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형의 집에 있던 아들 성민이를 찾아와서 단칸방에 누워 있자니 정말 모든 것이 한심했다.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정신, 육체 훈련을 받고 나온 나는 삼청교육대 훈련으로 인해 사회의 어느 부분에도 소속될 수 없었고 오히려 대인 기피증마저 생긴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가운데는 죽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정신적인 공황이 왔다.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고 조바심이 늘 나를 괴롭혔다. 집중을 할 수 없었고 늘 안절부절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사회의 냉대는 물론 친형님들을 비롯한 가족들의 눈초리도 따갑기만 했다.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일에 대해서 억울하게 생각하며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어머님조차도 혹독한 대가를 치뤘으니까 이제는 제대로 정신차리고 잘 살아보라는 말만 하실 뿐이었다.  
  
아무것도 내 의지와 생각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점점 무기력한 장애자와 같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순간순간 나를 이렇게 만든 삼청교육대의 조교들과 전두환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삼청교육대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데 나는 2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정신적인, 또는 육체적인 불구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인생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역사,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역사의 많은 부분은 인권 유린으로 점철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고, 존중된 시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인생을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으로부터 간섭과 통제를 받지 못하는 인생은 결국 악의 세력으로부터 간섭과 물리적인 통제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영계에서는 한 영혼을 간섭하기 위한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엡 6:11).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의 영역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받게 되길 바래서 탄식하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롬 8:26), 선한 길과 악한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다.  
  
일단은 나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인정하는 그 영접의 행위가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근대사 가운데 한국 민족은 악의 세력들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고 생명의 존엄성이 한순간에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운 예가 바로 삼청교육대 사건이며, 일제시대 일본 군인들에 의한 강제 징용, 정신대, 인체 실험 등의 만행이 그에 속한다. 그리고 구 소련제국의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되었던 30여만 명의 재소 한인 동포들의 운명도 결국 악의 세력들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철저히 유린당한 대표적인 경우라 말할 수 있다.  
  
스탈린에 의한 강제 이주의 역사는 한민족의 눈물의 역사다. 일제 치하를 벗어나 만주와 연해주 쪽에 거주하고 있던 30여만 명의 조선 동포들은 1937년 겨울, 단 열흘 만에 살고 있던 지역에서 기차에 실려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중앙아시아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지는 비운을 당했다. 본인들의 의견은 온데간데 없었다. 타인의 결정에 의해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당시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누구 한 명 항변조차 할 수 없었고 20여 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중앙아시아 철도를 달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소금 사막의 땅에 그야말로 인간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스탈린 정부는 이들의 생존 여부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단지 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일본의 연해주 쪽 세력 확장을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한민족을 그 땅에서 쫓아냄으로써 자기들이 우려했던 일본 비밀 스파이들이 다 사라지게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나는 삼청교육대에서 본인의 의지, 행실에 관계없이 폭력에 의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유린당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역사의 폭력에 의해 70여 년 전 중앙아시아 땅에 버려졌던 불쌍한 우리 고려인 후손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소련이 만주, 연해주 한민족 강제 추방이라는 인권 유린의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일본은 한국을 식민통치하면서 한국의 젊은 청년들을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젊은 처녀들을 군 위안부인 정신대로 강제 징용해서 한민족의 인권을 가장 처참하게 짓밟았다. 그런가 하면 군사 무기를 개발하면 서 한국사람들을 인체 실험용으로 잔인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몇 세대를 지나와도 일본이라고 하면 먼저 불편한 민족 감정이 앞서게 되는 것도 모두 이때 당한 억울한 감정들이 한민족의 핏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용 당했다가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사할린 땅에 남겨진 5만여 명의 한인 동포들은 부조리한 역사의 희생자들이었다. 일제시대에 강제 징용된 사람들의 삶도 처절한 것이었다. 주로 군수물자 공급을 위해 탄광 노동자, 또는 나무채벌공 등 육체적으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물론 임금 지급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끼니마다 식사를 제때 공급받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은 영양실조와 과로로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싸늘한 시체로 죽어갔다. 강제 징용된 사람들에게 인간의 가치, 개인의 의지는 이미 사전에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곳에는 일본군의 끊임 없는 노동력 착취와 개 다루듯 업신여기는 인간적인 모욕만이 넘쳐흘렀다. 한국 민족의 핏속에는 일본에 대한 원한과 철천지 원수처럼 미워할 수밖에 없는 반일 민족감정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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