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학 대학원 교수이신, Richard Gaffin이 Calvin and The Sabbath이란 책을 쓰셨는데 마직막에 칼빈의 견해를 19가지로 요약 해 놓은 것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1.십계명은 온 인류를 모든 세대를 통하여 구속하는 하나님께서 쓴 변개되지 않는 도덕법이다. 

 

2. 십계명의 한 부분인 4계명 역시 하나님의 불변하는 법으로 온 인류를 모든 세대를 통하여 구속한다. 이 점에서 안식일 제도는 창조 질서에 속한다. 

 

3. 구약 시대에 있어서, 4계명이 명한 안식일은 영적 안식의 모형 혹은 상징이다. 

 

4. 영적 안식은 우리 자신의 죄된 일들을 그만 두고, 우리 옛 본성을 죽임으로써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화의 사역을 우리 안에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이 안식은 한님의 뜻을 순종함 혹은 그분을 닮아감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5. 구약에서 매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다른 6일동안의 노동을 그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안식은 공적인 예배를 위해서 그리고 그 안식이 표상하고 있는 약속의 실체에 대한 개인적인 묵상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6.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미래의 실체에 미리 맛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매주 안식일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표징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중생의 성례였다. 

 

7.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 분 빛 아래에서 모든 그림자는 사라지고 영적 안식은 충만한 실체가 되었다. 그 결과 모형과 성례로서의 안식일은 폐지되었다. 

 

8. 비록 완전한 영적 안식은 마지막 날까지 이루어지지 않지만,신자들은 이 안식을 실제적으로 소유한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영적 안식은 영원한 안식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 

 

9. 엄격히 말해서 신자들은 매주 하나의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더이상 없다. 그러나 이 계명의 완화가 4계명을 폐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안식일의 4계명의 요구들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킨다. 

 

10. 신자에게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남으로 누리는 영적 안식(죄로부터의 자유, 새 생명)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1. 그러한 영적 안식은 한 주의 한 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고 영구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12. 영적 안식의 경험은 경건과 그리스도인의 봉사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묵상과 예배 행위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영적 안식은 영구적이기 때문에 매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자에게 가장 이상적이다. 

 

13. 신자는 구약시대의 신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죄의 연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지정된 시간을 따로 구별함으로 신자들이 세상적인 염려나 근심으로 부터 자유하여 사적으로 묵상의 시간을 갖고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인 현실적으로 꼭 필요하다. 

 

14. 유대인의 안식일은 이 필요성을 완전하게 충족시킨다. 하지만, 모형적인 신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장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수많은 미신들이 안식일과 결부되게 되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안식일을 주일로 대체하였다. 이렇게 바뀐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약의 상징들이 더이상 필요없게 된 날을 기념하기 때문에 특히 타당하다. 

 

15. 오늘날 주일은 그것이 원래 의도한 바를 여전히 충족시킨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주일이 아닌 다른 날을 구별하거나 일주에 한 번 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신자들이, 그런 다른 날들이 예배와 묵상을 위한 정해진 시간으로 사용되는 한, 정죄되어서는 안된다. 

 

16. 그러므로 신자들은 주일이 어떤 종교적인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의 질서와 화합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자유스럽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주일을 지킨다. 

 

17. 노예들과 노동자들을 위하여 4계명이 요구한 육체적 안식은 이 계명의 기본적인 관심에 부가된 것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이나 주일의 안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묵상과 공적 예배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18. 이 안식의 명령은 주인이나 고용인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인간적으로 억눌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것은 첫째 돌판 보다는 둘째 돌판에 속하는 것이다. 

19. 4계명의 핵심은 안식일 제도의 본질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따라야 하고 그런 본받음이 공적인 예배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사적인 묵상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양무리마을/로빈슨크로소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들을 세상의 성도들에게 다양하게 나누어 주시고, 그들에게 서로 다르게 빛을 비추어주시듯이,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선물들로 면류관을 씌워 주실 그 하늘의 영광도 모두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날에(살전2:19)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20)고 말하는데, 이것은 모두에게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들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듯이 하늘에서도 영광을 입히실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자기의 수고에 따라서 자기를 위해서 특별한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딤후4: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맡겨진 직무의 존귀함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열매가 하늘에 예비되어 있다고 가르친다(참조. 마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또한 다니엘도 이를 가르치고 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

누구든지 성경을 면밀하게 공부해 보면, 성경이 신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할 뿐 아니라

각 개인에게 특별한 상급을 약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도 이렇게 진술한다: (딤후1:18절)

☞ 칼빈은 18절만 언급하지만 문맥을 고려해서 16절부터 18절까지 올린다.

 

(딤후 1: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딤후 1: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딤후 1: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이는 또한 그리스도의 약속을 통해서 확증되고 있다:“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을 주셔서 그의 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또한 점점 그 영광을 증대시키듯이, 하늘에서도 그 영광을 그렇게 완성시키실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la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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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구든지 원수든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존 칼빈

1.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 피곤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는"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행한 대로라면 선대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린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선을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사람의 실존적이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다만 우리 모두가 경외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 생각하라고 가르침으로써 탁월한 논의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권속들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회복된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당신의 친절한 봉사를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 당신은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그가 낯선 사람이라고 합시다,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인을 쳐서 당신과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 자신의 혈육을 멸시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가령 그가 아주 멸시받는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황송스럽게도 주님은 그를 자신의 형상으로 단장할 만큼 귀하게 여기십니다.
가령 당신이 섬길 의무를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많은 축복을 받은 당신은 베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당신으로부터 최소한의 선행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이 자아를 죽이고 당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주도록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아무런 친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오히려 그는 당신에게 상처와 모욕을 줌으로써 당신을 분노케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그를 사랑으로 감싸지 않고 모든 친절을 베풀지도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그는 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오직 모든 사람의 모든 무례함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3.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해 받은 것을 친절로서 갚고, 저주를 축복으로 돌려주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만을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의 잘못을 덮고 지워버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마 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17: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 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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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한 가지 일, 즉 믿음에 대해 일깨워 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사람이 믿음 없이 행동하는 모든 일은 헛되고 무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 하나만을 요구하시므로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는 믿음과 인간의 공로 및 노력 사이에 암묵적인 대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이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애쓰면, 말하자면 주로(主路)를 벗어나 달리다가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그런 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는 사람들이 평생토록 불쌍할 만큼 자기를 괴롭게 해도 자신의 삶의 기준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다 헛 수고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 사랑도 경시해선 안 될 것이고 그 밖의 다른 신앙의 의무들도 그 위치와 영예를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다른 선행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믿음은 이웃 사랑이나 그 밖에 다른 선행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해지는 까닭은, 믿음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며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스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믿음과 믿음의 열매를 분리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과연 믿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삼으셨는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출처: http://thevine21.homp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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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험과 사탄의 시험은 서로 전혀 다르다
 



 
사탄은 무너뜨리고 정죄를 받고 내어쫓김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시험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연단하심으로써 그들의 신실함을 시험하시며, 시험을 통해서 그들을 강건하게 하시며, 그들의 육체를 죽이고 정결하게 하고자 하신다. 이처럼 절제시키지 않으면 육체는 스스로 교만과 방종에 빠져서 걷잡을 수 없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사탄은 무장을 갖추지도 않고 공격을 받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을 주시는 가운데서도 피할 길을 주셔서 그의 백성들이 그 닥치는 모든 것들을 인내로 견딜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고전10:13,벧후2:9).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 ‘악’은 마귀로 이해하든 죄로 이해하든 별 차이가 없다. 사탄은 우리의 생명을 찾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철천지 원수이며(벧전5:8), 더욱이 그는 죄로 무장하고서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떠한 시험이 오더라도 거기에 압도되어 무너지지 않고,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적대 세력들을 주의 권능으로 대적하며 굳게 서게 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보살피심과 보호하심을 받아 죄와 사망과 지옥의 문들과 마귀의 권세 전체를 견디며 승리하도록 해주시기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주목해야 할 것은, 그 큰 용사 마귀와 싸우며 그의 힘과 공격을 견디는 일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기들 스스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자들은 그들의 대적하고 있는 그 원수가 얼마나 사납고 얼마나 무장이 잘되어 있는지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귀는 미친 듯이 울부짖는 사자와도 같기 때문에, 만일 주께서 그 죽음의 상태에서 우리를 건져내지 않으시면, 우리로서는 즉시 그 마귀의 날카로운 이와 발톱에 갈가리 찢기고 그에게 삼키운 바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얼마든지 잠잠히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시60:2).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강하게 서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야고보의 증언처럼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시험하지 않으시니(약1:13) 하나님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고 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 이미 해결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욕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모든 시험의 원인이며(약1:14) 따라서 시험의 책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고보의 의도는 다만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스스로 범하게 되는 그런 악행들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이 헛되며 부당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정의롭고 은밀하신 그의 판단에 의하여, 우리를 사탄에게 넘기기도 하시며, 우리를 불신앙의 마음과 헛된 정욕 속에 던져넣기도 하시며,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500-502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토요일에서 주일로 변경이유/ 칼빈


 

주님의 날을 설교를 듣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기도를 드리는 데 활용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주님의 날은 우리에게 망루와 같은 역할을 해서 우리로 거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멀리까지 바라보게 해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님의 날을 게임이나 헛된 오락, 하나님을 완전히 거스르는 행동들로 보냈다면 그들은 자신이 주님의 날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노엽게 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곁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제정하신 이 거룩한 규례가 그런 방법으로 어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 규례는 율법의 구속을 받고 있을 때처럼 의식을 엄격하게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형상이나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날에 따로따로 떨어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어느 특정한 날에 함께 모여서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실은 매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지함을 고려하고 그들의 나태함 때문에 특별한 날이 그 목적을 위해서 온전히 바쳐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제 7일을 그날로 지정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정되었던 것과 같은 날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전에는 그날이 토요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를 율법의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며, 율법에 담겨있는 의무를 취소시켰기 때문에 그날이 바뀌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까닭으로 그날이 옮겨졌다. 우리는 일주일 중 어느 날을 안식일로 정해서 그 규례를 준수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이틀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선택에 맡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성찬식을 갖고 하나님께 공동의 기도를 드리고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날을 정하는 것이 편리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 앉아서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이 규례를 지킴으로써 교회의 모든 존속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합당하다.”

 


 


 

칼빈설교. 신 5:12-15.

 

출처: 물과피와성령/글쓴이: 새생명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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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16: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혹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터툴리안(Tetullian)과 암브로스(Ambross), 칼빈(Calvin)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본문에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부자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다이브스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믿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 품으로갔다는 말씀이 잘 가리킵니다(22). 부자는 믿지 않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호화로운 연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씀이 증거합니다(19).

 

 

부자

 

부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옷,자동차,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곧 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거지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의 연회에서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서 배를 채웠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문가에서 같이 음식을 나누던 개가 그 헌데를 핥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나사로가 어떤 사유로 거지가 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몹시 불행했고 고통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22절에 보면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육신적 죽음입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옥에 있는 부자를 봅니다. 부자가 그 지옥 속에서 외치는 외침을 들어봅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적셔 주시옵소서." 그는 이미 지옥에 가서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머리가 보통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옥은 한번 빠지면 이미 결판이 났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곳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에 대달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단절이 생겼다. 그래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강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내 아버지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 다섯 형제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는 형제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 부자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닙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형님 전갈이라고 말하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아니,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가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지옥의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을 말하시는 분은 이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호세아도 아니고 아모스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옥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를 아십니다. 시작을 아십니다. 끝을 압니다. 인생의 높이를 압니다. 저 깊은 낮음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 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자비가 끊어진 장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십니다. 공평하십니다. 한없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처럼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단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 불 같은 불 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끊어져버린 장소,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마저도 말라버린 장소가 지옥입니다.

 

  

지옥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옥에서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거기 들어갔던 이 부자는 다시 기회 없는 줄 이미 눈치챘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었으면 그 유능한 능력으로 아마 예수님이라도 로비를 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물 한 방울만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두 번째로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단절의 땅입니다.

 

 

지옥은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개혁주의 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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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오염 / 존 칼빈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
 
담의 영적인 생명은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계속 연합되고 결합되어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는 아담의 영혼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자연 질서 전체를 뒤집어 놓은 그가 자신의 반역으로 인류를 타락시킨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롬 8:20, 22). 그 이유를 묻는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피조물이 인간이 받아 마땅한 형벌의 일부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저주가 하늘과 땅과 세상의 모든 영역에 두루 퍼졌으므로 그 저주가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도 퍼졌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불합리한 점이 없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늘의 형상이 지워진 뒤에 아담은 하나님께 받은 온갖 장신구-지혜, 미덕, 정의, 진리, 성결 등-을 빼앗기고 그 자리를 무시무시한 역병-맹목, 무능, 허영, 음란, 불의 등-이 대신하는 형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후손들도 함께 자기와 똑같은 비참한 상태에 몰아 넣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다윗의 고백에는 분명 아무런 모호한 점이 없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이 구절에서 다윗의 의도는 자신의 부모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효과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자신의 태생적인 불결함을 되풀이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사례는 온 인류의 공통된 운명의 한 예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의 부정한 씨에서 나와 죄에 오염된 채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아니, 우리는 태양 빛을 보기 전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렵혀지고 오염되었습니다. 욥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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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John Calvin의「基督敎 綱要 - Ⅲ권」에서 그의 "부활"에 관한 내용을 간추린 것으로,

     25장의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25장. 최후의 부활

(최후의 부활 교리를 주장함, 1-4)

1. 부활의 소망 : 이 소망의 중요성과 소망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 - 경건한 자들의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있는 소망을 주목한다고 바울은 말한다(골 1:4~5).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시하면서 하늘을 의지하며, 지상에 있는 것에 조금도 끌리지 않고 약속된 복을 바라 볼 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실현된다. 이처럼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힘을 준다 - 우리는 이 지상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유일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도록 매일 더욱 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연합이 완전히 실현되어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이것은 계속될 것이다.

3. 바라는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 완전히 썩어 버린 몸이 때가 오면 드디어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 큰 장애물을 믿음이 극복할 수 있도록, 성경은 두 가지 도움을 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으로써 그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으셔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이다.

4. 몸의 부활의 근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각종 반대론자들의 반대론을 반박함, 5-9)

5. 이교도들의 반대론을 장례로 반박함. 천년왕국론자들의 오류 - 본성의 놀라운 충동에 의해 사람들은 그들의 눈앞에 항상 부활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매장 풍습을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인정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생명에 대한 보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천년왕국론자들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천년 동안으로 제한하였는데, 천이라는 수는(계 20:4)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6.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7. 현세에서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

8. 몸을 존중하는 장례의 의미, 부활의 모양 - 매장하는 몸들을 위해서 새로운 생명이 준비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장례는 왜 생겼겠는가? 본체로 보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 몸의 본체는 보유하겠지만 변화가 생겨서(고전 15:51~52) 이 나중 상태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한다.

9. 불신자의 부활 -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 같이 앞으로 있을 부활을 기다린다고 한 유명한 고백을(행 24:15) 고수해야 하지만, 성경은 부활과 하늘 영광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가르치는 일이 더 많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원래의 목적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내세 생활 :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즐거움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소원해진 영원한 불행, 10-12)

10. 영원한 복 - 우리는 항상 영원한 행복을, 즉 부활의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몸의 영광을 각양 각색의 선물로 나타내기 시작하시고 점점 그 영광을 증대하시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그 영광을 완성하실 것이다.

11. 무용한 질문들을 처리함 - 나는 개인적으로 무익한 문제들을 공연히 연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t대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박한 행동을 조장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12. 버림받은 자들의 처지 -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중대성은 적당하게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비유를 쓰게 된다. 예컨대 어둠, 울음, 이를 갊(마 8:12; 22:13), 꺼지지 않는 불(마 3:12; 막 9:43; 사 66:24), 심장을 갉아 먹는 죽지 않는 벌레(사 66:24)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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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탄생 오백주년 (1509-2009)을 맞이하여 그가 남긴 공헌과 영향력을 평가하는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연구서적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이 나왔다. 칼빈은 지난 2천 년간의 기독교 신학과 교회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5대 인물의 반열에 올랐다. 라틴 교부들과 동방 교부들을 통합하여 네 명을 손꼽는데, 암브로스, 제롬, 어거스틴, 그레고리 등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들을 종합하여 다섯 번째 교부의 지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칼빈은 이들 초대교회 교부들을 훨씬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기독교 신학과 성령론을 제시하여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우는데 기여했다.

 

 

 

(1)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 칼빈주의자의 등장

 

20세기에 저명한 개신교 역사학자 에밀 레오나르드 (Emile G. L?onard, 1891-1961)는 칼빈의 업적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새로운 신앙인의 모습, 칼빈주의자” (a new type of man, the Calvinist)라는 명칭이 그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졌다고 평가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 칼빈주의자는 첫째, 윤리적으로 엄정하고, 둘째 고난과 박해와 시련에도 새로운 교회를 중심으로 믿음을 견고히 지켜내며, 셋째 직업의 소명의식을 가진 성도를 말한다. 지금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의 유형, 칼빈주의가 역사에 제네바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당대 종교개혁자들의 장점들을 종합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로잡힌 신학자로, 사도 바울 이후에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확한 가장 분명한 복음의 전파자였다. 칼빈주의는 가장 순수한 기독교 신앙의 대명사가 되었다. 독일에서 등장한 루터파도 아니요, 스위스 쮜리히에서 시도되어지던 쯔빙글리파도 아닌, 새로운 유형의 교회와 성도들이 뚜렷하게 등장한 것이다. 새롭게 나타난 이들의 독특한 신앙적인 색채는 칼빈의 성경적 신학과 경건에 근거하고 있어서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칼빈주의자라는 호칭은 칼빈이 원했던 바도 아니요, 더구나 16세기에는 별로 좋은 의미로 사용된 것도 아니었다. 챨스 5세 치하의 유럽 전 지역에 새로운 종교개혁이 퍼져나가면서, 루터를 따르는 독일지역과 쯔빙글리를 따르는 스위스 동맹으로 구별되었는데, 이들과도 다른 새로운 개신교 그룹이 칼빈의 제네바를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차츰 세계로 퍼져나간 칼빈주의는 영국에서는 장로교회, 유럽 대륙과 다른 지역에서는 개혁교회라는 이름으로, 17세기에는 청교도 신앙인들이 계승하였고, 한국에서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소개되고 정착되었다.

 

제네바의 사회사를 연구하여 세계적으로 저명한 칼빈 학자, 로버트 킹던 박사는 칼빈주의자들은 각 지역마다 새로운 교회에 관련된 통일된 사회공동체로 재구성하고, 조직화된 교회제도를 통해서 권징의 실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는 점을 강조한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새로운 교회질서를 유지해나가는 구조가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칼빈은 스콜라주의에 빠졌던 중세신학자들을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다시 세웠다. 기독교 신앙인들이 믿어야할 주요주제를 정리하여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성경의 핵심 주제들에 대한 해설과 토론을 묶은 기독교 강요성경주석은 상호 보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는 도구였다. 그가 기독교 휴머니즘 학자로서 법학을 공부한 재능을 바탕으로 채택한 주제중심의 논증방식은 종교개혁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밝혀주었다. 칼빈의 저술들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왜곡을 지적하면서 애매모호한 교회전통을 털어내고 성경적인 신앙진리를 밝혀주는 빛과 같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학사상과 동시대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연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걸작이다. 칼빈은 성경적인 기독교 진리의 회복을 염원하면서 어거스틴과 칼케톤 신조” (451)를 계승하고, 정확한 신학의 개념들을 정리하여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교회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서 창조적인 기념비를 세웠다. 칼빈은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근면한 노동과 직업윤리를 정착시켰으며, 제네바 사회의 개혁을 일궈내어 사회 공동체의 조직적 건설에도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칼빈의 신학은 제네바를 넘어서서 스위스 전지역으로, 프랑스로, 다시 네델란드, 영국, 독일, 동유럽으로 퍼져나가 종교개혁 시대에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경건한 신자들에게 사랑과 거룩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칼빈은 피터 마터 버미글리 (Peter Martyr Vermigli, 1499?1562)가 쓴 신학총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 버미글리는 이탈리아 출신 로마 가톨릭 신부이자 히브리어에 능한 휴머니즘 학자였는데, 개신교로 개종하여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써의 동지였으며, 노년기에는 쮜리히의 불링거와 같이 개혁운동을 위해서 헌신하였다.

 

칼빈은 성경적 설교, 제네바 교회의 재조직과 운영, 강해설교 중심의 예배와 시편 찬송의 회복, 봉사와 권징의 확립, 심지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에 이르는 근면과 직업에의 소명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엄청난 공헌을 남기게 된 칼빈의 기본적인 사역이자 제네바 교회를 개혁한 수단들은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설교를 통해서 제네바 시민들을 교화하고 도덕적으로 변혁하도록 하였다. 제네바 시는 세 지역으로 나누어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게 하였다. 칼빈은 세 중에 어느 곳인가에서 성경에 따라갈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었다. 1541년 여름에 다시 돌아와서, 2년여 전에 떠날 때에 중단했던 그 다음 본문에 대해서 강해설교를 이어갔다. 25년 동안 약 4천편의 설교를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풀어주었다. 설교의 역동성은 성령의 감동과 기름부으심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현대 세계 칼빈 신학자들에게마저도 이런 성령의 신학자의 모습이 여전히 잊혀져있다.

 

둘째로, 칼빈은 당회를 통한 권징을 철저히 시행하였다. 제네바 시민들은 25명 내외로 구성된 목회자와 장로들이 시행하는 훈계를 순중하였다. 매년 당회원들은 시민들의 투표로 개편되었다. 당회는 성만찬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영적인 순결을 촉구하였다. 제네바 당회는 시의 도덕적인 질서를 세우는 일에 전적인 권한을 갖고 성도들의 행위를 감독하였다. 각종 음행들, 성적인 타락, 놀음, 과도한 음주, 방탕을 부추기는 춤추기 등은 당회 앞에서 고백하고 회개한 후 처벌을 받았다. 상업적인 거래에서 속임수와 고리대금도 엄격한 징계의 대상이었다. 1550년의 경우, 아직 칼빈의 지도력이 확고히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인데, 제네바 시민의 약 6.5%가 치리를 받았다.

 

당회의 처벌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개인적인 권고를 통해서 회개하게 하되, 비밀리에 당회에서만 반성토록 기회를 주고 마무리 되었다. 거의 대부분은 칼빈이 권면과 조언을 직접 제시하였다. 반성하지 않는다거나, 좀 더 심각한 범법자들은 회개와 반성의 분명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규제를 당했다. 아주 심각하게 공공의 안정을 해친 자들은 시정부의 처벌기관으로 이관되었다. 교회 전체 앞에서 회개와 반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회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성도들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규제할 수 있었다.

 


 

 

(2) 성령의 주권을 회복시킨 종교개혁자

 

이처럼 위대한 종교개혁 시대의 탁월한 신학자 칼빈을 일컬어서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평범한 성도들과 일부 목회자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들릴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파격적인 용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칼빈을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무려 백 여 년이 넘게 이 칭호를 사용하여 왔으니, ‘공인된 칭호가 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 혹자는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려면, 그러면 칼빈에게 성부의 신학자혹은 성자의 신학자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철저히 믿었던 사람이므로 어떤 칭호든지 붙여도 가능하다. 칼빈은 제네바 초기사역에서부터 삼위일체 신학을 근간으로 제시했다.

 

Scripture and pious experience itself show us in the absolutely

 

simple essence of Go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개인적인 주관주의를 넘어서서, 칼빈은 성경에서 성령의 작용이 함께하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제시로서 신봉하였다. 하지만 굳이 성령의 신학자라는 명칭을 사용한 연유는 그의 신학체계에서 항상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 성경적으로 강조되었으며,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 교리에서 왜곡되어져 왔던 성령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제 위치로 회복되어졌기에 붙이게 된 말이다. 기독교 신학의 발전 역사에서 가장 온전하게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대한 정리를 함으로써 성경적 진리를 회복시켰기에 칼빈에게 이 명예로운 호칭을 붙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이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성령의 권위를 빙자하여 태초부터 교회에 들어온 사탄의 모든 허구적 고안들이 날조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 이슬람교 모하메드와 천주교의 교황은 성경에는 완전한 교리가 완전하게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좀 더 고차원적인 교리가 성령에 의해서 계시되어 왔다는 것을 주장한다.

 

재세례파와 자유방임파들은 오늘 우리의 시대에 똑같은 수렁에 빠져서 미쳐있다. 복음과는 거리가 먼 가르침이나 교리를 소개하는 영은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복음의 가르침에 인을 쳐서, 그 가르침을 확증하는 일을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비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교황이나, 모하메드나, 직통계시를 받는다는 재세례파나, 신령주의자들을 단호히 배척한다. 그들이야말로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부패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 바로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우상숭배이다. 항상 보이는 우상을 통해서 위안을 삼으려는 인간의 어두운 욕심 때문에 영적인 어둠에 빠져있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말하자면, 영속적인 우상의 제조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교만과 담대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감히 자기들의 역량대로 하나님 을 상상해 내는 것이다. 거짓되고 허망한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대신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

 

끊임없이 우상을 생산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에는 교만과 대담한 무지가 가득 차 있다. 칼빈의 맑은 영혼이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다. 칼빈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는 성령의 사역에만 의존하려 한다.

 

우리가 아직도 칼빈이라는 신학자가 당대 혼돈을 극복하면서 정리해 놓은 것들과 그가 실천하였으며 실체로 남긴 유산들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칼빈에게서 순수한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확고한 기초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칼빈 한사람만을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셨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개혁은 우연으로 빚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16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루터, 쯔빙글리, 부써, 외콜람파디우스, 버미글리, 멜랑톤, 불링거, 파렐, 비레, 부겐하겐, 베자, 낙스, 무스쿨루스, 까피토, 쟝 스트룸, 피터 마터 버미글리, 미코니우스,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쟌키우스 등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기여하였다. 그 시대의 기라성 같은 수재들이 곳곳에서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중요한 개혁의 주도세력으로 역할을 수행했었다.

 

지난 기독교 교회의 2천년 역사 속에서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 이후로 가장 성경적인 신학을 체계화한 인물로 칼빈을 손꼽고 있다. 세계 교회가 믿어야할 보편적인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종합적으로 찾아서 정리하고 세웠으며, 천년을 내려온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순을 파헤치고 다시 한번 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갱신, 예배의 갱신, 신학의 갱신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칼빈의 저서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3) 총체적 오류에 빠진 교회를 살려내다.

 

칼빈은 성경의 모든 중요한 가르침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요약하여 제시하고자 노력한 신학자였다. 그래서 다섯 번이나 수정 보완하여 마침내 완성한 기독교강요최종판 (1559)에는 무려 26가지 중요한 신학 주제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 성경의 필요성과 신빙성, 참 하나님에 대한 설명, 삼위일체, 창조, 섭리, 타락한 인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율법, 구약과 신약의 관계, 그리스도의 위격, 그리스도의 사역, 믿음, 회개, 그리스도인의 삶 (자기부인과 묵상), 칭의, 선행과 확신, 그리스도인의 자유, 기도, 선택이 주는 위로 (예정론), 최후 부활, 참된 교회, 교회의 권위와 권징, 세례, 성만찬, 교회와 국가 등이다. 그 어느 것 하나라고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자 본질적이 것들이다. 모두 다 잘 이해하여야 할 기초적인 성경의 교훈들이다. 칼빈은 각종 주제들을 성경에 비교해서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경건한 신앙고백과 같고, 순수한 성경적 해석과 진술에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설교처럼 토로하는 열정을 담아놓았다. 그리고 그 행간에는 어느 주제에서나 성령의 사역을 빼놓지 않고 연관 지어 설명하여 놓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성을 건설하여 놓았다.

 

성경적 신학자로서 칼빈이 당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문제점을 수정하고자 제시한 핵심적인 내용들 가운데서 성경관, 신론, 기독론, 교회관, 구원론, 성례론, 설교론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구원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이 시행하는 일곱 가지 성례를 통해서 전달되고 주어진다고 하였다. 그러한 교회의 성직주의와 독선적인 주장들로 인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와 성령의 적용사역이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칼빈은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가 적용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주장하여, 제 자리에 되돌려 놓은 신학자이다.

 

칼빈은 새로운 종교개혁의 신학, 특히 결정적으로는 구원론과 교회론을 새롭게 제시했다. 면죄부와 고해성사, 미사참여로 혼돈을 겪고 있던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순과 미신적인 신앙행태를 제네바 교회에서는 완전히 철폐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촛불을 밝혀놓고 성자들의 공로에 의지하려는 기도는 금지되었다. 성령의 신비로운 작동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이 개인에게 믿음을 주며, 말씀으로 교회에 감동을 주신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구원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성령의 적용사역에 의하여 결정된다. 성령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인간의 심령에 심어지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겨나고 만들어진다. 성경은 성령에 의하여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써 놓은 책이기에 성령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삼위일체가 되어서 구원사역에 동참한다. 성령은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를 창설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며, 모든 구원의 방편들을 활용하여서 성부의 계획이 성자로 인하여 성취되었고, 이를 적용하고 보전하는 구원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성령의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체계화한 최초의 신학자가 바로 요한 칼빈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과 교황제도의 비성경적인 문제점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은 고집스럽게도 성례 중심의 신앙생활과 성직자 중심의 구원론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는 옳바른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16세기에 칼빈이 성령의 주권을 회복시켜서 제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교회, 특히 성직자가 실시하는 성례를 통과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칼빈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때에 값없이 주어지는 죄사함으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받음과 동시에 죄의 저주가 더 이상 우리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된다.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을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영 같은 것은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조롱하기까지 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교황주의자들의 철학이 그러하다.”

 

칼빈은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깊이 인식하여 성경적 신앙을 정립하였고, 설교사역, 성경의 해석, 기도생활, 각종 목회활동에서 성령의 감화력을 강조하였다. 칼빈의 확신에 찬 설명을 들어보자:

 

도덕적 추측에 관계된 궤변론자들의 쓰레기 같은 주장들에 대한 훌륭한 반박이다. 그들의 그런 주장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심령이, 망상에 사로잡혀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그들의 심령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그들의 그러한 반론에 대하여 답변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데, 실제로 사람이 자신만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주는 분은 오직 성령이라고 강조한다.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고 명백하게 실현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성령의 신학자라고 해서 칼빈이 오직 성령론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는 종합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어야할 보편적 교훈을 성경에서 찾아서 바로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서 일생동안 강단에서 외쳤고 신학생들에게 강연하였고, 때로는 잘못된 가르침을 제거하기 위한 논쟁에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논쟁에서 취한 엄격한 자세와 명쾌한 분석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제네바에서 행한 권징때문에 칼빈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로마 가톨릭은 말할 필요도 없고, 루터파, 자유파, 재세례파, 심지어 같은 쮜리히에서 활동한 쯔빙글리파 개혁주의자들도 때로는 칼빈과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경쟁자들이 쏟아놓은 비판의 내용들은 칼빈의 신학에 대한 권위를 더욱 높여주고 말았다. 이런 비판자들로 인하여서 밤잠을 설치면서 남긴 칼빈의 저술들이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성령의 신학자칼빈을 잘 모르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칼빈의 신학에 대해서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면, 제발 세계 신학계에서 왜 성령의 신학자, 칼빈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바란다. 왜 이런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연구해 보고 찾아보기를 권유 드린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경건한 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면서, 성령으로 인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고 심령의 평안을 얻게 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깨어지기 쉽고, 온갖 연약한 것들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위협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은 그런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무수한 악들에 의해서 압도당하지 않게 하시며 충분할 정도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아울러, 성령이 이렇게 우리에게 힘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신음하고 탄식하며 우리의 속량을 향하여 힘써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증명해 준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증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변함이 없다. 이러한 복음과 가장 순수한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할 때에 칼빈의 해석들은 견고한 기초가 된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 (12:2)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이지 한 사람 유명한 신학자에게 얽매여서 정통성을 주장해보려는 것이 아니다. 칼빈이 말했다는 몇 마디에 따라서 성령에 관한 유명한 격언이나 소개하면서 그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빈을 인용하되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거나, 유식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지식인의 속임수요, 오용이자 남용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을 활용하여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파하려면 성령의 주권적 사역을 이해하여야 한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와 성경전체의 가르침과의 근본적인 연계성을 강조한다. 그는 성령을 떠나서, 성령의 간섭이 없이는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거나 교훈을 세울 수 없다고 말한다.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라서 계시가 선포되고 알려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하는 칼빈의 교리적 설명들을 그냥 교과서적으로 암기하거나 그저 나열하는데 그치게 된다면 그것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칼빈의 교리에 대한 교과서적 암기는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므로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이 형성된 지 거의 오백 여년이 흘러갔는데도 세계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큰 감화를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신학에 담긴 신선함과 역동성 때문이다. 칼빈의 저술들 중에서 어떤 부분들은 우리 한국에 사는 성도들에겐 다소 어렵다고 느껴질 부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분하게 그의 글을 읽어보면, 복음을 갈망하던 청년 칼빈이 점차 성장하면서 성경에 담긴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과 인도하심을 통해서 확신과 위로를 발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중세신학이 신비주의와 모호한 영성신학에 빠져서 잃어버린 성령의 사역을 선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체계를 참고하여 명료화했다. 그의 여러 저술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종합적인 안목과 그로부터 나오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체험하게 되는 확실한 위로를 발견하게 된다. 칼빈의 글은 어디를 펴 놓아도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게 된다. 바로 성경에 담긴 성령에 관한 교훈이 그대로 살아있다. 기독교 성도들은 성령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지혜로 인하여 오늘의 혼탁한 사상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분별력을 갖추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2). 이 말씀은 율법주의와 바리새적인 교육을 받아왔던 사도 바울이 복음에서 터득한 엄청난 확신의 토로였다. 성령의 사역을 확신하게 된 칼빈의 경우에도 마치 바울 사도의 감격과 같은 기쁨이 넘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서 벗어나서 순수한 신앙내용을 터득하여 제시해 놓았고, 세계 기독교인들이 이를 따르게 되면서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개혁주의 전통과 유산을 선교사들을 통해서 물려받았고, 성경적이며 종합적인 확신을 더욱 견고히 세워 나가야 한다.

 

성령의 신학자라는 다소 거창한 명칭을 칼빈에게 수식어로 붙이게 된 이유는 그가 오직 성령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치중하여 사역했다거나 신학저술을 발전시켰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칼빈의 신학이 오직 성령론 한 분야에만 집중되어 있다거나, 성령론만을 전문으로 연구한 신학자라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추호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칼빈은 성령의 능력 체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강조하거나, 성령의 체험중심으로 신학을 재구성하는 사람들처럼 편향성을 가진 신학자가 아니었다. 칼빈은 기독교 신학의 발전 역사에서 오직 성령론이라는 한 분야에 관하여서만 공헌을 남긴 것이 아니다.

 

사실 칼빈은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종교개혁을 총망라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정립을 위해서 거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가 기독교 신학사의 발전사에서 남긴 선구자적인 공헌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하나님을 아는 교리 (인식론)의 확립, 경건 신학의 정립, 기독론에서 신성과 인성의 교류, 예수님이 맡으신 삼중직 (선지자, , 제사장) 에 대한 교리, 구원론에서 칭의와 성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교리들, 고해성사의 허구를 갈파한 점, 구원의 확신과 예정론의 옹호, 교회론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 직분론의 확립, 장로제도의 회복과 교회의 독립권 쟁취, 세례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등 헤아릴 수 없는 신학 주제들에 대해서 최초로 명쾌한 교리를 체계화한 신학자였다. 가히 기독교 신학의 발전역사에서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공헌을 남겼다. 역시, 성령론 분야에서도 칼빈은 종교개혁의 혼돈기에 가장 명쾌한 성경적 체계와 해석을 세워 놓았다.

 

신학자들이 앞 다투어서 칼빈에게 성령의 신학자라는 위대한 호칭을 헌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러한 명칭을 붙이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칼빈이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주권적으로 구원을 적용하는 저자라는 적합한 호칭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장악하여 행사하고 있던 구원의 적용이라는 권세가 모순임을 적발하고 지적하였다. 구원은 오직 성령의 주권 하에 있으며, 그 구체적 적용 사역들은 교회를 통해서 성직자들이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가운데 자유롭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령이 친히 주권적으로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는가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성령의 신학자라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16세 유럽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를 통해서 구원의 은총이 전달된다고 주장하여, 결국 성령의 사역을 무력화시키고 로마 교회에 종속시켜 버렸는데, 그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각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원리를 천명한 것이다. 로마 교회가 구원의 적용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쾌한 성경적 주장을 함으로서 성령의 위치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던 것이다. 성령으로 하여금 그 위대한 구원 사역의 창시자이자, ‘양자의 영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시키고 새로운 영을 불어넣은 분이라고 칼빈은 강조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칼빈이 이를 가장 먼저 체계화하여 올바로 가르쳐 주었고, 그 후로 교회들이 이 기본적인 복음의 기초를 잘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입각하여 체계화한 나머지 매우 정교하면서도 딱딱한 교과서처럼 정리하지 않고, 칼빈 자신이 먼저 성령의 역동성과 권능과 감화력을 실제로 체험하여 구원의 여러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사역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풀이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가 칼빈의 저술들을 읽을 때에는 어디서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사로잡힌 사람의 심장을 느끼게 되며, 성령에 감동된 중심에서 나오는 매우 신선하고 순수하며 고결한 감동을 받게 되어진다.

 


 

 

(4) 워필드 박사,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다

 

칼빈의 성령론이라는 주제가 결코 잊혀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지적을 처음으로 강조하신 분은 지금부터 백여 년 전에 미국에서 칼빈 연구의 기틀을 세우신 워필드 박사였다. 필자가 확신을 갖도록 눈을 열어준 것도 역시 워필드 박사가 남긴 칼빈 연구 논문들 속에서였다. 워필드 박사의 칼빈 연구업적은 훗날 영국과 북미주에서 많은 후배 학자들의 칼빈 연구에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필자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할 때에, 마크 놀 (Mark Noll) 박사에게서 프린스턴 신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하였다. 매주 그가 발표한 프린스턴 신학자들에 관한 논문과 저술들을 섭렵하는 한편, “워필드 박사의 경건과 성령이해를 학기말 논문으로 제출하면서 상세히 연구하였다.

 

1909, 칼빈이 출생한지 400주년이 되던 해에도 미국 남부 죠지아주 사바나에서 칼빈 탄생을 기념하는 대회가 개최되었다. 워필드 박사가 초청강연을 맡았었다. 당시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하던 워필드 박사는 그 해에 칼빈에 관한 논문을 무려 일곱 편이나 쏟아 내놓았는데, 영어권에서 칼빈의 신학을 연구하는 이들의 기초석이 되는 훌륭한 연구 성과였다. 박학다식하여 많은 방면에 지속적인 논문을 펴낸 워필드 박사는 최고의 신학자, 칼빈이라는 논문에서 그 어떤 이름보다도 성령의 신학자라는 위대한 이름이 칼빈에게 합당하다고 선포하였다. 그 후로, 주요 칼빈 신학자들이 이를 다시금 재인용하면서 강조하였다. 워필드 박사의 연구 성과 이후로 여러 칼빈 학자들과 성령론 전문가들이 동의를 표시하였고, 이젠 확고한 명칭으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성령의 사역이란 교리는 칼빈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교회에 주어진 선물이다. 물론, 칼빈이 이것을 개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조직적이요 적합한 표현을 제시한 첫 번째 신학자가 바로 칼빈이었다. 그로 인해서,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의 사역들에 대해서 확실한 소유를 하게 되어졌다.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 있어서 칼빈이 끼친 공헌들이 많다는 평범하게 받아들여져 오고 있는 견해를 훨씬 능가하는, 이 보다 더 놀라운 교리사의 현상은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칼빈의 여러 저술을 완벽하게 독파한 연후에, 성령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가장 뛰어나게 강조하고 제시한 신학자라고 특징을 지은 것이다.

 

따라서기독교 강요라는 책은, 죄악된 인간을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로 인도하며, 죄악된 인간에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논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워필드 박사의 주장은, 그 이전에도 그러하였듯이, 또 다시 20세기 초엽 영어권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성도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자유주의신학, 실존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운동 등은 칼빈의 성령론을 덮어버렸다. 특히,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기독론 중심의 신학체계를 제시되면서 칼빈의 성령론은 완전히 묻혀 버리고 말았다. 다른 일부 기독교 교파에서는 칼빈의 신학사상이 너무나 신학적 과학과 같이 논리적이며,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의 논쟁부분에서는 너무나 자기 주관적이라고 논평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워필드 박사는 칼빈에게서 그처럼 편협한 마음을 가진 교리주의자의 면모가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오히려 복음을 바르게 파악하려고 노력한 신학자였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죄인으로서 접근하였다.”

 

칼빈의 성령론을 연구하면서 워필드 박사가 주목한 부분은 구원의 적용자로서 사역에 대해서 정확하게 서술하여 주었다는 점이다. 비록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구원론에 다소 주관적인 면모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요, 오히려 구원의 이해를 가장 바르게 접근하여 제시한 훌륭한 이해라는 것이다. 구원은 각각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제공 되어지는 것이므로 그러한 설명을 하는 것이 오히려 구원론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모든 생명의 창조자요, 저자요, 수여자라고 칼빈이 이해하였다. 칼빈은 구원의 적용자로서 성령의 사역을 가장 강도 높게 주장하였다. 구원의 적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워필드는 성령의 증거사역에 대해서도 칼빈이 가장 적절한 설명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칼빈이 개혁주의 교회에 기여한 것은 성령의 증거라는 교리가 가장 기본적인 교리라는 것이다.” 칼빈은 누구보다도 성경의 진실함에 대해서 증거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지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에 의존할 뿐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내적인 증거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체 안에 스스로를 입증하는 확증을 오직 성령의 내적증거로부터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이 계시하는 자는 아니다. 성경 속에 담긴 계시의 확증자로서 성령은 성경이 스스로 입증하는 본질을 확실하게 증거하여 주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칼빈이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음을 주목하였다: “칼빈주의가 특별히 주장하는 것은 구원의 초자연주의로서, 이는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 하나님의 긴밀한 사역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워필드는 당대 신학자들이 진화론과 같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빠져있어서 초월적이요 초자연적인 차원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칼빈의 초자연주의가 성령의 사역이라고 하는 교리적 해결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구원의 초자연주의라는 일관된 교리야말로 칼빈주의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워필드 박사의 칼빈 해석을 지지하는 최근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죤 머레이 교수는 "칼빈은 매우 합당하게 성령의 신학자로 명명되었다고 하였다. 머레이의 뒤를 이어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최근 성령론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술을 많이 남긴 리챠드 개핀 교수는 비록 널리 인기 있는 해석은 아니라 하더라도 워필드의 지적을 지지하였다. 개핀 교수도 역시 워필드 박사의 해석에 동의하면서, 성령의 내적 증거로 인하여서 성경의 신적 기원과 진리성에 대해 확신을 주는 칼빈의 주장이야말로 교회가 칼빈에게 빚지고 있는 매우 뛰어난 확증이라고 인정하였다. 개핀 교수는 칼빈이 기독교강요3권 구원론에서 논의하는 것들 중에 성령에 관한 언급이 특별히 주목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칼빈은 개인적인 죄인의 체험 속에 구원의 적용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성령론의 논의가 적절하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퍼거슨 교수는 가장 최근에 펴낸 성령에 관한 주목할 만한 교과서적인 저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가 칼빈의 성령론에서 가장 핵심이며 이후 개혁주의 구원론의 뼈대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다른 논문에서도 역시 성령의 신학자 칼빈의 설명들이 얼마나 중요한 초석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워필드 박사의 선언과 이를 지지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들이 담긴 칼빈의 성령론에 관련된 연구 논문들을 살펴본 바, 비록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명명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선언을 하고 난 후에 좀 더 그 주장을 입증하는 상세한 연구를 더 이상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아쉽게도 성령의 신학자로서 칼빈의 성령론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학자가 후대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성령의 신학자라는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 성령관련 내용만을 집중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비록 짧은 논문들에서지만, 워필드가 칼빈의 성령 이해에서 발견한 핵심은 결코 가볍게 취급할 내용이 아니다.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결국 칼빈주의가 특별히 주장하는 초자연적 구원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 속에서 성령이 친히 즉각적으로 역사한다.” 다시 말하면, 워필드는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 자연주의적인 신학이 세력을 펼치는 상황에서 칼빈의 성령론은 초자연적인 근원을 강조하였다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구원의 지속적인 초자연주의는 칼빈주의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일부 칼빈 학자들에게는 아직도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다라는 선언이 간과되고 있지만, 옛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과 그 정신을 이어받은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는 여전히 이를 매우 의미심장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죤 머레이 교수는 워필드 박사의 주장을 매우 합당한 것으로 인정하였으며, 칼빈의 성경해석과 신학전반에 성령의 사역이 균형 잡혀 있다고 하였다. 리챠드 개핀 교수, 퍼거슨 교수, 그리고 갓프리 교수 등은 모두 다 워필드와 죤 머레이의 해석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에버딘 대학교에서 죤 오웬이라는 퓨리턴 신학자를 연구하여 기독신자의 생활에 관한 교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싱클레어 퍼거슨 (Dr. Sinclair B. Ferguson) 교수가 당시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개설한 과목이 바로 칼빈의 성령론이었다. 필자는 박사과정 첫 학기 첫 과목의 제목에서부터 엄청난 충격과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이때부터 필자는 매우 생소하게 느껴진 바로 이 성령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새로운 칼빈 신학에의 해석을 시도하고자 노력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필자는 칼빈의 신학사상에서 가장 잊혀진 부분이 성령론 분야임을 입증하면서 전체 칼빈 저술을 통해서 재조명했다. 마침내, 그리스도와의 연합: 칼빈의 신학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이라는 박사 학위논문이 완성되어졌다.

 

2009년은 칼빈 탄생 오백주년이 되는 해였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성대한 세계 칼빈 연구자들의 학술대회와 기념행사가 있었다. 필자가 한국 대표로 참여하여 달라는 심사위원회의 연락을 받았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회가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필자가 발표한 글을 통해서 다시금 조금이나마 칼빈주의 확장사 연구에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면서 일주일간 지속된 세미나 시간에서도 칼빈의 생애와 신학에 대해서 짧은 강의를 맡았는데, 필자의 연구내용을 경청했던 많은 칼빈 학자들의 격찬을 받게 되었다.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교 법학교수 스킬 박사는 월스트릿 저널 기고문에서 이번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오백주년의 의미를 세계대륙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에 대한 확인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우간다의 대주교 헨리 옴브리가 설교한 것과 한국의 칼빈 학자로 김재성 박사가 아시아에서의 칼빈주의를 발표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고 지적하였다. 필자의 발표문을 포함하여, 이날 발표된 칼빈의 시대, 사상, 영향 등은 귀한 연구자료가 될 것이다.

 

성령의 인격과 사역을 연구하는 죠엘 비키와 파이파 교수 등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워필드 박사의 주장을 기본으로 따르고 있다. 최근에 비록 소수이지만, 칼빈의 성령론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논의를 다루고 있어서 유익한 도움을 주고 있다.

 

 

 

(5) 칼빈의 영향과 칼빈주의 성령론의 발전

 

칼빈의 신학사상이 한 사람의 독백으로 그쳤다면 오늘날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는 거대한 신학적 유산과 교회들을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것들은 세계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신앙이었기에 지역과 언어를 초월하여 널리 공감대를 얻게 되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생생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에게 공감하면서도 각각 자신들의 시대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칼빈주의 신학은 다양하게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핵심에 해당하는 중요 교리가 바로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라는 점을 공통분모로 삼았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적용을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하는 가운데서만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어졌는데, 이는 칼빈 이후로 모든 칼빈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신학사상이 되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활동한 그 어떤 신학자보다도 칼빈은 신학적인 영향력은 실로 방대하다. 이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칼빈의 위대한 신학사상은 후대의 신학자들과 경건한 성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들은 칼빈에 의해서 체계화 되었기에 후대의 성도들은 편리하게 분별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17세기로 내려오면서 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를 규명하는 신학서론(prolegomena)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칼빈의기독교강요의 첫 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발전시킨 해답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삼위일체론을 비롯한 신론, 하나님의 경륜과 언약, 성경과 계시의 이해,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사역, 사람이자 하나님이신 분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설명, 구원론의 전체 과정과 예정론의 이해, 기도의 실제와 이론, 교회의 직분과 권징, 세례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등 기독교신학에서 다루는 핵심 분야 전반의 발전이 칼빈 사상과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범위를 좀 더 좁혀서 살펴보려는 성령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도, 정통 신학을 세우려는 17세기 기독교 교리학자들과 퓨리턴들, 그리고 최근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자들은 연속성을 갖고 발전시켰다.

 

미국에서 20세기 초엽에 시작된 오순절 운동이 여러 개의 교단을 형성하면서 마치 성령론을 부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거나, 오순절파 교회들만이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좁은 시야에서 본 것이다. 칼빈주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서는 성령이 없었다거나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신학의 역사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1907년 미국에서 오순절파의 방언운동 이후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어졌다는 주장도 잘못된 말이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 중에 한 가지에 해당하는 방언운동을 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이미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지하여 믿음생활을 경주하여 왔고, 철저히 주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경건을 힘써왔던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장로교회에는 성령이 없어서 힘이 없고 나약하며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칼빈 당대의 문서들과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요약한 성령론을 들여다보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와 강조에 있어서 연속성과 지속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칼빈의 성령론에서 강조되어진 것들이 역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칼빈주의자들에게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앞에서 워필드 박사가 지적한 칼빈의 성령론에 나오는 것들이 주로 칼빈주의자들의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은 모든 교리의 핵심으로서 신학의 전반에서 다루어졌으나, 오늘의 성도들과 교회 사역자들이 철저히 연구하고 조사하지 아니하여 무지하게 덮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1)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하이델베그 교리문답서에 핵심적인 교리들은 모두 다 성령에 연계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사역과 승천과 중보자의 사역에서 성령의 동역과 개인의 신앙 생활에서 중생, 성화, 믿음, 기도, 확신, 영적 전쟁, 종말론적 기대, 설교, 성례들에 관련되어 있는 성령의 적용적 사역을 다루고 있다. 거의 모든 구조와 문항에서 성령의 사역이 관련을 맺고 있다.

 

1563년에 독일에서 나온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작성한 간단한 신앙교본이다. 이 문답은 독일 남서부 지역의 영주 프레데릭 3세가 종교개혁의 시대에 자기의 영지 내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통일된 신앙을 갖추어 주고자 만들게 된 문서였다. 독일에서는 영주의 신앙이 곧 그 지역의 신앙이다는 원칙을 결정하였으므로 그는 객관적인 신앙에 대한 안목을 추구한 나머지 독일 비텐베르그에서 멜랑톤에게 배운 우르시누스와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올레비아누스까지도 초청하여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서술형식이 아니고, 질문과 답변 형태로 되어있다. 그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무학자들과 문맹자들이 쉽게 깨닫도록 하려는 교육적 의도에서였다. 129개의 문답에 들어있는 내용들은, 성령에 관계된 내용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거의 칼빈의 주장들과 일치하거나 유사하다.

 

첫 문답에 핵심을 담았는데, 사람에게 유일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며, 성부의 섭리적 보호와 우리 안에 감사하는 마음과 영생의 확신을 창조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3-11문까지 죄책과 불행을 다루면서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나야함을 밝힌다. 21문에서 성령은 믿음을 창조한다고 되어있다. 우리 인간들이 죄의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8문답). 칼빈이 기독교강요314항에서 믿음은 성령의 기본적인 사역이다고 주장한 말과 제 327항에서 믿음에 대하여 개념을 정리한 것이 거의 그대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도 들어있다. , 성령이야말로 믿음의 저자이라는 점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들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성령에게서 온다. 그분은 거룩한 복음의 선포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성례의 시행으로 믿음을 굳게 하신다” (65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믿음의 정의를 내린 제 21문답은 거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같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복음으로써 내 마음 속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이다. 곧 순전한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주심을 믿는 것이다.”

 

21문과 22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24문답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설명한다. 성부는 창조주로, 성자는 구속주로, 성령은 우리의 성화를 관장하신다는 경륜적 사역의 구별,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적사역에 관한 구분을 칼빈이 설명한 바와 같이 풀이하였다. 앞에서 본 것처럼 칼빈의 성령이해는 먼저 삼위일체론에서 나오고 있는데, 각 위격이 담당하는 사역을 구별하여 설명한 바 같다.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서, 24문에서 64문까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사역을 풀이한다. 53문답에서 성령은 첫째,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둘째, 그분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져서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며 나를 위로하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였다.

 

65문에서 82문까지는 은혜의 수단들을 다루는데,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믿음을 창조하고 확증하는 성령의 사역을 다룬다. 성례를 규정한 68문답과 세례에 대한 설명 (70문답, 73문답)들도 모두 칼빈의 성령론과도 깊은 연계성이 발견되어진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칼빈이 성령의 사역에서 손꼽는 구원의 적용사역 가운데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성령의 역사하심인데 역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도 성만찬은 성령에 의해서 연합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76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 은 무슨 뜻인가?

 

: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며,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더욱 더 연합됨을 의미한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며, 그의 참된 몸은 하늘에 있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심을 확증한다 (80문답)

 

마지막 부분, 86문에서 129문까지는 성령을 주제로 우리가 감사하는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가를 다룬다. 십계명을 간추린 질문들에서 성령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고, 기도에 대한 부분에서도 줄곧 언급되어져있다.

 

 

 

2) 돌트 신경

 

16세기 후반에 큰 희생의 기초 위에서 개혁주의 교회를 발전시킨 네델란드에서는 1618년에 알미니우스파와의 신학논쟁을 통해서 돌트 신경을 작성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을 강조한 다섯 가지 조항을 담고 있기에 성령에 관한 내용을 그리 많지는 않지만, 칼빈의 핵심 강조점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한 칼빈의 입장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에게 외부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역사하는 성령에 의하여 말씀 선포의 사역이 필수적이라고 선언하였다.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도들의 증거사명과 선교를 강조하였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청교도의 회심

 

영국과 미국에서도 청교도들도 성령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와 해석을 한 단계 높여놓았다. 성령에 대한 언급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42, 대요리문답에서는 38, 소요리문답에서는 10회나 언급되어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확장된 성령의 이해를 추구하면서, 성령의 신성, 삼위일체 내에서 성령의 인격,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의 관련성,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 개인에게 적용사역을 하는 주관적 영역과 성도들의 삶에서 인도하심과 객관적인 사역 등이 다루어졌다.

 

회심체험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항이었다. 종교개혁 이후로 세대가 점점 흘러가면서 아무런 열심도 없는 명목상의 기독교신자가 많이 양산되어갔다. 16세기 후반에서부터 18세기 초엽에 이르는 청교도들의 시대는 기독교인이라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외형적 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위선적인 기독교인들도 많아졌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분별하고자 회심체험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의 신앙이 달라졌다기 보다는 세대가 흘러가면서 그에 합당한 대안을 찾고자 노력한 것이라고 본다. 참다운 신앙을 점검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심을 강조하였는데, 죄인이 회개하였다는 경험을 목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점검하였고, 교회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래서 워필드 박사는 퓨리턴 사상은 총체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즐겁게 연구하는 정신으로 거의 가득 차 있다고 본다고 하였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와 대, 소 요리문답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성령이 사람의 심장 속에서 내적으로 적용하는 사역을 통해서 역사하되 성령의 외적인 도구를 통해서 역사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우리의 심장 깊은 곳에 다가 새로운 생명과 권능을 심어서 효과적으로 죄를 ?아내고, 죄인을 복음에 반응하도록 가능하게 하고 기꺼이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역사한다.

 

기본적으로 청교도 신학자들은 복음전파에 있어서 목회자들의 공적인 말씀 선포사역과 개인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맺어야할 열매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였다.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굳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피조물로부터 즉각적으로 흘러나오는 뛰어난 결정체들은 회심에 대한 열망과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함이라고 썼다. 굳윈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루시며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들은 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요 또는 무너진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회심을 일으켜서 거룩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고 하였다.

 

영국 청교도 최고의 신학자 존 오웬의 성령론은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 연구에 담겨있다. 청교도 교과서를 저술한 신학자 오웬은 성령론에 주목하여 좀 더 심화된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성령의 인격과 개인 성도의 생애 속에서 역사하심에 대해서 상세한 풀이를 하였다. 오웬의 저작전집 4권에서는 성령과 성경의 권위, 조명, 기도, 영적인 위로, 은사들을 실제적으로 풀이했다. 오웬은 종교개혁자 칼빈이 남긴 유산을 연구하면서 왜 아직까지 성령에 관한 교과서가 한권도 없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묶어서 제시하였다.

 

오웬을 비롯한 위대한 퓨리턴들이 총망라되어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7)는 무려 5년간의 산고 (1643-48) 속에서 나온 기도의 결정체였다. 이들 17세기 절정기의 영국 퓨리턴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강조를 성경과 연결시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그대로 담아 놓았다. 간단히 지적하자면 칼빈의 성경관처럼 성령의 내적 증거사역을 강조한 것부터 연속성을 입증해준다.

 

성경이 무오한 진리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납득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가지고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이다.”

 

회심은 성령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성령은 두 가지로 동시에 일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첫째는 말씀이라는 도구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해와 확신을 불어넣으시고, 이와 동시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여 일어나게 되는 특수한 것, 매우 예외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기대하였다. 따라서 회심을 기대하던 퓨리턴들은 점차 성령의 축복을 어떤 예외적인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여서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돌보아 주고 성장시켜 주는 것이라야 하는데 다소 지나치게 이것만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쉐퍼드의 책, 진정한 회심(The Sincere Convert, 1643)이란 책에는 참된 신자의 소수를 분별하기; 그리고 구원받는 회심의 엄청난 어려움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칼 바르트에 의해서 확산된 신정통주의는 청교도 신학자들이 칼빈의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한다. 바르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언약사상을 비난했다. 칼빈을 비롯한 16세기의 기본적인 개혁주의 입장과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청교도 신학자들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후대에 조금씩 다른 독특성을 추가하기도 했다고 비판한다. 청교도들이 너무나 완고하게 구원을 얻기 위한 회심체험을 매우 강조하는 바람에, 구원에 이르는 길을 미리 준비를 하게 한 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20세기 중엽의 신정통주의자들이 17세기 청교도들의 시대적 과제를 온전히 이해한 것일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성도들이라도 앞선 세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과연 신정통주의자들은 정확하게 잘 파악하였을까? 시대마다 장소마다 신학적인 강조점과 방법론이 약간씩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17세기라는 시대적 환경은 전혀 그 이전 세대와는 달라졌다. 영국과 미국 신대륙에서 새롭게 대응해야할 심각한 문제점들이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퓨리턴들은 하나의 규칙을 생각하고 있었던 바, 죄의 확신은 율법을 선포함으로 촉발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을 갖기 전에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 면 그 누구도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알기 전까지는 구원 을 받고자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려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매우 강조되었던 믿음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한 요점으로서 퓨리턴의 회심 교리에서 강조된 매우 독특한 것이다.”

 

하지만, 준비 단계의 지식이나 확신만을 가지고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확언할 수 없다. “준비단계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우리는 확고한 내적인 자격들을 이해하게 되어지고, 죄의 상태에 있는 영혼의 육적인 요소와 율법과 복음의 동시적인 사역 가운데 새겨진 회심과의 사이에 도달한다. 성령의 동시적인 사역으로 인하여 영혼은 즉각적으로 믿음의 사역에 들어가게 되는데, 예를 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되 후기 퓨리턴의 거장 리챠드 백스터의 경우, 복음의 선포와 요리문답 교육을 지속하므로 키더민스터에서 행한 그의 목회사역은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 17년 동안에 무려 육백 명을 회심시켰다. 18세기 마지막 퓨리턴에 해당하는 토마스 보스톤의 경우에도 들과 산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여 처음 그가 성찬을 베푼 사람들은 60여 명이었지만, 20여년이 지난 후인 1731년에 시행한 마지막 성찬에는 777명이나 참가하는 놀라운 전도의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모두 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의 비판에 직면했었다.

 

스코틀랜드 칼빈주의 신학자 제임스 뷰캐넌의 성령론 교과서에서도 역시 퓨리턴 전통에서 중요시되어온 회심 사역이 핵심적으로 다루어졌다. 죄인을 회개케 하시는 일으키시는 성령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데 집중하였다.

 

 

 

4) 부흥운동과 특별한 체험

 

칼빈의 성령론이 영향을 끼친 개혁주의 부흥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면, 미국 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과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죠나단 에드워드 (1703-1758)와 죠지 휫필드 (1714-1770)가 이끌던 개혁주의 부흥운동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독특한 회심체험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없는 자극을 받아서 극적인 반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칼빈의 입장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들은 교회사에 나타나는 성령의 사역 가운데서 부흥의 중요성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이들 미국의 부흥운동가들은 칼빈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었고, 직면했던 신앙인들의 문제점들도 전혀 달랐다. 지금도 부흥운동은 성령의 특수한 활동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주권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도 일상을 넘어서는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흥운동은 교회 안에서 다시 체험을 유발하고 있고,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에드워드는 부흥운동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인류의 타락 이후로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효과 면에서 볼 때에는 구원의 사역이란 하나님의 영의 놀라운 전달수단에 의해서 주로 수행되어졌다고 관측되어진다. 비록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영향이 평상적으로 일반적인 범위에서는 항상 있어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위대한 일을 수행하도록 함에 있어서 취해진 방법은 항상 놀라운 표출이 일어남으로 시행되었는데, 특별한 긍휼의 열매들이 맺히는바 우리의 임무를 지금부터 더 앞으로 수행함으로써 충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 쓰임을 받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 부흥운동이다. 그러므로 전문적인 부흥사가 부흥의 방법론을 확산시켜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일 뿐이다. 부흥사들이 영광을 받거나, 부흥을 일으킨 현장 즉 어떤 특정한 교회가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 휫필드는 자신들의 사역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임을 인정하였다. 휫필드는 교단을 초월하여 부흥운동의 도구로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였다. 마이크가 없던 시대에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선포한 복음이 바람결을 타고 널리 퍼지는 특수한 현상들을 체험하였다. “회심하지 않은 목회사역의 위험성이라는 설교에 담긴 내용들을 당시 미국 장로교회 부흥운동가 길버트 테네츠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휫필드에 이르러서 뉴잉글랜드와 영국 장로교회는 설교의 강조점이 달라졌는데, 준비단계를 강조하기 보다는 즉각적인 회심을 호소하게 되었다. 이것은 요한 웨슬레의 설교에서 나온 영향이기도 하다.

 

 

 

5) 인간중심적 부흥주의와의 충돌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령론이 점차 소원하게 다루어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잘못된 부흥운동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부흥운동은 개혁주이 신학이 강조하여 온 기본적인 주제들 보다는 사람들의 현장체험으로 치우게 되어졌다. 따라서 개혁주의 진영은 전혀 부흥운동에 참여하지 않게 되면서 성령의 일상적 사역에 대해서만 설교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흐름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거부하고 인위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챨스 피니 (Charles G. Finney)가 주도한 19세기 초기 부흥운동은 1837년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 (New School)로 나뉘어졌다. 에서 나타났다. 피니는 부흥설교에서 먼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도록 자극했다. 성령이 설득하는데 도움을 주고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고 깨닫고 듣는데 심리학적인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회심하도록 유도하였다. 피니의 인본주의적인 부흥설교는 성령에 대한 신학적 곡해이자 나쁜 방법론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죤 네빈은 부흥운동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피니의 방법이 지닌 모순점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미국적 낙관론과 복음적인 알미니안주의와의 혼합으로 전개되자 개혁주의는 거의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무디 (Dwight L. Moody, 1837-1899)의 부흥운동은 피니와 다르다고 확신하였던 챨스 핫지 박사가 적극 후원하였고 신학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지도해 주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성령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당대의 잘못된 성령운동의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워필드 박사는 로마 가톨릭, 알미니안주의자들, 웨슬레안들, 퀘이커주의자들, 정숙주의자들, 케직사경회 운동 등에서 완전주의라는 공통분모가 발견하였다. 이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죄에 대한 기본인식이 잘못되어 있다고 설파하였다. 죄가 현존하는 한, 인간이 율법의 조항을 완전히 지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들이 너무 가볍게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워필드는 특히 챨스 피니의 부흥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의 주권적 역사하심에 대하여 방대한 저술로 복원시켰다. 성령의 중생 사역을 강조하면서, 유아세례의 이미를 크게 부각시켰다. 점차 감리교회와 부흥운동이 인간적인 방법론 (Methodism)에만 치우게 되면서, 기본적인 교리와 신학을 무시하고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따라서 이를 간파한 아브라함 카이퍼는 일찍이 감리교회에서 강조하는 회심체험을 위한 부흥회는 축소주의적이요, 펠라기우스적인 부흥회라고 공격하였다: “감리교회는 성례의 예민한 감각을 죽여 버린다; 그것은 매우 차가운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교제를 무시해버린다. 신앙고백에서 제시한 진리를 무제한적으로 무시하도록 만든다. 우리 주 하나님이 육십 육권으로 된 아주 두꺼운 책을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생각하라고 주셨는데, 감리교는 그 복음을 싸구려처럼 쓸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성령은 자발적인 조직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은혜롭게 주어지며 경험된다고 주장했다.

 

19세기와 20세 초엽,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워필드의 영향으로 인하여서, 미국 개신교회에서는 구원의 집행자로 역사하는 성령의 모든 사역들을 다시금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알렉산더 핫지도 역시 성도의 믿음생활에 절대적으로 간여하는 성령의 결정적인 역사를 강조하였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마크 놀 교수에 의하면, 프린스턴 신학의 유산과 전통 속에는 균형 잡힌 성령론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칼빈의 성령론은 견고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리챠드 개핀 교수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날의 성령 역사는 요엘서 28절의 성취로서 이해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행사되는 날로 보아야 하며,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단 한번 일어났지만 영원토록 그 효력이 유효하다는 입장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성경이 종결된 이후로 예언적 성격의 방언은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입장을 전개했다. 퍼거슨 교수는 1995년 자신의 구원론강의 노트를 발전시켜서 성령에 관한 종합적인 교리를 체계화 하면서 많은 현대 오순절 운동의 주장들이 지닌 모순점들에 대하여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다시 해답을 제시하는 획기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칼빈에서 퍼거슨에 이르기까지 개혁주의자들이 내놓은 일련의 성령에 관한 연구들은 개혁주의 교회와 장로교회가 결코 성령에 관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입증하는 신학적인 증거들이다. 성령에 관하여 가장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보편적 진리들을 추구하였고, 놀랍도록 풍성한 답변들을 찾아 놓았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개혁주의 신학에 성령이 빠져버렸다는 잘못된 편견은 버려야 한다. 세계적인 신학자들의 연구 업적들을 자신만 모르면서 마냥 남들이 하는 험담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연구가 우리가 지금 궁금하게 생각하는 모든 문제점들을 다 해결해 주었다고 볼 수 없다. 아직도 우리가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고, 한국교회 성도들이 더욱 궁금해 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성령의 존재와 사역을 놓쳐 버리고, 좀 더 특수한 것, 좀 더 새로운 것, 좀 더 강력한 것을 직접 체험하려 하면서 성경 말씀을 저버리는 성령운동은 혼돈에 빠지고 만다. 이것이 칼빈으로부터 그리고 그 후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남긴 성령에 대한 강조들 가운데서 우리가 얻어야할 지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혜도 필요하고, 성령의 권능과 능력에 사로잡혀서 다시금 소망을 새롭게 하는 시기에 처해 있으므로 더욱 더 주의가 필요하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므로 사람의 지혜에 의지하여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16:13-17).

 

우리는 지금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기독교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기뻐하시도록 자신의 욕망을 내어 버리고 제물로 드려지는 삶이라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믿음 안에서 성화의 삶을 매일 살아가는 것은 평범한 생존이 아니라,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소망에 넘치는 성령 충만한 자의 자화상이다.

 

 

 

결론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개신교들의 운동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수직적인 성직주의를 깨트리고 성경적 종교개혁의 종합적인 완성자로서 칼빈의 공헌을 생각할 때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는 찬사가 결코 허황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성경에서 터득하여 제시한 지침들로 인하여서 개신교 전체가 도움을 얻을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사실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라는 명예만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는 칭호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업적을 남겼다. 적어도 칼빈이 가졌던 다음과 같은 신앙인의 태도는 성령의 신학자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아야만 하지 않는가? 칼빈이 자신을 ?아냈다가 다시 부른 제네바 교회로 돌아가면서, 주변에서 강권하는 분들에게 보낸 심경의 한 부분은 다음과 같이 비장했었다.

 

나는 나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

 

하나님에게 바쳐진 희생 제물처럼,

 

나는 나의 심장을 하나님께 드리나이다.

 

......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나의 뜻과 나의 애틋한 감정들을 바치오며,

 

복종시킬 것이며, 흔들리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뜻을 버려야만 할 때에는 언제든지,

 

주님께서 친히 나에게 말씀하실 것을 소망하면서,

 

나 자신을 복종시키고자 합니다.”

 

칼빈과 개혁주의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내주하심에 철저히 의존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칼빈은 혼돈에 빠져있던 제네바 교회를 철저한 신앙공동체로 바꿔놓았다. 그야말로 일생에 걸친 그의 헌신적인 희생과 투쟁의 산물이었다. 칼빈은 분명하고도 확고한 신념을 갖고 말씀을 선포하였다. 성경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성령의 역사로 갖게 되었다. 무모한 자기 과시나 소영웅주의에 빠진 자만심의 선포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서 체험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을 비판하고 거스리는 수많은 대적자들과 맞서서 목회사역을 감당해야만 했었다. 그는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나갈 수 있었을까?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약해질 수 있고, 조롱과 비난에 부딪혀서 인간적으로는 비참할 수 밖에 없었는데도, 그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를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깊은 연구와 경건한 생활의 근거는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위로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에 확신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감사하도록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주시고, 위로해 주신다. 한국교회도 다시 한번 신뢰를 받고 활발하게 살아나려면, 칼빈에게 주어졌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모두가 체험하여서 성령의 사람으로 확고하게 일어나야 한다. 모두 성도들이 확실한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아름다운 열매들은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영생의 맛을 보는 내용이다. 살아있는 역동성을 유지하면서, 창조적인 비전을 안고 나아가려면,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여야 한다. 사람의 감정이나 흥분이나 종교적 체험은 일시적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나 목표들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고 만다. 오직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부어지심이 있어야만 거룩한 사랑이 역사하게 된다.

 

 

김재성 박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8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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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당한 칼빈주의

 

 

- Ian Hamilton/신호섭 역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기질적으로 얼마나 조용하고 얌전하며 공격적이지 않은지 관계없이 전혀 선천적이지 않은 덕목이다. 따라서 칼빈이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를 강해하면서 어거스틴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겸손이다. "나무가 뿌리를 땅 아래 깊숙이 박고 있어야 높이 성장하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겸손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 않다면 그는 멸망을 향하여 자신을 높이 드러내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칼빈과 같은 사람이 겸손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자만과 비판의 대명사가 아닌가? 칼빈은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칼빈주의적 선택과 예정 교리는 어절 수 없이 겸손보다는 자만을 가르치지 않는가?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칼빈은 "우리에게 겸손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들의 멸망을 향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자가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때로 건방지고 교만하게 행동하며 차갑고 냉소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그들이 이런 행동을 통해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참된 특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자민 워필드는 칼빈주의를 "하나님의 위엄 하심이 인간의 모든 삶과 경험에 가득 차는 것"으로 정의한다. 워필드가 의미하는 바가 거룩하신 여호와의 영광이 잘 드러나 있는 이사야서 6장에 그림같이 표현되어 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이사야를 우쭐하게 하거나 교만하게 만들지 않았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이 사건은 이사야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고 외치고 말았다. 여기 진정한 칼빈주의의 참된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열쇠가 있다. 칼빈주의는 절대로 교만하거나 차갑거나 냉소적이거나 당당할 수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 한가지 이유 즉 우리는 결코 높아지신 위엄의 '위엄의 왕을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의 타락한 심령을 가지고 그의 존전에서 결코 당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워필드가 칼빈주의의 근원은 신학적 체계에 있지 않고 '신앙적 자의식' 안에 있다고 말한 의미이다. 칼빈주의의 뿌리는 (낮이 밤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그곳으로부터 특별한 신학이 나타나는 '신앙적 태도'에 심겨져 있는 것이다.

 

워필드는 '우리 삶에 있어서의 칼빈주의의 성취는 신학적 체계의 과학적 진술에서 만나는 근본적인 신앙적 의식의 발진'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칼빈주의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실수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우선 신학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신앙적 태도' 즉 특별하고도 엄밀하며 그렇지만 하나님 영광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체계를 태동시키는 마음의 태도이다. 칼빈주의를 구성하는 주요원리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예정론이 아니라 오히려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좀 더 자주 높이 선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칼빈주의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가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이다. 다시 한번 워필드를 인용하자.

 

자신을 선택하신 분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아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전 구원의 과정과 매 국면의 삶이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이 그 구원의 모든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과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에 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로 배은망덕한 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던 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열정이기도 하다. 그의 마지막 일기의 한 부분에서 브레이너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행복하게 하실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데려가 사람들과 천사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지고한 천국으로 날 이끈다고 해도 나는 영원토록 비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미하게 하라. 하나님을 더욱 더 영원토록 기쁘시게 하라! 바로 이것이 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더욱 원하는 한 가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를!

 

진정한 칼빈주의는 선천적으로 온유하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왕이시며 자신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에 빚진 자라고 고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만하고 거만한 체하며 다른 죄인들,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경멸하고 멸시한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다시 한번 뒤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이 '겸손'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그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약함과 눈물이다. 그렇다면 누가 겸손하길 원하겠는가? 그 누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처럼 순종적이길 원하겠는가?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다(마11:28-30).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큼 악과 위선과 무정함을 책망하시는 분이 누구이겠는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큼 그 말씀과 행위에 있어서 권위로우신 분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우리 구세주에게는 결코 영적 우유부단이란건 존재하지 않았다. 연대를 무시하고 말하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칼빈주의자의 본질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을 통하여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한에 달려있음을 배우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임을 잘 아셨다(요6:39). 예수께서는 또한 역사 속에 모든 사건들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작정되어 있음을 아셨다(마10:29). 이러한 지식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 악한 죄인들을 향하여 교만하고 무정하게 하며 냉소적이고 경멸하게 만들었는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칼빈주의'를 모든 사람에게 자랑한 적이 있으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종이시자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셨다. 그에게 임하신 성령은 '제한이 없으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것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마12:18-20)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겸손이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가? 그것은 모든 방면에서 매우 풍성한 변화를 초래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배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를 결정해준다. 기독교 예배의 다른 요소들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예배 모임은 하나님의 영광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무가치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만일 우리가 겸손이라는 은혜의 강물에 더 깊이 잠기기만 한다면, 현재 복음주의권 안에 팽배해 있는 오늘날의 예배의 가벼움과 하찮음은 하룻밤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의 표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의 표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8-29).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근엄하고 지루한 예배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결코 그럴 마음이 없다.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의 생명으로 충만한 예배인데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사람을 높이는 예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예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예배란 설교의 거장이나 음악의 거장의 숙련된 모습이나 연주를 보고 박수를 치고 칭송하는 공연이 아니다. 예배란 그 어원의 의미 그대로 엎드려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의 위엄 앞에 엎드리는 것이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의식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의 또 다른 증거는 설교자의 개성이나 재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좌우되는 설교에 있다. 제임스 데니(James Denny)는 "설교자 자신이 재주 있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시다는 것을 동시에 제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복음으로 죄인과 성도를 동시에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는가? 당신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을 믿는가? 당신이 설교자라면, 당신의 모든 준비가 바로 이 확신에 가득 잠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그 열매로 증명되듯이 겸손 역시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슬프게도 아주 종종 나는 강단에서 똑똑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것은 겸손치 못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효과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독교 설교는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겸손을 짓밟고 교만을 조장하는 것은 진정한 칼빈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칼빈주의는 온유하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을 낳는다. 그렇다면 당신과 내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구세주와 함께 연합해 있으면서 어떻게 교만하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기독교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당당한 칼빈주의는 궁극적으로 모순되는 어법이다.

 

그렇지만 나로 하여금 칼빈주의는 또한 실제로 당당하다고 말하게 하라. 칼빈과 그의 신학적 영적 후예들이 당당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당당함이나 자랑은 결코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받기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는 활활 타오르는 불 가운데서 건짐을 당한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셨다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다"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에 놀라야만 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우리의 당당함이 어디에 자리할 것인가? 우리의 오만함이나 방자함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의 자랑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의 자랑은 바울의 고백과 함께 고동치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칼빈주의는 당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구세주의 당당함일 뿐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은혜의 당당함이다. 그것은 높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시는 수치를 당하심으로 그의 낮아지심을 통하여 우리가 높아질 수 있는 당당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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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정준모

 

 

1.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은 칼빈의 신학과 삶의 핵심 주제며 교리이다. 그의 여러 문헌과 작품 속에서, 칼빈은 다각적인 측면에서 경건과 그 결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경건은 칼빈 신학의 하나의 공통된 주제라기보다는 그의 신학 전반의 방향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총체와 구원 지식에 필요한 핵심 교리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읽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책으로 간주하였다.

 

경건에 대해 언급한 후 칼빈은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하여 설명한다. 참 종교를 결정짓는 것은 경건이다. 칼빈은 경건을 외형적인 모습에 나타난 어떤 형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진실한 경건, 참된 신실함으로 표현되는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우리의 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만큼 그분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그의 의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에 대한 거역이 죽음보다 더 악하다고 여기고 두려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종교나 경건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긍휼을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칼빈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들을 통해 종교가 발생되고 이런 능력들이 경건에 대한 우리의 좋은 스승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경건을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포함된 경외라고 부른다.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스며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경건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는데, 그 첫 번째 발걸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고 다스리시고 양육하시는 우리 아버지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회개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인 경건은 거룩함 속에서 평생 성장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칼빈은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맺게 되는 열매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경건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모든 인간을 향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 그리고 전 삶을 통하여 거룩함과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십계명에 대한 논의에서도 칼빈은 십계명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사랑과 경건을 실행할 의무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참된 경건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경건은 교회에 관한 정황 속에서 순수한 교리로부터 얻게 되는 믿음 있는 삶을 내포할 수 있다고 칼빈은 생각한다. 결국 칼빈은 이 개념을 성경의 전반적인 계시로 이해하면서도, 단지 경건의 교리만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보여주었다.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그 어떤 것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너무나 필수적인 것이어서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지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이며, 경건이 완성된 곳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경건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경건의 개념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일컫는 포괄적 개념으로 보았고 경건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경건은 사랑, 경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그리고 경배의 원천이라고 인식하였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3.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자유의지
 
인간 본성과 그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며 염세적인 견해를 가진 칼빈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처절하게 묘사한다. 그는 인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관하여 그 어느 개혁자들보다 너그러운 자세를 취하였지만, 『신앙교육서』에서는 이러한 인문주의적인 영향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은 죄와 반역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든 타고난 능력들을 박탈당하였으며, 단지 영혼이 결여된 육체만을 음미하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은 지성과 의지뿐만 아니라, 손상되어 부패해 버린 신체적인 능력에도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어떤 방향으로 우리가 눈을 돌리든지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더럽고, 저속하고, 혐오스러운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에 관하여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으며 여전히 인간의 부패로 잔존하는 모든 것은 무서울 정도로 추할뿐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죄의 결과로 영혼의 모든 능력은 죄로 점유되었고 저급한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가증한 불경건이 인간 이성의 아성을 점령해 버렸으며, 교만이 그 마음의 은밀한 장소까지 침투해 들어갔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전통적으로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이 전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범죄를 저질렀으며 모든 인류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최종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죄의 독성에 빠져서 오직 죄의 열매만을 맺게 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맨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거울에서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반영했을 것이지만, 죄로 지워져 버린 이 형상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음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회복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 안에서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창조보다 이 두 번째 창조 즉,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훨씬 더 풍성하고 강력하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될 여지를 갖게 된다고 칼빈은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칼빈의 사상은 성경적이며 매우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죄인의 의지가 노예 의지이며, 이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도움을 받기 전에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가장 어두운 색채로 죄악의 실체를 묘사하는 칼빈은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을 첨가시켜서 자유 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칼빈은 자유 의지에 관해서 적극적인 입장을 갖게 된다. 타락된 상태의 관점에서 자유 의지를 바라본 칼빈은 “육체에 속한 인간은 전 영혼이 한결같이 죄 속에 거한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와 노예 의지를 모두 갖는다고 말한다. 칼빈 자신은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거나 간단하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의 근본 입장은 명확하다. 원래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던 인간은 바람직한 구별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기만 했다면 자유 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따라서 아담은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오직 자신의 의지로 자기가 넘어지는 것을 알고 바로 설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버렸던 것은 처음 인간이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와 같이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부인함으로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결정론에 빠질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이 노예 의지를 부인함으로 운명론에 빠질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예의지를 모두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즉 칼빈은 인간에 관한 결정론이나 운명론을 모두 거부한 반면, 그는 분명코 한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른 한 측면에서는 노예의지를 인정하였다.

 
4. 십계명과 삶
 
칼빈은 전통적인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율법관을 따르지 않고, 사도 바울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율법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그의 『신앙교육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율법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삶을 정확히 측정할 목적으로 당신이 친히 부여하신 규정 혹은 표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참된 의로움과 인생의 길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율법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은 죄인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어거스틴의 말을 따라서 칼빈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하나님에게는 무익하다고 본다.

 

율법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우리를 지속적으로 훈육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악을 버리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권고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는 점에서 그 유익성을 찾는다. 율법은 우리가 어떤 열매를 거둘 수 있으며 또한 그것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보게 하며, 우리의 행동을 제어한다. 이런 통제는 건전한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율법은 이미 성령이 성도들의 마음에 사역하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

 

십계명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데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칼빈은 십계명을 아는 사람이 온전하게 성경을 안다고 하였다. 칼빈은 율법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 이해를 가진다. 우선 하나님은 영적인 율법 수여자이시기 때문에 율법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이해되고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점에서 십계명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율법의 심장, 영혼, 생명, 목적, 마침, 그리고 성취라고 하면서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진술한다. 따라서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부가적으로 율법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모세의 마지막 네 권의 책들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강력하고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칼빈은 십계명을 우리의 전 삶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행하여야 할 것에 관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은 계명을 주시면서 그 계명의 근거로 이스라엘의 해방을 상기시키셨는데,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의 주인이심을 밝히면서 그 자유를 누리는 길이 계명에 대한 순종임을 언급하며 율법과 자유의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되는 바이다. 그 점에 있어서 칼빈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도록 훈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우리의 판단은 점점 흐려지기 쉽다.
 
특히 어렵고 명확하지 않은 윤리적 결정들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매우 혼란스럽고 당혹스럽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이 문제에 관해서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율법의 개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율법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거기에 기록해 놓으셨다. 우리가 알아야 될 모든 사항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칼빈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동시에 취하여 작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분의 형상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회복되기 위하여 우리가 아들로서 입양되었다고 칼빈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의 정신, 생명, 목표, 그리고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율법은 모든 부분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참으로 율법의 모든 교리, 명령, 약속은 항상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최고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본질이시며 완성이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토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의 삶을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보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받을 모델과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5.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자유
 
칼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칭의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자유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인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밝힌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고 칭하시는 자유이며, 그리스도께 종노릇하는 자유이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곧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건한 삶의 기초이며 그분이 부여하신 은혜의 결과로 우리는 회개와 중생의 삶을 갖는다고 말한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순종을 통하여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나게 함을 뜻하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가 두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칭의는 전적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자신을 장식하는 것이다. 칼빈은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인으로 선언됨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의미는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무엇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의 어떤 세력에 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명저인『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칭의 교리를 정립하려고 시도하는 칼빈은 기독론적 차원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분명하게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관점에서 칭의로부터 진정한 자유가 파생된다고 보았던 칼빈의 사상은 그의 율법에 대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칭의와 자유의 관계를 오랫동안 생각하였던 칼빈은 양심이 칭의에 의하여 죄책에서 자유롭게 될 때에, 칭의의 중심적 의미는 분명하게 된다고 이해한다. 그는 진정한 경건에 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이런 자세는 반드시 믿음의 중요한 행동인 기도로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롭다. 칼빈은 그 근거를 바울의 율법 폐지에 대한 언급에서 찾는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바울이 말하였을 때, 그것은 칼빈에 따르면 우리가 그 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율법의 엄격한 요구들과 그 요구들로 말미암은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따라서 폐지된 것은 율법의 규칙이 아니라 절대적인 완성을 위한 요구를 통하여 얻게 된 자유에 반대하는 요소이다. 이제 믿는 자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양심의 끝없는 속박이 주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서 ‘양심의 자유’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를 오랫동안 속박시켰던 율법에 복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법적인 요구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대항하고 있었던 그 속박은 벗어졌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모든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하며 그 자유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은 율법 아래뿐만 아니라 복음 아래서도 요구된다. 그러나 양쪽에 대한 순종에는 차이가 있다. 복음에 대한 순종은 더 이상 율법의 명령들에 대해서 요구되는 엄격하고 혹독한 복종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인 순종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에 의하여 율법의 요구들을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순종에 대한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충족되는 것이다.

 

자유는 자율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진정한 주인을 찾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예속된 자유임과 동시에 섬기는 자유다”라고 한 루터의 말을 반복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섬김’ 그 자체이며 섬기는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는 순종 안에 거하는 자유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가 자발적이어야 하듯이 복종 또한 기쁨의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랑과 감사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면 믿음의 순종이 아니다.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열망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기쁨의 순종은 단지 그들이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제 진정으로 자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 결국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지적이며 자발적인 순종을 할 수 있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6. 선택 교리 
 
선택과 예정은 칼빈의 교리들 가운데 가장 강조되지만 또한 오해되는 것들 중 하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증거하는 수단이다. 선택은 자주 귀중한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보여준다. 칼빈은 예정을 하나님의 주권의 틀에서 이해하였다. 선택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예정되었다는 근거를 가진다. 칼빈은 선택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되고 인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의 선택 교리는 성경적으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을 철저히 따른다. 또한 그는 바울의 주장처럼 선택 교리를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는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순전한 관대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오직 주께서 그의 영원하신 선택에 의하여 당신의 자녀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로 예정하셨던 사람들 속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으로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인 예정은 각 개인에게 적용된다.

 

예정 혹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는 칼빈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로서 『신앙고백서』, 『제네바 신앙교육서』, 그리고 『기독교강요』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칼빈은 이 교리를 중요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이중예정교리’는 인간 이성에 의하여 이해될 수가 없는 오묘한 진리이며 인간 이성에 장애물과 같은 개념이다. 칼빈은 이러한 어려움을 인식하고 예정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에 대해서 주님 자신의 가장 합리적인 이유로 그들에 대한 각기 다른 행동을 우리에게 감추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간파하려는 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였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의 지혜의 지극히 경미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심판들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선택과 유기 사이의 평행 관계를 생각하는 일부 신학자들과는 달리, 칼빈은 누가 선택되었고 유기되었는지에 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이런 입장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약속들을 신뢰하는 것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곳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 대해서 칼빈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는 은혜에 집중된다. 그가 우선 강조하는 사항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그분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믿는 자들에게 불확실성과 혼돈이 아닌 위로의 원천이 된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과 선택에 대해서 확실한 입장을 가지지 못하였다. 칼빈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그들에게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영원부터 정하셨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단지 비참한 근심과 걱정으로 우리를 초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는 모든 곳에서 그는 ‘그리스도’라는 주제가 우리의 선택을 반영하고 명확하게 해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을 다루면서 다시 우리에게 그리스도만을 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감추어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이며 가장 진지한 것이며, 서약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거울 안에서 보여주는 생명을 숙고하며 믿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가장 진지한 것과 서약을 붙들고 있다.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있다.

 

7. 믿음과 이신칭의
 
칼빈의 <신앙교육서>에 따르면, 그는 선택교리를 살펴 본 후에 바로 믿음의 주제로 돌아간다. 그는 믿음을 역사적 사건들과 근본적인 교리들에 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에 대한 가슴의 확신으로 보았다. 하지만 무지가 아닌 지식에 근거하는 믿음은 약속들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또한, 믿음에 관한 지식은 뇌보다도 가슴의 문제이며, 이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질의 문제기 때문에 이 지식은 특별하다.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인간의 감각적 인식을 통한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넘어가며 일어나야 하는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를 모두 강조하였지만 지성보다는 의지를 더 강조하였다. 그는 신앙에서 의지의 역할을 중심에 두고 지성의 역할을 주변에 둔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 믿음은 성령의 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이며,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복음에 있는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에 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믿음의 영구한 대상’이시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은 확인되며, 제시되고, 완성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모든 신적인 자비의 부요함을 제공해 주시는 믿음의 지속적인 대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특별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에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이 자비롭게 나를 향하시고,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하실 것이라는 지식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직 은총 위에서만 사람의 심장이 쉼을 얻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은총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외적인 유일한 서약이 되신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주어진 진리의 약속에 기초된 지식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하는 이 지식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져서 견고하고 확실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 또한 믿음의 창시자요 저자이신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접착제 역할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롭고 언약적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효과적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묶어주도록 하는 끈으로, 이것은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이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확신이 우리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확실성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일체에 있다. 칼빈은 종종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신비적인 결합’이라고 한다.

 

칼빈은 칭의를 간단히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호의 안으로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받으시는 수납’으로 정의한다. 선한 행위에 대한 토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들어오는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함을 받아 죄 용서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감 있게 서게 된다”고 그는 더욱 완성된 정의를 내린다.

 

칼빈에게 칭의는 단지 법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의인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칭의는 죄의 사면과 전가로 구성된다. 따라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수납되는 것이며, 용서받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는 것으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놀라운 선물들 중의 하나는 양심의 평화와 조용한 기쁨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칭의를 복음의 가장 위대한 선물로 보았다.
 
8. 기 독 론
 
니젤(Niesel)의 명저인 『칼빈의 신학』에서, 그는 칼빈 신학의 특징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으로 보았다. 그는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고, 목표이며, 목적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가 성경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두 직분(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가르쳤던 초대 교회처럼, 칼빈도 『신앙교육서』에서 두 직분만 가르쳤다. 그러나 1539년의 『기독교강요』 두 번째 판에서는 『1541년 신앙교육서』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을 덧붙였다.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은 그가 교회의 영원한 지배자이며 옹호자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귀와 세상과 육에 대한 모든 투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며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식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은 그의 자기 희생과 죽음으로 이루신 죄에 대한 유일한 만족과 중보의 간구하심을 의미하는데, 그는 지금도 제사장의 직무를 계속하고 계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최종판에서 “대속적인 죽음의 희생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분은 오직 그분께만 속해 있다”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죄 사함, 하나님의 진노의 소멸,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하나님의 긍휼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선지자로서의 세 번째 직분을 강조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에 선지자로 오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언하시고 모든 것을 계시하실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주권적인 대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직분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세 직분에 모두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직분들은 모두 우리의 선을 위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교제하며,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은사를 받으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직분에서 얻어지는 개인적인 유익은 우리의 주인과 교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학자가 되도록 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참된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모든 저서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그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십자가에 완전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래도 구원의 성취를 재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보고,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희망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본질을 분리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가 씻겨졌고 죽음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부활을 통하여 의가 소생되었고 생명이 살아났다 말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죽음으로 죽음의 권능이 소멸되어서 우리 안에 효험이 있게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권세를 넘어서 승리를 얻도록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때, 올바르게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9. 기도론 (1) 기도와 믿음
 
칼빈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기도에 큰 비중을 둔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였던 기도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 중에서도 칼빈이 기도에 대해서 논의한 글은 그 중심에 위치한다.

 

기도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는 믿음이다. 즉, 기도와 믿음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기도가 전적으로 믿음과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자신의 부족을 확실히 깨닫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부족의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의 가련함을 도울 수 있는 어떤 구원의 손길을 찾게 된다. 즉, 그는 창조주이신 주님을 찾음으로써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고 또한 하늘의 모든 보화를 열어주실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총체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묵상하며, 그의 전 기대는 그 분께 의존하며, 그의 모든 소망은 그 분께 집착하고 그분 안에서 쉼을 갖게 된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주요 훈련은 기도하는 것이며, 이것은 신앙의 참된 증거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믿음은 진정한 기도의 기초가 되는 동시에 필수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칼빈은 성경의 약속은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연료와 같다고 하면서 성경을 좋아하였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소망을 나타내는 신앙이며, 살아있는 신앙의 표현이자 호흡과 같아서 거룩한 교리에 대한 지식이 내 몸에 살아 움직이는 표가 된

다. 기도의 중요성 때문에 칼빈은 기도에 원칙과 형식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논한다.

 

또한 기도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필수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기도가 칼빈의 경건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경건은 예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기도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기도와 믿음은 모두 그 초점과 목표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이러한 풍부한 요소들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마치 엄청난 보화가 땅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믿음의 눈을 통하여 보게 되며, 그 보화들을 기도를 통하여 파내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경우에서 기도와 예배의 의미를 찾는다. 여기서 그는 고넬료가 연단 받을 때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렸다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칼빈은 진심으로 열렬히 예배에 몰두하였던 고넬료가 거기에서 신앙의 힘을 얻었다고 추측하였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 간청해야 한다. 또한 기도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놀라운 평화와 안정을 갖게 된다. 기도는 살아있는 신앙 표현이며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필요한 것들을 받으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9. 기도론 (2) 기도의 필요성과 규칙
 
칼빈의 기도의 필요성과 기도의 규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대하심이 기도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식에 있어서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들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반드시 그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우선 믿음의 강건을 위하여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해야 할 여섯 가지 이유들은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도록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 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기도로 응답해 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로, 우리가 연약한 때일수록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지켜 주신다.

 

칼빈은 기도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행해지는 일종의 약속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소원, 기쁨, 하소연을 포함한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들을 내어놓을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이며, 우리 마음의 순수한 감정의 작용인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선택적인 행동’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그 명령은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약속과 함께 온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모두 기도의 동기와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거절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될 것은 ‘기도하지 않는 죄가 가장 나쁜 죄’라는 것이다.

 

기도의 규칙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신자들을 위하여 적절한 기도의 규칙들을 열거하고 논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합당하게 대화하기 위하여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자세를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 의존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의 탄원을 불타는 열성으로 아뢰어야 한다. 전심으로, 진지하게 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합당한 기도의 전제 조건은 통회하는 심령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광과 가치에 대한 생각은 일체 포기하고 겸비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고백적인 응답이다. 신자가 먼저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 또한 모든 기도는 죄의 고백과 용서의 간청이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런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경외가 수반되어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회와 믿음으로 기도하는 모든 이에게 인자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자는 철저하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능력과 기도에 온 정신을 바쳐야 하고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정신을 모으기 어려울 때는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마음과 생각이 주를 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훈련이며,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이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성화의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일정한 시간에 기도할 것과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도 인내로 간구할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준다.

 

[출처] 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1146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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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하나님의 종은 모든 일이 마음에 바라는 대로 잘 이루어질 때에,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느꼈든,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든, 그 모든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덕분으로 돌리게 된다. 모든 일이 번창한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감사하게 된다.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는 곧바로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로 향할 것이며, 하나님의 손길에서 인내와 마음의 평안을 풍성하게 얻게 될 것이다. 요셉이 형들의 배신을 계속해서 마음에 두었더라면, 절대로 그들을 향하여 형제다운 애정을 보여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들을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욥의 경우도 만일 갈대아 사람들의 잔악한 행위를 계속 마음에 두었더라면 즉시 보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정하였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다윗의 경우도 시므이에게서 협박과 모욕을 당하였을 때에 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더라면, 곧바로 부하들을 시켜 보복하였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39:9).

 

끓어오르는 분노와 조급한 마음을 치료하는 것으로 과연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기를 배운 사람은 분명 굉장한 유익을 얻을 것이고, 언제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곧 “주께서 그렇게 뜻하셨으니 반드시 견뎌야 마땅하다. 비단 그것을 대적하여 싸울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주께서는 정의로우며 유익한 일 이외에는 어떠한 일도 뜻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혹시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상처를 당할 때에라도,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하면 우리의 고통만 더 악화되고 우리의 마음에 복수할 생각만 날카롭게 일어날 뿐이니-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경륜에 따라 허락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를 배우기를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해 보복할 마음을 갖지 않도록 절제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6:12) 우리의 영적 원수 마귀에 대한 것임을(엡6:11) 지혜롭게 지적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싸움을 잘 대비하게 해 주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일으킬 모든 충동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교훈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귀와 모든 악인들을 무장시켜 싸우게 하시며, 친히 그 싸움의 재판장으로 앉아 계셔서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빛도 짖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45:7).

 

경건한 사람은 부차적인 원인들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유익을 베풀어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섬기는 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베푼 인간적인 친절에 대해서 무시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느끼며, 자신이 무언가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고백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려 할 것이다.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주님을 근원으로 여겨 그에게 찬양과 공경을 돌리며, 동시에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존귀하게 여길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뜻을 가지셔서 그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혹시 부주의나 태만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경우라도, 이 경건한 사람은 그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동시에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경우는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런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일이나 그들의 조언을 청하는 일을 꺼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무엇이든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주께서 베푸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하나님의 섭리의 정당한 도구들로서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금 취하고 있는 조치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베푸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에게 최상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저런 조치들을 취할 때에,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지혜에 맡겨서 올바른 목표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후원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온통 기대고 확신 가운데서 안심하거나, 혹은 그런 것이 없을 때에는 그로 인하여 불안해하고 떨 정도로 그런 것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만 생각을 고정시킬 것이고, 그리하여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궁리로 그 섭리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서 벗어나지를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의무를 부지런히 수행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10:12)

 

-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pp 266-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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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칼빈의 5대교리 다섯번째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5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1.도입   

 

   이제 본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주제 하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계획’에 관해 연속적으로 공부해 왔습니다. 처음 강의에서 밝힌 바 있듯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어디까지나 소위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인본주의적 구원관에 대한 오류와 부당성을 역사적 개혁주의 입장에서 접근해 그 내용의 허구성을 성경적 변호와 반론을 통해 지적하여 성경의 본래적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의 어떠함을 체계화시킨 교리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성도의 견인(牽引)교리는 달리 ‘성도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는 성도가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기에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결코 중도에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저들의 구원의 정체성을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기에 구원받은 인간이 남은 생애의 기간동안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날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위와 의지의 발동 여부에 따라서 구원의 향배(向背)가 좌우될 수 있다고 보기에 이런 견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이와 같은 저들의 주장의 반증(反證)으로 나와진 종교 개혁자들의 성경적 증언입니다. 곧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속성과 지속성 말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성도의 견인교리 또한 독립적인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앞에서 전개시켜 나온 제반 교리적 내용인 인간의 전적타락, 하나님에 의한 주권적 선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제한적 속죄사역과 이에 대한 구체적 적용인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불가항력적 은혜)과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그 성격과 시작이 철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주권)으로 말미암는 신적기원에 근거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엡1:4-6). 따라서 성도의 구원이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 구원교리의 뒷받침(오직 믿음)과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실제적 경험(변화된 행위)을 동반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이상 성경적 구원은 어떤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결코 취소되거나 방해를 받거나 상실될 수 없음이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오해해서 구원은 믿음과 행함의 이중적 요건의 충족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호리라도 행함이 개입될 때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개념은 사라지고 선물의 의미는 상실되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검증과 진단의 필요성으로 제기되는 ‘변화된 경험적 행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에 인간 편에서의 일말의 선행이나 공적이 개입되거나 참작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성경적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이기에 말입니다(롬3:28, 엡2:8-9, 딤후1:9). 따라서 이 표현은 은혜의 선물로 대가없이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의 새생명적 새인격의 활동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됨으로 한 사람의 불가시적 구원의 실질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얘깁니다(롬6:11-14, 12:1-2, 갈2:20, 엡4:1-3, 22-24, 골3:1-3). 야고보 사도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는 지적은 이상의 구원과 행함의 함수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적 배경 속에서 나와진 결론입니다(약2:17, 26).


    그렇습니다. 성도의 구원의 실상은 변화된 새인격의 구체적 활동으로 확인됩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성격을 옛자아의 사망선고와 더불어 새생명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적 활동의 전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고후5:17, 갈2:20, 엡4:22-24).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성경적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처음부터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향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통해 영생하는 구원의 새생명적 활동을 전개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의 에덴의 삶을 묵상해 보십시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선악과 금령법의 내용을 삶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 영생의 실질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창2:16-17).


    오늘 강의는 오직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수여되는 구원의 영원성과 영속성이라는 차원에서 흔히들 표현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교리인 성도의 견인교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전개


    성도의 견인교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중도에서 어떤 이유에서라도 결코 취소되거나 중단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성도의 견인은 성도들이 끝까지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음을 포함합니다. 물론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를 발휘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지속적으로 믿음 안에서 보존, 보호,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간섭과 능력으로 말입니다. 이런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총체적 구원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얻게 하십니다.


    다른 한편 성도의 견인이 ‘한 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다’는 말을 가리킨다고 할 때, 이 말은 단순히 죄책(罪責)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 나머지 지옥의 형벌을 피하게 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일체의 죄책에서 사면될 뿐 아니라 이후 남은 생애의 기간을 살아갈 동안에 경험하게 되는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함을 받게 될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구원은 이렇게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둘 다를 내포합니다. 사람이 죄책에서는 구원을 받고 죄의 권세에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곧 성령의 내주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넉넉히 죄를 굴복시킬 수 있는 권세 또한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생명의 능력을 성령을 좇아서 발휘시켜 나갈 때 육체의 욕심을 넉넉히 제어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롬6:11-14에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따라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서의 의미를 발휘하는 바 중도에서 실수하거나 실패할 수는 있을 망정 근본적으로 구원을 잃거나 믿음에서 아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창세전 은혜로 선택하신 구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구원하심은 철저히 은혜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은혜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호리라도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편의 선의적(善意的) 호의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아직 세상 가운데 태어나거나 어떤 선악간의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당신 편에서 일방적으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 창세전이란 말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조건적 보상이 아닌 하나님편의 호의적 선물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아울러 여기서 구원이 보상의 개념이 아니라 선물의 개념으로 설명됨은 구원의 성격이 철저히 하나님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무조건적 사역임을 시사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 여부와 무관하게 주어진 선물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구원 이후의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서 취소되거나 파기될 수 없는 독특한 성격적 특징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롬9:10-13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얘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 아직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근거가 인간편의 선행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사실 출생 이후의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성격면에서나 행동면에서 결코 형 에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점을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오히려 내성적이면서도 약삭빠르고 매사에 계산적이며 일면 교활한 면까지 갖고 있어서 번번이 형 에서의 비위를 건드리기가 일쑤였습니다. 한 번은 형 에서가 허기져 들어온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팥 죽 한 그릇으로 차지했을 뿐 아니라, 노년에 기력과 시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아비 이삭을 속여 형 에서로 가장한 채 이삭의 축복을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에서를 피해 어미 리브가의 본향인 하란의 라반 삼촌에게로 피신해 살면서도 그의 상업적이고 계산적인 사고방식은 여전해서 끊임없이 삼촌과의 첨예한 재산상의 갈등과 대립은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그의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행위와 무관하게 야곱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먼저 택하셨습니다.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과 예정에 기초해서 말입니다. 이 선택은 사람의 행위와 무관한 것으로 인해 그의 출생 이후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사랑의 징계는 가해질 망정(히12:5-6) 이로 인해 아주 버리시거나 구원을 다시 거두지는 않으십니다. 사람의 구원은 그 근본이 신적기원에서 찾아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번 하시고자 한 바는 결코 중도에서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음이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절대 주권자의 속성이며 성품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는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속죄 효력의 영원성


    성도의 견인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속죄 효력의 무한성과 영원성, 그리고 영속성에서도 찾아집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구약의 짐승제사는 제물 자체의 열등함과 제사계시의 모형론적 성격으로 인해 처음부터 대속물의 실체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全)구속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시적이고 제한적으로 주신 예표적 제사제도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구약 제사제도의 계시적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제사의 희생제물은 새언약 안에서 자기 몸을 한 마리 어린양 같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히9:11-14, 요1:29). 한편 구약제사에 드려진 제물은 그 가치의 열등함으로 인해 그리고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예표론적 성격으로 인해 불완전 할 뿐 아니라 한시적으로만 효력이 미치는 것으로 인해 해마다 다른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가 없었습니다(히10: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제사의 경우는 다릅니다. 구약제사의 참 형상이며 동시에 실체적 계시사건입니다. 따라서 제사의 효력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며 영속적인 특징을 가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9:12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여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해마다 드리는 반복적인 제사를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시기에 가치적 측면에서 무한하시고 제사의 계시적 성격상 구약제사의 실체로 오신 분이기에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확증하면서 ‘영원하신 성령’(히9:14)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히10장에서는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언급합니다. 12절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절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7-18절입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상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제사가 갖는 효력이 영원하고 지속적이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더 이상 사라졌음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영단번(once for all)에 드려진 제사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무한하셔서 그 효력이 미치는 범위와 시간이 무한정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죄사역에 의해 한번 죄사함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결코 그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구원을 결코 잃거나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롬8:1)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3:23-24, 4:25).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사면령(赦免令)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칭의적 구원선포는 교리적이고 원리적 측면에서 우리를 죄 없다고 여겨 주신다는 내용이지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부터는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적 죄성은 여전히 우리를 옛사람이 종노릇했던 죄의 법 아래로 이끌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고 짓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기자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갈등과 대립과 긴장을 설명함이 이런 배경에 근거를 두고 기술한 내용입니다(갈5:16). 그도 역시 롬7:21-25에서 보면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이 상호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음을 솔직한 심정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장으로 넘어가면 로마서 기자가 새롭게 발견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도를 해방시켜 준 사실로 인해 죄책의 면제 뿐 아니라 죄의 권세까지도 이길 수 있는 영적 힘을 공급해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까지도 넉넉히 이루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수행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경험은 기계적으로 되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거듭난 새인격의 새생명의 능력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발휘해 나가는 것을 통해 가능해 집니다. 성경은 이를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갈5:16). 거듭난 새생명적 활동이 발휘되기에 이런 사건이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통해 죄의 권세를 넉넉히 제어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삶 말입니다. 빌립보서 기자는 이런 성화의 삶을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적극적으로 권면합니다(빌2:12). 우리 안에서 능력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넉넉히 죄를 굴복시키는 것을 통해 보다 진전된 성화의 삶을 지향해 나갈 수 있게 됨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이끌어 가실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빌1:6, 4:1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功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뿐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승리할 수 있는 은혜의 왕노릇 하는 권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롬5:21). 성도의 견인교리의 보장이 이런 구원의 원리와 실제적 적용을 통해 나옵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잃어지거나 취소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효력 또한 영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시키는 것을 통해 우리의 구원 또한 영원하고 지속적이어서 어떤 경우라도 절대 안전함을 보장해 줍니다.


                               성령의 인침과 보증의 약속


    성도의 견인이 구원의 영원한 안전과 지속적인 보장을 의미한다 함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과 예정에 근거함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는 시기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인간편의 행위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하나님편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롬8: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창세전 예정은 구원에로의 현재적 소명과 칭의로 연결돼 종말론적 영화의 단계까지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중도에서 취소되거나 포기될 수 없는 일관된 내용임을 파악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택자들을 세상 가운데서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원해서 그 최종적 완성인 영화의 단계까지 인도하실 것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6:39). 그렇습니다. 성도의 견인교리인 ‘한 번 구원의 영원성과 영속성’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속에 이미 처음부터 보장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자연히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의한 대속적 구속사역의 효력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무한한 것임을 증거합니다(히9:14). 다시 죄에 대해 제사드릴 여지가 없는 영(永)단번의 일회적이고 영구적인 속죄사역이었음을 피력합니다(히10:12-18). 때문에 이런 주님의 속죄사역의 실제적 적용대상인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는 동일하게 죄의 문제가 영원토록 도말 됐기에 다시 죄에 대해 추가적으로 드릴 대속적 희생제사의 필요성이 전무(全無)하게 됩니다(히10:18). 구원 이후 성도들의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범할 수 있는 죄의 문제는 상한 심령의 자백을 통해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아울러 밝히고 있습니다(요일1:8-9). 따라서 구원 이후에 성도들이 계속해서 지을 수 있는 범죄(갈5:16-21, 골3:5-10)는 구원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과 성격이 영단번으로 마감된 것이기에 말입니다. 다시 죄에 대해 추가적으로 드려야 되는 제사의 필요성이 영원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범죄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화목을 해치는 요소로 작용하는 바 지속적인 인격적 교통과 사귐을 위해 철저한 자백을 통한 용서를 구하는 일이 뒤따라야 될 줄 압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6-7).


 

    성도의 견인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완벽하게 적용시키시는 성령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해 다시 한번 보증됩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성령님을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 소개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인치시는 작업을 통해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공효를 구체적으로 적용시키셔서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십니다(엡1:13, 고후1:11).


    이런 과정을 통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자들인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면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요14:16-17, 고전3:16, 6:19). 이후 지속적으로 성도들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 까지 이르는 성화의 삶을 부단히 추구해 가는 일에 유기적으로 역사하십니다(갈5:16). 이때 죄를 책망하시며(요16:8) 주님의 뜻을 더욱 밝히 나타내 보이시는 사역을 담당하시는 것을 통해(요14:26, 16:13)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시는 사역을 충실히 수행하십니다(딤후3:16-17). 성도가 신앙의 중도에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믿음에서 떠날 수 없음이 이런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적극적인 구원사역으로 말미암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들을 다시 정죄 하거나 송사 할 수 없습니다. 사단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가당치 않습니다(롬8:33-39). 왜 그렇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이며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창조자이시고 주권자이시기에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성경은 엄히 증거합니다(요10: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성도의 구원은 절대 안전합니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보증하시고 보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결론


    성도의 견인(牽引)교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결론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 5대 교리의 내용인 ?인간의 전적타락,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예수님의 제한속죄, ?성령님의 유효적 부르심(불가항력적 은혜)의 결과로 …성도의 견인교리의 성립이 가능해 집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구원과 믿음의 영원성과 영속성을 보증하는 바 한 번 구원받은 성도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중도에서 결코 구원을 상실하거나 아주 믿음에서 떠날 개연성(蓋然性)은 전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그가 처음부터 성경이 말하는 정상적인 구원에 접촉된 것이 아니거나 일시적인 실족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성도의 구원은 그 성격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의한 신적기원에서 출발하고 있기에 인간 편에서나 다른 어떤 피조물에 의해 결코 영향을 받을 수도 받지도 않습니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인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혹자(或者)는 이를 두고 성도의 삶을 방종으로 유도하는 왜곡된 가르침이라고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반증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된 것을 가리킵니다(고후5:17).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갈2:20). 따라서 옛 사람적 육체의 소욕을 좇던 삶에서 새 사람적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삶에로 방향전환이 일어납니다. 천상의 본질적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지상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무익한 가치관을 점진적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라고 설명합니다. 천상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가치관을 부단히 추구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른 기독교적 신앙의 관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만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적 관점이 총체적인 방향에서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 지향적이며 현실적인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제아무리 신앙적 열심을 발휘한다 할지라도 그런 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바른 신앙관은 아닙니다. 그런 신앙의 정체성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적인 바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으로 판정됩니다(마7:21-23).


    성경적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자기부인을 통해서만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로 나갈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때문에 자아와 자존과 자만과 자긍의 요소들은 죄로 인해 타락한 본성과 밀접하게 연루되고 있는 것으로 인해 항상 사단의 유혹에 노출돼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마16:22-24).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궁극적 관심으로 삼는 것을 통해 신앙의 순수성과 진리성이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진리에 이르는 지식에 근거한 신앙이 아닐 때, 제아무리 기독교적인 모습과 모양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종교심을 부추기며 구름같이 몰려든다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거기에 참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온전한 성경적 순종은 발견되지 않습니다(롬10:2-3). 대신 인간의 부패한 종교심만 난무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적 무속신앙일 뿐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부추기는 이교도적 제사행위이며 가나안의 종교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그 내용과 성격의 특징상 신적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이에 신실히 접촉된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향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것에서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과 진리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코 방종과 이기적 욕심에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이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성도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 드립니다.(*)

 

  

    지금까지 칼빈의 5대교리를 여러분들과 함께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分辯)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이레이네...

 

 

출처: keeper77 | 조회 68 |추천 0 |2004.10.14. 14:46 http://cafe.daum.net/keeper77/AWW/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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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칼빈의 5대교리 네번째 / 불가항력 은혜(Irresistible Grace)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4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1.도입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전제하는 바 죄를 없이해 주시는 속죄교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아울러 선택이 다수 중에 일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택정하시는 주권적 사역으로 인해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또한 전 인류가 아닌 바로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제한적(制限的)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공효의 능력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것이지만 공효의 범위와 대상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해서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차별적이고 선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의 효력이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어떤 방식을 통해 미치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일컬어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항력적 은혜 또는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택자들을 구원에로 부르실 때 사람 편에서 의지적으로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성령의 사역은 훼방을 받아 목적이 좌절될 수도 있다는 교리에 대한 반동으로 나와진 내용이며 동시에 철저히 성경에 기초를 둔 교리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으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며 이 과정에서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떤 방식을 통해서도 결코 거부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항력적’이란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강제로 납치하거나 유괴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강요해서 인간의 뜻을 거스려 역사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불가항력적 은혜에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단어의 올바른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택자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게 하시면 그들의 영혼이 거듭나게 되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령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와 그리스도께서 대신해 죽어주신 모든 자들로 틀림없이 예수님을 구주와 하나님으로 믿게 하신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유효한 부르심으로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도리에 대해서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의 효력을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실제적 구원에로 부르시는 직접적이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신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구원은 실로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2.전개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이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효과적으로 불러내셔서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때 성령께서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십니다.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외적 부르심(outward calling)

 

    외적소명을 일명 외소(外召)라고 부릅니다. 이는 먼저 구원받은 성도들이나 전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의 복음이 불특정 다수나 개인을 향해 전해지는 것을 가리켜 부르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권고합니다(딤후4:2).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십니다(막16:15).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십니다(마28:19).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촉구하십니다(행1:8). 이는 전파하는 자가 없이는 복음을 들을 수 없으며 듣지 못하면 믿을 수도 없는(롬10:14) 구원의 기본도리에 근거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속죄사역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한결같은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누구도 이 직무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알지도 못하는 고로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통해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고전1:21).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통해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과정에서도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사용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열 두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눅9:1). 이들은 각 촌에 두루 다니며 처처(處處)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후에 따로 칠십인을 세우셔서 둘씩 앞서 보내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전파하라고 이르셨습니다(눅10:1). 이들은 각 동네를 찾아다니며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병든자를 고쳤습니다. 제자들의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는 항상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거절하는 자들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어느 동네를 무론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가리켜 외적 부르심(소명)이라고 일컫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방식은 변하지 않고 사용됩니다. 이 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과 방법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선교사를 통해 오지(奧地)의 땅에서 그리고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불모지에서 복음은 끊임없이 증거됩니다. 공개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아직은 허락되지 않은 지역에서조차 생명을 불사하고 전도자들의 활약은 중단 없이 진행됩니다. 주님 안에서 먼저 된 자로 복음의 빚진 자로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영적 충동이 우리를 자극해 지속적으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과 효과를 전파하게 됩니다. 이 일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이런 복음 증거를 신학적으로 외적 부르심이라고 일컫습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에는 다수의 청중을 향해 대중전도를 하는 경우와 그룹 내지는 개인을 향해 전파하는 개인전도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증거에서 외적 부르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13-14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울의 이차 전도 여행 시 빌립보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복음을 전파하는 광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 이곳 저곳을 배회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강가에 앉아 있는 일단의 여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접근해서 얘기를 나누던 중에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누가는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본절에서 우리가 주의해 봐야 할 부분이 자주장사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 바울의 복음을 ‘들었다’는 지적입니다. 이 말은 루디아라는 여자만 홀로 바울의 복음을 들었다는 지적이 아닙니다. 13절에서 보면 강가에는 얼마간의 여인들이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바울은 일행과 함께 기도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강가에 한 무리의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접근합니다. 기도처를 찾고 있었기에 기도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함이 일차적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내친 김에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내적 충동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이 공개적으로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바울의 입장과 상황으로 보건대 얼마든지 가능한 추리입니다. 아니 상황의 전개상 이들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도처의 위치를 묻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분위기로 전환된 사실을 문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과 그의 일행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이곳까지 온 것이기에 말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루디아라는 여인 뿐 아니라 그곳에 함께 모여 있었던 일단의 여자들이 동시에 들었다는 지적입니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저들이 들은 사실을 일컬어 외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앞서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을 것입니다. 개인 전도를 통해서, 교회 차원의 전도집회를 통해서, 또는 의도된 대중전도집회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런 사건들을 일컬어 한결같이 외적 부르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 부르심 그 자체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외적으로 전해지면 여기에는 크게 두 부류의 서로 다른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믿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반응이 그것입니다(막16:15-16, 눅9:4-5, 10:5-11). 때문에 외적 부르심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기계적으로 구원에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외적 부르심은 내적 부르심을 요구하는 바 내적 부르심을 통해서만이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내적 부르심에 접촉되지 못하면 결코 자의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내적 부르심에 접촉이 되면 자의적으로 구원을 기피하거나 거절할 수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을 위한 예정을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창세 전부터 이미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효과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유효한 부르심으로 작용하게 되는 법입니다.

 

내적 부르심(inward calling)

 

    내적 부르심을 내적 소명 또는 내소(內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외적 부르심에 대해 상대적인 개념으로 호칭되고 있습니다. 외적 부르심이 사람을 도구로 해서 주님의 복음을 불특정 다수나 소수 또는 개인에게 전하는 것이라면 내적 부르심이란 외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 중에 일부를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케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속죄와 구속사역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다수 중의 일부가 복음에 반응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들이 바로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으로 저들의 죄를 속량해 주신 자들을 가리킵니다. 한편 당신의 백성을 부르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일에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십니다.

 

    행16:14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본문은 세 가지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들었다’는 사실과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었다는 사건과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을 루디아가 듣게 된 사건이 곧 ‘외적 부르심’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미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를 소위 전도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먼저 복음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빚진 자들로서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전도)에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자들입니다(딤후4:2).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 부르심인 전도자의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한결같이 복음에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만이 반응합니다. 이들만이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습니다. 믿음으로 수납합니다. 여기서 루디아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청종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내적 부르심’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루디아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럿이었습니다. 문맥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루디아만이 여럿 중에서 유독 홀로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현실적으로 뭐가 특별한 면이 있어서일까요? 본문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된 성경적 믿음에서 나와진 신앙이란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성경적 믿음은 한 사람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거듭나는 것을 통해서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루디아의 하나님을 향한 공경은 그녀가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과 그에 따른 일반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는 접촉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특히 누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란 표현을 유대교에 접촉된 경건한 이방인들을 향해 사용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행10:1-2).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청종할 수 있게 된 것은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녀가 이미 하나님의 택자로 존재해 나오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6:65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따라서 그녀의 하나님 공경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선행적으로 그녀에게 작용해 오다가 때가 차매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듣게 하시고 이런 사건을 계기로 그녀를 구원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이 간섭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先) 선택의 역사가 선행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특정인에게 선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와 성령님의 내적 조명을 통한 구원에로의 부르심은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일관성을 띤 채 동일한 사람에게 유효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본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수 중에 일부를 부르셔서 구원에 접촉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일컬어 내적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다수 중 일부가 반응하게 되는 경위를 다른 말로 유효적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택자들을 향한 유효한 부르심

 

    우리는 여기서 내적(유효적) 부르심의 범위와 대상에 대한 성경의 증언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내적 부르심의 주체는 성령님이란 사실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행16:14에서는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청종하게 하신 당사자가 주님이심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영으로서의 성령님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롬8:9). 에베소서 기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계획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사역적 측면에서 구원사역을 분담하고 계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엡1:4-14). 이때 성령님의 사역은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서의 인치심의 역할을 담당하십니다.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적 구속사역을 유효하게 적용시킴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기업의 후사로 삼으시는 역사를 수행하고 계심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엡1:13-14, 고후1:22). 그렇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의 주체가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제한적이지만 유효적으로 적용시키는 작업을 수행하십니다.

 

    여기서 유효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성령님으로 하여금 구원에로 부르실 때 분명하고 확실하게 성령의 내적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는 것을 통해 창세전에 선택한 자들을 남김 없이 불러모으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내적 부르심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때에 택자들의 응답은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신적 감동과 감화의 역사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영혼에게 그의 인격을 통해 유기적으로 역사하심으로 외부적 절대 타자에 의해 섭리적으로 간섭되고 있음을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고 당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절대로 타의에 의해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요구를 받고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의 실제적 배경이 이렇습니다.

 

    요6:37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본 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예정자들을 가리킵니다(엡1:4, 요15:16). 그런데 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구원은 절대 안전이 보장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그 장중에 붙들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계1:18). 만유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요10:28-29). 요10:4과 27절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보면 목자는 자기의 양을 알고 양은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부르면 따라오게 돼 있음을 우리에 들지 않은 일단의 다른 양들(26절)과의 비교를 통해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아 죄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눅19:10, 마1:21)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 가운데 구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복음의 말씀으로 당신의 양무리를 부르십니다. 찾으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말입니다. 이때 주님의 양들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 알고 기꺼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때문에 이때의 부르심은 강요에 의한 억지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본능적으로 알아서 기쁨으로 찾아가듯이 그렇게 동일한 원리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복음에 반응하는 택자들의 모습이 이렇다는 얘깁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일컬어 신학적으로 유효적 부르심 또는 불가향력적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 주님의 생명에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한 몸 곧 보편의 우주적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고전12:12-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종말론적 가정공동체 말입니다(엡2:14-16, 19). 이 보편의 교회가 지상에 가시적으로 그 자태를 드러낸 것이 지역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지역교회는 늘 천상의 보편의 교회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가는 일에서 교회적 존재이유와 본질적 가치를 부단히 창출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존재양식으로서 말입니다. 이를 현실적으로 가능케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말씀에 대한 풍성한 이해와 이에 따른 순종력의 발휘입니다. 지식을 좇아 행하는 신앙적 삶 말입니다(롬10:2-3).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적 권세가 충만히 발휘될 뿐 아니라 그 통치를 원활하게 받고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현존성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형편은 교회의 천상적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서 너무나도 동떨어지고 부족할 뿐임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교회가 무엇인지 조차 성경적으로 바르게 해명해 내지 못함으로 해서 말씀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임의대로 적용시키는 나머지 인간의 종교심만을 한껏 부추기는 가운데 급기야 우상숭배의 이교도적 집단으로 변질돼 가고 있는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르짖기는 하는데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신의 일신상의 일락(逸樂)과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성격을 성경은 우상숭배 내지는 자의적 숭배신앙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골2:23, 3:5).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앙을 혐오하실 뿐 아니라 결코 방관치 않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만홀(漫忽)이 여기는 처사이며 동시에 망령된 행실이 되기 때문입니다(출20:3-7).

 

    이와 관련해서 계시록의 일 곱 교회를 통해 주께서 책망하시고 권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교회적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봐야 할 줄 압니다(계2-3장). 그렇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지고 심지어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교회와 사단의 교회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타락하고 변질된 교회로 전락될 수 있다는 경고에 귀기울여야 될 줄 압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는 오늘도 여전히 현존하는 모든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준엄하신 경고와 경계의 말씀입니다.

 

 

3.결론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는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지각과 감정과 능력을 근원적으로 상실했기에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기회란 전무한 것이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무능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에 호소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공효는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만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와 필연을 유발하게 됩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의 교리는 이상의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성령하나님의 신비스런 사역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들은 다수 중 얼마를 복음에 반응케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총을 선물의 의미로 수납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런 대가(代價)없이 말입니다. 이때 이 사역을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담당하시는 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택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의 복음의 내용을 저항 없이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지적입니다(행13:48). 이런 사실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택자들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현실적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 신앙이 관념이 아닌 실질인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성령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가 이런 신비한 구원사역을 현실로 절감하게 만듭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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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5대교리 세번째 /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3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i Christo, Soli Deo Gloria"

God, "and God alone", is man's highest good!

 

1.도입

 

  우리는 지난 두 번의 강의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부패와 무능은 자력구원의 길이 근원적으로 차단돼 버린 나머지 외부적 절대타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하나님편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허물과 죄로 철저히 죽어버린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에 올라 하나님과 깨진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키고 화목과 교통과 교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재창조의 유일한 방식임을 도출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는 구원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바 창세 전 선택이란 창세 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지적 표명이며 동시에 구원을 위한 사전표식이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의 사전단계일 뿐 아니라 그 성격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발휘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속죄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대신해서 갚아주신다는 속량(贖良)내지는 대속(代贖) 또는 구속(救贖)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특정인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속죄교리를 제시하면서 특별히 제한속죄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모두 중 일부에게 만 적용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속죄교리는 누구를 위해 속죄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셨느냐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보편적 속죄교리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인간편에서 원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면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이 증거될 때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 바 한 부류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가 하면 다른 한편은 복음을 거부함으로 정죄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막16:15-16). 이런 결과를 볼 때 비록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은 그 분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범위는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소위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한속죄의 실상입니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해서 언제나 제한속죄 교리를 성경의 바른 증언으로 신앙고백을 해 왔습니다.

 

2.전개

 

    제한속죄 교리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속죄교리의 반동으로 나왔으나 그 근거는 철저히 성경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아울러 제한속죄 교리는 앞에서 언급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내용의 전개상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제한속죄는 차별적으로 일부에게만 베푸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연장선상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할 줄 압니다. 이제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봅니다.

 

속죄의 필요성

 

    하나님의 선택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 중 일부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을 좇아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가운데 죄 없다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의로운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칭의적 구원의 예비적 조치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전 선택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속죄의 범주에서도 제외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죄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해서 시행되는 연속적인 구원사역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속죄(贖罪)가 필요한 것일까요. 속죄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금품이나 공로로 지은 죄를 씻음 받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본주의적 접근방식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적 구원사역을 일컫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자력으로는 어떤 선행과 공로의 대가로도 죄의 문제를 탕감 받을 수 없기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의의기준과 가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3:10).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베푸시는 속죄사역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구체적 시행에 있어서 그 정당한 실효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선택이 미래적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전표식인 바 구원은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함과 동시에(무죄선언)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의인됨(칭의)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문제해결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상호 관련 속에서 선택은 필연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즉 죄의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은 실제적 적용에 있어서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택교리 후에 바로 속죄교리가 뒤따르는 당위성이 이런 이유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속죄사역을 통해서만이 최종적으로 실현된다는 얘깁니다.

 

속죄의 성격과 방식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통해 속죄의 성격이 요구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로서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무(全無)함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이는 어떤 형태의 인위적 방식으로도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절대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인간의 선택이 가능했듯이 동일한 원리로 절대적 선과 의의 소유자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인간의 속죄를 실현시키기 위한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신학적으로 ‘대속적(代贖的) 속죄’라고 일컫습니다. 말 그대로 절대적 타자가 대신 죄의 값을 지불해 주는 것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속죄는 비로소 실현 가능성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절대타자에 의한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전적타락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영적 파산자입니다. 영원히 죄인으로 정죄 될 뿐입니다.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자력구원은 요원합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인간의 죄를 사면하시는 방식은 죄인이 아닌 절대적 타자에 의한 대속의 원리가 요구됩니다. 죄와 불의와 허물이 전혀 없는 절대 타자(他者) 말입니다. 여기서 속죄의 성격 또한 대속적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대두됩니다.

 

    이제 인간의 속죄는 절대타자가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바치는 것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게 됩니다. 죄 값은 사망 곧 죽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6:23). 구약의 율법의 제사제도하에서 요구되어진 일체의 희생제사 행위는 바로 이런 속죄사건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의 일환입니다(레1-7장, 히9:13). 이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9:22, 레17:11)는 하나님의 속죄의 원리에서 나와진 실천적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약제사의 실체(히9:14)로서 절대타자의 필요충분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절대타자이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대속물로 표현합니다(막10:15).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한 마리 희생양으로 오신 분(요1:29)임을 언급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이 바로 절대타자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야 말로 절대 선과 의로우신 분으로서 곧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빌2:5).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말입니다(요1:14, 18). 그러기에 비록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육화(肉化)하셨지만 그 분의 본체는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시고(히4:15), 죄를 모르시며(고후5:21), 죄를 짓지도 않으신 분(벧전2:22)으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신(神)-인(人)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하심으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요,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또한 알고 믿게 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요14:9).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분의 출생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눅1:26-35). 곧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비밀의 경륜 속에서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출생과 전 생애가 앞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하신 바 구속의 도리를 세상 가운데 펼치시고 이루시는 일에 집중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요17:4).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으며,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죄를 친히 사해주시는 것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왕적 권세를 발휘하고 계심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막2:1-12).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속죄사역은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대속적 사역의 절정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건에 근거해서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성경은 감히 선포합니다(롬8:1). 다시 말해 그 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으며 그 분의 다시 살아나심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우리 또한 의롭다고 칭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롬4:2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으심이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적 죽음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나아가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롬3:24) 그 결과로 주님을 왕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성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을 믿음으로 거듭나셨는지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으셨는지요. 구원 받으셨는지요. 그래서 지금은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분명한 목적과 가치관의 전환 속에서 살아가시는지요. 물론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 없다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우리의 연약과 한계를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때마다 상한 심령으로 자백하는 일과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멀어지는 일에 진보가 있어야 함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1:8-10).    

 

속죄의 효력과 적용의 범위

 

    이제 우리는 본 교리의 핵심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적 속죄사역을 베푸셨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속죄사역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 대속적으로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내어주셨단 말인가? 이 주제에 대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보편속죄를 주장합니다. 이는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자신이 믿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견지해 오는 칼빈주의 자들은 제한속죄를 성경적 바른 교리로 수납해 왔습니다. 이는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결국은 창세 전 택자들에게만 유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제 2 강에서 이미 살펴 본대로 당신의 기뻐하시는 절대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전체 중 일부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죄의 효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속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공효는 염소나 송아지의 희생과 같은 저급한 피조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들은 그 가치면에서 그처럼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효력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매년 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을 통해서만 한시적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속적이지는 못합니다.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이를 실체를 향한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물로서의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이렇게 해명합니다. 히9:13-14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신 바 그 가치의 우월성과 속성상 영원성으로 인해 단번에 드리신 바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린 셈이라고 설명합니다(히10:12-14).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이제는 추가적으로나 반복적으로 더 이상의 죄를 위한 다른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이런 사실은 다른 한편 ‘영 단번’으로 드려진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이 전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전담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공효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예수님의 무한하신 가치는 온 인류의 죄를 넉넉히 담당하시기에 족하고도 남습니다. “다 이루셨다”(요19:30)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드리셨다는 승리의 일성(一聲)입니다. 비록 죽으시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림으로서 후에 받으실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신 계시적 발언인 것입니다(히12:2).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안에서 죄인 된 인류는 당당히 구원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롭고 산’ (히10:20) 생명의 길이 열려진 셈입니다. 온 인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도말 되기에 족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졌습니다(시103:12). 속죄의 공효적 능력의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속죄의 적용과 범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위한 속죄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를 위해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담당해야만 하셨느냐의 관한 내용 말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결코 전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속죄의 공효는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원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적 능력이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적용의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 들어온 자들을 위해서만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은 유효하게 미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란 말인가요. 바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들입니다. ‘남은자’(사10:20-22, 롬11:4-5)들 말입니다. 성경은 이사실을 다양한 표현과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마1:21입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천사의 고지(告知)를 인용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하니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의 특성상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나시기 전에 이미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역적 측면을 확인하게 되는 데, 이는 다름 아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일’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구약제사의 제물인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모든 인류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만을 담당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실 것임을 지적합니다. 자기 백성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온 인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백성 곧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조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예수님께만 속한 당신의 특별한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죄사역을 위해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저들의 대속물로 오셨다는 사실의 증언입니다.

 

    눅19:10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해서 그 분의 성육신 사건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에로 부르신 후에 직접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구일까요. 온 세상 만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만민 중에 일부를 가리킵니다. 요6:37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니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제한적 의미로 당신의 백성 곧 세상 가운데 잃어버린 특별한 백성이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 앞으로 나온다는 지적입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가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습니다(요10:1-6). 모두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만이 나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단의 양무리가 따로 있다는 얘깁니다. 요5:40을 보십시오. 분명히 주님께 오기를 원치 않는 일단의 무리 또한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주님의 양무리가 아닌 연고입니다.

 

    막16:15-16에서 마가는 복음증거와 이에 따른 결과를 얘기하면서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음을 동일하게 지적합니다. 동시에 한 자리에서 같은 복음의 내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제한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실질을 봅니다. 이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공효가 그들 중 일부에게만 선별적으로 역사하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제 4 강의를 통해 재차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주신 자들만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원에로 이끄십니다(요6:39). 여기서 구원에로 이끄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사역이 결국 잃어버린 자들만을 위해 제한적으로 적용될 것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속죄사역의 효력은 무한하기에 온 인류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속죄사역의 범위와 대상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주님께 주신 바 된 하나님의 택자(擇者)들 곧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이고 양보적으로 적용될 것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13:18입니다. 본 절에서 누가는 이방인들 중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고 있는 사실을 바울의 전도내용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기쁘신 뜻에 의해 미리 선택된 자들입니다. 선택과 구원은 약속과 성취의 구조와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 선(先) 약속이 전제되지 않으면 후(後) 성취의 내용이 있을 수 없듯이, 선(先) 선택이 있기에 후(後) 구원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행18:10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핍박으로 심히 두려워했으나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을 위로하시면서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말로 고린도 전도에 열심을 낼 것을 촉구하시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도 ‘내 백성’ 곧 주님의 백성이 따로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련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적용의 측면에서 결과론적으로 접근할 때 결국은 일부의 택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한 제한적 죽음이란 신학적 명제를 유발시킵니다. 따라서 제한속죄란 성경의 여러 말씀을 종합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규명해 본 결과에서 얻어진 당연한 귀결입니다. 단지 견해와 입장이 다른 반대편의 무리를 거부하고 성토하기 위해 취해진 억지발언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일부 성경 구절을 통해 ‘모든 사람(고후5:14-15)’ 이나 ‘세상(요3:16)’을 위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으며 또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신 것으로 기록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본(本) 절에만 제한시켜서 지엽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얼마든지 보편속죄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본문을 해석할 때 잊지 말아야 될 명제는 언제나 주어진 본문을 문맥과, 한 장 전체와, 나아가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 곧 구속사적 경륜에 입각해서 접근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전체를 통해 부분을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 말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나름대로 코끼리의 모양이 넓은 벽 같다느니, 굵은 통나무 같다느니, 아니면 큰 부채와도 같다는 식의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경우가 될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코끼리의 다리가 마치 통나무 같이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마치 통나무 같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석한다면 틀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죽으신 대속적 죽음이며 세상을 위한 죽음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다른 본문을 통해 그리고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관점을 통해 총체적 시각으로 접근해서 본문이 말하는 의미를 명확히 해명해 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보다 확실한 내용을 통해 불확실한 부분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3.결론

 

    우리는 제 2 강을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일부의 특정한 사람들에만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제한적이고 차별적이라면 저들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사역 또한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음이 당연한 논리의 귀결입니다. 더욱이 보다 많은 성경의 본문이 이를 실제로 뒷받침 해주고 있음을 위에서 확인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는 능력면에서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분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말입니다(히9:14). 그러나 적용의 대상과 범위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결코 온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음이 성경의 솔직한 증언인 사실을 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기 위해 속죄 양으로 오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공효가 미치는 대상을 볼진대 당신의 잃어버린 백성들 곧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그 분께 주신 택자들에게만 선별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결코 성경은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증거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 매여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임을 확실히 증거합니다(마25:41).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이 무론대소하고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최종적으로 유황 불못에 처해지는 광경을 봅니다(계20:11-15). 이들은 결국 유기된 자들 곧 버려진 자들입니다. 주님의 속죄사역이 공효가 이들에게 미치지 않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죄 값으로 심판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영벌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주님의 속죄의 공효는 제한적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만을 선별해서 유효하게 적용시키십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만민 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를 덧입은 자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몸이 아님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생명으로 변환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새사람(엡2:15), 하나님의 권속(엡2:19), 천국시민(빌3:20)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주님의 생명에 함께 지체로 연합돼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어느 칭함보다도 영광스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피로 친히 값을 지불하고 사신 바 된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와 방불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유기체란 말입니다. 몸입니다. 공동체입니다. 이 몸으로서의 교회공동체의 개념을 잃으면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됩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성도의 구원을 보증해 주는 유일한 천상의 기관입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보증의 권한의 열쇠를 오직 교회에게만 맡기셨습니다. 소위 천국열쇠 말입니다(마16:19). 따라서 복음적 삶을 살아감이 교회를 세워나가는 첩경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며 운반하는 삶의 실질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경주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주님은 바로 세상 속에 남은자들을 위해서만 당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4-1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통해서만 성도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의 정당한 발휘로 정의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품성으로 닮아 가는 삶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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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5대교리 두번째 /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2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1.도입

 

  절대적 타자(他者)로서의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 방식은 죄로 인해 전적타락과 부패와 무능에 빠진 인간을 가장 자연스럽게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며 자비며 긍휼의 일환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인간의 영적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하여 자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 곧 영적 사망으로 인한 일체의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단절된 파산자(破産者)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외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무능한 범죄자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외부적 절대 타자(他者)에 의한 구원에로의 선택교리를 요청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요구이며 증언이지 상황전개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나와진 즉흥적(卽興的) 요구만은 아닙니다.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에 의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소위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에 대한 반증으로 나온 성경적 대응이며 해명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능력이 범죄로 인해 완전히 타락했거나 부패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인간 스스로의 자의적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의 허구성(虛構性)은 이미 지난번 전적타락 교리에 의한 성경의 자체 증언을 통해 충분히 밝힌바 있습니다. 결코 성경은 인간 스스로의 자력 구원의 가능성을 추호라도 용납하지 않음을 살펴봤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용인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그 신적 기원에 따른 본질적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복음주의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절대성과 충족성을 이렇게 변호합니다.“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3:21). 그렇습니다. 인간의 구원사역에 사람편의 의지적 행위는 절대불가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율법을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란 전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오히려 생각하고 행하는 것마다 불의함과 죄악뿐임을 증거합니다(창6:5, 사64:6, 렘17:9). 인간의 본성이 죄로 오염되고 부패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타자(他者)로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관련해서 흔히 사용되는 몇 몇 용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할 줄 압니다.
  
   먼저 작정(作定)이라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물의 조성과 만사의 진행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총괄적 계획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할 때 이는 창세 전에 미리 작정하신 계획대로 피조세계 속에서 만물과 만사를 그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보존, 관리, 통치하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고 증언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해서 나온 변증(辨證)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물과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경영된다고 할 때 세상에 우연의 산물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배후에 존재하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계시적 사실의 터 위에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섭리 의존적 신앙의 교리적 정립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작정이란 전 우주적 역사를 그 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해 가시는 포괄적(包括的)인 계획을 가리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다음으로 예정(豫定)이란 용어를 들 수 있습니다. 예정은 작정의 일부입니다. 작정이 우주만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보편적(普遍的)인 사전계획이라면 예정은 우주만물 중 특별히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과 결부된 교리에 특별히 국한시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작정이 내용상 포괄적이고 광의적이며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예정은 지엽적이고 협의적이며 특별한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은 구원과 관련된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을 얘기할 때 주로 사용되기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타락한 사람들 중에서 얼마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선택해서 구원해 주실 것을 창세 전에 미리 정(定)한 사실을 가리켜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예정 속에는 선택교리와 함께 자연히 유기(遺棄)교리까지도 포함되게 됩니다. 다수 중에 일부가 선택됐다면 나머지는 자연히 버려진 바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공평할 수 없음은 인간은 본성상 죄값으로 심판에 처해 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진 자들로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전적타락과 부패).

 

   그러나 내용이 담고 있는 범위와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정은 보다 큰 범위의 작정 안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로 인해 때로는 예정을 작정으로 대체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작정의 의미는 항상 예정의 내용과 성격인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정과 관련해서 고전적(古典的) 성경 본문인 엡1:4-5입니다. 여기서 선택과 예정은 분명히 사람의 구원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돼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행13;48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누가는 이를 설명하면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작정이란 다름 아닌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정과 작정을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리키는 바 구원의 의미나 성격이 달라지거나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2.전개

 

   무조건적 선택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시된 성경적 교리입니다. 저들은 인간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자의적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자정(自淨)능력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남은 의지적 선택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성에 의해 이를 미래지향적으로 내다보시고(예지) 구원에로 선택하셨다(예정)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도르트 회의에 의해 그 부당성이 이미 지적되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경의 증언에 근거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로 이미 무효화된 구시대적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범죄는 인간을 전인적(지정의)으로 부패케 만듦으로 하나님을 향한 지정의의 기능을 근원적으로 상실한 나머지 자력(自力)으로는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도, 더듬어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가 됐다고 선고합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인간의 구원의 기회란 전적으로 외부적 절대 타자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하게 돼 버린 셈입니다.   

 

예지-예정론의 허구성

 

   오늘날 예지-예정론에 근거한 선택교리는 비단 알미니안적 사고방식에 동조하는 교단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일부 장로교 교단에서조차 이를 수용해서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지-예정론이란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성경적 논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에 반응하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당신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창세 전에 예지(豫知)하시고 이에 근거해 그 사람을 구원에로 예정(豫定)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서기2000년 8월25일에 어느 한 사람이 서울의 모교회의 전도집회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을 발휘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창세 전에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내다보시고(예지) 그를 선택해 구원하시기로 예정했기에 그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됐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이런 교리적 논리 하에서는 구원의 주체가 복음을 자의지적으로 받아들인 그 사람 곧 인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복음을 자원해서 의지적으로 받아들였기에 조건적으로 그를 구원하셨다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란 주장입니다.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만한 선한 능력이 남아 있기에 얼마든지 그 남은 선(善)을 발동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력으로 취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한편 이런 조건적 선택교리 곧 예지-예정론을 수용하는 측에서는 이 교리를 정당화시키는 증거본문으로 대부분 롬8:29을 제시합니다. 29절 한 절만을 보면 틀림없이 ‘미리 아신(예지)자’와 ‘미리 정하셨다’(예정)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순서는 예지-예정의 단계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롬8장 전체를 문맥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주관에 빠진 자의적(自意的) 해석이며 따라서 허구(虛構)인지를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롬8:1-2에서는 성도들의 죄로부터의 해방이, 곧 성도의 구원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한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았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더욱 3절에서는 육신이 죄성으로 인해 연약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들을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통해 이제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얼마든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음을 변증합니다. 나아가 7절에서는 옛 사람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굴복할 수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기에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아울러 고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과 이 사실에 대한 확증은 오직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과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할 뿐입니다(16절).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옛사람의 타락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자의지적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일말의 자각(自覺)도 불가능합니다(26절).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판정 받았기에 말입니다(엡2:1).

 

   이렇게 롬8장 자체 문맥만을 검토하더라도 29절의 예지란 인간의 자력(自力)적 선택을 미리 보아 알고 계시다는 의미의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라(예지-예정),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역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구원시킬 자를 예정하셨기에 그들이 누구이며 또한 누가 복음을 수용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계신다(예지)라는 사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예정-예지). 이 뿐만이 아닙니다. 관련 주제를 다룬 다른 본문에서는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증거합니다. 요15: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본(本)절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제자를 선택한 주체가 제자들 스스로가 아닌 주님 자신임을 분명히 천명(闡明)합니다. 앞에서 잠깐 살펴봤던 행13:48에서도 주님을 믿는 주체가 사람이기 이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자들’로 제한돼 있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함’임을 분명히 보아 알 수 있습니다. 행16:14을 보십시오. 여기서도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됐을 때 그녀가 복음을 청종하게 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그러나 이때도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주체가 루디아의 자의적 선택이 아닌 주님으로 분명히 소개됩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님께서 루디아의 전적으로 타락하여 죽어버린 바 된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그녀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셨다는 지적입니다. 요3:3입니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상의 일련의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거나 믿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설령 성경 어느 한 구절의 내용 속에서 선택과 믿음의 주체가 사람으로 설명된다 할지라도 앞 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접근하면 결코 사람에 의해 임의대로 선택과 구원이 좌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1:12에서는 주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의 특권이 인간의 자의적 선택과 신앙적 고백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 같이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이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자녀 된 근본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과 고백의 대가와 보상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창세 전 선(先)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음임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의지로 말미암았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발견되는 구원교리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선택적 구원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미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영적 사망자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자로 선고됐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이로 인한 원죄의 생득적 전가로 말입니다(롬3:23, 5:12). 따라서 인간의 자력으로는 어떤 방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택적 구원을 임의(任意)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이러 이유로 해서 인간에 의한 하나님의 조건적 선택과 관련해 예지-예정론의 논리적 허구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

 

   그렇다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이미 전(前) 강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실존의 비참함을 살펴봤습니다. 영적 사망자와 파산자로서 인간의 전인격적 기관은 하나님을 향해 이미 그 총체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인 사실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됐습니다(마8:21-22).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구원이란 자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뿐입니다.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외부인이라 할지라도 같은 인간의 수준에서는 또한 불가합니다. 그도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아야 할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절대 외부적 타자(他者)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됩니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당사자는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만이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사1:18, 44:22, 시103:12, 행4:12).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에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곧 창조주와 절대자로서의 그 분의 절대 주권 안에서 말입니다.

 

   롬9:10-13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본문에서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들 두 아들이 쌍둥이로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이들의 나중 형편을 선택적으로 예정하셨습니다. ‘큰 자(에서)가 작은 자(야곱)를 섬길 것’을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했을 때부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공평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사전결정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요. 본문은 이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에서 찾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창조자적 절대 주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좀 더 원색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 마음대로’란 의미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런 사실에 대한 독자들의 반발과 이의(異意)제기를 예감하고 얘기를 계속 전개시킵니다. 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변론합니다. 창조자로서의 절대 주권과 권능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할 말을 잊게 될 뿐이며 그 분의 행하시는 처사는 어느 것 하나도 불의함과 불공평함이 있을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상 말입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저자는 노파심(老婆心)을 발동시킨 나머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기장이와 한 덩어리의 진흙의 비유를 들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을 시도합니다(롬9:20-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임의대로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도 창조자의 권능과 주권으로 택자를 임의선택 할 수 있다는 논리적 변증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본질적으로 타락한 죄인인 이상 구원을 위해 선택해 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항의할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찌했든지 아담 안에서 범죄한 불의한 죄인들로 이미 정죄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롬1:29-31)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定)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32). 지금 저자는 본문들을 통해 철저히 부패하여 타락한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 중에 일부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을 좇아서 구원에로 선택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 크신 일을 이루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 속에 우리의 구원이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지도 않았을 때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성경적 은혜의 실질과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이 호리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개입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退色)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의 은혜에 인간의 역할과 기능은 전무할 뿐입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무상으로 베푸실 수 있는 전폭적인 사랑의 호의이기에 말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에 근거하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행하시는 예정에 의한 것임을 에베소 기자는 선포합니다(엡1:5). 여기서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창조자적 주권을 가리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 ‘오게 하시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요6:37, 39, 44, 65). 이는 결국 같은 의미의 다른 설명일 뿐입니다. 내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시종일관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합니다. 그렇다면 왜 다수 중에 일부를 주권적으로 임의(任意) 선택했느냐 하는 문제 말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근거해서 선택적 구원동기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사를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해 가실 때 필요한 자들을 선택적으로 부르셔서 계시의 도구로 선용(善用)하십니다. 이 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원하심을 따라 되는 창조자적 주권에 따라서 소명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 오직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성취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롬9:11). 그렇다고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황에 따른 임시조처라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필요에 따라 임시변통(臨時變通)적으로 선택하는 즉흥적 발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필요에 따른 임기응변(臨機應變)식의 임의적 결정같이 보일지라도 창세 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先) 주권적 선택에 따른 후(後) 성취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절대자적 주권이 한낱 창조자의 횡포와 전횡(專橫)으로 오해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시고 무분별하고 소견에 좋을 대로 사사로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민23:19). 창세 전에 세우신 작정과 계획에 근거해서 만물과 만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일점 일획의 착오와 차질 없이 세상역사 속에서 섭리적으로 경영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을 신앙과 생명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음이 이런 계시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렇다면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빛도 이름도 없는 우리인가요. 왜 막강한 열국 중에 작고 미약하며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세상가운데서 택자(擇者)를 부르시는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의 동기를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發露)라고 말씀하십니다. 신7:7-8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본문에서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각별한 선택의 배경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로 열국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도구로 사용하시는 데는 이스라엘의 외부적인 열악한 여건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배려’가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둘째로 이 사랑의 선택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의 열조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한 성취를 위해 애굽으로부터 구출해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과 공과가 인정되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선택과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열국에 비해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사랑이 동기가 돼서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의 하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요3:16과 엡1:4과 2:8, 롬5:8과 요일4:10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택과 속죄와 구원의 동기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하사(下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의 결과임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속량하시기 위해 대속적 죽음을 자원해서 담당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죄악 중에 구원해 주셨을까요. 성경은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선포합니다(고전1:29, 엡2:9, 1:6, 눅17:10).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성경은 성도의 신앙적 본분을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을 즐거워하는 삶이라고 강력히 피력(披瀝)합니다(전12:13, 고전10:31, 롬14:8, 엡5:10). 그렇다면 이런 삶의 구체적 내용과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롬12:2을 통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가치관을 수립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모든 지상적 삶의 성격과 방향성을 집중시켜 나가라는 엄숙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왜 삽니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결국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요.

 

   우리는 본 강의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성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 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근거해서 택자들에게만 베풀어주시는 선택적 은혜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차별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 와 택자들의 행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인간의 행위가 철저히 배제된 선택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해서 세 번째로 살펴 볼 문제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근거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혀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미치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미 전(前) 강의(전적타락)에서 지적한대로 인간의 영적 상태가 스스로 선을 행하거나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영적 기능과 능력을 본질적으로 상실했기에 독자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신앙적 반응을 전혀 보일 수 없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앙자는 비록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나 방불함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마8:22).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통해 찾아지는 바(전12:13) 피조자로서 창조자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생명의 원리로 삼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과는 무관한자로서 곧 영적 사망자란 지적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의 구원은 외부의 절대적 타자(他者)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사실상 이런 영적 사망자(불신자)에 의해 시도되는 어떤 행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죄인 됨의 전제하에서는 결코 선(善)과 의(義)로 평가될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는 일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역설적으로 선포합니다(롬1:28-32).

 

   인간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상대적(相對的) 선은 하나님의 절대적(絶對的) 선의 요구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에 상대적으로 극한 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한낱 더러운 누더기 옷과 다를 바 없음이 성경이 보는 해석적 관점입니다(사64:6). 그러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성경은 전 인류를 향해 감히 선포하는 것입니다(롬3:11-12). 왜 그렇습니까. 오직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느 사람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죄인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만 인간의 죄는 사면될 수 있습니다(행4:12).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원수 된 죄(원죄, 자범죄, 불신죄 등) 문제를 깨끗이 탕감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성격은 자연히 인간의 행위를 철저히 배제시킨 하나님의 독자적인 주권과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를 통해서 베푸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하나님의 선택에 일조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는 그 본연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적 진노만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롬9:11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한 구약의 사건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두 자녀인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에 따라서 야곱을 택하여 아비 이삭의 뒤를 이을 언약의 계승자로 택정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난 이후의 에서나 야곱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만한 특별한 사건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에서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나 지극히 육신적이었으며 무책임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소극적이지만 이기적이었으며 교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졌다면 야곱은 형 에서에 비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상대적으로 독차지 할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선악의 행위와 무관하게 그가 태어나기도 전 아직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그를 에서보다 사랑하여 언약의 당사자로 선택하신 사실을 성경은 소상하게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사역에 인간의 행위는 전혀 무용지물입니다. 무관합니다. 적극적으로 배제됩니다. 만일에 호리만큼이라도 인간의 행위와 공적이 참작(參酌)된다면 이는 인간의 전적타락교리를 성경스스로가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은 자연히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의 성격이 오직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택이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에 기준으로 작용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 과연 몇이나 될는지요.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일는지요. 하나님의 선택적 구속이 우리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덮어 주셨습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행2:11).

 

3.결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최선의  방편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은혜 됨의 비밀이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강퍅(剛愎)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하십니다(롬9:18, 11:32). 만일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이 되었다면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택정 함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무상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와 그 분의 선하신 뜻을 감당하는 일에 남은 생애를 불사르게 만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선택을 입은 자의 생애를 계속해서 섭리적으로 간섭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일에 선용하신다는 사실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잡고 살아가게 하는 바 섭리 의존적 신앙관을 확립시킵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신앙관을 촉발시킵니다. 이런 신앙관의 확립은 흑암의 세력이 주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늘 승리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성도의 진정한 기쁨이 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천하 만민 중에 천지의 창조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행복한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이 늘 풍성히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베푸신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 개개인을 사랑하십니다.

 

출처: keeper77 | 조회 59 |추천 0 |2004.10.09. 16:08 http://cafe.daum.net/keeper77/AWW/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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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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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칼빈의 5대교리 첫번째 /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1 강

칼빈주의의 5대 교리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1.도입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곧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 그리고 보수신학을 칼빈주의의 신학적인 체계와 결부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장로교(개혁주의)신학과 신앙을 바르게 보수(保守)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고 하겠습니다.

 

칼빈주의란?  
                                 
  
그렇다면 칼빈주의란 무엇인가요? 칼빈주의를 곡해하는 사람들은 칼빈 개인의 신학사상이라고 이해할는지 모르지만 죤 칼빈(John Calvin)은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의 전승과 신앙고백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신학사상을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로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그는 비록 칼빈주의 신학사상 체계에서 취급된 모든 사상들을 손수 만들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진리를 가장 바르게 깨달은 사람 중 하나였으며 교의(敎義)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바울, 어거스틴등)의 사상을 후대에 가장 바르게 체계를 세워 전달한 사람입니다.

 

  물론 역사적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신앙이 칼빈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칼빈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개혁자들(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등)에 의해 전통적인 신학이 산발적으로 제시됐는데 칼빈이 이를 종합적이고 보다 체계적으로 수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란 칼빈이 처음으로 종합적인 신학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것이지 칼빈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이론을 뉴톤이 처음 발견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뉴톤의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본래는 창조 때부터 존재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시작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 의해 신학적 기초가 수립됐으며,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이 되었고, 칼빈에 의해 종합적으로 체계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칼빈을 추종하는 신학자들(벤자민 워필드, 챨스 핫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등)에 의해 꽃이 피었으며, 현재 역사적 개혁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보수 신학자들에 의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인간의 사색된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성경적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 곧 성경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사상 체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란 성경에서 시작하여 칼빈이 체계를 세운 것을 후에 신학자들이 집을 지은 것으로 우리는 칼빈주의가 성경을 기초로 한 전통신학이요 보수신학의 기초라고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칼빈주의 신학의 기본원리는 ?하나님 중심사상(God Centered) 성경중심사상(Scripture Centered)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God's Absolute Sovereignty)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기원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형성하게 된 것은 1610년 화란신학교 교수였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가 죽은 뒤, 소위 알미니우스주의자들(Arminians)이라고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그의 가르침을 기초로 다섯까지 주요 요점으로 공식화해서 내어놓은 것이 시발점이 됩니다. 그때까지 화란 교회들은 유럽의 다른 주요 개혁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비르크의 신앙고백에 찬동하고 있었으며, 이 고백들은 둘 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철저히 기초한 교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이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성경의 교리적 가르침에 항의(抗議)해 자신들 나름대로의 교리적 입장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표명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free will or human ability) : 이는 인간이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았지만 영적 선을 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능해진 것은 아니며 따라서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 소위 예지(豫知)에 의한 예정(豫定)교리로서 구원을 받고 싶어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복음에 반응해 믿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예정에 선행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보편적 구속 혹은 일반적 속죄(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결국은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적으로 돌아가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 값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있을지언정 종래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견해입니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지에 제한을 받음(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regeneration limited by the human will) : 이는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역사(役事) 하실 때 인간의지에 의해 거부를 당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성령의 뜻이 좌절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자진해서 영생의 생명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한 성령은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요지입니다. …은혜에서 떨어 짐(falling from grace) : 이 주장은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조항은 각각의 내용이 담고 있는 교리적 성격상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하나님으로서 일체의 성경적 교리는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편에서의 교리는 다른 한편에서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성경의 자증입니다. 성경은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유기적(有機的)으로 연합돼 있습니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논쟁이 일어나자 화란 정부는 1618년 11월에 화란의 남부지역인 도르트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 129명이 모여 이 문제를 갖고 회의를 시작합니다. 이 회의는 이듬해인 1619년 5월까지 약 7개월간에 걸쳐 무려 154회에 이르는 마라톤회의를 거듭한 끝에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조항들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에 의견을 모으게 됩니다. 동시에 종교개혁에서 매우 명백히 제시됐고, 프랑스 신학자인 죤 칼빈에 의해 체계적으로 형성된 개혁주의 교리적 입장을 재확인 한 도르트 대회는 알미니안들의 체계에 대결하기 위한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공식화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교리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2.전개

 

  우리가 흔히 칼빈주의의 5대 교리라고 일컫는 내용은 칼빈 개인의 주관적인 교리적 견해에서 나와진 독단적인 성경해석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미 종교개혁자들과 주요 종교회의에 의해 정립된 개혁주의적 성경해석의 차원에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일단의 알미니안들의 교리적 항의를 일축하고 재확인하는 형식으로 나온 성경적 변증의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이들 내용은 ‘구원의 도리’에 집중해서 연관돼 있음이 특징입니다.

  한편 이들 주요 조항들을 영문의 첫 글자를 중심으로 나열했을 때 'TULIP'이라는 글자로 표기되는 바 일명 ‘튤립교리’라고도 부릅니다. 오늘은 이 중 첫 번째 교리인 ‘인간의 전적타락’에 관해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자유의지’ 및 ‘인간의 능력’ 교리의 반동(反動)으로 제시된 교리적 주제임을 쉽게 간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알미니안파들의 주장에 대한 철저한 부인과 이에 대한 성경적 답변입니다. 우리는 본 강의를 통해 성경이 증언하는 바 인간의 전적타락과 관련해서 몇 가지 측면에서 이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전적부패 또는 전적무능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 속에는 한결같이 몇 가지 동일하게 시사하는 신학적 명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주제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는 상대적 명제가 아닙니다. 절대적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인데 이는 사람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평가된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절대적 관계에 근거해서 진단된 결과라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분의 고하와 출신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죄인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정죄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은 처음 무죄자로 창조됩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죄자가 곧 완전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자는 무죄할 뿐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짓지도 않는 절대자를 일컫는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죄자이지만 불완전한 아담은 하나님께서 내신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통해 보다 완전하고 온전한 선의 상태로 발전해 나가야 할 시험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시험에서 실패합니다.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기게 됩니다. 이것이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사건입니다. 원죄의 기원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죄의 성립은 인간의 내적 욕심의 발로로 야기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본질적 성격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지 못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요16:9). 이후 아담의 범죄의 죄성(罪性)은 그의 후손들의 본성에 유전적으로 전가(轉嫁)돼 온 인류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선고하는 근본원인을 제공합니다(창2:17, 3:5-6). 롬3:23와 5:12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지적이 바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범죄행위와 이로 인한 후손에게로의 죄의 생득적 전가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이후부터 온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됩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롬3:10). 인류의 비극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죄인으로 정죄 당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체의 영적 교제에서 단절돼 영원히 결별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영적 이산가족이 돼 버린 셈입니다. 바로 죄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사59:2입니다.“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후 아담의 원죄는 그의 후손들의 본성 속에 감추어져 온갖 범죄행위의 원인 제공자로 활동하게 되는 바 곧 자범죄(自犯罪)의 근원이 됩니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 만연돼 있는 갖가지 형태의 범죄는 바로 조상으로부터 생득적으로 전수된 원죄의 다양한 외적 표현일 뿐입니다. 설령 일생에 거쳐 행위에 근거한 범죄를 한번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있을지라도 본성적으로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소위 양심(良心)이 고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은 죄인으로 전락한 인간이 현재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유일의 천성적(天性的) 흔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양심마저도 화인(火印) 맞아 그나마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때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요8:1-11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의 얘기가 소개됩니다. 한 무리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다수의 시민들이 이 얘기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고소할 목적으로 이 여인을 잡아 의도적으로 주님께 이끌어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을 명했다고 하면서 주님의 판결을 요구합니다. 사도 요한은 저들의 요구가 ‘예수님을 시험해서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라고 이 사건의 내막에 담긴 실상을 독자들에게 폭로합니다. 어찌했든 예수님은 저들의 요구에 어떤 식으로라도 답변하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계십니다. 만약에 모세의 법대로 죽이라고 하신다면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법을 위반해 스스로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고 죄를 용서하셔서 구원하시는 사랑의 법에 근거해 살려 주라고 하시면 이는 주님 또한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을 통해 오신 분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적 규범인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시는 셈이 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잠시 시간을 가지신 후에 살기등등(殺氣騰騰)하고 의기양양한 회중을 향해 일성(一聲)을 발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절). 다시 잠시의 침묵이 흐릅니다. 얼마 후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때의 상황을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회중은 간음한 여인과 비교해서 분명히 현행범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적 의의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드러난 죄인’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주님의 질문 섞인 답변에 어느 누구 한사람도 선뜻 나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회중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일말의 양심이 저들을 여인과 동일한 범죄자로 고발하고 있음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감춰진 죄인‘으로 말입니다. 요한은 이 상황을 해석하면서‘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떠나게 됐다고 기록합니다. 비록 저들이 현행범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자기 양심에 찔려 감히 자신들을 무죄자라고 주장하지 못한 사실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적나라하게 시사합니다. 여기서 양심은 바로 주님의 질문 곧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인간 본성의 실질이 어떠함을 사실적으로 직고(直告)하는 고발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지금 인류를 향해 저들의 실상이 하나님 앞에서 ‘이 여인이나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사실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드러난 죄인이나 감추어진 죄인이나를 막론하고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시선 앞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은 죄인들로 존재할 뿐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 심성의 실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여기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명제 속에는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의 영향은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전(全) 영역에 걸쳐 ‘전인적(全人的) 부패’를 초래한 나머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원을 스스로 취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死亡者)라고 정의한다는 지적입니다(롬3:10-12, 엡2:1). 다시 말해 인간의 지정의가 그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교통의 기능을 철저히 상실한 나머지 어떤 자의적 방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롬1:21-23). 이는 처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도의 영적 수준에서 자력으로는 회복불가능의 저급하고 타락한 상태로 전락돼 버렸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창2:17을 보십시오. 선악과 금과법에는 문맥상 조건부적으로 영생과 사망이 대가로 주어졌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이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하셔서 죽음이 즉각적으로 저들에게 임하는 것을 지연시킴으로 구속의 기회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과의 종전 같은 막힘 없는 전인적 교제와 교통은 한 순간에 단절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여느 때와 같이 찾아 오셨지만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음으로서 인격적 교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됨을 봅니다(창3:8-10). 도리어 하나님을 피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영적 죽음 곧 ‘전인적 관계의 단절’이라고 부릅니다.

 

  이후로 아담의 범죄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과의 일체의 정상적인 교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죄(原罪)로 기능하게 됩니다(사59:1-2). 롬3:23과 5:12을 보십시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일하게 죄인인 사실을 증거합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 행위로 나타나는 일체의 인간의 자범죄(自犯罪)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인간의 본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원죄의 죄성으로부터 기인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합니다.

 

  엡2:1을 보십시오. 우리의 옛사람의 형편과 처지는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들로 판정 받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죽은 자나 방불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과의 마땅한 영적 교제(전12:13)의 단절이 성경적 죽음의 일차적 판정임을 알게 됩니다. 마8:22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친의 장사(葬事)문제로 주님을 즉각적으로 좇기를 주저하는 한 제자를 향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권고하십니다(마8:22, 눅9:60). 여기서 실제로 죽은 자는 두 번째 죽은 자를 가리키며, 첫 번째 죽은 자들이란 비록 현재적으로 살아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통해 주님과 관계도 분깃도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불신자들로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에 있는 원수 된 자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은 여전히 전적부패한 자들로서 결국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로 간주됨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그렇다면 갓난아이들이나 태아들은 어떨까요? 성경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사악(邪惡)한 존재라고 정죄합니다. 원죄로 인해 처음부터 죄인으로 잉태되고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시51:5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실토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간의 심성을 고발하면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17:9)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함으로 당시의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 했음을 창세기 저자는 고발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결과가 되었음을 기록합니다(창6:5). 로마서 기자는 이런 인간의 죄악 된 상태를 힐난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3:10). 지금 저자는 인간 상호간의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 선의 기준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선의 기준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이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91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해서(원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규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목적)하는 것’을 동기유발로 삼아 행할 때 비로소 선행으로 성립된다고 가르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전적타락의 두 번째 명제는 사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근원이 원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임을 증거합니다(롬6:23).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히9:27). 왜냐하면 죄는 법정적(法定的) 측면에서 이에 상응하는 형벌을 요구하는 바 죽음은 죄 값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며 동시에 형벌이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노령으로 죽는 자연사(自然死)나 각종 병사(病死) 그리고 사고사(事故死)는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의 방식(方式)일 뿐 죽음의 근본 원인(原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의 값으로 사망이 인류에게 불청객으로 찾아온 것입니다(롬6:23). 역사이래 한 번 태어난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원리와 원칙은 지속적으로 유효해서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전히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 인류를 죽음의 포로로 사로잡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필연적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선고하는 성경의 증언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이며 선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이 안고 있는 명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 죽는 것으로 모든 지상의 삶이 마감되는 줄 압니다. 더 이상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죽음 후에는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요5:28-29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죽음을 영생(하나님 나라)과 영벌(불못 곧 지옥)의 실질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때 인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를 경유해야 할 것임을 경계시킵니다. 따라서 죽음 후에는 온 인류 앞에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히9:27). 이는 한 번 태어난 생명의 가치는 영생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로 하사된(창2:7) 탁월한 성격상 영원불멸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의 법칙이며 원리입니다.

 

  아울러 종말론적 생명의 최후적 거처는 영생과 영벌의 장소로 나뉘어 질 것임을 성경은 지적합니다(계20:15, 21:1, 4). 본문(요5:28-29)은 하나님의 최후적 심판대에 서기 위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사실 부활의 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는 그 신비하고 초자연적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실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사건의 경우를 통해 분명한 실제적 사건으로 소개합니다(롬8:11, 고전15:20-24). 사실상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고전15: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의 종말론적 부활의 첫 열매로서의 보증이 되신 사건입니다. 그분의 부활에 속해져서 성도들은 그 분이 다시 오시는 날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15:42-44, 살전4:16-17)). 이미 부활해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체의 영광을 입고서 말입니다. 이토록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남김없이 만족시킨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증거로 작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양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고전15:3-4).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은 이 부활 후 심판(계20:11-14)에서 제외됨으로 지옥의 다른 설명인 불못의 종말론적 형벌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사면(赦免)됐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요5:24). 이 말은 역(逆)으로 현재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아직 죽음과 그 후의 부활과 심판을 현실로 경험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선취적으로 종말론적 심판에 처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요3:18). 복음이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입는 것을 통해 필연적 심판(영벌)에서 제외되며 동시에 영생하는 생명에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요5:24).

 

  이런 복음의 내용이 이미 우리 안에서 현재적으로 성취된 사건으로 신기하게도(?)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 믿는 것이 아닌 믿어지는 것입니다. ‘절대적 타자’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이끌림을 받아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자아는 위에서 본대로 이미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자로 존재하기에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타자(他者)로서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다른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사역이 우리를 위한 대속적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미 죽어버린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이를 수납하게 하신다는 얘깁니다.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향한 정상적인 영적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역의 주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예수님의 지상적 사역의 계승자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서 당신의 종말론적 구속사역을 성령님을 통해 진행해 가십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 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에 대해 원보혜사가 되시며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통해 성령님을 자신의 대리적 파송자로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의 성격은 오직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을 증거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을 통해 부단히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시며 이를 가능케 하는 일에 집중돼 있습니다(요14:16, 26). 가시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까지도 성령님은 성도들의 심령에 관계하셔서 여전히 영생하는 생명력의 근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요14:16).

 

3.결론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면전에서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한 무능자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증언합니다. 바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반응할 수 있는 일체의 지정의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이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들을 일컬어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선고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도 없으며 한결같이 치우쳐 무익하게 됐음을 선포합니다(롬3:11-12). 나아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조차 싫어한다고 지적합니다(롬1:28).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심성이 전적인 타락과 부패로 인해 마땅히 섬길 자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상실된 상태를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시종일관하게 인간의 본질적인 영적 상태를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영적 파산자로 선고를 내립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거듭날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임을 지적합니다(고전2;14). 그렇습니다. 이제 외부적 타자(他者)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전무할 뿐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의 머리됨으로 인해 온 인류를 부패와 타락으로 몰아가 죄인 되게 함으로서 영적 사망과 육체적 죽음과 최후적 심판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지정의를 발동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일말의 능력조차도 앗아감으로 인류를 하나님 없는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런 교리적 내용들을 일컬어 전적타락, 전적부패 혹은 전적무능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경이 증언하는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적 무능자로 타락한 인생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타자’의 도움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당위(當爲)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 강론에서는 자연히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택정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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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끈이 되신다- 좐 칼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시고 또한 우리 속에 거하셔야만 비로소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축복들을 우리와 함께 나누실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의 머리”(엡4:15), “많은 형제 중의 맏아들”(롬8:29)이라 부르며, 우리에 대해서는 그에게 “접붙임”이 되었다고 하며(롬11:17), 또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3:27)고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그가 소유하시는 모든 것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고, 또한 그가 베푸시는 모든 은택을 누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다.

 

사도 바울은 깨끗이 씻음과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6:11)고 말한다. 정리하자면,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 자신과 연합시키시는 끈이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특별한 목적으로 성령을 받으셨다.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키고 우리를 영원한 기업의 소망으로 연합시키시기 위하여 친히 성령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가리켜 “거룩하게 하심”의 영이라 부른다(살후2:13,벧전1:2,롬1:4). 그가 친히 우리 속에 있는 하늘의 생명의 뿌리와 씨가 되시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 제시하는 최고의 사실은 바로 그 나라에서는 성령께서 더욱 풍성하게 부어지리라는 것이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욜2:28). 그리스도는 성령의 선물들을 지니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다. 주님은 목마른 자들을 향하여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셨다(요7:37). 바울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4:7) 각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를 구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교통하심”을 거기에 덧붙이는데(고후13:13), 그것은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절대로 맛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한다(롬5:5).

 

성령은 여러 칭호로 부른다. “양자의 영”(롬8:15)이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품으셔서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신 그 하나님의 값없으신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분이시며, 또한 그에게 기도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을 기업의 “보증이며 인”이라고도 부른다(고후1:22). 성령께서는 은밀한 가운데 우리에게 물을 대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서 의의 싹이 돋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물”이라고 부르는 예가 많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55:1),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44:3). 이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요7:37)과 일치한다. 그러나, 때로는 깨끗 씻어 정결케 하는 그의 능력 때문에 성령을 가리켜 “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호와께서 “맑은 물”로 그 백성들의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 정결케 하리라고 약속하신다(겔36:25).

 

또한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부으시고 충만한 삶의 힘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가리켜 “기름”, 또는 “기름 부음”이라고도 부른다(요일2:20.27).

 

또한 반대로, 성령께서는 악하고 규모 없는 정욕들을 억제하시고 제거하시며, 또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불타게 하시므로, 그를 가리켜 “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눅3:16).

 

성령을 가리켜, 하늘의 모든 풍성한 것들이 우리에게 솟아 나오는 “샘”으로 묘사하기도 하며(요4:14), 그를 하나님의 권능을 시행하는 “주의 손”으로 묘사하기도 한다(행11:21).

 

요컨대, 성령께서는 그의 신적인 감동으로 신적인 생명을 우리 속에 불어넣으셔서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그의 역사하심과 자극의 지배를 받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가 그의 은혜의 열매들이며, 그와 상관 없이 우리가 지닌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정신의 캄캄한 어둠과, 마음의 비뚤어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갈5:19-21).

 

그리스도와의 신성한 혼인을 통하여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요 그의 뼈 중의 뼈가 되어 그와 하나가 되는데(엡5:30), 이 신성한 혼인이라는 것도 바로 그러한 연합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와 연합을 이루신다. 그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어, 그는 우리를 자기 자신 아래 있도록 지키시고, 또한 우리는 그를 소유하는 것이다.

 

성령의 주된 역사는 바로 믿음이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표현하는 일상적인 용어들은 대개의 경우 믿음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그가 우리를 복음의 빛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다(요1:12-13).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야말로 초자연적인 선물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님도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고 하셨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바울은 그들의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했는데(엡1:13) 이 역시 이와 비슷하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고 하는데(살후2:13), 이는 믿음 자체의 근원이 다름 아닌 바로 성령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능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리의 영”을 주셔서(요14:17), 그들이 하늘의 지혜를 받아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령을 가리켜 천국의 보화를 여는 열쇠라 부르는 것(계3:7)도 합당할 것이며, 또한 그의 조명하심을 가리켜 마음의 눈이라 부르는 것도 합당할 것이다.

 

바울은 성령의 직분을 높이 기리는데(고후3:6), 이는 내적인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지 않으시면(요6:44) 인간 교사들이 아무리 외쳐도 전혀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구원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했거니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심으로써(눅3:16) 우리를 그 구원에 동참하게 하셔서, 그의 복음을 믿는 믿음 속으로 우리를 밝히 이끄시며, 우리를 중생케 하사 새로운 피조물들이 되게 하시며(고후5:17), 그리하여 세상의 더러움에서 우리를 깨끗이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구별하여 세우시는 것이다(고전3:16-17, 엡2:21).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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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罪) 고백(告白)]

“우리는 이미 범죄(犯罪)하여 패역(悖逆)하며 행악(行惡)하며 반역(叛逆)하여 주의 법도(法度)와 규례(規例)를 떠났사오며”(단9:5)

성경에 규정된, 죄를 고백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잊으시며 도말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용서를 얻으려면 주님께 죄를 고백합시다. 주님은 의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처를 그분께 보여 드립시다. 주님은 상하시고 모욕을 받으셨...으니 그분께 평안을 구합시다. 주님은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모든 생각을 아시므로 그분 앞에 서둘러 나아가 우리 마음을 쏟아놓읍시다. 죄인을 초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지체하지 말고 그분께 나아갑시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32:5). 다니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9:5). 우리는 누구에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그분께 고백해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꾸짖고 책망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에서 비롯되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을 한 사람은 틀림없이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널리 알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꺼이 혀로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 마음의 비밀을 한 사람의 귀에 단 한 번 속삭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주 공개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듣는 데서 솔직하게 자신의 수치와 더불어 주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다윗도 나단의 책망을 들은 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신의 죄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12:13). 즉, 이제 아무런 변명거리도, 빠져나갈 구멍도 없으니 모두가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해야 마땅하며,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로 감춰 두고 싶었던 자신의 죄도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참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우리 자신과 온 세상 앞에 나타내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존 칼빈과 함께하는 말씀묵상 36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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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16: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혹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터툴리안(Tetullian)과 암브로스(Ambross), 칼빈(Calvin)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본문에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부자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다이브스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믿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 품으로갔다는 말씀이 잘 가리킵니다(22). 부자는 믿지 않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호화로운 연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씀이 증거합니다(19).

 

 

부자

 

부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옷,자동차,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곧 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거지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의 연회에서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서 배를 채웠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문가에서 같이 음식을 나누던 개가 그 헌데를 핥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나사로가 어떤 사유로 거지가 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몹시 불행했고 고통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22절에 보면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육신적 죽음입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옥에 있는 부자를 봅니다. 부자가 그 지옥 속에서 외치는 외침을 들어봅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적셔 주시옵소서." 그는 이미 지옥에 가서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머리가 보통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옥은 한번 빠지면 이미 결판이 났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곳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에 대달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단절이 생겼다. 그래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강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내 아버지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 다섯 형제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는 형제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 부자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닙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형님 전갈이라고 말하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아니,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가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지옥의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을 말하시는 분은 이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호세아도 아니고 아모스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옥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를 아십니다. 시작을 아십니다. 끝을 압니다. 인생의 높이를 압니다. 저 깊은 낮음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 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자비가 끊어진 장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십니다. 공평하십니다. 한없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처럼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단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 불 같은 불 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끊어져버린 장소,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마저도 말라버린 장소가 지옥입니다.

 

  

지옥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옥에서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거기 들어갔던 이 부자는 다시 기회 없는 줄 이미 눈치챘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었으면 그 유능한 능력으로 아마 예수님이라도 로비를 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물 한 방울만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두 번째로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단절의 땅입니다.

 

 

지옥은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천국과 지옥

(16: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혹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터툴리안(Tetullian)과 암브로스(Ambross), 칼빈(Calvin)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본문에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부자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다이브스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믿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 품으로갔다는 말씀이 잘 가리킵니다(22). 부자는 믿지 않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호화로운 연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씀이 증거합니다(19).

 

 

부자

 

부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옷,자동차,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곧 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거지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의 연회에서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서 배를 채웠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문가에서 같이 음식을 나누던 개가 그 헌데를 핥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나사로가 어떤 사유로 거지가 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몹시 불행했고 고통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22절에 보면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육신적 죽음입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옥에 있는 부자를 봅니다. 부자가 그 지옥 속에서 외치는 외침을 들어봅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적셔 주시옵소서." 그는 이미 지옥에 가서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머리가 보통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옥은 한번 빠지면 이미 결판이 났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곳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에 대달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단절이 생겼다. 그래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강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내 아버지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 다섯 형제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는 형제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 부자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닙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형님 전갈이라고 말하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아니,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가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지옥의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을 말하시는 분은 이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호세아도 아니고 아모스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옥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를 아십니다. 시작을 아십니다. 끝을 압니다. 인생의 높이를 압니다. 저 깊은 낮음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 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자비가 끊어진 장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십니다. 공평하십니다. 한없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처럼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단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 불 같은 불 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끊어져버린 장소,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마저도 말라버린 장소가 지옥입니다.

 

  

지옥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옥에서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거기 들어갔던 이 부자는 다시 기회 없는 줄 이미 눈치챘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었으면 그 유능한 능력으로 아마 예수님이라도 로비를 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물 한 방울만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두 번째로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단절의 땅입니다.

   

지옥은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개혁주의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세 가지 간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승구 교수는 마틴 루터의 명언인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되게 하라!" 라는 말을 들고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우리 안에 하나님 자리가 없을 수 있다!"고 강하게 경고한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 중심으로 흘러가야 이 땅 위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히'라는 말을 '무겁다'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승구 교수는 거룩한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는 어느 정도 중심 한 가운데가 무거워야 함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균형 잡힌 삶과 예배가 있어야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삶도 하나님 중심의 '무거움'을 가지고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허물을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무겁게 눌러 다시는 기도와 예배를 중심으로 죄악, 연약함 앞에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든지 이 땅 위의 모든 자녀들이 그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함으로 하나님의 무거운 거룩하심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우리의 삶과 영혼이 그의 거룩함에 가득 차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재배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미소와 감동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받아 개인의 삶이 제대로 정립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가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무거우심"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핵심은 "우리가 무언가 노력한다고 해서 혹은 기도와 예배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노력도 모습을 떠나 그분은 그 영광 자체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더 짙어지거나 흐려지지 않는다. 또한 예배적 측면에서 주일, 수요일, 금요 철야, 새벽기도까지 빠짐없이 나오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목회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발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실수로 인해 긁혀진 유리의 흠집같이 우리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흠집이 더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칼빈 역시 하나님의 '자비·전능·진리·완전함·거룩함'이라는 크고 놀라운 속성을 말하며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들 안에서 거룩하여지기를 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미 완성된 '거룩히 여김'에 대해 다시 한 번 새겨 보아야 한다. 그의 거룩함은 절대 사라지지도 더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에 동조할 수 없다. 다만 그 거룩함을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정치·경제·문화·과학 전체에서 우리의 위치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삶과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극명하게 비추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우리 내면의 하나님을 버리는 일'에 빠져, 전혀 하나님의 영광에는 흠집이 없는데도 삶과 예배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면 이는 되돌아보아야 한다. 균형 잡힌 삼위일체적 하나님 중심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두지 못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을 치유하고 비추는지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그 안타까움과 불편함을 심각하게 자각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내 울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가리지 않는지, 물질에 어두워 예배를 뒤로 미루지 않는지, 모든 것들이 내 중심으로 흐르지 않는지, 이런 내면을 자각하여 '내적 심리적 공황'이라는 심각한 자각을 가지면 이 땅 위를 울리고 대지를 적신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의 두 번째 간구는 완전한 '하나님나라'에 관한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자기 백성 위에 행하시고 다스리어 그의 선하심과 자비의 부요가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속에 나타나도록 하는 일이다"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통제성과 현재성'을 이룩하기 위해 우리 손을 내밀기 바라신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3중적 의미'를 바라보자.

첫째, 예수를 통해 이미 통치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목표를 가지고 전진해 나가는 '하나님나라'를 친히 삶에서 이루도록 기도한다.


셋째, '하나님나라'는 '아직 아니 하심'(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의미)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혼자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하나님나라에 이바지함으로 그의 나라를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통치와 하나님나라에 협조하는 의미로 동참하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이승구 교수는 강조한다. 우리는 '삶과 말'로서 하나님나라가 과거에 이룩했으며 하나님께서 지금 통치하고 있다는 것들을 전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이고 그의 '메시지' 역할을 할 뿐이다.

기독교인들이 아닌 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인 '하나님나라'의 일부분인 이 세상 속에서도 '번창함과 통제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정녕 이 땅과는 무관하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나라'(요17:14)의 성격은, 영적이며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성격을 띤다고 칼빈은 부르짖는다. 진정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정신 차리고 '하나님나라' 메시지 역할을 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번영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야 하나, 일반 사람들은 칼빈에게 선교 사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주님께서 새로 믿는 자들을 날이면 날마다 그의 백성에 더 보태사"라고 주장하면서 선교에 눈뜨지 못한 때부터 이미 선교를 향해 마음을 두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선교적 마인드로 "하나님나라가 어서 오소서!"라고 간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우리가 공동체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들에 회초리를 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계시가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신비한 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예수와 함께 동조한 수많은 선교사, 순교자, 봉사자들과 늘 함께 한듯하다. 비록 몇 십 세대가 지났지만, 마치 과거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문제를 제기하며 동일하게 받은 세례를 통해 연대감과 연합을 이루어 나가는 단계를 말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우리가 이 같은 간구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모두 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애정을 주님께 향하도록 조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작성하신 대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세 번째 간구의 특성을 제대로 드러낸다. 즉 하나님은 개인에게 성령을 주었고 그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하나님이 작성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늘 내면의 깊은 자각이 없이 그저 보이는 대로 간구하며 보챈다. 이에 대한 인간의 심리를 이승구 교수는 "우리는 간구하라고 하면 늘 '바라는 바'를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바라는 바'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헬라어로 "에피두미아 (-epithoumia)", 즉 "~ 하려는 관점이나 의도로"라는 뜻이다. 인간의 보이지 않는 '욕망', '욕구', '탐욕', '정욕'등을 품고 있는 속마음을 일컫는다.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너무 충만하여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고 그 인간적 '에피두미아의 마음'은 쉽게 버릴 수 없다.

나의 잘못된 '바라는 바'대로 흘러가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에피두미아'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 나의 애정이 하나님에게 향하여 나의 성령과 마음이 감화 감동되어 육체의 고집과 연관한 '에피두미아'적 요소는 버려야 한다. 지구상에서 진정 다른 자와 차별되어 아름답고 찬란한 영적 하나님과 연관하며 구별된 자로 거듭난다. 이승구 교수는 이를 두고 "거룩성은 관계의 개념이다"라는 짧은 표현으로 단정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연인과의 대화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교류한다. 그때부터 이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

하나님을 향한 간구에 대해 칼빈은 "우리가 간구하는 이 일들은 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생각이나 바람이나 간구 없이도, 일어날 일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일들을 여전히 바라고 구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면서 간구를 정의한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와 다른 사상을 가진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심지어 회의론자들은 '딴죽걸기'를 서슴없이 구사한다. 하나님이 최선을 모두 알고 있다면 기도할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 '딴죽걸기'는 여기 '예수의 기도' 앞에 소용이 없어진다. 그의 길 앞에서는 모두가 다 겸허해진다. 그는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늘 기도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바대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기도했다.

"Prayer is not only asking, but an attitude of mind which produces the atmosphere in which asking is perfectly natural."
(기도는 '간구'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자연이 되기를 간구하는 공기를 생산하도록 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 Oswald Chambers(오스월드 체임버스)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 <기독교 강요> 기도편: 예수의 기도(중)
출처: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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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시험 받음

존 칼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22:1)

  창세기 기자는 "그 일 후에"라는 말로 하나의 어구 안에 아브라함이 겪었던 여러 사건과 그가 노년에 얻기 시작한 편안한 삶을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팔십 세까지 유랑의 불안정한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피해에 시달리며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 비참하고 근심 가득한 삶을 어렵게 견뎌 왔습니다. 기근은 아브라함을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들어온 땅에서 이집트로 쫓아 냈습니다. 그는 아내를 두 번이나 뺏았겼습니다. 그리고 조카와도 헤어졌습니다. 조카가 포로로 잡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걸고 조카를 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이 살다가 나중에는 자식을 가질 수 있는 모든 희망마져 사라지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마침내 아들을 얻은 뒤에도 그는 그 아들을 포기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야 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특별하고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아들과 함께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갑자기 하늘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이 이 아들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마치 연극의 마지막 장처럼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전보다 훨씬 심하게 검증받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는 방법, 즉 하나님의 말에 대한 이 거룩한 사람의 믿음을 하나님이 그 말 자체를 반대로 뒤집으심으로써 흔들어 보시려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 의문이 없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분명히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는 근심에서 벗어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다면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를 이어 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의지하여 아브라함은 그런 암시를 사탄의 궤변으로 여겨 거부했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 두려움 없이 유혹을 떨쳐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의심의 원인은 제저되어 아브라함은 이의 없이 이 음성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합니다.
  

  개력주의마을/Jennifer


필연과 강제의 구분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에서)

 

인간의 의지는 죄의 굴레에 완전히 묶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향하여 움직일 수도 없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움직임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심의 시초인데, 성경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자기를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자신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같은 장에서, 신자들의 영적 수공을 묘사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였다”고 말씀한다. 이는 분명 여호와께 버림을 받아 마귀의 멍에 아래서 행하는 동안 죄인이 얼마나 단단한 족쇄에 묶어 있는가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지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죄를 향하여 강력한 애착을 갖고 그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이런 처지에 있다고 해서 의지를 빼앗기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의지의 건전성을 빼앗기는 것이다.

 

자,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내 말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 말이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것은, 그들이 필연과 강제를 서로 구분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그들에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선하지 않으신가? 마귀는 필연적을 악하지 않은가? 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의 신성과 너무나도 밀착되어 있어서, 그가 하나님이신 것이나 그가 선하신 것이나 똑같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귀 역시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에 참여 하는 것에서 완전히 끊어져 버렸으므로, 그는 악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모욕하려고, 하나님께서는 강제로라도 자신의 선하심을 보존하지 않으실 수 없으니 그가 선하다는 것에 대해서 굳이 칭찬을 받으실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빈정거린다고 하자. 그럴 경우에는 곧바로 답변할 수가 있다. 곧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지 못하시는 것은 그렇게 못하시도록 어떤 강제적인 압력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한량없이 선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선을 행하실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선을 행하는 하나님의 자유 의지가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또한 마귀가 오직 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지로 악을 행하는 것이라면,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 아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곳에서 이런 필연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코엘레스티우스(Coeletius)가 이에 대해 트집을 잡으며 그를 비난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단언하였다. “자유를 통해서 사람이 죄 가운데 있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형벌로 나타난 부패성이 자유를 필연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이를 필연적인 죄의 속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타락에 의하여 부패하였을 때에 강제에 의해서 억지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며,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강력한 이끌림에 의해서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본성이 너무나 부패해 있어서 그는 오직 악을 향해서만 움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사람이 분명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베르나르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동의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생물들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자유롭다. 그런데 죄가 개입함으로 인하여 사람 역시 일종의 폭력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것으로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의 의지가 해를 입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본래 부여받은 자유는 빼앗기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가서는 이렇게 쓰고 잇다. “무언가 비열하고도 이상한 방식으로 그 의자 자체가 죄로 말미암아 더 악하게 변하여 그 자체가 필연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이 ? 그것이 의지에 속하면서도 ? 의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반대로 의지도 ? 그것이 이끌림을 받아 그릇된 상태로 나아가지만 ? 필연을 배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 필연이 말하자면 자의적인 것이 때문이다.

 

그리고 더 뒤에 가서는, 우리를 압박하는 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의적인 종노릇의 멍에이며, 따라서 의지가 자유로울 때에 스스로 죄의 종이 되었으니 종노릇의 상태를 보면 비참하기 이를 데 없고, 의지를 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짓는다. “이렇듯 영혼은, 무언가 이상스럽고도 악한 방식으로 자의적이면서도 그릇 자유로운 필연성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스럽고 한심스러운 일은 영혼이 자유롭기 때문에 죄책이 있으며, 죄책이 있기 때문에 종노릇의 상태에 있는 것이요, 결국 자유롭기 때문에 종노릇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4510

[출처] 필연과 강제의 구분--칼빈 (한마음개혁교회) |작성자 목사님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칼빈의 핵심 교리 해설 (2) -정준모 목사
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타작마당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 [칼빈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2)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앞 문장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듭나도록 촉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심판을 말함으로써 조롱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많은 위선자들이 자기들에게 제시된 그리스도의 은혜를 항상 거만스럽게 배척하는 만큼 그들 앞에 기다리는 형벌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은 엄한 심판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불신자를 비교해서 묘사하고 있다.

위선자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아무 탈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들이 무감각에서 일깨워지고 구원의 주(主)로 조롱했던 바로 그 분이 보복자로 등장하는 날,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이 가르침을 우리도 역시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그리고 요한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성취하실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를 가리켜 '키'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 전에는 온 세상이 뒤범벅인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으며, 선과 악이 뒤범벅이 되어 있고, 사실상 쭉정이로 가득차 있음으로써 그들은 쾌락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현장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법정으로 소환하는 날, 온 마당에 가득찼던 쭉정이는 이 키의 바람에 날려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복음이 각 개인에게서 쭉정이를 제거하지만, 요한은 여기서 많은 쭉정이를 버림 받은 자에게, 신실한 자를 알곡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타작 마당은(어떤 사람들 생각대로)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이것은 요한의 말이 누구를 상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명백하다. 유대인들이 자기들만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그들의 어리석은 교만을 들어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은 잠시 동안 뿐이고 쭉정이가 타작 마당에서 없어지듯 곧 날려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잠시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무용지물로 질식하고 있지만 곧 복음의 강풍으로 제거될 당시에 타락한 교회 상태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 쭉정이 밖에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쭉정이와 알곡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선택받은 자들은 알곡이 되기 때문에 쭉정이와는 상관없이 곧 곡간으로 거둬들여질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정화작업을 시작하였으며 날마다 그 결산을 보고 계시지만, 전체 결과는 마지막 날에 가서야 완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우리들에게 이 최후의 순간을 지적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신실한 자들은 오늘날은 소망을 통해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가며, 마지막 날에 가서는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체험할 그 불의의 열기를 현재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인들이 심판 후에 받을 고통으로서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갑론을박하지만, 여러 성경 귀절을 종합해 볼 때 이것은 은유적 표현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것이 실제로 물질적인 불이라면 이사야 30장33절에 나오는 유황과 사름도 물질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은 벌레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벌레'라는 단어가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며 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데는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퍅한 사람들이 쓸데 없이 고민하는 온갖 억측같은 것은 뒤로 제쳐놓자. 이 여러가지 표현은, 우리의 단순한 마음이 파악하는 대로라면, 오늘날 인간의 이해력과 표현력을 초월하는 그러한 무서운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칼빈 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고난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하면서 사도는 그러한 고난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1:5-7)라고 가르친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한다:“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아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6:10).

 

첫째 구절(살후1:5-7))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공로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가 자녀로 택하신 우리들이 그의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에(8:29), 그리스도께서 먼저 고난 당하시고 후에 그에게 정해진 영광에 들어가신 것처럼(24:26)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14:22)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환난을 당하는 동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의 양들에게 찍으셔서 구별하시는 특정한 흔적이 우리에게 찍혀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요(6:17), 그 흔적이 하나님의 자녀된 증표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진술도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11).

 

바울이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행위가 어느 정도라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강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의 말은 말하자면 이런 뜻이다:“너희들에게 환난을 가져다주는 원수들에 대해서 보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부합되듯이, 너희에게는 그 고난에서 벗어나 안식과 평안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그의 심판에 부합하는 것이다.”

 

둘째 구절(6:10)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하는 섬김과 봉사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되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게으름을 없애시기 위하여,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지는 고난이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는 값없는 언약이 먼저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 전체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데- 이 약속이, 다른 약속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하여 아무런 열매도 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 사실을 확고하게 의지하고서 우리는 든든한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섬김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비롯되는 상급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이러한 기대가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분이 아니시며 한 번 하신 맹세는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의로우심은 정당한 것을 갚아주는 공평성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어거스틴, “주께서는 신실하셔서 스스로 우리의 채무자가 되셨다.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받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87-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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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닻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천국의 상속자들이고, 우리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복락의 소망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7:12-13). 또한 마찬가지로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7:5-7). 이와 비슷한 말씀들을 천 가지도 넘게 인용할 수 있다.

 

모세는 율법은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 그리고 죽음과 생명을 제시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이 무익하고 무효가 되든지, 아니면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주장을 한다. 만일 율법을 붙잡게 되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모든 범죄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저주가 우리 위에 드리워지게 된다(27:16). 왜냐하면 주께서는 오직 그의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키는 자들에게만 약속을 하시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통해서는 온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요, 거기서 해방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말하자면 율법의 속박에서 풀려나서 자유를 얻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런데 만일 이 자유가 육체적인 자유라면 우리가 율법을 준행하는 데서 벗어나서 모든 일에 방종해지며, 마치 자물쇠가 망가져버렸고 고삐가 풀려버린 것처럼 우리의 욕심이 마음껏 활개치게 되겠지만, 이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영적인 자유이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실망에 빠져 있는 상한 양심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서, 율법이 억누르고 얽매어 놓고 족쇄를 채워놓고 있던 그 저주와 정죄에서 자유함을 받았음을 분명히 확신케 해 주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잡을 때에 이러한 자유와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을 얻게 된다. 율법이 양심으로 죄를 의식하도록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찌르고 괴롭혀 왔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죄를 사함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으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지 않으셨더라면 율법에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는 약속들이 모두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율법을 준행하여야 한다는 조건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되, 우리의 행위들의 의의 일부로 인정하시고 또 나머지 일부는 그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그 의를 이루시는 분으로 지정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 다음 이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부패함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는 상급의 혜택을 절대로 누릴 수가 없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른 의를 얻고서야 비로소 그 혜택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자기 종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상급을 기억하고서 곧바로 그 상급을 무효화시키는 죄를 떠올리는 것이다. 시편 19:12에서 율법의 유익함을 높이 찬양하면서도 곧바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다윗은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25:10)라고 말한 다음, 곧바로 이어서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25:11)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율법에 우리를 위하여 제시되어 있어서 행위로써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그 자비하심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런 행위를 도저히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의 약속들이 복음을 통하여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약속이 열매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사라지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 율법의 약속들은 행위의 공로와 관련지을 때에는 전혀 그 혜택을 누리는 일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만 생각하면 그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폐기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18:5)라는 유명한 약속이 있으나 그냥 거기서 그쳐버리면 그 약속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또한 없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다(10:5,312).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온갖 과실과 허물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그들조차도 그 약속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들로 그것들을 대체시키면, 그 약속들은 값없는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만들어줄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만들어 주게 된다. 주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기뻐하시기로 정하실 뿐 아니라, 그의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축복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께서 그의 율법에서 의와 거룩함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상급들이 신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베풀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 이러한 상급이 베풀어지는 데 대해서 우리는 주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의 행위들을 인정하셨는지 그 이유를 항상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의 행위를 돌아보시면 언제나 칭찬보다는 책망이 앞서게 되는데, 그가 그 종들의 행위를 돌아보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들을 품어 안으시고, 행위의 도움이 없이 오직 믿음만을 보시고 그들을 자기 자신과 친히 화목하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지니신 그의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신 사랑으로 그들의 행위를 그토록 존귀한 자리로 높이 인정하셔서 그것들에게 가치를 부여하시는 사실이다. 셋째는, 그 종들의 행위들을 그 불완전하며 부패한 상태 그대로 보신다면 덕이 아니라 죄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시지 않고, 그 행위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사실이다.

 

궤변가들은 자기들이 공로를 세워준다고 보는 그 행위들이 과연 율법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조건들에서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직 믿음에 근거하는 의롭다 하심과 죄 사함을 통해서 선한 행위들이 흠도 티도 없이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만 그런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53-357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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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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