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설교의 형식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신도들을 감동시켜 생활영역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분명코 이 모든 원리를 밝히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고대역사나 고대문명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것에 대한 강좌를 하는 골동품 연구가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오늘날 생존하여 생의 문제에 직면한 신도들에게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들에게 사활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며,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존재를 걸고 들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가 그들이 사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98p) 

 

제5장 설교행위

 

설교를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Whole Personality)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강조하려는 두 번째 요소는,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知覺力)입니다. 설교자는 결코 변명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설교자는 마치 회중들의 양해를 얻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추측이나 생각을 실험삼아 말하는 것이 되어도 안됩니다. 그것은 정말로 설교자가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확실한 일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명을 띠고 권위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는 보냄받은 사자(使者)로서 회중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이것은 자기 확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설교자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입니다.....(108p)

내가 중요성을 부여하고 싶은 또 다른 요소는 설교자가 말하는 동안 어느 의미에서는 회중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고 있어야 합니다. 회중 가운데는 영적인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 기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설교에는 상호 교환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은 수필과 강좌가 설교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길입니다. 자기의 수필을 낭독하는 사람은 자기의 청중들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 사람 앞에 있는 것은 쓰여진 것이 전부입니다. 거기에는 새롭거나 창조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주고받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비록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를 하였다 할지라도-

이 영적 자유의 요소 때문에 아직 회중으로부터 어떤 것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상호작용과 행동, 반응이 있게 되고, 종종 이것은 아주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109p)

 

비록 여러분이 설교를 아주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준비했다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강단에 서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이 일어날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발생한 것에 자기도 모르게 놀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요소들이 가입할 수도, 앞뒤 없는 얘기일 수도, 불완전한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학자연(學者然)하는 자들이 비웃는 것들이 많을 수도 있고 문학 평론가들이 평론에서 신랄하게 비평할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은 설교를 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설교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심중에 그 점을 간직하고 있고 다른 요소들에게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가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유로움의 요소는 정말 중요합니다. 설교는 언제나 성령-그의 능력과 지배-아래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무엇이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유로우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준비하라, 그것도 주의깊게 준비하라”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라고 말했다고 해서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거기에도 전혀 어떠한 모순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준비할 때 도우셨던 성령께서 설교를 행하는 동안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도우시며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열어 보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요소는 진지함의 요소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진지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그들의 조건과 그들의 영혼상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 사람들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다른 이들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과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의 특징은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일러주며 그들 앞에 놓인 가공할 만한 영벌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설교자는 이 생의 허무함을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잘 인식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일과 사업과 세상 열락과 허망한 자랑에 너무 깊이 빠져있어서 그들이 부단히 생각하는 일은 덧없는 생의 성격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설교자란 항상 그가 강단에 나타나는 순간에도 거기서 행하는 일에 대한 심각함의 인상을 창조하고 풍겨햐 합니다.....(111p)

 

나는 ‘박력’의 요소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는 심각함이 진지한 체하는 것을 뜻하지도, 슬픈 기색을 뜻하지도, 침울한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생기에 넘쳐있어야 합니다. 박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설교자는 결코 흐리멍텅하거나 지루해서는 안됩니다.....(112p)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십시다. 그 다음은 열심, 열정감입니다. 이들 진행의 요소들은 모두 친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열심이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그것에 붙잡히지 못하였으면 아무도 그 진리에 붙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113p)

 

그 점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의 요소에 우리를 인도합니다. 설교자는 결코 냉담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거의 옳고 정말 거의 완벽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상적이지 않고 살아있지 못하며 차갑고 감동이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감동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만일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으로 감동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안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을 유발합니다.....(116p)

 

설교자는 이런 이유와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서 그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사람입니다. 이탈되지 말고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의 음성, 그의 태도, 그의 모든 접근방식에서 풍겨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친밀한 접촉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나는 “긴박감”의 요소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단순히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으로 가고 있는 순례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 생에서의 생과 사의 문제 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절실하고 급한 것이 없습니다....(118p)

 

우리는 생의 한가운데서 죽음에 맞부딪혀 있습니다. 만일 설교자가 이 긴박감, 즉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단에 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는 종요하고 냉정하고 과학적이고 초연한 척 여유를 부릴 수 없습니다. 철학자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설교자에게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전체적인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해서 설교는 언제나 “설득력”에 의해 특징지어 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담대함으로 권하노니 하나님께 대해 화해하십시오.” 분명히 이 설교행위의 전체 목적은 청중들을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것을 취하라 또는 저것을 버리라“는 식의 태도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진리를 그들에게 설득시키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그것을 알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노력하며 그들에게 감화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한 본문에 대한 수준 높은 논문을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는 영혼들을 다루고 있고 그 영혼들을 움직여 진리로 그들을 이끌어 주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그의 모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이 모든 요소들은 강의하는 것과 설교하는 것 사이의 차이 또는

수필과 설교문 사이의 차이를 구분지어 줍니다.....(119p)

 

우리는 순전히 지적이거나 논증적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정념의 요소가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은 이 정념을 산출할 뿐 아니라 그 일 자체가 그 일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닫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점을 숙고하고 이해하기 위해 어떤 사도도 우리들을 사무치도록 감동시켜 줍니다.....(120p)

 

이 정념(情念)과 감격의 요소는 내게 있어서 아주 사활적으로 중대한 것입니다. 현세기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결핍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특별히 개혁파(Reformed)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균형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도하게 지적이 되어 정말 감정과 느낌의 요소를 거의 경멸하는 추세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배운 사람들이고, 진리를 너무 많이 포착하여 가지고 있다보니까 감정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대부분 감정적이고 감상적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이해를 못 가졌습니다!

 

이는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거기 모아 놓은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느낌을 혐오하다니 이것은 위험한 경향이 아닙니까? 우리는 도취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설교자로서의 우리에게 맡겨진 이 영광스런 진리들을 아무런 감동도 없이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영적 시안이 무엇인가로 가리워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말한 바처럼 이러한 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감동되지 않고 지나치는 수가 결코 없었습니다. 나는 내 말을 입증하는 한 가지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로마서 9, 10, 11장에서 바울이 어떻게 유대인의 특정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차지할 곳은 어디인가.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나 기타 그가 말해온....(122p)

끝으로 나는 말씀의 능력에 대해 언급해야겠습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가지만으로도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능력(권능)이 없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결국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설교의 주요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존전에 있다는 생각을

주는 것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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