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율법과 복음 서론 / 홍인규 교수

 

 

서론

 

율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율법은 바울의 신학과 윤리의 여러 주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다.

 

바울 서신에서 율법이라는 주제는 극도로 복잡한 문제이다. 쇠프스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도 "바울의 신학에서 가장 난해한 교리적 이슈"일 것이다.1 그 난점은 주로 바울의 율법관에서 나타난 외견상의 모순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을 부정적으로 말한다.

(1) 칭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갈 2:16; 3:11; 롬 3:28).

(2) 율법은 약속보다 열등하다(갈 3:15 이하).

(3) 율법은 범법함을 (생산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갈 3:19).

(4) 율법은 죄를 더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롬 5:20; 7:5, 8-13; cf 고전 15:26).

(5) 율법은 생명을 공급해 주지 못한다(갈 3:21).

(6)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갈 2:19; 롬 7:4).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갈 3:25; 5:1 롬 7:6).

(7)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롬 10:4). 등등.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1) 율법은 거룩하고(롬 7:12), 영적이다(롬 7:14).

(2) 율법은 지식과 진리의 (구체적) 표현이다(롬 5:20).

(3) 계명은 생명을 위한 것이다(롬 7:10; cf 갈 3:12).

(4)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롬 3:31)

(5) 모든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갈 5:14; 롬 13:8, 10; cf 갈 6:2; 롬 8:4) 등.

 

그러므로 지금까지, 특히 지난 수십년 동안에, 바울과 율법에 대하여 막대한 양의 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이와 같은 엄청난 수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의견의 일치는 이루지 못하고, 각양각색의 상이한 견해들만 양산해 내었다는 것은 불행한 알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여기서 모든 의견들을 소개하지 않겠다. 다만 현재까지 제안된 해결책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들만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2

 

1. 잘 알려진 대로, 수많은 학자들은 율법주의적으로 사용된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을 구분하거나3,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분하거나4, 또는 모세의 토라와 메시아의 토라 사이를 구분하여5 바울의 율법관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2. 어떤 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 불일치(inconsistencies)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진술들을 발전적인 구도(developmental scheme) 안에서 조화시키려고 한다. 드레인에 의하면,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압력을 받으면서 쓴 갈라디아서에서 자유방종주의자(libertine)로서 율법을 완전히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린도전서에서는 율법주의자처럼 보인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영지주의자로 기울어 가는 자유방종주의자들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고전 7:19) "법적인 언어 형식"을 다시 도입한다.6 그러나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자유방종주의(libertinism)와 고린도전서의 율법주의를 결합시킨다. 이러한 종합은 바울 신학에 대한 균형 있고 중립적인 표현(자유방임주의도 율법주의도 아닌)이 나타나는 로마서에서 좀더 충분히 이루어진다.7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구원 능력은 부인하지만, 그것의 신적 기원(롬 7:22, 25, 8:7)과 믿는 자의 생활 속에서의 긍정적 역할(롬 8:3-4, 13:8-10)은 인정한다.8

 

휘브너도 비슷한 이론을 제시하는데 그의 기본 명제를 보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기록 사이에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율법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율법은 범법 행위를 유발하기 위하여 타락한(demonic) 천사들이 주었으며(갈 3:19),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계명 외에는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갈 5:14).

 

이러한 과격한 입장은 예루살렘 교회의 격렬한 바난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것 때문에 바울은 그의 율법관을 재고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로마서에 나타나 있다. 로마서에 보면, 율법은 신적인 것이며, 그 기능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롬 3:20, 7:7)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로마서에는 모세의 율법과 사랑의 계명 사이의 대조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랑의 계명은 여전히 유효한 모세 율법의 요구 사항들을 요약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롬 13:8-10).

 

휘브너는 로마서 10:4을 주석하면서,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지만,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율법에 대한 육적 오용의 마침"이라고 하였다.9

 

빌켄스도 마찬가지로 바울의 율법 이해에 어떤 발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갈라디아서의 논쟁적 상황에서 바울은 율법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와 율법, 믿음과 율법의 행위, 약속과 율법 사이의 대조를 발전시킨다. 동시에 그는 교회를 이스라엘과 대립시킨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제시하면서, 율법은 믿음으로 폐지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취된다고 말한다(롬 3:31, 13:8-10).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심판 아래로 끌어 간다.10

 

3. 이와는 대조적으로 샌더스(Sanders)는 갈라디아에서 로마서로 직선적인 발전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는 로마서에서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 내적 긴장과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롬 1:18-2:29에서 바울은 우주적인 죄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2:14-15, 25-29에서는, 어떤 자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로마서 로마서 2장에서는 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율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해놓고, 5:12-14, 18에서는 율법이 없던 아담과 모세 사이의 시대에도 죄가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로마서 5:20-21과 7:7-13, 14-25에서 죄와 관련된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상반되는 세 가지 설명을 제시한다.11

 

센더스가 보기에, 이상의 모든 것들은 바울의 신학적 사유가 "곤경에서 해결로 나아가기보다는 해결에서 곤경으로" 나아가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12 다시 말해서, 바울의 율법관은 인간의 곤경을 분석한 다음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 데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이다.

 

레이제넨도 비슷한 노선을 취한다. 그러나 그는 샌더스보다 상당히 더 과격하다. 그는 "모순과 긴장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신학에서 항구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것들은 "바울이 개인적으로 신학적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들"이라는 것이다.13 비일관성이 포착되는 주요 영역은 율법의 개념과 지속적 유효성, 성취 가능성, 기원(origin) 그리고 기능이다. 레이제넨은 바울이 일관성 없는 율법관을 갖게 된 것은 선교 사역을 하는 중에 이방인의 율법관을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4. 던은 자신이 이전의 한 논문에서 제시한 논증을 사용하여,14 위에서 살핀 샌더스와 레이제넨의 해석에 불만을 표시하고, 그들은 모두 바울 서신들의 사회적인 정황 속에 충분히 파고 들어가지 못했고, 당시의 율법이 발휘했던 사회적 기능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던이 보기에 바울은 율법 자체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공격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구분하는 율법의 사회적 기능이다. "율법의 행위"라는 어구는 일반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게 이스라엘의 정체의 독특성에 날카롭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요구 사항들"을 가리키다.15 이러한 이유로 할례와 음식법, 안식일 준수가 "율법의 행위"에 대한 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기능을 제외하면, 율법은 계속해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사랑 안에서 성취된다. 

 

5. 위에서 언급된 바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들에 반대하여, 웨스터홈( Westerholm)은 루터의 바울 이해를 부활시키고자 한다. 그의 견해로는, 바울에게 있어 율법은 기본적으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세세한 요구 사항들의 총합"을 가리킨다.16 이 모세의 율법은 생명을 위하여 "행함"(doing)을 요구한다(갈 10:12; 롬 10:5; 레 18:5).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일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로 이해되어야 한다.17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대조시키고 있다. 웨스터홈은 계속해서,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대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의 교훈에 매달릴 의무가 없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위의 해결책 가운데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바울과 율법이라는 주제는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얻기 위해서 과학적인 탐구를 계속 요구하는 문제이다. 이 점에서 필자는 근래의 해석학 분야의 발전에 비추어 이 문제에 새롭게 접근해 보아야겠다는 도전을 받았다.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포괄적인 취급은, 그의 서신들 각각에 나타나 있는 율법에 대한 발언들을 전반적이고 철저하게 조사한 것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그 이유는 바울의 각 서신은 특정한 수사학적(rhetorical), 사회적 정황 속에서 기록되었고, 따라서 각각 그 나름대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율법 문제의 복잡성을 감안하여, 필자의 연구는 율법이 처음으로 취급되었던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18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이 서신에 표현된 바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심층적으로 파헤치려고 진지하게 시도한 적이 없었다.

 

본서는 7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제 1장에서는 갈라디아서의 표면 구조를 분석한다. 여기서 사용한 주요 도구는 강화 분석법(discourse analysis)이다. 그러나 고대 서간문 형식과 수사학적 구조도 참작할 것이다. 제 2장에서는 구조 분석에 의하여 드러난 주축적(pivotal) 진술들을 탐색하여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적 관점을 파악한다. 제 3장에서는 적대자들의 주장과 정체를 재구성해 본다. 갈라디아서의 구조와 바울의 신학적 관점으로부터 도출된 함의들(implication)이 이 작업을 위한 기준으로 활용된다. 이상의 3개 장이 제 1부를 구성한다.

 

이러한 예비적 고찰에 근거하여, 제 2부에서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어떻게 취급하였는가를 다룬다. 이것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 4장에서는, 갈라디아서의 "율법"(ν?μο?)은 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갈 3:21b, 4:21b)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세의 토라를 가리키며,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단위로 간주된다는 것을 간단하게 주장하려 한다. 제 5장에서는, 율법을 시내(Sinai) 언약의 의무로 보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으로 보지 않는다. 제 6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율법이 수행하는 기능을 조사한다. 제 7장에서는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룬다. 결론 부분에 가면,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대한 필자의 논의에 따르는 결과들이 요약된 형식으로 제시되고, 그 후에 바울과 율법에 대한 최근의 논쟁들과 관련 있는 몇 가지 함의들이 필자의 연구로부터 도출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논문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여러 가지 진술들을 좀더 명료하게 밝히는 데 기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홍인규 교수의 '바울의 율법과 복음'에서 발췌(13-20p)

각주 1

Schoep 1961:168.

각주 2

바울의 율법에 대한 최근의 논쟁들을 전반적으로 개관하려면, Moo 1987:287-307을 보라.

각주 3

예를 들면, Burton 1921:443-60; Cranfield 1964:43-68; Moule 1967:389-406; Ladd 1968:50-57.

각주 4

예를 들면, Haufe 1966:171-78; Kaiser 1983:307-14; Schreiner 1989:47-74.

각주 5

예를 들면, Davies 1948:71-72, 136-46; Longenecker[1964] 1976:128-32, 183-96.

각주 6

Drane 1975:65.

각주 7

Drane 1975:4.

각주 8

Cf. Drane 1974:167-78.

각주 9

Hubner 1968:148-49.

각주 10

Wickens 1982a:154-90; Wilckens 1982b:17-26

각주 11

Sanders 1983:74-75.

각주 12

Sanders 1983:150; cf. Sanders 1977:442-47.

각주 13

Raisanen 1983:11, 12.

각주 14

Dunn 1983a.

각주 15

Dunn 1985:531; cf. Dunn 1983a:107-11; Wright 1978:61-88.

각주 16

Westerholm 1988:108.

각주 17

Westerholm 1988:142.

각주 18

Cf. Cranfield 1964:62.

  1. Schoep 1961:168. [본문으로]
  2. 바울의 율법에 대한 최근의 논쟁들을 전반적으로 개관하려면, Moo 1987:287-307을 보라. [본문으로]
  3. 예를 들면, Burton 1921:443-60; Cranfield 1964:43-68; Moule 1967:389-406; Ladd 1968:50-57. [본문으로]
  4. 예를 들면, Haufe 1966:171-78; Kaiser 1983:307-14; Schreiner 1989:47-74. [본문으로]
  5. 예를 들면, Davies 1948:71-72, 136-46; Longenecker[1964] 1976:128-32, 183-96. [본문으로]
  6. Drane 1975:65. [본문으로]
  7. Drane 1975:4. [본문으로]
  8. Cf. Drane 1974:167-78. [본문으로]
  9. Hubner 1968:148-49. [본문으로]
  10. Wickens 1982a:154-90; Wilckens 1982b:17-26 [본문으로]
  11. Sanders 1983:74-75. [본문으로]
  12. Sanders 1983:150; cf. Sanders 1977:442-47. [본문으로]
  13. Raisanen 1983:11, 12. [본문으로]
  14. Dunn 1983a. [본문으로]
  15. Dunn 1985:531; cf. Dunn 1983a:107-11; Wright 1978:61-88. [본문으로]
  16. Westerholm 1988:108. [본문으로]
  17. Westerholm 1988:142. [본문으로]
  18. Cf. Cranfield 1964:62. [본문으로]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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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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