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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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롬 1:19). 그래서 저마다의 하나님을 그려낸다. 그 결과 시대나 지역이나 인종에 따라 온갖 모습의 하나님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효과적인 싸움은 적을 알고 나를 알 때라야 가능한 것처럼, 효과적이고 올바른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바로 알 때라야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그 모습을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독교적인 신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만을 제한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여호와"라고 답하시면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록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고 하셨다. 여호와는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다. 여호와는 히브리어의 발음에 따라 '야훼'라고 하기도 한다. 그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이다.

우리 주변에는 오랜 세월을 지내고 하늘에 올라간 짐승이나 공덕을 쌓은 어떤 사람이 변해서 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누가 있게 해서 존재하게 된 분이나 누군가가 올라가서 되어지신 분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고 계시는 자존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정한 원인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이 되신다. 그러므로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으로도 묘사되어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출 20:4). 심지어는 십자가 형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믿음의 대상이 되어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 존재에서뿐만 아니라 계획이나 활동에 있어서도 아무런 원인을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혼자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만사를 자유롭게 계획하신다. 또 아무의 구애도 받지 않고 그 계획을 이루어가신다. 하나님은 천지의 변화나 인간의 죄악된 행위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천지가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없어지지 않으시고 그의 말씀 역시 변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시거나(삼상 15:11, 35) 뜻을 돌이키신 것(삿 2:18)처럼 보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람 편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머물러 있는 태양을 지구가 돌고 있음에도, 해가 동쪽에서 떠올랐다가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상하시고"(시 102:27), "변역하지 아니하시고"(말 3:6), "식언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시며"(민 23:19),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약 1:17) 분이시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함께 쓰여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혼자 동떨어져 계시지 않고, 사람들을 찾아오시고, 사람들에게 언약을 맺어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같은 조상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지금도 기억하여 반드시 성취하실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맺어주실 정도로 은혜로운 분이시다. 그리고 천지는 없어져도 그의 약속을 기필코 완성하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2. 인격적인 하나님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심과, 늘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분이심과, 시간이나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영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거나 죽는 법이 없이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저기 멀리 하늘이나 예배당에만 계시는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바알처럼 졸거나 주무시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분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스라엘의 부족신 또는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의 하나님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의 내 하나님으로 나와 더불어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임마누엘이시다. 우리는 엘리사처럼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이까"(왕하 2:14)라고 외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지금 우리 앞에 가로 놓인 강물을 가를 수 있어야 한다.

또 영은 인격적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격적이란 나무나 돌 같지 아니하고 지성적, 감정적, 의지적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지성을 가지신 하나님은 천지와 사람들에 관한 모든 것들을 겉모양만 아니라 그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 근원부터 장래에 대한 것까지를 다 헤아리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호리라는 숨겨진 것이 없이 다 밝히 드러난다.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 자녀를 사랑으로 감싸고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다.

불의와 죄악에 대해서는 맹렬한 노를 발하신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비뚤어진 사랑에 대해서는 질투를 하기까지 하신다(출 34:14).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뜻을 정하고 세상 끝날까지 그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것을 분명하게 이루어 가신다(빌 1:6)고 했다.

인격적 존재는 다른 인격적 존재와 더불어서 교통을 하며 지낸다. 인격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나누신다. 피차 의논을 하시기도 하고(창 1:26), 보고 들으시기도 하고(요 3:32), 보내고 보냄을 받으시기도 한다(요 12:14, 16:17)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사람들과 더불어서도 교통을 나누신다. 사람이 날이 서늘할 때 아담을 찾으시던 하나님과 나누는 인격적인 교통,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교통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그 대상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고려할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방적인 묵상이나, 일방적인 요구나, 광란적인 몸짓이나, 번지르한 단어의 나열보다도 중심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대화형이 더 바람직할 수 있을 것이다.

3. 선하신 하나님

사람은 누구나 선을 칭찬하고 악을 비난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판단기준이 애매하거나 서로 달라서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주님께서는 친히 한 청년에게 이르시기를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따라서 하나님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아닌 것은 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최근 종교다원주의의 바람을 타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선을 인정하려 하거나,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음 몇 가지로 그 의미를 적용시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섭리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창조하시는 때에서만 그치지 않고, 그것들이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때를 따라 햇빛과 비와 바람을 주심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공중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특별한 사랑을 더 쏟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게 하고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후사로 삼아 주신다(롬 8:15).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공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무엇이 선한 것인지 율법으로 보여 주신다. 그리고 피조믈들을 그 율법에 따라서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시어 조금도 변벽됨이 없게 하신다. 또 상과 벌을 그 정도에 따라서 정확하게 베푸신다. 우리에게는 얼핏 보아 당장에 보기에 공평치 못한 것처럼 여겨져서 원망과 불평과 시비를 벌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 공평함은 드러나진다. 그러므로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조급하게 속단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요셉은 부당하게 팔려갔지만 그것은 그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미리 보내신 조치이었다(창 45:5). 바울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했지만,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기 위한 효과적인 인도이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범죄한 자들을 향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을 인하여 당장에 지옥불에 떨어져야 할 죄인들임에도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회개의 기회는 오직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천사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눈이 범죄할 때 눈을 빼고, 손이 범죄할 때 손을 찍어버린다면 지금 우리의 눈과 손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여 우리는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향하는 결단을 가져야 한다.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4. 삼위일체 하나님

1) 삼위일체의 중요성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한 분이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인격으로 계심을 말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회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사도신경의 대부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삼위일체가 이해하기 어려움에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또 성경전체의 중심 주제인 구속진리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성령이 하나님 되심도 부정하여, 우리 속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구속적용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2) 삼위일체의 증거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종합해 보면 삼위일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성경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성자를 낳으신 성부를 하나님이라고 하였다(고전 8:6) 태초부터 성부와 함께 계시던 성자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요 1:1).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속였던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행 5:3, 4). 삼위께서 각각 하신 사역을 보아도 하나님으로서의 전지전능하심과 편재하심 등의 속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명사를 사용하여 "우리"(창 1:26, 3:22)라고 하셨다. 세례를 베풀 때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하였다. 왜냐하면 삼위가 각각 하나님이시고, 그 영광과 권능에서 서로 동등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딤전 6:15)라고 하였고,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신 4:35)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말이 삼위일체이다.

3) 삼위일체 교리의 완성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해서 생겨났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맨 처음 삼위로 표현한 분은 주후 2세기 때 교회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데오빌루스이었다. 그 후 220~240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터틀리아누스가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오해로 인하여 교회에 혼란이 일어나자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전체교회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주후 325년에 니케아라는 도시에서 있었다. 이 회의는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자세한 내용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니케아 신경으로 발표가 되었다. 이 회의에서 크게 공헌을 했던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었던 아다나시우스(293~373)이었다.

4) 삼위의 구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에도 삼위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는 동시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한다. 성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요단강이 그 좋은 예이다. 성부께서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로 임하시고, 성자께서는 물에서 나오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성령께서는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내려 임하셨다(마 4:16, 17).

삼위 사이에는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교통이 있고, 그 사역에서 서로 구분이 있다. 성부는 계획을 하시고, 성자는 성취를 하시고, 성령은 적용을 하신다. 예를 들어 성부께서는 죄인의 구원과 그 구체적인 방법을 계획하시고, 성자께서는 그 계획에 따른 율법의 요구를 성육신과 죽음을 통해서 성취하시고, 성령께서는 그 계획의 효력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택하신 자들을 중생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이는 마치 한 건물의 경우에 설계자와 건축업자와 입주자의 역할이 서로 구분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삼위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불려진다.

5)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

사람의 머리로서는 삼위일체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교회역사에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로 말미암아 많은 오해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를 이단이라고 부르는데, 그 유형은 대체로 성자에 관한 설명여하에 따라서 다음 두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만 계시지 않고 성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시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러나 사람의 머리로는 이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이라고만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예수님은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를 주님으로 부르고 찬송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경건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처럼 존경을 받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나,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성부 하나님 오직 한 분뿐이라고 하면서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모사타 출신의 바울이라는 사람이 그 대표이었다. 지금은 유니테리안파와 같은 곳에서 이러한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에"(고전 12:3) 생겨난 이단이다.

정반대의 다른 오해도 있다. 성자의 참 하나님 되심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사람 됨을 부인하는 오해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과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된 육체를 가지실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가 실제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가 아니었고, 다만 신기루처럼 우리의 육체와 같이 보여졌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한 분 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터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성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율법을 완성하실 때는 성부로 나타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성자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시고, 구속을 적용하실 때는 성부나 성자로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성령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한 사람의 연극 배우가 각기 다른 세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하는 경우와 같이 생각을 한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내가 교회에 가면 집사이고 집에 가면 가장이고 직장에 가면 과장이지만, 사실 나는 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오해에 해당된다. 초대교회에서는 시벨리우스라는 사람이 그 대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우리들 주변에도 폭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요일 4:2, 3)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오해는 성자를 성부보다, 성령을 성부나 성자보다 못한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기 때문에, 삼위는 동등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열이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우열이 있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보는 삼신론(三神論)에 이르고 만다. 삼위 하나님은 똑같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 영원한 시간을 초월한 것이므로 먼저와 나중이 따로 있지 않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며, 순간이 영원 같고, 영원이 순간 같다(벧후 3:8). 따라서 삼위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앞에 선 우리는 바닷가의 모래알갱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얼음속에 박힌 나무가지를 억지로 잡아 빼면 부러지고 만다. 그러나 봄이 오면 그 가지는 저절로 빠진다. 이해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는 주님께서 주의 기이한 것을 밝히 주시기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출처: 안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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