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과 아들이 제게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아들에게 권면하고...

아들은 아들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아버지에게 요구하는...


목사님은 아들을 사랑한다는 전제,

아들은 목사인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몇시간을 서로 옥신각신 했습니다.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른 세상 얘기를 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합의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입장)의 말을 합니다.

서로 못 알아 듣습니다.


저도 이전에는

누구보다 말이 안 통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아내가 좋은 신앙인이 되길 바랬었고,

아들들을 잘 키워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잔뜩 부담만 주는 몹쓸 남편이자 아버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상대가 바뀌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길 바라십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은혜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5)


대화는 한국말(영어)로 서로 잘 알아듣고 하는 듯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아무리 유창하게 말해도

서로의 뜻이 전달 안되니 결국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됩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참 많이 힘듭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고는 아무리 유창한 말과

지식이 있어도 복음이 쉽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영안은 상대방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이웃(형제)을 알아볼 수 있는 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길 간절히 사모할 때입니다.

은혜를 알면 알수록 내가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강도 맞은 죄인들에게는 사랑으로,

스스로 의롭다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무관심한 듯 때가 찰 때까지 인내하며...

그리스도인은 분별의 영이 임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출처: 짐바브웨 선교-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자가 <선교사>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김명호

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신정국가(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사다.

에덴 동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로 상징되었다. 모든 창조물을 다스릴 대리자의 지위를 부여받은 아담은 모든 지상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야만 했다. 구약학자인 Meredith Kline은 이와 같은 신정국가들을 시종일관 종교(예배)와 문화(세속적 활동)의 결합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활동들이 '예배'라는 보편적 방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아담의 왕적 신분을 통해 에덴동산을 통치하셨다. 바꿔 말하자면, 에덴 동산은 말 그대로 '지상천국'이었다. 모든 것이 이적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것은 천국의 축소판이었다. 그렇지만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예배와 문화의 통일성이 와해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장래를 위한 상징과 그림자와 약속을 통해 구원을 소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죄를 용서하고, 믿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하실 때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구원을 받았다.

세계 역사가 진행된 훨씬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반역과 죄악으로 가득 차 버린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으며, 장차 그 방주를 통해 '새 창조'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셨다. 각각의 종류에서 보존된 생명체들은 이 작은 신정국가, 곧 노아의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범람하는 바다를 견뎌 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한 왕을 통해 기적으로 자기백성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멸망당하고 의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을 때,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탄생되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신정국가가 되었다. 성막이 세워졌으며 이후에는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 성전은 에덴 동산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쾌한 냄세로 가득 찬 방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다. 다시 한번 종교(예배)와 문화(인간의 활동)가 융화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직접다스리셨다. 홍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길을 열기 위해 갈라지고 그들의 대적을 집어삼키키 위해 덮쳤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한번 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광야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었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사의 중심이요, 장차 오실 왕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가진 제사장과 왕의 직무를 행함으로 종교와 문화를 하나로 융합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구원, 기도, 예전 그리고 '영적'인 일에 관한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생활의 모든 양식을 지시하셨다.

그와 같은 각각의 신정국가에는 성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있었으며, 희생 제사도 있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첫 신정국가의 성전이었고, 노아의 방주는 두 번째 성전이 되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이 구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무의  경우, 신정국가에서는 대개 한 사람의 대리자가 그 세가지 직무를 모두 겸임했다. 희생 제물의 경우,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덮을 수 있는 가죽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동물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으며(창 3:21), 죄를 위한 궁극적 희생을 약속하셨는데, 단지 이 동물 희생은 장차 있을 궁극적 희생에 대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창 3:15). 홍수 이후에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다"(창 8:20). 희생제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신정 국가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든 신정 국가들은 이적으로 통치 받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구원하시고,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의 어느 고요한 밤, 한 유대인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잉태했을 그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다. 과거에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이 예표했던 바로 그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자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그분의 신정국가는 이적과 계시와 구속 행위가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으로 국면으로 펼쳐질 것을 예고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나라의 실제 속에서 천국을 지상으로 이끄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성전이셨으며, 그것은 솔로몬이 최고 전성기 때 누렸던 명성과 영예의 찬란함을 능가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라고 선언하셨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적보다는 섭리가 특정적이었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점으로 지상이 아닌 하늘의 신정국가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이 땅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복음이 전 세계를 통해 신앙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홍해를 통해, 혹은 방주 안에서 홍수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기 보다는 심판의 바다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고 있는 나라가 점진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일이 원수를 친구로 변화시키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희생으로 성취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대중들이 믿고 있는 바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강령이나 사회적 행동지침이 아니다. 결국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희생 제물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며,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정결한' 짐승 제사로 예표되었던 온전하고 흠이 없는 한 번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화목을 위한 최고의 방식을 충족시키셨다.

은혜의 복음이란/ Michael S. Horton

* 받은 은혜를 감사하라 (조지 휫필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소원한 상태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줄만한 표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은 감사와 찬송의 임무를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낙원에 두셨을 때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풍성한 감정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복됨 안에서 살게 됩니다.

 

 

1. 구속받은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찬양과 감사

 

태초에 인간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종종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섬기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된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우리의 심령을 감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이 열려 여호와의 자애로우심을 노래하거나 그의 찬양에 대하여 말하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찬양과 사모함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임무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은 전 인류에게 매일 그의 복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사랑과 흠모를 나타내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른 은총들도 마치 자기들의 공적으로 받은 것인 양 감사하지 않습니다.

 

1)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이며 ,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신나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경향을 가진 이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은총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가까이 다가올 때 그것들은 더 큰 효과를 발합니다. 성도들은 그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 사실들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주 여호와로부터 수천 가지 복을 받은 자들 중에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감사할 줄 몰랐던 문둔병자들에 대한 기록은 인간들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지를 잘 예증합니다. 병에서 고침 받거나 심한 고통가운데서 해결함을 받고 정말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은 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이런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것은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과 정반대의 성품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성도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7,18).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2)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이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항상 상기시켰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습니다. 실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지금도 태양으로 낮을 달로 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물이 갈라져 육지같이 건너는 것을 본적이 없고, 왕과 그의 군대에 의해 추격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다른 배에 의해서 침몰 할 수 있는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실로 무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을 행운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과 선견지명으로 이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섭리하심이 모든 것을 관할하십니다. 바람과 바다고 그의 말씀에 잠잠케 되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때는 가라고 명하시매 바람이 가고, 때로는 오라고 말씀하시매 바람이 왔습니다. 우리가 엄청난 광풍 속에서 그 파도를 타고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2.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는 까닭

 

1) 감사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가장 약한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못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그의 행사를 인하여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그분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같이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오직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의 무한한 사랑의 끈으로 여러분을 단단히 잡아매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순종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그분보다 더 나은 주인을 결코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를 섬기는 것이 가장 완벽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상급이 주어지고 이후에는 결코 썩지 않는 면류관을 주십니다.

 

다른 주인들은 여러분들에게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며 이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준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설혹 모든 세상을 준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분 없이는 여러분은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영적 삶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지만 또한 의로운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을 많이 받을수록, 우리가 받은 복만큼 우리의 영적 삶을 진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후에 받을 저주가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함께 항해한 군인들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선원들에게 주는 당부

 

1) 행실을 선하게 하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곳 주변은 엄청나게 많은 이교도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방인들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름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간 헤롯의 군사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조소거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보도 많이 누렸던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말씀의 기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나치게 많은 영적 양식으로 과식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적 진보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패 할 수 없고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저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꺼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함으로 인해 제가 사랑을 덜 받을지라도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2) 옳은 일에 장부가 되십시오.

 

낙심치 말고 강해지고 대장부가 되십시오.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겁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행동하십시오. 용감히 행동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모든 난제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더 나아가 여러분들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불평하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3) 혀를 주의하고 마음의 정결을 지키십시오.

 

여러분들의 아내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혼식 때 엄숙한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자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의 문을 굳게 지키도록 조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로 남을 공격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사랑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리하여 기도가 막히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둔 여성들은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이 되게 하여 정결치 못한 여자로 의혹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4) 영혼이 폭풍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회개하지 않고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폭풍은 우리를 순식간에 삼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심스럽게 항해하기 위해 나침반을 살펴보는 것처럼 믿음의 파선을 방지하고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 말씀에 눈을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5)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오늘 듣고 있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병들었을 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취하실 때의 결단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약속에 따라 그분께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입술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표현하십시오. 비록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흠모하시기 바랍니다.

 

6)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은 유혹의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될 준비가 된 자들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결코 헤어짐이 없는 그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하는 데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필경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과 일에 있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그리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고 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7) 입술로가 아니라 삶으로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심령을 주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면 크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을 포구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험한 파도와 고통의 순간들을 다 이기게 하시고 여기로 도달하게 하셨기 때문에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직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할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인들을 노래하며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른 모든 노래와 더불어 그분을 찬양할 것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초신자를 위한 신앙생활 길잡이> ⑮ 은혜(Grace)  


은혜는 공로 없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Grace)란 말을 많이 접하게 된다. 흔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명 받았을 때 “은혜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초신자들에게는 “은혜 받아야 된다”고 권념한다. 여기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기쁘다, 감동되었다, 찔렸다, 깨달았다’는 등의 상태를 은혜 받은 것으로 본다. 또는 교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은혜스럽게 넘어가자고 말한다. 여기는 ‘이해와 사랑’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성령의 은사와 은혜를 혼동하기도 한다. 은혜와 은사를 혼동해 은사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은사는 은혜의 부산물이지 은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은혜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은혜는 절대적 주권자인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한 백성들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며, ‘은총·자비·인자·인애’ 등으로도 표현된다.
구약성경에서 은혜를 의미하는 단어는 ‘헤세드’와 ‘헨’이 있는데, 헤세드는 불변의 사랑(인자), 언약적 사랑을 뜻하고 헨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과분한 호의(렘31:2)를 뜻한다. 이중 헤세드는 구약의 은혜 개념에 기초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동기를 말한다(시136:1-).
신약성경에서 은혜는 ‘카리스’로 단어적 의미는 ‘매력을 느끼게 된 상태나 기뻐하게 된 상태’에 대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친절한, 예의바른, 관대한 처분’ 등의 사상을 띤 의미로 사용됐다. 신약시대에는 보다 발전하여 구체적으로 ‘은총이나 혜택’을 나타나게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카리스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라는 용어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구약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선의와 사랑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구약적 의미뿐만 아니라 구원이란 말의 동의어로 나타난다. 즉 신약의 은혜 개념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의 근간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적 활동(성육신-생애-고난-죽음-부활-승천)을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계시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혜’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은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성육신은 은혜의 최고 절정


예수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잃어버린바 된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이것이 은혜의 참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새로운 언약(은혜 언약)이 시작되었다. 죄 가운데 있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 은혜이며,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공로를 통해 그 깨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구속의 은혜인 것이다. 거듭남과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상태를 은혜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편 은혜는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할 수 없는 구원과 성화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즉 은혜는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며 보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은혜는 찾아오는 자를 향해 주시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베풀어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다고 에베소서 2장 8절에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를 받는 통로와 종류


은혜는 특별은혜와 일반은혜로 구분된다. 특별은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말하고, 일반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베푸시는 자연적 축복을 말한다.
그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교회는 구원에 필요한 은혜를 성도들에게 주기 위한 기관이다. 먼저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을 읽고 깨달았을 때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데,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찬과 세례를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데 성찬과 세례에 동참한다는 것은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은혜는 삼위일체로 나타나는데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근원으로서 말씀을 선포하시며, 성자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부 은혜의 전달통로로서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속하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은 은혜를 선포하고 구속받은 성도를 감화 감동케 하여 주신다.

▲ 하나님의 은혜 -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창조질서 속에 내포된 근원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축복의 세계가 열리고 구원이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한다.


▲ 그리스도의 은혜 -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화 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성육신과 사람들을 위해 죽음의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의 최고 표현이다.

▲ 성령의 은혜 - 성령의 은혜는 주님을 섬기는 다양한 형태의 직책(은사)으로 나타나며, 그 은혜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교회공동을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혹은 믿음을 받거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 말씀을 전하는 능력, 방언의 능력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부르심을 입었으며(갈1:15), 의롭다 하심을 입고(롬3:24), 거룩함을 입는 것이다(롬6:14). 또한 영원한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 것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살후2:16),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딤후2:1).


Part 2. 율법과 은혜의 관계

은혜를 말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율법은 행위를 강조하여 선행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에 은혜는 인간의 공적 없이 값없는 믿음을 기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표준이지만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표준이다. 은혜는 어떠한 기준이나 노력 없이도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해주며 죄에서 구원해 준다. 즉 은혜는 어떤 일체의 공로를 배제하며,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 대가 없이 분에 넘치게 받는 선물이다.
일반적으로 율법이 구약의 중심개념이라면 은혜는 신약의 중심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즉 '구약시대를 율법시대'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시대 곧 '교회시대를 은혜시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은혜는 신약시대부터 생겨났다고 봐야 되는가에 대해 성경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및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주어졌다. 아담 이후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거절하였을 때에 ‘더하여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출애굽과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출15:13, 18:9), ‘주께서 행하심대로 다 준행하리이다’라고 맹세함으로서 은혜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 얽매이게 되었다(출19, 24장).

그렇다고 율법과 은혜는 전혀 다른 대립적 개념이 아니다. 단지 외형상 다른 형태를 취할 뿐 율법의 중심사상도 사실상 은혜와 같이 사랑, 긍휼이지만 영적 지적 성숙도가 낮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 엄격한 형태의 금기식 율법을 주었으며,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본질적 방편이 아니었다. 율법이 다스렸던 구약시대에도 은혜는 존재했다.
한편 ‘은혜’를 신약성경의 핵심내용으로 정착시킨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은혜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구약적 은혜의 개념은 은혜의 실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보다는 신약적 은혜의 그림자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창조에서부터 나타난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 자체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안타까워 하와를 주신 것도 은혜에 속한다. 인류 구원을 위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힌 은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애굽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나뭇가지 옷을 대신에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입히셨다(창3:21). 거친 환경 속에 살아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사건인 동시에 예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피흘림이 반드시 있어야 됨을 나타낸다.


② 가인에게 보호 표를 주신 은혜
제사 문제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에 대해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가인에게 보호의 징표를 주어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다(창4:15). 이것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죄악된 인간들에게 사랑과 구원의 밧줄을 던지시고 계심을 엿볼 수 있다.


③ 에녹에게 주신 승천의 은혜
아담의 7대 손인 에녹은 당시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간 경건한 생활을 했다(창5:21-24).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회복되는 곳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에녹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고 변화 승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④ 노아 홍수심판과 구원의 은혜
노아 때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도덕적이고 신앙적으로 온전히 살고자 했던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의 방주를 지을 수 있는 사명을 받게 되었다(창6:8-22). 구원의 방주 속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은 대홍수 심판을 모면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⑤ 아브라함을 찾으신 소명의 은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 부르시고, 열국의 아비로서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이 어디든 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함을 받는 은혜를 받았다(약2:23).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⑥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율법 은혜
모세를 부르셔 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을 맡기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했을 때 그들을 인도하고 구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과 은혜를 선택하게 하셨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 인도한 은혜 대신 율법을 선택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여전히 은혜 아래 있었다.


⑦ 죄악된 백성을 성결케 하는 성막 은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증거의 장막인 성막을 만들게 하셨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피의 제사를 통해 죄악된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정결케 하는 곳을 주셨다. 만일 성막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속죄할 방법은 없었다. 또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⑧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은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통치자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범죄 함으로 인해 이방민족의 지배를 당하게 됐고,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그들을 구원할 사사를 보내주셨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되던 시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영원한 통치자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지켜줄 왕을 요구했다(삼상8장).


⑨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은혜
말씀이 육신 되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화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림이 없었다면 인류는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었다.




Part 3. 은혜의 사역 - 구원·성화·소명

은혜의 중요한 사역은 성도의 구원과 성화, 하나님의 나라 사역을 위한 소명을 불어넣는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지만 역사로 나타날 때는 인간에게 자비로운 도움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힘이나 능력이다. 은혜의 능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를 극복하고, 인간 영혼의 파멸을 회복시킨다.


1) 구원의 사역 - 죄악된 인간을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사하게 하고 의롭다 함을 얻게 하며 구원을 이루게 하는 역사를 한다. 즉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은혜의 실체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기만 하면 죄악된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게 하셨다.
행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딛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2) 성화의 사역 -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될 수 있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도는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으며 신앙적 성숙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즉 은혜는 구원 사역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도록 때를 따라 돕는 역사를 계속한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3) 소명의 사역 - 특별한 직무를 맡기고 능력을 공급한다
은혜는 성도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특별한 직무를 맡긴다. 바울도 사도로 임명을 받고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비록 복음을 전파에 부적합하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은혜는 그 직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영적 도덕적 능력을 공급한다. 이러한 일은 사도들에게 부여된 것이 아닌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활용될 수 있는 다양한 재능인 은사가 주어진다.
고전15:9-10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에 대한 잘못된 견해>
사람들은 은혜 받는 것을 기복적인 신앙이나 그릇된 생각에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나님의 은혜는 어떤 조건이나 단서가 붙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인 것도 아닌 모든 인류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이란 선물이다. 또한 은혜는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지 무법을 허용하는 것도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 사업이 잘되고 부자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보았는데 본인은 동일한 사업에서 특별한 이익을 얻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을 만족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구원과 연관된 것으로 어려운 일이 닥치고 힘들다고 해서 은혜가 떠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 은혜 받으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무관하다
일부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혜는 죄를 짓도록 허용하거나 경건하게 살아야 할 우리의 소명을 짓밟도록 허용하는 허가증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죄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선행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구원)는 선한 일을 하거나 종교적 행사에 참여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등 공로에 따라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롬11:6, 딛3:5).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노력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롬4:4, 엡2:8-9).

▲ 은혜 받으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일은 은혜가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은혜가 역사하는 대로 따라가면 될 뿐 아무 일(성화의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책임한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면 인간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명분으로 하여 인간에게 부여된 신앙적 책임까지 부정되어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 즉 하나님의 은혜의 근본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 은혜 받아도 율법은 철저히 지켜야 된다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써 그 구원을 보존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많이 나타난 잘못된 생각으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출처: 성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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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았습니다." "은혜가 됩니다." "은혜스롭습니다." 등등에 사용하는 "은혜"라는 단어...

 그리고 카페에서의 글이나 크리스마스 카드 등에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샬롬" 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필자도 가끔 댓글 말미에 사용하는 "카리스"라는 단어가 "은혜"라는 뜻이다.

 

찾아보니 "은혜"라는 단어는 신약에만도 155번이나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이 단어는 교회에서 대단히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설교에 감흥을 받으면 "은혜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좋은 성도를 볼 때면...

 "집사님만 보면 은혜가 됩니다!" 심지어는 뚱뚱하고 건강미 넘치는 아이를 보면 "너 참 은혜롭게 생겼다."

라고 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은혜"는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대표적인 말씀이 로마서 3장 24절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기서의 "은혜"란 하나님이 베푸신 "호의"를 말함이며 우리가 받은 은혜는 바로 "구원"이다.

 이렇듯 은혜는 구원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로마서 5장 20절을 주의깊게 보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과 “죄가 왕노릇하던 곳에서 은혜가 왕노릇하게 되었다”라는 

말에서 은혜가 과연 무슨 뜻으로 사용됐을까를 생각해 보라. 먼저 은혜는 죄의 반대어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말해 은혜는 죄를 이기고 물리치는 것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무엇이 죄를 이기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새생명 즉, "구원"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은혜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9장28절을 보면 좀 다른 뜻으로 "은혜"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느낌인가? 은헤가 "모든 일에 넉넉하고...착하고 선한 일에 넉넉한..." 우리의 행실에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착한일을 넘치게 하는 원인을 무어라 했나?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행을 하기전에 먼저 받은 것이

 "은혜"라는 말이다. 그것은 "구원"이다. 원래 "카리스"라는 "은혜"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존재로 부터의 "선물" "호의"라는 뜻이다. 

바로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그 선물인 것이다. 

어제 송구영신예배를 마치고 한 전도사님이 필자에게 "새헤에도 은혜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 분은 그저 인사로 한 말이겠지만 사실 이 말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새해에도 변함없이

늘 임하십시오!" 라는 의미이다. ^^ 


그러므로 성경에 "은혜"라는 말이 나오면 그 말 대신해 "구원"이나 "선물"을 대입하여 읽어보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좀 더 구체적으로 좀 더 은혜스럽게(? ^^)  느낄 수 있다 하겠다. 

그리고 "샬롬"이라 흔히 말하는 "평안""평강""평화""화평"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글을 쓸 때 같은 뜻으로 "에이레네" 라고 쓰면 좀 더 있어 보이는데...^^  

샬롬은 히브리말이고 에이레네는 같은 뜻의 헬라말이다. 


그러면 이 단어가 성경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보자. 샬롬은 화평의 의미이지만 "질서"의 의미도 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4:33) 

말 그대로 "어지러움"의 반대어로 "화평"을 말하고 있다. 

이미 창세기 1장에 어지러운 혼돈의 상태로 부터 세상을 조화롭고 질서있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이 

"샬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대표적인 구절이 요한복음 14장 27절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의 "평안"이란 어떠한 것일까? 

분명한건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이라 했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언가? 

그것은 넉넉하고 평탄한 삶이나 삶의 위기가 왔다가 다시 극복했을 때의 휴~ 라고 안도하는 안전감...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세상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란 무언가? 정반대라 하겠다. 


평탄한 삶이 세상이 주는 평안이라 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평탄과는 반대로 극도의 불안과 

풍랑속에서의 "평안"을 말함이다. 그래야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다는 말이 성립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이란 우리 육신의 안정이나 평안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도 충분히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의 궁극적인 평안 즉, 영혼의 평안이다. 다른 말로 "구원이 가져다주는 평안"이다. 

이것은 세상이 알지도 못한다. 성도만이 경험하는 평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평안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평안은 고사하고 다 죽어야만 한다. 

저번 게시글에 언급했듯이 "피의 보수자"의 살기등등한 칼날에 우리 모두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마땅하다. 구약에선 그 피를 짐승들이 대신 흘렸다. 

피비린내나는 짐승살육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평강을 이룬 것이다. 


더 끔찍한 평강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진노가운데 놓여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내어 이룬 

처참한 평강이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하는 우리가 희생제물로 대신 피를 쏟아낸 예수로 인하여 얻게된 

평강이 샬롬이다. 우리의 끔직한 죄악이 씻어짐으로 가능케 된 평강이 샬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샬롬"이라고 글의 맺음을 할 때 그 의미는 첫째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영혼의 평안를 말함이요 그 평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로 인한 죽음의 멸망 

가운데 거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 주는 "평안"이란 뜻이다. 결국 "샬롬"의 진정한 의미 역시 '구원"이다.


우리가 별 생각없이 많이 사용하는 "은혜"와 "샬롬"... 

모두 하나님이 우리 성도에게 베푸신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 많히 받으세요!" 라고 인사하는 것은 단순한 원함이나 기원이 아니다. 

그리고 "샬롬"이라고 끝맺음하는 인사 역시 단지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소망이나 인사치레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그 은혜와 평강이란 구원받은 성도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으로써의 실질적인 

하늘의 "복"을 말 함이다. 

 

성도는 그 복을 반드시 누리는 존재이다. 
실제로 사도바울은 각 서신서에 "은혜와 평강"을 편지의 서두로 시작함을 우리는 쉽게 본다. 
실제로 찾아보니... 고린도전서, 로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베드로전후서...거의 서신서 전체에서 이와같은 인사로 시작을 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인사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원하는 기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원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이다. 

우리는 정말 이러한 의미로써의 "은혜"와 "샬롬"이 넘치는 형제 자매되기를 원하는 바이다.               


 

 

 출처: 물과피와성령/ess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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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항력적인 은혜
      126EA9134C8E13CFAF4336 

       

      그러므로 알듯이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이 비록 여러 다른 곳에 거처한다할지라도 마음에 역사하시기에 그들은 같은 믿음과 같은 진리를 믿고 받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러브-
      내적인 부름은 성령님께서 외적인 말씀의 부르심과 동반하여 그 사람을 무지에서 지식으로 자연인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부르실 때 일어난다. -크리스토퍼 러브
      부르심은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연합할 자들을 모으시는 것이다. -윌리암 아메스
      그리스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운데서 성령의 은혜원리가 작용되는 과정이다. 내적인 부름은 영적인 계몽이며, 여기서 약속들은 내적인 말씀에 의해 그 사람들의 마음에 증거된다. -윌리암 아메스-
      하나님에 의해 영적이며 신적인 빛이 곧 인간의 영혼에 주어지는데 이는 자연적인 도구에 의해 얻어진 무엇과는 전혀다른 속성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육신에 있는 편견은 거룩한 진리와 반대되는 것으로 제거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진리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적절히 민감해 지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거룩한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적 교리에 대한 완전한 반감이다. 이것은 진리를 입증하는 논쟁에 대해 무익하며 마음에 힘을 잃게 만들고 만다. 하지만 누군가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적 교리들의 영적인 탁월함을 밝혔을 때에는 이것이 모든 반감을 부수고 모든 편견을 제거하며 이성을 거룩하게 만들고 진리에 대한 논쟁의 힘에 마음을 열게 만든다. -조나단 에드워드
      이러한 부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죄로 죽어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복음의 선포와 성령님의 은혜로 불러낸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며 그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한다 -프란시스 튜레틴
      양자됨은 우리에게 아들의 특권, 즉 아들들의 새로운 본성의 거듭남이다. -스테판 차르녹
      첫 창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렇듯이 두번째 창조, 거듭남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지식과 의와 진실한 거룩성, 사랑에서 새롭게 만드신다. -바바서 파웰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사람의 변화이다. -토마스 아담스
      사람의 관점에서는 인생이 아름답게 보일만한 것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 못한데, 다만 그 마음이 변화되어 새롭게 될 때까지 그러하다. 이 세상의 어떤 약도 성령님의 거룩케 하는 역사가 없이는, 상처와 병이난 부위를 덮을 수는 있어도 영혼을 치료하고 고칠 수는 없다.
      -오지 스윈녹-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 꾸밈: 최송연의 목양연가"묵상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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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지나간 시절에 우리의 도움이셨던 하나님

                다가올 세월에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비바람 치는 폭풍의 때에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십니다.

                 

                주님의 보좌 그늘 아래서

                우리가 여전히 안전하게 거합니다.

                주님의 팔만으로도

                우리의 방패는 확실합니다.

                 

                작은 산들이 질서 있게 서고

                땅의 틀이 잡히기도 전에

                영원부터 당신은 하나님이시며

                영원까지 동일하십니다.

                 

                오,

                지나간 시절에 우리의 도움이셨던 하나님

                다가올 세월에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다하기까지

                우리가 영원히 본향에 이르도록

                우리의 인도자가 되소서.

                 

                      - 아이작 와츠-

         

         

        질문: 선택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인가요? 만일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결정해 놓으셨다면, 그 문제에 관해 나는 실제로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마치 비밀장치와 과학기술이 사람들의 손을 올리거나, 복도를 걷게 하거나, 기도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며 종종 복음 전도를 한다. 우리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문제는 사람들이 죄로 물던 본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중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보가 불충분할 뿐이므로 감동을 주는 신앙고백이나 찬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때로 그러한 수단들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들을 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중생이나 회심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게끔 만들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선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리시는 결정이지, 우리가 그 분을 위해 그렇게 결정할 리가 결코 만무하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할 때, 그 대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지불하셨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아들의 죽음을 담보로 보증하셨던 것이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오라! -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한량없는 부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백인은 누구든지 오라! 혹은 미국인은 누구든지 오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어떤 사회-경제적 집단이나 정치적 집단, 혹은 인종적 집단으로 복음의 제안을 한정하시지 않는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하나님의 만찬에서는 환대받는다. 하지만 사람이 오고자 의지적으로 결단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받고 회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실제로 올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자유의지의 발현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외부에서 그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성과 자아 중심적 성향을 변화시키시고 생전 처음으로 죄악으로 가득 찬 의지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므로, 그때부터 우리는 새롭게 거듭난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우리가 예전에 마음대로 하나님을 싫어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는 아낌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시기로 결정하셨고 우리가 반항하는 상태에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것을 이루셨는데, 감히 어느 누가 그것에 대해, 특히 우리가 예전에 말했던 모든 것이 '아니오'라는 부정뿐이었던 상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나는 예수님이 내 마음대로 행하도록 방치하시는 '마음씨 좋은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지를 거슬러 강요하는 실력행사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직시하게끔 만듦으로써 그리고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공급하시는 완전한 자유의식으로 압도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된 자로 하여금 그분을 따르는 자가 되도록 설복하신다. 성령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시게 되면 그 은혜는 절대로 거부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사람의 눈을 여실 때에 그 사람이 즉각적으로(효과적으로) 보게 되며, 성령께서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때에 하나님을 적대하던 사람들은 곧 그 분을 따르는 자가 되고, 죽었던 자들은 살아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비유에서, 어떤 의지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람들의 의심, 가령 눈먼 사람이 의지적 행동을 통해 시력을 회복한다든지, 골이 깊은 원수가 단지 어떤 결정을 통해 하나님의 편이 된다든지, 혹은 죽은 사람이 자기 부활을 통해 살아난다든지 하는 것 등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한번 살아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 소생시킨 사람은 영적 죽음과 또다시 하나님한테서 소외당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그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류가 없고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이 넘치는 권유와 은혜로운 구속으로 우리를 붙잡으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영생을 얻도록 예정한 사람들을, 그분께서 정하시고 용납하신 때에 자기 말씀과 영으로서, 그 본성적 상태인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구원으로 불러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성을 영적으로 구원을 얻도록 일깨움으로써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들을 (그것들을 제하시거나 강압적으로 그렇게 하시지 않고) 새롭게 하시며, 자신의 전능한 권능으로 무엇이 선인지를 결정케 하시며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그리스도께 이끄신다(제5장).

        바울 사도는 구원에 대해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라고 공포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원치 않는다거나 달리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결정과 경영과 사역에 달려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처음에는 상당히 불쾌하고 귀에 거슬리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다른 대안을 가진 삶을 훨씬 능가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서 분개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자아 중심적 태도가 지닌 잣대가 아닐 수 없다.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Michael S. H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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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하시는 기도응답의 다섯가지 방법

         
        이 책에서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다섯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다,
        안된다,
        기다려라,
        네가 할 일이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마......
         
        이 책을 읽고 나면 결론은 한가지로 요약됩니다. 물론 다섯가지 응답으로 나타나지만,
        그 각각의 의도엔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크나큰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은 “좋다”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가 주님의 행하시고자 하는 뜻에
        합당할 때 나타난다. 그렇지만 기도할 때마다 이처럼 “좋다”고 하시기를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기도에 “좋다”고 하신 경우가 다음과 같이 몇 가지가 있다.
        1) 한나가 아들을 얻기 소망하여 여호와께 통곡하고 서원하였더니 주님은 그에게 아들 사무엘을 주셨다.
        2)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그를 위해 기도를 했다. 그리하였더니 주의 사자가 그를 깨우고 쇠사슬이 풀리고 파수를 물리치고 감옥 문이 열렸다.
        3) 솔로몬이 주께 지혜를 구했다. 그의 그 기도가 주의 마음에 맞아 하나님은 그에게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주셨고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다.
        4)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려고 보낸 편지를 보고 기도한다. 그는 산헤립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오직 주만 바라보고 확신하는 믿음을 보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를 치셨고 산헤립은 죽임을 당하였다.
        5)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바울이 기도했다. 그리고 안수하여 그를 낫게했다.
        6)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지만 베드로는 기도하여 그를 소생시켰다.
        7) 엘리야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비웃는 백성들에게 그 분의 존재를 보이도록 기도했다. 정성으로 번제물을 준비하고 도랑에 물을 흐르게 하였더니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다.
         
        두 번째로 기도에 대한 응답은 “안된다”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이 담겨 있을지라도, 우리가 주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해달라고 하는 요구가 담겨 있을지라도 첫 번째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좋다”고 하시길 원하고 있다. 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안된다”고 하신다.
        성경속에 나오는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주시길 세 번이나 기도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中)
        이 말씀을 들은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中)라고 전한다.
        우리가 기도하였을 때 주님께서 “안된다”고 하시면 우리는 얼마 못가서 기도를 포기하고 주님을 원망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안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거나 주님의 뜻에 합당치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고치도록 길을 안내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를 계획하셨는데,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도록 무조건 “좋다”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로 기도에 대한 응답은 “기다려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오랜 기다림 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빨리 눈앞에 보여지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이 주 뜻에 합당할 때만 “좋다”고 하신다. 만일 우리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신다면 우리가 시험에 빠질 수도 있고 우리가 자만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도하기 전,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갖추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곤 한다.
        이 책의 지은이는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한다.
        첫째, 헛되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유를 물어야 한다.
        둘째, 그 기도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예를 들어 여러분의 건강)이라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기도보다 구하는 것을 멈출 자세가 더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물질적인 복을 위한 기도라면(욥처럼), 도대체 그 기도를 드렸어야 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만일 영적인 복(하나님의 인도, 특정한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능력, 성경을 이해하는 것등)을 위한 기도라면,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또는 하나님이 기도를 멈추도록 인도하고 계신다고 확신하는 시점에 이르지 않는 한, 계속 기도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
        그리고 네 번째 기도에 대한 응답은 “네가 할 일이다”이다.
        부모님이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도록 배려하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길 바라신다.
        우리는 가끔씩 아픈 사람들이나 선교지를 위해 기도 부탁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실천으로 행하길 원하고 계신다.
        아픈 사람이 빨리 나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할 때, 우리는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병원에 있기에 사람을 만나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의 만남은 그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우리의 이 행동을 통해서 그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전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병도 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씩, 물론 나도,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뿐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선교지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직접 선교사로 가서 실천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헌금을 통해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헌금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기도에 대한 응답은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마”이다.
        우리는 가끔씩 자신의 일만 생각하고 기도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결혼식이 있는 날에 날씨가 맑기를 기도하지만, 그 때 농부들은 시들어 가는 작물을 위해 기도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으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쪽의 기도를 들어 주실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께선 적절하게 놀라운 방법으로 이루어 내신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능력에 감탄하고 놀란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방법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주님이시다.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기도를 할찌라도 우리에게 더욱 적절한 방법으로 응답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셔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네게 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이유조차 밝힐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나를 신뢰 하거라.”
        <기도응답의 다섯가지 방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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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호받는 영혼 (아다나시우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원수가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묵상합시다.
        원수가 우리를 접근할 때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맞게 접근합니다. 원수는 우리 마음의 상태에 맞춰 기만 전략을 씁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우리가 겁을 먹고 혼란에 빠져 있다고 여겨지면 우리 마음이 무방비 상태임을 발견하고 강도처럼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원수는 우리에 대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원수는 우리가 약하고 비겁하다고 생각되면 기만과 위협으로 우리의 공포를 배가시킵니다. 그러면 불행한 영혼들은 그러한 일들로 인해 고통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장래의 축복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며, 어떤 악한 영도 그리스도인을 대적할 힘이나 누군가를 지배할 권세가 없음을 알고 있는 모습을 보면 원수는 그러한 생각의 힘으로 인해 패배하고 뒤로 물러납니다.


        원수는 이런 식으로 욥이 힘을 얻는 모습을 보고 욥에게서 물러 났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유다가 무방비 상태에 있는 모습을 보고 그를 포로로 사로 잡았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원수를 경멸하고 싶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은 언제나 소망 안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귀의 함정은 연기와 같고 악한 자들은 우리를 쫓아오기 보다는 달아날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교수 은퇴 기념 고별 강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_박영선 목사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 박영선 교수, 남포교회,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

         

        이 원고는 20131129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박영선 교수 은퇴 기념강좌의 내용을 강의안에 의존하여 임의로 발췌한 것입니다. 원고의 일부 내용 중 미흡한 점이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발췌자 : 송영찬 국장>

         

        인류 역사 속에서 보수주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하고 명예로운 것에 대하여 그다지 깊은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야 하는 보수주의는 이 시대에 과연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궁색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보수주의를 통해 누가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우리는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이라도 실패한 적이 없으셨다. 심지어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실패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보수주의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가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Text(역사적 사실)Context(역사적 의미)

         

        보수주의는 역사성의 인식에서부터 자유주의와 다르다. 보수주의는 역사, 곧 사실을 하나님의 경륜과 약속의 시행으로 본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역사, 곧 사실보다는 실존의 공감과 이해에 우선을 둔다. 그 결과 사실보다는 그 의미에 치중한다. 보수주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한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보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미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사실(text)을 담고 흘러간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55:8-11)라고 선언하신다.

         

        그렇지만 역사라고 하는 시, 공간 속에서 사실(text)과 정황(context)의 구별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정황(context)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개인의 신앙체험에서 보듯이, textcontext와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text는 그 특정한 context 이외의 것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자유주의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특히 인문학자들에게 있어 역사의 context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들은 text를 무시한 채 역사를 '반복'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인생을 '윤회'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들은 역사 속에 녹아든 text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학교를 보는 것과 같다. 학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학교 자체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매년 학생들이 입학하고 승급하고 졸업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윤회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또한 해마다 학생들의 입학과 졸업이 반복된다고 해서 학교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정황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틀은 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찾아오심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밭에 감춰진 보화는 그 context의 보잘 것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text 자체를 무시케 하게 만든다. 그와 같이 말구유는 역사지만 그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조작되거나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text를 감싸고 있는 context를 더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보수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문, text를 존중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그 text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계시이다. 특히 구약이 그렇다. 구약에는 문맥이 있다. 그 문맥이 없다면 신약조차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보수주의는 하나님만이 주도권과 능력을 행사하시며 그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신학 원리로 고백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textcontext 없이 전하면, 다만 고함과 공허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context 속에서 text를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 전후 사정이 없다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

         

        구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해서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충돌을 통해 자신을 보이셨다. 그것이 바로 계시였으며 이 계시는 전인격적인 성숙을 그 목적으로 주어졌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contexttext 자체, 또 이해와 설득이 모두 하나님께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의 내용과 사실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근거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야곱이 경험한 벧엘 사건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창세기 2810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야곱에게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신다. 야곱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이시다. 조부와 부친의 하나님 곧 과거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야곱의 하나님 곧 현재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조상들에서 하신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여기에서 그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2.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하나님의 역사성으로 실제가 된다. 곧 역사라고 하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야곱은 역사의 문맥인 정황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가 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유산(모태 신앙), 체험(극적 회심), 기복(현실)이 동기가 되거나 정황(context)을 가지는 경우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서 text를 만나게 된다.

         

        둘째는 개인 현실에서 느끼는 실존적 결단, 현실적 필요, 정체성의 질문 등에 의해 구체화 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특성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정황(context)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오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 특성을 전부 가지거나 균형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의 정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인정한다. 감리교에서는 헌신과 열정을 강조하게 된다. 순복음에서는 체험적 신앙을 그 정점으로 가진다. 이런 것들은 모두 text의 정황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 그 결과 설명이 달라진다. 본문, text는 동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황을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서로 신학이 다르다고 매도하면 안 된다.

         

        잘 아는 것처럼 각자 자신이 정황을 이해하는 방법들의 다양성, 즉 그 장점들이나 또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거나 증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변증이고,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균형과 종합을 위해 하나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신학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방식과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정황 이해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에서는 context를 공감하고 납득하는 방식을 취한다. 거기에는 남다른 열심과 정열이 있다. 심지어 감동과 환희, 사색과 성찰도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이 방면에서 많은 고뇌를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체험주의이거나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정황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시도들 때문이다. 반면에 보수주의, 특히 장로교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

         

        보수주의는 일종의 원어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이 모국어인 자신들은 실상 자기가 가진 유산을 잘 모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를 한다. 특히 문법과 철자를 사용함에 있어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들이 원어민들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신앙 그 자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성경 원어나 성서 역사의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별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심지어 불어까지도 공부한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잘 아는 것처럼 언어()는 역사와 유산으로 만들어 진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text를 대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역사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거기에서 구체적인 정황을 찾으며 마침내 역사의 완성을 보고 있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은 체험(확인), 헌신(열정), 공감(실존) 등이 결국 하나님의 크기와 약속과 능력 그리고 성품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혹시 그와 같은 모든 정황들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보수주의는 결국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역사의 완성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비록 자기 자신이 속한 역사의 성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정황을 해석하고 변증함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인 신학이라거나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다름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 배타적일 때 기독교 신앙을 훼손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 사실을 교회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가톨릭에서는 장엄한 형식과 아름다움에 text를 담아 자신들의 진심을 표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그래서 가톨릭은 성상이나 성화와 미사 혹은 화려한 예식(일곱 성례)와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러한 가톨릭의 형식이 오히려 text를 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로써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들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선포 위주의 방식을 택했다. 이때부터 설교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계몽주의 영향을 받게 되자 설명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통적인 선포 위주의 설교를 설명 위주의 설교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한 설명을 통해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신앙을 납득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 방식이다.

         

        또 다른 방식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사실이 중시된 선포에서 사실은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만을 강조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이로써 사실은 더 이상 실제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방식이다. 이 자유주의에서는 내용의 공감만을 강조하게 된다.

         

        3. 자유주의를 향한 질문

         

        자유주의에서는 text보다는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에 강조점을 둔다. 때문에 그들은 초시간적 추상적 개념들에 초점을 둔다. 한마디로 이것은 환상적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이 추상적 개념들을 도입함에 있어 실존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을 실감해야 할 자아, 곧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고무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앙으로 이끄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자칫하면 이 길만이 신앙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인식론을 향해 질문해야 한다. 인간이 다만 신적 의지와 능력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라면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수주의 곧 개혁주의는 답을 해야 한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선택과 책임은 명예요 영광이다.

         

        둘째, 그러나 인간의 공감과 이해에 의해 성립되는 신의 존재나 의지일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움과 피조물로서의 한계와는 진정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셋째, 신앙인의 감격은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선하심과 능력에 근거한다.

         

        성경은 이상의 사실들을 증거한다. 곧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언한다. 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진술이다. 생각한다고 해서 존재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존재만 인정하게 되면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무척이나 성경 본문에 충성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지만 생각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는 인간의 이해에 묶인 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자유주의가 말하듯, 공감을 요구한다는 점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근거가 되거나 출발점은 되지 못한다. 나와 현재라는 정점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한편, 하나님의 임재가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여러 죄악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선지서들은 징벌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은 은혜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도덕이 아니며, 윤리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곧 하나님의 없음이 벌이고 그것이 곧 재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상을 볼 때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 분명해진다.

         

        먼저 (1) 교리를 외우듯이 거대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누려야 한다. 이 교리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리는 나중에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 인격이 따라야 한다. 곧 하나님의 일하시는 정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리를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타인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배우는 것과 같다.

         

        집나간 자식이 정신 차리는 문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증명한다. 반면에 집에 있는 자신의 유익과 명예에 대한 책임도 말하고 있다. 큰 아들에게 있어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비난이 전부라면 결코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담긴 부요함에 참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3:20-21)이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한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누리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큰 법칙이 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원칙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 부요함과 신실함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역설이 담긴 text어떻게 대할 것인가?

         

        보수주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보수주의가 대면하고 있는 과제이다. (1) 유신론 안에서 전체 세계관이 항상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2) 교회가 (죽은) 전통주의 항목, context가 배제된 채로 text에 집착하는 경향을 지녀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말하는 성경으로서 text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제임스 사이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필연과 자유를 관념의 세계에서 생각지 않고, '신 앞에 서 있다' 하는 현실에서 생각한다면, 그리고 내가 '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으며' 동시에 '모든 것은 내개 달렸다'는 것을 안다면, 이 두 개의 조화될 수 없는 명제를 두 개의 분할된 타당성의 영역에 돌림으로써 내가 살아가야 할 역설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또는 어떤 신학적 기교로써 이 둘의 관념적 화해에 도움을 주려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스스로 취하여 함께 살아야 하며, 또한 함께 살 때만 이 두 가지는 하나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 “모든 정황에 네가 들어가 살아라.” 이 명령을 기억하라. 이럴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반면에 text에서 보이는 역설을 잘못 수용할 때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신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역설적으로 이해한 진술이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의 입장을 비역설적으로 진술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2) 대부분의 비역설적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거나 인간의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즉 그들은 펠라기안이거나 극단적 초칼빈주의로 흐른다. 펠라기안주의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로 책임을 넘긴다. 초칼빈주의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넘긴다.

         

        3) 역설을 의지하는 것의 약점은 멈취야 할 지점(경계)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계를 정할 외적인 객관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역설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 지점을 알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5. 신학과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

         

        과연 신학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에게인가, 아니면 인간에게인가? 여기에 하나님과 학문의 대립이 있다. 계시와 인식의 대립이 있다. 사실과 의미의 대립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학문의 대상일 수 없다. 곧 신학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학이 존재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인식을 위해 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의미를 가지기 위해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그리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우연 속에 있는 존재라면, 의미와 이해와 객관적 기준을 가지지 못하며 다만 억지가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실은 우연으로부터인가, 필연으로부터인가? 우연이면 사실은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 허무주의에 불과하며, 역사는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곧 역사가 우연이라 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그 필연을 만드신 분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미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역사의 사실은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실패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에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근거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 곧 인간은 자신과 현실을 설명할 세계관을 필요로 하고, 대부분은 내용보다 어떤 주류나 인물로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다만 지도자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 보전 하려고 한다. 자기가 아닌 칼빈이나 박윤선을 내세우는 것으로 모두를 납득시키려 한다. 그리고 칼빈을 모르면, 박윤선을 모르면 신학이 다르다고 함으로써 책임을 모면하거나 그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한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위대한 장수라고 하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내세운다. 그런데 그들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복종한 무지하고 순종적인 병졸들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병졸들을 보아야 한다.

         

        병졸들의 무지와 순진은 절대적 다수에게 준 복이다. 그러니 지도자들이라면 우월함으로 자신을 확인하려말고 유통업자 같은 역할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기쁘신 은혜에 속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승인이나 획득이 필요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공감하거나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의존의 책임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가지는 것이다. 때문에 교육과 진심으로 그들을 공감시켜서 자신의 짐을 덜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존적, 인격적 요소인 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1) 실존적이라는 말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12:1). 삶으로써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2) 인격적이라는 말은 기계적이지 않고 더 풍성하고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풍요롭고 풍성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6. 결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 하나님은 폭풍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신다(40:6).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욥에게 보이신다. 그러자 비로소 욥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2-3)라고 실토하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5-6)라고 고백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그리고 땅을 보라.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을 보라. 이것들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바로 사망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다. 곧 부활 사건이 그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내일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오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이유와 자격 없이 어느 시대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내셨고 세우셨음을 자랑스러운 명예로 여겨야 한다.

         

         

        출처: 기독교개혁신보
        생명나무 쉼터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 조엘 비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은혜’라는 히브리어와 그 파생어들은 ‘친절함, 은총, 인자하심’을 뜻한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선한 뜻, 인자, 은총’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구속 사역에서 죄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당연히 받아야 할 진노에 대한 과분한 은총을 의미한다. 은혜란 불행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값을 치르고 수여된 복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실행에 옮기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강하고 우리의 모든 역경과 인간적인 불가능을 이기는 강력이다. 은혜는 성경의 핵심이지 우리의 구원의 핵심이다.

         

        은혜는 불행과 지옥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들(전적 타락)을 구원하는 것이 오직 삼위 하나님의 사역임을 가르쳐 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께서 이 은혜의 사역에 참여하고 공헌하신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의미는,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백성들을 성령께서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구원하시는 일에 결코 실패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그 의도를 성취할 것이다. 구원적 은혜의 대상자들은 틀림없이 구원받고 말 것이다.

         

        도르트 신조 제3,4교리 제11항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택자들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실 때, 또는 그들 안에서 참 회심으로 역사하실 때에는, 외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분별하게 하신다. 또한 거듭나게 하시는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사 닫힌 것을 여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받지 못한 것을 할례받게 하시고, 지금까지 죽어 있던 의지를 살려서 새로운 활력을 갖게 하여 악함과 불순종함과 완고함으로부터 돌아서서 선하고 순종하고 온순하고 활기차고 강하게 하여, 마치 좋은 나무처럼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0장1절 역시 불가항력적 은혜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 단지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렇지만 그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을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된다.”

         

        불행하게도 불가항력적이라는 용어는 의지를 향한 죄인의 변덕스러운 힘이나 폭력을 암시할 수도 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매우 강력하고도 강제적인 것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상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영접했던 사람들보다 더 기쁘고도 즐거우며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91-197

         

         

        출처: http://blog.daum.net/kds201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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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 박영선 교수, 남포교회,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

         

        이 원고는 20131129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박영선 교수 은퇴 기념강좌의 내용을 강의안에 의존하여 임의로 발췌한 것입니다. 원고의 일부 내용 중 미흡한 점이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발췌자 : 송영찬 국장>

         

        인류 역사 속에서 보수주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하고 명예로운 것에 대하여 그다지 깊은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야 하는 보수주의는 이 시대에 과연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궁색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보수주의를 통해 누가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우리는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이라도 실패한 적이 없으셨다. 심지어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실패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보수주의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가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Text(역사적 사실)Context(역사적 의미)

         

        보수주의는 역사성의 인식에서부터 자유주의와 다르다. 보수주의는 역사, 곧 사실을 하나님의 경륜과 약속의 시행으로 본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역사, 곧 사실보다는 실존의 공감과 이해에 우선을 둔다. 그 결과 사실보다는 그 의미에 치중한다. 보수주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한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보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미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사실(text)을 담고 흘러간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55:8-11)라고 선언하신다.

         

        그렇지만 역사라고 하는 시, 공간 속에서 사실(text)과 정황(context)의 구별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정황(context)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개인의 신앙체험에서 보듯이, textcontext와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text는 그 특정한 context 이외의 것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자유주의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특히 인문학자들에게 있어 역사의 context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들은 text를 무시한 채 역사를 '반복'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인생을 '윤회'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들은 역사 속에 녹아든 text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학교를 보는 것과 같다. 학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학교 자체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매년 학생들이 입학하고 승급하고 졸업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윤회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또한 해마다 학생들의 입학과 졸업이 반복된다고 해서 학교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정황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틀은 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찾아오심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밭에 감춰진 보화는 그 context의 보잘 것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text 자체를 무시케 하게 만든다. 그와 같이 말구유는 역사지만 그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조작되거나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text를 감싸고 있는 context를 더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보수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문, text를 존중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그 text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계시이다. 특히 구약이 그렇다. 구약에는 문맥이 있다. 그 문맥이 없다면 신약조차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보수주의는 하나님만이 주도권과 능력을 행사하시며 그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신학 원리로 고백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textcontext 없이 전하면, 다만 고함과 공허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context 속에서 text를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 전후 사정이 없다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

         

        구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해서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충돌을 통해 자신을 보이셨다. 그것이 바로 계시였으며 이 계시는 전인격적인 성숙을 그 목적으로 주어졌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contexttext 자체, 또 이해와 설득이 모두 하나님께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의 내용과 사실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근거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야곱이 경험한 벧엘 사건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창세기 2810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야곱에게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신다. 야곱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이시다. 조부와 부친의 하나님 곧 과거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야곱의 하나님 곧 현재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조상들에서 하신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여기에서 그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2.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하나님의 역사성으로 실제가 된다. 곧 역사라고 하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야곱은 역사의 문맥인 정황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가 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유산(모태 신앙), 체험(극적 회심), 기복(현실)이 동기가 되거나 정황(context)을 가지는 경우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서 text를 만나게 된다.

         

        둘째는 개인 현실에서 느끼는 실존적 결단, 현실적 필요, 정체성의 질문 등에 의해 구체화 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특성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정황(context)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오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 특성을 전부 가지거나 균형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의 정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인정한다. 감리교에서는 헌신과 열정을 강조하게 된다. 순복음에서는 체험적 신앙을 그 정점으로 가진다. 이런 것들은 모두 text의 정황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 그 결과 설명이 달라진다. 본문, text는 동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황을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서로 신학이 다르다고 매도하면 안 된다.

         

        잘 아는 것처럼 각자 자신이 정황을 이해하는 방법들의 다양성, 즉 그 장점들이나 또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거나 증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변증이고,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균형과 종합을 위해 하나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신학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방식과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정황 이해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에서는 context를 공감하고 납득하는 방식을 취한다. 거기에는 남다른 열심과 정열이 있다. 심지어 감동과 환희, 사색과 성찰도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이 방면에서 많은 고뇌를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체험주의이거나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정황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시도들 때문이다. 반면에 보수주의, 특히 장로교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

         

        보수주의는 일종의 원어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이 모국어인 자신들은 실상 자기가 가진 유산을 잘 모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를 한다. 특히 문법과 철자를 사용함에 있어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들이 원어민들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신앙 그 자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성경 원어나 성서 역사의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별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심지어 불어까지도 공부한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잘 아는 것처럼 언어()는 역사와 유산으로 만들어 진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text를 대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역사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거기에서 구체적인 정황을 찾으며 마침내 역사의 완성을 보고 있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은 체험(확인), 헌신(열정), 공감(실존) 등이 결국 하나님의 크기와 약속과 능력 그리고 성품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혹시 그와 같은 모든 정황들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보수주의는 결국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역사의 완성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비록 자기 자신이 속한 역사의 성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정황을 해석하고 변증함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인 신학이라거나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다름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 배타적일 때 기독교 신앙을 훼손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 사실을 교회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가톨릭에서는 장엄한 형식과 아름다움에 text를 담아 자신들의 진심을 표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그래서 가톨릭은 성상이나 성화와 미사 혹은 화려한 예식(일곱 성례)와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러한 가톨릭의 형식이 오히려 text를 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로써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들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선포 위주의 방식을 택했다. 이때부터 설교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계몽주의 영향을 받게 되자 설명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통적인 선포 위주의 설교를 설명 위주의 설교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한 설명을 통해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신앙을 납득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 방식이다.

         

        또 다른 방식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사실이 중시된 선포에서 사실은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만을 강조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이로써 사실은 더 이상 실제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방식이다. 이 자유주의에서는 내용의 공감만을 강조하게 된다.

         

        3. 자유주의를 향한 질문

         

        자유주의에서는 text보다는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에 강조점을 둔다. 때문에 그들은 초시간적 추상적 개념들에 초점을 둔다. 한마디로 이것은 환상적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이 추상적 개념들을 도입함에 있어 실존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을 실감해야 할 자아, 곧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고무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앙으로 이끄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자칫하면 이 길만이 신앙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인식론을 향해 질문해야 한다. 인간이 다만 신적 의지와 능력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라면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수주의 곧 개혁주의는 답을 해야 한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선택과 책임은 명예요 영광이다.

         

        둘째, 그러나 인간의 공감과 이해에 의해 성립되는 신의 존재나 의지일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움과 피조물로서의 한계와는 진정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셋째, 신앙인의 감격은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선하심과 능력에 근거한다.

         

        성경은 이상의 사실들을 증거한다. 곧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언한다. 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진술이다. 생각한다고 해서 존재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존재만 인정하게 되면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무척이나 성경 본문에 충성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지만 생각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는 인간의 이해에 묶인 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자유주의가 말하듯, 공감을 요구한다는 점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근거가 되거나 출발점은 되지 못한다. 나와 현재라는 정점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한편, 하나님의 임재가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여러 죄악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선지서들은 징벌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은 은혜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도덕이 아니며, 윤리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곧 하나님의 없음이 벌이고 그것이 곧 재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상을 볼 때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 분명해진다.

         

        먼저 (1) 교리를 외우듯이 거대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누려야 한다. 이 교리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리는 나중에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 인격이 따라야 한다. 곧 하나님의 일하시는 정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리를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타인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배우는 것과 같다.

         

        집나간 자식이 정신 차리는 문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증명한다. 반면에 집에 있는 자신의 유익과 명예에 대한 책임도 말하고 있다. 큰 아들에게 있어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비난이 전부라면 결코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담긴 부요함에 참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3:20-21)이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한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누리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큰 법칙이 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원칙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 부요함과 신실함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역설이 담긴 text어떻게 대할 것인가?

         

        보수주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보수주의가 대면하고 있는 과제이다. (1) 유신론 안에서 전체 세계관이 항상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2) 교회가 (죽은) 전통주의 항목, context가 배제된 채로 text에 집착하는 경향을 지녀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말하는 성경으로서 text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제임스 사이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필연과 자유를 관념의 세계에서 생각지 않고, '신 앞에 서 있다' 하는 현실에서 생각한다면, 그리고 내가 '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으며' 동시에 '모든 것은 내개 달렸다'는 것을 안다면, 이 두 개의 조화될 수 없는 명제를 두 개의 분할된 타당성의 영역에 돌림으로써 내가 살아가야 할 역설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또는 어떤 신학적 기교로써 이 둘의 관념적 화해에 도움을 주려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스스로 취하여 함께 살아야 하며, 또한 함께 살 때만 이 두 가지는 하나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 “모든 정황에 네가 들어가 살아라.” 이 명령을 기억하라. 이럴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반면에 text에서 보이는 역설을 잘못 수용할 때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신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역설적으로 이해한 진술이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의 입장을 비역설적으로 진술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2) 대부분의 비역설적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거나 인간의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즉 그들은 펠라기안이거나 극단적 초칼빈주의로 흐른다. 펠라기안주의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로 책임을 넘긴다. 초칼빈주의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넘긴다.

         

        3) 역설을 의지하는 것의 약점은 멈취야 할 지점(경계)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계를 정할 외적인 객관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역설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 지점을 알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5. 신학과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

         

        과연 신학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에게인가, 아니면 인간에게인가? 여기에 하나님과 학문의 대립이 있다. 계시와 인식의 대립이 있다. 사실과 의미의 대립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학문의 대상일 수 없다. 곧 신학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학이 존재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인식을 위해 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의미를 가지기 위해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그리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우연 속에 있는 존재라면, 의미와 이해와 객관적 기준을 가지지 못하며 다만 억지가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실은 우연으로부터인가, 필연으로부터인가? 우연이면 사실은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 허무주의에 불과하며, 역사는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곧 역사가 우연이라 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그 필연을 만드신 분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미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역사의 사실은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실패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에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근거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 곧 인간은 자신과 현실을 설명할 세계관을 필요로 하고, 대부분은 내용보다 어떤 주류나 인물로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다만 지도자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 보전 하려고 한다. 자기가 아닌 칼빈이나 박윤선을 내세우는 것으로 모두를 납득시키려 한다. 그리고 칼빈을 모르면, 박윤선을 모르면 신학이 다르다고 함으로써 책임을 모면하거나 그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한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위대한 장수라고 하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내세운다. 그런데 그들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복종한 무지하고 순종적인 병졸들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병졸들을 보아야 한다.

         

        병졸들의 무지와 순진은 절대적 다수에게 준 복이다. 그러니 지도자들이라면 우월함으로 자신을 확인하려말고 유통업자 같은 역할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기쁘신 은혜에 속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승인이나 획득이 필요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공감하거나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의존의 책임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가지는 것이다. 때문에 교육과 진심으로 그들을 공감시켜서 자신의 짐을 덜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존적, 인격적 요소인 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1) 실존적이라는 말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12:1). 삶으로써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2) 인격적이라는 말은 기계적이지 않고 더 풍성하고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풍요롭고 풍성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6. 결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 하나님은 폭풍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신다(40:6).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욥에게 보이신다. 그러자 비로소 욥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2-3)라고 실토하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5-6)라고 고백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그리고 땅을 보라.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을 보라. 이것들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바로 사망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다. 곧 부활 사건이 그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내일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오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이유와 자격 없이 어느 시대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내셨고 세우셨음을 자랑스러운 명예로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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