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신자들 / 박신 목사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시30:11,12)


영토와 통상 분쟁 ?왕조들 간의 해묵은 반목으로 17세기 전반부에 30년간이나 전쟁의 광풍이 유럽 전역에 몰아쳤습니다. 그 여파로 기아와 흑사병이 만연하여 일반인마저 수도 없이 죽었습니다. 독일의 아이렌 버그 지역의 마틴 린칼트라는 목사는 하루에 장례식을 50번을 치른 적도 있고 어떤 때는 자기 가족의 장례식도 집전해야 했습니다. 


그런 생지옥 가운데 그분은 66개의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 중에 “다 감사드리세 . 온 마음을 주께 바치세. 그 섭리 놀라와 온 세상이 기뻐하네. 예로부터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지금부터 영원토록.”이라는 시도 있었습니다. 도무지 감사할 여건이 되지 않는 전쟁의 와중에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고 한없는 사랑을 영원토록 받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편의 표현대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었고 상복은 입었지만 찬양의 옷을 덧입었습니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둠이 30 년간이나 끌었습니다. 도대체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몰랐을 것입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끝이 안 보이는 암흑의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을 감안해 보면 거의 전 평생을 절망 가운데 보낸 셈입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찬양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고난이 자꾸 겹치고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면 흔히들 어떻게 반응합니까? 처음에는 당연히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도 고난이 자꾸 겹치면 기도와 동시에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 놓게 됩니다. 그런데도 아무 진전이 없으면 이제는 자기의 잘못을 고치거나 뭔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테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구출해달라는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 금식, 봉사, 헌금, 성경공부, 등등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하나님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의지적으로 감사하고 열심히 찬양도 해보지만 잠시 그 때뿐 변화가 없으면 서서히 체념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 자체를 포기하려니 뭔가 불안해서 교회 활동은 여전히 성실하게 참석은 하지만 아무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때로는 하시니까 이런 고난을 끝없이 주는가보다 단정지어버립니다. 믿음은 이제 허울만 남았고 아무 힘을 발휘 못합니다.


명목상으로는 신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산소 호흡기에만 의존하는 식물 신자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설교 말씀 듣는 것이 유일한 신앙 활동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실제로는 고난을 외면, 부인, 망각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예컨대 30 년간이나 고난이 계속되었기에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돌리지 않는 것만도 그나마 잘하는 일인 양 생각합니다.


예의 린칼트 목사의 경우는 그런 흑암 중에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 좋은 일에만 감사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감사가 절로 되는 일에 감사 못할 신자는, 아니 불신자도 없습니다.  

  

같은 독일 목사로 종교 개혁을 이룬 마르틴 루터에게 있었던 유명한 일화입니다. 카토릭 당국과 홀로 맞서 싸우느라 온갖 음해와 핍박에 시달려 오랫동안 염려와 낙심 속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아내가 검은 상복을 입고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누가 죽었느냐?” 물었습니다. 아내는 곧바로 “하나님이 죽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루터가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아내가 “지금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 죽고 없는 것처럼 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곧 바로 자기 잘못을 깨닫고 다시 개혁의 길에 매진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신자는 완전히 낙망할 수 없으며 또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방치하지도 않습니다.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며 현실에서 실패하여 극도의 실망에 빠질 수는 있어도 완전한 좌절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좌절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범사에 감사는 여전히 잘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신자는 하나님이 언젠가는 이 재앙을 축복으로 바꿔주실 것을 믿기에 그나마 인내는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많은 신자들이 “감사거리에 대해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 당신에 대해 감사하라”는 권면도 잘 알고 실천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30년간이나 침묵하고 있는 것 같다면 도무지 하나님 당신에 대해 그것도 범사에 감사하기는 정말로 힘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해결책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침묵하고 있는 것 같아도 침묵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자라는 지성과 연약한 영성으로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커튼 뒤에서 눈에 안 보이게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시겠지 믿고 감사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인내이지 실제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지 않고 실제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반드시 찾아내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고난을 인간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어 보라는 것입니다. 끝없는 고난을 당하면 인간은 외면, 부인, 망각, 잘해야 인내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관점에선 끝없는 고난이라도 신자를 향한 끝없는 사랑, 자비, 긍휼이며 최소한도 그분의 주권적 섭리입니다.


온 사방에 질병과 죽음뿐이었던 린칼트 목사가 어떻게 찬양할 수 있었겠습니까? 땅에서 절망이 넘치면 필연적으로 남는 것이라고는 하늘에서의 소망뿐입니다. 사람이 당장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죽음의 공포 앞에 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지난 생애를 회개하고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영원을 소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회귀하게 됩니다.


특별히 모든 사람이 똑 같이 죽게 되었을 때에는 그동안 서로 쌓았던 원망과 시기와 죄악들을 자연히 용서 내지 용납해 주게 됩니다. 침몰해가는 여객선에 함께 탄 승객들 간에는 용서와 긍휼이, 최소한도 동일한 고난을 나누고 있다는 동료애라도 나타날 것 아니겠습니까? 온 사방에서 육신은 죽어나갈지라도 영혼의 생명은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루터 목사의 경우에도 자신의 대적을 언젠가는 하나님이 막아주시겠지, 설령 순교하더라도 천국에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만으로 다시 힘을 얻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니까 자기마저 주저앉으면 이제 겨우 작은 불씨가 붙기 시작한 개혁이 틀림없이 사그라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시고 있는 큰일을 자기가 중단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종교개혁이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솔직히 감사거리가 생겨야 감사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적인 인간 습성입니다. 두 마틴 목사님들은 슬픔과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실제로 감사할 거리를 찾았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자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또 그 일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범사를 바라 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따져 볼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범사를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감사가 잘 안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세상에 눈이 가려 하나님 쪽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 탐욕이 있고 세속의 쾌락과 죄악을 밝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를 안 짓고 선한 일을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소망하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잘 보지 못하고 있으니 갑갑합니다.


이제 점점 정답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데 사실 그 답도 간단합니다. 신자가 죄 안 짓고 선한 일을 하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고 또 하나님은 신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가 그런 쪽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그분의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일을 잘 발견할 수 없어 끝까지 침묵하는 하나님으로만 비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 마틴 목사가 고난 가운데 발견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나라에 당신의 백성들로 채워서 당신에게 세세토록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돌려주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자가 처한 환경과 일어나는 범사가 오직 그 목적에 바탕을 두고 섭리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당연히 이 땅의 좋은 것도 채워주시기도 하지만 필요하다면 끝없는 고난도 주십니다. 


감사거리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감사하게 되는 이유는 그 일이 자기에게는 진짜 소중하고 귀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 안 짓고 선해지며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자비를 받는 것도 신자에겐 아주 소중하고 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들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게 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발견하여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더 큰, 아니 진정한 자비이자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섭리를 모든 일에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어찌 다른 데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말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복을 받는 일 외에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면 매사에 감사할 수 없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5,46)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두 말씀을 합쳐서 해석하면,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을 발견하면 당연히 그 마음에 기쁨이 오는데 하나님의 보물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 소유를 다 팔더라도 차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환난 중에라도 정말 귀하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과 섭리를 발견한 자는 환난이 끝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범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서 하나님의 보물을 발견한 자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범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진정한 감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신자가 끝없는 환난 중에 염려와 실망에만 끝없이 빠져 있다면 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외면, 부인, 망각 혹은 인내만 하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억지로 감사하려고 노력해 비슷하게 감사의 흉내를 내고 있으니 믿음이 좋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신자는 침묵하는 것 같아도 일하고 있는 하나님을 범사에서 특별히 환난 중에 발견하고 반드시 감사할 거리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연 신자에게가 아니라 그분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한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묵상해야 하며 그 일을 신자도 정말 그렇게 여기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범사가 오직 그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겸비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장단을 맞춘 자는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찬양을 부르며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마음에 장단을 맞춘 자는 자신의 믿음과 상관없이 진정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는 실종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교회 안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믿음이 좋은 자로 칭송을 받아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죽여서 상복을 입고 있는 신자도 사람들 눈에는 얼마든지 찬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비췰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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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2006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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