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필자는 우연히 어느 기독 싸이트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어떤 목사님의 칼럼 글을 읽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모 선교단체의 집회가 그 교회에서 있었다는 것이고, 집사님 한 분이 (아마도 그 선교단체를 도우시는 책임을 맡으신 듯) 그 선교사님과 발제자 목사님을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저야 늘 잘 먹으니 선교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드시죠, 선교사님, 뭘 드시고 싶으세요?” “회 ~ 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시더라고 한다.

목사님 자신은 “그래요, 그럼 여기가 좋겠군요” 하며 일식집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자 식사를 대접한다는 집사가 급히 길을 막듯이 서둘러 말하기를. “거기는 불편하니 설렁탕을 드시죠, 설렁탕 전문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하며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듯 말하며 앞장서 씩씩하게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그 발제자 목사님께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마음에 “저기요, 당신께서는 그냥 가세요, 선교사님 식사 대접은 내가 하겠소” 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집회를 앞두고 있어 꾹 참으며 뒤따라갔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설렁탕을 시켜 먹으면서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한쪽에 골라내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그 목사님을 보며, 눈치를 채신 집사님이, “어머 목사님께서는 설렁탕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물었고, 그분은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런 무례한 자신을 회개하거나 뉘우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집사님이 말장난을 했고 자기는 덩달아 장단에 맞춰 말장난까지 할 기분이 나지를 않는 것, 그 집사님의 말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란 것이다. 처음부터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인사치례나 할려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필자가 보는 시각은 그 집사님이 너무 안쓰럽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에, 자신이 후원하는 선교사님께서 집회를 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목사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싶은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고민 끝에 결정을 했겠지. “내가 아무리 어렵다곤 해도 현지에서 모처럼 나오신 선교사님 대접도 할 겸, 그 선교사님을 불러주신 목사님도 모시고 한 끼 대접을 하는 것이야.” 그래서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 집에서 눈을 흘길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그러나 겉으로 표시 낼 수야 있나? 명색이 선교책임 집사인데….꼭 한번은 대접을 해서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큰 마음을 먹고 초청을 했다. 두 분 음식취향을 물어보아야 예의이긴 한데,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간이 쿵덕거린다. “에이, 설마, 선교사님과 목사님이신데….비싼 횟집이야 가자고 하시겠어? 요즘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저…목사님들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교사란 분이 “횟집.”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급해진 집사님께서 부랴부랴 목사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설렁탕 좋아하시죠?” 너스레를 떨면서 설렁탕 집으로 모시고 가는 그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슬플 것인지… 식사가 나왔다.

선교사님과 목사님의 얼굴이 저녁 굶긴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부어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목사님은 보란 듯,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죄다 꺼집어 내어서 밥상 위에다 착착 쌓아둔다….

“목사님, 설렁탕 좋아하지 않나봐요.”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 것 같은가? 적어도 양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목사님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네.”라고 대답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집사님께서 처음부터 물어본 것이 ‘말장난’이란 것이며, 자신은 그런 말장난에 맞장구를 친 것이 억울해서 죽겠다는 요지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그 글을 읽는 내내…필자는 그 집사님의 가슴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의분(?)이 일었다.

성도는 주님의 양떼,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목동이건 목자건 주님의 양떼를 맡았으면 그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고, 약한 자 병든 자는 싸매어 주어야 하는데….주인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게시판에도 최근 연로하신 은퇴 목사님 한 분께서 종종 글을 올리시기에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환영인사 댓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그분이 올리신 글에 들어가 찬찬히 정독을 하던 중, 역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어느 유명한 강사님이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이며, 그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그 강의 내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신다는 것인데, 나쁜 뜻은 없으신 것 같고, 목사님들에게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성도를 섬겨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좋은 의도일테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기에...안타깝다. 그 내용 일부분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고, 그 부분은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교회 주인이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은 성도들이라는 답변 말고 장로가 주인인가? 목사가 주인인가? 묻는다. 곤란한 질문에 강사는 힘주어 말한다.

1. 목사는 목회적 명예의 주인, 장로는 사회학적 교회 살림을 맡은 주인,

2. 목사는 초청받은 임기제의 주인, 장로는 자생한 종신주인.

3. 목사는 대가를 받는 주인이고, 장로는 대가를 받지 않은 주인이다.

4. 목사는 장로 인사권이 없는 주인, 장로는 목사의 인사권이 있는 주인.

5. 목사는 언젠가 떠나야 할 주인, 장로는 영원히 그곳에 살 주인

결론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보면 목사는 교회학적 형식상의 주인이고, 장로는 사회학적으로 실질적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들은 장로들을 잘 섬겨서 목회 잘하라는 당부였다. 섬기는것이 몇배 섬김을 받는진리. 으뜸이 되는진리. 높은 자리에 앉는진리. 이 진리를 모르는 석두목사가 되지 말라.)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요 핵심을 말하자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와 목사란 것이다! 목사는 유급주인, 장로는 무급주인이란 이야기이며, 이것이 진리라고 역설하시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초년병 목사님이 그런 말을 지지했다고 하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러려니…할 수도 있겠지만, 긴 세월을 개혁교회 안에서 헌신봉사 하시다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제 은퇴까지 하신 어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놀랍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敎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1. 교회(敎會)

가 무엇인가?
믿는 자의 무리다. ‘에클레시아’란, “임금의 대관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임)

2. 교회(敎會)
는 누가 세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다. (마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교육시키셨고 (마 10:1-5, 16. 마 5:1-2), 70인을 조직하여 파송하셧다 (눅 10:1-2), 120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고, (행 1:15),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 회개역사( 행 2: 41, (행4:4) 5000명 회개역사, 남녀의 큰 무리들( 해 5:14), 이렇게 잠시,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도들을 불러모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3 교회(敎會)
의 주인 (소유주)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 교회의 소유주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고전 1:2, 고전 10:32, 고전 11:6, 고전 15: 9, 갈 1:13, 딤전 3:15)을 보면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명시해 두셨음을 보아 알 수 있다.

4. 교회(敎會)
의 머리는 누군가?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절 말씀).” (골1: 8절 참조).

5. 교회(敎會)
는 어디에 세워져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 16:18, 고전 10:4, 시 18:31 절 참조)

6. 교회(敎會)
는 누가 운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으로 친히 운영하신다. (슥 4:6,하박구 2:20절 참조)

7.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는 누군가?
그들은 교회(敎會)의 기구다.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엡 4:11-12) 주님의 교회를 각 직분대로 맡아서 섬기는 봉사자요, 일꾼, 청지기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우리가 이 청지기의식, 일꾼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청지기의식이라 함은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기에 여기서 재론하지는 않겠다.그러나 주님의 선한 일꾼들이라면 교회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일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시사 하늘에 오르셨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셨다. 세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엡 4:11-12절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꾼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선한 일꾼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일꾼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직분자요,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는 그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주인의식이 잘못될 때, 목사가 장로가 교회의 주인 되어, 성도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 할 것이고, 그런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서 성도들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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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을 말하는  기독교 신자 중에서 그처럼 중요하게 강조 있을?

 

 번째 질문 -------------------------------------------

 

진실을 말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제일의 성경적 리입니다. 현대 사회의   진실을 부주의하게 취급하거나 고의적으로   결과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에서 들의 정직함에 대해   있는 것은 개인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일입니다.

 

재정과  과정의 세계는 정직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무나   있기 문에사기나 오해가 생기지 도록,  합의  주로 문서로 성해  것을 하고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녀들의 말과 약속이,  약속을 입증하는 법률 문서 이도, 모든 면에서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하십니다.

 

진리가 ? 2   전에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늘날에도 문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실에 대한 절대  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쓰면서 정거리는  그러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실한 인은 그러한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갖을 것을 구합니다.

진실은 입증   있는 정한 사실일? 바르 동하는 것이나 또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자체는 진실함을 의미하나요? 진실은 사람마다 다른 것인가요? 진실은   믿지 아도 참된 것인가요?

 

진실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며, 황마다 다른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보편적인 진실을 아야만 하며, 현대 문화가 그것에 대해 논박할 때라도 그것을 하고, "사랑 에서" 그것을 어해야 합니다 (소서 4:15).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음성 문에  사람들이 수에 빠져  르침 따라니다. 백하게   있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을 조하신 조자께서 선언하시고 믿음과 행위의 도로서 우리를 위해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율법 책인 성경에 기록된 진리 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개인적이며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대해서 말할  아니라 그것에 의해 살도록 우리들에게 니다. 성경의 진리는 사실적일  아니라 도덕적입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입니다. , , 관계,  , 그리고 심지어 개인의  가운데서도 우리들은 위선을 보며 공공연한 결의가 정직과 신으로 보입니다. 위선은 진실과 직함의 외면만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가면은 함과 진리의 용을 숨깁니다. 위선은 실제적인 삶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를  라도

으로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염려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위선은 이기적인 행동  습관이 비밀러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 으로는 하나님께 신하는 것처럼 미는 것입니다.

 

정직은 진실과 정직한 행동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여는 것이나 직하게 말하는  말하는 사람에게    에라도 스스 진실함을 합니다. 약속  약을 지키는 것은 정직의 행위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것은 정직과 진실에 대한 (名望)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지적인 정직함은 마음   직하고 있는 개인적 의견 될지도  그러한 모든 진실에 대해서 까지도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성실함은 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수님은 나다나엘  속에 사한 것이   사람”(요한복음 1:47)이라고 말씀하습니다. 사람은 정직하지 더라도 으로만 정직해 보일  있습니다. 진실로 정직한 사람은 진리와 함께 하며 (고린도전서

13:6) 불의와 위선에 대해서는 화를 내며 슬퍼합니다.

 

사기는 오직 세상에서만 찾아볼  있는 정직함  립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 바울이  당시에 믿는 자들에게   도록 권면해야만 했다면, 우리는 우리들이  신자들을 대할   정직하게 행하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연합 그것을 합니다. 너희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아니하? 너희  행하고 속이는.  너희 제로다.” (고린도전서 6:7,8).

 

마가복음 10:19  기록된  청년에게 하신 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계명을 아나니 인하지 말라, 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증거 하지 말라속여 하지 말라,  모를 공경하라 였느니라.”  5, 6, 7, 8, 그리고 9 계명은 모두 “ 하지 말라 하는 계명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증거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관심사: 

 

어떤 선의의 마음을 가진 기독교인이 약성경에서  말했 것이 나중에  결과를  주었던 사람에 대한  지적합니다. 이러한 부터 그들은  말하는 것이 용되 예외의  있다고 결론을 습니다. 이러한 결론을 받침해주 로서 사적인 사건에 기초를     인용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하는 사가 찾아와서  고소된 사람이나 가족들에 대해서 물을  다른 사람의 생명 호하는 것이  일이 닐까? 성경은 계명에 대해서 외의 경우를  주지  있습니다.

 

짓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말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못된 이기적인 이유를  것을 북돋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못에 대해 주어 하는 형벌 피하는 것은  상대방 사람에게도 생명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종류 정직함을 정당화시키는 교활한  우리들의 사회의 심각한 재해인  상대주의(상대론, relativism) 황윤리(situational ethics) 했습니다.

 

교회에서 특별  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의 성실함과 정직함입니다. 령님을  위한 노력으로, 혹은 지도자로서  사람의 (名望) 높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간적인 방법 사용합니다. 적인 형상이 령님에 인도함을 받은 상으로 표현될  진실은 태롭 니다. 모든 영적 지도자들 바울과 함께 마음으로 우리를 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하지 ,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 일이 없노 라고 증거   있어야 합니.

기독교인은 말과 행동으로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진실함에 대한 본을 보이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  첨부: 상대주의 - 절대적으로 바른 진리 있을   바른 것은 그것을 정하는 기준 의해 해지는 것이라는 주장.

 

상황윤리  1960  말에 겨난 용어로서 보편적인 윤리 규범 정하면서, 구체적인 상황 처한 개인 자신의 윤리적 당위(當爲) 스스로의 직관을  식별해야 하거나 윤리 규범  그대로 따라야 다고 주장하는 윤리 학설이다. , 절대적인 리의 윤리를 따지기 보다는  상황 따라서는   없었다는 것을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기 합리화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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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에서의 옷을 입고 염소털로 손등을 덮고 염소고기를 손에 들고 떨면서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갔어요.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라는 게 들통나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은 야곱의 손을 만져보고 옷 냄새를 맡아보고 완전히 속아 넘어갔어요.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니 에서로구나.” 그리고 염소고기를 먹고 야곱을 축복하였어요.

우리가 천국 가는 것도 하나님 속이기예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어린양의 그 피를 들고 두려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속아주실 거예요.
속아주시기로 작정하고 아들을 내어 주셨으니까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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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안 보입니다. 전기(電氣)도 안 보이고, 자력(磁力)도 안 보이고, 전파도 안 보이고, 힘, 에너지, 중력, 인력(引力)도 안 보입니다. 우리는 그 안 보이는 것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명도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 보이는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바이러스로부터 모든 동식물, 거대한 고래까지 생명으로 삽니다. 이 지구, 온 세상이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생명이 무엇일까요? 전기작용? 물리학적 현상? 화학작용?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이 무엇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낼 수 없고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생명 한 조각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 또한 영적세계에 속한 것일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생명이 무엇일까, 내가 죽으면 이 생명은 어디로 가는 걸까, 오늘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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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이후를 알 수도 없고 죽음에서 다시 돌아올 수도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며 일평생 매여 종노릇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죽을 생명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셔서 십자가에 몸을 깨뜨려 흘려주신 영원한 새 생명으로 바꾸는 것,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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