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지옥에 가야 할 사악한 괴물입니다!


사람들이 다시 성경적인 회개를 하기를 원합니다.


조지 휫필드는 알고 있었습니다.

2만명이 모인 집회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지옥에 가야 할 사악한 괴물입니다.

가장 사악한 범죄는 당신들이 범죄자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죄 짓기를 중단하지 않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개탄했습니다.

그는 머리를 재치고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그들이 지옥에 갈까 걱정 되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악한 죄인들이면서

자신들의 죄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점을 분별하겠습니까?

차이점은 어떤 사람들은 지옥의 고통이 두려워 떱니다.


자신의 죄의 중대함과 범죄의 크기,

신성 모독에 대한 죄는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지옥에서 피부가 그을릴까봐

두려워 떤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성령께서 비통함으로

이르게 준비해주시는 선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기 전에는

아무도 주를 영접할 수 없고

성령께 찔림 받기 전에는 죄를 회개할 수 없습니다.


죄를 회개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자신이 지옥에 가야 할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며 영원히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과 그보다 100배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범죄입니다.

이것이 20세기 설교와

존 웨슬리의 설교의 다른 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공의를 높이고 하나님의 정의와 진노

그리고 인간이 짓는 죄의 중대함과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 반역, 불법,

방종에 대해 설교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청중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해

기록에 의하면 한 번은 1800명의 사람들이

완전히 의식을 잃고 기절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빛 가운데 비친

자신들의 죄의 중대성에 대한

계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꿰뚫고 들어가셨기에 그들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것은 오직 웨슬리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미국 케네티컷 주의 뉴헤븐과 예일에서

웨슬리와 휫필드는 3년간 연속해서 사역을 했습니다.


18세기 예일 보에서 커다른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 당시 경찰들은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에게서

술 냄새가 나면 감옥에 가두었지만

술 냄새가 나지 않으면 웨슬리, 휫필드 병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휫필드 병에 걸린 사람들은

야외에 버려두면 깨어나 술주정뱅이는 술을 끊었고

잔인한 사람은 잔인한 행동을 중단했고

부도덕한 자들은 행실을 바꿨으며

도둑은 훔친 물건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고

자신들의 죄에 대한 중대함을 깨닫자

성령이 그들을 기절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무게 때문에 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회개케 하여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에게

그들과 나쁜 하나님과의 사이에 문제가 있으니

해결해야 한다고 설득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쁜 인간들에게

그들이 선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설교했습니다.


그 결과는 회개였습니다.

그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회개였습니다.


회개를 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경배와 예배, 사랑과 순종을 받아 마땅하시기 때문이지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옥 가는 길을 피해 천국에 가려고 회개 한다면

당신은 10세겔과 옷 한 벌을 벌기 위해 섬기는 레위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유익한 것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란 하나님처럼 행동했던

죄의 중대함과 공의로운 하나님께 그분이

받아 마땅한 예배와 순종을 드리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왜 죄인이 회개해야만 합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께 드리기를 거부하고 있는

순종과 사랑을 당연히 받으셔야 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회개하는 이유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면

당신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글쓴이: 하나님의 동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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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휘트필드의 구원간증

죠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죤 웨슬리(John Wesley) 등과 함께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말씀의 불꽃으로 
한 시대를 불태운 당대 최고의 설교자였습니다. 

휘트필드의 사역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 중부지방에 위치한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불행한 편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두 살 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 결과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잘 받지 못하다가 
12살이 되어서야 교회 부설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5살 때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를 돕기 위해 약 1년 반 정도 학업을 중단하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여인숙 급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 4살 때에 홍역을 앓다가 
간호사의 실수로 인해 생긴 흉 때문에 사팔뜨기처럼 보여서 
별명이 “사팔뜨기”가 되기도 한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18세에는 식비와 수업료를 

면제받는 대신에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대학(Pembroke College)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1732년). 

당시 근로 장학생은 부유층 자제들의 방청소와 
심부름 등 시중을 들면서 공부하는 조건이었으므로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이 옥스퍼드 시절이야말로 
바로 그가 거듭남을 경험한 소중한 때였습니다. 

그는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여인숙에서 일을 마친 후에는 
늘 성경을 읽었습니다”고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은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영적인 부분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성경 외에도 
“켄의 윈체스터 학자들에 대한 안내서"라는 책과 
윌리엄 로(William Law)가 쓴 
”경건한 삶에로의 진지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외에 그는 많은 청교도들의 책을 포함해서 
고전들과 전기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그가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휘트필드는 청소년기에 
죄에 대해 심각한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때 
종종 어머니의 돈을 훔치면서도 그것을 하찮게 여겼고, 
거짓말이나 욕설, 저주의 말, 어리석은 농담 등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휘트필드는 
“어린 시절의 범죄와 죄악들은 셀 수 없어서 
그것들은 내 머리털보다 더 많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나는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고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내 마음 속에 없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강했지만 
동시에 죄를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죄에 대한 심각한 갈등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기도와 금식으로 수많은 날들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그가 옥스퍼드로 진학한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그가 거듭남을 경험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 가운데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고민 없이 
죄사함의 경험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면서 
온갖 굴욕적인 상황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는 근면한 자세를 가지고 성실하게 대학시절을 보냈고 
글로스터에서처럼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죤 웨슬리, 챨스 웨슬리 등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던 “홀리 클럽(Holy Club)"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철저한 
자기훈련으로 경건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많은 선행과 경건생활이 
자신들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휘트필드 자신도 
이러한 경건의 훈련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는 수단이 될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거듭남”이라고 되어 있는 바로 그 경험이었습니다. 

렸을 때부터 죄 문제와 갈등하면서 
참 자유를 추구해 온 그에게 마침내 
진리의 빛이 임한 것입니다. 

어느 날 챨스 웨슬리가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
이란 책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 책은 휘트필드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허물고 거듭남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는 책을 접하고 난 뒤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듭나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성찬에 참여할지라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책을 태워버릴까? 던져 버릴까? 
아니면 그것을 한번 추구해 볼까? 

나는 그 책을 계속 읽었고, 
그 책을 손에 들고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제가 마지막에 멸망당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제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소서!.....

나는 금식을 해왔고 철야도 했으며, 
기도와 성례참여 등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친구를 통해서 그토록 귀한 책을 
나에게 보내 주시기 전까지 나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몇 줄 더 읽어나가는 동안에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거룩한 광선이 내 영혼 위에 비쳤고, 
그때야 비로소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종교적인 경건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깨뜨리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그로 하여금 기독교 내에서의 종교생활과 경건, 
선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며 
이러한 삶을 철저히 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거듭남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휘트필드는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은 
자기 부인과 불타는 경건을 통해 오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자 
그는 홀리 클럽과의 관계를 끊고 간단한 빵과 차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간절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의 쇠잔함과 정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정으로 계속해서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휘트필드는 1735년 어느 날, 
로마서 8:15-16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휘트필드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양자의 영(롬 8:15)"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 날 비추어주시는 은혜의 빛을 통해 
휘트필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당시의 체험을 이렇게 간증합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면서(은혜를 갈망하면서) 침대에 몸을 던졌습니다. 

잠시 후 곧바로 나는 나를 매우 심하게 억압하고 있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탄식하는 영께서 나를 취하셨고 
나는 내 구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가는 곳마다 
시편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내 기쁨은 점점 내 영혼에 자리잡게 되었고,
따라서 나의 탄식하던 날이 종결되었습니다.

휘트필드의 거듭남의 체험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체험한 거듭남은 
그의 영적생활과 사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거듭남"은 평생 동안 
그의 수많은 설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잊을 수 없는 이 거듭남의 
체험에 대하여 평생 동안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던 그 날을 회고하면서 
휘트필드는 "그 기쁨은 마치 강둑에서 범람하는 
홍수와 같아서 말로 형언할 수 없었으며, 
그 날은 영원히 기억될 날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휘트필드는 거듭남을 체험하고 
그 놀라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간증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며 
“나는 내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사실을 알렸고 내 방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도 
그 일을 말했습니다”고 했습니다.

(윗 글의 대부분의 자료는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휘트필드
(송삼용 저, 생명의 말씀사, 1998)”
에서 발췌한 것임).


위에서 보았듯이 휘트필드는 
어느 누구보다 경건한 삶을 훈련하며 살았지만, 
이러한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거듭남을 
경험해야 한다는 도전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영혼의 괴로움 가운데 기도하며 
간절히 거듭남을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그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셨고, 
그가 모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로마서 8:15-16 말씀을 통해 
거듭남의 선물을 은혜로 베푸셨습니다. 

이 거듭남은 휘트필드처럼 
나중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예

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입니다. 

즉,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가 아무리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경건하다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자신의 경건함이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하고 
연약한 죄인인지 올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휘트필드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절망감을 느끼게 하시고, 
자신을 구원하시는 온전한 하나님 은혜를 경험케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분명한 거듭남을 경험했습니까?


카페: 신약성경적인 교회



받은 은혜를 감사하라

 

조지 휫필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소원한 상태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줄만한 표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은 감사와 찬송의 임무를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낙원에 두셨을 때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풍성한 감정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복됨 안에서 살게 됩니다.

 

1. 구속받은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찬양과 감사태초에 인간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종종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섬기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된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우리의 심령을 감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이 열려 여호와의 자애로우심을 노래하거나 그의 찬양에 대하여 말하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찬양과 사모함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임무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은 전 인류에게 매일 그의 복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사랑과 흠모를 나타내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른 은총들도 마치 자기들의 공적으로 받은 것인 양 감사하지 않습니다.

 

 

1)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이며 ,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타락한 인간을 신나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경향을 가진 이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은총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가까이 다가올 때 그것들은 더 큰 효과를 발합니다. 성도들은 그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 사실들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주 여호와로부터 수천 가지 복을 받은 자들 중에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감사할 줄 몰랐던 문둥병자들에 대한 기록은 인간들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지를 잘 예증합니다. 병에서 고침 받거나 심한 고통가운데서 해결함을 받고 정말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은 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상황입니다.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이런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것은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과 정반대의 성품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성도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7,18).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2)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이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항상 상기시켰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습니다. 실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지금도 태양으로 낮을 달로 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물이 갈라져 육지같이 건너는 것을 본적이 없고, 왕과 그의 군대에 의해 추격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다른 배에 의해서 침몰 할 수 있는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실로 무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을 행운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과 선견지명으로 이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섭리하심이 모든 것을 관할하십니다. 바람과 바다고 그의 말씀에 잠잠케 되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때는 가라고 명하시매 바람이 가고, 때로는 오라고 말씀하시매 바람이 왔습니다. 우리가 엄청난 광풍 속에서 그 파도를 타고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2.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는 까닭

 

1) 감사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가장 약한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못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그의 행사를 인하여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그분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같이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오직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의 무한한 사랑의 끈으로 여러분을 단단히 잡아매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순종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그분보다 더 나은 주인을 결코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를 섬기는 것이 가장 완벽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상급이 주어지고 이후에는 결코 썩지 않는 면류관을 주십니다.다른 주인들은 여러분들에게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며 이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준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설혹 모든 세상을 준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분 없이는 여러분은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영적 삶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지만 또한 의로운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을 많이 받을수록, 우리가 받은 복만큼 우리의 영적 삶을 진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후에 받을 저주가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함께 항해한 군인들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선원들에게 주는 당부

 

1) 행실을 선하게 하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곳 주변은 엄청나게 많은 이교도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방인들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름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간 헤롯의 군사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조소거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여러분들이 이 땅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보도 많이 누렸던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말씀의 기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나치게 많은 영적 양식으로 과식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적 진보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패 할 수 없고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저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꺼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함으로 인해 제가 사랑을 덜 받을지라도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2) 옳은 일에 장부가 되십시오.낙심치 말고 강해지고 대장부가 되십시오.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겁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행동하십시오. 용감히 행동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모든 난제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더 나아가 여러분들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불평하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3) 혀를 주의하고 마음의 정결을 지키십시오.여러분들의 아내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혼식 때 엄숙한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자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의 문을 굳게 지키도록 조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로 남을 공격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사랑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리하여 기도가 막히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둔 여성들은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이 되게 하여 정결치 못한 여자로 의혹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4) 영혼이 폭풍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십시오.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회개하지 않고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폭풍은 우리를 순식간에 삼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심스럽게 항해하기 위해 나침반을 살펴보는 것처럼 믿음의 파선을 방지하고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 말씀에 눈을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5)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오늘 듣고 있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병들었을 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취하실 때의 결단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약속에 따라 그분께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입술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표현하십시오. 비록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흠모하시기 바랍니다. 6)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은 유혹의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될 준비가 된 자들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결코 헤어짐이 없는 그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하는 데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필경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과 일에 있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그리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고 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7) 입술로가 아니라 삶으로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심령을 주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면 크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을 포구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험한 파도와 고통의 순간들을 다 이기게 하시고 여기로 도달하게 하셨기 때문에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직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할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인들을 노래하며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른 모든 노래와 더불어 그분을 찬양할 것입니다

 


* 받은 은혜를 감사하라 (조지 휫필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소원한 상태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줄만한 표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은 감사와 찬송의 임무를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낙원에 두셨을 때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풍성한 감정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복됨 안에서 살게 됩니다.

 

 

1. 구속받은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찬양과 감사

 

태초에 인간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종종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섬기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된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우리의 심령을 감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이 열려 여호와의 자애로우심을 노래하거나 그의 찬양에 대하여 말하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찬양과 사모함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임무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은 전 인류에게 매일 그의 복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사랑과 흠모를 나타내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른 은총들도 마치 자기들의 공적으로 받은 것인 양 감사하지 않습니다.

 

1)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이며 ,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신나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경향을 가진 이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은총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가까이 다가올 때 그것들은 더 큰 효과를 발합니다. 성도들은 그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 사실들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주 여호와로부터 수천 가지 복을 받은 자들 중에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감사할 줄 몰랐던 문둔병자들에 대한 기록은 인간들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지를 잘 예증합니다. 병에서 고침 받거나 심한 고통가운데서 해결함을 받고 정말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은 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이런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것은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과 정반대의 성품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성도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7,18).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2)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이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항상 상기시켰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습니다. 실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지금도 태양으로 낮을 달로 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물이 갈라져 육지같이 건너는 것을 본적이 없고, 왕과 그의 군대에 의해 추격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다른 배에 의해서 침몰 할 수 있는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실로 무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을 행운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과 선견지명으로 이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섭리하심이 모든 것을 관할하십니다. 바람과 바다고 그의 말씀에 잠잠케 되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때는 가라고 명하시매 바람이 가고, 때로는 오라고 말씀하시매 바람이 왔습니다. 우리가 엄청난 광풍 속에서 그 파도를 타고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2.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는 까닭

 

1) 감사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가장 약한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못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그의 행사를 인하여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그분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같이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오직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의 무한한 사랑의 끈으로 여러분을 단단히 잡아매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순종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그분보다 더 나은 주인을 결코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를 섬기는 것이 가장 완벽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상급이 주어지고 이후에는 결코 썩지 않는 면류관을 주십니다.

 

다른 주인들은 여러분들에게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며 이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준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설혹 모든 세상을 준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분 없이는 여러분은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영적 삶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지만 또한 의로운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을 많이 받을수록, 우리가 받은 복만큼 우리의 영적 삶을 진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후에 받을 저주가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함께 항해한 군인들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선원들에게 주는 당부

 

1) 행실을 선하게 하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곳 주변은 엄청나게 많은 이교도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방인들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름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간 헤롯의 군사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조소거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보도 많이 누렸던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말씀의 기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나치게 많은 영적 양식으로 과식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적 진보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패 할 수 없고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저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꺼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함으로 인해 제가 사랑을 덜 받을지라도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2) 옳은 일에 장부가 되십시오.

 

낙심치 말고 강해지고 대장부가 되십시오.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겁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행동하십시오. 용감히 행동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모든 난제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더 나아가 여러분들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불평하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3) 혀를 주의하고 마음의 정결을 지키십시오.

 

여러분들의 아내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혼식 때 엄숙한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자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의 문을 굳게 지키도록 조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로 남을 공격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사랑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리하여 기도가 막히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둔 여성들은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이 되게 하여 정결치 못한 여자로 의혹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4) 영혼이 폭풍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회개하지 않고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폭풍은 우리를 순식간에 삼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심스럽게 항해하기 위해 나침반을 살펴보는 것처럼 믿음의 파선을 방지하고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 말씀에 눈을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5)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오늘 듣고 있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병들었을 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취하실 때의 결단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약속에 따라 그분께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입술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표현하십시오. 비록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흠모하시기 바랍니다.

 

6)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은 유혹의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될 준비가 된 자들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결코 헤어짐이 없는 그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하는 데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필경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과 일에 있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그리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고 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7) 입술로가 아니라 삶으로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심령을 주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면 크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을 포구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험한 파도와 고통의 순간들을 다 이기게 하시고 여기로 도달하게 하셨기 때문에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직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할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인들을 노래하며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른 모든 노래와 더불어 그분을 찬양할 것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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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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휫필드 12 - 휫필드의 설교 연구 / 송삼용 목사

 

 

 

휫필드의 설교 연구  

 

송삼용/전주 서부중앙교회 담임목사

 

35.휫필드의 설교 연구

 

1)휫필드의 설교에 대한 소명

한 세기를 말씀의 불꽃으로 활활 태웠던 휫필드의 설교사역을 통해서 입증된 바와 같이. 그는 분명 평범한 설교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존라일(J.C.Ryle)이 휫필드를 가리켜서 설교에 관한 한 18세기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했던 것처럼, 그는 세기적인 탁월한 설교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휫필드로 하여금 그렇게 탁월한 설교자로 만들었을까? 어떤 사람은 휫필드의 설교의 탁월성을 말할 때 그의 뛰어난 웅변력을 포함한 천부적인 자질에 대해서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휫필드가 설교자로서 최상의 재능들을 골고루 갖추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그는 일찍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좋은 음성과 효과적인 의사 전달 능력, 설교의 태도와 동작. 그리고 어휘의 구사력 등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개혁 신학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라고 평가되어 온 '로이드 존스'가 정의한 바에 의하면, 설교란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스런 복음을 전달하는 연설이다." 그렇다면 휫필드가 아무리 뛰어난 웅변력과 설교자로서의 자질을 잘 갖추고 있었더라도 그러한 탁월한 연설의 능력만으로 한 세기의 설교의 정상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휫필드는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을 느끼지 못하고 설교한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그의 탁월한 설교는 성령의 능력과 뛰어난 웅변력, 그리고 천부적인 설교자의 자질 등이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작품이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필자는 휫필드의 설교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휫필드의 설교에 대한 소명과 관점들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휫필드의 초기 생애 가운데서 발견 할 수 있는 ‘설교에 대한 소명과 확신'은 휫필드가 일생동안 설교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데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죽는 한 이 있어도 설교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지막 죽기 전날 밤늦게까지 설교를 마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정도로 설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설교를 위해 살다가 설교 하다가 죽은 사람이었다. 그는 수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의 집회로 부터 소규모의 권면 설교에 이르기까지 34년동안 4만여 번의 설교를 강행했으니, 그야말로 '설교 인생'을 산사람이었다. 휫필드가 그와 같이 설교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소위 '설교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초기에 가졌던 설교에 대한 불타는 소명과 확신이 가져다준 열매였다. 필자는 휫필드의 설교에 대한 소명과 확신이야말로 그의 설교를 그처럼 활활 불태울 수 있었던 장작과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 확신한다. 설교에 대한 휫필드의 소명과 확신은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휫필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교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목회자가 되기로 결단하고 종종 목사 흉내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휫필드의 결단은 그의 초기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생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휫필드의 설교자로서의 소명에 대한 확신은 그러한 헌신의 결단에 의해서만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휫필드 자신이 나중에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밝힌 바이지만, 자신은 설교자로서기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확신하기 위하여 땀을 비오듯 쏟으며 수천 번을 기도했다고 고백한 말 속에서 , 그의 불타는 소명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그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 수천 번을 부르짖으면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할까! 휫필드는 설교자로서 그의 인생을 출발하기 전에 뼈를 깍고 살을 베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수천 번을 눈물로 기도하며 ,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는지를 확인함으로서 그렇게 열정적인 설교 인생을 사는데 견고한 기초를 세웠다.

 

둘째, 휫필드는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확신했다. 그는 최초의 설교를 마치고 자신은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설교했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증언한 바있다. 휫필드는 처음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권위에 의해서 붙들린 바 되었고, 자신의 영혼에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한 것을 체험한 후 그 확신 가운데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휫필드는 설교를 통해서 한 말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하신 말씀이라는 확신 가운데 설교함으로서 영적인 권위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망으로 가득 찰 은밀한 기도가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한 주간에 40-60여 시간씩 수천. 수만 명의 군중들에게 설교하고 난 후에도 저녁에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과 권세를 공급받기 위해서 기도로 씨름하면서 보낼 정도였다.

 

휫필드는 자신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무장할 때 죽어가는 영혼들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휫필드는 자신이 설교할 때마다 청중들 위에 복음의 권세가 가득하며 , 성령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설교할 수 있었다. 휫필드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더욱 강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설교자로서의 영적인 책임감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 외에 어떠한 교훈과 연설도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더구나 그는 여러 차례 말씀의 권세 앞에 거꾸러졌던 체험이 있었다. 따라서 말씀의 권세에 사로잡힌 바 된 휫필드는 일생 동안 그 말씀의 권세를 확신하며 설교함으로서 당시에 죄에 대해서 감각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던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휫필드는 설교자의 위대성을 확신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설교는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거룩한 사역이었다. 그는 설교의 사역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한 하나님의 소명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거룩한 노동(hoIy labour)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 그는 설교자의 위대성을 발견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거룩한 노동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천군 천사도 부러워할 위대한 일꾼들이었다. 휫필드는 최종적으로 설교자의 길을 결단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날들을 기도와 번민으로 보냈다.

 

그 이유는 그토록 위대하게 생각했던 설교자의 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한 두려움과 번민 가운데서 휫필드는 설교자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다.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설교 사역을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자신의 영혼과 몸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렸다. 휫필드는 설교자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과 피와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고 설교사역을 위해 자신을 헌신했다. 그는 설교자의 위대성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2)휫필드의 설교 준비

18세기 중엽 영국 전역과 미국에서 설교에 있어서 휫필드 만큼 많은 영향을 끼친 설교자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휫필드를 가리켜 영어권 설교 역사 가운데 최대의 설교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아니한 이유가 바로그것이다. 그처럼 위대한 설교자 휫필드는 설교를 어떻게 준비했을까? 휫필드의 설교준비는 네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휫필드는 광범위한 독서를 중단하지 않았다. 휫필드의 설교관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고 긴박한 메시지의 선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준비 없이 선포하는 즉흥 설교는 아니었다. 대체로 휫필드는 탁월한 웅변력에 의존하면서 준비 없이 행한 즉흥 설교자라고 인식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의 뛰어난 웅변술 때문에 흔히 그의 설교 준비에 관한 부분들은 쉽게 지나쳐왔다. 하지만 휫필드는 옥스포드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는 가운데 무려 150편의 설교를 준비하려 했던 시도나 현재 출판되어 보존된 70여 편의 설교내용을 볼 때 그가 설교준비에 소홀히 했다거나 준비 없이 행한 즉흥설교자였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심지어 초기에 그는 철저히 설교를 준비해서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들을 정도로 설교 준비에 철저한사람이었다.

 

휫필드의 설교 준비에 있어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광범위한 독서를 중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광범위한 독서는 다양한 주제와 소제로 읽어가며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실로 휫필드의 지식의 창고에는 항상 풍성한 메시지의 재료가 가득 차 있었다. 결국 그의 불같은 메시지는 이미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서 축적된 다양한 지식들로부터 나온 것들이었다. 휫필드가 사람들에게 독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개발할 것을 권면하면서 추천했거나 언급한 책들은 약350여 권이나 될 정도였으니 . 그가 어느 정도 독서에 충실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휫필드의 사상과 설교의 배경이 광범위한 독서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휫필드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가 광범위한 독서를 중시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집중했던 책은 역시 '성경' 이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기쁨으로 행하였다. 그는 주로 헬라어 성경을 사용하면서 본문의 깊은 뜻을 찾으려고 했고, 설교에서도 종종 그것을 언급했다.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다른 사람들이 번역해 놓은 원문번역보다는 자신이 직접 그 구절이나 본문을 해석한다는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편지에서조차도 헬라어를 인용했던 것을 보면 그가 헬라어에 능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휫필드는 또한 라틴어도 능통했기 때문에 라틴어로 기록된 신학서적을 종종 읽었다.

 

당시 순회 설교자들이 보통 설교자들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서 한 시간을 기도로 보내고 나서 5시부터는 매튜 헨리 주석 (Matthew Henry's Commentary)을 보면서 성경 본문을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성경 속에서 늘 기쁨을 얻었고, 성경을 통해서 위로부터 오는 능력과 새 생명을 매일 공급받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휫필드의 능력 있는 설교의 비결은 '기도‘ 와 깊이 있는 ’말씀연구'로 지속된 경건 생활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휫필드의 위대성은 그의 웅변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경건에 있다는 평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셋째, 휫필드는 말씀 한 절, 한 절을 놓고 기도로 준비했다. 이것은 휫필드가 가졌던 독특한 설교 준비 방식인데, 그는 영어와 헬라어의 각 단어와 행까지도 기도하면서 준비했다. 그래서 그 단어나 절 혹은 행의 기본적인 의미가 확인될 때까지 연구했고, 마음에 기쁨과 확신이 올 때까지 그것들을 위해서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사역의 길에 들어서면서 결단하기를 '어느 때 보다도 절제 있는 삶으로 자신을 기도와 말씀 연구에 전력하기로' 결단한 바 있었다. 휫필드는 장차 자신의 시적이 기도에 의해서 준비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준비에 있어서 말씀 한 절, 한 절을 위해서 기도로 준비했던 것이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늘 그리스도의 임재와 성령의 동행하심,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곧 능력 있는 설교의 밑거름이 되었다.

 

넷째, 휫필드는 설교 준비에 있어서 버키트(Burkitt)의 주석이나 매튜헨리 주석(Matthew Hen교's Commentary)을 주로 참고했는데. 특히 후자를 집중적으로 인용하거나 의존했다. 지금까지 휫필드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매튜헨리 주석을 가까이 하고 종종 인용했다는 사실을 언급해왔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인용하고 의존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휫필드의 설교를 연구한 데이빗 크럼프(David Crump)는 휫필드와 메튜 헨리의 설교 윤곽의 비교 분석을 통해서 휫필드가 어느 정도 매튜 헨리를 의존했는지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이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휫필드는 이 두 설교에 관한 한 매튜 헨리의 설교를 집중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제시한 윤곽 뿐만 아니라 설교의 전체적인 내용을 관찰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드러난다. 첫째, 전체적인 설교 윤곽이 유사하다. 둘째, 상당수의 증거 본문(Proof-text)들이 공통적이다. 셋째, 핵심 구절을 사용하는 것이 일치한다. 넷째, 일반적인 교훈이 일치한다. 다섯째, 사상의 전개가 일치한다. 이와 같이 휫필드는 그의 설교에서 매튜 헨리를 집중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휫필드가 매튜 헨리의 주석을 보면서 성경 본문을 한 구절 한 구절 집중적으로 분석해서 연구하여 설교를 준비했다는 사실은 그가 설교준비 없이 일방적이고도 집중적으로매튜 헨리 주석을 의존했으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인 듯하다. 오히려 휫필드가 매튜 헨리를 그렇게 집중적으로 의존한 이유는 그가 청교도 사상과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경건한 주석가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휫필드의 설교 원고

휫필드는 교회 내의 설교보다는 야외 설교에서 그 기량을 더욱 발휘하면서 수만 명이 운집된 회중들에게 날마다 설교했다. 그러면 휫필드가 매일 한 두시간, 5-9회씩이나 되는 많은 설교원고를 어떻게 기록했으며 ,어떤 식으로 전달했느냐 하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앞서 휫필드가 설교할 때 준비 없이 행한 '즉흥설교자 라는 그동안의 인식을 비판하면서 그는 설교 준비에 철저한 목회자였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위의 질문과 관련해서 달리모아(Arnold A. Dallimore)는 휫필드가 설교를 시작한 후 약일 년 반 무렵까지는 준비된 설교원고를 읽는 식으로 설교했다고 말했다. 초기 몇 달 동안 행했던 휫필드의 설교 아흡 편의 원고가 그대로 책으로 출판된 것을 보면 이러한 견해는 그 타당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가 같은 설교를 몇 군데서 다시 반복해서 했다는 것도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는 그때마다 똑같은 설교원고를 읽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가 성직 안수를 받은 후 최초로 했던 전도서 4장 9-12절의 '공동체의 본질과필요성'(The Nature and Necessity of Society)이라는 설교는 나중에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달리모아(Arnold A. Dallimore)는 휫필드가 조지아 항해 이후부터 즉석 기도와 강론을 실행하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설교 방식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휫필드는 조지아 항해 이후에 원고를 읽어나가는 지금까지의 설교 습관을 깨뜨렸다. 필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자신이 초기 일 년 이상동안 수많은 회중들 앞에서 설교한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이제 그의 눈을 더 이상 설교원고에 고정시켜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더욱이 그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기도와 말씀 연구를 했다고 할지라도 종종 새벽 다섯 시부터 시작하여 밤늦도록 설교하면서 한주에 5-6편의 설교원고를 모두 기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 휫필드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설교원고를 기록하는 습관이나 설교스타일을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휫필드는 그때부터 이미 준비된 설교 원고를 의존하되 깊은 사상과 자유로운 언어에 기초해서 원고에 매이지 않고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데이빗 크럼프(David Crump)역시 그의 설교 원고와 전달방식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휫필드는 그의 초기 설교에서 설교의 모든 원고를 완전히 써서 그것들을 강단에서 그대로 읽었다‥‥둘째, 휫필드는 초기 야외 설교를 시작할 때도 전과 같이 설교원고를 계속해서 썼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읽어나가는 것보다 즉흥적으로 전달할 목적으로 그 원고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의 설교 스타일이 즉흥적인 탁월함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기간이었다‥‥셋째, 휫필드는 종종 설교를 즉흥적으로 했지만 그때는 나중에 원고를 다시 쓰기도 했다. 그 원고의 사본은 후에 친구들에게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다‥‥넷째, 휫필드가 원고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 몇 편만 청중의 한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가장 좋은 예는 1741년 스코틀랜드의 캠버슬랑(Cambuslang)에서 했던 그의 설교들이다.""

 

크럼프(David Crump)의 견해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나 전혀 원고 없이 설교했다는 네 번째 부분에 있어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라고 보여 진다. 왜냐하면 그는 이 부분에 대한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휫필드가 전적으로 원고가 없이 설교했다는 것은 설교 사역에 임하는 그의 태도와도 일치하지 않는 듯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자의 견해로는 휫필드가 모든 설교 원고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떤 형태로든지 철저히 준비된 원고는 소유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초기 설교원고에 의해 출판된 설교 내용들과 원고 없이 행해졌다는 후기의 출판된 설교의 내용들의 흐름, 조직, 사상, 분량 등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 차이를 거의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철저히 시간과 자신을 관리해왔던 그의 성품으로 보건데 아무리 자신이 능수능란한 설교자였다 할지라도 그 탁월함을 자랑하듯 아무런 준비 없이 강단에 서서 설교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휫필드는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독특한 성경 연구스타일, 곧 성경의 절과 구절의 원문을 세밀하게 연구한 독특한 스타일과 광범위한 독서의 량을 기초해서 자유자재로 표현하며, 능수능란하게 설교했을지라도 그는 분명 사전에 준비된 원고에 의해서 설교했다는 것은 결코 무리한 추측이 아닐 것이다.

 

로이드 존스(D.M.Lloyd Jones)가 휫필드를 가리켜 '즉흥설교자‘라고 한 것은 휫필드가 아무런 준비도, 원고도 없이 설교했다는 것이 아니고 천부적인 설교의 능력과 기량을 소유한 그가 원고에 의존함이 없이 자유롭게 설교했다는 의미인 듯하다.

그말씀 | 1997. 12

 

 

2009.02.05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모든 사람들의 장소(전도서 6:6) / 조지 휫필드

 

 

 

저는 재능있는 한 작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대단히 많은 책을 발표 하였으나 그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유익한 책들은 그가 50세가 지난 뒤에 쓴 것들입니다. 즉 나이가 들면서 인간의 판단력은 무르익어가며, 재능 역시 성숙하게 진보되어 갑니다. 젊었을 때 모아진 경험들은 인생이 쇠퇴하여 가면서 흰 머리가 이곳저곳에서 나기 시작할 때 보다 더 유용하 게 사용되게 됩니다. 사실 노인은 어린이의 두 배 몫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재능이 너무 낮아 어린이의 두 배 몫을 하기는커녕 요람에서 무덤까지 계속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반성하며 마음의 고통들을 성화(聖化)시켜 앞으로의 행동의 지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경우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셨을 정도로 커다란 은총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크게 타락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본래의 신실함을 다시 가지게 되지 않았다면 “성도의 궁극적 견인”(final perseverance of the saints)에 대한 교리는 근거 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회개하여 다시 신실하여졌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전도서에 기록함으로써 그가 회개하였음을 입증하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를 읽어보십시오. 전도서는 어느 시대에서건 교회의 각별한 존중을 받아 왔습니다. 전도서란 전도자가 쓴 글이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 명의 전도자로서 이 글을 썼습니다.

 

본문이 인용된 전도서 제 6장은 우리의 현재의 상태가 성화되지 않으면 헛되고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 괴물입니다. 이 괴물은 걷기도 하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이 괴물은 하나님께서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심으로써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으나 먹을 수 있는 힘을 받지 못함으로써 그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인간입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사람을 “헛되이 악한 병”에 걸린 사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를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누리도록 내버려두는 늙은 욕심 많은 구두쇠에 대해 이 보다 더 인상적인 묘사가 있 었습니까 ? 솔로몬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그는 덧붙여 이야기하기를, 그러한 사람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하여도 그 자신을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참된 선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낙도 없이 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낙태된 자나 오랜 생을 산자나, 젊은이건 늙은이건, 지위가 높건 낮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자녀가 많건 적건, 자녀들을 위해 빵을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이건 자녀들에게 자주빛 좋은 옷을 업히고 훌륭한 음식을 먹이는 부자이건 간에 마침내는 다 한 곳으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는 질문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 역시 오늘밤 똑같은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져야 할 듯싶습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이 어째서 그러한 질문을 던졌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솔로몬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죽음이었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언급된 곳은 무덤입니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이미 선언하셨습니다. 인류의 첫 조상이 지은 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하늘 아래 거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죽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즉 자범죄(自犯罪)를 범하지 않을 자들에게도 사망은 있어왔습니다. 아담의 죄된 상태가, 즉 원죄가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가장 큰 증거는, 방금 태어난 사랑스려운 아기가 또는 태어난 지 수개월 된 아기가 참으로 안타깝게도 어머니 앞에서 죽어버리는 것일 것입니다. 더우기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기가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키면서 오랜 동안 안타까운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어버리도록 하였다면, 당신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이미 보았던 셈입니다.

        

런던에 있는 올해 약 32 세 가량의 제 친구 하나는 자녀들을 애지중지하며, 끔찍하게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조지아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 “자네의 우상은 아직도 죽지 않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자네가 애지중지하는 우상은 곧 죽어버릴 그러한 우상이라네.” 그 뒤 제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저를 보자마자, 제 편지가 도착되기 하루 전에 그의 자녀 한 명이 배설물을 입으로 토해낼 정도로 너무나 큰 고통으로 신음하던 끝에 죽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여 그는 자식이 그런 식으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자신이 천 번이라도 죽고 싶었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에게로 가 제발 그 아이를 빨리 데려가 달라고 간청하고 싶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그처럼 고통을 겪다가 죽어버리고 마는 경우들은, 어린아이들도 세상에 나올 때에는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를 받기 쉬운 타락을 지니고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서운 증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값진 보혈이 그 아이들을 더러운 죄된 상태로부터 깨끗하게 하여줄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자녀를 일찍 잃어버린 분들은 제가 본문을 가지고 이야기하여 나갈 것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아이들이 간 곳으로 자신도 가게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저는 그곳에서 그러한 분들이 하늘의 별이 되어있는 자녀들을 만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 리 모두는 똑같은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년기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중년기에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말년에 그곳으로 갑니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빨리 그곳에 갈수록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여보면 심지어 솔로몬의 말도 반박할 수 있습니다. 즉 본문의 말씀을 다른 견지에서 생각하여 보 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한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흙 속이나 물 속에 묻히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게 됩니다. 이 심판은 우리들을 영원히 결정적으로 갈라놓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을 확대시켜 생각할 경우 우리는 그 본문의 말씀을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게 국한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죽음과 함께 한곳으로 모두 가게 됩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란,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자들이란 어떠한 사 람들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이제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그 세례를 성년이 되어 받았건 어린시절에 받았건, 물뿌림으로 받았건 침례로 받었건 간에 하늘로 가게 된다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례가 중생을 필연적으로 가져다준다고 하는 생각을 저의 첫 번째 설교에서 공박하였을 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설교는 제가 약 25 세경에 또는 그보다 약간 뒤에 인쇄되어 발표되었읍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저의 견해를 반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오 히려 화체설(doctrine of transubstantiation)을 믿고 싶습니다. 세례를 받았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이 성도라는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 사람을, 세상과 육과 마귀와 전혀 싸우지 않으며, 대부(代父)나 대모(代母)가 그를 위해 약속한 말들에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을, 그러한 사람을 어떻게 제가 참된 기독교인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결코 믿을 수 없읍니다. 차라리 저는 사제의 손에 있는 약간의 물이 바로 예루살렘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뼈라고 믿고 싶습니다. 저는 세례가 그리스도의 규례임을 명백히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년기나 유년기에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음으로써 모두 다 한 곳으로 가게 될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저의 주장에 화를 낼 신실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그들을 영원히 목마르게 하면서 그을릴 무서운 불이 있는 곳이며, 그 불은 어떠한 물로도 끌 수 없는 그러한 불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생생한 신탁들이 실려있는 전도서를 가지고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엄숙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후에 하나님과 영원히 행복하게 있게 되기를 바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듯이 저도 여러분들께 그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이라는 말을 이신론자(理神論者)들만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이라는 말을 하나님을 비웃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하지 않으며, 방탕한 간통 간음자들이나 인권 유린자들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마치 이마 위에 태양 빛으로 쓰여진 듯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멸시를 받으실 분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채 죽게 되면, 거듭난 상태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게 되면, 모두 다 한곳으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인 분이 계신다면 오늘밤 하나님께서 그를 멈추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이제 저는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이라는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앞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 교회 밖의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울타리 밖보다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 더 많은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합니다. 교회 밖보다는 교회의 안에 더 많은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성수(聖水)를 뿌릴 때 저의 이 말을 생각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고백자들 모두가 신앙의 소유자들은 아닙니다. 모든 신앙고백자들이 약속된 것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약속된 구세주를 가지고 있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 약속을 실제로 부여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약속된 것이나 또는 거룩한 약속을 마음속에 부여받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구세주를 가지고 있다고 혀와 입으로는 주장할 수 있습니다. 약속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서 외형적인 율법만을 지키며, 자기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너무도 고집불통이어서 자기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비록 자기 자신을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머지 않아 모두 믿건 안 믿건 간에 한곳에 가게 됩니다. 그들은 한 법정에 소집될 것이며, “일어나라 너희 죽은 자들아 심판을 받으라”고 하는 대천사의 목소리가 그들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일어날 것이며, 모든 인류의 심판관이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신실하지 못하였던 자들은 모두 변명을 늘어놓으며 기꺼이 용서받고자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을 면제받고자 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정죄받는 것을 면제받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삶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따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일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게 깨어있다면 등골을 오싹 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없는 곳에, 즉 저주받은 영혼들이 영원히 하나님과 서로를 저주하는 곳에,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잠시 생각하여 보십시요. 그러한 생각이 오늘밤 우연히 이곳에 들어왔다가 지금 다시 나가고자 하는 경솔한 사람들을 일깨워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서재에서 여러분들이 몰려들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여러분들이 서로 밀치고 들어오면서 일부는 장막 안이나 제의실(祭衣室) 안에, 다른 일부는 앞마당을 채우면서, 또 다른 일부는 입구에 서있는 것을 불 때, 내가 오늘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나는 이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흐느껴 울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수많은 귀중한 영혼 들에게 실질적인 방법으로 진지하게 설교함으로써, 그들을 나 자신에게가 아니라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분노를 알고 있는 이상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 분노를 피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주고자 합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고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귀처럼 산다면 우리는 우리가 죽었을 때 영원히 마귀들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목사는 저에게 어느 한 여자가 죽기 직전에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였는지를 들려주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뉴잉글랜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 여자가 임종 직전에 있을 해 한 신부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죽었을 때 어디로 가기를 바라십니까? 그녀는, 나는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부는 다시, 당신은 당신이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상관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네, 저는 제가 어디로 가게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신부가 물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에게 당신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할 선택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녀는 지옥으로 가겠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답에 신부는 놀라, 당신 마쳤어요? 당신 지옥으로 가고자 한단 말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예, 저는 지옥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읍니다. 그래서 신부는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 나의 모든 친족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신부는 그녀가 죽은 뒤 한 설교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신의 친족들이 지옥에 있기 때문에 자신도 그 곳으로 가겠다고 한 그녀의 말이 놀랄지 않느냐고 물었읍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친족들이 모두 그곳에 있고, 그들의 아버지인 마귀도 그곳에 있으며, 모 든 저주받은 천사들과 악령들 역시 그곳에 있으며, 그들의 형제 자매도 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모두 한 길을 걷고 있듯이 이 후의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두 한 곳으로 추방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이 슬픈 사실을 더 이상 논하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가는 곳은 생각만 하여도 우울해집니다.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그들이 가는 곳과는 다른 장소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그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모두 가게 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중 일부는 이곳에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자들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눈을 감기고, 실질적인 이별이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소리 대신,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를 보여 주셨습니다. 부자는 결국 무덤 속에 묻히게 될 자신의 몸을 살찌우고 향락시키면서, 일년에 하루도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문 앞에서 굶주리다가 아마도 도랑에 묻혔을 것입니다. 파렴치한 부자 역시 죽었으며, 화려한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장례식이 치러질 때 그는 두명의 상여꾼이 들고 가는 관속에 누워 있었을 것이며, 저주받은 마귀들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 때문에 눈을 떳습니다. 여러분 그의 고통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잠시 제가 말을 멈추고 있을터이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요. 사악한 자들이여, 여러분 형제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요?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기도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지옥에서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간구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저주받은 자들은 천국에 있는 자들을 지옥에서 바라보면서, 그들이 잃어벼린 천국이 어떠한 것이며, 그들이 버린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시며, 그들이 상실한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이 여러분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도록 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들 속에 들어간다면,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고통을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말의 의미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받아들여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말과 새로운 행동과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되어 옛것들은 모두 버리고 우리의 영혼 속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뚜렷하게 밝혀져 있음을 대단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커다란 싸움을 벌여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저는 여러분께 빈번히 말씀드려왔읍니다. 그러나 저는 예언자냐 예언자의 아들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영광을 위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권능은 이 땅에서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무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하는 자는 화있을진저!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의심하면서 파멸해 갑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의 권능을 중시하는 일부 복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영국과 스코틀랜도와 아일랜드와 웨일즈와 아메리카의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권능을 존중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사람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 사이를 흐르고 우리들에 의해 찬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을 고의적으로 경멸하면서 성령의 권능에 대한 교리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영을 무시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양심의 자유의 보루인 신앙의 자유 밑에서 제각기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탄생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세상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건 기울이지 않건간에 우리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조작된 거짓된 우화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이 보아온 것, 우리의 손이, 만져온 것, 우리의 마음이 생명의 말씀에 의해 느끼게 된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제가 16 살이었을 때 저는 일주일에 두 번 총 36시간 동안 금식하기 시작하였으며, 매일 많이 기도하였으며, 매주마다 성찬을 받았으며, 사순절의 40일 동안에는 거의 죽을 정도로 금식을 하였습니다. 이 사순절의 금식 기간 동안에 저는 하루에 7번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 이외에 하루에 적어도 3번 이상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저의 의무로 삼기로 결심하였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과연 태어난 것인지 아닌지도 몰랐었던 만큼, 제가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안 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였었습니다.

 

저는 배우가 되고 짚윤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과 함께 저는 양심의 가책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제가 배우가 될 수 있으면서도 성찬을 받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배우 같은 사람들도 성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비록 이 땅의 법에 의하면 어떠한 배우도 자신이 회개하고 있음을 입증하지 않는 한 성찬을 받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대주교 틸롯슨(Tilotson)의 교리이었읍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저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사람의 역할은 물론 마귀의 역할도 하고자 하였읍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저의 방황을 멈춰주셨습니다.

 

여기서 저는 저의 옛 친구 찰스 웨슬리에게 고마움을 표하여야 할 듯 싶습니다. 그는 나에게 《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이라는 책을 주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다시 태어나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다시 태어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미신적인 행동일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옥스퍼드에 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그 자신을 제게 보여주셨으며, 제게 새로운 탄생을 주셨던 곳으로 달려가곤 합니다. 그곳은 제가 그 책을 읽으며, 교회에 가 기도를 드리고‘성찬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형제들이여,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다고 하는 글을 발견한 곳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파산한 것을 알고는 회계장부를 보기 두려위하는 불쌍한 사람처럼 저의 마음도 웨슬리가 준 책을 보고는 걷잡을 수 없이 떨렸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그 책을 불태워 벼릴 수 있겠으며, 집어던지거나 숨겨버릴 수 있겠읍니까? 저는 그 책을 손에 쥔 채 하늘과 이 땅의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만일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만일 제가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오 하나님 제게 참된 기독교인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소서 : 그래서 제가 최후에 저주받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저는 그 책을 좀더 읽어 나갔읍니다. : 그리고 저는 참된 신앙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얻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불쌍한 영혼에 거룩한 생명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모든 하찮은 대화를 멈추고, 모든 사소한 책들을 밀어놓고 하나님의 참된 성도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저의 영혼에 축복을 내려주셔서 왔습니다. 저는 지금 55 세이며, 곧 60세가 되어 얼마 후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더 저는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없다면 여러분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없읍니다.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그가 젊건, 늙었건,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에난지 6시간이 되었건 9시간이 되었건 11시간이 되었건간에 그들이 아무리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모두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들이 가게 되는 그 곳은 어디일까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곳은 바로 천국입니다. 이 천국에서 그들은 누구를 만나게 될까요? 그들은 그 곳에서 의로운, 사람들의 완전한 영혼들 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들 중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천국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 하게 된다면 아무런 즐거움도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이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천국을 좋은 곳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기쁨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느니 차라리 제 자신이 한번이라도 죽고 싶습니다. 수년 전 데포드에서 저는 저의 모든 친구들과 헤어진 뒤 눈물을 터뜨리면서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제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겪는 이러한 고통을 주님과 헤어지면서 느끼고 싶지는 않습니다.”그 뒤 저는 저의 천구들에게 되돌아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자 이제 죽음의 고통은 사라졌습니다.” 저는 이제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요. 죽음 뒤에는 아무런 이별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목회자들도,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모두 한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한 곳을 다니느냐 그렇지 않느나는 하등의 의미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비국교도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나는 국교도라고 이야기하여도, 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불신자로 비난하여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참된 구주로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있는 이상 그들은 모두.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수년 전 한 여인이 제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저를 찾아와 이렇게 물었읍니다. “당신은 코튼 매더(Cotton Mather)와 그리고 마른 신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사람은 제가 거룩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찬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천사들이 그 두 신부 모두를 천국에 기꺼이 데려간 것으로 믿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말에 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천국에서 이제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문제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와 한 성령을 모시고 있으며 신앙의 한 교제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머지않아 곧 천사들이 내려와 동서남북 사방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을  자들을 뽑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만일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는 것을 두려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공적인 위치에 있어왔던 관계로 감히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저처럼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토록 빈번히 헤어진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현재 열 세 번째로 바다를 건너 영

국으로 가려 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도 바울에 대하여 말씀된 것이 참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가는 데마다 불화를 낳은 것이 아니라, 이별의 눈물을 낳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결코 불화로 인하여 사람들이 그를 때리고 그의 등을 상하게 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그의 교인들은 이처럼 이별을 슬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이러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통하여 나를 그의 아들로 삼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참으로 북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이여 영광 받으소서!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성령 다음에 당신의 종을 통해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이겠습니까! 또한 인간에 대한 : 사역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라 그리고 네가 내게 가져다준 자녀들을 보라”고 말씀하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그 거룩한 승리감으로 그들의 면류관을 어린양의 발아래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살아 공표될 때 그들은 어떠한 기쁨으로 은총, 은총이라고 외치겠읍니까! 그 다음 그들은 구속의 사랑과 부요한 자유로운 은총을 최고의 정성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차이는 마치 우리가 합창을 하면서 어떤 이는 소프라노, 어떤 이는 테너 어떤 이는 베이스로 부르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각부는 다른 부를 도와 화성을 이룹니다. 모든 사람에 동일한 음으로 노래한다면 화음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의 차이들이 아무리 충격적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차이는 우리로 하여금 장래의 세계에서 더 잘 노래하게 하고 더 훌륭하게 하나가 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이제 나는 여러분이 자신이 가려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묻기 시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다음과 같이 추론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늘밤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지옥에 가서 저주받은 자들 가운데 거한다는 것을 들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 모든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 람들은 그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하나님, 천사들 그리고 완전하게 된 의로운 사람들의 영혼들과 더불어 거하리라는 것을 들었다. 나는 목사님의 설교가 가끔 장황한 것 같기는 하나 그의 설교를 통하여 우려 모두 한 곳으로, 즉 무덤으로 간다는 것을 들었다. 나는 지금 그리로 서둘러 가고 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곧 나뭇잎이 떨어

질 것이다. 그러면 기후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한 폭풍 또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의 결실들을 지나치게 즐김으로 인한 과식, 어떤 질병이 나를 나의 오래도록 거할 집으로 데려갈지 모른다.” 나는 중풍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의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튼튼하고 건강했다. 나는 나의 힘을 자랑했다. 그러니 열로 인하여 이 지경이 될 줄을 누가 알

았으랴. 나보다 더 연약한 사람이 더 잘 견딘다.”

 

전에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만일 내가 오늘밤에 데려감을 당한다면 나는 지옥으로 가겠는가? 하늘나라로 가겠는가? 두려위 하는, 이제 떠나게 될 사랑하는 나의 영혼이여. 그대는 어디로 가려는가? ” 이것은 그가 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한 황제가 생명의 은(銀) 줄(전12:6)이 풀어지려는 임종의 자리에서 행한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 으십니까? 여호와의 촛불인 양심이 여러분을 돕게 되어 가련한 죄인인 여러분이 자신에 대한 지식에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세주의 이름으로 - 나는 지금 그의 이름으로 그의 권세에 의하여 설교합니다 - 여러분의 양심에 권고합니다. “오, 그대 신실한 충고자인 양심이여, 각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의 양심의 소리를 듣게 하라.” 여러분이여, 만일 양심이 말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 하겠습니까? 즉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여러분은. 영원히 잃어지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인들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호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그네들을 환대하기를 좋아합니다. 그 결과 이곳에서는 나그네들이 여관에 투숙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환대를 받아 나그네로서 투숙하게 될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한번은 시워드(Setward)씨와 다른 몇 사람의 훌륭한 친구들이 나와 더불어 있었읍니다. 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 주인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옳다고 나는 믿어요. 나는 내 성경을 들출 때마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요.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도 그럴겁니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 말을 경멸하오. 내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요? 하나님께서 그렇치 않다고 당신께 말하든가요? 천만의 말씀이요. 당신은 도덕적 인간이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소. 또 골치가 아프니까 술을 마시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요. 하기는 당신은 음행과 간음을 저지르지는 않을테니까요. 이런 일은 위대한 자들 가운데 흔한 일인데 이런 일이 흔하므로 그들은 그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처형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요. 아마 당신은 신문에 나는 것이 두려워 간통을 저지르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오. 물론 우리 가운데 이러한 규율은 없소. 당신은 망나니가 될까 두려위하여, 또는 연행될까 두려위 하여 이런 일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오. 그러나 이러한 당신의 복종은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란 말이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비참한 상태를 알려주시기를 바라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에는 내가 한곳에서 영생토록 함께 살기를 바라는 사랑스러운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나의 동료 기독교인들을 나는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나의 사랑스러운 형제와 친구들을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한 부모의 자녀들로, 한 성령께로부터 태어나 생활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그러나 잠시 동안 우리는 헤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죽든지 여러분이 죽든지 우리는 헤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한곳에 모여 살게 될 것입니다. 복된 저 세상에서 우리는 만나서 거저 베풀어지는 은총을 찬양할 것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들어 서로를 위로하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만일 우리 모두 한 곳으로 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를 도중에서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나는 주물공장에 속했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성막 예배당에 속했노라고도 말하지 마십시오(전자는 웨슬리의 예배처를 말하고 후자는 휫필드의 예배처를 가리킴 -역주). 종 웨슬라와 조오지 횟필드에 대해 험담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너는 비국교파 예배당으로 가라. 나는 국교회 기도처로 가겠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나는 바울에게 속했느니, 게바에게 속했느니 하고 말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가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도와서,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여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 높은 부르심의 상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십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평화와, 기쁨으로 우리를 채우시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모든 폭풍, 모든 시련이 파기되고 우리를 위해 선한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우리의 모든 상해와 우리의 모든 시험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더 간절하게 사모하고 이 지상을 더욱 싫어할 수 있게 만들기를 !

 

만일 여려분들 가운데 이와 같지 않은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밤 여러분을 회개시키시기를 바랍니다. 성막 예배당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신문을 통하여 이 설교를 대하게 될 런던의 청중들이여, 간절히 바라노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십시요. 여러분은 스스로 지옥을 향하여 나아갔었습니다.        

 

이제 거기서 돌이킨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인하여 아직도 그리로 가는 사람들을 멈추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회개하지 않은 친우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요. 경솔하게도 지옥으 나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여, 하나님께서 오늘밤 여러분들을 멈추게 하려고 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말하면 여러분은 한 젊은 신사가 내게 했던 말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내가 그 신사에게 맹세하지 말기를 희망하였을 때 그는 내게 돌아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박사님(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박사가 아니었고, 또한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을 지옥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 이러한 특성을 지녔다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내리셔서 이러한 특성이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의 길을 따라 지옥길로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따라,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늘나라로 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악마에게 속한 자녀는 이 세상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밤 여러분의 발길을 평화의 길로 돌이키시기를! 어느날 밤 한 젊은이에게 있었던 일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를! 내 기억으로는 약 200회 정도 한 듯 싶은 얘기인데 한 젊은이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6시에 애인을 만나려고 무어필즈에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나의 애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젊은이들이여, 오늘밤 하나님께 대하여 여러분도 그럴 수 있기를! 여러분이 놀이를 찾아 나섰을 때 크레인씨에게 일어났던 일이 여러분에게도 있어지기를 ! 크레인씨는 고아원의 직원입니다. 한번은 그가 연극을 보려고 드러리 레인에 갔었습니다. 그러나 만원이었으므로 그는 커벤트 가든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만원이어서 발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진실로 그는 이스라옐 자손이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내게 말해 준 바대로 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서 휫펄드 박사의 설교나 듣도록 하자.” 거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임하셨읍니다. 이제 그는 빛을 발합니다. 저는 어제와 그제 조지아 주로부터 편지들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들을 받고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고동쳤습니다. 성실하고 불굴의 사람인‘라이트씨와 크레인씨는 아주 잘 지내고 있고, 또한 고아원도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각지로부터 오는 모든 편지들이 제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저는 라이트씨와 크레인씨 같은 사람들을 1만명이라도 내보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저는 우리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전할 백 명의 설교자들도 보낼 수가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러한 호기심이 오늘밤 여러분 몇 분 가운데 선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기를! 이제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잠시라도 여러분을 더 잡아둔다면 여러분에게 폐가 될 것입니다. 또한 나도 여행하기 전에 피곤하게 되어 항해하는데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염려됩니다. 내일 저는 숙박할 곳을 확인해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저는 내 얼 성만찬을 가지고 다음 안식일 아침에 다른 곳에서 성만찬을 집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주일날 저녁에 여러분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자신의 사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또한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곳으로 갈 준바를 하기 위하여 하루 이틀 정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가급적이면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 사실을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하겠읍니다. 그것은 이 교회당 수리에 대한 것으로 보시다시피 이곳은 말끔히 단장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저는 가기 전에 문제를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이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헌금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제가 매우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제가 대단한 부자라고 생각하고는 이러 이러한 장소에 30파운드를 가져다놓지 않으면 틀림없이 나를 죽이겠노라고 협박 편지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나는 칼이나 피스톨에 의하여 갑자기 죽임을 당하는 것을 두려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여기서 설교를 하여 치부를 한 것으로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제가 떠나려는 입장에서 묻겠는데 여러분은 정말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데 대하여 주어지는 나의 고정 급여가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연봉은 1백 파운드에 불과합니다. 나는 지난 밤에 재정상황이 어떠한 가를 물었읍니다. 그랬더니 단 6펜스짜리 주화 하나 남기는 커녕 50 파운드의 체불이 있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리하여 달가운 일은 아니나 오늘밤 헌금을 하여 모든 것을 처리하고자 합니다. 만일 한푼이라도 남는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분들 가운데서 제가 1월부터 8월까지 1기니의 돈이라도 받아낸 분이 있다면 말씀해 보십시요. 또한 저는 나의 항해 비용을 위해서도 1기니도 받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늘나라 나의 형체들에게 가게 되면, 여러분은 제가 어떠한 정신으로 여러분을 섬겼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여러분은 제가 행한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한 처소를 세우기 위해서였음을 알 것입니다. 제가 죽어서 그곳에 가듯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그렇게 거기서 영접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금후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실 때 우리는 한 장소에서 만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소생시키시고 여러분을 강건하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념께서는 오래지 않아 우리가 슬픔이 없는 곳에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아멘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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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는 1714년 12월 16일 글로스터에 있는 벨이라는 여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자신은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거의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하였다.

 

그는 행복하지 못하였고 예민한 양심은 죄책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결국 그가 일하던 술집을 나와 옥스퍼드로 향하였다.
그는 18세에 옥스퍼드의 팸브록 칼리지에 근로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함으로서 그의 일생이 변화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두명의 웨슬리, 요한과 그의 동생 찰스를 알게 되었고 엄격한 생활 방식(method) 때문에 처음으로 Methodists로 불렸던 경건한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옥스퍼드에는 신앙적으로 열심이 있는 학생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 벌레들', '성경꾼들',  '성찬 증시자들', '형식주의자들', '홀리 클럽' 등으로 불렸다.

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긴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을 실천했다.
그 모임 회원의 한 사람인 찰스 웨슬리가 휫필드의 종교적으로 열심히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이것은 그 두 사람이 역사적인 우정을 맺게 되는 발단이 되었다.


홀리 클럽의 영향 아래서 휫필드는 그의 사고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책 한 권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사람 헨리 스쿠걸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때까지 휫필드는 '중생'의 기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선행으로서 천국의 도상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그런 생각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735년에 회심하여 1736년부터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1736년은 그의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해로서 6월 20일 그의 나이 21세에 글로스터의 감독 벤슨으로부터 안수를 받고 일주일 후 6월 27일에 성마리아 크립트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하였다.

 

8월에는 런던의 비셥스게이트에서 큰 군중을 모아 놓고 설교집회를 열었고 런던타워 예배당의 대리목사로 봉직하였다. 두 달 후 햄프셔에서 교구목사로 일하기 시작하였고 죤 웨슬리의 영향을 받아 죠지아 선교에 대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1731년 1월 브리스톨에서 첫설교를 하고 1737년 5월까지 이곳에서의 설교활동은 계속되었다. 휫필드는 광부 등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해 킹스우드 스쿨을 설립했으며, 웨일즈 장로교회로 불리는 웰쉬 칼빈적 메도디스트 교회의 지도자가되었다.

 

그는 1743년에 이 교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의 영향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미국으로 확대되었다.

1740년 이후 휫필드가 미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1735년 제1차 대각성운동을 능가하는 제2차 대각성운동이었다. 그는 미국을 일곱차례 방문하였으며 대서양을 일곱 번이나 건너는 선교의 열정은 그가 34년간 18,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2. 휫필드 부흥운동의 특징 -위대한 설교가

 

휫필드의 설교의 주된 내용은 원죄와 중생이었으며,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내적인 영향을 믿었다. 그의 설교의 또다른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설교는 중생치 못한 자연인의 마음의 부패성과 신생의 필연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차이를 느끼고 결별하였는데, 웨슬리는 알미니안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하여 휫필드는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다같이 평생 영국성공회 성직자로 남아 있었다.

영국성공회는 오랫동안 청교도와 투쟁하는 동안 극단적인 칼빈주의를 배격하게 되었고,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브리스톨을 떠나면서 휫필드는 웨슬리가 "예정(predestination) 교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논쟁을 하지말기를" 기원했다. 웨슬리는 휫필드가 바로 칼빈주의라는 신학 체계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예정론에 관해 "논쟁하지 말라"는 휫필드의 권고는 웨슬리로서는 따르기 힘든 권고였다. 결별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복음적 알미니우스주의와 예정론의 결별이 이뤄진 것이다.

휫필드는 1737년 런던에서 중생에 관한 일곱편으로 이뤄진 설교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중생은 외적인 고백뿐 아니라 내적인 변화요, 마음의 정결이요, 성령의 내주이고, 그러므로 신비적으로 참되고 생동감 있는 신앙에 의하여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덕목을 받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칭의와 중생을 구별하는데, 그러나 이것을 구별하려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못 박는다.

 

휫필드에 의하면 물세례는 결코 참된 신자의 표징이 될 수 없다.
참된 신자의 표시는 외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데에 있다.

그 내면적인 것이란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말한다.


휫필드는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가 참된 신자의 표징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말하는 성령세례란 곧 중생을 말한다.

 


3. 공헌

 


죠지 휫필드는 옥스퍼드의 "거룩한 모임"의 회원이었으며, 그의 업적은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약간 상이했다고 인정할 수 있으나 웨슬리와 병행했다.

 

휫필드가 기독교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가 모든 면에서 감리교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 그의 신학은

 

-자신은 칼빈을 읽은 일이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지만-알미니우스주의자라기보다는 견실한 칼빈주의였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대 사람들은 그가 웨슬리보다도 더 설득력 있는 설교가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활동은 급기야 웰쉬-칼빈주의


-감리교-교회(Welsh Calvinistic Methodist Church)를 탄생시켰다.

 

휫필드의 18세기의 위대한 설교가로서의 면모는 당시의 잡지였던 "신사의 잡지(The Gentleman's Magazine)" 기사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엿볼 수 있다. 기사에 의하면,

 

"한 사회 내에서 열등한 사람의 근면은 그 부요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휫필드 목사와 같은 사람이 5,6천 명의 대중으로부터 매일의 노동을 그의 설교로 앗아간다면 적은 시간이지만 그 사회에 가져오는 손해는 얼마나 큰 것인가!


내 견해로는 만일 이 신사가 킹스우드의 광부들에게 자진해서 설교를 시작한 것처럼 여기서도 계속 설교를 해 나간다면 브리스톨 시 근방에서 얼마만큼의 석탄 가 폭등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은 그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평일이나 주일이나 그가 전도하는 곳의 교회는 청중이 빽빽이 들어 찼고 굉장한 평판을 낳곤 하였다.

 

명백한 사실은 참으로 웅변을 잘하고 즉석에서 아무 준비 없이 설교를 하는 전도자가 순수한 복음을 보기 드문 목소리와 훌륭한 몸짓으로 전하는 것인데, 그 때 런던에서는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의 청중들은 놀라고 황홀해진 나머지 넋을 잃었다.

 

1739년부터 1770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31년 동안 그는 오직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었으며, 항상 주 예수의 일만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휘필드는 웨슬리의 정확한 논리성과 비상한 행정력, 그리고 깊고도 강인한 성품이 결여되었으며, 웨슬리는 그보다 좀 느리기는 하지만 더욱 확고한 편이었다.

 

휫필드는 보다 신속하고 열렬하였으며 충동적이지만 그러나 웨슬리와 같은 종교적인 심원함을 소유하였으며, 더욱이 그는 웨슬리가 알지 못할 정력적인 영역에서 살았다.

거기에 첨가하여 그는 웨슬리로서는 당할 수 없는 웅변가였다.


그는 그의 일생에 걸친 설교사역에서 엡 2장 8절의 말씀을 주제로 삼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개혁자의 신앙을 이어받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에 진력한 휫필드의 삶은 굳어진 18세기 교회의 문을 부수고 무뎌진 명목상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감격하였고, 내면적 부흥운동의 큰 줄기로서 그들을 중생의 길로 인도하였다

 

 출처: 안개꽃

사두개인들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로 와서, "세상에서 일곱 남편들을 소유했던 그 여자가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므로 오해하고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23-31)

 

만일 우리가 주님의 교회에 퍼져 온 모든 오류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아본다면, 그 오류들은 대부분이 동일한 기초로부터,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로부터 흘러나온 것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서 오신 그 분은 성경기록들을 자신의 변함없는 규범과 안내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사로부터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도 주님은 그 대답으로서, "너는 무엇을 읽느냐?" 하시면서 자신에 관하여 성경을 언급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25-28)

 그리고 성령에 이끌리심을 받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도,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모든 공격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이 점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우리의 행동 원칙이 되어야 한다기 보다는 성령만으로 우리의 행동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꾸짖을 수 있는 대응책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이들의 주장대로 정말 그렇다면, 무한히 성령으로 충만하신 우리의 구주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언급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존중하지 않고, 그 거룩한 말씀을 무시하며 옛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케케묵은 책으로만 다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이유는 성경의 기록들이 무엇을 말씀하며, 어떠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첫째,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은 모든 사람들의 의무라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둘째,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을 할 때 유익을 얻도록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은 믿는 자의 의무입니다.

 

저는 먼저,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제가 성경이라고 할 때 율법서와 선지자들의 글과, 여러 세기 동안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아 온 책들, 그러니까 보통 성경이라 불리는 책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는 '진리의 성경기록들'(다니엘 10:21)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쓰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을 기초로 보면 다른 책들은 '진리의 기록물, 또는 경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말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개인이 사사로이 해석하거나, 그의 권위나 창작에 의해서 기록된 것들이 아닙니다. 예전에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기록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의 근본적인 목적은, 아담으로 인해 우리가 타락하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할 바대로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낸다면 그것들의 총체와 본질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인 두 가지의 큰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들 속에 있는 모든 위협의 말씀이나 약속과 교훈의 말씀, 모든 권면과 교리들, 모든 의식과 유대 율법의 경륜 아래서 지정된 예식들과 제사법, 성경의 역사적인 부분 모두가 아담 안에서 우리가 타락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오실 중보자를 바라보도록 지시하며 이미 육신으로 오신 그 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죄 없는 상태에 계속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외적인 계시를 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이 사람의 마음판에 깊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금지된 열매(창세기 2:15-17)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드러나는 계시가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의 비참과 흑암에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외적인 계시가 없었다면 말입니다.

 

자,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른 책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보면 됩니다. 만일 우리가 타락한 피조물들이 아니라면, 날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가증한 부패함들(마가복음 7:21-22)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는 부패한 존재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심 그 자체이시므로 그 분 자신처럼 거룩하고 공의로우시며 선한 존재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성의 혼돈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의 실제 됨됨이와는 전혀 다른 마음의 성향과 기질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라고 여러분에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본성적으로는 거만하고, 분노에 차 있으며, 복수심에 들끓고, 하나님의 정결하심과 거룩하심과 오래 참으심과는 상반되는 열정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자, 이것이야말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닙니까?

 

또한 그런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서 그 해로운 경우를 발견함과 동시에 자기를 상냥하고 예의 바르고 그럴 듯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그는 자기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그 비참으로부터 구원받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단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무한한 선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현대의 자연신론자들처럼 부패하고 패역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라도 성경을 보면서 그 점에 유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 인생이여, 어찌하여 너는 눈멀어 흑암과 비참함 속에 떨어져 있는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소원하는 바에 이르는 길, 즉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를 따라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비참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 두 가지 진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시에 관통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다른 어떤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비참과 우리의 행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타락과 회복, 한마디로 말해서 아담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다시 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우리 구원의 위대한 헌장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과 맺어진 언약의 계시이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마땅히 성경을 읽고 탐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연합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 필요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나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입증하려고 외향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벌이는 논증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들이 그러한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그들이 열심히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자기들 속에서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곰곰이 생각하고 상의한다 할지라도 자기들이 원하는 것밖에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들을 비교하며 밝혀낸다면, 자기들의 모든 결핍을 해결할 처방이 제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은 마음의 결핍과 소원을 정확하게 채워 준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얼굴을 물에 비추어 보면 그 모습이 그대로 떠오르듯이 말입니다.

 

서기관이 어디 있으며, 지혜자가 어디 있으며, 이 세대의 견실함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바라는 대로 분명하게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말씀을 제쳐 놓고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표적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처럼 분명한 계시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단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의 기록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임을 믿고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단순히 읽는 데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깊이 밝혀내는 일을 자기들의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2.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을 할 때 유익한 방법들

 

저는 여기서 성경의 기록들을 어떤 방식으로 비교하며 밝혀내야 유익한지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항상 기억해 두라는 것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는 "성경을 상고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함이니, 그 성경은 나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음이라." (요한복음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십시오

 

여러분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항상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밭에 숨겨진 보물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여러 예언들과 모형들, 제사들과 그림자들을 통해서 예표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고, 신약 성경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모든 뜻을 계시하시는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항상 그리스도를 기억해 두면 동편에 떠 있는 새벽별처럼 여러분을 메시야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하지 못한 모든 것을 여는 열쇠와 같이 작용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모든 신비들의 부요함과 지혜를 열어줄 것입니다.

 

(2) 성경의 기록들은 어린 아이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비교하며 밝혀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함을 가지고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마다 결단코 성경의 내용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깨달음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1:25/누가복음 10:21/누가복음 24:45)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기와 같은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밝히 보여 주십니다. 자기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기를 겸손하게 소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히브리서 5:12-14)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낼 때, 특별히 신약 성경을 읽을 때에는 거룩하신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와 같은 자세를 취하도록 애를 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든지 사무엘처럼 기꺼이 들으려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사무엘은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 (사무엘상 3:9)라고 말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사상과 상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거역하고 싶어합니다. 오, 갓난아기들처럼, 그들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그들이 더 이상 조롱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성경을 읽을 때에 필리스티아인들이 삼손을 끌어다가 우스갯거리로 만든 것과 같이 농담처럼 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말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혼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두려움 속에서 자라갈 것입니다.

 

(3)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되, 읽는 말씀을 실행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하십시오.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그 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리라" (요한복음 7:17).

 

또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의 신비들이 너희에게는 알도록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받게 되어 더 풍성히 가질 것이나, 누구든지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노니, 이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또 깨닫지도 못함이라." (마태복음 13:11-13).

 

하나님께서 강력한 미혹을 보내시어 저희로 거짓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을 의향이 조금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감추어 놓으신 것은 정당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와 같이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그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믿고, 따라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것처럼 그 분 자신을 분명하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요한복음 4:26)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눈먼 소경에게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 눈먼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도 "너와 말하고 있는 이가 그니라"(요한복음 9: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을 알고 그 계명을 지키고 싶은 소원은 전혀 없으며, 또 주님의 성령 속에서 계시된 말씀의 단순함을 비웃는 자들'에게는 결단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결코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호기심에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예수님을 트집잡기 위한 목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에게도 결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4) 읽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십시오.

 

성경기록들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비교하며 밝혀내기 위해서 여러분이 읽는 모든 것들을 여러분의 마음에 적용시키십시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타락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지 않습니까? 모든 교훈과 위협적인 말씀, 약속의 말씀은 그 말씀들을 직접 받았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할 때에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갈라디아서 2:20)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모셔 들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우리 각자에게 효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교리들과 역사적인 사실들은 자신에게 적용해야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고, 의로 훈육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3:16-17).

 

성경을 읽는 모든 영적인 독자들의 체험에 비추어, 감히 저는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비교하며 밝혀내고 적용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명백하게 알 수 있지 않았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우림과 툼밈1)이 대제사장의 흉배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성경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는 방법입니다.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고, 이미 주어진 말씀을 모든 신실한 독자의 마음에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분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하면 더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을 위한 완벽한 원리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 그 길을 정확하게 지도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아닌 성령의 지시가 오직 유일한 법칙이어야 한다."

 

그러나 저는 그 주장을 부인합니다. 오히려 저는 이렇게 확언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거룩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의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원하는 특별한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은 저로 하여금 다음의 요점에 이르게 합니다.

 

(5) 성경이 쓰여지도록 간구하신 성령을 구하십시오.

 

성경기록들을 유익하게 비교하며 밝혀내는 또 다른 방안은 성경이 쓰여지도록 간구하셨던 성령을 부지런히 구하는 것입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들은 영이시며 생명이기 때문에 자연인은 그 말씀의 참된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보며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성경의 말씀들이 이스라엘을 앞서 인도했던 구름 기둥에 비유된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마치 구름 기둥이 이집트 사람들 앞에서는 어둠처럼 보였듯이 자연인에게 성경의 기록들은 깜깜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빛과 생명입니다. 파라오와 그 집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어둠처럼 보였던 구름 기둥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는 밝음과 영광스러움으로 나타났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코데모가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서 그처럼 무지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가 아직 자연인이었기 때문에 거듭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구주의 제자들이 주님과 그처럼 자주 교제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말씀하신 가르침들의 본질에 대해서 날마다 오해를 했던 것도 성령께서 아직 그들에게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연인의 휘장'이 그들의 마음에서 걷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경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체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여러 비유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이방인인 채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책'의 거의 모든 교훈에 포함된 영적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인 방식 외에는 사람들의 마음과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께 대하여 이방인이라면 그 분의 말씀에 대해서도 계속 이방인으로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그 분 자신과 같이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복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의 문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야말로 성령의 감동을 받는 가장 즉각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다음 요점으로 나아가 봅시다.

 

(6) 성경기록들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성경기록들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을 따라서 여러분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요한복음 16:13)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간간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가능하다면 모든 구절을 읽을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성경책을 덮은 후에는 읽은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여러분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자, 이렇게 하면 거룩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임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혜로운 감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이 빛을 받아 깨어날 것이며, 여러분의 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성령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기록들을 읽을 것뿐만 아니라 읽은 것을 표시하고, 배운 것들이 내적으로 소화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혼을 위한 양식과 생수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마치 아폴로처럼 성경기록들 안에서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기꺼이 배울 의향을 가진 서기관처럼 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쌓인 선한 보화들이 나오게 하십시오. 구약과 신약성경의 말씀들 속에서 배운 것들이 여러분의 행실 속에 더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7)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되 끊임없이 집요하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기록들을 끊임없이 읽으십시오. 본문 속에 있는 우리 주님의 표현대로, "성경을 상고하십시오"(요5:39).

감추인 보화를 파내듯이 성경기록들을 파고드십시오. 감추인 보화를 찾는 사람의 모습이 성경에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고 성장하려면 금과 은을 캐내는 사람들처럼 구주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읽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기록들 속에 은밀할 것들을 숨겨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주의하고, 겉치레적이고, 몹시 서두르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충분하게 파헤쳐질 수 없습니다. 다만, 부지런하고 면밀하고 겸손한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의인의 특징으로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편 1:2)"를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묵상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의 길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고 네가 좋은 성공을 이루리라.(여호수아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기록들을 경건하게 뿐만 아니라 날마다 비교하며 밝혀내십시오. 성경기록들 속에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복음 5:39) 지혜의 문에서 끊임없이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그때까지가 아니라, 그때서야 그 지혜의 문이 여러분에게 열리며 하늘 보화들을 보여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자라 하더라도 그 하늘 보화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를 대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자라면 여러분에게 있는 짧은 시간을 주의깊게 활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에 의해서 마지막 날에 용서함을 받기도 하고, 그 말씀들에 의해서 정죄함을 받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멸시받는 책에 대한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연극이나 소설, 또는 재미난 책들이 여러분의 입맛을 더 당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상태라면 여러분이 가진 그 분별력은 손상된 것임을 감히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침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 분의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내세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쓸모없는 그 책들을 읽는 것이 죄냐고 물으시겠지요? 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똑같은 이유에서 무익한 대화에 빠지는 것도 죄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몹시 슬프시게 하고 소멸시키는 일입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권면해 드린 것들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십시오. 제가 제시해 드린 방안대로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파헤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그 책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쓰여진 책들이 아닌 다른 책들을 읽는 것이 죄악이고 위험하며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 내가 어린 아이였고,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몰랐을 때, 나는 세상이 해롭지 않다고 말하며 추천하는 그런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식이 있다 하던 다른 아이들이 행했고,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일을 내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생명의 선한 말씀을 맛보게 되었으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완전한 지식을 아는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러한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집어던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해 주는 이 책만을 읽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를 맛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결코 하늘의 만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빈 껍데기와 무가치한 빵과 죄악적인 소일거리들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 속에는 거짓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그러한 보잘 것 없는 오락들을 매우 하찮게 여기게 될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좋아했던 지난 과거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벌집보다 더 달게 느껴질 것이고, 금이나 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시편 19:10)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여러분의 혼은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배부를 것이며(시편 63:5), 여러분의 마음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복되신 창조주의 영을 따라 형성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인도함을 받을 것이며, 내세에는 그 분의 거룩한 말씀의 빛을 따라서 영광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청교도 개혁주의 도서 보급 선교회/출처: 개혁주의마을/Jennifer



받은 은혜를 감사하라(휫필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소원한 상태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줄만한 표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은 감사와 찬송의 임무를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낙원에 두셨을 때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풍성한 감정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복됨 안에서 살게 됩니다.

1. 구속받은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찬양과 감사

태초에 인간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종종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섬기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된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우리의 심령을 감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이 열려 여호와의 자애로우심을 노래하거나 그의 찬양에 대하여 말하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찬양과 사모함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임무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은 전 인류에게 매일 그의 복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사랑과 흠모를 나타내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른 은총들도 마치 자기들의 공적으로 받은 것인 양 감사하지 않습니다.

1)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이며 ,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신나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경향을 가진 이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은총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가까이 다가올 때 그것들은 더 큰 효과를 발합니다. 성도들은 그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 사실들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주 여호와로부터 수천 가지 복을 받은 자들 중에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감사할 줄 몰랐던 문둔병자들에 대한 기록은 인간들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지를 잘 예증합니다. 병에서 고침 받거나 심한 고통가운데서 해결함을 받고 정말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은 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이런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것은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과 정반대의 성품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성도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7,18).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2)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이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항상 상기시켰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습니다. 실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지금도 태양으로 낮을 달로 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물이 갈라져 육지같이 건너는 것을 본적이 없고, 왕과 그의 군대에 의해 추격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다른 배에 의해서 침몰 할 수 있는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실로 무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을 행운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과 선견지명으로 이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섭리하심이 모든 것을 관할하십니다. 바람과 바다고 그의 말씀에 잠잠케 되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때는 가라고 명하시매 바람이 가고, 때로는 오라고 말씀하시매 바람이 왔습니다. 우리가 엄청난 광풍 속에서 그 파도를 타고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2.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는 까닭

1) 감사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가장 약한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못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그의 행사를 인하여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그분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같이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오직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의 무한한 사랑의 끈으로 여러분을 단단히 잡아매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순종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그분보다 더 나은 주인을 결코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를 섬기는 것이 가장 완벽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상급이 주어지고 이후에는 결코 썩지 않는 면류관을 주십니다.

다른 주인들은 여러분들에게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며 이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준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설혹 모든 세상을 준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분 없이는 여러분은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영적 삶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지만 또한 의로운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을 많이 받을수록, 우리가 받은 복만큼 우리의 영적 삶을 진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후에 받을 저주가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함께 항해한 군인들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선원들에게 주는 당부

1) 행실을 선하게 하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곳 주변은 엄청나게 많은 이교도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방인들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름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간 헤롯의 군사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조소거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보도 많이 누렸던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말씀의 기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나치게 많은 영적 양식으로 과식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적 진보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패 할 수 없고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저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꺼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함으로 인해 제가 사랑을 덜 받을지라도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2) 옳은 일에 장부가 되십시오.

낙심치 말고 강해지고 대장부가 되십시오.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겁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행동하십시오. 용감히 행동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모든 난제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더 나아가 여러분들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불평하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3) 혀를 주의하고 마음의 정결을 지키십시오.

여러분들의 아내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혼식 때 엄숙한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자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의 문을 굳게 지키도록 조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로 남을 공격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사랑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리하여 기도가 막히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둔 여성들은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이 되게 하여 정결치 못한 여자로 의혹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4) 영혼이 폭풍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회개하지 않고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폭풍은 우리를 순식간에 삼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심스럽게 항해하기 위해 나침반을 살펴보는 것처럼 믿음의 파선을 방지하고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 말씀에 눈을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5)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오늘 듣고 있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병들었을 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취하실 때의 결단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약속에 따라 그분께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입술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표현하십시오. 비록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흠모하시기 바랍니다.

6)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은 유혹의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될 준비가 된 자들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결코 헤어짐이 없는 그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하는 데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필경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과 일에 있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그리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고 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7) 입술로가 아니라 삶으로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심령을 주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면 크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을 포구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험한 파도와 고통의 순간들을 다 이기게 하시고 여기로 도달하게 하셨기 때문에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직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할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인들을 노래하며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른 모든 노래와 더불어 그분을 찬양할 것입니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주는 우리의 의라(조지 휫필드)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인간의 일반적인 본성이나 그 개별적인 마음의 성향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가 마음에 뿌리를 박은 마지막 우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모두 행위 언약 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이런 행위 언약에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비록 온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악마적인 자만심에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교를 비난하고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지만, 우리 모두가 또한 가톨릭교도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모두 타고난 알미니안파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신조를 따른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공로의 교의를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선한 은혜라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에 곧바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아주 훌륭하게 관찰하는 것같이 우리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이리저리 ‘다니며’ 옛 바리새인들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서 난 의에 온전히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쓰라린 슬픔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일찍이 알려졌던 것 중 가장 흔한 죄악입니다. 어느 시대나, 특히 우리가 사는 이 형편없는 시대에 있어서 충분히 매도되지 않는 죄악입니다. 일반인들에 있어서나, 제사장들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하신 것 같이, 한때 진리를 드높게 설교한 강단에서까지.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경건한 조상들과는 달리 너무 타락하여, 은혜의 교리, 특히 모든 것을 넘치게 하신 예수의 인격적인 의의 교리를 너무 드물게 그리고 너무 가볍게 너무 있는 상황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열렬한 믿음의 조상들이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다시 일어나 저들의 치명적인 잘못을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일깨워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천사들도 알아보려고 하는 큰 신비의 하나며,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이 가르치신 최초의 교훈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첫 조상들에게 입히신 옷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믿는자들의 마음을 공로에 돌리는 전형적인 사례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돌리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에게 입혀주신 옷은 짐승의 가죽옷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짐승은 사람의 식물이 아니었으므로 그 짐승들은 희생제물이 되었으며 그 뒤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큰 희생을 기념하는 예표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추측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잡은 짐승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힌 옷은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하나님의 어린양의 의로 가려야한다는 교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여기시고”(창 15:6)라고 하신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가 특히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주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에 대한 바른 견해를 다섯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Ⅰ. 주 여호와라는 말은 누구를 가르키는가?

Ⅱ. 주가 어떻게 사람의 의가 되는가?

Ⅲ. 이 교리에 반대하는 몇 가지 중요한 반론

Ⅳ. 이 교리를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이어지는 아주 심각한 결과의 몇 가지 예증

Ⅴ.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와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주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권고

Ⅰ. 나는 주(여호와)라고 말할 때 나오는 ‘주’는 누구를 가르키는 말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아리우스파나 소시니우스파 말장이들이 만들어내는 말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고귀한 피로 불쌍한 죄인들을 사신 주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부끄러움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주라는 이름으로 언급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주(여호와)가 말하노라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주(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의로운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는데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본문에서 주라고 일컫는 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만일 성경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는 다른 본문이 없다해도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주라는 낱말이 본래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이심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 성경의 난외에서 보듯이 주라는 낱말은 본래 원어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본질적인 칭호인 여호와(한글 개역성경에는 주를 대부분 여호와로 밝혀서 읽고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파들은 와서 하나님의 아들께 입 맞추고 그 앞에 엎드려,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듯이 그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를 참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천사들, 저 계명성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동정녀 마리아를 경배하는 자들과 다름이 없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리고 소시니우스파 곧 그리스도는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원리에 의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만일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는 육신의 팔일뿐이기 때문입니다(대하 32:8). 그리고 ‘육신의 팔을 믿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는 그런 괴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점들을 고려하고 나면 그들도 그같이 괴물같은 터무니없는 학설을 부끄러워서 감히 더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라는 말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하며, 그가 여기서 몸소 여호와라는 칭호를 취하시며 그러므로 그가 참 하나님 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는 바울이 깊은 믿음을 통해 표현하고 있듯이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Ⅱ. 어떻게 주께서 인간의 의가 되시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전가(imputation, 하나님이 의로 여기심, 창 15:6)에 의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신 뒤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부터 계신 지극히 높으신 분의 겸손하심은 너무나 크고 깊어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복종을 요구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과 죄 짓지 않고 복종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불멸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조건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자기 자신을 즐거이 그 언약 당사로서의 책임을 지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그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순종하고 그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다면 정녕 살리라는 사실을 추측해도 좋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비통한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전해줍니다. 곧 우리의 첫 조상이 어떻게 이 언약을 깨뜨렸으며, 그 때문에 장래에 하나님의 영접을 받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것보다 더 훌륭한 의를 필요하게 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슨 일을 해야만 합니까? 그들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히 행위 언약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순종한 뒤로, 비록 힘을 잃었으나 그 일을 해야 함은 물론 모든 일을 계속하여 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며 또한 주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대로 가장 완전하게 행해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이 이미 저지른 범죄행위로 말미암아 무한히 침해된 하나님의 공의를 보상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자(Divine Philanthropy)가 눈부시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십시오. 사람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나타나기 위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본성까지 입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람의 본성을 통해 그는 복종하셨으며, 그로써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도덕률을 다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으며, 그로써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위하여, 또는 대신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만족하였고, 동시에 사람으로서 복종하셨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자, 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야 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온전하고 넘치는 의를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로움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단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인 동시에 수동적인 순종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말할 때, 후자 곧 그의 죽으심만을 언급할 뿐입니다. 그러나 전자 곧 그의 삶과 적극적인 순종이 똑같이 필요합니다. 이 두 요소를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합당한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사셨습니다. 고난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또는 대신하여) 순종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연합하여, 우리의 첫 조상의 불순종이 전가되어 불순종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전가될 완전한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서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첫째와 둘째 아담을 비교한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이해시키고자했던 주 우리의 의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33장 16절에서 “그 성은(곧, 교회 자체) 주(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이 의가 그 성에 전가되어)”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과 모든 자녀가 가장 깊이 묵상해야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락한 자들의 교만한 마음에 뿌리를 내린 많은 반론들이 이렇게 온전하고, 이렇게 거룩하며, 이렇게 영혼 구원의 양식이 되는 교리를 잇달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Ⅲ. 이 교리에 반대하는 몇 가지 중요한 반론

첫째, 그들은 그들 자신이 도덕적 동반자임을 내세우기 위하여, ‘의가 전가된다는 교리는 선행을 파기하고 방종으로 이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제발 일반적으로 이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믿음이 넉넉한 사람들입니까? 진정으로 선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소수의 예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대개 썩어빠진 정신에다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명칭은 불경스러운 도덕론자profane moralists가 아니면 이른바 거짓 도덕론자들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곳에 나온 여러분과 아울러 지난 세대에 체험한 믿음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인격의 의에 대한 교리가 가장 많이 비난을 당하고 가장 드물게 언급된 곳에, 악행이 적지 않게 휩쓸었고 지금 휩쓸고 있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인 아르미안의 가르침은 항상 적그리스도들의 행실을 이끌어 왔고 또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하시는 가르침 곧 전가된 의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서는 교회의 개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루터가 명령하듯이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입니다(articutis stantis aut condentis ecclesioe).

그리고 이 교리를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반대하는 쪽으로부터 대개 도덕률폐기론자들, 사기꾼들이라는 악명으로 낙인을 찍히고 있으나 이 교리의 진리가 이 교리를 가르치는 목회자와 그것을 고백하는 신도들의 삶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면, 양쪽의 부정적인 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 족이 모든 면에서 유리하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이 교리도 다른 모든 은혜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일부 비그리스도교도들의 행실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믿음에 의한 칭의 등에 대하여 말은 했으나, 결코 자신의 영혼 속에 그 의가 전가되었음을 느끼지 못한 사람의 행실이 그리스도의 적으로 하여금 그같이 모독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불공정한 동시에 부당한 논증 방법입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전가된 의에 대한 이 교리 그 자체가 ‘선행을 방해하거나 방종에 이끈 적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아니다’라고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어떤 원인으로부터 일(또는 행위)을 제외시킵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이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그리고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의 의롭다 인정받은 증거가 뚜렷함을 나타내기 위해 선행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전가된 의에 대한 교리가 어떻게 방종으로 이끌어가는 교리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중상모략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이단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단들만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기 자신의 영혼으로 체험해 보지 못한 자들이 계속해서 의의 교리를 반박하고 나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반박이 있음에도 본문의 선지자와 함께 우리는 당당하게 ‘주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그의 종들이 그를 모방하는 것을 염려할 것은 없다) 종종 자신을 빛의 천사를 꾸밉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도된 것들을, 이단과 아르미니우스파들이 사람들을 꼬드겨 말하게 할 것이다) 그들의 반론을 가장 돋보이게 하려고, 어떤 자들은 “우리 구세주가 그런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이 산상수훈을 보면, 그는 도덕만을 언급하십니다. 따라서 전가된 의의 교리를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반론을 내세우는 자들은 주의 복된 설교를 읽지도 않았거나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그 설교를 보면 전가된 의의 교리, 곧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 인정하신다는 가르침이 아주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믿음의 경우를 아는 자는 그가 보는 눈이 있다면 그 말씀을 읽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께서 도덕과 선행을 권고하시고 (모든 신실한 목사님들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유식한 바리새인들이 첨가한 많은 거짓된 겉치례들을 제거하여 도덕률을 명백히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시기 전,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심령의 가난, 온유함, 거룩함, 슬픔, 마음의 깨함, 특히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같은 내적인 경건을 말씀하시고 나서, 그의 의를 전가받은 증거로서 선행을 권고하시며, 이 은혜와 신성하신 그의 기질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게 하시는 점입니다.

“너희 빛을 (즉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빛)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삶의 규칙으로서의 율법의 법을 빼앗으려고),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그것을 끝까지 지켜서 그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하려고)”(마 5:17),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도덕과 율법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전가된 의를 무효로 하는 대신 오히려 확인하심은 물론이요 착한 행실이 의가 우리의 영혼에 전가된 증거요 확증임을 밝히심으로서 앞에서 말한 반론을 반박하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선지자가 본문에서 ‘주 우리의 의라’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그러나 사단이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공격했을 때 성경을 인용함은 물론 성경 말씀으로 연속해서 시험했던 것처럼 사단의 자녀들도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대개 같은 방법을 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가된 의의 교리에 대하여 또 다른 반론을 펴면서 복음서의 청년을 보기로 내세웁니다. 그들의 반론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복음서 기자 마가는 10장에서 어떤 젊은이가 그리스도께 달려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든 그에게 율법의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일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행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원인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가된 의의 교리는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최대한의 반론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논리의 전개에는 아무런 타당성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전가된 의의 필연성을 증명하려고 했다면 지금 이 젊은 청년의 경우보다 더 좋은 예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이와 우리 주께서 그를 대하시는 방법을 좀더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절을 보면 이 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그는 귀족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께 달려온다는 것은 정말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꿇어 앉아(이런 신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은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청년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변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그 청년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입니다.

말하자면 영생이란 그의 행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께서는 그 청년에게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반론을 펴는 자들처럼 그 청년의 도덕적 행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을만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심어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 계명을 통해 그 청년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청년이 자기 자신이 계명의 조목마다 어겼음을 깨닫고, 그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결과적으로 자기의 영생의 기반이 될 더욱 훌륭한 의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주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의 의도였습니다. 그 청년은 독선적이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 인정하려고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을 알았더라면 그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어겼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간음을 한 적은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마음으로 한 여자에게 음욕을 품어본 적이 없었을까요? 그가 실제로 남을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아무 이유없이 화를 내거나 남을 헐뜯은 적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계명의 지극히 작은 것을 어겼더라도, 그것으로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율법이 하였음이라)”(갈 3:10)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관찰한 것 같이, 우리 주께서는 비난하기는커녕 그 청년에게 전가된 의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를 그같은 방법으로 다루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적인 사랑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며 동시에 이 청년은 예수님의 보혈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염려하여 우시면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말씀을 알았더라면”(눅 19:42) 등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본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 청년을 사랑하신 사랑과 마리아와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르다를 사랑하신 사랑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참조, 요 11: 5, 13, 23).

이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가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공중예배 시간에 점잖게 행동하며 여러 면에서 겉으로 아무런 흠이 없는 생활을 하는 신자를 보면 그만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목회자가 그런 신자에게 느끼는 사랑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거듭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느끼는 영혼의 일체감과 동정심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족하지만 우리 주의 경우에 적용시켜 보십시오. 젊은이의 경우에 대하여 대개 무슨 말들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지 않고 이 반론을 편든다면, 여러분은 그 청년처럼 슬퍼하며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청년에게 답변하신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문에서 “주는 우리 의라”고 한 주장의 진실성을 더더욱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더욱 큰 반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반론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곳을 보면 우리 주께서는 백성들에게 영생을 상급으로 주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린 자들을 먹였고 헐벗은 자들을 입혀주는 등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실이 그들이 의롭다 인정받게 된 원인이었으며, 따라서 전가된 의의 교의는 성경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을 바탕으로 주장된 의인의 교리를 반박하는 가장 그럴듯한 반론이라는 사실을 나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가장 명백하면서도 간략하게 이 반론에 대하여 답변하기 위해서는 영국교회 신조의 조항을 빗대어 고백하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곧 선한 행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의롭다 인정하심을 입은 다음 그 열매로서 선한 행실이 뒤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행실은 그 자체가 상급을 요구할 수는 없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갱생된 심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행실이 많을수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실 때 우리의 상급이 더욱 클 것입니다.

이 조항을 잘 살펴보면 반론에 대한 답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태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임금이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상을 주리라.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나를 사랑함으로 하였고 이로써 너희가 나의 참 제자된 것을 증거하였느니라)”(마 25:34).

그러므로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이런 행실에 의하여 의롭다 인정을 받고 있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마 25:37-38)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를 의존하면서, 하나님께 용인받고 죄 용서함받는 것에 관한 말과 질문은 전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하여 다시 대답할 것입니다. ‘그 장 후반부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런 선한 행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하고 내어 쫓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하신다면 선행하는 것 때문에 구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전가된 의의 교리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사소한 도덕율일지라도 저버린 사람은 누구든지 당연히 정죄하실 수 있으나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반드시 상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계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들이며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장 거룩한 산 영혼의 언어가 되어야할 책임을 거의 이행하지 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방금 언급한 경건한 영혼의 틀입니다.

이 사실을 헤아려 볼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여서 인간의 어설픈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행실을 하나님이 크게 상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낮 뜨거운 짓일 것입니다. 이 말을 ‘주는 우리의 의라’고 한 예레미야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내세우는 자들에게 의분을 느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전가된 의의 교리에 대하여 널리 제기된 당당한 반론들을 잘 반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답변을 중단해야 한다면 나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감탄했던 논증의 방법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이 방법이 언제나 논점 중 어떤 전제를 부인함으로서 생길 수 있는 불합리한 사항들을 보여주는 아주 납득할만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Ⅲ. 이것은 제기된 다음 문제입니다. 그리고 전가된 의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혼란과 불합리보다 더 크고 더 심각한 불합리는 다른 교리를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결코 생기지 않았습니다.

첫째, 만일 우리가 이 교리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거짓말로 만들어 버릴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모두 뒤엎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엡 2:9). 구원은 하나님의 은사요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적 의가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시는 오직 하나님의 원인이 아니라면, 만일 내가 행했거나 앞으로 행할 행실이 조금이라도 구원에 보탬이 된다면,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원인이라면, 나는 무엇인가 스스로 자랑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속하시는 위대한 일에 있어서는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전가된 의의 교리를 반대하는 편이라면 그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교리가 진실이 아니라면 성경 본문이 얼마나 거짓말이 될지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전가된 의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계시를 동시에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책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주는 우리의 의라’고 한 말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나는 이 설교 서두에서 우리는 본래 무도 알미니안파요 가톨릭교도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알미니안 주의는 가톨릭교로 퇴행하는 방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만일 우리가 전가된 의의 교리를 부인한다면, 우리가 어떤 믿음을 고백하든지 간에 실제로 우리는 마음으로 가톨릭교도가 되는 것이며 다른 개신교의 명의로 인정을 못 받게 될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만일 여러분은 성자들에게 기도하고 그들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러 왔다면, 여러분은 내가 가톨릭 선교사로 불려야 마땅하며 회당에서 쫓겨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로, 성자들의 중재없이 충분했으며, 예수님의 중재가 부족하여 성자들의 중재를 보탠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짓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더 부연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는 부족하여 우리는 죽음도 보태야 하며,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죽어서 여러분의 죽음을 그의 죽음에 보태야 비로소 충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먼지를 털고 일어나면서 나를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 자’라고 불러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중재가 부족한양 성자들의 중재를 보태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우리의 죽음을 보태는 것이 불합리한 짓일 뿐만 아니라 불경스러운 짓이기도 하다면, 그리스도의 복종이 부족한 양 우리의 복종을 보태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고 불경스러운 짓이 아닌가 판단하십시오. 만일 그렇다면, 주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복종이 다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많은 불합리한 것들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 교리를 부인함으로써 유발되는, 그리고 내가 전에 저지른 불합리를 한 가지 더 언급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고위 성직자가가 로체스터 백작에게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의 실재를 여러 가지 논증하여 설득했으나 실패를 하고 나자 이런 말을 남기고 자기의 교구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곧 “좋습니다. 백작 저하, 만일 지옥이 없다면 나는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지옥과 같은 그런 곳이 있다면 백작님은 어떻게 되실까요?”

나는 이 말을 지금 주장하고 있는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에게 적용합니다. 만일 전가된 의의 교리와 같은 가르침이 없다면 이 교리를 지지하는 자와 거룩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가르침이 없다면(확실히 있으나) 그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분간하기가 곤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지옥불을 분깃으로 받을 것이며 영원히 연자맷돌을 매단 신세가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실에 의지하는 자는 그 행실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소의 저울로 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게가 모자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행실로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난 그들은 지옥 불길 속에서 가련한 심령으로 잦아들며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뉴잉글랜드 출신의 위대한 회중교회 목사님인 솔로몬 스토다드는 그가 쓴 책의 제명을 <심판날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안전을 얻음>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참 잘 된 명칭이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이 기회에 나는 그 책을 권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반석을 두고 무엇 때문에 지푸라기를 잡으려고 허리를 구부리겠습니까?

이제 나는 더욱 자세한 설명을 하기 전에 사도 바울이 당당하게 외치는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고전 1:20)라는 구절을 잠시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 세대에 합리적인 불신자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서 제시된 교리보다 더 합리적인 것이 여러분의 논증을 통해 나올 수 있습니까? 말씀과 일치하는 확신을 느끼지 못하였습니까?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를 여러분의 의가 되시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여러분의 양심에 더 긴밀하게 호소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들이여, 어떤 사람은 이 교리를 반대하고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다고 생각하더라도, 여러분 대다수에게는 이 교리가 고귀한 것이며 여러분이 갓난 아이 때부터 간직해 온 바른 말씀에 합당하다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지방에서 왔으나 영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는 우리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주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를 기억만하고 마음에 살아 있는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정죄받을 죄만 불어날 뿐입니다.

내가 자주 말했던 것처럼 다시 여러분에게 말하겠습니다. 마음을 의탁하지 않은 그리스도는 결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도마처럼 믿으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거룩함이 되신 것처럼 여러분의 드러난 의로움이 되셨습니까? 의라는 낱말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와 아울러 우리 안에 역사된 거룩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하나로 합일시켰습니다. 그는 결코 이 둘을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않으며,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또한 주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여러분은 ‘주는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신의 범죄와 원죄를 혐오하고 자기 자신의 의를 역겨워했다면, 이사야가 잘 표현했듯이 “여러분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 같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나의 영혼은 그리스도를 갈급하여 그의 의를 애타게 사모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까? 아, 내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입고 나의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그리스도만을,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그리스도만을 주옵소서. 내가 만족하겠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리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마음의 언어로 고백된 적이 있었습니까? 이런 마음의 갈등을 겪고 난 다음, 믿음의 팔을 뻗어 여러분의 영혼에 복되신 예수를 껴안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어디에 있든지 두려워 마십시오. 환호하십시오, 복된 심령들이여! 주, 주 그리스도, 영원한 하나님이 여러분의 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여러분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제 그의 은혜로 의롭게 된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목하며 오래지 않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영광중에서 영원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열매를 육신과 영혼으로 맺을 것입니다.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모두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만일 주의 의가 여러분의 의라면, 주의 의를 끊임없이 여러분의 입으로 증거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며 권고하십시오. 앉았을 때나 일어섰을 때나 일터에 나갈 때나 집에 들어올 때나 그의 의를 말하십시오!

그 은혜의 큼을 생각하며 아울러 그 은혜를 주시는 분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믿은 그를 온세상에 보이십시오! 모두에게 여러분의 믿음의 열매를 알게 하여 주가 여러분의 의요 여러분이 하늘에서 주를 뵈올 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십시오! 여러분을 부르신 이가 거룩하신 것 같이 거룩하게 되는 법을 공부하십시오! 그의 피로 여러분을 씻고 거룩하게 되십시오! 주의 의를 악평하지 않도록 하고 친구의 집에서 그리스도가 해를 입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으로 날마다 자라나십시오. 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 사랑의 줄에 묶여 그에게 순종하십시오! 많이 용서를 받았으니 많이 사랑하십시오.

주께서 그의 의를 주시는데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가를 항상 물으십시오! ‘왜 저니이까, 왜 저니이까?’라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질문을 항상 마음에 두십시오. 왜 주가 나의 의인가? 왜 그가 나의 구원이 되시는가? 항상 그의 손에 정죄받아 마땅한 내가 왜 그의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는가?

나의 벗들이여! 나는 내가 하나님이 내 마음에 특별히 분별하는 사랑을 주심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 여러분을 격려하는 능력을 조금 돌려서 그리스도 없이 죄짓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그에게 인도하고 그의 의를 받아들여 생명을 얻으라고 권고해야 할 것입니다.

슬프도다, 나의 마음은 찢어질듯합니다! 내 앞에 이처럼 많은 고귀한 사람들이 모이다니! 그러나 아, 가슴을 에이는 듯한 상념이여!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의 심령을 동아보신다면, 모인 숫자와 비교해서 말하자면, 주는 우리의 의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인들이여!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의가 아니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아니, 그리스도의 의만이 여러분이 입고 혼인잔치에 나와야 할 대상입니다.

아, 그리스도 없이 죄짓고 사는 자들이여! 나는 여러분 때문에 비통합니다! 내 영혼의 소망은 확대되었습니다. 아, 지금 이 시간 나의 이 소망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라면! 주가 여러분의 의로움이 되시는 시간이라면! 의를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여러분에게 죽음이 닥치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진정 여러분이 숨을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 세우실 때, 여러분 자신의 주장하는 의의 어설픈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벗은 몸을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들이 아무 쓸모가 없을 알았고 여러분도 알게 될 것입니다.

아,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심판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주저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만일 주가 여러분의 의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무엇일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을 지으신 그가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 안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안 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정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정죄를 받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영영한 불속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살은 구리요 뼈는 쇠입니까? 구리살과 쇠뼈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지옥 불은 완전히 태워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떠나 견딜 수 있겠습니까? 아,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습니다! 며칠이나 몇 시간이라도 하나님 없이 어두움을 헤매며 빛을 보지 못할 때마다 슬피 우는 거룩한 영혼들에게 물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그가 계시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그를 찾아 슬퍼하며 온종일 그를 찾아 얼마나 애통하는가를 보십시오! 그리고 하루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심을 잃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일이라면 영원이 그에게서 추방당하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아니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전가되고 여러분의 삶에 적용되지 않으면 여러분은 죽어서 지옥불에 영원히 타는 고통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몸소 여러분을 정죄하여 그 고통의 연못에 던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나는 불쌍하고 가련한 죄인들이 주의 심판석 앞에 두려워 떨며 서서, 주여 우리가 정죄를 받아야 한다면 천사나 천사장을 보내어 그 판결을 선고하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돌이킬 수 없는 선고를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두려움을 알고 그리스도와 긴밀한 사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주는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쉬지 마십시오. 주밖에 누가 여러분을 용서하시는 넉넉한 사랑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믿음을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만일 주께서 믿음을 주신다면 여러분은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그의 의와 그의 모든 것을 함께 받을 것입니다. 죄가 많고 크다고 해서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인이라면 나도 죄인입니다. 여러분이 죄인의 괴수라면 나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배반자라면 나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그의 풍부하고 아낌없고 으뜸이신 은혜를 영원히 흠모해야 할 것입니다), 주가 나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젊은이여, 오십시오. 방탕하게 놀며(내가 한때 그랬던 것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방황하는 탕자들이여 오십시오. 집으로 오십시오. 여러분의 돼지 우리를 떠나 돌아오십시오.

이제 육감적인 쾌락의 꼬투리를 먹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고 일어나 집으로 오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그의 아들의 의의 옷을 입고 저만치 서 계시는 그를 보십시오. 그의 눈부신 옷을 보고 또 보십시오. 하나님의 피를 주시고 사신 그 옷의 사랑스러운 의미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얼마나 위대한 것을 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의 의의 옷이 없으면, 여러분은 영원히 잃어버릴 것입니다.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쌍하고 죄많은 탕자들이여, 집으로 오십시오. 정말 나는 복음서의 장자처럼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아니, 나는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내려다보시고 강림하소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내려오소서, 나에게 은혜를 보여 주신 것 같이 당신의 복되신 성령을 시켜 당신의 의를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젊은 탕자들에게 입히시고 그 벌거벗은 심령을 당신의 가장 고귀한 옷으로 입히소서!

그러나 나는 처녀들과 아울러 청소년들에게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몸치장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은 벗은 것이 아닙니까? 누가 주는 나의 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값을 알 수 없이 고귀한 옷을 입을 만큼 누가 열심히 갈망하고 있습니까? 그 옷을 입지 않은 자 제 아무리 단장을 해도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처녀들은 가장 중요한 장식이 무엇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주가 여러분의 의가 되시기를 비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용모의 아름다움이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중년들, 매우 분주한 상인들, 주를 훼방하는 마르다들에게 말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다 갖고 있다고 하겠지만 주를 여러분의 의로 소유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슬픕니다! 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진주를 소유하지 않는다면 이 태양 아래 애를 쓴들 무슨 유익이 돌아오겠습니까? 이 한 가지 물건이 여러분에게서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절대적으로 긴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을 음식을 위해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금부터 주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기를, 다시 말해서 여러분에게 영생을 얻을 자격을 주시는 의가 여러분의 소유가 되도록 간구하십시오.

나는 또한 여기에 백발이 노인들이 계심을 봅니다. 아마 여러분들 대부분은 주는 나의 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 머리가 희어버린 죄인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위해 울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흰 머리는 여러분의 면류관이어야 하고 여러분의 자랑이어야 하는데 지금 여러분의 부끄러움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심을 모릅니다. 늙은 죄인들이여, 서두르고 서두르며 서두르십시오! 구원하시는 주의 사랑에 관심을 두십시오!

슬프도다 여러분의 한쪽 다리는 이미 지옥에 있고, 여러분의 생명의 잔은 텅비어가고 있으며, 여러분의 해는 떨어지는 중입니다. 주가 여러분의 의가 되지 않는다면 그 해는 떨어지고 여러분은 영원한 어두움 속에 갇힐 것입니다! 그러니까 달아나십시오, 여러분의 생영을 위해 달아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께 나오면, 그때가 열한시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내쫓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여러분의 의가 되시도록 기도하고, 사람이 늙어서 거듭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시라고 그에게 간구하십시오! 그러나 나는 양떼 중에 있는 어린 양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먹이는 것이 나의 주가 내리신 마지막 명령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내가 만일 주께서 그들의 의가 되실 수 있음과 천국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면 나오게 진노하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까, 어린이들이여, 그리스도께 오십시오. 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실 것입니다. 너무 어려서 회개하고 믿기 어렵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너희는 대개 여덟에서 아홉 살이 된 것 같으며, 아직 주 우리의 의라는 알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보다 더 어려도 그런 말을 한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직 어릴 때 오십시오. 여러분은 오래 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부모가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더라도 여러분들만이라도 오십시오. 어린이들이 주께서 여러분의 의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여러분들을 먹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늦지 않게 주를 여러분의 의를 삼게 하여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서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난한 흑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여러분의 심령을 경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여러분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줄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 여러분이 주를 여러분의 의로 맞이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가 여러분에게 알려지게 되라라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아무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간다게 여왕의 내시에 대하여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도 여러분과 같이 흑인이었습니다. 그는 믿었고 주께서 그의 의가 되셨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어제와 오늘이 같으시며 그의 피로 여러분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집으로 오십시오. 본문 말씀을 여러분의 기도 제목으로 삼고 주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시기를 간구하십시오.

바로 지금 오소서, 주 예수여, 우리 모두의 영혼에 빨리 오십시오. 아멘, 주 예수, 아멘 또 아멘!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죠지아 베데스다, 1740년 12월 24일, 
 

친애하는 경건한 형제에게.


하나님만이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아실테지, 지난 번에 영국을 떠난 이래로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것이 나의 연약함이든 아니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갈 때보다 훨씬 더 꺼리는 마음으로 자네를 반대하는 글을 쓰기 위해 지금 내가 손에 펜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네.

 

그러나 내가 하나님과 나 자신, 그리고 다른 영혼들에게 신실하다면 더 이상 중립적 위치를 견지해서는 안되네. 우리의 적들은 우리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고 기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네.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데, 아니, 하나님께서 나의 사역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셨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있고, 또한 더 엄청난 수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의견을 보여 달라고 여전히 큰 소리로 요청하고 있는데 말일세. 그러하기에 내가 나의 주시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의무와 일치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들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만 하겠네.

의심할 바 없이 이 편지 때문에 나는 많은 친구들을 잃게 되겠지.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을 맡기셨나 보네. 심지어 내가 그 분을 위해 내 모든 친구들을 기꺼이 버릴지, 그렇지 않을지를 보시려고 말일세.

이와 같은 생각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는 바, 내가 확신하고 있는 진리들을 겸손하게 증언하고 진정으로 변호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 드린 채, 이 진리들을 변호함에 있어 아주 명백하게 진술하고 이 땅 위에 있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가장 큰 단순함과 신실함, 그리고 자유를 가지고 대해야만 하겠네.

 

전에 얼마동안 특별히 지난번에 내가 영국을 떠난 이래로, 자네는 공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설교와 출판을 통해 만인 구원론(universal redemption)이라는 교리를 보급해 왔네. 바울이 베드로의 위선을 어떻게 꾸짖었는지를 기억할 때 내가 너무 오랫동안 죄악스럽게도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두렵기만 하네. 오, 그렇다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여, 내가 지금 이 편지를 통해 자네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함으로써 내 영혼을 구원한다고 나에게 노여워하지 말게나.

 

하나님의 율례에 관한 긴 논쟁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나의 의도가 아니었네. 에드워즈 박사의 부활한 진리(Veritas Redux)를 참조해 보게나. 그 책은 특정한 논점을 제외하고 선택받은 사람과 유기된 사람 사이에 있는 중간 종류의 사람에 관해 논술하고 있는, 반박할 수 없는 책이라고 생각하네. 그 자신도 사실상 후에 그 중간 부류의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지.

 

값없는 은혜(Free Grace)라는 제목의 자네 설교에 관해서는 단지 몇 가지만 논하도록 하겠네. 본론 자체에 들어가기 전에, 자네가 자네의 설교의 서두에서 온 세상에 공개하기 위해 자네가 필수 불가결한 의무라고 이름한 것에 대해 잠깐 주목하도록 허락해 주게나. 나는 항상 자네가 이 주제에 관해 어느 정도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네.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도 알고 있듯이 이 경우는 다음과 같네.

 

자네가 브리스톨에 있었을 때, 자네는 개인 인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을 것일세. 그 편지는 자네가 선택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네가 복음을 설교하지 않는 것이라며 자네를 비난하고 있었네. 이에 자네는 제비를 뽑았고 그 답은 설교를 출판하라였지. 나는 종종 자네가 그러게 하는 가운데 혹시 주님을 시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구만. 나는 지금도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네.

 

제비를 뽑지 않더라도 신앙적인 신중함으로 마땅한 행동을 했더라면 이 일과 관련하여 인도함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거기다가 나는 자네가 선택이 복음의 교리인지 아닌지를 하나님께 물어보았다는 소리를 결코 들어 보지 못헀네. 그러나 자네는 선택이 복음의 교리가 아니라고 당연히 여긴 채, 단지 잠잠할지 아니면 설교하고 선택에 반대하여 출판물을 인쇄할지 그것만 물었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네. 이 일이 어찌 되었든 제비는 설교를 출판하라로 나왔고 이에 따라 자네는 설교하고 선택에 반대하는 출판물을 인쇄했네.

 

자네는 내가 영국에 있는 동안에는 나의 원함에 따라 설교하고 출판하는 것을 자제했지만, 내가 영국을 떠난 후에 곧바로 그 설교를 세상에 내 보냈네. 오, 자네가 그것을 그냥 간직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러나 그 설교가 제비 뽑은 결과로 출판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자네를 속게 하심으로 그토록 고통받게 하시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게 하신 한 가지 이유는 그로 인하여 나에게 특별한 의무를 지우시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자꾸 생각하게 되네. 즉 신실하게 선택의 성경적 교리를 선포하라고 말일세. 그렇게 함으로 주님께서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내가 그분의 대의에 진실한지 아닌지를 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나에게 주시려는 것 같네.

 

자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듯이, 전에도 한번 주님의 델(Deal)에서 자네에게 이번에와 똑 같은 또 다른 제비를 주심으로 나를 시험하지 않으셨나. 내가 델에서 지브롤터를 향해 항해하려던 아침에 자네는 조지아에서 돌아오고 있는 길이었고 마침 그때 그곳에 닿게 되었지. 배가 육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나에게 자네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대신에 제비를 뽑았고 즉시 런던으로 출발해 버렸네.

 

자네는 뒤에 편지 한 통을 남겨 두었고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지. 자네를 실어 가고 있고 나를 이끌어 온 바람 곁에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 보았네. 그분의 답을 여기 동봉했네. 이것은 편지의 한 부분이고 그 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지. 그를 런던으로 돌아가게 하라.

이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다소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네. 여기 한편에는 제비를 뽑고 나서 하나님께서 내가 런던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고 말해 주는 훌륭한 한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 나는 나의 소명이 조지아로 가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런던을 떠났던 것이고 또한 나의 책임에 맡겨진 군인들을 마땅히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친구들과 함께 기도에 전념했네.

 

열왕기상 13장 말씀에 있는 본문이 강력하게 나의 영혼에 다가왔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계셨네. 여호와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해 준 다른 선지자의 말대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과 반대로) 돌아가도록 시험을 받은 선지자를 사자가 찢어 죽였도다 (왕상 13:26). 나는 곧바로 런던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편지를 자네에게 써 보냈지.

 

우리는 즉시 항해를 시작했네. 몇 달 후에 나는 조지아에서 자네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고, 그 편지에서 자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고 있었네. 하나님께서 이전에 결코 틀린 제비를 뽑게 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때는 자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 지를 시험하시려고 나로 하여금 그러한 제비를 뽑는 곤욕을 당하게 하셨나 보네.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하도록 나에게 요청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이 개인적인 편지글을 세상에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일세. 여기에서 보면 자네가 틀린 제비를 뽑았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가! 이것은 정확하게 자네가 제비를 뽑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네. 나는 지금의 경우도 그때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그렇다면 자네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제비에 따라 만인 구원론을 설교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친구들이 기도하고 자네의 친구들이기도 한 하나님의 자녀들과 또한 그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 교리를 참되다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자네가 출판한 설교의 서론에서 오직 여기에 전개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라는 확신뿐만 아니라 이 진리를 반드시 온 세상에 전파해야만 한다는 가장 강한 확신만으로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이 이야기가 답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분명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썼을 테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여 글을 썼을 것이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단코 자네를 의심하지 않네. 그러나 그렇다면 존경하는 친구여, 자네가 했던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자네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든 피치 못할 책임 아래 놓이게 되고 그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 것이네. 이러한 생각을 하면 자네가 크게 실수해 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네. 하물며 이런 식으로 생명에 이르는 예정하심의 교리에 반대하는 설교를 출판하는 것은 더 말해 무엇하겠나.

 

다음으로 진술해야만 하는 사실은, 자네와 그와 같은 상상의 보중에 의하여 설교를 출판하는 것이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듯이, 마찬가지로 자네의 본문 선택 역시 참으로 불행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네. 존경하는 친구여, 어떻게 로마서 8장에서 선택 교리를 논박하는 본문을 선택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

 

로마서 8장 말씀은 이 선택 교리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일단 이 본문으로 이 주제에 관해 어떤 퀘이커 교도와 이야기하든, 바울이 틀렸다고 믿습니라라는 말 말고는 이 말씀에서 사도가 피력하고 있는 주장의 강력함을 모면할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을 정도가 아닌가. 한때 선택 교리에 대해 크게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또 다른 한 친구는, 나는 사도 바울 자신이 실수를 했거나 이 본문이 바르게 번역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네라고 최근에 솔직하게 고백을 했네.

 

존경하는 친구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전체를 통해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특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네. 참으로 모든 반박을 넘어서, 이 사실은 명백한 것일세. 선입견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아무에게나 자네가 제시하는 본문 전에 나오는 말씀과 이어서 나오는 말씀을 읽어 보라고 하게. 그 사람은 분명 여기에 나오는 모든이라는 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의미한다고 고백할 것임이 틀림없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내가 깨닫기로 웨슬리 자네는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최종 견인 (final perseverance)을 명백하게 입증하고 있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 (즉,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특정하게는 우리로 끝까지 인내할 수 있게 하시는 은혜, 그리고 우리를 아버지의 천국까지 데려다 주는 데 필요한 그 밖의 모든 것이네.

 

어떤 사람이든, 그 누구든 최종 견인 뿐만 아니라 선택 교리를 입증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자네가 그 교리들을 반박하려고 선택한 이 말씀보다 그 사람의 목적에 더 적합한 본문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할 것일세. 자네를 아지 못하는 사람은 자네 자신이 이것을 인식하고 있는 지를 의심할 것일세. 왜냐하면 첫번째 문단 이후로 자네의 설교 전체에 걸쳐, 자네는 이 본문의 말씀을 거의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네.

 

내 생각으로 자네의 논문은 자네가 선택한 본문과 거의 부합하지 않으며 본문을 왜곡하는 대신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교리에 대한 신념에 있어 나를 더욱더 확증해 준다네.

자네가 얼마나 비논리적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겠네. 자네가 명쾌하게 글을 썼다면, 존경하는 친구여, 자네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진다라는 주장부터 입증했어야 했네. 그리고 나서 추론의 방식으로 자네가 끔찍한 율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큰소리로 반대했어야 했네.

 

그러나 자네는 (최근에 알미니안 주의가 우리 사이에 너무 많이 넘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영벌 (reprobation)의 교리를 까닭 없이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네. 따라서 자네가 사람들이 영벌의 교리를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수한다면 자네는 선택 교리를 완전히 뒤엎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네. 왜냐하면 의심할 바 없이 선택의 교리와 영벌의 교리는 함께 서거나 함께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은혜라는 말에 대한 자네의 분명치 않은 정의와 값없는(free)이란 말에 대해 자네가 내릴 잘못된 정의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지나가서, 가능한 간략하게 말하자면, 나는 영벌의 교리를 믿고 있네.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바이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특정 수의 사람들에게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로 작정하셨고, 아담의 타락 이후로 계속 죄에 머물기 위해 누가 보아도 분명히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은 마침내 영원한 사망으로 고통을 받게 하셨네. 그것은 타당한 죄의 삯이네.

이것은 확립된 성경의 교리이며 버넷 감독이 고백하듯이, 영국 국교회의 17번째 조항에서 인정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절대적으로 이 교리를 부정하고 있네.

그러나 이 교리를 반대하는 이유로써 자네가 내세우고 있는 가장 중요한 반대들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신실하게 시험해 보면, 분명 자네가 내 세우고 있는 가장 중요한 반대들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것일세. 다음의 주제에 따라서 이 문제를 겸손히, 그리고 차분하게 다시 살펴보세.

 

첫 번째로, 자네는, 만약 이것이 그렇다면 (즉 선택이 있다면) 모든 설교는 헛된 일이다. 선택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필요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설교가 있든 없든 전혀 그릇됨 없이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과 관련하여, 영혼을 구원한다는 설교의 목적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역시나 설교는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교가 있든 없든 그릇됨 없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설교의 목적은 공허하며 당신이 설교를 듣는 일 역시 헛된 일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네 (10번째 페이지, 9번째 문단).

, 사랑하는 친구여. 이것이 논증인가? 논증이기는커녕 궤변이 아닌가! 특정 수의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말씀 전하는 것을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정하지 않으셨나. 도대체 누가 그 밖의 다른 의미로 선택을 붙잡고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복음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선택 받은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도록 고안되었다면, 어떻게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 설교가 필요 없겠는가?

누가 선택을 받고 누가 영벌을 받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리지 않고 설교를 해야만 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더 큰 악과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준다는 면에서, 심지어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말씀은 유용하기 때문이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심지어 주님께서 영생을 주시도록 정하신 사람들이, 이러한 설교의 방법에 의해 틀림없이 영혼이 소생되어 신앙을 갖게 된다고 생각할 때, 충분히 설교하고 듣는 일에 최대한으로 부지런해지도록 우리 마음이 자극되지 않는가. 특별히 경외함과 주의 깊은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들으려고 참석한 사람 말고 누가 자신이 그 행복한 수에 들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로, 자네는, 그것은 (선택과 영벌의 교리는) 하나님의 모든 규례의 목적인 거룩함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왜냐하면 (판단을 잘못한 웨슬리 자네가) 너무나 빈번하게 성경에 제시되어 있듯이 거룩을 따르려고 했던 그 첫마음을 완전히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미래의 보상에 대한 소망, 형벌에 대한 두려움, 천국의 소망, 그리고 지옥의 두려움 등이라고 말했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만큼 완전함을 그토록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라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해지도록 거룩해지려고 힘쓰는 것이며, 천국의 보상이나 지옥의 두려움과 상관없이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사랑하는 친구여, 스쿠갈(Scougal)이,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는 더 강력한 동기이다라고 말한 것을 자네도 기억할테지. 그러나 이것은 넘어가서, 정직하게 보상과 형벌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행동하도록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된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렇기에) 어떻게 선택 교리가 이러한 동기들을 파괴하는가?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들의 보상이 더 크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이것이 그들을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데 인내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격려가 되지 않는가? 어떻게 선택 교리가 거룩함을 파괴하는가? 사도가, 성령의 성결케 하심을 통해 선택되었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설교한 것 말고 어느 누가 그 밖의 다른 선택을 설교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네. 선택을 설교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면, 거룩은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표증이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선택의 교리가 거룩을 파괴할 수 있는가?

자네가 자네의 논증을 예증하기 위해 들고 있는 예는, 정말이지, 사랑하는 친구여, 완전히 이것과 관계가 없는 것이네. 자네는, 만약 어떤 아픈 사람이 어느 쪽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불가피하게 죽거나 아니면 불가피하게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가 치료를 받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네. 사랑하는 형제여, 이게 무슨 불합리한 논법이란 말인가?

 

자네는 평생토록 아팠던 적이 없었는가? 아무리 자네가 틀림없이 살거나 죽는다는 사실이 고정 불변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자네가 회복될 수 있다고 하는 있는 그대로의 가망성, 혹은 그 가능성이 치료를 받도록 자네를 격려하지 않았었나?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치료를 통해 자네를 회복하시기로 작정하셨을지를 자네가 어떻게 알겠는가? 선택의 교리가 바로 이와같네.

 

내가 반드시 저주를 받거나 아니면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이 고정 불변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 내가 육에 속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애씀이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의 상태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나에게 복을 주시려고 작정하신 도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내가 애를 쓰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친구여,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게. 치우치지 않는 적용을 해 보게. 그리고 나서, 따라서 이 교리는 일반적으로 거룩함의 바로 그 문을 직접 닫아 버려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거룩함에 접근하거나 혹은 거룩함에 들어가도록 애쓰는 것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12번째 페이지의 10번째 문단에서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미약한 이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를 판단해 보게.

 

자네는, 직접적으로 이 교리는 온유함, 사랑 등과 같은 거룩의 여러 가지 특정 가지들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사랑하는 친구여. 이 문단에 관해서는 조금만 답변하겠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가 아마도 선택을 붙잡고 있는 몇몇 미지근하고 좁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는, 그들의 정신이 미지근하고 좁은 것이 그들의 원칙들 때문이라고 추론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그러나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예정론자이면서 온유하고 겸손하며, 긍휼이 여기고 정중하며,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고 친절하며, 포용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가장 간악하고 방탕한 사람이 회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많은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알지 못하는가? 그들이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적인 사랑의 행위로 그들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금은 가장 버려진 것 같아 보이는 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전적으로 이 교리들을 고수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몇몇 사람들의 관행으로부터, 일반적으로는 원칙들의 진리 여부를, 특정적으로는 선택 교리의 진리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되네. 그렇게 되면, 자네 자신의 교리에 대한 큰 반대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네.

자네는 만인 구원론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과 연관된 편협한 정신과 얼마늬 혼적 분열을 자네 자신 안에서 느꼈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는가? 나는 이 부분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자네 마음에 호소하는 바이네. 만약 그랬다면, 자네 자신의 규칙에 따라 만인 구원론은 틀린 것이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온유, 사랑 등과 같은 거룩함의 여러 가지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네.

 

그러나 이것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사도가 펼치는 논증의 힘과 그가 골로새서 3장 12, 13절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하고 있는 말들에 의해, 자네의 추론이 완전히 제쳐지고 있는 것을 보라고 당부하고 싶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에서 사도는 이것을 생각하고, 즉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기 때문에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등으로 옷 입으라고 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보네. 경험적으로 이 교리를 마음 속으로 느꼈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라는 사실의 순전한 결과임을 느끼고 있네.

그러나 아마도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이 점에서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열심만을 열정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네. 사랑하는 친구여, 사도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 1:3)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을 터이니.

 

그러므로 선택 교리를 향해 열심있어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좁은 마음을 가졌다거나 핍박자라고 정죄해서는 안되네. 왜냐하면 그들은 자네를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네.

내가 확신하는 바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자네를 사랑하며 자네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친구여, 비록 고의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자네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분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한 자네의 잘못을 반대하는 데 내 뜻을 굽힐 수가 없네. 주님이여, 웨슬리의 마음의 눈으로부터 편견의 껍질을 벗겨 주시고, 참된 기독교 지식을 따라 그에게 열심을 주옵소서!

 

세 번째로, 자네의 설교는, 이 교리는 신앙의 평안함, 기독교의 행복 등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그러나 선택을 결코 믿지 않는 웨슬리 자네가 어떻게 이것을 아는가? 선택 교리를 경험한 사람들은 우리의 17번째 조항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정하심과 선택에 관한 신성한 생각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안에서 육체의 일과 땅에 속한 것을 죽이며 그들의 마음을 높은 것과 하늘에 있는 것에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역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달콤하고 기쁘며 말할 수 없는 평안으로 충만한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누릴 수 있도록 영원한 구원의 믿음을 크게 확립해 주고 확증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 등을 향한 그들의 사랑에 강렬한 불을 붙이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네.

 

이것은 우리의 경건한 종교개혁자들이 선택 교리가 거룩함이나 신앙의 평안함을 파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네. 나로서는, 이 교리가 매일 나를 지탱해 주고 있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도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선택하셨고, 지금 효과적으로 나를 불러 주셨기에, 아무도 나를 그분의 강력한 손에서 잡아채도록 놓아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확신하지 않았다면, 임박한 시련의 두려움 아래에서 극심하게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을 것이네.

자네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하고 있더군. 이것은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믿거나 아니면 단지 그것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다. 모든 크고 귀한 약속들이 그들에게 상실되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위로의 광선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에 답변하면서, 나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지하도록 해 주게나. 즉 살아 있는 아무도, 특별히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 받는 자의 수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자신이 선택되지 않았다고 두려워할 만한 그 어떤 타당한 이유를 가질 수 없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육신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러한 상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거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양식인 복음의 귀한 약속을 그들에게도 감시 적용시킬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네! 선택과 영벌의 교리가 몇몇 사람들을 의심하게 만들면 어쩌겠는가?

 

중생의 교리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이러한 의심이 그들을 찾아보고 열심히 애쓰게 만드는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애씀이 그들의 부르심과 선택을 확실하게 해 주는 선한 도구가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다른 많은 이유들 중에서 내가 선택의 교리에 찬탄하고, 이 교리를 복음적인 목회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신실함과 주의 깊은 마음을 가지고 이 교리를 주장하는 한 가지 이유이네.

이 교리는 세속적인 안정감으로부터 영혼을 일으키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이 교리에 대해 반대를 외치는 것이네. 반면에 만인 구원론은 슬프게도 영혼을 둔감하고 졸린 상태에 있도록 만드는 순응된 개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 그것에 감복하고 환호를 보내는 것이네.

 

다음으로 자네의 13번째, 14번째, 15번째 문단을 생각해 보려고 하네. (자네가 말하길) 경험은 성령의 증거가 이 교리에 의해 크게 저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누구의 경험을 말하는 것인가? 설마 자네의 것은 아니겠지. 자네가 조지아를 떠나 런던으로 돌아가는 동안에 쓴 자네 일기에서, 자네는 그러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따라서 자네는 이 문제에 있어서 자격있는 심판관은 아닌 것 같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겠군. 왜냐하면 자네가 같은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네. 심지어 좋은 은사를 맛보았으나 곧 그것을 다시 잃어 버리고 (그것에 대한 감각을 다시 잃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네) 의심과 두려움과 어둠과, 그리고 느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어둠 등에 떨어지는 사람들안에서 조차.

이제, 버려짐의 어둠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헤아릴 수 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후에 그분 자신의 경우가 아니었는가? 동산에서, 심지어 사망에 이를 정도로 그 분의 영혼이 심하게 고뇌하지 않으셨는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그분은 그 끔찍한 어둠, 느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어둠에 휩싸이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그 동일한 것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으로부터 분명하지 않은가?

사도가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리라 (히 2:18)라고 말하고 있네. 거기다가 고난 중에 계셨던 그분을 따라 일관되게 쫓는 것이 그분의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마땅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성령의 증거를 받은 후에 어둠에 빠져 버린 사람들이 선택 교리를 반대하는 반대의 논증이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교리를 고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지구 전역에서 그들이 처음으로 믿었던 그 순간부터 바로 오늘까지,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막힘 없는 성령의 증거와 계속되는 하나님의 얼굴의 비취심을 누리고 있다라고 자네는 말하고 있네. 그러나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지구 전역에 있는 많은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자네가 직접 다 조사해 보았는가? 아니면, 자네가 충분한 기초없이 진척시킨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이 이러한 빛 가운데 계속 거하는 것이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덕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럴 수 없네. 우리 교회의 정서에 따르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믿음을 크게 확증하고 세워 주며, 그리스도인이 어둠 속을 걷고 있고 빛을 전혀 보지 못할 때라도, 확실하고 견고하게 그들의 소망의 닻이 되어 주는 것이네.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성령의 증거를 받은 후에라도 이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네. 자네 혹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분별없이 그와 반대로 무엇을 주장하든지 간에 말일세.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주의하면서, 변치 않으시는 그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구별된 사랑에 자신을 내던지면, 축 늘어진 팔이 일으켜지고 연약한 무릎이 강하게 될 것일세. 그러나 선택 교리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불변함에 대한 믿음 없이, 영원한 구원에 대해 편안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네.

 

어떤 사람이 과거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장차 마귀의 자식이 되어 버려 마침내는 지옥으로 던져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장차 올 진노로부터 건짐 받는 것을 선한 열심으로 구하라고 경고를 받았다고 가정해 보게. 만약 그 사람의 양심이 완전히 깨어 있다면 이러한 사실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겠는가? 그러한 확신이 자기 마음의 부패함과 패역함을, 악의와 교활함, 그리고 사탄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어떤 견고하고 영속하는 위안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네!

 

믿음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이름에 오로지 합당한 것은, 하나님의 구별된 사랑에 대하여 그가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가운데, 자기를 멸하려는 현재의 시련들뿐만 아니라 모든 미래와 관련하여, 사도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3-39)라고 말했듯이, 사람이든 귀신이든 모든 대적에게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신자를 담대하게 해 주는 그런 확신뿐이네.

 

사랑하는 친구여, 이것은 믿음의 충만한 확신을 얻은 모든 영혼들이 내 뿜는 승리의 언어이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적인 영원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갖지만 내일도 그분 안에 있을 것이라는, 하물며 영원토록 내내 그분 안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갖지 못하거나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특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완전함이요 불행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그러한 그분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끄사, 더 이상 그들 자신의 의로움 위에 세우지 아니하고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의 변치 않음 위에 세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드리네.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이전에 관찰한 바로는 사람들의 관행으로부터 원칙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항상 안전한 법칙만은 아니더군. 따라서 믿음을 받은 후에 자네가 설명한 방식으로 만인 구원론을 고수하는 모든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막힘 없는 하나님의 얼굴 빛을 누리고 있다고 가정한다고 해서,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원칙의 열매라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네. 왜냐하면 피조물은 그로 말미암아 그가 구원의 상태에 계속 있는 것이 자신의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가르침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 교리는 자연스럽게 영혼을 영원토록 어둠 속에 가두어 두는 경향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네.

 

불쌍한 피조물이 얼마나 불안정한 모래 같은 토대 위에 견인의 소망을 세우고 있는가? 죄에 빠뜨리는 온갖 타락과, 유혹으로 인한 모든 경악들이 틀림없이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끔찍한 어둠, 느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어둠 속으로 그를 던져 넣을 걸세.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 만인 구원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 반대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받은 편지들과 비교하여 볼 때 죽어 있고 생명력이 없으며 메마르고 모순되어 있네.

만인 구원 계획에 안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들이 성령 안에서 시작했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 반대로 무어라 말하든 간에), 육체로 마치고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 위에 기초를 둔 의로움을 쌓아 가고 있으나, 반면 그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그가 느낄 수 있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에게서 거두어질 때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개가를 울리고 하나님의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약속과 변치 않으시는 사랑 위에서 의로움을 세워 간다네.

 

그러나 어느 특정한 개인들의 경험에 의해 선택 교리의 진리 여부를 판단하지는 않겠네. 그랬다면 (오, 자랑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나를 참아 주게나), 분명 나 자신이 선택 교리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근래 5, 6년 동안 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증거를 받아 왔네. 나는 그때 이래로 단 한순간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네. 하지만 그 때 이래로 종종 죄에 빠지곤 했네. 어떤 한 범죄도 허용치 않았고, 감히 허용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하루도 (지금의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감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기대도 안 하지만) 모든 결점과 죄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서 살 수 없었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은혜를 가장 크게 받은 사람들 중에도 전혀 없으며, 이 땅 위에 단 한 사람도 없다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경우가 모두 이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네. 매 세대에 있었던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이러한 사실이 보편적으로 경험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로, 사람이 거듭난 후에는 죄를 지을 수 없다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논박하기에 충분하네. 특별히, 진리가 없어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고도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성령께서 정죄하시기 때문이네 (요일 1:8, 10).

나는 또한 가지 각색의 유혹을 지났으며 낙심 가운데 있었다네. 아마도 죽기 전에 종종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네.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러했고, 내가 발견할 수 있는 한에서 단호하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선택 교리를 고수했던 하나님의 사람 루터도 그러했네. 위대한 존 안트는 단지 그가 죽기 얼마 전에 극심한 혼란에 빠졌는데, 그는 전혀 예정론자가 아니었네.

 

내가 자유롭게 말해야만 한다면, 나는 자네가 선택 교리에 대항하여 그토록 완강하게 싸우고 죄 없는 완전함을 위해 그토록 열렬하게 항변하는 것이, 자네가 복음의 자유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적이고 영원한 사랑을 경험적으로 맛보고 매일 배불리 먹고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그 믿음의 충만함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이유들, 또는 책잡을 만한 원인들 중의 하나라고 믿고 있네.

 

그러나 아마도 자네는 루터와 안트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적어도 매우 연약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탁월하게 불리웠음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아브라함을 하찮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한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그러하기에 자네가 얼만 전에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네가 읽어 온 침례교 저자나 장로교 저자 중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유에 관해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무슨 소린가! 번연 (Bunyan), 헨리 (Henry), 플라벨 (Flavel), 할리버톤 (Halyburton)도, 그 어떤 뉴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사역자들 중 아무도 그렇지 않다는 소리인가!

 

사랑하는 친구여, 얼마나 편협한 정신과 사랑의 결핍이 자네의 원칙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게나. 그리고 나서 온유함과 사랑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 선택에 대해 반대하며 부르짖지 말게나.

 

네 번째로, 이제 나는 또 다른 주제로 나아가야겠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수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어떤 아직 짓지 아니한 죄악이나 잘못없이 불변적으로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질 운명으로 정해졌다는 이러한 생각은 얼마나 거북한가?라고 말하고 있네.

그러나 어떤 짓지 아니한 죄악이나 잘못없이 수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불변적으로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질 운명이라고 단언하신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원한 불 속으로 던져 넣으시도록 운명을 정하셨다고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또한 그들을 아담 안에서 타락한 사람들로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형벌을 제정했던 그 율례가 그 율례에 의해 마땅히 정죄받아야 하는 그 범죄를 우선 주의하여 보지 않겠는가?

분명 웨슬리 자네는 아담의 죄를 그 자손에게 전가하는 것에 있어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할 것일세. 또한 아담과 아담 안에 있는 그의 자손들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 누구든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 자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당연히 간과하셨을 거라는 사실 역시 인정하고 있을 것일세. 자네가 진심으로 이 점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원죄를 바르게 믿고 있는 것이 아니네.

 

자네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선택과 영벌의 교리가 굉장히 정당하고 합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시키시고 그 후에 모든 사람들을 간과하시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면 몇몇 사람들을 간과하시는 것도 정당할 수 있기 때문이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자네는 풀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일세. 자네가 일관되려 한다면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교리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 결과로써의 거룩하고 의로운 영벌과 함께 사랑스러운 선택 교리를 받아들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만 하네. 자네가 믿을 수 있건 없건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게 지속되네.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롬 11:7).

16페이지, 17번째 문단은 지나가겠네. 약간만 변경한다면 9번째와 10번째 문단에 관해 말한 것이 답변이 될 것일세. 오직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선한 일에 넘쳐나도록 나를 가장 압박하는 것이 바로 선택 교리라는 점이네. 하나님께서는 나로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모든 고난을 받도록 만드셨네. 이 때문에 나는 평안하게 설교를 하네. 왜냐하면 구원이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께서 그분의 능력의 날에 자원하게 하시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몇몇 택하신 사람들을 본향으로 이끄시는데 나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네. 그러나,

 

다섯 번째로, 자네는,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 전체를 뒤엎어 버리는 직접적이고 명백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왜냐하면 기독교의 계시가 없는 곳에 살았던 사람들 중 일부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라는 변치 않은 영원한 율례를 개정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 의해 교회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오직 기독교 계시에 의해서이지 않은가? 그렇다네. 이것은 영원한 언약에 안착된 것으로, 이 구원은 그 아들을 아는 지식과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네. 선지자 이사야 53장 11절에서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고 말하고 있듯이 말이네. 그런데 어떻게 선택 교리가 전체 기독교 계시를 뒤엎는 직접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파종과 추수 때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셨다고 해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을 태만하게 해도 된다는 논쟁이 가당할 수 있는가? 또한 수확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이 있다고 해서, 추수를 내기 위한 태양의 열기와 천체의 영향력이 불필요하게 되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절대적인 목적은 복음의 계시의 필요성, 또는 하나님께서 율례가 효력을 나타내도록 정하신 어떤 수단의 사용을 배제하고 있지 않네. 바른 이해, 혹은 하나님의 율례에 대한 경건한 믿음은 어떤 경우에든 기독교인을 목적으로부터 수단을 분리하거나 수단으로부터 목적을 분리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것으로 고통받게 하지 않을 것이네. 계시는 선택 받은 자들이 죄를 자각할 수 있게 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의도되고 주어지는 것이라고 이 계시 자체에 의해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 있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계시를 어디에 보내시든, 조만간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을 그 부르심 안에서 구원하시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는 충만한 확신 안에서, 기쁨으로 이 계시를 받고, 크게 소중히 여기며, 믿음 안에서 사용하고 온 세상에서 전파하도록 힘을 다하는 것이네. 그렇다면 이 교리를 고수한다고 해서 어떻게 우리가 기독교 계시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에 있어 현대의 믿지 않는 자들과 연합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네.

 

사랑하는 친구여, 자네가 실수한 것이네. 모든 종류의 이교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네 쪽에 있네. 자연신론자, 아리우스파, 소시니안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비난하고 만인 구원을 지지하고 있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의 설교가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슬프게 했듯이, 또한 대부분의 공공연한 하나님의 많은 원수들의 손을 강하게 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네!

 

이곳에서 나는 거의 드러누워 흐느껴 울 판이라네. , 가드에서는 그것을 말하지 말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딸들이 기뻐하지 않도록, 믿지 않는 자들의 아들들이 개가를 울리지 않도록 아스글론의 거리에서는 그것을 출판하지 말게나! 더 나아가 자네는, 이 교리는 계시를 그 자체와 모순되게 만든다라고 말하고 있네. 예를 들면, 자네는, 이 교리의 주장자들은 야곱은 내가 사랑하였으나 에서는 내가 미워하였다라는 성경 본문을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하나님께서 에서와 버림 받은 모든 사람들을 영원 전부터 미워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타락한 것으로 간주할 때, 그들 모두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이 아니었나?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야곱과 선택받은 사람들은 사랑하시거나, 그분의 은총을 보여 주시고, 동시에 영벌을 받을 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뭐가 잘못되겠는가? 그러나 자네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은총을 보여 주시지 않는 한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 없단 말인가!

거기다가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이 여기시고라는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은 단지 몇몇 사람, 즉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만 자비로우시다고, 특별히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긍휼로 그 모든 행사를 덮으셨다는 말씀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성경의 전체 행로와 완전히 반대 되게도, 오직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긍휼을 베푸신다고 추론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그렇지 않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불의한 자와 선한 사람에게 모든 비를 내리시네. 그러나 자네는 하나님은 전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네! 왜냐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나, 믿지 않은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네.

 

인생의 외적 조건이나 상황의 어떠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전혀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선택 교리는 하나님이 차별적이시라고 조금도 상정하지 않는다네. 그러나 아무에게도 빚이 없으신, 모든 이의 주권적인 주로서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 분의 기쁘심을 따라 그 분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시고, 그분이 적당하다고 보시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실 권리가 있으시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최고 권리는 분명하고 강하게 다음과 같은 성경 본문에서 강력히 주장되고 있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네 (롬 9:15, 출 33:19).

더 나아가서 자네는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도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1, 12)라는 본문으로부터 생명으로의 예정하심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추론한 채 우리를 설명하고 있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누가 이것을 추론했나? 왜냐하면 만약 미리 아심이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그러하듯이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예정과 선택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달려 있다고 고백하는 바이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택하고 따라서 그들을 선택하는 토대나 혹은 근거로서 피조물들에 의해 행해진 얼마의 선행을 예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의미에서 예정은 결단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바이네.

 

이 편진의 서두에서 에드워즈 박사의 부활한 진리를 참조해 보라고 자네에게 권했었는데, 이 후반에서도 또한 엘리샤 코울즈 (Elisha Coles)의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책과 함께 에드워즈 박사의 책을 추천하는 바이네. 부디 이러한 책들과 또한 내가 자네에게 보낸 뉴잉글랜드의 보스톤에 있는 쿠퍼의 탁월한 설교 역시 읽어 보게나. 그러면 의심할 바 없이 자네의 모든 반대가 답변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마침내 양쪽의 질문을 다 읽는다 해도, 이 생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율례를 완전하게 살필 수는 없을 것일세. 그럴 수 없네. 우리는 마치 저 위대한 사도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탐구의 마지막에서, 깊도다..라고 부르짓었고, 또한 우리 주님께서,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6)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주권에 경탄하셨을 때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겸손하게 흠모해야만 하네.

그러나 아무도 멸망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내가 죽은 자를 전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및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들을 가장 엄격한 의미로 해석하면, 결국 아무도 정죄를 받지 않게 되는 게 아니냐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이 적적할 수도 있을 것 같네. 그러나 여기 그 구별이 있네. 하나님께서는 단지 죄인들의 죽음을 기뻐하시기 위해 그들의 죽음에서 기쁨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네. 다만 죄인들이 죄악에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을 죄인들에게 지우심으로, 그분의 정의를 증대시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네. 죄인을 정죄하시는 것에서 아무 기쁨도 취하지 않으시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법과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비록 그 죄인의 사형 집행을 연기할 수 있는 힘이 그의 능력 안에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공정하게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네.

 

한발 더 나아가 내가 자네에게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자네가 진술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만인 구원의 교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존엄과 그 피의 공로에 정말이지 가장 심각한 치욕이 되고 있기 때문에, 자네는 불경스럽게도 영벌의 교리를 부당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라네.

자네가 말하듯이, 그리스도께서 구원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멸망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신성모독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이것을 주해하기 위해 자네는 본문을 잘못 적용하고 있더군. 리즐리 (Ridgely), 에드워즈, 헨리가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그리고 내가 직접 자네의 본문에 답변하는 것은 일부로 생략했다네. 그래야 자네가 그러한 논문들을 읽게 될 것이고, 그 논문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서 자네에게 자네의 오류를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네.

 

(모라비안 형제들 중의 한 명의 피터 볼러라는 사람이 만인 구원을 입증하기 위해, 최근에 한 편지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듯이), 정죄받은 모든 영혼들은 장차 지옥에서 견져질 것이다라는 사실을 고수하지 않고 자네는, 그리스도께서 멸망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라는 주장을 성립시킬 수 없을 것이네. 나는 웨슬리 자네가 이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네. 여전히 자네가 이 사실을 고수하지 않는 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취했을 때 만인 구원론은 완전히 땅에 곤두박질치게 된다고 입증할 수 있다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구속함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친구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도, 선택을 부정함으로 자네가 얼마나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게. 자네는 노골적으로 구원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게 만들고 있네. 만약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죽으신 자신의 죽음의 열매를 보고 만족하실 리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설교도 헛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는 모든 초청도 역시 헛될 것이네.

그러나 하나님을 송축하네. 우리 주님은 자신이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지를 아셨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계약이 있었네. 아들의 순종과 죽음의 대가와 보상으로 그때 특정 수의 사람들이 그분에게 주어졌네.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네. 이들을 위해서, 오직 이들을 위해서만 주님은 지금도 중보하고 계시고, 그들의 구원으로 주님은 완전히 만족하실 것이네.

 

자네 설교의 마지막 여러 페이지들에 관해서 더 이상 상세하게 논하는 것은 일부러 그만 두겠네. 사랑하는 친구여, 정말이지 자네의 이름이 이 설교 앞에 붙어 있지만 않았어도, 자네가 이러한 궤변의 저자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만큼 그렇게 가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네. 자네는, (내가 추측하기로, 몇몇 사람들이 정죄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개개인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교묘히 논점을 피하고 있네.

 

자네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든 간과하시면 하나님은 부당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어떤 견실한 증거도 없이) 당연히 여기고 있네. 그러면서 이 지엄한 율례에 대해 큰 소리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라네. 그럼에도 내가 이전에 잠깐 내비쳤듯이 원죄의 교리를 고수한다면, 설사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간과하신다 하더라도 정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네는 믿어야만 하네.

 

사랑하는 친구여, 오, 부디 마음 상하지 말게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디 경솔하지 말게나. 은혜의 언약을 공부해 보게. 자네의 육적인 논증을 내려 놓게나. 어린아이가 되게나. 만약 만인 구원 교리가 진리가 아니라면, 자네가 최근의 찬송집 서문에서 그랬듯이, 죄 없는 완전함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에, 그리고 자네가 이 설교에서 그랬듯이, 사람의 구원을 그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게 만드는 대신에, 주권적인 구별적 사랑을 찬양하는 것으로 찬송을 짓게 될 것일세.

 

믿는 자들이 그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완전함을 행사하려고 전력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게 될 것이고, 이와 반대되는 또 다른 설교를 출판하게 될 것이며, 그제서야 그 설교를 값없는 은혜라고 이름 붙이게 될 것일세.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시기 때문에 값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사람과 그분이 기뻐하시는 때에 거두기도 하시고 주기도 하시기 때문에 값없는 것이라네.

자네가 이 일을 하기까지, 나는 자네가 자네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의심해야만 하겠네. 그 사이에, 자네 자신이 자네의 원칙에 의해서 9번째, 10번째, 17번째 조항을 명확하게 부정하면서, 우리 교회의 사역자들이 그들의 조항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한 것에 대해 자네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네.

 

사랑하는 친구여, 이러한 일들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네. 전에도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네. 그렇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영예와 관련된 그것만이 이 편지를 쓰게 했다고 다시금 나의 입장을 표명하는 바이네. 그 분을 위하여 나는 자네를 사랑하고 존경하네. 그리고 내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에서 자네가 내 영혼을 위해 행한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자네에게 감사할 것이네.

 

나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가 선택한 영원한 사랑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네. 그때 자네가 자네의 면류관을 어린 양의 발 앞에 던져 버리는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리고 자네가 지금껏 해 왔던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반대한 것 때문에 자네 얼굴이 온통 거룩한 부끄러움으로 붉어져 있는 모습을 어떻게 볼까 생각하면, 종종 기쁨으로 내 마음이 충만해진다네.

그러나 주님께서 자네가 죽기 전에 이 사실을 보여 주시기를 바라네. 오, 내가 그날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를 아는가! 주님께서 이 편지를 그 목적으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여, 나의 마음이 기쁨으로 흘러 넘칠 것이네.

 

그리스도 안에서 무익한 형제요 종인,

조지 휫필드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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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방식(조지 휫필드)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하나님은 한 민족이나 백성에게 충실하고 성실하며 믿음이 고결한 종들을 주시는 것 이상의 복을 베푸실 수 없듯이, 하나님이 이 세상 어느 백성에게 베푸실 수도 있을 최악의 저주는 눈멀고, 갱생하지 않고, 미지근하며, 섣부른 길잡이를 주시는 것이다.

더욱이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양의 옷을 입은 많은 이리들이, 회칠을 한 많은 자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보다도 더 부드러운(또는 ‘아첨하는’) 말로 예언하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지난날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며 그 말씀으로 속이는 자들이 많다.

어떤 의미로는, 예레미야 시대에도 마차가지였다. 자기를 불러 쓰신 주 하나님께 충실했던 예레미야는 때때로 그들을 반박하지 않는 법이 없었고 그가 때때로 의지하여 말했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반드시 고귀한 증거를 하였다. 그의 예언을 읽어보면 예레미야만큼 세속적인 종들을 비난한 사람도 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특히 본문이 있는 6장에서 그의 아주 가혹하게 비난을 한다--그는 몇 가지 범죄를 들어 그들을 비난한다. 특히, 그는 탐욕을 들어 그들을 비난한다. 13절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람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리고 이어서, 그는 본문을 통해 보면, 더욱 상세하게 그들이 거짓을 행한 내력을,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방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는 말한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가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전쟁을 경고해 왔었고 그들의 집이 황폐해질 것이라고 말해왔으며, 주께서 확실히 그 땅을 전쟁으로 심판하시리라고 예언해 왔다.

1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예레미야 선지자가 두려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그들의 두렵고 놀란 나머지 회개할 수 있는 마음과 자세를 갖추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제사장들이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뉘우치는 마음을 눌러버리고 있었으며, 백성들이 충격을 받거나 두려워하면, 그들은 백성들에게 예레미야는 열광적인 전도자일 뿐이며 전쟁 같은 것을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백성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랬고, 예레미야가 평강이 없다고 말하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평안하다, 평안하다’, 또는 ‘괜찮다, 괜찮다’)고 발림 말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말씀은 기본적으로 밖으로 나타난 일들을 지적하고 있으나 나아가서 인간의 심령 상태를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진정 믿는다.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은 백성들이 죄를 뉘우치기 시작하고 하늘을 향해 소망을 돌리기 시작하였을 때, 백성들의 뉘우치는 마음을 억누르고 백성들이 착하기만 했다고 사탕발림을 했던 거짓 교사들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백성들은 대개 그런 말을 솔깃해하는 법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너무 속임수에 능하고 지독하게 악하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아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평화가 없는데, 자기 자신에게 ‘평화롭다, 평화로다’라고 말하고 있는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흥미를 느낀다고 발림말을 하고 있는가!

 

그들의 일상의 경험을 검토해 보면, 그들이 평화라고 떠벌이는 것은 악마가 만드는 평화일 따름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아니다--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평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평화를 말할 수 있느냐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다 평화를 갈망한다. 평화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이다. 평화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에게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기 전에, 자신이 어디까지 가야 하며, 스스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를 배워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뜻하는 바는, 나의 영혼을 구하고 내가 설교하고 있는 자들의 피를 흘릴 염려가 없게 되어 하나님의 온전한 권고를 선포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나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스스로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기 전에 무엇을 체험해야 하며, 무슨 일을 행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직접 하기 전에, 한두 가지 주의할 사항을 전제하겠다. 첫째, 나는 여러분이 종교란 내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여러분은 종교가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영혼의 내부에서 행해진 일이라고 믿는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비록 성경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것을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미워할 것이다. 종교는 성경의 어디를 보거나 사람의 마음속에 행하신 하나의 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다.”

여러분 중에 종교를 표면적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의 마음에 맞는 발림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내가 불쌍한 죄인의 마음을 향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때 마치 내가 알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처럼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한 가지 더 내가 결코 하나님에 대하여, 행위의 한 가지 방법에 한정시켜서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전제하고자 한다. 나는 결코, 모든 사람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전에, 동일한 수준이 뉘우침을 겪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돌이키시는 갖가지 방법을 마련하고 계신다. 그의 성령의 바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어오는지 모르게 불어온다.

그러나 아무튼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기 전에, 여러분의 뉘우치는 기간이 길건 짧건, 신랄하건, 조용하건, 여러분은 내가 이어서 말하게 될 일을 반드시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첫째,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기 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실제로 거역한 허물들을 보고, 느끼고, 슬퍼하고, 통곡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삶을 두고 맹세하신 행위 언약(The Covenrant of Works)에 따르면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하셨다. 율법책에 기록한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그가 누구든지 저주를 받는다.

우리는 율법책에 기록된 일 중 어떤 것들을 행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행해야 하며, 언제나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행위 언약에 의하면, 조금이라도 도덕율을 어기는 것은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위로나, 하나님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게 된다.

만일 한 가지 악한 생각이, 한마디 악한 말이, 한번의 악한 행동이, 영원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면 인생을 하나님께 거역만 해온 우리 모두에게는 얼마나 많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그러므로, 애당초 마음으로 평화를 말할 수 있기 전에 사시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보아야 하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벗들이여! 마음을 잘 헤아려 살피라. 나는 여러분이 마음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이곳을 왔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그 때를 아는가 라고 묻고 싶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그 때를 정확히 모른다면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괴로운 일을 기록하셨으며, 언제 전능자의 살이 여러분의 몸에 박히었는지를 아는가? 여러분의 죄를 기억하고 비통했던 적이 있었는가? 여러분이 실제로 하나님을 거역한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여러분에게 떨어져 마땅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여러분의 일생 중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해 본 적이 있었는가? 여러분은 스스로, ‘내 죄가 너무 무거워 머리를 들 수 없구나’라고 탄식해 본 적이 있었는가? 여러분은 이런 뉘우침을 맛보았던 적이 있었는가?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이 교감하여, 뉘우치는 여러분의 마음이 그에게 상달된 적이 있었던가?

만일 그런 적이 없다면, 부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말라. 여러분은 마음속에 평안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평화는 없다. 주께서 그의 뜻이라면, 여러분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러분을 각성시켜 뉘우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더욱이, 여러분은 자신의 지은 죄를 깨닫고 놀랄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일 수가 있으며 여러분의 마음에 진정한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항상 여러분이 마음으로 평화를 말할 수 있기 전에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쳐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실제로 거역한 허물을 뉘우쳐야할 뿐 아니라, 여러분의 모든 허물의 바탕까지도 뉘우쳐야 할 것이다. 그러면 허물의 바탕이란 무엇인가? 나는 원죄,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우리 자신과 더불어 타고난 원죄를 말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자기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원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꾸며대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담의 죄를 우리에게 전가시킨 것을 부당하다고 비난할 것이다.

우리는 짐승의 표와 악마의 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가 죄 속에 낳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한 자들은 세상을 보고 그 무질서를 생각하며, 할 수 있으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여 살게 하신 낙원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질서하다. 나는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만일 원죄를 논증할만한 것이 따로 없더라도, 늑대와 호랑이가 사람을 공격하는 일, 아니 개가 사람에게 짖어대는 일이 원죄에 대한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더라면 호랑이와 사자가 감히 사람을 공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짐승이 사람을 공격하면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범죄 하였다고 말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편에서 악과 싸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본다면, 많은 탐욕을 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기질과 정반대되는 사람의 기질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교만, 악덕, 원한, 시기와 질투가 들어 있다. 이런 기질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될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하나님을 닮았던 형상을 벗어버리고 악마가 된, 우리가 조상 아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부인할지라도, 회개하고 뉘우치는 때가 되면, 모든 세속적인 추론들은 곧 무너져 내리고 저 불쌍한 사람들의 심령이 오염된 모든 죄악의 근원을 느끼기 시작하고 보기 시작한다. 죄인이 처음으로 눈을 뜨면, 내가 어떻게 그처럼 악하게 됐을까하며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갑자기 간섭하고 본래 그에게 선한 것이 없었음을 보여 주신다. 이윽고 그는 자기가 거의 바른 길을 벗어났으며 거의 지겨울 정도의 비참한 죄인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나서 이 불쌍한 죄인은 하나님의 보좌 아래 꿇어 앉아, 비록 그가 일생에 한 가지 죄도 지은 적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정죄하시고 죽이시더라도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여러분 중에 일찍이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을 정죄하시는 것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여러분이 본래 진노의 자녀였음을 인정하며, 비록 여러분이 일생에 그를 거역한 적이 없는데도 그가 여러분을 죽이실지라도 정당하다고 인정해본 적이 있었는가? 만일 여러분이 진심으로 회개한 적이 있었다면, 만일 여러분이 진심으로 비통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면, 만일 여러분의 자아가 참으로 소멸되었다면, 여러분은 이 사실을 느끼고 깨닫게 되었으리라.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원죄의 무게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면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지 말라.

자기 자신이 진심으로 원죄를 깨닫는 것이 진심으로 회개한 자가 져야할 가장 무거운 짐이다. 이것은 항상 갱생한 심령을 괴롭히고 성별된 심령을 비통하게 한다. 마음속에 내재하는 죄가 회개한 사람의 멍에(또는 ‘경고’)가 된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멍에(‘경고’)이다. 그는 끊임없이 ‘아, 이 죽음의 육신으로부터 누가 나를 구할 것인가’라고 소리친다.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이 결함으로부터 누가 나를 구할 것인가? 이것이 불쌍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어지럽히는 문제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이 마음의 결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면,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그 때문에 여러분을 저주해도 당연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면, 나의 사랑하는 벗들이여,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평화롭다고 할 수 있으나 두렵건데 진정한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더욱이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평화를 말할 수 있기 전에 여러분은 자신의 삶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게 될 것은 물론이요 또한 여러분의 최상의 직책과 성취 때문에도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어느 불쌍한 사람이 주를 두려워함으로 어느 정도 죄를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행위 언약(The Covenant of Works) 아래 태어난 존재가 된 것인데, 다시 한 행위의 언약을 향해 곧장 달아나 버린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동산 나무들 사이에 숨고 무화과 잎으로 벌거벗은 몸뚱아리를 가린 것 같이, 불쌍한 그 죄인도 자기의 직책과 자기의 성취를 향해 달아나고 하나님을 피해 숨으며 스스로 의를 주워 맞추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이제 나는 매우 선해질 거야, 나는 개심할거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거야. 그러면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실 거야.” 그러나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평화를 말할 수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일찍이 올렸던 가장 훌륭한 기도 때문에 여러분을 정죄하실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여러분의 모든 직책, 모든 의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격조 높게 표현하고 있듯이 모두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뽐내기에 너무 부족하고, 여러분의 불쌍한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어떤 동기와 권유가 되기에는 너무 못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의 직책과 의를 더러운 걸래 조각, 생리대로 보실 것이며,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호감을 얻기 위하여 여러분의 직책과 의를 그에게 제시하지 않으면 그는 그런 것들을 미워하실 것이며 참을 수 없으시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의 벗들이여, 우리는 무엇을 성취했다고 하나님께 뽐낼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인격은 본래 의롭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만 번이라도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은 물질적으로 선을 베풀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떤 것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올바르게 선한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자연을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는 믿음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갱생을 얻은 뒤로도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갱생을 얻었을 뿐이므로 내재하는 죄가 여전히 남아 있고 우리가 행하는 직무에는 결함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심한 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일에 따라서 우리를 영접하실 뿐이라면 그는 우리를 정죄하시게 될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는 도덕율이 요구하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먼 기도 밖에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오직 죄를 지을 뿐 기도할 수 없고, 나는 오직 죄를 지을 뿐, 설교를 할 수 없으며, 어떤 사람이 표현하듯이, 나의 회개는 되풀이 되고, 나의 눈물은 나의 구세주의 보배로운 피로 씻겨지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직분들은 무수히 많고 화려한 죄와 같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평화를 말할 수 있기 전에 여러분은 원죄와 실제적인 죄의 병에 걸려야 하고, 여러분의 모든 직분과 성취의 병에 걸려야 한다. 독선으로부터 벗어나오기 전에 깊은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교만함을 벗어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앞에 굴복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아무 의로운 것이 없었음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면, 만일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올 수 없다.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이 “좋아, 우린 이 모든 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과 느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자신의 의의 결함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지금 마음속으로, “주여, 제가 성취한 가장 훌륭한 직분 때문에 저를 정죄하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이와 같이 자아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평화를 말할 수는 있으나 평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평화를 말하기 전에 여러분이 크게 괴로움을 당해야 할만할 한 가지 특별한 죄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 중에 그것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지배적이고 저주 받은 죄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거의, 또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라. 그것은 여러분 대다수가 자신은 죄가 없다, 다시 말해서 불신하는 죄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평화를 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마음의 불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누가 스코틀랜드에, 곧 개신교의 땅에 태어나 주일마다 교회를 다니면서, 바로 이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불신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1년에 한차례 성찬을 받고(성찬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성찬의 징포를 받았으며, 가족 기도회를 지키고 있는 여러분 중에, 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무자비하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여러분 중에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자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기를 호소한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대부분 자기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악마만큼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사실이 두렵다.

 

나는 악마가 대다수의 우리를 보다도 성경을 더 믿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다. 이 사실은 스스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보다 악마가 성경을 더 잘 믿고 있는 증거다. 아니, 그는 믿고 두려워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보다 그가 더 확실히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고 있는 증거다.

나의 벗들이여, 우리는 하나의 역사적인 믿음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마음속에 이룩된 진정한 믿음으로 오해하고 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믿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러분도 성경이라는 책이 있다는 그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여러분은 교회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뿐이며, 성경이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뿐, 여러분은 시저나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사람이 있었음을 믿는 것 이상으로 선을 행하지 않으려 한다. 성경은 신성한 보고(寶庫)다. 우리에게 이 살아있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까?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소유하고 있을 수는 있어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사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힘입어 마음속에 하나의 원리가 심어져야 한다. 내가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대부분 여러분이 기억하는 한 예수를 믿어 왔다고, 다시 말해서 그릇되게 믿은 적이 없었다고 대답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일찍이 모태에서 성별된 것을 제외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믿지 않았다는 것 이상의 훌륭한 증거를 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때가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 만일 내가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기억하는 한, 하나님을 미워했던 기억이 없으며, 하나님을 증오했던 때가 없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주 일찍이 모태에서 성별된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하나님을 일생에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으리라.

나의 벗들이여, 나는 이 문제를 특히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거짓된 망상이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이미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샬 씨는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곧 그는 일생을 일해 왔고, 자기가 지은 죄를 모두 십계명에 따라 정리를 해가지고, 어느 목사에게 가서 ‘왜 내 자신이 평화를 얻을 수 없는가’고 물었다. 그 목사는 그가 작성해온 죄의 목록을 살펴본 다음, ‘당장 나가시오! 나는 당신의 목록에서 죄라는 낱말은 한마디로 발견하지 못 하겠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그(보혜사)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세상을 책망하리라.’ 그리고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나의 벗들이여!

하나님이 일찍이 여러분에게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신 적이 있었는가?

여러분이 완고하게 불신하는 마음을 몹시 슬퍼한 적이 있었는가?

여러분은 일찍이 주여, 믿음을 주소서. 주여, 제가 당신을 꼭 붙들게 하소서!

주여, 제가 당신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게 하소서라고 마음 으로 말한 적이 있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여러분에게 이같은 말을 할 수 있는 확신을 주신 적이 있었는가?

그가 일찍이 여러분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해 믿음을 주시라고 소리치게 하신 적이 있었는가?

그런 적이 없었다면, 마음 속으로 평화를 말하지 말라. 주께서 여러분을 일깨어 주시고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여러분에게 참되고 확실한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한 번 더 말하겠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평화를 말하기 전에, 여러분은 실제적인 원리와 자기 자신의 의의 죄와 불신의 죄를 확신해야 함은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충분한 의를 꼭 붙잡을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평화를 얻게 되리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을 격려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쉬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그들이 그에게 와서 믿고 그를 그들의 하나님이요 모든 것으로 확신한다는 조건에 의해서만 유효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기 전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의 표준으로 적용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의 중심에 모심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며, 그의 공적이 우리의 영혼에 전가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벗들이여!

여러분은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였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자기 자신을 여러분에게 주셨는가?

여러분은 일찍이 산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 여러분의 영혼에 평화를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일찍이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에 강처럼 흘러들었는가?

여러분은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평화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오셔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말씀하시기를 기도한다.

이상의 일들을 여러분은 체험해 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저 세상과 내적인 종교와 불쌍한 죄인의 마음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대단히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과 모두 관계가 있고, 여러분의 영혼과 깊은 관계가 있고, 여러분의 영원한 구원하고도 관계가 있다.

여러분은 모두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악마가 여러분을 세속적인 일에 매몰되게 하고 세속적인 안전에 기울어 잠들게 했을 수도 있으며, 여러분을 지옥에 데려다 놓고 거기서 여러분이 깨어나기까지, 여러분을 그렇게 거짓된 잠에 빠져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서 깨어나 너무나 두려운 잘못된 상황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때 여러분과 영원한 세상과는 넘을 수 없는 큰 심연이 있어서, 여러분이 자신의 혀를 식히려고 한 방울의 물을 애타게 호소하여도 여러분은 영원히 그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몇 부류의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무한한 자비로 나의 애씀이 바르게 이루어지도록 복을 내시기를 기원한다.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은혜를 통해 우리도 너와 함께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여 복을 내리소서!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확신하였고, 우리의 원죄를 확신하였고, 우리의 독선을 확신하였고, 불신의 쓰라림을 느꼈으며, 은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갔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평화를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천사들이 그 주일 첫날에(안식 후 첫날) 두 여인에게 말하였듯이 나도 여러분에게 인사를 할 것이다.

모두 큰 소리로 외쳐라! 나의 형제들이여, 두려워 말라. 여러분은 복된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앉아서 평안히 쉬어도 좋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섭리의 모든 경륜 아래서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효험은 무엇일까? 여러분은 밖에서 무슨 싸움을 싸우게 될까?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 안에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긴밀히 사귀었는가?

하나님이 여러분의 친구신가?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친구신가?

그러면 안심하고 위를 바라보라.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모두가 여러분과 더불어 선을 이룬다. 여러분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헤아린 바 되었다. 무릇 여러분을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너희를 건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벗들이여!

여러분의 최초의 회심에 안주하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아직 어린 여러분은 한번 숨을 쉴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살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쌓지 말라. 자신의 안에 행해진 일을 바탕으로 자신을 쌓아 올리지 말라. 오히려 언제나 밖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향하여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라. 여러분은 구원의 샘물을 길으러 나오는 죄인처럼 언제나 나와야 할 것이다.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언제나 짓쳐 나아갈 일이다.

나의 벗들이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정하고 긴밀하게 걸어가기만 하라. 우리들 가운데는 거친 걸음으로 서두르다가 평화를 잃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다른 무엇인가가 끼어들고 우리는 어두움에 떨어진다.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의 마음을 훔쳐 하나님을 등 돌리게 하고, 이 때문에 성령이 비통한 마음으로 우리를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권고하겠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이 평화를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 만일 여러분이 한번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결국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더럽게 떨어져서 일생동안 절뚝거리고 다닐 것이다.

배교를 조심하라. 부디 성령을 비통하게 하지 말라. 결코 일생동안 위로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긴밀히 사귄 뒤 하나님을 떠나 방랑하지 말라. 나의 벗들이여, 나는 배교를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약해져서 조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살피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고, 바른 길을 벗어나게 할 것이다. 욥과 다윗과 성경의 다른 성도들에게 내린 심판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권고한다. 그리스도와 긴밀히 사귀는 삶을 살기 위하여 평화를 얻으라. 나는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으면서 해매는 사람들을 슬퍼한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서 하나님을 대언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 흘러내려 간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세속의 무리와 어울리게 된다면, 그들은 마치 자기가 세상과 한 동아리였던 것처럼, 세상을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았을 때,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그랬었더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등불이 여러분의 영혼을 비추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영원히 증언할 수 있었으리라. 사랑하는 주를 위하여 여러분이 무언인가 말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세상과 한 덩아리가 되어 저들이 세상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터놓고 들으면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면 남이 비웃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의미로 영국국교 교도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마땅히 그렇게 되겠지만, 영국 교회의 의식절차를 비난하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동으로 의식절차들을 대단히 좋아하고 있다. 여러분은 세상의 의식절차에 적응할 것이 새 방식을 가져올 때까지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적응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선하고 주를 위해 담대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이 예수와 동행하고 있음을 알도록 선하고 담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자리 잡기를 권고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 마음속에 항상 하나님이 가시게 하라. 우리는 자기의 믿음에 집착하여 자기를 중심하여 살기 때문에 위안을 잃는다. 그러나 우리는 집착하는 믿음(our faith of adherence)을 버리고 확신하는 믿음(a faith of assurance)을 향해 성장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성령의 위로를 받고 살면서 사랑의 품성을 길러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자기 친구들의 집에서 큰 상처를 입고 계신다. 내가 상세하게 밝히는 것을 이해해 달라.

나의 벗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적들보다 자기 친구들 때문에 상처를 입어야한다는 사실이 더욱 서글프기 때문이다. 이신론자들(Deists)로부터 기대할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는 자들은 멀어져 간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본디 부름을 받은 직분에 어울리게 행하지 않는다.

이런 일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를 믿는 신앙을 이방인들이 멸시하고 조롱하는 천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부디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 곁에 있으라. 하나님이 평화를 말씀하셨다면, 숨 쉴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러르며 그 평화를 지키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시련을 당하더라도 두려워 말라. 모든 것이 여러분을 위해 선을 이룰 것이다. 시험을 당하더라도 두려워 말라. 그가 여러분d의 마음에 평화를 속삭이셨다면, 이 모든 것들이 여러분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리고 이 회중들의 대다수가 그런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만 해도 울고 싶어진다. 여러분은 대부분 자기 마음을 살펴본다면, 하나님이 아직 한번도 자기 마음에 평화를 속삭여주신 적이 없었음을 고백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안 계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를 속삭여 주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악마의 자식들이다.

불쌍한 사람이여! 너무나 저주받은 상황에 떨어져 있구나! 나는 천만번 세상에 태어나도 그런 상황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왜? 여러분은 바로 지옥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적일 때, 하나님의 진노가 불쌍한 여러분의 영혼에 머물 때, 무슨 평화를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깨어나라. 거짓 평화의 잠을 자고 있는 여러분은 깨어나라.

세속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교회에 나가 성만찬을 받고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느껴본 적이 없는 위선자들은 깨어나라.

입에 발린 고백을 하고 형식에 굳어버린 자들은 깨어나고 세례받은 이방인들은 깨어나라.

그리고 거짓의 밑바탕에 누어 쉬고 있지 말라. 이렇게 전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정말,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소돔에 머뭇거리며 그곳에 머물고자 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천사가 롯을 인도했듯이 여러분을 인도하고자 이곳에 왔다. 나의 벗들이여! 떠나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 달아나라, 달아나라, 달아나라. 피 흘리시는 하나님께 달아나라. 은혜의 보좌로 달아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완고한 마음을 깨주시라고 애원하라. 하나님께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게 해주시라고 애원하라. 하나님께 자기의 독선적인 믿음을 뉘우치게 해주시라고 애원하라. 하나님께 믿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사귈 수 있게 만들어 주시라고 기도하라.

아, 지존의 바탕 위에서 안전하다고 속고 있는 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우뢰의 아들이 되어야겠다. 하나님, 우레나 폭풍으로라도 저들을 깨우게 하소서. 진정 내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슬픈 체험을 통해 거짓 평화에 취해 잠들어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으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 있게 생각했다. 그때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나는 아마 여러분 중의 많은 사람보다 더 열심이었을 것이다. 일주간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하루에 9시간씩 기도하곤 했으며, 주일마다 변함없이 성찬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전혀 몰랐다. 나는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내 영혼에 내재하는 내적인 신앙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불쌍한 나처럼 자신에게 속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정말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이 조심하지 않는다면 종교의 형식이 여러분의 영혼을 파멸시킬 것이다. 종교의 형식에 안주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전혀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것들은 방편일 뿐 종교의 완결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판단에 머무는 자들아, 깨어나라.

교회에 출석하며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아, 깨어나라. 이름을 날리는 자들, 부자로서 아무 부족도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 자신이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깨어나라.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한다. 와서 불로 연단한 예수 그리스도의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도록 하라.

그러나 나는 상처를 적게 입은 사람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설교가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귀한 심령을 일깨우시고 세상의 안일한 상태에서 일으켜 주시기를 바란다. 여러분 중에 그리스도께 나와서 자신이 거짓된 터에 집을 짓고 있었음을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아마 악마가 끼어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여러분에게 말해온 것은 여러분에 대한 사랑의 발로이다. 오직 여러분의 영적인 잠을 깨우고 여러분의 위험한 상황을 보게 하려 함이다. 누구라도 하나님과 화해하고자 한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그와 화해하시고자 하심을 알라. 그러니까 아직 평화가 없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 건너오라. 그는 우리의 평화요, 평화롭게 하시는 자며, 하나님과 거역하는 인간을 중재하여 평화를 이룩하셨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평화를 자기 몸으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라. 주 예수는 이 일을 위하여 자신의 심장의 피를 흘렸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죽으셨고 이 일을 위하여 다시 사셨다. 그는 하늘의 보좌에 올라 하나님의 우편에서 중재하고 계신다. 아마 자신에게는 평화가 없으리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으리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죄인이기 때문인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만민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자기 발로 밟았기 때문인가? 이 모든 일이 무엇인가? 하지만 여러분을 위한 평화가 있다. 기도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주간 첫날 제자들에게 오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던가? 그가 하신 첫마디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다. 그는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의 제자들아, 무서워하지 말라. 저들이 너희를 위해 어떻게 내 손과 발에 못을 박았는가 보아라. 그러므로 무서워 말아라.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너는 내 형제들과 특히 마음 상한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가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그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신 뒤 평안, 곧 노아의 비둘기와 같이 평안의 감람나무 잎을 가지고 오셔서 평안을 전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들이 누구였던가?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적들이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때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자들이었다. 여러분 중에는 배신을 하여 평화를 잃고, 평화를 얻을 가망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여러분은 벌써 평화를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배신을 용서하실 것이요, 여러분을 아낌없이 사랑하실 것이다. 상처받은 여러분이 만일 그리스도께 오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떠나 이리로 오라. 여러분 중에는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은 자신의 직분을 내세우며 그것으로 뽐내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지 말라. 본디 벌거벗은 자세로 오라. 걸레조각과 같은 신분이나 직분을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오라.

여러분 중에는, ‘우리는 갈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워낙 완악해버려서’라고 말할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리스도께 나오기 전에는 마음을 유연하게 할 도리가 없다. 그가 돌같이 굳은 마음을 버리실 것이며, 살아 있는 싱싱한 마음을 주실 것이다. 그가 여러분 영혼에 평화를 심으실 것이다. 여러분이 비록 그를 배반하였더라도 그가 여러분의 평화이실 것이다.

내가 오늘 아침 여러분 중의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설득해야 하는가?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모두가 너무 일찍 죽어서 심판을 받게 된다! 오늘 밤이 어둡기 전이라도, 아니면 내일 밤에, 여러분 중에 이 교회 뜰에 묻힐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를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어쩔 셈인가? 만일 하나님이 여기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의 벗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발림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러분의 영혼을 성실하게 대할 것이다. 여러분 중에는 내가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이끌고 간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심판을 당할 때, 내가 말한 것이, 여러분에게 영원한 저주이건, 위안이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여러분이 그에게 나아오게 되기를 기원하다. 나는 여러분을 설득시키지 않고는 떠나고 싶지 않다. 나는 여러분을 설득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쓰셔서 여러분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만을 느껴본 적이 있었는가! 시편기자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읊고 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죄를 지으면서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나는 안다. 나는 뉘우침을 억누르기 위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이와 같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세상 사람과 한 덩어리가 되면 뉘우침도 믿음도 팽개쳐버린다. 그러나 곧장 진상을 알아내는 것이 좋다. 그래야 한다. 자신의 심령의 상처를 알아내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만일 무관심 때문이라면, 나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으면 여러분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잃고 지옥에 가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어떻게 영원한 불 속에서 견딜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악마와 영원히 살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심령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저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죄를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이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안 계신 곳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그 외의 다른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지옥다운 지옥일 것이다. 악마와 더불어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지옥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귀고 평화를 누리라.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한 사자로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 주일 첫날 아침 내가 할 직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화목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화목을 누리려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가 여러분의 죄를 다 용서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결점을 다 씻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계속해서 그를 거역하고 날마다 그의 옆구리를 찌른다면, 만일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학대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지게 될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비웃음을 당하실 분이 아니시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여러분과 화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노하실 때 그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백성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아보려고 왔다가, 예수께서 ‘내가 그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모두 땅에 엎드렸다. 그들이 이 세상의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면 그가 아버지의 보좌 옆에 계시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 볼 수 있겠는가? 나는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이 자기 무덤에서 악마에게 끌려나오는 광경을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두려워 떨면서 언덕에다 대고 소리치고 바위틈에 몸을 숨기는 모습을 생각한다. 그러나 악마가, ‘오너라, 내가 너희를 데려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두려워 떨면서 서야할 것이다. 그들은 그 앞에 심문을 받으러 한번 설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판결을 받을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나는 불쌍한 자들이, ‘주여,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천사를 보내 판결을 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모습을 생각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 사랑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판결을 선포하실 것이다.

이것을 믿기 어려운가? 내가 꾸며서 말한다고 생각지 말라. 나는 진리의 성경에 일치되는 말을 하고 있다. 내가 꾸며서 말한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라. 그러면 이 아침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리스도께 굳게 붙어 있기로 하는 온전한 결단으로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쉬기 까지는 여러분의 심령에 평안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더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새 육신을 입을 때, 다시 말해서 영원히 썩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아름다운 몸을 갖게 되는 때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은가? 그때는 새 몸을 입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늘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이 돌아가서 각기 예배를 준비해야 할 때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 중 아무나 방해하지 않으련다. 나의 의도는 불쌍한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당신에게로 이끄시기를! 주 예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복을 더하여 보내시기를! 그리고 사랑하는 구세주께서 아직 영적으로 잠을 자는 자들을 일깨워 뉘우치게 하시고, 악인들을 제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기를! 그리고 모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아버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것을 허락하소서. 아버지와 복된 성령께 모든 존귀와 영광이 지금으로부터 영원하시기를 비나이다. 아멘.”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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