벌한 동물세계를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경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속도 없고 배알도 없이 바보처럼 주고 빼앗기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고까지 하시니, 누가 이 말씀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으시고 그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배알 없고 속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도 당연히 그런 속없고 배알 없이 다 베푸시고 다 빼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그런 속없고 배알 없는 성품 그대로 아버지께 순종하여 죄인들을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보라서 십자가 지셨습니까? 태양이 멍청해서 누구에게나 비취고, 비가 속이 없어서 누구의 밭에나 고루 내립니까? 만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만 사랑하시고, 의인만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예수님이 사람 골라서 피 흘려주셨다면 우리 같은 죄인이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속없이 배알 없이 무한히 나누어주셨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 완전한 사랑 때문에 나같은 죄인도 구원 받은 게 아니겠습니까? 

왼편 뺨도 돌려대며 겉옷도 벗어주며 원수를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사십시다. 그렇게 해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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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 직후 7년환란이 시작될텐데 7년환란은 전3년반과 후3년반 두 파트로 나누어진다

적그리스도(짐승)가 절대권력을 가지고 직접 통치하는 후3년반은 대환란의 정점이다

그러나 전3년반 시대에도 매우 힘든 시대가 될 전망이다


우선 전3년반동안 비가 오지 않아 대기근이 예상된다

두 증인은 전3년반(1260일) 기간에 예언하는데 그들이 예언하는 기간동안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한다(계11:6)

지구 전체가 3년반동안 비가 전혀 오지 않는다면 지구는 흉년으로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셋째인을 떼실 때에 검은 말이 나오는데 밀 한 되 값이 한 데나리온이 된다(계6:6)

밀 한 되가 한 데나리온의 가치로 인플레이션이 되면 도대체 현재보다 얼마나 비싸 지는지 계산을 해 보았다

한 되는 약 1.8kg 정도 된다

현재 시세로 밀가루 1.8kg은 약 2,160원이다


한 데나리온은 아는대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포도원에 품꾼을 들여 보낼 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다(마20:13)

작년기준으로 우리나라 최저임금은 시간당 7,530원이고 하루는 60,240원이다


그러므로 현재 밀가루 1.8kg가 2,160원인데 6만원으로 폭등하는 것이다

물가 상승률이 무려 2800%에 이른다

2800%는 최저임금 기준이고 3000%이상이 될 것이다

현재 물가는 2% 미만이다


인류역사상 세계물가상승률이 2800%에 이른 적이 없으므로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다

단일 국가 차원에서는 작년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이 130만%에 이르렀다


​인플레이션이 2800%에 이르면

라면 한 개가 1,000원에서 28,000원으로 오르고 한 사람의 일당으로 라면 2개를 살 수 있다

4인 가족이 라면만 먹는다 해도 하루에 33만 6천원의 식비가 들어간다

한 달이면 1000만원이다


성인이 한끼에 200g의 밀가루를 먹고 가족 3인이 3끼를 해결하려면 1.8kg이 필요한데

일당으로 겨우 하루 양식을 해결할 수 있다

그것도 밀가루만 먹을 경우다


 

화폐가치는 폭락하고 곡물가격은 폭등한다

일부 국가는 전 국민이 굶어죽는 비참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국가간 식량을 무기로 아귀다툼이 일어나고 도시는 폭동과 약탈이 일어날 것이다

세계인구 76억명이 식량위기에 몰리자 제3차세계전쟁이 발발하여 세계인구의 1/3인 25억명이 전쟁으로 사망한다

적그리스도가 짐승의 표인 666 매매시스템을 통해 세계를 통제하려는 계획에 전세계가 따라 올 수 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계 미디어는 3년반동안 비가 오지 않는 원인으로 두 증인을 주목한다

세계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쏟아 놓는데 짐승이 이들을 죽이자 환호하며 심지어 서로 선물까지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짐승에게 일심으로 세계를 통치할 권력을 이양한다

만약 들림받지 못하고 남는다면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이 7년 흉년을 대비했던 것처럼 7년치의 식량을 미리 확보하는 것도 지혜로운 행동지침이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지구전역에서 불러 올릴 것이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출처: https://blog.naver.com/acoloje/221456686373


[100세 시대 ‘나이 수업’] 자식보다… 돈보다 좋은 보약 같은 친구 기사의 사진
<일러스트=이영은>

결혼 전에는 매일같이 셋이 붙어 다녔다. 둘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란히 앉았던 짝꿍, 또 다른 둘은 대학 1학년 때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였다. 양쪽에 걸쳐있던 내가 다리를 놓아 셋이 만나게 되면서 이름하여 삼총사가 탄생했다. 


각자 직장에 다니면서도 저녁이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무언가를 같이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주말이면 1박 2일로, 여름이면 휴가 날짜를 맞춰 바다로 산으로 여행을 다녔다. 생김새가 다른 만큼 성격도 식성도 직업도 취향도 달랐지만, 아마도 달랐기 때문에 오히려 부딪힘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서른이 넘어 차례로 결혼을 했고 그중 한 친구는 일본으로 가 일본인 남편과 살게 됐다. 일하랴 살림하랴 아이 낳아 기르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데다가 한 친구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셋이서 만날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긴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이 다 자라 제 앞가림을 하게 되자 모두 한숨 돌리면서 이제 머지않아 우리도 셋이 뭉쳐 남들처럼 해외여행도 다닐 수 있게 됐다며 기뻐하고 보니, 머리는 희끗희끗 나이 육십이 코앞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한 친구가 큰 병에 걸렸고 모두가 애를 쓰며 돌보고 간절히 기도했건만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지난해 가을 훌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달려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전화로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던 일본에 사는 친구는 결국 장례식이 끝난 후에 귀국했고, 내가 안내해서 간 높은 언덕 야외 봉안당 앞에서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가을바람인데도 바람은 왜 그리 차가운지, 하늘은 또 왜 그리 파랗고 높은지. 하지만 눈물 속에서도 셋이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우리는 웃었고 젊은 시절 엉뚱한 짓을 기억해내고는 또 웃었다. 20대와 30대에 늘 함께했던 친구, 그 고마움이 뒤늦게 가슴을 채웠고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친구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일뿐이라는 아픈 깨달음에 우리는 또다시 울었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무료인터넷전화로 일본에 사는 친구와 통화를 한다. 남편보다도 아이들보다도 먼저 만나 알고 지낸 40년 오랜 벗 세 사람 중 한 명을 떠나보내고 둘만 남고 보니, 어르신들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자식보다 자네가 좋고, 돈보다 자네가 좋아, 자네와 난 보약 같은 친구’라는 가사가 들어있는 어르신들 애창가요의 제목은 ‘보약 같은 친구’이다. “쇠붙이는 쇠붙이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친구와 부대껴야 지혜가 예리해진다.” (잠 27:17, 새번역)

친구와의 행복한 동행을 위하여

하나,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과 위로, 격려를 받으면서 안정을 얻고 싶어 하지만,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팍팍한 현실은 가족 사이에서마저 이런 바람을 채우기 어렵게 만든다. 가족의 정서적인 기능을 친구가 담당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서로 관심을 기울이고 걱정과 즐거움을 나눌 친구의 소중함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둘, 길이 멀면 말(馬)의 힘을 알고, 날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간직해야 하지만 서로 맞지 않는데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붙잡고 있을 일은 아니다. 오십 이후는 살림살이도 늘리지 않고 정리해야 할 시기인데,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다. 좋은 사람 만나 좋은 시간 보내기도 부족한데, 일방적이거나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 혹은 허울만 남아있는 관계라면 포용력을 발휘하기에 앞서 맺고 끊음이 필요하다.

셋, 물이 깊어야 고기가 모인다. 좋은 친구를 얻으려면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돼야 한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교제의 범위나 모임의 개수보다는 서로를 깊이 받아들여 뭉근하게 숙성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나이 듦의 지혜이다. 비록 자주 만나지 못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고받지는 못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힘이 된다면 말 그대로 시공을 초월한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경 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



출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59719&code=23111413&sid1=m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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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소집된 니케아 공의회는 ‘고대교회의 신앙’을 요약하는 단일한 신조를 만들자는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황제는 종교 자문관 호시오스에게 여러 감독들과 논의해서 세부적인 내용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아리우스파와 그 동조자들은 신조를 작성할 때 성경적인 용어만 쓸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알렉산더와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는 이것을 일종의 책략으로 받아 들였는데, 그들이 보기에 아리우스파는 ‘성경을 왜곡하는 일’에 능숙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의 성자가 성부에 종속되었다는 종속론이 이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논쟁을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 밖의 용어를 사용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한 신성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하여 성경 밖의 표현을 사용하려고 하였습니다.

논쟁이 계속되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새 신조에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호모우시아)”이라는 주장을 포함시키자는 내용의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 종교자문관 호시우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이 용어를 추천하였고 호시우스는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로부터 그 방향으로 나가라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호모우시오스”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의 본질” 또는 “하나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 언어는 일찍이 테르툴리아누스가 사용한 라틴어 “하나의 본질(우나 서브스탄티아)”을 상기시키는데, 황제의 이러한 제안은 아리우스파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고, 아리우스파가 아닌 일부 감독들도 당황하며 걱정하였습니다. 반면 반(反) 아리우스파의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스어 “우시아(본질)”는 한 사람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호모우시아)”이라고 말하는 것은 똑 같은 사람이 두 개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이것은 바로 양태론이고 사벨리우스 주의입니다. 물론 “동일본질”을 주장한 쪽에서는 “본질”과 “존재”를 중심으로 하여 성부와 성자의 신성에 국한하여 동일한 본질적 속성의 공유를 의미한다고 설명을 하였지만 “동일본질”이라는 단어는 양태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매우 모호한 용어로서 아리우스파에 대한 정죄만을 목적으로 성자가 가지고 있는 인성적 구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하는 것을 꺼려하였던 중립적인 일부 감독들은 “동일본질”을 주장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앙키라의 마르켈리우스였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앙키라의 마르켈리우스는 숨은 사벨리우스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 몰래 양태론을 믿고 있었는데, 양태론자라고 해서 반드시 불법은 아니었습니다. 양태론이 어떻게 주장되었는가에 관해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단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이것은 지금의 설교 강단에서도 동일합니다.). 마르켈리우스의 “동일본질” 교리에 관한 지지는 니케아 공의회가 휴회하기 전까지도 많은 감독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벨리우스주의를 정통 교리로 확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게 했습니다. 마르켈리우스는 의기양양했고,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는 태연했습니다. 이들에게 사벨리우스주의는 아리우스주의보다 훨씬 덜 위험한 이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사벨리우스주의 문제를 다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황제는 신조를 성문화 하도록 감독 위원회를 임명하고 공의회에 출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감독들이 그 신조에 서명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신조가 탄생했습니다. 이 신조는 성령과 교회에 관한 세 번째 조항은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조항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두 번째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첨가됐습니다. 이 첫 번째 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조를 본뜬 것으로서 아리우스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표현을 덧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드신 창조자이시다.

그리고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다. 낳으신 자이시고 만들어진 자가 아니다.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 사람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성육신하셨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였으며, 하늘에 오르셨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는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황제는 모든 감독들에게 새 신조에 서명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교구 자리를 내놓고 망명을 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리우스파 감독들은 마지 못해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했지만,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니케아의 테오그니스 두 사람은 서명을 거절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서명을 거절하자 황제와 다른 감독들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세비우스와 테오그니스 모두 매우 영향력 있는 감독들이었고 모든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이 신조에 서명하지 않으면 이 문제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의회가 폐회될 때까지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니케아 신조는 동방의 두 유력 감독들이 주장한 교리를 이단으로 정죄하다고 문서화했고, 이 신조는 또 다른 이단 사벨리우스주의에 문을 열어주는 동시에 실제로 사벨리우스주의를 주장했던 감독을 승리자 중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셈이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교회역사학자 곤잘레스는 “니케아 신앙형식 그 자체에는 여전히 커다란 모호성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한국개신교회 안에 익숙하지 않은 에큐메니컬 공의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처: http://www.mytwelve.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08

“이제 당신 아버지의 유골은 가져가 해. 그러나 이 신주는 그냥 못 줘 해. 당신 아부지 죽어 했을 때, 우리 쌀람 이 신주 모셔했어. 그러니 거저 못 줘 해. 돈 없으면 데리고 온 아들이라도 내 놓아 해.“
아버지의 유골을 찾으려고 재산을 다 팔아 마련한 돈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수 천 리 길을 찾아온 조선인은 할 수 없이 울부짖는 아들을 흉측한 중국인에게 넘겨주고 나무로 만든 신주를 받아 품에 안았습니다. 아들은 어디엔가 노예나 종으로 팔려가겠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신주라는데 아니 찾아갈 수가 있습니까? 목숨보다 더 소중한 신주를 모시고 돌아가지 못 한다면 죽어서도 조상을 뵐 낯이 없으며, 천추에 씻지 못 할 죄가 되는 것입니다.

고려말기 주자학, 성리학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유교는 아름다운 충효사상과 삼강오륜 도덕기준을 뿌리내리게 하였고,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성리학자 주희가 만들어낸 제사법이 들어와 처음엔 궁중이나 귀족들간에 행해지다가, 조선조가 시작되면서 온 나라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고조선이나 삼한시대, 그리고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제사풍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제사는 하늘과 천지신명에 대한 것이었고 우리민족의 시조라는 단군도 이러한 제사장이었다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조상제사는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이렇게 최소 여덟 분의 기제사와 설, 한식, 추석까지 합쳐서 일 년 내내 정신없이 돌아와 우리민족의 가난한 살림살이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중하고,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사는 참 희한한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은 못 먹어도 제사는 차려야 했습니다. 남자들의 일, 특히 사대부의 일이란 게 제삿법, 풍수지리 따지는 게 전부였습니다. 정작 중국인들은 안 하는데 우린 참 열심히 했습니다. 종묘 제삿상에 굴비대가리를 동편으로 놓느냐, 서편으로 놓느냐를 놓고 피를 부르는 당파싸움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베옷 입고 머리 풀고 삼 년 동안 곡하는 것이 또 효도였습니다. 집안 살림살이꼴, 사람꼴, 나라꼴이 말이 되었겠습니까?

동북아를 호령하던 기개의 민족, 중국인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게 했던 무서운 동이족, 이천년전에 이미 인도와 아라비아까지 바닷길을 내었고,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가락국 왕에게 시집왔던 우리민족의 역사는 순식간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대륙이나 바다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자손취급도 못 받는데 제까짓게 어딜 감히 갈 수 있겠습니까? 중국땅을 휘몰아치던 고선지 장군과 남지나해를 호령하며 인도양, 아라비아까지 세력을 뻗친 바다의 왕자 장보고가 어찌 다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중국인들 잠자리가 갑자기 편안해졌습니다. 조선사람들 제사법 한 번 가르쳐 주니까 끝내주는 거 있지요.
그리하여 영국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들이 지구를 돌아 신대륙을 발견하고 호주, 뉴질랜드와 필리핀, 남양군도를 다 삼킬 때까지 우리민족은 제사 땜에, 죽은 조상 족쇄 땜에 옴짝달싹, 백리길도 갈 수 없었습니다. 당파싸움에 멸문지화를 당하고, 오랑캐에게 짓밟히고, 일본에 나라 뺏기고 징용, 정신대 끌려가 욕을 당하고 죽기까지 말입니다.

참말로 조상의 영혼이 제삿상머리에 오기라도 했다면 억울하지나 않았겠습니다.
도대체 어쩌다 우린 이렇게 600년 동안 제사를 지내고 있었단 말입니까?
제사가 아니었다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한반도에 요 꼴로 묶여 있었겠습니까?
만주벌, 요동, 옛 고구려 땅의 회복이 왜 아니 되었겠습니까? 오스트레일리아나 미대륙을 우리가 발견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최소함 괌, 오끼나와, 대마도, 사할린 정도는 우리땅 아니었겠습니까?
아라비아까지 항해하던 장보고의 배, 최무선의 함포, 이순신의 거북선이 울고 있습니다. 만주벌판에 말달리던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인 주희가 지하에서 깔깔 웃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신도 섬기지 말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아닌 자에게 경배하거나 속이는 거짓 영들에게 절하는 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닙니다. 귀신은 다른 존재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니 아닙니다.
세상을 떠돌다가 제삿날 오는 것도 아닙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돌아와 제삿상을 받는다는 거짓말입니다.
제삿상머리에 달려와 좌정하고 절받는 것은 속이는 영들, 바로 그들입니다.
그래서 신주 앞에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조상의 영혼이 온다면 누가 절하지 말라 하겠습니까?

조상제사 때문에 만주벌을 호령하던 우리민족, 일본을 신하 삼아 칠지도를 하사했던 민족, 세계최고의 철기문화로 동북아를 떨게 했던 민족이 한반도로 오그라들고 몰락하고 침략 받고 짓밟힌 것이 너무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그래도 중국인 주희가 가르쳐준 조상제사를 21세기의 지구촌 문명세계에서 세계만방이 지켜보는 앞에서 계속해야 할까요?
이제 떨치고 일어나 세계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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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규모가 있는 예배음악사역팀의 경우에는 찬양인도자와 뮤직 디렉터가 따로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 소 교회의 경우 찬양인도가 뮤직 디렉터의 역할을 함께 감당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취지에 따라 이번 글은 예배음악사역팀의 연습에서 실전까지의 과정을 순서의 흐름에 따라 정리하였습니다.

1. 찬양인도자의 역할

우선 찬양인도자의 역할은 교회가 지향하는 예배음악사역의 역할과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아트 오브 워십에서 그레그 시어는 예배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요. 말씀과 성찬을 중심으로 하는 의식적 예배, 주로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주제 중심적 예배, 찬양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경험적 예배로 구분합니다. 여러분의 보다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예배의 유형에 따른 찬양인도자의 기능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여러 예배의 요소가 이미 혼합(Blend)되어 다양한 형태의 예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찬양인도자와 각각의 교회의 특성과 필요에 맞는 방식으로 찬양인도의 방식을 선택하면 됩니다. 위의 표를 보면서 나만의 스타일과 교회에 맞는 가장 적절한 찬양 인도법을 한 번 떠올려보시면 어떨까요? 

다음으로는 연습에서 리허설까지 찬양인도자가 준비해야 할 몇 가지 주요한 사항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준비

1) 보컬

찬양인도자에게 보컬로서의 역량은 필수입니다. 다만 굳이 가수처럼 노래를 아주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부르는 이와 듣는 이가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주고받을 정도의 안정감은 최소한 필요합니다. 찬양인도자가 자신의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아도취에만 빠져 노래하고 있다면 예배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솔직히 단 몇 페이지의 글로 노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합니다. 여기에서는 우선 노래를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핵심 요소들에 대해서만 간단히 다뤄보기로 하겠습니다. 

① 말하듯이 노래하기

노래를 가르칠 때 말할 때의 소리와 노래할 때의 소리가 너무 다른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보통 처음 노래를 시작하시는 분들은 평소 말할 때와는 다르게 좀 더 멋지게 꾸며 노래하는 것이 더 잘하게 들릴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은 거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목과 어깨뿐만 아니라 배에도 과도한 힘을 주게 되죠. 
노래를 잘 하고 싶은 지나친 욕심은 자칫 노래를 망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사는 것처럼 노래하는 것이 가장 멋진 노래인 것처럼,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이 노래를 가장 잘 들리게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주세요.

② 호흡 훈련

노래를 부를 때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훈련은 호흡입니다. 호흡을 고르고 길게 들이쉬고 내쉬는 법을 제대로 익혀야 목소리가 떨리거나 혹은 음이 불안하거나 끝마무리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선 다음의 그림을 꼭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호흡을 먼저 코로 깊이 들이쉴 때 어깨와 가슴이 들리지 않고 코에서부터 광대뼈 살짝 위쪽으로 숨이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입과 코 안, 광대뼈, 미간 사이와 관자놀이 부분처럼 머릿속에 비어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 곳은 발성에서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그곳을 지나가는 느낌으로 머리를 뒤쪽으로 살짝 돌아내려와 성대(후두)와 척추를 타고 꼬리뼈까지 숨이 깊이 내려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위의 그림처럼 몸을 옆에서 보게 되면 커다란 물음표 모양의 곡선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이 곡선은 발성을 할 때도 굉장히 중요한 길입니다. 

그렇게 할 때 특히 옆구리 뒤쪽과 배꼽 아래 단전을 살짝 내밀어서 도너츠 모양을 만들어보세요. 숨을 들이쉴 때 배를 자연스럽게 내밀고, 숨을 내뱉을 때 내밀었던 배를 살짝 버티면서 풍선처럼 바람을 간직하다가 조금씩 내보낸다는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숨을 고르고 길게 내거나, 짧게 스타카토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반복하는 연습은 소리를 고르게 힘있게 만들어 노래가 안정적으로 들리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③ 힘 빼기

노래를 편하게 하기 위해선 몸에 힘을 빼야 합니다. 
특히 몸통의 상체부분인 명치 위에서부터 아래턱까지의 부분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게 되면 고음이 잘 안 올라가거나 목에 힘을 많이 주게 되어 쉽게 목이 쉬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특히 아래턱과 목, 혀 부분이 경직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정도가 심하면 명치나 가슴 쪽에 통증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곳에 힘을 빼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첫 번째로 실이 머리의 정수리 부분에서부터 천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실에 내 몸이 지탱하고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렇게 힘을 최대한 뺀 채로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어봅니다. 그러면서 입을 열어 ‘아’하고 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편안하게 소리를 계속 내봅니다.   

두 번째로 입술떨기인데요. 입술을 가볍게 다문 채로 살짝 입 속에 바람을 불어 떱니다. 그렇게 저음에서부터 고음까지 ‘부르르’하고 오토바이 소리를 내면서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흉내내봅니다. 그렇게 하면 특히 턱과 입술 쪽에 들어가 있는 불필요한 힘이 많이 빠집니다. 

세 번째로 나무젓가락 두 개를 준비합니다. 쪼개지 않은 채로 각각의 나무젓가락 손잡이 부분을 양쪽 어금니 안에 넣어 세운 채로 물어봅니다. 그렇게 턱을 고정한 채로 글을 또박또박 읽는 연습을 해보세요. 턱에 들어가 있는 불필요한 힘을 뺄 수 있습니다. 

④ 발성

발성은 노래 연습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요. 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몸의 울리는 부분이 다릅니다. 저음일 때엔 가슴이 울리고, 음이 올라갈수록 위쪽으로 울림이 올라가서 고음일 때는 머리 위쪽이 울려야 합니다. 가슴을 울리는 소리를 흉성, 입과 코 중간 정도를 울리는 소리를 중성, 머리를 울리는 소리를 두성이라고 합니다. 한 곡의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이 세 가지의 소리를 음의 높낮이에 따라 모두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리를 앞으로 크게 뽑아내려고 하다보면 저음일 때 소리를 지나치게 누르거나 고음일 때 지나치게 소리를 힘을 주면서 쥐어짜게 됩니다. 아까 설명 드렸던 것처럼 몸  옆으로 그려지는 커다란 물음표 모양의 호흡의 길을 상상해볼까요? 그 길을 따라 몸을 울려 소리를 낸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면 발성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⑤ 워밍업

찬양인도를 하다보면 처음엔 목이 잘 풀리지 않았다가 중간 정도 지나서야 노래가 오히려 더 나오고 목이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찬양인도 전에 제대로 워밍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래하기 전에는 반드시 30분 정도 워밍업을 해줘야 합니다. 그것은 목을 잘 관리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방법은 아까 설명을 드린 호흡과 힘 빼기, 발성 훈련 등을 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찬양을 많이 부르는 것은 단순히 기능으로서의 준비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최고의 준비입니다. 반복적으로 찬양을 부르면서 메시지를 묵상하게 될 때 우리는 많은 유익을 얻게 됩니다. 

2) 멘트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실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갑자기 특별순서를 맡아 노래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리나케 노래를 한 곡 골랐는데 문제는 멘트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멘트를 너무 쉽게 생각한 나머지 인사말만 대충 하자 싶어 준비되지 않은 채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래의 간주가 생각보다 꽤 길었던 거였습니다. 간주가 나오는 동안 가만히 서 있기 민망한지라 예상에 없던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꺼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간주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데도 멘트가 마무리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이 급해지니 저 자신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 꼬여버렸습니다. 결국 노래가 다시 시작되기 직전에 저는 이렇게 멘트를 급히 마무리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부분은 여러분이 알아서 생각하시고~ 오~(노래 가사)”

저는 그 이후로 단 한 두 문장을 멘트 해야 할 때도 항상 메모해서 외운 뒤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한 동안 그 사건은 저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저는 멘트를 열심히 준비하게 되었고, 그런 습관은 저의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멘트를 철저히 준비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발생하는 긴급 상황이 생겨도 그에 대한 적절한 메시지를 마음속으로 빠르게 정리하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됩니다. 

멘트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도입부에서는 원래 준비한 메시지와 현장의 분위기를 함께 연결해서 30초 이내로 하나의 스토리를 빠르고 짧게 만들어 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멘트는 곡과 관련된 간결한 내용이 좋습니다. 지나치게 가사를 많이 불러주는 식의 멘트는 회중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니 곡의 순서나 분위기 전환을 위한 정도의 역할로 절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멘트는 설교가 아니라 찬양으로 들어가거나 나가게 하고 다시 기도로 들어가게 하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구체적인 음악 연습은 앞부분에서 이미 다룬 앙상블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3. 리허설 

1) 반드시 모니터를 준비하세요.

연습이 끝나고 무대에 올라 리허설을 잘 이끄는 것도 찬양인도자에게는 중요한 임무입니다. 가장 먼저 모니터 스피커와 영상을 체크해야 합니다. 잘 듣고 잘 보는 것이 좋은 인도와 연주를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특히 모니터스피커는 반드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니터스피커 없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거울 없이 화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악팀과 회중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장비는 바로 모니터스피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리더의 목소리에 늘 귀를 기울이세요.

무대에서 이끌어가는 책임자가 없다면 그곳은 신호등이 없는 도로와도 같습니다. 혹시 따로 무대감독이나 연출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찬양인도자가 그 역할을 맡아 전체적인 진행을 해야 합니다. 찬양인도자의 진행에 따라 엔지니어가 음향을 체크하고, 밴드 리허설이 전체적으로 조절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인도자는 리허설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전체 순서가 어떻게 진행될 지를 미리 계산해야 합니다. 
자칫 한 파트에서만 시간이 많이 허비되어 결국 전체적인 체크가 다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배가 시작되지 않도록 우선순위를 잘 세워 리허설을 이끌어야 합니다. 

특별히 싱어들은 항상 자신이 예배 시에 가장 잘 눈에 띄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리더가 멘트를 할 때는 리더를 향해 시선과 마음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리더가 회중을 향해 선포하거나 반응을 요구할 때 싱어들은 리더의 말에 능동적으로 집중하고 반응하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또 기도와 찬양이 더욱 풍성하고 깊어질 때에는  너무 획일적인 모습보다는 각자가 마치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예배해야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싱어나 연주자들은 우리의 무대 위에서의 모습이 또 하나의 예배임을 기억하고 섬김에 임해야 합니다.  

3) 음정은 건반소리에, 리듬은 드럼소리에 맞추세요.

악기 연주자 중에서는 찬양인도자 외에 음악 전체를 이끄는 밴드 마스터가 필요합니다. 어떤 악기가 꼭 밴드 마스터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다만 음정에 관한 부분은 건반이 주로 맡고, 리듬은 드럼이 주로 맡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 중간에 음정을 튜닝해야 할 경우가 생길 때 기타나 다른 멜로디 악기의 음정은 건반에 맞추고, 리듬은 드럼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악기팀은 특히 연주할 때 서로 혼란이 왔을 때 이런 기준에 맞춰 빨리 제자리를 찾아 연주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악기 연주자들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가능하면 입으로 함께 찬양을 부르며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음악적인 기술에만 함몰되지 않고 메시지를 묵상하면서 예배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4) 한 번의 녹음은 열 번의 연습과도 같습니다.

요즘엔 굳이 좋은 음향기기를 따로 구입하지 않더라도 노트북이나 핸드폰 등으로도 간단히 녹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녹음은 특별히 리허설과 예배실황 이렇게 두 번 정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녹음을 통해 연주나 사운드 상태를 더 정확히 체크하고 수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녹음은 팀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5) 마이크 사용은 어떻게 할까요?

 마이크를 손에 쥘 때는 항상 위쪽에 동그란 헤드를 쥐지 않고 가운데 부분을 잡아야 합니다. 특별히 마이크와 입과의 거리가 중요합니다. 마이크를 입에서 너무 멀리 떨어뜨리면 고음 부분만 얇고 소리는 작게 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 가까이 대면 저음만 크게 들리고 소리는 둔탁하고 크게 들리게 됩니다. 마이크를 입에서 살짝만 떨어뜨려 45도 정도의 각도를 유지하면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모두가 같이 마이크를 공용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마이크에 구취가 심하게 베여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각자의 마이크를 정하거나 살균이나 탈취제 등을 사용하는 센스가 필요하겠죠? 
그리고 마이크 케이블은 아무렇게나 감아놓으면 거기서 문제가 생겨 사운드에 잡음이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항상 깔끔하게 케이블을 감아서 관리하는 것이 잡음이 없는 사운드를 유지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4. 최종 리허설 진행 순서

1) 무대 동선과 자리, 마이크 번호와 자리 점검

예배음악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무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하는 곳은 단지 교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이기도 하며, 또한 예배음악사역 팀에게 있어 예배는 잘 준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을 위한 공연이기도 하기 때문에 무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격적인 음향 체크가 들어가기 전에 무대로의 출입을 위한 동선을 체크해서 등장과 퇴장 시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섬김이들의 명단이 나오면 각자의 자리를 미리 체크해서 차질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고 마이크 번호는 꼭 마킹을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리허설이 끝난 후에 싱어들이 자신의 마이크를 서로 헛갈리게 두고 퇴장하게 되면, 나중에 케이블이 뒤엉키거나 다른 마이크를 들고 노래해서 힘들게 한 리허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무대 세팅을 미리 그려놓고 리허설을 진행합니다. 

2) 리더 마이크 점검

사운드 테스트가 시작되면 엔지니어는 가장 먼저 전체 스피커를 체크하기 위해 좋은 음질의 음악을 틀어서 최선의 사운드 EQ를 조절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리더 마이크를 먼저 테스트해서 찬양인도자가 전체적으로 리허설 진행을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합니다.   

3) 악기 점검

악기를 테스트할 때는 보통 “드럼(킥→스네어→하이햇→전체리듬) → 베이스 → 건반 → 기타 → 나머지 악기”의 순으로 하게 됩니다. 
만일 음향 어시스턴트가 있다면 무대에서 함께 체크하면서 음향 엔지니어와 무대 위의 맴버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중간 역할을 해줍니다. 하지만 메인 엔지니어만 있는 경우엔 각자 자신의 악기에 대한 피드백을 할 때엔 최대한 엔지니어에게 정중히 표현하거나, 찬양인도자와 보컬 디렉터와 악기 디렉터가 의견을 취합해서 소통의 혼선이 없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인 사운드에 대해서 피드백을 하고 싶을 때엔 사전에 미리 엔지니어에게 정중히 동의를 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중으로 나가는 스피커 사운드에 대한 책임은 1차적으로 엔지니어에게 있기 때문에, 엔지니어와 사전 동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드백을 할 경우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무대 위에서의 모니터링은 전적으로 음악팀에게 결정 권한이 있기 때문에 엔지니어는 음악팀의 모니터 피드백과 요청에 최대한 수용하고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껄끄러운 관계 중에 하나가 바로 엔지니어와 예배음악사역 팀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상호간의 이해를 전제로 사전에 소통의 질서를 지혜롭게 세우는 것이 엔지니어와 음악팀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4) 싱어 점검 

악기가 끝나면 싱어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리허설이 진행될 때 싱어는 반드시 실제 예배 때에 부르는 목소리의 크기로 노래를 부르면서 음향을 체크해야 합니다. 부끄러워서 목소리를 작은 소리로 내면서 음향체크를 했다가 실제 예배 중간에 갑자기 고조되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게 될 때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다른 파트의 멤버들도 당황하게 됩니다. 
제대로 소리를 내어야 개인의 목소리가 저음이 많은 편이지, 날카로운 편인지 등의 성향이 미리 파악되서 엔지니어가 여러 상황에 즉각 대처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전체 파트의 소리를 각자 맞춘 후에는 악기와 싱어의 전체 소리의 균형을 잡고, 혹시나 잡음이 생기는 곳이 없는지를 세세하게 체크합니다. 

5) 연습

가끔씩 어떤 팀은 무대 리허설 때에 전체 곡을 다 연습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전에 준비가 미흡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음악 연습은 반드시 음향 리허설 전에 어느 정도 다 마무리가 된 상태로 무대에 올라와야 합니다. 음향 리허설은 말 그대로 전체 음향을 체크하고 나서 전체 콘티의 주요 부분들만 따로 선별해서 간단히 연습하며 최종적인 소리를 다듬는 작업입니다.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서로 가진 악보가 혹시나 틀린 부분은 없이 다 준비되었는지 가사, 코드, 리듬을 점검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곡이 시작되는 Intro(전주)에서 Verse로, 그리고 Verse에서 Chorus로 넘어가는 연결 부분의 코드 진행이나 Fill in(드럼이나 다른 악기들이 특별히 꾸며 넣어 연주하는 부분)을 체크합니다. 또한 곡 안에서 Key Up(한 키를 올려 부르는 것)과 같이 변화되는 부분을 맞추어 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정확히 코드와 리듬을 연주해야 할 섹션 부분도 마지막으로 맞추면서 다음 곡으로 연결될 때 미리 편곡된 코드나 리듬을 점검합니다.  

실제 예배를 진행하는 도중에 팀원들과 소통할 때 사용하는 수신호나 사인에 대해 숙지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Verse는 손가락 하나로, Chorus는 손가락 두 개, 브릿지는 손가락 네 개, 마무리는 주먹을 쥐고, 곡이 넘어갈 땐 손바닥을 가볍게 뒤집는 식으로 수신호를 주고받아도 좋습니다. 물론 적절한 멘트로 곡의 순서를 팀원들에게 알려도 됩니다. 
그렇게 연습이 마무리되면 리더는 연습을 마무리하는 전 후로 전체 곡의 순서나 느낌을 다시 한 번 팀원들에게 설명해주고, 보완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한 후에 사역을 위한 기도로 리허설을 마무리합니다. 
리허설은 예배 시작 전에 너무 급하게 마치지 않도록 시작 시간 전에 여유를 두고 마무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론

리허설을 아무리 잘 준비해도 예배 중에는 한두 가지 이상 크고 작은 실수가 항상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 대다수의 팀원들은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틀리지 않기 위해 많은 긴장을 하고 예배를 시작합니다. 찬양인도자는 그런 팀원들의 마음을 미리 이해하고 전체 팀원이 너무 경직되지 않도록 적절한 편안함을 가질 수 있게 배려해야 합니다. 기술적인 이야기보다는 예배의 마인드와 격려와 응원의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로서 팀원들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음악은 생각하는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익혀진 대로 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충분히 연습한 이후라면 염려보다는 몸의 기억에 맡긴다는 열린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단언컨대 연습한 것 이상으로 음악을 잘 하려고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음악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보면 오히려 음악을 하는 데 방해요소가 되어서 음악에 지나치게 힘을 주게 되거나 몸 뿐만 아니라 음악까지 경직되게 만듭니다. 
연습한 만큼 음악이 나오면 감사한 것입니다. 혹시 연습한 만큼 음악이 나오지 않으면 보완할 부분이 있으니 그저 그 숙제를 다음에 잘 풀면 됩니다. 
음악은 대결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어제의 나를 돌아보고 조금 더 나은 오늘의 음악을 잘 연주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음악을 더 건강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출처: http://www.mytwelve.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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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포렌식과 칭의

 요즘 세간에 자주 듣는 용어 중에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이란 용어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포렌식이란 용어가 칭의를 정의하는 용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거 같다.

포렌식은 포럼과 퍼플릭의 합성어로 공적인 재판 혹은 법의학적 용어를 일컫는다. 사건 현장에서 범인은 사라졌지만 현장에 남은 증거를 통해서 사건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칭의를 흔히 법정적(forensic)이다고 말할 때, 단순히 법률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과거의 영역, 초월의 영역에 대한 증거가 여기까지 남아 있다는 의미다. 칭의는 원래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법정의 선언이라 초월적이기에 경험되지 않으며 과거 역사 현장의 사건이기에 오늘 우리에게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나 법정적이라는 이 용어는 단지 경험되지 않음만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은 아니다. 범죄가 경험되지 않지만 범죄 현장이 범죄를 증언해주는 것처럼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서신 사건과 역사상 빌라도에 법정에 서신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유추적인 증거를 남긴다. 마치 디지털 증거들이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지웠음에도 그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역사에서 증발해버린 현실이 오늘 우리에게 증언을 하고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이며 이것의 신학적 상승은 하늘의 법정의 사건이다. 우리에게 계시적인 증거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성화와 함께 실제적인 증거가 신자의 내면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칭의가 법정적이라고 할 때는 두 가지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이것이 우리 경험을 넘어선 초자연적이며 과거 역사의 일이며 그리스도가 겪으신 일이라는 점이다. 둘째, 그 구원 역사의 현장은 우리에게 증거를 남겼다. 마치 포럼의 토론과 공적 영역의 토론처럼 백주 대낮에 모두가 볼 수 있게 그 증거를 남겼으며 보는 자는 복이 있으며 귀는 있는 자는 듣게 될 것이다.

이 공적 영역의 증언이 우리 내적 증언과 역사로 되살아나는 사건이 성화다. 그리고 이 성화가 없이 역설적이게도 이 칭의를 경험적으로 알 수 없다.


출처: http://repress.kr/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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