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를 용인하고 묵인하는 기독교인을 향하여

사회/정치 2017. 6. 11. 05:28

이 글은 동성애를 용인하고 묵인하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동성애 합법화의 저지선은 대개 관습적, 생물의학적, 심리학적, 법학적, 신학적 단계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심리학적 저지선이 무너짐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각종 친동성애 법안 개정과 발효에(동성애 결혼법, 차별금지법 등) 가속도가 붙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저지선은 교회와 신학일텐데, 도리어 일부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마치 영혼이라도 팔아먹은 듯 상황주의적 윤리로써 동성애 옹호에 나서고 있어 그 저지선마저도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을 마련하였다. 이 글의 원안은 본래 10여 년 전에 작성했던 것인데, 지난 2014 퀴어문화축제 당시 하도 해괴하여 다시 꺼내 손을 봐서 게시했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도리어 친동성애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더욱 위중한 시기임을 직시하고 내용을 좀 더 보강해 배포하는 바이다.

동성애 옹호자들이 성서 해석을 어떻게 그릇되게 하는지, 그리고 세속법의 상황주의적 변화와는 별개로 우리의 불변한 기준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였다. 공유할 만할 것이다.


이영진 기호와 해석
▲이영진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동성애자 축제인 '퀴어문화축제' 행렬 앞에 가서 드러눕다시피 하는 기독교인의 열정을 지지한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친동성애자들은 성경을 적극 인용해 가면서 변증을 펼친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신학적 마지노선이란 사실상 성서적 저지선을 말한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이 성서의 해석이다. 그들 역시 성서를 해석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행위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릇된 해석을 압도하는 주석이어야 기준(canon)을 빼앗기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반(反) 동성애 입장의 전통적 기독교인은 단지, '동성애자는 무조건 죽이라고 (성경에서) 말했다'는 식의 주석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동성애 옹호 신학에서 단골로 끌어다 쓰는 성서 인용과 해석을 우선 나열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박과 교정을 담되, 최소한 성경으로는 더 이상의 논박이 없도록 당대 사회적 배경과 함께 입체적 주석으로 정리해 놓을 것이다.


1. 동성애 옹호자들의 그듯된 성서 해석에 대한 교정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전통적 기독교인은 대부분 레위기 18장 22절,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혹은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창 19장) 또는 그와 유사한 한 레위인의 첩 이야기(삿 19장) 등을 토대로 해서 동성애를 다룰 것이다. 과거에는 "봐라! '죽이라!'고 했다!" 하면 사회에 먹혀 들어갔다. 아니 그렇게 선언하고 덮으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절들에 대한 동성애 옹호 입장의 변증은 이미 오래 전에 다 고안된 상태이다. 기독교 윤리학 대가인 퍼니쉬(V.P. Furnish)는 이 같은 금지법이 '동성애 금지법'이 아닌 '성결법'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동성애의 보호막이 돼 주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들으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해석으로 들리겠지만, 법의 프레임을 넓게 변화를 주거나 각도를 옮겨줌으로써 동성애 관련 기독교 윤리의 시대적 변화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그들이 '남자'를 끌어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천사'에 대한 음욕이었다는 식으로, 한 레위인의 첩 이야기(삿 19) 역시 특별히 동성애를 겨냥한 심판이 아니라 기브아인의 비열함이나 잔인함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식으로 그 동성애 경계를 무력화시켰다. 벌써 30여 년 전에 이런 신학적 타진은 끝낸 상태이고, 지금은 일반적 이해가 돼 버렸다.

이와 같은 그릇된 성서 해석들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동성결혼
▲ⓒ이영진 교수 제공


※ 위 목록들에 대한 반박이다.

1) 소돔이 범했던 죄는 명백히 동성애의 죄였다

'알다(ידע)'는 모든 경우에 성관계 은유를 표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창세기에서만 무려 120여 회 사용된 중에 거의가 성관계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특히 롯이 자기 두 딸을 손님 대신 내어주면서 남자를 '안' 적이 없다는 용례는 결정적으로 '성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창 19:8).

게다가 '알다'는 '사악한 일'과 동등선상에 놓여 있다(7절). 소돔 사람의 관심이 성적인 게 아니었다면 왜 소돔인을 달래기 위해 처녀인 두 딸을 제공해야 했겠는가? 자기 딸을 내어주는 문화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 대목은 본질적으로 손님 접대(Hospitality) 라는 고대의 전통을 강조하는 대목임을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소돔으로 오기 직전 이 손님들에게 접대의 전통(Hospitality)이 아브라함에 의해 극진하게 베풀어진 것과의 비교 맥락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전통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는 말씀의 기원이 된 맥락이다

2) 소돔의 죄인 이기심은 동성애와 연결되어 있다

동성애자들의 퀴어축제 행렬을 따라 다니며 성찬을 베풀어주는 '무지개 목사'들의 경우, 다음 구절을 인용한 피켓을 드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겔 16:49)".

이 본문을 통해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 범죄가 아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은 죄'였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아마도 저기서 지적하는 소돔의 범죄는 '동성애'가 아닌 '교만'인데다, 소수(의 약)자라 일컫는 동성애자를 배격하는 반 동성애 기독교인들이 마치 소돔 자신이라는 모션인 것 같다.

에스겔이 소돔뿐 아니라 사마리아와 심지어 예루살렘까지 연대된 죄로 놓고 있기에(겔 16:46, 49) 유다도 피할 수 없던 이 죄는(50절), 동성애가 아닌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은 죄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 19장의 전통적인 동성애 죄 견해에 대한 균열을 공략하려는 것 같다.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한 학자는 대표적으로 월터 짐멀리(Walther Zimmerli)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에스겔의 소돔에 대한 일련의 언급들은 가난한 자를 돕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성애 죄를 같이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정설이다(Norman Geisler). 비틀어 풀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동성애란 가난한 자들에게 발생하는 죄가 아니라, 주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존하는 동성애자 중에는 가난한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트렌드로 창궐한 뒤의 일반화이고 문제는 진원지인데, 에이즈(AIDS)가 동성애에서 다발로 발생하는 것처럼 동성애의 시원 지점은 절대 부유함이다. 가난한 자는 먹고 사는 생계 문제 때문에 성에 탐닉할 겨를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부자가 되려는 꿈에 대한 기대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행여 그 꿈이 깨질까봐 고도의 쾌락 같은 것은 들여놓지 않으려는 다소의 면역체계를 구축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라고 했던 것이다. 니체는 이것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불렀다.

이제 아래에서 보면 알겠지만 역사적으로 노예들에게도 동성애가 있었는데, 그것 역시 대부분 부자, 즉 주인의 유린과 착취의 형태를 띠고 일어났다. (동성애로 성적 결정권이 유린당한 것이다. 오늘날은 거꾸로 동성애가 자기 결정권이라고 한다. 스스로 노예이면서.) 따라서 '동성애'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은 죄'를 동일선상에서 보지 않는 이 자들은 참으로 옹색한 주석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소돔이 범했던 죄는 접대 전통의 소홀함·불친절만이 아니었다. 이기심의 죄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위의 피켓에 적힌 구절 바로 다음 절인 50절에 나오는("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가증함'은 앞서 동성애 죄를 적시했던 레위기 18장 22절("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에 나오는 '가증함'과 동의어이다. 소돔의 죄인 이기심은 동성애와 연결돼 있다.

3) 레위기 율법은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법이다

고대의 제사법이 개정되거나 철폐된 사례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조항의 현대적 개정 가능성을 타진하지만, 제사 및 의식법을 그렇게 동성애와 묶어서는 안된다. 구약에 정해신 식사 의례는 변경됐지만(마 7:18; 행 10:12) 동성애를 하지 말라는 도덕 명령은 신약에서도 거듭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롬 1:26-27; 고전 6:9; 딤전 1:10; 유 7).

4) 불임에 관한 유대 정서와 동성애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불임은 동성애가 나쁘다는 이유가 당초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독신자를 죄인이라고 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cf. 마 19:11-12; 고전 7:8).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 19:11-12)"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 7:8)"

5) 이성간 사랑이 동성애자에게 비정상적이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로마서 1장 26절에 나오는 '역리'는 범죄 용어가 아니라, 단지 '비정상'이라는 상대적 개념어라는 논리인데, 그렇지 않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순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안다. 그래서 떳떳하지 못해 숨어지내는 것이다.

오히려 친 동성애 신학에서조차 어찌 하지 못하는 가장 강력한 반동성애 코드가(레위기 법전이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바울의 이 로마서 1장 18-32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챕터와 결론에 가서 자세히 정리할 것이다.

6) 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가 아니라 친구애였다

요나단이 다윗 앞에서 옷을 벗었다는 것는 갑옷과 예복을 벗었다는 의미이며(삼상 18:4), 특히 그것은 세습 왕권의 포기와 권력 이양을 상징한다. 아울러 당대 남성들의 인사법은 입맞춤이었고, 과연 "다윗이 곧 바위의 남쪽 편에서 일어나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삼상 20:41)"라는 문맥이 성적 뉘앙스인지 의아하며, 게다가 다윗은 밧세바를 향한 강력한 이성애 욕에 휩싸인 바도 있다. 다윗과 요나단에 관한 구체적 변증은 다음 글을 참조할 것.

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가 아니야  

바울
▲사도 바울 동상. Statue of Saint Paul by Giuseppe De Fabris 1840 in front of St. Peters Basilica, Rome. ⓒ이영진 교수 제공


자, 다음은 동성애의 죄상에 관한 사회적 배경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로마서 1장 18-32절과 맞물려 있다. 바울이 구약성경의 '동성애자는 죽이라'는 강력한 율법이 있음에도, 도리어 그런 율법 조문은 사용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념할 것이다. 당시 이런 배경 때문이다.


2. 로마의 동성애

로마에 동성애가 만연했지만, 공식적으로 드러내 놓고 수용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공화정 당시에는 노예와의 관계 안에서만 성행하였고 연장자가 소년을 성추행하면 처벌을 받는 등 공식적으로는 다소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과도기까지 이어진 동성애는 제정 말기에 이르러 부부애가 강조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동성애가 위축 되었고, 스토아주의(금욕주의)에 의한 성윤리가 확산된 이후로는 출산 목적의 성관계만 허용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당시 많은 이교도들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 개종자들의 성 정체성은 복음 윤리와의 접목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고 보고된다(W. Neil).

죄의식 없이 문란한 이 같은 성 정체성은 천민계급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계급에 퍼져 있었는데, 초기 15대에 이르는 로마 황제 가운데 14명이 동성연애자였다고 전한다(W. Barclay). 심지어 동성애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만 독점한 게 아니라 셈족에게도 흔한 일이었다는 보고도 있다.

다음은 몇 가지 구체적 사료들이다.

1) 세네카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이자 AD 49년경 집정관을 지낸 세네카(Seneca, 4 BC-AD 65)의 「Moral Epistles」에는 당시의 사치하고 방탕한 사람들의 노예 착취에 대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개탄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술 시중을 드는 노예는 여장을 해야 하고 나이가 든 남자도 소년처럼 행동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다.... 그는 마치 여자처럼 수염을 기르지 못하고 머리를 이쁘게 빗어 묶어야 한다. 그는 밤을 새워가면서 주인이 술이 취해 골아 떨어질 때가지 술시중을 들면서 그의 주인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성의 놀이개가 되어야만 한다."

또 네로는 동성애뿐 아니라 생모 소 아그리피나와의 불륜 의혹에 이어 결국 그녀를 참살하고 처 옥타비아와 이혼한 다음, 포파이아와 결혼하기 위해 옥타비아를 간통죄로 살해하는 등 성적으로 가정 부도덕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2) 플루타크

아테네의 사정을 잘 알 뿐 아니라 이집트 여행을 한 적도 있고 로마에서 강연도 하였다고 알려진 전기 작가 플루타크(Plutarch, AD 46-120)는 그의 「Dialogue on Love」라는 저서에 등장하는 한 화자의 대사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포함시키고 있다.

"...만일 남성들과의 연합이 애인의 부드러움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남녀간의 사랑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합리적인 것이고 또 사랑에서 우정이 발전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남성들과의 결합은...(사랑과 생식을 관장하는 헬라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총애를 잃고 미움을 받을 것이다. ..."

3) 크리소스톰(Dio Chrysostom, AD 40-112)

도미티안 황제 통치 초기에 로마로 추방당했던 Dio는 그의 저서에서 "비록 여성들이 많지만 이 남성들은 음탕함과 불법을 통하여 남성들로부터 만들어진 여성들을 갖기 원하여 남성들을 거세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행한 종(Breed)의 인간은 여성 보다도 더 연약하고 더 여성다웠다"라고 전한다.

다른 곳에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유명한 사례로서 AD 67년에 네로는 그의 두 번째 아내 포파이아(Poppaea Sabina)가 죽은 후 그의 남자 애인 Sporus를 거세시켜 그의 이름을 Sabina라고 고치고 그와 정식 결혼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앞서 구약성서의 동성애 관련 구절들을 '성결법'이나 '학대금지'로 시계를 흐렸던 퍼니쉬(V.P. Furnish)는 세네카나 플루타크의 이 같은 동성애에 관한 평가를 단지 '착취'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에 대한 전형적인 금욕주의적(스토익) 반감이라고 표명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문구를 남기고 있다.

"그래서 이런 남성들은 좀처럼 정복하기 어려운 남성들을 자기 성욕을 충족시킬 대상으로 삼고 싶어한다. 이런 남성들은 젊은 남자들과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남성들과의 성적 유희를 즐기려고 한다. ..."

이상과 같이 로마의 보편적 문화였던 동성애는 말 그대로 보편적이었지만, 그것은 억제된 정당성 속에 성행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선진국 로마에 그같은 성 풍속과 성 관념은 왜 유행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의 문화를 그대로 받았던 로마로서는 자연스런 문화유입이었다.

▲Liberal MP calls for referendum on same-sex marriage after Ireland vote. ⓒ이영진 교수 제공

그렇다면 그리스의 동성애는 어떤 것이었나?


3. 그리스의 동성애

그리스 시대의 동성애는 사회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들이 동성애에 관한 보편성을 갖기까지는 신화적 관념 속에 깊이 탑재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일찍이 플라톤은 아프로디테를 천상과 지상에 각각 존재하는 둘로 규정하고, 어머니 없이 우라노스에게서 나온 천상의 아프로디테는 오직 남성적 요소만 갖고 있는데 그것이 소년에 대한 사랑이며, 지상의 아프로디테는 여성과 남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한 사랑으로 여긴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철학적 사상 구조의 측면도 있었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이들의 철학적 이해에 따르면 여자와의 사랑은 '아기를 낳는다'는 불순한 목적이 있는 사랑이지만, 소년애는 순수한 사랑, 그야말로 사랑을 위한 사랑(l'amour pour l'amour)이기 때문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관조적 개념은 자웅양성으로 불리던 혼합적 존재가 반으로 나뉘어 남자 혹은 여자가 되어 간통과 같은 천한 죄를 범하는 부류가 된다는 사상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웅양성의 혼합적 존재가 아닌) 순전한 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동성애를 하게 되는 것이라면서 소년애를 특별한 남성다움으로 제시하였다.

결국 이러한 개념은 "여자들을 좋아하고 아기를 낳고 싶으면 아내에게로 가라. 여자와 자고 싶으면 노예나 창녀에게로 가라.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미소년에게로 가라"는 철학적 멋스러움으로 작용했고 이것이 곧 그리스인들의 성관념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들의 사회적 구조가 그와 같은 하류의 신화와 철학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위가 낮고 천했던 가사 여성은 한낱 생산의 도구였던 까닭에, 그리스의 어머니들에게는 자기의 자식을 가르칠 만한 지식이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 성인 남성들은 폴리스의 유지를 위해 어린 소년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교육 과제를 안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소년들은 필요한 그들의 지혜와 경험과 노하우를 성인 남성들로부터 전수받고 자신들이 장차 자라나 폴리스의 공직을 맡는 데 지장이 없도록 보호받는 대가로 자신들의 몸을 허락하던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동성애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뿌리를 지닌 사회에 유대교의 율법을 던진다 한들, 누가 귀담아 들었겠는가?


4. 바울과 동성애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바로 이 명문이 선포된 것이다.

"19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ㅡ로마서 1:18-32"

이 같은 상황에서 바울은 동성애를 윤리로 다룰 때 우리처럼 레위기 법전 같은 고강도 텍스트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난데없이 '양심'이라는 일반적인 도덕률을 끄집어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에는 그 양심을 통해 율법까지 포섭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의 테크닉, 아니 주석 능력을 이 시대 기독교인은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양심이라는 술어는 신약성서에서 일종의 파라클레토스이다. cf. https://www.facebook.com/pentalogia/posts/776004379098650] 그것은 위와 같은 사회 배경에서 살폈듯 이방인에게 제 아무리 "레위기에서 (동성애자를) 죽이라"고 했다며 성경책을 펼쳐보였다 한들 무위에 지나지 않았던, 이 시대의 경우와 결코 다르지 않았던 상황에 적확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특히 저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마음(ἐπιγνώσει)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νοῦν)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8절)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하나는 에피그노시스(ἐπιγνώσις), 지식소. 지식이 들어가는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누스(νους), 인식소. 인식이 들어차는 마음이다.

지식소인 전자의 마음에는 '안 된다' 혹은 '된다'는 기준으로서의 지식을 집어 넣는 것인데, 넣기가 싫은 것이다. 그냥 싫은 마음이다.

후자의 마음은 말 그대로 상실된 마음, 버려진 마음이다. 그 교정/개정의 여지를 거부하니깐 자신의 인식이 그만 버림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인식 구조의 원리를 토대로 우리에게는 마비가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러움과(v.24) 부끄러움과(v.26) 상실한 마음대로(v.28) "내어버려 둠(v. 24, 26, 28)"을 당하게 되고 그 내어버려둠의 결국에 맞이하게 되는 것이 바로 순리를 역리로 바꿔 쓰는 여성 동성애(v.26)와 남성 동성애(v.27)라는 최종 귀결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또한 우리가 이해해야 할 동성애이다. 동성애는 심판의 요인이 아니라 심판의 결국인 셈이다.

그렇지만 역으로 이 인식의 구조 덕택에 우리 모두는 진정한 심판의 국면에 섰을 때, "핑계치 못하게"ㅡ도 되는 것이다. 인식이 모른 척 했을 뿐이기에.

다시 말하거니와, 동성애 하면 벌 받는 게 아니라 동성애가 곧 형벌이다.


에필로그

따라서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는 생물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임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바울의 논거처럼 아닌 것을 아니지 않다고 하는 세상, 그리고 또 그렇게 그대로 되는 세상에서는 양심이 그 율법을 대신한다는 사실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약 보다는 바울 텍스트가 더 적절하다.

그럼에도 긍휼히 여김의 끈은 놓지 않기를.


이영진 교수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이다. 그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자본적 교회(대장간)>,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


원문 출처: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0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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