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영(靈)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 4:1)

 

우리는 인터넷상에서 

영계(靈界)를 체험한 분들의

여러 간증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진실하고 은혜로운 체험도 있으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전해주시는 말씀이 가장 확실하겠지요.

 

먼저 주님께서는 이 땅의 충성에 따라

천국의 상급에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눅 19:17)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시고"

(눅 19:19)

 

또한 천국은 세상처럼 소멸하는 낮은 몸이 아니요

천사들과 같이 불멸의 영체(靈體)라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0)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4)

 

이렇게 저는 저 분들처럼

영계를 직접 다녀오는 수고가 없이

날마다 성경 안에서 천국과 지옥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지옥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

(막 9:48-49)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계 8:5-6)

 

이처럼 지옥은 영혼 불멸의 장소이요,

그 중에서도 이단, 거짓 선지자들이

받는 형벌은 더욱 참혹합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10)

 

이처럼 천국과 지옥도 현세와 같이

오감(五感)의 감각이 뚜렷한 곳이요,

그곳 역시 하나님의 공의와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세상에서 성화된 '마음의 상태에 따라' 

천국의 부활에 모습도 모두 다를 것입니다.

 

하루 앞의 일도 알 수 없는 인생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그리 먼 곳이 아니며

이 땅은 바로 그 영원한 세계를 들어가는

첫 관문입니다.

 

늘 깨어서 예비하는 사람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도 

평안함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말씀과 기도 안에서

늘 깨어 예비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 잘 감당하여

하늘의 상급과 영광의 부활로

그날에 주님앞에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출처 : 성서 기도원 원문보기   글쓴이 : 전도자

- 뉴욕시에서 트렌스젠더에게 ‘잘못된 성 표현(Misgendering)’을 하면 25만 불의 벌금을 물게 된다.

 

여러분이 성전환자에게 그 사람이 “zhe”라는 호칭으로 불리길 원하는데도 “그 남자(he)” 혹은 “그 여자(she)”라고 부른 적이 있는가? 최근 개정된 뉴욕시의 ‘차별 금지법’에 의하면 당신은 이 일로 인해 25만 불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최근 뉴욕시 인권 위원회에서 새롭게 개정한 “성 정체성 과 표현에 기반한 차별(misgendering)”에 관한 법안에는 깜짝 놀랄만큼 가혹한 정치적 제재 내용이 담겨져 있다. 피고용인들을 향해 “misgender”를 하는 고용주에게 엄청난 벌금을 부과하여 압박하려는 것이다.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행위로 간주되는 사건의 경우 고용인은 25만 불의 벌금을 부과받게 되고, 일반적인 위반일 경우에도 12만 5천 불의 벌금이 부과되게 된다. 소규모 사업장을 운영하는 이들에겐 이 벌금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개정된 법안에는 단지 남자로 성전환을 한 사람들(transmen)을 “he”로 부르고 여자로 성전환을 한 사람들(transwomen)을 “she”로 불러야 한다는 내용 뿐 아니라, 고용주가 성전환을 한 고용인이 “zhe,”나 “hir” 혹은 다른 용어로 불리길 원할 경우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사원문>> NYC Will Fine You $250,000 For ‘Misgendering’ A Transsexual

 

 

* 하루가 멀게 첨단의 기술들이 쏟아지고,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오고가는 인터넷 공간의 확장으로 인해 우리는 매일같이 그 뜻을 다 헤아리기도 힘든 ‘신조어’들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 최근 미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결정 이후,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신조어들도 쏟아지고 있다.  위의 기사에 등장하는 Misgendering이라는 단어와 남자와 여자의 경계가 모호한 Zhe 혹은 Hir라는 단어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한 때 유행하다 사라지는 여타의 신조어들과는 달리 남성에서 여성으로 혹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한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호칭(신조어)에 따라 불러주지 않으면 최대 25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신조어를 모르면 벌금 폭탄을 맞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LGBT의 확산으로 남자와 여자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남자 여자라는 용어 자체가 불법이 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 지 우리가 그 끝을 보고 있는 것이다.

 


- 예레미야 - 

[출처] Misgendering?|작성자 예레미야

5자녀 빼앗긴 부부, 페북 열고 온라인 서명 운동 돌입…세계 지지자들 대사관 앞 항의 시위

마리우스 보드나리우(Marius Bodnariu)와 룻 보드나리우(Ruth Bodnariu) 부부
마리우스 보드나리우(Marius Bodnariu)와 룻 보드나리우(Ruth Bodnariu) 부부와 다섯 자녀들이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온라인 청원 페이지 캡춰

[기독일보 지민호 기자]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진 유럽. 이제 기독교 핍박국이 되어가는 듯 하다. 노르웨이 정부가 "기독교에 세뇌될 것에 대한 우려"로 한 기독교 가정의 다섯 자녀를 빼앗아 갔다는 황당한 소식이다. 이 부부는 물론, 부부를 지지하는 세계인들이 항의 시위에 돌입했다.

마리우스 보드나리우(Marius Bodnariu)와 룻 보드나리우(Ruth Bodnariu) 부부는 지난 11월 16일 노르웨이 어린이 보호기관인 '바르네베르넷'(Barnevernet)에 생후 3개월 신생아로부터 9살까지 5명의 자녀 양육권을 빼앗겼다. "아이들 양육에 있어 과격한 기독교인 부부가 기독교로 세뇌시키려 한다"는 한 교사의 고발로 말미암은 일이다. 부부는 이를 취소해 달라고 탄원했지만 당국은 11월 27일 이를 거부했으며, 아이들은 세 곳의 다른 가정에 보내져 보호(?) 받고 있다.

너무나 아름답고 웅장한 상상하지못할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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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나우뉴스]마치 꽃처럼 생겨 한 눈에 구분하기 힘든 희귀 사마귀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다.

최근 호주 맥쿼리 대학교 연구팀은 주로 말레이시아에 서식하는 '난초 사마귀'(orchid mantis)의 논문 일부를 언론에 공개했다.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모습의 난초 사마귀는 몸통과 다리가 꽃잎을 닮아 꽃 속에 숨어있으며 누구도 발견하기 쉽지않다. 난초 사마귀가 '위장의 달인'이 된 것은 이 기술로 먹이를 쉽게 잡아먹고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호주 연구팀의 조사결과 나비 등 꽃을 찾아 날아온 곤충들이 오히려 꽃보다 난초 사마귀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론적으로 꽃을 찾아 날아온 곤충들이 '다른 곳'에 홀려 먹잇감이 되는 셈.

연구를 이끈 맥쿼리 대학 진화생물학자 제임스 오한론 교수는 "위장을 통해 사냥을 하거나 자신을 보호하는 종들이 자연에 많다" 면서 "난초 사마귀는 특이하게도 그 자체가 꽃보다 더 뛰어난 유혹체"라고 설명했다.

이어 "12종의 꽃가루 매개 곤충이 정작 꽃보다 난초 사마귀에 관심을 두다 잡아먹혔다" 면서 "이같은 결과에 우리도 많이 당황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의 자세한 내용은 과학저널 '아메리칸 내추럴리스트'(American Naturalist) 2014년 1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사진=바크로프트/멀티비츠 

박종익 기자pj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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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멕시코에 계신 선교사님께서 직접 촬영하여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무슬림 사회 전반에 IS 이념 깊이 뿌리 박혀”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IS(이슬람국가)가 선전하는 '칼리프국가 수립'이나 '종말론' 등의 IS 이념(ideology)이 일부 무슬림 뿐만 아니라 무슬림 사회 전반에 깊이 박혀 있으며, 이로 인해 파리 테러 당시의 총기 난사나 폭탄 테러보다 더 큰 규모의 테러 공격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국제 사회가 IS와 같은 이슬람 조직들과 IS 이념을 뿌리뽑기 위해 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블레어 전 총리의 발언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극단주의 무슬림과 평범한 일반적인 무슬림, 온건한 무슬림을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블레어 총리는 이번 발언을 통해 전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서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 비교적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블레이 전 총리는 지난 3일 워싱턴D.C.의 의회도서관에서 한 연설에서 "칼리프국가 수립이나 종말론 등 IS가 선전하는 이념이 무슬림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면서 "무슬림들 가운데서 이슬람과 서구 사이의 태생적 적대관계를 믿는 자들은 결코 소수가 아니다"고 우려했다.

 

블레어 전 총리는 전 세계적인 상황을 놓고 봤을 때, IS의 극단주의적 관점에 대해 동감하는 무슬림들이 많다고도 했다.

 

아울러 "이교도나 변절자를 처단하자거나 유대인을 상대로 지하드(성전)을 벌이자고 선동하는 성직자들이 트위터에서 수백만의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IS가 선전하는 이념은 매우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이것을 파헤쳐서 뿌리뽑아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블레어 전 총리는 특히 '칼리프국가 수립'(caliphate,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 개념으로, 이슬람 최고 지도자인 칼리프가 지배하는 전 세계적 이슬람 국가를 의미)과 '종말론'이 IS의 신앙의 두 가지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이슬람의 종말론에 따르면, 무슬림과 기독교인 군대 간에 최후의 대결이 시리아의 한 마을인 다비크(Dabiq, 이것은 온라인 영어 선전 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다)에서 벌어진다.

 

이는 IS가 종말론을 중심으로 동조 세력과 대원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의미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마지막 전투가 멀지 않았고, 이슬람이 승리할 것이니 여기에 참여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셈이다.

 

다비크는 터키에 인접한 시리아 국경도시로, 이슬람 최고 선지자인 무함마드의 언행록 '하디스'에 따르면 이곳에서 '말라힘(종말이라는 뜻, 이슬람판 아마겟돈)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다.

 

IS는 하디스의 '80개 깃발'이라는 문구에 주목해 십자군 동맹이 80개에 이 전쟁이 개시된다고 믿고 있다. IS는 현재 미국과 한국 등을 포함해 62개국을 십자군 동맹으로 분류하고 있다.

 

IS는 또 고대 이슬람의 당에 칼리프국가를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비크 전투에 승리해 일단 고대 이슬람 영토 안에 칼리프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며, 결국에는 전 세계를 칼리프국가로 만들 계획을 품고 있다.

 

블레어 전 총리는 "IS 대원과 연계 단체, 그리고 IS의 이념을 지지하는 이들이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그리고 일부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서 격퇴되어야 한다"면서 "IS 격퇴는 그 과정의 시작에 불과하며, 무력만으로는 결코 IS에 승리할 수 없고,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지하디스트 광신도의 잔혹 행위보다 훨씬 폭넓고 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IS 세력 뿐 아니라 무슬림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그 사상까지 함께 없애려면 더 단호하고 근본적인 대처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재경일보 USA (http://www.jknus.com/)

 
     
      성육신의 주 최송연 캄캄한 세상 밝히시려 빛으로 임하신 주 죽었던 영혼 살리시려 생명으로 임하신 주 죄악의 사슬 벗기시려 은혜로 임하신 주 별들은 빛나고 숲 속의 새들 깊이 잠든 밤 더러운 말구유에 뉘신 한 아기 그는, 그 몸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실 우리 주 우리 왕이심을 누가 알았으랴!
        ******************************************** 지난 한 해 동안 목양연가를
        아껴주시고 응원해주신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님들께 이 장을 빌어 감사한 마음 전해드리면서...^^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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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육신의 주
           최송연


    캄캄한 세상
    밝히시려
    빛으로 임하신 주

    죽었던 영혼
    살리시려
    생명으로 임하신 주

    죄악의 사슬
    벗기시려
    은혜로 임하신 주

    별들은 빛나고
    숲 속의 새들 깊이 잠든 밤
    더러운 말구유에 뉘신 한 아기

    그는,
    그 몸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실
    우리 주 우리 왕이심을 누가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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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원운동에 끼친 영지주의

                                              Gnosticism in the Monasticism

       

       

      라 은 성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Ph.D.)

      Ra, Eun-Sung (Prof, Kukje Theology University, Historical, Ph.D.)

       

      들어가는 말

       

           영지주의는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로부터 경고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시대에도 뉴에이지 운동과 문학을 통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1 초기 기독교계에 끼친 영지주의의 영향을 세속화라고 말하기도 한다.2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의 세속화를 연구함에 있어 중요하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영지주의는 예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기독교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세기 초대교회 교부들은 영지주의에 대해 과도하다할 정도로 분석, 비판, 그리고 경고했다.3 그 결과 거의 근절되다시피 했던 영지주의는 형태를 바뀌어 시대마다 등장했다.4

       

           아쉽게도 근대에 이르기까지 영지주의에 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하지 못하다가 본격적인 연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주로 독일에서 일어났다. 대표적인 학자는 독일의 아돌프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이다. 그는 영지주의를 기독교의 헬라화로 보았고,5 또 칼 쉬나이더(Carl Schneider, 1900- )는 영지주의를 후기 플라톤주의에 속한 것으로 보고, 영지의 정신을 “순수한 헬라적이고 플라톤적”이라고 했다.6 이와는 조금 다르게 콘라드 케슬러(Konrad Kessler, 1851-1905)는 영지의 근원을 바벨론 종교로 보았고,7 빌헬름 안츠(Wilhelm Anz, 1871- )도 영지주의의 고향을 바벨론으로 보았다.8 빌헬름 부세트(Wilhelm Bousset, 1865-1920)는 영지주의를 동양의 이원론과 염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결론 내렸고, 리처드 라이첸쉬타인(Richard Reitzenstein,1861-1931)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9 더욱이 질레스 퀴스펠(Gilles Quispel)은 영지주의가 유대적 사색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10 현재에 와서 영지주의에 가장 큰 공헌을 끼친 세 사람을 말하라고 한다면,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 ), 앞에서 언급한 질레스 퀴스펠, 그리고 로벗 윌슨(Robert McLachlan Wilson)을 말할 수 있다.11 그리고 영지주의를 심리학과 연관시켜 연구하는 칼 융(Carl G. Jung, 1875-1961)을 들 수 있겠다.12 최근에 와서는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은 여러 영지주의 학자들과 함께 1945년에 발견된 Nag Hammdi Library 1977년 영어로 번역하여 내어놓으면서 연구는 활발하게 이뤄졌다.13

       

           현재 영지주의에 대한 내용에 대해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고전은14 미드(G. R. S. Mead)가 써서 1900년에 출간된 Fragments of a Faith Forgotten: The Gnostics, 레게(F. Legge)가 써서 1915년에 출간 된 Fore-Runners and Rivals of Christianity from 330 B.C. to 333 A.D., 버킷(F. C. Burkitt) 1932년에 쓴 Church and Gnosis 등이 있다. 그리고 Nag Hammdi Library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후, 리처드 윌슨이 쓴 The Gnostic Problem Gnosis and the New Testament가 있고, 그란트(R. M. Grant)가 써서 1959년에 출간된 Gnosticism and Early Christianity가 있다. 최근에 와서는 로벗 하르트 (Robert Haardt) 1969년에 출간한 Die Gnosis가 있고, 포어스터(W. Foerster) 1969년과 1971년에 두 권으로 출간한 Die Gnosis가 있다.

       

           이 소논문에서 위의 자료들을 모두 참고할 수 없지만 가능하다면 원문을 참고하면서 영지주의와 한국교회의 세속화의 문제를 위한 주요한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영지주의는 수도원 운동에 영향을 끼쳤을까? 요즈음은 한국교회의 대체적 신앙 형태를 영성신학으로 보고 수도원 운동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연구하기 위해서 수도원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곧 세속화를 의미한다는 대 가정을 세우면서 그 세속화에는 영지주의의 영향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가정의 답변을 찾기 위해 영향을 끼친 영지주의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수도원 운동에 관련된 배경이나 신학 등과 같은 설명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영지주의 요소들을 주요하게 다루면서 수도원운동의 특징에 영향을 주었음을 소개하려고 한다. 주요한 질문의 가정을 찾기 위해 보조적 질문들로서는 과연 영지주의의 사상 또는 특징은 무엇인가? 영지주의의 사상을 발전시킨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사상이 어떻게 수도원운동과 접촉하게 되었는가를 물어보면서 영지주의는 수도원운동에 영향을 끼쳤음을 나타내려고 한다. 영지주의 연구는 Nag Hammdi Library로 인하여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영지주의 연구함에 있어 초대교회 교부들과 함께 근대 영지주의 학자들이 연구한 것도 다루려고 한다.

       

      1. 영지주의

       

      . 정의15

       

           영지주의(Gnosticism)는 신비하고 비밀적인 지식을 또는 ‘영지’(gnosis)16 통해 구원이 이뤄진다는 종교적 철학적 이원론을 철저하게 표방하는 운동이다.17 이 운동은 영지주의자 발렌티우스(Valentinus, c. 105-c. 165)에 의해 설립된 로마학파와 알렉산드리아학파들이 2-3세기의 그레코-로만 (Greco-Roman) 세계에 그 절정과 그 번영을 나타내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었고 그 이후 이 운동은 기독교에 큰 충격을 준 신비적 종교운동이 되었다. 이 운동이 번영했던 시기는 교회교부들―이레니우스(ca. 120-203), 히폴리투스(d. 235), 터툴리안(ca. 150-160~ca. 220-240) 등―이 활동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영지주의의 위협을 느끼고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부들이 초긴장을 하며 대응했던 이유는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한다고 가정하면서 초대교회에 정통 기독교와는 너무나도 다른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원론에 입각하여 모든 물질적 실체는 사악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갇혀있는 영혼을 자유롭게 하므로 구원은 이뤄져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어떻게 영혼들이 갇히게 되었는지, 영혼들이 어떻게 인도를 받는지에 대한 신화적 설명들이 덧붙여진다. 먼저 초월하신 하나님은 ‘이온들’(aeons)이라 불리는 영원한 존재들과 관련을 맺고 있을 뿐 모든 물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된 이온들은 남녀성의 짝을 이룬다. 대체적으로 그 짝은 30종이나 되고 그들은 ‘플레로마’(pleroma), 즉 신격의 ‘충만’(Fullness)을 구성한다. 물질적 우주와 인류가 구원받아야하는 곳은 ‘플레로마’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 안에 신적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구원의 목적은 이런 신적 씨앗을 상실된 물질로부터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화적 상술을 가지고 2-3세기에 신비적 종교운동으로 발돋움한 영지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를 표방했다.

       

           위에서 언급한 ‘영지’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지식보다는 산만하고,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18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식이다.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은 전적으로 악한 물질세계에 주어졌다. 그 섬광들 또는 씨앗들은 인간의 몸에 갇혀 있다. 하지만 ‘신비한 지식,’ 즉 ‘영지’로 다시 일깨워진 신적 요소는 사람들을 초월적 영적 영역에서 적절한 보금자리를 갖도록 한다.

       

           영지주의자 또는 ‘알고 있는 자’는 지속적으로 신비한 영지의 새로운 통찰력을 받는다. 그들은 영구적으로 정착되지 않고 늘 지속적으로 더 높은 차원을 이해하기 위해 현재의 영지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 즉 구원은 하나님, 최상의 존재와 연합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발산되는 모든 것의 실재를 보는 것이다.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을 수 있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영지주의의 궁극적 목적이다. 이것을 또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이 구원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지식으로 말미암는다. 오직 ‘신비한 지식’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비한 지식’을 가지는 자는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성숙에 이르는데 요구되는 특별한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자들은 ‘엘리트들’(elites)이다. 이렇게 더 높은 영지를 가진 자들만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영지주의자들은 세 가지로 구분한다.19 첫째, ‘영적인 자들’(pneumatic)인 영지주의자들 또는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구세주를 인식하고 그에게 일치한다. 둘째, 완전한 영지주의자들은 아니지만 지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심령자들’(psychic)이 있다. 이들은 첫째와 둘째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주저하지만 구세주에게 가까이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셋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인 ‘물질인들’(hylic)은 물질에 지배를 받고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금욕을 지나치게 행하여 영의 지배를 받으려고 노력한다.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다.20

       

      . 특징

       

           초대교회에 있었던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최고의 기독교 변증자는 이레니우스였다. 그의 책 Adversus Haereses에서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30개의 ‘이온들’이 시공간의 초월한 ‘플레로마’ 안에 존재한다.21

      2. 여신 지혜는 ‘조물주’(demiurge)를 만들었다. 그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신이며 이온들의 독재자이다. 그는 사람을 창조했고 지혜는 사람에게 영혼을 주었다.22

      3. 어떤 이들은 선행을 충분히 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가기로 예정되었다.23

      4. 영지주의자들은 지혜로부터 발산된 영들을 갖고 있다.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실할 수가 없다. 그들이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완전자들은 악한 일들을 행할 수도 있고 자신들이 개종시킨 여인들의 순결을 빼앗아도 된다고 한다.24

      5. 결국 모든 물질은 악과 함께 멸망당하고 구원을 얻을 수 없다.25

      6. 영지주의자들은 영혼들이 되어 천사들과 결혼할 것이다.26

      7. 그리스도는 세례 시 예수님에게 강림했고, 예수님이 음모를 받기 전에 떠났다. 지혜는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허락하지 않는다.27

      8. 그들은 자연에 영향을 끼치는 mantras를 언급한다.28

      9. 영들은 성육신한다.29

      10. 완전한 지식은 세례, 영적 결혼과 마지막 의식들을 통해 얻는다.30

      11. 지혜는 미카엘이란 천사 또는 Samael이라는 천사, 즉 뱀을 에덴동산으로 보내어 아담과 이브를 자유토록 했다. 그들이 금지된 실과를 먹으므로 참된 영지를 얻었고 자유하게 되었다.31

      12. 지혜는 악한 조물주가 일으킨 대홍수로부터 노아를 구원했다.32

      13. 조물주는 여러 회 강제적으로 이브와 성적 교제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브는 악한천사들을 낳게 되었다.33

      14. 죽을 때 어떤 영들은 중간 상태에 들어가서 ‘플레로마’에 들어갈 때까지 동물의 본성을 정결케 한다.34

       

      위의 특징들에 비해 현대 학자들은 조금 다르게 상술하기도 한다.35 영지와 영지주의가 다르다는 견해도 있지만 영지주의가 철저한 이원론 위에 서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논란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원론을 강조하면서 요나스는 하는 말이 “타락한 신 없이, 어리석은 창조자와 불행한 피조물 없이, 낯선 영 없이, 우주적 포로와 비우주적 구원 없이, 신성의 스스로의 구원 계획함 없이, 즉 신적 슬픔이 없는 영지는 설명될 수 없다”고 한다.36

       

      1) 우주론

       

           불교처럼 영지주의는 지상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37 아르콘들(Archons)38 지배하고 감독하는 사악으로 가득 찬 이생에서 자신을 육성하기 위한 삶의 모든 형태는 서로를 소멸시키고 만다. 그 결과 고통, 두려움, 그리고 죽음이 있게 된다. 소위 자연재해들인 지진, 기근, 화재, 화산폭발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것에 대한 이유와 해결하는 길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과 정반대의 설명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선하였던 것이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빚어진 결과라고 우리는 본다. 이와는 달리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타락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사악성과 모든 불행들의 근원을 조물주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선한 하나님이 아닌 악한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세상이기에 불행한 일들이 발생한다. 그는 7번째 영역에 있는 자이다.39

       

           언 듯 보면, 이런 아이디어가 창세기의 상술과 유사한 것처럼 여겨지지만40 두드러진 차이점은 발렌티누스의 ‘플레로마’ 아이디어부터 위와 같은 창조론이 시작된다는 것이다.41 그에 의하면, 더 높은 세계로부터 소피아가 떨어져 나와서 세상을 존재케 했다는 것이다. 유대학자인 필로(Philo, 20 B.C.-A.D.50)에 의하면, 플레로마 사상은 플라톤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42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의 기원을 선하신 하나님께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소피아의 타락이 요청되고 인간의 타락이 요청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우주의 창조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가 아닌 최상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알아보자.

       

      2) 신론

       

           영지주의 사상의 또 다른 핵심인 완전히 초월적인 최상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고, 이 하나님과 세상을 중재하는 연속적인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덧붙여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물질세계가 악하다는 전제를 갖고 그 기원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 설명을 위해 영지주의자들은 근거도 없는 복잡한 신화를 발전시킨다. 기원적으로 알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이 있었는데 그는 모든 창조된 우주 너머 계신 분이고,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다. 이런 참된 하나님은 어떤 것도 형성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발산하여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세상의 모든 것들의 본질들을 존재토록 했다. 초월적이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은 발산하여 저급한 신성들의 연속들을 만들므로 ‘계급제도’(hierarchy)가 도입된다.43 이러한 연속들을 가리켜 ‘이온들’이라 부른다. 이들은 참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신성들이다. 이들은 참된 하나님과 함께 신성들이 완전하게 활동하는 ‘충만’(pleroma)의 영역을 약속했다. 그 ‘충만’은 공허한 우리의 상태와 잘 비교된다. 참된 하나님이 발산한 저급한 본질들, 즉 신성들 중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신성은 소피아, 즉 ‘지혜’이다. 그 지혜는 알 수 없는 최상의 하나님을 알려는 또는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찼다. 이것은 합법적이지 않는 욕망으로서 결국 사악한 신인 동시에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즉 ‘조물주’(demiurge)를 잉태하고 산출하여 우주를 창조토록 한다. 인류 가운데 있는 신적 섬광들은 이런 우주 안에 있거나 아니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최상의 하나님으로 인해 우주, 즉 세상으로 보내질 수도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사악한 신으로 단정하고 난 후, 이 신은 인류를 하나님에 대해 무지가운데 있도록 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들은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추방시킨 것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으로 이런 관점으로 이해했다.

       

      3) 인간론

       

           영지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간은 이 물질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더 높은 하늘 세계에 속했다는 전제를 세운다. 자연스럽게 이원적 인간론을 갖는다. 이런 인간론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발렌티누스에 의해서이다. 이원론적 인간론을 기초하여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는 그는 인간이 부분적으로는 거짓 신인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지고, 부분적으로는 참된 하나님의 빛을 갖고 있다고 한다. 본래 사람은 신적 본질의 파편인 영적 요소만 아니라 육적이고 심적인 요소를 함께 갖고 있다. 영적 요소를 가리켜서 ‘신적 섬광’(divine spark)인 상징적으로 부른다. 그래서 하늘의 이원성과 세상의 이원성을 함께 취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인류는 본래 자신들 안에 있는 신적 섬광을 일반적으로 모른다. 이런 무지는 거짓 신인 조물주와 저급한 지배자들인 ‘아르콘들’로 인해 싹텄다고 한다. 그들은 남녀들을 참된 본성과 운명들에 대해 무관심하도록 했다. 지상적인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모든 것은 저급한 아르콘들에 종노릇하도록 할 뿐이다. 죽음은 신적 섬광을 인간의 몸에 갇혀있는 데서 벗어나게 한다. 하지만 죽음보다도 영혼에 의해 시작된 영지의 본질적 사역이 없다면 그러한 벗어남은 신적 섬광을 추방시키는 것에 불과하고 육적 세상에 노예로 다시 보내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 신과 동등

       

           영지를 가진 사람은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신적 섬광’ (또는 ‘영혼’)을 발견하고 해방시킨 후, 신적 본질로 신비적으로 상승하고 빛의 영역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경험한 신적 계시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신의 기원을, 즉 하나님과 같은 자신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되어야함을 주장한다. 이것 역시 영지주의의 핵심적 사상인데 Apocryphon of James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면, 그리고 사탄에게 유혹을 받는 동안, 그로부터 선물로 주어지지 않은 너희들의 공로가 무엇이냐? 아버지의 뜻을 너희들이 행하고, 사탄으로부터 너희들이 핍박을 받고 억압을 받는다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사랑하실 것이고, 너희를 나와 동일하게 만드실 것이고, 너희를 자신의 섭리를 통해 사랑받는 자로 여기실 것이다.44

       

      The Tripartite Tractate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자들은 영원토록 태어날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돕도록 태어난다. 발산들이 무제한적이고 수없이 일어나기 때문이고, 자신과 동일하거나 자신과 유사한 것을 태어나기 위해 그로부터 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편에서는 아무런 시기가 없기 때문이고, 그가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계시하는 ‘전체들’(Totalities)에 존재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신 그 분이 바라시는 사람들과 그 분이 ‘전체들’로 만드시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온들 또는 자녀들이며,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자들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나오는 자들은 그가 되는 것이다.45

       

      ) 엘리트의식

       

           신비적 영지, 즉 지식은 엘리트들만 가지는 것이다.46 그들은 앞에서 말한 ‘영적인 자들’로서 이성의 능력과 육체를 넘어선 특별한 재능을 소유한 자들이다. 이런 특별한 재능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빛의 영역으로부터 빛의 섬광을 소유한 메신저로 인해 부여받은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목적은 그 영지로 인해 내적 인간이 해방되어 빛의 영역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는 종교생활에 있어 실제 세상을 떠나 자기중심주의(narcissism)를 형성한다. 영지주의의 본질이 자기에로의 여행하면서 완전, 불멸, 신성, 그리고 육체와 세상에서 떠난 경건한 엘리트 형태를 취한다.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만 사랑한다. 영지주의 문서들 중 하나인 The Gospel of Thomas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영혼과 같은 형제들을 사랑하고, 너희 눈에 맞는 자들과 같은 형제를 보호하라’”고 되어있다.47 이런 형태는 마치 ‘유아론’(solipsism)과 같이 스스로 자만하여 구원받은 자들만 세상에 살면서도 별거하여 사는 것처럼 자신들만 교제하는 독특하다.48 그래서 사회적 관계나 연맹에 얽매이지 않으려하고, 교파의 벽을 무너뜨리고, 건전한 교리와 종교성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되면, 기독교들은 하나님과의 내적 궁정에 들어가서 안식하려고 하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힘든 길을 걷지 않으려 한다. 믿음보다는 ‘해탈의 경지’(nirvana)를 주관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한다. 인격적 발전보다는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49

       

      4) 구원론50

       

           인간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기 때문에 고향 또는 집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전제를 영지주의자들은 갖고 있다. 궁지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기원, 본질, 그리고 궁극적 운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육적 존재를 갖고 있다. 이런 궁지에서 해방되기 위해 인류는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이 요청된다. 인류를 돕기 위해 처음에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빛의 메신저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지주의 설명에 의하면, (Seth), 예수님, 그리고 선지자 마니(Mani)가 있다고 한다. 이런 자들 가운데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대표적 구세주로 본다.51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이 아니다. 죄가 결과인 무지로부터 구원을 말한다. 무지, 즉 영적 실체들에 대한 무지는 영지에 의해 일소되어지고 영지의 계시는 빛의 메신저들로 인해 전달된다. 특별히 참된 하나님의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전달된다. 그의 죽으심이나 고난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의 사역을 위해 수행했던 신비들을 이룩하고 그것에 대한 가르침으로 구원은 이뤄진다. 구원에 대한 개념은 매우 희미하다. 단순히 운명에서 벗어남이고, 이생의 압력으로부터 해방만을 의미한다.52 한 편으로 볼 때, 영지주의 구원은 자신이 계획한 영적 기획과 같은 것이거나 아니면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 개인적 경험에 근거하는 듯싶다. 영지에 대한 잠재력과 구원에 대한 잠재력은 모든 남녀들에게 있으며 구원이 대리적이 아니라 개인적임을 고수한다. 동시에 그들은 영지와 구원이 인식 안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시적이 되어야만 하고, 또는 동시적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동시성은 빛의 메신저들에 의해 주어진다.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여기고 있지만 몇몇 기독교적 요소들을 비기독교적 영지주의 문서들 속에 넣었다. 기독교적인 체 하고 있다.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신약의 하나님을, 즉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구약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아무렇게나 해석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묵시적 복음서들, 예를 들면, Gospel of Thomas Gospel of Mary에서 부활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참되고 영지적인 해석을 알렸다고 주장했다. 신적 영이신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님의 몸을 취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고 지상 사역을 마친 후 신적 영역으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과 죽으심을 그리고 육체의 부활을 거부한다:

       

      구세주는 죽음을 삼키셨다. . . 그는 멸망하는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불가시적인 것으로 인해 가시적인 것을 삼키신 후 자신을 타락하지 않는 이온으로 변화시키고 일으켰다. 그래서 우리에게 불멸성에 이르는 길을 주었다. . . . 하지만 우리가 그를 입을 수 있는 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의 광채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죽게 될 때까지 그로 인해 보호를 받는다. 그로 인해 태양의 광채처럼 들림을 받는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과 함께 하는 심성적인 것을 삼키는 영적 부활을 말한다.53

       

      게다가 복음서에 대한 정통적 해석들을 거부했다. 특별히 Gospel of Thomas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를, “자신의 손으로 소유하는 사람은 더 많이 받을 것이다. 소유하지 못한 자는 소유한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를, “너희가 만일 너희들 안에 남아있는 것을 가지게 되면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은 구원이다. 만일 너희들 가운데 이것을 갖고 있지 못하면 너희는 죽을 것이다.54

       

           신약학자 브루스 (F. F. Bruce)는 이 구절에 대하여 평하면서 “41장은 하늘의 빛을 언급하는 듯하다. 그것을 소유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잃어버리는 자는 멸망을 받을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55 펑크와 후버에 의하면, 사람의 구원은 신적 모습, 즉 거룩한 섬과, 빛의 파편, 높으신 하나님께 기원을 두는 것, 조물주를 포함한 다른 신성들의 궁극적 근원을 소유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영지주의적 아이디어를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한다.56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은 전적으로 자신 안에 존재하는 빛이다. 빛을 의미하는 지식이 없으면 멸망한다고 한다.

       

      5) 의식들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성례들을 거부하지만 일부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세례와 성체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성례는 영지를 깨닫게 하는 상징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성례를 갖고 있는데 ‘진리의 세례’(baptism of truth)라는 것이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세상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57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생수’(living water), 즉 영지의 선물로 여겨지는 것으로 붓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영지주의 의식들은 인간의 영에 있는 신적 요소를 영적 영역으로 상승시키는데 유용하도록 고안되었다. “기도하는 자세로서 양손을 뻗치고” 찬양들과 마술적 의식들은 하나님의 환상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기에 음창한다.58 또 장례식에서 상승된 영혼을 포획할 수 있고 다시금 몸에 가두어놓게 하는 귀신들을 격퇴하기 위해 여러 의식들을 행한다. 발렌티니안 종파는 ‘신혼방’(bridal chamber)이라는 특별한 의식을 행하는데 하늘의 짝과 상실한 영혼이 재결합하는데 요청되는 의식이다.59 The Gospel of Philip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브가 아담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기원적 남녀양성의 연합은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아담과 이브를 다시금 연합시키는데 있다. 남편과 아내가 신혼방에서 연합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이뤄지는 재연합은 신혼방에서 성례가 일어난다. 그곳에서 사람은 천사적이고 하늘의 짝과 함께 궁극적으로 연합하는 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미리 맛본다.60

       

           계속하여 그 곳 성전의 신혼방은 셋으로 나누고 있다 :

       

      “결혼의 신비는 얼마나 위대한지! 그 결혼 없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

      “예루살렘에는 희생을 위해 특별히 세 개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성소’(holy)라고 부르는 곳이다. 다른 하나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성소 중 성소’라 부른다. 나머지 하나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지성소’라 부른다.   곳은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세례는 ‘성소’라는 건물에서 거행된다. 구속은 ‘성소 중 성소’에서 거행된다. 그리고 ‘지성소는 신혼방이다. . .

      “그리스도는 시작부터 있었던 분리를 치유하러 왔다. 다시금 분리된 것을 연합시킨다. 분리의 결과로 죽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을 연합시켰다. 여인은 신혼방에서 남편에게 연합된다. 신혼방에서 연합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 . .” “만일 어떤 사람들이 사제직의 명령을 받고 있다면, 그들은 대제사장과 함께 그 베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 . 그곳은 영광위에 영광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능력위에 능력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일들은 감춰진 진리와 함께 우리들에게 개방되었다. 지성소는 계시되었고 신혼방은 우리를 초청했다.61

       

      6) 윤리

       

           영지를 소유한 ‘영적인 자들,’ 즉 엘리트들은 아르콘들이 지배하는 세상과 분리하여 살아야만 한다. 영적인 자들은 우주적 ‘운명’(heimarmene)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도덕율과 같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62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경멸하고 세상을 향한 적대심을 가져야만 한다. 더욱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영들이 이 세상과 완전히 결별한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그 안에서 행했던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고수한다. 니콜라이탄들, 오파이트들(Ophites), 카르포크라티안들(Carpocratians) 등 과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성경의 도덕율들을 대체적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류를 가두어두기 위해 사악한 신이 사용하는 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의 윤리적 가르침들은 금욕주의에서 자유사상(libertinism) 또는 허무주의적 요소를 갖게 된다.63 몸과 물질적 세상이 사악하다는 교리는 여인들을 ‘사탄의 일’로 여기기 때문에 세베루스를 주장하는 3세기의 마르시온파들은 결혼을 사탄의 일을 성취하는 것이라 보았다.64 이런 자세는 수도원제도의 금욕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조물주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물질을 형성하는 육체를 증오하여 음식이나 성적 교제를 저버리는 자세는 유대인들의 에센파와 같은 현상이라 하겠다.

       

           윤리 또는 도덕성이란 말이 규칙의 체제와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면 영지주의는 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한 체제들은 대체적으로 조물주와 함께 시작하고 그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한 편으로 볼 때, 도덕성은 사람 안에 내재해 있는 섬광이 조명되면서 일어나는 내적 고결성을 의미하며, 영지주의자들은 존재론적인 윤리를 이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계명들과 규칙들을 지키므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본다. 행위 규칙들은 질서 있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단체들 가운데 있는 조화를 이루는 유지와 같은 수많은 목적들을 성취해낸다. 하지만 규칙들은 구원과 무관하다. 구원은 오직 영지로 인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성은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의미로 여겨진다. 그것은 개인들의 영적 발전에 따라 수정되고 보완되는 것이다.65 위에서 언급했던 세 부류의 사람에서 ‘물질인들’은 도덕성에 그렇게 관심을 많이 가지지 않는다. 심령자들은 가끔 그것에 중요성을 둔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더 높은 다른 문제들에 관심을 쏟는다.  

       

      2. 영지주의자들

       

      . 니콜라스

       

           영지주의 기원에 전통을 보면, 요한계시록(2:6, 15-17)에서 사도요한은 에베소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경고를 주면서 니골라당을 언급한다. ‘니골라당’(Nicolaitans)이란 이름은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는 안디옥 출신으로 사도들에 의해 수임을 받았다고 한다.66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기 때문에 육체를 경멸하라는 교훈들에 관해 반항적인 해석을 피력했다는 것이다.67 요한계시록 이후 니골라당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저스틴(Justin Martyr, d.c. 165)이었다. Trailians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는 “니골라당을 멀리 하십시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쾌락을 사랑하지만 중상적인 혀를 놀립니다”고 했다.68 이레니스(Irenaeus, c.125?c.202)는 자신의 책 Adversus Haereses 에서 그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니골라당은 사도들에 의해 집사를 처음으로 받은 자인 니콜라스를 추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절제적인 방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에 대해서 요한 계시록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69 계속하여 이런 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칭하고, 익나티우스와 동일하게 시몬과 메난더를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70 역사가 소크라테스 (Socrates the historian, 5C.)는 요한일서 4:1-3이 니골라당을 두고 하는 말이면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성과 분리하려고 하는 자들이라고 했다.71 이와 같이 니골라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을 반대하고 반율법적인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는 Carpocratians이 니골라당의 견해를 갖는다고 했다.72 모세임 (Mosheim)도 니골라당을 영지주의자들과 연관시키고 있다.73 

       

      . 시몬 마구스

       

           영지주의의 창시자는 대체적으로 시몬 마구스(Simon Margus)라고 한다.74 사도행전 8:9-13에 나오는 시몬 마구스가 영지주의 창설자라는 설명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의 Recognitions Homilies에 나타난 묵시적 작품들에서 비롯된다. 사두개인들의 유대 종파의 설립자로 가끔 여겨지는 도시데우스(Dositheus)가 시몬의 스승이었다고 하는데75 도시데우스와 시몬의 근거를 두는 단체는 사마리아에서 설립되어 ‘사마리아인들’(Samaritans)이라 불렀다.76

       

           시몬 마구스는 로마제국의 황제 클라디우스 시대에 사마리아 지타(Gitta) 출신으로 마술을 행하는 자였다. 스스로 인간 형태를 가진 신이라고 주장했다.77 신으로서 자신은 경배를 받아야 하고 유대인들 가운데 메시아로 나타났다고 했다.78 시몬은 자신이 죽은 후 무덤을 파헤치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3일 안에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79 그리하여 자신을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리스도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두로에 가서 시몬은 헬렌이라는 매춘녀를 만나 구입하여 그녀와 함께 즐겼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그녀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헬렌을 가리켜 자신의 영의 첫 사상이라고 말했다.80 그녀는 길 잃은 양과 비유된다.81 이 어두운 세상의 타락한 신적 영의 최초의 모습이다. 자신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형태로 성육신되었다. 영지주의 체제에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요인이다.82 “시몬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이고 외형으로만 사람인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힘과 죽음도 단순히 외형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시몬은 가르쳤다. 그래서 그노시스주의가 그리스도가 단순히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교리인 “가현설(docetism, 헬라어 doketio, ‘나타나다,’ ‘. . . 처럼 보인다’)”의 서론이 시작된 셈이다.83

       

           시몬은 니콜라스보다 한층 더 영지주의의 선구자로서 구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 메난더(Menander)에 의해 나타났다. 메난더는 사마리아인으로 Capparetia 출신이었다. 주로 안디옥에서 활동했으며 스스로 불가시적 능력을 받은 구세주라고 천명했다.84 시몬의 사상은 앞으로 등장하게 되는 이단운동에 끼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

       

      (1) 이교도와 근동으로부터 나온 주제들과 성경적 사상들을 섞은 혼합주의적 현상;

      (2) 본질상, 순수한 영적 성부와 구별되어 소망 없는 물질세계로 보는 이원론적 해석;

      (3) 인격적 구세주가 세상에 임하셨다는 가르침;

      (4) 유대인의 성경을 거짓되고 사악한 것으로 보고 거절함;

      (5) 비밀적 지식만 아니라 마술에 대한 관심.85

       

      . 케린투스

       

           케린투스(Cerinthus)에 관해서는 이름 외에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1세기 말 요한의 작품들을 반대하는 자들은 그 기원을 케린투스에게 두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종말론에서 천년왕국설 신봉자였다고 한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86 만일 최상의 존재가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가르쳤으며, 최상의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려는 능력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그리고 다른 천사가 율법을 만들어 유대인의 하나님이 되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최상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 즉 덕은 세례 시에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부어졌다.87 이런 주장은 후에 선재하는 이온들에 대한 영지주의 이론을 낳도록 한다.88 인간 예수님만이 죽음을 경험했고 부활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었던 “나의 하나님”을 표현을 ‘나의 능력’으로 본다. 그는 마르시온을 따르는 자로서 역시 이원론을 고수한다. 로고스를 역시 ‘8인조’(ogdoad)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오기 전에 지혜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요한서신을 통해 공격을 받았다(요한 1 4:3; 요한 2 7). 7명의 천사들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었고 마지막으로 창조된 인간은 신의 형상을 가졌다고 한다. 이런 인간은 더 높은 능력이 부어지기 전까지 바로 설 수 없다. 그래서 빛의 섬광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 빛은 바로 구세주로서 그리스도이다. 이 세상에는 천사들에 의해 창조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사악한 자들, 사람들, 그리고 귀신들을 멸망시키고, 선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결혼과 자녀들을 낳는 것은 사탄의 일이고 사악한 일이다.89 어떤 면으로 볼 때, 케린투스는 기독교 영지주의자라고 할 수 있고 후에 등장할 사투르니누스의 초기 형태를 보는 듯싶다.90

       

      . 사투르니누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 인물인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또는 Saturnilus, 117?138)에 대해서는 히폴리투스가 쓴 Refutation of all Heresies 16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91 그는 시리아의 안디옥 출신으로 메난더가 주장했던 것과 거의 유사한 견해를 가졌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 아버지는 천사들, 본질들, 또는 능력들을 창조했다. 7명의 천사들에 의해 세상과 사람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우리들의 형상과 모양은 천사들의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모습이 지렁이에 지나지 않지만 위로부터의 ‘생명의 광채’(scintillation)로 인해 인간은 활력을 갖게 되었다. 천사들에 의해 두 종류의 인간이 창조되었다. 하나는 선한 영적 인류와 다른 하나는 악한 지상적인 인간이다. 이렇게 인간에 대해서 두 종류의 인간임을 말한 자는 사투르니누스가 처음이다.92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고, 형상을 가지지 않은 구세주를 사람인 것처럼 하여 보내셨다고 한다. 이렇게 가현설을 주장하면서 그에 의하면, 구세주는 유대인의 하나님의 던져버리기 위해 와서 자신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즉 생명의 광채를 되찾아 주는 것이다. 이상에 볼 때 그의 사상을 세 가지로 다시 요약할 수 있다:

       

      (1) 성부와 세상 간에 다소간 타락하기 쉬운 중개자의 하강하는 사슬의 개념; 이러한 것을 “시대”라 번역되는 헬라어의 어원을 가진 “이언들(aeons)”은 신과 같은 영적 실재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천사들은 타락하고 기본적 이언들이고 그 가운데서 선한 이언이 그리스도이다.

      (2)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간의 이원론이 이런 사슬에 포개진다. 영적인 실재인 이언들은 선하거나 악할 수 있지만 물질세계는 악한 이언들의 산출이고 그 자체는 악하다.

      (3) 특별히 구원에 대한 이러한 영지주의적 개념은 육체적 감옥으로부터 구현된 인간 영혼들의 자유와 성부에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하지만 신약성경과 너무나 다른 이 개념은 육체의 부활만 아니라 영혼의 생존을 필요하게 된다.93

       

      . 바실리데스

       

      영지주의의 창시자이며 최초의 영지주의 조직신학자인 바실리데스(Basilides, d. 140)는 알렉산드리아인이었다.94 개인의 생애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들 Isidore가 있었다는 것을 사료들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아들 Isidore는 바실리데스의 교리를 발전시켜 제자들을 이끌었다고 한다.95 바실리데스는 베드로의 해설자로 알려진 Glaucias의 제자라고 자청하면서 자신의 가르침들은 그에게서 배웠다고 했다.96 또 다른 곳에서는 바실리데스가 Barcabbas Barcoph라는 선지자들을 만들고 사도 Matthias의 구두적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97 Epipahnius에 의하면, 사투르니누스와 함께 안디옥의 메난더의 제자로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제국의 황제 하드리안(Hadrian, 117-138)과 황제 피우스(Antonius Pius, 138-161)시대에 가르쳤다.98

       

      Agrippa Castor에 따르면, 그의 저서들이 현존하지 않지만 복음서에 관해 24권을 썼다고 한다.99 하지만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순수한 무의 상태 또는 무존재(nonentiry)이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100 바실리데스는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로부터 이성(nous)이 처음 나오고, 이성으로부터 로고스, 로고스로부터 신중(phronesis), 신중으로부터 지혜(sophia)와 힘(dynamis), 지혜와 힘으로부터 능력들, 본질들, 그리고 천사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천사적 존재들로 인해 가장 높은 하늘, 즉 첫 번째 하늘이 만들어졌다. 이들의 발산으로 인해 형성된 다른 능력들은 첫 번째 하늘과 유사한 또 다른 하늘을 창조했다. 첫 번째와 거의 유사한 모양이다. 또 다시 세 번째 하늘, 네 번째 하늘, 등등으로 만들어져서 마침내 365개의 하늘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일 마지막 하늘을 붙잡고 있는 천사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었다. 모든 것의 주인은 유대인의 하나님이다. 이제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했으나 모든 군주들이 그에게 항거하고 반대했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는 아버지는 이러한 불운을 보시고 처음 태어난 이성, 즉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보내어 세상을 지었던 천사적 존재들의 능력을 받아 자신을 믿게 하셨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보이고, 이적을 행했지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님은 하늘로 되돌아왔다. 시몬은 예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다. 그리스도의 영지(gnosis)를 통해 사람들의 영들은 구원을 받지만 육체는 멸망을 당한다.101

       

      Epiphanius Pseudo-Tertullian에서도 이와 비슷한 묘사를 읽을 수 있다.102 가장 높으신 하나님, 즉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는 신비한 존재인 Abrasax를 가졌다고 한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103 Abrasax 365개의 하늘을 낳았다.104 일 년 365일의 수와 같다. 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고백하고 순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구레네 시몬이 대신하여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를 위한 것이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실리데스는 이렇게 가현설을 주장한다.

       

      히폴리투스가 바실리데스의 원리에 관하여 말했던 곳은 「모든 이단들에 대한 반박들」(Refutation of all heresies)이다.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그의 체제는 범신론적 일원론이었다. 모든 것은 태어나지 않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것의 순수한 형태이다. 그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범주를 뛰어 넘어 있다. 하나님은 비존재이시라고 하며 모든 것의 태아로부터 낳으신다. 그 태아에는 3중아들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우주적 영(pneuma)으로서 비존재의 근원이다. 둘째는 하나님 아래에 있는 우주적 아들로서 비존재의 기반이 된다. 영과는 구분되지만 능력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셋째는 세상의 혼란에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물질과 영혼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퍼져있는 영혼의 분자들은 부분적으로만 되돌아올 수 있다. 이런 귀환은 영이 물질의 짐을 잊어버리는 개인적 정결의 과정이다. 신적인 우주적 씨앗-영혼-빛의 혼란-물질-어두움으로 결합하게 되면 빗과 어두움의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으로 영혼의 분자들을 물질의 혼란으로부터 석방시키고 영혼을 기원적 근원으로 귀환하게 된다.105

       

      . 카르포크라테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 인물은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는 영지주의에 분명히 속하는 자이다.106 그는 시몬 마구스의 후계자들인 바실리데스와 사투리누스와 같은 자이며 영지주의자들의 아버지라 불린다.107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Carpocrates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보다 못한 천사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 비록 강하고 순수한 영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게 보인다.108 또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는 그가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다는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빈부나 귀천, 어리석은 자나 총명한 자, 남자나 여자, 주인이나 종, 그리고 백성들이나 통치자 간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고 했다. 그가 자유방임하는 운명주의를 지향한다고 했다.109 유대 학자 필로 (Philo, c. 20 B.C.-A.D. 50)에 의하면, 율법의 신비들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업신여기고 있는 어떤 자들은 “A.D. 40년에 이르러 자유사상(libertinism)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주의 내에서 지성적으로 존경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세기 후 그 사상은 카르포크라테스 운동을 통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영지주의의 원리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110 카르포크라테스에게는 Epiphanius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17세에 죽었다. 그러자 Samos라는 섬에 그의 제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전을 지었다고 한다.111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Pythagoras, Plato, Aristotle, 그리고 Christ를 숭배하고, 그들을 위해 전을 건축했다.112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Secret Gospel of Mark”에 대한 클리멘트의 서신에서는 카르포크라테스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어느 장로로부터 비밀 복음서(secret Gospel)의 복사본을 받았는데 그것을 그는 참람하고 육욕적인 교리에 따라 해석할 뿐만 아니라 흠도 없고 거룩한 말씀들을 오염시키고 혼합시켰다“고 되어있다.113

       

      . 마르시온

       

           2세기의 다른 어떤 이단보다 기독교에 위협을 주었던 것은 마르시온(Marcion, d. 160)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다.114 그가 쓴 작품들도 현존하지 않지만 그를 비판한 자료들을 통해 그에 대한 것을 사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특별히 터툴리안의 작품에서 잘 엿볼 수 있다.115 마르시온은 약 85년에 Pontus Sinope (흑해 근교)에서 부유한 선박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역시 그는 감독의 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감독이었다고 한다.116 성스러운 처녀를 미혹했다는 혐의를 물어 부친은 그를 교회로부터 추방시켰다.117 그는 135-140년에 로마를 방문했다. 그 곳에 있는 교회에 200,000 sesterces를 헌납했다.118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영지주의 교사 Cerdo의 사상을 구체화시켰다.119 그에게서 그는 이사야 39-66장의 말씀 해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20 그러면서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Marcionites-을 거닐었다.121 그 결과 그는 장로들에게 의심을 받아 144년 출교를 받았다. 하지만 계속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널리 확산시켜 나갔다.122 저스틴 마터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그리스도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고 가르쳤다.123 폴리캅은 그를 가리켜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했다.124 마르시온은 약 160년경에 죽었지만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3세기까지 지속했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니교에 연합되었다.125       

       

           마르시온의 사상은 영지주의임이 틀림없다.126 그의 사상을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그는 구약성경을 자체를 포기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역사이고 조물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바울만이 진실한 사도이기에 그가 쓴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를 제외한 서신들만 성경으로 봐야한다고 했다.127 또 그는 누가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서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인용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128 2)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는 하나님이지만 높으신 하나님과는 구별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 외에는 그 높으신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조물주는 공의의 하나님이지만 매우 엄격하고 힘들게 하는 신이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새로운 왕국을 선포하셨다.129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조물주가 행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일들을 수행했다. 조물주를 믿는 자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도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조물주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30 그리하여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 결과 그는 가현설주의자가 되고 만다.131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하나님과 조물주, 복음과 율법을 대치시키는 그의 이원성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육체의 부활은 없고 최후의 심판도 없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드시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아야만 한다. 결혼을 해서는 안된다. 결혼했던 자들은 헤어져야만 한다. 먹고 마시는 것에도 절제해야만 한다. 순교를 즐겼다.

       

      . 발렌티누스

       

           시몬, 바실리데스, 그리고 마르시온 이후 영지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자는 이집트 델타(Delta)에서 태어난 발렌티누스(Valentinus, ca. 100-ca. 175)였다. 그는 이집트 종교 철학가이며, 영지주의 로마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창시자이고,132 gn?sis 또는 ‘신비한 지식’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진 종교적 이원론의 체제를 만든 자이다.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된 발렌티니안 공동체는 2-3세기 기독교 신학에 큰 도전을 안겨다 주었다. 발렌티누스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 근교에서 철학을 배우면서 바실리데스를 만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바실리데스는 그 곳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아마 그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플라톤주의에 매력을 느꼈고, 성경에 대한 헬라적 유대 해석을 가미하였다. 그 후 교사로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면서 아마도 책을 출판했을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그가 사도바울의 제자인 Theudas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133

       

           2-3세기 파편으로 된 신학자들의 문서들에 의하면, 발렌티누스는 약 136년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로마감독 히기우스(Hygius, c.136-140) 아래 가르쳤고, 로마감독 피우스(Pius, ca 150-155) 아래서 눈부시게 활약했고, 그리고 로마감독 아니케투스(Anicetus, ca. 155-160) 때까지 활동했다.134 기독교 영지주의 가르침과 동방 영지주의 가르침의 종합을 상술하면서 25년 동안 그곳에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로마감독이 되려는 열망을 품은 그는 약 140년 감독직을 넘겨받았으나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정죄를 받고 기독교 공동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60 Cyprus를 위해 로마를 포기한 발렌티누스는 지속적으로 신비적으로 유래된 종교 철학에 대한 자신의 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모든 사상들은 플라톤과 Pythagoras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Gospel of Truth의 저자였다. 그 책은 영지주의 원리들이 담긴 기독교 바울신학과 혼동될 수도 있다. 또 그는 설교집, 서신들, 찬송, Treatise of the Three Natures Revelations 또는 Visions를 썼을 것이다. 더욱이 4세기 이집트 파피루스인 Jung Codex(1946년 발견)는 발렌티누스의 본문의 Coptic 역본으로서 자신의 교리에 대한 것이다.

       

           발렌티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제력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그리고 들을 수도 없는” 최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믿었다.135 그는 무한하고, 시작도 끝도 없고, 그리고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기원이다. 그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 없다.136 세상의 있는 것은 그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단일성을 유지하시면서 존재의 다수성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혼합된 남성과 여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남녀성의 이원 일위(dyad)이시다. 아버지가 본질을 우주에 제공하시는 측면은 여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침묵, 은혜, 그리고 사상으로 불린다. 침묵은 평정과 자기 인식에 대한 하나님의 원시적 상태이다. 침묵은 창조적이다. 사상은 본질적인 이온의 모든 연속적인 상태를 말한다. 우주에 형태를 주는 하나님의 남성적 측면은 형용할 수 없는 ‘심연’(abyss)과 최초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심연은 너무 깊어 불가해적 존재며, 신성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심연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그의 여성인 사상에 의해 행동되어질 때에만 그는 우주에 형태를 준다.137 히폴리투스에 의하면, 아버지의 단일성을 강조한다. 신성의 이와 같은 두 가지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격 안에 있는 존재로서 동시에 존재한다.138 물과 축축함과 같거나 동전의 두 면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분리될 수도 없으며 둘 중에 하나가 없을 수도 없다.

       

      ·    우주의 기원은 신격에서 나온 존재의 연속적인 상태의 발산과정으로 묘사된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비활성적 존재로 계셨다.139 우주는 잠재적으로만 존재한다. 창조의 과정은 신격 편에서의 자기 제한이 필요하였다. 이온들의 연속적인 상태가 그로부터 분리되기 위해 아버지는 제한이나 한정을 창조하셨다.140 모든 것을 견고케 하고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함 밖에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은 제한의 능력이다.141 제한은 두 가지 기능을 행한다. 아버지로부터 ‘영적 세계’ (충만, Fullness)를 분리시켜 힘을 제공한다.142 그 이후 아버지는 발산의 과정을 통해 가해적인 형태로 자신을 명시하신다. 아버지는 자신을 알 수 있는 자신의 사상을 통해 지식의 영을 낳았다. 그 영은 지식 안에 있는 ‘독생자’(Only-Begotten)이다. 그 독생자도 하나님처럼 남녀성의 이원일위로서 일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독생자의 이온 또는 독생자의 남성적 측면은 마음이다. 그의 여성적 측면은 진리와 모든 것의 모친이다. 그것들은 어떻게 진리가 진실한 의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독생자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아버지와 독생자는 이따금 기원적인 넷, 즉 심연, 침묵, 마음, 또는 진리로 언급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독생자는 이원일위이기 때문이다. 독생자 (예를 들면, 마음과 진리)는 하나님의 불가해적 측면들의 가해적인 형상이다.143 우리가 최상의 신을 알 수 있는 것도 독생자의 중재로 말미암는다. 독생자와 아버지의 관계는 인간의 마음과 무의식의 관계와 비교될 수 있다. 독생자는 아버지께 안겨 있으며 그분 안에 있다.

       

           아버지에 의해 영감 받은 남녀성을 가진 독생자는 자신의 인격 내에 내재하는 에너지를 명시하는 과정을 시작한다. 그는 4개의 이온들을 발산한다. 첫 번째 짝은 말씀(남성)과 생명(여성)이다. 그것들은 심연과 침묵의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두 번째 짝은 인류(남성)와 교회 (여성)이다. 그것들은 마음과 진리의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또 교회에 결합된 인류의 자연적 상태를 나타낸다. 본래의 기원적 4개의 이온들과 그것들에서 나온 4개의 이온들은 모든 것들의 근원이며 본질이다.144 이 ‘8인조’(ogdoad)의 이온들에 미치지 못하는 이온들이 탄생하게 된다. 말씀과 생명에서 10개의 이온들145, 인류와 교회에서 12개의 이온들146이다. 이리하여 모두 30개의 이온들 또는 신적 속성이 완성된다. 이것을 가리켜 ‘플레로마’(pleroma)라 부른다. 이것들은 모두 독생자의 본성의 다른 측면들을 명시한다. 신적 충만의 자기 계시과정은 씨앗에서 나무로 자라나는 것으로 비교될 수 있다.147 또 태양에서 나오는 빛의 관성과 같은 것이다.148 독생자가 아버지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이온들의 충만도 독생자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온들의 다수성 안에 신격의 단일성은 유지된다. 발렌티누스가 쓴 Gospel of Truth 안에서 독생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묘사된다. 개인적으로는 완전한 것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이름을 구성하고 있다.149 그래서 이온들은 함께 신격의 완전한 충만을 구성한다. 마르쿠스 (Marcus)에 따르면, 30개의 이온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이온들을 가질 수 있다. 마치 글자와 같아서 글자들이 합쳐 또 다른 단어들을 만드는 것과 같다.150

       

           독생자만이 최성의 아버지의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다른 모든 이온들에게 여전히 불가시적이고 불가해적이다.151 이온들은 독생자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이온들은 자신들이 나온 분을 알기를 갈망했다. 이것을 발렌티누스는 자신의 Gospel of Truth에 묘사하고 있다 : “모든 것은 자신들을 낳으신 분을 찾고 있다. 모든 것은 그 안에 있다. 불가해적이신 그 분은 모든 사상보다 훨씬 뛰어나신다.152 그에 따르면 아버지를 찾고자 하는 이온들의 갈망은 결국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절망적이다.

       

           그래서 발렌티누스는 지혜의 신화를 만들어 낸다.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바람이 지혜에 넘쳐났다. 지혜는 12개의 이온들 중 제일 어리다. 완전한 충만을 위해 지혜는 최성의 부모를 알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는 독생자의 중재가 없이 하나님을 알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되어 오류와 고통의 상태로 처하게 되었다.153 이는 마치 창세기의 이브의 타락과 흡사하다. 그 결과 지혜는 아버지와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빚어진 낙태를 가리켜 지혜의 결핍된 생각이라고 한다.154 이러한 부족 속에 지혜는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슬픔 속에 그녀는 회개하고 도움을 청한다. 다른 이온들도 역시 슬퍼하며 그녀의 청원에 관심을 갖는다.155 제한 또는 두 번째 한계의 도움을 받아 지혜는 더 높고 더 낮은 수준으로 나눠진다. 더 낮은 수준 또는 낙태는 고통을 가지면서 충만에서 배제되었다. 더 높은 지혜는 강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알 수 없는 분이심을 확신하고 되돌아온다.156 지혜의 이런 행위는 충만에 있는 결핍을 분리시켰고, 밖으로 향하게 했다.

       

           이런 위기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독생자는 자신을 그리스도(남성)와 성령(여성)이라는 형태로 다른 이온들에게 자신을 명시했다.157 그리스도가 된 독생자는 다른 이온들에게 아버지가 불가해적이고 자신을 통해서만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음을 계시했다.158 성령은 그들에게 감사를 가르쳤고, 모두가 동등하게 창조되게 했다.159 이것이 소위 말하는 세례이다. 이것은 인간 교회만 아니라 이온들에게도 해당되었다 : “아버지는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다. 이제 그의 사랑은 성령으로 나타난다. 그는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을 계시하신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독생자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비로 인해 이온들은 그를 알게 되고 아버지를 찾는 수고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 안에서 쉼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안식을 취하게 된다.160 모든 이온들은 함께 뭉쳐 구세주라 불리는 독생자와 연합하게 되었다. 모든 이온들에게서 나온 완전한 이름을 구세주만이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아멘이라고 부른다.161 구세주는 역시 제한 밖에 있는 타락한 지혜의 동반자가 되기로 되어있다.162

       

           타락한 더 낮은 지혜는 또는 낙태당한 생각은 고통이 있는 더 낮은 영역에 갇히게 되었다. 부족 또는 더 낮은 영역은 물질적 우주이다. 충만이 독생자의 산물이고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부족의 영역은 충만의 산물이고 그 안에 있다. 부족은 지식에 관해서 충만 밖에 있다.163 부족은 무지의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헛수고를 계속하는 지혜는 제한으로 인해 충만에 상승하지 못한다. 무지의 결과로 인해 그녀는 슬픔, 두려움, 그리고 혼돈을 경험한다. 세상이 환각임을 경험하면서 무엇이 실재인지 무엇이 환각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이다.164 이제 지혜는 회개하게 되고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쁨을 다시 회복한다.165

       

           지혜의 회개로 인해 구세주는 자신을 비워서 충만 밖으로 나와 천사들의 수행원과 함께 부족으로 하강했다.166 그와 지혜는 함께 이온들의 짝처럼 결합했다. 영원한 영역을 알게 되므로 지혜는 환각과 고통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지혜는 구세주와 천사들의 수행원을 보고 기뻐하고 자신의 형상으로 영적 씨앗들을 낳는다. 이런 씨앗들은 모든 기독교인들 안에 있는 영적 요소가 된다. 이런 이유로 씨앗들은 교회에 맡겨진다. 씨앗들은 충만한 가운데 있는 선재한 교회의 형상으로 여겨진다.167 이리하여 지혜에서 나온 세 가지 존재 상태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하나는 무지와 고통에서 나온 세속적인 존재를 특징짓는 환각, 다른 하나는 무지와 지식 간에 있는 중간 상태를 말하는 회개와 기쁨, 마지막은 영적인 씨앗이 지혜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 등이다.

       

           영적 씨앗이 아직도 성숙하고 훈련을 받기 위해 물질세계가 필요하게 된다.168 지혜가 이 세상을 직접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장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장인을 통해 지혜는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169 장인은 자신의 모친을 모르고 자신 혼자 행했다고 생각한다. 장인은 7개의 천사적 존재 또는 하늘들을 창조하여 그것들 위에 군림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일곱 번째라 불린다. 장인의 7개의 천사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7일을 의미한다. 장인의 모친인 지혜와 구세주는 8번째 하늘에 있어 그보다 위에 군림한다. 이런 8가지 하늘들은 충만 가운데 있는 8개 이온들의 형상이다.170 지혜와 구세주는 비밀적으로 장인에게 영향을 끼쳐 물질우주를 완전의 형상으로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진리는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현현한다. 사람들은 장인에 의해 선재하는 인류(Humanity)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사람들은 귀신적 요소, 물질적 몸, 이성적 영과 영적 씨앗으로 구성한다. 영적 씨앗은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 (영지)을 얻을 수 있다. 지식을 받은 각 사람은 부족의 부분을 제하여 버리고 신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세상의 종말은 영적인 모든 것이 지식으로 채워질 때 오게 된다.171 영혼들은 동물의 영들을 버리고 자신들의 모친인 지혜와 더불어 충만으로 들어간다. 지혜는 새 예루살렘이 되고 신랑, 즉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가 된다. 영혼은 천사들에 가입하게 된다.172 세상에 감추어진 불은 모든 물질을 활활 태워버리고 무로 나타난다. 육체적 세상은 사라진다. 부족도 사라져서 회복의 과정은 완성될 것이다.173

       

      3. 영향

       

      . 초기 기독교

       

           1세기 초기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먼저 재림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사도행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곧 재림하시리라 믿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교리의 조직적 구조를 발전시킬 만한 경향이 없었다.1 지연되는 재림사상에 몬타누스를 비롯한 이단들이 등장하여 기독교인들을 어지럽혔다. 그러자 사람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나름대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적 사실들을 우주적 형틀 속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을 최초로 가장 위험한 시도로 감행한 자들은 바로 영지주의자들이었다.2

       

           둘째, 영지주의는 혼합종교이기에 신비한 무엇인가를 해석하는 것이 스스로 엘리트라 생각하는 자들에게 큰 매력적이었다. 더욱이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 널리 퍼지면서 기독교인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일반인들이 익숙해 있었던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종교들을 종합하여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혼합적 영지주의는 만족한 대답을 줄 수 있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세상에 대한 수수께끼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3 영지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매력적인 특색 두 가지 중 하나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설명하는 비밀 지식(lore)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비밀들을 엘리트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데 있었다.4 신약성경에 나타난 말씀들을 철학적으로, 신비적으로 해석하려는 호기심을 영지주의는 충족시켰던 것이다:

       

      본래적으로 기독교가 단순한 복음이 제시하는 것보다 우주와 존재에 대한 신비로운 면을 잘 설명하는데 관심을 가졌으며 기독교 사상가들이 포괄적인 신학적 방법으로 아직 많은 작품들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영지주의는 기독교에 실제적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정통 저술가들은 거짓 교리들과 대면해야만 했고, 영지주의가 다루었던 우주적으로 신비로운 것들 ― 우주의 기원, 악의 기원과 본질 그리고 개인 구원의 의미 ― 에 대한 다른 설명들을 해야만 했다.5

       

           셋째, 4세기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영지주의가 지향하는 종교적 삶에 있던 세 가지 현상 때문이었다: “금욕주의, 카리스마적인 경향, 그리고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였다.6 금욕주의는 주님을 더 가까이 따르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 속에 방해가 되는 육체적 욕심들을 억제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영지주의 문서인 the Acts of Peter and the Twelve Apostles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포기하지 않고서 매일같이 금식하지 않고서 어느 누구도 그 길을 계속 할 수 없다. 강도들과 야생동물들이 그 길에 있다. 길에서 빵을 가진 자는 검은 개가 죽일 것이다. 왜냐하면 빵 때문이다. 세상의 화려한 가운을 입은 자는 강도들이 그를 죽일 것이다. 왜냐하면 옷 때문이다. 물을 가진 자는 늑대가 죽일 것이다. . . 고기와 채소를 먹고자 애쓰는 자는 사자가 죽일 것이다. . . . 만일 사자를 피했다고 하더라도 황소가 그를 먹기 위해 받을 것이다.7

       

      카리스마적인 경향은 신앙의 이상형이었던 순교가 그치고 마땅한 신앙의 목표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즉 미지근한 신앙의 삶 가운데 특별한 은사들의 행사가 큰 매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영적인 체험, 영적인 능력 등등을 묘사하는 성경의 말씀들과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경향은 엘리트주의로 흐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사상으로도 흘러갔다. 자유사상으로 흐르는 현상이란 말은 ‘영적인 자’에 속하지 못한 자들이 늘 금욕하며 살아야 하지만 자신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근한 실례를 헬렌과 관련된 시몬 마구스에게서 잘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유인들로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행한다. 자신[시몬]의 은혜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긴다. 마치 천사들처럼.8 철학적인 분위기란 신앙으로만 이해될 수 없는 성경적 진리들을 당시의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의 사상으로 해결할 때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

       

      . 수도원 운동

       

           1세기 기독교 시대에 영지주의란 말은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비록 이교적이지만 기독교인들도 사용했다. 특히 영지주의 교사들 중 가장 영향력을 가진 발렌티누스는 로마의 감독으로 선출되었을지도 모른다. 영지주의 비밀적 지식, 새로운 성경들, 금욕주의와 자유 사상적 자세 등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180년 경 리용의 감독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글을 썼다.9 그 외에도 여러 교부들은 영지주의에 반대하는 글들을 남겼다. 4세기 말에 묻혔다고 여겨지는 Nag Hammadi Library10 나타난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가 근간에 와서 활발하게 되었다.

       

           영지주의 문서라 알려진 가죽 표지로 된 Nag Hammadi Library 1945년 발견되었다. 그것들이 묻혔던 잠정추정 시기는 이집트의 영지주의가 쇠퇴하고 있었던 때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제도가 성장하는 시기였다.12 Nag Hammadi Library가 발견된 이후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는 매우 활발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이집트에 있던 수도원 운동은 파코미안 시노바이트니즘(Pachomian cenobitism)이었다.13 이 수도원 운동은 서방교회 베네딕트 수도원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앞으로 수도원 운동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런데 이 수도원 운동과 Nag Hammadi Library간의 어떤 접촉이 있었을 수 있는 주장이 있어왔다.14

       

      1) 파코미우스

       

           먼저 시노바이트 수도회를 창설한 파코미우스(Pachomius, 292-346)15 사막의 은자인 이집트의 앤터니(Anthony, ca. 250-355)처럼 기독교인 출신이 아니고 이교도였다. 그는 292년 부유한 농부가문 출신으로 나일강변에 있는 Sne에서 태어났다. 형 존과 여동생 마리가 각각 있었다. 312년 서로마제국을 아우구스투스로서 다스렸던 막시미안 다이아(Maximian Daia)는 적대자 리키니우스(Licinius)를 대적하기 위해 군인들이 필요했다.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강제로 붙잡혀 가서 로마군인의 생활을 했다. 전쟁 속에 그는 Antinoe에서 감옥생활을 했다. 이 때 기독교인들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체험했다. 이것에 이끌려 이교도였던 파코미우스는 감명을 받아 후에 남을 위한 봉사를 하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수도원적 생활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전쟁이 끝나고 파코미우스는 석방되어 집으로 되돌아왔지만 이미 폐허가 되었다. 그는 앤터니처럼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313년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을 때 감옥에서 받았던 감명대로 남을 섬기는데 마음을 정했다. 할 수 있는 한 주위 사람들을 도왔다. 그는 Palamon을 찾아가 그의 아래서 금욕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혹독한 금욕생활을 하면서 앤터니처럼 많은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잘 견디었다.16

       

           323 Tabennesi로 가서 은자의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고 Palamon을 떠났다. 먼저 자신의 형 존이 그에게 와서 그와 함께 살았지만 어느 날 밤 꿈을17 꾼 후 존과 언쟁이 있었다. 존은 지속적으로 작은 방에서 은자적 삶을 원했고, 파코미우스는 계시대로 수도원을 짓기를 원했다. 324년 파코미우스는 수도원을 짓게 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로마의 군대의 위협, 도덕성 하락, 높은 과세, 기근, 그리고 가난 등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경건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Lives of the Desert Fathers의 서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들의 삶이 영감 받고, 놀랍고, 그리고 덕스러운 방법으로 충만하기를 바라는 새로운 선지자들을 나는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었다.18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요구가 무엇임을 그는 이해했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극적인 금욕을 통하여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이끌었고, 자신도 친히 굴속에서 금욕을 실천했다.19 그는 실제로 그들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가 그들에게 주었던 교훈은 각자는 자기 충족을 행하고, 자신의 일들을 보살펴야만 했다. 수도원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야만 했다. 수도사들을 위한 음식을 제공하든지 손님을 위해 음식을 제공하든지 간에 물질적 필요를 채워야만 했다. 329 Phbow에서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공동체가 ‘코이노니아’ (Koin?nia)라는 공동체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시노바이트 공동체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로 세워진 모임은 Tabennesi, Phbow, Sheneset, 그리고 Thmoushons이다. 그의 임종 시, 340-345년경에 Thbew에서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앞의 세 곳은 Shmin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마지막 장소는 보다 남쪽인 Phnoum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파코미우스는 346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코미우스를 이어 346년 시노바이트 공동체의 지도자는 Petronios였다. 그는 몇 개월 후에 다른 지도자 Horsiesius가 그 직을 대신했다.20 권위직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은 후 Thedore 5년 동안 그 공동체를 책임 맡았다. 368 Theodore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금 Horsiesius가 그 공동체의 지도자직을 맡아 380년까지 활동했다. 파코미우스가 세상을 떠날 당시 시노바이트 공동체는 남성을 위한 수도원 9개와 여성을 수도원 2개였다. 수도원에 속한 수도사들의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21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시노바이트 공동체는 쇠퇴하게 되었다. 346-350 Horsiesius가 지도자로 있을 때는 새로운 공동체가 설립되지 않았고, 350-368 Theodore가 지도자로 있었던 시기에는 남성을 위한 수도원 2개와 여성을 위한 수녀원 1개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이집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미 이집트 상류에는 파코미우스의 스승인 Palamon이 이끄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도사들의 모임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도 Rule of Pachimius를 따르거나 파코미안 수도사들이면, 대체적으로 Tabennesiots 이름으로 불렸다.22

       

      2) Nag Hammadi Library

       

           Nag Hammadi Library 1945년 파코미안 수도원이 있는 지역들, Tabennesi, Phbow and Sheneset 에서 불과 몇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Jabal al-Tarif cliff, near Kasr es-Sayyad 에서 발견되었다. 지리적인 인근성이 어떤 실마리를 주는 분명히 아니지만 무엇인가 서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23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기록되었을 추정 연대가 333~348년이다. 이 시기는 파코미우스가 죽음의 전후를 포함하는 연대이다. 더욱이 그 문서들의 코덱스 7번이 파코미안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코덱스 안에서 두 서신이 있는데 한 서신에 어느 여인이 Sasnos Psatos라는 수도사에게 나귀들을 위해 사료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코덱에 있는 어느 콥트어로 된 파편은 어느 Paphnout가 어느 파코미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이 있다. Paphanoute Theodore의 형제였다는 것이다.24 이런 점들을 보아 수도사가 쓸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이 일어났다.25

       

           특히 그 코텍스에 있는 문서들은 기독교 영지주의라 특징지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 내용을 보면 대단히 경건한 문제들과 이교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비세 (F. Wisse)는 초기 수도원 운동 시기에 이집트에 잔재해 있었던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점진적으로 수도원 공동체로 동화되어 갔다고 한다.26 당시에 수도원들이 신비적, 환상적, 귀신적, 그리고 천사적인 여러 요소들에 영향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파코미우스는 심지어 오리겐의 영향까지 차단하기를 원했다.27 그래서 겉으로는 기독교적이지만 실상은 이교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28 367년 축제에 관하여 파코미안 수도원에 보내는 서신을 아타나시우스는 써서 이교적, 즉 영지주의적인 문서들을 폐기 처분하라고 명한다.29 하지만 파코미안 수도사들은 거부했고 그것들을 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30

       

           더욱이 Nag Hammadi Library들 중 일부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기독교적 영지주의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Sentences of Sextus, Teachings of Silvanus, 그리고 Gospel of Thomas 등이다. 특히 Sentences of Sextus는 코덱스 12번에 속한 콥트어로 번역된 파편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영지주의 문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헨리 채드윅(Henry Chadwick)이 잘 설명하고 있다.31 흥미 있는 것은 이 내용 가운데 하나가 콜룸반의 규율(Rule of St. Columban)에 들어있다는 것이다.32 게다가 두 번째 문서인 Teachings of Silvanus는 코덱스 7번에 들어있다. 이 내용은 앤터니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수도원 저자들이 선호했던 지혜(sapiential) 문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잠언 1-9장의 내용과 유사하다. 특별히 실바라는 이름은 사도바울과 사도베드로와 동반자로 알려져 있다.33 동일 인물이라기보다는 이름을 도용하여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펑크(W. P. Funk)에 의하면, Teachings of Silvanus는 이집트 수도원 운동이 시작하기 전에 쓰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앤터니가 그것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34 아니면 앤터니는 적어도 Teachings of Silvanus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문서인 Gospel of Thomas는 매우 금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문서는 약 14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 근거를 둔 시리안 기독교 금욕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고 믿어진다. 시리아에 있던 유대파 기독교인들이 행했던 금욕주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금욕주의와 유대파 기독교 금욕주의와 너무나도 유사한 점이 많다. 금욕주의는 수도원 영성의 하나의 측면이다. 금욕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마음의 개종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다.

       

           독일의 쿠르트 루돌프(Kurt Rudolph)교수는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끼친 두 가지 현상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는 신학적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세 분파자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 단적인 예로서 오리겐으로부터 기독교 수도원적 신비주의의 경험에 점차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영지주의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 환각상태에 들어가려는 면을 말한다.35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교의 뉴 칼리지의 학장이었던 개혁신학자인 윌리엄 커닝함(William Cunningham, 1805-1865)은 그의 걸작인 「역사신학」상권에서 속사도 시대의 이단을 논하면서 영지주의 영향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영지주의 체제가 초기 교회의 견해들과 조건에 대해 ― 특히 두 가지 점에 관해 ―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두 가지 점이란 하나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격이고, 다른 하나는 독신주의와 수도원제도를 포함하여 금욕적 제도나 기당이라 불리는 것으로 이것은 곧 유해한 영향으로 교회에 넓게 확산되고 있었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련된 가장 최초의 이단자들은 영지주의 체제의 원리들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 . 독신주의와 수도원제도는 영지주의 원리들이 교회에 가장 명료하고 완전하게 발전되었던 실례였다.36

       

           수도원 운동의 금욕적, 카리스마적, 사색적인 형태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앞 장에서 언급한 영지주의가 가진 특징은 현상적이지만 대체적으로 수도원 운동이 행하고 있는 것이다.

       

      . 수도원제도

       

           수도원제도(Monasticism)라는 용어는 헬라어 monachos에서 유래되었다. 그 의미는 ‘홀로 산다’는 의미이다. 수도원 운동은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여 완전에 이르러 하나님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는 것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정해진 규율도 없었고 단순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수도원 운동은 로마제국으로 복음이 전파되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진행되는 동안, 배교의 위험으로부터 피하고,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개인적으로 황량한 이집트 사막으로 나아가서 금욕, 회개, 명상, 그리고 기도하였다. 그러다가 4세기에 이르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퍼져나갔다. 수도원 운동이 기독교인들에게 급속하게 퍼져나가게 된 이유는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종결되고 자유하게 되자 두 가지 현상이 있었다. 하나는 존경하는 신앙의 모범, 즉 순교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기독교인들은 한적에 곳으로 가서 사탄과 싸우면서 자신들의 유혹을 극복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신앙이 안일해지면서 범람하고 많아지는 기독교인들은 점점 세속화되어가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도덕적 타락은 기독교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 현상이었다. 높은 세금으로 백성들, 독재와 노예들, 끝없는 사치와 절망적인 가난, 계층 간의 갈등, 야만족들의 위협, 등등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황야로 향했다. 동시에 수도원 운동은 순교를 위해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37

       

      이러한 장소로 불타는 사막은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수도적 삶을 살고자 하는 은자들은 자신을 학대하고, 육신적 욕망을 자제하고, 금욕적 삶을 살았다. 이집트 지역에서 시작된 최초의 기독교 은자들로서는 데베스(Thebes)의 바울과 사막의 수도사 앤터니를 빼놓을 수 없다.38 하지만 이들은 개인적인 은자적 삶이었기에 수도원 운동의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은 4세기 이집트의 파코미우스(Pachomius)부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도원 운동을 네 시대로39 구분하여 볼 때 세 번째 시대의 수도원제도를 확립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한 사람은 파코미우스였음이 틀림없다. 그에 의해 수도원 제도의 모습이 형태를, 즉 공동체를 ― cenobitic(공동체적인 모습)을 ―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규율40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수도원 제도의 규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수도원적 삶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로 삶이었다:

       

      육체를 지배하는 영을 온전히 통치한 후 본능적인 투쟁 그리고 하나님과 영이 방해받지 않고 교제하므로 거룩한 높은 단계에 이른 후 감성을 지배하는 이성, 자연적인 것을 지배하는 초자연적인 것, 그리고 육체, 가족, 국가, 그리고 세상에 있어야만 하는 신적 질서의 병적인 타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41

       

           철저하게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수도원 운동에서 볼 수 있다. 이 모습을 우리는 파코니안 규율에서 잘 볼 수 있다. 파코미우스의 수도원 운동은 이전에 있었던 것과 많이 달랐다.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던 그들에 대해 역사가 소조멘은 말한다:

       

      그들은 덕행에 힘썼고, 세상의 일들을 경멸했고, 천국적 명상에 힘썼고, 그것을 위해 육체적 소욕을 기꺼이 제제했다. . .  그들은 소매가 없는 긴 가운을 입었다. 그 이유는 손들이 건방진 사악한 일을 하는데 사용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자신의 두건이라 불리는 것을 써서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우유만을 먹는 유아들처럼 순순하고 순전하게 살기 위해 동일한 형태로 입었던 것이다. 허리, 어깨, 그리고 팔에는 띠와 스카프와 같은 것을 두르고,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사역을 위해 항상 준비되도록 했다.42

       

      영지주의가 수도원 운동에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은 역시 금욕적, 카리스마적, 그리고 사색적이지만 이런 형태는 결국 영지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우주론, 신론, 인간론, 구원론, 그리고 윤리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나가는 말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영지주의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과 영지주의에 관련된 여러 견해들도 있다.43 이러한 영지주의는 신약성경시대 이후 초기 기독교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신앙적 측면에서 금욕적이고 카리스마적으로, 신학적 측면에서 철학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시대를 직면하게 되는 4세기부터 신앙은 새로운 측면을 맞이했다. 그것이 바로 수도원 운동이었고 이 시점에 이르러 영지주의는 쇠퇴하게 되었다. 쇠퇴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환했는데 그것이 수도원 운동이었다. 이와 연관된 것으로 Nag Hammadi Library가 발견되면서 두 사상의 관계는 더욱 분명해졌다. 수도원 운동에 흐르는 금욕적, 카리스마적, 철학적인 모습을 바로 영지주의가 지향했던 것이고 빌려왔던 것이다.

       

           영지주의는 혼합종교로서 대체적으로 시몬 마구스부터 시작하여 발렌티누스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이것에 대해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간과하지 않고 그 위험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945 Nag Hammadi Library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주로 교부들의 작품을 통해 영지주의를 연구했다. 교부들의 작품들에서 나타난 영지주의와 Nag Hammadi Library에 나타난 영지주의와 다를 바가 없었다.44 이 문서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묻혔던 시기와 장소만 아니라 이유가 그곳에서 시작했던 시노바이트 수도회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수도회를 창설한 수도회는 수도원 운동에 끼치는 악영향을 염려하여 여러 이교사상들을 금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에 살았던 위대한 삼위일체 신학자인 아타나시우스도 그들에게 서신을 띄우면서 어떤 문서들을 파기하라고 명했다는 것을 볼 때 분명히 영지주의가 당시 수도원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영지주의의 이론, 윤리, 의식 등등이 수도원 운동과 너무나도 일치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이 지향하는 엘리트 의식만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구원을 보면, 수도사들이 지향하는 의도와 유사하다. 그들이 채택하는 성례는 인간 안에 있는 신적 요소, 즉 빛을 증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 빛을 증진시키기 위해 그들은 금욕을 행한다.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다. 이런 개념은 그들이 이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도덕적 삶은 각자 사람들 안에 내재하는 섬광을 조명시키는 존재론적인 윤리관을 소유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영지주의를 채택했던 초기 교회처럼 위기의식들을 맞이하고 있다. 여러 사회적 문제들만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답변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영지주의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뉴 에이지 운동에 한국교회는 달리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저 문화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현대인의 감각에 맞추어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수도원 운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관상신학을 채택하여 교회의 신앙교육에 실행하고 있다. 성장위주의 흐름을 거슬리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다. 이것은 가리켜 나는 한국교회의 세속화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왔는지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점검하지 않고 현대 문화에 적응한다고 하여 무턱대고 받아들이고 있는 수많은 운동들이 있다. 예배시간에 채택되는 갖가지 요소들, 순서들, 관습들, 또는 지침들은 대체적으로 그 근거를 파악하지도 않고 단순히 성경에 있다는 단순한 유사성만을 가지고 빌려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 금욕적인 표현들이 있으니 금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결코 성경적 금욕과 작금에 행해지는 수도원적 금욕은 근거부터가 다르다. 성경에 묵상이 나온다고 하여 명상이라고 바꾸어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결코 성경적 묵상과 수도원적 관상은 근거부터가 다른 것이다. 이들의 근거는 영지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들의 모든 것들은 영지주의의 모습들이지 결코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모습들이 아니다. 이러한 세속적 모습으로 인해 초기교회 교부들이 그렇게 강조하며 심지어 신약성경 저자들이 그렇게 강조하며 경고했던 것을 간과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원으로 되돌아가자고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의 노고가 허무하게 될 수도 있다.

       

      출처: 청교도의 길 

       

       

       

      한국 땅에 이슬람의 공포가 밀려온다!

       

       

       

       

       

      속지 마라! 이것이 이슬람의 실체다!

       

      매스컴은 순식간에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손쉽게 할 수 있다. 이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대중을 속여 큰 피해를 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가까운 예로 세월호의 선내 방송을 들 수 있겠다. 세월호가 중심을 잃고 기울었을 때  당황하지 말고 방에서 기다리라는 선내 방송을 여러 차례 내보냈다고 한다. 이 때 만일 선실에 있으면 위험하니 모두 갑판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방송을 했다면 한 명의 피해자도 없이 모두 구출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슬람에 관한 정보도 이와 같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이슬람의 테러 사건들이 온 세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가르치고 있으면 세월호 참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규모의 국가적인 재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혹자는 이슬람에는 온건한 이슬람도 있고 급진적이거나 폭력적인 이슬람도 있기 때문에 모두 같은 기준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온건한 무슬림들은 우리가 사회복지를 통해서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혜택을 주고 권리와 활동을 보장해주면 전혀 문제없이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선량한 미국시민 3,000 여명이 목숨을 잃은 9.11 테러라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런데 온건하고 선량한 무슬림이라는 말이 과연 제대로 된 표현인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온건하고 선량한 무슬림들은 우리의 친구요 이웃이지만 테러를 저지르는 무리들은 철저히 응징하고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19명의 테러범들이 모두 무슬림들이었으며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철저히 계획된 의도적인 테러였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가 문제이지 이슬람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우리 주변에 소위 온건한 무슬림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오히려 온건한 무슬림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그렇지만 이슬람의 교리에 의하면 진정한 무슬림은 온건할 수 없으며 온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네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 (꾸란 9:123)

       

      여기서 싸우라는 말은 아랍어 원문에 까틸루(Qatiloo)고 쓰여있는데 그 어원은 까탈라(Qatala)이다. 이는 죽이다자르다라는 말이다따라서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는 말은 서로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하거나 뺨을 때리는 정도의 싸움이 아니라 이웃을 죽이는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싸워야 할 이유는 그들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꾸란의 명령이며 모든 무슬림들의 행동지침이라면, 그런 지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비무슬림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는가

       

      이슬람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꾸란의 그 구절은 전쟁 시의 지침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꾸란 9장은 전쟁 시의 지침이 아니다. 1절에 이웃과의 평화조약을 취소하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고, 2절에는 4개월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준다고 했다그런데 4개월이 지났어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불신자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는 것이 5절의 내용이다

       

      이슬람에서 불신자들을 죽이는 전쟁을 지하드라고 하며 이는 알라(Allah)의 뜻을 수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룩한 전쟁(聖戰)’이라고 부른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의 통치자가 되어 군사적인 힘이 생기자 주후 624년부터 평화롭게 공존하던 이웃 마을 사람들이라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격하여 남자들은 잔인하게 죽이고 그 아내들과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든지 팔거나 물물교환을 했다는 것은 이슬람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이슬람이 뭔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귀의했다고 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이들이 무슬림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고(꾸란49:14), 진정한 무슬림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었다진정한 무슬림이란 아래 3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꾸란49:15)

       

      첫째알라와 무함마드를 믿어야 한다.

      둘째절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생명과 재산을 바쳐 지하드(전쟁)해야 한다.

       

      거부하면 죽이겠다는 위협에 마지못해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웃 사람들은 다른 이웃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러 가는 전쟁에는 참여를 꺼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이웃과의 전쟁은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하는 의무사항이라는 계시가 내려왔단다(꾸란 2:216). 전쟁을 해본 일도 없고 싸우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자 무함마드는이들을 위선자라고 정죄하였다. 이들을 '신자인 체 하는 자들일 뿐 사실은 불신자(Kafir)들'이라고 선언한 것이다(꾸란3:167). 무함마드가 불신자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슬람의 적으로서 살해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겠다는 무서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은 평화를 말하고 있고 그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그들은 이슬람의 실체를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또는 속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왜냐하면 꾸란이 폭력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테러나 폭력을 의무사항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매스컴을 통해서 왜곡된 정보일 뿐, 사실은 온 세상이 이슬람으로 통일될 때까지 비무슬림들과 싸워 세상을 이슬람화 시키는 것이 저들의 지상목표다. 그것은 아래 꾸란 구절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오직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싸우라 그러나 그들이 단념한다면 알라는 그들의 모든 행위를 보고 계시느니라" (꾸란 8:39)

       

      이슬람 신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세상에 무슬림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 싸우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한국의 최영길 역 꾸란 각주에도 그렇게 되어있다그러므로 헌신된 무슬림이라면 비무슬림들을 향해 테러를 가하는 것은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다.

       

      서양에서는 공영방송을 통해서 이슬람이 얼마나 평화스런 종교인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독자적인 이슬람 방송국을 설립해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기존 방송망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방송을 들어보면 이슬람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인가를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방송의 담당자는 물론 가장 헌신된 무슬림들로서, 인류 최고의 행복의 비결은 모두 이슬람을 믿어야 하는 것인 양 아름다운 말로 이슬람을 소개한다.

       

      ▲ 심각한 아내 구타 혐의로 체포된 독일의 이맘 쉐이크 아부 아담

       

      그런데 2010년 독일 뮌헨 모스크의 이맘인 쉐이크 아부 아담이 심각한 아내 구타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그는 공식석상에서 항상 이슬람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인지를 설교해 ?고, 모든 폭력을 반대하는 독일의 대표적인 이슬람 지도자였다또한 독일 정부와 함께 종교 간의 화해 문제를 위한 사역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기 아내를 때려서 코와 어깨뼈를 부러뜨리고 온몸이 군데군데 멍들고 여러 군데 잘라져 나가게 만든 것이다구타 이유는 31세 된 아내가 감히 서양사람 스타일로 산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슬람 성직자답게 자신의 아내를 구타할 때 꾸란의 구절을 암송했다고 한다. 이 일이 일어나기 바로 일주일 전에도 그는 뮌헨의 한 카톨릭 대학에서 폭력과는 거리가 먼 이슬람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어쩌다 한 사람 정도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의 율법은 아내 구타를 정당화 한다(꾸란4:34). 이슬람 성직자들이 아랍어 공영방송에 나와 아내를 구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설교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슬람은 폭력을 반대하는 평화의 종교라고 설교한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위와 같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

      파키스탄 출신의 무슬림 ‘무자밀 모 하산(46)’이라는 사람은 9.11 테러 이후 이슬람의 폭력적 이미지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평화로운 이슬람을 소개하여 미국과 이슬람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취지로 2004년 뉴욕의 버팔로에 “Bridges TV”라는 방송국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엇다.

       

      그는 2009년 2월, 4살과 6살 되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방송국의 공동 설립자인 자기 아내의 목을 잘라 살해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고 신고했으나 방송국 CCTV를 통해서 아내를 칼로 찌르고 목을 자르는 장면이 녹화된 것이 발견되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무슬림과 미국 사회에 가교 역할을 하겠다며 Bridges TV를 창립한 무자일 모 하산과 그의 아내. 하산은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

      ▲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무슬림과 미국 사회에 가교 역할을 하겠다며 Bridges TV를 창립한 무자일 모 하산과 그의 아내. 하산은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두 사건은 서양에서 발생했기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이슬람권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지만 주변에서 쉬쉬하면서 화제를 삼지 않고 언론에서 다루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묻혀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슬람은 넘쳐나는 오일 달러를 이용하여 방송을 통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설득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별 생각 없이 방송 내용을 수용한 결과 지금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이슬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가 만일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매스컴의 주장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믿어버리면 우리 후손들에게 평화로운 미래를 물려줄 수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급격히 늘어나는 무슬림들의 투표권에 눈독을 들이며 이슬람의 거짓말을 대변해 주고 있고, 매스컴들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액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오일 머니가 필요하기에 아첨을 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 매스컴은 유럽에서 이미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고 공언된 다문화 정책 등이 선진국 국민으로서의 성숙한 자세라고 적극 홍보해주고 있다.

       

      온건한 이슬람이란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비무슬림과의 전쟁을 거부하는 무슬림은 위선자로 분류되며(꾸란3:167) 비무슬림들은 사악한 짐승들이기에(꾸란8:55) 절대로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된다(꾸란3:28)고 하는 것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무슬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싶어 하는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하는 헌신된 무슬림들의 명예살인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온건한 무슬림은 꾸란의 정의에 의하면 이미 무슬림이 아니고 무슬림인 척하는 위선자다생명과 재산을 바쳐 지하드 하는 자만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꾸란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꾸란 49:15) 온건한 무슬림들은 오히려 준비된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눈을 떠서 참 주님이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만나게 함으로 그들도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함께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출처: http://www.newswinkorea.com/news/article.html?no=269 

      가져온 곳 : 
      블로그 >* 주님 오시는 발자국 소리 *
      |
      글쓴이 : 엘샤다이 †| 원글보기



      1953년 5월 29일,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가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사가르마타, 초모룽마)를 오른 뒤,

      에베레스트를 향한 전 세계 산악인들의 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에베레스트는

      초모룽마(Chomolungma)라고도 일컫는데

      한국에서는 초모랑마(대지의 여신)라고 발음한다.


      에베레스트는

      1950년 기준으로 8,848m이며

      2008년 기준으로 8,850m인데 해마다 5cm씩 높아지고 있다.


      세계 최고의 등반가들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이유가

      돈을 위한 것이든, 명예를 위한 것이든,


      혹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 오르든,

      아니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건

      또는 그 외의 다른 무슨 이유가 있든 간에

      목숨을 건 히말라야 등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1095343_1.jpg


      힐러리 경이 정상을 밟은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던

      최고의 등반가 가운데 약 4분이 1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21095343_2.jpg


      무엇이 산악인들을 히말라야로 이끄는가?

      이유는 단 하나, 그곳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21095343_3.jpg


      산악인들에게

      에베레스트는 산 그 이상이다.


      에베레스트는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올라야 할 최고의 목표이다.


      21095343_4.jpg


      영화 히말라야는

      몇 달 전(2015년 9월)에 개봉되었던

      제이슨 클락 주연의 에베레스트와 여러모로 닮아있다.


      우선 두 영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에베레스트의 데쓰 존 인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극한의 한계 상황을 두고 벌어지는

      산악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 등에서 비슷하다.


      21095343_5.jpg


      하지만 이 두 영화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영화 에베레스트가

      1924년 이후 히말라야 등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사고 중 하나였던 사건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되지만


      영화 히말라야는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는 이들의 모습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21095343_6.jpg


      영화 히말라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반부는 엄홍길과 살아있는 박무택의 이야기,

      그리고 후반부는 엄홍길과 죽은 박무택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전반부가

      엄홍길과 박무택 대원이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칸첸중가에 오르면서

      어떻게 우정(혹은 형제애)이 싹텄는지를 보여준다면


      영화 후반부는

      그 사랑하는 동생 같았던 박무택 원정대장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후 하산 도중 설맹으로 목숨을 잃고


      그가

      히말라야에 묻힌 것을 안타까워하며 

      휴먼원정대를 결성하여 어떻게 그를 데려오는지를 보여준다.


      21095343_7.jpg


      사실,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원정대가

      진정한 휴먼 원정대였는지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에베레스트의 죽음의 지대(Death Zone)가

      어떠한 곳인지 잘 아는 사람들은 휴먼 원정대가

      죽은 사람을 이용한 보여주기식 쇼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Death Zone 에서

      얼음으로 꽁꽁 언 시신을 데리고 내려 온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수억원의 돈을 들여

      시신을 겨우 100m 내린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주장이 터무니없이 들리지 만은 않는다.


      21095343_8.jpg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들 가운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2005년 MBC에서 방송된 아! 에베레스트를 본 사람들일 것이다).

      휴먼원정대가 진정한 동료애를 보여준 감동깊은 원정대였다고 말한다.


      휴먼 원정대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화 자체는 진정한 휴머니즘이 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화 히말라야는

      영화 에베레스트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21095343_9.jpg


      영화 에베레스트가

      사실적인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영화 히말라야는 극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영화 에베레스트는

      보고 난 후에 비극적인 아픔이 가슴에 남지만

      영하 히말라야는 비극 후에도 아련한 감동을 남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휴먼원정대 자체가 따뜻한 인간애와

      끈끈한 동료애를 추구하는 휴머니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화 에베레스트는

      침착하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건의 진행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영하 히말라야는

      구수한 된장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경상도(대구) 사투리가 주는 익살스러움과 더불어

      인간적이면서도 휴머니즘적인 요소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바로 이점 때문에

      영화 히말라야는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21095343_10.jpg


      산을 좋아하지 않거나

      혹은 K2나, 버티칼 리미트,

      노스 페이스같은 산악 영화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은


      영화 히말라야의 등반 장면이

      너무 아슬아슬하게 보일 것이고

      그래서 손에 땀을 쥐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스릴러 못지않은 긴장감으로

      관객들을 영화로 몰입시키는 대단한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21095343_11.jpg


      영화 에베레스트 못지 않은

      수려하고 스펙터클한 영상은 영화 히말라야의 백미중 하나이다.


      한국 영화의 촬영기법이 

      헐리우드를 위협할 정도로 발전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21100320_14.jpg


      영화 히말라야는

      극한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산 사나이들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성경에서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던가?(요한복음 15장 13절)


      악천후로 모두가 나서기를 꺼려할 때

      설맹으로 하산이 불가능해진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백준호 대원(영화에서는 박정복)은 죽음을 무릅쓰고 등반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친구가 외롭지 않도록

      곁에 머무르며, 마침내 자신도 죽음의 길에  동행한다.



      21100320_15.jpg


      단언컨대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나왔던 산악 영화의 명작,


      예컨대 K2나 버티칼 리미트, 노스 페이스

      그리고 에베레스트보다 훨씬 더 스펙터클하고 감동적이다.


      21095343_14.jpg


      영화의 완성도로 따지자면

      이 영화는 수작에 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당신이 영화 히말라야를 본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 생애에서 보지 못했던

      가장 감동적인 한편의 휴먼 드라마를 보게 될 것이다.


      21095343_15.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21)



          ◈ 물이 맑으면 ◈ 물이 맑으면 달(月)이 와서 쉬고 나무를 심으면 새가 날아와 둥지를 튼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입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도리(道理)를 깨달아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설사 백년(百年)을 산다 할지라도 사람의 참된 도리를 모르고 산다면 그 사람은 인생(人生)을 헛되게 사는 것이다. 윗사람이 선(善)하면 아랫사람은 따라서 선(善)해지고 윗사람이 정의(正意)를 존중(尊重)하면 아랫사람은 자연히 부정(不正)과 불의(不義)를 저지르지 않게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윗사람이 선(善)의 씨앗을 아랫사람에게 뿌림과 같은 것이다. 참된 지식(智識)은 단순히 경전(經典)을 읽기만 해서 얻어질 수 없다. 진정 덕(德)의 실천(實踐) 없이 얻기란 불가능(不可能)하다. 마음은 언제나 비워두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이 비어있어야, 정의(正意)와 진리(眞理)가 깃들기 때문이다. 마음은 언제나 채워두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이 꽉 차 있으면, 욕심(慾心)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방(相對方)의 결점(缺點)을 오래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자신(自身)의 잘못 된 일도 오래 생각지 말고 용서(容恕)하도록 하라. 남도 용서하고 자신도 용서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한다면, 기분 나쁜 일도 그 순간(瞬間)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시간(時間)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련만 쓸 데 없는 생각들로 마음을 괴롭히니 세월(歲月)은 흘러만 가고 인생(人生)은 짧기만 하네. 이 세상(世上)에는, 비난(非難)받아야 할 일을 칭찬(稱讚)하는 사람들도 있고 칭찬해야 할 일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 좋은 글중에서 - Time To Say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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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은 왜 아벨을 쳐 죽였을까?

         

        세월이 흐른 후에”라고 되어 있으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몇 십 년인지 몇 백 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인은 가시덤불을 헤치며 땀 흘려 농사지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덩달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열납(기쁘게 받으심)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그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벨은 선을 행하는 착한 자였고 가인은 행위가 악한 자였을까요? 이 문제는 성경학자들 사이에도 많은 주장과 해석, 그리고 논쟁이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구절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 마치 가인이 선을 행치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 하고 제물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흘로 암 헤이티브 쓰야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흘로’ 아니, ‘암’ 만일, ‘헤이티브’, 만일 네가 바로 하면, ‘쓰야트’, 들릴 것이다. 받아들여질 것이다. 즉 ‘만일 네가 바로 한다면 왜 안 받아 올려지겠느냐?’입니다. “바로 한다면”은 그냥 “바로 한다면‘입니다. 이것을 “행동을 바로 한다면”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제사를 바로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지금 가인의 행위를 놓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사와 제물을 놓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만일 가인이 선행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면 창세기 기록자가 이 대목 어딘가에 “가인은 행실이 좋지 못 하고 아벨은 선행을 하였더라.” 하는 식으로 가인과 아벨의 행실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제사와 예배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행위입니까? 복을 비는 아부행위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제사로 섬겨달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에게 제사를 요구하시겠습니까? 더구나 죄인 된 인간이 제사를 드린다고 하나님이 얼씨구나 달려와서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제사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죄인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 인간에게 남겨주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요 방법’이었습니다. 제사란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고 더럽혀진 죄인을 아주 버리지 않으셨다는 표시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은 죄의 구렁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줄이요 다리였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죄인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생명과 소망의 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를 가능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제사는 먼 훗날 오실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의 제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은 여자의 후손의 약속,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징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인간이 노력하여 땅에서 거둔 소출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가인이 왜 그렇게 분해 하고 안색이 변하였을까요? 왜 격분하여 동생을 때려 죽였을까요? 아벨이 착하고 행실이 선했다면 과연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감히 그렇게 화를 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가인은 열심히 밭 갈고 노력하는 성실한 자였고 아벨은 빈둥거리며 양이나 치는 놈팽이 같은 나쁜 녀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기에 가인이 “아니, 너 같은 나쁜 놈이??” 분이 나고 참을 수 없어 아벨을 때려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튼 가인은 못 나가고 아벨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은 제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어린양 제물입니다. 나의 노력도, 선행도, 공로도 아닙니다. 나를 정케 하는 것은, 나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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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땅에 주님 오신지 2000년이 지났습니다.
        성탄의 참의미는 잊은 채 그저 하나의 절기로만 성탄절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탄의 참의미는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이 계절에 사랑이 넘치기를 기도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 사이트를 준비했습니다.
        주님 사랑이 온누리에 가득 차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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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크리스마스의 유래

        "크리스마스"의 날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12월 25일 설은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지날을 채택한데서 비롯됐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지절(12월 24일 - 다음해 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로마" 주교는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축제일인 동지를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했다.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 부터이다. 고대 "로마"교회에서 기원한 "크리스마스"를 지키기 시작한 년대에 대해서는 335년설과 354년설이 맞서있다. "성탄일"은 그 후 동방 교회로 퍼져나가 "콘스탄티노롤리스"(379년),"카파도기아"(382년)등에서 지키기 시작했고 교회력의 기원이 되었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시력 기원의 시원이 되었다.

        "로마"의 "액시그누스"(500-544)가 533년 부활절표를 작성할 때 계산한 데서 비롯된 시력기원의 기점인 "그리스도"의 탄생은 실제로는 현재보다 4년이 앞당겨진다.

        "성서"에는 예수님의 탄생 년도나 날자의 기록이 전혀 없다.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한 최고(最古)의 기록이라는 "안디옥" 주교의 "데오필로스"기록(175-183)도 학자들간에는 위작(僞作)이라고 단정되고 있다.

        "그리스도"와 "미사"가 합쳐 구성된 용어인 "크리스마스"사건에 관한 성서적 근거로는 "마태복음 제 1 장"과 "누가복음 제 2 장"을 들 수 있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천사의 고지, 이상한 별의 출현, "베들레헴"의 말 구유까지 박사들을 인도한 빛 등은 "그리스도"가 인간이된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 처럼 성탄에 널리 유행하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관습은 고대 "애급"에서의 동지제(冬至祭) 때의 나뭇가지 장식, "로마" 축제 행렬에서의 촛불을 단 월계수 가지 장식 등 옛날의 성목(聖木)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있다.

        흔히 "크리스마스 트리"로 전나무를 사용하게 된데는 전설이 있다.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 "오딘"은 신성하다는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 이 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한데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모든 성실한 종교개혁의 후예들, 정통 신앙의 말씀 중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하나님께서는 말씀 하신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출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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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크리스마스의 시작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처음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의 일이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기 전에는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지켰는데 동방교회에서는 1월 6일을 예수의 탄생과 세례를 기념하는 이중 명절로 지켰고, 예루살렘에서는 같은 날 예수의 탄생만 경축 하였다.


        로마 교회
        로마에서는 4세기에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결정하고 이어서 1월 6일을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현현일 (Epiphany)로 기념하였다. 예수의 세례 기념일은 1월 6일로 부터 옥타브가 되는 다음주 같은날로 연기하여 지키는데 이날에는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는 정도로 기억할 뿐 특별한 행사는 없다.

        본래 로마에서는 하루 해가 가장 짧았다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보고 이날을 축제일로 삼아 농업을 주관하는 Saturnalia라고 불리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주후 274년 Aurelian 로마황제에 의하여 되어진 일이다. 북구라파에서는 이전부터 "태양이 다시소생"하는 동지 (冬至)를 크게 기념하는 축제(Festival)를 전통적으로 지켜 왔었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요 1:9)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빛"의 탄생이다. 로마에서 이교도들이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정한것과 기독교에서 "세상의 빛"이 탄생한날을 12월 25일로 결정한 것은 이교도들의 "태양의 빛"과 기독교의 "세상의 빛"을 일치시킴으로 기독교를 이교도들에게 더욱 의미있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그 시대를 기록한 력기를 보면 주후 336년전에 이상과 같이 결정해서 지킨것을 알수 있고, 이날(12월 25일)을 교회력의 첫날로 기록하고 있는것을 볼수 있다.

        이집트

        이집트에는 희랍의 철학, 동양의 신비주의, 기독교의 교리등을 종합하여 얻은 "인간의 지식에 의하여 인간 영혼의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노시스(Gnostics)라고 하는 기독교의 이단 집단이 있었다. 약 200년경에 Clement (Clement of Alexandria)가 1월10일 (일부 사람들은 1월 6일 이라고도 함)을 그리스도의 세례를 기념하는 날로 지켰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집트에서 1월 6일을 교회의 축일로 정한 것은 그노시스 교도 보다 2세기 후인 380년에서 400년 사이에 결정된 일이다. 이집트에서는 이 날을 예수 의 탄생일 겸 세례 기념일로 지켰다고 그 무렵 이집트를 방문한 John Cassian이 기록하고 있다.

        동방교회

        동방교회에서 크리스마스를 특정일로 정해서 지키기 시작한 것은 380년 Constantinople에서 비롯 되었고, Antioch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계속 반대해 왔었다. 동 로마제국에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1월 6일을 현현일로 명확하게 분리하여 지키게 된것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에서 결정한 이후 432년 부터 이다.

        예루살렘과 아르메니아

        예루살렘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계속 부정해 오다가 6세기 이후부터 1월 6일과 12월 25일로 분리하여 경축하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Armenia 지방의 교회에서는 1월 6일에 성탄절을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전통 때문에 1월 6일 현현일을 "작은 크리스마스"(Little Christmas) 또는 "구 크리스마스"(Old Christmas)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 개신교회에서도 현현일을 지킬수 있도록 장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동방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같은 날 천사들에 의하여 "기쁜소식"을 들은 목자들의 방문(눅 2:11)도 겸하여 경축하고 동시에 성경에는 동방박사가 언제 찾아 왔는지 확실한 날짜는 밝히지 않았지만 동방박사의 경배도 아울러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탄생과 목자만을 기억하고 동방박사의 경배는 현현일에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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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크리스마스 캐롤

        a. Christmas와 캐롤 (Carol)

        크리스마스의 전통과 관습 중에서 가장 즐겁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캐롤를 부르는 것일 것이다. 캐롤은 본래 불란서 말 carole에서 온 말로 주로 중세 불란서에서 둥근 원을 만들어 춤을 추었던 원무(圓舞)를 일컫던 말이었다. 이 원무는 동지때 가졌던 축제에서 사용한 이교도들의 무곡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캐롤은 춤출 때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 말이어서 캐롤이 모두 크리스마스와 반드시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그 음악 이 캐롤인지 아닌지는 곡의 가사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적 형식으로 판단하였다.

        그 곡에 버든(Burden)이라고 불리우는 후렴이 각 절의 가사 끝에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 했는데 이것을 형식으로 보면 B, V1, B, V2, ... B의 형식이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개롤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캐롤은 우리가 현재 아는 바 대로 크리스마스 노래만을 한정해서 일컫는 말은 아니다. 그 시대의 캐롤은 다양하게 씌여져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캐롤이 동정녀 마리아, 아기 예수, 등을 주제로 한 연유로 크리스마스 노래인것 같으나 실상은 부활절 캐롤도 있고, 고난절, 승천일, 성령강림 주일,... 등등 1년 교회력의 모든 절기에 맞는 캐롤이 있다.

        옥스포드 대학 에서 출판한 {The Oxford Book of Carols} 에 보면 모든 절기에 맞는 캐롤 200여곡이 실려 있다. 대부분의 캐롤이 라틴어와 영어 두 언어를 섞어 쓰고 있는 것이 캐롤의 또 다른 특색이다. "저들 밖에 ... 노엘, 노엘," "천사 찬송하기를... 글로리아(영광)," 등은 좋은 예이다. 15 세기에 있어서 캐롤은 대중적인 종교 가곡이었고, 불란서의 론도(rondeau), 비렐레이 (virelai), 발라드 (ballade)와 견줄 수 있는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고정된 음악 형식이었다.

        캐롤음악의 중요성은 그 음악의 화성에 있지 않고 선율과 리듬에 있다. 일반적으로 캐롤은 즐거운 노래로 된 것이 특징이고 대중에게 많이 불려지도록 되어 있다. 캐롤은 본래 교회의 절기 때 마다 부르는 모든 노래를 일컬었지만, 특별히 크리스마스 노래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트 리트(Weihnacht lied) 라고 하는데, 이는 영어로 Christmas eve song이란 뜻이고, 불란서에서는 노엘(No l)이라고 한다. 노엘이란 말은 영국으로 건너와서 노웰(Nowell)라 불려 졌다.

        b. 캐롤의 내용

        성 프랜시스(St. Francis: 1181-1226)가 처음 시작 했다고 하는 마굿간 앞에서 사람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행사를 가졌다. 여기에서 부른 노래와 춤이 캐롤이고 원무였다. 고대 캐롤이 수록된 한 雜記帳이 1850년 발견 되었는데 그 잡기장은 Richard Hill이란 영국의 한 식료품 가게 주인이 1500년부터 1536년 사이 자기가 기억해야 할 모든 것을 기록해 둔 것이었다.

        무게 환산표, 장날, 약처방, 음식 조리법, 자기 아이들의 생일, 맥주 만드는 법 등과 수수께끼, 글 맞추기, 영어, 불어, 래틴어 詩 등을 기록해 놓고, 여기에 그 시대의 많은 캐롤을 수록해 두었다. 그외에도 조잡하게 인쇄된 낱장으로 된 캐롤이 남아 있는 것이 있고, 구전되어 내려오는 캐롤, 민속음악 수집가들에 의하여 수록 편집된 캐롤 등에서 옛 캐롤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특별히 불란서 캐롤은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요소가 많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태리의 나폴리 같은 지방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언덕 위 목장에서 목동들이 내려와 마굿간이 설치되어 있는 앞에서 춤을 추며 캐롤을 부르는 풍 습이 있었다고 한다. Handel이 작곡한 [메시야]중에 전원 교향곡이 나오는 데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와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들의 목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 시대 목자들이 백파이프 (bagpipe)로 연주하는 음악을 그대로 전원 교향곡으로 만든 것이어서 밑의 저음은 같은 음이 계속되는 통주음(通奏音)에 다 그 위에 고음이 화려하고 맑고 조용히 움직이는 선율로 되어 있어 조용하고 평화로운 베들레헴의 들과 잠자는 양떼들, 차거운 밤하늘과 별빛을 잘 묘사했다고 보여진다. 이 음악이 끝나면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주께 영광" (Glory to God)을 노래 하는 순서가 이어 진다. 캐롤 중에는 천사들의 노래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역사상의 첫 캐롤을, 천사들이 하늘에서 불렀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찬양이 주제로 된 것 중 우리가 쉽게 아는 것은 "천사 찬송 하기를..." "하늘 위의 천사들... 영광..." 등등이 있고, "Ding, dong, Meririly on High.... Gloria in excelsis Deo" 등을 들 수 있다.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치는데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 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찬양한 것을 그들이 처음으로 들었으나 그 음악, 그 멜로디와 리듬과 화음이 어떠 했는지는 애석하게도 우리가 알 길이 없다.

        그 때 천사들의 합창이 어떤 것이었는지 실로 궁금하기 그지없다. 많은 작곡가들이 그 천사들의 찬송을 캐롤로 작곡해 놓았는데 과연 어느만치 그때의 천사 노래에 흡사한지는 모르겠다. 그 외의 많은 캐롤이 성경말씀 이외의 내용으로 된 것이 많다.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재미있고 진귀한 아이디어를 내용으로 한 것이 대단히 많은데 이런 것들은 본래 캐롤이 춤을 추기 위한 노래이고, 즐겁고 흥겹 고 경쾌한 기분을 노래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 예배에서 부를 수는 없는 곡들이다.

        "Jingle Bells", "싼타클로스가 마을에 오네"(Santa Claus is Coming to Twon), "빨간코 루돌프"(Rudolf the Red-nosed Reindeer), "White Christmas", "I Wish You a Merry Christmas,"... 등등은 예배에서 부를 수 없는 즐거운 캐롤이다. 특별히 "The Holly and the Ivy"는 기독교적인 내용과 이교도적인 내용이 혼합되어 캐롤이 된 좋은 예이다.

        c. 캐롤링 (Carolling)

        19세기 상반기 영국에서는 집집을 방문 하면서 캐롤을 불러주는 관습이 있었다. 부락의 모든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쓸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11월말 부터 시작하여 각집을 돌아 다니면서 캐롤을 부르곤 했던 것이다. 미국 작가Washington Irving(1783-1859)이 1820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크리스마스날 밤 창문 밑에서 들려오는 합창단의 아름다운 캐롤 소리에 잠이 깨었다고 한다. 그 합창단은 십여 명의 옆 동네 사람들로 구성되어 집집마다 돌아 다니면서 창문 밑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화음이 서투르긴 해도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캐롤링은 그리스도 탄생의 기쁜소식을 천사들이 찬양으로 전했던 것 처럼 크리스마스 새벽이면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집집마다 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졌다. 한국에서도 6.25후 얼마 동안 까지 크리스마스 새벽이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 캐롤링의 전통을 유지 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밤이 너무 무질서하고 퇴폐적인데다가 새벽의 노랫소리가 옆집의 비기독교인 가정에 안면 방해가되어 기쁜 소식이 아니라 불쾌한 원성이 높다고하여 교회가 자진하여 캐롤링을 삼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d. 크리스마스 캐롤 이외의 캐롤

        캐롤은 크리스마스 캐롤만 있는것이 아니라고 이미 말 했다. {The Oxford Book of Carols}를 보면 1년 열두달 교회력에 따라 200여개의 무수히 많은 캐롤이 수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캐롤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도, 무도회에서도, 음악회에서도, 그리고 집에서도 광범위하게 불려질 수 있는 음악이다.

        우리가 캐롤을 크리스마스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많은 캐롤이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하여 씌어 졌기 때문이다. 마치 요즘 대학생들이 기타에 맞추어 가스펠 송 (실제로는 포크송(folk song)이라고 해야 옳다)을 즐겨 부르듯이 캐롤을 계절과 교회력에 맞추어 교회의 모임과, 그룹 활동, 여전도회, 청년회 등의 모임과 예배에 두루 사용 한다고 하면 즐거운 기분을 북돋우어줄 뿐만 아니라 은혜와 감명도 받을 수 있어 장려할만 하다고 본다.

        큰 교회에서는 대곡을 가지고 매주일 연주를 할 수 있지만 작은 교회 성가대는 대 합창곡을 하려고 힘겹게 애쓸 것이 아니라 캐롤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교회의 절기에 맞추어 부를 수 있는 캐롤이 많이 소개되지 않아서 애로가 많지만, 노래를 번역할 수 있는 교회음악가는 이와 같은 음악을 많이 번역하여 작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해 줄 필요가 있다.

        큰 교회에서도 가끔 대합창곡 대신 캐롤을 연주한다든가 또는 예배 후 찬양대가 캐롤을 합창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후렴이나 또는 3,4,절을 함께 부르도록 하면 좋을 것 이다. 신앙 생활에서 즐거움을 증가시켜 주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 감사절 등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중요한 이유는 이 절기의 찬송가와 찬양대의 음악이 모두 즐겁고 흥겹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e. 캐롤 복원 운동

        17세기에 영국과 Scotland의 청교도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적인 축제를 지키는 것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캐롤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를 금지 시켰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세력이 약해 지면서 1660년부터 영국에서 크리스마스 축제 복원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Scotland의 장로교회에서는 계속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았고 그 대신 정월 초하루를 크리스마스 못지않게 즐겁고 흥겨운 명절로 지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교회에서 신년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Scotland 교회의 영향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청교도들의 극심한 캐롤에 대한 핍박으로 캐롤의 본래의 의미가 희석 되기에 이르렀다가 1831년 J.W.Parker에 의해 [크리스마스 캐롤집] (Christmas Carols)이 출판되었고, 그 음악적인 수준이 미흡했음에도 불구하고 1857년에 재판되었다. 이곳에 수록된 캐롤이 훌륭한 캐롤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이때 영국 감리교회의 Charles Wesley를 중심으로 캐롤 부흥운동이 시작되어 많은 캐롤이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 졌다.

        예를 들면 "천사 찬송하기를..." 또는 "첫번 노엘" 등 찬송 스타일의 캐롤이 등장한 것이다. 미국 대륙에 건너간 청교도들도 처음에는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았고, 따라서 캐롤도 가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에서 캐롤을 부르는 것은 지극히 근대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목사 J.H. Hopkins 가 "동방박사 세 사람..."을 쓰게 된 것이 1857년 경이고, Boston의 Trinity 교회의 목사였던 Philip Brooks가 "오, 베들레헴 작은 골..."을 쓴 것이 1868년의 일로 이때 부터 신대륙에도 옛 캐롤의 전통이 복원되어 전파되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f. 캐롤을 통해서 교회음악의 토착화 운동을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의 세속적인 축일로 결정한 것은 일종의 기독교 토착화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도 크리스마스 때 서양에서 온 행사만 답습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토속적인 축제 행사가 크리스마스와 융합된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월 대보름의 행사가 크리스마스 행사와 융합하여 기독교적인 신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 부터 차츰 받아 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의 감사절 행사도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미국의 감사절(Thanksgiving holiday)에 따라 11월에 지킬 것이 아니라 우리의 추석을 기독교의 감사절로 하고, 추석의 민속적인 놀이를 기독교화 하면 좀더 쉽게 토착화될 것이다. 이미 시내의 경동 교회에서는 추석날을 감사절로 정하고 몇년 전에는 마당놀이를 갖는 것을 보았다. 퍽 앞서가는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음악의 토착화운동도 캐롤음악으로 시작하면 구태여 예배에서 부르지 않아도 되는 음악이기 때문에 토착화 과정도 순조로울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찬송가만을 교회에서 부르다가, 타령이나 판소리 같은 찬송을 부르게 되면 교인들로 부터 심한 반발을 받을 것은 확실하다. 역사의 변화과정을 이해하고 점차적이면서 은연 중에 한국 교회음악을 이끌어 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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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크리스마스 전통과 습관

        h4-1.gifa. 산타이미지

        크리스마스와 함께 오래도록 지켜 내려 오는 전통과 관습이 있다. 촛불예배라든가,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빨간 열매가 달린 초록색 담장(Holly)이라든가, 싼타클로스 할아버지, 마굿간 등이 그것이다. 이들 관습의 많은 부분이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많다. 이것은 본래 12월 25일이 이교도의 축제일인데 이것을 기독교의 축일로 바꾸었기 때문에 이교도의 전통과 관습이 기독교의 관습에 그대로 남아 있는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b. 크리스마스 장작
        고대 Scandinavia에서는 동짓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큰 화로에 불을 붙이는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동지까지 해가 짧아 지다가 이 날로 부터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여 "태양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태양이 없는 겨울울 지내는 북극지방의 사람들에게 태양이 다시 살아 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심장한 일이다. 이 전통이 영국에 와서는 큰 장작(크리스마스 장작 또는 Yule log)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벽난로(fire-place)에서 불을 붙여 밤새도록 태워 방도 따뜻하게하고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도 돋구는 풍습으로 전해져 왔다.

        c. 촛불예배

        예수는 "세상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요한복음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참 빛이시며... 그 빛이 어둠에 비치니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주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전날밤에 자정 촛불 미사를 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빛"되신 예수가 이 세상 에 빛으로 등장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개신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자정 촛불예배를 별로 지키지 않는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이외에 촛불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경우는 고난주간의 세족 목요일 저녁예배이다. 이 경우의 촛불예배는 크리스마스의 경우과는 정 반대이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가 죽으심으로 밝았던 세상이 다시 어두어지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칠언을 한마디씩 읽고 명상하든가 또는 합창단이 노래하고 나면 촛불을 하나식 꺼 나가는 것으로 명상이 계속되 는 동안 촛불은 둘 셋 넷... 꺼져 종국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왕촛대의 불만 남기고 어두운 가운데에서 예배를 마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개 신교회 중에서 는 새문안 교회가 매년 크리스마스와 세족 목요일에 촛불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촛불예배는 1982년에, 고난음악 촛불예배는 1983년에 필자가 시작한 것이다.

        e.상록 담장 넝쿨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를 파란 담장 넝쿨로 장식하고, 또 그렇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고 받는다. 이와같은 풍습은 북 유럽의 비기독교인들의 전통이 역시 영국에 전해진 것이다. 아리안 인종의 한 분파로 Ireland와 Wales 및 Scotland에 사는 겔트족과 독일족들은 동짓날 축제 때가 되면 상록 담장 넝쿨을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숭배 했었다.

        이 식물을 숭배하게 된 이유는 태양이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질때 쓰신 가시 면류관이 담장 넝쿨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담장 넝쿨은 본래 흰 열매를 맺는 식물이었는데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의 머리에 눌러 씌움으로 예수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쳐 나와 빨간 열매로 변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마스 때 담장 넝쿨로 화환을 만들어 교회와 집문에 붙이는 관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면류관의 상징이다.

        f. 크리스마스 츄리 (Christmas tree)

        크리스마스 츄리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이 독일에서 Martin Luther가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크 리스마스 전날 밤 하늘에 별이 빛나고 그 밑에 상록수가 서 있는 모습이 Luther의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상록수의 끝이 뾰죽하여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같이 보여 이와같은 나무를 준비하여 자기집 방에 세우고 거기에 별과 촛불을 매 달아서 장식을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상록수는 이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이교도들의 "생명의 상징"인 상록수와 기독교인들의 생 명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로 통합되어 이루어진 전통이 "크리스마스 나무"라는 것이다.

        g. 싼타클로스 할아버지

        뚱뚱하고 배가 불룩할 뿐 아니라 기분좋게 "호! 호! 호!"하고 웃는 흰 수염이 있는 싼타클로스 할아버지는 4세기에 소아시아 지방의 조교로 있었던 좋은 일을 많이 행한 성 니콜라스(St. Nicholas)를 의미한다고 한다. 선물을 나누어 주는 싼타클로스의 풍습은 성 니콜라스가 평상시 불쌍한 어린이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누어 준 것을 기념하는 관습이다.

        처음엔 소아시아에서 시작된 것이 구라파에 전해졌고, 그것이 화란 사람들에게 까지 전해졌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미국으로 이민해 감으로써 미국에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싼타클로스가 선물을 배달하면서 "호! 호! 호!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즐겁게 외치는데, 이것은 미국작가 Washington Irving이 싼타클로스를 항상 웃는 즐거운 인물로 묘사한 {Visit from St. Nicholas}를 1822년 Clement Moore가 작곡 함으로("T'was the Night before Christmas") 시작 되었다. 싼타클로스가 흰 털이 달린 빨간옷과 검은 벧트를 두르고 긴 고깔모자를 쓴 모습은 미국 만화가 Thomas Nast가 1863년에 그린 만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h. 크리스마스 선물교환

        로마에서 쌔터날리아로 지키는 12월 17일 부터 24일 까지는 흥겹게 지내는 계절이었다. 이때는 집안을 상록수나 상록 담장넝쿨, 그리고 촛불로 장식을 하고 선물을 어린이들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종들에게 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와 같은 풍습이 크리스마스에 까지 영향을 미쳐 오늘날도 선물을 교환하고 있다. 또한 동방박사가 아기예수를 찾아와 황금, 유향, 몰약을 선물로 드린 것을 본받아 기독교인들 간에는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풍습이 생겼을 것이다.

        i. 마굿간의 설치

        크리스마스 때 한국의 개신교회 중에서 마굿간을 만들어 전시하는 교회는 별로 없다. 그러나 명동 성당에 가면 마굿간이 해마다 설치됨을 본다. 거기에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옆에는 요셉이 서 있고, 양과 짐승들도 있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엄숙하게 경배를 드리고 있다. 교인들은 그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간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여기저기서 마굿간을 구경할 수 있다. 이와같은 마굿간은 13세기 아씨씨의 성 프랜시스(St. Francis of Assisi)가 처음 시작하였다고 한다. 성 프랜시스는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경축하기 위하여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도 권장하였다. 여기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시작 되었다.

        j. 기 타

        이 외에도 우리 나라에서는 볼수 없는 것으로 "Lord of Misrule"이란 것이 중세 크리스마스 때 행해 졌었는데 이것은 평민 또는 대 군주의 노예 중에 서 한 사람을 뽑아 그가 군왕이 되어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 동안 절대 권력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하는 전통이다. 이들은 대부분 사회의 대혼란 을 일으키곤 했는데 이 전통도 쌔터넬리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쌔터넬리아 축제기간에는 모든 노예에게 그들의 주인과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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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크리스마스 용어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은
        "크리스마스"란 말을 원래는 Christes Masse - 그리스도 미사(예배)라고 불러 오다가 중세 영국에 와서 두 말이 하나로 합쳐서 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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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첫번째의 의미보다는 나중에 설명한 것이 더 신약성경적으로 근거가 분명하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설명되어오던 Christes Masse '그리스도 예배' 라는 말의 의미 변화를 설명하는데 더 신뢰할만한 것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어떤 단어이건 분명한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기념한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X-MAS
        크리스마스가 가까와 오면 곳곳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써 놓은 것을 보기도 하지만 간단하게 X-MAS라고 쓴 것도 볼 수 있다.
        이 표기를 영어의 X로 생각하여 어떤분은 X-MAS는 잘못된 표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표기보다는 진정한 의미의 X-MAS을 알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에서 X 자는 영어 알파벳의 X자가 아니다.
        헬라어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자인 '크스'자로서 이 뒤에다 MAS자를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표기는 X-MAS로 할 수 있지만 읽을 때에는 반드시 '크리스마스'라고 해야 한다. 만일 이것을 표기한 대로 X-MAS라고 읽는다면 완전히 본 뜻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난 날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들은 표기대로의 X-MAS를 지켜왔던 것은 사실이다. 수학에서는 미지수의 표기를 X.Y.Z로 표시한다. 그것은 '모른다'는 뜻으로 성탄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하나의 축제로 지낸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곧 X-MAS였다.

        이제 진정한 크리스마스로서 지켜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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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크리스마스 각국의 모습

        a. 영국

        영국에서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봉건제도 시대에 장원 영주의 저택에서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렸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는 풍습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사람들은 대강절 기간부터 교회나 가정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른다.그리고 이를 축하하고 성탄의 기쁨을 나누려는 뜻에서 카드를 보낸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여왕의 성탄절 메시지가 크리스마스 아침에 영국 전역에 방송된다. 영국 트리팔가 광장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진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밤에 통나무를 통째로 들여다가 벽난로 옆에 갖고 놓고 옛날의 풍습대로 온 가족이 통나무 위에 앉아 본다. 그리고 나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새해에는 행운이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나무를 벽난로 속에 넣기 전에 인사한다.
        어린이들은 벽난로 또는 화덕 옆에 긴 양말을 걸어 놓고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가득 채워 주시기를 바란다. 또한 우편배달부, 우유배달소년, 신문배달 소년, 청소년들에게 장갑, 털구두 따위의 선물을 안겨 주면서 한 해 동안의 수고에 감사한다.
        성탄절 아침에는 치즈를 발라서 요리한 공작새 고기를 먹는다.

        b. 독일

        독일의 성탄절은 크리스마스 장난감으로 유명하다. 독일에서는 12월 6일 전날 밤부터 크리스마스 축제가 시작되는데, 교회는 대강절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이 마음에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기쁨이 가득찬다.
        독일의 크리스마스 풍습으로 첫째는 선물을 주는 일이다. 아기 예수의 오심이 우리에게 기쁨이듯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의 물건을 만들어 선사한다. 한 예로 비누로 만든 장미, 종이로 만든 꽃(인형)등이 있다.
        가정에서는 대강절 화환과 대강절 촛불을 켜둔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어머니가 장식한다. 12월이 되면 어머니는 혼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다. 또한 크리스마스 식탁도 마련하는 것이다.
        성탄절 전날 밤에 가족들은 어머니의 초대로 식탁이 마련된 방으로 초대된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아름다움에 환성을 지르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성탄절 전의 한 주간을 개방한다. 누구든지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갈 수 있도록 한다. 예배실 및 부속된 여러 방들과 기도실을 사용할 수 있다.

        c. 프랑스

        비록 법적인 공휴일은 아니지만 12월 6일의 성 니콜라스의 날은 동부 프랑스에서 아주 널리 지켜지고 있다.프랑스에서 이 날은 아이들에게 선물과 캔디를 주는 행사로 간주되어 점차 성탄절을 대신하게 되었다.
        종교적 행사와 가족 식사는 성탄절을 기념하여 축하한다. 성탄절 앞서 여러 주간 동안 파리의 큰 백화점의 상설 전시대에는 실물 크기의 전설적인 상들이 놓여진다.
        가정에서의 축하의식은 성탄절 며칠전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함으로써 시작된다. 양초와 반짝이는 여러 가지 색깔의 별들이 장식에 사용된다. 성탄절 전날 밤에 어린이들이 잠들었을 때 작은 장난감과 캔디와 과일들을 가지에 매달아 '크리스마스 아버지'(Pere Noel)가 벽난로 옆 그들의 구두 속에 남기고 간 선물들에 추가시킨다. 구유에는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과 소와 나귀 그리고 목자들을 의미하는 작은 상(모형)들을 놓는다. '작은 성인들'(Santons, 본래는 인형 또는 동물상)이라고 불리우는 작고 채색된 토기상이 어떤 지역에서 사용되는데, 이것은 성경의 인물들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사람들도 나타내주고 있다.(즉 시장,사제,경관,도살업자,빵굽는 사람 등). '작은 성인들'의 세계적 중심지는 아우바그네(Aubagne)의 작은 마을이다. 비록 1224년 앗시스(Assisi)의 성 프랜시스가 구유(Crech3,구유 속의 아기 예수상)을 소개하였지만 16세기에 이르러서야 구유를 만드는 풍습이 널리 퍼졌다.
        한밤 중에 세 차례의 미사가 집례된다. 이를 위해서 교회와 대성당은 아름답게 불을 밝히고,캐롤과 종소리와 차임(편종)의 멜로디가 메아리친다.
        아침에 어린이들은 모두 흥분한 가운데 일어나서 벽난로와 성탄절 트리에 있는 선물들을 확인한다. 이어서 전 가족은 선물 교환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다.
        최초의 구유와 캐롤의 결합을 통해서 대성당의 광장에서 행하여지는 예배식의 드라마가 생기게 되었다.14세기 이후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의 이야기는 "성탄절의 신비"와 인형극의 형태로 전하여졌다.

        d.미국

        크리스마스는 미국사람들의 마음과 뜻의 형상을 신앙적으로 이끌어 주었다. 미국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선물을 사고, 분주했던 생활 가운데서 시간을 내어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한다.
        이들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열리는 음악회 행사에 참석하고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하는 축제 프로그램을 즐긴다. 한해중 가장 눈에 뜨이게 사랑이 넘치는 계절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부모들은 자녀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여러 장식들을 집 안팎에 꾸민다. 대강절 넷째 주일되면 주부들은 빵,쿠키,푸딩 따위의 음식을 만들고 가족이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밤이 깊은 줄 모른다.
        교회와 성가대원들은 크리스마스가 가까와 올 즈음에 각 가정을 방문하면서 캐롤을 불러 준다. 이때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테 어울러 캐롤을 부른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들을 위하여 선물을 포장하여 양말을 채워둔다. 이것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아무도 모르게 한다. 이튿날 어린이들은 양말에 든 선물을 받고 기뻐한다.

        e.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크리스마스는 11월말 대강절의 계절에서부터 시작된다. 교회와 각 가정에서는 대강절 찬송을 부르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린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세계의 성탄절 풍습 가운데서도 더 아름다운 풍습을 갖고 있다. 이 나라의 성탄절 축제는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 때 집안의 창문이 있는 곳마다 촛불을 켜 놓는다. 그리고 창을 조금씩 열어둔다. 이것은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호텔이나 빌딩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촛불을 켜서 창을 열어두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아기 예수를 낳기 위하여 마구간을 찾아 헤매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아침에 메리 또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나 여인이 촛불을 끄도록 되어 있다.

        f. 네덜란드

        네덜란드에서는 산타할아버지가 흰말(백마)을 타고 온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실제로 산타할아버지가 흰말을 타고 이집,저집을 방문한다. 따라서 흰말의 먹이와 물을 준비해 두는 의미로 어린이들은 깨끗한 나막신에다 마른 풀,빨간 무우(홍당무)등을 달아서 창문 앞에 놓는다. 물도 한 그릇 떠다가 놓는다. 이렇게 하고서 잔다 성탄절 아침에 아침예배가 끝나면 마을은 온통 축제에 휩싸인다. 괴상하고도 우습기만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춤을 추면서 이집,저집으로 다니며 성탄노래를 불러 준다.

        g. 아르헨티나

        남반부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는 우리와 정반대의 기후를 갖는다. 즉 우리가 얼음이 꽁꽁 어는 영하의 추운 겨울을 맞이하면 그곳에서는 땀을 뻘뻘 흘려야 되는 영상 40도시의 무더운 여름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나비다드(Navidad-성탄절)라고 부른다. 성탄 인사는 "휄리스-나비다드(Feliz Navidad)"라고 한다.
        이때는 온 가족 및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크고, 작은 휘에스따(fiesta,파티)를 갖는데 음악과 춤이 동반된 흥겨운 축연이 된다. 대표적인 음료로써 시드라(Sidra-사과주)를 마신다. 또는 비노블랑꼬(Vino Blanco-백포도주)나 비노 니그로(Vino Negro-흑포도주)를 차갑게 하여 축배를 드는데 살루드(Salud-안녕)를 빈다. 컵과 컵을 마주치며 '친 친 살루드(Chin-Chin -salud)' 라고 외친다.
        축연이 계속되는 중 자정 12시에는 일제히 한 자리에 모여 하늘에 축포를 쏘아올린다. 연발되는 축포(권총 또는 화약을 사용)속에 자신들의 소원을 말한다.
        아이들은 불꽃놀이와 함께 빠빠-노엘(Papa-Noel)이 가져오는 선물을 기다리며 나비다드 전날 저녁을 즐겁게 보낸다.  

        h. 카나다

        카나다는 본래의 원주민들과 이주해 온 사람들로 구성된 나라다. 넓은 땅과도 같이 카나다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즉, 북극의 에스키모, 북 아메리카의 북동부에 있는 마브라도르, 뉴퍼들랜드 섬이 독특한 성탄절 풍습을 갖고 있다.
        에스키모 사람들이 지키는 크리스마스 축제는 백인들에 의해서 전해진 것이다. 그런 에스키모에는"싱크덕크"라고 불리우는 한 겨울의 축제가 있었다. 이 축제는 정해진 날에 각 마을 사람들이 긴개의 행렬이 끄는 썰매를 타고 한 곳에 모여 춤과 선물의 파티를 즐긴다.
        북아메리카 북동부 위치한 라브라도르 어부들에게는 축제가 없었다. 이곳에는 백인들이 세운 선교교회로 말미암아 생활양식이 변화를 일으켰다.
        선교교회에서 시작한 최초의 크리스마스 행사에서는 아이들의 순무위에 세운 작은 촛불을 받는다. 이 촛불을 받는 축제에서, 지금은 수입한 양초를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사슴의 기름으로 만든 초를 썼다.
        뉴질랜드 주민들은 성탄절의 고기잡이 축제를 지킨다. 그들은 교회를 의해서 고기를 잡았다. 교회는 그 고기를 팔아 교회의 운영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노바 스코티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성탄절 아침에 찬송을 부른다. 또한 예수 노래와 캐롤도 부른다.
        벵쿠버에서는 크리스마스 축제가 오락과 술의 파티로 지켜진다. 특히 선창가에는 외국의 여러 뱃사람들이 몰려드는 까닭에 이들을 위로하는 프로그램들이 해마다 마련되고 있다.

        i. 코스타리카

        코스타리카의 성탄절은 가정에서 시작한다. 그들의 가정이나 정원에는 크리스마스 크레쉬가 꾸며진다. 정원이 있는 집에서는 나무 아래에,그렇지 못한 집에서는 방안의 가운데에 아기 예수가 나신 말구유와 인형 따위로 아기 예수의 모양을 꾸미는 것이다. 그리고 방안 전체에 첫번 크리스마스의 장면을 재현한다.
        성탄절이 가까우면 사람들은 이웃 가정을 방문한다. 그들은 각 가정에 꾸며진 크리스마스 크레쉬를 감상하면서 즐거워하고 아기 예수를 찬양한다.
        최근에는 산타크로스 풍습이 등장하고 있다. 할아버지나 친척들 가운데서 한 어른이 산타크로스로 분장하여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준다.

        j. 멕시코

        멕시코에는 포사다스라고 불리우는 축제가 있다. 포사다스는 12월 16일에 시작되는데 순례자의 축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12월 16일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손님을 기다린다. 포사다스의 본래 의미는 쉼,휴식이다. 즉,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그들이 기거할 장소를 찾기 위해서 고생하였던 일들을 기억하는 축제가 행해지는 것이다.
        각 가정에서는 스페인 이끼와 상록수 가지로 집을 꾸민다.그리고 집안의 한 곳을 마구간처럼 장식한다. 소나무 가지와 이끼 따위로 작은 단을 만들고 여기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재현시킨다.
        이들은 그 둘레에 마태복음 및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빈들의 양떼들과 밤을 지새우는 목자들, 큰 별, 동방박사를 꾸미기도 한다.
        그런 다음에 이곳 사람들은 다른 집을 방문해서 "빈 방이 있습니까"라는 물음을 하고 "다른 곳으로 가보시오"라는 대답을 그 집의 주인이 하는 등 요셉과 마리아의 베들레헴 순례를 재현해 본다.

        k. 칠레

        동정녀를 기념하는 안타콜로의 축제와 말 경기가 칠레의 크리스마스 풍습이다. 칠레에는 안타콜로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3피트 높이의 동정녀 상이 세워져 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때가 되면 수천 명의 방문객들이 여기에 와서 동정녀상 앞에서 마리아를 경배한다.
        크리스마스 축제 시즌에는 수많은 무용수들이 색색의 옷을 입고 춤을 춘다. 거리에는 인형과 각종의 장신구들이 넘실거린다. 한편, 그들은 경주 말을 타고 뛰어난 인디언의 솜씨로 경주를 한다.

        l. 필리핀

        오랫동안 서구의 지배를 받은 필리핀은 성탄절이 가장 큰 종교적 축제이다. 더운 나라인 까닭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지는 않으나 파스토레스라는 종교극을 공연하고 축하 예배를 드린다.
        성탄절 이브가 되면 모든 교회(개신교,구교)는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은 언제라도 들어와서 기도를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구교에서는 크리스마스 기간 중에 매시간마다 미사를 드린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도 이 기간에는 천주교회에 들어가서 미사를 드려본다.
        필리핀의 시골 마을에서는 파스토레스 종교극이 무대에 올려진다. 이 종교극의 배우들은 청년 남녀들이 맡는다. 이들은 마을을 순뢰하면서 공연을 한다.

        m. 이디오피아

        이디오피아의 크리스마스는 주후 330년경부터 축제로 지켜지고 있다. 이디오피아의 콥트 교회는 1월 7일에 성탄절 행사를 갖는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억하고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다.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라리베라'라는 도시를 그들의 예루살렘으로 여기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디오피아의 사람들은 성지인 라리베라로 모여든다. 라리베라는 순레자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들은 성탄절 아침을 기다리고 1월 7일의 해가 떠오르면 근처의 산정에서 콥트교회의 예식에 따라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린다.
        순례자들은 성직자들이 축복한 빵과 음료를 먹고 마시면서 기뻐한다. 예배 의식이 끝나면 성탄축하 연회를 갖는다.

        n. 이집트

        기독교의 성립 후 처음 300년 동안에는 성탄절 축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온 교회의 관심이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성육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사상가들이 주님의 인성에 대하여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교회도 성육신의 심오한 의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별히 동방의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교회는 성탄절을 기쁨과 경이로써 축하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알려진 성탄절에 대한 기록 중 최초는 4세기 초기의 이집트 파피루스에 남은 기록이다. 이 파피루스에는 수많은 손자국들이 찍혀 있는데, 이것은 이미 그 파피루스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파피루스는 4세기 초의 성탄절이 1월 6일 저녁부터 7일까지 축하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냈을까요? 2세기에 있었던 이단 분파인 알렉산드리아의 영지주의 추종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날(1월 6일 또는 10일)을 축제일로 지켰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통하여 신성의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한편 정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었다.

        o.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는 성탄절이 하루로 끝나지 않고 3주간의 성탄 시즌을 갖는다. 이곳에서의 성탄절 8일 전은 ‘9일 기도’의 시작으로 곧 성탄 시즌이 시작되어 성탄절 후 12일째 밤까지 계속된다.
        이때 아이들은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성탄절 노래를 부르고 동전을 받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 돈을 모아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다. 어른들 또한 악기를 연주하고 캐롤을 부르며 이웃들을 방문한다.

        p. 일본

        범신론을 믿고 있는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대단히 화려하게 성탄절을 준비하며, 즐긴다. 일본의 기업가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성탄절을 취급한다. 그리고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흥청거리며 놀 수 있는 날”쯤으로 성탄절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처럼 안타까운 일은 일본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크리스천이 전국민의 0.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일본에서는 성탄절이 공휴일은 아니지만 거리에는 캐롤이 울려 퍼지고, 젊은 사람들은 파티로 시끌벅적하게 보낸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 섣달 그믐이 되면 새해를 준비하는 대청소와 떡찧기를 한다. 대청소 후에는 소나무 가지 장식을 문에다 꽂고 짚으로 만든 것으로 현관을 꾸미며, 둥글게 빚은 떡을 불단이나 신붕(집안에 신령을 모시는 곳)에 올린다. 밤에는 백팔번뇌가 없어지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제야의 종이 108차례 울리고,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연월(음식)을 먹는다.

        q. 스페인

        성탄절은 스페인 전역에서 비슷한 방법으로 기념하는 몇 안되는 축제의 하나이다. 무엇보다는 성탄절은 가족들의 축제이다. 12월 24일은 예수 탄생전야인 Nochebuena (노체 부에나: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오후에는 스페인 성탄절의 한 상징인 성탄 인형(Bele’n)을 애들이 세우면서 좋아한다. Belen은 목동들, 양들, 낙타를 탄 동방박사 (los Reyes Magos)등의 형상들의 풍경을 나타내는 하나의 건축물이다. 중요한 요소는 portal이라고 불리는 마굿간과 소, 노새, 구유통에 누여져 있는 예수와 성 요한과 성모 마리아상이다. 사람들은 이런 Belen을 집이나 교회, 학교 심지어 상가 등에 세운다.
        Cadiz 지방의 Arcos de la Frontera와 같은 어떤 마을에서는 이런 축제를 위해서 마을의 한 부분이 살아있는 Belen들로 구성을 한다.
        저녁식사 후 어린 애들은 소형탬버린 등의 악기를 이용해서 크리스마스 캐롤 (villancicos)를 노래한다. Jerez에서는 집시들이 zambombas라는 악기를 이용한 축제행사를 연다. 이 축제는 밤새 계속되며 거리나 집의 안뜰에서 아랍음악을 연상케 하는 크리스마스 캐롤에 장단을 맞추어 춤을 춘다. Navarra지방의 Lesaka나 다른 마을에서는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서 산에서 내려오는 숯장이를 상징하는 누더기 옷의 인형이 설치된다.

        r. 러시아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 아닌, 그보다 13일 늦은 1월 7일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유래가 있는데, 슬라브 정교의 전신이었던 동방정교회는 옛 동로마제국의 국교로 현 터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발달한 기독교 중 하나다. 1500년대 말까지는 동방정교회와 가톨릭 등 전 기독교계는 로마시절부터 내려오던 율리우스력을 따랐으나 가톨릭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제정에 의해 1582년 동방정교회를 제외한 서구세계가 개정된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게 됐다. 율리우스력은 그레고리력보다 매년 11분이 늦어 현재는 총 13일로 차이가 벌어졌다. 이 때문에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는 동방정교회권은 크리스마스 등 전통행사들을 서구보다 13일 늦게 맞고 있다.
        이곳 크리스마스 축제의 가장 큰 행사는 서구와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해당하는 ‘사첼닉’이다.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옛 소련시절엔 무신론 원칙 때문에 없어지다시피 했으나 91년부터 소연방의 해체이후 가장 큰 축제가 되었다.
        러시아에도 산타클로스가 있다. ‘데드 모로자(얼음 할아버지)’라는 러시아 산타클로스가 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 12월 31일에 온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러시아 산타클로스는 ‘스네구르카(눈의 아가씨)’라 불리는 여자 파트너와 함께 다닌다는 점이다.

        s. 인도

        여러 민족과 종교가 뒤섞인 인도에서는 일년을 통해서 수많은 축제가 열리고 있다. 어떤 것은 계절이 변해감을 축하하고 어떤 것은 인도의 문화와 깊이 관련되어있다.
        축제의 규모도 전국적으로 성대히 행해지는가하면 일부 지역만으로 조용히 열리는 것도 있다. 그 중에 크리스마스 또한 큰 행사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타 종교의 사람들도 크리스마스를 열광적으로 축하한다. 델리, 뭄바이, 켈커타와 같은 큰 도시들에서는 축제분위기로 고조되고, 크리스마스 바겐세일과 축제행사가 진행된다.

        t. 콩고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크리스마스 행사는 즐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트리로 쓸 만한 전나무는 전혀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콩고 사람들은 어린 바나나 나무나 야자나무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대신한다.
        일반적으로 바하마인들은 정열적이고 신앙심이 깊으며 대부분 춤과 음악을 좋아한다.
        국가최대의 축제는 연말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해서 연시에 2번 개최되는 ‘중카누(Junkanoo)’라 불리우는 행사로 아프리카 흑인노예들로부터 계승된 축제이다. 이 행사에는 화려하게 꾸민 수백명의 사람들이 큰 길로 나와 가 장행렬을 하면서 방울을 흔들고, 아프리카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며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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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어 캘리그라피

        ▲아랍어 캘리그라피. ⓒ영상 캡쳐

        미국 버지니아주 어거스타 카운티의 모든 공립학교들이

        아랍어 숙제에 분노한 학부모들의 반발로 인해 최근 휴교했다.


        파리 테러와 미국 샌버나디노 총격 사건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로 공포감이 커진 상황에서,

        교사가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선지자이다”라는

        내용의 문장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 물의를 빚은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오거스타 지역에 위치한 리버헤드공립고등학교의 지리교사는

        최근 학생들에게 아랍어로 된 문장을 적어 주면서 직접 손으로 이를 써 오라는 숙제를 냈다.


        아랍어로 된 문장은 이슬람교의 신앙고백인 ‘샤하다’(알라가 유일신인 것을 외우는 기도문)였다.

        해당 교사는 이 문장을 학생들에게 소개하면서,

        이를 암송하게 하거나 믿는다고 말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알게 된 학부모들은 “학생들을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기 위한 것 아니냐”며 반발했다.

        또 이 지역 주민 2만 4천 명은 해당 숙제를 내준 교사를 해고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학교에 항의 전화를 하거나 메일을 보냈다.


        이를 보도한 CNN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잇따른 테러로 공포감이 커진 상황에서,

        학교가 알라를 유일신으로 가르치자 대부분의 기독교인인 학부모들이 분개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교사는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세계 종교 교재에 나와 있는 지도서대로 숙제를 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아랍어 필기체를 손으로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 주려 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논란이 계속되자, 학교 당국은 17일 샤하다를 세계 종교 커리큘럼에서 삭제하고,

        학생들을 개종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학교를 겨냥한 협박 메일이 빗발치면서,

        버지니아주 오거스타교육국은 증오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구역 내 모든 학교를 대상으로 18일(현지시각)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리버헤드학교의 셰릴 라포트 교장과 그 일가족은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바벨론 종교'라는 화학첨가물이 들어간 성탄절!

         

        * 예수님의 초림을 기념하는 성탄절과 부활의 사건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초림)과 그 목적(부활의 은혜를 주시고자 함)을 보여주는 이 두 절기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기에 사탄 마귀가 이 절기들의 의미를 퇴색시키기 위해 아래와 같은 '바벨론 종교'라는 첨가물을 섞어넣은 것입니다.

         

        혹자는 성탄절과 부활절에 '바벨론 종교'라는 첨가물이 섞여있기에 교회가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키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성탄절과 부활절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거리끼게 만들려는 사탄 마귀의 진짜 목적을 도와주는 결과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탄절은 그 날짜의 기원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초림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이는 장차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 할 지를 돌아볼 수 있는 의미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부디 교회 안에서 성탄절과 부활절에 뒤섞인 바벨론 종교의 흔적들을 제거하는 노력을 하되, 절기 자체를 부정하는 또 다른 오류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식품회사들은 자사에서 생산되는 음식의 맛을 더하고, 모양과 빛깔을 좋게하거나 혹은 보존기한을 늘리기 위해 MSG, 색소, 방부제와 같은 각종 화학첨가물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화학첨가물들이 아토피와 천식, 심지어 암과 같은 각종 질환을 유발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회가 지키는 절기 가운데 부활절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절기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크리스마스이다. 그런데 이 크리스마스에 바벨론 종교라고 하는 치명적인 화학첨가물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잠시 살펴보자.

         

         

        1. 예수님의 탄생일이 왜 12월 25일이 되었는가?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면서 그 당시 로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던 바벨론 종교를 교회 안에 끌어들였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절기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을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로 알고 있는데, 성서학자들 사이엔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짜가 12월 25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나팔절에 해당되는 9월말이나 10월초 경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기가 양들이 새끼를 낳는 시기인 4월 초 (유대력으로 니산월 1일)로 보기도 한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베들레헴에 있던 목자들이 한 밤중에 들판에서 양떼들을 지키다가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찾아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떼를 방목하는 시기는 우기가 시작되는 10월 말이면 끝난다고 한다. 추운 겨울을 알리는 우기가 시작되면 들판에 있던 양떼를 우리로 데려와서 겨울을 지낸다는 것이다. 이미 겨울이 깊어가고 있는 12월 25일에는 양떼를 몰고 들판에 나와 있는 목자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3년 반으로 보고 예수님이 30세 되던 때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신 사실과 유월절 시작 직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근거로 날짜를 계산해보면 대략 예수님의 탄생일이 10월 초 쯤으로 계산된다.

         

        이런 성경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 대제가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선언한 것은 이 날이 바로 로마에서 섬기던 태양신의 탄생일이었기 때문이다. 

         

        태양신을 숭배하던 로마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저들이 오랜동안 지켜오던 태양신의 절기를 기독교의 절기로 모양새만 바꿨다는 것이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약해졌던 태양의 기운이 새롭게 회복된다고 믿고 있는 동지는 바로 ‘태양신의 출생(혹은 환생)’을 기념하는 절기였던 것이다.

         

        12월 25일이 바로 그 당시 로마에서 사용되던 율리안 달력으로 ‘동지’에 해당되는 날짜였던 것이다(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론 12월 21 혹은 22일(국가간의 시차)이 동지이다). 스스로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는 ‘루시퍼’는 바벨론 종교에서 ‘태양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이 바벨론 종교가 로마에까지 이어졌는데, 태양신 루시퍼의 출생을 기념하던 날인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일로 왜곡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2. 크리스마스 장식들

         

        크리스마스의 상징이 되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상록수나무)는 풍요와 다산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Yule(태양신으로 알려져 있다)신 숭배와 관련이 있는데, 이것 자체가 ‘남근’을 상징하고 있다.

         

        또 크리스마스 장식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식물인 holly(서양호랑가시나무 - 오늘날에도 마술을 행하는 자들이 바로 이 나무로 요술 지팡이를 만든다고 한다)의 붉은색 열매(우리나라에서 '사랑의 열매'로 알려져 있다)는 하늘의 황후로 알려진 Diana 여신이 흘린 ‘생리혈’로, 또 겨우살이(mistletoe)와 그 열매인 whiteberry는 태양신이 흘린 ‘정액’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들을 집 문에 걸어두면 풍요와 다산의 복이 임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선물 장식 - 이 선물들은 Yule신에게 예물을 바치던 풍습에서 기원한 것이다.

         

        holly와 붉은색 열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

        - 크리스마스 트리가 남신인 yule을 상징한다면,

        holly는 여신 Diana를 상징하고 있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서양에선 크리스마스가 되면 하얀 열매가 맺힌

        겨우살이를 장식하여 문 앞에 걸어놓고 풍요와 다산을 기원한다고 한다. 

         

         

        3. 산타 클로스

         

        예수님을 몰아내고 성탄절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고 있는 산타 클로스는 4세기 미라(Myra)의 감독이었던 니콜라스(Nikolaas) 혹은 북극에 살면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던 이집트의 신 베스(Bes)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클로스가 찾아와서 선물을 준다는 생각을 믿었던 아이들이 차츰 철이 들면서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크리스마스에 반복되는 이런 학습효과가 예수님의 탄생과 성탄의 의미 자체도 산타클로스의 이야기처럼 그저 철없는 아이들을 위해 꾸며낸 동화와 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몰아내고 크리스마스의 주인이 된 산타(Santa)

        - Santa라는 용어 자체가 Satan(사탄)이라는 단어에서

        글자의 순서만 바꾼(애너그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4. 로마 카톨릭의 크리스마스 -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를 기념하는 절기

         

        ?음녀 바벨론으로 지목되고 있는 로마 카톨릭의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탄생 보다는 바벨론 종교의 두 기둥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를 기념하는 절기로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 카톨릭의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보다는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니므롯이 죽은 뒤 그의 아내였던 세미라미스가 태양신이 된 니므롯의 기운을 받아 담무스를 낳았다고 전해지는 바벨론 신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아기예수보다 마리아가 강조되는 카톨릭의 크리스마스 미사

        - 바벨론 종교의 세미라미스와 담무스의 신화를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5.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성탄절이다.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용어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Christ와 로마 카톨릭의 미사를 의미하는 Mass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성찬식이 중심이 되는 Mass(미사)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그러기에 Christ Mass라 하면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한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출처>>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한다하면서 실제로는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을 행한다니 얼마나 마귀적인 발상인가? 예수님의 탄생일을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성탄절’로 불러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앞서 살핀 것처럼 우리가 지키고 있는 크리스마스에는 오히려 예수님의 탄생을 모독하고 왜곡하는 이교적인 풍습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 자체를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올바른 해답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알리는 것은 이 땅에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탄 마귀도 바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동안 성탄절의 의미를 퇴색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써 온 것이라고 본다.

         

        더러운 목욕물을 버린다고 욕조 안에 있는 소중한 아기를 함께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탄절을 지키되 성탄절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안에 섞여있는 크리스마스라는 바벨론 종교의 혼합물들을 씻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참 구원 신앙과 거짓 구원 신앙 / 아더 핑크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는다 해서 그것이 다 구원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의지하는 것 같아 보이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것 같이 보여도 구원 신앙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을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는 말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 인생의 영원한 행복과 불행 또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을 다루고 있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최대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이 구절은 구원을 얻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믿음이고, 구원을 얻지 못하고 정죄 받지 못하고 가장 크고 저주스러운 죄가 불신앙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죽음의 형벌이 죄의 결과로서 반드시 뒤따른다고 경고하며 죄를 범한 모든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믿는 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적용될 만큼 절대적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생명을 얻는 조건에 관해 말씀합니다. 이 조건은 믿음이라는 1차 조건과 세례라는 2차 조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례가 2차 조건인 이유는 이것이 생명을 얻는데 믿음만큼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후반부가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가 아닌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로 되어 있는 것, 즉 세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믿음은 구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지만, 세례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정죄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를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칼을 뽑아 드시고 내리칠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구원 신앙 외에는 그 칼을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해서 불신앙을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이 생명을 얻는 필수 조건이고 불신앙이 무서운 죽음의 형벌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믿음미 무엇인지 또한 구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는다고 다 구원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앞에 두고 스스로 속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그분이 이루신 속죄 사역을 의지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모래성을 쌓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완전한 구원을 보장 받았다고 믿지만, 안락한 꿈에서 깨어난 순간 차디찬 죽음의 손아귀에 붙들려 경악하게 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 신앙이 무엇인진 알고 그 믿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거짓 구원 신앙의 모습

         

        참 구원 신앙과 거짓 구원 신앙은 매우 흡사해서 당사자는 물론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도 혼동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마술사 시몬이 대표적이 경우입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8:13).

         

        빌립은 시몬이 나름대로 믿음을 보였기에 그를 참 신자로 여기고 신자가 되는 특권을 누리도록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1-23절)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하여 다른 사람이 도달하지 못한 믿음의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는 성경에 대한 탁원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폭넓은 믿음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행 24:14)라고 말한 사도 바울 처럼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구원 신앙을 지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로 그런 사람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그에게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 26:27)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신앙을 이른바 역사적 신앙 이라할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은 교육이나 자력으로 얻지못 할 두 요소, 즉 생각을 움직여 믿음에 이르게 하는 신령한 빛과 성려의 능력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심지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도 구원 신앙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조명과 마음의 감동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중생의 체험을 하지 않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한 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참여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 6:4-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라는 것은 그들이 '성령에 참여한 바 된‘ 덕분에 진리를 인식했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와 성경에 근거한 신령한 믿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삼고 굳센 확신으로 의지합니다. 성경이 거짓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믿음이 합리적이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기 때문에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신령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으로 애굽과 홍해에서 구원을 경험한 뒤에 그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 하나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였습니다(히 3:17-18).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렘 13: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속하게 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렘 13:10)고 말하였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사 10:20)라는 말씀이나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라는 말씀에 나오는 ‘의지하다’와 ‘신뢰하다’역시 확고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또 이사야 48장 2절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구원 신앙이 아니라고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사 48: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기대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아 8:5)라는 말씀의 ‘기대다’역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그런 표현을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미 3:9)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삵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오늘날에도 추잡하고 속된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붙잡아 주시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거나 재앙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은 한마디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큰 절망이나 위기가 닥치면 예상 밖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가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산헤립이 큰 군대를 이끌고 유다 성읍을 포위했을 때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대하 32:7-8)고 말했습니다. 이에 백성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8절) 안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히스기야의 말에 안심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5년이 채 못 되어 그들은 하나님이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게’ 악을 행했습니다(대하 33:9).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믿는 것 자체가 진정한 중생의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다의 아비야 왕입니다. 역대하 13장에서 여로보암 왕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아비야 왕이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소금 언약”으로 나라를 다윗그의 자손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대하 13:5). 둘째 그는 자신을 대적하는 여로보암의 왕의 죄를 엄중히 꾸짖었습니다(6-9절). 셋째, 그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기에 자신과 유다 백성의 편에 서신다고 확신했습니다(10-12절).

         

        그러나 성경은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이는 그들이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17-18절)와 같은 행동을 보였던 아비야 왕을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왕상 15:3)라고 평가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어느 한 순간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약속과 언약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 3장 5절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이 보내신 선지자도 알지 못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보였다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었을까요? 더욱이 그분의 메시지가 축복의 약속이 아니라 심판의 경고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 아래에 사는 오늘날에는 복음의 약속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겠습니까?

         

        청교도 목사요 신학자였던 존 오웬과 함께 사역했던 데이비드 클락슨은 1680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판의 경고가 주어지면 안팎에서 큰 반발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심판의 경고는 마치 쓴 약처럼 죽음의 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삼키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안에서부터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밖에서도 반발이 일어난다. 사탄이 쌍수를 들고 그것을 막으려고 소란을 피우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심판의 경고를 통해 자심의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피할 길을 찾을 까봐 노심초사한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어 그들이 심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이와 같이 약속의 말씀은 대개 아무런 반발도 일으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복음의 정수인 용서와 생명에 대한 약속을 안에서부터 그저 달콤하게 받아 삼킨다. 사탄도 반발하기는 커녕 약속의 말씀을 그릇 적용하도록 옆에서 힘껏 돕는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사람들을 자연 상태 그대로 머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약속의 말씀을 그릇 적용하는 것은 무덤을 봉인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죄의 무덤 속에서 영혼이 죽은 채로 널부러져 썩어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렇듯 심판의 경고는 약속의 말씀보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어렵다. 따라서 니느웨 백성의 경우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심판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복음의 약속은 아무 반발 없이 수훨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는가?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구원 신앙이 아닌 경우가 또 하나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잠깐 믿다가”(눅 8:13)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신앙인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마 13:20) 받는 부류에 속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사한 빛이 감돌고 온몸 가득 의욕과 열정이 넘칩니다.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들, 즉 참된 신자들과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표면 아래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둘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에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땅을 파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진정한 구원의 뿌리가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훨씬 더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기꺼이 받아드리면서도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그분의 명령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놀랍게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만 여전히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처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고 복종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 심지어동으로 믿음을 보인 사람들 중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거짓 구원 신앙의 특징

         

        그렇다며 거짓 구원 신앙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이고 무엇이 구원받는 신앙인지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신앙이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도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삼으며, 구원신앙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신앙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 신앙이나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이나 모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며 둘 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이 모두 "다 일어나 등을 준비“(마 25:7)했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구원신앙에도 기쁨이 뒤따르고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에도 기쁨이 뒤따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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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주께서 기뻐하실 기도 / 김성봉 목사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1. 기도를 멈추세요

         

        1) 이방 종교식의 기도를 멈추세요 - 중언부언(重言復言):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2) 자기 욕심을 채우는 식의 기도를 멈추세요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b-3)
        3) 무언가를 쌓는다는 식의 기도를 멈추세요 -
        “예수 이름으로 구하라!”는 뜻은 단순히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성부 하나님을 향한 기도 행위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4) 가증한 기도를 멈추세요 -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2. 기도를 배우세요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배우세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
        하나님의 이름 거룩/ 하나님의 나라 임함/ 하나님의 뜻의 실현/ 일용할 양식/ 죄사함/ 시험에 들지 않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께 있기를
        2) 기도의 내용을 배우세요
        - 영적이고 영원한 것/ 하늘 아버지의 소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
        - 성도를 위한 사도의 기도들(엡 1:16 이하, 3;14 이하; 골 1:9 이하)
        3) 기도의 방식을 배우세요
        -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감사/ 죄의 고백과 용서의 간구/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한 도고/ 자신의 필요를 위한 간구/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 돌림/ 예수 이름으로 기도/ 아멘!
        4) 기도에 따르는 책임을 배우세요
        -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리라!(마 7:7, 8)
        - 자기 기도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a. 진실을 파악해야 b. 자기가 기도하는 말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에 한해서 진실을 파악해야 c.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을 생각해야

         

         

        3. 기도를 하세요

         

        1)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
        2) 가족과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하세요 -
        3) 교회와 목회자와 전도자를 위하여 기도하세요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8-19)
        4) 국가공동체와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하세요 -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4. 쉬지 말고 기도하세요!

         

        1) 쉬지 말고 기도하세요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2) 끈기 있게 기도하세요 -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 ”(눅 18:1ff.)
        3) 약속을 믿고 소망 중에 기도하세요

         

         

        5. 기도에 관한 다양한 교훈들

         

        1) 들으시는 기도/ 이루어지는 기도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4-16. 참조. 요일 3:22. 비교. 잠 10:24)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잠 10:24)

         

        2) 듣지 않으시는 기도

         

        듣지 않으시는 기도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비교. 잠 28:9; 사 59:2; 요 9:31; 약 4:3. 보라. 욥 27:9

         

        가증한 기도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비교. 시 109:7. 보라. 잠 15:8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그 연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시 109:4-10)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직한 자의 기도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사 59:1-3)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 5:25)

         

        -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참조. 욥 27:9; 시 66:18; 잠 28:9; 사 1:15)

         

        -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으시는 기도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 참조. 잠 1:28; 미 3:4)“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잠 1:24-30. 보라. 삼상 8:18; 욥 27:9)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삼상 8:10-18)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미 3:1-4)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 비교.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4-16. 참조. 요일 3:22. 비교. 잠 10:24)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잠 10:24)“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욥 27:8-10)

         

        3) 자기 품으로 돌아 온 기도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1-13. 비교. 마 10:13; 눅 10:6)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 10:11-13)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 10:5-6)

         

        4) 대적을 위한 기도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69:10-13)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제직, 기도하는 교회가 되십시다.

         

         

        http://thevine21.hompee.com/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기억을 위한 기도 최송연      
            내 가슴 속에 새겨주신 당신의 핏빛 사랑 내 기억이 둔하여져서 혹여, 그 사랑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내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사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노년이 되어서도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보존하여 주시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잊을지라도 주님께 받은 그 크신 사랑만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게 하시사 주의 사랑하심이 날이면 날마다 더 크게... 더 밝게... 더 선명하게... 자라나는 소년의 기억처럼, 소록소록 새로워질 수 있도록 내 기억까지도 늘 지켜주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베푸신 그 사랑 나 항상 기억하기 원합니다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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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지 못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고 원수가 되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풍요와 즐거움과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가시덤불과 고통 속에 살다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애처로워 내어쫓지 못 하시고 에덴동산에 그냥 두셨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들이 영생나무 실과를 먹고 영원히 살게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는 구원할 방법도, 회복할 방법도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내어 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진심, 하나님의 속마음까지는 알지 못 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들어가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빼앗겨 비참한 처지로 내몰린 인생의 바닥에서 감사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때 존귀하던 자가 급전직하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며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면 대개의 경우 분노하고 원망하기 마련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 가운데서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랑하시며 먼 훗날 구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동침하매’가 아니라 ‘야다’, ‘알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체험할 때도 사용하는 이 단어를 아담과 하와의 동침에 사용한 것도 기이한 일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여호와로 남자를 얻었다.’ NIV 영어성경은 'With the help of the Lord I have brought forth a man.' 곧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내가 한 남자를 얻었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남편과 동침하여, 내가 열 달 동안 임신하여, 내가 고통을 겪으며, 내가 아들을 낳았다.’ 곧 ‘내가 내 힘으로 수고하여’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도우사 남자(아들)를 얻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고백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수고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끈을 붙잡고 기다리는 그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도우사 아들을 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을 기대하며 아들이 태어난 것을 얼마나 기뻐하며 얼마나 기대하였을까요? 그러나 그 아들은 하와가 바라고 기대하고 믿었던 구세주의 계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죄의 상처를 더욱 깊게 하고 인간의 죄를 더욱 크게 하고 동생을 죽임으로써 믿음의 줄까지 끊어버리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그 불순종과 타락의 범죄는 아담과 하와의 기대와 같이 잠시잠깐의 고난, 그들 당대의 고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아들이 태어남으로써 곧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죄는 온 세상을 검게 물들이고, 온 세상을 사단마귀의 손아귀에 집어넣고 온 세상을 수천 년 동안 죽음과 절망의 고통에 밀어 넣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찢김 당하셔야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끔찍한 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죄,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끔찍한지를 잘 알지 못 합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였다는 것을,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죽임 당하지 않으시면 안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세상을 덮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는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원망하면서 정작 온 세상을 뒤덮은 공허와 혼돈, 흑암의 깊은 곳, 더러운 죄가 이룬 가시덤불과 사망의 깊은 바다를 헤치고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셔서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셔야 하는 아픔을, 아들을 그렇게 내어주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가슴이 찢어지는 그 고통을 헤아리지 못 합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와 그 아들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입으로는 ‘하늘의 두루마리, 바다의 먹물’을 노래하면서도 미쳐 깨닫지 못 하고 느끼지 못 합니다. 이와 같이 또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도 잘 알지 못 합니다.

                    .

                    진짜 중요한 일
                    조 수 정



                    허상을 쫓지않고
                    곁에 있는 자를 챙기겠습니다
                    대단한 일보다
                    맡겨주신 양에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평생 은혜를 배신하지않겠습니다
                    작은 친절도 귀하게 받고
                    축복하겠습니다
                    스승의 허물을 들추지않고
                    감사한것만 담겠습니다

                    일 때문에 사람을 잃지않겠습니다
                    천하보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며
                    작은 약속도 신중히 이행하겠습니다
                    늘 사람의 마음을 살피겠습니다

                    앞서 지휘하기보다
                    받쳐주고 격려하겠습니다
                    인격과 예의를 갖추고
                    제 안의 주님을 높이겠습니다

                    늘 화목을 도모하고
                    겸손하겠습니다
                    하루 해가 넘도록 분노하지 않으며
                    그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겠습니다



                    성취형이되기보다
                    과정 하나 하나에 진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며
                    현재를 최상으로 누리겠습니다
                    어디서나 자족하며
                    맑고 따뜻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더 갈망하며 달려가리니
                    결코 자만하거나 게으르지 않겠습니다
                    온전하고 흠이없도록
                    나 자신에게 엄격하겠습니다

                    죽기까지 죄와 싸우겠습니다
                    항의하고 탓하기보다
                    제가 끌어안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 늘 서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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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부터 유튜브에서 활동을 시작한 일루미나티 사이트 Liekillers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두 증인들’로 자처하며 적그리스도가 올 길을 예비하기 위한 본격적인 홍보 작업을 시작하였다.

                    각종 일루미나티 상징으로 도배된 일루미나티 사이트 LieKillers가 짐승의 표를 하나님의 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림을 클릭하면 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서 제작한 공식영상(아래)을 보면 피라미드와 666을 합쳐 만든 짐승의 표(The Mark of Beast)를 하나님의 인(The Mark of God)이라 소개하며 앞으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표를 받고 단일종교와 단일국가로 재편된 새로운 세상 New World Order에서 한 왕(King - 적그리스도)을 섬기며 살게 될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요한일서 2장 18절에 등장하는 ‘적그리스도’라는 단어 ‘안티크리스토스(αντιχριστος)’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크리스토스’에 ‘안티’(αντι)라는 단어를 붙인 것인데 헬라어 ‘안티’(αντι)라는 단어는 ‘대적한다’는 뜻과 함께 ‘거짓, 혹은 사이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일 뿐 아니라, 사람들을 속여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인 것처럼 미혹하는 가짜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짐승의 표를 하나님의 표로, 적그리스도가 세우는 나라인 New World Order를 성경에 예언된 천년왕국으로 또 현재 종교통합을 통해 적그리스도가 올 길을 예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교황을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은 세례요한으로 믿게 만들기 위한 미혹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별로 알려진 육망성을 하나님의 상징으로(왼쪽) 역시 Saturn의 또 다른 상징은인 검은색 6면체를 하나님의 인장(니비루?)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탄의 별 Saturn의 상징인 육망성과 검은색 육면체, SM의 아이돌 그룹 엑소의 멤버가 검은색 정육면체를 들고 있다.

                    피라미드와 전시안 그리고 666 마크를 합친 오컬트의 상징을 하나님의 인(Mark of God)으로  소개하며 이를 이마와 오른손에 받아야 새로운 세상(NWO)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 “Prepare yourself to receive The Mark Of God, 하나님의 표(짐승의 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라는 도전적인 말을 통해 짐승의 표가 곧 하나님의 인인 것처럼 미혹하고 있다.

                    영상에선 계속해서 이 표를 이마에나 오른 손에 받는 자들은 평화와 안전을 보장 받을 것이며, 조만간 세계의 모든 종교와 국가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한 왕(One King)이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New World Order)이 도래할 때 이 나라의 당당한 시민(SAINT)으로서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표식을 거부하는 자들은 악을 선택한 자로 신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 위협하고 있다.

                     

                    사탄은 대중들 앞에 언제나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때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도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영문판>> http://blog.naver.com/dandelion4je/220521875207



                    - 예레미야 -  




                    2.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love, the love of God & charity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And though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though I have all faith, so that I could remove mountains,
                    and have not charity,
                    I am nothing.]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 없더라도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고
                    예언하는 은사로 비밀과 지식을 아는 능력도 있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have not charity, I am nothing.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하지 못한 사람은
                    모든 능력의 비밀과, 지식과 믿음의 존재 가치의 무의미함을 가리킨다.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And though I bestow all my goods to feed the poor, and though I give my body to be burned, and have not charity, it profiteth me nothing.]
                    사랑이 없으면, have not charity,
                    아무 유익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구제나
                    그 당시처럼 구제의 제물로 자기 몸을 불살라 우상에게 내 줄지라도
                    이제 자기의 의로, 또는 정의의 동기로 든 이념이든 자기 생명을 내 줄지라도
                    'charity'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구제나 희생은 아무 유익이 없다.
                    그래서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16]
                    거룩은 히브리어의 ‘분리’를 뜻하여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분리를
                    뜻하였지만 예수님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여
                    죄로 인한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분리’를 허무시고 중보자가 되시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켰고
                    성령님은 이 거룩을 증거하시고 거룩으로 우리를 인도 하신다.
                    그래서 이제 거룩이란, 예수님의 사랑(charity)으로 죄에서 분리된 새로운 피조물로,
                    이제 성도로 불리고,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을 우리는 ‘복음’ 이라 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 졌기에 하나님의 ‘의’ 라
                    하고 이 의를 ‘공의의 하나님(righteousness of God)’라 한다.
                    로마서를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therein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로마서 1:17 절]
                    하나님의 뜻하시는 봐,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 가 공의이기에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랑(charity)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은,
                    기록된 성경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온전한 믿음은,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살라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 임하도록,
                    빛으로 오신 분을 본받아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인생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인도 하는 빛으로,
                    세상의 정신적인 가치관의 기준이 되어 세상문화를 정립해야 하는데,
                    이것이 복음인데,
                    썩은 소금이 되어 맛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차이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한국교회는 이미 자체 정화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이리 저리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방향을 잃고 난파된 이유는
                    복음의 참된 가치관,
                    삶이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상투 적으로, 쉽게, 말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목사의 사당(祠堂)화가 되어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평신도’로 신분을 분리하는 교회는, 그런 교회는
                    이미 교회는 건물을 의미하지, 성도라는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성도라는 생명의 존재가치는 교회 유지의 조직이고
                    재원의 충당 조직일 뿐이다.
                    보라, 예수님 이전의 성전, 이후 교회의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해 지면
                    헐리어 사라졌지 이제 까지 교회로 존재하고 있는 건물이 있는지 보라.
                    이제 화려한 건물로 이 모양 저 모양의 하늘을 찌르는 교회의 건물은
                    현대판 바벨탑이다.

                    (온갖 교회부흥을 위하여 만들어진 프로그램
                    그 프로그램의 핵심은 ‘순종’ 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우리 주를 향한 순종으로 시작하였든, 처음부터 오류의 프로그램이었든
                    어찌되었든, 프로그램이 변질되어 교회의 목사를 위한 순종으로 변절됨을 보면서
                    통탄해 오다, 한 친구로부터 어느 목사의 자랑을 듣고 그 분을 만난 적도 없었지만
                    그 분의 개혁적인 교육에 대하여 듣고, 그분을 알기 전 한국의 다른 모임에서 일찍
                    '제자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라 그 같은 훈련을 존중했기에, 목사님의 주장된 프로그램
                    ‘제자 훈련’ 의 소식을 듣고 카세트 테임을 구입하여 설교를 들으며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겼지만 제자훈련이 변절되어 감을,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카세트 테임 구입도 끊었고 그 후 기억에서 멀어 후, 후임 목사와 의  분란소식과
                    이제는 더 웅장하고 더 화려한 교회의 건축을 한다 는 소식에 일말의 안타까움 마저 버렸다.)

                    바벨(Balbel)은 히브리어의 ‘혼란’을 의미하나 ‘꼭대기(top)’이나 ‘우두머리’ 라는 뜻으로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께 대적한 반역의 대명사 이다.
                    이제 건물의 꼭대기에서 우두머리의 상징으로 화려한 가운을 걸친
                    현대판 바리새인이여.
                    예수님, 사도들, 그 누군가 종교의식으로 왕같이 제사장같이 화려한 가운을 걸쳤는가,
                    그것도 세상적인 재판관과 박사의 표시로.
                    개혁을 주장하면서 가톨릭 신부의 로만 칼라를 화장한 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바울도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 탄식했고
                    바리새인와 헤롯당들도 예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심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 이다  마가복음 12:14]
                    한국교회의 ‘혼란’이 어디서 왔는가?
                    예수님은 왜 성전의 꼭대기에서 유혹의 시험을 받으셨는가?
                    왜 하나님은 바벨탑을 지은 인간을 언어로 분리시켜 혼란케 하셨는가?
                    오늘날도 여전하고, 여전히
                    높아지려고 건물을 높이고 존재를 가치를 높이려고 신분의 분리를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이여,
                    낮고 낮아져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했다면
                    낮아진 만큼 성도가 서로 교통했을 것이고
                    낮아진 만큼 교회와 교회가 교통했을 텐데...
                    성도라는 아름다운 명칭도 겹다 못해 불의의 삯을 탐하고, 스스로 소명 받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이 되어 성도 앞에 성경의 잘못된 해석으로 올무를 놓고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자신의 욕심을 일삼는 음행의 발람의 길로 간 사람도 있고,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여
                    망령되고 헛된 말로 믿음이 파선되어 사탄에게 내어준 사람들의 말이
                    악성 종기처럼 퍼져 나감은 [디모데후서 2:14-17]
                    오늘날도 여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have not charity,
                    분별력이 파탄 나서 열심은 있으나 유익이 없고
                    내 모든 것을 내어 줄 지라도 그리스도의 도(道)를 빙자한, 사유(私有)한
                    그리스도의 도(道) 아무 상관없는 자신의 도(道)라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와 단절된 벨리알의 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 갈라디아서를 루터는 ‘나의 편지요 나의 아내이다’ 말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charity’ 로 사는 삶,
                    그런 삶인가...  이 구절을 읽을 때 마다 너무 부끄러워 고개도 들 수 없고,
                    그렇지 못한 생활이 한스럽고 고통스러워, 그 사랑이 내 마음의 중심을 흔들고
                    요동(搖動)하여 가슴에 박혔고 또 박히고...
                    그 사랑을 어찌 말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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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화가 난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큰 소리로 외치지 못하는 이유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 것보다

                    그래서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그냥 이대로인 채로 있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득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이 괴로울 수 있지만 말입니다


                    모두를 위해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마세요

                    그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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