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겼노라

은혜의 단비 2008. 9. 16. 10:04
내가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화평을 지니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시더라.(요16:33)

아마도 주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오늘 이 말씀은 두고두고 제자들의 삶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귀한 약속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후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박해와 고난과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척박한 삶속에서도 제자들을 절망하지 않도록 견고하게 붙들어 준 능력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결국 구약의 성도들과도 동일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맺은 특별한 관계에서부터 출발한 민족입니다. 그 약속의 당사자는 놀랍게도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만유를 창조하신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이성과 인식의 한계를 초월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하나님이 오심으로부터 시작되어진 특별한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로 죽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사망 아래 허덕이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심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동등이시며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셔서 죽으셔야 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다시 살아나셔야만 한 놀라운 우주적인 사건은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이루워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의 열두 자손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 온 것이 언약사상입니다. 그 언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약의 성도들에게까지 갱신되었고 그 언약의 중심에 오늘 제자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아주 독특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속에서 면면히 흘러온 변함없는 약속의 확인은 세상의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이론으로나 문화로도 설명할 수 없는 유일함입니다. 본래 죄악으로 부패했고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실낙원의 후예들은 계속해서 번성해 갔습니다만 이미 어그러진 사상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가 회복 불능으로 엉망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죄악의 관영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언약은 취소될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한 백성이요 패역한 나라요 이미 마귀의 종으로 전락해 버린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상상할 수 없는 계획은 흑암의 세계속에 한줄기 빛으로 섬광처럼 내려온 것입니다. 모두가 죄악으로 치우치며 죄악에서 뒹굴고 죄를 먹고 마시며 취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보존되어서 구별될 수 있도록 역사를 주관하시는 섭리속에서 오늘 여기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우리는 미혹과 혼돈 속에서 인간들의 의지와 노력과 열심으로 여기까지 왔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으로 온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지는 자들에게만 열려진 당연한 역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으며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이성적으로 보게 된다면 결코 볼 수 없는 그 영원한 세계의 역사를 우리는 보는 자들입니다. 바로 내 손에 쥐어지고 내가 손을 들어서 펼치기만 하면 훤히 보이는 세계를 성경을 통해서 가까이에 주셨건만 동일한 성경을 열어서 보는것조차 믿음으로가 아니라면 보기는 보아도 못 보는 것이며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귀가 가려져서 듣지를 못하는 것이며 종교적인 전통으로만 볼 수 밖에 없는 한계점으로 오늘날 현대 지성인들에게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아무리 율법서를 연구하고 암송했어도 정작 메시아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우지 못하고 무지한 일반 세리요 죄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며 산상수훈이며 산 떡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도 역시나 자기 지혜를 토대로 바라보는 학자들이나 지도자들은 뻔히 보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눈을 두지 못하고서 자주 전통이나 형식에 얽매여서 성령의 음성과 깨닫게 함을 전혀 못 보는 영적인 시각 장애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보는자들이라고 여기고 주님의 말씀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에게는 오늘의 본문이 사실상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올라 가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조차도 알 수가 없었던 제자들이 알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함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면 그는 틀림없이 거짓의 영에 속은 자요 마귀의 도구일 뿐입니다. 적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공공연하게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으니 개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그는 대적하는 자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살후2:3-4)

그러나 사실은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공통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성도들은 큰 환란과 핍박을 당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려움에 있는 성도들에게 밝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붙잡고 인내하며 견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결같은 사도들의 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디에서도 이러한 고난의 가르침은 없고 평안과 번영과 이생의 자랑과 성공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더이상 성도들에게 삶의 인내나 역경에 대하여 준비하지 못하도록 귀를 막고 축복받기위한 도구로서 말씀을 이용하는 시대로 변한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던 것과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을까요?

이시대의 교회들인 성도들에게 세상 만국의 영화를 보여 주면서 한번만 딱 한번만  나에게 절하면 거져 주겠다는 메세지가 범람을 합니다.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모든 저주와 질병에서 해방되었으므로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현세적인 번영복음으로 당당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마귀가 주께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에게 명하여 빵이 되게 하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시더라. 그러자 마귀가 주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동안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주더라. 그리고 마귀가 주께 말하기를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것들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그것이 나에게 넘겨졌으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내게 경배하면,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리라.”고 하니,(눅4:3-7)

마귀가 주께 말하기를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것들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그것이 나에게 넘겨졌으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내게 경배하면,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리라. 이렇게 달콤하게 유혹하는 설교가 판을 치는 것이 우연일까요? 부자되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며 성공하는 자들의 습관 운운하면서 말씀을 도구로 이용하는 곳에 엄청난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수 많은 무리들이 몰려 올 때에 그곳을 떠나서 홀로 계셨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결코 혼자이기를 싫어합니다.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곳에 섞이기를 원하며 인정받기를 원하며 사람들의 대접 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조금만 인정해주면 더 큰 사역지를 물색하느라 경력을 포장하고 겸손을 가장하면서 더 큰 교회로 청빙되기를 꿈꾸는 현실입니다. 나는 그럴만한 자격과 실력이 있으니 한번 시험해 봐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낮아지심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이 겪은 지독한 고난은 옛날 이야기나 전설이 되었고 지금은 풍성함과 번영과 소돔의 화려함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대입니다. 이미 교회는 등대로서의 소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회칠한 무덤처럼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것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울고 애통할 것이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며, 너희는 슬퍼하겠으나 너희의 슬픔은 기쁨이 되리라.

여기 어디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형통을 말씀하셨읍니까?

잘될것은 꿈도 꾸지 말라 하십니다. 세상은 너희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하십니다. 너희들이 원하는 그런 일들이 결코 없을 것이다 하십니다. 너희는 울고 애통할 것이다 하십니다. 세상은 기뻐하며 너희를 조롱하고 핍박할 것이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형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어떻게 교회만 가면 만사 형통이라고 합니까? 교회안에서 부르는 찬양에도 그렇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부르지요? 세상 부귀와 세상 자랑도 다 버렸네 합니다. 헌금송을 부를때도 그렇지요? 세상 복락 멀리하고 주만 따라 갑니다 하지요? 입으로는 이렇게 찬양하면서 가르침은 왜 세상에서 머리가 되고 사업 번성하고 부자되어야 한다고 할까요? 주님의 말씀과 사단의 말은 완전히 드러납니다. 성경은 그것을 극명하게 밝혀 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저 범사사 잘 될것이다 하며 축복의 말씀을 하시면 좋으련만 고난과 핍박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자들의 처음 모습입니다. 처음의 삶은 이렇게 이미 어둠과 사탄에게 속한 세상에서의 싸움을 해야 하기에 필연적으로 핍박과 어려움에 던져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다음 약속을 세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과 핍박이 몰려 온다해도 성도가 견딜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넉넉하게 승리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화평을 지니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한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 하십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세상의 임금이 쫒겨났습니다.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승리하셨다는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성공이 본질이 아닙니다.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오직 승리입니다. 승리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현실적으로 낙심할 수 밖에 없고 절망할 수 밖에 없고 쓰러질 수 밖에 없지만 아주 쓰러지지 않음은 승리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며 능력이며 권세인가를 아는 자라면 어떤 조건속에서도 평안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승리하신 주님께서 평강의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권세와 영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연약한 소자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의 발걸음과 함께 승리의 노래를 주님께 올리며 본향을 향하여 한걸음 씩 걸어가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런 귀한 약속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글/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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