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청빙 어떻게 할 것인가?

자료실 2015. 11. 11. 04:49

목회자 청빙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는 사람의 뜻으로 세운 기관이 아니고 사람이 세워가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에게 맡겨졌고 또한 사람에 의해 세워져 갑니다. 교회는 무엇인지, 어떻게 세워졌는지, 어떻게 세워가야 하는지 그 모든 원리와 가르침은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모든 원리와 가르침을 성경에서 찾고 배워야 한다는 것은 구체적 방법까지를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계시이지만 자연과 역사도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민주주의도 수용하고 자본주의 원리도 인정합니다.

 

교회는 민주주의를 수용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해야 하지만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본주의 원리를 인정하지만 자본주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어떤 면에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기 때문에 소수보다는 다수, 다수보다는 진리를 따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일반론에서 이야기 할 때 소수보다 다수, 다수보다 진리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다수보다 소수가 옳을 수 있고, 진리도 순수한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진리 즉 참 진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인식과 판단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성령님께 의존하여 따르는 것은 신비로운 어떤 환상이나 음성을 통해 원리와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계시의 이와 같은 특성은 계시의 역사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시를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밝히 드러내시기 때문에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의 이 계시의 역사성을 존중하십니다. 인간의 역사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계시를 점차 밝히 드러내십니다. 인간이 불완전한 역사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면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행위이지만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와 법과 질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기능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지만 인간의 모든 제도와 법과 사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제도와 사상이 완전하지 못해도 그 나름의 질서가 유질될 때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완전하지 못해도 민주주의 질서가 잘 지켜질 때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도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유지되고 질서가운데서 개혁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제도와 법이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합리적인 질서를 통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기 전까지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쉽게 바꿀 수 있다면 혼란은 감당할 수 없이 심화 될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그런 류의 혼란으로 인하여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는 성경적 원리 위에 세워졌지만, 교파마다 제도와 법과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장로교의 제도와 원리를 성경적으로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장로교회의 특징은 장로주의 또는 장로회제도(Presbyterianis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장로교는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정치의 한 유형을 뜻합니다. 이 제도는 어느 시대에 고안된 혁신적 제도가 아니라 초대교회들에서 사도들에 의한 교회운영의 모델을 회복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 정치를 대의정치 즉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라고 합니다. 사실 오늘날 민주정치의 대명사처럼 된 대의제도는 장로교회 창시자 존 칼빈(John Calvin)이 1500년대 중반 스위스 제네바에서 대의제도에 입각한 신정정치(神政政治)를 펴면서, 공동체 의사결정을 위한 하나의 모델적 질서로서 도입한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도 처형에 대한 저항논리로 칼빈은 대의제적 인민주권(Representative Popular Sovereignty)의 개념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는 그의 저서를 통해 고대로마와 아테네 등에서 활용됐던 호민관제, 즉 인민들에 의해 선출된 통치관원인 호민관이 왕의 폭정으로부터 인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아 활동했던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호민관들은 비록 인민들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호민관은 장로 직을 연상케 하는데, 회중들에 의해 선출된 평신도 대표인 장로는 목사와 함께 당회에서 동일한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위임하는 것이 장로교회의 치리 제도입니다. 그 대표들인 장로들의 결정이 비록 인간들에 의해 선출된 인간에 의한 결정일지라도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 담긴 결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장로교회 정치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에서 처음 선보인 대의제도는 그 후 현실 정치에서 대의민주주의, 즉 의회정치 형태가 발전해 나가는 데 시금석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봉착하고 있는 위기현상에서 그 제도의 원형을 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장로회 정치는 회중이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것인데, 대표자들은 그들을 선출한 회중의 이름으로 정책을 결정할 권한을 부여 받고 있는 것입니다. 대의제도 아래서도 회중의 정치참여는 여전히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은 대표자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행사할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선출하는 것, 즉 선거참여나 또는 대표자들에게 여론형태 등을 통해 때때로 어떤 의사를 전달하는 것에 국한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의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 점 중의 하나이지만 회중의 지나친 정치참여의 욕구가 얼마나 큰 혼란을 야기시키는가를 미국 건국자들은 뼈저리게 경험하였기에 미국의 헌법은 대중의 직접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막아 놓았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대통령이나 의회나 대중들에 의해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부분을 개혁하려고 해도 너무나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획기적 개혁이 어렵고 혁명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나마 안전하게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장로교의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 교회의 목회자 청빙 때의 청빙위원회의 역할을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로교의 대의정치 원리에서 생각할 때 지금의 청빙위원회는 장로교 대의정치원리를 한 참 벗어나고 있습니다. 현실 교회들의 목회자 청빙을 위한 청빙위원회는 대의정치의 원리를 따른 것이기 보다 단순히 민주주의의 원칙을 따른 것입니다. 교회가 분별없이 민주주의 원칙을 좇아갈 경우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의 역할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장로교 대의정치 원리에서 생각할 때 청빙위원회는 장로로 구성되거나 당회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한 청빙위원이 청빙 할 목회자를 심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청빙위원이 장로들이라고 하여도 일반적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볼 때 장로는 교회와 교회 제도에 대한 비전문가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수준에서 목회자의 능력과 신학과 은사를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이에서 비롯된 아픔과 갈등과 분쟁을 실제로 겪고 있습니다. 현실 교회의 문제들이 목회자의 상식을 무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고, 교회의 비전문가 수준의 장로들이 교회 정치에 지나치게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분쟁과 갈등의 상당한 요인이 교회 제도와 법에 대한 남용에서 비롯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제도와 법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시민들이 모든 것을 거리에서 해결하려는 지나친 욕구가 혼란을 야기하는데 교회는 그 경우가 더욱 심각합니다. 목회자 청빙에서 가장 우선 고려되어야 할 점은 목사의 소속이 노회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목사는 노회의 허락 없이 개교회의 청빙이 불가능함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에 세워진 제도입니다.

청빙위원회는 노회에 목회자 선택을 의뢰하는 것이 지혜롭게 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역기능이 적지 않지만 더 나은 제도를 도입하기 전까지는 이 제도의 본래의 의도와 순기능을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몇몇 가지의 역기능을 문제 삼아 장로교의 대의정치의 근간을 무시하는 청빙위원회나 운영위원회나 안수집사회나 권사회의 역할이 극대화 되면 교회 문제는 결코 진정국면으로 갈 수 없습니다. 분쟁과 갈등이 있는 장로교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가려면 공동의회와 당회와 제직회를 제외한 모든 모임을 해체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기존의 합법적 회의를 통해 질서 가운데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부정하거나 법과 윤리를 노골적으로 해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와 입장과 의견이 달라도 회의 결과에 승복해야 합니다. 현실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개인과 몇몇 사람들이 집단으로 교회회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이들에게 물리적으로 제제를 가할 강제력이 없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난장판이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진리는 역사와 전통을 통해 드러나고 세워집니다. 어떤 개인도 역사와 전통을 능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목회자 청빙위원회의 역할만 장로교 대의정치원리를 제대로 따라가도 많은 문제가 진정 국면으로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의 역기능은 지나치게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려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지만, 교회는 계시의 역사와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살후 3;6 -

USA 아멘넷/황상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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