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믿음과 아스라엘의 실패

본문읽기:마태복음 8장 8-13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은 주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걸 금했습니다. 상거래는 허용했지만 식탁의 교제는 안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잘 아는 백부장이라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씀드린 것일까요?

백부장이 유대인의 율례를 따라 덩달아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집이 누추해서 모시기가 뭐해서도 아닐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서 뵙지 않은 것으로 나옵니다. 이는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그 분 앞에 감히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죄인을 심히 죄인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비참과 절망으로 몸부림치면서, 죄인에게 구원-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간구하며 고백하게 되는 것이지요.

본문에는 그런 백부장의 고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부분적으로 생략하고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부각코자 했기에 저자가 선택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셈이지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진실로-아멘입니다. 이 아멘은 구약 시편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시편 제 1권 2권 3권 말미에는 '아멘 아멘'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아멘 아멘'(진실로 진실로)이 무려 25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3장에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아멘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진실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멘을 남발한다고 좋은 신앙은 아닙니다. 예전에 신학교에 강의를 몇 년 나간 적이 있었는데 어떤 학생이 말끝마다 '아멘 아멘!'을 연발하더군요. 자꾸 들어니까 거북하더라고요. 마음으로 동의하고 속으로 아멘! 해도 될 터인데 말입니다.

성경 66권 전체를 다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성경구절에다 밑줄을 긋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을 정독하던 시절에 골방에 들어가 작은 백열등을 켜놓고 먼저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서 성경을 통독했던 적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말씀을 가볍게 대하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며 하시는 말씀을 차분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비시키면서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상도 약속(언약)도 율법도 시편과 선지자도 다 유대인 자신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그들이 그토록 대망하는 메시야가 오셨건만 도무지 알아먹지를 못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도 제사장 나라로 삼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보내주기로 약속하신 구원자를 기다리고 바라면서 이방인에게도 이 복된 약속을 전하라고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쓸데 없는 선민사상에 젖어서 이방인을 깔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보아라~ 너희들이 개 돼지 취급하는 이 이방인 같은 믿음을 너희 중에서는 찾지 못하였노라!'
"동 서로 부터 많은 사람이..."

해뜨는 데부터 해지는 데까지...입니다. 복음성가도 있었지요. 온 세상을 표현할 때 쓰는 언투입니다. 당시에 흔히 쓰던 관용적 표현이지요.

많은 사람이-수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반면에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쫓겨난다는 겁니다. 이방인을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있을) 자들로 여겨 멸시했던 그들은 정작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어둔운데 쫓겨나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애통하고 원통했으면 이런 표현을 쓰셨을까요. 말씀을 믿음으로 화합치 않고 율법의 행위를 의지한 유대인의 결국이 이러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공로사상에 함몰되어 자신들 외는 다 죄인취급하던 그들이 슬피울며 이를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어서 지들 맘대로 억지로 풀다가 망하게 되었음을 통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잘못된 자기확신 가운데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어둔데 쫓겨나 슬피울며 이를 갈 수도 있다는 말씀으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잎만 무성한, 다시 말해 입만 살아 있는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후손을 택하신 것은 그들을 구원의 통로로 삼고자 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습니다. 메시야의 계보(족보)를 형성하는데는 한 줄기면 족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다윗의 뿌리 말입니다. 그 줄기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그런데도 잘못된 우월적 선민사상에 젖어 교만할 대로 교만해져서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선택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는 작금의 한국교계 형편이기도 합니다.

선택이란 자고로 뜨거운 감자와 같습니다. 덥썩 한입 깨물었다가는 십겁(?)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본의를 인간의 사변의 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 할 때, 선택이란 그 복된 말씀은 형체를 잃고 마는 것이지요.

로마서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와같은 신학적 궤변이 난무하게 됩니다. 로마서를 강해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분히 풀어서 전하겠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네가 믿었던 대로 될지어다' 입니다. 과거에 확정해 놓은 그 믿음 말입니다. 초석은 한 번 놓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 위에다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맨날 도의 초보에 머물러 터만 닦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남의 집이 어떠니 터가 어떠니 판단이나 하면서요.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야 합니다. 백부장은 그가 믿었던(과거) 것을 바탕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며 고백했던 자였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신 우리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권면드립니다. 부디 살아 있는 믿음으로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있을 때 잘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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