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선교원리에 관한 논의

 

이광호 목사




1. 서론

   우리시대에 ‘선교’라는 용어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기독교 초기부터 사용된 말은 아니었다. 교회가 수행해야할 본질적 사명 가운데 하나가 복음전파이므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는 선교라는 말이 복음전파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선교라는 용어는 인간의 종교적 열정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물질적 봉사의 영역으로서 선교를 요구하도록 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우리는 주로 가난한 나라에 선교를 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향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의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경향이다.     

  본래 선교학의 유일한 근거는 신구약 성경이다. 성경의 요구와 가르침에 근거하여서만 선교의 의미가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학이 현대교회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이래 선교학은 성경중심으로 발전되기 보다 세계 속의 급변하는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개혁주의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을 기초로 한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선교에 있어서도 종교적 자기 열정이나 결심이 아니라 기본적인 신앙고백의 틀 위에서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선교의 목적은, 미리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 성도들이 하나님의 택한바 된 백성들을 찾아 그 고백을 전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현대선교의 다양한 신학적 양태들을 간단하게 살펴봄과 동시에,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은 선교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졌으며 그들은 어떠한 고백을 했는지 신앙고백서들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현대 선교에 있어서 적극성과 소극성의 문제와 함께 구체적인 성경말씀들을 살펴봄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우리의 선교원리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현대선교의 다양한 신학적 양태

   (1) 자유주의 선교이론

       우리 시대에 가장 경계해야 할 선교신학은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다. 자유주의 선교이론은 ‘Missio Dei 사상’에 근거한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교회의 안팎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세상통치를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여 인본주의적 해석을 가미하고 있다. 이에서 나온 선교사상들이 남미의 해방신학, 유렵의 정치신학, 아프리카의 흑인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현재 이슈가 되어있는 여성신학 등 소위 행동신학(Doing Theology)이다.   

  1960년대가 되면서부터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조와 함께 선교학 마저 고유한 복음전파의 개념을 크게 상실 당하게 된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내부에서 상황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사회과학적인 면이 과대하게 강조되었다. 최근에 들어와 신학의 타학문 분야에서 이에 대해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즉 신학이 없는 선교학에 대한 비판과 성경을 도외시한 사회과학 쪽으로 치우친 선교학 연구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 복음주의 선교이론

       복음주의 선교이론의 특색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참여에 있어서 인간 즉 지상교회들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선교실적을 논하게 된다. 그들은 선교활동 자체가 인간의 공적이 되며 그 공적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활동으로 인한 선교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를 하기도 한다. 

  복음주의 선교학에서는 소위 기독교화(Christianization)에 치중하여 기독교의 영역을 넓히는 것에 힘을 쏟는다.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예정에 대한 교훈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 대신 보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주로 강조하며 하나님을 이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고유한 하나님의 경륜이나 섭리보다 인간의 자기연민에 기인한 감성적 사고의 결과일 따름이다.  


   (3) 개혁주의 선교이론

       개혁주의 선교이론에서는 구원과 선교 전반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참여할 뿐이다. 개혁주의 선교이론에 있어서는 외적인 결과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논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온전히 순종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며 반성하게 된다.

    개혁주의 선교이론의 근거는 오직 신구약 성경말씀이다. 이 말씀에 조화되는 전통적인 신앙고백들이 곧 선교이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즉 개혁주의자들은 인간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획과 경륜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3.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의 선교에 대한 자세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선교에 대한 이해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선교’에 관한 별항이 들어있지 않다. 현재에 있어서도, 많은 경우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의 표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제1부 교리표준 <1. 신앙고백>에서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를 첨가한 문서를 채택하고 있다. 물론 나중에 첨가된 이 조항은 원리적 측면에서 앞의 전통적 신앙고백서에 조화되어야 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현대 개혁주의 선교 이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5장을 전반적으로 잘 고찰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 제1항에서는 “하나님은 ‘은혜계약 안에서’, ......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거저 주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장에는 전체적으로 ‘모든 인간’을 뜻하는 문구들이 되풀이하여 등장하고 있다. 제1항에는 ‘모든 멸망한 인류’, ‘모든 사람’, 제2항에는 ‘모든 사람’, ‘모든 사람들’, 제3항에는 ‘모든 사람’, 제4항에는 ‘모든 민족’ 등이 나타난다. 여기에 언급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요 온 인류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고신 교단이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5장을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앞의,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와 제10장,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하여’에서 고백하고 있는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동일한 신앙고백서에서 서로 배치되는 항목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제35장 제1항의 모든 멸망할 인류와 ‘모든 사람’ 앞에는 각각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서’ ‘복음 안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제2항에서도 ‘모든 사람’ 앞에 ‘복음 안에서’라는 말과 ‘진실로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제3항에서도 ‘복음을 듣는’ 이라는 수식어가 ‘모든 사람’ 앞에 붙어 있다. 그리고 제4항에서의 ‘모든 민족’은 all nations가 아니라 every nations로 해석하여야 한다. 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에 속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종족을 초월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5장이 앞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조회되는 고백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인을 다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예정과 부르심을 통해 주를 믿는 성도들만 부르고 계시고 그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궁극적 심판도 실제적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에 의한 제한적 구원에 관해서는 대소교리문답에서도 그대로 명시되어 있다.

 

   (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복음전파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요리문답 제54문에서 거룩한 공회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관한 문항에서 ‘인류가운데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부르시고 계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선교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영생에의 참여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함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83문에서는 교회의 문을 여는 천국열쇠의 핵심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84문에서는 복음의 선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게 되지만, 불신자와 위선자들에게는 천국문이 닫히게 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와 유기된 자 사이에는 복음의 선포 즉 선교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구분되어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 벨직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도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특히 벨직 신앙고백서 제16장 [영원한 선택]에서,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에 대해서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무력함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어떤 노력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원한 선택만이 구원이 있게 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인간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지 않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밝히고 있는 바, 인간의 구원이 인간들의 여하한 활동에 달려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달려 있음은 현대 선교학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3) 도르트 신경

      도르트 종교회의(the Great Reformed Synod of Dortrecht, 1618-1619)는, 알미니안 주의가 생겨나고 그 사상이 퍼짐에 따라 개혁교회 내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됨으로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도르트 신경은 첫째교리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도르트 신경 첫째교리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의 말미에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이라는 별항에서 선택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변증하고 있다. 특히 제1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배격하고 있다. 그리고 제3절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선택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무런 효력이 없게되어 인간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바 은혜로써 주신 칭의와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될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4. 선교의 적극성과 소극성의 문제

   개혁주의 신학에서 선교는 소극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그 소극성이라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인간의 적극적인 자기노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개혁주의자들의 선교에 대한 적극성은 하나님의 경륜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인간의 선교적 자기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 아니다.

    

   (1) ‘선택 및 예정교리’와 선교의 조화 

       복음전파에 있어서 과연 선택 및 예정교리와 현대선교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다 알 수 없다. 단지 말씀의 가르침을 좇아 그 뜻을 따를 따름이다. 선교는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교리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한 채 ‘기독교’라는 종교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적 의미에서의 선교를 벗어나는 것이다. 선교는 인간의 종교적 성공’이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올바른 선포’가 중요한 문제이다.

  선교는 이미 설정된 구원의 완성을 지향해야 한다. 즉 이미 설정된 선교의 완성을 향해 각기 주어진 은사에 따라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선교의 착실한 과정이요 목적인 것이다.     


   (2) 무분별한 열정에 대한 주의

       현대적 개념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교활동은 자칫 인본주의적으로 흐르기 쉽다. 선교활동 여하에 따라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할 것이라는 생각은 알미니안주의적 신학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알미니안주의 에서는 “믿고자 하고 이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전체적이므로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할 뿐, 그 외의 다른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선교는 소위 선교 전략적 방법에 치중하려 하며 그것을 위해 많은 선교사와 선교비가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떠난 선교지도자들은 더 많은 사람을 해외로 보내고 더 많은 돈을 지원함으로써 선교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지나치게 되면 인본주의적 종교활동으로 전락할 뿐 성경이 가르치는 바 진정한 선교가 되지 못한다.   

 

   (3) ‘선포냐, 설득이냐’의 문제

       개혁주의 선교신학에서는 ‘선포’에 더 많은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는 ‘설득’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선포’나 ‘설득’이라는 용어 대신 ‘전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이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선교에 있어서 이에 대한 문제해결을 하는 선교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자칫 ‘설득’은 말씀 전달자의 사랑과 관심이 풍부한 것처럼 보여질 수 있는 반면, ‘선포’는 일방적인 것으로 매우 건조한 의미로 들려지기 쉽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보아, 선교 신학에 있어서 ‘설득’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감성적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선포’는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지적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선교학자들 가운데는 ‘선포적 전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설득이  타협의 위험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궁극적 설득자는 성령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복음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도 선교에 포함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종교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하여 선교전략이나 방법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전략이나 방법에 열중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자연스런 인도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경험이나 주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성경말씀에서 얻는 교훈

   1) 복음전파에 대한 적극적 교훈

      (1) 모든 족속을 제자 삼도록 요구하심(마태복음 28:18-20)

          흔히 선교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마태복음 28장 맨 뒷부분을 언급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족속 모든 사람’(all nations everybody)을 제자로 삼을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 여기서 요구하시고 있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 민족에서부터 이방에 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오히려 개별적 자기 판단을 중지시키고 계신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신다. 즉 자기 이름으로 자기 판단에 따라 세례 베푸는 것을 엄히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내용에 국한됨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인간의 활동이 이에 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의 뜻을 멀리 하는 것이다.

      

      (2) 주님의 증인이 됨(사도행전1:8)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게 되었을 때 성도는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8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우리 시대의 선교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서 특별히 주어진 말씀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라는 말씀은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심을 의미한다. ‘너희에게’ 라고 하는 말씀은 지상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 오순절 성령이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 오시게 되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언약의 민족인 유대인의 범주를 벗어난 이방에 미치는 복음의 의미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3)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의 의미(딤후4:2)

          이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바 단순히 ‘전도’를 계속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가 지속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전파’는 말씀선포의 의미를 가진다. 이웃에게 ‘예수 믿으시오’라고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 전도의 말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더불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복음전파, 즉 선교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가장 중요한 핵심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있어야만 한다.말씀선포 보다 더 중시되는 다른 선교적 활동이 있다면 분명히 견제되어야 할 일이다.   



   2) 복음전파에 대한 소극적 교훈

      (1) 노아홍수 사건에서 얻는 교훈(창세기7:1,13; 벧전3:20)

          노아 홍수때 구원을 받은 사람은 모두 여덟명에 지나지 않는다. 왜 단지 여덟명인가? 우리는 노아의 방주의 규모를 알고 있다. 그 큰 배에 사람을 태운다면 아마 수 천명이라도 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심판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악한 사람들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악함이란 윤리적 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들의 진리를 떠난 악함이었다.

  노아 당시에도 순진한 어린이들이 있었을 것이며 일반적인 범죄능력을 상실한 노약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노아의 방주에 오르지 못했던 것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악함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떠난 악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방주에 태우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의 열정적인 교인들은 그 큰 방주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각종 동물을 암수 일곱씩 태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태우려 애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노아의 가족 이외에는 한 사람도 방주에 타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며 노아의 가족 역시 방주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워 구원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가나안 땅에서의 냉혹함(신명기7:1-5)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살고 있던 이방 민족들에 대한 무차별한 도륙(屠戮)을 명령하셨을까? 여호수아서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진다[여리고성 함락(수6:20-21), 아이성 전투(수8:24), 하솔과의 전투(수11:6-15)].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유하여 이스라엘에 포함시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모두 쫓아내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도륙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타협을 원하시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법칙만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자기 자비심이나 연민은 오히려 위험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족속들을 철저하게 추방하고 도륙했던 것은 그 땅이 하나님의 백성만이 살아야 할 곳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시대 같으면 그 이방 사람들을 잘 권유하여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논리를 펼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방법이라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뜻을 나타내심으로써 그 의미를 명확히 하셨다.    


      (3) 세례요한의 무자비함(마태복음 3:5-9)

          세레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세례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었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례 베풀기를 거부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를 받기 위해 그에게로 왔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고 책망하며 그들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했다.

  우리 같으면 그런 경우 어떻게 하려 할까?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찾아왔다. 누가 강압적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자기 판단에 의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만일 오늘날 잘못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자발적으로 찾아온 그들에게 마땅히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런 식으로 쫓아내는 것은 비복음적인 것이라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렇게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4) ‘복음의 비밀’과 ‘깨달음이 허락된 자’에 대한 이해(마태복음 13:10-17)

          복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별적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자기백성’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함임이 복음서 처음부터 계시되어 있다(마1:21).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다 이루시기 전에 이미 ‘자기백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자기의 말을 듣기는 들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깨달음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이 그 말을 듣는다 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엄숙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경험에 따라 일반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녀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에게는 모든 것을 드러내어 가르쳐 주시지만 자기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밀을 알려 주지 않으신다.  

           

       (5) 교회의 정결을 요구함(고린도전서 5장)

           사도바울은 교회의 정결을 교회 안에 들어와 복음의 맛을 상당부분 보았을 사람들에게 조차 하나님의 교훈을 떠날 경우 저들을 교회로부터 쫓아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그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주변의 권유와 자기의 판단에 의해 교회 내부로 들어왔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교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이들은 이러한 원리를 염두에 둔 채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강권하여 교회를 채우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 가운데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판단이나 노력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6. 결론

   개혁주의 신학원리에 있어서 선교란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교란 인류의 구원에 대해 인간의 노력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 가운데 온전히 참여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복음전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에 있다. 이는 인간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정과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자기활동에 근거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근래의 개혁주의 신학사상에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구원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므로 그냥 방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성도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에 온전히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숙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선교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나 노력을 지속해 나가되 선교지도자들은 그 일들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행해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밖에 있는 자들 중, 외견상 누가 하나님의 구원에 부르심을 받은 자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양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1:20)을 통해 주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가운데 미리 부르심을 입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가 아직 세상에 속해 살고 있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 나서는 것이 곧 종된 자들의 삶인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선교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느 정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의 백성을 예정하여 선택해 두고 있음을 믿는다. 우리가 힘을 다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섭리 가운데서 그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력 여하가 복음에 참여하게 되는 수를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원리에 입각한 선교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덜 열정적으로 비쳐질 우려가 없지 않다. 물론 그렇지 않으나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다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범주를 알 수 없으므로 인해 더욱 부지런히 주님께서 허락하신 선교사역에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복음에 성숙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개혁주의적 올바른 선교이론을 확립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와 문화 제8호, 2002)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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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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