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트니스 리는 교회관에도 이단이다
지상논쟁5-2 교회와신앙측
1997년 11월 01일 (토)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Ⅰ. 지난 호에 대하여
윗트니스 리편의 변증자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전호에서 필자에 대하여 제기했던 글을 보면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삼위일체에 대한 부분이고, 둘째는 기독론에 대한 부분이고, 셋째는 인간론에 대한 부분이며, 넷째는 교회론에 대한 부분이다. 필자는 지면이 너무나 넘쳐서 본호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변증하고 그리고 지난 호에 약속한 것처럼 교회론에 대하여 소개하고 비판한 다음에 다음호로 본 지상논쟁이 끝나게 됨으로 그 때 기독론과 인간론과 함께 마지막 정리를 하도록 하겠다.

글을 시작하며 먼저 밝혀 두고 싶은 점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이 논쟁이 하나님과 한국교회 앞에 유익한 논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기도하며 이 글을 썼음을 말해 둔다. 다음으로는 필자가 그 동안 개신교, 기성교회, 정통교회란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본호에서는 정통교회란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하겠다. 후론하겠지만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정통교회가 무엇인지 정의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에게는 스스로 모순된 말이 너무 많다
진실이란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하나는 주관적인 것이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것이다. 전자를 진심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실이란 주관, 객관 이 두 가지가 다 옳아야 한다. 그래야 참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이란 편협성과 제한성 때문에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모두 자신이 객관이라고 주장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아마 자신이 객관이라고 믿는다는 뜻이요 객관을 향해 가고 있고 가겠다는 의지요 표현으로 본다면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람이요 진실로 객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항상 주관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객관적인 진실을 구하는 사람인지 알려면 먼저 그의 주관적인 진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주관적으로 자기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관은 객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요 객관을 볼 수 있는 현미경이요 망원경과 같기 때문이다. 만일 주관적으로 자기 모순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에게서는 객관적인 진실은 검토해 볼 필요도 없다. 그는 진리를 이용하는 사람일 뿐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도 진리를 바르게 찾아가는 사람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통해서 진리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를 살펴볼 때 너무나 자기 모순이 많다는 것이다. 먼저 그 점을 하나씩 지적함으로 이들이 얼마나 진리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기에 부족한 안목과 인격을 가진 사람들인지 증명하고 싶다.

(1)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에게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필자를 너무 쉽게 이단이라고 하는 점이 모순된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필자의 말을 대단히 싫어했고, 이단이란 말은 인신공격적인 말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용하지 않도록 여러 번 요구한 바가 있다. 처음에는, 이단 판정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자제해 달라고 하였고(어차피 절대는 하나님 앞에 가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를 향해 가고 있을 뿐 모두 상대적이란 점에서 이 말도 틀린 말이지만), 독자들에게 이단이란 선입견을 주게 된다는 등의 이유를 말하며 이단이란 말을 자제해 달라고 했다. 처음에 필자는 윗트니스 리편에서 할 수 있는 요구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요구를 들어 주지 못할 이유도 충분히 밝힌 바 있다. 필자는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소신에 변함이 없고, 그리고 이단이란 명예훼손과 관계가 없으며, 본 논쟁의 목적이 윗트니스 리가 이단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음을 말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필자를 너무나 쉽게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는 점이다. 그것도 필자는 필자의 삼위일체 사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고 이들도 그것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자신들이 다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옳다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이고 자신들이 다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이라고 본다는 것이니 주관적으로 모순이 아니고 무엇인가?

필자는 이단이란 말을 인신공격적인 용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교리적인 용어로 사용한다. 그러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단이란 말을 인신공격적인 용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사용했으니 결국 필자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취지에서 이단이라고 한 것 같다. 심지어 필자가 했던 한두 마디 말에 의해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정죄한 것은 사려 깊은 일이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더라도 정직하고 객관적인 안목을 가진 진실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재는 자와 너를 재는 자가 같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필자를 이단이라고 주장해서 억울하다거나 그 영향이 두려워서 하는 말은 아니다. 스스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너를 도둑놈으로 만들어 나의 도둑놈 됨을 면하려는 윤리는 성령의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윤리라고 본다.

(2)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가 이단이란 말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이단이란 말을 사용한다고 하면서 자신도 이단이란 말에 대한 어떤 정의도 없이 이단에 대하여 변증하고 또 남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점이 모순된다
필자는 이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명한 개념을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개념은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있고, 또한 그 기준 속에서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주장하고 가능하면 그의 이단성을 널리 알려 성도들로 미혹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전호(97년 9월호)에서 필자에게 이단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였다. 그것도 성경에 근거하여 밝히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저들도 이단이란 말을 정의한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고도 이단이 아니라는 변증도 했고 이제 다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정죄까지 하고 있으니 모순된다. 이를 상대적인 이단으로 보아야 하는지 절대적인 이단으로 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을 이단으로 하는 것은 절대적이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이단들이 사용하는 수법이다. 필자가 이단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은 채 사용한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으려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이단이란 말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이단이란 말을 정의했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이단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고, 자신들은 이단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고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이요 모순이다.

비록 우리 모두는 이단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이단이다“, “아니다“라고 변증하고 있었던 것은 무언중에 이해하고 있는 공통적인 개념이 있었기 때문으로 믿는다. 사실 이단이 무엇인지 모르고 “이단이 아니다“, “이단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필자가 아니라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같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인격‘이란 용어에서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인격이란 말의 정의를 내리고 사용했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윗트니스 리가 인격이란 말의 정의를 모르고 사용하는 것 같아서 필자가 먼저 정의하였고 그리고 윗트니스 리의 정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격이란 말은 사용하면서도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라고 하는 등 한 사람의 학자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적당히 지나가려 하고 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인격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나 필자에게 이단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다 모순이다.

(3) 필자가 삼위일체에 대한 필자의 사상을 충분히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정죄하는 것도 모순된다
필자는 삼위일체에 대한 필자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이유를 앞에서 자세히 밝혔다. 필자가 필자의 삼위일체 사상을 충분히 밝히지 않았음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규정했다. 이는 분명히 사려 깊지 못하고 나아가 모순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필자는 본호에서 교리적인 면에서 삼신론자가 아님을 구체적으로 변증하겠지만, 이단의 절대적 의미를 추구한다는 사람들로서 한두 마디 말로 남을 이렇게 쉽게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절대적인 이단규정인가? 윗트니스 리에 대한 필자나 교단의 연구에 대하여는 사려 깊지 못한 연구였다고 자주 말하면서, 자신들은 다른 사람을 그렇게 쉽게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기를 바라는가? 물론 본 필자라도 이단이면 이단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단 몇 마디 말로(그 말도 삼신론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지만) 이단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이 아니라는 변증도 같은 수준의 변증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한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뭐라고 하든지 필자의 입장은 이렇다.
첫째, 본 논쟁의 초점은 필자의 이단성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윗트니스 리에 대한 이단 규정이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바르게 한 규정인가 아닌가를 밝히자는 것이다. 특히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 모두 양태론을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필자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문제를 삼았으니 그 점도 분명히 밝히겠지만, 본 논쟁의 초점은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을 밝히자는 것임을 잊지 않기 바란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교회와신앙>이 할애하고 있는 지면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그들의 자유이겠지만, 적어도 <교회와신앙>이 이단자들에게까지 지면을 할애하는 본래 뜻이 그 점에 있음을 인지하기 바란다.

둘째, 삼위일체는 너무나 방대해서 그것만으로도 1년간 <교회와신앙>, 전 지면을 다 할애해도 부족할 것이다. 더욱이 삼위일체의 그 난해성과 신비성까지 포함한다면 더욱 그렇다. 결국 이번 6회 동안에 끝까지 삼위일체 논쟁을 벗어나지 못할 터인데 이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셋째, 윗트니스 리가 변형된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필자나 예장 통합 교단에서 윗트니스 리를 오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바르게 이해를 했으나 그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즉 정통신학을 기준으로 할 때에도 이단이 아니란 말인지, 아니면 정통신학의 입장은 어떠하든지 성경적인 입장에서 그러하다는 말인지(그것도 윗트니스 리가 주관적으로 보는 것이지만) 밝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처음에는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적인 것이 아님을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것처럼 주장을 하다가, 이제는 자신들이 성경적인 입장에서 옳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는 쪽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 필자가 이단자들과 논쟁을 해 보면서 거의 마찬가지로 느꼈던 점이다. 예컨대, 안식교와 논쟁을 하였는데 그들도 그랬다. 대부분 이단들은 처음에는 오해라고 주장을 하다가, 다음으로는 정통신학을 기준으로 해도 이단이 아니라고 했다가, 마지막으로는 자신들이 성경적으로 옳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본 논쟁을 잘 지켜보기 바란다. 정통신학의 기준에서 볼 때 윗트니스 리가 변형된 양태론이란 점이 확연히 밝혀진다고 해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굴복하지 않겠지만, 그 점이 먼저 밝혀진 후에 성경적으로 옳은지 틀린지 따져야 할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먼저 따져야 할 초점은 성경적인 면에서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바른 이해가 되었는지 그리고 바른 기준 설정이 되었는지를 따져야 한다. 그것은 절대로 성경적인 입장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다. 성경적이냐 아니냐는 그 다음의 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먼저 분명히 하고 그 논쟁이 끝난 후라면 필자도 성경적인 논쟁을 적극적으로 할 것을 약속한다.

(4) 필자의 신론은 이단적이고 기독론은 비성경적이라는 말도 모순된 소리이다
필자가 보기에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필자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기준은 정통신학의 삼위일체 교리를 기준해서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왠일인지 저들은 필자의 기독론은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비성경적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이 말은 아마 자기 나름으로는 성경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 같다. 하나의 기준으로 필자를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단‘이란 말과 ‘비성경적‘이라는 말로 나누어서 사용할 수 있겠는가? 우선 두 개의 기준을 따로 가지고 말하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이단이란 말과 비성경적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도 모순된 소리이다.

그리고 기독론에서 비성경적이라면 그는 분명히 이단인 것이다. 기독론은 한편으로는 삼위일체론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구원론이 된다.  2천년 동안 신학은 기독론 중심으로 발전된 것은 바로 구원론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회의는 기독론 문제로 이단을 규정했다. 사도신경도 대부분이 기독론 중심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그렇게 볼 때 어떤 사람이 기독론에서 비성경적이라면 그는 이단 중에 이단이다. 기독론은 이단을 가장 밝히 볼 수 있는 현미경이 아닌가? 그런데 저들은 필자가 기독론에서 비성경적이라면 필자를 이단이라고 해야 하는데 왜 비성경적이라고 했겠는가? 삼위일체론도 기독론도 비성경적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삼위일체론도 기독론도 이단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저들이 이단이란 말과 비성경적이란 말을 나누어서 사용하는 것은 모순이다.

왜 그랬을까? 필자가 보기에, 필자를 삼위일체론에서 이단이라고 한 것은 ‘정통신학‘을 기준해서 하는 말 같고, 기독론에서 비성경적이라고 한 것은 ‘성경‘을 기준해서 하는 말로 들린다. 즉 자신들의 기독론이 정통신학과 다르기 때문에 성경적으로는 자신들이 옳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을 기준으로 볼 때 윗트니스 리의 기독론은 이단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즉 윗트니스 리의 기독론은 정통신학에서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비록 자신들은 성경적으로 옳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정통교회의 기독론과 다르다는 간접적인 시인이다.

(5) 성경적인 논쟁을 하자고 해 놓고 학자들의 의견을 많이 인용하는 점도 모순되며, 필자에게 성경적인 논쟁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중요한 교리를 밝히며 성구를 전혀 인용하지 않았던 것도 모순된다

필자나 윗트니스 리편 모두 성경적인 논쟁을 하자는 데 일치한다. 그런데도 필자는 성경적으로 적극적인 논쟁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필자의 논쟁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가 그렇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구를 인용한다고 성경적인 논쟁이며, 성구를 인용하지 않았다고 성경적인 논쟁이 아니라는 주장은 성경과 신앙 내지는 신학에 대하여 이원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장하는 무지한 견해라고 본다(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이원론적 의식에 대하여는 후론하겠다). 필자는 이미 실례를 들어 말을 했다. 예를 들어 통일교의 경전인 <원리강론>이란 책에는 칼빈이 저술한 불후의 명작으로 여겨지는 <기독교강요>라는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구보다 더 많은 성구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필자가 성구를 인용하지 않아서 신학과 신앙적으로 모순되거나 그릇된 주장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점이 있으면 밝혀 주기 바란다.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는 성구를 인용하고 변증하고 있고 앞으로도 하겠다. 성경 용어를 사용했다고 절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사상과 일치한다고 본다면 성경도 기독교 역사도 모르는 사람의 말이다. 비록 필자가 하나 하나에 성경적으로 논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윗트니스 리에 대한 필자의 이단규정이 성경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필자가 따르고 있는 정통교회의 교리 자체를 성경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지방교회의 글은 주장하는 진리의 매 항목마다 성경의 근거가 분명하여 필요시 성경말씀을 직접 인용하였(다)“고 말하였다(97년 3월호 138쪽).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왠일인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중요한 부분에서 어떤 성구도 인용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96년 8월호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밝인 일이 있다. “우리의 실행들“이란 란에서 보면 '거듭남', '분별', '헌신', '주님을 사랑함', '하나님의 말씀', '기도', '그리스도를 체험함',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 '생명의 성장', '인간 생활', 그리고 '그 영'(125~128쪽)에서는 단 하나의 성구도 인용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이런 곳을 제시하려면 너무나 많이 할 수 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처럼 위에 성구가 인용되지 않았으니 위의 항들은 모두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개인 사상으로 보아도 되겠는가? 그러면서도 필자에게 성경적으로 증명하라느니 성구를 인용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모습이 너무나 모순스럽다.

그리고 필자는 학자들의 말도 인용하지 않았다. 진짜 성경적인 논쟁에서 학자의 말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학자들의 주장은 또 다른 학자들에 의해 도전받기 때문에 많은 논쟁만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존경받는 학자라도 성경적으로 실수를 할 수 있다. 루터도 성경관에서 실수를 했고(예컨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성경이라고 했다), 구약학 학자로서 유명한 에드워드 영 박사도 66권을 다 성경으로 보지 않는 큰 실수를 했으며, 이단연구가로 공헌을 세웠던 월터 마틴 같은 학자도 안식교를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실수를 했다.

필자가 존경하는 칼빈도 많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실수를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초대교회 교부 중에 역사적 교회의 정통성을 어떤 교부보다 더 보여 주었다고 평가받는 터툴리안도 몬타니즘에 빠지는 실수를 하였다. 필자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충분한 책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열거하거나 인용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필자는 신학과 성경을, 교리와 성경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성경적인 논쟁을 하자고 주장하면서도 학자들의 이론을 많이 인용하는 것을 보는데 이도 모순된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필자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보다 오히려 더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6) 필자가 쓴 장로교의 안경이라고 지적한 것들에도 모순이 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필자는 장로교의 안경을 쓰고 있다고 하기에 그 안경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엉뚱한 대답을 하였다. 먼저는, 필자가 말씀 자체가 아닌 자신의 신학 지식에 근거하여 토론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 그 안경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참으로 어이가 없다. 어떻게 이것이 장로교의 안경인가? 바로 이것이 필자가 쓴 장로교의 안경이라고 본다면 그가 장로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짐작케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신학과 신앙을, 그리고 교리와 성경을 이원화하여 보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안경이요 이단자 윗트니스 리가 쓰고 있는 안경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 실례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을 주장하는 윗트니스 리를 신인합일주의자로 보는 것이 장로교의 안경이라고 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장로교‘의 ‘장‘자도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때는 윗트니스 리가 신인합일주의가 아니라고 하고 이제 윗트니스 리를 신인합일주의자로 보는 것이 장로교의 안경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의 입장에서 보면 장로교는 음녀라는 말이 옳은 것이요, 또한 장로교의 입장에서 보면 윗트니스 리가 신인합일주의적 이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로교가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상식 중에 상식이다. 그러나 신인합일주의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저들이 장로교를 이렇게 보는 바로 그 눈이 윗트니스 리가 신인합일주의임을 인정하는 안경으로 보인다.

(7) 회복교회(지방교회)는 무지막지하고 호전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법정시비로 이단논쟁을 막으려는 비성경적인 자세가 모순스런 행위이다
필자가 “윗트니스 리가 소위 정통교회의 예배도 부정하고, 침례(세례)의 의미도 부정하며, 목사도 부정하고, 장로의 개념도 다르며, 심지어 정통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하고 있다“고 했던 말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의 말이 “기독교내 목회자와 성도들로 하여금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인들을 향해 적개심 또는 심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선동처럼 들린다“는 것이요, 또한 “윗트니스 리는 최삼경 목사가 묘사하듯 그렇게 무지막지하고 호전적인 사람이 아니다“고 하였다.

필자가 적개심을 선동한다는 말에 대하여는 교회론에서 대답을 하겠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진리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감정 운운하여 저들이 오히려 감정에 호소하는 것으로 보이며, 정통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려는 데 거침돌이 될까 봐서 하는 말로 들릴 뿐이다. 어쨌든 이들에게 모순된 행동이 있다는 것이다. 즉 세상 법정에 제소하고 또 그것을 방패막이로 윗트니스 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있다는 점이 모순된 행동이다.

이미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전에 “비판적인 몇 사람이 합당한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명예훼손 혐의로 법정까지 비화되었습니다. 어려운 장시간의 소송 결과, 하나의 사건은 그들이 공개적인 사과문을 신문에 게재하고, 출판된 책들을 전부 회수하여 폐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고, 또 다른 소송 사건은 그들의 책이 명예를 훼손하는 거짓된 내용과 의도가 있는 것으로 법적인 판결이 났습니다“라고 하여(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자신들의 세상 법정 사건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자신들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은근히 협박하는 것을 보았다.

필자는 세 가지로 대답하겠다.
첫째, 세상 법정은 이단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 세상법정에서 이겼다면 그것은 명예훼손 부분이었을 것이다. 만일 세상 법정에서 이단문제에 대한 판결을 받으려고 했고 받았다면 처음부터 그 세상 법정을 의지하여 이단이 아님을 증명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둘째,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 갈 길이 아니란 점이다. 만일 세상법정에서 이단성여부을 판결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필자와 필자가 속한 교단도 세상 법정에 제소해도 무방할 것이다. 필자는 이단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수십 번 싸웠고 결국 다 승소했지만 그것이 이단이냐 아니냐를 가린다고 말한 일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이겼으니 너는 이단이라고 말한 일이 없다. 단지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은 세상 법정에서 이단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이단들이 가지는 행태라는 점이다. 세상 법정에 제소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일이고, 그것이 이단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으로 믿으며, 그리고 이단규정에 혹 명예훼손 부분이 있다고 여긴다면 필자와 본 교단을 제소해 주기 바란다. 그렇게 하고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자유지만 기다리고 있겠다.

셋째, 이것은 자신들이 온유한 사람인 것처럼 정통교인들에게 비쳐지기를 바라는 자세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저주한다는 말이 마치 칼이라도 들고 정통교인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정통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하는 것보다 더한 저주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가 만난 여호와의증인들이나 안식교인들 중에 포학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적 선이 아니다. 아리우스는 인간적으로 정직하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사람이란 사실을 아는가? 그런데 세상 법정을 들어 협박하는 것도 온유한 행위에 속한단 말인가?
필자가 윗트니스 리에 대하여 냉혹한 말을 자주 하는 것은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소신과, 성경에서는 이단자와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다(요이 1:10~11).

(8) 천주교에 대한 자세가 모순된다
윗트니스 리는 천주교에 대한(개신교를 포함해서) 자세에 있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어느 때는 이 날개로 날고, 어느 때는 저 날개로 난다. 길이가 다른 두 개의 날개로는 나를 수가 없을 것인데 말이다.

어느 때는 천주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가진다.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지방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후론하겠지만 이 말도 거짓된 말이다: 필자주). 우리는 천주교 안에, 교파들 안에, 독립된 단체들 안에, 피로 씻음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참된 믿는 이들이 많다고 인정하며 그 분들을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받습니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이제 반대로 천주교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하는 내용을 들어 보자. “계시록 17장에는 큰 성 바벨론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를 위주로 한 종교적 체계를 말한다. 구약의 바벨론은 모형일 뿐이지만 신약의 큰 성 바벨론은 실제의 것이다.  … 오늘날 큰 음녀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큰 음녀의 딸들은 누구인가? 이것이 로마 가돌릭 같은 류가 아니라면 이 말이 누구에게 적용될 수 있겠는가?“(교회와신앙, 97년 3월호).
물론 다른 변명이 있을 것이나 모순되다는 것이다.

2. 대답해야 할 다른 문제들
(1)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지면의 제한성을 너무 많이 말하였다.
논쟁이란 평형이 맞아야 한다. 지난 호(교회와신앙, 97년 9월호)에 윗트니스 리편에서는 그 전에(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필자가 썼던 원고의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원고를 보내 왔다. 필자는 200자 원고지 130매를 사용하였으나 윗트니스 리편에서는 무려 180매를 사용했다. 그러니 50매나 더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본지에 지면을 허락하였다. 그것은 진리는 힘에 의하여 좌우되기보다는 진리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 동안 본지의 방침인 반론권을 보장한다는 취지를 흐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데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전호에서 ‘지면의 제한성‘을 여러 번 호소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어이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지면의 한계성을 호소하지 않았다면 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저들이 지면이 부족하다고 말을 너무 자주 하는 것은 본 논쟁의 원래 취지였던, 즉 자신들의 이단성을 변증하는 점을 망각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교리를 소개하여 정통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고 또 필자를 공격하여 자신들의 이단사상을 은폐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로 보인다. 어쨌든 본호에서 필자도 180여 매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한 번밖에 남지 않은 논쟁이 하나님 앞에, 한국교회 앞에 그리고 독자들 앞에 유익한 논쟁이 되기를 기도하며 다섯 번째 논쟁에 임한다.

(2) ‘정통교회‘란 말을 정의하라는 것에 대하여
필자는 개신교, 기성교회, 정통교회란 말을 모두 사용했다. 그러자 필자가 정통교회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마음대로 하는 추측이지만) 그 뜻을 정의하라고 요구하였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왜 이런 추측과 요구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정통교회란 말 때문일 것이다. 정통교회란 가치가 부여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에 천주교는 천주교를, 개신교는 개신교를, 심지어 안식교는 안식교를 정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점에서는 지방교회(회복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본다(놀라운 것은 회복교회에서 기성교회를 가리켜 정통교회라고 말하는 기록이 있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 필자는 필자가 존경하는 초대교회의 교부 이레니우스의 정통에 대한 견해를 취하겠다. 정통이란 성경의 ‘전승‘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서 천주교에서 말하는 외적인 전승이 아니라 내적 전승, 말씀의 전승, 그리고 성령의 전승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개신교를 정통이라고 생각하고 그러기에 개신교회를 정통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3)‘이단‘이란 말을 정의하라는 점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이단이 무엇인지 모르고 “이단이다“, “아니다“고 하였다고 해도, 그리고 필자가 이단이 무엇인지 모를까봐 필자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물었다고 해도 필자는 대답을 하려고 한다. 그대신 필자도 요구한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다음에 ‘이단‘, ‘사이비‘, ‘신흥종교‘, 그리고 ‘유사종교‘란 말에 대하여 신학적(성경적) 정의를 내려 주기 바란다.

필자는 이단에 대한 역사적, 성경적(신학적), 그리고 현실적 정의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입장만 밝히겠다. 이단문제는 교리(교훈: 요이 1:9~10)가 그 본질이다.  즉 이단이란 어떤 교리(교훈)에서 발생했든지 직간접적으로, 결과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을 바꾸어 놓을 때 그것을 이단이라고 한다. 필자가 사용하는 이단이란 말의 개념이요, 그런 관점에서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4)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미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윗트니스 리가 이단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는 그들의 교리가 그렇다. 그들 스스로 지방교회(회복교회)를 정통교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이며 조직적이며 제도적인 기독교에 속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습니다“라고 선명히 밝힌 바 있다(교회와신앙, 1996년 8월호). 비판은 교회론에서 하겠다.

둘째는 자신들을 기독교 내부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정통교회를 기독교 내부라고 표현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5쪽). 자신들은 기독교 내부의 사람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임을 인정한 말이다.

셋째는 실제로 지방교회(회복교회) 교인들이 정통교회 교인들과 교제하지 않음을 필자가 지적했고 저들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변증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정통교회의 교리를 기준으로 할 때 윗트니스 리는 이단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역시 효과적으로 정통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한 전략이요 꾀요 궤계일 뿐이다.

(5)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원론자이다
성도는 성경 중심으로 산다. 변하지 않는 성경을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온전한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늘 성경을 배우고 연구하며 또한 모든 일에 성경의 비판을 받으며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이다. 그리고 그 깨달은 진리를 가지고 신앙의 규범을 삼고 또 그것을 교리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과 교리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또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교리는 분명히 성경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교리에다 성경적인 가치를 부여해도 안 되지만, 반대로 교리와 성경을 이원화해도 안 된다. 만일 성경과 교리를 이원화한다면 그는 절대로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자로 바른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 우리의 깨달음은 성경 자체는 아니다. 그리나 그 깨달음을 통하여 교리를 만들고 또한 그것을 우리의 신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런 점에서 장로교의 신앙의 원리도 하나의 교리요, 또한 지방교회(회복교회)의 신앙의 원리도 하나의 교리이다. 단지 서로 자기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필자는 교리에다 성경과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교리와 성경을 따로 나누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자가 믿는 교리는, 그것이 교리화되었든 교리화되지 않았든, 성경적이라고 믿기 때문이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단 문제는 성경적인 문제라는 말과 교리적인 문제라는 말은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만일 교리적 믿음, 성경적 믿음을 따로 나눈다면 그는 이원론적인 믿음을 가진 자로서 절대로 바른 신앙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교리적 믿음과 성경적 믿음, 둘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신앙에는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리와 성경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교리도 성경을 기초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인데도 성경적으로 밝히라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윗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하여는 교리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모순점과 그 이원성을 증명하고 비판해 보겠다.

윗트니스 리는 성경적인 것과 교리적인 것을 나누지 않고 성경적인 것만 취급한다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삼위일체‘란 말이나 ‘이단‘이란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말을 하려면 그것이 교리적인 의미인지 성경적인 의미인지 먼저 밝힌 후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사용할 때는 교리적인 의미요 자신들이 사용할 때는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이는 교만과 무지의 극치이다.

그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이 점이 더 선명해 진다. 즉 윗트니스 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분명히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인격‘이란 말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직접 인용해 보자.

“최삼경 목사가 문제를 제기한 용어들인 ‘인격‘이니 ‘격위‘니 또는 ‘페르소나‘니 하는 말들은 성경 용어가 아니다. 그것들은 신학자들이 편의상 지어낸 말들이다. 그리고, 인격과 위격 또는 격위는 모두 한 단어(헬라어의 페르소나(Persona), 영어의 펄슨(Person)를 번역한 것이다. 양태론으로 오해되기 쉬운 단어도 최목사가 지적한 ‘위격‘이란 단어가 아닌, ‘프로소폰(얼굴)‘ 또는 ‘존재의 양식‘이란 단어이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4쪽). 삼위일체 논쟁에서 말하겠지만 분명히 성경 용어가 아님을 알면서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원론적이란 말이다. 필자에게 성경적으로 말하라고 다그치기 잘하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 점에 대하여 어떤 말로 변명을 하는지 다음호에서 들어 보겠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인격이란 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며,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양태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 없는 용어를 교리화하여 사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위일체(삼일 하나님) 교리이다. 칼빈도 처음에는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러나 성경에 삼위일체란 말은 없지만 삼위일체 사상이 있기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점은 윗트니스 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경에는 ‘삼일 하나님‘이란 말은 없다. 그런데도 윗트니스 리가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삼일 하나님이란 용어는 성경적이고 정통교회에서 사용하는 삼위일체는 교리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는가? 필자는 역사적인 교회가 믿고 있는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이란 점에서 한 점의 의심도 없다. 그런 관점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은 변형된 양태론이라고 본다.

필자에게서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처럼 신학과 성경을, 교리와 성경을 구별하여 요구하고 증명하는 경우를 본 일이 있는가? 그러나 저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교리와 성경을 나누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큰 모순 중에 모순이다. 예를 들어 저들의 입장으로 보면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적이라기보다 교리적인 것이라고 해야 맞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란 말도 ‘삼일하나님‘이란 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들이 위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교리적인 논쟁을 성경적으로 하자는 것인지, 성경적인 논쟁을 교리적으로 하자는 것인지, 또는 교리적인 논쟁 따로 성경적인 논쟁 따로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필자는 성경 66권을 전적으로 믿는다. 필자가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은 개신교의 보편적인 교리와 장로교의 교리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교리는 성경 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교리를 성경과 동일한 수준에 두지 않지만, 저들처럼 성경과 교리를 이원론적으로 나누지도 않는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자신들은 성경적이요 정통교회는 교리적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필자에게 장로교의 안경을 운운할 때에도 그러했다. 필자가 보기에 분명히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나 지방교회(회복교회) 교인들은 윗트니스 리가 주장한 가르침들은 하나의 사상이요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곧 성경이라고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의 교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공연히 그렇게 주장을 하지 않더라도 무언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신격화된 교주임에 틀림이 없다.

3. 교리적인 부분에 대하여
(1) 삼위일체 논쟁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삼위일체 문제에 있어서 주장했던 초점은 두 가지로서 필자가 삼신론자란 것이요 그리고 윗트니스 리는 양태론자가 아니란 것이다.

1)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한 점에 대하여
필자를 삼신론자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필자가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삼신론이란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세 영들이란 용어를 분리의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삼신론이라는 것이다. 하나씩 변증하겠다.

① 필자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내재를 부인하지 않으며 본질의 단일성을 믿고 인격의 구별성을 믿는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을 다시 들어 보자. “최목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예를 들어보자. 한 하나님 속에 두 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 결국 서로 교제하고 대화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 속에서도 얼마든지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교회와신앙, 97년 6월호, 164~165쪽). 위 말은 무슨 뜻인가?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는 계시지만 지상에 계신 예수님 안에는 안 계시다는 말이다. 또는 인격이신 아버지는 하늘에 남아 계시고 본질로만 아들과 함께 한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아버지는 보내시는 분으로서 하늘에 남아 계시고 보내심 받은 아들만 아버지와 떨어져 땅으로 왔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점이 최목사가 삼신론자임을 증명한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5쪽).

세 가지로 나누어 대답하겠다.
첫째, 필자의 말로 하나님의 상호내재를 부정한다고 말한 일이 한 번도 없는데 필자의 말을 그렇게 해석하고 몰아 세운 것이다. 이 점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로도 확인될 수 있다. 전호에서 저들이 이런 가정을 했다. “최목사는 성령님을 영접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7쪽). 이 말은 필자가 상호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한 말이다. 말일 필자가 상호내재를 부정한 일이 있고 그렇게 확신한다면 이런 가정은 가정으로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가정인 것처럼 저것도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그리고 저들은 필자의 신학적인 배경을 알고 있다. 필자의 교육적 배경이 삼위의 상호내재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피하기 위하여 만든 가정이다. 그 동안 필자는 얼마나 여러 번 ‘한 본질‘의 하나님을 말하였던가? 그런데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저들에게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본질의 하나님을 말하고도 삼신론자가 된 경우가 기독교 역사 속에 있었는가?

둘째, 위의 말에서도 필자가 삼위의 상호내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해 보자.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했다. 이 말이 삼신론을 의미한다면 필자는 삼신론자가 되겠다. 분명히 인격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이라고 제한하여 말하였다. 이 점에 대한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분명히 한 인격으로서의 내재요 결합이라면 이는 양태론이다. 그리고 그것을 삼신론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분명히 삼신론자가 되겠다.

셋째, 문제는 단순해졌다. ‘인격‘이란 말로 하나님을 정의할 때 ‘세 인격‘이란 말도 가능하고 ‘한 인격‘이란 말도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삼위일체를 정의하면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요 그렇게 하면 그것이 양태론이란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삼위의 상호내재성을 한 인격으로써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논쟁의 초점이 좁혀졌다. 후론하겠다.
지금까지 기독교 내에서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단이 된 사람이 있었는가? 기독교 외부에 다신교의 측면에서 삼신론 사상이 있었지만 내부에서는 없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다음에 꼭 기독교 2천년 속에서 기독교 내부로부터 삼신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이 된 사람 중에 필자와 유사한 사람이 있었는지 밝혀 주기 바란다. 그런 하나님으로는 아예 믿을 수도 없다.

필자가 자신들을 양태론자라고 말하자 삼위일체 자체가 비밀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하면서, 때로는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로 그리고 삼신론자로 비난을 받았던 교회의 역사가 있었다고 말하였다(97년 7월호 159쪽). 먼저 필자가 몰라서 묻는다. 언제 누구를 통해 어거스틴이 양태론자로 그리고 삼신론자로 공격을 받았는지 역사적 자료를 다음호에 밝혀 주기 바란다. 자신들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복잡성을 몰라서 한 말이고,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하는 것은 그 복잡성을 다 알고 했다는 말인가 의심스럽다.

② 둘째로 필자는 세 인격의 하나님도, 본질적으로 연합의 하나님도 부정하지 않지만 분명히 ‘세 인격의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으며 ‘한 인격의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삼신론을 의미한다면 필자는 삼신론자가 되겠다.

삼위일체에는 분명히 3의 의미와 1의 의미가 있다. 3은 분리의 의미요 1은 연합의 의미이다. 그래서 신학의 흐름에 따라서 3을 강조하는 곳도 있고 1을 강조하는 곳도 있다. 즉 동방신학은 3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서방신학은 1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몰트만 같은 사람은 3을 강조하다 보니 삼신론적이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삼위일체 신학(신앙)을 보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인격이란 말로 3도 되고 1도 된다면 필자는 삼위일체 교리는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교리는 불가지론적인 교리이기 때문이고, 역사적 교회는 그런 불가지론적인 교리로 이단을 가장 많이 규정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윗트니스 리는 삼위 하나님을 ‘한 영‘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분명히 ‘한 인격‘으로서의 ‘한 영‘이라고 하면 양태론이요 단지 ‘한 영‘이란 말을 본질에 대한 말로 했으면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는 ‘한 영‘이란 말을 본질의 의미가 아니라 인격의 의미로 사용했음을 충분히 증명했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157쪽). 그런데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의 말은 듣지 않은 것처럼 귀를 막고 위선을 부리고 있다. 다음 항에서 더 변증하겠다.

2)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증한 점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전호에 한 변증에 의해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은 양태론임이 더 선명해졌다고 본다. 분명히 윗트니스 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으로 말하였고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를 옳다고 변증했기 때문이다. 이를 선명히 하기 위하여 또 다시 직접 인용해 보자. 윗트니스 리의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윗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1993, 52쪽). 그리고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이다. “그러나 ‘영‘이라는 단어는 상황이 다르다.

‘영‘은 성경 용어이며 그 사용법에 엄격한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이 만든 용어인 ‘세 위격(또는 인격)‘도 분리의 의미로 쓰면 삼신론이 된다. 즉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세 하나님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4쪽).

위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한 영‘은 ‘한 인격‘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세 위격(또는 인격)도 분리의 의미로 쓰면 삼신론이 된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다시 말한다. 필자는 한 본질의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도 한 인격의 하나님이시며, 예수님도 한 인격의 하나님이시며, 성령님도 한 인격의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처럼 만일 삼위 하나님이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첫째, 각각 하나님은 온전한 인격의 하나님이 아니라 1/3쪽의 하나님이란 말이 된다. 하나님의 인격이 셋도 되고 하나도 된다면 하나님은 손오공처럼 열 명도 되고 천 명도 되는 마술을 부리는 분이란 말이 된다. 그러나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 한 분이 온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각각 1/3쪽의 하나님 셋이 모여서 온전하신 하나님이 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코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 하나님도, 성령님 하나님도 각각 온전하신 한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세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왜냐? 인격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삼경이라는 사람의 인격은 하나이다. 그런데 목사 최삼경이와 교수 최삼경이가 싸움을 하거나 대화를 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나 자신과 대화하고 나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가 한 인격의 하나님을 말한다면 기독교는 무질서한 종교가 된다. 사도신경으로 예를 들어 보자. 이렇게 시작된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이다.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해도 무관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예수님을 믿사오며 …“ 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성령님을 믿사오며 …“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한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양태론자이다. 그리고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성령님 하나님께서 동정녀에게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해도 된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양태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을 단일 인격으로 보는 양태론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창조의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라고 사도신경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 예수님도 성령님 하나님도 거기에 참여하셨다고 본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본질적인 속성에 있어서 하나요 그리고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은 예수님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사도신경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 하나님이 참여하셨다. 왜냐?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은 성령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속에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 예수님도 계신 것을 믿는다. 그 이유는 삼위 하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기도로 예를 들어보자.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기도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게 된다. “성령님 하나님! …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예수님 하나님! … 성령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그래도 아무런 잘못이 없게 된다. 저들의 말처럼 삼위 하나님이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말이다. 윗트니스 리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것은 바로 양태론적 삼위일체관과 신인합일주의 사상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셋째, 역사적으로 ‘인격'(페르소나: persona)이란 말을 본질의 단일성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일이 없다.
삼위일체에 대하여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과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 외에는 없다. 그런데 ‘인격‘이란 말은 동방교회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오직 서방교회에서 사용한 말이다. 윗트니스 리도 이 말을 사용했으니 알고 있을 것이다.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를 나타낼 때는 ‘우시아‘란 말을 사용하였고, 셋을 나타낼 때는 ‘휘포스타시스‘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서방교회에서는 하나를 나타낼 때는 ‘서브스탄티아‘를 사용했고, 셋을 나타낼 때는 ‘인격‘(페르소나: persona)이란 말을 사용했음을 이미 밝혔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156~157쪽).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 좁혀졌다. ‘인격‘이란 말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한 영‘이란 말에 대하여 3의 구별성을 의미하지 않고 1의 단일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함으로 피해갈 수도 있다. 사실 윗트니스 리는 ‘한 영‘이란 말을 분명히 ‘한 인격‘의 의미로 사용했음을 증명했고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음이 앞의 논쟁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인격‘이란 말은 본질의 단일성을 말할 때는 사용할 수 없다. 오직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진 자외에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인격‘이란 말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란 점과 이종성 교수의 ‘인격이라고 번역하면 원문의 뜻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말을 빌어서 적당히 도망가려 하였다. 변증하겠다.

먼저, 그렇다면 인격이란 비성경적인 용어를 왜 사용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어디에서 인격이란 말을 가져다 사용했는가? 가능성은 세 가지이다. 성경에서 가져다 사용했든지, 아니면 신학적인 용어로 사용했든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서 사용했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해도 다 틀렸다. 먼저는 성경을 강조하고 성경적으로 하자고 말하는 사람으로 성경에 없는 말을 가지고 그렇게 중요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면 윗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이요 그리고 모순된 행위요 그리고 이원론적이란 말이다. 만일 신학적인 용어로 인격이란 말을 사용했다면 분명히 양태론자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별도의 의미를 만들어 사용했다면 그것부터가 지방교회(회복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이요, 그리고 그 의미를 정의했어야 할 것인데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모두 엉터리이다. 윗트니스 리의 책에 ‘인격‘이란 말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말한 것처럼 ‘인격‘이란 말을 ‘자유와 책임을 가진 존재‘라고 정의한다면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필자는 이종성 교수의 말에 대하여는 변증하지 않겠다. 그러나 필자의 정의는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맞는 정의라고 본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 점에 대하여 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인격‘이란 말을 모르고 쓰고 있기 때문이든지 또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면 양태론적인 입장이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한 학자인 이종성 교수의 말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자란 증거요, 그러기에 필자를 삼신론자로 볼 수밖에 없는 증거이다.

여기서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기막힌 모순을 하나 더 증명해 보자. 필자는 ‘영성‘이란 말과 ‘영‘이란 말이 같지 않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영‘이란 말을 ‘인격‘이란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그러기에 ‘영‘을 ‘성령‘으로 이해해서도 안 됨을 충분히 밝혔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인간관을 말하면서 죄도 인격성이 있다고 말하였다. 인용해 보자.

“죄(Sin)는 육체 안에 거하고(롬 7:20), 왕노릇하고(6:12), 주관하고(6:14), 살아나고(7:9), 기회를 얻어 속이고 죽인다(7:11). 이러한 것은 다 ‘죄‘의 인격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4쪽). 위의 말과 삼위일체를 연결해 보자면 이런 우스운 논리가 생긴다. 즉 죄에게 ‘인격성‘이 있다는 말과 죄가 ‘인격‘이란 말이 같은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면 지옥에 갈 존재는 사탄이 아니라 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죄도 인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과 ‘영성‘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영성‘이란 말과 ‘인격성‘에 대한 이해이다.

Ⅱ. 교회론에 나타난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
1. 교회론에 대한 변증 중에서

(1) 교회의 조직(교파)과 교회 성도들을 구분한다는 말에 대하여
그 동안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자신들의 교회관에 대하여 정통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했던 말들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미 지방교회는 역사적이며 조직적이며 제도적인 기독교에 속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고 했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134~135쪽). 다음으로는 “지방교회측은 기독교 안에 있는 참된 믿는 이들에 대해 그 분들이 어느 교파에 소속해 있든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중하며 사랑한다“고 했다(97년 3월호 136쪽).

그러면서도 “다만 성경의 진리를 말해야 할 경우(특히 성경을 해석할 때), 윗트니스 리는 기독교 안의 믿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고 항상 ‘기독교의 비성경적인 상태‘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지하기 바란다“고 했다(교회와신앙, 97년 3월호, 136쪽). 그리고 “계시록 17장에는 큰 성 바벨론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를 위주로 한 종교적 체계를 말한다“(교회와신앙, 97년 3월호, 137쪽)고 하여 기독교를 포함하여 바벨론 음녀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시인하였다. 그런면서 “윗트니스 리는 ‘교회조직(교파)‘과 ‘교회 성도들(Person)‘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후자는 성경에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6쪽).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첫째, 스스로 밝힌 바에 의하면 정통교회에서 볼 때 교회론에서도 이단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통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다음호에 ‘거룩한 공회‘에 대해 말이 많을 것으로 추측한다). 역사적인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더욱 정통교회에서 윗트니스 리가 이단일 수밖에 없는 말이다. 스스로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이요, 역사적인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들이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 아니기를 원할 수 있는가?

둘째, 조직과 교파와 체계가 바벨론이요 음녀라면 그 조직과 교파와 체계가 정죄받으면 될 것이다. 조직과 교파는 사람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직과 체계는 단지 사람이 만든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는 확신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조직과 체계 자체도 성경적인 것으로 믿는 것이 정통교회이다. 지방교회(회복교회)의 조직과 체계는 그렇지 않은가? 윗트니스 리가 가르친 조직과 체계는 조직과 체계가 아니라는 모순된 소리를 하겠는가? 아니면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귀신같은 소리를 하겠는가? 아니면 그것은 성경 자체라는 교주같은 소리를 하겠는가?

셋째, 이는 말장난이요 ‘네모난 삼각형‘ 같은 소리다. 이는 한편으로는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란 정죄를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통교회를 음녀 바벨론으로 보게 하고, 나아가 정통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자는 잔꾀에서 나온 말로 들린다. 사람이 없는 조직이란 필요도 없는 것이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산주의를 비판할 때 그 공산주의적 사상을 따르는 사람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비록 공산주의 정권 아래 있어도 그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방교회(회복교회)를 다니면서도 윗트니스 리의 사상을 몰랐건 반신반의했건 핵심적인 부분에서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필자는 보았다. 그는 비록 외적으로 형식적으로 회복교인이지만 내적으로 회복교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회복교회를 이단이라고 정죄할 때의 의미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유치하지만 그 말을 역으로 하자면 이렇다. 필자는 비록 윗트니스 리를 이단의 괴수라고 보고 있지만 또한 그의 사상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을 같은 의미로 정죄하지만 그러나 회복교회 안에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형제로 보고 있다. 이는 필자가 이단으로 생각하고 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도 동일하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최삼경 목사는 윗트니스 리가 교파안의 성도들을 저주하고 욕했다고 말했다. 이 어떠한 거짓말인가!“(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6~167쪽)라고 말했다. 필자가 윗트니스 리가 교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저주하지 않았는데 거짓말로 했다는 말이다. 그 사실 여부는 다음 항에서 거론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윗트니스 리가 교파와 성도들을 구별해서 욕했느니 욕하지 않았느니 말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필자도 역으로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필자가 윗트니스 리와 회복교회를 이단이라고 하였지만 이런 말이 가능하다. “언제 필자가 회복교회 교인들을 이단이라고 저주한 일이 있는가?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에 있는가!“ 필자가 회복교회를 이단이라고 하고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할 때에는 그의 사상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입을 가지고 이런 괴변을 결코 말할 수 없다고 본다.

(2) 개신교인들이 서로 오고가며 예배를 드리고 교역자가 서로 사역지를 옮길 수 있다면 구태여 교파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말(97년 9월호, 153쪽)에 대하여
위의 말은, 필자가 지방교회 교인들은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받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실제로 개신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현실 자체가 그들이 정통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고 지적한 말에 대한 변호이다. 동문서답식 말이지만 조금 생각해 보자.

우선 필자가 말한 ‘정통교회와 회복교회 사이에 서로 넘을 수 없는 담이 있다‘는 말에 대한 간접적인 시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왜 이렇게 회복교회 교인들은 정직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솔직히 “회복교회 교인들은 정통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정통교회를 부정한다“고 말한다면 정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는 성경적으로 모든 교회와 교인들은 사상과 제도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로 일치할 때에만 하나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하나만 성경적이요 다른 것은 다 음녀요 바벨론이라고 보는가? 그렇게 본다면 역시 이단의 교주 같은 안목일 것이다. 필자는 장로교의 제도와 사상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에 장로교 교인이지만, 그러나 감리교나 침례교의 사상과 제도는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넓은 의미에서 같은 형제라고 본다는 말이다. 같은 장로교라도 그 안에서 교단마다 또는 심지어 사람마다 사상이 다를 수 있다. 필자의 친한 친구라도 필자와 다른 사상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한계 안에서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한 나라에 도(道)가 나누어져 있다고 국경이 나누어진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정통교회와 지방교회(회복교회)에는 부자와 나사로가 오고 갈 수 없는 것 같은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심지어 필자가 예장 합동측에서 공부를 하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현재 예장 통합측에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을 “합동측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눈에 좋고 바람직한 일로 보일지, 아니면 이익을 따라 옮겨 다니는 기회주의자로 비칠지는 속단할 수 없는 일 아닌가?“(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3쪽)라고 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인격이 의심스럽다. 전혀 관계가 없는 합동측 사람들의 생각을 추측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비인격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같은 형태로 말을 함을 독자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런 말을 하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를 회복 교인들이 논리도 구별을 못하는 저질스런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볼지, 안 볼지 속단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어쨌든, 바로 필자가 합동측에서 통합측으로 와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통교회와 지방교회(회복교회)의 차이란 점을 잊지 않기 바란다.

(3)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가 정통교회 교인들의 적개심을 선동한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그것의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미련에 속한다. 먼저, 필자가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보는 주관적인 진실을 알고 있다면 이런 말은 무익한 말이 아닌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 같으면 내 자식이 해로운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면 감정선동은 하지 않고 먹지 못하도록 하겠는가? 그렇게도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을 그토록 신랄하게 저주하신 점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4) ‘교회 문제가 90% 목사의 책임‘이란 말을 인용하는 점에 대하여
먼저, 위의 말은 정통교회 목사가 정통교회 목사의 자성과 회개를 촉구하며 한 말이다. 이단들에게 정통교회 교회가 이렇게 잘못됐으니 정통교회가 잘못됐고 이단들이 맞다는 뜻에서 한 말이 결코 아니다.

다음으로, 역시 지방교회(회복교회) 교인들이 정통교회와 한 형제가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만일 한 형제였다면 그것을 가지고 정통교회를 비난하는 말로 인용하지 않고 오히려 아파하고 회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잘못됐다고 내가 옳은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이단들은 정통교회의 약점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인용한다. 그래서 이단들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부정적인 도구라고 본다. 필자는 정통교회 안에 많은 잘못이 있음을 알고 있고 아파하고 회개하고 있지만 그 문제로 이단에게 송사를 받아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떤 부모라도 내가 내 자식의 잘못을 지적하고 또 채찍을 가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고 채찍질 당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할 때 채찍질하시지만 또한 그 하나님께서 싸매어 주심과 같다.

(5) “오 주 예수여!“를 주문처럼 외우지 않는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고전 1:2; 딤후 2:22) 지방교인들처럼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정통교회 교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지만 “오 주 예수여!“라고 회복교회 교인들처럼 부르지는 않는다. 저들은 또한 “오 주 예수여!“를 외움으로(부름으로) 주 예수님의 부요함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5쪽).

그러나 정통교회 교인들 중에 회복교회 교인들처럼 “오 주 예수여!“를 외우지 않아도 풍성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더 많음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필자가 주문처럼 외운다는 말이 기분을 상하게 해서 이런 변증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떤 주문은 그냥 마음의 진실과 관계 없이 형식적으로 외워도 된다는 그런 주문도 있는가? 정통교회 교인들이 보기에 주문처럼 외운다 그 말이다.

2. 윗트니스 리가 주장하는 교회론의 실상은 무엇인가?
이미 윗트니스 리의 교회관과 정통교회에 대하여 가지는 입장은,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정통교회 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기 위하여 은폐한 부분을 제하고, 그 사상이 충분히 나타났다고 본다. 하나씩 변증할 가치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 사실 자체를 나타냄으로 우선 충분하다고 본다. 예컨대, 목사제도에 대한 저들의 입장이 너무나 형편없는 것도 이에 속한다. 지면 관계상 사상을 소개만 하고 필요하다면 다음호에 비판을 하도록 하겠다.

(1) 윗트니스 리에게 있어 교회의 직분이 다르며 목사를 부정하며 장로의 개념이 다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목사라는 제도보다 계급적인 목사를 부정한다고 했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7쪽). 정통교회에서 목사제도를 계급적인 의미로 말하는 목사론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목사제도 자체를 말하는가? 아니면 그 실제를 말하는가?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사도제도를 만드실 때 가룟유다같이 되라고 만드신 제도가 아닌데도 가룟유다가 생긴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룟유다의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회복교회 제도가 회복교회 지도자 중에 그런 사람이 절대로 생기지 않도록 그것을 보장해 준다면 우리 모두 정통교회 제도를 버리고 회복교회 제도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인간 자체의 약점으로 안다. 다음호에 목사제도를 계급적으로 만들었다는 목사론을 꼭 좀 소개해 주기 바란다. 이단자에게 이런 고백을 하는 자신이 우습지만, 필자는 섬기는 목사로 살려고 늘 자신과 싸우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미 이들이 정통교회의 목사제도와 장로개념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 확인은 충분히 됐기 때문에 내용을 조금 소개하겠다. 저들은 목사제도 자체를 다스리는 제도로 보고 있다.

“성경 안에 교회를 다스리는 목사가 있는가? 교회 전체의 책임을 지고 성도들을 키우며 목양하는 사역자가 있는가? 없다. … 성경에 있는 교회 안에는 오늘날의 목사나 변질된 목사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워치만 니, 사역의 재고, 1988, 240쪽), “장로는 지방에 있는 형제이므로 다른 곳의 교회를 다스리기 위하여 다른 곳에서 사람을 그 곳에 파견하는 모든 방법은 다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위의 책, 242쪽),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 사역자의 위치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형제이다“(위의 책, 255쪽).

(2) 윗트니스 리는 기성교회 예배를 부정한다
여기에서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현웅 목사가 정통교회의 예배의 갱신에 대하여 쓴 글을 인용한 일이 있다(교회와신앙, 97년 9월 169쪽). 앞에서 ‘교회 문제가 90% 목사의 책임이란‘ 말을 인용했던 점에 대하여 변증한 내용을 여기에서도 그 대답으로 취하고, 지방교회측이 정통교회의 예배를 부정하는 글을 인용하겠다.

“이런 집회(정통교회의 집회를 말함: 필자주)는 한 사람이 말하고 모든 사람이 듣는 집회이다. 이런 종류의 집회는 지방 교회의 범위 안에 없다. … 성경은 교회자체가 일방적이고 능동적인 이런 집회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렇게 예배하는 식의 집회가 이미 교회 집회가 되어 버렸고 또한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집회가 되어 버렸다. 거의 모든 교회가 이런 집회 위에 세워져 있고 이것이 없으면 교회가 곧 무너질 것 같다. … 그러나 성경대로 본다면 이것은 수동적인 것이고 죽어 있는 상태이다. 그는 일년 52 주일마다 예배당에 가서 말씀을 들었지만 아직 교회에 온 적이 없는 것이다“(워치만 니, 사역의 재고, 1988, 251쪽),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는 무엇이고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는 무엇인가? 원탁형의 집회는 다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이고 강단이 있는 집회는 다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한 지방 교회 안에서 첫 번째로 폐지되어야 할 것은 강단의 이런 집회이다. … 강단의 집회가 폐지되지 않는 한 지방의 집회는 있을 수 없고 지방 교회 또한 자랄 수 없게 된다. 강단의 집회는 사도가 있을 때만 가질 수 있고 사도가 없을 때에는 가질 수 없다. 사도가 메시지를 전하고 떠난 후 그런 집회는 즉시 끝나야 한다“(위의 책, 257~258쪽).

지면상 평가는 하지 않아도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넘어가겠다.

(3) 윗트니스 리는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한다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하는 내용을 들어보자.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는 이 점에 있어서는 다 문제가 없다. … 그러나 누구든지 믿기만 하고 침례받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구원받지 않은 것임을 기억하라“(워치만 니, 그리스도인50 필수과정I, 1989, 11쪽),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며 이것이 정통 기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위의 책, 14쪽), “하나님의 구원의 각 방면 중 어떤 것은 사람이 믿음으로 얻을 수 있고 어떤 것은 침례받음으로 참여할 수 있다. 믿고 침례받아야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윗트니스 리, 진리공과-제1단계 제3권, 1987, 88쪽).

옳고 그름을 비판할 지면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통교회의 세례(침례)관과 다르다는 것이요 결국 구원관도 다르다는 말이다.

(4) 지방교회측은 한 지방에 1개 교회만 있어야 한다는 모순된 소리를 한다
“지방은 군과 같이 크지 않고 구와도 같이 크지도 않으며 한 나라와 같이 크지도 않고 사람들이 한 군데 모여 살고 있는 하나의 행정 단위만큼 큰 것이다. 이런 지방이 성경 안에 있는 교회의 경계이다“(워치만 니, 사역의 재고, 1988, 98쪽), “지방보다 더 작은 것도 지방 교회가 아니고, 지방보다 더 큰 것도 지방 교회가 아니다“(위의 책, 99쪽), “지방 교회의 행동은 반드시 모든 교회들에게 유익이 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다른 방면에서 지방 교회는 절대적으로 독립적이므로 지방 교회의 결정은 유일한 결정이다. 지방 교회의 결정은 최고의 결정이고 최종적인 결정이다.

지방 교회 위에 다른 기관이 없고 그 아래에도 다른 기관이 없다. … 또한 다른 교회들보다 더 높은 조직과 권위를 가진 교회는 하나도 없다. 성경은 다른 교회들보다 더 높은 권위가 있는 어떤 지방 교회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기독교가 이 땅 위에 있는 최고의 조직과 기관으로서 이 땅에서 이보다 더 낮거나 더 높은 조직이나 기관은 없다“(위의 책, 109~111쪽).
역시 평가할 지면이 없다. 단지 노회나 총회제도를 부정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5) 정통교회를 바벨론이라고 한 내용들
제도가 어떠니 성도가 어떠니 하지만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시록 17장에는 큰 성 바벨론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를 위주로 한 종교적 체계를 말한다. … 가톨릭교는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어떤 것에게로 갔다. 같은 원리로 타락한 개신교 교회들도 역시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 분이 아닌 다른 것에게로 갔다“(윗트니스 리, 주의 회복에 관하여, 1990, 12~13쪽), “오늘날 기독교가 그렇게 가련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 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개신교와 그 밖에 이교와 연루된 모든 단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벨론인들이다.

음녀들의 어미의 천주교 교회는 큰 음녀요, 그 밖에 모든 바벨론 단체들은 그 딸들이다.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 곳에 없다. 그 분이 우상 숭배와 이교주의로 가득찬 곳에 거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윗트니스 리, 성경의 핵심, 1991, 94~95쪽),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분열과 혼돈으로 가득 차있을 뿐 아니라 우상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기독교는 전통으로 충만하다, 전통은 허위요 허위는 공허하다. 허위는 또한 일종의 우상 숭배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뭔가 헛된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오늘날의 기독교에 적용해 본다면, 기독교의 상황이 정확히 바벨론과 같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음녀로부터 나와서 예루살렘 곧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위의 책, 103쪽).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과 동일하다. … 왜냐하면 오늘날 죽어 있음 때문이다. 죽은 가르침들, 죽은 집회, 죽은 교회들, 죽은 지식, 죽은 메시지들, 죽은 책들, 심지어 죽은 성경! … 오늘날 기독교는 죽어 있다! 그것은 죽은 종교이다. … 우리 모두에게는 돌이킴이 필요하고 돌이켜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기독교로부터 분별될 필요가 있다“(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 10~11쪽).

앞에서 윗트니스 리편의 사람들이 말한 내용이 얼마나 거짓된 말인가를 증명하는 말들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너무나 많으나 생략하겠다. 단지 분명한 것은 윗트니스 리측은 정통교회가 아니라는 점이요, 또한 윗트니스 리가 보는 정통교회는 바벨론 음녀요 죽어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짧은 말로 본호의 결론을 삼겠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에게 ‘필자나 필자가 속한 교단의 윗트니스 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음을 시인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자주 말을 했다. 그러나 오히려 회개하고 사과할 자는 필자가 아니라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이다. 필자의 연구나 교단의 연구는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조금도 균형을 잃지 않은 연구로서 필자의 연구나 교단의 연구가 부족한 것처럼 말한 인신공격적인 말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회개하고 사과해야 할 것이다.

(월간<교회와신앙> 1997년 11월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