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기 위한 필수 전제
개혁주의 자료 2015. 3. 8. 21:48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기 위한 필수 전제 (엡 2:20-22)
교회를 아는 지식의 중요성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특별한 각성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서 사는 안일한 태도로 지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법도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륜을 이해할 리 만무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다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란 것이 이런 것인데,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 우리가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서 희희낙락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활태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교회가 이 세상 가운에서 특별히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값으로 사신 가운데 이렇게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으로 묶으시고,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 속에서 필요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사명을 말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구원의 기관 노릇을 한다고 하는 이 사실이 가장 크고도 중요한 사명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 세우신 유일한 구원의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기관을 이 땅에 내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라고 할 때, 교회는 그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인격들을 통해서 그 활동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이 교회의 한 분자로서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펑범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수행하는 자로서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분은 참으로 값진 것이고, 이런 의식 속에서 각성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인 것이요, 그리고 이와 같은 믿음의 결국에 우리는 다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했습니다(1:9).
우리가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의 완성에 안전하게 들어가려면, 지금이라 불리우는 이 시점에서부터 이미 이 구원을 풍성하게 누리는 자로서 서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기관 노릇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구원의 기관 노릇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우선 필요시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무엇에 앞서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일입니다. 성경이 교회를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열심히 연구하고 충분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줄기차게 말하고 있고, 이때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도 말하며, 이러한 세상 가운데 처해 있는 우리 교회의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교회로 하여금 정당한 세상관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이 세상관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여기에 비추어서 세상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까지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비로소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다’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관을 정립하는 일이 성경을 하루 이틀 읽고 연구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삶의 다양한 체험과 경험 속에서 해석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책상 앞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외우는 식의 단순한 지적인 학습 방법만으로는 수립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깨달아진 어떤 하나의 이론은 삶의 경험 속에서 더더욱 견고하게 확증되어지고, 이것이 다시 다음 단계의 확증으로 발전하는 등등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마침내 성도가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믿음의 삶의 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방식으로 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식을 가리켜 체험적 지식이라, 혹은 살아 있는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참으로 많이 하고 나름대로 오래했을지라도, 가령 교회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에, ‘교회란 이런 이런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평소에 교회를 배우고 경험함에 있어서 순전히 지식적인 방법으로만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 밤잠을 설치면서 각종 수험 예상 문제들을 암송하듯이 하는 그런 방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했을지라도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 보여주는 정도의 뼈를 깎는 듯한 노력과 각오로 임했다면, 결과는 좀더 나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도의 각오와 노력으로 성경을 연구함으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신학자나 목사 혹은 기타 성경연구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혹시 이런 정도의 열심과 각오로 성경을 연구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성경 지식은 머리 속의 회전만으로는 온전히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온전한 것이 되려면 경험과 체험이 임상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만큼은 정확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집행해 나가시는, 이때 최고로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교회를 내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들을 희생하심으로 교회를 이 땅에 내셨고, 교회로 하여금 아들의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관심의 최고 절정체요,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를 주관하심에 있어서 기준으로 삼으시는 중심 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세상 만물의 모든 것들을 경영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엡 1:11). 또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는 말씀하시기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회복한 종교 개혁자들의 수고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을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물론 이 형식이라는 것은 또한 반드시 그 내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용이 없이 겉으로만 형식을 갖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형식이란 것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온전하게 수립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교회의 형식이란 것이 수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는 곧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하나님의 참교회가 온갖 미신과 거짓으로 더럽혀졌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기간이 얼마 동안이냐 하면, 대략 A.D 4세기 말경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던 때인 A.D 15-6세기경까지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교회의 정체성이란 것이 밖으로 알려지거나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로마 카톨릭이라고 하는 이름 아래 움직이는 거대한 조직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물론 이 거대한 조직은 자기네를 가리켜 스스로 교회라고 불렀지만, 과연 성경적으로 어떤 뒷받침을 받아서 그렇게 교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반대 세력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까닭에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성경에 눈을 뜬 사람들에 의해서 로마 교회가 사실상 거짓 교회인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고, 성경에 눈을 뜬 사람들의 각성은 이후 점차적으로 개혁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말틴 루터와 같은 사람은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긴 사람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최초의 사람인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도 이름 없이 수고하고 죽어간 이름 없는 종교개혁자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당시 보헤미야 사람 존 후스는 로마 교회를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부르짖던 중에 마침내 로마 교회 당국자들에게 붙잡혀서 화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교개혁의 불길을 여전히 지펴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이후 존 후스의 사상을 받들고 이를 널리 전파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다볼파(Taborites) 혹은 모라비안 형제들(the Moreviav Brethren)로 불리우면서, 로마 교회를 대항해서 종교개혁의 물결을 조성해 나갔습니다. 또 존 후스가 그처럼 로마 교회가 거짓된 교회인 사실을 깨닫고 눈을 뜨게 된 데에는 그의 시대 바로 앞에서 이루어진 존 위클립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존 위클립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사람인데, 그가 이런 활약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접할 수 있었고, 따라서 로마 교회가 얼마나 거짓된 종교였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존 후스도 이 위클립의 영어 성경 때문에 참 교회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종교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서서히 불씨를 지피셨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말틴 루터에 이르러 이것이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과 로마 교회와의 투쟁이 일어난 이 사실로 말미암아 자연히 교회의 정체성 문제가 거론되게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은 로마 교회의 거짓된 교회를 타파하면서 ‘참 교회의 실상이란 이런 이런 것이다’라고 제시했던 것입니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이론들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는 것들이 바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내용들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이러한 내용들에 입각하여 움직이게 되면 여기에서 자연히 형식이란 것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의 형식이란 것은 우리가 교회를 논하게 될 때에 우선적으로 논하여야 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대두됩니다. 적어도 어느 한 지역에 존재하는 지역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 교회로 발견되어지려면 바로 이 형식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형식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내용은 없이 겉으로 형식만을 갖추게 되면 안 되는 것이요, 또 사실상 내용이 없는 한에는 형식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각처에 많은 교회들이 지역 교회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에서 서울 하늘을 내려다보니까, 서울이 온통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들로 물결을 이루더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런 말도 80년대에 회자되던 것이고, 지금 우리는 96년도 말기의 시대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마만큼 서울에는 교회들이 많이 서 있습니다. 서울 장안 구석구석에 교회들이 들어가 있지 않은 곳이 없고, 심지어는 한 건물에 두 세 개의 교회 간판이 걸려 있기까지 합니다.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은 몫이 좋은 곳을 찾기 위하여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을 찾기 위하여 서울 장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닙니다.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끝에 건물을 빌리고, 강대상과 의자 등등의 기구들을 사서 배치합니다. 좀더 재력이 있는 사람은 내부 치장에 신경을 더 써서 강대상 뒤에 휘장도 드리우고, 예배당 안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꾸미기 위하여 돈을 씁니다. 큰 교단에 속해 있는 개척자인 경우에는 피아노도 면세로 들여놓고, 마이크도 음질이 좋은 것으로 골라서 설치합니다. 예배당 유리창에는 ‘무슨 무슨 교회’라는 이름을 아름답게 새긴 조각을 붙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좀더 세심한 개척자는 그럴듯한 성구나 교회 표어들을 써서 여기 저기에 붙여놓습니다. 그리고는 주일날이 되면 예배를 진행합니다. 이때 소위 말하는 개척 멤버들조차 없이 이렇게 교회를 시작한 경우에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만이 이 날 예배의 참석자들입니다. 이후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전도합니다. 다소간 시일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후 사람은 한 사람 두 사람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문제는 나타납니다. 그것을 교회를 빨리 부흥시키려고 하는 욕구에 사로잡힌 나머지, 교회에 가입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정당하게 점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이 정한 최소한의 규례와 절차조차도 무시하고, 아무에게나 함부로 세례를 베푸는 일이 있게 되고, 순전히 그 사람을 붙잡아 놓으려는 목적으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직분을 남발합니다.
이상 살펴본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처음으로 개척될 때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기존의 한 큰 교회가 순전히 복음 전도를 위하여 다른 지역에 교회를 분가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앞서 살펴본 방식으로 새로운 교회를 교회가 개척되고 있는 실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이런 식으로 개척되는 교회들이 교회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십자가 네온사인이나 교회 간판을 통하여 이름을 내는 등등의 것들은 교회의 형식이 전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교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내용이요, 혹은 형식이라고,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필자는 지금 현대적인 문화의 상황하에서 이런 것들이 교회에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과 같이 문화가 고급으로 발달해 있는 현대의 실상 속에서 교회 역시 이런 것들을 필요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필수 요소들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제아무리 다양하고 고급스럽게 갖춘다 할지라도 결코 교회의 속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이런 것들이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인양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처음에 개척하려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항상 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금 저 옛날 로마 교회가 지배했던 암흑기를 답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내용이나 형식이 전혀 비성경적인 것에 근거하여 ‘이것이 교회이다’라고 주장하는 결과를 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구분하는 시금석은 교회의 형식으로부터 나옵니다. 가령 우리 주위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이런 저런 종류의 기독교 선교 단체들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그야말로 선교 단체일 뿐이지 교회는 아닙니다. 때로는 복음을 섬김에 있어서 선교 단체들이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을 봅니다. 아직까지 문명의 혜택을 잘 받지 못하는 제 3세계의 사람들을 위하여 성경을 번역해서 원주민들에게 보급하기도 하고, 또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선교 단체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선교 단체의 경우 성경에서 교회를 정의할 때에 가르치고 있는 내용들이나 혹은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교회가 있어서 자기네를 가리켜 ‘우리는 교회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내용이 없다면, 그래서 교회의 형식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는 사실상 하나의 기독교적 종교 단체로 평가될 뿐이지, 결코 교회라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운다거나 또는 교회를 이루어 나간다고 할 때에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각별히 주의해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조건으로서의 정통성
교회가 교회도기 위해서는 형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를 개혁할 때에 이 형식 문제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이들이 세운 교회의 형식이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입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는 것이요, 두 번째로는 성례를 신실하게 집행하는 것이고, 세 번째로는 권징을 능력있게 시행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사실이 있어야만이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이미 오래 전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이 이론이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 작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입니다. 교회 안에 권징이 필요한 이유는, 이것이 있어야만이 교회는 교리를 순수하게 보존할 수 있고, 또 일정한 규율과 질서 체계를 유지함으로 교회가 스스로 혼란 가운데로 빠져들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일들을 미연에 방지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거듭난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에 순결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는 일은 더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순수한 선포를 통하여서만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며(고전 1:18), 또 이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난 자들의 삶을 잘 지도하는 가운데 구원의 항구로 안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1:23 2:2).
그런데 사실 현실적인 상황을 보건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명분 아래 이런 저런 세상적인 철학이나 윤리 도덕 등이 가르쳐지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기는 하되, 그 사상이나 이념을 충분하게 드러내지 못하거나 심하면 왜곡시키기까지 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말씀을 듣는 회중들까지도 이런 것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 순전히 이야기주의로 빠져버리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무엇보다 첫 번째로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할 때에 일어나게 될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순전하게 선포하는 이것이 어떻게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하는 회의를 스스로 품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까닭에 복음을 고지식하게 선포하는 일을 미련하다고 보고는 대신에 여러 가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세상적인 철학이나 기타 이론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런 것을 준엄하게 타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전하지 않는 데서부터 교회의 타락은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신앙 생활의 기반인 법인데, 바로 이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거나 심지어 변개시키기까지 하면서, 그러면서도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사실상의 이율배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논리와 행동하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성장이란 것은, 실질에 있어서는 전혀 교회가 아니요, 교회의 타락이라고 하는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딤전 3:15). 이 말씀을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가 하는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여기서 ‘기둥과 터’라는 것은, 진리를 기둥(pillar) 같이, 기념비(monument) 같이 높이 세우고 그 아래는 좌대를 돌로 쌓아 올렸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진리의 기둥이라는 기념비와 그 좌대가 되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교회는 말씀을 높이 들어서 ‘이 기념비를 보시오’라고 하면서 남들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높이 들고 서야 하며, 바로 이것이 교회의 성립근거요 또한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교회는 말씀의 수호자요, 선양자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떠나서는 달리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은혜의 방도이다, 혹은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다 라고 하는 이 사실은 철칙과도 같은 원칙이요, 영원토록 불변하는 진리인 것이며, 하늘이 꺼지고 바다가 잠기며 태산이 무너져도 변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회를 개혁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선포를 그 첫째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교회를 진단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회를 건설했습니다. 개혁자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 당시의 어떤 교역자 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이 전한다거나 또는 부분적으로 전하고, 혹은 사람의 말을 가하고 하는 등등의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보면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과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라는 말씀은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단호히 선포하거니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순순하게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성례가 신실하게 시행되어야 하고, 또한 권징이 집행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형식이요, 곧 교회의 표식인 것입니다. 이를 영어로는 ‘mark of the church’라고 합니다. 이들 세 가지 형식은 교회와 교회가 아닌 것들을 구별해 주는 시금석입니다. 이 세 가지 형식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이 세 가지 형식이 균등하게 작용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교회의 형식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형식은 어떤 임의의 기독교 단체를 평가할 때, 이것이 과연 교회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판정해주는 시금석 역할을 합니다. (이 세 가지 형식의 요소들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은 별도로 주제를 정하여 다루기도 합니다.) 교회가 새롭게 설립되거나 개척되는 처음 단계부터 이 세 가지 형식이 중심에 와야 합니다. 이 세 가지 형식이 없는 한에는 제아무리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을 하늘 높이 치켜올리고, 그럴듯한 값비싼 가구들로 교회당을 장식한다 할지라도, 결코 교회라고는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게 되면 이는 하나의 기독교적인 종교 단체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정당한 평가일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에 세워지는 첫 출발의 시작 단계부터 이와 같은 형식을 반드시 갖추어야 하고, 만일 부득이 이런 것이 없이 교회로서 출발했다고 하면, 이후로는 이것을 자기네 교회가 성취해야 할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정통성의 문제
우리는 여기서 정통성의 문제와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개척되거나 새롭게 세워지는 처음 단계부터 이와 같은 교회의 표식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 바로 이 정통성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정통성이란, 교회를 세우는 자의 자격 문제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회란 아무라고 열심히 있기만 하면, 그 열심 있는 사람이 세우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이런 생각에 의해서 현재에도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는 데 있어서는 세우는 자의 정통성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정통성은 다시금 하나님의 재가라고 하는 명제와 연결되어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부르심을 입고, 그리고 보내심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이것을 주장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와 변명으로서 그처럼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의 정당성을 하나님께로 연결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요, 문제는 객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객관성은 다름 아닌 정통성입니다. 그리고 이 정통성 혹은 객관성은 교회를 세우는 사람의 자격과도 연결되어집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먼저 그렇게 할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 자격은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받는 것을 가리키고, 이것이 자기 혼자만의 주관성을 가지면 안되고, 자타가 시비를 따질 수 없을 만큼의 객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의 이 논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는 곳입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말할 때에,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터’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어떤 사람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말씀을 맡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신 가운데 당신의 말씀을 맡기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도록 세우시는 사람이 없이는 교회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부르심을 입었던 초대교회 당시의 때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려 함에 있어서 당신의 말씀을 맡을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나서서 다시금 앞서 이미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통성이란 것이 성립되어집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사도들의 시대와는 달리 이미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었고, 또 이와 더불어 교회의 창설이 끝난 관계로, 그리고 다름 아닌 교회를 세우는 일에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성격상, 이제 누군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 자신이 이미 정통적인 교회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고, 또 아는 바 그 진리에 이미 자기 자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사람이어야만이, 이후 교회란 이런 이런 것이다 라고 하면서 남들을 가르치고 인도함으로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정통성에 대한 해석입니다. 자기 자신이 교회란 이런 이런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깨닫는 대로 친히 자신을 적용해 나가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을 바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이론대로 자신은 물론이요 함께 인도함을 받는 다른 성도들을 목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교회가 세워짐에 있어서 이 정통성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교회는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할 때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서 ‘이제부터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나가자’라고 합의하고, 그렇게 밀고 나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교회란 것이 존재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종교개혁자들이 생명을 걸고서까지 사수해 나온 진리의 법칙에 크게 위배됩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사람 편에서 먼저 모이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심으로써 되어지는 일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사람들 편에서 스스로 먼저 모이는 데서 교회가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불러모으심으로 비로소 교회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 일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하나님 당신께서 세우신 말씀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시는 모습을 띄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말씀의 순수한 전파’라고 하는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 가운데 첫 번째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첫째로는 말씀의 본질, 곧 진리성과 관련한 것이고, 둘째로는 말씀을 전파하는 자의 자격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은 피차 분리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상 누구나가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누구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있고, 또 그렇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입네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보편적인 차원에서 자격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특별한 의미, 그러니까 교회를 세우는 일과 관련하여, 교회가 성립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로 하는 말씀을 순수한 전파 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말씀의 순수한 전파의 당위성 문제를 떠나서 교회의 본질 문제를 다룬 적이 개혁파 교회권에서는 단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서 작용하고 역사하는 가장 적합한 곳은 교회의 강단입니다. 이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어야만이 이 강단에 설 수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만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수 있고, 또한 성례를 집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충분하게 드러내어 선포할 수 있으려면, 그마만큼 필요 적절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필요 적절한 훈련에는 성경 지식을 쌓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제로 한 사람의 교회원이 되어, 성경으로서 깨닫고 배우게 되는 교회의 이론을 몸으로서 적용해 나가는 과정까지 수반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훈련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역을 통하여 자신의 죄값을 사유하셨음을 확실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을 통하여 죄를 이기는 능력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신앙고백의 바탕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고, 그렇게 깨달은 이론대로 자신을 적용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양육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필요 적절하게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필요 적절한 훈련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고, 이런 사람만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을 보면, 자신이 어느 날 작심을 하고 산 속에 들어가서 밥을 굶어가면서 소위 말하는 금식 기도에 힘썼더니, 갑자기 무슨 신기한 기운이 자기를 사로잡았는데, 이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항상 문제를 일으켜서 마침내 그들이 발휘한 열심만큼이나 그렇게 깊게 교회를 색욕거리로 변질시키게 됩니다. 진리를 아는 능력이 없고,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는 신중함이 없고서야 어떻게 교회의 형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의 순수한 전파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이내 삯군 설교자로 변질되기 마련이고,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달음박질치며 달려나갔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부르신다거나 훈련시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우리의 능력이 심히 미미하다 할지라도 태산과도 같은 주의 일일지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부르심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자기 속에 교회를 아는 지식이 넘쳐나는 이것이 바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지는 첫 번째 요소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함이 넘쳐나고, 교회를 아는 지식이 머리 속에 가득차 있지 않는 한에는 어느 누구도 주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나서거나 주장할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아는 만큼만 이야기할 수 있고, 또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인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는 지식도 없고 체험도 없는 사람이고서야 어떻게 교회를 논하고 세워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예로부터 개혁파 교회는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단코 강단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훈련받지 못한 사람이 강단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이 규례는 개혁파 교회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런 원리가 간단없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훈련받지 못한 사람, 곧 정통성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마구잡이로 세워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들에 의해서 교회는 여지없이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들은 순전히 열심 하나만을 내세우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듭니다. 따라서 이들이 가진 교회상이란 것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하고 추상적이기 그지없으며, 지극히 유아적이어서 유치하기만 합니다. 이들은 교회의 형식 혹은 표식을 이루어 내려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고,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건물을 짓고 여기에다가 사람들을 그득히 채우는 일에만 죽기살기로 뛰어다닙니다. 교회를 처음 개척하는 초기 때부터, 주보를 화려하게 만들고 교회 이름을 새긴 간판을 거창하게 내어단다거나 십자가 종탑을 높이 세우는 일 등등의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을 보건대, 그 이후 나아가게 될 발전과 결말이란 것이 이렇게 나타날 것을 이미 지금부터 충분히 예상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까닭에 중세기에 시작된 종교 개혁은 사실상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성함으로 이것을 완성하는 일에 초석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빠져버린 지난 날의 과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교회는 자기에게 교회를 세우려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함부로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려는 사람은 최소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양하고도 깊이 있게 아는 지식을 갖추어야 하고, 이것이 교회의 실질적인 내용으로 자리잡음으로 교회의 형식이 되도록 하는 일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같은 마음으로 거듭난 증거가 있는 사람이 최소한 몇몇은 되어서 함께 동일한 각성 하에서 움직일 수 있어야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네만 믿는 신조도 뚜렷하게 가지고 있고, 교회적인 질서와 규범도 있어서 거기에 확고히 서 나갈 때에 비로소 교회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관이 투철하지 못한 어떤 한 사람이 순전히 열심하나만으로 밀어붙여서 건물을 얻고 거기에 교회 간판을 내어 거는 식으로도 교회란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아주 피상적인 고백만을 하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고 합쳐가지고 적당히 성경공부를 하다가 기회를 살려 목사를 모셔오곤 하는 식으로도 교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워지는 교회들의 경우 신학적 결점을 치명적으로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교회의 표식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서부터 잘 드러나게 됩니다. 내용이 없으니 형식이 나올 수 없는 것이고,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신학적 지식이 없으니, 내용을 구성해 나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앙고백의 일치성도 없고, 신앙의 도리들에 있어서 논리적인 일관성도 없는 까닭에 객관적으로 드러내보일만한 교회다운 형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상황을 보건대 종교개혁기의 상황보다도 더 어두운 면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 이 시대는 당시와도 같이 개혁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온갖 박해를 당한다거나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기는 환난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건설해 나가는 일에 전념하는 주의 종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심히도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오직 로마 교회 하나만이 개혁의 대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개혁자들은 로마 교회의 거짓된 것에만 맞서서 투쟁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혹은 영국과 같은 경우, 헨리 8세가 새롭게 시작한 성공회와 맞서서 개혁을 하는 것이 청교도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저마다 개혁파 교회임을 주장하고 내세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아니한 것으로 가득차 있는 까닭에 상황이 심히 어려워져버렸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름 우리는 온통 비스므레하고 유사한 것들에 둘러 싸여 있는 까닭에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하에 놓여진 것입니다.
상황이 왜 이렇게 처참하게 되었는가 하면, 한국 교회가 그 동안 지나치게 물량적인 부흥에 치중하느라고 자체에 규정된 교회 개척의 원리들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부흥과 선의의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각 교단마다 자기네가 스스로 정한 교회법조차도 무시하면서 마구잡이로 교회를 개척해 나왔습니다. 각기 개개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점들은 있겠으나, 대개의 경우 교단들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과 관련하여 지키고 따라야 할 질서를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것을 교단의 헌법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신앙의 도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가령 교회가 한 사람의 구도자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따라야 할 일정한 질서 체계를 세운다거나 목사나 혹은 장로와 집사의 직무를 맡기 위해서 밟아야 할 일정한 규율과 질서들도 설정해 놓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는 일과 관련한 규례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자기네 판단에 좋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런 저런 생각들을 여기 저기서 조금씩 취해서 모으는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실증되어진 개혁파 교회의 정통성의 기반 위에 서서 최종적으로 교회법을 확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다른 말로 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원리에 입각하여 세세한 부분들을 설정하고 규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까닭에 가령 장로교 헌법이라 할 것 같으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헌법과 미국 장로교의 헌법은 근본 원리면에 있어서 동일한 것입니다. 지역적인 특성과 문화적인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는 차이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 원리면에 있어서는 영국 장로교의 헌법과 한국 장로교의 헌법은 서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신학교들과 목회자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부흥되려는 욕구에 사로잡힌 나머지 혹은 선의의 경쟁이라는 이름 하에 서로 교세를 확장하는 데 집착하느라고 무질서하게 교회를 세워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신학의 기반이 없는 비정통적인 신학교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오고, 신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재주를 피워 신학교를 졸업하고는 적당히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지역 교회들이 여기 저기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세울 수 없는 것이고, 일정한 질서에 따라야 한다고 저마다의 교단 헌법들은 규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조금 전에 설명한 바 있습니다. 특별히 말씀의 순수한 선포가 교회의 중요한 표식인 것과 관련하여, 교단의 통제하에서 적절하게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설교할 수 있다고 못박아 놓았습니다. 목사가 아니면 성례를 집례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순전히 권위를 내세우려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존귀하게 다루려는 데서 부득불 이러한 질서가 최소한도로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생들이 전도사라고 하는 명칭을 내세워 저마다 앞다투어 교회를 개척하고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어느 정도 사람을 모으게 되면, 각 교단마다 앞다투어 이들에게 안수를 주어 목사가 되게 하고, 교회 설립을 인증해주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는 가히 신학교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요와 공급이 넘쳐나서 여기 저기 신학교들이 생겨나고, 신학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학생을 모집할 때에 두루뭉실하게 넘어갔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목사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갖추어야 할 것으로 신앙고백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보다도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하고, 또한 지역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처럼 지역 교회를 이루어나가고 있는 실질에 성립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데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러나 이것은 자기 혼자만의 주관적인 신념이어서는 안되고,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봉사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드러난 은사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의 직분이란 것은 은사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가 신학생을 뽑을 때에 이런 것을 확실하게 점검하지 않았습니다. ‘소명이 있느냐?’라고 묻기는 하지만, ‘예! 소명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교회의 ‘추천서’라는 것도 아주 요식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원래 이것은 목사 후보생이 실제로 지역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지, 나아가 목사의 직무를 감당할만한 은사가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알아보려는 의도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추천서 용지를 들고 와서 도장을 찍어 달라고 하면, 그냥 찍어주었습니다. 만일 찍어주지 않을 것 같으면, 그는 교회를 떠나버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는 수단으로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이즈음의 상황이 이미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새삼스럽게 신앙고백을 배우는 기괴한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믿음 안에 서 있고, 믿음의 도리들에 대해서 확고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런 기초 위에서 이제 목회에 관한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 신학교의 과정인데, 어이없게도 신학교에서 신앙고백을 새삼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조차도 제대로 교수되는 예가 지극히 드물었습니다. 이것저것 배우느라고 대개의 학과들이 수박 겉핱기 식으로 가르쳐졌습니다. 신앙고백서를 아예 가르치지 않는 신학교도 있는가 하면, 가르친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생들의 경우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자신이 인격에로 흡수되지 못하고, 단순히 하나의 지식과 정보가 되어 그의 머리 속에 쌓여지게 되었습니다. 정보와 지식 그 자체만으로는 구원 얻는 신앙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초보적인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식과 정보를 가진 이것이 자신에게 있는 신앙고백인 것처럼 여김으로 큰 착각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열심을 낸답시고 나서서는 교회들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이후 하는 일들을 보니, 도무지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리 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여기 저기 움직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목회하는 사람다운 자태가 엿보이지 않습니다.
표현이 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살펴보니, 순전히 기업을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미국 목사님이 ‘하나님을 파는 세일즈맨’이라는 책을 써서는 이런 형태의 목회자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일들을 하고 다닌다 말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순전히 마케팅 기법으로서 운영하고 부흥시키려고 합니다. 겉으로는 성령님의 역사 운운하지만, 실제로 해나가는 행동을 보면 순전히 마케팅기법입니다. 이들이 목회하는 교회들은 순전히 기업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성장학’인가 뭔가 하는 세미나들이 여기 저기서 개설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곳을 기웃거리면서 복음을 판매하는 기발한(?) 방법들을 배우곤 합니다. 이들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사람을 심각하게 하거나 진지하게 하는 내용들이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고, 그저 사람을 웃기고 편하게 해주며, 그야말로 싸구려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들은 주의 몸을 돌보는 목자요 교사로서의 목사입네 하면서도, 정작 주의 백성들에 대한 신실한 책임감도 없고,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인도하려고 하는 진지한 열심이 없습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많이 긁어모아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백화점과도 같은 큰 건물을 지을까 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야말로 기업하는 사업가들이 기업을 운영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듯이 하는 그런 행동들을 답습한단 말입니다. 교회원들의 영혼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여 관찰하는 가운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들을 인도하고 권면하는 일에 애쓰는 이런 모습을 도무지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인도하고 주관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행태들이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교회를 운영한다 하면서도 정작 성경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 무슨 이론 하에서 교회를 진리에 걸맞도록 운영해 나가겠습니까? 그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본받고 답습하는 것이 전부요, 누군가가 어떤 방법을 써서 교회를 크게 만들었다고 할 것 같으면, 너도나도 달려가서 그 방법을 배우고 도입해서 써먹기에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어이없는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에 소위 성공했다고 알려진 어떤 유명한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이 목회자가 어느 날 자기와 같이 크게 성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강의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간증하기를, 자신이 큰 교회를 짓기 위해서 마음에 둔 어떤 땅이 있었는데, 마침 성경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성을 칠일 동안 돌았던 것이 기억이 나서, 자기도 매일 아침마다 그 땅을 찾아가 ‘하나님, 이 땅을 제게 주십시요!’하면서 그 경계를 돌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그 땅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목회자가 이런 간증을 했는데, 이 간증을 들은 당신의 참석자들이 저마다 나서서 이 목회자처럼 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네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방법을 가르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마치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인 듯이 가르쳐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이 많고, 교회들도 많다고 하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자기네가 정통이요, 가장 성경적인 목회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고 자부했습니다. 참으로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세월이 흐르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러자 이렇게 순전히 자기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이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정도를 강의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강론을 정리하자면,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로서의 형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물론 이 형식은 실제적인 내용이 있는데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용은 없는데, 껍데기로만 형식을 갖추고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개혁파 교회가 설정한 교회의 형식은 첫째, 말씀의 순수한 전파, 둘째, 성례의 신실한 집행, 셋째, 권징의 능력적 집행 등입니다. 이 세 가지 형식을 갖추는 한에 있어서 비로소 교회라고 평가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런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교회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혹 형식을 갖춘 듯이 보여도 그야말로 껍데기만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가 이런 처지에 머물러 있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형편에 있는 교회가 무언가 열심을 내고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되면,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기독교적인 종교 단체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교회 타락의 주범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교회가 처음에 설립될 당시부터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서 그렇게 세워져야 합니다. 즉 교회를 설립하는 사람은 정통성이 있어야 하고, 부흥되려는 욕구에 미혹되지 않는 가운데, 항상 교회를 교회다웁게 하는 일에만 최고의 관심을 기울여 나가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질적인 성숙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습니다. 성숙이 수반되지 않는 부흥이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별히 은사를 더하심으로, 우리의 봉사를 통하여 교회가 세워져 나갈 때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안산회복교회/전상범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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