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귀출라프

그의 아내 뉴엘은 1831년 2월 16일, 쌍둥이 딸을 출산하다가 하나가 잘못되어 죽게 되었다. 그리고 둘째 역시 잃고, 게다가 아내도 세상을 떠나자 귀출라프는 태국을 떠나 중국을 향해 선교지를 옮겨 새롭게 사역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세 차례의 선교여행을 하였는데, 특별히 그의 두 번째 여행은 한국선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의 여행은 1832년 7월 출발하였다. 그는 중국 남부 해안 마카오를 떠나 타이완, 상하이, 산둥반도를 경유, 그 해 7월 17일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 이것이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한국 땅을 밟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겉으로는 단순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댓가지불이라는 관문을 통과할 때 이루어짐을 귀출라프 선교사를 통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한국 방문을 통해 기록한 항해기가 출간되므로 은둔의 나라, 한국이 서방에 잘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 입국했으며, 로버트 토마스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
귀출라프(Gutzlaff, Karl Friedrick, 1803-1851)는 1803년 7월 8일, 독일 프로이젠의 포메라니아(오늘날의 폴란드) 프릿츠에서 재봉사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그가 4세에 별세하였고, 아버지는 8명의 자녀를 둔 여인과 재혼하였다. 어린 귀출라프는 계모 밑에서 학대와 상처, 고통 가운데 성장하였다. 참으로 그는 외로움과 상처가운데 자라났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 삼아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8세까지 독일 할레에서 경건주의자 프랑케가 설립한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학비 때문에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고 고향의 프릿츠 공립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그가 신앙적 영향을 받은 것은 할레에서 경건주의자들에 의해서다. 이때 그의 중심에 부흥이 일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설교자가 되는 꿈이 있었지만, 선교사가 되길 꿈꾼 것은 바젤선교회에서 발행되는 선교잡지를 접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동기는 런던에서 당시 중국선교의 개척자인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로버트 모리슨은 중국 최초의 선교사로서 1807년 9월에 중국 마카오에 도착, 광주로 이동하여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 통역요원으로 일하면서 중국선교를 위해 헌신했었다. 그는 주로 문서선교를 하였고, 실제적인 회심자를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으며, 병원을 세우기도 하였고, 중국인 최초의 목사 ‘양발’을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영향으로 영국에 있었던 칼 귀출라프에게 선교적 도전을 주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런던에서 한국선교와 관련된 인물이었던 귀출라프에게 선교동기를 심어주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의미가 있다. 우리 주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 귀출라프가 17세 되던 해, 1820년 스테틴에 당시 황제인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가 프로이젠 군대 열병식에 참석했는데, 이때 귀출라프와 그의 친구가 함께 지은 “충성의 시(詩)”가 황제에게 헌정되었다. 귀출라프는 이 시를 통해 황제로부터 계속 공부를 위한 재정지원을 약속 받았으며, 1821년 오한네스 야니케가 설립한 베를린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영적인 중생을 체험하였고, 경건주의의 최소한의 교리를 배우면서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회심을 기록하였다.

“침상에 무릎을 끊고 기도하며 더 이상 낙심하지 아니하고 학업을 시작하기 위해 내 자신의 책상에 앉아서 진실하며 조용히 명상하듯 기도하는 자세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학업을 성실하게 하므로 6개 국어를 공부하였다. 그 후 베를린대학교에서 잠깐 공부를 하다가 도중 그만두고 로테르담에 있는 네덜란드 선교회에 입회하여 선교사로서의 지식과 자질을 준비하였다. 그곳에서 복음주의 루터파 소속 목사가 되어 3년간 사역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로서 파송받음
네덜란드 선교회는 귀출라프를 1826년, 그의 나이 23세에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은 자카르타였다. 귀출라프는 그해 7월 20일, 정식선교사로 임명되어 9월 15일, 자바섬으로 들어가 다음해인 1927년 1월 6일, 바타비아(오늘날 자카르타)에 도착하여 사역을 시작하였지만,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다만 런던선교회 소속의 매드허스트와 협력하여 복음전도와 언어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이러한 때에 매드허스트가 태국선교에 대한 제안을 하자 그는1828년 태국 방콕으로 선교지를 옮겨 8월 23일부터 시암(태국 방콕의 옛 지명)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특별히 그는 1931년 방콕에서 런던선교회 소속 톰린(Tomlin, Jacob)의 도전을 받아 동아시아 사역의 비전을 구체화하였다. 하지만, 1931년 2월 16일, 그의 아내 뉴엘(Newell, Maria)의 출산사고로 소천하면서 선교지를 바꾸게 되었는데, 그가 본래 가고 싶었던 나라, 수억의 이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던 중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때가 1931년 6월 3일 이었다.

선교역사가 스티븐 네일(Stephen Neil)은 귀출라프를 가리켜 “그는 성인이자 괴짜이며 비전이 가득한 진정한 개척자임과 동시에 광신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중국선교를 시작한 1931년부터 정기선, 마약선, 함선들을 가리지 않고 승선하여 중국 연해안과 한국 연해안을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중국인 복장을 하고 능숙한 중국어를 구사하면서 연해안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내륙까지 들어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 위험할 때에는 모리슨처럼 통역관이 되어 남경조약 체결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아편전쟁 이후에는 중국에 본거지를 정하고 중국복음화를 계획하였다. 그가 중국 북부를 여행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중국 사람으로 오인하기도 하였다. 워낙 중국말을 유창하게 잘했고, 중국식 옷을 입고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배를 이용하여 해안 선교를 하는 동안 여러 번의 해상 폭풍을 만나기도 하고, 한 번은 어려운 위기를 경험하기도 하였는데, 기독교 서적을 넣은 상자에 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선원들의 살해음모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귀출라프와 한국
한국선교와 귀출라프의 인연은 그의 두 번째 선교여행이다. 1832년 2월 26일,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암허스트호를 이용하여 중국 북방으로 행해 마카오에서 타이완, 상하이, 산동반도를 경유하여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이 배는 무역선으로서 무역개항을 타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배 안에는 린제이 함장을 비롯해서 통역관으로 귀출라프, 리스로 선장 등 67명이 승선하였다. 그리고 로버트 모리슨은 이 여행 기간에 배포할 수 있는 다량의 중국어 성경을 귀출라프에게 후원하였다. 이 배는 예정대로 산동반도를 경유하여 한국 서해안에 도착했는데, 처음으로 닿은 곳이 황해남도 몽금포이다. 이때가 7월 17일, 오전 10시. 이때 귀출라프의 기도문을 옮기면,

“거센 바람이 우리를 조선 땅에 오게 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중국 해안으로부터 그 수많은 위험한 고비마다 우리들을 보호해 주셨으니 진실로 감사합니다.”

이때는 한국은 문호를 개방치 않았던 쇄국정책을 펼칠 때였으니 그는 긴장과 기대가 교차되었을 것이다. 그의 감사기도는 입술에 발린 형식적 말이 아니라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감사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귀출라프 일행은 7월 17일, 오후 5시 암허스트호 모선에서 작은 보트를 이용하여 몽금포 부근 작은 마을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그의 말을 직접 옮기면,

“우리가 상륙하자 많은 주민들이 언덕으로부터 달려 왔다. 그들은 말총으로 만든 둥근 모자를 쓰고 중국인 것과 비슷하지만 보다 넓은 단추가 없는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이들의 표정이나 행동은 매우 신중하였다. 그중 지팡이를 들은 지도자로 보이는 윗사람이 “좌”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하면서 우리에게 앉으라고 하였다. 그의 요구에 응하자 그는 연설을 길게 하였다. ... 다행이 한문을 아는 젊은이의 덕택으로 우리는 뒤 늦게 이 나라의 외국인에 대한 국법과 외국인이 도착했을 때 주어진 그들의 의무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설득을 하면 우리를 해변에 머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언덕을 향해 마구 진입을 시도하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우리가 마을 쪽으로 걸어가자 그들은 버티고 서서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 우리가 언덕에서 내려가자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준 것에 만족하여 담뱃대와 잎담배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의 나이와 성과 어떤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결국 몽금포 주민들은 귀출라프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귀출라프는 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고 그곳을 떠나 7월 25일, 홍주 고대도 안항에 도착하였다. 이때 홍주 목사(牧使)에게 서양포, 시진표, 천리경 등 진귀한 서양물품과 성경 2권, 교리서 수집종이 포함된 헌상품을 순조에게 헌상하면서 영국과의 통상을 주문하였다. 이것은 외국인이 한국에 통상을 요구한 최초의 사건으로서 외교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파견해 온 역관 오계순은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 상국의 명령이나 허락 없이는 외국과의 교역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므로 헌상품과 주문을 반환하고자 하였다. 이때 귀출라프의 일기를 옮기면,

“우리는 드디어 조정에서 보낸 특사와 선상에서 만나게 되어 기뻤다. 자신은 재무대신이 보낸 사람이라고 말한 다음 서론을 말하였다. “당신의 서한과 선물을 받는 것은 불법이요. 이 일을 맡은 두 관리가 너무 늙어서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이오. 그러나 이는 불법이므로 국왕께 헌상을 할 수 없으므로 되돌려 주는 것이오. 우리 국가는 중국의 속국으로 중국 황제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소. 이것이 우리의 법이오.”

이때 귀출라프는 고대도에 잠시 머무는 동안 도민들에게 감자종자를 주고 심는 법과 저장법을 써주어 감자가 충청도 일원에 퍼진 것은 서양 식물도래의 좋은 예이며, 홍주 목사 이민회의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은 성경 한글역의 효시가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 후 일행은 여행을 하다가 8월 17일 제주도를 경유하여 8월 22일 일본의 오키나와 섬을 거쳐 9월 5일 마카오로 귀항하였다.

오늘날 고대도는 거룩한 성지가 되었다. 이곳에 귀출라프를 기념하는 교회가 1982년 4월 30일에 건립되었으며, 고대도에 귀출라프가 최초로 입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곳에 기독교인들이 방문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충남 보령시 관광지로 활성화 하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고대도를 정비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본래의 기독교 가치가 훼손될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현재 이 섬의 총가구수는 54가구이며, 주민은 120여 명이며 대부분 기독교인들이다. 이곳은 기독교 신앙을 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로서의 업적
귀출라프는 한국 땅을 처음으로 밟은 개신교 선교사로 역사에 기록되었으며, 그 후의 그의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중국에서 그는 1844년 복음을 전 중국에 증거하기 위해 중국인 전도인과 권서인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인 연맹(The Chinese Union)이다. 중국인 연맹 회원수는 나날이 늘어나 1848년에는 중국의 19개주 가운데 12개 주에서 천 여 명의 권서인과 100명의 설교자가 사역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국인들은 조약상 광주를 비롯한 마카오, 홍콩 등 5개 항구에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는 홍콩에 중국인 지도자를 양육하기 위하여 신학원을 설립하였고, 중국복음화선교회(The Chinese Evangelical Society)를 설립하여 이 선교회에서 처음으로 허드슨 테일러를 파송하였다. <중국내지 선교회>를 설립한 테일러는 귀출라프를 통해 선교를 배워 중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래서 테일러는 귀출라프를 가리켜, ‘중국내지선교회의 조부’라 하였다. 그러므로 귀출라프는 저 유명한 <중국내지 선교회>를 창립한 허드슨 테일러의 스승인 셈이다. 테일러는 이미 그의 스승 귀출라프를 통해 토착화된 방식의 선교를 배워 적용하였던 것이다.  

귀출라프의 사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였다. 중국에서 선교목적을 위해 모든 기회를 이용하면서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종결된 후 영국총독이 홍콩에 주재할 때 민정관으로도 일했다. 그가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선교에 유익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844년에는 홍콩에 신학원을 설립하기도 하고, <중국복음화선교회>를 창설하여 중국선교에 진력하였다. 그의 선교 열정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 일환으로 그는 1849년 영국,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중국선교 보고회를 가졌으며, 듣는 자들이 많은 도전을 받고 동양선교에 함께 협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1851년 8월 9일,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홍콩 빅토리아섬에서 약관 48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여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사역은 그가 죽었어도 하이트 모어가 피력했듯이 “그가 용기를 가지고 시작한 선교사역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수행되었다.” 그는 실로 원두우와 아펜젤러가 내한하기 53년 전, 한국 선교에 포문을 연 하나님이 한국에 보내신 최초의 천국대사였음이 틀림없다.

우리의 귀출라프 선교사는 어릴 때부터 꿈의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한 모라비안들을 통해 어릴 때, 설교자가 되길 원했으며, 하지만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을 영국 런던에서 만나면서부터 그의 꿈은 선교사가 되는 것으로 굳혀 갔다. 중국 현지에 가서도 그는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면서 주의 나라 위해 헌신하였으니 실로 그를 지탱해 주었던 것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하나님의 꿈이었다. 우리는 칼 귀출라프를 통하여 어릴 때 회심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꿈은 한 사람의 생애 가운데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배우게 된다. 또한 그 꿈은 삶의 고난과 위험가운데서도 그 자신을 지탱시켜 주는지도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그는 모험의 사람이었다. 수많은 선교항해 여행을 하면서 폭풍과 파선, 강도의 위험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바울같이 모험을 하였다. 귀출라프는 여러 번의 삶의 위기를 만났다. 자녀의 죽음, 아내와의 사별, 항해 가운데 강도, 위험, 죽음의 위기 등.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으며, 그 꿈은 주의 복음을 이교도들에게 전하는 열정이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는 믿음으로 그 거룩한 일을 포기치 않고 감당하였으니 그리스도 안에서의 꿈은 거룩한 모험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마지막 세 번째, 그는 조직자였다 <중국복음화선교회>를 조직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선교를 하길 원했다. 그는 중국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도 세우고, <중국복음화선교회>에서 허드슨 테일러를 파송하였는데, 테일러는 <중국내지선교회, CIM>를 통해 경이로운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의 중국사역은 지금까지 중국선교에 있어 전무후무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에 대해선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겠다. 허드슨 테일러의 흔적은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으니 이는 귀출라프에게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

조경현(세움동공체 대표)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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