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2)

C.H.매킨토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되신 주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뭐라고 답하셨는지요? 이것은 특히나 흥미롭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5-8).

여기서 우리는 거듭남 혹은 새로운 출생이 “물과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분명한 사실을 배웁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심오하고 하늘에 속한 신비들을 알아가려면 그는 반드시 물에서 나고 또한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가장 명석한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그 심오한 비밀들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러하기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으로만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물에서 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당황합니다. 확실히 이 표현 때문에 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확증하고 싶다면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특정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굳이 성경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들에게 내리는 특별한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물에서 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질문에 답변해야 합니다.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이 구절들은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 관한 성경 기록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모두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지 믿는다고 말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앞에 나온 구절들의 참된 의미를 받아들이고 진실로 그렇게 믿은 자들입니다. 그 말씀이 계시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분을 계시하는 말씀 안에 바로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리고 죽은 자들이 그 음성을 듣는 일에 대해 조롱하거나 놀라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말씀이 보태집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죽은 몸은 물론 죽은 영혼들(souls)은 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 있는 목소리는 몸과 영혼에 주님의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들이 제아무리 논리를 세워 반대할지라도 자신의 헛된 생각을 기준삼아 하나님을 일부러 제쳐놓는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음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두가 요한복음 3장 5절의 ‘물로 거듭난다’는 것과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는 야고보서 1장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가운데 최초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약 1:18, 현대어성경).

또한 베드로전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새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여러분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생명은 곧 썩어 버리지만 거듭난 이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새 생명은 인간 가운데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1:23, 현대어성경).

이 말씀에서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교통하게 된 것을 볼 때 물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도구로 특별히 제시됩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새 생명을 받았다고 밝힙니다.
자, 우리 주님께서 “물로 거듭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면 여기서 은 어떤 중요한 비유적인 의미로 “말씀”을 표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에스겔 36:25-27절을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던 니고데모는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말씀이 물로 아름답게 비유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5-26).

또한 디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십시오

앞에서 인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께서 죽은 영혼들을 불러 생명을 주시는 데 있어 위대한 도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를 통해 우리는 이 진리를 독특한 방식으로 확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합니까?”라고 니고데모가 계속 여쭈었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선생”에게 구약에 나온 구리뱀에 관한 단순한 교훈을 가르쳐주십니다. 구약에서 뱀에게 물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장대에 달린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사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죄로 인해 죽은 죄인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뱀에 물린 상처로 인한 것이긴 했지만 그 상처가 아니라 장대 위에 달린 뱀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비록 죄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그 죄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죄인들은 모두 살아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대에 달린 구리뱀은 결코 차선책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얻는 데 있어 우리 영혼도 결코 차선책으로 예수님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 ‘누구를’ 바라보는가의 문제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아’(Look unto Me)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다비역).

니고데모는 자신이 질문한 “어떻게?”에 대한 답변으로 이런 소중한 교훈들을 배워야 했습니다. 새로운 탄생에 관해서 이리저리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분명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새로운 탄생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런 탄생을 가능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있어 갈피를 못잡습니다. 그들은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어떤 과정을 거쳐 거듭나는지에 관해서만 골몰합니다. 그러기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기보다 자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자명하지요? 우리가 자신에게 아무리 골똘하더라도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대상과 바라보는 행위 사이에 아무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처만 쳐다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얻었나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죄인이 자신만 쳐다본다면 무엇을 얻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론에서 우리는 다음 말씀을 접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우리가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모두 다시 태어난 자들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아들 하나님을 믿은 모든 자들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이들입니다. 이 믿음의 근원도 신적이고, 그 대상 역시 신적이며 이 믿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역사하는 권능도 신적입니다. 거듭남의 모든 사역은 이렇듯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사로잡힌 나머지 니고데모처럼 “내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대신에 믿음으로 예수님께 자기를 내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걸고 그분을 신뢰한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생명을 얻어 거듭납니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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