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위기와 그 해결책/손봉호 교수
기독론 2012. 12. 5. 02:531. 타락한 한국교회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 교회보다 더 타락한 교회는 없었을 것 같다. 교회사 학자 몇 분에게 물어봐도 그런 예를 제시하지 못했다.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성적 스캔들을 일으키고, 수억을 횡령하여 감옥에 들어가고,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자식에게 세습하는 예가 빈번하다.
어떤 교단의 총회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기관이 억대의 돈이 오고가는 선거로 회장을 뽑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어떤 교단 총회에는 조폭이 동원되고 가스총이 등장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 개신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묵인하는 교회와 총회들이 이렇게 많은 나라도 한국 외에는 없다.
어느 다른 나라에서도 교인들 목회자의 세습을 절대다수로 찬동한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적 수준보다 낮은 나라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해 1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개신교인들을 포함한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조사할 결과 17.6%만이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개신교인이 인구의 약 19%를 차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개신교인들 가운데도 개신교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2009년 18.4%보다 떨어졌을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41.4%, 불교 33.5%에 비해서도 월등하게 낮다.
한 NGO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신을 받는 집단이 정치인들이고 두 번째로 불신을 받는 사람들이 종교인으로 드러났는데, 그 종교인들 가운데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장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1+1=2란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다. 따라서 누가 그것을 주장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기꾼이 1+1=라 주장한다 하여 그 사실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1=3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보통의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계시의 종교는 마치 1+1=3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3위 1체, 예수님의 양성, 부활, 동정녀 탄생 같은 것은 모두 1+1=3이란 것과 같이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2세기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말이 안되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 absurdum)라는 우명한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계시의 종교를 전파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거짓말을 잘하고 이기적이라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충선된 증인”, 즉 “믿을 만한” (pistos) 중인인지가 중요하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들이었으며 모든 신자들도 믿을만한 증인이 되어야 복음을 올바로 증거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얻지 못하는 교회와 교인은 계시에 근거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한국 교회가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나 6.25 전쟁 때 공산군의 핍박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심각한 위기를 맞은 것이다.
과거의 위기는 외부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교회와 신앙을 정화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가 맞고 있는 위기는 교회 내부에서 부패로 인한 것이고 성경적인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기 때문에 회복을 매우 어렵게 하는 성질의 것이다.
교회의 타락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을 때는 주위 이방민족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다. 주위 이방 나라들과 다른 방법으로 타락하는 경우는 결코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
구교가 타락했을 때는 성경의 가르침과 도덕적 원칙을 어겨가며 그 때 세상이 섬기던 우상, 즉 돈과 권력을 추구했다. 한국 교회가 타락하는 것도 한국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세상이 은을 섬길 때 타락한 교회는 금을 섬기는 경우는 없다.
우상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바울이 분명히 가르친다 (고전 8:4).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거나 하나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인 줄 알고 믿는 것이 우상숭배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도 자신들이 섬기는 것이 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나 교인도 자신이 우상을 섬긴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은 믿을만한 것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상인줄 알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한국 교회 대부분은 “우리 교회”란 우상을 섬긴다. 개교회주의가 정도를 넘어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광에 해가 되더라도 “우리 교회” 성장이나 명예에 이익이 되면 감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높이는 것이라도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다른 교회 교인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은 누가 봐도 비신사적이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양 훔치기” (sheep snatching)나 대형버스가 온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교인 실어 나르는 것을 보고 “교회 장사” 한다고 비웃는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렇게 더럽혀지고 교회 전체의 사역이 큰 방해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자행된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교회의 명예보다 “우리 교회”의 성장과 영광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하나님 사랑이 교회 사랑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수억 원의 돈을 부정하게 쓰면서 총회장이 되거나 기독교 단체의 대표가 되는 것,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비난과 냉소는 정당하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나 교회를 오해해서 그것을 비판한다고 주장한다. 궤변 중에 궤변이다. 하나님 영광과 전체 교회의 명예와 신임도에 큰 해가 되는 것이 자명한데도 그것을 감행하는 것은 명예와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파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인데도 자신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세씁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것이 우상숭배고, 그것은 신사참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우상숭배다. 신사참배는 외부 세력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천황을 신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아무 압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직을 매매하며 세습을 감행하는 것은 자발적인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우리 교회 우상”이나 성직매매, 세습 등의 배후에 작용하는 것은 “탐심의 우상”이다. 바울사도는 엡5:5와 골 3:5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 했고 주님도 마6:24에서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한국 교회가 섬기는 우상은 대부분 한국 사회가 섬기는 돈, 명예, 권력의 우상과 같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울처럼 세상적인 이익이나 특권을 배설물로 치부한다면 탐심의 우상숭배가 생겨날 수가 없다.
2. 차세중심적 한국적 세계관
돈, 권력, 명예는 오늘날 전 세계,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열심히 추구한다. 그것들은 공유가 불가능한 (zero-sum) 가치들이다. 즉 한 사람이 많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면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경쟁심이 가장 강한 것과 돈, 권력, 명예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한국인의 이 엄청난 경쟁심 덕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불과 60년 만에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성취하지 못한 두 가지를 거뜬히 이룩했다.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했고 민주화를 이룩했다. 2009년에는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의 회원이 됨으로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60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Korean Dream을 쫓아 한국에 찾아왔다. 과학기술 수준도 세계에서 7위 정도를 유지하고, 교육수준은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문화적으로도 한류가 전 세계에 휩쓸고 싸이가 세계 방방곡곡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매우 불행하다. 영국의 레가툼연구소 (Legatum Institute)가 발표한 2011년도 번영지수 (Prosperity Index)에 의하면 한국의 생활만족도 (Average Life Satisfaction)은 세계 110개국 가운데 104번째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28.4명으로 OECD 국가들에서 1위이며, 2위인 헝가리의 19.4명과의 차이가 9명이나 된다는 객관적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의 노인들의 경우 10만 명당 81.4명이 자살해서 일본의 일본 17.9명, 미국의 14.1명의 거의 5배나 된다. 경제가 아무리 좋아지고 과학기술과 문화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민이 불행하면 그 모든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불행한가? 그것은 도덕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경쟁이 아무리 치열해도 그 경쟁이 공정하게만 이뤄지면 억울한 사람이 생겨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국에는 경쟁심은 유난히 강한데도 도덕적 수준은 너무 낮아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질투가 생기고 억울한 사람이 많아지면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국제투명성기구는 2011년 한국의 투명성이 세계에서 43위로 아프리카의 보츠와나 32위보다 11이나 뒤떨어진다 했다.
김승규 전 법무부 장관의 조사에 의하면 지난 2000년 한국에서 위증으로 기소된 사람의 수는 일본의 671배이며, 무고로 기소된 사람은 무려 4151배나 된다 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선진국이나 윤리에 있어서는 후진국이 아니라 야만국에 가깝다. 일본에는 기독교인이 가톨릭을 포함해서 전 인구의 1%정도인데 한국에는 천주교인을 포함하면 27%나 된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이렇게 불투명하고 불공정하다.
이렇게 경쟁심이 강하고 도덕적 수준이 낮은 것은 한국의 세계관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간 사회는 이런 저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대부분의 경우 그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종교에 의하여 형성된다.
한국의 세계관은 주로 무속종교와 유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지배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던 것은 불교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에 끼친 불교의 영향은 그렇게 큰 것 같지 않다.
세계문화 분류에서 한국은 불교 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유교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교가 가장 최근까지 근 500년을 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가장 크게 남아 있는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가장 최근의 지배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이 유일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무속신앙의 세계관과 비슷한 요소가 많기 때문에 유교의 영향이 큰 것이 아닌가 한다.
무속신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권을 이룩할 만큼 세계적인 종교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고 유교나 불교 수준의 고등종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속적 문화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문화의 저변에 흐르면서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무속종교란 주장이 일반적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 한국에 들어 온 모든 고등종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무속화한 것만 보아도 그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불교 사찰에는 거의 빠짐없이 무속 신앙과 관계있는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고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은 무속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유교와 무속종교의 공통점은 둘 다 절대 신이나 내세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속종교도 귀신을 인정하나 무당에 의하여 쫓겨나가거나 복을 가져다 줄 정도일 뿐 자체의 독립적인 의지와 전능한 능력을 가진 절대 신이 아니다.
무교는 적극적인 인간중심의 축복기원이 그 핵심이다. 무병장수 (無病長壽), 부귀영화 (富貴榮華), 무사태평 (無事泰平)이 그 이상이다. 그런 축복은 선한 삶, 부지런한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귀신들의 자의적인 호의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으로 우연한 운수의 결과로 본다.
유교도 신이나 내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공자의 제자 계로 (季路)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공자는 “나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죽음에 대한 질문에는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느냐 하고 대답함으로 내세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한국 무교와 유교는 절대 신이나 내세를 부인하는 철저한 인간중심적, 차세중심적인 (diesseitig) 세계관을 형성해 놓았다. 이런 세계관은 다양한 형태의 한국적 특성을 생산해 놓았다. 그 가운데는 물론 긍정적인 것들이 없지 않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 결과 경의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삶의 모든 가치와 목적은 이 세상에서 이룩해야 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다른 나라보다 더 경쟁심이 강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풍토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차세중심적 세계관이 없었다면 한국은 오늘날의 것과 같은 경제적 발전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그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매우 뒤떨어진 윤리문화다. 경제, 예술, 과학기술, 스포츠 등 경쟁적인 추구의 대상이 되는 분야는 매우 빨리 발전하고 성공했으나 비경쟁적인 분야는 매우 뒤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윤리다.
윤리는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부당하게 이익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가능한 것이다. 더 윤리적이 되기 위하여 경쟁하는 사람은 없고, 도덕성에서 1등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없다.
도덕적이 되면 경제나 정치 등 다른 분야에서 오히려 1등을 놓치는 결과를 가져오기가 쉽다. “정직하면 잘못 산다”는 생각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는 ‘신과 내세가 존재해야 건강한 윤리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논리는 복잡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는 실제로 모든 선행이 다 보상을 받고 모든 악이 다 철저하게 보응을 받지 못하므로 완벽한 정의가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이 세상이 전부라면 구태여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할 유혹을 강하게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세가 있다고 믿으면 이 세상에서 미완된 인과보응이 거기서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의가 실현되려면 인과보응을 집행하는 전능한 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세도, 신도 믿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악을 행할 유혹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인격적 신이나 인과보응을 주제하는 우주의 법칙 같은 것을 무시하면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감시자(police within)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을 쉽게 속일 수 있다. 한국의 윤리적 수준이 낮고 특히 정직에 뛰어나지 못한 것은 이런 차세중심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세계관에서 성취해야 할 삶의 의미는 효경이 말하는 입신양명 (立身揚名)이다. 출세해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다. 유명해지는 길은 시대마다 달랐다. 시대에 따라 좋은 가문, 높은 학식, 높은 벼슬자리, 돈 등이 이름을 날리는 수단이었다.
오늘날에는 돈, 권력, 명예가 한국인의 우상이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돈이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다. 차세중심적 세계관이 한국 사회로 하여금 돈의 우상을 섬기게 하고 도덕적 수준을 낮게 한다.
역사상 어느 다른 시대에도 오늘에 만큼 돈이 모든 가치를 주도하고 모든 가치의 표준으로 등극하지는 않았다. 돈은 오늘날 생물학적 생존을 보장해주고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를 넘어 정치적 권력, 사회적 명예, 학문적 성취, 예술적 창조, 운동경기의 승리, 심지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 까지 도와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가문, 명예, 존경, 사랑, 인기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돈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졌다.
돈은 흔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라 하지만, 앞으로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한다고 믿기 때문에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돈 그 자체를 얻는 것이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돈은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거뜬히 등극했다. 오늘날의 돈만큼 전 세계가 숭배하고 믿는 우상은 역사상 존재해 본 일이 없다.
특히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돈을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8년 4월 8일 일본청소년연구소가 한국, 일본, 미국, 중국의 고교생 1000-1500명씩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한 결과 한국학생의 50.4%는 “부자가 되는 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응답했고, 일본 학생은 33%, 중국 학생은 27%, 미국 학생은 22.1%가 그렇게 응답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선 어떤 수단을 써도 괜찮다”는 것에도 한국 학생23.3%가 동의해서 미국 21.2%, 일본 13.4%, 중국 5.6%보다 높았다.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다”는 것에도 한국 학생은 54.3%나 동의했는데, 미국, 일본, 중국은 30%대였다 한다.
한국인이 삶에 불만이 많은 것도 돈을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돈은 공유불가능(zero-sum)한 하급가치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그렇지 않아도 경쟁심이 유달리 강한 한국인을 더 경쟁적이 되게 하고 질투와 갈등을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다.
사랑, 지혜, 지식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다른 사람이 그 때문에 적게 가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질투와 경쟁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런 공유 가능한 가치는 고급 가치라 할 수 있는 반면에 돈, 권력, 명성 같이 공유 불가능한 가치들은 하급가치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가치들은 사람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질투심과 갈등을 조장하며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인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낮은 수준의 도덕이다. 도덕이란 다른 사람에게 직접 혹은 간접으로 해를 끼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인데, 도덕적 수준이 낮다는 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빈도가 높고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에는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자연에 의하여 결정되었지만 현대인은 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그런데 윤리문화가 뒤떨어져서 사람이 사람에게 해가 되도록 행동하면 해를 입은 사람은 불행할 것이고, 전체 사회의 도덕적 수준이 낮으면 모든 사람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윤리적 질서가 깨어지면 모든 사람이 그 피해자가 되지만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더 큰 피해자가 된다. 교통질서가 무너지면 크고 튼튼한 차를 모는 사람보다는 작고 약한 차를 모는 사람이 더 큰 손해를 보고 자전거를 타거나 � 다니는 사람은 길거리에 나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비윤리적인 행동은 정의에 어긋나고, 모든 비윤리적인 행위는 약자를 해치는 것이므로 비겁하다 하겠다.
3. 물질주의 극복이 한국 교회의 사명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심각한 한국의 도덕적 상황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하고, 그것을 고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동시에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복음전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1960년대까지는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당할 정도로 잘 감당했다. 비록 교회가 분명하게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더라도 한국교회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비교적 잘 감당했으며, 한국 역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과거 한국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한 것은 주로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공헌이었다. 한국 사회에 없었거나 약했던 평등사상, 민주주의, 인권 사상을 도입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지금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새로 시작하는 교회들이 그런 사명을 감당하고 있고 또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보다는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새로 시작하는 것과 고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바 창조의 교리와 십자가의 치유와 관계가 있다.
인류는 긴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나 많은 쓰레기와 찌꺼기를 생산해 놓아서 질식할 상황에 처해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가 감당해야 할 주 활동은 창조적(creative)인 것이 아니라 치유적(curative)인 것이다.
인류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함으로 병든 세상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시대적 소명도 한국 사회에 무슨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우상과 더불어 싸우는 종교다. 한국 교회가 진정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영적으로 민감한 눈으로 자신과 이 시대를 관찰하면 세상이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교회 자체가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 그것을 알 수 없게 된다. 누구도 우상인 줄 알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없다. 우상이 아닌 줄 알고 섬기기 때문에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만이 절대이며 그의 말씀은 진리임을 믿는다면 모든 우상은 그 자체로 거짓일 뿐 아니라 우상숭배는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와 교인들에게만 부정적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사회에도 부정적이다.
그러므로 우상을 제거하는 것은 곧 세상에도 이익을 주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할 수 있는 공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 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시대를 가장 병들게 하고 이 시대가 가장 열렬히 섬기는 우상이다. 바로 물질만능주의, 곧 돈의 우상이다. 돈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상으로 등장했고 예수님도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재물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 하심으로 재물이 하나님 자리에 앉을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마6:24). 예수님의 경고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재물을 사랑하는 잘못과 관계된 것이란 주장도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바울사도가 경고하였다면 (딤전 6:10) 초대교회가 투쟁하던 시대에도 돈은 심각한 우상이었던 것 같다.
돈에 대한 욕망을 부채질하고 정당화하는 제도가 자본주의다. 18세기 네덜란드인 만더비어 (B. Mandeville)가 쓴 <벌의 우화>란 책의 부제가 “사적인 악이 공적인 이익” (Private Vices, Public Benefits)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자체로는 분명히 악이지만 그 악이 결과적으로 공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면 결과적으로 사회가 윤택해지고 발전함으로 공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논리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도 주장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윤택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를 택한 사회는 가난해지고 만 것이다. 성경도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열심히 일할 것을 독려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그런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희년제도를 둔 것,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유무상통한 것,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예수님의 비유 등 자본주의와 상치되는 가르침도 많이 있다.
성경이 허락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유재산은 자본주의가 이해하듯이 우리 마음대로 처분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이용해야 할 책임의 영역이다. 즉 권리로서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할 정치기 재산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사유재산과 성경이 인정하는 청지기 재산은 구별해야 한다.
과거 마르크스주의가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자본주의가 그 견제를 받았고, 그 때문에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치우칠 수 없었다. 누진과세, 독과점 금지 등의 제도를 도입하여 그 약점들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진 오늘날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할 만 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재 받지 않는 모든 세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타락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지금 타락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최근 온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경제활동을 돕기 위하여 봉사해야 할 금융기관들이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으로 변신하여 돈으로 돈을 버는 상황으로 변질되고, 거기에 도덕성까지 타락해서 오늘날 전 세계가 신음하는 경제위기를 유발한 것이다.
성경의 원칙은 모든 소득은 노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성경이 이자를 금한 것은 그것을 보여준다. 노동을 통하지 않는 소득은 문자 그대로 불로소득 (不勞所得)이고, 과거 농경사회와 달리 산업사회에서는 불로소득은 대부분 도둑질이다. 재물에 대한 욕망을 지금처럼 방임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결국 전 인류에게 큰 불행을 가져오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서버리면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다 한다.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 경제가 어디까지 계속 자랄 것인가? 그런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원료는 어디서 구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사용할 에너지는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날로 심각해지는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미 우리는 과소비와 과 생산을 통하여 우리 후손들이 사용해야 할 자원을 도둑질하고 있으며, 심각하게 오염된 자연을 유산으로 남기고 있다. 이런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환경오염에 의한 인류의 종말은 불가피하고 촉진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교회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신이 되어 있는 돈의 우상을 대항하여 교회가 수행하는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돈의 우상을 제거하여 자본주의의 회포와 타락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 특히 오늘의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대적 소명이다. 이에 성공하지 못하면 교회의 영적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들의 삶도 심각한 위기에 당도할 것이다.
4. “세계내적 금욕”
돈의 우상을 제거하고 자본주의를 견제, 수정하려면 교회부터 돈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돈 때문에 거짓말하고, 총회장 등 기독교 단체의 장이 되기 위하여 돈을 쓰고, 목사가 교회의 돈 수십억 원을 횡령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보다는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물질주의의 심각성을 비판하고 경고하는 설교가 강단에서 거의 사라졌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기도, 봉사, 헌금이 물질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수단으로 이해하는 설교자와 교인이 한 둘이 아니다. 교회가 돈의 우상을 섬기는데 어떻게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시대적 소명을 조금이라도 감당하려면 가난해져야 한다.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고는 물질주의를 비판할 수 없으며,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없다. 예수님도, 바울사도도, 위대한 믿음의 용장들도 모두 가난했다.
예배당은 검소하고 교인들의 생활방식도 단순해져야 한다. 돈이 있다면 선교와 구제를 위하여 써버려야 한다. 지금도 전 세계 인군의 거의 절반이 하루에 2000원 이하로 생활하고 있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과소비하고 사치하게 사는 것은 죄악이다.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자본주의는 개신교의 절제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 (Max Weber)의 주장이다. 그에 의하여 초대 칼빈주의자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번 돈을 가능한 한 쓰지 않고 저축했기 때문에 자본이 축척되고 거기서 자본주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옳은지는 논란꺼리지만 적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개신교는 처음부터 근면과 절제를 매우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베버는 초기 개신교회가 세계내적 금욕 (innerweltliche Askese)을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수도사들이나 승려들이 속세를 떠나 수도원이나 절에서 수행하는 금욕과 달리 개신교인들은 속세에 살면서 사치를 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절제했다는 것이다. 그런 전통은 지금도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 북유럽 개신교인들의 삶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이나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에서 음식 맛이 유난히 없는 것도 맛있게 먹는 탐식(gluttony)을 죄악시하는 전통 때문이다. 탐식은 중세 교회의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 (seven deadly sins)에 속한다. 흔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라 주장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절제하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경제는 비교적 건전하지만 사치하고 과소비하는 이태리나 스페인의 경제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그러나 북유럽국가들도 점점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있고 그들을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던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나고 있다. 독일도, 네덜란드도 사치와 쾌락에 서서히 탐닉되고 있다. 전 세계가 쾌락의 자본주의란 말을 타고 쾌락의 미끼만 바라보고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의 경고는 말의 귀를 스쳐 지나가는 동쪽바람 (馬耳東風)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특히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다시 일어서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하지 않고는 다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비록 물질적인 것에 대한 절제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어떤 해결이나 개혁도 불가능하다.
돈의 우상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물질적인 것에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명예욕, 권력욕, 쾌락욕 등 다른 욕망에도 절제할 수 있을 것이고 탐심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이든 타율적이든 교회가 가난해지면 철저히 순수하고 헌신된 사람 이외에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1960년대 이전 한국 교회가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하고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도 교회가 가난해서 오직 순수하지 못하고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총회나 기독교 단체의 장이 되는 것은 무거운 책임만 지는 것이었지 세속적인 이익은 아무 것도 없었고, 세습은 곧 가난과 고난의 세습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 교회는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 장기려 박사는 “예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자의 생활을 보고 감탄해서 그런 모습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예전에는”이란 표현을 쓴 것은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비록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항상 정확하고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기려 박사, 한경직 목사 같은 분들이 교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는 것을 보면 순수한 신앙과 절제된 삶은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헌은 우리 사회가 걸려 있는 돈 중독을 조금이라도 해독하는 것이다. 사회가 돈의 우상 때문에 빈부 격차가 커지고 양극화가 심각해지며,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자포자기 하며 냉소적이 된다.
OECD 국가가운데 네 번째로 갈등지수가 높고 그 때문에 연간 약 300조원의 돈이 낭비된다 한다. 돈의 우상숭배를 제거하거나 약화하지 않고 치열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고는 한국은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없다.
한 사회의 도덕성은 그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가 책임져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종교는 기독교라 할 수 있다. 신도의 수로는 불교 (인구의 23%)가 가장 큰 종교이지만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서는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한 불교 신문에 의하면 한국의 중요한 직장 70%를 개신교인이 차지하고 있다 한다. 장관,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의 사회지도층에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 많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의 도덕성은 기독교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부터 돈의 우상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하고 돈을 미워할 만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세속화되어 있고 타락한 교회가 과연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수정하여 자연과 인류의 생존이 가능하도록 할 의지와 안목을 가질 수 있을까?
5. 자발적 불편운동
금년부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자발적 불편운동”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좀 불편하게 살자는 운동이다.
예를 들어 무거운 짐을 들지 않고나 노인이 아니면 지하철이나 건물의 승강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이용하고, 주차장에서는 가장 불편한 곳에 주차하고 교회에서는 가장 불편한 곳에 앉는 것 등이 그 예다.
물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 정도로는 못하더라도 조금씩이라도 손해를 보는 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라야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
작은 것도 양보하지 못하고 희생하지 못하면 큰 것은 전혀 양보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작은 것부터 조금씩 손해보고 양보하는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6. 강의를 마무리 하면서
물론 한국의 모든 교회, 모든 지도자가 다 세상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히 충실하여 올바로 믿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교회와 교역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도매금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충고를 자주 듣고 있으며, 그 충고는 정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예외를 인정하자 말자 정말 타락한 교회와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자신들이 바로 그런 예외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우상숭배자의 가장 전형적인 표식이다.
그러므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이 7천이나 되었지만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타락을 개탄하고 비판했다. 자기와 자기 교회는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사회가 교회에 대해서 하는 비판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은 무책임하다.
그리고 기독교는 윤리만 강조하는 종교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선한 행위가 아니라 참된 믿음만이 구원의 수단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반드시 올바른 삶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윤리적이라야 성경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반드시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
마치 반드시 비가 와야 길이 젖는 것은 아니다. 비 이외의 다른 이유로도 길이 젖을 수 있다. 그러나 비가 오면 반드시 길이 젖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하셨다.
참 믿음만 회복하면 한국 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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