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포렌식과 칭의

 요즘 세간에 자주 듣는 용어 중에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이란 용어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포렌식이란 용어가 칭의를 정의하는 용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거 같다.

포렌식은 포럼과 퍼플릭의 합성어로 공적인 재판 혹은 법의학적 용어를 일컫는다. 사건 현장에서 범인은 사라졌지만 현장에 남은 증거를 통해서 사건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칭의를 흔히 법정적(forensic)이다고 말할 때, 단순히 법률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과거의 영역, 초월의 영역에 대한 증거가 여기까지 남아 있다는 의미다. 칭의는 원래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법정의 선언이라 초월적이기에 경험되지 않으며 과거 역사 현장의 사건이기에 오늘 우리에게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나 법정적이라는 이 용어는 단지 경험되지 않음만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은 아니다. 범죄가 경험되지 않지만 범죄 현장이 범죄를 증언해주는 것처럼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서신 사건과 역사상 빌라도에 법정에 서신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유추적인 증거를 남긴다. 마치 디지털 증거들이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지웠음에도 그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역사에서 증발해버린 현실이 오늘 우리에게 증언을 하고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이며 이것의 신학적 상승은 하늘의 법정의 사건이다. 우리에게 계시적인 증거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성화와 함께 실제적인 증거가 신자의 내면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칭의가 법정적이라고 할 때는 두 가지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이것이 우리 경험을 넘어선 초자연적이며 과거 역사의 일이며 그리스도가 겪으신 일이라는 점이다. 둘째, 그 구원 역사의 현장은 우리에게 증거를 남겼다. 마치 포럼의 토론과 공적 영역의 토론처럼 백주 대낮에 모두가 볼 수 있게 그 증거를 남겼으며 보는 자는 복이 있으며 귀는 있는 자는 듣게 될 것이다.

이 공적 영역의 증언이 우리 내적 증언과 역사로 되살아나는 사건이 성화다. 그리고 이 성화가 없이 역설적이게도 이 칭의를 경험적으로 알 수 없다.


출처: http://repress.kr/9260/

엄밀히 따져볼 때, 

신학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놓고보면, 

"중립적 가치"의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신학 자체를 

'절대선'의 자리에 올려놓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신학을 

'절대선'의 자리에 올려놓으면,

말씀안에 신학이 종속되는게 아니라,

신학안에 말씀이 종속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신학을 공고화 하기 위해,

되려 말씀을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고,


그 신학의 틀에서 벗어난 것들은

모두 반진리, 비진리 취급을 당하게 되고,

결국 신학 자체가 

절대진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진짜 중립적 가치에 있는 신학이

진리에 맞는 수단으로 적용되기 위해선,

먼저 하나님 경외함을 최우선에 두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속에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자세가 

중심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중심이 바로 서 있다면,

신학은 내가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기 위한

선한 '수단'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기가 배운 신학이 

말씀안에서 

어떤 오류가 있고 문제가 있었는지를,

나중에 성령님과의 교제 속에서 

진리에 맞게 교정될 수도 있고,


건강한 영적상태를 유지하며 

믿음을 더 성장시켜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중심에 

그런 영적 기반이 깔려 있지 않고

오로지 신학 자체가 

절대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하나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고

성령의 역사가 아닌, 

그 신학적 지식을 절대기준 삼아 

하나님의 뜻도 다 제끼고, 

성령의 역사도 다 제끼고

되려 진리와 상충되는 

미혹된 흐름으로 가도록

신학을 마귀가 역이용해 

악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이게 바로 자칫 신학을 통해서 

맺어질 수 있는 최악의 열매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이런 최악의 열매가 

맺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이 든다.


신학에 매몰되어 버리면,

현실적으로 풀어지는 문제에 있어서

영적인 접근이 전혀 안되기 떄문에, 

분별 자체가 되지 않는다.


WCC 총회현장에서 그 참담한 실체들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냈음에도,

이게 영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인식 자체가 전혀 되지 않기에,


자기 신학 지식만 가지고서,

WCC의 태동은 이랬고,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는,

말같지 않은 소리나 하고 있고...


휴거도 없고, 7년대환란도 없고,

이런건 다 세대주의자들이 만든 교리고,

이스라엘은 이미 구약에서 관계가 끝났고,

그 언약은 교회로 대체되었다는

하나님 마음과 전혀 상관없는 소리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훗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

신학이란 간판 달고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하며, 

미혹된 흐름을 따라가며,


본인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까지 

얼마나 그 미혹을 전염시켰는지에 대한

분명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신학'이란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행태다!



글: 엘샤다이

개혁주의 선교원리에 관한 논의

 

이광호 목사




1. 서론

   우리시대에 ‘선교’라는 용어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기독교 초기부터 사용된 말은 아니었다. 교회가 수행해야할 본질적 사명 가운데 하나가 복음전파이므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는 선교라는 말이 복음전파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선교라는 용어는 인간의 종교적 열정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물질적 봉사의 영역으로서 선교를 요구하도록 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우리는 주로 가난한 나라에 선교를 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향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의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경향이다.     

  본래 선교학의 유일한 근거는 신구약 성경이다. 성경의 요구와 가르침에 근거하여서만 선교의 의미가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학이 현대교회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이래 선교학은 성경중심으로 발전되기 보다 세계 속의 급변하는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개혁주의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을 기초로 한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선교에 있어서도 종교적 자기 열정이나 결심이 아니라 기본적인 신앙고백의 틀 위에서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선교의 목적은, 미리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 성도들이 하나님의 택한바 된 백성들을 찾아 그 고백을 전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현대선교의 다양한 신학적 양태들을 간단하게 살펴봄과 동시에,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은 선교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졌으며 그들은 어떠한 고백을 했는지 신앙고백서들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현대 선교에 있어서 적극성과 소극성의 문제와 함께 구체적인 성경말씀들을 살펴봄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우리의 선교원리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현대선교의 다양한 신학적 양태

   (1) 자유주의 선교이론

       우리 시대에 가장 경계해야 할 선교신학은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다. 자유주의 선교이론은 ‘Missio Dei 사상’에 근거한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교회의 안팎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세상통치를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여 인본주의적 해석을 가미하고 있다. 이에서 나온 선교사상들이 남미의 해방신학, 유렵의 정치신학, 아프리카의 흑인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현재 이슈가 되어있는 여성신학 등 소위 행동신학(Doing Theology)이다.   

  1960년대가 되면서부터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조와 함께 선교학 마저 고유한 복음전파의 개념을 크게 상실 당하게 된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내부에서 상황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사회과학적인 면이 과대하게 강조되었다. 최근에 들어와 신학의 타학문 분야에서 이에 대해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즉 신학이 없는 선교학에 대한 비판과 성경을 도외시한 사회과학 쪽으로 치우친 선교학 연구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 복음주의 선교이론

       복음주의 선교이론의 특색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참여에 있어서 인간 즉 지상교회들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선교실적을 논하게 된다. 그들은 선교활동 자체가 인간의 공적이 되며 그 공적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활동으로 인한 선교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를 하기도 한다. 

  복음주의 선교학에서는 소위 기독교화(Christianization)에 치중하여 기독교의 영역을 넓히는 것에 힘을 쏟는다.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예정에 대한 교훈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 대신 보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주로 강조하며 하나님을 이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고유한 하나님의 경륜이나 섭리보다 인간의 자기연민에 기인한 감성적 사고의 결과일 따름이다.  


   (3) 개혁주의 선교이론

       개혁주의 선교이론에서는 구원과 선교 전반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참여할 뿐이다. 개혁주의 선교이론에 있어서는 외적인 결과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논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온전히 순종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며 반성하게 된다.

    개혁주의 선교이론의 근거는 오직 신구약 성경말씀이다. 이 말씀에 조화되는 전통적인 신앙고백들이 곧 선교이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즉 개혁주의자들은 인간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획과 경륜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3.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의 선교에 대한 자세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선교에 대한 이해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선교’에 관한 별항이 들어있지 않다. 현재에 있어서도, 많은 경우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의 표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제1부 교리표준 <1. 신앙고백>에서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를 첨가한 문서를 채택하고 있다. 물론 나중에 첨가된 이 조항은 원리적 측면에서 앞의 전통적 신앙고백서에 조화되어야 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현대 개혁주의 선교 이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5장을 전반적으로 잘 고찰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 제1항에서는 “하나님은 ‘은혜계약 안에서’, ......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거저 주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장에는 전체적으로 ‘모든 인간’을 뜻하는 문구들이 되풀이하여 등장하고 있다. 제1항에는 ‘모든 멸망한 인류’, ‘모든 사람’, 제2항에는 ‘모든 사람’, ‘모든 사람들’, 제3항에는 ‘모든 사람’, 제4항에는 ‘모든 민족’ 등이 나타난다. 여기에 언급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요 온 인류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고신 교단이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5장을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앞의,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와 제10장,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하여’에서 고백하고 있는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동일한 신앙고백서에서 서로 배치되는 항목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제35장 제1항의 모든 멸망할 인류와 ‘모든 사람’ 앞에는 각각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서’ ‘복음 안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제2항에서도 ‘모든 사람’ 앞에 ‘복음 안에서’라는 말과 ‘진실로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제3항에서도 ‘복음을 듣는’ 이라는 수식어가 ‘모든 사람’ 앞에 붙어 있다. 그리고 제4항에서의 ‘모든 민족’은 all nations가 아니라 every nations로 해석하여야 한다. 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에 속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종족을 초월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5장이 앞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조회되는 고백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인을 다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예정과 부르심을 통해 주를 믿는 성도들만 부르고 계시고 그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궁극적 심판도 실제적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에 의한 제한적 구원에 관해서는 대소교리문답에서도 그대로 명시되어 있다.

 

   (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복음전파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요리문답 제54문에서 거룩한 공회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관한 문항에서 ‘인류가운데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부르시고 계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선교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영생에의 참여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함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83문에서는 교회의 문을 여는 천국열쇠의 핵심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84문에서는 복음의 선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게 되지만, 불신자와 위선자들에게는 천국문이 닫히게 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와 유기된 자 사이에는 복음의 선포 즉 선교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구분되어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 벨직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도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특히 벨직 신앙고백서 제16장 [영원한 선택]에서,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에 대해서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무력함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어떤 노력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원한 선택만이 구원이 있게 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인간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지 않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밝히고 있는 바, 인간의 구원이 인간들의 여하한 활동에 달려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달려 있음은 현대 선교학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3) 도르트 신경

      도르트 종교회의(the Great Reformed Synod of Dortrecht, 1618-1619)는, 알미니안 주의가 생겨나고 그 사상이 퍼짐에 따라 개혁교회 내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됨으로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도르트 신경은 첫째교리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도르트 신경 첫째교리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의 말미에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이라는 별항에서 선택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변증하고 있다. 특히 제1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배격하고 있다. 그리고 제3절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선택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무런 효력이 없게되어 인간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바 은혜로써 주신 칭의와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될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4. 선교의 적극성과 소극성의 문제

   개혁주의 신학에서 선교는 소극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그 소극성이라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인간의 적극적인 자기노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개혁주의자들의 선교에 대한 적극성은 하나님의 경륜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인간의 선교적 자기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 아니다.

    

   (1) ‘선택 및 예정교리’와 선교의 조화 

       복음전파에 있어서 과연 선택 및 예정교리와 현대선교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다 알 수 없다. 단지 말씀의 가르침을 좇아 그 뜻을 따를 따름이다. 선교는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교리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한 채 ‘기독교’라는 종교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적 의미에서의 선교를 벗어나는 것이다. 선교는 인간의 종교적 성공’이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올바른 선포’가 중요한 문제이다.

  선교는 이미 설정된 구원의 완성을 지향해야 한다. 즉 이미 설정된 선교의 완성을 향해 각기 주어진 은사에 따라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선교의 착실한 과정이요 목적인 것이다.     


   (2) 무분별한 열정에 대한 주의

       현대적 개념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교활동은 자칫 인본주의적으로 흐르기 쉽다. 선교활동 여하에 따라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할 것이라는 생각은 알미니안주의적 신학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알미니안주의 에서는 “믿고자 하고 이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전체적이므로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할 뿐, 그 외의 다른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선교는 소위 선교 전략적 방법에 치중하려 하며 그것을 위해 많은 선교사와 선교비가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떠난 선교지도자들은 더 많은 사람을 해외로 보내고 더 많은 돈을 지원함으로써 선교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지나치게 되면 인본주의적 종교활동으로 전락할 뿐 성경이 가르치는 바 진정한 선교가 되지 못한다.   

 

   (3) ‘선포냐, 설득이냐’의 문제

       개혁주의 선교신학에서는 ‘선포’에 더 많은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는 ‘설득’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선포’나 ‘설득’이라는 용어 대신 ‘전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이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선교에 있어서 이에 대한 문제해결을 하는 선교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자칫 ‘설득’은 말씀 전달자의 사랑과 관심이 풍부한 것처럼 보여질 수 있는 반면, ‘선포’는 일방적인 것으로 매우 건조한 의미로 들려지기 쉽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보아, 선교 신학에 있어서 ‘설득’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감성적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선포’는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지적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선교학자들 가운데는 ‘선포적 전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설득이  타협의 위험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궁극적 설득자는 성령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복음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도 선교에 포함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종교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하여 선교전략이나 방법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전략이나 방법에 열중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자연스런 인도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경험이나 주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성경말씀에서 얻는 교훈

   1) 복음전파에 대한 적극적 교훈

      (1) 모든 족속을 제자 삼도록 요구하심(마태복음 28:18-20)

          흔히 선교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마태복음 28장 맨 뒷부분을 언급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족속 모든 사람’(all nations everybody)을 제자로 삼을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 여기서 요구하시고 있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 민족에서부터 이방에 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오히려 개별적 자기 판단을 중지시키고 계신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신다. 즉 자기 이름으로 자기 판단에 따라 세례 베푸는 것을 엄히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내용에 국한됨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인간의 활동이 이에 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의 뜻을 멀리 하는 것이다.

      

      (2) 주님의 증인이 됨(사도행전1:8)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게 되었을 때 성도는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8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우리 시대의 선교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서 특별히 주어진 말씀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라는 말씀은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심을 의미한다. ‘너희에게’ 라고 하는 말씀은 지상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 오순절 성령이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 오시게 되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언약의 민족인 유대인의 범주를 벗어난 이방에 미치는 복음의 의미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3)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의 의미(딤후4:2)

          이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바 단순히 ‘전도’를 계속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가 지속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전파’는 말씀선포의 의미를 가진다. 이웃에게 ‘예수 믿으시오’라고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 전도의 말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더불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복음전파, 즉 선교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가장 중요한 핵심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있어야만 한다.말씀선포 보다 더 중시되는 다른 선교적 활동이 있다면 분명히 견제되어야 할 일이다.   



   2) 복음전파에 대한 소극적 교훈

      (1) 노아홍수 사건에서 얻는 교훈(창세기7:1,13; 벧전3:20)

          노아 홍수때 구원을 받은 사람은 모두 여덟명에 지나지 않는다. 왜 단지 여덟명인가? 우리는 노아의 방주의 규모를 알고 있다. 그 큰 배에 사람을 태운다면 아마 수 천명이라도 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심판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악한 사람들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악함이란 윤리적 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들의 진리를 떠난 악함이었다.

  노아 당시에도 순진한 어린이들이 있었을 것이며 일반적인 범죄능력을 상실한 노약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노아의 방주에 오르지 못했던 것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악함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떠난 악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방주에 태우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의 열정적인 교인들은 그 큰 방주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각종 동물을 암수 일곱씩 태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태우려 애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노아의 가족 이외에는 한 사람도 방주에 타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며 노아의 가족 역시 방주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워 구원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가나안 땅에서의 냉혹함(신명기7:1-5)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살고 있던 이방 민족들에 대한 무차별한 도륙(屠戮)을 명령하셨을까? 여호수아서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진다[여리고성 함락(수6:20-21), 아이성 전투(수8:24), 하솔과의 전투(수11:6-15)].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유하여 이스라엘에 포함시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모두 쫓아내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도륙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타협을 원하시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법칙만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자기 자비심이나 연민은 오히려 위험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족속들을 철저하게 추방하고 도륙했던 것은 그 땅이 하나님의 백성만이 살아야 할 곳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시대 같으면 그 이방 사람들을 잘 권유하여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논리를 펼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방법이라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뜻을 나타내심으로써 그 의미를 명확히 하셨다.    


      (3) 세례요한의 무자비함(마태복음 3:5-9)

          세레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세례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었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례 베풀기를 거부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를 받기 위해 그에게로 왔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고 책망하며 그들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했다.

  우리 같으면 그런 경우 어떻게 하려 할까?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찾아왔다. 누가 강압적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자기 판단에 의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만일 오늘날 잘못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자발적으로 찾아온 그들에게 마땅히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런 식으로 쫓아내는 것은 비복음적인 것이라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렇게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4) ‘복음의 비밀’과 ‘깨달음이 허락된 자’에 대한 이해(마태복음 13:10-17)

          복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별적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자기백성’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함임이 복음서 처음부터 계시되어 있다(마1:21).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다 이루시기 전에 이미 ‘자기백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자기의 말을 듣기는 들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깨달음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이 그 말을 듣는다 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엄숙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경험에 따라 일반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녀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에게는 모든 것을 드러내어 가르쳐 주시지만 자기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밀을 알려 주지 않으신다.  

           

       (5) 교회의 정결을 요구함(고린도전서 5장)

           사도바울은 교회의 정결을 교회 안에 들어와 복음의 맛을 상당부분 보았을 사람들에게 조차 하나님의 교훈을 떠날 경우 저들을 교회로부터 쫓아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그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주변의 권유와 자기의 판단에 의해 교회 내부로 들어왔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교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이들은 이러한 원리를 염두에 둔 채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강권하여 교회를 채우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 가운데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판단이나 노력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6. 결론

   개혁주의 신학원리에 있어서 선교란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교란 인류의 구원에 대해 인간의 노력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 가운데 온전히 참여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복음전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에 있다. 이는 인간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정과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자기활동에 근거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근래의 개혁주의 신학사상에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구원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므로 그냥 방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성도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에 온전히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숙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선교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나 노력을 지속해 나가되 선교지도자들은 그 일들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행해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밖에 있는 자들 중, 외견상 누가 하나님의 구원에 부르심을 받은 자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양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1:20)을 통해 주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가운데 미리 부르심을 입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가 아직 세상에 속해 살고 있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 나서는 것이 곧 종된 자들의 삶인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선교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느 정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의 백성을 예정하여 선택해 두고 있음을 믿는다. 우리가 힘을 다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섭리 가운데서 그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력 여하가 복음에 참여하게 되는 수를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원리에 입각한 선교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덜 열정적으로 비쳐질 우려가 없지 않다. 물론 그렇지 않으나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다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범주를 알 수 없으므로 인해 더욱 부지런히 주님께서 허락하신 선교사역에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복음에 성숙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개혁주의적 올바른 선교이론을 확립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와 문화 제8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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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후기-종교개혁 연구에 보다 밝은 빛이 . . .


                                                         리차드 멀러 (Richard A. Muller. 칼빈 신학교)
                                                                     번역 : 이성호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종교개혁과 후기 종교개혁 연구는 지난 30 여년 동안 극적인 변화를 겪었는데 이 변화는 신학교 교육에 가장 적합한 연구 분야, 즉 기독교 사상과 교리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 같다. 이 변화들의 근저에는 역사학 연구의 두 발전이 자리잡고 있다. 첫째, 헤이코 오버만(Heiko Oberman), 데이빗 스타인멧츠(David Steinmetz), 그리고 스티븐 오즈멘트(Steven Ozment)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과 중세의 연속성에 대한 관심의 증가. 둘째, 신정통주의의 쇠퇴와 신정통주의의 종교개혁가들과 스콜라주의(중세든 후기-종교개혁이든)의 사상에 대한, 지나치게 편향된 해석의 쇠퇴.

첫째 이슈, 즉, 중세와 종교개혁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종교개혁의 전통적이고 교회론적 특징에 대한 인식, 따라서, 종교개혁가들의 신학과 그 이전 교회사의 신학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 물론 이 인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인식은, 교회 내의 문제점과 오류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이해했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너무나 분명하였다. 그리고 이 인식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뿐만이 아니라 교부들의 신학, 심지어 중세의 “보다 건전한” 신학에도 의지하였던 종교개혁가들의 후계자들, 즉 16세기 말과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에게도 분명하였다.

최근의 연구는 중세 후기 사상에 대한 일련의 궤적을 잘 보여준다. 그 결과 우리는 종교개혁이 반대하였던 고해성사와 공로사상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지만, 또한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하였던 어거스틴의 중세적인 “은혜 신학”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중세 후기에 전통의 권위가 성경과 동일하다는 주장도 발견하지만, 또한 성경이 신학을 위한 절대 유일한 규범이고 전통은 종속적인 규범이라는 가르침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트렌트 공의회나 현대 로마 카톨릭 교회보다는 종교개혁과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다소 놀라운 일이다.

종교개혁사를 다시 보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인문주의”와 “스콜라주의”의 대립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종교개혁에 대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구 스콜라주의의 영향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발견하였다는 데 있다. 따라서 스코라주의자들에 대항한 종교개혁 시대의 논쟁들은 종교개혁자들에 영향을 미친 중세 스콜라 신학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이해함으로써 이제는 균형을 바로 잡아야만 한다. 우리는 “스콜라주의”가 특별한 신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접근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콜라주의는 어거스틴적 은혜신학을 포함한 여러 신학을 운반하도록 도와주는 학문적 수레바퀴일 뿐이다. 종교개혁은 신학적 오류들과 지나치게 사색적인 신학방법에 대항하였으나 여전히 은혜의 구(스콜라적인!)신학에 굳게 서 있었다.

신학 발전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이 종교개혁과 개신교 정통주의에 적용될 때에도, 역사가들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개신교 정통주의와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종교개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전 세대의 판단이 너무 단순하고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스콜라주의와 정통주의에 대한 이 부정적 견해는 종교개혁가들은 이전 시대의 거의 모든 전제들을 제쳐놓고 구 스콜라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 중심적인” 새로운 신학 형식을 제공하려고 어떤 식으로든 노력하였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개혁가들의 후계자들은 구 스콜라주의적 형식에 의존하여 “예정론적 형이상학”을 만들어 내었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었다. 17세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들 중에서 적어도 하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돌트 신경의 가르침인 “제한 속죄”와는 반대로 칼빈은 “보편 속죄”를 가르쳤다. 이 주장은 사실 상 칼빈은 알미니안주의자로 전락시키고 칼빈의 가르침과 돌트 신경의 진정한 연속성을 부인한다. 칼빈과 다른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이 신정통주의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어떠한 관련도 없으며 그들의 후예들도 “예정론적 형이상학”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칼빈과 돌트신경의 연속성은 훨씬 더 분명해 진다.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재해석은 분명히 일련의 실천적 교회론적 의미를 내포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서 우리 자신의 카톨릭성을 확증하게 되며 따라서 교회사 전체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특별히, 역사를 이렇게 읽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의 분파로 제한시키기보다는 우리자신이 보편 혹은 “카톨릭” 교회 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전통의 자료들을 보다 많이 접하게 될 때 우리의 신학과 영성이 발전한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가들과 후기 정통주의자들 모두가 기독교 전통의 중심되는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해 주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적 정당성도 거의 없이 시간에 묶인 신학을 하면서 종교 개혁을 그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만 재현하고, 그 결과 종교 개혁과 오늘을 분리시켜 그 배들을 역사의 정박지로부터 떠나 떠돌아 다니게 하였다는 생각에 더 이상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신정통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세대 들 보다 훨씬 더 존경스런 마음으로, 동시에 훨씬 덜 불안한 마음으로 우리의 전통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신앙 문서들은 보다 더 분명하게 시대과 장소에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종교개혁과 그 이전 전통과의 연속성, 그리고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시대와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벨직 신앙고백서와 돌트 신경을 보다 발전된 개혁 전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돌트 신경을 “스콜라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초점을 잃은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 구 스콜라주의의 요소가 개신교 신학에 채택된 이상, 돌트 신경의 “스콜라적” 요소들은 종교개혁과 돌트 신경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돌트신경,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종교개혁가들의 사상을 통해 초대교회의 전통과의 연속성을 근거로 우리 개혁신앙이 카톨릭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듯이, 이 문서들은 자신들이 종교 개혁과 연속선 위에 있고 교회에 개혁 신학이 무엇인지 설명하여 준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기독교 연합 신문>의 부탁으로써서  10월 14일자로 나온 1175호 7면에 실린 원본 글을 올립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종교 개혁과 우리를 생각하며 10월 20일(토요일)과 21일(주일) 오후 6시에 열릴 종교개혁 495주년 기념  언약교회 신앙 강좌에 참여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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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 이 질문은 해마다 10월의 마지막 날 우리들이 기념하는 종교 개혁 기념일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매우 크고 넓은 주장이다. 만일의 이 질문이 “어떻게 해서 종교 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당대의 부패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와 사회와 그런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이라면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라고 대답하면서 그 가까운 원인들을 다 찾아 대답해야 할 어렵고도 폭 넓은 질문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니었다면 종교 개혁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그 이전에 비슷한 주장을 했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c. 1330-84)처럼 정죄되거나 그의 글을 따르다가 1415년 7월 6일에 화형 당한 존 후스(John Huss, c. 1372-1415)나 1536년 10월 6일에 목이 비틀리고 화형당한 윌리엄 틴델(William Tyndale, c. 1494-1536)과 같이 정죄되고 화형 당해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가 종교 개혁적 주장을 하고서도 사형당하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생경서 종교 개혁이 이루어 진 일은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물론 역사가들은 왜 다른 이들은 사형 당해 죽었는데 루터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는가를 탐구하는 인간적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우리의 질문은 종교 개혁에 성공했건, 아니면 후스와 같이 화형 당해 죽었건 당대에 종교 개혁적 주장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한정해 보려고 한다.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1) 외적인 이유: 당대 교회와 사회의 외적인 부패

 

흔히 종교 개혁 전야라고 불리던 중세 말기의 천주교회에는 여러 가지 도덕적 문제가 모든 사람들이 목도할 만하게 아주 분명히 나타났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 성적인 부패였다.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딤전 3:2, 12; 딛 1:6)에 반해서 성직자들의 독신제도를 고착화 시킨 당시 천주교회 내의 성적인 부패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고위 성직자들이 실질적인 아내를 두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다른 직임과 함께 성직을 물려주는 (2) 세습의 문제가 당대의 외적인 부패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그것 배후에는 (3) 모든 문제와 관련해서 돈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물질 중심주의가 있었다. 당대에 문제가 되었던 면죄부를 파는 일도 결국은 누가 그 권한을 가지는가, 그리하여 누가 돈을 많아 벌 수 있느냐의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는 성직 매애 문제와 함께 당시의 모든 것이 돈을 버는 것과 관련 되어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 예를 들어서, 당시 교황이던 레오 10세는 이미 2개의 주교직 가진 호헨졸레른의 알버트(Albert of Hohenzollern)에게 마인쯔(Mainz) 주교직을 제안하면서 교황은 1,200 두카트 요구했고, Albert는 700 두카트를 주장했으나 결국 1,000 두카트로 낙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가의 하나로 그의 영토내에서 8년 동안 면죄부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수익금의 절반은 Albert가 가지고 절반은 베드로 성당 건축비로 내도록 했다고 한다. 물론 면제부 판매인들은 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를 백성들에게 요청하여 실질적인 문제는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4) 명예와 힘을 휘두르는 것이 당시에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끔 한다. 그리고 (5) 일반 민중들은 성경적인 형태의 경건 보다는 자신들에게 익숙한 형태의 경건 생활의 형태를 유지하여 수 없이 많은 미신을 양산해 갔다. 십자가 자체에 의존하고 손으로 그은 성호가 자신들을 악마로부터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자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면서 점차 성자숭배에로 나아가는 등 온갖 미신이 난무하게 되었다. 당시 부활절 어간에만 일반 민중들에게 공개되었던 수 없이 많은 성물들에 대한 숭배는 이런 미신을 조장하는 데 중요한 기연이 되었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는 오늘 날 한국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와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비록 시대적 차이와 상황의 차이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다를 찌라도 성적인 문제, 세습 문제, 돈 문제, 명예와 힘의 문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비성경적인 종교적 행위를 하는 미신의 문제라는 본질은 뚜렷한 유사성을 나타내 보인다.)

 

어쩌면 이런 외적인 부패 때문에 종교 개혁적 주장이 널리 퍼져 나가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쉬웠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부패는 종교 개혁의 궁극적 원인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당대 교회의 이런 외적인 부패를 누구보다도 강하고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우신예찬>과 같은 풍자적인 글을 쓰기도 했던 에라스무스(Desderius Erasmus, 아마도 1469-1536) 같은 이는 결코 천주교회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았고, 1524년에 있었던 의지의 자유에 대한 루터와의 논쟁을 통해 보면 그는 기본적으로 천주교적인 사상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 사회와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종교 개혁의 근원적 원인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2) 근본적 이유: 당대 교회의 교리의 문제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근원적 이유는 무엇인가? 왜 자신들이 화형 당할 줄 알면서도 종교개혁의 선구자들과 개혁자들은 종교개혁적 주장을 했는가? 그것은 결국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속해 있던 교회가 너무나도 심각하게 벗어나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도덕적인 타락과 문제들 정도가 아니라 당대의 교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종교개혁의 근본적 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시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속해 있던 교회의 가르침과 예배와 제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점차 당대 교회를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정확한 이해를 가져 나간 루터는 후에 “다른 사람들은 생활을 공격했지만, 나는 교리를 공격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그는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병폐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독교 이해 자체를 공격한 것이다. 그는 “나는 기독교를 보존해야만 하는 사람들, 즉 주교들과 학자들 가운데에는 참된 기독교가 존재하기를 그만두었다고 말할 뿐이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종교 개혁의 근본적 이유였다고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당대의 교회가 참된 교회가 아니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제 2의 종교 개혁을 운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와 같이 이 세상에 교회라고 이름 하는 긴관과 공동체 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실질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닌 상황에서만 언급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부패가 있고 잘못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고쳐 가고 갱신하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라는 말은 교회라고 이름 하는 것이 참 교회가 이난 상황에서라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중세 말기의 교회, 루터 자신이 그 안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수도사가 되고, 신부님이 되어 미사를 집례하고 하던 그 교회 공동체가인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교회가 아닌 공동체가 되어 버렸는가?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은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선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된 복음이 왜곡되어 잘못된 복음이 선포되어 많은 백성들을 오도(誤導) 하기 때문에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도 성경이 말하는 복음 외에 다른 것이 선포되거나, 성경의 복음을 왜곡하는 소위 교회들은 모두 참된 교회가 아닌 것이 된다.

 

오늘날의 천주교회도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와 칼빈이 비판하였던 그 천주교적 교리인 (1) 성경과 전통을 다 강조하는 입장, (2) 은혜와 믿음으로만의 구원이 아닌 믿음에 더하여 은혜에 근거한 인간의 행위가 어느 정도 있어야 그것의 공로로 구원함을 얻는 다는 행위 구원론(공로 구원론), (3)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후에는 십자가의 속죄를 피 없는 형태로 다시 제시하는(represent) 피 없는 제사가 지속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천주교적 미사관, (4) 그 피 없는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司祭, priest)이 있다는 견해, (5) 사제의 축성 이후에 성찬의 요소들인 떡과 포도주의 본질(substance)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로 변한다는(transubstaintion) 화체설(化體說) 등을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일탈적 가르침들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만일에 루터와 칼빈이 오늘날의 천주교회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이런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서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명확히 이단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만일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데서는 성경적인 복음이 선포 되고 있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1) 성경이 성문화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계시가 주어진다는 주장,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거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몰라도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 내포 되어 있다고 주장, (3)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으로 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함께 고려되어 칭의가 이루어지며 구원이 주어진다는 주장 등. 그러므로 어느 시대이든지 바른 복음이 선포 되지 않는 공동체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니고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한국 교회 중의 대부분은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진정한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겸손히 회개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정한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을 회개하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교회 공동체이다. 그 갱신의 힘과 능력을 성령님께서 공급해 주시기에 우리는 성령님에 의존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들의 문제를 찾아 가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인도하는 대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1) 교회 세습 문제, (2) 목회자들의 재정적 투명성이 부족한 문제, (3)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성적인 타락 문제, (4) 우리 주변 사람들의 가난과 아픔과 동참하는 일에 게으른 문제, 그리고 (5)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효험만 있으면 어떤 형태의 종교적 행위도 다하는 문제 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적하는 우리들의 외적인 부패의 문제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들은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사람들에게 우선 드러나는 문제는 이런 문제들이기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회개가 선행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만을 생각하는 것은 종교 개혁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된다. 종교 개혁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신경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 가운데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틀린 것들,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들, 우리의 교회 제도 가운데서 성경에 비추어 틀린 것들을 고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종교 개혁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방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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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거룩한 삼위일체’와 우리의 삶

 

황원하 목사

(산성교회 담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성경을 읽는 근본적인 목적이며 신학 본연의 주제이다. 즉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며,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하여 하나님에 관한 언설들을 체계화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 얻어지며, 인간의 경험과 이성에 의해서 규정되고 밝혀진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한다. 필시 오직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한 분만이 계신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신들을 창조해 내었다. 사람들은 신들을 조작하여 만들어낸 후에 그들이 만든 신들을 섬기다가 그러한 신들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신들을 단지 자신들에게 복지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삼았으며, 신들과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조작된 신들과 다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하심이 무한하시고, 지극히 순수한 영이시며,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나 지체가 없으시며, 정욕도 없으시고, 불변하시며,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불가해하시며, 전능하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자유로우시며, 지극히 절대적이신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불변성과 영원성과 무한성을 가지고 계시며, 존재론적 한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존재와 완전하심에 있어서 무한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잠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미래는 결코 창창하지 않으며 우리의 앞날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교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의 육체는 신뢰할만하지 못하며, 우리는 질병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의 삶은 각종 사고에 취약하다. 필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존재, 지혜, 권능, 거룩하심, 공의, 인자, 진실하심에 있어서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하며, 인간들과 인간적인 수단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참고. 잠 3:5-6).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예배와 경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기도로 구현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경배해야 하며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필요를 아뢰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가지신 불변하시고 지극히 의로우신 뜻의 협의들을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신다. 따라서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고 절대적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시는데,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이에 대해서 불평할 만한 아무런 이유와 근거가 없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순복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성품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며,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신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참고. 요일 4:8).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인간의 말과 글로 도저히 형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어려움을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신다(참고. 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열심히 구하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신다. 그러므로 마음의 허전함과 육신의 연약함과 삶의 공허함을 느끼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은 원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며, 마음이 굳어진 자들을 풀어주시고, 물질과 건강을 부어주시며, 영적인 은혜를 허락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또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에서 지극히 공의롭고 두려우신 분이시며, 모든 죄를 미워하고, 범죄자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죄를 면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시기에 죄를 정확히 판단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간과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잘못을 짚고 넘어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동시에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복을 자기 안에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은 홀로 자신에게 자족하시며, 자신이 만드신 어떤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저들로부터 어떤 영광도 얻어내지 않으시고,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 안에서 피조물을 통하여 피조물에게 나타내신다. 즉 모든 피조물은 생명을 외부(하나님)로부터 가지고 오지만, 하나님은 유일하게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돌림이나 피조물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답하실 거야’라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손해를 보는 거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시면서 홀로 만족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유일한 근원(원천)이시니,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만물 위에 주권적 지배권을 가지시고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를 만물을 통하여 만물을 위하여 만물 위에 행하신다. 그분 앞에는 만물이 열려있고 명백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 위에 드리워 있음을 깨닫고 그의 영광을 온전히 깨달아 그러한 영광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알게 한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완전한 주권과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고, 무오하며, 피조물에 의지하지 않으시니, 어떤 것도 우연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협의, 모든 행사와 모든 명령에서 지극히 거룩하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와 경배와 순종을 돌려드려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만물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초월적인 지혜와 힘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피조세계에 내재하시는 그분의 위대한 영광을 깨닫는다면 겸손하게 되고 그분을 경배하게 된다.

4.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말한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것은 인간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이 교리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혹은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우리의 지식과 지혜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 방도가 없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섣불리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세 분 하나님의 상호협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완전한 조화와 협력을 이루시면서 일하셨고, 그분들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이나 갈등도 없었다. 삼위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계시기에 이러한 일치가 가능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일체이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교제(관계)를 생각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21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가르쳐주는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됨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 됨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접하면서 우리의 연합과 일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나누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은 분열하고 있다. 기독교 안에 교파가 많고, 교회 안에 분쟁이 있어서 서로 싸우는 현상은 심히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러한 조화와 협력을 모색해야 함을 배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를 나눈 한 형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어떠한 분열이나 갈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치를 도모해야 하며 화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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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리의 은혜를 기억하여 주를 영화롭게 하라


- 존 플라벨 -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겸손한 태도로 섭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크고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섭리의 경험을 신앙일지에 기록하는 것도 그러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모든 신자가 시간을 내어 신앙일지를 기록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신앙일지는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유익을 끼친다.


신자들이 서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앞으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섭리의 말씀들을 모아서 기록해두고, 또 직접 경험한 섭리까지 더해둔다면 참으로 보물과 같은 귀한 자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매순간 우리의 삶과 자유와 관심사에 영향을 미친다. 일용할 양식도, 필요한 물질도, 안전한 삶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섭리를 통해 받은 은혜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수없이 경험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형편없는 기억력을 의지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이 찾아오면 이전의 경험은 쉽게 파묻히는 것이 보통이다.


문자화된 기억력은 이런 위험에서우리를 보호할 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 세상에 사는 동안 경험했던 하나님의 섭리의 추억을 잃는 것에 비하면, 금은이나 토지나 가재도구를 잃는 것은 그다지 큰 손실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 귀한 보물을 신앙일지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잘 간수하라. 그리고 새로운 문제나 두려움이나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칠 때마다 “전에도 이런 고통을 겪어본 적이 있나? 이것이 처음 있는 시련인가? 아삽이 그랬던 것처럼(시77:5) 옛날 일들을 떠올려보자”라고 생각하며 다시 신앙일지를 들춰보라.


현재의 시련과 위험만 크게 보고, 과거의 시련과 위험을 경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항상 다음에 닥치는 시련이 가장 크게 보이는 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에게 육지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오래된 경험일수록 그런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위험이나 두려움도 현재의 그것들만큼 심각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 존 플라벨, 『하나님의 섭리』, pp 372-375

출처: 안산회복 교회/안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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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인간, 연약한 교회

 

황대우 교수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피조물이므로 창조주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마지막 피조물이므로 이전의 피조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타락한 죄인이므로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연약한 존재다.  

이처럼 연약한 인간은 분수를 모르고 강함과 위대함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잊어버리는 순간 타락하고 만다. 하와가 그랬고, 아담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온갖 종류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 그러하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 욕망한다.  

그 욕망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고 싶어 한다. 그 욕망은 황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와 성공제일주의를 조장한다. 또한 그 욕망은 어느새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와 원동력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욕망의 추악한 본성은 사라지고 실리적인 당위성만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 삶의 일상이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이 이 세상을 죄인답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이처럼 타락한 세상과 타락한 인간에게 연약함이란 수치요 악이다. 타락한 인간들의 타락한 세상에서는 강함과 위대함만이 최고최상이다. 강한 자, 위대한 자는 박수갈채를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반면, 연약한 자는 무시되고 소외되며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 속의 타락한 군상들은 강함과 위대함을 욕망한다. 아니, 세상뿐만 아니라, 세상 속의 교회도 강함과 위대함을 추구한다. 마치 그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 양! 이런 교회에는 세상과의 공간적 구분만 존재할 뿐,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영적 구별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교회의 세속화이다.

 교회는 연약한 존재다.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없이도 존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연약한 인간의 태생적 연약함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영적 연약함까지도 공유하는 공동체다. 자신의 연약함을 모르는 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결코 구성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는 자다. 강한 자가 되어 당당하게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이든 영적이든 연약한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열망하면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의원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부르신다.  

하나님 없이도, 구원자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는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자를 찾으시고 부르신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될 자격이 주어진다.

 주님만을 간절히 찾고 주님을 주인과 머리로 모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연약한 자와 연약한 교회만을 우리 주님께서는 찾고 부르신다. 연약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통로다. 연약함은 빈 손 들고 하나님께 나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영혼의 가난함이다. 연약함은 가장 큰 영적 선물이다.

 

이런 영적 연약함과 가난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속절없이 세상의 강함과 부요함에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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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성전이시다 / 샘 스톰스

 

 

내가 인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예들 중 하나를 들면,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시며 구약 시대 성전의 물리적 구조가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종말에 나타날 사건들과 더불어서 또 하나의(제3의) 물리적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승인하고 감독하시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해석 원리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기 위해 이 주제를 잠시 검토하겠다.

 

이 중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구약 성경의 서사(narrative)인데,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광휘, 하나님의 장엄하고 빛나는 영광이 자기 백성 중에서 가시화되는 광경, 곧 하나님의 '쉐키나'를 목격한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광휘와 영광, 즉 '쉐키나'가 없다면 이스라엘 자손은 이방 세계를 특징짓는 어둠 속에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가 지은 장막 곧 성막에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자기 백성을 더불어 만나시려는 곳이 바로 성막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게 할지니라"(출25:8)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곳에서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섰고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셨다"(출33:9).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출40:34) 곳이 바로 성막이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다(참고. 레9:23; 민14:10).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머무는 동안 성막에 적용된 원리는 솔로몬 성전에 훨씬 잘 적용된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로 메어 들였을 때"(대하5:7),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했기 때문"(대하5:14).

 

바로 이런 예비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포를 듣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스케누)는 문자적으로 "장막을 치다" 또는 "천막에 거하다"라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가 지은 천막 곧 이동식 성막과 최종적으로 솔로몬 성전을 처소로 삼았던 구약 성경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요지는 하나님이 이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되 더 인격적인 방식으로, 곧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이신 나사렛 사람 예수는 하나님의 참되고 궁극적인 '쉐키나' 영광, 곧 자기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철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거처는 자기 아들의 육신이다! 지금 성육신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된 대단히 탁월한 영광에 비하면, 과거에 신비로운 구름으로 갈진 천막/성막/성전 안에 간직되었던 그 영광은 단지 예시적으로 깜빡거리는 램프의 불빛 불과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참고. 골1:19).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의 손으로 지은 천막이나 장막에 거하시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분명한 현존은 대리석과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전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자기 장막을 치시는 분이다.

 

요지는 옛 언약에 속한 성전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모형 또는 전조였다는 것이다(모형론에 대해서는 아래서 좀 더 살펴볼 것이다). 성전은 바로 모세 율법이 보관된 장소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그 율법의 성취이시다. 성전은 계시와 관계의 장소였는데, 하나님은 성전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만나시고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만난다. 성전은 제사의 장소였는데, 죄 용서는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죄 용서를 위해 예수님께 나아간다(막2:1-12을 보라). 이스라엘 자손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서 예배하고 절기를 기념했다. 오늘날 우리는 지리적 장소와 상관없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참고. 요4:20-26).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만나고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 지은 특정 건물이나 장막이나 구조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간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게리 버지(Garry M. Burge)의 다음 진술은 옳다. "신성한 공간은 더 이상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성전으로 여겨진다. 여호와 하나님의 '쉐키나'는 이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영구적으로 능력 있게 깃들인다.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사실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안에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엡2:21-22).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처소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문자적인 성전도 아니고 단순히 하늘도 아니며, 소아시아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이 일부를 이루는 교회다."

 

이 성전의 설립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이며 지속적인 과정이다(또한 엡4:15-16을 보라). 비록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하는 "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바울은 우리가 교회를 유기체로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도 다소 역설적인 어법을 사용해서 신자들을 "살아 있는 돌들"(벧전2:5)이라고 언급한다는 점을 상기하라!

 

바울은 이 진리를 근거로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시 호소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바울은 성적 순결을 요청하는 대목에서도 다음과 같이 거듭 호소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또한 이 진리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벧전2:4-10을 보라).

 

우리는 이 모든 논증을 통해 고린도후서 6장 16절 후반부에 나타난 바울의 최종 선포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바울은 이런 논지를 보강하기 위해 장차 올 성전에 대해 예언한 구약 성경의 여러 본문(레26:11-12; 사52:11; 겔11;17, 20:34, 41; 삼하7:14)을 종합하는데, 그중 하나인 에스겔 37장 26-27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게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거두절미하고 요지를 말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히 거하실 종말론적 성전에 대한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시작하여 부활에서 완성함으로써 성취하고 계신데,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점진적으로 세우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세워진 문자적이고 물리적인 성전은 어떻게 될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속 목적에서 영적인 중요성을 상실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마태복음 23-2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검토해야 한다(나는 이어지는 두 장에서 이에 대해 많이 언급할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 백성에 대해 심판하실 때, 성전 건물들은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기 위해 떠나시는 그 순간에 물리적.영적 측면에서 모두 주님께 버림받는다. 예수님은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를 그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을 때"(마27:51), 하나님은 성전을 자기 현존으로 축복하거나 성전을 이가봇(영광이 떠났다)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정하기를 영원히 그만두신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에 극적으로 들어가신 것(마21:1-7. 소위 "개선 입성식")과 똑같이 극적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을 떠나신다. 한 때 웅장하고 영화로웠던 이 하나님의 집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완전히 넘겨진다("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너희에게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 강조는 필자의 것임).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겔10:18-19, 11:22-23을 보라). 주후 70년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물리적으로 최종 파괴되는데, 이로써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유기가 외형적으로 완결된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서 결코 되돌아가시지 않는다. 참으로 성전을 떠나 감람산에 앉으시는(마24:3) 예수님의 행동은 에스겔 11장 23절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이것은 오늘날 바위 돔 사원이 서 있는 장소 근처인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는 미래의 성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성전 건물을 짓고 그 안에서 종교 활동을 재개하는 일도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 일이 가져오게 될 종교적 열광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함축된 정치적.군사적 파장 또한 명백하다. 이 일이 앞으로 언제 발생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비록 실제로 발생하더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세우는 일 외에 다른 어떤 종말론적.신학적 의미는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현재와 미래에 영원히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유일한 성전은 예수님과 그분의 영적인 몸인 교회다.

 

하나님이 장차 성전 재건을 승인하시리라고 제한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구속과 관련해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퇴행을 나타내는 터무니없는 발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를 부인하는 처사가 될 것이며, 그리하여 고린도후서 6장의 이 대목과 다른 곳에서 바울이 명시적으로 단언하는 내용을 모욕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의 이 구절에서 밝히는 현실적인 주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어떤 표현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교회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오늘날 세상에 나타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또 하나의 문화 단체나 우리 이웃의 "체감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회봉사 집단"이 아니다. "대신에 교회는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공통의 신원으로 연합되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 같이 예배하고 경외하는 일을 중심으로 모이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영광스럽고 고상한 신원을 늘 반영하기를 기원한다.

 

 

샘 스톰스의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에서 발췌(2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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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성신과 종말론 / 리처드 개핀

 

 

3. 하지만 성신의 사역의 종말론적 양상을 가장 현저하고 분명하게 선포하는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는 성신을 '보증'과 '첫 열매'로 표현하는데, 그가 이러한 용어들을 써서 성신에 관해 가르친 데에는 교회가 현재 성신을 받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잠정적이면서도 진정으로 종말론적임을 알리려는 구체적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아라본'(보증)과 '아파르케'(첫 열매)라는 이 단어들은 성신의 역사를 바울 종말론의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의 구조 안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에베소서 1:14은 성신께서 "우리(곧 교회)의 기업에 보증"이 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명백히 종말론적 범주에 해당합니다(참조. 특히 1:13과 4:30; 5:5). 그리고 로마서 8:23과 고린도후서 5:5은 성신께서 신자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 즉 육체의 종말론적 존재에 대한 '첫 열매'와 '보증'이시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성신에 대하여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한 목적은 교회에 임재해 계시는 성신, 곧 모든 신자 안에 내주하시면서 풍성하고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성신께서 마지막 날에 치를 금액의 첫 지불금이심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이 첫 지불금은 그 자체가 종말의 실현입니다. 성신께서는 종말론적 존재의 첫 지불금이십니다. 그러한 구체적인 의미에서, 성신께서는 신자들이 이미 처음에 받은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온전히 받게 될 것에 대한 보증이십니다. 성신의 역사는 육체의 부활로써 온전히 성취될 종말론적 변화를 미리 잠정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두 단어는 바울이 성신께 관해 생각할 때 그 방향이 현재로부터 미래로 움직이지 않고, 미래로부터 현재로 움직였음을 보여 줍니다. 즉 미래가 현재의 연장이라기보다(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긴 하지만) 현재가 (종말론적) 미래를 미리 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기자와 온전히 일치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주의에서 취한 역사적-종말론적 구도를 근거로 성신과 연관된 권능을 "내세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6:4-5).

 

사도 바울이 성신의 역사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것은 위대한 부활을 언급한 고린도전서 15장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사도는 42-49절의 단락에서 신자가 장차 입을 부활의 (종말론적) 몸을 묘사하기 위해서 '신령한'(spiritual, 프뉴마티콘. 44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형용사가 가리키는 것은 인간적인 것, 곧 정신에 적응되거나 정신의 지배를 받는 몸도 아니고, 본질적인 것, 곧 부활의 몸이 지닐 것으로 추정되는 비물질적인 영적 실체도 아니며, 다만 성신의 활동입니다. 사도의 논지는 종말론적 특성들을 지닌 부활의 몸이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성신에 의해 철저히 변화하고 새로워질 것이므로,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만한 한 단어가 구체적으로 '신령한'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단락은 종말에 성신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우주적인 차원의 것임을 생각하게도 합니다. 사도는 단지 관념적으로 부활의 몸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신자가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맥락이나 상황도 함께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도가 부활 전의 몸과 부활의 몸을 대조할 때(42-44절), 그 근거를 각각 대표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자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총체적이고도 포괄적으로 대조하는 데 두는 사실에서 잘 나타납니다(45, 47-49절). 따라서 마지막 아담과 관련되시는 성신께서는 다름 아닌 새롭고 종말론적인 창조 질서의 모든 양상에 영향을 끼치면서 우주적인 규모로 수행됩니다(참조. 롬8:19-23).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사도 바울의 이러한 교훈은 추상적이고 독립된 종말론적 원리들로, 즉 다소 고립된 영적인 교훈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교훈을 사도의 교훈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적-역사적 관점과 관련지어 다루어야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하반절)

 

내 판단으로는, 이 절을 주의 깊게 해석해 보면 다음 두 가지를 알게 됩니다. 첫째, '영'(프뉴마)은 성신의 위격을 가리킵니다. 둘째, '되었나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부활 시에, 혹은 좀 더 광범위하게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셨을 때 된 일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부활을 기점으로 높이 되신 그리스도와 성신 사이에 이루어진 어떤 동일시, 혹은 연합이나 일치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기독론과 성신론은 물론, 신약 성경의 나머지 상당 부분의 교훈도 주관하는 대단히 중요한 고려 사항입니다. 성신과 성신의 종말론적 사역에 관한 모든 사유는 이 동일화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기우이지만, 나의 이 말을 곡해하여 삼위일체를 혼동했다거나 그리스도와 성신 사이의 위격 구분을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했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삼위일체 사이의 내적 관계를 모를 리 없지만(참조. 예. 롬1:3, 8:3,32; 9:5; 빌2:6), 여기서 그것은 그의 시야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근거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 안에서, 즉 '마지막 아담' 혹은 '둘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경험하는 바에 관하여 말합니다(47절). 그의 관점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되셨는가'에 눈길을 두는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와 성신의 하나 됨 곧 동일화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륜적이고 기능적이고 '종말론적'인 동일화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활(영화)에 의하여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신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변화되셨을 뿐 아니라, 성신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사로잡힌바 되신 까닭에, 두 분이 각자의 사역에서 하나가 되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분이 구체적으로 '생명을 주는', 즉 종말론적인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일에서 하나가 되셨기에 두 분을 한 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15장의 문맥에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이러한 활동(20절)은 여전히 미래에 이루어질 추수, 곧 몸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지금 누구시고 어떤 분이 되셨는가('살려 주는 영') 하는 점 때문에, 종말론적 생명을 주시는 일을 지금 하시는 것이 적어도 암시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약 신학의 포괄적인 프로그램의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은 사실상 오순절에 관한 사도 바울의 한 문장짜리 주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사도행전 2:32-33에서 선포하듯이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와 연결된 일이고 단회적이고 영구한 의의를 가졌습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신 강림은 단지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을 덧붙인 것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넘어서거나 보완하는 다소 독립된 활동 영역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순절은 그릿도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어떤 일을 행하셨다는 것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시면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신다는 것까지도 밝히 말해 줍니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성신을 선물로 주신 날이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친히 '살려 주는 영'으로서 주님의 교회에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성신으로 세례를 베푸실 때 친히 그 자리에 임재하시어서 자기 자신으로 세례를 베푸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성신을 선물로 주신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 곧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슷한 사고 유형이 요한복음 14-16장에도 나타납니다. 특히 14:12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심'을 전제로 성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것은 동시에 예수님 자신의 '오심'에 대한 약속입니다(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참조. 16:16 이하).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되신 뒤에 성신께서 오심(참조. 7:39)은 곧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고 약속하실 때(마28:20), 그 약속은 그리스도의 신적 편재(遍在)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고, 그보다는 성신의 임재와 권능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4. 신약 성경의 이러한 조망을 정리하여 그 주된 논지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종말론적 성신은 높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납득할 만한 일반화인지를 신약 성경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자체로는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이것은 매우 함축적이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성신 안에 있는 종말론적 생명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성신과 공유하시는 생명입니다. 신약 성경이 성신께서 교회 안에서 이루시는 일에 관해서 말할 때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종말론적 생명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신약 성경이 현재의 관점이든 미래의 관점이든 부활에 관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성신의 종말론적 사역을 염두에 둡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9-11에서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들(9절 중)에 관해 말하는 대목에서 이 원리를 끄집어내는데, 여기서 그는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9절 상)이라고 말하며, 만일 그러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즉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9절 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다'고 함축적으로 말합나다(10절 상). 짧은 세 문장 안에 가능한 모든 조합이 나옵니다. '너희가 성신 안에', '성신께서 너희 안에',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라는 표현을 사실상 동의어로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교회의 삶을 묘사합니다. 이러한 사용 유형이 가능한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선행(先行)하고 근거가 되는 사실, 곧 그리스도께서 '살리시는 영'이시고 성신께서 '그리스도의 영'이라는사실 때문입니다(9절 하). 그리고 11절은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그들의 죽을 몸도 일으키실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성신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위해 행하셨듯이 신자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성신은 종말론적인 부활의 권능이십니다. 성신의 권능은 부활의 권능이기 때문에 성신은 종말론적 영입니다.

 

 

리처드 개핀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의 '제5장 성신과 종말론'에서 발췌(73-7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언약과 선택 그리고 언약과 설교 예배

 

고재수 교수

  화란 개혁교회 안에서 언약은 중요한 연구대상의 하나였다. 이 언약에 대해서 여러 총회가 중요한 결정들을 하였다. 예를 들어 1905년의 총회는 언약의 자녀의 위치에 대해 결정하였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아래 있는 언약의 자녀는, 자라는 동안 그 행실이나 교리상 반대의 경우가 명백해지기까지는, 중생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특별히 30년대에 언약이라는 주제는 많이 토의되었다. 언약의 기초가 다시 연구되었고 옛 신학자들, 특히 칼빈 견해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여러 가지 견해가 나타났다. 1936년 총회는 다른 주제들 중 특히 언약사상을 연구할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1942년에는 한가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개혁교회 내의 여러 그룹들은 그 총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는 많은 교수들과 목사들 및 장로들을 강압적으로 축출하였다. 이렇게하여 고신교단의 자매교회인 화란 개혁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언약에 대한, 특별히 언약의 자녀의 위치에 대한, 이 총회의 결정에 불볼했다는 이유 때문에 축출된 사람들인 것이다.

 

화란 개력교회 안에서 언약이라는 주제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연구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80년대에 출판된 책 두가지를 언급하지면, 첫재로 캄펀(Kampen)신학교의 교의학 교수였던 깜파이스(,Kamphuis)교수(그는 1987년에 은퇴했다.)가 1984년 에 출판된「영원한 언약」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다분히 교의학적 성격을 갖는다. 다른 하나의 책은 은퇴 목사였던 프랑커(Joh. Francke)가 다음해에 「빛나는 계역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는 책인데 그 책은 성경에 나오는 언약의 과정들을 추적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개혁교회 안에서 언약이라는 주제가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필자가 마주했던 난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언약에 대해 이런 두권의 책이 쓰여질 정도라면 이 제한된 글에서는 언약에 대해 얼마나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기서는 세 가지 주제를 선정해서 그 분야에서 언약사상의 영향이 어떠한가를 살펴 보기로 했다. 충분히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이글을 통해 적어도 언약사상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 선택한 세 주제는 설교, 세례 및 축도이다.

 

1. 언약과 설교

 

일반적으로 설교를 이 언약사상에 연결시키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화란에서 언약사상은 바로 여기서 부활하기 시작했다. 많은 목사들은 언약에 대한 올바를 관점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많은 목사들은 언약이 선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된 자는 언약에 속하고 선택되지 못한 자는 언약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때로는 언약 안에 구분을 두기도 했다. 외적 언약, 즉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으시는 언약과 내적 언약, 즉 선택된 자들과만 맺으시는 언약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설교에 어떤 결과를 낳는가? 예를 들어 설교자가 성부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하자. 설교자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기를 약속하십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누구에게 약속하셨는가? 만일 언약과 선택을 동일 한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오직 선택받은 자에게만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하나님은 선택자의 아버지가 되실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하십니다”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사람이므로 사람들 중 누가 선택되었으며 누가 유기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면 설교자가 말하는 것은 회중의 일부에게만 해당되고, 결국 그가 하는 말은 다음과 같이 될 수 밖에 없다. 즉 “저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심을 말합니다”라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가 정말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 시하게 됨으로써 생겨나는 논리적 결과이다.

 

또는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칭의에 대해 설교한다 하자. 설교자로서는 그는 청중들에게 믿음을 통한 칭의의 영광스러운 선물을 보여 줄 것이다. 즉 사람들이 죄인일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복음을 전달한 다음의 결론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칭의인데 선택된 여러분은 그것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약속은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 단계는 청중들이 선택 받았는지의 여부를 발견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큰 약속을 듣고서도 자신들이 그 약속을 받을 자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택된 자인지 알기만 하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이 약속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자기가 선택받은 줄 확신하기만 한다면 죄 용서의 약속도 자기를 위한 것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을 받았다고 쉽게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삶이여 어떻게 살든 이제 선택 받았으니 그 약속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항상 고뇌에 빠져 살게 될 것이다. “그 약속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일까? 나는 죄인이고, 거듭 하나님께 죄를 짓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 가끔 또 다른 단계가 따라온다. 그 추론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언약은 선택된 자들만 위한 것이다. 따라서 둘째,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것임을 확실히 알기 전에 먼저 자기가 선택받은 자에 속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고민을 많이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출구를 발견한다. 그것은 셋째, 체험이다. 그들은 특별한 체험을 찾는다. 마음의 감동이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 등이다. 이것을 갖고 그들이 선택받은 자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때 하나님의 약속도 자기의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개혁교회 이 목사들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물에 대해 힘을 다해 설교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그들은 물어야만 했다. “이 모든 약속들이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까? 저는 하나님이 이 약속들을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으면 합니다.” 많은 청중들은 진열장에 있는 맛있는 빵을 보고 서 있는 배고픈 거지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빵을 보고서도 먹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선택받은 자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사야 55:1에 나오는 이사야의 위대한 말씀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런 문제의 원인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한데 있다. 그때 많은 목사들은 성경을 다시 연구하게 되었고, 칼빈에게 돌아가서, 성경과 성경의 교훈을 따라 칼빈도 다르게 말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좀 쉽게 하기 위해 여기서는 칼빈 대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장 3항을 인용하겠다. “하나님은 이로써 죄인에게도 예수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시되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약속하셨는가? 하나님의 언약과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물을 누구에게 약속하셨는가? 선택된 자들에게인가? 아니다. 죄인들에게서이다. 하나님 말씀의 영향 아래로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은혜의 선물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 두 개의 기본적인 본문을 간단히 제시하겠다.

 

창 1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 언약의 할례라는 표시로 확인 되었다. 그런데 이 약속에 속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할례의 표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믿었던 아브라함인가? 성경에 따르면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종들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들 모두가 언약의 약속을 받은 것이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또 17:12 참고).

 

그 두가 선택된 자들이었는가? 우리는 모른다.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큰 의심이 가는데 그는 후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언약의 표시를 거절한 몇몇 사람의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언약의 벌을 받을 자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언약에 속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언약은 선택된 자의 수 이상이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라도 모르겠다. “그것은 신약 시대와는 다른 구약 시대가 아닌가? 언약이 처음에는 선택된 자의 수 이상으로 맺어졌지만 신약에서는 언약이 선택된 자들에게만 체결된 약속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39절을 살펴보자.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베드로는 이 말을 누구에게 했는가? 선택된 자들이 죄의 용서와 성령에 대한 약속(38절)을 받을 것이라는 말인가? 베드로는 일반적으로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36절에 나온대로 “이스라엘의 온 집”이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음으로써 무거운 죄를 지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2:4)죄 용서와 성령에 대한 약속을 선택된 자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당시 모든 청중들에게 확장시켰다. 그들은 죄를 회개해야만 했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했다. 그때 그들은 죄 용서를 받고 성령까지라도 받을 것이다.

 

이제 결론은 명백해졌다. 언약의 백성은 선택된 자와 수와 동일할 수 없다. 언약의 약속은 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로 부르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30년대의 화란 목사들은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사야 처럼 청중을 하나님의 선물에게로 초정하는 설교를 했다. 또 베드로처럼 백성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르시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에 있어서의 언약사상의 의미를 발견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부요함을 보여주고는 그것을 믿으라고 한다. 또 설교자는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벌이 있음을 말해주고, 그때 다시 회개와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선택에 따라 제한된 것이 아니다. 반면에 백성의 믿음은 선택에 따라 제한된다. 하나님은 정말로 모든 청중들에게 언약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지만 믿는 자들만이 그 복을 받는다. 왜냐하면 언약의 선물은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 사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다시 창 17장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거기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 위대한 약속의 한 부분으로서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하신다.(8절)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땅을 받을 줄 알았는가? 실제로 그 일은 그의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고 수백년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약속의 땅을 그들의 나라로 받았다. 그럼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 약속을 확실히 알 수 있었는가? 오직 믿음으로였다. 이것은 이미 후손에 대한 약속에 표현되었던 것이고(창 15:6, 롬 4:9이하), 히 11:9, 13이하에도 나타난다.

설교할 때 설교자는 하나님에 대해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세상을 지으시며 그의 아들을 위하여 보내시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이야기 한다. 또 설교자는 모든 죄인들에게 용서의 복과 성령의 복을 받도록 권면 할 수 있다. 설교자는 백성들에게 믿음을 촉구한다.(고후 5:20) 누구든지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지만 믿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무르므로 생명을 보지 못할 것임을 청중들에게 선포한다(요 3:36)

 

또 듣는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자기가 선택받은 사람인지 많이 고민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전에 먼저 자기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번도 선택받았느냐에 대해 고민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내 약속을 믿으라. 내 벌을 두려워하고 피하라”고 말씀하신다. 청중들은 그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그들이 선택받은 자임을 알게 된다.

 

2. 언약과 세례

 

우리는 세례를 가리켜 언약의 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언약교리에 변화가 생기면 세례에 대한 관점에서도 직접적인 변화가 나온다. 이 경우는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1905년 총회의 결정사항을 인용한 바 있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아래 있는 언약의 자녀는, 자라는 동안 그 행실이나 교리상 반대의 경우가 명백해지기까지는, 중생되고 그리스도의 안에서 성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2-1944의 총회에서 일어난 일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이 결정을 해석한 일이었다. 그 때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용에 언급된 중생된 아이들이 누구인가하면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실 때 다만 선택된 자녀들에게만 약속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받지 못한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약속해 주셨는가? 그것은 어려운 문제였고 명확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명확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중생과 용서를 약속해 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결과는 물론 세례가 두가지 다른 내용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나는 복음의 일반적 제시이며 다른 하나는 중생의 특별한 확신이다. 첫째의 것은 언약의 외적면에 속하고 둘째의 것은 내면적 언약의 진실한 부분에 속한다. 전자에 있어서 세례의 내용은 은혜의 말이며, 후자에 있어서는 은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차이를 하나님 편으로부터와 인간 편으로부터 제시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 편으로부터 살펴보자. 언약의 약속은, 가장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창 17:7,8절에 나오는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세례의 양식과 꼭 같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의무 및 축복과 함께 그 자신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그런데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게 되면 이 꼭 같은 세례의 표현의 경우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결과는 참담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두 말을 하시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가지고 때로는 이것을 의미하고 또 때로는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는 식이다. 그래서 세례의 이 약속이 경우에 따라서 동일한 약속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일은 일간의 편으로부터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례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두가지 의미를 가지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난 하나님이 어떤 의미로 그 약속을 나에게 주셨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그 충분한 약속을 받았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후의 내 생에 동안에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용서와 영생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충분한 약속을 받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약속을 받았다면 내가 받은 세례는 다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하게 된다. 거기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는 표시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을 찾게 되면 충분한 약속을 받은 줄 알겠지만 그 은혜의 표시를 찾지 못하면 단지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밖에는 받은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절망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40년대에 화란개혁교회에서는 교리논쟁이 불붙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작은 문제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중심이 다음과 같은 의심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세례시에 의미하시는 바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었다.

 

다시 창 17장으로 돌아가보자. 아브라함 집안에 속한 모든 사람과 그의 첫 아들 이스마엘까지도 할례를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언약의 표시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후에 이삭이 태어나게 되고 아브라함이 특별히 받은 약속은 직접 이삭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이삭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약속을 받았다. 땅의 약속까지도 그의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먼저 이삭에게 돌아간 것이고 이스마엘은 이삭에게 순복할 때 그도 약 속의 가나안 땅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만일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머무름으로써 하나님께 구체적인 순종을 보이려고만 했다면 그도 몫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복하기를 거절했고(창 21;9) 그래서 내어 쫓김을 당했다(창 11:10-12).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에서는 언약에서 배제되지 않았으며 그는 언약에 속하여 모든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라’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만일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그렇게 하였다면 언약의 약속은 그에게도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히 10:29에 나오는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형벌을 받을 이 사람이 약속을 받지 못했던 자이겠는가? 아니다. 그 표현에는 세례 양식에서와 꼭같이 성자 및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고의적으로 거절했고 그 약속된 선물을 약용하여 언약을 깨뜨렸으며, 그럼으로써 그 언약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언약의 중심이 구약과 신약의 여러 단계에서 확실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실 것과 용서로부터 영생에 이르는 축복을 그들에게 주시리라는 약속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이 모든 약속을 확실하게 하는 한 표시를 받는다. 또 우리는 그것에 포함되는 바를 확실히 안다. 성령에는 이중적 의미 같은 것이 없다. 세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약속을 특별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머물고, 그의 앞에서 행하면 우리는 그 약속된 선물들을 다 받을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거절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례시에 그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3. 언약과 축도

 

예배 마지막에 하는 축도의 양식이 화란에서 언약 사상과 관련하여 쟁점이 된 적은 없다고 알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좀 문제시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문제는 축도를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배시에, 특별히 예배가 아닌 다른 행사에서 이 축도를 들을 때 좀 이상한 것은 이를 확장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은 바울이 쓴 양식대로 하지 않고 여기에다 다른 것을 덧붙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모든 백성 위에’ 영원히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축도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축복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지만 목사들의 생각에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신자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모든 청중들의 다 축복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들은 이 축도문을 좀 더 자세히 제한하여, 그 복이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자들에게만 한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쓸때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다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알고 있었는가? 고린도 교회에서는 교인들 가운데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들은 서로 다투고 싶어했고, 다른 교인보다 자신을 더 높이고자 하였다. 또 무서운 죄를 회중 가운데 방치해 두고 있었다. 심지어 바울이 그들을 꾸짖었을 때 그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사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는 신약의 바울서신서 중 가장 날카로운 글이다.

 

바로 이런 교회를 향해 바울은 가장 고상한 마지막 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다. 바울은 누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의 말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인가? 선택받은 자들에게인가? 아니다. ‘너희 모두’에게이다. 거스리고 죄인인 그 모든 사람들이 약속을 받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여기서 언약의 축복을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먼저 구약의 축복인 민 6:22-27을 생각해 보자. 제사장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다. 대상은 온 백성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복을 그 말에다 연결시키신다. ‘그들은 이같이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27절)

 

그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복이 자동적으로 온다는 뜻인가? 율법에서도 명백히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 복은 자동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예를 들어 레 26장)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복 대신 벌을 주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복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의 언약을 지키면 그들은 모든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구약의 축복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오는 것이지만 실제로 불신자는 그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않는다.

 

눅 10:5,6의 인사 방식의 경우도 이와 동일하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여기서의 인사말은 그저 ‘평안하십시오’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인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내신 사도들의 인사이다. 이때 평화란 하나님과의 평화를 내포한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이 축복을 이스라엘 집들에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복이 자동적으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만일 그 평안의 말에 응답하는 자가 있으면 그 하나님의 평화는 그 집에 머무를 것이다. 만약 받지 않으면 그 평안의 약속은 그 집에 평안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룰 것없이 되돌아 올 것이다.

 

이는 서신서에 나오는 바울의 모든 맺음말의 특성이다. 그것은 바울의 기도가 아니다. 또 그것은 불명확한 어떤 인간의 소원도 아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만을 향한 것도 아니라 모두를 향한 것이다. 회중에 속한 모든 사람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이다. 고후 13:13의 말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지 축도가 아니다.

그래서 예배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고 기대하는 모든 것의 요약이다. 이 말에서 약속된 은혜와 사랑과 교통 이상의 것은 없다. 회중에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목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그것을 말씀하신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그 축복을 듣는 사람은 모두 한 가지 일만을 해야 한다. 감사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믿음으로 주님의 모든 축복을 받는 일이다. 그때 그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고생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그의 모든 은사와 함께 약속해 주신 것을 알고 이 약속이 이루어질 하나님의 시간을 충실하게 기다리며 살아간다.

 

아브라함이 그의 생애동안 하나님의 약속들이 다 실행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면서도 믿음으로 살았던 것과 같다. 이같이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물 중 그 어떤 것도 받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원수가 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 즉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을 다 약속하셨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이 가까이 살기를 거절했고 그 약 속의 성취를 기다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결론

 

언약은 참된 종교의 본질이다. 그래서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어느 곳에서나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과 아닌 당신의 모든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음을 기억해야 하다. 우리는 설교의 약속과 경고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설교에서 제시된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례의 약속과 경고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성례에서 나타나는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축복의 약속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축복에 담긴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살아갈 것이다 .

출처: 언약과 개혁/ 주의 아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언약적 구속사로 본 성경 계시역사)

1. 들어가면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단히 성경을 공부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전해야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때문입니다(딤전2:4). 물론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택하기로 예정하신 당신의 백성 모두의 구원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결코 보편 구원론적 관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에 근거한 제한구원(limited salvation)을 강조합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서 이런 사실이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마1:28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백성을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요6:37, 눅19:10) 성육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입니다(빌2:6-8).

이런 이유로 합당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바른 계시관의 정립에서 비롯됩니다. 곧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철저히 근거를 두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10:17). 때문에 청중 모두가 공감하는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설교를 제아무리 은혜롭게 선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본문이 말하는바 하나님의 본의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계시의존적 설교와는 무관한 자의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설교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청중을 즐겁게 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게 된다고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마7:21-23, 롬10:2-3). 문제는 사람의 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천상적 시각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씀하는 천상적 의미를 세상적 관점과 질서 속에서 접근하게 될 때, 거기에는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그것은 넓은 길의 신앙관일 수는 있어도 결코 좁은 길의 신앙여정과는 무관합니다. 그 결국은 사망과 생명, 그리고 심판과 구원만큼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뿐입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라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으로서 세상만사와 만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오직 성경을 통해 계시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중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에 집중됩니다. 이런 사실은 뱀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죄의 문제(창2:17, 3:6)가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의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갈4:4)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해결됨으로 당초 하나님의 창조언약으로서 문화명령(창1:28)은 지속적으로 성취를 향한 길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계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救贖, redemption)사역에 집중될 때(요5:39, 딤후3:15-17), 계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성경계시의 총화(總和)를 하나님 나라 사상에서 찾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역사의 종국에 가서 마침내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에서 성취의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계시에 무지하거나 왜곡 및 곡해현상은 사이비적 기독교 신앙과 교회 및 목회에로의 귀결이 불가피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와지는 종교성이 이를 적극 부추기기 때문입니다(롬1:21-23). 결과는 우상 숭배적 신앙관의 형성입니다. 상황이 이럴 진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게 될 뿐입니다. 거기에 분명히 유사기독교의 모습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바 정당한 기독교 신앙관은 찾기 힘듭니다. 불법적(마7:21-23)이고 불복종적(롬10:2-3)인 자의적 숭배 신앙만이 난무하게 됩니다. 바른 성경공부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해 강력히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며, 성경계시의 총화가 무엇인 지를 바르게 아는 일은 바른 신앙관 형성의 척도가 될 만큼 중요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목적 곧 구원의 이유와 바로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로서의 천국사상이 성경이 말씀하는 총체적 계시관의 궁극적 목표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시민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 살아가야 합니다(마6:33). 이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추구와 구현을 위한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요 제일 된 목적이라고 설파합니다(전12:13).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삶의 실상이 궁극적으로 선악 간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의한 최종적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전12:14, 고후5:10, 히9:27, 계20:11-15).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계시의 총화인 사실의 정당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 사상은 공교하게 지어낸 것이 아닌 성경 자체가 자증하는 객관적인 관점이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신앙으로 수납하고 실제적인 삶의 가치관과 목표로 삼아 살아가는 것을 통해 여기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신분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여기서부터 맛보며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실제적 삶의 경험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그래서 현세와는 단절된 사후세계에 속한 나라(that world)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예비적으로 맛보며 체험하며 이루어가는 현재 진행적(this world, 마12:28, 눅17:20-21, 마13:31-33)이며 동시에 미래지향적(눅17:22-24, 22:14-18, 마25:31-33)인 이중적 국면을 띠고 있는 나라입니다.

먼저,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내용을 다니엘이 해석하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 나라 주제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단2:31-46). 거기에서 각기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깊이 연계돼 있는 두 종류의 꿈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큰 신상’과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그래서 신적기원에 의한 ‘뜨인 돌’에 관한 꿈 내용입니다. 문맥을 통해 전자는 인간의 통치역사를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후자는 신적기원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표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두 나라의 정체성은 각기 적대적인 성격을 띠면서 부단히 충돌합니다. 결국 뜨인 돌에 의해 큰 신상은 파괴됩니다. 최종적으로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뜨인 돌로 말미암는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인간통치의 세상나라를 대치합니다. 이는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을 명백히 증거하는 것을 통해, 세상역사의 종식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란 신학적 명제를 동시적으로 시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이며 무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역사를 방편삼아서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에 모아집니다. 성도의 모든 삶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적극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의 편집방향성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구성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66권의 처음 책인 구약의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선언합니다.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으로서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이 천지 곧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 말입니다(히3:4). 그런데 계21:1을 살펴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관련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창1:1에서 언급하고 있는 태초의 천지창조사역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재창조사역으로 갱신, 확장되고 있음을 명백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벧후3:10-13, 마19:28, 사65:17, 66:22). 다시 말해 처음부터 이 세상(this world)의 창조사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that world)의 건설을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전(全) 우주적 경륜(universal economy)을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해석 속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공생의 사역의 중심사상이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에 집중됩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사상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선언(宣言)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마4:17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본문에서 ‘천국이 가까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 속에서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해 역사하고 있는 현재완료진행형적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12:28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17:20-21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뿐만이 아닙니다. 막2:10에서는 한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는 사실을 소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지들이 종합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능력이 현재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와 병자의 치유 및 축사(逐邪)사역, 그리고 천국복음의 증거와 죄사함의 권세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해 역사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명백한 표적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로 귀결됩니다.

넷째로, 소위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마6:33)을 천국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신앙적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설파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4:17)고 선포하시는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할 관점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 사상이야말로 성도들의 존재이유와 추구할 삶의 궁극적인 목표요 가치관이란 사실을 강조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섯째로, 동일한 산상수훈 속에서 특별히 기도문제와 관련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마6:9-10)에 대해 집중해 기도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맛보며 체험하는 삶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적극 소망함으로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중심이 자신의 현세적인 목적달성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에 치우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도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의 성격과 방향성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구현’(고전10:31)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성경의 본의(本意) 또한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구현을 지향하는 삶이란 본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될 것이 확실하기에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경륜을 바르게 인식하고 신앙하는 데서 나와지는 자율적 순종의 삶 곧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계시(啓示)의존적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여섯째로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한 새 사람, 곧 한 몸을 이룸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되었음을 논술합니다(고후5:17, 엡2:14-16).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는 본질에 있어서 천상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새로운 신분의 소유자들임을 강조합니다. 골1:13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습니다. 지상의 성도는 본질에서 이미 천상의 나라를 기업으로 소유한 천국백성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사역 안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미래의 영광을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한 자들로 성경은 설명합니다(엡2:6). 성도의 현재적 삶의 성격을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소속돼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적 삶으로 간주해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성도들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을 생명의 도리로 받드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선양과 확장과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궁극적 명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친 백성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진술들을 통해 성경이 제시하는 주제들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부적인 주제들을 총괄하는 단일한 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된다는 사실에 달리 이견(異見)이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 전체의 역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요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관을 전통적이 아닌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는 전통적이고 유전적인 신앙관은 그것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본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헛된 경배로 판정되기에 결과적으로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막7:6-8, 마7:21-23, 롬10:2-3, 딤후3:15-17, 딤전2:4, 요삼4절, 엡4:11-13).

2. 펼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로서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진행됩니다. 여기서 계시라 함은 창세전 영원세계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수립된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우주 만물에 대한 작정과 계획을 성경저자들을 통해 포괄적으로 세상역사 속에 드러내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언약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사상인 구속의 도리가 세상역사를 무대로 섭리적으로 펼쳐질 때, '선(先) 언약-후(後) 성취'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언약(言約, covenant)을 구속사 진행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구속사(redemptive history)라 함은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 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시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심으로 종말론적 영광을 받으시고자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활동사역을 가리킵니다(엡1:4-6).

이런 일련의 상호 불가분의 계시적 정황상, 계시사와 언약사 및 구속사란 표현은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면서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향해 서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런 종말론적 구속사를 예시(豫示)적으로 진행해 나가기 위해 앞서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계시의 도구로서 모형적이며 예표적인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제반 언약들은 성격상 다양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이 신적(神的, divine)인 것으로 인해 통일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상황에서 갱신, 확장,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기록된 핵심 사건들이 신적 언약을 중보적 매체로 상호 깊이 연계돼 있음을 바르게 확인하게 될 때, 비로소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삼위일체적 구속계시의 본의(엡1:3-14)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아가 나머지 성경의 계시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일관성 있게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와 지침을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①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창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서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친히 지으셔서 에덴에 거주케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든 창조물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위임해 주십니다(창1:28).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창조의 절정과 극치와 면류관으로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representative ruler)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아담 부부가 타락하기 전,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예표적이며 성례전적으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다 온전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저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창1:28의 창조언약을 통해 주신 소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creation mandate, christian stewardship)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의 본의(本意)가 그랬습니다. 이는 인간의 문화 활동으로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생명적 활동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자손), 땅을 정복하라(땅),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통치권, 창1:28)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의 중심사상은 본질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②선악과 금령법(선악과 언약)으로서 아담언약(창2:17)

그렇다면 창1:28에 담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이 어떤 방식을 통해 실현 가능할까요. 이는 창조의 원리상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시행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순종의 삶을 특징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전12:13, 요14:21). 바로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표상(表象)적 사건이 다름 아닌 선악과 금령법(禁令法)에 담긴 선악과 언약(행위언약)의 비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이런 이유로 이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 금령법(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아담부부의 생명의 근원이 말씀에 기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지속적인 존속여부 또한 철저하게 말씀의 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에게 이후 문화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선악과 행위언약(창2:17)이란 자체 속에 조건부적인 단서조항을 포함함으로 일종의 선의(善意)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2:16을 통해 이미 저들에게 허락된 자유의지(self will)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의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본질적 관계상, 하나님의 뜻을 적극 이루어 드리는 일에 의존적이며 종속적으로 선용되어야 하는 제한된 자유의지입니다.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에 의해 아담의 행동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합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이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서도 극명하게 확인됩니다(창2:19-20). 다시 말해 아담은 각양의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임의대로 명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게 지어준 것입니다(의존적 자유의지).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출된 경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 아담부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지를 오남용함으로 월권을 하게 된다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는 경우에 따라서 무시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시험적 성격을 담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존재이유와 가치성과 본분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 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데서 비로소 찾아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전12:13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따라서 아담부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16절의 범주 안에서 만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절과의 관계 속에서는 철저히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실까,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행하실까,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 일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될까 등등의 질문을 던져보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상의 질문에 ’예와 아멘‘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이는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셈이 될 줄 압니다.

③원시복음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한편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사단과 그의 졸개들에게 세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들에게 허락된 통치의 영역입니다(요12:31, 16:11, 마4:8, 엡6:12).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담 부부와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는 계획을 감지한 사단은 천상의 영계(靈界)에서 이루지 못한 사욕(邪慾)을 채우고자(유6, 벧후2:4, 사14:12-15) 이번에는 뱀을 하수인으로 삼아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이번에는 직접 공세를 포기하고 우회전술을 시도합니다. 이 시험에 아담과 하와가 빠지고 맙니다(창3:1-6). 이로 인해 에덴에 죄가 유입됩니다. 이제 에덴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천상적 모습과 성격을 잃게 됩니다. 인류에게는 실낙원이 돼버린 셈입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버립니다. 비록 이들에게 선악과 행위언약 속에 조건부로 주어진 죽음이 즉각적으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창3:8-10)은 본질에서 죽음과 방불한 형벌로 기능하기에 충분합니다. 사단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따라서 창1:28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건설을 위한 문화명령적 언약은 파기된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사단은 영계(靈界)에서 못 다한 한(恨)을 여기 지상에서 보상받는 듯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가 제기됩니다.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근거하면 이 언약이 성격상 은혜성을 띠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서 파기될 수 가 없는 상황입니다(창조언약의 기원은 사실상 엡1:3-6에서 찾아집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아담과 하와 부부 및 그의 자손들을 통해 문화명령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십니다. 그러나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은 조건적인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 이를 어기면 불순종의 대가로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창3:6)는 죄인으로 정죄돼 죽음의 선고는 필연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상기 두 언약 사이의 상호 반목과 대립 및 충돌과정에서 ‘하나님의 딜레마’란 문제가 제기됩니다(하나님의 의인화 곧 신인동성동형의 원리에 근거해서).

다시 말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1:28)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언약(창2:17)은 이를 어긴 아담 부부의 즉각적인 죽음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의 진행을 불허(不許)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하나님의 딜레마’란 이런 양극단의 대립양상을 염두에 둔 데서 나온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창조자의 절대 주권적인 특성상 어떤 이유로라도 파기되거나 변개 될 수 없습니다(민23:19). 더욱이 선악과 금령법은 비록 그것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조건부적으로 주어졌다 할지라도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창1:28의 은혜언약에 부속돼 있음으로 죽음의 형벌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주어질망정, 영원한 형벌로서 아주 사망에 처해지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이는 창1:28의 언약이 식언(食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출처가 본질에서 신적 기원 곧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미 자체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비록 아담부부가 선악과 금령법(창2:17)을 어김으로 사형선고가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언약(창1:28)과의 관계상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형벌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죽을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편으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이들의 죄책(창3:6)을 해결해 주시며, 다른 한편으로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가시는 방식의 일환으로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상의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충돌을 동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해결책으로서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일컬어 복음의 원형(prototype), 곧 '원시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안에 구속계시의 원리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의미가 암시적으로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갈4:4).

④구속의 원리를 방편으로 선용하셔서 창조원리를 지속시켜 나감

이제 당초 창조원리(창1:28)에 근거해 타락 전 무죄자로서 아담과 하와와 이들의 후손으로 인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계획은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죄를 구속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와 방식(창3:15)을 통해 재정립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 당초 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변경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갱신(更新)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의 원리를 방편삼아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 건설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려는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이런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엡1:4, 행2:23, 4:27-2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런 식으로 세상역사(표면적 사건)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이면적 사건)인 사실을 통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로서 성육신의 길이 예비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창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역사는 표면적으로 보편적 인류의 역사라는 성격을 띠고 피조세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만, 사실은 여자의 후손(창3:15)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화명령의 결국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는 구속사의 현장이요 무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각기 기록된 언약에 관한 상호 연계성과 의존성 및 이에 대한 정당한 해석여부는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계시역사 전반에 걸친 언약적 구속사의 내용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명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근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⑤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

이상 창 1-2-3장에 각각 언급된 언약간의 상호 필연적인 연계성은 창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언약적 구속사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을 세상에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언약을 수단과 방편삼아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미래의 메시아는 계보적으로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혈통적 후손을 통해 세상에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세속사의 본질이 구속사인 사실이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도출(導出)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하건대, 창4장에 소개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단순히 시기질투에서 빚어진 충동적인 살인행위가 아닙니다. 표면적(세속사적 관점)으로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 된 데 대한 가인의 감정적인 문제가 깊이 개입된 결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이미 언급된 인류의 두 후손,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끊임없는 적대적인 대립과 충돌에 관한 예언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으로 아벨은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벨의 제사가 상대적으로 열납 된 사실은 제물의 차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히11:4)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원시복음의 내용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온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창6:8-9, 히11:8, 엡2:8-9, 고전15:10).

이후 성경의 계시역사는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시켜 나가는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돼 감을 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구속사의 진행을 특별히 족보의 기술을 통해 묵계(黙契)적으로 시사합니다. 창5장에서 소개되는 아담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언약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죽은 아벨 대신 주신 셋을 통해 에녹과 노아에게로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족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 여자의 후손계보를 위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통로로서의 기능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⑥노아의 본존언약(창9:8-10, 1-2절)

노아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류를 물로 심판하십니다. 심판의 동기를 설명하면서 창세기 저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창6:5)이라고 고발합니다. 이후 성경역사 속에서 ‘죄의 관영’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로 작용함을 도처에서 지적합니다(창15:16, 18:20-21, 눅17:26-30). 이런 원리에 근거해 신약의 기자는 죄의 값은 사망이요, 그 결국은 종말론적 심판임을 경고합니다. 노아를 포함해 8식구만 남고 당시 모든 인류가 물 심판을 당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들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창6:8) 인류의 초기역사 때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시행되는 주권적인 선택의 섭리역사가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대표로 이들 식구들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9:8-10). 이 언약을 일컬어 노아의 보존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노아의 남은 자녀들을 통해 아담부부와 맺었던 창조언약인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노아의 보존언약 속에 담긴 내용이 본질에서 아담에게 주신 창조언약의 내용과 동질성을 띠고 있음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창9:1-2). 물론 노아의 보존언약의 궁극적 성취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구속의 방식을 통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후 노아의 보존언약을 통해 진행되는 여자의 후손언약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특별히 셈의 계보를 선택적으로 선용하셔서 그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을 통해 데라와 아브람에게까지 연결되기에 이릅니다(창11:10, 26절).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는 태초의 인류역사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택적이고 차별적으로 시행돼 왔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창11장에 소개된 바벨탑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본질에서 선악과 시험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의 요소와 동질성을 띠고 있음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과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지존사상(개인주의 및 이기주의) 곧 타락한 욕망의 극한 상황을 계시한다 하겠습니다(창11:4, 3:5). 이후 바벨탑 반역사건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과 배도사상은 역사적 바벨론 제국을 통해 다시 한번 가시화되었다가(창11:1-2, 단1:1-2), 계시록에 소개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계18:2-3). 이런 식으로 바벨탑 사상은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통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적 시험과 반역사상을 총체적으로 계시한다 하겠습니다.

⑦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대전환인 아브라함 언약(창12:1-3)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다시 시작된 인류의 생육과 번성의 역사는 특별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감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계보를 노아의 세 아들 중 맏이인 셈(창6:10)과,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창10:22, 11:10) 및 데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까지 연결시키는 가운데(창11:24-26), 아브라함에게 이르러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대 전환의 국면을 맞게 됩니다. 즉 초기 인류역사(창4장-11장)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은 성격상 암묵(暗黙적이던 것이 구체적이고 명시(明示)적으로 바뀝니다. 은닉(隱匿)적이던 것이 공개적이고 개인적으로 지목해서 역사의 전면에 아브람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직접 아브람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12:1-3).

아브람 언약의 대전제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창12:1). 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일체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내용과 방향성을 180도 전환해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돌아서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전인적(全人的)인 가치관과 인생관의 전환 곧 현세지향적이던 삶을 천상지향적인 삶으로 바꾸는 일 말입니다. 이를 신약적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마6:33). 예수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강조하심도 이런 맥락에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마16:24).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 지를 요약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신앙과 경배의 본질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을 구현하는 일이란 사실입니다(고전1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깊이 접촉된 데서 나와지는 무한 감사와 감격의 심정의 발로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은 크게 4가지 요소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창17:6),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인해 열국이 받게 되는 복입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 속에 나타난 4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켜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는 가운데, 그곳에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을 건설함으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수행케 할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결과적으로 문화명령(창1:28)의 본질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계시의 도구로 삼아 당신의 뜻을 계시하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 관련해 각각의 요소들이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 및 열국의 복 언약의 순서를 밟아 차착 없이 전개됩니다. 이들 각각의 성취내용을 우선 요약적으로 살펴봅니다.


자손언약의 성취

먼저 자손언약의 구체적 성취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거쳐 후에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출24:1-8)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돼 마침내 요단강 동편 모압 땅에 이르기까지의 모세 5경(창-신)의 내용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자손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 언약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 속에서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해방돼 나오게 된다는 예언적 약속말입니다(창15:12-17). 이 구원사건은 본질에서 가나안 정복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과 아모리(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함으로 저들을 심판하시는 문제가 상호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가리킵니다.

땅 언약의 성취

땅 언약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성취과정이 소개됩니다.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요단강을 믿음으로 도하(渡河)하는 한편,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락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믿음의 성전(聖戰, holy war)을 통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안 지경 일부는 도면상으로 분할해 제비뽑는 방식으로 분배해 줍니다(수18:8-10). 그러나 이런 도면상의 분배마저도 여호수아서 기자는 실제적인 땅 분배 사건의 성취로 간주해 기술합니다(수21:43-45). 이는 신적 언약의 특성상(주권성과 은혜성 및 실현성)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땅의 전(全) 지경을 온전히 정복하게 됩니다(창15:18, 왕상4:21, 14, 25절).

왕 언약의 성취

왕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서는 사사기서를 통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21:25)고 지적함으로 왕의 필요성이 우회적으로 암시되고(삿21:25), 룻기서에서는 유다의 계보를 다윗에게 연결시킴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다윗임을 묵계적으로 지목합니다(룻4:18-22). 사무엘서를 통해서 마침내 다윗이 최종적으로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게 됨으로 마침내 왕 언약이 성취됩니다(삼상16:12-13, 삼하2:4, 5:3).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이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인해 비록 예비적이긴 하지만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고 있음을 후에 열왕기서 기자는 대내외적으로 명백히 천명합니다(왕상4:20-25). 이런 사실의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열왕기서 기자가 비유적으로 묘사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왕상4:25)는 표현을 동일하게 차용해 설명하고 있는 데서 확연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끝으로 아브라함의 씨로 인해 열국이 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창12:3, 22:18)은 솔로몬 통치 하에서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며, 저들을 관할하게 됨으로 사방에 평화와 안녕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통해 예비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왕상4:21, 24절).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봅니다.

⑧출애굽 사건으로 말미암는 시내산 언약(출24:1-8)

출애굽 구원사건은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 부분, 특별히 횃불언약식(창15:12-18)을 통해 맹세적 보증으로 확증해 주신 자손언약이 무려 430년 만에 정확히 성취되는 사건입니다(출12:40-41).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우리 편에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찰 때에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실현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에 있어서 성도 편에서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심에 있어서 굳이 우회(迂廻) 길을 택하게 하심으로 홍해 길로 인도하시고 광야여정 길로 몰아가십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처사입니다. 430년간 애굽의 이방문화에 익숙해지고 체질화 돼 가히 노예집단과 방불한 저들을 명실공히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여호와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관을 재정립해 주시기 위한 계도(啓導)적이고 계몽(啓蒙)적인 교육적 차원에서 취해진 결과입니다.

마침내 모세는 이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피를 매개로 공식적인 언약식을 체결하십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를 일컬어 언약의 피라고 설명합니다(출24:1-8). 이 피의 언약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에로 인(印)쳐 주시는 새 언약 속에서 실체화 됩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성찬식의 제정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시(例示)해 줍니다(히10:1, 눅22:19-20). 이런 의미에서 시내산에 집결한 총회로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교회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대속사역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성취로 출현하게 될 신약의 교회공동체와 천상의 보편의 교회를 예표적으로 표상한다 하겠습니다(히12:18-23)

이 언약식을 통해 하나님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됩니다(출19:5-8). 이런 사실의 보증으로 율법을 하사(下賜)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율법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신정(神政)적 정체성을 만천하에 현시해야 합니다. 제사장 나라의 신분으로 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런 사실을 구체화시킬 현장으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율법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순종을 담보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약관계 속에서 적극 통치해 가실 것입니다.

울법하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성막(聖幕)에 대해 계시해 주십니다. 성막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함께 거하시며 당신의 정권(正權)으로 친히 통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의 정수(精髓)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출25:8-9). 이런 사실의 구체적 성취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요1:14)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셔서 내주하신다는 방식을 통해 실체화되기에 이릅니다(고전3:16, 6:19). 레위기서에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지속적으로 교제와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거룩의 관계를 각종 제사의 방식, 특별히 속죄제사를 통해 계시해 주십니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실질이 어떤 것인 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적 사건의 의미를 갖습니다. 민수기서는 가나안 정복의 성취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광야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 교훈해 줍니다. 동시에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언약적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40년간에 걸친 광야의 유리방황을 통해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민13-14장)과 불뱀사건(민21:4-9) 등은 이런 사실을 예시해 주시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명기서에서는 출애굽 2세대를 향해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사적 본의 및 율법의 재해석, 가나안 정복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통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을 다짐시키는 모세의 3편의 설교를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 가운데 친히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해 확증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손길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믿음의 인내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와집니다. 전3;5-6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⑨다윗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삼하7:11-17)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아브라함 언약에 약속된 자손언약은 출애굽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가운데 다음 단계로 땅 언약의 성취를 향해 가나안 정복의 여정 길로 나아갑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 속에 담긴 구원의 실질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계시된 제사장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수립은 가나안 땅에 정착돼 평안과 안식의 삶이 보장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입니다(수21:43-45). 다시 말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거나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늘 불안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을 누리는 삶이라고 평가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출애굽 사건으로 시작된 구원의 완성과 실제적 누림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는 가나안 땅의 정복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신약적 관점에서 성도가 소망하는 영적 본향인 천상의 도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의 등장과 과도기적 통치를 통해 왕의 필요성을 시사합니다(삿21:25). 이는 곧바로 시내산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신17:14-19)이 누구인 지를 룻기서를 통해 다윗을 지목하는 방식으로 보다 진전됩니다(룻4:18:22). 다윗의 공식적인 즉위에 앞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인 사울을 먼저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십니다(삼상8:20). 이런 사실의 본의는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 반(反)하는지를 알게 하셔서 인간의 연약과 실패를 깨우쳐 주심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적극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사울이 통치하는 동안 반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뿐 아니라(삼상13:8-15, 15:9, 12절), 그 때마다 변명 일변도로 처신하는 것(삼상13:11-12, 15:21)을 소상하게 기술함으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자격미달인 사실을 우회적으로 증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을 기름 부어 사울을 이어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을 삼을 것을 명령하십니다(삼상16:1, 11-13절). 이것이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이때는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철저히 비공식적으로 예식이 치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밀한 중에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이내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내 보내 골리앗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심으로(삼상17:45-49)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 놓으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구속사적 의미가 이런 사실에 집중됩니다. 다윗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주심으로 소위 상견례(相見禮)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섭리역사 말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창화(唱和)하는 소리에 담긴 의미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사건은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 곧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현장이요 무대인 사실로 인해 철저히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실하게 제시해 줍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윗은 철저히 사울의 견제를 받으면서 집중적인 핍박과 고난의 기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을 통해 받는 시련을 통해 다윗을 연단하심으로 더욱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에 깊이 접촉시켜 주십니다.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 땅 헤브론으로 귀향합니다. 유다사람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저들의 왕을 삼게 됩니다(삼하2:4). 이것이 두 번째 기름 부음입니다. 보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의 작정기간이 차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헤브론에 모입니다. 저들이 한 마음으로 다윗을 기름 부어 명실 공히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으로 옹립(擁立)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세 번째 기름을 부음을 받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자 이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운반해와 다윗성에 안치합니다(삼하6:12-15).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그것이 다윗성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왕권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을 받음으로 언약적 정통성을 보증 받는 동시에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음을 확증한다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저 유명한 소위 다윗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삼하7:11-17). 다윗언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셔서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약속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의 자식을 주심으로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 자식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위해 거하실 집(성전)을 짓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넷째, 언약의 핵심관계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고부동하게 인(印)쳐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나단으로부터 이 언약의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감당키 어려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삼하7:8).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들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통해 차착 없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질 것을 간절히 열망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그의 심정을 담은 고백적 기도의 내용이 다름 아닌 삼하7:29의 내용입니다.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기도의 내용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해서 편의적(便宜的)으로 적용시키게 되면 다윗의 기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本意)와는 전혀 무관한 사사로운 기도의 내용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소위 말씀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배도(背道)의 신앙관이 성립되게 됩니다(마7:21-23, 롬10:2-3, 딤전6:3-5). 결국 말씀의 도구화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한낱 수종자로 삼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매도하는 크나큰 범죄행위를 유발시킵니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관이 자칫 이런 식으로 변질된다면 신앙의 본질이 처음부터 왜곡(歪曲)된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irony)와 역설적 현상(paradoxical phenomenon)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준엄하게 경고합니다(마7:21-23).

이후 다윗언약은 그의 약속의 아들 솔로몬 왕의 초기 통치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더불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됩니다(왕상4:20-25). 특별히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을 “솔로몬의 사는 날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와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는 비유적 묘사를 통해 확고히 증거합니다. 이런 표현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을 차용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통치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실질이 성격상 예비적이며 예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 통치역사 속에서 실현된 다윗언약은 실질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자체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약속의 성취를 전망케 하는 종말론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솔로몬 통치 말기에 율법에 대한 그의 불순종과 이방의 처첩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각종 우상숭배에 동조하는 것으로 인해 사실상 남북이 분열됨으로 다윗왕조는 중도하차하는 데서 이런 이중적 전망을 더욱 사실화 시킵니다(왕상11:1-13). 상황이 이럼에도 다윗언약의 예비적 성취와 중단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다윗왕조를 아주 패(敗)하지 않으시고 불가피하게 다윗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향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합니다(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9:6-7, 11:1-2, 52:13-15. 53:4-6).

이런 관점에서 비록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당사자와 하나님 나라 몰락의 장본인이란 이중적 성격을 띤 불가사의한 인물로 평가될지라도 다윗언약 속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서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한 사실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예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治世)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성전을 짓는 일과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진정한 아들의 신분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임마누엘 곧 성전의 실체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1:1, 22-23절, 요2:19-22).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를 보면서도 자신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가운데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질책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솔로몬의 실체로 친히 증거 하십니다(마12:42, 눅11:31).

솔로몬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는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급기야 분열 이스라엘 왕국으로 전락돼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유다는 르호보암이 통치하게 됩니다. 다윗언약에 명시된 대로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이 과정에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은 철저히 여호와의 종교를 수단화시켜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 사사로이 이용합니다(왕상12:25-33). 열왕기서 기자는 이를 ‘여로보암의 길’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악행의 표상으로 정죄합니다(왕상15:34. 여로보암의 죄는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한결 같이 좇았던 패역한 범죄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왕상14:16). 이런 사실은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는 것으로 현실화됩니다(왕하17:1-8).

일반적으로 ‘여로보암의 길’로 표현되는 여로보암의 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왕상12:25-33). 첫째, 하나님의 도구화 및 우상화 작업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해진 절기에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칫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과 벧엘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의 신앙을 우상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편으로 전락될 때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여호와의 신앙은 실종됩니다. 대신 여호와의 신앙을 가장한 우상 숭배적 사이비 신앙이 성립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유익을 도모하는 한 낮 수종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러 상황에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불법적이며 불복종적인 자의적 숭배신앙만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롬10:2-3, 마7:21-23). 둘째, 자의적 숭배신앙의 조장으로 인한 무자격 신자의 양산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을 임명하는 데 있어서 모세 율법에 정한 대로 레위지파 사람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을 임의대로 제사장에 봉직시킵니다(대하11:13-16).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철저히 무시되는 패역한 범죄행위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현대적 적용이란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소명이나 구원의 확신과는 무관한 교세확장을 위한 무자격 목회자의 마구잡이식의 배출과 목회성공을 위한 무자격 세례교인의 양산에 비교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이 유유상종해 교회공동체를 이룬다고 할 때, 그 곳에 참 된 성경적 신앙과 교회와 목회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셋째, 유사성(類似性)과 편의성(便宜性)의 문제입니다. 이는 본질에서 이탈한 형식주의 및 외식주의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거국적으로 정해서 드리는 절기를 임의대로 변경해 적용시킵니다. 특별히 7월 15일로 정해져 있는 초막 절기를 8월 15일로 변경해 드리도록 유도합니다. 겉으로 보면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날짜가 다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유사성과 편의성을 앞세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비슷하게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되면 이미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됩니다. 모든 신앙적 열심이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종을 울립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란 ‘지식을 좇는 신앙’(롬10:2-3)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말씀의 본의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 사색신앙과 섭리의존 순종신앙 자세를 일컫습니다.

남왕국 유다 또한 본질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왕의 경호원들로서 선지자들에 의해 부단히 불의와 불법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남유다 마저 바벨론의 3차(BC605년, 597년, 586년)에 걸친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패망하게 됩니다(렘25:1-9, 대하36:17-20).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 북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멸망과 포로의 기간을 70년으로 제한하심으로 70년이 마치는 날에 바벨론 포로로부터 다시 고토(古土) 가나안에로 귀향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렘25:8-13, 29:10-14, 30:1-3, 겔37:21-22, 사14:1-3). 이는 다윗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다윗의 왕위와 왕권의 영속적인 보장이 바벨론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왕국을 통해 중단 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라고 축복했던 야곱의 예언이 남유다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취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아울러 간파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면 다윗언약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출처와 배경이 야곱의 예언적 축복에서부터 유래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⑩선지자들의 새 언약(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40:1-2, 42:9, 61:1-3)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이어 남유다 왕국의 패망은 특별히 유대 백성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좌절 및 통한의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적어도 다윗언약에 근거하면 남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망정 어떤 경우라도 결코 멸망당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선지자 하박국마저도 유다의 패역과 간악함을 마땅히 징치해 주실 것을 간곡히 청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없는 이방 갈대아 인(바벨론)을 채찍삼아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기막힌 사실 앞에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 하시나이까”라고 거침없이 항변했던 것입니다(합1:13).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박국의 이런 질문에 명확하게 답변해 줍니다. 렘25:12-13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이런 예언의 말씀은 바사왕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 포로들이 고토로 귀향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스1:1-4).

그렇습니다. 다윗언약은 신적 언약의 특성상 어떤 경우라도 결코 무효화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과 관련해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 구조적 성격에 대해 감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다윗언약을 포함해서 제반 신적언약의 중심 사상들이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과거역사 속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되는 것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미래에 참 다윗 왕의 실체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이며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에 대한 확실한 전망 말입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포로기 전후 선지자들이 예언한 약속들 중, 특별히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맞춰 선포한 예언들을 총체적으로 일컬어 ‘새 언약’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은 이처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시내산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철저하게 멸망을 선고받을지라도 다윗언약에서 시사하고 있는 이중 구조적인 특성으로 인해 조만간 일차적으로 다시 구원해 주실 것과 아울러, 보다 미래적인 종말론적 회복을 예시(豫示)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신(新)다윗 왕조의 재건과 복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신정왕국의 회복을 지향합니다. 이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을 특별히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이사야 등 세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 사상

첫째, 예레미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렘31:31-34).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 유명한 하나님의 ‘새 언약’을 선포하기 전, 먼저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이런 남 유다의 회복을 북 이스라엘에게 확대 적용시키는 가운데 역사적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새 언약 안에서 재해석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는 독자들에게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되는 이스라엘이란 역사적 이스라엘을 뛰어 넘는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을 부각시킴으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세상 가운데 출현하게 될 교회공동체를 지향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는 결국 또 다른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유다의 불순종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바벨론을 채찍으로 삼아 언약적 심판을 내리실 것을 예언하십니다(렘25:7-10). 그러나 아주 멸하지는 않으시고 70년으로 제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11절). 이는 유다의 회복을 보증하시는 말씀(렘29:10-14, 30:1-3)으로 다윗 언약을 통해 다윗 왕조를 영원히 지속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한 내용입니다. 70년이 찰 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 중 일단의 무리를 포로로 잡혀갔던 이방으로부터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남은 자’(remnant)라고 명명합니다(렘23:3).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친 백성을 가리키는 언약적 용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을 ‘택자’ 사상과 동일한 의미를 간직합니다(엡1:4-6). 신구약 역사를 막론하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성경은 자증합니다(롬11:4-6). 아울러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그로 하여금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 공평과 정의를 행사하게 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때 비로소 참 된 구원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왕을 통해 여호와의 의가 실질로 온 백성에게 전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렘23:5-6, 롬3:21-22). 그리고 이들은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통해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렘23:7-8).

이상의 관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여전히 다윗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로 인해 다윗 언약은 자체 속에 처음부터 이중적 성격을 띠고 주어졌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언약은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성취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중적 구조를 띠고 진행됨을 보게 됩니다.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측면 말입니다.

이렇게 렘23-30장에 걸쳐 집중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 기술하던 예레미야는 31장에 이르러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해 ‘새 언약’을 선포합니다(렘31:31-34). 새 언약의 내용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시내산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나 괄목할만한 갱신과 발전을 통해 심화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심비에 새겨진 율법으로 인해 율법의 자율적 순종이 보장되고 있음은 시내산 옛 언약에 비해 현격한 계시의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새 언약의 구속사적 특징을 살펴봅니다.

새 언약의 발효 시기는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새 언약이 유효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출6:2-9). 새 언약의 성격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옛 언약(시내산 언약)과 비교해서 내용적으로는 동일하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에 반응하는 순종을 관장하는 행동지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맺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동시적으로 외적으로는 불연속성을 갖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 언약은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지켜질 것입니다. 순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을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령의 내주와 후원하시는 능력의 역사로 가능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십니다(렘31:34상). 이로 인해 죄로부터 온전히 용서를 받습니다(34절하).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사실상 예레미야에 의해 선포된 새 언약에 있어서 종전의 언약과 비교해 괄목할만한 언약의 갱신과 발전을 가져 온 부분은 새 언약이 성취되는 시대가 다름 아닌 ‘죄용서의 시대’란 사실입니다.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지는 시대 말입니다(히10:17-18). 물론 옛 언약 하에서도 죄용서가 가능했습니다(히9:13). 그러나 그것은 실체를 향한 예표적 제도로서 한시적으로 효력을 발생했을 뿐입니다(히10:11). 그래서 해마다 거듭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 하에서는 실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한 영원한 제사(once for all)를 드리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 안에서 모든 죄가 영원히 도말(塗抹) 된 것입니다(히9:12, 10:14, 17-18절). 이런 결과로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성취됩니다. 마침내 임마누엘의 종말론적 성취가 실현됩니다. 여기서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저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적 표현은 언약의 본질로서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가리킵니다(계21:3, 창17:8, 출19:5, 레26:12). 성경에 약속된 신적 언약의 핵심사상은 한결 같이 위의 주제를 본질로 삼아 역사 속에서 진행돼 나왔습니다. 이런 사실은 언약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상의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섭리적 기간이 찰 때 회복될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이 모든 일들이 다윗의 위를 좇아 세우신 한 의로운 가지에 의해 성취될 것이며(렘23:5-6), 그 나라와 그 백성들은 결코 다시 멸망하지 않으며 영속될 것입니다(렘33:14-18).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영속성과 불변성을 자연법칙을 담보로 보증하십니다(25-26절). 이는 온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은 필연적이고 영원할 것에 대한 확약입니다. 이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로 일컫는 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통해 마침내 실현될 것입니다(엡2:14-15).

에스겔의 새 언약 사상

둘째, 에스겔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겔36:26-38, 37:24-28, 11:19-20). 에스겔서에서는 언약의 개념이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을 기술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들에서 언약(베리트)이라는 용어가 자주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의 전체 예언은 새 언약적 관점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아직은 미래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예언의 중심내용으로 삼아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보다 발전, 확대시켜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두 선지자의 목적하는 바는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통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최종 완성에 모아집니다.

겔36:16절 이하에서 에스겔은 회복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설정된 미래적 이상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실하게 된 요인들이 시내산 언약을 배경으로 회고됩니다(16-20절).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멸망과 가나안 땅의 상실은 철저히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특별히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춰 설명됩니다. 여기서 우상숭배란 실제로 가나안 족속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을 뿐 아니라(호8:4-7, 12:11, 13:1-2),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이 결핍돼 사사로운 종교적 감정만을 부추겨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이기적인 목적 차원에서 자의적으로 섬긴 사실을 포함하기도 합니다(사1:11-14).

겔36:21-23절에 소개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동기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상당히 예레미야적입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회복 및 갱신은 이스라엘이 철저히 회개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인 것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열방 중에 회복시키기 위해 스스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결심하셨다는 지적입니다. W.J.Dumbrell은 그의 저서 Covenant and Creation(언약과 창조, 크리스챤 서적, 1999년)에서, 21-23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행동하시는 근거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신적 언약을 기필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의 문제 때문입니다(21절). 신실성은 하나님의 불변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동시적으로 당신의 실추된 신실하심을 열방 중에서 영화롭게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랑이라기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회복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22절). 셋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열국으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보게 하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열방에서도 인정함을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란 사실입니다(23절).

겔36:24-25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구체화될 수 있는 ‘외적’ 세부내용들이 열거됩니다. 곧 열국에서 먼저 취해 내십니다. 그리고 고토로 데리고 가십니다. 정결 의식을 통해 더러운 행동과 우상숭배로부터 이들을 깨끗케 합니다. 이로 인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들이 공식적으로 분리돼야 합니다. 이는 본질에서 옛사람적 삶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말씀 속에 담긴 계시의 본의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회복의 전제조건입니다. 옛 것과의 단절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새 것을 적극 추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능케 하기 위해 26절 이후부터 본격적인 새 언약의 내용으로서 회복의 ‘내적’ 요소들이 제시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신을 내주케 하십니다(27절). 이로 인해 새 영과 새 마음, 곧 거듭난 새 성품을 소유하게 됩니다. 27절에서는 26절의 새 영을 주신 목적이 설명됩니다. 곧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능케 하시기 때문입니다(롬8:3-4). 옛 언약 하에서는 이 부분이 결핍돼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옛 언약을 가리켜 ‘낡아지게 하신 것’(히8:13)과 ‘개혁할 때까지 육체의 예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케 하기 위함’(히9:10)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 실체를 위한 모형적 역할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에스겔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새로운 순종의 관계를 설정하신 이가 하나님 자신임을 언급하면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확대하고 보다 구체화시켜 설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언약은 신적 기원(起源)상 동일한 목표를 지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 말입니다.

35절에서는 회복된 가나안 고토가 마치 에덴동산을 방불케 하는 새로운 환경으로 회복될 것을 지적합니다. 이런 사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향하는 바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목적 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새 언약의 성격은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구속사 진행의 원리에 입각해 아담의 창조언약, 여자의 후손언약,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다윗 언약의 갱신 및 발전적 확장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8절에서 새 언약의 성취로 나타나는 결과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선언적 말씀 속에서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이 확인됩니다. 이 말씀은 언약의 핵심적 사상이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사실과 임마누엘의 궁극적 완성인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29-38절에 기술된 ‘환경’의 회복기사 내용에 앞서서 26-28절에 소개된 하나님의 신(성령)의 내주로 말미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듭남과 영적 회복 및 이로 인한 순종력의 발휘기사를 소개함은 ‘환경’의 회복에 앞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본질적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인간의 타락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당초 에덴의 천상적 환경은 아담과 하와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 나라로서의 본래적 성격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 될 때 다시 회복될 것을 보장받습니다(창3:15, 롬8:19-21). 지금 에스겔의 새 언약의 일차적 강조점이 새 신의 내주와 후원의 역사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들의 영적 회복에 일차적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신’의 내주와 역사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새 영과 새 마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에스겔의 새 언약(겔36:26-28)의 내용은 에스겔서 37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특별히 겔37:26에서 언급되고 있는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속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됩니다. 이 화평의 언약 또한 내용적으로 아담의 창조언약,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갱신과 확대를 지향합니다. 이런 사실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렘31:31-34)의 내용이 그랬듯이 동일하게 신적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견지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될 새 신(겔36:27)으로서 성령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에스겔은 이를 소위 ‘마른 뼈의 소생’ 사건을 통해 설명합니다(겔37:1-14). 이는 ‘마른 뼈’를 통해 이스라엘의 소망 없는 영적 상태를 묵시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철저히 죽어버린 이스라엘의 현재적 영적 상태를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절대 타자로서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력으로 소생 불가능한 절망의 상태를 극명히 기술함에 다름 아닙니다. 마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불어넣어질 때 단지 사람의 모양으로 빚어진 진흙 덩어리가 생령(生靈)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창2:7).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돼 있을 뿐입니다.

마른 뼈에 비유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은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됩니다. 먼저는 사람의 ‘외적 형태’를 갖춥니다. 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수많은 뼈 조각들이 상합하고 연락해 서로 맞춰집니다.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마지막으로 가죽이 덮입니다(겔37:7-8). 완연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습니다. 아직은 죽어있는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다음으로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즉시 죽은 상태에서 소생합니다. 에스겔은 살아난 사람들을 군대라 칭합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해명해 주십니다(10-11절). 남북이 연합된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 말입니다. 이어서 보여주신 두 막대기의 상징적 비유(15-17절)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증해 주십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고토(가나안)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부연해 약속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체화시켜 천명하십니다(12-14절).

다음으로 겔37:15-28까지의 내용을 통해서는 ‘두 막대기’(15-16절)의 묵시적 비유를 통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정치적으로 통합돼 한 나라를 이룰 것(17절)과, 이들을 가나안 고토로 인도해서 한 왕에 의해 영속적으로 다스림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보다 진전된 언약적 계시의 내용입니다. 이 약속을 소위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일명 ‘영원한 언약’(26절, 렘32:40)이라 부릅니다.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겔37:15-28)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을 다스릴 한 임금이란 다름 아닌 참 다윗 왕을 가리킵니다. 곧 복권된 다윗 왕이 신(新) 다윗 왕조인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이는 다윗 언약의 회복과 다윗 왕조의 영속적인 보전(保全)을 가리킵니다. 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영원히 거합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는 궁극적 구원의 안식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궁극적 안식이란 또 다른 의미에서 회복된 에덴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주된 강조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근간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역사와 이로 인한 순종력의 발휘 및 다윗 왕조의 영속성에 계시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다름 아닌 재창조로서 에덴의 회복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2:1-3, 2:17, 3:6, 3:15). 이런 식으로 가나안과 에덴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동질성을 함의(含意)하는 가운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인 천상의 도성을 동일하게 지향합니다.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고 성소를 저들 가운데 둠으로써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본질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임마누엘의 궁극적 성취를 의미합니다(계21:3). 그리고 이 사건은 성소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됩니다(요2:19-21, 고전3:16, 6:19, 12:13). 따라서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은 예레미아의 ‘새 언약’(렘31:31-34)과 더불어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통해 온전한 성취가 보장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평의 언약과 새 언약은 동일한 목적의 다른 표현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최종 목표로 삼아 진행됩니다.

이사야의 새 언약 사상

셋째, 이사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사40-66장). 이사야는 예레미야(BC628-586)와 에스겔(BC595-572)이 포로시대 선지자로 활약한 것에 비해, 포로기전 선지자로서 유다의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740-680년경)에 걸쳐 예언 활동을 한 문서 선지자입니다. 남 왕국 유다 역사에서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 군사적 격변기로 평가됩니다. 즉 웃시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 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와 번영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야기시키며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스라엘 전(全)역사의 진행구도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에 이어 가나안 실지 정복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사사기서에서 구속사 진행상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런 순환적 패턴(구원-타락- 심판-회개)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유다의 언약파기와 배역의 죄악상과 관련해 원색적인 독설과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선지적 사역을 시작합니다(사1:24, 28-31). 그러나 본 장(사1장)에서 말하는 심판은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화(淨化)적 차원에서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그러기에 심판의 예언 중에도 구원과 회복의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수반됩니다(25-27절).

이사야는 1장에서 먼저 과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회상과 현재 유다의 패역에 대한 책망을 기록합니다(2-9절). 유다는 그 죄악상의 격심함과 이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이런 비교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며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들 중 소수의 남은 자들을 보존해 주신다고 약속하심으로 아주 멸하시지는 않습니다(9절). 언약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환입니다.

앞에서(2-9절) 유다의 총체적 타락과 부패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발하며 책망하던 이사야는 본 절(10-17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의 죄악상을 지적합니다. 특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역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유다의 범죄가 제의(祭儀)적 영역에서부터 비롯됐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이는 당시 유다의 국가적 정체성이 내외적으로 심각히 도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근거해 여전히 신정왕국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제사의식은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제의에 드려지는 제물로 인해 이스라엘의 죄악은 한시적으로나마 대속적 사죄를 받게 되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는 회복됩니다. 당시 이런 방식의 이스라엘의 제사의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취될 구속사역의 예표적 성격을 내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과 진정이 결여된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제사만을 습관적으로만 반복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가식적인 제사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상응하는 보상심리를 발동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제사의 본질을 망각한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사건(BC722)과 남 왕국 유다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는 유다인들에는 경악할 일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관점과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해 때때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적잖은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어용(御用)선지자들에 의한 왕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적극 거절하셨을 뿐 아니라 혐오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심으로 이들의 형식적인 예배행위를 신랄히 정죄하십니다.

이와 같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부패와 타락상을 고발하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는 회개를 촉구합니다(18절). 참으로 언약백성의 특권이란 그들의 죄가 아무리 중(重)할지라도 충심(衷心)으로 드려지는 회개를 통해 온전히 용서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는 기억됨이 없도록 영원히 도말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히10:14-18).

이제 이사야는 사39장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역의 초기부터 유다의 범죄와 타락상을 책망하며 줄곧 심판을 경고해 오던 이사야는 마침내 유다의 멸망이 당시 대제국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바벨론에 의해 집행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사39장에서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침공과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는 사40-66장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새 언약’의 내용을 예언합니다. 이런 이사야의 새 언약 속에는 비단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까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먼저 사40:1-2에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예루살렘에게 위로의 메시지,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할 것을 명하십니다. 이는 다름 아닌 곧 다가 올 유다와 예루살렘의 미래적 회복에 대한 약속을 가리킵니다. 곧 이사야 선지자의 ‘새 언약’ 말입니다. 이사야의 ‘새 언약’의 내용인즉 “예루살렘의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2절).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내용을 빌리자면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간 70년의 때가 거의 찼다는 것입니다(렘25:11, 29:10). 이제 가나안 고토로의 포로귀환과 이로 인한 회복의 때가 다가온다는 얘기입니다(사14:1, 겔37:21). 이는 제 2의 출애굽 사건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으로부터의 제 2의 출애굽 사건을 애굽으로부터의 제 1의 출애굽 사건의 실체로 암시하면서 포로귀환의 구속사적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동일한 계시적 관점에서 취급합니다(렘23:5-8).

이런 사실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갖는 새 언약의 계시적 의미가 결국은 참 다윗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교회공동체와 불가분의 계시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적으로 갖게 됨을 가리킵니다. 이때 두 공동체간 계시의 연속성이란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점진성의 원리와 관련해 두 집단 간에 존재하는 모형과 실체라는 관계성을 갖기 때문이며, 계시의 불연속성이란 구약교회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로 구성돼 있는 반면에 신약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갈3:7, 29, 롬9:6-8).

따라서 이사야의 새 언약은 단순한 역사적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만이 아닙니다. 사43:19에서는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생활과는 비교가 안 되는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구속사를 집행하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회복 속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구속사의 경륜을 실행하시겠다는 강력한 시사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십니다(사44:3). 다음으로 허물과 죄를 기억치 않으십니다(사43:25). 이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사40:2, 44:22).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은 예표적이고 제한적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새 언약 안에서 보다 진전되고 확대된 구속사의 경륜이 집행될 것입니다(사48:6-7). 이 뿐만이 아닙니다. 파괴된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사44:28) 및 시온의 회복을 약속합니다(사46:13). 이는 다름 아닌 다윗 언약의 회복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성전 및 시온의 회복은 다윗 왕조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으로 곧 다윗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명시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고레스 왕(메데-파샤)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계기로 이루어질 것입니다(사45:1-7). 당시의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판도 속에서 대제국 바벨론의 멸망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는 막강한 세력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당신의 기름 부은 종으로 삼아 새 일을 시작하시겠다고 천명하십니다. 여기서 고레스란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명해 부르심은 그만큼 새 언약의 집행이 확실하며 사실적임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역사의 주관자가 천지상간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사실을 극명하게 현시하시는 대목입니다(5-7절). 이 예언적 약속의 말씀은 에스라1:1-4을 통해 성취됩니다.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진전됩니다.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통치적 왕권을 가져올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합니다(사52:7). 그는 처녀에게서 잉태될 것입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일컫습니다(사7:14). 그의 본체와 속성은 하나님과 동일시 여김을 받습니다(사9:6). 그는 다윗 왕조를 회복하시며 친히 참 다윗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지는 진정한 메시아 왕국이 될 것입니다(사9:7, 32:1, 55:3). 더하여 다윗 왕으로 오실 구원자는 이새의 계보를 통해 오십니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사11:1-2). 이런 사실은 야곱이 임종에 즈음해 열 두 아들들을 불러 놓고 예언적 축복을 하는 과정에서 유다에게 선언한 복의 내용 속에서 이미 확인됩니다(창49:10). 이런 식으로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메시아의 가문으로 택정을 입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 성취될 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왕적 통치하에서 모든 피조물은 죄의 권세에서 풀려납니다. 허무한 데 더 이상 굴복치 않습니다(롬8:19-23). 본래의 창조적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마치 회복된 에덴처럼 말입니다. 결국 평화와 공존의 새 질서와 새 창조의 시대가 도래하는 셈입니다(사11:6-9). 그러나 이런 새 시대는 사실상 구속사의 절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근거해 본격적으로 출현한 교회시대를 거쳐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때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이런 식의 종말론적 메시아 왕국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고 선언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 그 진정한 실상(實像)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 하에서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의 성격도 당시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보다 미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한 초림의 사역 및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재림의 사역까지를 포괄적으로 망라해서 전망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지상적 생애가 이렇게 오묘하신 하나님의 전(全)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호리만큼의 차착(差錯)도 없이 시종일관하게 섭리적으로 통치와 인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일은 가장 큰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구원자의 도래는 왕적 메시아의 신분(사52:13, 15)으로 확인되기 이전에 ‘고난의 종’의 신분으로 제시되고 있음이 이사야의 새 언약이 간직한 구속사적 특징입니다(사52:14, 53:1-12). 동일한 메시아에 대한 이중적 예언 말입니다(사52:13, 15절과 14절의 비교).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메시아 도래의 예언이 먼 미래적 사건으로 남아 있었기에 마치 겹쳐진 두 산 봉우리를 멀리서 보면서 하나의 산인 양 착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각축장(角逐場)을 방불케 하는 가나안 지역의 지정학적 특성상,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은 자연히 정치적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의 인격과 사역을 살펴봅니다.

구원자로서 종의 승귀(exaltation)와 함께 고난 받는 종의 처참한 비하(卑下, humiliation)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먼저 예고합니다(사52:13-15). 사53장에서는 종의 모습을 보다 세밀하게 언급합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흠모할만한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끝내 싫어 버림을 받게 됩니다(1-3절). 그 종은 본격적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는 찔림을 받습니다. 그는 심하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는 징계를 받습니다. 그는 채찍에 맞습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8-9절).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오직 우리를 죄와 허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대속적 고난입니다.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주기 위해 애매히 당한 고난입니다. 헌신적인 희생의 고난입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 분에게 대속적으로 짐지게 하심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신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사53:4-6). 성도의 구원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의 부활과 하늘 보좌로의 승귀가 보장된 대속적 죽음이었기에 말입니다(히12:2, 롬8:34). 결국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종을 위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것이며, 만인의 무릎을 그 분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 분을 주라 시인하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입니다(사53:10-12, 52:13, 15, 빌2:9-11).

나아가 사61:1-3의 예언을 통해 이사야는 메시아 사역의 구속사적 성격을 이스라엘의 희년 절기(레25:10-11)의 종말론적 성취로 설명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의 성격이 사61:1-3을 구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우회적으로 시사하심으로 구약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고난의 종 된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그러나 암시적으로 증거하십니다(눅4:16-19).

이상의 내용을 통해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담긴 새 언약의 내용들을 특별히 세 선지자들의 예언을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이들이 예언하고 있는 새 언약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다윗왕조의 복권이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귀환 사건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다윗왕조의 복권은 미래에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고난의 종 메시아를 통해 실현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사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출현한 새 이스라엘로서 곧 교회공동체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은 자연히 아브라함언약, 시내산언약, 다윗언약을 총체적으로 포괄(包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절정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을 통해 성취의 실상을 드러내게 됩니다(눅22:19-20), 히브리서 기자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성취의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 진술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히10:12-18).

⑪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과 하나님 나라 사상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
첫째,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기술합니다(마1:1). 이는 이제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에 의해 줄기차게 약속돼 나온 참 자손(창22:18, 행3:25-26, 갈3:16, 삼하7:11-16)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혈통적으로나 법적 자격에 있어서 명실공히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히 지적합니다. 사실상 다윗 왕조가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몰락된 이후 거의 6세기가 흐르는 동안 다윗의 왕통(王統)은 표면상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던 다윗의 왕권을 이을 적법한 메시아가 되심을 밝히는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논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사실상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 예언 된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눅24:27, 44절).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의 왕적 혈통을 객관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족보의 기술을 통해 그 분의 법적 자격과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족보에 의한 예수님의 탄생기록은 구약의 예표적이며 모형적인 계시시대를 마감하고 구속의 실체로서 구원의 새로운 계시시대를 여는 신기원(新紀元)적 의미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술합니다(마1:2). 이는 유대인의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왕적 정통성과 법적 합법성 및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술방식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가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눅3:23-38). 이는 누가복음의 저작 동기와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눅1:1-4). 그래서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全)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나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명백히 증거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족보의 기술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전(全) 족보의 내용을 크게 삼등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마1:2-6), 다윗에게서 여고냐(여호야긴)와 그의 형제들의 출생까지(7-11절), 그리고 여고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까지(12-16절)입니다. 이런 삼등분은 단순히 연대기적 편의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구속사적인 계시성이 깊이 개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삼등분 한 족보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집약해 구분하면서 각각에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합니다. 곧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移住)까지, 그리고 바벨론 이주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그것입니다(17절). 마태의 이런 구분과 표현방식은 다분히 다윗 왕조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분류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신정왕국으로 이해한 데서 나와진 하나님 나라의 흥왕기, 쇠퇴기 및 회복기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속자의 출현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본격적으로 구속사를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키시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라고 기술합니다. 바야흐로 구속사의 핵심사상인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절정을 보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세기 동안 세상역사 속에 깊이 침잠했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치 새 봄의 마른 가지에 새 싹이 움트듯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매 새 언약의 남은 성취를 위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자기 백성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성격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고 선포하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중보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 어린 속죄양(scape goat)으로 오신 분입니다(요1:29). 이사야는 메시아를 참 다윗 왕에 앞서 고난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과 사역을 내다봅니다(사52:13-15, 53장). 하나님께서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대속적으로 담당시키십니다(사53:5-6). 그 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죄를 대속하시는 중보사역(마9:12-13, 막2:17, 10:45)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보증하고 있는 죄책의 사면(렘31:34) 및 죄의 도말(사44:22)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 약속된 회복된 이스라엘의 사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것임을 전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성취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선취적으로 보증됩니다. 새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종말론적 완성인 사실이 이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죄의 권세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이 막힘없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 곳입니다(렘31:34).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이 차별 없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임마누엘의 성취자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단지 중보적 사역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명하면서 ‘임마누엘’의 성취로 선포합니다(마1:22-23).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적 구속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구약 성막계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임재, 통치, 연합, 교통과 동행의 예표적 계시(출25:8)가 성막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성막의 구속사적 계시와 동일시하므로 예수님을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을 명백히 증거합니다(요1:14, 2:19-21). 오늘날 예수님은 성령님의 내주, 교통, 인도하시는 역사(고전3:16, 6:19, 갈2:20)를 통해 여전히 우리의 왕으로, 우리와 연합돼, 우리의 전 인격과 생애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십니다(욥23:10).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신학은 성령님의 신비하신 사역으로 인해 성도를 예수님의 생명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도 간에도 지체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합되게 함으로 우주적 보편의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임마누엘 사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요1:14)는 사실과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마누엘 신학은 언약사상의 본질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도 동일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 핵심사상은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마침내 현실화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지적입니다(계21:3, 7절).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사상은 곧 신정왕국사상과 신학적 상응(相應)성을 띠게 됩니다. 이런 상호 밀접한 신학적 관계성은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임마누엘의 실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음을 명백히 시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 실례를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넷째, 새 이스라엘(교회)의 대표자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동방 박사들에 의해 경배를 받습니다(마2:1-2, 11절).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왕이신 사실을 암시적으로 증거합니다. 곧 인류의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증거입니다.

헤롯의 살해음모를 천사로부터 고지(告知)받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대동해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마태는 호세아의 예언(호11:1)을 구속사적 계시안목으로 재해석하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을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에 적용시킵니다. 다시 말해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가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 속에서 신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 속에는 마태가 아기 예수님의 불가피한 애굽으로의 여행사건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출애굽사건의 연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신 사건은 얼마 후 헤롯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내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내셔서 나사렛에서 그 분의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시는 것을 통해 출애굽사건의 재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음이 더욱 확증됩니다(마2:19-20). 이처럼 구속사 진행의 정점인 예수님의 개인적 생애는 신구약 시대를 총망라한 하나님의 백성들(교회 공동체)의 생애와 영적으로 연합돼 동일시됩니다. 교회의 통일성, 연합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듯이,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원형(prototype) 내지는 실체(antitype)로서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자격을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40일 광야금식사건과 마귀로부터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과 첫째 아담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보이심으로 자신을 모세의 실체인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그리고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오신 새 인류의 머리이신 사실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시도는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정당화시키며 공생애 사역의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선험(先驗)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준비

헤롯의 죽음과 더불어 아기 예수께서 출애굽하셔서 가나안으로 돌아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위에서 살펴봤습니다. 향후 그 분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될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를 대표하심으로 역사적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오신 아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담당하시기까지 북쪽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지방에서 생활하셨습니다(마2:23).

한편 마태는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 등장시킴으로 왕이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선구자로 그를 소개합니다(마3:1). 4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각기 다른 방향과 각도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구속사적 의미를 기술합니다만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소개하는 데는 하나같이 일치를 보입니다. (막1:1-8, 눅3:1-17, 요1:15-34). 이런 사실은 그의 출현으로 인한 사역의 성격과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으로 이스라엘 앞에와 전 인류를 향해 유일한 메시아와 구세주로 증거하는 선구자로서의 구속사적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세례요한의 출현입니다. 마태는 3장을 시작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세례요한의 출현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마태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된 사40:3의 말씀의 구체적 성취로 연결시킴으로 그의 출현과 사역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3:3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은 원래 이사야40:3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킨 말씀으로 유다 민족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뿐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 절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및 느혜미야가 이끈 포로귀환으로 인해 부분적이고 일차적으로만 성취됐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안식은 당시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역사 속에서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인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적인 모습으로 성취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실체화된다는 이중 구조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본문의 이사야의 예언도 이런 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로서 하나님 나라인 메시아 왕국의 선포와 도래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포로귀환의 차원을 넘어 본질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구원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해 세례 요한의 출현을 소개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종말론적으로 세례 요한에게서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마3:1절에서 언급된 ‘그 때’란 말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어린 시절 헤롯의 살해음모로 애굽으로 잠시 피했다가 북쪽 갈릴리 인근 지역인 나사렛으로 귀환해 줄곧 그곳에서 성장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에 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마2:23). 따라서 마태가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의 시기를 ‘그 때’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름 아닌 충분히 장성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한 시기로서 세례요한과 더불어 30세쯤 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탄생보다 6개월 정도 앞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눅3:23, 1:24-26).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마2장과 3장 사이는 거의 30여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때가 차매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을 이제 세례 요한을 출현시킴으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는 배경이 이렇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침례) 받으심입니다. 마3:13-17은 ‘이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이 단락과 바로 앞의 단락, 곧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이 불가불 연결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의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온 유다 지역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크나큰 도덕적 각성이 일어나 죄에 대한 자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때에 13-17절의 사건이 일어났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지금까지 은거(隱居)해 계시던 참 다윗 왕께서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이제 주의 길이 예비되었고 그의 왕적 대로가 평탄케 된 것을 시사합니다.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준비가 끝난 때에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13절의 ‘이때에’라는 부사 시제 속에 담긴 상황적 분위기가 이렇습니다.

13-1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사건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증하는 것을 통해 그의 메시아 되심과 메시아적 사역을 공식적으로 윤허(允許)하는 사건이 소개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는 것은 그 자신이 이 물세례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분으로서,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에 의해 받게 되신 예수님의 수세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본체로서 죄인인 뭇 백성들이 받는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마3:15절 속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의 수세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이 말은 확실히 예수님께서 굳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의미에서 되어진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뭇 백성들과 같이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 곧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전(全)요구를 성취하는 셈이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세례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계획하신 것임을 명백히 확인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역과 상호 밀접히 연결을 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에 의한 예수님의 수세를 통해 요한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죄인들과 동일시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세사건이 이후 진행될 그분의 구속사역과 내용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은 곧 그의 백성들과 연합해서 저들의 죄를 대표적이고 대속적으로 담당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고후5:14).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자기 백성들의 죄 책(責)을 담당하시기 위해 자원해 회개에 이르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스스로를 죄인들과 동일시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 죄인 된 그의 백성들을 대표적으로 품으시고 저들의 죄를 속량하고자 대신 죽기 위해서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의 백성의 머리로서 세례 받으심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되셨고 나아가 그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속돼 새 생명을 얻을 것을 계시한 것입니다. 빌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후5:14입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21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세례 받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음은 우리의 머리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속하는 새로운 신분의 백성이 된다는 외적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의 터 위에서만 비로소 세례 받은 자로서의 거듭난 인격적 삶이 확인되며 보증됨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의식은 단순한 성례전적 형식 이상의 본질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이미 천국백성 된 사실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뚜렷한 천상적 정체성의 확증 말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수세의 의미를 율법의 완성이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서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의 의미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총체적 요구에 대한 성취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의’라는 표현 속에 율법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문구는 확실히 구약에 요구된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그 분의 메시아적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세례 받으심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로 인해 본격적인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로 작용합니다. 물론 성경 기록상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출발은 마4:1-11사이에서 소개된 마귀로부터의 시험받으신 사건 이후인 마4:17부터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먼저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이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실질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은밀한 중에 시행된 것이 아닌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공식적인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어 시행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의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최종적인 재가와 인준을 받는 것으로 메시아적 왕의 대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게 됩니다.

셋째, 하늘의 재가(裁可)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께 임한 사실을 4복음서 기자는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의 사실성과 메시아 사역의 본격적인 개시(開始)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 기록입니다. 특별히 요1:31-34에서는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로 예수님께 임한 사건이 갖는 의미를 명시적으로 기록하는 가운데, 성령세례의 수여자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갖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첫째로 세례요한의 사역을 확증시키기 위함입니다. 요한의 사역은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물세례의 실체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인 메시아의 도래가 임박해 왔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임하신 사건은 예수께서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메시아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33). 이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이 다시 한번 공인된 셈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무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인준의 표식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실상 예수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서 정당하게 지명을 받으셨지만, 단지 공식적인 인준을 확인하는 임명장을 받지 않음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메시아적 권한행사가 잠정적으로 유보된 것과 방불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실제적으로는 요한의 세례에 이어 즉각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임은 하늘의 재가를 거쳐서 실제적 권한행사로 들어갑니다. 특히 하늘로서 임한 말씀인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하신 내용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소명과 임무를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고 ‘개인적 차원’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을 인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그의 사역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결과적으로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아들을 향하신 아버지의 만족하심이 충분히 계시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일의 공증으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원래부터가 성령에 충만한 분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기에 일종의 거룩한 성례전적 예식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으신 것입니다. 아울러 성령의 임하심은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부여하신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가납(嘉納)하신 승인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적 측면에서 이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베푸셨던 각종 표적적 능력들과 복음적 사역을 자기 안에 계셨던 성령께 돌렸던 사실들을 생각할 때 확인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마12:28, 눅4:18, 행10:36-38). 셋째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처럼 중생케 하시는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의미 속에는 수세자가 가진 죄가 그와 같이 씻김을 받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이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역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행2:38).

넷째,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이어서 광야로 나가셔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십니다. 이 일에 앞서 예수님의 수세사건 때 예수님 위에 충만하게 임재 하셨던 성령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마4:1). 마가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1:12)‘고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동일한 성령님에 의해 주도된 의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마태를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통해,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능력을 힘 있게 발휘하심으로, 사단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도래시키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마12:28-29을 통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이렇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가 능력있게 발휘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왕성하게 펼쳐질 것을 염두에 두시고, 자칭 세상 임금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단의 세력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먼저 제압하셨던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에 앞 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한 배경이 이렇습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의도적으로 주도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마4:1, 막1:12-13, 눅4:1-2). 다시 말해 마귀의 세력을 먼저 제압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왕적 권세가 힘있게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직무와도 직결되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요일3:8).

마태는 이런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때’에 라는 부사 시제를 사용합니다(마4:1). 여기서 ‘그 때’란 내용의 정황으로 보아 바로 3:13-17에서 소개된 예수님의 수세사건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재가사건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 사건 직후에 지금 소개되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는 어떤 구속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일까요. 왜 굳이 이런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성격에 대해 알아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을 이해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1)하나는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이 당시 하나님 앞에 어떤 자격과 신분으로 서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고, (2)다음으로는 구약의 광야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이 받았던 40년간의 광야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실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선악과 사건을 통해 시험 가운데 두셨습니다. 이 시험은 보상과 형벌이 대가와 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일종의 율법적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창2:16-17). 본 선악과 금령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이 시험을 통하여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즉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단계로 올라감으로 궁극적으로 영생하는 삶을 누리게 하셔서 악과는 영원히 상관없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창1:28에서 복으로 언약하신 문화명령 속에 담긴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아담의 후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마침내 실현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에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허리에 속한 모든 인류 또한 아담과 더불어 실패에 동참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형벌로서 죽음이 큰 권세로 온 인류 위에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롬5:12).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과 관련해서, 둘째 아담의 신분과 자격으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구원자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죄에 대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롬5:14, 고전15:45, 막10:45).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구원자로서 둘째 아담의 자격을 능히 취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자격을 취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세상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따라서 무죄한 인성의 입장에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적법한 자격자로서의 시험을 성령의 인도 하에 자원해서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만일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들과도 같이 동일하게 죄가 있는 분이셨다면, 이는 구속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기에 결코 구세주로의 대속적 사역을 담당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시기에 아담의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으로서 구원자가 되시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 되십니다(행4:12, 히4:14-16, 벧전2:22, 고후5:21).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본 시험은 구약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교회의 자격(행7:38)을 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8:2의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본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사건(민13:1-2, 25-26)은 가나안을 진격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주어진 사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이삭을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자녀로 주시고는 다시 그를 번제로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신실성을 시험하셨던 경우와 동일한 방식으로 말입니다(창22:1-2).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일면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사 백 여년 이상 노예집단과 방불한 종살이로 일관해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잘 훈련되고 정비된 가나안 족속들의 삶의 모습은 자신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 정탐꾼은 모든 사실을 외적으로만 판단해서 부정적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사건을 구속사적 관점과 계시적 통찰력을 갖고 해석했습니다. 때문에 비록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일지라도, 지금까지 불가능한 상황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과 인도하심으로 극복하게 하셔서 이곳 가데스까지 선히 인도해 주셨기에, 앞으로도 가나안 정복을 위한 성전(聖戰)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적 손길로 친히 간섭해 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의지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승리에 대한 확신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확신은 열 정탐꾼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들과 비교해서 ‘메뚜기’ 같다는 표현으로 비하한 반면(민13:33),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아예 무시한 지적 속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민14:9). 이렇게 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신앙자세는 시종일관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생명의 도리와 신앙과 삶의 근간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데서 나와지는 전인격적 신앙고백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결국 이스라엘은 열 정탐꾼의 보고에 동의한 나머지 가나안 정복의 직전에서 회귀해 급기야 광야에서의 40년 유랑의 생활에 접어들게 됩니다(민14:34).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주어지는 언약적 심판의 일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2세대에 의해 40년이 마치는 날 다시 가나안 정복의 길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신1:3). 지금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광야’라고 하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 배경과 의미가 여기에 있으며, 동시에 ‘40’일이라고 하는 시험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구속사적 계시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보냈던 40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에 의지하여 마귀의 시험에 대처하셨던 것입니다(신8:3, 16, 13).

이렇게 예수님은 구원자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을 자신 안에 품으시고 저들을 대표해서 참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십니다. 구속 사역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것을 다시금 이와 같은 방식을 재현하심으로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 안에 회복시키려고 스스로 대표적으로 시험에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한편, 사단을 이기는 권세를 동일한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통해 신약의 성도들에게 공급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미 마태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라고 했던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아기 예수님의 출애굽사건에 적용시킴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예표적 출애굽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될 참 이스라엘인 성도들에게 실체로 성취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동일한 구속사적 원리 안에서 이제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타락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몸 된 교회에 연합하는 모든 성도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마귀로 말미암는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요일3:8) 친히 당신의 부활하신 생명을 그의 몸 된 교회공동체에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해명해 본다면, 실패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실패한 이스라엘을 거쳐서,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진정한 구원자로서 참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 된 ‘새 언약’의 본질적인 사상이 이런 사실에 모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세 번에 걸친 시험(마4:3-11)을 오직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메시아로서의 본격적인 사역을 위한 준비를 마치십니다. 실로 사단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거기에 자신을 드리는 방식으로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을 친히 전인적으로 보여주신 모범적 사건이었습니다. 동시에 보다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왕권이 능력 있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사단의 권세를 패배시킴으로 이후 공생애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종말론적 구속사역의 최종적 성취를 보증하고 담보하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새 언약과의 관계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에 이끌리어 40일간 광야에서의 금식과 사단으로부터 시험받으심은 이제 예수님으로 하여금 명실공히 메시아로서 구원사역에 요구되는 일체의 필요충분조건이 온전히 충족됐음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은 첫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전락된 인류를 이제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안에서 의인 삼으심으로 재창조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도모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향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죄사역은 옛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과정에서 새 언약에 담긴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입니다. 렘31:34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회복된 이스라엘(33절)이 한결 같이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지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죄의 은총과 죄의 영원한 도말입니다. 여기서 앎이란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관계의 회복과 이로 인한 관계의 정상화를 가리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깨져버린 에덴의 당초 교제와 화목이 새 언약 안에서 다시 회복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제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보증하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에서 공히 약속하고 있었던 언약의 영원성은 새 언약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를 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런 새 언약의 영원성과 보증의 확실성을 자연법칙의 불변성에 근거해서 재차 확약하십니다(렘31:35-37).

그런데 새 언약 안에서 이런 놀라운 축복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을 향해 오랜 세월 불화와 단절의 원인이었던 죄의 문제(사59:1-2)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이런 사실은 이제 율법이 이스라엘의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을 통해 온전한 순종이 보장되고, 이로 인해 33절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는” 언약의 중심사상, 곧 임마누엘 신학의 온전한 성취로 인해서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도래할 것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간에 연합된 일체감이 형성된다는 얘깁니다(계21:3, 엡2:14-16). 더 이상 구약 시대의 선지자나 제사장 등의 다른 중보자가 필요치 않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미 메시아로 말미암은 화목이 회복됐기에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 안에서는 문맥상 감추어진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 즉 성령의 공작하시는 신비한 구원 적용의 사역이 에스겔의 새 언약인 ‘화평의 언약’(겔37:26) 안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됩니다. 에스겔의 새 언약에서는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온전한 순종의 가능성과 확실성을 하나님의 신,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영과 새 마음의 변화 곧 전인적인 거듭남에서 찾습니다(겔36:26-27).

그러나 사실상 새 언약에 근거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상의 새 언약의 계시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새 언약의 효력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시기 위해 바벨론 포수(捕囚)로부터 3차에 걸쳐 포로귀환을 시도하셨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에 의한 성전재건도 시도됐습니다. 에스라에 의한 특단의 종교적 구조조정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토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새 언약에 약속된 여타의 언약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저들은 시내산 언약을 어기며 과거 다윗 왕조를 멸망케 했던 불법과 불의를 자행하는 일을 여전히 일삼았을 뿐입니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기록내용(학개, 스가랴, 말라기)이 이런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결국 이런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새 언약의 내용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새 언약 안에서 예표적 성취에 불과한 것이고, 이를 통해 보다 근원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다른 최종목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곧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회복 곧, 신약교회공동체의 출현 말입니다(마16:16-21).

그렇다면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공동체는 어떤 방식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누가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예식을 잡수시는 것으로 이를 폐하시고, 새롭게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가운데 이를 새 언약으로 명명하시는 내용을 기술합니다(눅22:14-20). 본문에서 유월절 예식은 분명히 성찬식으로 대체됩니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 예식의 예표적 본의가 성찬식의 실체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마침내 완성될 것을 시사합니다. 때문에 모형과 예표로서 유월절 예식은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켜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표가 실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죄(赦罪)와 구원을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받게 됩니다(엡2:8-9, 1:7, 롬3:22-24, 8:1-2).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일컬어 성경은 하나님의 친 백성,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자녀와 아들(양자), 그리고 후사 등으로 부릅니다. 이들을 집합적으로 부르게 될 경우 바로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는 한 새 사람 곧 천상공동체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 말입니다(엡2:14-15, 1:23, 4:12, 골1:18). 이런 식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출현은 성찬식에 암시 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천상적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마16:16-21)

상황이 이럴진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사역의 결과로 출현하게 된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입니다.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개념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죽어서 가는 천당 내지는 천국의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원천적으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서 이미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실제화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도래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밭에 감춰진 보화와도 같이 찾을 수도 있고, 아주 값진 진주와도 같이 살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마13:44-46).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천상적 통치권이 이 땅에 보편적으로 역사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적극적으로 이 왕권을 수납해 순종함으로 영생에 이르는가 하면, 누구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도래한 사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축사(逐邪)사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지(標識)입니다(마12:28, 눅11:20).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자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실 수 있음은 마귀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귀신의 총수격인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저를 먼저 결박해 놓으신 사실에 근거합니다(마4:11, 12:29, 요일3:8). 물론 그 외에 다른 초자연적 치유사역 또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아적 사역을 보증하는 명백한 증거(사35:5-6)로서 메시아의 왕권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특별히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마9:1-8, 막2:1-12)은 다른 치유사건과는 달리 그의 죄를 먼저 사해주시고, 후에 이를 확증케 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풍병을 치유해 주심으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한결 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그 분의 메시아성의 확증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권세 있게 그 천상적 권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 도래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증거해 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차원을 넘어 이미 도래한 바로 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그 분의 왕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린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왕의 통치권을 받아 순종하는 천상적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재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난 새 인격의 발휘로서 말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차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실천적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수혜자(受惠者)로 하여금 시혜자(施惠者)의 뜻에 따르려는 자율적 순종을 촉발시키기 마련입니다.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거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표현 속에 담긴 본의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약2:22, 1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이런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과 이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수납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거부되고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식의 거부와 배척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제약을 받습니다. 때론 부인되기도 합니다.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부 따르는 무리들에게만은 사정이 다릅니다. 예외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나라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권능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하고 예수님을 적극 좇습니다. 기꺼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권세 있게 실현되는 대상이고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능력있게 증거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실질로 기능합니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천국)는 작은 겨자씨에서 새 들이 깃들만큼의 큰 나무로 자랄 것이며, 세상을 그 나라의 천상적 능력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마13:31-33).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메시아 왕국을 현재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로 그 나라의 친 백성을 삼으시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에게 붙여진 교회의 정체성을 가시(可視)적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아닙니다.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이고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지상의 지역교회의 모습 속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공존하며, 갖가지 죄의 권세와 역사가 활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둘 사이에 여전히 불연속성의 긴장과 갈등 및 대립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국면만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가 비록 예표적이기는 했지만 가시화 됐던 역사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세상 역사의 끝에 비로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아직'(not yet) 오지 않은 것으로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란 지적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을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친히 집행하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합니다(마13:39-41, 49-50, 눅21;31). 모든 사람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의인은 복락의 세계로 들어가고 악인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 영벌의 지옥과 영생의 천국의 삶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마25:31-46).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측면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22:14-18입니다. 그 나라는 유월절의 본질이 온전히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땅에서의 유월절을 폐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유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앞에 놓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유월절 식사는 유월절 규례를 폐지하시는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예표적으로 계시돼 왔던 구속의 도리가 이제 유월절 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5:7)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자인 예표를 폐지하고 실체인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대체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제정경위가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만 그 분과 연합돼 죄용서와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폐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겠다’(18절)고 다짐하십니다. 16절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을 빌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다시 유월절 식사를 할 것이며, 아울러 포도주도 마실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될 줄 압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인해 유월절 규례는 폐지되고 새 언약이 발휘되겠지만 그것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는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불의와 불법과 착취와 압제가 공존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온전히 실현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라는 촉구의 말씀입니다. 사실 유월절에 근거해 성사된 출애굽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애굽의 압제와 노역과 종살이로부터의 구원과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와 해방 및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사실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라야 비로소 성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새롭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18절),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실성과 사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치유하시는 사건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축사의 능력이 하나님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했던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 사건과 연결시키십니다(눅11:20, 마12:28). 그렇습니다. 귀신을 축사(逐邪)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언급 하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장 확실하고 명백하게 증거하는 사례입니다. 이 외에도 죄를 사하시고(막2:1-12), 천국 복음이 전파되며, 기타 초자연적인 메시아적 치유(마11:5)의 능력을 행하심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확증과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천상적 권세를 발휘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시던 주님께서 이제 공생애 사역의 절정에 즈음해 다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눅22:18). 사건의 전말을 살펴 보건대, 지금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음으로 이미 현재적 도래가 확인된 하나님 나라(통치권)와는 다른 차원, 다른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국면인 미래성 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성격상 구원사역의 절정에도 불구하고 예비적이고 임시적이며 제한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세상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격을 띠고 도래함으로 최종적이고 완성적이며 최후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계시록에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기술합니다. 체질이 근본적으로 갱신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로 인해 본질이 왜곡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계21:4).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과 아울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눅17:22-25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인자(人子)의 날로 규정하십니다. 여기서 인자란 구약적 표현으로서(단7:13-14)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오시는 만왕의 왕 되신 영광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심판의 환상을 통해 인자를 세상 끝 날에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추수하는 심판주로 묘사합니다(계14:14-16, 마25:31-33). 따라서 인자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또는 메시아 통치의 시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의 날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인자의 날의 성격은 성도들에게는 구속의 주님을 영광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만나는 희락의 날이 되겠지만(마24:30-31, 고전1:8),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판단해 영벌에 처하게 하시는 두려운 심판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마25:41-46).

누가는 인자의 날의 도래를 설명하면서 ‘번개의 비침’을 비유로 듭니다(눅17:24). 이는 비단 누가뿐만이 아닙니다. 마태의 소위 종말론장이라 일컫는 마24장에서도 인자의 임함을 설명하면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절)고 번개의 비침을 예로 듭니다. 여기서 번개의 비침을 통해 인자의 오심을 설명함은 예수님의 재림의 성격을 범우주적 가시성, 즉각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의 경우와는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더 이상 은밀한 중에 오시지 않습니다. 제한된 사람에게만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전 우주적으로 오십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계1:7). 만왕의 왕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그리고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마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우편 양과 좌편 염소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우편 양들에게는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좌편 염소들은 지옥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마25:32-33, 41).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계21:1).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나라의 미래적 국면을 동시에 증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교회시대는 ’이미‘ 실현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래서 지금 오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 중첩되는 과도기적인 기간 속에 위치해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 분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일면 선취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영적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6:12).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어떤 관계성을 맺고 있을까요.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그 나라의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그 왕적 권능과 권세를 능력 있게 발휘하시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가장 현저하고 명백하게 확인 된 내용들입니다.

한편 교회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신앙하는 신앙공동체로서(롬10:9), 성령의 신비한 공작과 연합사역으로 인해 예수님을 머리로 각인의 성도들이 지체로 더해진 신앙적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고전12:13, 엡1:23, 5:30, 골1:24). 그래서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의 통제 하에 다양성을 통해 통일된 행동을 나타내 보이듯이 교회공동체 또한 같은 원리 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 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신앙적 집합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동일한 왕과 동일한 백성의 관계 속에서 왕의 통치권이 가장 권세 있게 행사(行使)되는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양자 간 상당한 동질성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고백한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 또는 ‘메시아의 자기은닉 사상’(마16:16, 20)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선포하십니다(18절). 이어서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교회에게 맡기심으로 천국을 매고 푸는 복음진리의 권한행사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 맡기십니다(19절).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논리적인 사고체계 안에서 교회와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은 교회와 천국의 두 개념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천국열쇠의 효력은 교회설립에 대한 공표로부터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될 것임을 간파하게 됩니다(18-19절). 다시 말해 바야흐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드러난 ‘메시아의 비밀’로 인해 그때부터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파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그 나라의 이르는 열쇠를 소유하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에 대한 증거자로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대한 중계자(agent)로서의 역할을 이어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으로 이끄는 문을 열거나 닫는 지식의 열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눅11:52).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복음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제자로 더해진 사실(행2:41)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롬1:16). 그리고 이렇게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불러 낸 구원받은 무리들의 집합체를 일컬어 한 새로운 사람들의 집합으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엡2:14-15, 행5:11). 이들이 다름 아닌 천국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상호관계와 원리 안에서 교회와 천국(하나님 나라)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만은 없는 불연속성 내지는 이질성 또한 발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인 용어일 뿐 아니라 교회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엡2:22)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대변하거나 현시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양자는 비록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할지라도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곧 교회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더 깊은 숙고가 필요할 줄 압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과 능력을 힙 입어 신생(新生)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그것의 궁극적인 종착지로 삼고 현재 진행형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구속사 진행 선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approximation)로서 존재하며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 나라의 ‘지방자치기관’(communal)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 - 그것이 비록 부족과 결핍과 불완전함이 여전하다 할지라도 - 속에서 가장 확실하고 현저하게 그 천상적 통치와 권세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혹자는 교회를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곧 믿음 안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구성된 교회의 만수(滿數)가 찰 때에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귀속될 것입니다(롬11:25-26). 그 때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나라가 교회로 양자가 통일될 것입니다. 동일시 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고난과 긴장과 여러 가지 영적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은 바로 이런 미래적 소망이 우리 앞에 확실히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종말론적 공동체(an eschatological community)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 까닭은 교회가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천상적 나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기자들 또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신약의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을 또 다른 관점에서 ‘하늘의 시민권자’(빌3:20)와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골1:13)들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의존적인 관계상 지상의 교회는 부단히 천상의 우주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귀속될 것입니다.

3.마치면서

이제 본 강론을 맺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로서 자체 속에 다양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주제들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이는 성경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증하는 통전(通全)적 주제이기도합니다. 특별히 창세기로부터 시작해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66권의 편집구도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사상이 이런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 사상을 주제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총체적인 시각으로 바르게 해석하려고 할 때, 언약적 구속사란 관점은 성경의 본의를 밝히는 최선의 해석의 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성경이 자증하는 해석적 관점이며 구조적인 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해석상의 객관적 증거를 특별히 창1-3장에서 발견되는 창조언약(문화명령)-선악과 언약(아담언약)-여자의 후손언약(원시복음) 속에서 발견되는 신적 언약간의 상호 불가피한 의존적인 관계성과 연계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원리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찾으시는 가운데 저들로 하여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상의 성도들의 삶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마6:33)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구속의 원리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결정적인 동인(動因)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신적 언약의 총화요 제반 언약의 결국인 새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가 바른신앙/바른교회/바른목회를 지향하는 일과 관련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정당한 해석을 통해 성경의 본의에 바르게 접촉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이란 주제 안에서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총제적인 계시의 안목으로 접근하는 데서 비로소 그 가능성과 실현성이 일차적으로 보장된다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본 강론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What the Bible Says)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밝히 해명하는 것을 통해 성경적 바른 신앙관/바른 교회관/바른 목회관의 재정립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4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10:2-3).

출처: 주님의 뜰 - 행원소구/김유미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요한계시록의 열쇠인 복음 (그레엄 골즈 워디)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1-6,9)

 

 

                                                어린 양과 사자

 

묵시는 종교적인 글들을 기록하는 일종의 문체로서 기원전 약 2세기경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성행했습니다. 이 묵시의 특성 중 하나는 환상을 본 자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그런 계시를 받았는지를 서술하며(묵시는 '계시'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또한 두루마리에 써서 계시할 때가 이르기까지 봉해 놓도록 명령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루마리의 공표는 때가 이미 이르렀고 그 비밀이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5장에서 바로 이러한 특성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하나님의 메시지, 즉 그분의 나라에 관한 진리가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펼칠 합당한 자가 없고, 그렇게 되면 두루마리가 봉해진 채로 있게 될 것 같아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 옵니다. 어떤 분이 이기었는데, 그분이 그 두루마리를 펼칠 수 있는 분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다 지파의 사자(the Lion)이시며 다윗 왕가에서 나온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묘사를 듣자 요한은 엄청난 위엄과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압도되고 맙니다. 여기서 그분은 자신의 칼에 적의 피를 묻힌 채로 싸움터에서 갓 돌아온 전사(戰士)이신 왕(the warror-king)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정복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께 대적하려던 모든 자들은 공포에 질리게 되었고, 결국 패하여 도망쳤습니다. 이처럼 승리를 이루어낸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인하여 그 사자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모든 사람에게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고개를 돌려 그 사자를 보았을 때 그는 그런 영광스럽고 위엄 있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히려 '마치 죽임을 당한 것 같이' 서 있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 묵시의 전형적인 이 수수게끼 같은 표현조차도 동물의 왕인 사자로 묘사된 주님의 이미지(image)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효과를 증대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우리 손이 미치는 곳에 놓아둔 승리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묵시의 이미지를 능숙하게 사용해서 복음의 핵심적인 파라독스(paradox)를 예증합니다. 즉 하나님의 승리는 그분의 아들의 낮아지심과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승리하기 위하여 사자는 어린 양의 온유함을 취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이제 그 두루마리는 펼쳐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소리가 찬양으로 들려옵니다.

 

당신은 그 두루마리를 취하여 그 인봉들을 떼기에 합당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일찍 죽임을 당하사...(때문입니다)

 

그 어린 양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의 계시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제목이 붙은 것(계1:1)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진리의 열쇠가 곧 이 땅에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묵시적 어법으로 엮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드러내 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을 죽임 당한 어린 양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는 이런 어법으로 요한계시록의 중심 사상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풀어내려면 오로지 이 땅에서 구원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참된 말씀이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도 역시 복음에 대한 해설입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이 복음의 어떤 함축적인 의미들을 강조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복음에 관한 책이라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윌콕(Michale Wilcock)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말씀과 증언, 즉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메시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 않아 영감된 그 밖의 성경책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모임에서 큰 소리로 읽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그가 이미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간추린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리의 패턴(pattern)을 되풀이 하시는 것은 그 때가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엄청남 권능과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을 보이시며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우선 복음 중심 사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실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2천여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오셔서 그분 자신과 그분의 사역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복음 사건의 효과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효과들 그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의 효과들 또는 열매들과 복음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믿음, 성화는 복음의 열매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복음의 열매들인] 믿음이나 거듭남 또는 성령을 주심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나의 대속자로서 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조차도 복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의 한 열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이 사실은 복음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못박아 말할 수 없다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복음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분 안에서 일어난 완전하고 완성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사역이 아닙니다. 이러한 복음, 이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이 후자의 사실을 가리켜 종종 의롭게 여김(칭의)이라고 말합니다. 의롭게 여김이란 어떤 사람에게 올바르다 또는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대로 옮겨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죄인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순전히 그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 계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죄인이란 믿음을 가진 죄인을 뜻하는데, 그(또는 그녀)는 이땅에 실제로 오셨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 서 계신 자신의 대리자로 의뢰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인물인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실제 대리자이셨다는 이유만으로 지금도 우리의 대리자로서 그곳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중심 사상을 말할 때, 그것은 곧 우리 구원의 모든 것이 복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회개시키시고 성화시키셔서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므로, 복음은 진정 하나님의 능력임을 뜻합니다. 또한 그것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 역사와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과 계속과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유일의 방편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뽑아 버려야만 할 잘못된 사고는 복음이란 단지 우리를 회개시키는 데 쓰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생각입니다. 한번은 제가 어떤 선교사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선교지에 파견된 한 목사님이 자기의 교인들에 대해 선교본부에 써 보낸 편지를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우리는 이제 복음을 압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더 확고한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복음을 그리스도인의 체험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보고 일단 우리가 그 관문에 들어선 후에는 우리를 계속 전진시킬 수 있는 어떤 확고한 실재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성화 또는 거룩하게 되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 등을 종종 회개한 후에 도달해야 할 새로운 단계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단계에 이르는 방법들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헌신" 또는 "스스로를 비움" 또는 "옛성품을 죽임"으로 그곳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극적인 체험을 분명히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서적들과 설교는 "더 깊은 삶으로 나아가는 단계들" 또는 "풍성하고도 승리하는 삶의 열쇠" 등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저는 그러한 경건에 관한 표현이나 용어들을 흠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문제 삼고 있는 점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 - 우리를 회개시킨 그 복음 - 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성화에 이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났음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 중심 사상

 

또한 우리의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 연관하여 복음 중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 중심 사상은, 신구약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의 궁극적 목표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알파와 오메가로서 그리스도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는 창조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창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히 파악하려면, 창조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1:1-2은 우리에게 육신이 되어 나사렛 예수로서 오신 그 말씀이 곧 창조자이셨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15-20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골1:20)가 곧 창조자이시며 창조의 목적이시며 목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죄가 창조계를 망치자 하나님께서 계획하여 내신 일종의 사후대책이 복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은 창조 이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만물을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게 하려는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의 언약들과 율법의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역사의 진행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언약 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본질을 밝혀 놓은 일종의 규약인 셈입니다. 그리고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 사역으로 수립된 이 언약관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는 이 언약을 주제로 삼았으며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언약의 성취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언약의 약속들의 성취로서 묘사됩니다(눅1:46-55, 68-79; 2:29-32을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마5:17)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covenant partner)로서 [그 언약이 요구하는] 삶을 완전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받으신 그분의 세례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인간으로서 취한 선택을 완전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이 점과 연관지어서 누가는 계보를 열거하는데(눅3:22-28), 이러한 계보의 열거를 통해서 누가는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참 인간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38절의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는 의미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예언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대해서 "내가 그것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마5: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선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메시아에 관한 어떤 예언들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포괄적인 것으로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죄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 말씀은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됩니다. 그리고 새 언약,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들, 사람들 안에 거하실 하나님의 새로운 처소에 관한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이처럼 이 모든 것들은 복음 사건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후에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설명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예언의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yes)가 된다"(고후1:20)는 바울의 확신을 살펴봅시다. 사실 바울은 이러한 확신을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에서 이미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노니 곧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킴으로써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들의 자녀인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셨다"(행13:32-33).

 

4.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산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다"(빌1:21)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빌립보서 2장에 묘사된 그리스도로서, 육신의 고통을 받으시고 영광된 처소로 올라가 하나님과 더불어 계신 그분입니다(빌2:6-11). 따라서 주님은 곧 복음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간의 참된 관계를 계시하시며 다시 세우심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구원 사역을 값없이 선물로 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죄인에게 그 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죄인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그러나 죄는 없이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써 소유하게 된 똑같은 상태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라는 바울의 표현 외에는 달리 더 잘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과 죽음의 결과로써,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 없는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참되신 언약의 파트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사랑받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외롭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심판받으신 죄인이시며 새 생명이시며 성령이 총만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즉 복음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 사실에서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동기와 원동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복음의 열매는 바로 글자 그대로 즉 복음에서 나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거듭남, 믿음, 성화, 끝까지 인내함, 이 모두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헌신"이나 "전적인 헌신"을 이루어 내려고 가하는 율법주의적인 요구들이나 감언이설 또는 위험들은 복음의 은혜에서 벗어날 경우 단지 낙담과 환멸, 배반만을 산출하는 몹쓸 잡초일 뿐입니다.

 

5. 그리스도는 재림의 의미입니다

복음 사건인 그리스도의 초림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의미를 이미 세워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요한계시록을 곡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해서 생기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관계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까닭은 새로운 또는 다른 사역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영광 가운데 다시 돌아오셔서 이미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사역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분은 자신의 모든 영광 가운데 오셔서 모든 권세와 권능을 가진 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가 지금은 맏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그 때에는 모든 이의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가 지금은 믿음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믿는 자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그 때에는 믿는 자 안에서 실재로서 완전해질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있는 신분이 그 때에는 우리들 자신 안에 갖춰져서 실재의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자기 사고의 구조로 삼고 있는 초림과 재림 간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고통받는 그리스도와 영광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 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어린 양(the Lamb)과 사자(the Lion)와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사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메시아/왕으로서 지닌 위엄의 상징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 양은 고난 받으신 나사렛 예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사자를 보려는 자는 먼저 어린 양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 왕국은 오직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만 그 실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 때문에 높아지셨으므로 여전히 어린 양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 때에는 그 어린 양으로부터 사자의 위엄이 발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로서는 사자의 영광이 가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만이 복음을 통해서 그 영광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왕이신 그리스도로 묘사하는 신약성경의 증거는 믿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복음서를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구원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믿도록 확신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믿는 것일 뿐, 그 외의 방법으로는 그런 인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반응한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거짓 선지자로 몰아 배척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거나 자신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줄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그분을 좇기에 열광적이었습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그분 안에 이스라엘의 참된 영적 소망의 해답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의 말씀 중 어떤 것들은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오해했던 말씀들을 마침내 제대로 이해한 것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신 이후였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맏는 자들의 현재의 삶을 유목민처럼 장막에 거주하는 자들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우리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 짐을 진 것처럼 탄식하는 것은 그것을 벗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하늘 집을 입음으로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켜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목적을 우리로 이루도록 하셨으며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이 육체의 집에 사는 동안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5:4-7).

 

이처럼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데서 우리가 미완성이라는 느낌과 인식이 비롯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결코 모호한 정의를 가진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언제나 그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유지시키시는 그리스도, 즉 복음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성령님이 주어진 것은 마침내 주님과 떨어져 있는 일이 결코 없는 그 나라에 믿는 자가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증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성령님은 이러한 보증으로서 어떠한 일을 하십니까? 그분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게 하시며 의지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일은 우리가 믿음 그 자체나 성령님 자신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을 힘있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주님이 곧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신 나사렛 예수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써 지금은 이 구세주가 모든 것을 정복하신 사자, 즉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께서 어린 양으로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모든 것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결과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들은 신약성경 안에 진부하리 만큼 수없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이런 가르침을 한 번 더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구약성경에 쓰인 표현과 이미지로 다시 옷 입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가 이후에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대단히 큰 가치가 있는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 목적이란 오스틴 패러(Austin Farrer)가 묘사한 것처럼 이미지(image), 즉 지나간 과거의 문화와 사람들이 사용하던 옛 이미지들을 되살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의 장엄함을 살짝 그러나 새롭게 들여다보고 놀라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수시로 갈등을 겪는 일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미지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시각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어린 양의 받으신 고난 때문에 믿는 자 각자의 고난도 그것이 작든 크든 간에 무의미의 늪 속에 가라앉힐 수는 없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간추림

 

사자는 영광스러우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 주실 수 있고, 그것의 실재를 알려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처럼 우리가 그 사자를 볼 수 있으려면 그분께서 먼저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나라의 계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복음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또한 요한계시록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모든 존재의 의미는 복음 안에 계시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하여 그 나라가 임하는 것과 계속되는 현재 질서 사이의 긴장 속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복음으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요한계시록의 주제인 것입니다.

 

 

* 중심주제 *

어린 양과 사자 사이의 긴장은 복음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보여 준다.

 

 

그레엄 골즈워디의 [복음과 요한 계시록] 중에서 발췌(25-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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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와 쉐키나의 하나님

 

 

쉐마와 쉐키나의 신앙으로 코람데오의 길을 걸어가자

 

그리스도인, 우리들의 삶이 자꾸만 피폐해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사람의 탈을 쓰고 살면서 땅의 것만 추구하는 삶을 사는 이상은 변화될 것도 갱신 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한 번 듣고 깨달음과 실천하는 삶의 길을 걷기 위해 아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방법으로서의 쉐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계속해서 던지신 가르침은 “쉐마”( ???)였습니다. “쉐마”는 “들으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쉐마”( ???)는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샤마”의 명령형입니다. 대표 성경구절은 신명기 6장 4~9절이며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됩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영 표를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그 분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서 들으라는 것이요.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 듣게 하라는 것이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강론하여 듣게 하라는 것입니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여 들으며 실천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쉐마”는 구약시대부터 하루에 아침저녁에 암송하도록 되어있어 이스라엘의 의식구조와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앙고백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세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삶으로서의 “쉐키나”

 

“쉐키나”( ?????)는 문자적 뜻은 “거주” 또는 “임재”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성막의 언약궤(민 10:35~36)와 솔로몬의 성전(왕상 8:29)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로서 소개됩니다. “쉐키나”( ?????)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언약궤에 쉐키나 하신 하나님

 

"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서서 하였더라."(민 10:35-36)

 

성전에 쉐키나 하신 하나님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9)

 

하나님이 자기 임재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형태는 “주의 천사”, “하나님의 얼굴”, “구름기둥”, “불기둥” 같은 것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신약에는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쉐키나”입니다(마 1:2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살피시고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막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거기 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쉐키나’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우왕좌왕할 때 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쉐키나’ 입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시고 그 가운데 ‘쉐키나’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후에는 성령님을 보내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곧 ‘쉐키나’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성령님 주도적인 삶이란 우리 속에 임재하신 ‘쉐키나’ 즉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하나님 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개혁주의의 모토인 코람 데오(Coram Deo) 신앙사상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는 성령으로의 거듭남과 점진적 성화를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쉐마( ???)의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몸소 체험하는 쉐키나( ?????)의 신앙이 또한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적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공동체로서의 삶 속에서 나타내 보임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내 안에 쉐마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항상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며, 만일 내 안에 쉐키나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영광이 선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석봉 목사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 나용화 교수 -



정부가 범죄를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했으나, 불의하고 악한자들은 여전히 폭력을 자행하며 피흘리는데 민첩하다. 팔순의 할머니들과 여섯 살의 귀여운 여자 아이를 생매장하여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을 비롯하여 십대 청소년들이 한 선배를 칼로 50여 군대를 찔러 죽인 일 등은 이 사회가 너무나 살벌함을 느끼게 한다. 이같이 난폭하고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의를 행하여 빛을 발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사야 시대에 탐욕과 향락에 도취하여 포악해져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사람들을 향하여 일어나 빛을 발하며 공의를 행하라고 요구하신 것과도 같다(참조, 사 56:1; 60:1).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의를 행하라고 요구하심에 있어서 먼저 의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온전히 행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베푸신 의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덧입어야 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이 베푸신 의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게 멸망될 때 활동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약속하심 말씀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의 의이심을 소개한바 있고(렘 23:5-6; 33:14-18)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후에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바 우리의 의이심을 증거했다(고전 1:30).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의이시다. 예수님께서도 자기가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간 것이 바로 의라고 말씀하셨다(요 16:10).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이시다.


하나님의 의인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를 덧입게 되고 이로써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그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들었을 뿐만 아니라(갈 3:8, 16) 그를 미리서 보았다(요 8:56). 그래서 하나님이 베푸신 의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인하여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자 그 믿음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하셨다(창 22:12-19; 약 2:21-24).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을 성취해 놓으셨고 그 성취된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만족을 얻으셨기 때문이다(롬 3:20-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에는 인자와 긍휼을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인자’(히브리어, ‘헤세드’)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이 잘되길 즉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영화롭게 되기를(롬 8:29-30) 바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여 쏟아 부어주는 ‘내리사랑’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인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위하여 그의 독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요 3:16)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사건에서 잘 나타났다(롬 5:8). ‘긍휼’(히브리어, ‘체다카’)이라는 용어는 한편 하나님의 백성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허물과 약점을 대신 담당하는 ‘안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 긍휼은 예수께서 우리 성도들의 죄악을 담당하신 사건(사 53:4-6; 마 8:17)과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에 대한 비유(마 18:27, 33)에 잘 나타나있다. 이같이 하나님이 백성이 그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그가 그들을 위해 독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저주와 형벌을 당하여 죽게 하신바 그의 인자(내리사랑)와 긍휼(안는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바 이 의를 가르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밖에서 오는 처음의 피동적 의’(the alien, primary, passive righteousness from God through faith)라고 한다. 이 의가 선행에 앞서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의 경우처럼 선행이 의에 앞서는 것이 아니다.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도가 선행을 행하여 공로를 쌓아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된다. 예컨대 수도사가 되어 폐쇄된 수도원에 들어가 금식하고 기도하며 공로를 쌓아야 의롭게 된다고 로마교회가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 곧 선행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육체가 없으며(롬 3:20)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살아계셔 역사하실 때(갈 2:20) 그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생각을 품으며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빌 2:13).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계시어 활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덧입는 자 곧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얻은 자가 의를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의가 선행에 앞선다’고 주장하여 로마 교회를 개혁하였던 것이다.



2.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우리를 위하여 의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후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셨고 이사야를 통하여 “너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사 56:1)고 촉구하시는가 하면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그가 베푸신 의의 개념에 잘 나타나 있지만 그 반대 개념과 비교하면 또한 잘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의 의의 반대되는 개념은 우상숭배이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에 나타난 의 곧 예수 그리스도가 참 진리인데 반하여 우상은 거짓이요 불의이기 때문이다(롬 1:16-17, 23) 이사야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진리이신 여호와를 업신여겨 멀리하고 물러가(사 1:4) 우상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었다(사 2:8). 이방인들의 대표적인 우상은 바알종교이다. 이 바알종교의 특색은 경제적 풍요를 최대의 축복으로 여기는 까닭은 부동산 곧 땅과 집을 맗이 갖는 것이었다(사 5:8; 미 2:2; 6:16). 그래서 바알 종교가 성행하게 되면 부동산 투기가 심해져 가난한 자들의 땅을 권력자와 부자들이 탐내여 착취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이 은 두 달란트로 사마리아 산을 세멜에게서 산 사건(왕상 16:24)과 그의 아들 아합이 이세벨의 도움을 받아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이다(왕상 21장). 이두 왕들은 바알종교와 그것의 불의한 경제제도를 끌어들여와 여호와의 노를 격발시켰다(왕상 16:26, 33). 그러기에 우상숭배는 전형적인 불의 곧 탐욕과 거짓이다(참조, 골 3:5).


이 같이 불의하고 이기적인 탐욕의 우상숭배와는 달리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의는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의도 사실상 한마다로 사랑(내리사랑과 안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하나님께서 자기가 베푸신 의에 기초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를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본래의 실천적 의”(the proper, practical righteousness active in love before God)라고 부른다. 이 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이이도 하다(갈 5:22).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대신에 그의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므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레 18:1-5)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만을 사랑하고(신 6:5), 이웃사랑하기를 우리의 몸과 같이 하라고 명하셨다(레 19:18). 한 율법사가 예수에게 율법중에 가장 큰 계명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에 대하여 물었을 때 위의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을 하나로 묶어서 대답하신 것(마 22:34-40)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잘 요약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롬 13:10)고 하고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갈 5:14)고 하며 예수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행하여 사랑과 절제 등의 열매를 맺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갈 5:16-24). 우리의 이웃 곧 혈연, 지연, 학연 등과는 무관한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도록 그들의 허물과 약점을 담당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을 베풀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그 성격상 공동체적이다. 자기 아닌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사랑과 의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자기만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사실상 믿음도 없고, 따라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한 지체들이기에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도록(고전 12:26) 되어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여 각각의 직분을 따라 서로를 섬기되 서로 먼저 그리고 열심히 하여 하는 것이다(롬 12:3-13).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으로 충만케 된 경우에는 그 결과로서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엡 5:18-21), 아내와 남편 사이(엡 5:22-33), 자녀와 부모 사이(엡 6:1-4),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엡 6:5-9) 온전한 사랑의 질서가 있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 같은 사실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으로 충만한 초대 교회가 서로 교제하기를 힘쓰면서 재산과 소유를 서로 함께 쓰거나 각 사람의 필요대로 나눠준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행 2:42-45). 이렇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하나님과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인바 이 사랑은 이웃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거룩해지며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성장하여 영화롭게 되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허물과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짊어지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이웃에 대한 이 같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크신 사랑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체험하는 데서 사실상 가능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의가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어떤 것인지를 살핌에 있어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특별히 성령을 부으시고 복음을 가난한 자들과 흉악한 멍에의 줄로 압제당하는 자들에게 전파하여 자유와 생명을 베풀도록 하신 점(사 56:6; 61:1-2; 눅 4:17-21)으로 미루어 보아 오늘 우리의 이웃으로는 농어민, 도시의 영세민 근로자, 고등학생들과 10대 소녀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당국의 농업정책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삶이 너무나 어려워졌다. 어민들이나 도시 저소득층도 마찬가지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잘산다’는 개념이 물질적 풍요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는 까닭에, 경제적으로 빈곤하면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좌절감을 갖는 것이 문제이다.


대학입학시험을 목전에 둔 고등학생들은 대학입학을 인생의 행복의 열쇠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입시공부의 노예가 되어있다. 그들의 삶의 목표가 오직 대학입학 뿐인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런가 하면 공부라고 하는 흉악한 멍에가 주는 압박감 때문에 탈선한 10대 소녀들이 윤락의 희생물로 전락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우리의 이웃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가 무엇인가?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의의 사람들이기에 변혁의 역군(change agent)들이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는 일꾼들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성공과 행복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상대적 빈곤감이나 열등의식을 갖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적어도 물질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 빈곤은 미덕이 아니므로 가난한 채로 살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불신앙이다(딤전 5:8).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이 생활향상을 위한 정책수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정부가 정책적으로 뒷받침하여 농민들이 조합원이 되어 농수산물의 생산, 가공, 판매등을 총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로써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 같이 보호되고 도시의 영세민의 생활향상까지 도모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므로(레 25:23) 개인들이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하고 땅을 경작하는 자들로 하여금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와 적어도 소작농들의 생산의욕을 충족시킬 수 있게 소작료가 강력하게 규제되어야 할 것이다. 도시의 경우는 건물 임대료와 전세값이 규제되어 마땅하다. 청소년들의 겨우 입시의 멍에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더라도 저녁식사만큼은 귀가하여 가족들과 함께 먹을 수 있게 하고 공휴일 즉 주일에는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어야 한다. 지금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의 탐욕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기성세대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세속적인 야망을 자기의 자녀들인 청소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며 세속적인 야망을 자기의 자녀들인 청소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며 세속적인 성공의 개념에 따라서 청소년들에게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비 인간화 시키고 있다. 부모들은 성경 말씀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자녀들과 함께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기도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훈련을 함께 해야 한다. 성경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교육해 주어야 한다. 이 교육의 책임은 특별히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다.(참조, 딤전 2:11-12)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정부의 정책수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정책이 빈곤한 정치권력에 대하여 비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칼빈도 그의『기독교강요』에서 권세자들에 대하여 때로는 비판적으로 불순종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2권 8장 38항과; 4권 20장 32항).


그러한 한편 우리는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곧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함으로 이웃에게 덕을 세워야 하고 이로써 환경오염도 예방할 수 있어야 한다.



결 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말고(마 6:1)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마 6:33).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생활과 불신자들의 탐욕적 생활을 함께 경계하면서 이웃 사랑의 실천방법으로 구제를(마 6:3)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경외심 및 믿음을 연단하는 방법으로 기도를(마 6:5)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으로 금식을(마 6:16) 말씀하셨고,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할 것(마 6:20)을 말씀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세속적인 정욕과 탐욕을 버리고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 근신하여 이웃을 사랑함으로 의롭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경건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딛 2:12). 이로 보건대 하나님이 사람으로서 의롭게 살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마 6:33)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들을 통해서 파괴되고 황폐해진 땅의 기초를 수축하신다(사 58:12). 다시 말해서 거짓된 바알종교의 불의한 부동산 투기와 그것과 결부된 폭력과 착취로 말미암아 황폐된 땅을 치료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변혁의 역군들로서 의를 행하여 빛을 발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출처: 안산 회복의 교회 /전상범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공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원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성공의 가치와 내용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 원하는 것, 뜻하는 바가 세속적인 것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일 때 이를 성공주의라고 일컫는다. 원하는 것이 영구한 가치가 있고,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성공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좋아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돈, 쾌락, 명예, 권력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 성공주의자들이다. 결국 가치관의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데,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원인은 바로 이 가치관의 문제이다. 기독교적인 가치가 오늘날은 교회 안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의 대상은 바꾸었지만 가치관은 바꾸지 않은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영원히 소원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과 내용과 그 방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목회자들도 큰 차이가 없다. 목회자들 중에도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알고는 있지만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계속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휩쓸린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세속주의의 광풍에 뿌리까지 흔들릴 지경에 있다.

 

왕룽의 길

 

펄벅 여사가 쓴 소설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은 왕룽이다. 펄벅은 왕룽의 생애를 통해 중국인들 - 바로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인생관이랄까 그 가치관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주듯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왕룽은 부자인 황가네 집에서 소작인으로 살았다. 그는 가난했다. 그런데 전쟁을 피해 피난 갔던 곳에서 뜻밖의 많은 보물을 얻어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던 그는 땅을 사들이기 시작하였고 그도 지주가 된다. 그리고 부자가 되어 좋은 가마도 타고 다니며 기방(妓房)에도 들락거리다가 나중에는 아들보다 젊은 기생을 첩으로 삼기도 한다. 아내가 병들어 죽자 미안한 마음에 무덤을 아주 거창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들어갈 무덤도 미리 만들어 둔다.

 

왕룽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룽의 길을 간다. 열심히 돈을 벌고, 돈이 모이면 아파트 평수를 늘이거나 좋은 집을 짓고,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쾌락을 찾아 여유롭게 즐긴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무엘처럼 어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좋아서 그런 대견스런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동기는 매우 단순하고 유치하였다. 목사 되는 것이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면 잘 먹고 옷도 잘 입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당시 어린 나에게 있어서 성공한 사람이란 출세해서 도시에 살고, 얼굴이 허옇고, 양복을 입고 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자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어린 나에겐 목사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유치한 생각은 목사가 되고 난 후에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스스로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말이다. 목사의 자랑은 교인들이 많은 것이고, 교회당이 크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례금을 많이 받고 좋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아주 자연스럽게 세속적인 성공관에 물들며 자랐다.

 

그때는 잘 살아보세가 우리의 노래였고 백성들의 소원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 꿈이었다. 목사들의 꿈과 비전도, 비록 고상한 신앙적인 용어들로 포장하기는 하지만, 그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은 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켜 큰 교회당을 짓고 더 많은 사람들을 모우고 그래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말이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적인 야심이 뒤섞여 분별이 안 되었으므로 양심의 가책도 거의 없었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을 위한 노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큰 충성이요 자랑스러운 헌신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성장주의와 성공주의

 

근년에 이르러 교회 성장주의는 목회자 성공주의와 동일한 용어가 되었다. 성장주의가 목회자들을 사로잡아 흔들어왔다. 한국교회의 타락의 주범은 성장주의다.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본질을 잃어버린 성장이다. 복음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수가 더하여지는 성장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인의 수가 더하여지는 성장이다. 이는 경제영역에서의 물량주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많은 목회자들이 7-80년대의 양적 부흥과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휩싸여 자신들도 모르게 성장주의 곧 성공주의에 함몰돼버렸다.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변질시키고 훼손하는 악한 사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상은 성장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장주의가 한국교회를 이렇게도 깊이 병들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성장은 선하고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부의 진리를 방패로 삼아 세속적 성장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자신들의 공로를 드러내주는 세속적인 명예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성장주의가 교회의 교회됨을 파괴하고 부흥을 왜곡시키며 진정한 성장을 가로막는 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 교회성장운동은 많은 경우 바벨탑운동으로 변질돼 있다. 다들 아는 대로 바벨탑운동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11:4)는 말 그대로, ‘교인들을 많이 모우고 교회당을 크게 짓고 유명해지자는 운동이다.

 

한국교회가 성장주의에 사로잡힌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7-80년대부터 "많은 교인, 큰 교회당"이 우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전도는 사람 모으기 운동으로 전락했고,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전도를 상업적인 판촉활동으로 여기고 있다. 목회자를 평가하는 교인들의 기준도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속어가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자기 목회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성장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인수를 늘리기 위해 설교나 전도를 장사하듯 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목사나 교회들이 교인수를 과장한다. 더구나 회개도 없고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례(침례)를 베풀고, 교회직분으로 교인들의 헌신과 충성을 사려고 이를 매매하듯 하고 있다. 제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사역"은 말뿐인 경우가 많고 큰 교회로 성장시켜 유명해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유명함에 따라 붙는 것은 권력이다. 일부 목회자들은 교회의 주이시며 동시에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큰 영광과 힘이라도 가진 것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이다.

 

생계형 목회

 

한편 성공주의 목회의 뒤안길에서는 생계형 목회가 점점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큰 교회를 세우고 유명해지자는 바벨탑운동형의 성장주의가 이제는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의 떡을 위하여”(13:19) 예언하던 옛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생계주의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목회자로부터 눈물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구령사업에 헌신하겠다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신학수련을 받아 목사가 되고 교회도 개척하였는데, 한두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집세를 낼 돈이 없어 고민해야 하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해야 했다. 새벽기도 시간이면 기도보다 오늘 당장 얼마의 돈이라도 구해야 하는 일 때문에 당황해하고 있는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발견하고 울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질과 양 모두에서 쇠퇴하고 있지만 대형교회들은 여전히 그 영광을 구가하고 있다. 작은 교회의 교인들이 대형교회들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와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고 또 대형교회가 가진 익명성 때문에 누구의 간섭이나 부담 없이 조용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숨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본질적인 기능과 사역에 집중하기보다 교인수 늘이기에 매달리다보니 교회도 결국 세속적인 경제논리를 따라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고 여기에서 탈락된 목회자들은 우선 생존하기에도 버거운 현실에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성장주의나 성공주의는 큰 교회 목회자들만 갖고 있는 생각은 아니다. 어쩌면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더 그러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현실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성공이란 말 자체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면서, 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교인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절박함에 항상 시달리고 있다. 이러면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10:10) 목회의 목적과 목표와는 점점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이를 당장 확인하고 싶으면 해외에 있는 교포 교회들에 가보라. 교포 교회들을 보면 이런 현실들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교포사회가 좁다보니 교인 수에 목을 매다시피 하고 있는 교회들의 가련한 모습이 송두리째 노출되고 있다. 복음사역을 위해서라기보다 영주권을 얻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생계를 위해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없지 않다.

 

그런 교회들에 다니는 교인들은 자기들이 다니는 교회에 약간의 불만만 있어도 예사로 교회를 옮긴다. 또 어느 교회로 옮기든 일단은 환영을 받기 때문에 철새 교인들은 그 교회에 다녀주는 것이 그 목회자에게 무슨 혜택을 베풀기라도 하는 듯한 마음으로 등록한다. 어느 교포 교회의 목사는 교인들이 목사들을 가지고 논다.”며 탄식을 했다. ()가 우상이 되다보니 교회의 정체성마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성장주의가 신학교까지 점령

 

성장주의와 성공주의가 신학교까지 점령했다. 어쩌면 신학교가 성장주의와 성공주의를 보육(保育)했는지도 모른다. 거룩한 소명과 거룩한 헌신으로 수행되어야 할 목회가 상업주의적인 경쟁으로 치닫게 된 데는 목회자 과잉 배출이라는 더욱 근원적이고 심각한 원인이 있다.

 

먼저 지금 한국에 신학교가 얼마나 될까?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간한 한국의 종교현황(문화체육관광부, 서울 2008)에 보면 개신교가 운영하는 일반대학이 49, 대학원 대학교가 20, 전문대학이 27, 각종학교가 3곳으로 나와 있다(p.117). 여기에 모두 신학과가 있다 하더라도 집계 가능한 숫자는 100곳 이하이다. 그러나 대한예수교장로회란 명칭을 가진 교파만 해도 240곳이며(pp.38-55), 감리교와 침례교와 순복음교회 등 다른 교파들과 합하면 291곳이다. 여기에 파악이 안 된 교파들도 있고, 또 한 교파에 신학교가 둘 이상인 경우들도 많음으로 신학교의 전체수는 대략 잡아도 400여 곳이나 된다.

 

그리고 여기서 졸업하는 목사후보생들의 수는 역시 적게 잡아도 해마다 일만 명이 넘는다고 볼 수 있다. 이중 몇 %가 목사로 임직하는지 모르나 반만 잡아도 한 해에 5천 명이 배출된다. 목사의 과다 배출은 이미 교회문제를 넘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목사가 되어도 갈 교회가 없으므로 그 가정이 극빈가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문체부의 위 통계자료(200812월 기준)로 보면 교회 수는 58,612곳이고 교직자 수는 95,596명이다. 필자가 속한 예장 고신의 경우 2015년 현재 교회 수는 2,049이고 목사 수는 3,563명이다. 여기서 합당한 사례금을 드리면서 목회자를 청빙할 수 있는 자립된 교회는 반도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목회자들이 사역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교회가 목회자를 구한다는 광고가 나오면 5-60명이 지원하는 것은 보통이고, 100명이 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교회서는 목회자 청빙을 일반 회사들이 직원을 채용하듯 한다. 이렇게 해서 채용된(?) 목사에게 무슨 영적인 권위가 있겠는가? 이런 경쟁을 뚫고 부임한 목사가 자신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사람 모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학교들은 왜 이렇게 많아졌나?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신학교가 많아진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중심 말씀중심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에 빠지면서 우주가 폭발하듯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열된 교회지도자들은 교파주의에 빠져서 반드시 자체적으로 신학교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다 자기 교파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목사후보생들을 배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량주의적인 성장주의가 신학교육까지도 지배해버린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과 정책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제들의 심각성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는 교회의 교회됨 곧 그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먼저 목회자들의 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교회의 건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도자가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를 한다면 과연 그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겠는가? 오늘날 목회자들의 수준은 상식 이하의 수준까지 추락하고 있다. 근년에 목회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라. 일반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전에는 사이비 이단 종파에서나 일어났던 범죄들 곧 음란, 사기, 폭력, 살인, 방화 등의 범죄들이 멀쩡한 기성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가면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돼버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마저 든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종교는 성경적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돼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믿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타났을 때 그를 거짓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죽여 버렸다. 그럴 정도였으니 유대교는 다른 종교가 되었다는 정도를 넘어 메시야 종교를 대적하는 사탄의 종교가 돼 있었던 것이다. 중세기의 타락한 천주교 역시 기독교로부터 너무나 멀리 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성공주의를 넘어서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현상을 넘어 실상을 본다(11:1-3).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에 마음을 다 빼앗긴다. 그래서 잘못된 성공주의에 빠져서 타락의 경사로를 빠르게 내려가게 된다. 본질을 찾아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더 확실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케 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말한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11:3b).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시작이다.

 

참으로 성공한 사람은 실상을 알고 실체를 붙든 자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성공이다. 히브리서는 모세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 세상적 가치와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얼마나 뚜렷하고 분명하게 대조되고 있는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세는 어리석은 자요 실패자이다.

 

개종 후의 사도 바울도 보자. 과연 그가 성공한 사람인가? 그는 구세주를 만난 것이 아니라 환란의 주를 만난 자처럼 살아야 했다. 핍박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살아야 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3:7-9a)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가치 있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던 것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는 배설물처럼 여겨졌다. 여기다 우리가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목회자들은 교리도 알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알아야 하고 이를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가 무엇인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며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인도자가 될 수 있다.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 잘 나오고, 기도 많이 하고, 연보 잘 하고그러면 신앙 좋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최고 가치인 사랑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아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내가 목사가 되고 3년쯤 된 어느 날 아침 나는 성령으로부터 로마서 12:1-2 말씀을 새롭게 받았다. “새롭게 받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하고 강력한 감동으로 본문을 읽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서의 전반부는 11장까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이신칭의라고 요약할 수 있다. 후반부는 12장부터 시작되는데 그 내용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12:1,2의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는 말씀이다.

 

1절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되도록 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2절에서는 삶이 예배가 되는 그런 생활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 첫 번째 말씀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대라고 번역된 낱말 아이온(α??ν, α??νο?)”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매우 힘든 말이다. NIV에서는 the pattern of this world라고 번역했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삶의 패턴이 있고 질서가 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 우리 기독인들은 이것을 본받거나 따라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

 

둘째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 마음은 생각을 말한다. 생각이 바뀌고 사고방식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은 가치관이 안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가졌던 그 생각 그대로 살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미신종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것을 우리의 가치로 삼고 우리의 삶의 목포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범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 뜻이 성취된 영역이 아닌가. 그날 아침 나는 이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92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기독교 신비주의

http://www.ligonier.org/learn/articles/mystic/
by 피터 릴백(Peter Lillback)


14세기는 신비주의가 만개한 시대였다. 당시의 신비주의는 오늘날까지도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운동이다. 신비주의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개인적이고 즉각적으로 연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별한 정신적 체험과 상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신비주의는 기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는 않다. 전세계 철학과 종교들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저술가인 위디오니우스(Pseudo-Dionysius) 등의 신플라톤 철학과 8세기 위디오니우스의 저술들을 번역한 스콜라 철학자 존 스코투스(John Scotus)에게 영향을 받았다.

14세기에는 신비주의 도미니크파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hart), 요한 타울러(Johann Tauler),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uso) 등이 활약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신비주의 저서인 [독일신학_Theologica Germanica]이 어느 정도 마르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화란의 신비주의자인 게르하르트 그루테(Gerhart Groote)는 공동생활형제단(Brothers of the Common Life)를 세웠는데, 그 단체가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국의 신비주의자 중에는 여성인 노위치의 줄리언(Julian of Norwich)이 있으며, 동시대 여성 신비주의자는 시에나의 캐더린(Catherline of Siena),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등이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 출현의 원인
교회사의 다른 이면에는 “마술적”이고 비현실적인 특징들이 존재하는데, 이런 이유로 그것은 매우 의심쩍고 비정통적인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출현했다. 금욕주의, 성례적 미신주의,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 등도 이에 포함된다.
금욕주의는 급진적으로 물리세계를 거부하는 사상으로서, 기독교 신비주의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 기독교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금욕주의는 신플라톤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

성례적 미신주의는 그레코-로만 신비종교들의 영향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미트라와 이시스를 섬기는 사교가 이에 해당한다. 교회는 이 미신주의가 특별한 의식이 발휘하는 능력에 대한 신비적이고 마술적인 믿음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특징이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즉, 이 미신주의의 특징은 성례, 순교자의 성물, 교회의 영웅들 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경을 4중으로 주해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역사적 시각 대신, 성경은 비밀스럽고 형이상학적이며, 종말론적인 지식을 전달해 주는 지식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별한 체험을 하여 의식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이러한 욕망은 무엇을 결과했는가? 첫째, 성경을 잘못 해석했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1:4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이 구절을 맥락에서 벗어난 상태로 읽으면, 지나친 영적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변화산상의 변형사건(마 17:1-13), 바울의 삼층천 경험에 대한 묘사(고전 12:2), 계시록의 요한의 환상 등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부지불식간 성경적 기독교신앙을 비기독교신앙, 이교의 신비적 체험과 철학 등에 혼합시키게 된다.

기독교 신비주의 출현의 또다른 원인을 언급할 때, 우리는 중세적 맥락도 생각해야 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면, 페스트의 유행과 높은 사망률, 이단의 박혜, 십자군전쟁, 부유한 교회의 상태 등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 신비주의는 위협적이고 혼란스러우며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다. 신비주의자들은 주관적이고 내적인 체험을 강조하며 외부세계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무시하게 만들었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통과 기술
수도원운동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을 떠나 수도원생활을 했는데, 14세기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수도원운동이 확산되자, 수도원에서는 수행자들에게 신비체험을 증진시키는 명상과 관련한 경건 계획표를 제공해 주었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자들은 종종 금식과 순례를 훈련으로 삼았으며, 좀더 급진적인 금욕주의 형태로는 극단적 금식, 수면금지, 자기 태형 등이 있다. 종교적 황홀경에 대한 신비주의자들의 탐구는 정신의 수위성(秀偉性)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반복 기도를 통해 정신을 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려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체험을 활용하였다. 첫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부정하여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두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역설(力說)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두 방식 모두 본질적으로 사색적이었다. 어떤 방식도 성경적 계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인간 자신의 내적이고도 비이성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 했다. 그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으려는 행위는 종종 가설적이었고, 성경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자들
14세기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주의에 대하여 각자 자신들만의 접근법을 갖고 있었다. 동방의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로 기도를 통한 내적 침잠을 지지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금언(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을 활용하였다. 그는 이 금언 속에는 범신론과는 다르지만 인간 신성화의 형태가 담겨있다고 주장했다. 팔라마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신 반면, 인간은 신적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별한 자세로 신성한 문장을 암송하는 등의 여러 신비주의적 의식을 발전시켰다.

반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지식관에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의 불꽃_spark of the soul” 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믿었다. 그 불꽃은 영원한 진리를 명상하게 하여 “영혼 속에 하나님을 출생”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이것은 오직 자아와 이 세상을 포기할 때만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생명과 그 신적 본성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영혼은 신적 본성에 참여하여 신이 될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이 지식은 말로는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순전한 신적 연합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축복의 이상_beatific vision”은 그리 오래가지 않으며, 영원 속에서만이 영구한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교황은 나중에 에크하르트의 범신론적 주장을 비판하였다.

중세신비주의의 유산
신비주의 신학은 중세기를 끝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후 교회에서도 꾸준히 재등장하였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 오시그의 카스파르 슈벵크펠트(Caspar Schwenkfeld von Ossig), 일부 영국 청교도들이 신비주의적 주장을 했다.

또한, 다양한 개신교 전통 속에도 신비주의가 들어있거나, 신비체험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경건주의, 퀘이커, 오순절운동, 은사주의운동 등이 이에 포함된다. “개신교 자유주의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는 종교적 체험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의 신비주의는 종교적,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어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같은 양상을 주도한 이들로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등이 있다. 이들 모두 14세기 기독교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극복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비체험 등에 자리를 내주어서는 안된다. 말씀은 우리에게 정당한 계시 진리이며, 누군가가 어떤 개인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의심해 봐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무아지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인격을 통해 당신을 예배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성령과 말씀 간의 철저한 연결성, 말씀과 성례의 성경적 결합, 겸손한 순종과 믿음 안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는 범신론이나 인신공양적 미신주의 등등의 여러 신비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에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들이다.

성경은 거짓 가르침이 우리 인간의 타락한 품성에서 나타나기 태문에 영을 시험하라고 가르친다. 구원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감정, 선택, 사상, 이상 등등이 구원으로 이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와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좇는다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 특별히 종교개혁적 의미의 신앙의 회복은 무절제한 신비체험을 거부하고, 성령님을 통한 그리스도의 정경적 계시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내적 충동성을 우선적인 영적 안내자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님을 겸손히 의지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묵상은 성경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행하시고 말씀으로 기록하신 특별한 이적들을 상고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분을 말해주는 성경을 알아야 하고(요 5:46), 사랑하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며, 예배와 성례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지상명령을 기억하며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눅 10:27). 또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에 뿌리를 두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를 내적으로 체험한 마음과 감정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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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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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지금도 세상의 현상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김영규 목사,

“하나님은 씨앗 한 톨의 분화 속에서도 각각의 질료들에 역사하셔”

성경에서 사람에게 말하는 땅을 정복하라, 복종시키라는 명령은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처럼 사람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자신의 역사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나님 없이는 사물과 생명도 없어

여기에서 우리는 땅의 생명체들에 대해서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것도 하나님의 친히 다스리시는 역사 없이 사람이 그런 생명체들을 다스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심도 있게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식물들을 가꾸고 짐승들도 기르며 자연 생태들에 대해서 더 깊숙이 알아 도저히 양식할 수 없다고 믿어 왔던 생명체들도 이제 양식할 수 있는 기술들이 점점 더 크게 발달이 되고 있다.

그렇게 생명체들을 다스리는 기술들만이 발달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 밖에 소행성이나 혜성 등을 이용하여 먼 별들을 여행하는 꿈도 꾸고 있다. 그래서 자연을 정복하라는 의미는 그 자연을 정복하는 기술들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일로 여겨지고 있다.

이사야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의 길을 형극과 질려가 방해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지만, 하와와 아담의 범죄 이래 인간과 땅을 향한 저주로 항상 등장하는 형극과 질려가 사람에게 좋은 약재나 식물이 되고 있는 것도 변화된 역사의 다른 단면이다.

그런데 최근 Nature 잡지에서 소개된 학술적인 논문들의 인용 횟수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발견들은 바로 교과서들 안에 반영이 되어 인용이 될 필요가 없거나 그렇지 않으면 특허기술로 바로 발전이 되어 상품화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인용횟수가 줄어들어 실제로 생각 없이 인용해야 하는 논문들에 대한 인용횟수가 커가고 있다는 분석을 내 놓고 있다.

역시 학문분야에 연구가 활발한 분야들에 속한 우수 논문들의 인용 횟수가 상대적으로 크고 과학적 발견이나 기술들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돕는 논문들에 대한 인용횟수가 큰 것도 특징이 되고 있는 것도 소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계속적으로 진보가 이루어지는 분야의 우수 논문들이나 넓은 관심이 있는 분야의 우수 논문들의 인용횟수가 커져가고 있는 현상에서 실제 혁명적이고 큰 획기적인 혁신적 논문들은 상대적으로 인용횟수가 떨어진다는 분석과 함께 아주 드물지만 어떤 발견이나 기술들은 출판 자체가 어려운 성과물들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 상 이런 분석은 상당히 정확한 분석이다. 식물처럼 이산화탄소를 소모하여 인간에게 이로운 물질로 바꾸어 또 다른 에너지원이나 기타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생산물을 낼 수 있는 기술이나 발견들은 모든 이들에게 유행하고 진보하면 할수록 인류에게 유익할 수 있지만, 어떤 획기적 기술들로서 자연과 인류의 전체적인 삶과 그 역사에 피해를 주는 기술들은 출판하기도 어려운 성과물로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분석을 고려할 때, 현재 유행하고 있거나 널리 알려진 과학적 이론들이나 객관성은 상당히 거품이 많다고 평가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누구나 그런 거품들이 조금씩 거두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제에는 항상 인간성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아무리 큰 획기적 학문적 성과물도 어떤 경우에 따라서 영원히 묻혀 있기를 바라는 그런 업적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성경에서 나타내 보이는 진리는 그런 업적들과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말하는 자를 영원히 없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짓과 그냥 지나가거나 잊어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세계가 통의 물 한 방울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이 보이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기존 질서로부터 먼 거시세계에 계시고, 동시에 우리의 머리칼을 세시는 질서의 미시세계에도 계시며,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는 모든 질서의 중앙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심는 이도 있고 물 주는 이도 있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되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듯이 사람이 뿌리는 것은 장차 생기는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이미 가지고 있는 밀이나 다른 것들의 단순한 씨를 뿌릴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것에 형체를 주시며 씨들의 각각에게 자신의 형체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유전정보의 집합체라고 알려진 염색체들이 세포 안에서 갈라지게 하는 두 극점들이 세포 안에 생기기 전에 세포 밖에 한 점으로 있다가 세포를 감싸고 안으로 들어와 두 극점들이 된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인간의 뇌에서 하려고 하는 의지의 기점이 생기기 전에 거의 5분 3 정도의 시간 동안 그것에 관련된 뇌 세포들은 열심히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왔다.

또한 우리 밖의 정보들이 우리의 지각들을 통해서 모아져 뇌 세포들에게 전달이 되어 물질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정보로 펼쳐 보이면서 지각하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로부터 나오거나 우리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 자체를 다시 볼 수 없는 그 자유의 공간은 내가 받고 자라는 선물의 극치로 있을 뿐이다. 따라서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큰 것을 선물로 주시고자 섭리로 역사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기본 질서들에 불과하다.


만물은 하나님 섭리 구현하는 질서

그렇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세계는 이미 행복한 것이 아닌가?

출처: 기독교개혁신보사/편집국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벧전 3:19절의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시니라”는 무슨 뜻인가?                                김선기 목사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19은 흔히 난해 구절로 취급되며 참으로 오해하기 쉬운 곳입니다. 우리 성경으로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벧전 3:19절의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시대에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을 때 순종하지 않고 홍수에 멸망한 사람들 곧 순종치 않고 지옥에 간 ( 노아의 8명 식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으로 지옥에 있는 노아 시대의 불신자들에게 전도하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모순이 따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후 왜 하필 노아 시대에 지옥간 자들에게만 전도하셨습니까? 더욱이 이미 지옥에 간 자들에게도 전도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옥에 있는 영들이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던 타락한 천사들을 말합니다. 우리말의 구조와 헬라어의 구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를 무시한 채  나온 오역의  결과로 엄청난 혼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벧전 3:19~20절을 원문으로 보면  "주님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 곧 불순종했던 천사들에게 가셔서 선포하셨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불순종했을 때가 노아의 시대 방주가 예비 되고 있는 동안이었으며 이 방주에서 극소수 곧 8명만이 구원 받았다." 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순종했던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불순종했던 천사들에게 주님이 선포하셨는데 그 때가 바로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고 있을 때였고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극소수 곧 8명 뿐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옥은 지옥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한 개의 영어 단어 "hell"(지옥)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세 개의 서로 다른 헬라어 단어(게헨나, 하데스, 탈타루스)가 있는 데 영어는 모두 오직 "hell" 하나로만 번역했고 우리말도 거의 구별하지 않고 번역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옥은 흔히 불못이라고 말하는 “게헨나” 또는 음부라는 뜻의 “하데스”가 아니고 “탈타루스”로서 노아의 홍수 시대에 범죄했던 타락한 천사들을 가두었던 감옥을 말합니다. 이 단어가 벧후 2:4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여기에서 지옥이 원문에 “탈타루스”입니다. 또 유다서 1:6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바로 이 범죄한 천사들을 가두어 두신 곳이 “탈타루스”입니다.

그리고 19절의 “전파하시니라”도 전도하다의 뜻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케뤼소”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탄을 좇아 타락한 천사들에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사탄의 심판과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해 볼 것이 있습니다. 과연 천사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심판 때까지 “탈타루스”에 갇혀 있게 되었는가? 여기서의 범죄가 천사장이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을 때 같이 동참하여 타락했던 천사들의 범죄가아니라 이 천사들이 노아시대에 범죄했다는 것을 본문은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이들이 과연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가? 이들과 노아홍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도전했던 사탄, 지금도 꼬리를 감추고 교활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처참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발버둥치고 있는 사탄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너무나 무방비 상태인 것 같습니다.  

페트라 성경원어 연구원 /개혁주의마을

정동섭 교수

 

 

[편집자 알림: 아래의 글의 저작권자는 '? 바른믿음'이다. 페이스북에서 옮겨 싣는다. 저작권자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글쓴이 정동섭은 신학자 권호덕, 스탠리 그렌츠, 피영민 등의 책을 참고하여 근래에 주목을 받고 있는 이 주제를 간명하게 간추려 소개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하는 최근의 일부 종말론과 관련하여 참고할만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글의 내용은 <리포르만다>의 신학 견해와 다를 수도 있다.]

 

 

이단들이 좋아하는 세대주의적 성경해석

이스라엘과 교회, 율법과 은혜 분리하는 것이 큰 문제

 

정동섭 목사 / 가족관계연구소 소장 (전 침신대 교수, Ph.D.)

 

1. 세대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Separatist Plymouth Brethren) 지도자 달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성공회가 부패했다면서, 교파를 떠나 형제운동을 시작하며 세대주의를 체계화한 사람이다. Darby의 지도하에 형제교회는 급성장했는데, 세대주의는 영국과 미국의 근본주의에 유입되면서 가시적인 기성교회의 제도와 충돌하였다.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편협한 노선을 주창하면서, 뉴톤(B.W. Newton)과 심한 논쟁 끝에 달비는 배타적 형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영미에는 개방적인 형제교회Open Brethren도 있는데,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다).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서 신학이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언약신학’에 기초한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이다. 세대(dispensation)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복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형제교회 창시자 달비와 성경주석자 스코필드는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세대주의에서는 성경 역사를 무죄(innocence)시대, 양심(conscience)시대, 인간통치(human government)시대, 약속(promise: Patriarchal Rule)시대, 율법(Law)시대, 은혜(grace)시대, 천년왕국(Kingdom: Millennium)시대 등 일곱 가지 시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셨다고 주장하였다.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각 시대마다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 양심시대는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을 받고,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따라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길을 주셨다는 교리였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킬 것을 언약하였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지금 성도들은 은혜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기론(antinominianism)으로 이어졌고, 기독교의 윤리성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양사건과 세월호사건을 일으킨 유병언의 구원파라 할 수 있다. 회개무용론을 가르치고 있는 또 다른 구원파의 교주 박옥수도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는 돌파리 목사 중 하나다. 이 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통교회도 은혜를 누린다면서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 것이다. 세대주의적 사고에 따라,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율법관과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치고 있고, 많은 이단을 양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리교 사회학자 이원규 교수는 “한국교회는 교파분열이 심하고, 사이비 이단종파가 많으며, 품위 없는 성직자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물질주의로 나타나는 탐심과 성적 타락은 그 배후에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세대주의 신학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달비는 유럽과 뉴질랜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세대주의를 보급하였고 많은 사람을 형제교회(Brethrenism)로 회심시키려 시도하였다. 그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1883-1897에 연례적으로 열렸던 Niagara Bible Conference를 통해 전파되었다. 많은 침례교인과 감리교인, 그리고 장로교인들이 그의 신학적 전제를 수용하였지만 기존교단에 대한 비판으로 교단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정통교단을 떠나지는 않았다.

 

1920년대 당시 자유주의가 성경적 가르침을 거부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대주의자들과 프린스톤 칼빈주의자와 같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달비의 세대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 그의 종말론은 미국 근본주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C.I. Scofield Reference Bible은 50년 동안 3백만 부가 팔렸는데, 그 영향으로 Biola, Moody, Dallas, Grace와 같은 신학교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종말론을 가르쳤다.

 

달비는 개신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부인하였다. ⑴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인이 된다는 ‘전가설’, 즉 이신칭의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놀라운 교환’(wonderful exchange)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가진 죄를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는 교리이다. 신학자들은 이 교환을 전가(imputation)라고 부른다. ⑵성도의 성화과정에 필요한 십계명의 규범적 기능을 부인하였다.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를 부인하였다. 결국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신학을 바탕으로 사역하였다. 결국 십계명을 무시하는 도덕률폐기론, 즉 율법폐기론이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신학의 극단적 열매가 구원파의 회개무용론, 도덕률폐기론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세대주의 신학의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율법과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점진적 계시와 관련하여, 한 세대는 하나님의 경륜 안의 한 단계다. 1960년대 초부터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이단은 다미선교회나 구원파만이 아니다. 지방교회의 사상적 뿌리도 세대주의다. 기존교회 안에서도 특히 극단적 세대주의 신학(ultradispensationalism)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 이스라엘이 독립하던 해 1948년으로부터 한 세대되는 1988년 전후에 예수가 재림하고 신자들은 휴거된다고 가르치던 대형교회 목사들이 있었다.
 

2. 세대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언약신학)은 어떻게 다른가?

 

세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떤 특별한 계시에 순종하는 것과 관련해 인간이 시험받는 기간”이다. 세대주의는 구약은 율법시대, 신약은 은혜시대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세대의 수: 바울은 적어도 세 개의 세대를 언급한다. 현재 이전의 세대(골 1:25-26), 현 세대(엡 3:2), 그리고 장래 세대(엡 1:10). 이 세 세대는 네 번째 세대를 요구하는데, 율법 이전 세대다. 그리고 율법 이전 세대는 다시 두 개로 분류되는데,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로 구분된다. 성경의 전천년설적 이해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다섯 세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7세대는 노아홍수 이후의 한 세대와 아브라함의 부름을 계기로 한 또 한 세대를 상정하고 있다.

 

세대주의신학은 문자적 해석원리를 따른다. 이 해석원리를 적용하다보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분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약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오순절 날 시작된 것으로 본다.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도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해방된 것이지 율법의 도덕적 교훈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즉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세대주의 신학의 맹점이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외면하고 은혜만을 강조하다 보니, 유병언과 구원파 교인들의 삶에서 보듯이, 양심의 가책이 없이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고 탐내고 살인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새대주의의 우산 아래서 수 많은 이단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세대주의를 이단이라 할 수는 없지만 유사기독교의 나쁜 신학이 틀림없다.

 

언약신학: 하나님은 행위언약에 실패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을 준비해 주셨다. 은혜언약의 핵심내용은 누구든지 자기의 노력이나, 자기의 선이나, 자기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영생을 소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은혜언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영생과 부활의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고 노아와 언약을 맺고 최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맺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이삭, 야곱과 모세, 다윗과 언약을 맺고 점진적으로 그 뜻을 계시하셨는데, 모든 언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 ‘야곱의 후손’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단수 ‘자손’(seed)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수로 적혀 있는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결국 이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영생의 복을 얻게 되리라는 은혜언약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구약시대에는 그림자와 예표를 통해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시대에는 실체를 보고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는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그림자였고 예표였지만, 시 언약은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주신다는 그림자를 폐한 언약이다(피영민, 2015).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은 다른 법이 아니다. 신약과 구약에는 연속성이 있다. 각 법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그리고 두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종용하는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개혁신학(Reformed Tradition)은 멜랑히톤, 루터, 칼빈과 쭈빙글리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모세의 법에는 도덕적이고, 의식적이며, 시민적 측면이 있는데, 도덕법에는 ①시민적, ②영적, ③규범적 3가지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본다. 언약신학은 타락 이후 하나님은 하나의 은혜 언약 아래 역사하신 것으로 본다. 통일된 특징은 은혜의 언약이며 그 언약 아래 있는 구원적 계획이 있다. 구약에서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구약의 언약은 기대적 성격이 있고, 신약에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취된 구원으로 그 언약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이단집단과의 논쟁을 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교회역사를 보면, ‘율법’(말씀)과 ‘성령’, 그리고 ‘나’ 사이에 세 가지 역학적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⑴말씀을 무시하고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는 경우; ⑵말씀은 강조하는데 성령의 역사를 무시되는 경우; 그리고 ⑶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는 경우이다. 첫째는 율법을 배격하고 성령의 직통계시만을 강조하는 율법폐기론자의 경우로 율법을 폐하고 마음대로 살려던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에는 성령 사역의 이름으로 다락방 운동(가계저주론, 조상 죄), 신사도운동(제3의 물결과 같은 현상적인 집회), 알파코스와 은사남용, G-12와 견고한 진, 쓴 뿌리, Soul Tie), 귀신론에 기초한 내적치유 운동이 행해지고 있으나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이단들 가운데 김기동 베뢰아 운동, 변승우의 큰믿음교회 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둘째는 말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로서 율법주의 오류에 빠진 이들이다. 율법주의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런 율법주의자의 문제점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한 다음 자기 의(義) 사상에 빠지는 데 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율법을 지키려는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말씀을 따라 생활하려는 노력이 강조되는 것에 비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배제되는 성향이 있다. 세 번째는 받은 바 이신득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약 130년에 이른 한국교회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매우 극적인 내용들 때문에 듣는 자들은 쉽게 거기에 빠져들어갔다. 예수의 재림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이단집단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뼈대를 둔 것은 그 매혹적인 극적인 정황 설명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세대주의 사상은 한국교인들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권호덕). 세대주의 사상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무천년 왕국설이 본격적으로 우라나라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3. 율법이란 무엇인가?

 

존 파인버그(John Feinberg)에 의하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삶의 규칙(rule of life),”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계명들(commandments)이다. 율법은 넒은 의미로 성경전체, 중간적 의미로 모세 오경, 좁은 의미로 십계명을 가리킨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인 십계명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두 돌비에 새겨졌다. 첫 번째 돌비에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나와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 나와 있다.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대신(對神)관계가 기록돼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대인(對人)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율법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참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지침서, 즉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백성에게 영속적 관계를 위해서 항상 율법을 주신다. 율법에는 제사법적(ceremonial) 차원과 시민법적(civil) 차원, 그리고 도덕법적(moral) 차원이 있다. 세 차원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는 주로 제사법(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을 다루고, 신명기는 도덕법을 기록하고 있다. 의식적인 제사법은 금식과 침례(세례), 할례, 유월절, 정결법, 십일조 등과 관계되는 것이고, 시민법은 소송문제, 안식일, 결혼, 노동과 같은 신자들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룬다. 도덕법은 안식일을 제외한 십계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것이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나 언제든지 타당하게 적용되는 영구불변의 항존법(standing law)이다. 제사의식법은 신약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신약시대라 해서 십계명이 폐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세대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신약에 와서 도덕법은 더욱 굳게 세워지고 있다(마 5:19; 롬 3:31). 신약에서 율법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한 데 묶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순종하고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구원파는 성경과는 너누 거리가 먼, 매우 위험한 율법이해를 하고 있다. 율법을 너무나 좁게 이해하고 있다. 율법을 설명할 때, 성령과 인간 사이의 역학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성화를 위해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율법은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떤 가치가 있는가?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살리고, 교육시키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피영민, 2008).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따르면, 비신자는 율법을 순종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인해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은혜에 의한 구원에 감사드릴 길을 마련해주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보여줄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성령은 또한 율법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며 회개케 하신다. 모세의 율법의 규범적이고 일차적인 용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법의 근간이 된다.

 

출애굽기에서는 십계명을 계속 ‘증거판’(Testimony)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계시다. 따라서 이 뜻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거역하면 진노하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드러난 것이다. 다음의 ‘율법의 3가지 용도’는 멜랑히톤,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의 이신칭의(이신득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율법의 3가지 용도: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첫째로 율법의 용도 가운데는 악을 제어하는 시민적 용도(civil function)가 있는데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율법은 자기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10가지 계명 중 8가지가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의 형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십계명은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재갈과 같다”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 인간은 저주와 정죄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하는 데 율법의 목적이 있다. 우리는 율법에서 저주와 정죄 소리만 듣는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여Td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인간은 구원파에서는 율법의 죄를 인식하고 깨닫게 하는 기능만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신학적, 영적 용도(spiritual function)로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용도로서, 율법은 죄를 책망하고 예수를 찾도록 하는 몽학(蒙學)선생의 기능을 한다. 율법은 절망에 빠진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엄격한 교사(몽학선생)인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셋째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세 번째 규범적 용도(normative function)가 있는데, 누구든지 중생하면 율법을 지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수 있도록 기능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중생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죄인은 회개한 후에도 여전히 죄인이고 또 죄인으로 남는다. 율법은 칭의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율법의 제3용도는 중생자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다. 중생한 후에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이 성령은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특별히 십계명을 판단의 잣대로 이용한다.

 

성경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하다(롬 7:12, 14)고 말하고, 율법을 ”하나님의 법“(롬 7:22, 25)이라고 부르고 있다.
 

4. 성도의 행복을 위해 주신 율법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언하고 있다: “내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율법은 원래 구원받은 선민을 괴롭히고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명령과 규례를 지키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율법폐기론이나 불순종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은혜와 사랑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삶이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받은 성도는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히 12:1-3).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죄와 악이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의 근원은 마귀이고 내 안에 있는 악은 바로 죄성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세력, 즉 밖에서 성도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세력과 안에서 거룩과 경건을 방해하고 성령의 소욕을 방해하는 죄성, 이 두 가지 세력과 싸우는 가운데 성화를 이뤄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서로의 관계를 관장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질서 있는 삶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이단 구원파는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기존교회에서 하는 것은 종교요, 자기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구원을 받으면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정통교단은 구원파를 율법폐기론자(도덕률폐기론자들)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 그 교훈과 도덕률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 바울은 사랑으로 율법의 구체적 계명을 준수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엡 6:2).

 

권신찬은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의 내용을 들어,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주일성수, 십일조, 금식, 새벽기도, 기도생활까지도 율법이라고 하여 이러한 규범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과거에 장로교 목사로서 이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려 노력했던 것이 소용이 없었음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제 자기를 괴롭혔던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면서 은혜를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자는 무서운 자기복음을 만들었다(종교에서의 해방, p.43).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하니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는 무엇으로 죄인지 알 수 있겠는가? 알 필요도 없는가. 아니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인가? 도둑질, 간음, 부모거역, 탐심, 살인 등의 죄를 무엇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구태여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성경에서 율법이 폐해졌다고 말씀할 때는 그 율법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모든 율법과 법도 즉 모세의 율법은 십자가로 폐한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할례나 제사제도나 절기 등의 제사법이나 시민법에 관련된 율법이 폐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규례를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하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바울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임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갈 3:11-13).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는 자신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시내산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고 소개하신 후에, 즉 죄의 굴레에서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 이제 너에게 보여준 자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고, 시편 19편에서는 율법의 완전함을 노래하며, 119편에 와서는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절)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한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에서마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의 일부분인 도덕적인 윤리규범은 신약에 와서 다시 강조된다. 도덕적 율법은 폐한 것이 아니라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계명)을 지킬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말씀하신 후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절)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사단은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고 율법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경험해서 죄를 안 짓게 되길 원하신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치 않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정상이다. 친밀하게 사랑하는 관계가 이루어지면, 율법과 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윤동일, 2008).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노력이 율법의 반역을 초래하였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할 뿐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율법에 순종하여 의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한다(롬 7:12).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이 선한 것인 줄 안다고 말했다(딤전 1:8).
 

5.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을 주신 시기는 출애굽 후, 즉 구원받은 후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의 삶의 지침서이다. 은혜가 감사해서 주를 위해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이다. 최고의 경건은 계명 준수를 즐기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순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불순종으로부터의 자유다.” 율법을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유도하는 종교는 하등종교, 사이비종교가 분명하다.

 

율법과 은혜.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쳐놓은 원인 중 하나다...하나님의 십계명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국의 기독교는 은혜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은혜 언약으로 가는 예표요, 단계다”(피영민, 2007).

 

성경에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등 많은 언약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다. 그것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이 여러 가지 언약들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는 “약속의 언약들”(Covenants of the Promise)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약속은 단수로 되어 있고 언약은 복수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한 가지를 이루는 여러 가지 언약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가르침(언약)이나 나의 가르침은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준 언약과 모세언약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으로 볼 수 없다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신 백성들에게 삶의 원리가 된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가야 할 삶의 원리이며 규칙이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세언약은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삶의 원리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에 두고 십계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항상 거룩하고 완전한 계명을 늘 기준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자복함으로써 죄씻음을 받고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은혜가 공짜라고?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이다. 우리는 흔히 은혜는 공짜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씨뿌림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목적으로 하는 투자다(마 13:1-7).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하 반응과 철저한 청산이 강조된다. 은혜는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투자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우리 속담은 성경의 은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관계중심적인 체면사회에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 거저 주어지는 공짜 선물이란 개념의 은혜는 없다. 선물은 자발적인 순환을 요구한다. 선물(은혜)을 받은 사람은 자발적인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은혜의 조건은 먼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고(엡 2:9), 다음 조건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10절). 신약성경은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충성스런 삶을 요구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투자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자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이민규, 2014).

 

갈라디아서는 신실함과 순종의 삶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갈 5:16).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갈 5:21).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신자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싫어하게 되고, 죄에 대해서 저항하게 되는 새로운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서는 죄와 투쟁하는 거룩한 삶의 새 질서가 시작된다. 존 웨슬리가 가르친 것처럼 ‘완전성화’란 신자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완전하게 자신의 죄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죄를 즐거워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죄에 끌려가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즐기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요 16:8).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져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다거나 율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 요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도덕률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율법에 작별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해야 한다“(로마서 7장 강해, p.27).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는 그 결과로 삶 가운데 선한 행위를 보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의롭게 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선행은 어디까지나 이미 우리를 새롭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행위다. 선한 일에는 거창한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중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은 영역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세속적인 일’과 ‘신성한 일’(거룩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마틴 루터도,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아니라 설거지와 빨래하기, 낙엽치우기, 기저귀 갈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5.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들: 예수님의 재림과 세대주의 종말론

 

사도 요한이 본 천년왕국 비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는(계 20:1-10) 2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은 흥분과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 과정에서 세 가지 기본적 입장이 확고해졌다. 그 세 가지 입장은 각각 재림이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는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천년왕국 후에 재림이 있다는 ‘후천년설,’(postmillennianism) 그리고 재림 이전이나 이후나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다.

 

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전천년설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는 천년왕국의 천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무천년설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천 년을 지금 천국에서 이뤄지는 죽은 성도들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쟁과 기근, 지진과 같은 징조가 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며, 배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장으로서 본다. 교회시대의 정점은 휴거이며,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실한 제자들은 ‘공중에서’ 만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여실 것이다. 이렇게 참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면, 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악마적 통치를 시작하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위에 쏟아진다. 이러한 대환란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군대와 함께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를 모두 처부순다. 그 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시점)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서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도록 만들었다. 1992년 10. 28. 휴거설을 주창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는 소속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무시한 채, 강제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회개하게 만들었다.

 

연대기적 해석을 하게 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시키고,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 개념으로 분리시켰다. 율법은 모세와 행위와 연관된 반면, 은혜는 그리스도와 믿음에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은 결코 구원이나 칭의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스코필드(Scofield)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을 칭의하지도 않고 신자를 성화시키지도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 성향은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킨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등한시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환상적인 이상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유토피아나 지상천국을 약속한 이단종파에 미혹되어 현실의 삶을 망친 경우를 많이 목격하고 있다.

 

무천년설에서는 천 년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고 완전수인 10을 세 번 곱한 충만 수로 봐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본다. 천 년이란 교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승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칼빈과 어거스틴도 이 입장을 취했다. 천년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충만한 기간을 천 년으로 보는 것이다. 천 년은 단지 택한 백성을 전부 구원할만한 충분한 기간이다.

 

20세기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전했던 세대주의전천년설은 성경을 벗어난 매우 불건전한 해석이다(피영민).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대부분 이 세대주의전천년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고 있는 구원파와 같은 집단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차츰 이 주제에 마음을 빼앗겨 정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이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혼의 건강에 위험한 것은 없다. 러시아, 이집트, 이스라엘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에스겔서 37,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 그밖의 예언적 관점에서 여러 시기나 경우를 계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하며 전생애를 투입하게 되기가 쉽다. 한편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등한히 될 수 있다. 물론 예언적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래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나머지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들의 일차적인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14:36).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 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 7). 우리는 복된 소망을 갖고 현실에 더욱 더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더 충실히 감당하며 충성하고 봉사할 때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이다(마 24:36; 벧후 3:11,12).

 

우리는 특별한 ‘종말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때로서,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시기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선견자 요한처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세에는 네 가지 징조가 있다: ①사람의 징조 “미혹”이다(마 24:4); ②환란의 징조 “난리”이다(마 24:6); ③자연의 징조 “재난”이다(마 24: 7-8); ④종교적 징조 “이단”이다(마 24: 11, 23-24). 우리 모두는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한다.

 

우리는 재림이 가까워진다는 핑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살전 4:11).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를 맞아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불신자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시간과 시기에 대해 성도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서적

 

권호덕.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그리심, 2003.
김민규.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새물결플러스, 2014.
스탠리 그렌츠. [누구나 쉽게 배우는 신학]. CUP, 2000.
이인규. [평신도들이 혼동하기 쉬운 성경 50]. 카리스, 2014.
피영민. [신약개론]. 검과흙손, 2015.
Walter Elwell.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1984.

정동섭 cantoncrc@gmail.com

 

출처: 최덕성 교수님의 리포르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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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 신자의 바른 태도 - 김홍전 박사

 

 

개혁 교회의 신앙이라고 해서 개혁 신앙과 신학을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개혁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개혁 신학’이라는 체계를 죽겠다고 쥐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면 깨닫고 거기에 자기를 비춰 보고, 자기 자신의 사상 체계를 비추어 보아서 완고한 것이나 그릇된 것이나 자기 식 생각에 그냥 서 있으면 다른 것을 평가하는 평가의 척도나 혹은 원칙(principle)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언제든지 다시 신선하게 비판해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옳다고 확신하고 받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도리를 좀 더 받아 가면, 그 거룩한 도리를 좀 더 알았다는 새로운 지식의 터 위에서 그것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비추어서 확인해 보고 옳은 것은 더욱 확신을 가지고 굳혀 가고 미비한 것은 보충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 정신의 태도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뿐 아니라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것은 옳다’ 하고 한번 정해 놓으면, 거기에 의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교 행동을 하고 행사를 하는데, 그러한 종교 행동이나 행사에 대해서 덮어놓고 맹종(盲從)하고 맹목적으로 나아갈 때에는 거기에 무서운 오류가 스며들고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또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법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자리를 어떻게 취하고 있습니까? 가령 데살로니가 사람과 같이 자꾸 설득해야 비로소 그 말을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베뢰아 사람과 같이 말씀 자체에 깊이 들어가서 받은 내용을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증험하고 확인하고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덴 사람과 같이 무슨 새로운 소리를 자꾸 해 주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흥미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말씀의 내용을 깊이 가르치고 그것을 들어 버릇하면 자꾸만 새로운 소리를 듣기 원하는 폐단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기네의 생활에는 별로 접촉이 안 됩니다. 아덴 사람들이 바울에게 새로운 소리를 듣기 원하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리를 새로운 소리라고 전하지 않고 어떤 미지의 신의 단, 즉 알지 못하는 신의 단이라는 것을 인용해서, ‘너희 속에 있는 이미 있는 것을 내가 이야기하겠다. 너희들은 벌써 단까지 만들었다. 그 미지의 신이라는 것이 너희 속에 갈구의 대상으로 있지 않으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하겠다’ 해서 새로운 소리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변증, 혹은 변론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에 비추어서 우리를 돌아볼 때에, 우리들은 항상 말씀을 들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자기를 다시 도마 위에 놓고 총 평가를 하고 붙일 것을 다시 붙이고 잘못된 것은 다시 제거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항상 우리에게 반복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말씀을 이론으로만 자꾸 가지고 있습니까? 개혁 신학이라는 이론을 신학교 가서 쭉 배우면 별수가 생깁니까?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서적들을 다 읽어 가지고 신학을 섭렵(涉獵)해서 안다고 해서 별스럽게 하나님 나라에 큰 보탬이 될 만한 것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능력으로 나에게 존재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하신 대로 능력에 있어야 합니다.

김홍전,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232-235쪽에서

 

http://cafe.daum.net/churchinsejong/1T4Q/236

 

 

출처: 영적분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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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며 성령으로 새롭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비록 육체의 범죄와 육체의 언약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 했다 할지라도 죄의 지배와 그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다.

 

 

제 2 장

 

인간이 불완전함으로 범하는 날마다의 죄와 결점은 성도로서의 최선의 일을 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죄와 결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낮추게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만 의지하도록 만드는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으로 기도하며 경건을 연습함으로써 더욱더 육체를 제어하고 완전한 목적을 향하여 나감으로 마지막에 이 육체의 죽음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어린양과 함께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제 3 장

 

이 죄에 거하는 성도들, 또한 이 세상의 사단의 유혹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이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 끝까지 자비로 지켜주시고 능력으로 보존해 주신다.

 

 

제 4 장

 

믿는 자들을 은혜 속에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연약한 인간이 거스릴 수는 없으나 회심한 이후에라도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성령 안에 항상 거하지는 못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죄에 빠져 육체의 정욕에 유혹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을 게을리할 때 성도라도 육신적인 이 세상의 사단의 크고 무서운 죄에 빠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실제로 이 죄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과 베드로와 그 외의 다른 성도들이 연약함으로 인하여 타락에 빠진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제 5 장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심히 거스리는 죄를 범함으로써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고 믿음의 사역을 방해하며 그들의 양심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고 잠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기도 하는데, 이럴 때에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그 길에서 돌아서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빛이 그들에게 다시 임하게 된다.

 

 

제 6 장

 

하지만 변함없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기초한 그의 풍성하신 은혜는 비록 성도들이 심각한 죄에 빠져 있을 때라도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은혜를 잃음으로 의인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고통 가운데 방치해 두거나,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며 전적으로 타락되어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하시지도 않으신다.

 

 

제 7 장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멸망에 빠져 있는 이 세상 중에서도 결코 썩지 않는 마음의 씨를 보존해 주신다. 다시 말해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새롭게 되고,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속에 탄식하도록 함으로 중보자의 보혈로 죄사함을 얻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음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두려운 마음과 수고로써 그들 자신의 구원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역사하신다.

 

 

제 8 장

 

그러므로 믿음과 은혜에서 전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며 범죄로 인한 멸망에서 우리가 구원된 것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비록 인간은 실수하여 범죄함으로 마음속에 결심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거나 실패하지 않으며 그 약속이 취소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도고의 기도 그리고 성도를 보호해 주시는 그 모든 것은 성령의 인치심으로 되는 일이므로 결코 좌절하거나 무효화되는 일이 없다.

 

 

제 9 장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지닌 믿음의 정도에 따라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심과 믿음으로 성도를 보존해 주심에 대한 확신을 갖는데, 이 확신을 따라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의 참 지체가 되며 앞으로도 계속 지체가 된다는 사실과 죄사함을 얻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다.

 

 

제 10 장

 

그러나 이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해 주는 것과 어긋나는 그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그 계시된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의 믿음으로만 이뤄지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기업이 된다고 말하는 성령의 증거로서 되는 것이다(롬 8:16). 또한 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 선한 일을 이루도록 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대한 약속을 소유하지 못할 때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제 11 장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신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육신적인 의심으로 마음의 갈등을 갖게 되며 심한 유혹으로 믿음과 성도의 견인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성도를 견인토록 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고 다만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전 10:13).

 

 

제 12 장

 

그러나 성도를 인내하도록 하신다는 이 확신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안일함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겸손한 마음과 충성심, 참된 경건함과 모든 시험 중에서의 참음, 그리고 뜨거운 기도와 인내심 그리고 진리를 고백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인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 이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한데,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 성도들이 체험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제 13 장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내하게 하신다는 이 확신은, 죄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함을 무시하고 세상적으로 나가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서 정하신 길 안에서 조심스런 마음을 계속 가져서 그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 사랑을 남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양심이 고통을 받는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제 14 장

 

복음을 외침으로 하나님을 기뻐시게 했던 것같이 우리 속에서 이 은혜가 역사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해 주시되 그 말씀을 듣고, 보고, 묵상하며 또한 이 말씀에 의하여 권면하고 책망하며, 그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여 성례를 행하게 하심으로 그의 성도들을 지켜 주시는 것이다(견인의 방식).

 

 

제 15 장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에 관한 이 교리와 계시된 말씀 속에서 충분히 나타난 확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만 자신의 이름의 영광과 성도를 향하신 위로를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를 미워하고 이 세상도 이를 조롱하며,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이를 남용하고 이단들도 이를 적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은 날마다 이 사랑을 갖고 마치 놀라운 보배를 가졌듯이 이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도를 보호해 주실 것이요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께만 영원토록 영광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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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선택’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조엘 비키

 

 

첫째로, 조건적 선택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선택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경의 선택 교리는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 아주 오래전에 설계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를 자유롭게 선택하신다는 교리이다(계7:9-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얻을 방편을 마련해 놓으셨다(엡1:4,5).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고 믿음과 회개로 이끌어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고 보존하시며, 그 택한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영화롭게 하신다(롬8:28-39,살후2:13,14,딤후1:9,10). 그리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을 죄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롬9장).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내재적인 선함 때문에(고전1:27-31), 혹은 그들이 언젠가는 믿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조건적인 선택은 우리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범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영광을 가로채고 만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 교리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택자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고난과 죽음에 내주셨던, 주권적으로 선택하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스펼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인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죄와 저주를 받아야 하며, 구원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멸망받을 자를 멸망받도록 선택하신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조건적 선택은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조건적 선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타락한 인간 존재에 구원의 기초를 두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반면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지 않고, 천국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을 천국에서 물리치시고 to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그러므로 경이로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의롭게 거절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 한사람의 죄인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터스 스트롱,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적은 수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불의하시다고 건방지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더 찬미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덕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불의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선택하신다는 이 신비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존 라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신자는 선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미하게 될 것이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21-123

 

 

출처: 청교도의 길  http://blog.daum.net/kds201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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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노트(원종천교수님)-루터의 신학
글쓴이: 유니짱   06.06.22   http://cafe.daum.net/assistantpastor/1vjF/4

 

 

루터의 신학

원종천 교수


3/6

루터 당시의 신학과 현 시대의 신학과의 차이와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루터 글 자체를 읽어야 한다.

1차 자료가 중요하다...

기본 교재 : 루터 저작선

강의 방법 : 강의, 발표, 평가

지정 도서 : 루터 전(영문)선집(국문), 저작선, 2차 자료

성적 평가 : 루터 저작선의 한 부분을 가지고 연구, 씨름, 발표

           중간고사, 기말고사(오픈 북)

강의 : 3-4주 강의, 발표, 평가

과제물 : 매주 읽은 분량(발표 분량)을 읽어와야 한다.(for 토론)

        추가 과제물: 한 주제에 대해 한 페이지 내용으로 적어와야 한다.

주제: 사도신경, 주기도문 - 요리문답에 관한 설교들 1528(루터저작선 265-302)


*역사신학은 사상(신학)이 가장 중요하다.

*사상이 흐름을 주도하고, 사람의 마음과 심령을 주관한다.

*부흥운동도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부흥에도 사상의 틀과 내용이 있다.

*회심의 성경이 조금이 다르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에는 조직신학이라는 말이 없고 역사신학에 포함되어 있다.

*루터가 무슨 생각을 했고, 왜 했는가는 찾아내야 한다.

*사상에는 분명한 배경이 있다. 상황에서의 필요성과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당시의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요구와 질문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도 그 시각이 다르다.

*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16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 2차 자료를 볼 때, 루터의 신학의 사상에 대한 논문들을 보지 말고,

  루터가 살던 당시의 1)역사적 상황들을 보도록 해라.

약간의 상상이 필요하다.

2)역사적 배경 - 그 당시 전시대 상황을 봐야 한다. 그 시대의 사상을 봐야 한다.



3/13


1. 역사적 배경 - 사상적 배경(중세말, 14-15세기)

약간의 상상(추론)이 있어야 한다.


1)인문주의 배경(Humanism) -르네상스에서 나온 학문의 방법. 중세말

기독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성경해석학이다. 문헌연구가 발달(고전연구가 발달)

고전을 원문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 성경학자들이 성경에 도입(성경해석학)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는 사상방법론의 근원을 형성

- 문법, 역사적 해석방법(grammatical-historical)

: 고대문헌의 문법을 (그 의미대로)그대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문자적 해석), 영해하지 말라

영해에 대한 반발(알레고리컬 - 4가지 의미가 있다): 교회가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을 이용해서 했다고 봄,

거기에 대한 반발 루터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의도적으로 지키려고 함 -   한계를 느낌

 (대표적: 아가서-루터는 노력을 했지만, 칼빈은 침묵으로 일관)

루터는 영해에 대한 부담을 느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해할 수 있음을 인정

역사적 방법 - 본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연구.

역사적인 의미를 충실히 연구해야 한다.

루터는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


- 논리학이 경시되는 경향이 나타남 - 중시시대에 성경을 연구하는데 많이 사용되는 방법론이었다(스콜라주의, 철학),

     그러나 더 이상은 안된다.

논리학 대신에 수사학(어떻게 내 의견을 잘 전달할 수 있는가?, 저자의 전달 방식을 연구, 설교학과 비슷),

문헌학(문법, 역사적 방법이 총망라, 누가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떠한 글로 전달하고 있는가?

문헌연구)이 발달 적용이 중요시 되었다.(설교가 될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의 학문(신학)이 경건과 분리될 수 없었다.


2)교회의 타락(부패)

- 윤리적 타락(종교개혁자 대다수가 동의), 성직자들의 타락, 수도원의 타락(포괄적 타락)

- 종교 개혁의 힘의 원동력이 된다.(교회타락에 대한 분노) : 철저하게 폭로


* 루터 한 사람이 위대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가능했다.

  (인문주의라는 도구, 교회의 타락이 있었기에 가능)


루터에 있어서 윤리, 도덕의 강조가 있었다.

‘이신칭의’에 가려져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개신교의 정치세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 바로 정치세력의 윤리문제였다.

(윤리문제가 중요)

- 교회가 분열

- 교회가 (세속)정치화

- 영적인 무능력


3)공의회 주의(Coneiliarism) - 교회정치와 관련

-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론(이신칭의)’였다. 그러므로 교회정치는 좀 밀려 있었다.

- 마틴루터가 카톨릭과 논쟁할 때 교회정치에 대한 얘기가 1519년에 벌써 나오기 시작한다.(라이프니츠논쟁)

- 카톨릭에 있어서 가장 관심은 교회정치에 있었다.

  (권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 교황과 종교회의의 관계(권위) :

종교회의를 교황의 권위 위에 두려는 시도(종교개혁전(위클리프의 공헌)의 종교개혁)

1814-1818년까지 종교회의를 위에 두었지만, 얼마가지 않았음. - 큰 의미가 있다.

교황의 성경적 권위가 없음을 밝힘.

- 종교회의도 무오하지 않다고 봄(공의회보다 한 단계 더 나간 의견)

루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진술(1519년)이 됨(후스가 할 말의 반복이다),

 루터는 ‘성경만이 무오하다’고 말함.(궁극적 권위를 ‘성경’에 둠)


4)스콜라주의(Scholasticism)

- 방법론

: 지극히 철학적(헬라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논리적(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충되는 내용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믿음(윗영역-삼위일체)부분도 인정,

                              그러나 대부분이 이성으로 이해) 

         

:실제론(realism)이란 개념이 들어가 있다

   - 보편(universal,전칭,원형-완벽한 실재(선,악의 완벽한 것이 있다,

     이성(Logos, 신의 이성, 인간에게도 있다)이 그것을 꿰뚫어 알 수 있다)가 존재)

     신학도 이성으로 할 수 있다.

   - 개별(특징)

-내용

: ①성경의 범위 초월(논리적 추구로 교리가 성경의 범위를 넘어갈 수 있고, 있다고 봄)

 ②신앙적으로 불필요할 내용이 과다(신앙과 교회에 도움이 안되는 것이 많음)

   -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 그 이유이다(근거가 불분명(비판))

 - 구원론

  ①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주입) 한다.(성령께서 역사하신다) : 전적 하나님의 은혜

      -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전제

  ②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 해서 윤리적인 협동(선행)이 일어난다. : 공로가 된다

        (신인협동협동설, 공로설)

  ③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신다.

*루터는 헬라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철학(선한 사람의 개념 -  ①하나님께서 선의 기질(능력)을 주셔야(주입) 한다.

  ②열심히 선행을 노력해야 한다.   ③1번과 2번이 합하여 선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됨)의 영향으로 이러한 교리가 나왔다고 봄.


변형 ; 한 단계가 더 추가(유명론자들의 구원론)


①자연인의 선행노력(하나님께서 은혜주입을 주시는 기준이 됨) - 공로

②하나님의 은혜 주입

③윤리적 협동 - 공로

④영생

* 루터가 철저히 비판

(1510년 전 어느 쯤에 유명론자(스콜라주의자들의 붕괴에 공헌, 보편이나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 개별적인 것만 존재,

 보편은 이름에만 존재한다. 하나의 약속일 뿐이다.   대표자 : 오캄(Occam, 공의회주의자), 교황청에 대한 반박으로 나옴,

 교회개혁차원에서 나옴) 들의 잘못을 앎,  시편 강해 시 이러한 구원론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함)


5) 신비주의(수도원중심) - 하나님의 은혜 + 공로사상

루터 자신이 이 안에 들어가 있었다(수도사)


- 금욕주의

신학적 요소 중 하나가 공로사상이다.


- 수도원영성

새순교주의(안락한 생활로 인해 나태해진 그 전 순교에서 나타난 영성에 대한 갈망)

: 나를 쳐서 죽이는 영성(순교의 영성을 재현시키고자 하는 노력)

물질적 가난(소유욕의 차단)의 내면화(영적화)

: 새순교와 연결, 중세말에 물질적 가난이 영적, 내면화 되면서 영적, 내면적 가난을 주장

: 내면을 비우고, 동시에 기도를 통해서, 말씀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로 채우는 것.


* 루터가 1519년까지 긍정적으로 생각 (스콜라주의에 반해서 긍정, 공로사상을 발견하므로 부정적으로 봄)


2. 역사적 상황

루터가 태어난 당시 1500년 정도


1) 정치

 - 군주 : 내부평정과 외세축출(근본적 대상: 로마교회, 교황청)의 역할을 함(군주의 세력이 강화),

          민족주의(국수주의)가 강화

          독일 - 선제후의 힘이 강화(교황과 교황청에 대한 반감) :루터가 도움을 받음.


2) 사회적 상황

- 중상층(자본가)들의 형성 : 정치, 사회적으로 변화를 요구.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참.

- 인쇄술이 발달 : 루터의 사상이 전파되는데 문화적 도움을 줌.


3)종교적 상황

- 성직자들의 부패와 연결 : 영적 갈급함, 신앙이 미신화 되는 현상이 나타남.

           성례제도(7성례)

            - 고해성사(참회, 고백, 면죄, 보속)가 가장 영향을 미침.

             *13세기(1215년)에 공식화, 명문화

             *14세기(1343년)에 교회가 신학적 근거제시(‘공로의 보고’사상)   

             *공로의 보고 사상 - 잉여공로(예수그리스도, 마리아, 성인 등)가 교회에 축척되어 있다.

                 교황이 분배(면죄부 매매)가능.

             *15세기(1476년)에 이미 죽은 자를 위해 공로를 사 줄 수 있다는 신학 제시

             (보속의 문제와 연결, 합당한 형벌을 주는 것(정통-원래 죄사함과 상관없다. 왜곡이 됨: 루터가 비판))

- 연옥의 공포에서 살았다. 족쇄로 채우는 형태를 가졌다. (루터는 여기에서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 루터의 글을 보면, 울분과 분노, 애국심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교회의 부패에 대한 분노)


**** 이러한 배경과 상황 속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을 성공할 수 있었다. ****

* 루터는 새로운 것을 제공한다. 루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운동화 되어 버림.


3. 루터에 대한 이해

*신앙적 관점

-성경을 이해하려고 했던 신앙적, 신학적 통찰

-시대상황과 맞물려 엄청난 운동이 됨

-중세시대가 개혁운동이 될 만한 요건들을 갖추고 있었음.


1) 루터의 생애(1483-1546)

- 루터의 고뇌(수도사가 되기 전후 시기)

(1) 자신의 죄의식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없는 것.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거룩함으로 설 수 있는가?”

          * 교회의 대답 : 하나님의 은혜(성례, 객관적인 영적 실체가 주입된다고 봄.) + 자신의 선행(공로사상)

                루터의 질문 : “어디까지 선행해야 하는가?”

                            아무리 통회, 자백 해봐도 거룩하게 되지 않음을 자각.

                            스타우비츠(Staupitz)의 조언이 있음.


- 1512년에 신학 박사학위(성경학)를 받음.

- 1513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시편 강의 - 복음적 내용을 습득)

- 1513에서 1519년 사이에 회심체험(기도탑 체험) : ‘하나님의 의’ 개념과 연결

  하나님의 공의 심판 개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개념으로

  연결해야 함을 깨달음. 하나님의 의가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응징적 의’가 아니라 ‘구속적 의’로 이해.

내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로를 만들어내셨기에, 그 공로를 믿음으로 


James Kittelson, Luther the Reformer를 참고...



2) 95개 조항(면죄부와 관련된 신학적, 교회 관련된 문제)

-1517년 10월 31일, 보속 문제(면죄부)와 관련해서..

- 요한 테쩨의 설교로 인해 자극을 받음

- 보속(형벌개념) 개념 그 자체의 문제

  치리, 훈련(치유, 상담)개념(긍정적의미)▶ 형벌개념(댓가를 치룸, 교회가 제정)

  ▶면죄부(교황의 죄사함(하나님과의 관계)의 개념까지 감)

   :루터가 비판한 부분...

   (교회가 제정한 형벌의 차원에서만 면죄가 가능, 죄사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 배포된 내용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함.

   신학적 관심보다는 교회와 교황청(교황의 권위)에 대한 반감이 작용.

   교황의 권위가 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식.

   교황이 심각한 것으로 인식

 - 1518년, 루터가 아우그스투스 총회에 참석해서 해명하는 기회를 가짐.

   하이델베르그 논제(스타우비츠가 조언, 죄, 자유의지, 은혜에 대한 문제 포함)

  : [십자가 신학]이 나옴 - 반대 [영광의 신학]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것인가’ - 고난과 낮아짐(십자가)속에서 인식가능)

   자연신학을 비판

- 1519년 라이프니찌 논쟁(교회 권위에 대항)


* 루터의 신학

1. 구원론(칭의론)

- 중세)하나님의 은혜를 강조, 그러나 인간의 공로가 들어가 있다.

- 이신칭의 - 공로가 없다

- 오직 믿음(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 결혼으로 표현 - 칼빈에게 영향을 줌)▷연합 ▷죄, 의의 교환

   ▷칭의(외래적(alient) ‘의’(자기의 의가 없다), 수동적(passive) ‘의’, 전가된(impute) ‘의’)

-신비주의 : 독일신비주의에 대해 긍정(이유-스콜라주의가 너무 사색적이 되었기 때문에)

            1)내면적, 체험적, 훈련적, 수동적▷ 긍정적 요소가 많았다.(1518년까지)

           루터가 생각한 문제점 : ①내면적 겸손이 공로적 개념, 역할을 한다.

                                 ②신적 불꽃(영혼의 불꽃, synd(th)eresis,)  ▷인간에게 신적 요소가 있다.

                                    인간의 영혼이 신적인 것으로 상승(버나드는 예외), 공로적 사상이 들어가면 교만해 진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대체

 “믿음이 오직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결혼의 agent이다”


2)유사원칙

“동질의 것이 하나 될 수 있다”

상승해서 올라가서 하나님의 위치가 되어서 하나될 수 있다는 개념(루터가 반대)

루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무능을 인식할 때 하나될 수 있다.(겸손과 회개) - 비유사성


3)사랑(‘선’의 개념과 연결)

루터 - 믿음으로만 가능


2.루터의 성화사상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 ; 외래적 의(칭의)와 더불어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성화적 의)

                          자신을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추호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것,

                          육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 자신에 대해 근신하며, 이웃에게


-믿음이 칭의의 도구라면, ‘사랑’을 성화의 도구로 봄(칭의를 근거로 해서 사랑을 주장)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랑은 사람들과 관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


-“무엇을 가지고 있다면, 내 것인양 하지말고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들어와서 그들을 위해서 사용하라”(사랑의 원칙-이웃사랑)

-첫 번째 의가 신랑의 음성(“너는 나의 것”), 두 번째 의가 신부의 음성(“예,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 첫 번째 의가 근거가 되어서 두 번째 의가 이루어졌을 때, 결혼이 완성됨.(칭의+성화)

-칭의 후 성화 ▷ 선행: 경계시키고 있음(이것을 근거로 의로워지려고 하면 안된다(칭의X))

 

 선행의 이유

①육신의 제어 -수도원에서 말하는 것을 다시 말하고 있음

②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③이웃에 대해 사상으로 자유 가운데 스스로를 복종시켜야 한다.(그리스도인의 자유)



3.루터의 성경관

-루터 신학의 출발은 항상 ‘이신칭의’이다

① 이신칭의 ▷  ②근거: 성경(중세: 성경+전통(루터는 전통을 깨뜨리려고 함))   

 (오직믿음)     (오직성경, 성경의 충분성)

▷ ③성경해석의 원칙

성경은 스스로 해석한다.(성경이 성경을 해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성령의 역사)

성경은 얼마든지 개인적 해석이 가능하다.


▷ ④ 성경은 ‘그리스도’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그리스도 중심적 해석방법)

복음 중심적 해석방법

이신칭의(야고보서에 대해 공격(오해)) 


- 성경을 Unity로 봄(복음)

 율법 - 복음 : 둘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신학적 비평을 사용(성경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작업을 함)

야고보서 -지푸라기

*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용(약점 - 칼빈이 보완)


4. 루터의 인론(죄론)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free choice  신학적으로 로마 카톨릭 신학이다.

-루터 : free will, necessity - 이신칭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

  내 밑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의지(짐승과 같다...

  누가(하나님, 사탄) 타느냐(선택불가)에 따라 달라진다.)가 있을 수 있으나,

  위에 것(구원)에 대해 자유의지, 자유선택이 없다.... necessity밖에 없다.

절대적 신학적 신앙

- 타락의 심각성 - 루터는 완전 타락, 카톨릭은 부분타락

- 카톨릭은 죄의 개념을 개별적 행동으로 본다

  루터는 인간의 죄는 죄성이 너무도 강렬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뒤틀려져 있다.   

  인간은 매순간 죄 짓고 살고 있다. 안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불신앙(1계명과 연결: 자기를 섬기고 삶)인이다.(모든 죄의 근원이다)

 - ‘의’ ▷루터에게 있어서는 ‘시민적 의’(civil righteousness)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의가 될 수 없다(ex)바리새인

- 자유의지의 노예화


5. 루터의 기독론

- 신성과 인성의 존재양식으로 논쟁해 왔음(정통적 기독론).

- 그리스도의 신성쪽으로 많이 넘어옴.

- 중세이후 그리스도의 인성쪽으로 관심을 가짐

  ▷ 버나드(주님의 사랑), 성프랜시스(십자가에서의 고난) : 영성의 근거자료가 됨.

- 루터 :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보게 만듬(요한복음과 관련).

         그리스도 인성과 신성의 결합에 대해 강조.

         (공존설 - 떡과 포도주 강조 “인성이 있는 곳에 신성이 있다.”)

- 루터의 기독론은 사실상 구원론이다.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체험적이 될 수밖에 없다.


6. 루터의 십자가 신학

- 계시의 신학 : 추론의 신학이 아니다(이성, 논리추구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방법론을 비판

               스스로를 계시해 준 하나님을 안다.

- 간접적, 숨겨져 있다. : 숨겨진 계시

-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십자가의 비하와 수치 속의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본다.

- 십자가 안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계시의 믿음의 문제이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성례적 신비주의적 연합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령을 제한하는 예배?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 요즘 몇몇의 한국 교회 안에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는 표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물론 맞는 표현이다.  우리가 감히 뭔데 성령을 제한한단 말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의 의미를 남용하여 성경을 통해 전혀 검증될 수 없는 신비체험이나 전통 등을 예배에 도용하기 위하여 사용한다는 사실에 쓴 웃음이 지어진다. 나는 이러한 작금의 현실에 아파하는 한 예배자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한 비유를 통하여 조직신학적으로 나누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방법이 나눠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연주회의 구성요소: 연주회를 연상해 보자. 연주회에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 네 개가 있다: (1) 지휘자, (2) 악보, (3) 연주자, (4) 관객이다. 이 네 개의 요소는 연주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각각의 위치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1) 지휘자: 지휘자의 역할이 무엇일까? 지휘자는 음악회를 총괄적으로 바라보며 연주를 이끌어 간다. 독수리와 같은 눈으로 모든 구석 구석을 살피기도 하고, 음악의 강도와 빠르기등을 조절하면서 말이다.

(2) 악보: 악보의 역할은 무엇을 연주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악보는 연주의 시종을 담고 있는 종이일 뿐 아니라 음악회의 이름을 결정하는 뼈대이기도 하다.

(3) 연주자: 연주자의 역할은 말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반드시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악보대로만 연주해야 한다. 만약 연주자가 지휘를 무시하고 악보를 벗어나 연주한다면 연주회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연주자는 반드시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악보대로만 연주해야 한다.

(4) 관객: 관객의 역할은 연주회를 즐김과 동시에 평가를 하는 것이다. 모든 음악회가 관객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2.예배의 구성요소: 이런 연주회의 구성요소가 예배에도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 구성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예배의 지휘자: 예배의 지휘자가 누구일까? 담임 목사일까? 아니다.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님께서는 예배를 전체적으로 총괄하시며 지휘하신다. 뜨거움이 필요할 때에는 뜨겁게 지휘하시고, 차가움이 필요할 때에는 차갑게 지휘하시며 예배의 시종을 인도하신다.

(2) 예배의 악보: 악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이다. 성경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해 놓은 악보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시금석이 된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연주하기 원한다면 이 악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 악보대로 연주되는 예배만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목사가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계시적이어야 한다”고 쓴 책을 읽었다. 나는 이 표현이 영지주의적 독법을 가능케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가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계시적이어야 한다” 고 말했다면 동의할 수 있었겠다. 그러나 “성경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계시적이어야 한다”는 표현은 많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키는 표현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을 계시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은 성경이 곧 계시의 극치인 특별 계시라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부인하는 것으로 까지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의아해 하며 계속 읽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성경적인 것과 계시적인 것을 분리한 그는 성경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을 “초 성경적”인 것으로 분류하여 예배에 도용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곡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악보에 남이 멋대로 쓴 저급한 악보를 덧붙이려 한 것이다. 명심하자.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경 66권 대로만 연주되는 예배만을 받으신다.

(3) 예배의 연주자: 연주자는 누구일까? 모든 성도이다. 설교자나, 성가대나, 찬양 인도자들만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가 연주자이다. 중요한 것은  예배자는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성령님의 지휘를 따라 말씀대로만 예배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실 때에 그 영을 거부하고 기쁨의 찬양을 대신 부를 수 없다. 또한 말씀에 나와있지도 않은 현상이나 전통 등을 내 기분에 맞는다는 이유로 연주해서도 안 된다. 예배자는 반드시 성령의 지휘를 받아 기록된 말씀대로만 연주해야 한다. 예배자가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순간 이단적인 예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성령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쓰신 성경에 모순되게 예배를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성령 하나님을 빙자하여 성경과 모순되는 것들을 예배에 도용한다면 하나님의 속성(屬性)인 불변성(不變性)과 정직성(眞實性)을 부인하는 악랄한 자가 되어 마귀적 예배자가 된다.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

(4) 예배의 관객: 그렇다면 관객은 누구일까? 성도일까?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도들은 예배를 구경하거나 관람(觀覽)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예배의 유일하신 관객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하여 연주하는 자들이다. 설교자는 설교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청중들은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린다.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요, 청중들이 설교를 듣는다고 예배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같은 예배자로써 예배의 유일한 관객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하여 연주한다. 그러므로 “예배 보러 간다”는 한국 교인들의 발언을 “예배 드리러 간다”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언어학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옳은 게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것뿐 아니라 평가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몇몇의 성도들은 예배당을 빠져나가며 “오늘 예배가 좋았어” 혹은 “오늘 예배는 별로 였어” 말하며 스스로가 예배의 관객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목사의 설교에 강약이 없었다고 예배가 별로였다고 생각하는가? 찬양단의 찬양에 당신이 좋아하는 곡이 없었기에 예배가 별로였다고 생각하는가? 오! 교만한 자들이여, 언제부터 당신들이 예배의 관객이 되었단 말인가? 설교자의 설교에 강약이 있던 없던, 찬양단의 찬양에 당신이 좋아하는 곡이 있던 없던 그 설교와 찬양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에 쓰인 내용대로 선포되고 연주된 것이라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상 진단: 요즘 “거룩한 웃음,” “금 이빨,” “성령주,” “장풍”등의 신비한 현상들이 단지 일어난다는 이유로 교회 안에 무분별하게 들어오고 있다. 더 가슴 아픈 사실은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목사들이 “성령을 제한하는 목사”라는 딱지를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체험한다.  고로 내가 하는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라는 사고가 옳은 것인가? 이러한 생각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잘못된 유추의 오류, 흑백의 오류, 잘못된 인과 관계의 오류,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바로를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는 모세가 애굽에 내린 신비한 현상을 본 후 마음을 얼추 돌이켰다가 애굽의 술객들이 부린 신비한 현상을 보고 마음을 다시 강퍅하게 했다. 일어나는 모든 신비한 현상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을 분별하라고 말하는 게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깨어나라. “내가 체험한다.  고로 내가 하는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라는 어수룩한 논법을 버리고, “내가 체험한다.  고로 내 체험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검증되어야만 한다”는 논법을 붙잡으라. 그렇게 함으로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려져야만 하는 예배를 갈취하고 있는 마귀로부터 예배를 되 찾아야만 한다.

 

맺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성령사역은 비판 받아야 하고, 말씀을 떠난 체험은 판단 받아 마땅하며, 말씀에 검증되지 못하는 경험은 버려져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함으로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배가 한국 교회에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기를 전심으로 기도한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소제목: 번영 신학은 현대판 바알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자기 만족(滿足)을 위해 끊임없이 욕심을 낸다.  이 욕심이 감추어진 체 종교들도 만들어진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 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탐심(貪心: greedy desire)이 온갖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종교의 원인이요 뿌리란 뜻이다.

인간의 이런 타락한 이기심을 가장 잘 만족시켜 주는 종교가 바로 무교(巫敎: shamanism)이다.  무교는 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종교는 인간의 탐심을 잘 채워주기에 인류 사회를 오랜 동안 지배한다.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들 즉 불교나 유교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무교에 흡수 당했다.  종교의 세속화이다.

이 점에서 한국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소개한 ㅅ교회의 ㅈ목사와 그의 동역자였던 ㅊ여목사에 의해 기복주의적인 신학 즉 번영 신학이 한국 교회에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 병 고치는 기도에서 출발되었다.  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번영 신학이 주장되었다.  이를 지지하는 성구가 요한일서 1 2절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번영 신학은 4중 복음으로도 설명된다.

 

구약 시대에도 기복적(祈福的)인 종교가 있었고 이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직전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요단 강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이스라엘에게 미리 경고해야 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8:12-14)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고 안식을 얻은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를 맞았다.  이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종교였던 남신 바알과 여신 아스타롯을 섬기기 시작했다(2:11-13).  이 신들은 농업 신들로 구약 시대의 배금 종교(拜金 宗敎: mammonizm)였다.  창조주 하나님 대신 우상(偶像)이라는 헛된 것을 섬기는 것은 모세 율법이 금했다(20:4-5, 32:21, 삼상12:21).

그러므로 사사(士師)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은 늘 바알 종교와 끊임없이 다투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도 가나안의 기복적인 종교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타락하며 멸망 했다(2:8, 19:4-5).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부보다 내부의 부패와 타락에 연유한다.  말씀의 종교가 물질숭배 종교로 바뀌자 선민 이스라엘도 영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부패하며 내부적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이 때 외부의 공격은 쉽게 이스라엘을 쉽게 무너트렸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현상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기독교에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사회로부터도 불신(不信)을 당하고 조롱 받고 있다.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 교회의 부흥기는 지났고 복음이 들어온 지 100여 년 조금 지나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빨리 탄 불이 빨리 꺼지듯이……  이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에 있다.  달리 말한다면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 종교인 무교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기독교와 한국인의 종교적 정서라는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55475613)

번영 신학이 어떤 점에서 비성경적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로써 그 동안 한국 교회를 기만한 번영 신학 즉 4중 복음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오늘날의 바알인 형통 신학 즉 번영 신학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진 기독교를 새롭게 세우기 위함이다.

 

번영 신학은 신구약 성경 사이 존재하는 계시 방법과 내용상 차이를 전혀 모른다.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1:26)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출발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 하나님은 선악과 규례를 인간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보존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법치(法治) 즉 말씀 통치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종하면 아담과 하와는 낙원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한다면 이들은 낙원을 잃을 것이다.

여기 두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며 그 나라 안에서 누리는 복도 물질적(物質的)일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에 실패하여 낙원을 잃었다.  그리고 에덴 밖에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어렵게 살아야 했다.  타락 전후(前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복의 성경적인 관점은 족장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기 위해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상에서 그를 불러내 보이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게 했다.  마침내 가나안에 살았지만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였다.  그러나 물질적인 복을 충분히 누리며 살았다.  그 조건은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살면 물질로 표현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소명 목적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했다.  그 목적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애굽의 노예로 고생한 이스라엘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함이었다.  마침내 하나님 나라는 다윗 왕국이라는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 형태로 가나안 땅에서 실현되었다.

다윗 왕국은 이방 나라와 구별되어야 했다.  그 구별은 하나님의 율법에 있었다.  율법에 따라 산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일등 나라가 될 것이다.  일등 나라라는 증거는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등등 모든 분야에서 일어날 것이다(4:6, 28:1-14).  이렇게 보이는 형태로 하나님은 구약 시대 자신의 백성을 축복했다.

여기엔 다른 목적도 있었다.  원복음(3:15)이 약속한 메시아에 의해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예언해 주기 위함이었다.  신약 시대 세워질 하나님 나라도 법치에 근거할 것이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복이 결정될 것임을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미리 계시해 주었다.

 

다윗 왕국이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윗 왕국은 결국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참이 아니었다.  참이 아닌 것은 곧 올 참 것을 위해 무너져야 한다(7:18-19, 8:13).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에 의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은 멸망해야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한 동안 사라졌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복을 앞으로 외형적(外形的)인 것으로 더 이상 표현 또는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신약 시대를 연 예수님이 그 좋은 예이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궁이 아닌 목수의 집안에 출생했다.  창조주가 이 세상에 누울 것이 없어 말 구유에 탄생한 이유였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하늘의 복은 세상 것과 완전히 달라서 세상 것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지 않았고 목수의 아들로 자랐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력이나 부귀영화를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나라는 구약 시대와 달리 세상 나라에 더 이상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18:36).  그러므로 세상 나라 방식으로 즉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나 권세를 표현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약 시대 계시의 방법과 내용이 구약 시대와 달리 완전히 바뀌었다. 이에 따라 신약 시대 하나님이 복을 주는 방법도 달라졌다.  눈에 보이는 방식에서 안 보이는 방식으로…… 

산상수훈(5-7)의 팔복(八福)은 이를 잘 증명한다(5:3-10).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복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복을 받을 대상은 이 세상에서 그리 사랑 받지 못할 사람들일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등등……  이들은 구약 시대 찬란한 믿음의 영웅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처럼 어디에도 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았다.  ㅈ목사가 4중 복음의 증거로 내세우는 성구 요일1:2절이 비교적 구약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단 한번만 신약 성경에 기록되는가?  아주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한번의 기록을 보고 구약과 같은 복을 지지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번영 신학은 몇 가지 성구들로 지지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무시하고 관련 성구들만 주장한다.  예컨대 눅4:18-19절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위해 그가 행할 이적에 대한 기록이지 절대로 번영 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  8:28절에서 언급된 합력한 선()은 앞뒤 성구들을 살핀다면 물질이나 경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인 영화(榮華: sanctification)와 관계된다(8:29-39).  그리고 히11:1절을 근거 성구로 들이댈 수 있다.  역시 앞뒤 성구들을 살피면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믿음으로 산 생애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설명하는 성구일 뿐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대속 죽음과 부활로 인해 예수님은 구세주와 만왕의 왕이 되었다.  번영 신학에 의하면 예수님은 마침내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활한 예수님은 이 위대한 성공과 그 결과를 만인 앞에서 보여주며 누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昇天)했다.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권세를 부활한 예수님은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그의 부활로 인해 이 세상에 미쳐질 하늘의 복은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헛된 탐심을 품지 못하도록 부활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영화와 영광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본()을 따라 이 땅의 성도들도 세상 것을 부정하며 하늘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은 신약 시대 철저히 부정되었다.

그러나 반영 신학은 아직도 구약 성경에 연연하다.  그렇게 구약 시대 임시적으로 표현된 그림자 같은 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추구는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로 이미 성취된 참 복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이다.  재림 이후에만 나타날 영화를 소망하며 이런 거짓된 복을 거부하여야 하지만 번영 신학은 여전히 거짓 복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런 거짓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진실한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경고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7:29-31)

 

번영 신학은 성경 진리의 반()만 고집한 결과이다.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의 문제는 대립적인 이분법(二分法)에 따라 성경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오래 수()를 누리고 복을 받으며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지만 그와 반대되는 것은 안 좋다.  즉 행복은 좋지만 불행은 나쁘다.  또는 성공은 좋지만 실패는 안 좋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을 번영 신학은 보인다.

구약 시대 이런 사고가 맞는 듯이 보인다.  족장들의 경우처럼 믿음이 좋은 신앙인들은 마지막까지 수복강령을 누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땅의 나그네로 살았다.  나그네는 정착 삶이 아니다.  항상 떠돌아 다녀야 했다.  어디를 가나 정착 사회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기근 때는 오히려 약탈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105:12, 7:4-6).  

이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성공과 강함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에게도 약한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이 세상에 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1:9-10).  물질적인 복을 누린 것을 사실이었지만 나그네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복적인 번영 신학은 이들이 마치 이 세상에서 거부(巨富)처럼 산 것처럼 과장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번영 신학은 의미를 잃었다.  구약 시대 선민 이스라엘 사회도 부패했다.  이 때 의인(義人)들은 진실한 신앙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당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이지만 이런 사회에서 믿음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시대 의인들은 고난을 기쁘게 받았다. 행복은 좋고 불행은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이 이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뻐했다(34:19).  고난이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됨을 알았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그리고 구약 성경은 고난 자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다고까지 말한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77:19)  고통을 주는 멍에를 오히려 기뻐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3:27-33)  예수님도 말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  이런 성구들은 구약 성경이 번영 신학을 지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대립적 이분법의 문제는 많고 적음, 크고 작음 그리고 높고 낮음 같은 수준과 정도 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수준과 정도에서 클수록 좋은 것이며 작을수록 안 좋다고 번영 신학은 생각한다.  예컨대 일억 원보다 십억 원을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은사나 능력 면에서도 나타난다.  작은 은사나 능력보다 더 큰 은사나 능력을 이들을 더 선호한다.

이에 따라 믿음의 등급과 목회자의 등급도 매겨진다.  하급자는 상급자를 지극히 존경한다.  교회 안과 목회자들 가운데 차별이 생긴다.  하나님의 은사인 능력은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봉사하고 섬기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이분법에 근거를 둔 은사론은 기독교 내에 상하계층을 만들어 목회자들을 계급화시켰다.  사도 바울이 설명한 지체이론(고전12:4-27)의 신학적인 의미를 이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나 능력은 작은가 큰가의 문제라기보다 충성의 문제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탈란트 비유가 이를 잘 증언한다(25:14-30).  하나님의 평가는 번영 신학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하나님 앞보다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더 좋아한다.

 

더 나아가 번영 신학은 믿음의 정도가 물질적 그리고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성공과 출세의 정도가 믿음의 정도로 이해된다.  이들이 구약 식으로 믿음과 복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안 보이는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측량하려 한다.  결국 믿음과 무관하게 부자 신자라면 좋은 믿음의 소유자로 칭찬받는다.  이렇게 기독교와 그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시킨다.

이들의 성경 해석에 크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분법에 따라 번영 신학에 안 맞는 성구들을 모두 폐기된다.  강대상에서 전혀 설교되지 않는다.  그렇게 이들은 성경의 반 쪽만 갖고 신앙 삶을 기꺼이 살려 한다.  이렇게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파괴시킨다.  자기 마음에 드는 성구들만 설교하기 때문이다.  번영 신학은 결국 성경 말씀을 더 하거나 빼고 해석한 결과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4:2, 12:32, 30:6, 22:18-19).

그리고 번영 신학에 또 다른 문제가 발견된다.  번영 신학은 예수님의 구속의 결과만 누리려 한다.  그 복된 결과를 가져온 과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구속의 결과 얻은 복만 강조하려 함으로 그 복을 초래시킨 예수님의 고난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의 복을 주려고 스스로 십자가에 죽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영생의 복을 얻기 위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번영 신학은 성공과 복만 추구함으로 복음을 위한 고난과 헌신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과정보다 결과를 즐김으로 신앙의 성숙이 없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삶의 모든 결과는 예수님 재림 이후 나타나고 이를 위해 성도는 복음을 위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재림 이후에 받을 복을 미리 앞당겨 이 세상에서 누리려 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한다(10:38, 14:22).

 

그러나 구원 이후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리고 그에게 향한다면(11:36) 무엇이든지 예수 안에서 아니요가 아니라 가 된다.

성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은 어느 때는 복을 그러나 다른 때는 화를 보낸다.  이 때 성도는 화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참 좋은 예는 죽음이다.  성도는 죽음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불행 자체이지만 성도에게는 축복 자체이다.  이렇게 구원 받은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점에서 대립적인 이분법에 근거를 둔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번영 신학은 이 세상에 관심을 두게 만들며 재림 이후 완성될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世俗化)이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영리(營利)를 목적하는 세상 조직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부유한 자는 웃고 가난한 자는 우는 그런 곳으로 변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보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4-26)

 

결론

번영 복음은 반쪽 진리이다.  아니 거짓 진리이다.  복음이 말하는 두 면을 모두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번영 신학이 잘못된 그리고 비성경적인 세계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약속의 땅 가나안과 같아 4 가지 모습을 지닌다 (‘요단에서 바라본 가나안이란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98073224).  이 세상은 애굽처럼 빨리 벗어나야 할 곳이며 동시에 광야처럼 훈련을 받아야 곳이다.  그리고 가나안처럼 하나님 나라를 세우야 할 곳이면서 아울러 앞으로 불로 심판을 받아 사라질 세상이기도 하다.

 

성경적인 세계관은 결국 두 면, 즉 낙관적인 것과 비관적인 것을 모두 보여준다.  이 세상이 성도들이 훈련을 받아야 할 곳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곳이다.  그러나 성도에게 이 세상은 빨리 벗어나야 할 애굽과 같은 곳이며 그리고 언젠가 불로 사라질 곳이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낙관적(樂觀的)인 세계관만 견지한다.  한 쪽으로 치우쳤다.  그 결과 균형 잡힌 신앙 삶을 가르치지 못한다.  현세(現世)에만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잘 언급하지 않는 이유이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야만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마찬 가지로 번영 신학을 추구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은 자신들의 것을 모두 앗아갈 예수님의 재림을 싫어한다.

 

그 동안 한국 목회자들이 번영 신학의 영향을 받으며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했다. ㅅ교회의 ㅈ목사 탓만이 아니다.  자신의 건전하고도 참된 성경적 신학을 버리고 그의 실용적인 신학을 많은 목회자들이 추구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이것이 탐심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기초는 서서히 무너졌다.

이젠 신자들이 목회자 못지 않은 신앙 수준을 길러야 한다.  성도의 수준이 높아져야 비로소 목회자들이 긴장하며 그 수준도 향상될 것이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신자들에 의해 개혁되어져야 한다.   마라나타!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2. 창세 선택과 이론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믿는다.15)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과 더불어 영원토록 함께 거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빠진 자기 백성( 1: 21)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이미 인간 역사 가운데 존재할 자기 백성을 구원키로 작정하셨으며 처음부터 유기할 인간들을 택자들로부터 선을 그어 분리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유기의 원인자가 되므로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게 되는 어리석음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1: 28) 하선 창세기의 기록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나님의 택자인 자기 백성 에게 주신 말씀이다. 범죄한 모든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원래의 뜻은 택한 자기 백성이 피조 세계를 다스리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써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인간들( 2: 2) 모든 것을 상실당하여 원래의 상황이 뒤엉키게 되었다.

 

선택할 자들과 유기할 자들 사이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선을 그어 양분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16)

 

만일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창세 전에선택한 자기 백성을 피조 세계인 지구상에 존재케 하려 했을까 하는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이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남으로 인해 모든 인간들은 여인의 분만을 통해 태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여인을 통한 인간의 분만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세상에 출생하는 자체가 심판이 아니라 여인의 자궁을 통해 태어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3 : 16)라는 창세기의 기록은 그에 대한 분명한 증언이다.

 

말씀은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허락하셨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설령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자기 백성을 피조 세계에 보냈을 것이며 그때는 여인의 자궁을 통한 분만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해 인간은 육체적 생식력을 갖추게 된다. 인간의 육체적 생식력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17)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여성을 통해 출산하게 되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18)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선택과 무관한 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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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m.5; The Canons of Dort 1.11;  The Belgic Confession, 16 하나님의 영원한선택.

16) 유기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은연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게 우려가 었다. 하나님께서는 유기한 자들로 하여금 범죄케 했다는 논리가 성립될수 있다. 그것은 결국 죄에 대한 하나님 책임론에 빠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 C머띠n 1552 발표한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사장에 의존하여 창세 선택과 더불어 유기를 매우 중요하게생각했다. 하지만 K. Barth J. Calvin 유기이론에 대해 강한 반기를 들었다. 물론 이런 류의 주장은 이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예정론에 관한 K. Bh의신학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우리의 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유기에 관한 그의 주장을 생각해 본다. 그는 1942 출간된교회교의학 n . 2에서 예정론을 다루면서 유기이론을 부인하고 있다. 아직 인간들이 존재하기도 전에 일부를 지옥에 가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기를 예정한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구원을 위해 모든 사람을 선택했을것이며 영원한 멸망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유기할 자들을 따로 예정할 리만무하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은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만인구원론을 배경으로 히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물론 K Barth 유기이론 부인과 필자가유기이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필자는 하나님의 형상을닮은 자들에 대한 창세 선택이 있었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택하실 자와 유기할 자를 통일선상에서 따로 구별한 것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7) Augustine, On Gensis against the Manichees, 1. x .30; 라은성 , “어거스틴의 신학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안명준 서울: 이컴비즈넷 2005,p.7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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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것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빠진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선택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은 사탄의 수하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간에 모든 인간들은 가운데 출생하게 된다. 우리가 분명히 유념해야 점은 모든 인간이 멸망에 처하게 원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궤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죄의 조성자가 없으며 사악한 사탄이 죄의 조성자이다.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그 속성상 결코 죄의 조성자가 없다.19)

 

창세 선택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하나님께서 임의로 택자와 불택자를 구분하셨다는 생각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을 배경으로 한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할자와 유기할자를 창세 전에 절대적인 자기 주권에 따라 임의로 구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인간이 범죄하기는 커녕 생기기도 전에 그런 임의적 분류를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 비추어 공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있다.20)  범죄 이전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이론을 따르게되면 하나님에 의해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분류에 따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가 있으므로 쉽게 받아들일 없는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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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필자는 성도의 혼인을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섭리로 이해한다. 성도의 혼인은 인간의 배우자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만일 혼인에 있어서 배우자 선택 논리가 성립되면 자칫 진화론적 개념에 빠지게 하는 우려가 발생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혼인과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의 비밀을 창세 선택과 예정의 의해 이끌어 가고 계신다.

19)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1.

20) 알미니안주의의 자율구원론이나 만인구원설 등의 이론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할 있는가하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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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일부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주장이 었다.21)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면서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보았으며 그로 인해 미래에 존재하게 인간들 일부를 선택하시고 일부는 유기하셨다는 것이다. 이 역시 개별 인간이 출생하지 않았을 뿐더러 타락하기도 전에 선택과 유기를 했다는 점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속성에 조화되지 않는다.그리고 아담이 범죄한 하나님께서 택할 자와 유기할 자를 정하셨다는 주장이 있다. 인간이 범죄하지 않아 아직 죄가 존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유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논리상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담이 타락한 후라 할지라도 여전히 태어나지도 않은 개별 인간들에 대해 일부를 선택해 자기 백성으로 삼고 다른 일부는 유기했다는 점에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선택설에 문제가 았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행위 구원을 주장하며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행동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가장 공평하다고 한다. 선하게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것이며 악하게 산 사람들은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다수 신학자들은 차라리 이것이 선택설보다는 공평한 입장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히는 인본적인 사고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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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타락 선택과 타락 선택의 신학적 개념은 시간과 역사 속의 사건을 기준으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존재했던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 속에 포함된 개념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철학적 관념에 머무르는 신학적 사변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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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결국 모든 인간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할것이라 주장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논리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성경의 기록들을 근거로 한주 장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때문에 나타나는 양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한면 영혼멸절설을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더러 었다. 하나님은 멸망받을 자들을 영원토록 고통에 빠뜨리는 잔인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인간들의 영혼은 멸절되어 없어진다고 한다. 그들의 견해는 어떤 의미에서 창세 하나님의 자기 백성만의 존재 선택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일 있다.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에 대한 불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없는 이론이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개혁주의 언약교리에 나타난 조직(신학)과 경건의 조화 :

윌리암 퍼킨스(1558-1602)와 죤 프레스톤(1587-1628)"

 

송 영 재 (조직신학, 개혁신학연구원)

 

I. 전체 요약 (Summary)

 

        스탠리 그렌즈(Stanley J. Grenz)와 로져 올슨(Roger E. Olson)은 현대신학의 역사를 하나님의 초월(transcendence)과 내재(immanence)의 긴장이라는 관점에서 해석 하였다.  20세기 신학은 계몽주의 철학의 도래와 함께 깨어졌던 "초월과 내재의 신학적 균형"을 찾아 가고있는 과정중에 있다고 저들은 결론적으로 말하였다.  신학에서 초월과 내재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필자는 영국 개혁주의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의 이분법적 해석에 대한 문제를 본 논문에서 새롭게 조명하여 보려고 했다.  

 

        초기 개혁주의 언약신학 안에 스콜라적인 전통과, 성경적인 전통이 있었다는 이른바 이분설(two traditions theory)은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에 우호적이지 않은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통하는 학설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전자는 조직신학의 특성인 주제별(loci) 혹은 논리적(logical) 접근을 강조하는 예정론 중심의 대륙신학과 영국 개혁신학에서, 후자는 성경신학의 특성인 구속사적 (heilsgeschichtlich) 혹은 역사적(historical) 접근을 중요시 하는 독일(화란) 개혁신학에서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제네바(Geneva) 신학의 "유언(testament)"에 의거한 은혜일변도의 초월신학이며, 다른 하나는 쥬릭(Zurich)신학의 "언약(covenant)"에 의거한 역사와 인간의 자율성을 무시하지 않는 내재신학 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개혁신학의 언약교리에 대한 "유언적" 접근과 "언약적" 접근의 대립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언약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대립시키는 부당한 신학적 전제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이 낳은 "본체계(phenomena)/ 현상계(noumena)"라는 초월과 내재의 분리가 (이른바 "the post-Newtonian mind") 이와같이 언약신학에 있어서도 유언/언약의 분리해석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역사(구속사)/구조(예정론) 이라는 신학의 총체적인 이분화 현상을 유도 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직도 학자들이 과거의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약교리가 주로 주경신학(exegetical theology)의 연구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과거의 추세도 여기에 적지않은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주경신학의 특성상 구원의 역사적이고 내재적인 관점을 초월적인 것보다 더 강하게 하이라이트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언약교리에 대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 "스타일"의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적 방법론이 어디에서부터 체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답을 영국 개혁신학의 최초의 조직신학자로 평가 받고있는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의 언약신학에서 찾게 되었다.  퍼킨스의 언약신학은 칼빈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후자보다 좀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언약의 적용을 한 것이 다른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약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해석하고 "구원의 서정"적인 구조안에서 언약과 Decree, Casuistry, Conscience, Sacraments, Faith, Assurance, Law, Preparation 등의 관계성을 풀어 나갔다.  

        이와같은 사실을 배경으로 본 논문이 논증하려고 하는 것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초기 개혁신학의 언약에대한 "조직신학적" 방법론을 밝혀 내려고 하였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실제적인 창시자로 알려진 요한 칵세이어스(Johannes Cocceius, 1603-1669)의 "구속사적"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칼빈의 신학을 이어받은 영국의 개혁신학자들이 조직신학적으로 언약을 연구 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언약의 조직신학적 방법론은 네가지로 요약되는데 (1) 언약이 "구원의 서정"적 구조속에서 다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2) 언약은 영원한 작정을 역사속에서 집행해 나가는 "작정집행의 방편(the means of the execution of the decree)"으로 정의 되었다는 사실이다.  (3) 언약을 은혜(Grace)와 율법(Law)등 신학적 구원론적 초월과 내재의 연결고리로 사용한 사실이다.   (4) Ramist 의 양단법(dichotomous method)을 사용하여 신학을 faith and duty 로 나누어 정리한 사실이다 (예: 웨스트 민스터 문답서).

 

        이와 함께 조직신학의 특성인 "주제별(loci)"접근과 주경신학의 특성인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 접근은 각각 구원의 구조(redemptive logic)와 구원의 역사(redemptive history)를 구별하는 방법론적(methodological) 구분일뿐 언약의 초월성(영원성과 은혜성)과 내재성(역사성과 조건성)을 분리시키는 신학적(dogmatic) 또는 내용적(substantial) 구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

        구원의 구조(구원론)와 구원의 역사(구속사)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 전통적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신학의 "조직성"과 "역사성"의 구분을 "유언"과 "언약"의 구분과 동일시 하여 대립적으로 보는것은 신학과 신학의 방법론을 혼동하는데서 비롯된 발상이다.  

        둘째, 퍼킨스는 "경건주의의 아버지(the father of pietism)"라고 불리울 정도로 그의 신학은 경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칼빈주의적 예정론자인 경건주의의 창시자로까지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경건신학은 곧 언약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음을 필자는 발견 하였다.  그의 경건신학 곧 성화신학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Casuistry, Sacraments, Assurance of Faith, Law, and Preparation for Regeneration 등에서 강렬하게 표현 된다.  이러한 주제들을 초기 개혁자들보다 더 자세하게 연구하여 구원의 "내재"를 조명하고 경건의 dynamic 을 강조한 그가 "조직신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성경적 긴장관계 속에서 유지하려고 했음을 필자는 밝히려고 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만이 인간의 책임있는 삶과 역동적인 경건의 dynamic 을 가능케 한다는 것의 퍼킨스 언약신학의 요약이라고 할 수있다.  초월과 내재, 영원성과 역사성, 은혜와 책임이라는 파라독스적인 신학구조는 칼빈이든 불링거이든 개혁주의 언약교리의 기본 전제인데 Federalist 학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만을 강조하여 그 신학에는 언약적 경건이 없는 것 처럼 결론을 내리었다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 하였다.

        셋째, 구원의 구조와 구원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곧 개혁신학 그 자체를 신학적으로 분리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Calvinist/Federalist 이론은 이러한 분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언약적 구조를 기초로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과 17세기 영국 개혁신학(i.e.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로 John Preston)이 신학적으로 Calivinist 가 아닌, Federalist 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언약에 대한 접근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언약개념 그 자체가 예정론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신학적 대립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 학설의 모순점은 퍼킨스와 같은 예정론자들이 언약을 중심으로 구원의 구조문제를 다루었다는 것과, 거꾸로 17세기 쌍무적 언약신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진 죤 프레스톤과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등은 영원한 작정을 전제로하여 언약을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Calvinist/ Federalist 이론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설득력있는 답변을 제시하지 못 하였다.  필자는 저들이 Federalist 로 간주하여 그 전통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고 있는 죤 프레스톤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전무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의 언약신학에 대한 좀더 심도있는 해석을 퍼킨스와의 통일성이라는 관점에서 시도 하였다.

 

 

II. 초월과 내재의 신학적 분리(A Dogmatic Division of Transcendence and Immanence)

 

        1. 언약의 초월과 내재에 대한 두 학설

 

        죤 본로(John von Rohr)는 17세기 영국개혁주의 언약신학에대한 연구결과들을 크게 두갈래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페리 밀러(Perry Miller)의 학설인데 그는 칼빈의 예정신학과 차세대 칼빈주의자들의 언약신학이 질적으로 대립되는 두 개의 다른 신학임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언약신학은 예정신학의 지나친 초월성에 대한 역반응으로 생겨났으며, 후자에서 결핍된 내재성(immanence)을 보완하는 신학이었다는 것이다.  

        그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레오나드 트린테루드(Leonard Trinterud), 윌리암 클레브쉬(William Clebsch), 리차드 그리브스(Richard Greaves), 웨인 베이커(Wayne Baker), 알티 켄들(R.T. Kendall) 등의 학자들이 밀러의 학설을 토대로 영국 개혁주의 언약신학에 대한 비중 있는 연구 논문들을 발표 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칼빈의 "유언(testament)" 신학은 은혜일변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신학 이었던 반면에, 불링거(Bullinger)의 "계약(covenant)" 신학은 쌍무적 책임을 강조한 균형있는 신학으로 평가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제 2세대 개혁신학은 두 개혁자들을 분깃점으로 칼빈파와 과 불링거파로 나뉘어 결과적으로 "유언신학(Calvinist)"과 "계약신학(Federalist)"이라는 두 개의 융합될 수 없는 독특한 신학으로 발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이와는 반대되는 입장에서 젠스 몰러(Jens Moller)가 제시한 작정신학과 언약신학의 일체성과 연속성에 대한 학설을 따르고 있다.  그는 개혁주의 언약교리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것이 예정론을 "무디게(blunting)"하거나 "누그러뜨린다 (mitigating)"는 대립논적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약을 영원한 작정(eternal decree)의 역사적 "집행도구(means of execution)"로 이해함으로써 작정과 언약의 신학적 동질성(dogmatic unity)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칼빈의 신학은 예정론적 이면서도 경건적 이었다고 지적 하였고, 후기 칼빈주의자들의 언약신학이 칼빈의 신학에 내포된 언약교리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후 다른이들이 역시 몰러의 학설에 동조하면서 후속 연구논문들을 발표 하였는데 그중 마이클 멕기퍼트(Michael McGiffert), 윌리암 스토버(William Stoever), 죤 본로(John von Rohr)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언약신학의 논쟁에 있어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 그들은 언약을 이해함에 있어서 "공로와 은혜는 본질적으로 또한 절대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언약신학이 철저하게 은혜신학 임을 재천명 한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그들은 언약에서 "인간의 공로를 배제한다는 것은 언약에 참여하는 인간의 자발적 기능(conditionality)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들은 언약이 초월성을 전제하면서도 내재적인 관점에서 역사의 유기성과 인간의 자발성(이것은 타락전 행위언약을 가능케 했던 근거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는 사실을 개혁주의 인간론(the doctrine of man)의 관점에서 시사 하였다.  

 

        2. 은혜와 공로의 속죄론적 구분

 

        필자는 후자에 속한 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Calvinist/Federalist 학설의 문제는 은혜(grace)와 공로(merit)의 속죄론적 구분과, 은혜(grace)와 조건(condition)의 언약적 구분을 혼동하거나 부정 하는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혁신학은 속죄론적으로 보면 하나님 주권과 은혜를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유언"신학이다.  그러나 "회심"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거듭난 이성과 의지의 관점에서 보면 개혁신학은 지극히 "언약"적인  것이다.  Calvinist/Federalist 이론은 이 구분을 수용하지 못하는데서 비롯 되었음이 확실하다.  

        이 두가지 구분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개혁주의 신학은 "창조언약(the covenant of creation)" 또는 "순종의 언약(the covenant of obedience)"이라고도 불리우는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을 구원론의 대전제로 간주한다.  언약신학에서 많은 논란이 되고있는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은 실로 개혁주의 속죄론의 "뇌관"에 해당되는 교리이다.  이것은 속죄론에서 공로와 은혜의 질적구분을 명백히 하여줌으로써 "이신칭의"의 신학적 당위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발성을 전제로 하는 심판의 근거가 되는 교리이다.  

        Calvinist/Federalist 파의 학자들이 "유언신학"을 스콜라 신학으로 치부하고 "유언신학"의 속죄론적 전제인 "행위언약"을 일종의 신학적 금지사항(taboo)으로 규정해 버린것도 이때문이다.  행위언약을 인정함은 곧 "유언신학"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죄론의 관점에서 "유언"을 인정하지 않음은 곧 Sola Gratia 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성향을 놓고 볼 때 필자는 Calvinist/Federalist 의 신학적 의도 그 자체가 심히 의심 스럽기까지 하다.  

        행위언약의 부정은 곧 개혁신학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신정통주의에 사상에 근거한 "Law in the Gospel" 교리에 대항하여 앞장서고 있는 마크 칼버그(Mark Karlberg)는 이른바 Calvin/Calvinist 학설의 신학적인 문제점이 행위언약의 속죄론적 의미를 간과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 하였다.  그는 개혁신학을 "유언신학"과 "언약신학"으로, 또는 "예정론적" 신학과 "성경적" 신학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개혁신학의 핵심 전제가 되는 '행위와 은혜의 구분' 을 충분히 감지하지 못한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못 밖았다.  

        결국 저들은 행위언약에 내포된 은혜와 행위의 속죄론적 대립을 은혜와 책임, 예정과 역사의 대립으로 비약 하였다.  저들이 의미하는 "유언신학(칼빈신학)"에는 언약 당사자들의 쌍무적 책임이 전혀 배제되었다.   개혁주의 안에 칼빈주의 전통은 역사와 인간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무시하는 잔인한(inhumane) 신학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행위언약"은 속죄론에 있어서 행위와 은혜의 절대적 대립을 의미하는 것 뿐이지 칼빈주의 신학 전체를 "유언신학"으로 규정짖는 비약적인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행위언약 교리는 다른 무엇보다 성경적 구원론적 진리이지, 저들이 주장하듯 이중 예정론을 변호하기 위한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공론에서 비롯된 교리가 아니다.  어쨌든 개혁신학의 속죄론과 칭의론(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에 있어서 은혜와 행위의 구분은 명백해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이 명백하게 구분 되어져야 한다.  만일 언약적 또는 쌍무적 "협력"이 속죄론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의 혼합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개혁신학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특정신학을 "유언이냐 언약이냐?"으로 규정짖는 것은 그 신학의 속죄론을 규정 짖는 것과 다름 없다.  저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신학으로 보기 때문에 "유언"이라고 했지만, 거꾸로 칼빈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언"이 빠진 언약신학은 알미니안 신학으로 전락하게 된다(실제로 그런 성향이 많이 있음을 필자는 본 논문에서 다루었다).  저들은 유언신학에는 인간의 책임이 배제 되었다고 주장 하지만, 그렇다면 거꾸로 유언이 빠진 언약에는 행위가 구원을 결정하게 된다는 사실을 저들이 직시 해야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혁신학을 유언과 언약으로 나누는 것은 마치 개혁 신학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로 나누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개혁신학은 속죄론의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은혜에 근거한 "유언신학"이지만,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한 "언약신학" 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유언이냐 언약이냐?"는 윌리암 스토버(William Stoever)의 말대로 "post-Newtonian mind"에서 나온 "위조된 이분설(false dichotomy)"이다.

        그러나 필자는 실제로 저들이 유언신학이라고 규정한 칼빈신학과 그의 영국 후예들은 인간의 자발성과 책임을 전제로한 강렬한 경건신학을 산출해 내었다는 사실을 저들의 모델(construct) 속에서 설명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논증 하였다.  이것은 또한 저들이 언약신학이라고 규정한 츄리히 파의 불링거 신학에도 칼빈신학과 버금가는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가 지배적 이라는 다른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놓고 볼 때 Calvinist/Federalist 이론이 얼마나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3. 대안: 방법론적 구분

 

        결국 Calvinist/Federalist 의 충돌은 개혁신학을 이분화 시키는 신학적 충돌을 피할수 없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구조/역사"라는 방법론적 구분을 제시 하였다.  Bullinger-Cocceius 전통은 구속사적 렌즈를 통해서 언약의 점진적 발전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법론이며, Calvin-Perkins 전통은 구원의 구조적인 렌즈를 통해서 언약의 체계에 초점을 맞춘 방법이다.  구원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과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분명이 다른 시각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와 히브리서는 같은 언약교리를 접근함에 있어서 "구조/역사"라는 방법론적 차이점을 갖으며 여기에서 생겨나는 긴장관계는 성경계시의 원래적 의도임을 알 수 있다.  이 책들이 두 개의 서로 매우다른 독특한 관점에서 언약을 설명하고 있음은 신학적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파악할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모든 구속행위들(redemptive acts)을 논리적 구조(logical structure)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반면 히브리서는 그것들을 역사적 구조(historical structure)안에서 설명하고 있다.  

        똑같은 신학적 주제를 놓고 한책은 논리적 통일성을 전제로하여 조직적인 접근을 하고 있고, 다른책은 역사적 점진성을 전제로하여 구속사적 접근을 하고 있다.  성경의 저자들은 이 두가지 방법론의 대립적 관계를 표명한적이 없다.  이 두방법론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유추된 언약적 이해가 하나의 획일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 보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교리를 더욱 풍성하게 그리고 다각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필립 휴즈(Philip Hughes)는 히브리서에 나타난 "구속사"가 "성경의 조직성(logic of Scripture)"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바로 지적 하였다.  이것은 성경의 조직성과 역사성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말이며, 바꾸어 말하면 성경의 신학적 구조 역시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만 바로 이해 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칼빈과 불링거, 그리고 퍼킨스와 칵세이어스 사이에 신학적 충돌을 피하면서 그들의 언약신학속에 나타나 있는 분명한 접근방식의 차이점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두가지 방법론은 상호보완적이지 상충대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였다.  

 

        두 방법론을 신학적으로 상충대립 시킨 사례는 물론 오늘날의 Calvinist/ Federalist 학설외에도 역사적으로  빈번 하였다.  Gabriel Biel 에서 시작된 로마 천주교의 언약 신학("If you do what is in you, God will not deny grace.")과 Calvin 과 Bullinger 에서 시작된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속죄론에서 "주입된 은혜"와 "전가된 은혜"를 구분하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둘다 언약의 관점에서 인간의 책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천주교 신학의 배경을 갖은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구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교리에 대하여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그가 언약교리가 Sola Fide 를 위협한다고 생각 한것도 이때문이다.

 

        스콜라적 초 칼빈주의(Hyper-Calivinism)는 칼빈의 예정론을 인간의지에 대립 시켰으며, 거꾸로 알미니우스-에미로우(Amyraut) 전통은 불링거의 언약을 하나님의 예정에 대립 시켰다.  오늘날에 거론되고 있는 세대주의 신학, 신정통 신학,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 Nomism) 등은 형태와 유형은 다르지만 사실상 전통적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볼때 두 언약적 방법론을 신학적으로 상충대립 시켰을 때 생기는 자연 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신학의 심장부는 역시 구원론인데 구원론중에서도 속죄론(칭의론)과 성화론의 바른 관계 정립은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양보나 타협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세대주의, 신정통, 언약적 신율주의 신학은 모두 속죄론과 성화론에 있어서, 또는 은혜와 율법에 있어서 전통적 개혁신학과 길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Calvinist/Federalist 의 문제가 실제적으로 오늘날 심각하게 재현 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역사적 개혁신학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작정(decree)과 인간의 결정(decision)을 동시적으로 강조 하면서도, 인간의 결정을 절대로 "공로"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았다.  쌍무적 언약의 책임을 인정 하면서도 속죄론적 "공로"는 철저히 배제 시켰다.  따라서 필자는 "유언과 계약"이라는 신학적 대립을 "조직과 역사"라는 방법론적 대립과 차별화 하지 않고 그대로 연결하여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양극화 시키는 학설의 비약과 무모함을 본 논문에서 밝히려고 했다.  

 

        제네바와 영국 개혁신학의 systematic(예정론적) 언약신학이라고 해서 구원의 역사성이나 인간의 자발성 및 윤리와 경건을 배제하고 있다거나, 반대로 독일과 화란에서 형성된 redemptive historical(구속사적) 언약신학이라고 해서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외에 다른 어떤것에 근거 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은 신학의 문제와 방법론의 문제를 혼동 한 것으로 보인다.  언약 학자들이 주장하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다양성(diversity)은 속죄론적인 유언과 언약의 개념으로 분리하기 보다는 (soteriological distinction), 방법론적인 구원의 구조와 역사의 개념으로 구분함이 (methodological distinction) 옳다고 생각한다.

        이분설은 거부하되 분명한 방법론적 다양성과 차이점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유익하다.  한가지 방법론(구원론 아니면 구속사)의 획일적이고 일원론적인 해석이나 적용은 유기적인 계시를 기계화 시키거나, 거꾸로 지나치게 역사화(historicize) 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언약의 내용적 동질성(unity)은 지키되, 역사적 획일성(uniformity)을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며, 언약의 다양성(diversity)은 인정하되 그것의 불통일(disunity)은 거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의 구조는 불변하지만 그 관계의 역사적 과정은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III. 요한 칵세이어스와 구속사적 방법론

 

        Calvinist/Federalist 학설에 의하면 칵세이어스는 불링거 계열의 언약신학, 즉, Federalist 신학을 완성한 인물이다.  저들 서클에서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절정(zenith)" 이라고도 불리우는 화란 신학자 요한 칵세이어스(Johannes Cocceius, 1603-1669)는 개혁전통 안에서 언약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시도하였던 최초의 학자로써(그 전에 시도 되었던 모든 언약에 관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집필 했다는 의미에서) 개혁주의 언약신학 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성경의 언약을 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ly) 연구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언약에 대한 성경신학적 모델을 제시 하였다.

        개혁신학 전통 안에서 칵세이어스와 그의 성경신학적 혹은 구속사적 언약신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기념비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의 구속사적 방법론은 언약의 내재성(immanence)을 강조한 것으로써, 구속사를 통해 인간과 동행하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적" 하나님을 묘사한 것이 특징 이었다.  구속사는 곧 언약사라고 할정도로 언약은 그의 신학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는데 그 이유는 언약이 역사안에서 초월적인 하나님과 내재적인 인간을 연결해 주는 구원론적 매체가 되기 때문이다.  

        언약의 역사성에 대한 칵세이어스의 집착은 대단한 것 으로써 그는 헤겔의 역사철학과 19세기 "역사주의(historicism)"의 아버지로 불리우기도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내재철학"의 절정이라고 불리운 것 역시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그가 시도한 구속사적 접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사를 점진적 이면서도 시대적 구분에 의거한 "세대적(dispensational)" 관점에서 해석한 것 이었다.

        언약교리의 구원론적 방법론이 역사성과 내재성을 중요시 하는 칵세이어스 스타일의 구속사적 언약신학에서 배울수 있다는 사실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방법론은 언약관계에서 인간의 자발성이나 결정권을 확대 시킴으로 영성신학이나 경건신학을 발전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그렇지 않은 신학보다 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제시할수 있다.  스콜라적 칼빈신학의 "조직적" 방법론이 구원의 초역사적 뉘앙스들을 지나치게 확대 시키어 언약의 현실성을 약화 시키었음은 모든 개혁신학자들이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바 이기도 하다.

        언약적 신조로 알려져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의 언약교리 조차도 인간의 자발성을 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근거하여 구원의 기계적 성격을 강조한 이른바 "대륙 주의설(continental voluntarism)"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 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칼빈주의 언약신학이 구속사의 시대적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역시 획일적으로 구원론적이었다.  이러한면에서 좀더 두드러지고 과감한 해석을 보여준 것은 이른바 비정통파들의 신학과 이론이었다."  요한 칵세이어스(Cocceius)와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자 기스베루트스 보시어스(Gisbertus Voetius, 1589-1676)의 논쟁은 바로 이 두신학적 방법론의 차이점을 나타내 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논쟁은 곧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대립이었다고 말할수 있는데, 후에 조직신학적 방법론에 반기를 든 칵세이어스파의 과격론자 들은 극단적인 "세대적" 방법론을 주장하며 구속사의 세대적인 차이를 간과한 기독론적 "이신칭의" 교리의 획일적인 적용을 부정 하였다.  앞서 지적한 대로 칵세이어스의 구속사적 방법론이 과격한 세대적인 해석으로 빠지면서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이신칭의" 교리와 입장을 달리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칵세이어스는 구약에서는 죄의 간과 (παρεσιs, overlooking) 만이 있었을 뿐이며, 죄를 말끔히 제거하는 완전한 속죄는 아니었다고 가르쳤고, 신약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과 유언이 완성된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이 완전한 속죄(αφεσιs, forgiveness of sin)가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구약의 "죄의 간과"와 신약의 "죄의 속죄"가 구약적 칭의(Old Testament justification)와 신약적 칭의(New Testament justification)라는 개념들로 비약 되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명백히 정통 개혁신학의 속죄론에서 벗어 난것이며 결국 신구약을 분리시키는 해석학적 문제와, 신구약의 구원의 통일성을 붕괴하는 구원론적 문제와, Sola Fide 를 위협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헤르만 윗치어스(Herman Witsius) 와 같은 학자는 기본적으로 칵세이어스의 방법론을 선호 하면서도 두 신학의 차이점이 관점의 차이일뿐 질적 혹은 내용적인 차이가 아님을 지적 하였다.  언약의 구속사적인 방법론이 개혁신학에 기여한바는 점진적 계시의 시대적인 다양성에 촛점을 맞추어 언약의 유기성을 확대 시키고 역사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실감나게 할뿐아니라 인간역사에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을 묘사함으로써 실천적인 신앙과 경건의 "내재성"을 가능케한 것 이라고 할수있다.  개혁신학이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초역사적인, 이른바 "초 칼빈주의(Hyper-Calvinism)"의 오류를 피할수 있었던 것은 칵세이서가 시도한 것과 같은 구속사적 방법론이 초월과 내재의 균형을 맞추어 주었기 때문 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을 근거로 하여 칵세이어스의 Federalist 신학이야 말로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Calvinist 신학이 형이상학적인 교리들과 "명제적 정통주의(propositional orthodoxy)"에 집착하여 언약의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배제 했다는 이론을 펼친다.  

        그들은 "칼빈주의"의 이른바 추론적 예정론(deductive predestinarianism)에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역사성과 인격성, 그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비성경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교리라고 비난한다.  "신학을 예정이라는 영원한 작정으로부터 추리함으로써 스콜라적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섭리를 엄격하고 기계적인 것으로 전락시키었고, 그로인해 역사나 구원 그리고 인간의 책임같은 것 들은 거의 무의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이들중 어떤이들은 아예 칼빈주의 언약신학을 중세 유명론(Scotist Nominalism)과 동일시 하여 언약신학 그 자체를 스콜라신학 으로 몰아치는 경우도 있다.  칼빈주의 에서 언약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 마저도 중세 유명론의 "조약(pactum)"교리에서 파생된 것 으로써 스콜라적 형이상학에 근거 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에서 형이상학이 성경보다, 예정론이 구속사보다 앞선다는 비난에 대하여 리챠드 뮬러(Richard Muller)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통 개혁주의의 태동은 대략 네가지로 설명 될 수있다 (신학적 변증, 교육적 필요, 체계적 설명, 논리적 깊이와 일관성).  여기에서 한가지 확실하게 배제된 것은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핵심교리(central dogma)에 대한 집착이다."  여기서 "핵심교리"는 물론 예정론을 의미한다.  

        그는 2세대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더욱 조직적인 방법으로 초기 개혁자들의 신학을 체계화 시켜나간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과정속에서 저들이 중세 스콜라신학의 방법론을 빌려 사용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문제시 되어서는 안될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시말해서 칼빈주의 신학이 스콜라적 방법론을 빌려 사용했기 때문에 두신학이 동일하다는 결론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비약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일반화 되어있다: "스콜라적 방법론은 성경적 진리들을 객관적인 사색의 대상으로 다루지만, 성경적 언약신학은 신학적 사고를 믿음의 범주안에 둠으로써 매우 실천적이고 인격적인 성향을 갖는다."  

        한 마디로 "칼빈주의"의 구조적 방법론은 경건에 대하여 무지한 사변적 신학이요, 구속사적 언약신학 이야말로 개혁주의 경건신학(theology of piety)을 대표하는 실천적 신학 이라는 이론이다.  구속사적 언약신학의 대부로 알려진 화란의 요한 칵세이어스가 개혁신학과 독일 루터신학을 포함하여 저들 사이에서 "경건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것도 이러한 반칼빈주의 정서에서 나온것이라고 볼 수 있다.  챨스 멕코이(Charles McCoy)는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 학자인 릿츨(Ritschl)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칵세이어스의 신학과 당시 스콜라적 방법론을 택하였던 칼빈주의 신학을 풍자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칼빈주의자이면서 또한 성경신학자이었던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기독교가 교리만이 아닌 삶 그 자체라는 것 이었다."

        여기서 멕코이가 칼빈주의적 언약신학과 칵세이어스적 언약신학을 "교리와 삶"으로 대조한 것은 지금까지 지적한바 대로 저와같은 학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비교의 출발점이 얼마나 그 뿌리에서 부터 부정적이며 분리적 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제네바와 영국 개혁신학의 조직적(loci) 방법론은 교리일변도의 신학이며 독일과 화란 개혁신학의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 방법론은 "교리와 삶"의 균형을 이룬 성경적 신학 이라는 주장은 무리한 논리의 비약이며 다시 우리로 하여금 신학의 초월과 내재의 문제로 돌아가게 한다.  

 

 

IV. 윌리암 퍼킨스

 

        1. 서론적 고찰

 

        앞서서 지적 했듯이 윌리암 퍼킨스의 언약신학에 나타난 구조적(systematic) 방법론은 언약이 "구원의 과정(ordo salutis)"을 실제화 시키는 구원론적 도구(soteriological instrument)라는 것이다.   죤 머리(John Murray)는 언약을 "구원의 적용(application of redemption)"이라고 설명 했는데 역시 같은 의미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개혁신학 에서는 구원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설명한다.  성부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시고(arranged), 성자께서 그의 적극적인 그리고 희생적인 순종을 통해 이루신(accomplished) 구원을, 성령께서 택함받은자에게 실제로 적용하여(applied) 구원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성령의 사역을 총체적으로 묶어서 "구원의 과정" 혹은 "구원의 적용"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곧 그리스도 와의 연합의 결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퍼킨스 신학에서는 바로 그리스도 와의 연합을 언약의 본질(essence)이요 내용(substance) 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효과적 부르심, 중생, 회심, 칭의, 화해, 양자, 성화 등의 모든 구원의 선물들은 그리스도 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도에게 주어지며, 그리스도 와의 연합은 언약이라는 관계의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 지고,  언약은 믿음을 통해서 체약 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  

        더 나아가서 퍼킨스의 신학에서 언약은 인간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그 특유의 내재적 또는 인격적 성향 때문에 경건신학과 실천신학을 유도하는 매우 "현실적"인 교리 이기도 하다.  초월과 내재를 연결하는 그 특유성 때문에 언약신학은 철저하게 은혜신학 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반응으로써의 역동적인 경건신학 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퍼킨스의 신학에 나타난 칼빈주의적 언약신학은 "ordo salutis의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분석과 적용이었으며...동시에 조직신학과 윤리적 결의론(moral casuistry)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였다"고 리챠드 뮬러는 말하였다.  

        뮬러는 퍼킨스의 언약신학이 초월적인 작정과 내재적인 신앙을 일관성 있게 체계적 (systematic)으로 연결시키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던 방법론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지적 하였다.  필자는 뮬러의 지적을 더욱 발전 시켜 퍼킨스의 언약 신학에서 영원한 작정과 역사적 신앙을 상충대립 구도 속에서 해석하는 역사주의(historicism)적 전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결정 사이의 신학적 접촉점(theological point of contact)으로서의 언약 개념을 찾으려고 하였다.

 

        2. 퍼킨스의 언약신학

 

        영국 개혁신학의 선구자였던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의 언약신학은 지나치게 조직신학적 이고 스콜라적 이었다고 학자들에 의해 비난을 받고있지만 하인릭 헵(Heinrich Heppe)같은 대 학자도 퍼킨스의 언약신학을 대표하는 황금의 고리줄(A Golden Chaine)을 인용하며 퍼킨스는 엄격한 스콜라주의자가 아니라 "경건주의의 아버지(der Vater des Pietismus)" 였다고 그의 경건신학을 높이 평가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언약신학이 조직신학과 실천신학을 이어주는 신학적 접촉점 으로써의 당위성과 역할이다.       

        하나님의 은혜(초월)와 인간의 자발성(내재)의 조화라는 역설적인 원리를 동시적으로 강조하는 개혁신학에 있어서 언약이 바로 그 둘을 이어주는 신학적 "고리줄(chain)"이라는 것은 타당한 이론이다.  이 "고리줄"은 성령에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개인에게 적용되는 이른바 "구원의 과정(ordo salutis)"이라고 앞서 지적했다.  

        칼빈주의 언약신학에서는 특히 이 언약의 "고리줄"에 의해서 연결되는 두가지의 역설적 관계를 강조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God's decree)과 인간의 결정(man's decision)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은혜와 율법이다.  이 것들은 신학의 "신경중추(nerve center)"로써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수많은 신학적 논쟁들은 사실 이 두가지의 긴장관계를 해석하는데서 파생된 것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퍼킨스는 바로 이처럼 극도로 민감한 신학적 초월과 내재의 균형을 언약안에서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은혜와 자발적 순종의 합체라는 언약의 본래적 속성때문에 그런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퍼킨스 언약신학의 조직적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살펴보았다.

        첫째, 앞서 언급 하였듯이 퍼킨스는 언약을 "예정의 집행도구"(the means of the execution of the decree)로 정의 하였다.  그는 예정론을 성경에 충실한 진리로 확신하여 사변적인 공론이 아닌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호하는 교리로 부끄럼없이 천명하였다.  그의 예정과 언약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는 17세기 초반 영국의 알미니안 신학을 상대로 했던 죤 프레스튼과는 달리 로마 천주교의 구원론을 상대로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상으로는 매우 흡사한 배경 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천주교는 개신교적 구원론이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공격했고, 루터와 칼빈이후 이른바 제 2세대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를 보호 하면서도 Sola Fide 교리가 초래할 수 있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답변으로 언약교리를 발전 시킨 것이다.  

        어쨋든 퍼킨스는 예정론이 인간의 자발성과 대립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것 이며 은혜신학의 타협할 수 없는 대전제임을 그의 신학체계 속에서 일종의 prolegomena 로 삼았다.  물론 이러한 면이 그의 신학을 스콜라주의로 공격한 그의 적들에게 원인제공을 한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그는 복음선포를 통한 신앙결단의 필요성과 경건의 자발성 역시 성경에 근거한 정당한 가르침임을 인정하였고 경건성 계발을 위한 수많은 글과 운동을 실천에 옮기었다.  예정론이 은혜신학의 절대적인 전제라면, 인간의 자발성과 그에따른 책임성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개혁신학의 인간론적 원칙 이었던 것이다.  

        성경의 이 두가지 진리사이에 생겨나는 긴장과 파라독스 앞에서 퍼킨스는 언약을 선택했다.  그가 언약을 "영원한 작정을 집행하는 도구(the means of the execution of the decree)"로 정의하여 그것을 예정과 자발적 의지의 고리줄로써 이해한 것은 개혁신학의 본질을 꿰?는 심오한 신학적 통찰력 이었다고 평가되며, Calvinist/Federalist 이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필자는 논증 하였다.

        둘째로, 언약을 통한 초월과 내재의 결합은 그의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이해해서 상세하게 다루어 진다.  퍼킨스의 구원의 서정은 사실상 중생과 성화로 요약된다. 왜냐하면 중생은 구원의 초월성에 해당되며 성화는 구원의 내재성에 해당 되기 때문이다.  중생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 지지만 성화는 인간의 의지를 통해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퍼킨스는 이와 같은 은혜의 객관성과 주관성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곧 구원의 서정을 성도에게 가져다 주며 그것이 곧 구원론적 언약의 이해이다.  

        셋째, 퍼킨스가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운 것은 그의 언약신학이 율법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정론자인 그가 율법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바 "율법적 경건(the piety of law)"이란 말도 그에게서 비롯 되었다.  퍼킨스는 믿음과 행위가 구원의 방법으로써(as a means of life-inheritance)는 대립적 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적 관계적인 차원에서 볼때 율법에 대한 순종을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창조론적 그리고 더 나아가서 종말론적 요구라고 이해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순종에는 율법에대한 적극적인 순종(active obedience)과 십자가의 희생적인 순종(passive obedience)이라는 두가지 "행위"가 포함되어 그것들이 믿는자에게 은혜로 전가된다는 것이 그의 속죄론이다.  이것이 그의 언약신? 속에 담겨있는 은혜의 객관성이다.  

        성화는 은혜의 주관적 적용이라고 보았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하다.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 하면서 율법을 심비에 적어 자발적인 순종을 하도록 도와 주실 때 성화가 이루어 진다.  성화 역시 믿음으로 시작되고 지속되지만 인간의 의지와 협력 통해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결국 은혜는 창조론적 하나님과 인간의 순종의 언약 관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로서의 은혜이다.  그래서 은혜는 절대로 순종을 배제하지 않으며 배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칭의(justification)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마치 내것처럼 전가받았다는 것이지 선한 행위 자체를 면제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율법은 거룩의 기준이요 하나님이 본래 언약적으로 인간에게 요구하신 불변하는 성경적 진리이기 때문에 은혜는 진정한 율법(순종)으로의 회복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은혜를 전제로한 이 "행위"라는 인간의 자발적인 선택과 활동이야 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와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죄로 인하여 율법은 은혜를 필요케 하고, 은혜는 또다시 율법을 그 본래적 역할로 회복시키는 것은 퍼킨스 신학에서 언약적 경건의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라고 말할수 있다.  따라서 퍼킨스 신학에서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은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을 완성하는 언약으로 이해 되는 것이다.                

        그의 언약적 경건이 이러한 근거에서 나오게 되었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커베난트(co-venant)"라는 단어의 원의미는 "함께오다"이다.  이말은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발적 책임이 "함께올수" 있도록 묶어주는 "고리줄"임을 시사하는 것 이기도하다.  특히 언약의 쌍무적 성격(bilateral character)이 그것을 대변해주는데 이러한 언약적 특성에 근거한 퍼킨스의 율법론, 성례론, 윤리적 결의론(moral casuistry), 구원의 확신(assurance), 구원준비(preparation for salvation) 등은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경건주의(pietism) 신학의 모체가 되도록 하였다.  Calvinist/Federalist 학설은 퍼킨스 신학에서 이러한 경건의 이론적 근거와 힘(dynamic)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지 못한다.

        넷째, 퍼킨스의 조직적 언약신학은 또한 프랑스의 개혁주의 철학자인 피터 레이머스(Peter Ramus)의 "주제별 방법론(loci method)"과 "양단법적 방법론(dichotomous method)"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제2세대 개혁신학의 조직적 방법론은 사실 레이머스의 양단법을 많이 사용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문답서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레이머스의 주제별 방법론은 성경의 내용들을 신학적 주제별로(논리적으로) 구분하여 나열하는 방법이며, 그의 양단법적 방법론은 신학을 "이론과 실천"으로 구분하는 방법으로써 이론은 곧 실천이며, 실천은 이론에 근거하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서가 "믿음과 실천(faith and duty)"으로 구분된 것도 이러한 라미스트(Ramist)의 양단법적 방법론에 근거한 것이다.  저 신앙고백이 당대 최고의 언약신학자들에 의하여 쓰여졌으며, 그 것의 신학적 하부구조가 언약적이며, 나아가서 언약의 본질인 "믿음과 실천"으로써 요리문답을 정리한 것은 개혁주의 언약신학이 Calvinist/Federalist 로 나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V. 죤 프레스톤(John Preston, 1587-1628)

 

        Calvinist/Federalist 학자들은 죤 프레스톤을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에서 Calvinist 계열을 벗어나서 Federalist 신학을 대표하는 언약신학자로 뽑는다.  또한 그와 함께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역시 내용적으로 Calvinist 가 아닌 Federalist 로 평가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죤 프레스톤의 언약사상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한 번도 비중있게 다루어 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Calvinist/Federalist 라는 모델에 끼워 맞추는 것에 반론을 제기 하였다.

        필자는 일반적으로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을 평가하는 두가지 접근을 논하고 그것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첫째로, 초기 개혁자들과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자들을 직접 비교하는 식의 접근이 많이 시도되고 있다.  "칼빈과 프레스톤," "칼빈과 퍼킨스"식의 연구 논문들이 많은데 이런 접근의 문제는 두 부류의 신학자들 사이에 신학적 방법론의 차이점들이 무모하게 질적(substantial) 차이로 해석 된다는 데 있다.      언약교리에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쉽게 설명이 된다.  칼빈이나 불링거는 제 2세대 개혁자들에 비해 언약에 대한 집착이나 경건적 적용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론적인 문제에 많은 에너지를 할애 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필자는 퍼킨스와 같은 언약신학자를 고려하지 않은 칼빈과 프레스톤의 직접비교는 정확한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 하였다.  신학과 방법론의 차별화, 이론과 실천, 구원과 성화의 강조점들이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변화된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채 직접 비교하여 일방적으로 차이점을 극대화 시킨 문제가 따르는 것이다.

        둘째로, 퍼킨스에 대한 해석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딜레마 이론"이라고 볼 수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신학에는 예정과 언약이라는 이중적인 원리가 공존 하는데 퍼킨스 자신도 서로 상충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이중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범주안에서 예정과 언약을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역시 필자의 견해로는 퍼킨스의 신학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퍼킨스"를 만들어 놓고 그의 제자들과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은 예정과 언약이라는 딜레마속에서 언약을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Calvinist/Federalist 모델에 퍼킨스와 영국 개혁신학을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 한 것이다.  앞서 본것같이 실제로 퍼킨스는 예정과 언약을 신학의 이중원리로 보지 않았다.  "이중원리"는 해석자의 사고속에서 온것이지 그의 신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말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현대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종교개혁과 개혁주의 신학을 논함에 있어서 "post-Newtonian mindset"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분리시켜놓은 전제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여기서 퍼킨스와 프레스톤의 언약신학은 강조점과 적용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뿐이지 신학적 내용과 언약의 구조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 하였다.  프레스톤은 영국교회안에 퍼지기 시작한 알미니안 신학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는 알미니안 신학과 논쟁 하면서 구원론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고(그것은 이미 초기 개혁자들과 퍼킨스와 같은 학자들이 충분히 해 놓았음을 감안할 때 이해가 된다) 알미니안 신학자들이 칼빈주의 신학에 윤리와 성화가 없다고 비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그의 언약신학은 자연히 신학적 논문형식이 아니고(퍼킨스 처럼) 설교형식으로 다루어 졌다.  그의 언약적 관심이 구원론적 이슈가 아니라 칼빈주의 성화와 윤리에 있었고, 딱딱한 신학적 글을 통해서보다 자연히 설교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이것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프레스톤의 글과 설교들을 분석해 보면 퍼킨스와 같이 예정론과 구원의 구조 등에 많이 집착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있다.

        그런데 Calvinist/Federalist 학자들은 바로 이점만을 보고 피상적으로 그를 읽었다.  그에 대하여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한 번도 진지한 연구를 하지 않고 그의 신학이 칼빈주의에서 벗어났으며, 그는 예정론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그의 신학은 쌍무적 언약신학으로서 실제로 이중예정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저들이 선택적으로 취급한 (이것은 놀랍게도 사실이다) 프레스톤의 글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프레스톤의 언약신학은 설교적 유형이라는 사실과 언약교리를 사용하여 칼빈주의적 성화와 경건을 강조하려고 했다는 사실외에는 퍼킨스의 언약신학과 신학적 내용에서나 조직적 방법론에서 전혀 다르지 않음을 논증 하였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퍼킨스나 프레스톤등 제 2-3세대 개혁주의 신학은 앞서 말한 라미스트(Ramist)의 양단법을 사용하여 신학을 "faith and duty"로 나누어 이론과 실천을 논하였다.  따라서 때로는 실천에 있어서 이론과 상충되는 듯한 인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특히 preparation for salvation 에서 강한 conditionality 의 개념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있다.          

        이 preparation 교리는 학자들에 의하여 한편으로 청교도와 영국 개혁신학이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알미니안화 되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확정적인 증거로서 거의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고, Federalist 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거꾸로 이 교리야 말로 인간의 자발성을 강조했던 오리지날 언약신학(불링거)을 다시 회복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preparation 은 Calvinist 의 예정과 유기 교리의 엄격성을 극복하는 매우 긍정적인 교리로 저들은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필자는 새로운 해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속죄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측면이 있고, 인간론(언약)적 관점에서 볼것이 있다.  퍼킨스나 프레스톤이 인간론(언약)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발적 의지나 preparation 의 conditionality 를 말한 것은 저들이 속죄론에서 하나님의 은혜나 그것을 보호하는 예정론을 강조한 것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저들의 신학적 체계 속에서는)을 이해해야 된다.  대립과 상충은 앞서 지적한 것 처럼 해석자의 상상(imagination)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있다.

 

        저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에 절대적으로 근거한 것이지만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써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갖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실제적으로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의 자발적 의지가 한계점에 이르도록 제한적인 "자유성"을 허용 하였다.  성경은 "공로(merit)"의 차원에서가 아닌 인격적 존재로서의 자발성을 인간에게 언약의 "조건(condition)"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윌리암 스토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his seems to be a more difficult problem for post-Newtonians, who tend to conceive of causality exclusively in terms of efficiency.  In the scholastic  conception, human will and grace...may consist as the formal and efficient   causes...of the act of faith...and as the instrumental and efficient causes of the individual's justification.

 

        필자는 스콜라적 방법론에 익숙한 퍼킨스나 프레스톤이 라미스트의 양단법을 동원하여 "faith and duty"로 신학을 체계와 한 것이나, 아리스토틸리안 적인 causality 이론을 구원론에 사용하여 efficient cause 와 instrumental cause 로 이해한 것은 언약의 본질을 바로 이해 한데서 비롯 된것이라고 생각한다.  Calvinist/Federalist 학자들이 속죄론과 언약을 구분하지 않음으로 유언/언약이라는 이분설을 주장한 것과, preparation 교리를 두고 예정교리를 "누그러 뜨리는" 인간의 의지 개념으로 생각한 것은(예정/의지) 다를바 없다.

 

         "효율적 원인"과 "도구적 원인"의 구분은 곧 merit 와 condition 을 구분함과 같다.  모든 merit 은 하나님에게 그러나 인간에게는 condition 을 요구 하는 것이 언약이다.  결국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을 폭군으로 그리고 인간을 꼭두각시로 보는 신학이나, 반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돕는 존재로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신학이나 개혁주의 언약교리를 잘못해석함에 있어서는 다를바 없는 것이다.

 

 

IV. 결론

 

        구원은 예정론적(decretal)이면서도 역사적(historical)이고,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와같은 속성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면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무엇으로 연결 시키는가?  바로 언약이라는 성경적 진리속에서 이 두가지 속성들이 상호관계를 갖으며 서로 맞물려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필자는 개혁주의 언약 교리안에 이처럼 초월성과 내재성, 영원성과 역사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구속사적" 방법론과 "구조적" 방법론이 갖는 차이점의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언약의 이분설은 개혁주의 언약교리의 구조적 방법론을 언약신학 그 자체에서 효과적으로 제외 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것은 현대신학의 "형이상학에 대한 차별(prejudice against metaphysics)"과 무관하지 않으며 신학에서 초월적인 내용을 배제하려는 부당한 출발점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난 다른 무엇보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속죄론적 은혜의 개념과 언약적 책임의 개념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부정하는데서 시작 되었다고 지적 하였다.

 

        언약신학의 방법론적인 다양성을 인정하고 확대할때 성경에 계시된 언약의 풍성한 은총들을 더욱 값지게 누릴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 두가지 방법론은 각각 그들의 독특한 특성과 기능에 따라서 차이점을 갖게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한가지 방법만을 통해서는 얻기 어려운 언약의 다양한 뉘앙스들을 유도해 낼 수 있는 장점들이 있다.  물론 장점들이 있듯이 단점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단점들 때문에 두 방법론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들이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것이기도 하다.

 

        이 둘중 어느 한 방법을 극단적으로 고집할 경우 생기는 신학적 오류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칵세이어스 시대에 그의 구속사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던 알미니우스파의 학자들(the Remonstrants)과 에미로우(Amyraut)파의 학자들은 언약을 지나치게 세대적으로 분석하여 옛언약을 "행위언약"과 동일시하고, 결과적으로 신구약의 기독론적 구원론의 통일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Old Testament justification 이 여기에서 유추되었다.

        반면에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구조적 방법론을 지나치게 고집하다가 "초 칼빈주의 (Hyper-Calvinism)" 라는 오명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늘날 신정통신학의 "Law in the Gospel" 개념이 여기에 근접한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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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우주적인 교회

 

교회 안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바울의 선언은 그들이 더 이상 죄로 말마암아 죽었던 존재이거나 하나님의 특권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며 하나님의 권속임을 증거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여기에서 성도들을 하나되게 하는 터전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되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서 있는 하나의 공동 운명체이다.

 

이러한 개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교회 안에서 신자로서 함께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들과 관련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개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엡 1:23; 4:16).

 

이런 점에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고 밝히고 있다.

 

고대 건축술에서 ‘주춧돌’은 전체 건물에 기초를 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단 하나의 터 위에 세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전파된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그 교회에 거처하시기를 원하신다. 특별히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는 성전의 지성소를 상징한다(F. F. Bruce).

 

교회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영적 몸이다(고전 3:16). 이런 점에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른다. 이 성전은 성령 안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유기적 생명체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터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범세계적으로 확장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William Handriksen).

‘육체를 따라 이스라엘’인 유대인들은 지방의 회당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정 지역에 있는 회당은 ‘온 이스라엘의 회중’이 지역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현상을 새 이스라엘, 즉 교회에 적용시키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의 하나됨, 곧 교회의 하나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 교회에 자신이 전파한 복음으로 신자들이 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그리고 유대인 선교를 포함시켰다. 바울이 바쁜 선교 일정 중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연보를 모금한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울에 의하면 모든 성도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지역의 모임에 합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입은 성도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하나의 영적인 실체의 일부를 구성했다. 성도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합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되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고린도, 로마, 에베소, 예루살렘 등 어디에 있든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기독교적 교제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F. F. Bruce).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보편적인 교회관의 근거이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성령의 전으로 표시된다. 그리고 이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며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엡 2:14-18).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화목에 의한 구원론(엡 2:19-22) 위에 세워져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옛 이스라엘과 성전을 대신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 분리시킨 옛 질서의 세계를 바꾸어 놓은 새로운 창조물이다. 교회는 새 사람들로 형성되는데 이는 인류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 포함된 새 인류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한다.

 

교회는 적대감이 극복된 영역이며 화목이 이루어진 영역이다. 또한 화평이 그 열매를 맺는 영역이며 세상을 위한 통일성의 가시적인 표지를 구성하는 영역이다.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진 자리이며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진 곳이며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가 회복되고 무엇보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특권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임재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 교회관은 더 이상 문자적인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적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동시에 아직 완전히 장성하지 않은 생명체이다. 이 교회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누리는 관계 그리고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더욱더 하나님을 위한 성소로 지어져 간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성장과 거룩에 의해 특징지어져야 한다(Andrew T. Lincoln).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얻은 새로운 특권적 지위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빚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으며 새로운 성전의 으뜸 돌이 되시며 그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서로 맞추어지고 성장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이 교회를 세우셨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의 의미에 대한 선포와 해석을 통해 평안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

 

성도들이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개념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이 사도와 선지자들의 복음 선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도적 복음 선포에 의해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효과적으로 세상에 널리 펼쳐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땅의 교회는 ①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터, 즉 사도와 선지자들이 전한 복음 선포 위에 서 있다는 사실과 ② 그 터 위에 있는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효과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세대주의 신학’, 한국교회 타락과 이단 양산의 주범

 

 

"20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세대주의 신학의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는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율법과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이 대거 등장하게 만들었다."


전 침신대 교수이며 현재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인 정동섭 박사는 최근 본지에 보내온 '세대주의와 이단'이라는 제목의 연구자료에서 세대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과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발생한 이단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성경해석과 교리들에 대해 지적했다.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 지도자 달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시작됐다. 달비는 19세기 중반에 영국 성공회가 부패했다면서 교파를 떠나 형제운동을 시작하며 세대주의를 체계화했다.


정 박사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 신학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언약신학'에 기초한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이다. 여기서 세대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정 박사에 따르면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복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세대주의의 경우 성경 역사를 무죄 시대, 양심 시대, 인간통치 시대, 약속 시대, 율법 시대, 은혜 시대, 천년왕국 시대 등 일곱 세대로 나눠 설명하면서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각 시대마다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 예를 든다면 양심 시대에는 양심을 따라 살면 구원 받고, 율법 시대에는 율법에 따라 구원받고, 은혜 시대에는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식이다. 따라서 현재 은혜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십계명은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없다는 율법폐기론으로 이어졌고, 기독교의 윤리성은 무너지게 됐다.


정 박사는 "무너진 기독교 윤리성의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양 사건과 세월호 사건을 일으킨 유병언의 구원파다. 회개무용론을 가르치고 있는 또 다른 구원파의 교주 박옥수도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다"며 "이러한 세대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통 교회도 은혜를 누린다면서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세대주의 율법관과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치고 있고, 많은 이단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초부터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이단은 다미선교회나 구원파만이 아니다. 지방교회의 사상적 뿌리도 세대주의다.


세대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언약신학)의 다른점에 대해 설명한 정 박사는 "세대주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했으며, 말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만들었다"며 "약 130년에 이른 한국교회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이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해 종말론을 가르치면서 세대주의 사상이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율법이 무엇이며, 율법의 용도에 대해 설명한 정 박사는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행복을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강조하면서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해 율법과 은혜를 나누는 것의 위험성과 이를 근거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이단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 박사는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서로의 관계를 관장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질서 있는 삶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필수사항이다)"라고 피력했다.


하지만 "이단 구원파는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며 "일단 구원을 받으면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한국의 모든 정통 교단은 구원파를 율법폐기론자(도덕률폐기론자)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 그 교훈과 도덕률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과 관계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폐기론'이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은혜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은혜는 공짜'라고 말하는 것이 한 예다. 은헤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은혜를 가리켜 공짜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 정 박사는 "성경에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과 철저한 청산을 강조한다"고 역설했다.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싫어하고 되고, 죄에 대해 저항하게 되는 새로운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서는 죄와 투쟁하는 거룩한 삶의 새 질서가 시작된다.


정 박사는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써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게 만들었다"며 "1992년 10월 28일 휴거설을 주장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는 소속 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무시한 채, 강제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회개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20세기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전했던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성경을 벗어난 매우 불건전한 해석이다.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대부분 이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를 주요 사용한다"며 "예언적 교훈이나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피력했다.


정 박사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며 "지금 우리가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말세의 징조인 미혹, 난리, 재난, 이단 등의 영향을 주의하면서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기고]세대주의와 이단

http://www.theosnlogos.com/news/articleView.html?idxno=984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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