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

믿음은 ㆍ 2013-12-09 (월) 09:39 IP: 1.xxx.205 ㆍ조회: 14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13. 교회 내에 불상사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결함을 참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깊은 사려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내려가는 길이 매우 미끄럽고 사탄이 비상수단으로 매복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완전히 성결하다는 그릇된 신념으로, 이미 낙원의 천사라도 된 양 인간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었다. 옛날 카타리파가 그러했고 도나투스파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일부 재세례파가 다른 사람들보다 고상한 체한다.

어떤 사람은 광적인 자만심보다 의에 대한 그릇된 열성 때문에 죄를 짓는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생활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즉시 거기에는 교회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불평이며, 이 극도로 비참한 시대에 이런 불평이 생길 원인을 우리 편에서 너무도 많이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받을 태만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께서는 반드시 이 태만을 벌할 것이며 이미 무거운 채찍으로 징벌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죄악된 자포자기와 방탕으로 약해진 양심들에게 상처를 입힌 우리는 어떻게 화를 면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자기의 불쾌한 생각을 억제할 줄 모르는 점에서 역시 죄를 짓게 된다. 주께서는 인자하라고 요구하시는데, 그들은 철저하게 순결하고 성실한 생활이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다는 생각으로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악인의 무리에서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하다고(엡5:26)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들어 보아야 한다. 교회는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아서, 물가로 끌어낼 때까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지 않는다(마13:47-48). 교회는 좋은 씨를 뿌린 밭과 같아서, 원수의 속임수로 가라지도 뿌려졌으나 추수 때가 되어 타작마당에 모아들일 때까지 뽑지 않고 버려둔다(마13:24-30). 교회는 곡식을 모아 놓은 타작마당 같아서, 키로 알곡을 가려 곡간에 들일 때까지 알곡은 쭉정이에 덮여 있게 된다(마3:12). 교회는 이런 재난 밑에서 수고하게 되리라고-심판의 날까지 악인이 섞여 있어서 큰 짐이 되리라고-주께서 언급하신다면 그들이 아무 오점도 없는 교회를 찾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14.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그러나 그들은 죄악이 두루 창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외친다. 여기서도 사도의 의견으로 그들에게 대답할까 한다.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는 타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사실 거의 회중 전체가 감염되었었다. 한 가지 죄가 아니라 아주 많았으며, 그것도 경미한 과실 정도가 아닌 무서운 비행이었다. 도덕적 방면뿐만 아니라 교리적인 방면에까지 부패가 있었다. 성령의 도구요 그의 증거에 의해서 교회의 존망이 결정될 저 거룩한 사도 바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그는 이런 교회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들을 몰아내는가? 최종적인 저주의 벼락으로 그들을 때려 부수는가? 그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라고 인정하며 선언한다(고전1:2).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는 분쟁과 분열과 시기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고전1:11, 3:3, 5:1, 6:7, 9:1 이하) 언쟁과 탐욕이 함께 싹트고 있었고 이교도들조차 미워할 악행을 버젓이 시인하고 있었다(고전5:1). 아버지처럼 존경해야 할 바울의 명예를 무례하게 깎아 내리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조롱하여 복음 전체까지 부수려고 하였다(고전15:12).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재능은 야심에 이용되었고 사랑을 돕지 못했다(고전13:5 참조). 여러 가지 일을 예절이나 질서 없이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선포와 성례 집행은 반대 없이 계속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교회가 존속했다. 그러면 누가 감히 이런 비행의 십분지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교회”라는 명칭을 빼앗을 것인가? 묻노니, 현대 교회들을 반대해서 야비하게 날뛰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떻게 대접했겠는가? 그들은 거의 복음을 버린 자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 사이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갈1:2)  

칼빈의 기독교강요(하) 제4권 제1장 13~14. 26~29p에서 발췌 / 생명의말씀사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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