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일곱 번째 질문 세속적 인본주의 및 뉴 에이지 운동 
성경은 세속적 인본주의와 뉴에이지 운동에 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가?

세속적 인본주의는 도덕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먹어가는 교활한 그러면서도 극단적으 로 해(害)가되는 암입니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으며 또 한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높이는 점에서 교활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철학은 자신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방법으로 훌륭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을 높이는 것은 더 높으시고 인간의 행위를 위해 기준을 전하신 창조주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암은 기독교, 전통적인 공교육, 그리고 일반적 도덕의 원리들을 좀 먹어갑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통속적으로 반(反) 성경적인 철학의 기초가 됩니다. 치명적인 이러한 진화적 신념의 중심에는 하나님이나 인격적인 창조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무신론), 인간이 모든 현실의 정점에 있다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이념은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며(인간의 타락을 묵살하면서) 완전한 창조물로 진화 하는 무제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활하게 호소합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어떤 필요성도 완전히 부인하며, 오히려 인간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가르칩니다. 뉴 에이지 운동은 세속적 인본주의와 동일한 성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모든 개인이 지금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진화 해야만 하는 “뉴 에이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인간이 서 있다고 주장합니다. 뉴 에이지 전도자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고 있는 선함은 실제로는 각 사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하는 신성이라고 주장합니다. 뉴 dp이지의 목표는 인간 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신을 깨우는 일입니다. 

이 거짓된 영적 상태의 인식 하에서는, 인간이 신이며 그러므로 신성하다고 간주하며, 개인과 사회의 세계적인 변화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흥미 있게도, 서방 세계에서 “새로운” 이라고 불리는 것은 고대 동양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 다른 뉴 에이지의 거짓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힌두교에서 가져온, 일원론적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것은 하나이다.” 라는 이념입니다. 이 범신론적 신앙은 “모든 것이 신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뉴 에이지 사람들은 영적 각성(깨달음)과 사람 속에 있는 신의 더 높은 의식을 얻음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세상을 파멸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뉴 에이지 사람들은 또한 힌두교의 환생의 개념을 빌려왔습니다. 뉴 에이지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주기적인 출생의 반복함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남으로서 죄와 나쁜 업(카르마)으로부터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든 것들과 신적 단일성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그들 은 마음의 힘을 통하여 그들이 무엇이든지 구상하는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뉴 에이지 운동의 알려진 목적은 핵에 의한 대학살이나 세계 자원의 고갈로 인한 인류의 멸종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뉴 에이지 운동의 최우선 순위입니다. 뉴 에이지 사람들은 지구의 치안을 유지하고 동양과 서양을 함께 조화시킬 새로운 세계 질서의 확립을 지원합니다. 슬프게도, 뉴 에이지 생각은 현대 생활의 거의 모든 양상에 침투했습니다. 

큰 기업은 그들의 정책 입안 매니저를 마음 증진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시킵니다. 치료 전문가들은 내적 반영과 의식의 탐사에 근거한 기술을 채택하여 사용합니다. 마케팅 전문가는 마케팅에 대한 동기의 능력에 대한 인간의 잠재력을 강조합니다. 연예인들은 그들에게 인기를 가져 다 줄 내적 힘을 발견하기 위해서 자신의 내부로 향합니다. 예전에는 하찮은 소문화권에 속했던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미국 생활의 주류로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진실을 왜곡하는 이러한 모든 표현에 저항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교활하고 부정직한 이러한 속임수를 드러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 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 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뉴 에이지와는 다르게 성경은 내부로 자신을 바라봄으로서가 아니라 위를 바라봄으로서, 사람을 바라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서 진실을 발견한다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17:5,9). 바울의 반문하는 질문은 그것을 가장 잘 밝혀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린도전서 1:20). 참으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성회는 진실에 반대되는 세속적인 인본주의와 뉴 에이지 이단의 거짓을 배척합니다. 

관심사: 

오늘날 교회는 항상 우리 주위의 모든 곳으로 침투하여 영향을 행사하려고 노력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철학에 항상 경계하며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자와 뉴 에이지 사람들이 말하는 달콤한 선언은 공립학교, 대학, 대학교, 정치적 구조, 그리고 모든 사회적 구조를 접수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의심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결백해 보이는 개념 뒤에 있는 총체적 철학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사람을 우리들이 믿는 것처럼 믿게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진리를 위해 서며,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의심치 않는 순진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끌어내는 사탄의 노력에 저항할 것을 기대합니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뉴 에이지 사람들이 환경을 보호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투표하는 것은 파국적일 수 있습니다. 개인의 독창성과 선도권(이니셔티브)을 격려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독창성과 선도권 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는 세속적 인본주의자를 위해 투표하 는 것은 재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정보에 밝으며,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은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역자주: 업 (카르마) - 불교 혹은 힌두교의 용어로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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