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돈 교수 "2% 부족한 목사를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
박영돈 목사 2013. 2. 1. 01:25박영돈 교수 "2% 부족한 목사를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지난해 10월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아멘넷은 주강사 박영돈 목사(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의 세미나 내용를 시리즈로 소개한바 있다.
관련 세미나 기사 보기
- 박영돈 목사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
- ①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②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① 박영돈 목사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
- ②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설교와 성령충만
- ③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성령충만한 목사
- 신비체험을 원하는 교인을 어떻게 지도하나?
다음은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0장 38-42절을 본문으로 "더 좋은 섬김의 길"이라는 제목의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내용으로 우리는 목회자를 의미한다. 박 목사는 본문의 마르다를 통해 주님의 방식대로가 아닌 자기의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는 목회자들을 조명했다.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인 교회의 세속화를 인간본연의 인정의식에서 찾았으며, 목회자의 탁월성조차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목사의 비전과 목회관이 교회가 나갈 방향을 결정한다. 목사의 경건과 영성이 교회 전체의 영적인 분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목사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하는 것이 목회의 핵심이다.
본문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좋은 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두종류의 교인으로 비유가 되곤한다. 성경공부시간에 참석하지 않고 주방에 가 일하는 교인은 마르다와 같이 문제가 있는 교인으로, 성경공부 시간에 만사를 제쳐놓고 말씀을 공부하는 교인은 마리아와 같은 착실한 교인으로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이 말씀때문에 종종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은 성경공부에 들어가고 싶은데 누군가 봉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주방에 들어가 일하는 교인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 말씀을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다 아실것이다.
주님과 조용히 교제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봉사하는 것 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중요한 일이다. 주님은 주님을 섬기는 봉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계신것은 아니다. 주님에 대한 포커스를 잃어버린 봉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 오신 주님을 극진하게 대접하려는 마르다의 의도와 정성은 귀한것이다. 문제는 마르다는 먼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신대로 주님을 섬긴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방식대로 주님을 섬긴것이다.
주님의 포커스와 사역자의 포커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것이다. 주님은 그런 대접과 섬김을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은 마르다 자신을 원하셨다. 마르다와 교제를 원하셨다. 마르다가 먼저 자신을 알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먼저 마르다에게 은혜를 베풀고 마르다를 섬겨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마르다의 섬김의 방식은 주님이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을 알게 하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이라고 볼수있다.
마르다의 모습에서 율법주의자의 얼굴을 보게 된다. 자기가 수고한것에 대한 보상의 심리, 그리고 공로의 심리, 그리고 그에 대한 우월의식에 빠진 그녀를 보게된다. 마르다는 주님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주님께 자신의 수고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수고하지 않는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처럼 수고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을 비난한 것 처럼 마르다도 자신의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마르다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우리는 천성적으로 지독한 율법주의자이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후,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과정속에서 율법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신앙생활의 과정속에서 다시 도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안에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성취지향적인 욕망을 부추긴다. 우리안에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이신지 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신지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나의 야먕과 계획과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나의 야망을 주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혼돈할때가 많다.
주님의 일을 하지만 우리들의 포커스가 주님이 아니라 일. 그리고 사역의 성과일때가 많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 주님의 영광은 파이널이 아니라 세미 파이널인 경우가 많다. 배후에 숨겨진 파이널,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영광이고 나의 성공일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자주 잊어버린다. 주님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를 잘해야겠다, 설교의 성과를 좀 올려야겠다는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너무 강해, 그 욕망에 눈이 멀어서 주님을 잊어버릴때가 많다.
주님을 위한 사역이 아이러니 하게도 주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되어버릴수가 있다. 목사에게 사역의 우상화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우리의 모든 사역이 주님이 아니라 사역에 오리엔트가 되버린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만들어내기 위해 읽고 공부한다. 기도를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 하기보다 사역을 감당할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끌어당기는 방편으로 하게 된다. 교인들을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계획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십자가가 목회에 필요한 이유
우리는 하나님과 성령님까지도 도구화 하려고 한다.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끌어당겨서 목회의 성공과 교회성장을 꾀하려 한다. 주님은 우리를 부려먹지 못해서 안달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과의 깊은 영적인 사랑의 교제이다. 우리사역의 열매가 없고 능력이 없는 원인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경건의 피상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님과의 교제가 풍성해지고 깊어질수록 우리의 사역이 더 열매를 맺게되고 우리의 메세지가 은혜로워지게 된다. 우리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만큼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주님으로 부터 섬김을 받는 만큼 섬길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 만큼 사랑을 베풀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은혜와 생명을 공급받는 만큼 우리도 생명을 흘러 보낼수가 있다. 목회사역에 나가는 것은 많은데 들어오는 것은 별로없기에 영적인 적자에 허득이고 있다. 그래서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마르다와 같이 많은 염려와 근심속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고 결국에 영적으로 고갈됨으로 교회 전체에 영적인 피폐함을 몰고 오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 목회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자기를 돌보는 일, 자기를 관리하는 일 즉 '자기 목회'라고 할 수 있다. 자기목회에 실패한 사람은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목회가 사실 가장 어렵다. 목사에게 가장 어려운 대상은 목사 자신이다. 자신때문에 가장 힘들때가 많다. 나의 욕심, 야망, 교만, 조급증, 자기중심적인 성정, 인격의 미숙함때문에 목회에 어려움을 격을때가 많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이다. 어떤 시인이 말한대로 나는 내가 너무 무거운 것이다. 이런 골치아픈 나를 내가 어찌할수 없다. 주님이 나를 목회하실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나를 섬겨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을 주님이 져 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 나의 옛 자아를 주님이 매일 져주셔야 우리들은 목회를 할 수 있다. 옛 자아가 십자가에 하나님의 은혜로 게속 못박혀야, 우리들의 야먕과 교만이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온전한 목회를 감당할수 있다. 옛 자아의 짐을 매일 지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만 우리는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수적인 것이다.
십자가의 가장 큰 축복은 나를 가장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죽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내안의 그리스도가 살게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하게 나타난다. 내가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나를 통하여 주님의 부활의 생명력이 교회안에 밀려들어오게 된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목사의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교회가 부활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서 교회가 새로워지고 부흥하게 된다.
2% 부족한 목사를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
우리의 옛 자아의 정욕과 교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탁월함도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 목사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영적인 깊이가 있어야 한다. 경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탁월한 것이 주님이 일을 하시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거침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런 학적인 영적인 탁월함으로 인해 교인들의 관심이 하나님 보다 나에게 어느 정도 쏠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탁월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주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일부분을 가로채게 된다. 목사가 헌금을 도독질 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가.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은 그와 비교할수 없는 악질적인 죄악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더 훌륭한 목사일수록, 더 거룩한 목사일수록, 더 설교를 잘하는 목사일수록 그래서 교인들에게 많은 감동과 은혜를 끼치는 목사일수록 마귀적인 죄악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자인 동시에 우상숭배를 은근히 유도하는 존재이다. 우상으로 숭배받고 싶은 교주 근성이 우리안에는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훌륭한 주의 종들인 목사님들을 존경은 해야 하지만 너무 추앙하면 안된다.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를 존경해야 하지만 너무 우상시해서는 안된다. 주의 종은 주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손가락이 너무 영광스러운 곤란하다. 사인판은 심플할수록 간단할수록 좋다. 사인판이 너무 화려하고 특출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사람들이 사인판을 보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그래서 대형교회의 유명하고 탁월한 목사가 대형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를 바라보지 말라"고 하면 교인들이 더 바라보고 존경하게 된다. 장모님은 신앙심이 깊은 권사님인데, 우리 교단에서는 박윤선 목사를 그렇게 존경한다. 박 목사가 작고하기 전에 80세가 되어 교인들에게 "나는 80년된 죄인입니다. 나를 바라보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장모님은 그 말을 전하면서 박 목사님이 그렇게 휼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더 그를 존경하게 된다. 물론 박 목사님은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훌륭한 분이다. 그러나 훌륭한 분일수록 그렇게 겸손의 말조차 할 필요가 없다. 겸손의 말을 하면 교인들의 목사를 더 존경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더 고차원적인 경건의 꼼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경건의 팡파레를 할 필요가 없다.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고 추앙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교인앞에서 좀 망가지면 된다. 좀 찌그러지면 된다. 좀 파손되고 망가진 우상을 교인들은 보기가 싫으니 숭배안한다. 그런데 목사중에 스스로 망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남자들은 지도자로서 교인앞에 망가지고 찌그러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죽기보다 더 두려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 깨뜨려 주신다. 망가뜨려 주신다. 그래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시고 우리에게 어떤 약점을 주신다.
그래서 목회를 잘하는 비결은 약간 모자라야 한다. 2% 부족한것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비결이다. 그것이 은혜의 통로이다. 빈틈없이 완벽하고 아주 탁월한 사람과 하나님은 일을 같이 안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 가로채가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갈 정도로 보잘것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들은 망가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단의 교주들은 자신의 약함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신비의 베일로 가린다. 교인들의 추앙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복음 사역자들은 자기의 탁월함을 좀 감추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약할때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서 나가고, 약하고 부족할때 나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완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니, 우리는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세속화와 인정욕구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우리들의 가장 무거운 짐,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는 그런 은혜를 점진적으로 체험할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게 된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것은 신앙의 종말론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잃어버리고 현세지향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의 비전과 목표가 하늘의 영광과 인정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성공과 이 땅에서의 영광으로 변해버린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안에 가장 큰 욕구중의 하나가 인정욕구라고 한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내가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치열한 경쟁사회가 우리안에 심리와 욕구를 계속 부추겨 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속에서 내가 좀 더 앞서고 뛰어나고 더많이 소유하고 성취함으로 내가 굉장한 사람이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과 평가를 받을때 우리는 살맛이 난다. 그제서야 삶의 희열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가 나의 존재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에 우리는 그것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보면 내가 중요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 헤매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우리 주위사람들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배심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심사위원으로 부터 어떻게 평가를 받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성공한 사람인가 아니면 실패한 사람인가, 내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형편없는 인간인가를 평가를 받는데 노심초사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 나자신마저도 나의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삶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저변에 인정욕구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가련한 인정 중독자라고 할 수 있다.
목사가 되어 주의 일을 한다고 인정중독이 치유되기 보다 오히려 더 악화될수 있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 보면 인정욕구가 우리안에서 강하게 발동하는 것을 체험한다. 세상에서 못이룬 인정욕구를 교회안에서 주의 일을 하면서 이루어 보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세상에서 인정을 못받는 사람일수록 교회안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이라도 맡게되면 행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와 갈등은 그런 인정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실패해서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식으로도 인도를 하신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자랑할것이 없게 하신다. 그러나 간혹 그런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인정욕구를 목사가 되어서 이루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큰교회를 이루고 성공한 목사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일을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가 기독교 연합단체의 회장이 되기위해 20억이라는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해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참으로 정신없는 목사이다. 명예욕에 사로잡히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교회의 이미지가 훼손되는가 하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사를 보면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게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안에 숨은 명예욕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저의 사역을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보다는 보이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주의 사역을 해 왔다.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보다 사람들의 영광과 인정에 더 목말라하며 주의 일을 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가져본다. 사람들앞에서 우리는 쇼를 할때가 너무나 많다. 나도 치유를 받아야 할 가련한 인정 중독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은혜가 없는데 은혜있는 사람처럼 나를 꾸미는데 무진 애를 쓰게되고, 아주 괜찮고 솔직하고 의식있는 목사라는 그러한 좋은 목사의 이미지를 관리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성령, 인정욕구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
이런 인정중독에서 헤어나오는 유일한 길이 주님과의 깊은 교제이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발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과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수있다. 그 당시에 랍비의 발앞에 앉는것은 랍비의 제자가 된다는 의지적인 표현이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을 주님의 영광을 계속 주시하는 것이다.
지금은 성령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안에 그리고 우리 바로 앞에 항상 임재해 계셔서 우리들이 성령안에서 주님의 얼굴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새언약의 일꾼들, 사역자들이 누릴수 있는 특권이라고 할수있다. 옛 언약, 율법의 중보자였던 모세도 누리지 못했던 축복이다. 모세가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지만 율법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수건에 가려진 것 처럼 온전히 계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계시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 4장 6절(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과 고린도 후서 3장 18절(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에서 말했다.
성령은 새 언약의 영이다. 성령안에서 우리가 살고 사역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보고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영광보다 탁월한 주님의 영광을 알지못하는 사람은 새 언약의 일꾼이 될 수 없다. 복음 사역자가 될 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헛된 명예를 부인할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가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쫓는것은, 새 언약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에 비쳐온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 그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과 은혜의 풍성함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고 도취되지 않는다면 이 복음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은 것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한것 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인 감각이 우리안에 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아름다우심과 영광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지 아니하고 주님을 바로 섬길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집요한 유혹을 뿌리칠수가 없게된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볼때 우리안에 가장 강한 욕망인 인정욕구가 변하게 된다.
인정욕구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욕구이다. 기독교는 욕망을 부인하는 종교가 아니다. 욕망을 비우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상반된다. 욕망을 비우면 큰일난다. 더 악한 욕망 일곱이 들어와 앉을수가 있다. 기독교는 참된 욕망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종교이고, 더 거룩한 욕망으로 우리를 충만케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진정한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사무치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열망이 없이 아무도 주님을 바르게 섬길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가장 사모하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목사가 된다. 영광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 바라보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목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만 추구하고 살며 사역을 할때 우리가 종말의 주님께 들을 칭찬을 미리 성령안에서 부분적으로 듣게된다.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의 길을 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종말에 들을 하나님의 음성을 미리 종말의 영인 성령안에서 듣게된다. 육성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그윽한 만족과 평안으로 그 음성이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이다.
세상의 인정과 박수갈채는 우리를 일시적으로 들뜨게 만들고 흥분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를 더 허탈하게 만들고 공허하게 만들고 더 목마르게 만든다. 우리에게 결코 만족을 안겨주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주님의 인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평안으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것이다. 이런 은혜가 사역자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란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지난해 10월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아멘넷은 주강사 박영돈 목사(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의 세미나 내용를 시리즈로 소개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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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사 박영돈 목사
목사의 비전과 목회관이 교회가 나갈 방향을 결정한다. 목사의 경건과 영성이 교회 전체의 영적인 분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목사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하는 것이 목회의 핵심이다.
본문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좋은 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두종류의 교인으로 비유가 되곤한다. 성경공부시간에 참석하지 않고 주방에 가 일하는 교인은 마르다와 같이 문제가 있는 교인으로, 성경공부 시간에 만사를 제쳐놓고 말씀을 공부하는 교인은 마리아와 같은 착실한 교인으로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이 말씀때문에 종종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은 성경공부에 들어가고 싶은데 누군가 봉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주방에 들어가 일하는 교인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 말씀을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다 아실것이다.
주님과 조용히 교제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봉사하는 것 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중요한 일이다. 주님은 주님을 섬기는 봉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계신것은 아니다. 주님에 대한 포커스를 잃어버린 봉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 오신 주님을 극진하게 대접하려는 마르다의 의도와 정성은 귀한것이다. 문제는 마르다는 먼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신대로 주님을 섬긴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방식대로 주님을 섬긴것이다.
주님의 포커스와 사역자의 포커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것이다. 주님은 그런 대접과 섬김을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은 마르다 자신을 원하셨다. 마르다와 교제를 원하셨다. 마르다가 먼저 자신을 알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먼저 마르다에게 은혜를 베풀고 마르다를 섬겨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마르다의 섬김의 방식은 주님이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을 알게 하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이라고 볼수있다.
마르다의 모습에서 율법주의자의 얼굴을 보게 된다. 자기가 수고한것에 대한 보상의 심리, 그리고 공로의 심리, 그리고 그에 대한 우월의식에 빠진 그녀를 보게된다. 마르다는 주님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주님께 자신의 수고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수고하지 않는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처럼 수고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을 비난한 것 처럼 마르다도 자신의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마르다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우리는 천성적으로 지독한 율법주의자이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후,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과정속에서 율법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신앙생활의 과정속에서 다시 도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안에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성취지향적인 욕망을 부추긴다. 우리안에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이신지 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신지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나의 야먕과 계획과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나의 야망을 주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혼돈할때가 많다.
주님의 일을 하지만 우리들의 포커스가 주님이 아니라 일. 그리고 사역의 성과일때가 많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 주님의 영광은 파이널이 아니라 세미 파이널인 경우가 많다. 배후에 숨겨진 파이널,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영광이고 나의 성공일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자주 잊어버린다. 주님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를 잘해야겠다, 설교의 성과를 좀 올려야겠다는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너무 강해, 그 욕망에 눈이 멀어서 주님을 잊어버릴때가 많다.
주님을 위한 사역이 아이러니 하게도 주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되어버릴수가 있다. 목사에게 사역의 우상화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우리의 모든 사역이 주님이 아니라 사역에 오리엔트가 되버린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만들어내기 위해 읽고 공부한다. 기도를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 하기보다 사역을 감당할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끌어당기는 방편으로 하게 된다. 교인들을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계획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십자가가 목회에 필요한 이유
우리는 하나님과 성령님까지도 도구화 하려고 한다.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끌어당겨서 목회의 성공과 교회성장을 꾀하려 한다. 주님은 우리를 부려먹지 못해서 안달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과의 깊은 영적인 사랑의 교제이다. 우리사역의 열매가 없고 능력이 없는 원인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경건의 피상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님과의 교제가 풍성해지고 깊어질수록 우리의 사역이 더 열매를 맺게되고 우리의 메세지가 은혜로워지게 된다. 우리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만큼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주님으로 부터 섬김을 받는 만큼 섬길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 만큼 사랑을 베풀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은혜와 생명을 공급받는 만큼 우리도 생명을 흘러 보낼수가 있다. 목회사역에 나가는 것은 많은데 들어오는 것은 별로없기에 영적인 적자에 허득이고 있다. 그래서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마르다와 같이 많은 염려와 근심속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고 결국에 영적으로 고갈됨으로 교회 전체에 영적인 피폐함을 몰고 오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 목회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자기를 돌보는 일, 자기를 관리하는 일 즉 '자기 목회'라고 할 수 있다. 자기목회에 실패한 사람은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목회가 사실 가장 어렵다. 목사에게 가장 어려운 대상은 목사 자신이다. 자신때문에 가장 힘들때가 많다. 나의 욕심, 야망, 교만, 조급증, 자기중심적인 성정, 인격의 미숙함때문에 목회에 어려움을 격을때가 많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이다. 어떤 시인이 말한대로 나는 내가 너무 무거운 것이다. 이런 골치아픈 나를 내가 어찌할수 없다. 주님이 나를 목회하실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나를 섬겨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을 주님이 져 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 나의 옛 자아를 주님이 매일 져주셔야 우리들은 목회를 할 수 있다. 옛 자아가 십자가에 하나님의 은혜로 게속 못박혀야, 우리들의 야먕과 교만이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온전한 목회를 감당할수 있다. 옛 자아의 짐을 매일 지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만 우리는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수적인 것이다.
십자가의 가장 큰 축복은 나를 가장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죽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내안의 그리스도가 살게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하게 나타난다. 내가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나를 통하여 주님의 부활의 생명력이 교회안에 밀려들어오게 된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목사의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교회가 부활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서 교회가 새로워지고 부흥하게 된다.
2% 부족한 목사를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
우리의 옛 자아의 정욕과 교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탁월함도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 목사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영적인 깊이가 있어야 한다. 경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탁월한 것이 주님이 일을 하시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거침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런 학적인 영적인 탁월함으로 인해 교인들의 관심이 하나님 보다 나에게 어느 정도 쏠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탁월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주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일부분을 가로채게 된다. 목사가 헌금을 도독질 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가.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은 그와 비교할수 없는 악질적인 죄악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더 훌륭한 목사일수록, 더 거룩한 목사일수록, 더 설교를 잘하는 목사일수록 그래서 교인들에게 많은 감동과 은혜를 끼치는 목사일수록 마귀적인 죄악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자인 동시에 우상숭배를 은근히 유도하는 존재이다. 우상으로 숭배받고 싶은 교주 근성이 우리안에는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훌륭한 주의 종들인 목사님들을 존경은 해야 하지만 너무 추앙하면 안된다.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를 존경해야 하지만 너무 우상시해서는 안된다. 주의 종은 주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손가락이 너무 영광스러운 곤란하다. 사인판은 심플할수록 간단할수록 좋다. 사인판이 너무 화려하고 특출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사람들이 사인판을 보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그래서 대형교회의 유명하고 탁월한 목사가 대형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를 바라보지 말라"고 하면 교인들이 더 바라보고 존경하게 된다. 장모님은 신앙심이 깊은 권사님인데, 우리 교단에서는 박윤선 목사를 그렇게 존경한다. 박 목사가 작고하기 전에 80세가 되어 교인들에게 "나는 80년된 죄인입니다. 나를 바라보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장모님은 그 말을 전하면서 박 목사님이 그렇게 휼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더 그를 존경하게 된다. 물론 박 목사님은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훌륭한 분이다. 그러나 훌륭한 분일수록 그렇게 겸손의 말조차 할 필요가 없다. 겸손의 말을 하면 교인들의 목사를 더 존경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더 고차원적인 경건의 꼼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경건의 팡파레를 할 필요가 없다.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고 추앙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교인앞에서 좀 망가지면 된다. 좀 찌그러지면 된다. 좀 파손되고 망가진 우상을 교인들은 보기가 싫으니 숭배안한다. 그런데 목사중에 스스로 망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남자들은 지도자로서 교인앞에 망가지고 찌그러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죽기보다 더 두려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 깨뜨려 주신다. 망가뜨려 주신다. 그래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시고 우리에게 어떤 약점을 주신다.
그래서 목회를 잘하는 비결은 약간 모자라야 한다. 2% 부족한것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비결이다. 그것이 은혜의 통로이다. 빈틈없이 완벽하고 아주 탁월한 사람과 하나님은 일을 같이 안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 가로채가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갈 정도로 보잘것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들은 망가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단의 교주들은 자신의 약함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신비의 베일로 가린다. 교인들의 추앙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복음 사역자들은 자기의 탁월함을 좀 감추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약할때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서 나가고, 약하고 부족할때 나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완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니, 우리는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세속화와 인정욕구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우리들의 가장 무거운 짐,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는 그런 은혜를 점진적으로 체험할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게 된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것은 신앙의 종말론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잃어버리고 현세지향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의 비전과 목표가 하늘의 영광과 인정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성공과 이 땅에서의 영광으로 변해버린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안에 가장 큰 욕구중의 하나가 인정욕구라고 한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내가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치열한 경쟁사회가 우리안에 심리와 욕구를 계속 부추겨 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속에서 내가 좀 더 앞서고 뛰어나고 더많이 소유하고 성취함으로 내가 굉장한 사람이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과 평가를 받을때 우리는 살맛이 난다. 그제서야 삶의 희열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가 나의 존재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에 우리는 그것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보면 내가 중요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 헤매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우리 주위사람들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배심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심사위원으로 부터 어떻게 평가를 받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성공한 사람인가 아니면 실패한 사람인가, 내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형편없는 인간인가를 평가를 받는데 노심초사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 나자신마저도 나의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삶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저변에 인정욕구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가련한 인정 중독자라고 할 수 있다.
목사가 되어 주의 일을 한다고 인정중독이 치유되기 보다 오히려 더 악화될수 있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 보면 인정욕구가 우리안에서 강하게 발동하는 것을 체험한다. 세상에서 못이룬 인정욕구를 교회안에서 주의 일을 하면서 이루어 보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세상에서 인정을 못받는 사람일수록 교회안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이라도 맡게되면 행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와 갈등은 그런 인정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실패해서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식으로도 인도를 하신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자랑할것이 없게 하신다. 그러나 간혹 그런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인정욕구를 목사가 되어서 이루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큰교회를 이루고 성공한 목사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일을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가 기독교 연합단체의 회장이 되기위해 20억이라는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해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참으로 정신없는 목사이다. 명예욕에 사로잡히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교회의 이미지가 훼손되는가 하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사를 보면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게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안에 숨은 명예욕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저의 사역을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보다는 보이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주의 사역을 해 왔다.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보다 사람들의 영광과 인정에 더 목말라하며 주의 일을 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가져본다. 사람들앞에서 우리는 쇼를 할때가 너무나 많다. 나도 치유를 받아야 할 가련한 인정 중독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은혜가 없는데 은혜있는 사람처럼 나를 꾸미는데 무진 애를 쓰게되고, 아주 괜찮고 솔직하고 의식있는 목사라는 그러한 좋은 목사의 이미지를 관리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성령, 인정욕구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
이런 인정중독에서 헤어나오는 유일한 길이 주님과의 깊은 교제이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발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과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수있다. 그 당시에 랍비의 발앞에 앉는것은 랍비의 제자가 된다는 의지적인 표현이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을 주님의 영광을 계속 주시하는 것이다.
지금은 성령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안에 그리고 우리 바로 앞에 항상 임재해 계셔서 우리들이 성령안에서 주님의 얼굴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새언약의 일꾼들, 사역자들이 누릴수 있는 특권이라고 할수있다. 옛 언약, 율법의 중보자였던 모세도 누리지 못했던 축복이다. 모세가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지만 율법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수건에 가려진 것 처럼 온전히 계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계시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 4장 6절(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과 고린도 후서 3장 18절(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에서 말했다.
성령은 새 언약의 영이다. 성령안에서 우리가 살고 사역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보고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영광보다 탁월한 주님의 영광을 알지못하는 사람은 새 언약의 일꾼이 될 수 없다. 복음 사역자가 될 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헛된 명예를 부인할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가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쫓는것은, 새 언약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에 비쳐온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 그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과 은혜의 풍성함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고 도취되지 않는다면 이 복음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은 것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한것 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인 감각이 우리안에 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아름다우심과 영광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지 아니하고 주님을 바로 섬길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집요한 유혹을 뿌리칠수가 없게된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볼때 우리안에 가장 강한 욕망인 인정욕구가 변하게 된다.
인정욕구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욕구이다. 기독교는 욕망을 부인하는 종교가 아니다. 욕망을 비우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상반된다. 욕망을 비우면 큰일난다. 더 악한 욕망 일곱이 들어와 앉을수가 있다. 기독교는 참된 욕망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종교이고, 더 거룩한 욕망으로 우리를 충만케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진정한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사무치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열망이 없이 아무도 주님을 바르게 섬길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가장 사모하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목사가 된다. 영광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 바라보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목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만 추구하고 살며 사역을 할때 우리가 종말의 주님께 들을 칭찬을 미리 성령안에서 부분적으로 듣게된다.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의 길을 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종말에 들을 하나님의 음성을 미리 종말의 영인 성령안에서 듣게된다. 육성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그윽한 만족과 평안으로 그 음성이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이다.
세상의 인정과 박수갈채는 우리를 일시적으로 들뜨게 만들고 흥분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를 더 허탈하게 만들고 공허하게 만들고 더 목마르게 만든다. 우리에게 결코 만족을 안겨주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주님의 인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평안으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것이다. 이런 은혜가 사역자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란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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