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들을 시험해야 할 우리들의 의무 -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 목사 2017. 7. 15. 11:34

현상들을 시험해야 할 우리들의 의무 - 로이드 존스

얼마 전의 우리의 연구에서, 우리는 어떻게 현상들을 시험해야 하는지를 숙고하기 시작했으며, 저는 여러분에게 감정을 신뢰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충고를 했습니다. 저는 이제, 각각의 현상들을 긍정적으로 시험하고 분별하는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성경이 아니라, 이것으로 시작하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물론, 초대교회는 우리처럼 온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시험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들은 영들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성과 지혜로 시작하며, 이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에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이성과 지혜를 결코 포기하거나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원리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할 문구로 삼고 싶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자제력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중에 이 문제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특히, 오늘날 미국과 영국에서 그리고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이 일들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이제 여러분이 이 복을 얻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
여러분이 이 은사를 원한다면 자신을 버려야 한고, 여러분의 자제력을 상실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이것이 항상 잘못된 것임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 점만은 명백히 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는 저에게 “
그런데 당신은 분명히, 사람이 스스로 기독 신앙을 믿을 수 없으며, 단순히 지적인 이해와 노력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벗어나고 있소. 당신은 이것을 강조하는데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 그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지적인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진리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가 비합리적인 것도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기독 신앙을 믿게 될 수는 없으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여러분은 기독교가 모든 것 중에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모로 보나, 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일부러 버려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결코 없습니다. 고의로 생각을 중단하고 우리 자신이 공허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다른 권세들에 내맡기는 것은 결코 성경이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이렇게 해서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이성을 조명하여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이성을 배제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가 행하시는 일은 우리의 이성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 마음과 이성이 죄의 성향에 지배되기
에 우리를 기독교, 혹은 하나님의 나라로 결코 인도할 수 없다는 것 외에는, 이치상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과 이성을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그의 이성과 지혜를 떠나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발생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 이성이 전에는 거절했던 진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지적인 자멸을 허용하거나, 자제력을 상실하고 생각을 중단하거나, 고의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능력들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고린도전서 2:10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분명하다고 확신합니다. 지성만 가지고는 우리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나, 성령을 통하여 계시가 주어질 때 우리의 마음과 이성은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안에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혜를 사용해야 할 첫 번째 답변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더욱더 중요한 두 번째 답변을 제시하고자합니다
. 고린도전서 1, 12, 13장 그리고 14장에 있는 논증의 배후에 있는 전제 조건은 지혜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며, 이것은 모든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합니다. 왜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러한 은사들을 시행하고 나타내는데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이성과 지혜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요한일서에 있는 권면을 받아들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만일 여러분이 마음과 이성과 지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떻
게 영들을 분별하고 시험할 수 있을까요? 이 일은 불가능
이런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여기에 한편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과 다른 한편은 악령들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양자는 우리를 끌어들이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내어버리거나, 자제력을 잃어버리거나, 사고(思考)를 그치거나, 이성과 여러분의 지혜를 사용하기를 중단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시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발생했던 이유도 그들이 그렇게 행하지 않았거나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 저는 이것을 얼마 후에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 방언의 은사를 오용하는 포괄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은사를 오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어쨌든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 종일토록 이것을 시행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사도는 외부인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 끼치는 영향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
하겠느냐”(고전 14:23). 이것이 사도가 다루어야 했던 상황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방언으로 말하면서, 그들의 교회 모임의 모든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그들에게 충고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의 권면과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이는, 방언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을 내어버리거나, 자제력을 잃어서는 안 되고 여전히 통제 아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제시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4:32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이제 이 말씀은 확실하게 이것을 단번에, 영원히 해결해 줍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방종에 내어버려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다른 영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킬 것이며, 여러분은 시험할 수도 나아가 통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권면으로 이 장을 마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고와 이성 그리고 지혜를 내버린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에 한 자기 문제가 있는데 곧이어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있어, 가장 놀라운 진리의 특성 중의 하나로, 어떻게 단번에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이 성령에 붙들림 바 되고 이끌려 지면서, 여전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영광이며, 기독교를 거짓되고 그럴듯한 다른 모든 종교들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인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저는 이것을 긍정적인 충고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온 인류를 사로잡는 기독교적 구원의 본질적인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이성과 마음과 의지를 사로잡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사고(思考)를 중단하면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어떠한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자체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지혜의 눈을 밝혀주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한껏 펼쳐지고 사로잡힌 바 되지만 지성과 전인(全人)이 수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방법이나 암시를 통해서 우리의 사고를 중단시키려는 어떠한 가르침도 의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조명을 끄고서, 어떤 음악이나 문구를 리듬있게 반복하는, 잘 알려진, 심리학적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보다 더 미개한 종족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 즉, 그들이 이런 방식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을 홍분시켜서 이성과 지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지 직접 보았거나,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어떠한 것이라도 의심해야만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이것에 근접하는 것은 전혀 없으며 여러분은 오히려 엄밀하게 정반대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이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과연 이것이 진리일진대, 명백한 것은 이것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자제력을 상실하십시오”라고 암시하는 어떠한 가르침이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적어도 의심할 근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는 영들을 시험하는 두 번째 대원리로 넘어 갑시다. 이것은 성경 자체입니다. 저는 이미 초대교회는 우리처럼 온전한 성경을 가지지 않았었다고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교회가 생겼을 때 이런 문제들은 이미 일어났었고, 바로 이것 때문에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서들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전에 이미 시험해야 할 상황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 2:20)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입니다. 여기에 권위있는 가르침이 있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주어졌기 때문에 성경에 다른 것을 덧붙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시험들을 적용하는 방법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성경과 분리시키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사에 정통한 모든 사람들은 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거짓된 운동, 혹은 소위 이단의 특징이었습니다.
특별히 영적인 은사와 나타남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경우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들은 항상 성령을 말씀에서
따로 떼어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성경말씀은 더 이상 필요없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내적 광명을 소유했다면 왜 성경을 필요로 하나요? 여러분이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받고있다면 어디에 성경이 필요하나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새로운 성령의 나타남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것에도 적용해야만 하는 가장 우선적인 시험들 중에 하나입니다. 특별히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경에 제시된 입장을 고수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운동의 역사에서, 비록 그들이 시작은 잘하지만, 점차적으로 성경을 적게 사용하고 소위 “예언의 메시지”라는 것에 더욱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경향을 종종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에 관해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을 설명하는 대신에 이것을 인쇄하여 유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항상 가장 위험스런 징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진리는 성경에 있으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일반적이고 가치있는 원칙으로 이것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점점 더 성경에 근거하려 하지 않고, 이것을 설명하는데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든 반면에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인 메시지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경향을 발견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모로 의심을 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경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령의 주권적 사역 - 로이드 존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자체를 포기해야 하는가?  (0) 2018.01.09
설교와 설교자  (0) 2018.01.06
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0) 2017.05.01
성령의 사역  (0) 2017.04.29
지금은...  (0) 2017.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