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과 중생자의 세계
이 승 구 교수

우리는 서론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특징 지우면서 이는 무엇보다도 중생자의 영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무엇이며, 중생의 결과로 우리의 의식과 영혼의 기능의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우리로 기독교 세계관을 갖게 하는지를 살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번 장에서는 중생이 무엇이며, 중생의 세계관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重生, regeneration)이란 인간 존재의 타락을 전제로 하고, 이렇게 타락한 존재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살기 위해서 그에게 요구되는 영혼의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런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 조금은 폭 넓게 사용되었고, 이런 용례에 따라서 신학에서도 상당히 폭넓게 사용되다가, 17세기에 이르러서 좀 좁고 제한된 의미의 중생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한된 의미로 사용된 중생은 시간 안에서의 사람들의 구원에로의 변화의 첫 단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런 개념의 중생의 의미에 의하면, 사람들은 중생에 의해서야 하나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바르지 아니하므로, 이 세상에 대해서도 궁극적으로는 바르지 못한 개념을 가진 것이 된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며, 따라서 이 세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중생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서 요한 복음 3장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중생의 필요성과 방법, 그 성격들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가 밤에 찾아온 것으로부터 그의 연약한 마음, 교만함,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핌 등을 추론하고 그를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그가 밤에 찾아 온 것이 그가 어두움과 육에 속해 있으며, 이 어두움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보여주려는 상징적인 일이었다고 보는 해석은 요한이 신비한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창작한 것이라는 불트만의 해석과 비슷하게 이 일의 역사성보다는 요한의 구성을 더 중시하려는 이상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예수님과 함께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에 많은 시간을 내어 깊이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시간이 밤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찾아와 가르침을 받으려고 한 것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생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어떤 태도와 자세로 예수님을 찾아 와서 배우고자 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다. 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사유와 바리새인으로서의 활동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조금만 더 받아 더하기만 하면 종교적으로도 완성되고, 자신들이 이제까지 기다려 오던 하나님 나라도 잘 준비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 듯싶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평가는 이제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이신 예수님에게서 그의 가르치심을 받으면 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 갈 수 있고, 그 나라 백성으로 활동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니고데모와 같은 예수님께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 보인 바리새인들의 공통적인 태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상당히 종교적인 자신들의 생각과 삶과 사고 방식,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계관이 그런 대로 괜찮은 것이라고들 생각했던 것이다. 카슨이 말하는 바와 같이, "니고데모가 다른 바리새인들과 같다면, 그는 자신의 전 생애가 씻혀지고 그의 마음이 변혁되며, 다시 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켜녕, 자신이 많이 회개해야 하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순종의 질에 대해 너무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니고데모의 이런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에 적절한 도전을 니고데모에게 던지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과 5절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pace Westcott). 그런데, 칼빈이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란 말로부터 [지금 하나님이 계신] 하늘(Heaven)을 생각하는 이들은 잘못된 것이다." 니고데모와 같은 배경과 확신을 가진 유대인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이 세대 끝에 나타날 그 나라에 참여한다, 영원한 부활 생명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많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영생이란 말로 대치되어 나타난 예가 더 많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의 동일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즉 그들이 고대하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고 아주 단정적으로, 그리고 엄숙하게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배우러 찾아 온 이 사람에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를 아시고서 그에 적절하게 반응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이전에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요 2:48) 말씀하신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고,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이었던 것이다(요 2:24-25). 이 예수님을 잘 보고 그에게서 배웠던 베드로가 먼 훗날에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서(요 21:17) 그는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 대한 헌신적 준수나 유대교의 개정된 제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중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리스가 말하듯이, "그는 한 문장으로 니고데모가 대변하는 모든 것을 쓸어 내시면서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왜냐 하면, "자신이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인의 항존적 이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거듭난다"라고 번역된 말( ' )은 문자적으로는 "다시 난다"(to be born again)고도 이해할 수 있고, "위에서 난다"(to be born from above)고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아노뗀"(' )을 공간적으로 해석한 "위에서 난다"는 말은 3:31과 19:11에서와 같이 "하늘로부터 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다시 난다"는 번역은 이를 시간적으로 해석한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라는 말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과 이를 희랍어로 옮겨 적고 있는 사도 요한은 이런 애매성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시 남이면서 동시에 위로부터 나는 남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오늘의 주제인 중생(重生)의 성격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 '다시 남'은 니고데모가 처음에 이해한 바와 같이 육체적인 다시 남이 아니다. 이를 육체적으로 이해한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 날 수 있삽나이까?"하고 반문했었다(4절).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영적 출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또는, 린다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기원의 문제는 도외시한 채 출생의 문제에만 집중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시는 다시 남이 육체적인 남이 아니라, 영적인 남이라는 것을 밝혀 주기 위해서 다시 매우 강조하면서 말씀해 주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5절). 이는 니고데모가 말하는 바 "어떻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인 셈이다.

이런 대답을 주시고는 답답하시다는 듯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6절-7절)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어머니 태에서 난 것은 육적인 남이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남은 성령으로 낳는 것이라고 하셔서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어머니 배에 다시 들어가서 두 번째로 육체적으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의 남, 즉 중생은 참으로 성령으로 낳는 것이다. (이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낳아진 사람은 그저 육일뿐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성령으로 나야만 영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5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라고 하셨던 말씀은 6절에 있는 "성령으로 난 것"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결국 중언법(重言法, hendiadys)적 표현으로 성령으로 남을 좀더 부연해서 설명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물은 칼빈이 잘 말하고 있듯이 "성령의 내면적으로 깨끗하게 하심과 일깨움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주해가 옳다고 생각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물과 성령"이라는 말씀이 혹시 그 말씀을 인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구약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빌론 포수기에서 회복시키실 때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는 에스겔 36:25-28의 말씀이다: "[그 때에]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예언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됨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신이 그들 가운데 주어져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되는 것과 그들의 마음과 영의 변화, 그리고 그들 안에 있는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을 연관시키면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물 표상(water-imagery)을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물이 이스라엘의 윤리적 더러움과 죄 문제를 제거하거나 씻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는 물 표상을 사용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과정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물은 성령께서 하시는 죄를 정결케 하시는 사역의 표상으로 사용된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의 연관이 "물과 성령"으로 라는 헨디아디스(hendiadys) 용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이 말은 성령께서 죄를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성령으로 우리의 존재가 위에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전에는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칼빈도 이 본문의 가르침 중의 하나가 인류의 부패한 본성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한다. 타락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외인들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중생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속적인 대립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가 이제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으로 산 존재가 되는 일 -- 그것이 중생인 것이다. 칼빈이 잘 드러내고 있듯이, 이 중생이라는 말로 그는 "어느 한 부분의 변화가 아니라, 본성 전체의 갱신(the renewal of the whole nature)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존재 전체의 변화, 인간성 전체의 변화가 의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영혼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와 같은 지식과 은사와 이해와 지위와 능력을 가진 이라도 이런 중생을 거쳐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고, 그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 없이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없다는 준엄한 선언이 여기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준비하던 사람들이라도 그 영혼이 새롭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이제까지 지녀 왔던 그 성향과 그 인식과 그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일은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혼에 사역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고,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루어 지는 일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절).

이 말씀은 성령으로 나는 일 그 자체는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치 바람 그 자체는 알 수 없고, 또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물론 뒤에서 말할 바와 같이 바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 즉 바람 부는 소리나 바람이 일으키는 결과들을 주의해 보면 바람이 부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다. 바람의 힘은 느낄 수 있지만 그 기원과 원인은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칼빈은 이런 해석이 크리소스톰과 시릴의 해석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이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좀더 분명한 의미로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중생 시키시는 일을 자연 현상인 바람과 비교하시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이렇게 묻는다: "이 세상의 잠정적인 삶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 능력에 대해 놀랄 정도로 놀랍게 역사하시는데, 천상적이고 초자연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사역을 우리 자신의 정신의 이해력으로 측정해서 보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보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칼빈의 이런 해석도 흥미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이 비교를 통해서 그 기원과 원인의 신비와 그 힘과 결과의 가시성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모리스는 여기까지는 우리와 같은 주해를 한 후에 이로부터 "자연인은 성령과 접촉할 수는 있지만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기원도 모르고 자신의 종국적 목적도 모른다"고 보는 것이 더 선호할 만한 해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 문맥에 성격상 예수님께서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이런 이해에 가장 근접하는 입장을 잘 표현한 이는 도날드 거뜨리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그 겉으로는 예견할 수 없음과 불가시성이란 두 성질 모두에서 바람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유용한 예증 구실을 하는 것이다. 중생의 기적은 인간의 제아무리 기묘한 능력으로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그 작용은 인간의 통제밖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에 근거해서 우리가 언제 중생했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언제 어떤 식으로 중생했는지를 알 수 없으면 중생한 것이 아니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중생했는지 알 수 없다는 이 말은 성령으로 새롭게 나는 일의 결과가 의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중생한 사람은 반드시 중생한 사람다운 모습과 태도를 드러내 보에게 된다. 중생 그 자체는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나, 중생의 결과는 반드시 우리의 의식 가운데서 의식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중생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2. 중생에 따르는 영혼의 기능과 정향의 변화

중생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영혼의 기능과 영혼의 근본적 정향(disposition)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벌코프는 "중생이란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사람 안에 심겨지는 것, 영혼의 주도적 정향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데, 이로써 성령의 영향력 아래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의 생명이 낳아지게 되는 것이다"고 말한다.

따라서 중생한 자의 영혼은 그 영혼의 주도적 성향이 변하여 이제 중생한 자로서의 기능을 나타내 보이게 된다.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인지적 기능의 변화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존재나 그의 뜻을 인정하지 아니하거나 그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神知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자신이 가지는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이다(고후 4:6).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한다. "갓난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2)는 말씀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려주는 계시의 책인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깊이 있게 생각하며, 성경으로부터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 전체를 하나님과의 관련 가운데서 바라본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관련 없는 것은 없고,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 참된 지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시며 알고 계시는 바에 따라서 생각하고 아는 것이 된다. 이처럼 중생한 사람은 그의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지식을 기준으로 하여 사고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과 중생한 사람의 바른 지식 사이에는 유비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지적 내용에서만 변화가 일어 나는 것이 아니고, 그의 감정과 정서도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무관심하던 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이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분의 뜻을 알려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려고 애쓰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쓴 일이 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무한한 즐거움과 기쁨을 짐작하게 해주는 말씀이다.

또 이렇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거룩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는 인간성에 내재된 능력이나 부패한 인간성 안에 있는 사랑하는 능력을 극대화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부패한 인간성 안에서의 모든 능력을 부인하는 위치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공급하시는 사랑을 가지고서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 사람과 동료 인간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계 일반에 대해서도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서 돌보는 작업을 하게 된다.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권면하면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다(요일 4:7).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난 일과 따라서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는 것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하는 지배와 다스림은 결코 이 세상을 파괴하거나 이 세상에 대해 적대적인 심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의 정서를 가득 채우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사랑의 심정이다. 언제나 무엇에 대해서나 그런 따뜻한 심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따뜻한 사랑의 심정은 마음과 정서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이웃을, 피조계 일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에 근거해서 활동하고 움직이려는 고귀한 의지와 그렇게 움직여 나갈 수 있는 힘도 공급받는 것이다. 이렇게 중생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수동적이거나 정적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 나가는 것이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요일 2:29). 중생한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가를 추구해 나간다. 그리고 중생한 사람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행해 나간다. 자신의 부패한 능력과 의지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일을 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모든 사랑의 역사를 행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한 일을 행해 나가는 사람은 그 행해 나가는 일이나, 그로 말마암아 이루어진 업적에 대해서 전혀 자신이 이루었다는 공로 의식을 갖지 않는 것으로 특징지어 진다. 성령에 의지해서 노력해 가는 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을 해나가는 역동적인 사람이나, 일 자체를 위해 살아 나가는 이도 아니며,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서 참으로 젠체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행하는 일과 관련해서도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에게는 도무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이며,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에 의존해서 일을 해 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한 사람이 성령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중생의 결과로서 나타내 보이게 되는 영혼의 기능과 정향의 변화는 전포괄적이고 전인격적인 변화이다. 그의 영혼 가운데서 중생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삶과 활동 전체가 중생의 영향 아래 있고, 있어야만 한다. 삶의 어떤 부분만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이 중생의 영향하에 노출되어야 한다.

3. 인지적 변화의 표현으로서의 외현화 된 기독교 세계관과 그 성장

따라서 중생자의 의식은 중생하기 전의 타락한 의식과는 아주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된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2:14).

이는, 예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나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 등과 같은 어떤 특정한 내용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련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특정한 종교적 내용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해서 파악을 해야 하고, 파악할 수 있으며, 자신이 그 파악한 내용을 구성해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로 여기며 사고한다. 그는 반틸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의식이 "창조적으로 구성적인(creatively constructive)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찾아보려고 하거나, 스스로 진리를 구성해 보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이 시공간 세계의 의미가 그 자체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자라고 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흔히 죄의 인지적 영향(the noetic effects of sin)이라고 지칭된다.

이에 비해서 중생한 사람은 처음 창조 받은 아담이 그렇게 했어야만 했듯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는 수납적으로 재구성적인(receptively reconstructive)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중생의 인지적 영향(the noetic effects of regeneration)이라는 것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변화된 의식, 특히 그 인지적 측면이 변화한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외현화 된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이 세상을 바라 볼 때에 이 세상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중생은 인간의 믿음에도 앞서고 인간의 그 어떤 반응에도 앞서지만, 중생은 반드시 성경에 제시한 바를 믿고 그에 반응하도록 하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한 사람의 의식이 성장할수록 그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더욱 풍성해지면 풍성해 질수록 그의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도 더 풍성해 지고, 더 바른 것이 되어 가는 것이다. 또 그가 이런 관점에서 이 세상을 더욱 바르게 관찰해 가며, 바르게 이해해 갈 때에 그는 더욱 더 온전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져 나가는 것이 된다. 이런 측면은 사실 중생, 즉 영적 출생의 결과로 그에게서 시작되는 영적 성장인 성화의 한 측면이다.

특히 성화의 인지적 측면은 이렇게 더욱 더 온전해 지는 기독교 세계관의 정립과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영혼의 성화가 완성되는 그의 죽음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온전한 기독교적 이해(그 일부가 온전한 기독교적 세계관이다!)를 가지고서 기다리다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게 되는 그의 부활과 영화 등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매우 온전한 셰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는 우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날마다 성숙해져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온전한 곳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세계관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이 없는 듯이 생각하게끔 해서는 안된다. 객관적으로는 성경에 성문화된 하나님의 특별 게시와 이 특별 계시의 빛에서 해석된 일반 계시가 그 기준이고, 주관적으로는 우리의 신앙과 중생된 의식, 특히 그 인지적 측면이 그 구성 요인으로 작업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으로부터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려고 해야 하며, 이를 이룰 수 있는 이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여 성화되어 가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련성 가운데서 그의 힘에 근거하여 성경과 성경의 빛에서 해석된 이 세상을 이해한 대로 제시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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