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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UN이 2030년까지 생체 ID 카드(베리칩)를 이 땅에 사는 모든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손에 받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중앙 데이터베이스가 이런 카드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지난 9월 말 나는 UN이 발표한 17개 조항의 새로운 “세계화 목표들(Global Goals)”에 관해 소개한 바 있다. 이후에도 이에 관한 글들을 올린 바 있지만, 과연 이 사이트의 독자들이 저들이 파놓은 함정에 대해서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 우려스럽다.

 

이 새로운 어젠더는 실상은 “New World Order”의 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새로운 “세계화 목표들(Global Goals)”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면 우리가 매우 경계해야 할 내용들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Goal 16.9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By 2030, provide legal identity for all, including birth registration”

(2030년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출생기록을 포함한 법적인 신분증을 제공한다.)

 

UN은 이미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으며 특별히 외국인 망명자(난민)들을 대상으로 이 일을 진행하고 있다. UN은 생체 신분증 시스템(베리칩)을 구축하는데 Accenture사와 협약을 맺었는데, 이 생체 신분증은 제네바에 있는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새로운 생체 신분증 시스템은 단순히 망명자(난민)들에게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FindBiometrics 의 보고에 의하면 관료들은 이 기술이 2030년까지 모든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손에 신분증을 심어놓겠다는 UN의 목표를 실현가능하게 해 줄 것으로 보고 있다.

 

기사원문 >> The UN Plans To Implement Universal Biometric Identification For All Of Humanity By 2030

 

* UN이 2030년까지 이 땅에 사는 모든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손에 ‘생체 ID 카드’를 이식하려하고 있다. ‘생체 ID 카드’라는 복잡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이 컴퓨터와 연결되는 와이파이 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베리칩이라는 것을 아마 본 블로그의 독자들이라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UN은 또 이 ‘생체 ID 카드(베리칩) 시스템’이 유럽과 전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민들’을 대상으로 먼저 시행될 것이라 발표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고국을 떠나 목숨을 걸고 찾아온 난민들의 손에 베리칩을 이식하여 실험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바람이 온다길래

모래가 날릴까 걱정했다


비가 온다길래

옷이 젖을까 걱정했다


안개가 낀다길래

앞이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직 아무것도


오지 않았는데 걱정했다

지금 밖은 해가 쨍쨍한데..


- 담아온 글 -




출처: 사모님사모님/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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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보고서.....이 보고서(報告書)는 「메시아」시대에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문서로서, 현재「터어키」의 성「소피아」사원(寺院)에 소장되어 있다. 50권으로 되어있는 이 원고는 서기관(書記官)의 손으로 씌어졌는데, 각권이 2×4피트로 되어 있는 것의 전문(全文)을 옮긴 것이다. 「로마」사가(史家) 「빌레루스·파테르쿠러스」의 주(註)에 의한 원명(原名)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 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로 되어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이 사가(史家)는 19세였으며, 그의 작품은 모두 소멸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사가(史家) 「프리시안」과 「타시투스」의 글을 빌면, 그는 「캄파니아」출신으로 가이사와는 친한 벗이었고 16년동안 로마군을 지휘하였으며, 그 후 로마로 돌아가 「로마史」집필을 끝낸 후 집정관(執政官)의 직책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사가(史家)「발레루스」 자신이 유다지방에서 만난 나사렛 예수는 그가 만난 인물 중 가장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은 전 군대보다도 예수를 더 두려워했다고 기록하였다. 예수는 모든 종류의 병자들을 치료하였으며 죽은 자를 살렸고, 그가 결실하 지 못한 과일나무를 저주하였을 때 그 나무는 즉시 뿌리까지 시들어 말라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예수는 그의 놀라운 능력을 타인을 해치기 위해서는 결코 사용치 않았으며 항상 유대인의 여론은 양분되었다.

빈민층은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구원해 낼 그들의 구원자로 여겨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지도층 계급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증오하고 시기하였으며 등뒤에서는 그를 저주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애굽의 마술사라고 빈정거렸다고 사가(史家)「발레루스」는 기록하였다.

본 보고서의 내용은 「도날드 N.리드만」박사가 소정의 요금을 지불한 후 특별 허가를 얻어 읽고, 영어로 번역하여 「예루살렘」에서 간행(刊行) 되고 있는 월간{더 마운트 자이언 리포터(The Mount Zion Reporter 「시온산 보고서」; June 1974)}에 게 재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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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보고서(報告書)

「로마」의 황제, 「디베료·가이사」각하에게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너무나 독특한 일이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까지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저는 사건이 일어난 대로 각하께 소상히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발생한 사건은 모든 다른 신(神)들과는 조화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발레리우스·플라슈스」를 계승하여 유대 총독이 된 날을 저주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부임한 이래로 제 생활은 불안과 근심의 연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직위를 인수하고 큰 연회(宴會)를 베풀 것을 명하고 「갈릴리」의 영주(領主)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그의 부하직원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저와 제가 속하고 있는 정부 전체에 대한 일종의 모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며칠 후 대제사장이 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의 거동(擧動)은 엄숙(嚴肅)하였으나 외식(外飾)에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종교가,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로마」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이라든지 먹는 것이라든지 마시는 것을 금지한다고 변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명은 신앙심이 깊은 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안색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변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략(政略)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순간부터 피 정복자는 정복자를 적(敵)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로마」인들에게 이 나라의 제사장들을 요주의(要注意)할 것을 경고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벼슬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해서는 그들의 어머니라도 배신할 자들입니다.

제가 통치하는 모든 도시 가운데 「예루살렘」은 가장 다스리기 힘든 도시라고 여겨집니다. 백성들은 매우 거칠어서, 저 자신 순간순간마다 폭동(暴動)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폭동을 진압할 만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다.단지 저의 지휘 하에 한 명의 백부장 (百夫長)과 그가 거느린 군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자기의 통치지역을 방어할 만한 충분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알려 온 「시리아」의 사령관(司令官)에게 증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획득한 영토를 방어하는 일을 등한히 한다면, 우리 제국의 확장을 꾀하는 지나친 욕심은 결국 우리 정부 전체의 붕괴(崩壞)를 초래케 하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가능한 한, 대중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 제사장들이 폭도들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 지도 모르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될 수 있는 데로 백성들의 마음과 입장을 탐지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제 귀에 들려온 여러 가지 소문들 중에 특별히 제 주의를 집중시킨 사건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젊은 청년이 「갈릴리」지방에 나타나,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새로운 법을 고귀한 열정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목적하는 바가 민중을 선동하여 「로마」제국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제 근심은 곧 걷히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예수는 유대인보다는 오히려 「로마」인에게 더 친근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큰 군중이 모여 있는 「실로」라는 곳을 지나다가, 군중에 둘러싸인 젊은이가 나무에 기대어 선 채로 군중을 향하여 조용하게 연설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라고 누군가가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그의 연설을 듣고 있는 군중과 현저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어서 저는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30세 가량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도 마음을 잡아끄는 평온한 얼굴을 본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예수와,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저 검은 턱수염과 황갈색의 안색을 가진 무리들과를 어떻게 대조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온 것이 예수에게 방해가 되게 하지 않으려고 저는 계속 걸었으나 제 부관(副官)에게는 군중 속에 들어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제 부관의 이름은 「만류스」로서 그는 「카타린」을 잡으려고 「에투루리아」에 주둔한 적이 있는 공작대장의 손자입니다. 「만류스」는 「유대」지방에 오랫동안 거주한 고로 「히브리」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충성하여 저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총독청에 들어서자 저는 먼저 와 있는 「만류스」를 발견하였으며 그는 「실로」에서 예수가 한 말을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읽어본 어떤 철학자의 작품에서도 예수의 말에 비교될 만한 것은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항적인 유대인 중 한 사람이 「가이사」에게 세(稅)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고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자유를 그 「나사렛」젊은이에게 허용한 것은 이와 같은 그의 지혜로운 말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를 체포하여 「본디오」로 추방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였다면 그것은 「로마」정부가 사람을 다루어 왔던 지금까지의 관례와는 상반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선동적이거나 반항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저는 예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보호의 손길을 그에게 뻗쳐 주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행동하였고 말하였으며, 사람들을 모아서 연설하거나 또 제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어떠한 관청의 제재(制裁)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우리 조상의 종교는 예수의 종교로 대치될 것이며, 이 숭고한 관용의 종교는 「로마」제국을 허망하게 붕괴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가련한 저는 유대인의 말을 빌자면 하나님의 섭리요, 우리의 말대로 하자면 운명의 도구로 쓰여진 것일 것입니다.

예수에게 허용된 무제한의 자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유하고 권세 있는 유대인들을 자극하였습니다. 예수가 후자들에게 가혹하게 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그 「나사렛」젊은이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은 것은 정략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는 그들을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음이 가득하다."

또 한번은 부자가 많은 헌금을 내고 뽐내는 것을 보고 한탄하며, 가난한 자의 한 푼이 하나님의 목전(目前)에서는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오만한 언동(言動)에 대한 항의가 날마다 총독청에 줄을 이어 들어왔습니다. 저는 예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선지자로 불리우는 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으며, 예수에 대한 진정서가 「가이사」에게 제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처사는 원로인에게 재가를 받은 것이었으며, 「파르티안」전쟁이 끝나면 저에게 증원군을 보내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폭동을 진압하기에는 우리의 군사력이 너무도 허약한 고로, 저는 힘없이 물러섬으로써 총독청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성(城)의 평온을 되찾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예수에게 글을 써 보내어 총독청에서 한번 만날 것을 청하였습니다. 예수가 왔습니다. 황제께서는 제가 「로마」인의 피에 서반아(西班牙)의 피가 섞여 흐르는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두려움 따위의 유약한 감정은 모르는 사람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나사렛」사람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저는 저의 접견실에서 거닐고 있었습니다.그런데 갑자기 제 다리는 쇳덩이로 된 손으로 대리석 바닥에 붙여놓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으며, 그 나사렛 젊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서 있는데도 저는 마치 형사범(刑事犯)처럼 사지(四肢)를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으나 제 앞에까지 다가와 서는 것만으로도 "내가 여기 왔나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 동안 저는 이 비범한 사람을 존경과 두려움으로 응시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신(神)들과 영웅의 형상을 그린 수많은 화가들이 아직 그려내지 못한 유형(類型)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너무나 두렵고 떨려서 그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여," 하고 드디어 저는 말문을 열었습니다."「나사렛」예수여, 지난 3년동안 나는 그대에게 연설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였소.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나는 조금도 후회가 없소. 그대의 말은 현인(賢人)의 말이오. 나는 그대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읽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그대의 설교는 다른 철학자들의 그것을 능가하며 단순하고도 장엄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황제께서도 알고 계시며, 그를 허락한 것을 스스로도 기쁘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나는 그대의 설교가 강력하고도 원한 깊은 적대자를 만들고 있음을 알려 드려야겠소.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오. 「소크라테스」에게도 대적이 있었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증오의 희생물이 되었다오.

그대의 경우는 그대의 설교가 그들에게 매우 가혹하다는 것과, 내가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한 것으로 그들이 나를 반대한다는 것 때문에 설상가상으로 시끄러워지고 있소. 그들은 「로마」정부가 그들에게 허용한 작은 권리마저도 나와 그대가 손을 잡고 그들로부터 빼앗으려 한다면서 고소까지 하고 있소.

내가 그대에게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으로서, 이제부터는 그대가 설교할 때에 좀더 신중하고 온화한 말로하며, 그들을 고려하여 대적의 자존심을 상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리석은 군중들을 충동질하여 그대를 대적하지 않도록 하고 또 나로 하여금 법의 도구 노릇을 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오."

그 「나사렛」사람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땅의 군주여, 그대의 말은 참된 지식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격류(激流)를 명하여 산골짜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계곡의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버릴 것입니다. 그 급류는 자연과 창조주의 법칙에 순종한다고 그대에게 답변할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그 급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계십니다. 진실로 그대에게 이르노니 「사론」의 장미가 피기 전에 정의의 피가 엎질러질 것입니다."


"당신의 피는 엎질러지지 않을 것이오."하고 저는 깊은 감동을 받고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지혜는 「로마」정부에 의하여 허용된 자유를 남용하는 거칠고 오만한 모든 「바리새」인보다 더욱 값진 것이오. 그들은 「가이사」에 대한 음모를 꾸며, 「가이사」는 폭군으로서 그들의 멸망을 도모하고 있다는 말로 무식한 자들을 충동하여 황제의 관대하심을 공포로 조작시키고 있소. 오만무례하고 철면피같은 인간들이오!
그들은 악한 계획을 도모하기 위해서 때로는 양의 가죽을 쓰는 「티베르」강의 여우임을 그들 자신은 모르고 있소. 나의 총독 관저는 밤낮을 물문하고 그대에게 도피처로 제공될 것이오."

예수는 관심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저으며, 근엄하고 숭엄(崇嚴)한 미소를 띄면서 말하였습니다.

"때가 이르면 그 때는 땅 위나 땅 아래 어느 곳에도 인자를 위한 도피처는 없을 것입니다. 의(義)의 도피처는 저기에 있습니다." 라면서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책에 기록된 말씀은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여,"하고 저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습니다."그대는 나의 요청을 명(命)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오. 나의 통치하에 있는 지방의 안전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소. 당신은 설교할 때 좀 더 온건한 태도를 취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오. 나의 명을 어기지 않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어떠할 지를 그대도 잘 알 것이오. 와 주어서 고맙소. 잘 가시오."

"땅의 군주여,"하고 예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과 자비를 주려고 왔습니다. 나는 「가이사 · 아구스도」가 「로마」세계에 평화를 주던 바로 그 날에 태어났습니다. 핍박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핍박을 예상하고 있으며, 나에게 길을 보여주신 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 핍박을 잘 감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세상적인 사려분별(思慮分別)과 지각을 삼가십시오. 성막에 희생 제물을 잡아놓는 것은 그대의 권력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말을 한 후 그는 투명한 영혼처럼 접견실 휘장 뒤로 사라져 갔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압감에 해방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예수를 대적하는 자들은 그 당시 「갈릴리」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에게 편지를 써서 그 「나사렛」사람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헤롯」이 그의 성격대로 하였다면 그는 예수를 당장 잡아 사형에 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왕의 위엄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의원에 대한 그의 영향이 무시당할지도 모르는 행동을 범하는데 주저하였으며, 또 저처럼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관리로서 한 유대인 때문에 겁을 집어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전에 「헤롯」은 총독청으로 저를 방문하였으며 얼마간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떠날 즈음에 「나사렛」사람에 대한 제 견해가 어떠한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하기를 예수는 가끔 위대한 민족이 드물게 배출해 내는 위대한 철인 중의 한사람으로 그의 교훈은 결코 처벌받을 만한 것이 아니므로 「로마」정부는 그 자신의 행동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를 그에게 허용하기로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헤롯」은 음흉하게 웃어 보이면서 마지못해 하는 투로 인사하고는 떠났습니다.



유대인의 큰 축제가 다가오고 있었으며 백성의 여론은 유월절 의식(儀式)에서 항상 감정을 표명하는 일반 백성의 환희에 편승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그 「나사렛」사람의 죽음을 시끄럽게 요구하는 소란한 군중들로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파견한 밀사(密使)는 성전의 금전이 군중들을 동원하는데 사용되고 있다고 전해 왔습니다. 위험은 점점 더 가중되었으며 한 「로마」의 백부장은 멸시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저는 「시리아」 의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100명의 보병과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습니다.

저는 반역하는 성(城)한 가운데서 얼마 되지도 않는 정병(精兵)들과 함께 외톨박이가 된 것 같았으며 폭동을 진압하기에 너무 약한 탓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을 너그럽게 대해 주는 수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붙들고 있었으며 선동적인 폭도들은 총독청에 대하여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들의 상전(上典)의 명령만 믿고 있었으며, 제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말해 보라고 눈짓을 했을 때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 서!"라고 고래고래 고함치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때는 세력 있는 세 당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 일심동체가 되었습니다.

첫째로 「헤롯」당과 「사두게」파로서 그들의 선동적인 행동은 두 가지의 동기- 즉 그들은 「나사렛」사람을 미워하였으며 「로마」의 속박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로마」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기(旗)를 가지고 거룩한 성에 들어왔다는 것 때문에 저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비록 제가 어떤 치명적인 죄를 범하였다고 해도 신성모독죄보다는 덜 흉악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불만의 씨가 그들의 가슴속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저는 성전의 은금(銀金)의 일부를 공공건물을 건축하는데 사용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제안은 무시당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공공연하게 예수의 대적임을 자처하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정부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자들로서 그 「나사렛」사람이 지난 3년 동안 그가 가는 곳마다 「바리새」인들을 혹독하게 질책한 것에 대하여 끔찍한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만의 힘으로 행동하기에는 너무도 두렵고 약하다는 것을 알고 「헤롯」당과 「사두게」파와의 불화를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들 세 당 외에도 저는 언제나 소요에 끼어들기 잘 하며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키는 데는 한몫을 잘 담당하는 분별없고 야비한 군중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예수는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와 사형으로 정죄되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중재(仲裁)를 부탁해 온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유죄판결을 확인한 후 처형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예수는 「갈릴리」사람이요 그 사건은 「헤롯」의 관할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니 거기로 보내라고 명(命)을 내렸습니다.

교활한 그 영주는 겸양을 표시하는 척 하면서 「가이사」의 대리자인 저의 명령을 거절하고 그 사람의 운명을 제 손에 위탁하였습니다.

곧 저의 관저는 포위된 성보(城保)의 형세를 띄었고 매순간마다 불만에 가득찬 터질 듯한 군중들은 그 수가 증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나사렛」산지(山地)에서 몰려온 군중들로 넘쳤으며 전 유대인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장래의 운명을 내다본다는 「까울」지방의 여자를 아내로 두고 있습니다. 아내는 제 발치에 엎드려 몸을 맡기고 울면서 말하였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조심하십시오. 저 사람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그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어제밤, 저는 환상 중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물 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 바람의 날개를 타고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기드론」골짜 기는 피로 물들어 붉게 흐르고 있었고 「가이사」의 조상(彫像)은 대량학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중간 기둥들은 퇴락하였고 태양은 무덤 속의 제녀(齊女)처럼 슬픔 속에 면사포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오! 「빌라도」여, 악(惡)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아내인 제 애원을 듣지 않으신다면 「로마」중의원이 받을 저주가 두렵고 「가이사」가 당할 괴로움이 두렵습니다."

이 때는 이미 몰려온 군중들의 무게로 층층대의 대리석 계단이 삐걱거렸습니다.
그들은 그 「나사렛」사람을 다시 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재판하는 장소로 나아가서 엄격한 어조로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 「나사렛」사람의 죽음이요."하고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무슨 죄 때문인가?"
"그는 참람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의 황폐를 예언하였으며 그 자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유대인의 왕, 「메시야」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로마」의 법은," 하고 저는 말하였습니다."그러한 죄는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냉혹한 폭도들이 소리질렀습니다. 분노한 폭도들의 고함소리는 관저의 기초까지 흔들어 놓았습니다.

군중 속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침착하게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그 「나사렛」사람이었습니다.

무자비한 핍박자들로부터 예수를 보호하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헛수고로 돌아가고 저는 마침내 그 순간 예수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된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즉 이러한 명절에는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으므로 저는 예수를 자유롭게 놓아 소위 그들이 일컫는 속죄 염소로 삼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들에게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하여서는 하루를 온전히 금식하지 않고서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그들 자신의 법을 들어, 앞뒤가 맞지 않는 그들의 주장의 모순성을 지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죄 선고는 「산헤드린」의 동의를 얻어 의장의 서명을 받아야 하며 또 어떠한 범죄자일지라도 형의 확정 선고를 받은 당일에는 그 형의 집행을 할 수 없으며 다음 날에 집행한다 할지라도 집행 전에 「산헤드린」이 전 경과를 검토해 보아야 하며 또 그들의 법에 따라서 한 사람이 기(旗)를 가지고 재판정 문에 서있는 동안 다른 사람은 말을 타고 좀 떨어진 곳에서 범죄자의 이름과 죄명과 증인의 이름을 소리 높이 외쳐, 혹시 누가 그를 변호할 사람이 있을 지의 여부를 알아봐야 하며, 형 집행 도중 범인이 세 번 뒤를 돌아보아서 새로운 사실로 자신에게 유리한 변호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구실을 말해 줌으로써 그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기를 바랐으나 여전히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줄 생각에서 예수를 채찍질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군중의 분노를 증가시켰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대야를 가져오라고 하여 소란스러운 군중 앞에서 제 손을 씻음으로써 「나사렛」예수를 죽음에 내어 주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만 그것도 허사였습니다.

이 철면피 같은 군중들이 갈구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가끔 시민폭동에서 노도한 군중을 목격하여 왔으나 이번처럼 격렬한 폭동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지옥의 모든 유령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것과 같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걸어 다닌다기 보다는 갑자기 땅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 같았으며 총독 청사의 입구에서부터 「시온」산까지 이르는 군중들은 넘실거리는 파도를 따라 움직이는 소용돌이처럼 보였고, 「판노니아」의 공회소의 소동이나 폭동에서도 결코 들어볼 수 없는 가지가지의 해괴한 소리를 지르며 모여들었습니다. 겨울날 황혼 무렵처럼 날이 어두워지자, 저 위대한 「줄리어스·시저」죽었을 때처럼 적막하였습니다.

마치 3월 보름날 같았습니다. 모반을 일삼는 이 성을 위임받은 통치자로서, 저는 접견실 기둥에 기대어 서서 그 죄없는 「나사렛」 젊은이를 처형하려고 끌고 다니는 어두컴컴한 지옥의 악마 같은 저들의 무서운 계략을 꺾을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주위의 모든 것이 황량하게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주민들을 「게모니카」로 가는 장례(葬禮)문을 통하여 모두 토하여 냈습니다. 황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저의 위병들은 기병과 백부장이 가세한 가운데 무력에 의한 질서유지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홀로 남았으며, 그때 잠깐 동안 지나간 그 순간은 마치 저 자신이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결을 타고 「골고다」에서 들려오는 큰 부르짖음 소리는 일찌기 인간의 귀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고통의 소리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구름이 성전 꼭대기 위에 드리워졌으며 마치 면사포를 가리운 것처럼 「예루살렘」을 덮고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에 나타난 징조들은 너무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마치 「디오누시오」가 "창조주가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우주가 떨어져 나가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다"라고 크게 소리 질렀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가공할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동안 애굽에는 무서운 지진이 일어났으며,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으며 미신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거의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안디옥」사람인 나이 많고 학식이 풍부한 「빌도살」이라는 한 유대인은 이 지진소동이 있은 후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놀라서 죽었는지 아니면 슬픔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 「나사렛」사람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날 밤 첫 시간이 되기 전에 저는 외투를 걸치고 성안으로 들어가 「골고다」로 향하는 문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 제물은 죽어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아직도 흥분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침울하여, 말없이 절망에 빠진 상태로 집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격한 사실은 그들을 공포와 양심의 가책으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저는 또, 저의 적은「로마」병정의 일단이 슬픔에 잠긴 채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며 기수(旗手)는 슬픔의 표시로서 독수리표 깃발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또 병정의 일부는 무엇인가 혼잣말을 하면서 지나갔지만 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神)들의 뜻을 좇는 「로마」인들을 당황케 하는 기적들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한 무리의 남녀들이 걸음을 멈추고는 되돌아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어떤 새로운 경이(驚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갈보리」언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허탈한 마음과 슬픔에 차서 총독청에 돌아왔습니다. 그 「나사렛」사람의 피가 아직 얼룩져 있는 계단을 오르다가 저는 문득 한 늙은이가 무엇을 탄원하는 듯한 태도로 서있는 것과 그 노인 뒤에서 몇 명의 「로마」사람들이 눈물을 지으면서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내 발 앞에 몸을 굽히고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늙은 노인이 울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으며, 비록 외국사람이기는 하지만, 함께 있는 「로마」사람과 같이 제 마음은 슬픔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날 제가 본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격한 감정을 가져본 체험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반역하여 판 사람들이나 그렇게도 반대 증언을 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의 피 값을 우리에게 돌리시오." 하고 큰소리쳤던 무리들은 비겁한 똥개같이 쑥 들어가 버려, 그들의 이빨을 식초로 씻은 듯 시침을 떼고 있었습니다.제가 들은 대로 예수가 죽은 후에 부활하리라는 그의 가르침이 사실이라면 이 가르침은 많은 군중 가운데서 실현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영감님," 저는 감정을 억제하고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며 바라는 요구가 무엇입니까?"
"저는 「아리마데」 요셉이라고 합니다."하고 노인은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나사렛」예수를 장사지내고 싶습니다. 그것을 허락해 달라고 당신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당신 소원대로 하십시오."하고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의 부관 「만류스」에게 명하여 병정 몇 사람을 대동하고 가서 매장하는 것을 감독하고 불경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며칠 후 그의 무덤은 비어 있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각처로 다니면서 예수가 자신이 말한 대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고 전파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건보다 더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제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황제께서도 「헤롯」을 시켜 조사하여 보시면 저에게 잘못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묘실에 예수를 매장하였습니다. 그가 예수의 부활을 예상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묘실을 준비하려던 것인지는 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가 매장된 다음날 제사장 한 사람이 총독청으로 와서 제게 말하기를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 숨긴 후 그가 생전에 예언한 대로 살아난 것처럼 꾸미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제사장을 친위대장인 「말커스」에게 보내어 무덤을 지키기에 충분한 수대로 병정을 데리고 가서 배치하라고 한 후, 만일 무슨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들의 책임이지 「로마」정부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큰 흥분이 일어났으며 저는 더 큰 근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슬람」이라는 사람을 보내어 자초지종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그는 제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연상할 수 있도록 자세히 말하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무덤 위에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빛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여자들이 그들의 풍속대로 예수에게 발라드릴 향유를 가지고 왔는가 하고 추측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여자들이 파수군을 통과할 수 없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러한 여러 생각이 그의 마음에 스쳐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온 주위가 환하고 밝게 비취고 거기에 이미 죽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수의(壽衣)를 입은 채로 서 있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들 모두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충만하여 환호하는 듯하였으며 동시에 그 주위와 위로부터 그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으며 온 누리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가득 차고 넘친 것 같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고 듣는 동안 땅은 기고 헤엄치는 것 같았고 그는 토할 것 같고 힘이 없어 일어설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지는 그 아래에서 헤 엄치는 듯하여 그의 감각은 마비되고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의 현기증이 잠에서 깨어나 너무 갑자기 일어남으로 흔히 있는 것 같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는가 물었습니다.그는 말하기를 잠들은 것이 아니라, 마치 임무 수행 중에 잠을 잤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아 죽는 경우와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병정들은 서로 교대로 잠을 잤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광경은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약 한 시간쯤 되지 않았나 짐작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정신이 돌아온 후 그 무덤에 가보았느냐고 물었으나 못 갔다고 대답하였고 그 이유는 교체병이 오자마자 그들이 숙소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에게 질문을 당하였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제사장은 밤에 일어난 사건이 지진이었으며 파수군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한 사람의 제자도 보지 못하였으며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며 누군가의 말을 듣고 후에 알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같이 대화한 제사장들의 예수에 대한 견해가 어떠하냐고 물어 보았습니다.그는 대답하기를 제사장이 더러는 예수는 남자도 사람도 아니며 「마리아」의 아들도 아닐 뿐더러 「베들레헴」의 처녀의 몸에서 탄생된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만일 유대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그를 따르는 자들이나 배척자들에 의하여 알려지고 증거된 것처럼 그 모든 사실이 그 사람의 생애와 조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잠들게 하고 폭풍을 멈추게 하고 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은전을 얻어낼 수 있었던 분입니다.

만일 모든 유대인들이 증거하는 것처럼 그가 했다고 하는 많은 일들을 그가 할 수 있었다면 그를 대적하게 했던 그의 모든 주장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는 범죄함으로, 어떤 법을 어김으로써 또 누구를 그릇되게 함으로써 비난을 싼 적은 없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 그를 지지하였던 사람 뿐 아니라 그를 대항하였던 수많은 사람들까지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각하여,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 있어서 「안티파터」가 제게 관한 여러 가지 가혹한 평을 하였다고 들었으므로 황제께서 사건의 전모를 아신 후 제가 취한 행동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내려 주시도록 자세히 쓰느라 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각하의 건승(健勝)을 빕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본디오·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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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에 대하여
빌라도는 로마 황제 「디베료·가이사」치하에서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아그립바」 1세가 말하는 빌라도는 천성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고 굽힐 줄 모르는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규탄하였다.

빌라도와 유대인들 간에는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부터 원한으로 대립되었다. 그는 예수를 재판하기 전에 그의 총독직을 위협하는 민중봉기를 두 번이나 당했다.

첫 봉기는 로마군을 투입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세속화시키려고 시도한데서 발생했다. 유대인들은 즉각 폭동을 일으켰다. 빌라도는 5일만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궁전에 세운 「로마」기념비를 제거하라고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피에 굶주린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아내의 청원은 그로 하여금 예수를 석방시키도록 용기를 주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는데 용기가 없었다.

사가「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이 비극의 순간을 잊을 수 없었으며 그로부터 수년 후에 유배를 당하여 고심하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출처:http://www.aspire7.net/belief-1-2.html

**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외경 자료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어 이곳에 따로 올립니다.**

귀한 자료를 올려주신 김남수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종종 부탁합니다!
DallasSohn.jpg 지난 달 초인가, 이화여대 인문학부에 다니는 김다혜라는 학생이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에 글을 하나 올렸다. 제목이 “‘헬조선’? 니들이 지옥을 알아?”라는 글이었다. 이틀 만에 4만 건이 넘는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한 이 글은 “북한 주민, 시리아 난민들이 진정한 지옥이다. 그걸 경험해 보지 못한 너희가 한국에 대고 헬조선이라고 잠꼬대나 투정을 부리지 마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한 신문에 의하면, 이 글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도 전재되었고, 찬사와 비난이 엇갈렸다고 한다. 그리고 ‘꾼’들의 필자에 대한 ‘신상 털기’가 기승을 부렸다고 했다.

ㅡ“저 글 쓰신 분 부모님, 최소한 사회지도층 인사일 것임” “글 수준을 떠나서 빚내서 학교 다니는 학생보다는 중산층 이상의 여유로움이 엿보이는 글이네요...” 등등.

그 신문의 기자는 네티즌들이 쓴 이 댓글을 몇 개 소개하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썼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글을 쓴 여학생은 사회지도층 인사의 딸도, 중산층 이상의 여유로운 삶을 사는 철부지 여대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쓴 여학생은 올해 34세의 탈북자이었다.

그 연유로 기자가 지난 10월 7일 그 필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 내용을 보니 ‘기막힌’ 일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김씨의 고향은 강원도 원산. 2010년 여름에 중국으로 탈북, 미얀마-라오스-태국을 거쳐 1년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차제에 그 인터뷰 기사를 요약해본다.

―탈북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 부모님은? / 저는 2년제 전문학교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후, 함흥시에 있는 상업관리소(주민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해 주는 국가기관)에서 9년간 근무했어요. 아버지는 노동당원에 공무원이었어요. 어머니는 가정주부였고….

―원산이면 그래도 북한에서는 대 도시인데, 소위 ‘고난의 행군’ 때 그런 곳에서도 아사자가 나왔나요? / 그렇죠. 1992년경부터 식량사정이 나빠졌고, 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배급제가 거의 무너졌어요. 95년부터는 아사자가 나오기 시작했고…오히려 시골에서는 산에 가서 나물이라도 뜯어 먹을 수 있지요. 대도시가 더 어려워요. 인심은 더 박하고… 우리 집은 그래도 아버지가 당원이고 현직 공무원이어서 배급이 조금 나왔어요. 같은 반 친구들 가운데 절반은 밥을 굶고 길가에서 아무 풀이나 뜯어 먹다가 독초를 잘못 먹고 죽는 친구도 많았어요.

―주변에서도 굶어 죽은 사람이 나왔나요? / 너무 많았죠.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네 집에서 아무개가 죽었다’는 얘기가 매일같이 들려왔어요. 더구나 95-96년도에는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었어요. 자고 깨면 골목에서 사람들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기력이 없어 그런지 죄송하지만, 마치 짐승 우는 소리 같았어요. (중략)

―남한이나 또는 유엔 등에서 보내오는 구호물자들이 인민들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않나요? / 상업관리소에서 일하면서 유니세프(UNICEF) 등 유엔 기구에서 보내오는 물자들은 많이 보았어요. 대한민국에서 보내는 물자들은 그걸 담은 부대나 포장을 다 바꾸기 때문에 우리는 몰라요. 10개가 들어온다면 1개는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9개는 간부들이 가져가요. (중략)

―탈북 이후 언제가 제일 어려웠나. 그리고 여기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점은? / 북한에서 중국의 국경을 넘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저희가 여기서 고생하는 건 고생도 아니죠. 저희는 지옥에서 살아봤잖아요. 그러다보니 저는 대한민국이 너무 좋고 천국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죠.(중략)...그리고 뭐든지 제가 하는 만큼 얻는 게 가장 좋아요. 북한에서는 상벌은 없고 뇌물만이 판을 쳐요. 여기 와서 열심히 해 5개월 동안에 회계1·2급, 세무2급 자격증도 땄어요. 추석 때 다른 탈북 동생들과 식사를 하면서 모두들 그랬어요. ‘여기서는 착하게 살면 착한 만큼, 나쁘게 살면 나쁜 만큼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 온다’고 했어요.

‘헬조선?’ 말은 맞다. 조선은 북한을 지칭하니까...허나, 생각을 모아보면, ‘핼조선‘을 외치는 청년들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여러 가지 할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나는 이글을 읽으며 우리 젊은이들이 진짜 지옥을 못 본 탓인지, 정주영 회장의 ‘이봐, 해봤어?’의 ‘해’자도 해보지 않은 채, 현실이 좀 힘들다고 내 나라에 대놓고 왜 그런 말을 내뱉는지...솔직히 아직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었다.*

Texas Dallas에 살고 계시는 손남우님 불로거에서

 

 

 

 

[무슬림의 한국생활수칙 5계명]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한국가면 일단 기독교 단체와 인권단체로 붙어라.

2.한국가면...영어 잘하는 척 하라...특히 한국녀들 앞에서 영어 사용하라

3.한국가면 무조건 한국여자 임신 시켜라

4.한국 여자와 결혼하면 한국녀 재산 챙기고나서 이혼하고

본국 부인과 가족들 모두 입국 시키고 무역업 하라

5.문제 생기면...무조건 인권단체로 가라 무조건 불쌍한 척 하라 ===================================

 

노르웨이의 실외강간의 100%가 무슬림.

히잡은 복종을 의미, 히잡을 안쓰면 창녀로 생각(무슬림이 아니기 때문)하는 것이 무슬림 남성들의 가치관임.

그래서 이렇게 집단 성폭행이 급작스럽게 높아지고 있음.

(3분) https://youtu.be/OAJNQyRRlxE 무슬림이 한국여자에게 접근하는 이유!!!!!!!!!!!!!!!!!(3분)

 https://youtu.be/G04gVXgOh0E

무슬림과 결혼 후 강제개종교육을 당한 피해 여성의 증언(CTS방송)(5분41초)

 https://youtu.be/Gl7YjwdiP1A 성폭행범과 결혼하라니…

사라진 여성인권(1분38초) https://youtu.be/CWwEuap2aq4

프린스턴대, 옥스퍼드대, 노터데임대, 보스턴대, 보스턴칼리지, 미시간주립대, 캔자스주립대, 밴더빌트대, 힐스데일대, 토론토대, 네브래스카대 등과 같은 대학의 법학교수들과 법률가들 64명이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에 맞서 일어났습니다.
이 사이트에 서명함으로 우리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서명 부탁드립니다. https://campaignforamericanprinciples.com/scholars-stat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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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핫지의 종말론

 

                                (A Reconsideration of Charles Hodge’s Eschatology)

 

                                                                                              박응규 교수(ACTS/역사신학)

 

 

 

들어가는 말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구프린스톤 신학자들 중에 조직신학자로 당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다. 핫지는 “19세기의 가장 탁월한 미국 장로교 신학자”로 인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지금까지 배출한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신학적 업적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7세기에 발전한 개혁신학을 계승하여 소위 “프린스톤 신학”(Princeton Theology)을 형성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1) 프린스톤 신학은 “미국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가늠하는 신학적 잣대”가 되었으며, 조직신학의 모든 분야에서처럼 종말론에 있어서도 핫지의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그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2)

 

우리는 흔히 찰스 핫지를 조직신학자로 그리고 그의 신학을 그가 저술한 세 권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과 동일시 하지만, 대부분의 당대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핫지는 당시의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주로 쓰는 사람”과 “변증적인 신학자”로 각인되어 있었다. 또한 핫지가 저술한 ?조직신학?을 비롯한 글들 속에는 당시의 문화적이고 교회적 상황에 대한 반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3) 그런 면에서 핫지의 종말사상을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서 재고찰하는 것은 그의 신학 세계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구프린스톤 신학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어네스트 샌딘(Ernest Sandeen)은 프린스톤 신학과 세대주의와의 연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두 신학조류가 결국 근본주의의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4)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두 신학체계 사이의 상이성 보다는 현대주의와의 논쟁으로 인하여 맺어진 협력과 제휴의 현상을 과도하게 강조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핫지의 종말론, 특히 후천년설에 대한 재고찰은 구프린스톤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뿐만 아니라 세대주의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귀한 안목을 제공할 것이다.5) 핫지를 비롯한 상당수의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신봉했던 후천년설은 19세기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다가 20세기 초에 이르게 되면서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연구는 드문 것이 사실이고, 한국장로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구프린스톤 신학의 종말론을 찰스 핫지를 중심으로 고찰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6)

 

 

I. 찰스 핫지의 시대와 신학적 배경

 

 

A. 핫지의 시대적 배경

 

찰스 핫지는 1797년 12월 27일, 필라델피아에서 휴 핫지(Hugh Hodge, 1755-1798)와 메어리 블랜차드(Mary Blanchard Hunt, 1765-1832) 사이에서 출생하였다.7) 그의 조부 앤드류 핫지(Andrew Hodge)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북부 아일란드에서 거주하다가 18세기 초에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였다. 그의 부친 휴 핫지는 1773년에 프린스톤 대학을 졸업한 후, 외과의사로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장로로서 개혁신앙의 유산을 계승하고 미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핫지의 식구들은 필라델피아 제 2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애쉬벨 그린(Ashbel Green) 목사의 신앙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핫지가 태어난지 7개월도 못되어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지만 평생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간직하였다. 그의 모친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두 아들, 휴 레녹스와 찰스의 교육을 위해 갖은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812년은 미국 장로교회 역사나 핫지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이 해에 애쉬벨 그린과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  목사가 주동이 되어 장로교 목회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육의 염원이 결실을 맺어 프린스톤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메어리 핫지는 프린스톤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훗날 핫지의 생애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린스톤 신학교의 초대 교수인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가 버지니아로부터 프린스톤으로 이주하였다. 1812년 가을에, 핫지는 프린스톤 대학에 입학하였고, 1815년 프린스톤에 불어 닥친 부흥의 영향으로 핫지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사역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알렉산더와 그린의 강한 영향력과 그의 어머니의 권유로 핫지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작정하였다.

 

이렇게 핫지가(家)의 프린스톤 이주는 장로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핫지의 생애와 사역의 중심지가 될 프린스톤 신학교와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뿐만 아니라 핫지가 알렉산더로부터 받은 신학적인 영향과 유대관계는 평생동안 이어졌으며,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를만큼 깊었으며, 자신의 첫 아들의 이름을 “아키발드 알렉산더” 핫지라고 지을만큼 가까왔다. 또한 1819년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알렉산더의 권유로 모교에서 교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으며, 그의 평생 사역이 그 곳에서 펼쳐지게 되었다.8)

 

그러나 핫지의 시대였던 19세기는 그 초반부터 미국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다.  1730-40 년대에 동부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대각성운동 이후 50년간은 미국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은 성장이 둔화되고 쇠퇴일로에 있었다. 이 기간에 미국교회는 위대한 목회자들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고,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시대를 특징지웠던 부흥의 열기, 회개, 변화 그리고 환희의 장면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고 단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계몽주의 사상들이 홍수처럼 미국에 밀려 들어왔고, 독립혁명은 미국에 다양한 합리주의가 유입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었고, 교리적인 이완과 부도덕한 윤리의식이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9)  

 

불경건과 부도덕이 가시적인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한 불신의 형태가 다양하게 미국 사회에 팽배하였다. “불신앙의 유령이 자신을 조직화하고,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무질서를 이용하고, 공동체를 조성하고, 그리고 파괴적인 아이디어들을 실행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과장하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단히 놀라게 만들었다.”10) 이와 함께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에서 유니테리안주의로의 변천이 1805년부터 1819년 사이에 발생하였다. 특히 하바드 대학교의 신학적 변질은 앤도버 신학교가 1807년에 설립되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점차로 정통주의와 기독교 “불(不)신앙”은 이제 전쟁의 반대편에 서서 서로의 지반을 굳혀 가면서 논쟁의 불이 점화되었다.

 

19세기 첫 반세기 동안에,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여파도 상당히 강하였다. 회심을 어떻게 제시하는가? 합법적인 설득의 사용이란 무엇인가? 소위 뜨겁게 은혜를 받은 금좌석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닥치는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찰스 피니(Charles Finney)와 그의 “새로운 수단들”(new measures)에 의해 제시된 문제들이었다. 피니가 개발한 해답들은 나다니엘 테일러(Nathaniel Taylor)가 예일에서 설명하였던 방법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였다.11) 핫지는 현대판 펠라기우스주의에서 회심이란 단순히 인간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간파했기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핫지의 신학의 형태와 방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프린스톤 신학자들도 유니테리안과의 논쟁에 참여하면서, 신학파와 구학파 신학자들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기게 되었다. 핫지도 테일러와 논쟁에 연루되었으며,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사이의 전선도 형성되었다. 미국 내의 이러한 일련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전체적이고도 철저하게 변호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프란시스 패턴과 워필드가 자신들의 작품을 시작할 때에야 절정에 달하였지만, 그 출발은 핫지에게서 시작되었다. 변증학이 주변의 학문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관심사로 부상하여 19세기 인들에게 흥미를 끌었다.”12) 또한 과격한 천년왕국사상과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에 대해 핫지는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13) 이렇게 핫지의 신학생애의 배경은 쓰라린 신학논쟁과 뒤틀린 교회분열의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B. 핫지의 신학적 배경

 

 

   1. 알렉산더와 핫지의 종말론

 

찰스 핫지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는 아픔을 겪었기에, 그에게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학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의 아버지 같은 인물이었다.14) 알렉산더와 맺은 인연과 영향력은 핫지의 생애 전체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그 어느 누구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영향력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였다.15) 핫지는 종말론에 있어서도, 알렉산더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더의 천년왕국 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는 그의 “마지막 날의 영광”(the latter day glory)에 대한 개념이다. “마지막 날의 영광”에 대한 알렉산더의 견해는 주류 후천년설주의자들과는 두 가지 면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1. 교회의 영광스러운 미래의 상태는 전적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2. 알렉산더는 이 축복의 기간을 천년왕국과 동일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 알렉산더는 마지막 날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수단은 바로 첫째도 전도요, 마지막도 전도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또한 알렉산더의 종말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전 세계의 복음으로의 회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을 “마지막 날의 영광”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 마지막 날의 영광을 천년왕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고, 영적으로 규정하였다. 사실상 알렉산더의 종말사상은 “천년왕국이 배제된 후천년설”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17) 프린스톤신학교를 설립한 초대 신학자들은 “천년왕국의 시기”에 대해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했음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프린스톤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그들의 종말론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가능한 한 요한계시록의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18)

 

   2. 튜레틴과 핫지의 종말론

 

알렉산더의 지대한 신학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핫지의 신학은 스코틀랜드 철학과 프랜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의 영향을 받았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앤드류 호펙커(W. Andrew Hoffecker)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찰스 핫지는 아취발트 알렉산더가 시작한 전승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편으로는 합리주의자들과 사변철학자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주의자들과 부흥운동가들에 대한 필연적인 양면공격을 부단하게 감행하였다. 강조점은 약간 달랐지만 본질적인 공격의 양상은 동일한 것이었다. 그의 양면공격을 통해 슐라이레마허의 신학이 훨씬 더 강력한 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핫지와 알렉산더의 부흥운동가들에 대해 보인 입장은 동일한 것이었는데 핫지의 입장이 더 강력했다. 핫지의 글 속에는 스코틀랜드 철학과 터러틴[Turretin]의 신학에 좀 더 의존하고 있다는 공식적인 언급이 알렉산더보다 더 많이 발견된다.19)

 

핫지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요한 인물은 17세기 제네바의 개혁신학자 튜레틴이었다. 튜레틴은 그의 저서 ?변증신학강요?(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를 통하여 칼빈 이후의 정통주의 개혁신학을 집대성하였다.20) 튜레틴의 신학적 공헌은 정교한 신학적 진술들로 개혁신학의 진수를 마무리했다는 데에 있다. 칼빈이 신학적 틀을 제공했다면, 튜레틴은 그것을 토대로 성경적 근거들과 가장 정교하고 완전한 형태의 논리적이고 연역적 방법들을 통하여 개혁신학적 입장을 탁월하게 발전시켰다. 그의 신학적 관심은 성경적이면서도 완전한 형태의 개혁신학을 확립함으로 비정통적인 해석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21) 유스토 곤잘레스(Justo L. Gonzalez)에 의하면, “튜레틴의 ?변증신학강요?야말로 칼빈의 ?기독교강요? 이후 아마도 가장 체계적이고 철저한 개혁신학의 교리적 입장을 훌륭하게 정리한 역저”라고 평가하였다.22)

 

라틴어로 기록된 튜레틴의 저서는 미국 내의 개혁신학을 신봉하는 여러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프린스톤신학교에서도 1872년 핫지의 ?조직신학?이 출판되기까지 초기부터 반세기 이상동안 신학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핫지는 그의 조직신학을 구성하고 확립해 나가는 데에 튜레틴에게 상당히 많이 의존하였고, 어거스틴, 칼빈,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한 원리들을 인용하고 재해석했지만, 그를 비롯한 구프린스톤에 미친 튜레틴의 영향이 매우 지대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23) 그런데 ?변증신학강요?에 반영된 튜레틴의 종말론적인 입장은 “다소 염세적인 무천년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24) 핫지의 입장은 그렇지 않은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와 함께 핫지나 프린스톤 신학을 논함에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개혁주의 고백주의, 종교적 체험, 그리고 성경적 기반주의 중에서, 어느 한 요소도 분리시키지 않은 채, 역동적이며 상호적인 영향을 주면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25) 이러한 영향을 받아 구프린스톤 신학은 핫지를 통해 신학적 골격을 완성하게 되는데, 그 가치와 의미는 상당히 높게 평가되었다.  

 

핫지의 계승자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핫지의 신학과 ?조직신학?을 비롯한 업적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조직신학 저서를 저술하지 않았으며, 그의 신학작업은 스승의 신학을 변호하고, 보완하며, 그리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핫지야말로 프린스톤 신학의 입장을 가장 철저하고도 분명하게 진술하고 설명할 뿐만 아니라 변증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26) 핫지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아담의 원죄의 유전설, 원죄, 무능력과 중생의 교리”에 보다 집중되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27) 핫지는 구원론적 결론이 인간론의 전제에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구속관의 결여는 부당한 죄관이 정정되기 전에는 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뿌리이며 확고한 원리임을 인식하였다.

 

C. 프린스톤신학교와 후천년설

 

프린스톤신학교가 설립되었던 시기에 미국은 전례 없는 문화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다니엘 워커 호웨(Daniel Walker Howe)에 의하면, “빅토리안 시대(the Victorian Age, 1837-1901)는 미국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심한 격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야말로 산업화, 지식의 폭발, 이민과 급격한 인구증가, 도시화, 지리적 확장, 인종간의 관계변화, 그리고 미국 내에서의 무력이 동반된 갈등 등으로 얼룩졌다.”28) 이러한 변화는 교회와 신앙의 양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Ahlstrom)이 지적하듯이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은 “민주적 복음주의의 황금시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29)

 

식민지 시대의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소위 자발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는 교회의 형태가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다양한 자원단체들의 설립에 영향을 미쳤으며, 남북전쟁 이전에 시민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많은 초교파적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이렇게 복음주의적인 종교인들이 미국 내에 자신들의 가치를 알리고 주입시키기 위해 협력하였다.30) 이러한 자발주의적인 정신은 인간 개인에 대한 가치와 자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근거로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의 신장(伸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린스톤신학교 설립자들인 에쉬빌 그린, 사무엘 밀러, 그리고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이러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설립 목표를 갖고 있었다: “문화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알맞은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것과 미국을 휩쓸고 있는 반종교적인 물결을 퇴치하는 것,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기독교를,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학적으로 변호하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데 있었다.”31) 복음주의적인 부흥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교단의식의 결과는 자연스럽게 교단신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대체적으로1808년까지는 목회자 교육은 대학교의 학부과정과 훌륭한 목회자들에 의한 개인지도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린스톤 신학교도 아키발드 알렉산더, 사무엘 밀러, 그리고 찰스 핫지의 세 교수들에 의해 구칼빈주의(Old Calvinism)를 새로운 시대에 적합하게 적용할 수 있는 소위 “구프린스톤 신학”을 표방하며 시작되었다.32)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된 프린스톤 신학은 일관성과 함께 전국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프린스톤의 칼빈주의는 1812년부터 한 세기 이상 상당히 강력하였다.33)

 

19세기 초반 반세기 동안 미국 지성계에서 가장 주요한 논의는 인간성에 대한 주제였다. 칼빈주의와 낙관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신념이 공존하고 있는 복음주의 안에서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은 매우 강렬하였다. 인간의 자연적 능력이 과연 선을 행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1830년대에 신학파 장로교인들을 구학파로부터 분리시키는 주요한 요소였다. 대체적으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칼빈주의적 강조에서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로 입장이 바뀌고 있었다. 부흥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수용능력과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높은 기준, 그리고 미국의 전반적인 여론에 호소력을 발휘했던 개인주의에 대한 교리는 결국 이러한 추세가 자리 잡게 하는 불가피한 요인들이었다.34) 이와 같은 복음주의적인 주도적인 입장에 대해 보수적이고 신앙고백적인 학자들은 “복음주의의 순박성에 대해 비판하였다.”35)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핫지를 비롯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자들과 미국 문화에 부합하고자 하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구학파와 신학파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였다.36) 브루스 쿠클릭(Bruce Kuklick)도 처음에는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예일의 테일러 신학사조에 대항하기 위해 중도적 입장을 유지하다가, 1837년 이후부터는 구학파의 입장을 지지했다고 주장하였다.37) 찰스 핫지를 비롯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개인경건과 회심의 경험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기독교 신학의 이성적이고 교리적인 표현을 중시하였다.”38)

 

그렇기 때문에 찰스 존스(Charles Jones)는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교회의 신학을 고백주의자들과 경건주의자들로 대조시키면서, 핫지의 신학을 단순히 고백주의자로 간주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핫지가 믿음의 객관적인 특성과 이성을 강조했지만, 그의 기독교 신앙에는 경건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39) 기독교 신학의 인지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을 동시에 강조하고, 고백적인 정통신앙과 “삶의 방식”으로서의 신앙을 구분하지 않는 믿음의 통전성(totality)을 중시하였다.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결코 마음과 가슴을 분리하거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영역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특성들은 그들의 설교나 “주일 오후강화”(Sabbath Afternoon lectures), 그리고 다양한 저작물들에서 발견되어진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 놀은 핫지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진정한 종교는… 극단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역사(役事)하신 결과이다… 핫지는 감정주의의 함정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의 객관적인 진리들과 정제된 칼빈주의 전통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였다.”41)

 

핫지와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칼빈주의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중시하였고, 당시의 미국 장로교회에서 공식적인 신앙문서로 채택하였다.4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종말사상의 초점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된 종말론적 목적을 회복시키는 데에 있다고 간주한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여자의 후손”으로 언급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이러한 승리가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론적 현상이 아니라, 결정적인 의미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4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종말론적 입장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가능하면 분열이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고 대체적으로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천년설적 견해를 표방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전천년설을 비판하는 데에 있어서도 상당히 온건하였다.44) 그러나 우리가 숙지해야 할 것은 17세기에는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은 “20세기의 신학용어라고 할 수 있는 무천년설은, 그 전 세기에는 후천년설이라고 알려졌던 견해를 신봉했던 자들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45)

 

 

II. 핫지의 후천년설의 형성배경, 구조 그리고 특성

 

 

A. 핫지의 후천년설의 형성배경

 

찰스 핫지는 후천년설을 신봉했던 탁월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다니엘 휫비(Daniel Whitby, 1638-1726)의 저술에 근거한 후천년설은 상당수의 후기 영국과 미국 청교도들이 선호했으며, 대각성운동이 이후 19세기까지도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신봉했던 종말론적 견해였다. 핫지 뿐만 아니라 당시의 많은 신학자들은 복음의 선포와 효과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이러한 특성은 대각성운동의 주역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46)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 후천년설은 알렉산더, 핫지, 그리고 워필드 등의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당시의 낙관적인 시대적 분위기와도 부합되었다.47) 마지막 사악한 제도라고 여겨졌던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세계선교의 확장에 대한 열기가 강해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개혁 운동들을 목격하면서 기대하던 황금시대가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48) 이러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낙관주의는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품었던 이상(理想)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미국이라는 나라에게 부여하신 신적사명을 통해 이루신다고 하는 확신으로 계승되었다. 핫지를 비롯한 프린스톤의 신학자들도 종말론 형성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대나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배제될 수는 없었다.49) 그러나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것은 핫지의 후천년설의 배후에는 문화적 요소뿐만 아니라, 성경적 근거도 분명히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핫지의 ?조직신학?이라는 저서가 출간되기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의 대표적인 신학저서는 프랜시스 튜레틴이 저술한 ?변증신학강요?였다. 핫지가 프린스톤신학교에는 새로운 신학이 전혀 창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종말론 분야에서는 예외였다.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거의 40여년 동안 신학교재로 사용된 ?변증신학강요?에서는 결코 후천년설을 옹호하지 않고, 무천년설의 입장을 지지하였다.50) 튜레틴이나 핫지는 개혁신학을 신봉하면서도 다른 신학세계와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서로 다른 종말론적 입장을 추구하였다. 결국 핫지는 튜레틴의 종말론적 염세주의로부터 떠나 낙관주의를 선호하였다.

 

이러한 실례를 핫지가 경험했던 링컨의 암살사건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그 일면을 읽을 수 있다. 노예제 폐지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며,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간주되고 있는 아브라함 링컨이 암살 된 직후인 1865년 4월 16일에 프린스톤신학교에서 히브리서 2:10을 본문으로 행한 설교에서 핫지는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소망의 메시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온전케 하심은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온전케 하실 것임을 일깨워준다. 결국 창조, 섭리, 그리고 구속은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연결되어진다.51)

 

이렇게 국가적인 비극을 맞으면서, 핫지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 소망의 낙관적인 메시지를 선포했으며, 이러한 신앙의 배후에는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표방하고 있는 섭리신학을 자신의 시대와 상황에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52) 핫지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서 적지 않은 글들을 남기며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미국의 노예제도나 남북전쟁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문화변혁”의 견지를 확고하게 지지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자연세계와 인류역사 전반에 미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본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다스림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53)

 

또한 핫지의 종말론적 낙관주의는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라는 확신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인간의 지혜가 아닌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십자가의 교리를 선포하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인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54) 그리고 복음은 하나님의 소유(롬 1:16)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그 능력은 세상의 어떤 세력도 장애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복음은 그 자체가 능력이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에” 구원과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55)

 

핫지의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프린스톤 신학 특히 종말론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에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복음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이 종말론과 함께 연결되면서 프린스톤 신학은 역동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선교적 열정과 후천년설적인 낙관주의는 핫지와 함께 동행하였다.”56)

 

 

B. 핫지의 후천년설의 구조

 

 

핫지의 후천년설의 구조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에서 그 윤곽과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고 가시적이며 영광스러운 재림이 있을 것이고,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세 사건들이 선행될 것이다: 1) 복음의 우주적인 선포/확산, 즉 선택된 자들을 끌어 모으는 기독교회의 사명수행; 2) 민족적 차원의 유대인들의 회심; 3) 적그리스도의 도래. 셋째로는 다음의 네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발생할 것이다: 1)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 2) 보편적 심판; 3) 세상의 종말; 4) 그리스도 왕국의 완성.57)

 

   1. 복음의 우주적 선포/확산

 

핫지의 후천년설의 근간이 되는 것은 복음의 능력과 확산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첫 번 째로 일어날 위대한 사건”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호세아 2:23과 이사야 45:22-23을 인용하면서 “진정한 종교인 기독교 복음이 전 세계에 편만해질 것이며, 여호와는  모든 지역에서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으로 인식되고 경배되어 질 것이다. 이와 유사한 성경의 내용들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인용하고 적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58)

 

핫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일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지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가 살던 시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 세계적으로 선포할 수 있는 전성기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복음을 확산시켜가는 유일한 기관은 교회를 통해서라고 주장하였다.59) 이러한 성경적 근거들과 종말론적 전망을 소유한 핫지와 프린스톤신학교는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적 선교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며, 선교학과가 최초로 신학교에 개설되고 졸업생 중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숫자가 점증하였다.60)  

 

  2. 민족적 차원의 유대인들의 회심

 

핫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일어날 두 번 째로 위대한 사건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들의 돌아 옴”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민족적 차원의 회심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는 로마서 11장을 들고 있다. 핫지는 로마서11장 26절을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이 “모든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민족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그들의 위치는 다시 회복되어진다고 믿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 개개인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의 은총이 유대인이라는 민족 전체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61) 그렇다고 해서 핫지의 이와같은 주장이 세대주의자들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이 성지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고, 민족적(racial)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62)

 

   3. 적그리스도의 도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일어날 사건 중의 세번 째는 바로 적그리스도의 도래이다. 당시의 대부분의 개신교도와 마찬가지로, 핫지도 적그리스도로 한 특정 인물을 지목하기 보다는 “교황제”라고 확신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황제도는 비기독교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만 카톨릭 교회는 그야말로 세속적인 권력으로 얼룩진 배교적 교회였다.63) 또한 회심치 않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생길 환란의 주된 원천이 되리라고 간주했다.64)

 

핫지의 종말론적 구조를 정리해 보면, 오순절 이후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시기까지를 천년왕국시대(The Millennial Age)로 명명하였다. 그런데 이 천년왕국시대를 교회시대 혹은 복음의 확산(The Church Age or “Gospel Dispensation”)과 거의 동일시했고, 배교와 환란(The Apostasy &Tribulation) 직후에 그리스도의 재림(The Second Advent)이 임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간단한 도표로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오순절--------------천년왕국시대---------------그리스도의 재림

                     교회시대 혹은                                 배교와 환란

                   복음의 확산

 

교회시대에는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되고 편만해지고,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며, 민족적 차원의 유대인의 회심이 일어날 것이다. 천년왕국시대에는 복음의 능력이 더욱 더 확산되고 전 세계가 복음화 될 것이며, 전 세계인구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재림 전에는 배교한 교회와 세속 권력으로 인하여 환란이 일어남으로 천년왕국시대가 끝이 나고 교회가 극심한 환란을 당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적(敵)그리스도적이고 비(非)기독교적인 세력들이 파괴될 것이다.65) 이러한 종말론적 구조를 통하여, 찰스 핫지는 프린스톤신학의 후천년설적인 견해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복음의 진보, 천년왕국시대, 배교와 환란,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핫지의 이해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선호되었던 후천년설의 기본적인 골격을 제공하였다.

 

 

C. 핫지의 후천년설의 특징들

 

 

   1. 선교적이며 영적인 특성

 

핫지의 종말사상에 나타나는 주요한 특성은 바로 선교적이며 영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특히 교회의 선교적 노력에 의하여 마지막 영광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66) 핫지에 의하면 19세기 초반까지도 복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적 관심이 매우 미흡했었으며 “거의 잊혀진” 주제였다.67) 그런 면에서 핫지의 종말사상을 “선교적 후천년설”로 지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68) 핫지에 의해 후천년설에 근거한 선교적 열기가 19세기에 프린스톤신학교와 미국 장로교회 안에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는 면에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핫지의 주도적인 후원으로 장로교 총회는 1835년에 실천신학 및 선교학 교수직을 미국 내에서는 최초로 프린스톤신학교에 창설하여 임명하였다.69)

 

핫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회가 복음을 만방에 전하는 선교적 과업에 충실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70) 그의 종말론은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선교적 열정을 동반하는 후천년설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 세대의 교회에 의한 선교사역을 통해 거의 모든 이방인들이 회심하는 기독교의 우주적 승리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핫지의 후천년설적 낙관주의는 성경으로부터 귀결된 결과라기 보다는 그의 시대적 상황과 “그의 타고난 낙천적인 기질”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71)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핫지도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을 전 세계의 회심과 연결시켜 이해하였다. 천년왕국적 영광의 시대가 분명히 이 지상에 도래할 것을 확고하게 신봉하고 있었고, 이것을 “교회의 천년왕국적 전성시대”라고 간주하였다.72)

 

핫지에게 천년왕국이란 교회의 선교적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독교로의 세상의 보편적 회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핫지의 천년왕국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은 철저하게 영적인 차원과 용어들로 정의되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에로의 회심, 그리고 세상이 아닌 교회가 그 주된 초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후천년설을 신봉하는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사회개혁과 과학과 문명의 진보에 대한 긍정적인 소망이라든지, 미국의 신적 사명에 대한 확신이 핫지에게서는 분명하게 발견되고 있지 않다.

 

   2. 천년왕국의 비(非) 중심성

 

핫지의 종말사상에서는 천년왕국이 중심적이지 않다. 그가 마지막 영광의 시대와 천년왕국을 연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천년왕국이라는 용어나 개념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조직신학?의 종말론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천년왕국을 다루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용 빈도수도 매우 희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핫지의 종말론의 입장에 있어서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천년왕국”은 주요한 요인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의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종말사상에는 계시록의 중요성이 반영되고 있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다. 물론 20세기 초반에 이르게 되면 세대주의의 영향으로 계시록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증대되었지만 19세기에는 예언서와 계시록에 대한 비중이 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핫지의 후천년설 견해를 형성하는 데에 요한계시록의 비중보다는 종말론에 관하여 보다 명확한 성경의 다른 부분들이 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핫지를 비롯한 초기의 프린스톤 신학자들에게는 성경전체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해석하기에 난해한 예언서를 이해하는 데에 적지 않은 긴장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해석학적 긴장을 해결하는 원리로서 요한계시록을 다른 성경의 내용과 주요한 교리적 체계에 종속시켰음을 알 수 있다.73) 

 

   3. 예언서 해석원리들과의 상관성

 

핫지의 종말사상은 그의 성경해석, 특히 예언서 해석원리들과 상관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유기적이고 완전하게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전제하였고, 이러한 성경관은 그의 신학과 해석학에 지속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그런데 튜레틴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핫지를 비롯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성경의 예언서들과 계시록을 해석하는 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예언을 해석하는 과정에는 신학적 특성과 문화적 배경이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침을 부인할 수 없다. 튜레틴과 핫지도 성경의 영감에 대한 입장이 같으면서도, 종말론에 대해서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배후에는 그들의 다양한 상황, 개인적인 기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을 배제할 수 없다.74) 그런 면에서 핫지의 예언서를 해석하는 원리들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핫지에 의하면, 예언서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제공하기 보다는, 역사가 과거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75) 그에게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의 가치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믿음을 보존케 하는 능력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핫지는 예언서가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모호성 때문에, 그 신학적 우선성을 성경의 나머지 부분보다 낮게 간주하였고, 성취되기까지 예언서는 특성상 명확하게 해석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6)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핫지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다섯 가지의 원리들을 적용하였다.77)

 

그 첫째 원리는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이미 성취된 예언의 방식과 조화를 이루며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문자적이 아닌 영적으로 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핫지에게 요한계시록을 포함하여 성취되지 않은 예언을 해석하는 데에 모델이 된 것은 바로 성취된 구약예언에 대한 신약의 영적해석이었다.

 

예언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둘째 원리는 모든 시대를 염두에 둔 예언서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핫지는 예언서의 주된 의도는 역사적 사건에 적용시키거나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예견하는 것이 아닌,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을 유지하고 소망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세 번 째 원리는 예언적인 상징들은 단지 하나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상징들을 임의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네 번째 원리는 아직 성취되지 예언에는 성경의 다른 부분과 동일한 해석상의 우선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교리적 입장이 예언서들을 해석하는 조절적 기능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핫지의 견해이다.78) 이러한 원리는 성경 전체의 지속성과 명료성을 고려해 볼 때, 성경의 교리적 입장이 예언서를 이해하는 데에  일종의 해석적 틀이 될 뿐만 아니라, 우선순위를 점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언서를 해석하는 다섯 번째 원리는 문자적이든 비유적이든 지속적이며 고정된 해석학적 입장에 따라 이루어져 한다는 것이다. 핫지에게 있어서 예언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해석학적 우선순위라는 개념”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낙관적인 그의 견해가 예언서를 해석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79) 

 

 

III. 핫지의 후천년설에 대한 재고찰

 

 

A. 프린스톤의 구학파 신학, 요한계시록, 그리고 후천년설

 

프린스톤신학교가 지향했던 구학파 신학의 특성들이 핫지의 종말사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즉, 문화와 문화의 업적에 대한 다소 비관적인 평가, 교회와 국가의 분리개념에 대한 확고한 입장,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도덕적 활동보다는 바른 교리에 대한 우월적 강조 등이 핫지를 비롯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종말론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사회개혁이나 문화변혁을 통한 천년왕국 건설이라는 과제에는 소극적이었고, 대신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 전천년설의 견해에 대응하면서, 자신들의 후천년설적 견해를 이렇게 마지막 날의 영광을 선교와 연결시키며, 자신들의 교리적 입장에 충실하면서도 당시 시대적 상황과 적절하게 조우시켜 나갔다.80) 19세기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후천년설은 당시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종말신앙을 견지하면서도 자신들의 보수적인 교리적 입장과도 배치되지 않는 차원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 적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핫지가 튜레틴의 정통주의 개혁신학으로부터 벗어난 배후에는 그가 기독교 교리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면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81)

 

후천년설은 교회를 통해 기독교가 세상을 다스리는 다가 올 영광스러운 시기를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되어 있는 천년왕국으로 간주하는 소망과 확신을 매우 중요시 한다. 그런데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후천년설 견해를 고찰해 보면 요한계시록이나 천년왕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주목된다.82) 아키발드 알렉산더도 후천년설을 신봉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마지막 영광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을 확신했지만, 그 기간을 “천년왕국”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 그의 천년왕국에 대한 불가지론은 해석하기에 매우 난해하다고 간주했던 요한계시록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알렉산더는 계시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 

 

수많은 탁월한 학자들이 요한계시록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해석해 왔지만, 주석상에는 폭넓은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교리를 형성하는 데에 특정적인 한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밖에 없다.83)

 

핫지도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승리의 시대가 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천년왕국으로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조직신학? 저서에서 종말론을 논의하는 데에 요한계시록은 부차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천년왕국”이라는 용어도 최소한도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종말론을 논하는 데에 요한계시록을 상대적으로 낮게 인용하고 있는 배후에는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전천년설주의자들의 과도한 관심과는 매우 대조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핫지도 전천년주의자들의 성경의 예언서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천년설주의자들이 예언서들을 경시하는 풍조에 대해서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8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핫지를 비롯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성경전체에 대한 정경적 위치와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예언서와 묵시록적 기록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85) 이러한 결과, 종말론에 있어서 계시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인이 1865년 이후에 미국에서 후천년설이 퇴조하는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존재한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종말론에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시키지 않은 프린스톤 신학자들과 전천년설을 신봉하는 자들의 해석학 사이에 갈등을 야기 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지는 않았는지를 규명할 필요성이 대두된다.86) 제임스 무어헤드(James Moorhead)는 후천년설이야말로 점진적인 진보라는 개념과 묵시적인 요소가 불완전하게 결합된 견해이며 결국은 신학적인 보수나 진보 진영으로부터 경원시 되었다고 주장한다.87) 이러한 배후에는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게 되면 후천년설은 상당히 약화되는 반면에 전천년설, 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확고하게 부상하게 되었다. 진화론을 비롯한 현대사조의 거센 도전 속에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과 세대주의 자들 간에는 일종의 “편의상 결혼관계”(marriage de convenance)가 성립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88)

 

전천년설주의자들은 후천년설주의자들보다 요한계시록을 보다 중요하게 인식하고, 그들의 종말론에 연결시키면서 영향력을 확장시켜 나갔는데, 이러한 특성은 당시에 불어 닥쳤던 고등성경비판을 주장하는 현대주의자들과의 논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복음주의자들의 입장과 부합되면서 적지 않은 호응을 얻게 되었다.89)

 

B. 핫지 이후: 프린스톤의 후천년설에서 웨스트민스터의 무천년설로

 

후천년설은 신대륙에 청교도들이 이주할 때부터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시기까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종말론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미국교회의 종말론적 성향은 여러 가지 면에서 격변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종말론적 입장을 고찰해 보면 이러한 변화의 단면도를 반영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29년 프린스톤 신학교의 재개편에 항의하여 그레스엠 메이첸(J. Gresham Machen, 1881-1937)을 비롯한 여러 명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필라델피아에 구프린스톤의 신학적 입장을 계승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초기 웨스트민스터 교수진들의 종말론을 일괄해 보면, 메이첸과 구약학 교수였던 로버트 윌슨(Robert Dick Wilson, 1856-1930)은 강력한 후천년설 신봉자들이었고, 조직신학자였던 존 머레이(John Murray)도 적어도 그의 생애 후반에는 후천년설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90) 칼 맥킨타이어(Carl MacIntire)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신봉하고 있었으며, 오스왈드 엘리스(Oswald T. Allis, 1880-1973)와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은 무천년설의 입장을 따르고 있었다. 1930년과 1937년에 윌슨과 메이첸이 세상을 떠나고, 1939년에는 맥킨타이어가 성경장로교단(Bible Presbyterian Church)을 세워 결별함으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종말론적 입장은 무천년설이 우세한 입장으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미국 복음주의 내의 후천년설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입지가 약화되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여파와 후천년설과 사회복음과의 연관성도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91) 

 

구프린스톤 신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세워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및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는 “종말론적 자유”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은 철저한 개혁주의적 입장과는 양립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다. 그런 면에서 웨스트민스터의 종말론적 입장을 무천년설로만 국한 할 수는 없지만, 튜레틴의 개혁신학적 전통으로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핫지의 후천년설은 19세기의 시대적 상황에 적합하게 적응된 종말론적 견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전술한 바와 같이, 후천년설을 신봉하는 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후천년설을 따르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회개혁적이고 국가적 신앙을 토대로 한 특성보다는, 상당히 영적이고 전도와 선교에 역점을 두는 특징이 핫지에게서 발견되었다. 핫지는 프렌시스 튜레틴의 지대한 신학적 영향을 받으면서도 종말론에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확립하였다. 그의 종말론 형성에는 성경해석학의 원리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시대적 상황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임을 알 수 있다.92)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도 교회의 전(全) 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해 왔지만, 구체적인 특징들은 시대적 여건과 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의 예언서들에 대한 해석학적 원리들에 의해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또한 핫지의 종말론을 재고찰하면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전천년설,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로 구분하여 종말론을 이해하고 논의하는 것이 과연 미래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도출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이와 함께 “천년왕국”이라는 종말론적 잣대가 역사적 상황과 밀접과 관련되면서 다양하게 표출될 뿐만 아니라, 나뉘어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를 자문해보면서, 좀 더 성경적이고 포괄적인 종말론적 교리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함을 절감하게 된다.

 

 

 

 

 


1) John W. Stewart, "Introducing Charles Hodge to Postmoderns," in Charles Hodge Revisited: A Critical Appraisal of His Life and Work, eds. John W. Stewart and James H. Moorhead (Grand Rapids: Eerdmans, 2002), 11-12, 36-39; Mark A. Noll,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Grand Rapids: Eerdmans, 1992), 235-236; Daniel G. Reid, ed., Dictionary of Christianity in America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90), 538.

2) Sydney A.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2), 463.

3) 데이빗 F. 웰스, “찰스 핫지,” 데이빗 F. 웰스, ed., ?프린스톤 신학? 박용규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2), 69-70.

4) Ernest R. Sandeen, “Toward a Historical Interpretation of the Origins of Fundamentalism,” Church History 36 (March, 1967): 67; idem, The Roots of Fundamentalism: British and American Millennialism 1800-193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5) Joe L. Coker, “Exploring the Roots of the Dispensationalist/Princetonian ‘Alliance’: Charles Hodge and John Nelson Darby on Eschatology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Fides et Historia 30:1 (Winter/Spring 1998): 41-56; D. G. Hart, “A Reconsideration of Biblical Inerrancy and the Princeton Theology’s Alliance with Fundamentalism,” Christian Scholar’s Review 20:4 (1991): 364; Paul Kemeny, “Princeton and the Premillennialsts: The Roots of the marriage de convenance,” American Presbyterians 71:1 (Spring 1993): 19.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세대주의에 대한 자세는 “관용적인 불만족” (tolerant dissatisfaction)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6) 구프린스톤 신학과 한국장로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박응규, “구프린스톤 신학과 한국장로교회,” ?ACTS 신학과 선교? 8 (2004): 185-204.

7) 찰스 핫지의 삶과 사상에 대한 개관은 다음을 참고하라. Mark A. Noll, ed., Charles Hodge: The Way of Life (New York: Paulist Press, 1987), 1-44. Cf.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in Studies in Reformed Theology and History 3:1 (Winter 1995): 1-114.

8) Mark A. Noll, ed., Charles Hodge: The Way of Life, 1-17.

9) 데이빗 F. 웰스, “찰스 핫지,” 71-72. Cf.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1-14.

10) 데이빗 F. 웰스, “찰스 핫지,” 74.

 


 

11) Cf. Douglas A. Sweeney, Nathaniel Taylor, New Haven Theology, and the Legacy of Jonathan Edward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12) 데이빗 F. 웰스, “찰스 핫지,” 79.

13)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in Servant Gladly: Essays in Honor of John W. Beardslee III, edited by Jack D. Klunder (Grand Rapids: Eerdman, 1988), 111.

14) David B. Calhoun, Princeton Seminary: Faith &Learning, 1812-1868, Vol. 1 (Carlisle: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4), 105; W. Andrew Hoffecker, ?프린스톤신학사상?, 홍치모 역 (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1), 92-93.

15) A. A. Hodge, The Life of Charles Hodg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880), 18, 47. Hodge always affirmed that he was “moulded more by the character and instructions of Dr. Achibald Alexander, than by all other external influences combined.”

16)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The Neglect of the Apocalypse,” (M. A. thesis,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1986), 25.

17)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29, 37. He has in effect a “nonmillennial” form of Postmillennialism. “He is in effect, a postmillennialist without a millennium.”

18)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36.

19) W. Andrew Hoffecker, ?프린스톤신학사상?, 141.

20) Elenctics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 for that which exposes error. Elenctic theology is thus polemic theology, since it is devoted to refutation of errors. 

 

 

21) R. J. VanderMolen, “Turretin, Francis.”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ed. Walter A. Elwell (Grand Rapids: Baker, 1984), 1116.

22) 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ume III: From the Protestant Reformation to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Abingdon, 1975), 251.

23) Mark A. Noll, The Princeton Theology, 29-30.

24)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04.

25) Mark A. Noll, The Princeton Theology, 36-38.

26) Stanley W. Bamberg, “Our Image of Warfield Must Go,” Journal of the Evangelical Society 34: 2 (June 1991): 237.

27) Earl William Kennedy, “An Historical Analysis of Charles Hodge’s Doctrines of Sin and Particular Grace” (Ph. D. diss.,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968), 17.

28) Daniel Walker Howe, “Victorian Culture in America,” in Victorian America, ed. Howe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76), 3.

29) Sydney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385.

30) See Charles I. Foster, An Errand of Mercy: The Evangelical United Front, 1790-1837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60); Timothy L. Smith,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in Mid-Nineteenth-Century America (Nashville: Abingdon, 1957).

 

 

31) 마크 놀, “프린스톤 신학,” 데이빗 F. 웰스, ed., ?프린스톤 신학?, 50.

32) E. Brooks Holifield, "Hodge, the Seminary, and the American Theological Context," in Charles Hodge Revisited, 103-128; John Oliver Nelson, “The Rise of the Princeton Theology: A Genetic Study of American Presbyterianism until 1850” (Ph. D. diss., Yale University, 1935), 235-236.

33) 1912년 개교 100주년에 신학교는 미국의 어떤 신학교보다도 많은 10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프린스톤에서 교수를 시작하고부터 워필드가 죽을 때까지 6,386명의 학생이 프린스톤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들 중에 몇 사람은 유명한 신학자, 교육가, 그리고 목회자들이 되었다. 1912년까지의 졸업생들 중에는 56명의 장로교 총회장이 포함되었고 5명의 개신교 감독교회 감독이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회에 프린스톤 출신의 목회자들이 진출하면서 강력한 미국 칼빈주의를 표현하여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마크 놀, “프린스톤 신학,” 50, 60.

34) George M. Marsden, The Evangelical Mind and the New School Presbyterian Experience: A Case Study of Thought and Theory in Nineteenth-Century Americ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0), 235.

35) Walter Conser, Church and Confession: Conservative Theologians in Germany, England, and America 1815-1866 (Macon: Mercer Press, 1984), 10.

36) A. A. Hodge, Life of Charles Hodge, 308-309.

37) Bruce Kuklick, Churchmen and Philosophers From Jonathan Edwards to John Dewe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5), 78-79.

38) Charles A. Jones, “Charles Hodge, The Keeper of Orthodoxy,” 31.

39) Charles A. Jones, “Charles Hodge, The Keeper of Orthodoxy,” 12.

40) Mark A. Noll, "Charles Hodge as an Expositor of the Spiritual Life," in Charles Hodge Revisited, 181-216; John W. Stewart, “The Tethered Theology: Biblical Criticism, Common Sense Philosophy, and the Princeton Tradition, 1812-1860,” (Ph. D. diss., University of Michigan, 1990), 157-158.

 

 

41) Mark A. Noll, ed., Charles Hodge: The Way of Life, 41.

42) John H. Leith, Assembly at Westminster: Reformed Theology in the Making (Richmond: John Knox Press, 1973), 65-74; D. B. Calhoun, “Old Princeton Seminary and the Westminster Standards,” The Westminster Confession into the 21st Century, Vol. Two, ed. Ligon Duncan (Geanies House: Mentor, 2004), 33-61.

43) Derek Thomas, “The Eschatology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and Assembly,”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into the 21st Century, Vol. Two, 308-309.

44) Derek Thomas, “The Eschatology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and Assembly,” 378-379.

45) Richard B. Gaffin, “Theonomy and Eschatology: Reflections on Postmillennialism,” in Theonomy: A Reformed Critique, eds. William S. Barker &W. Robert Godfrey (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90), 197-224. “A-millennialism, a twentieth century term, was upheld by many in previous centuries, but would have been known as postmillennialism.”

46) Iain Murray, Jonathan Edwards: A New Biography (Carlisle, Pennsylvania: Banner of Truth Trust, 1987), 297-298; Robert G. Clouse,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77), 11.

47) James Moorhead, “The Erosion of Post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65-1925,” Church History 53 (March 1984): 61-77. 종말론 형성에 있어서, 성경해석학과 시대적 상황의 연관성에 대해서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Stanley N. Gundry, “Hermeneutics or Zeitgeist as the Determining Factor in the History of Eschatologies?”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20 (March 1977): 45-55.

48)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11, 49.

49) Dennis M. Swanson, “Theonomic Postmillennialism: A Continuation of the Princeton Tradition?”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ies Papers (1994): 9.

50)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09.

 

 

51) David Whitford, “Painting a New Portrait: Charles Hodge and Abraham Lincoln,” The Princeton Seminary Bulletin 22:1 (2001): 91-93.

52) Mark A. Noll, America’s God: From Jonathan Edwards to Abraham Lincol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433-434; idem, The Civil War as a Theological Crisis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6), 82-83.

53) 핫지의 노예제와 남북전쟁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67-110. Cf. William S. Barker, "The Social Views of Charles Hodge (1797-1878): A Study in Nineteenth-Century Calvinism and Conservatism," Presbyterion 1 (Spring 1975): 1-22; Richard J. Cowardine, "The Politics of Charles Hodge," in Charles Hodge Revisited, 247-297; Allen C. Guelzo, "Charles Hodge's Antislavery Movement," in Charles Hodge Revisited, 299-325; George M. Marsden, “Reformed and American,” in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A History of Its Modern Development, ed. David F. Wells (Grand Rapids: Eerdmans, 1985), 1-12.

54) Charles Hodge,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 1953), 17.

55) Charles Hodge,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Eerdman, 1950), 28.

56)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10. “Missionary enthusiasm and postmillennial optimism go hand in with Hodge.”

57)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3 (Grand Rapids: Eerdmans, 1995), 792.

58)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0.

59)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4-805.

60)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10.

 


 

61) Hodge,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374.

62)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8. “For Hodge, national was understood to be racial.” Dennis M. Swanson, “Theonomic Postmillennialism: A Continuation of the Princeton Tradition?” 17.

63)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28.

64)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36.

65) Dennis M. Swanson, “Theonomic Postmillennialism: A Continuation of the Princeton Tradition?” 19.

66) Hodge, Systematic Theology, 3:856; A. A. Hodge, Outlines of Theology, Rev. ed. (New York: Carter, 1878), 568. 후천년설과 선교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저서를 참고하라: J. A. de Jong, As the Waters Cover the Sea: Millennial Expectation in the Rise of Anglo-American Missions, 1640-1810 (Kampen: J. H. Kok, 1970).

67)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4.

68) Earl William Kennedy, “A Historical Analysis of Charles Hodge’s Doctrines of Sin and Particular Grace,” 2, 258-264, 343-344; Joe L. Coker, “The Dispensationalist/Princetonian ‘Alliance,’” 44-45.

69) David B. Calhoun, Princeton Seminary: Faith &Learning, 1812-1868, 141-148, 205-207, 436.

70)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67.

 

 

71) Earl W.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13; idem, “An Historical Analysis of Charles Hodge’s Doctrines of Sin and Particular Grace,” 259-260. Cf. James Perry Martin, “The Place of the Last Judgment in Protestant Theology from Orthodoxy to Ritschl,” (Th. D, thesis,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958). 

72) Charles Hodge, “The Second Advent,” in A. A. Hodge, Outlines of Theology, 450. 핫지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천년왕국”(millennium)이라는 용어를 하나님 나라와 전천년설적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시켜 두 번만 사용하고 있다.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58-859, 861-868.

73)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66.

74)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minism to Optimism,” 115. 핫지의 성경해석원리에 대해서 다음을 참조하라. Hodge, Systematic Theology 1: 187-188; David H. Kelsey, "Charles Hodge as Interpreter of Scripture," in Charles Hodge Revisited, 217-245.

75) Hodge, Systematic Theology 3: 790.

76)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54-55.

77) 이 원리들은 찰스 핫지가  J. B. Ramsey의 Spiritual Kingdom에  쓴 서문과 Systematic Theology 3: 790-791에서 발견할 수 있다.

78) 찰스 핫지, “서문,” in Ramsey, Spiritual Kingdom, xxix; Joe L. Coker, “The Dispensationalist/ Princetonian ‘Alliance,’” 48.

79)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60; Joe L. Coker, “The Dispensationalist/Princetonian ‘Alliance,’” 52-53.

80)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70-71;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136;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2-3.

 

 

81) Kennedy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Hodge’s apparent ignorance of his significant departures from the older Reformed orthodoxy as represented by Turretin suggests that Hodge had a ‘tin ear’ with regard to historical development.”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116.

82) James Moorhead, “The Erosion of Post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65-1925,” 62.

83) Biblical Repertory and Princeton Review 19 (January 1847): 120.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73에서 재인용.

84)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74-75. 핫지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종말론을 언급하면서 예언서들과 시편, 복음서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귀절들, 그리고 로마서 11장들을 비롯한 성경귀절들을 인용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 대한 언급은 매우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0-807, 855-859.

85) James H. Moorhead, World without End: Mainstream American Protestant Visions of the Last Things, 1880-1925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22.

86)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76. 20세기 초에 이르면 후천년설은 현저하게 그 영향력이 약화된다. 이러한 퇴조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James H. Moorehead, “Erosion of Post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65-1925,” 61-77; idem, “Between Progress and the Apocalypse: A Reassessment of 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00-1880,” Journal of American History 71 (December 1984): 22-35; Jean Quandt, “Religion and Social Thought: The Secularization of Postmillennialism,” American Quarterly 25 (May 1973): 390-409; William R. Hutchison, The Modernist Impulse in American Protestantis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99-100;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141-195.

87) James H. Moorhead, “Erosion of Post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65-1925,” 62.

88) Paul Kemeny, “Princeton and the Premillennialsts: The Roots of the marriage de convenance,” 17-30. 마스덴은 이렇게 파국으로 끝난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1937년의 정통장로교회와 성경장로교회의 분열을 지목하였다. George M. Marsden, “Perspectives on the Division of 1937,” in Pressing Toward the Mark: Essays Commemorating Fifty Years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eds. Charles G. Dennison and Richard C. Gamble (Philadephia: Committee for the  Historian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1986), 295-328

89) Timothy P. Weber, Living in the Shadow of the Second Coming: American Premillennialism, 1875-1982 (Grand Rapids: Zondervan, 1983).

90) John M. Frame, “Machen’s Warrior Children,” in Alister E. McGrath &Evangelical Theology, ed. Sung Wook Chung (Cumbria, UK: Paternoster, 2003), 113-117.

 

 

91) Dennis M. Swanson, “Theonomic Postmillennialism: A Continuation of the Princeton Tradition?” 21-22, 25. 후천년설은 현재 신정주의자들 (Theonomists)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스완슨의 논문 pp. 23-33을 참조하라.

92)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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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지인이 직접 촬영하여 보내어 온 작품입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마음을 열어주는 풍경"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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