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재림-박일민 교수
종말론 2015. 7. 27. 23:35
그리스도의 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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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가 있다.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희망이 있다. 날마다 더욱 거룩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피나는 노력이 있다. 그리고 순탄한 경우일지라도, 행여나 넘어질까 항상 깨어 조심하는 경각심이 있다. 이러한 태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바로 이 중요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제 재림에 관한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하자.
재림의 중요성
신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다. 구약에는 456회에 달하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예언들이 있다. 이 많은 예언들 속에는 재림이 함께 예언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욥19:25, 26, 단7:13,14, 슥14:4, 말3:12 등에는 초림과 구별되는 재림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신약에는 재림을 가리키는 말씀이 318회에 걸쳐 등장한다. 이것은 평균 25절마다 한 번씩 나오는 것에 해당된다. 마태복음 24, 25장과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은 그 전체가 재림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 전체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리고 얼마나 확실한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 전체의 교훈을 이해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열쇠와 같다. 그러기에 만일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적인 축복보다도 영원한 세계와 그 곳에서 누리게 될 축복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그 축복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소망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께서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을 향하여,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했다(벧후 3:11, 12). 그 때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오늘을 거룩하게 살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재림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보나 성도들의 실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나 너무나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림의 형태
기독교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주장들이 많았다. 오순절에는 성령이 강림한 사건이나,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건을 재림으로 보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성도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이나, 성도들이 죽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을 재림으로 보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잘못된 추측에서 나온 것이었다.
재림의 정확한 형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다.
첫째는 성경이 재림을 말할 때 사용한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살피는 것이다. 성경은 세 가지의 희랍어 표현으로 재림을 말했다. 파루시아, 에피파네이아, 아포쿠에오가 그것이다. 파루시아는 그 자신의 본체가 다시 나타남을 의미한다. 에피파네이아는 영광스럽게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표현들 속에는 재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영광 중에 다시 임하셔서,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들을 밝혀 드러내시는 것을 가리켜서 재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다. 천사는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다(행 1:11). 따라서 우리는 승천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다음 몇 가지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대신해서 다른 누구를 하늘 나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승천을 하셨다. 재림도 역시 성육신 하시어 십자가를 지셨고 승천을 하셨던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림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시는 것이 될 수 없다. 하물며 자기 스스로를 재림 예수라고 외쳐대는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적그리스도 불과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육체 그대로 승천을 하셨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에도 역시 육체로 오실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 자기의 눈으로 그 모습을 볼 수 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께서는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고 하셨다(계 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는 그의 재림이라고 할 수 없다. 최근 어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앉아 계신다는 자리를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곳을 향하여 한국식 큰절을 하는 등 예의를 표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도록 육체로 오실 그리스도를 너무나도 오해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와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다. 그의 재림도 이처럼 영광스러울 것이다.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모든 족속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다(마 24:30). 그 때에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가 들려 올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이 울려 퍼질 것이다. 그래서 그 영광을 더욱 장엄하게 드러낼 것이다(실전 4:16). 사도 바울께서는 그 모습을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중에 나타나시는" 것으로 묘사했다(살후 1:7).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시다가 하늘로 올라 가셨다(행 1:9). 제자들로서는 미처 예기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와 같이 마치 도적과 같이 생각지 않은 때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한다(막 13:33).. 하늘의 천사들이라도 알지 못한다(마 24:36).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 날, 또는 그 날과 연관된 휴거의 날과 시간을 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날을 감추어 두기 원하시는 하나님보다도 더 큰 능력을 가졌거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보다도 더 많은 지혜를 가진 자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재림의 징조
우리는 재림의 정확한 날과 시간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늘과 땅에서 그 징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때를 짐작할 수는 있다. 재림의 징조들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이 되어진다.
첫째,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세상의 끝 즉, 재림의 때일 것을 의미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직장에서 신우회가 조직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온 세상은 장소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옳다. 예수님께서 재림의 때나 기한과 연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행 1:7). 그러면 땅 끝은 어디일까. 예루살렘일까, 중동지방일까, 남미일까, 시베리아일까, 아프리카의 밀림일까. 우리는 땅 끝을 어떤 특정한 지역에 국한해서 이해할 수가 없다. 지상의 장소는 항상 상대적이어서 어느 한 곳도 세상의 끝이 되어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족속들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다 회개를 하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재림의 날에도 이 세상의 향락에 빠져 있다가 버림을 당할 사람, 산과 바위 뒤에 몸을 숨길 사람, 아궁이에 던져질 가라지나 쭉정이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충분한 분위기에 이르게 될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다.
오늘날은 거의 모든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도회지에 사는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산이나 밀림에 사는 민족, 외딴 섬에는 민족, 심지어는 복음을 강력하게 배척하는 이념이나 종교를 가진 민족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재림이 매우 가까웠다는 느낌을 갖기에 충분하다.
예수님께서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때에 재림을 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속에는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강력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 복음전파에 게을리 하는 사람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의식에 해당한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반드시 복음전파에 나서야 한다. 직접 전도자가 되든지 아니면 간접 전도자, 즉 복음전파를 위해 기도하고 모든 협력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심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3:39).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심은 재림의 징조에 해당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기를,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롬 11:25, 26).
셋째,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재림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하셨다(마 24:24). 사도 요한께서도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라고 말씀하셨다(요일 2:18).
적그리스도에서의 '적(敵)'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대적한다는 의미와 대신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세력이나(요일 4:3),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가장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마 24:23).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불려졌다(요 12:30). 큰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는 짐승으로도 불려졌다(계 13:1 이하). 다니엘 11장에서는 이러한 성질의 적그리스도가 잘 그려져 있다. 반면 그리스도를 대신하기 해서는 그럴싸한 말이나 이론 또는 기이한 표적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게 된다. 심지어는 성도들마저도 미혹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적그리스도는 종교적인 색채를 띄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이나(요일 4:3),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는(요이 1:7) 모두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이러한 적그리스도는 과거 역사 속에 많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께서는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 인줄 알라"고 하셨다(요일 2:18). 그러나 과거에 있었던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다르다. 재림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세상의 정치적인 세력과 종교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닌 인격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여러 인물들이 적그리스도로 지적된 일이 있다. 초대교회의 많은 교부들은 로마의 황제 네로를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상당수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교회들의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품에 표시하는 바코드나 신용카드, 또는 컴퓨터나 유럽 공동체를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 모두가 어느 정도는 적그리스도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을 재림 때에 있을 적그리스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만약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단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재림의 때까지도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림 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적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넷째, 대배교와 대환란이 일어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의 때에 각처에 전쟁, 흉년, 기근, 지진 등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해 달 별과 같은 자연계에도 징조가 생겨날 것이라고 하셨다(눅 24:25).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징조들은 마침내 창세 이후에 없었던 대환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하셨다(마 24:21).
사도 바울께서는 디모데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도들은 이 환란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딤전 4:1). 그리고 이 환란에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은 배교를 하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나타남과 대환란과 대배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징조들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의 귀에는 난리와 전쟁의 소문들이 그칠 날이 없이 들려온다. 지진과 기근, 기상이변 등으로 인한 각종 대재난으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사탄이 가해오는 고난과 그럴듯한 미혹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고 돌아서거나 이방 종교에 빠지는 자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 쉽게 분별하기 어려운 이단과 사이비 주장들이 활개를 치며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성도는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이 모든 상황들은 이미 예언이 되어졌다. 사탄이 세력이 제아무리 강하고, 간교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넉넉히 마귀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귀와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 오히려 성도는 이러한 징조들 때문에 더 큰 소망을 가진다. 이 징조들에 이어질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밤이 깊을수록 아침은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재림의 목적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을 하시는 목적은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 위함이다. 최후의 심판은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것이다. 의인에게는 각자의 행함에 따른 상급이 주어진다. 악인에게는 행한 대로의 형벌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의인들에게 상급을 주고, 사탄과 악인들에게 벌을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신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고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은 재림의 의인의 상급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그리고 계 19:19-21에 나오는 사도 요한의 말씀은 재림이 사탄과 거짓 선지자와 악인의 형벌을 위한 것임을 확인하게 한다.
최후 심판의 대상에는 이미 죽은 자들과 재림 당시까지 살아 있던 자들이 모두 포함된다.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서 최후의 심판에 임할 것이다. 살아 있던 자들은 다시는 죽지 아니할 몸으로 변형되어 심판에 임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있던 자들의 변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때가 이르리니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을 받으리라"(요 5:28, 29)고 하셨다. 또 사도 바울께서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 52)고 하셨다.
성경에 분명하게 예언된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이 가진 최대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승천을 하셨을 때와 똑같이, 육체를 가지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큰 환란이 닥쳐도, 소망 중에서 인내하며 이겨야 한다. 적그리스도를 날 뛸수록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에 더욱 전력을 기우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모든 수고에 대한 보상과 함께 주어질 영광의 면류관은 바로 성도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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