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피한다고 안 일어나는게 아니다.도발하면 통일의 호기로!!!!!

 

1. 개 요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격침되어 침몰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 해군 병사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이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에 북괴가 우리의 대연평도를 향해 170여 발을 포격한 연평도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우리는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80여 발의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이 사건으로 연평도에서 복무하던 해병대원 2명(故 문광욱 일병,故 서정우 하사)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하였으며, 민간인 3명과 해병대원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밖에도 주택 12동이 대파되었고 25동은 불에 탔으며, 차량 3대와 컨테이너 박스도 여러 채 파괴되었다. 연평도의 가옥들이 포에 파손되고 불에 탔으며, 산불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확전을 우려하여 정부는 제대로 대응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며 많은 국민을 실망시킨 바 있다.



2. 처칠과 제2차 세계 대전

영국 수상 챔벌린은 히틀러와의 별도회담을 통해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합의문까지 받아냈고 귀국 후 자신이 유럽의 평화를 지켜냈다고 자화자찬하였다 그의 자화자찬에 영국국민들은 챔벌린을 개선장군처럼 환영하였다. 당시 해군장관이던 처칠은 그러한 양보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으나 그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약속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였고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결국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우리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것은 전쟁의 발발을 우려한 때문인데 전쟁은 유화정책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준 것이다.



3.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일전불사의 정신력이다

챔벌린이 실각하고 1940년 5월 처칠이 수상에 기용되자 영국 해군 병사들은 "원니(처칠의 애칭)가 돌아왔다!"고 외쳤다. 처칠은 "대가가 어떤 것이든 우리는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처칠은 의회에서 "나는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단합된 우리 힘을 믿고 앞으로 나갑시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는 25명의 장관에게 "영국의 긴 역사가 끝내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면, 히틀러가 피 흘리고 숨이 막혀 죽은 뒤에야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처칠이 단호한 의지와 용기로 앞장서면서 영국은 달라졌다. 5년 뒤 히틀러의 나치는 무릎을 꿇었다.

1962년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어 미국의 숨통을 노리려 했다. 그 위기에서 미국을 지켜낸 것은 핵전쟁을 각오하고 쿠바 해상을 봉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용기였다.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로 에워싸인 속에서 국가적 존엄을 유지하는 것도 어떤 침략과 위협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행동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4. 비스마르크가 한국인이었다면 통일의 호기로 삼았을 것

비스마르크는 당시 군웅활거하던 독일연방을 하나로 통합한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는 외교에 달인이었다. 아직까지 그를 능가하는 외교관은 없다. 그는 독일 통일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비인 것입니다. (중략) 프로이센의 국경은 건전한 국가의 국경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는 지금의 이 크나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언론이나 다수결은 1848년과 1849년의 결함이었습니다. 철과 피에 의해서만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통일은 씰데 없는 말장난이나 논의로 되는 게 아니다. 강력한 군대와 국민의 정신무장으로서만 통일이 가능하다. 또 외교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따라서 비스마르크의 외교능력을 배워야 한다. 사실 비스마르크의 외교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비스마르크는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교묘히 상대방이 전쟁에 응하도록 트릭을 썻는 데 만약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북괴가 스스로 기회를 준 이번 연평도 사건을 한국 통일의 호기로 보고 통일전쟁을 감행하였을 것이다.



5. 독일식 평화통일 불가능한 이유


서독은 동독을 흡수 통합하여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우리도 독일과 같이 평화통일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만은 통일되기 전의 동/서독의 환경과 한반도의 환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이한 바가 현저하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그칠 공산이 크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불가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서독은 민족상잔(民族相殘)을 겪지 않아 상호 적대감이 없으나 남/북한은 민족상잔을 겪어 상호 적대감이 극심하다. 가장 잔혹한 전쟁이 같은 민족끼리의 싸움이라고 한다. 1945년 625전쟁시 초기에는 북한이 남한 전역을 휩쓸었고, 후반기에는 남한이 북한전역을 휩쓴 결과 양측에서의 비전투원의 피살이 각각 1백여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 잔혹성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상호 증오와 불신 역시 극에 달하고 있어 평화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둘째, 분단당시 서독은 동독에 많은 원조를 하였으나 동독이 이 돈을 군사력을 증강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남한도 북한에 1997년부터 2006년 까지 10년간 약 80여억불의 물자 및 자금 지원을 하였으나 이 물자 또는 돈을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하였다는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북한은 남한 대부분의 국민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무시하고 몇 번의 핵 및 미사일 발사를 하여 남/북간은 물론 주변국간 긴장을 고조시켰다.

셋째, 독일통일은 동독 주민이 자발적으로 원하여 이루어 진 것이나 북한주민이 조국통일을 원한다는 징후가 없다. 남한에 대한 적대감이 심한데다가 북한지도부가 통치수단으로 북한 주민의 남한에 대한 증오감을 가지도록 부채질한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을 방문한 미국 선교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주민의 남한에 대한 생각은 김정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6. 부칸이 스스로 와해되는 것도 바라기 어럽다.

그 전에 김일성이 죽으면 부칸이 와해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완존히 빗나갔다. 또 뽀글이가 죽으면 와해될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틀린 확률이 크다. 중국이 원조를 끊지 않는 한 바라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통일한국이 등장하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간도도 영유권을 주장할 것이고 백두산 일부의 반환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통일한국은 군사대국이다. 군사대국이 출현하는 걸 반길 리가 없다. 사실 중국은 얼마 전에 당시 월맹을 건드렸다가 개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그들의 군사력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공한증이 있다. 고구려 때 묵사발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7. 다시 도발하면 통일의 기회로 삼아야

평화는 말로만 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고 통일 역시 그러하다. 북괴는 또 다시 도발할 것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말로만 2배 보복을 외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북괴는 속성상 같은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라서 비대칭전(테러전)의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이 많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현실화된다면 통일한국을 실현해야 한다.



국제정세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전쟁은 정신력이 중요하다. 과거 월남은 세계 5위의 근사강국이면서도 신발도 못 신은 거지군대 월맹에 패퇴하였다. 따라서 정신력이 해이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또 전쟁에서는 내부의 적이 문제이다. 월남은 베트콩(월남빨갱이)이 월맹의 승리에 기여한 바가 크다.

따라서 남한 존재한다는 종부기는 전면전 발발시 북괴를 위하여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척결 또한 필수적이다.

북괴와는 말이 필요없다. 또 다시 도발시에는 통일을 위한 호기로 삼아야 한다.

출처: http://blog.chosun.com/ifins/6355089/ Mr.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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