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레에게 보내는 편지/조지 휫필드
조지 휫필드 2012. 11. 27. 04:26죠지아 베데스다, 1740년 12월 24일,
친애하는 경건한 형제에게.
하나님만이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아실테지, 지난 번에 영국을 떠난 이래로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것이 나의 연약함이든 아니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갈 때보다 훨씬 더 꺼리는 마음으로 자네를 반대하는 글을 쓰기 위해 지금 내가 손에 펜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네.
그러나 내가 하나님과 나 자신, 그리고 다른 영혼들에게 신실하다면 더 이상 중립적 위치를 견지해서는 안되네. 우리의 적들은 우리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고 기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네.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데, 아니, 하나님께서 나의 사역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셨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있고, 또한 더 엄청난 수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의견을 보여 달라고 여전히 큰 소리로 요청하고 있는데 말일세. 그러하기에 내가 나의 주시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의무와 일치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들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만 하겠네.
의심할 바 없이 이 편지 때문에 나는 많은 친구들을 잃게 되겠지.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을 맡기셨나 보네. 심지어 내가 그 분을 위해 내 모든 친구들을 기꺼이 버릴지, 그렇지 않을지를 보시려고 말일세.
이와 같은 생각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는 바, 내가 확신하고 있는 진리들을 겸손하게 증언하고 진정으로 변호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 드린 채, 이 진리들을 변호함에 있어 아주 명백하게 진술하고 이 땅 위에 있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가장 큰 단순함과 신실함, 그리고 자유를 가지고 대해야만 하겠네.
전에 얼마동안 특별히 지난번에 내가 영국을 떠난 이래로, 자네는 공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설교와 출판을 통해 만인 구원론(universal redemption)이라는 교리를 보급해 왔네. 바울이 베드로의 위선을 어떻게 꾸짖었는지를 기억할 때 내가 너무 오랫동안 죄악스럽게도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두렵기만 하네. 오, 그렇다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여, 내가 지금 이 편지를 통해 자네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함으로써 내 영혼을 구원한다고 나에게 노여워하지 말게나.
하나님의 율례에 관한 긴 논쟁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나의 의도가 아니었네. 에드워즈 박사의 “부활한 진리(Veritas Redux)”를 참조해 보게나. 그 책은 특정한 논점을 제외하고 선택받은 사람과 유기된 사람 사이에 있는 중간 종류의 사람에 관해 논술하고 있는, 반박할 수 없는 책이라고 생각하네. 그 자신도 사실상 후에 그 중간 부류의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지.
값없는 은혜(Free Grace)라는 제목의 자네 설교에 관해서는 단지 몇 가지만 논하도록 하겠네. 본론 자체에 들어가기 전에, 자네가 자네의 설교의 서두에서 온 세상에 공개하기 위해 자네가 필수 불가결한 의무라고 이름한 것에 대해 잠깐 주목하도록 허락해 주게나. 나는 항상 자네가 이 주제에 관해 어느 정도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네.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도 알고 있듯이 이 경우는 다음과 같네.
자네가 브리스톨에 있었을 때, 자네는 개인 인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을 것일세. 그 편지는 자네가 선택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네가 복음을 설교하지 않는 것이라며 자네를 비난하고 있었네. 이에 자네는 제비를 뽑았고 그 답은 ‘설교를 출판하라’였지. 나는 종종 자네가 그러게 하는 가운데 혹시 주님을 시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구만. 나는 지금도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네.
제비를 뽑지 않더라도 신앙적인 신중함으로 마땅한 행동을 했더라면 이 일과 관련하여 인도함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거기다가 나는 자네가 선택이 복음의 교리인지 아닌지를 하나님께 물어보았다는 소리를 결코 들어 보지 못헀네. 그러나 자네는 선택이 복음의 교리가 아니라고 당연히 여긴 채, 단지 잠잠할지 아니면 설교하고 선택에 반대하여 출판물을 인쇄할지 그것만 물었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네. 이 일이 어찌 되었든 제비는 ‘설교를 출판하라’로 나왔고 이에 따라 자네는 설교하고 선택에 반대하는 출판물을 인쇄했네.
자네는 내가 영국에 있는 동안에는 나의 원함에 따라 설교하고 출판하는 것을 자제했지만, 내가 영국을 떠난 후에 곧바로 그 설교를 세상에 내 보냈네. 오, 자네가 그것을 그냥 간직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러나 그 설교가 제비 뽑은 결과로 출판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자네를 속게 하심으로 그토록 고통받게 하시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게 하신 한 가지 이유는 그로 인하여 나에게 특별한 의무를 지우시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자꾸 생각하게 되네. 즉 신실하게 선택의 성경적 교리를 선포하라고 말일세. 그렇게 함으로 주님께서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내가 그분의 대의에 진실한지 아닌지를 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나에게 주시려는 것 같네.
자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듯이, 전에도 한번 주님의 델(Deal)에서 자네에게 이번에와 똑 같은 또 다른 제비를 주심으로 나를 시험하지 않으셨나. 내가 델에서 지브롤터를 향해 항해하려던 아침에 자네는 조지아에서 돌아오고 있는 길이었고 마침 그때 그곳에 닿게 되었지. 배가 육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나에게 자네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대신에 제비를 뽑았고 즉시 런던으로 출발해 버렸네.
자네는 뒤에 편지 한 통을 남겨 두었고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지. “자네를 실어 가고 있고 나를 이끌어 온 바람 곁에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 보았네. 그분의 답을 여기 동봉했네.” 이것은 편지의 한 부분이고 그 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지. “그를 런던으로 돌아가게 하라.”
이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다소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네. 여기 한편에는 제비를 뽑고 나서 하나님께서 내가 런던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고 말해 주는 훌륭한 한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 나는 나의 소명이 조지아로 가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런던을 떠났던 것이고 또한 나의 책임에 맡겨진 군인들을 마땅히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친구들과 함께 기도에 전념했네.
열왕기상 13장 말씀에 있는 본문이 강력하게 나의 영혼에 다가왔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계셨네. “여호와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해 준 다른 선지자의 말대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과 반대로) 돌아가도록 시험을 받은 선지자를 사자가 찢어 죽였도다” (왕상 13:26). 나는 곧바로 런던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편지를 자네에게 써 보냈지.
우리는 즉시 항해를 시작했네. 몇 달 후에 나는 조지아에서 자네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고, 그 편지에서 자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고 있었네. “하나님께서 이전에 결코 틀린 제비를 뽑게 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때는 자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 지를 시험하시려고 나로 하여금 그러한 제비를 뽑는 곤욕을 당하게 하셨나 보네.”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하도록 나에게 요청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이 개인적인 편지글을 세상에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일세. 여기에서 보면 자네가 틀린 제비를 뽑았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가! 이것은 정확하게 자네가 제비를 뽑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네. 나는 지금의 경우도 그때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그렇다면 자네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제비에 따라 만인 구원론을 설교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친구들이 기도하고 자네의 친구들이기도 한 하나님의 자녀들과 또한 그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 교리를 참되다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자네가 출판한 설교의 서론에서 “오직 여기에 전개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라는 확신뿐만 아니라 이 진리를 반드시 온 세상에 전파해야만 한다는 가장 강한 확신만으로”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이 이야기가 답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분명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썼을 테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여 글을 썼을 것이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단코 자네를 의심하지 않네. 그러나 그렇다면 존경하는 친구여, 자네가 했던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자네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든 피치 못할 책임 아래 놓이게 되고 그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 것이네. 이러한 생각을 하면 자네가 크게 실수해 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네. 하물며 이런 식으로 생명에 이르는 예정하심의 교리에 반대하는 설교를 출판하는 것은 더 말해 무엇하겠나.
다음으로 진술해야만 하는 사실은, 자네와 그와 같은 상상의 보중에 의하여 설교를 출판하는 것이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듯이, 마찬가지로 자네의 본문 선택 역시 참으로 불행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네. 존경하는 친구여, 어떻게 로마서 8장에서 선택 교리를 논박하는 본문을 선택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
로마서 8장 말씀은 이 선택 교리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일단 이 본문으로 이 주제에 관해 어떤 퀘이커 교도와 이야기하든, “바울이 틀렸다고 믿습니라”라는 말 말고는 이 말씀에서 사도가 피력하고 있는 주장의 강력함을 모면할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을 정도가 아닌가. 한때 선택 교리에 대해 크게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또 다른 한 친구는, “나는 사도 바울 자신이 실수를 했거나 이 본문이 바르게 번역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네”라고 최근에 솔직하게 고백을 했네.
존경하는 친구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전체를 통해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특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네. 참으로 모든 반박을 넘어서, 이 사실은 명백한 것일세. 선입견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아무에게나 자네가 제시하는 본문 전에 나오는 말씀과 이어서 나오는 말씀을 읽어 보라고 하게. 그 사람은 분명 여기에 나오는 ‘모든’이라는 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의미한다고 고백할 것임이 틀림없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내가 깨닫기로 웨슬리 자네는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최종 견인 (final perseverance)을 명백하게 입증하고 있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 (즉,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특정하게는 우리로 끝까지 인내할 수 있게 하시는 은혜, 그리고 우리를 아버지의 천국까지 데려다 주는 데 필요한 그 밖의 모든 것이네.
어떤 사람이든, 그 누구든 최종 견인 뿐만 아니라 선택 교리를 입증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자네가 그 교리들을 반박하려고 선택한 이 말씀보다 그 사람의 목적에 더 적합한 본문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할 것일세. 자네를 아지 못하는 사람은 자네 자신이 이것을 인식하고 있는 지를 의심할 것일세. 왜냐하면 첫번째 문단 이후로 자네의 설교 전체에 걸쳐, 자네는 이 본문의 말씀을 거의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네.
내 생각으로 자네의 논문은 자네가 선택한 본문과 거의 부합하지 않으며 본문을 왜곡하는 대신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교리에 대한 신념에 있어 나를 더욱더 확증해 준다네.
자네가 얼마나 비논리적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겠네. 자네가 명쾌하게 글을 썼다면, 존경하는 친구여, 자네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진다”라는 주장부터 입증했어야 했네. 그리고 나서 추론의 방식으로 자네가 끔찍한 율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큰소리로 반대했어야 했네.
그러나 자네는 (최근에 알미니안 주의가 우리 사이에 너무 많이 넘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영벌 (reprobation)의 교리를 까닭 없이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네. 따라서 자네가 사람들이 영벌의 교리를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수한다면 자네는 선택 교리를 완전히 뒤엎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네. 왜냐하면 의심할 바 없이 선택의 교리와 영벌의 교리는 함께 서거나 함께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은혜라는 말에 대한 자네의 분명치 않은 정의와 값없는(free)이란 말에 대해 자네가 내릴 잘못된 정의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지나가서, 가능한 간략하게 말하자면, 나는 영벌의 교리를 믿고 있네.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바이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특정 수의 사람들에게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로 작정하셨고, 아담의 타락 이후로 계속 죄에 머물기 위해 누가 보아도 분명히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은 마침내 영원한 사망으로 고통을 받게 하셨네. 그것은 타당한 죄의 삯이네.
이것은 확립된 성경의 교리이며 버넷 감독이 고백하듯이, 영국 국교회의 17번째 조항에서 인정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절대적으로 이 교리를 부정하고 있네.
그러나 이 교리를 반대하는 이유로써 자네가 내세우고 있는 가장 중요한 반대들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신실하게 시험해 보면, 분명 자네가 내 세우고 있는 가장 중요한 반대들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것일세. 다음의 주제에 따라서 이 문제를 겸손히, 그리고 차분하게 다시 살펴보세.
첫 번째로, 자네는, “만약 이것이 그렇다면 (즉 선택이 있다면) 모든 설교는 헛된 일이다. 선택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필요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설교가 있든 없든 전혀 그릇됨 없이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과 관련하여, 영혼을 구원한다는 설교의 목적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역시나 설교는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교가 있든 없든 그릇됨 없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설교의 목적은 공허하며 당신이 설교를 듣는 일 역시 헛된 일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네 (10번째 페이지, 9번째 문단).
오, 사랑하는 친구여. 이것이 논증인가? 논증이기는커녕 궤변이 아닌가! 특정 수의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말씀 전하는 것을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정하지 않으셨나. 도대체 누가 그 밖의 다른 의미로 선택을 붙잡고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복음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선택 받은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도록 고안되었다면, 어떻게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 설교가 필요 없겠는가?
누가 선택을 받고 누가 영벌을 받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리지 않고 설교를 해야만 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더 큰 악과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준다는 면에서, 심지어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말씀은 유용하기 때문이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심지어 주님께서 영생을 주시도록 정하신 사람들이, 이러한 설교의 방법에 의해 틀림없이 영혼이 소생되어 신앙을 갖게 된다고 생각할 때, 충분히 설교하고 듣는 일에 최대한으로 부지런해지도록 우리 마음이 자극되지 않는가. 특별히 경외함과 주의 깊은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들으려고 참석한 사람 말고 누가 자신이 그 행복한 수에 들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로, 자네는, “그것은 (선택과 영벌의 교리는) 하나님의 모든 규례의 목적인 거룩함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왜냐하면 (판단을 잘못한 웨슬리 자네가) “너무나 빈번하게 성경에 제시되어 있듯이 거룩을 따르려고 했던 그 첫마음을 완전히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미래의 보상에 대한 소망, 형벌에 대한 두려움, 천국의 소망, 그리고 지옥의 두려움 등”이라고 말했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만큼 완전함을 그토록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라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해지도록 거룩해지려고 힘쓰는 것이며, 천국의 보상이나 지옥의 두려움과 상관없이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사랑하는 친구여, 스쿠갈(Scougal)이,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는 더 강력한 동기이다”라고 말한 것을 자네도 기억할테지. 그러나 이것은 넘어가서, 정직하게 보상과 형벌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행동하도록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된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렇기에) 어떻게 선택 교리가 이러한 동기들을 파괴하는가?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들의 보상이 더 크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이것이 그들을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데 인내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격려가 되지 않는가? 어떻게 선택 교리가 거룩함을 파괴하는가? 사도가, “성령의 성결케 하심을 통해 선택되었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설교한 것 말고 어느 누가 그 밖의 다른 선택을 설교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네. 선택을 설교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면, 거룩은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표증이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선택의 교리가 거룩을 파괴할 수 있는가?
자네가 자네의 논증을 예증하기 위해 들고 있는 예는, 정말이지, 사랑하는 친구여, 완전히 이것과 관계가 없는 것이네. 자네는, “만약 어떤 아픈 사람이 어느 쪽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불가피하게 죽거나 아니면 불가피하게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가 치료를 받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네. 사랑하는 형제여, 이게 무슨 불합리한 논법이란 말인가?
자네는 평생토록 아팠던 적이 없었는가? 아무리 자네가 틀림없이 살거나 죽는다는 사실이 고정 불변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자네가 회복될 수 있다고 하는 있는 그대로의 가망성, 혹은 그 가능성이 치료를 받도록 자네를 격려하지 않았었나?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치료를 통해 자네를 회복하시기로 작정하셨을지를 자네가 어떻게 알겠는가? 선택의 교리가 바로 이와같네.
내가 반드시 저주를 받거나 아니면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이 고정 불변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 내가 육에 속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애씀이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의 상태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나에게 복을 주시려고 작정하신 도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내가 애를 쓰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친구여,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게. 치우치지 않는 적용을 해 보게. 그리고 나서, “따라서 이 교리는 일반적으로 거룩함의 바로 그 문을 직접 닫아 버려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거룩함에 접근하거나 혹은 거룩함에 들어가도록 애쓰는 것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12번째 페이지의 10번째 문단에서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미약한 이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를 판단해 보게.
자네는, “직접적으로 이 교리는 온유함, 사랑 등과 같은 거룩의 여러 가지 특정 가지들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사랑하는 친구여. 이 문단에 관해서는 조금만 답변하겠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가 아마도 선택을 붙잡고 있는 몇몇 미지근하고 좁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는, 그들의 정신이 미지근하고 좁은 것이 그들의 원칙들 때문이라고 추론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그러나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예정론자이면서 온유하고 겸손하며, 긍휼이 여기고 정중하며,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고 친절하며, 포용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가장 간악하고 방탕한 사람이 회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많은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알지 못하는가? 그들이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적인 사랑의 행위로 그들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금은 가장 버려진 것 같아 보이는 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전적으로 이 교리들을 고수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몇몇 사람들의 관행으로부터, 일반적으로는 원칙들의 진리 여부를, 특정적으로는 선택 교리의 진리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되네. 그렇게 되면, 자네 자신의 교리에 대한 큰 반대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네.
자네는 만인 구원론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과 연관된 편협한 정신과 얼마늬 혼적 분열을 자네 자신 안에서 느꼈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는가? 나는 이 부분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자네 마음에 호소하는 바이네. 만약 그랬다면, 자네 자신의 규칙에 따라 만인 구원론은 틀린 것이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온유, 사랑 등과 같은 거룩함의 여러 가지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네.
그러나 이것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사도가 펼치는 논증의 힘과 그가 골로새서 3장 12, 13절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하고 있는 말들에 의해, 자네의 추론이 완전히 제쳐지고 있는 것을 보라고 당부하고 싶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에서 사도는 이것을 생각하고, 즉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기 때문에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등으로 옷 입으라고 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보네. 경험적으로 이 교리를 마음 속으로 느꼈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라는 사실의 순전한 결과임을 느끼고 있네.
그러나 아마도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이 점에서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열심만을 열정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네. 사랑하는 친구여, 사도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 1:3)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을 터이니.
그러므로 선택 교리를 향해 열심있어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좁은 마음을 가졌다거나 핍박자라고 정죄해서는 안되네. 왜냐하면 그들은 자네를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네.
내가 확신하는 바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자네를 사랑하며 자네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친구여, 비록 고의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자네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분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한 자네의 잘못을 반대하는 데 내 뜻을 굽힐 수가 없네. 주님이여, 웨슬리의 마음의 눈으로부터 편견의 껍질을 벗겨 주시고, 참된 기독교 지식을 따라 그에게 열심을 주옵소서!
세 번째로, 자네의 설교는, “이 교리는 신앙의 평안함, 기독교의 행복 등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그러나 선택을 결코 믿지 않는 웨슬리 자네가 어떻게 이것을 아는가? 선택 교리를 경험한 사람들은 우리의 17번째 조항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정하심과 선택에 관한 신성한 생각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안에서 육체의 일과 땅에 속한 것을 죽이며 그들의 마음을 높은 것과 하늘에 있는 것에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역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달콤하고 기쁘며 말할 수 없는 평안으로 충만한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누릴 수 있도록 영원한 구원의 믿음을 크게 확립해 주고 확증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 등을 향한 그들의 사랑에 강렬한 불을 붙이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네.
이것은 우리의 경건한 종교개혁자들이 선택 교리가 거룩함이나 신앙의 평안함을 파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네. 나로서는, 이 교리가 매일 나를 지탱해 주고 있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도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선택하셨고, 지금 효과적으로 나를 불러 주셨기에, 아무도 나를 그분의 강력한 손에서 잡아채도록 놓아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확신하지 않았다면, 임박한 시련의 두려움 아래에서 극심하게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을 것이네.
자네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하고 있더군. “이것은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믿거나 아니면 단지 그것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다. 모든 크고 귀한 약속들이 그들에게 상실되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위로의 광선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에 답변하면서, 나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지하도록 해 주게나. 즉 살아 있는 아무도, 특별히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 받는 자의 수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자신이 선택되지 않았다고 두려워할 만한 그 어떤 타당한 이유를 가질 수 없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육신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러한 상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거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양식인 복음의 귀한 약속을 그들에게도 감시 적용시킬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네! 선택과 영벌의 교리가 몇몇 사람들을 의심하게 만들면 어쩌겠는가?
중생의 교리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이러한 의심이 그들을 찾아보고 열심히 애쓰게 만드는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애씀이 그들의 부르심과 선택을 확실하게 해 주는 선한 도구가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다른 많은 이유들 중에서 내가 선택의 교리에 찬탄하고, 이 교리를 복음적인 목회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신실함과 주의 깊은 마음을 가지고 이 교리를 주장하는 한 가지 이유이네.
이 교리는 세속적인 안정감으로부터 영혼을 일으키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이 교리에 대해 반대를 외치는 것이네. 반면에 만인 구원론은 슬프게도 영혼을 둔감하고 졸린 상태에 있도록 만드는 순응된 개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 그것에 감복하고 환호를 보내는 것이네.
다음으로 자네의 13번째, 14번째, 15번째 문단을 생각해 보려고 하네. “(자네가 말하길) 경험은 성령의 증거가 이 교리에 의해 크게 저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누구의 경험을 말하는 것인가? 설마 자네의 것은 아니겠지. 자네가 조지아를 떠나 런던으로 돌아가는 동안에 쓴 자네 일기에서, 자네는 그러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따라서 자네는 이 문제에 있어서 자격있는 심판관은 아닌 것 같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겠군. 왜냐하면 자네가 같은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네. “심지어 좋은 은사를 맛보았으나 곧 그것을 다시 잃어 버리고 (그것에 대한 감각을 다시 잃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네) 의심과 두려움과 어둠과, 그리고 느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어둠 등에 떨어지는 사람들안에서 조차.”
이제, 버려짐의 어둠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헤아릴 수 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후에 그분 자신의 경우가 아니었는가? 동산에서, 심지어 사망에 이를 정도로 그 분의 영혼이 심하게 고뇌하지 않으셨는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그분은 그 끔찍한 어둠, 느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어둠에 휩싸이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그 동일한 것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으로부터 분명하지 않은가?
사도가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리라” (히 2:18)라고 말하고 있네. 거기다가 고난 중에 계셨던 그분을 따라 일관되게 쫓는 것이 그분의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마땅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성령의 증거를 받은 후에 어둠에 빠져 버린 사람들이 선택 교리를 반대하는 반대의 논증이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교리를 고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지구 전역에서 그들이 처음으로 믿었던 그 순간부터 바로 오늘까지,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막힘 없는 성령의 증거와 계속되는 하나님의 얼굴의 비취심을 누리고 있다”라고 자네는 말하고 있네. 그러나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지구 전역에 있는 많은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자네가 직접 다 조사해 보았는가? 아니면, 자네가 충분한 기초없이 진척시킨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이 이러한 빛 가운데 계속 거하는 것이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덕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럴 수 없네. 우리 교회의 정서에 따르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믿음을 크게 확증하고 세워 주며”, 그리스도인이 어둠 속을 걷고 있고 빛을 전혀 보지 못할 때라도, 확실하고 견고하게 그들의 소망의 닻이 되어 주는 것이네.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성령의 증거를 받은 후에라도 이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네. 자네 혹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분별없이 그와 반대로 무엇을 주장하든지 간에 말일세.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주의하면서, 변치 않으시는 그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구별된 사랑에 자신을 내던지면, 축 늘어진 팔이 일으켜지고 연약한 무릎이 강하게 될 것일세. 그러나 선택 교리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불변함에 대한 믿음 없이, 영원한 구원에 대해 편안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네.
어떤 사람이 과거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장차 마귀의 자식이 되어 버려 마침내는 지옥으로 던져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장차 올 진노로부터 건짐 받는 것을 선한 열심으로 구하라고 경고를 받았다고 가정해 보게. 만약 그 사람의 양심이 완전히 깨어 있다면 이러한 사실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겠는가? 그러한 확신이 자기 마음의 부패함과 패역함을, 악의와 교활함, 그리고 사탄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어떤 견고하고 영속하는 위안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네!
믿음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이름에 오로지 합당한 것은, 하나님의 구별된 사랑에 대하여 그가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가운데, 자기를 멸하려는 현재의 시련들뿐만 아니라 모든 미래와 관련하여, 사도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3-39)라고 말했듯이, 사람이든 귀신이든 모든 대적에게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신자를 담대하게 해 주는 그런 확신뿐이네.
사랑하는 친구여, 이것은 믿음의 충만한 확신을 얻은 모든 영혼들이 내 뿜는 승리의 언어이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적인 영원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갖지만 내일도 그분 안에 있을 것이라는, 하물며 영원토록 내내 그분 안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갖지 못하거나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특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완전함이요 불행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그러한 그분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끄사, 더 이상 그들 자신의 의로움 위에 세우지 아니하고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의 변치 않음 위에 세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드리네.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이전에 관찰한 바로는 사람들의 관행으로부터 원칙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항상 안전한 법칙만은 아니더군. 따라서 믿음을 받은 후에 자네가 설명한 방식으로 만인 구원론을 고수하는 모든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막힘 없는 하나님의 얼굴 빛을 누리고 있다고 가정한다고 해서,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원칙의 열매라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네. 왜냐하면 피조물은 그로 말미암아 그가 구원의 상태에 계속 있는 것이 자신의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가르침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 교리는 자연스럽게 영혼을 영원토록 어둠 속에 가두어 두는 경향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네.
불쌍한 피조물이 얼마나 불안정한 모래 같은 토대 위에 견인의 소망을 세우고 있는가? 죄에 빠뜨리는 온갖 타락과, 유혹으로 인한 모든 경악들이 틀림없이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끔찍한 어둠, 느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어둠 속으로’ 그를 던져 넣을 걸세.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 만인 구원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 반대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받은 편지들과 비교하여 볼 때 죽어 있고 생명력이 없으며 메마르고 모순되어 있네.
만인 구원 계획에 안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들이 성령 안에서 시작했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 반대로 무어라 말하든 간에), 육체로 마치고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 위에 기초를 둔 의로움을 쌓아 가고 있으나, 반면 그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그가 느낄 수 있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에게서 거두어질 때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개가를 울리고 하나님의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약속과 변치 않으시는 사랑 위에서 의로움을 세워 간다네.
그러나 어느 특정한 개인들의 경험에 의해 선택 교리의 진리 여부를 판단하지는 않겠네. 그랬다면 (오, 자랑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나를 참아 주게나), 분명 나 자신이 선택 교리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근래 5, 6년 동안 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증거를 받아 왔네. 나는 그때 이래로 단 한순간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네. 하지만 그 때 이래로 종종 죄에 빠지곤 했네. 어떤 한 범죄도 허용치 않았고, 감히 허용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하루도 (지금의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감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기대도 안 하지만) 모든 결점과 죄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서 살 수 없었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은혜를 가장 크게 받은 사람들 중에도 전혀 없으며, “이 땅 위에 단 한 사람도 없다”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경우가 모두 이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네. 매 세대에 있었던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이러한 사실이 보편적으로 경험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로, “사람이 거듭난 후에는 죄를 지을 수 없다”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논박하기에 충분하네. 특별히, 진리가 없어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고도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성령께서 정죄하시기 때문이네 (요일 1:8, 10).
나는 또한 가지 각색의 유혹을 지났으며 낙심 가운데 있었다네. 아마도 죽기 전에 종종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네.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러했고, 내가 발견할 수 있는 한에서 단호하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선택 교리를 고수했던 하나님의 사람 루터도 그러했네. 위대한 존 안트는 단지 그가 죽기 얼마 전에 극심한 혼란에 빠졌는데, 그는 전혀 예정론자가 아니었네.
내가 자유롭게 말해야만 한다면, 나는 자네가 선택 교리에 대항하여 그토록 완강하게 싸우고 죄 없는 완전함을 위해 그토록 열렬하게 항변하는 것이, 자네가 복음의 자유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적이고 영원한 사랑을 경험적으로 맛보고 매일 배불리 먹고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그 믿음의 충만함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이유들, 또는 책잡을 만한 원인들 중의 하나라고 믿고 있네.
그러나 아마도 자네는 루터와 안트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적어도 매우 연약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탁월하게 불리웠음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아브라함을 하찮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한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그러하기에 자네가 얼만 전에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네가 읽어 온 침례교 저자나 장로교 저자 중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유에 관해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무슨 소린가! 번연 (Bunyan), 헨리 (Henry), 플라벨 (Flavel), 할리버톤 (Halyburton)도, 그 어떤 뉴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사역자들 중 아무도 그렇지 않다는 소리인가!
사랑하는 친구여, 얼마나 편협한 정신과 사랑의 결핍이 자네의 원칙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게나. 그리고 나서 ‘온유함과 사랑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 선택에 대해 반대하며 부르짖지 말게나.
네 번째로, 이제 나는 또 다른 주제로 나아가야겠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수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어떤 아직 짓지 아니한 죄악이나 잘못없이 불변적으로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질 운명으로 정해졌다는 이러한 생각은 얼마나 거북한가?”라고 말하고 있네.
그러나 어떤 짓지 아니한 죄악이나 잘못없이 수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불변적으로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질 운명이라고 단언하신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원한 불 속으로 던져 넣으시도록 운명을 정하셨다고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또한 그들을 아담 안에서 타락한 사람들로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형벌을 제정했던 그 율례가 그 율례에 의해 마땅히 정죄받아야 하는 그 범죄를 우선 주의하여 보지 않겠는가?
분명 웨슬리 자네는 아담의 죄를 그 자손에게 전가하는 것에 있어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할 것일세. 또한 아담과 아담 안에 있는 그의 자손들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 누구든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 자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당연히 간과하셨을 거라는 사실 역시 인정하고 있을 것일세. 자네가 진심으로 이 점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원죄를 바르게 믿고 있는 것이 아니네.
자네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선택과 영벌의 교리가 굉장히 정당하고 합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시키시고 그 후에 모든 사람들을 간과하시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면 몇몇 사람들을 간과하시는 것도 정당할 수 있기 때문이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자네는 풀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일세. 자네가 일관되려 한다면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교리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 결과로써의 거룩하고 의로운 영벌과 함께 사랑스러운 선택 교리를 받아들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만 하네. 자네가 믿을 수 있건 없건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게 지속되네.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롬 11:7).
16페이지, 17번째 문단은 지나가겠네. 약간만 변경한다면 9번째와 10번째 문단에 관해 말한 것이 답변이 될 것일세. 오직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선한 일에 넘쳐나도록 나를 가장 압박하는 것이 바로 선택 교리라는 점이네. 하나님께서는 나로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모든 고난을 받도록 만드셨네. 이 때문에 나는 평안하게 설교를 하네. 왜냐하면 구원이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께서 그분의 능력의 날에 자원하게 하시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몇몇 택하신 사람들을 본향으로 이끄시는데 나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네. 그러나,
다섯 번째로, 자네는,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 전체를 뒤엎어 버리는 직접적이고 명백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왜냐하면 기독교의 계시가 없는 곳에 살았던 사람들 중 일부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라는 변치 않은 영원한 율례를 개정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 의해 교회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오직 기독교 계시에 의해서이지 않은가? 그렇다네. 이것은 영원한 언약에 안착된 것으로, 이 구원은 그 아들을 아는 지식과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네. 선지자 이사야 53장 11절에서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고 말하고 있듯이 말이네. 그런데 어떻게 선택 교리가 전체 기독교 계시를 뒤엎는 직접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파종과 추수 때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셨다고 해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을 태만하게 해도 된다는 논쟁이 가당할 수 있는가? 또한 수확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이 있다고 해서, 추수를 내기 위한 태양의 열기와 천체의 영향력이 불필요하게 되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절대적인 목적은 복음의 계시의 필요성, 또는 하나님께서 율례가 효력을 나타내도록 정하신 어떤 수단의 사용을 배제하고 있지 않네. 바른 이해, 혹은 하나님의 율례에 대한 경건한 믿음은 어떤 경우에든 기독교인을 목적으로부터 수단을 분리하거나 수단으로부터 목적을 분리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것으로 고통받게 하지 않을 것이네. 계시는 선택 받은 자들이 죄를 자각할 수 있게 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의도되고 주어지는 것이라고 이 계시 자체에 의해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 있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계시를 어디에 보내시든, 조만간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을 그 부르심 안에서 구원하시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는 충만한 확신 안에서, 기쁨으로 이 계시를 받고, 크게 소중히 여기며, 믿음 안에서 사용하고 온 세상에서 전파하도록 힘을 다하는 것이네. 그렇다면 이 교리를 고수한다고 해서 어떻게 우리가 기독교 계시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에 있어 현대의 믿지 않는 자들과 연합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네.
사랑하는 친구여, 자네가 실수한 것이네. 모든 종류의 이교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네 쪽에 있네. 자연신론자, 아리우스파, 소시니안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비난하고 만인 구원을 지지하고 있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의 설교가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슬프게 했듯이, 또한 대부분의 공공연한 하나님의 많은 원수들의 손을 강하게 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네!
이곳에서 나는 거의 드러누워 흐느껴 울 판이라네. “오, 가드에서는 그것을 말하지 말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딸들이 기뻐하지 않도록, 믿지 않는 자들의 아들들이 개가를 울리지 않도록 아스글론의 거리에서는 그것을 출판하지 말게나!” 더 나아가 자네는, “이 교리는 계시를 그 자체와 모순되게 만든다”라고 말하고 있네. 예를 들면, 자네는, “이 교리의 주장자들은 ‘야곱은 내가 사랑하였으나 에서는 내가 미워하였다’라는 성경 본문을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하나님께서 에서와 버림 받은 모든 사람들을 영원 전부터 미워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타락한 것으로 간주할 때, 그들 모두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이 아니었나?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야곱과 선택받은 사람들은 사랑하시거나, 그분의 은총을 보여 주시고, 동시에 영벌을 받을 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뭐가 잘못되겠는가? 그러나 자네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은총을 보여 주시지 않는 한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 없단 말인가!
거기다가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이 여기시고’라는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은 단지 몇몇 사람, 즉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만 자비로우시다고, 특별히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긍휼로 그 모든 행사를 덮으셨다는 말씀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성경의 전체 행로와 완전히 반대 되게도, 오직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긍휼을 베푸신다고 추론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그렇지 않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불의한 자와 선한 사람에게 모든 비를 내리시네. 그러나 자네는 “하나님은 전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네! 왜냐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나, “믿지 않은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네.
인생의 외적 조건이나 상황의 어떠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전혀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선택 교리는 하나님이 차별적이시라고 조금도 상정하지 않는다네. 그러나 아무에게도 빚이 없으신, 모든 이의 주권적인 주로서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 분의 기쁘심을 따라 그 분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시고, 그분이 적당하다고 보시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실 권리가 있으시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최고 권리는 분명하고 강하게 다음과 같은 성경 본문에서 강력히 주장되고 있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네 (롬 9:15, 출 33:19).
더 나아가서 자네는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도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1, 12)라는 본문으로부터 생명으로의 예정하심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추론한 채 우리를 설명하고 있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누가 이것을 추론했나? 왜냐하면 만약 미리 아심이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그러하듯이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예정과 선택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달려 있다고 고백하는 바이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택하고 따라서 그들을 선택하는 토대나 혹은 근거로서 피조물들에 의해 행해진 얼마의 선행을 예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의미에서 예정은 결단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바이네.
이 편진의 서두에서 에드워즈 박사의 “부활한 진리”를 참조해 보라고 자네에게 권했었는데, 이 후반에서도 또한 엘리샤 코울즈 (Elisha Coles)의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책과 함께 에드워즈 박사의 책을 추천하는 바이네. 부디 이러한 책들과 또한 내가 자네에게 보낸 뉴잉글랜드의 보스톤에 있는 쿠퍼의 탁월한 설교 역시 읽어 보게나. 그러면 의심할 바 없이 자네의 모든 반대가 답변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마침내 양쪽의 질문을 다 읽는다 해도, 이 생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율례를 완전하게 살필 수는 없을 것일세. 그럴 수 없네. 우리는 마치 저 위대한 사도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탐구의 마지막에서, “깊도다..”라고 부르짓었고, 또한 우리 주님께서,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6)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주권에 경탄하셨을 때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겸손하게 흠모해야만 하네.
그러나 “아무도 멸망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내가 죽은 자를 전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및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들을 가장 엄격한 의미로 해석하면, 결국 아무도 정죄를 받지 않게 되는 게 아니냐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이 적적할 수도 있을 것 같네. 그러나 여기 그 구별이 있네. 하나님께서는 단지 죄인들의 죽음을 기뻐하시기 위해 그들의 죽음에서 기쁨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네. 다만 죄인들이 죄악에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을 죄인들에게 지우심으로, 그분의 정의를 증대시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네. 죄인을 정죄하시는 것에서 아무 기쁨도 취하지 않으시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법과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비록 그 죄인의 사형 집행을 연기할 수 있는 힘이 그의 능력 안에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공정하게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네.
한발 더 나아가 내가 자네에게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자네가 진술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만인 구원의 교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존엄과 그 피의 공로에 정말이지 가장 심각한 치욕이 되고 있기 때문에, 자네는 불경스럽게도 영벌의 교리를 부당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라네.
자네가 말하듯이, “그리스도께서 구원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멸망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신성모독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이것을 주해하기 위해 자네는 본문을 잘못 적용하고 있더군. 리즐리 (Ridgely), 에드워즈, 헨리가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그리고 내가 직접 자네의 본문에 답변하는 것은 일부로 생략했다네. 그래야 자네가 그러한 논문들을 읽게 될 것이고, 그 논문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서 자네에게 자네의 오류를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네.
(모라비안 형제들 중의 한 명의 피터 볼러라는 사람이 만인 구원을 입증하기 위해, 최근에 한 편지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듯이), “정죄받은 모든 영혼들은 장차 지옥에서 견져질 것이다”라는 사실을 고수하지 않고 자네는, “그리스도께서 멸망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라는 주장을 성립시킬 수 없을 것이네. 나는 웨슬리 자네가 이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네. 여전히 자네가 이 사실을 고수하지 않는 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취했을 때 만인 구원론은 완전히 땅에 곤두박질치게 된다고 입증할 수 있다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구속함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친구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도, 선택을 부정함으로 자네가 얼마나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게. 자네는 노골적으로 구원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게 만들고 있네. 만약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죽으신 자신의 죽음의 열매를 보고 만족하실 리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설교도 헛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는 모든 초청도 역시 헛될 것이네.
그러나 하나님을 송축하네. 우리 주님은 자신이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지를 아셨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계약이 있었네. 아들의 순종과 죽음의 대가와 보상으로 그때 특정 수의 사람들이 그분에게 주어졌네.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네. 이들을 위해서, 오직 이들을 위해서만 주님은 지금도 중보하고 계시고, 그들의 구원으로 주님은 완전히 만족하실 것이네.
자네 설교의 마지막 여러 페이지들에 관해서 더 이상 상세하게 논하는 것은 일부러 그만 두겠네. 사랑하는 친구여, 정말이지 자네의 이름이 이 설교 앞에 붙어 있지만 않았어도, 자네가 이러한 궤변의 저자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만큼 그렇게 가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네. 자네는, “(내가 추측하기로, 몇몇 사람들이 정죄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개개인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교묘히 논점을 피하고 있네.
자네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든 간과하시면 하나님은 부당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어떤 견실한 증거도 없이) 당연히 여기고 있네. 그러면서 이 지엄한 율례에 대해 큰 소리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라네. 그럼에도 내가 이전에 잠깐 내비쳤듯이 원죄의 교리를 고수한다면, 설사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간과하신다 하더라도 정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네는 믿어야만 하네.
사랑하는 친구여, 오, 부디 마음 상하지 말게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디 경솔하지 말게나. 은혜의 언약을 공부해 보게. 자네의 육적인 논증을 내려 놓게나. 어린아이가 되게나. 만약 만인 구원 교리가 진리가 아니라면, 자네가 최근의 찬송집 서문에서 그랬듯이, 죄 없는 완전함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에, 그리고 자네가 이 설교에서 그랬듯이, 사람의 구원을 그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게 만드는 대신에, 주권적인 구별적 사랑을 찬양하는 것으로 찬송을 짓게 될 것일세.
믿는 자들이 그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완전함을 행사하려고 전력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게 될 것이고, 이와 반대되는 또 다른 설교를 출판하게 될 것이며, 그제서야 그 설교를 값없는 은혜라고 이름 붙이게 될 것일세.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시기 때문에 값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사람과 그분이 기뻐하시는 때에 거두기도 하시고 주기도 하시기 때문에 값없는 것이라네.
자네가 이 일을 하기까지, 나는 자네가 자네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의심해야만 하겠네. 그 사이에, 자네 자신이 자네의 원칙에 의해서 9번째, 10번째, 17번째 조항을 명확하게 부정하면서, 우리 교회의 사역자들이 그들의 조항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한 것에 대해 자네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네.
사랑하는 친구여, 이러한 일들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네. 전에도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네. 그렇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영예와 관련된 그것만이 이 편지를 쓰게 했다고 다시금 나의 입장을 표명하는 바이네. 그 분을 위하여 나는 자네를 사랑하고 존경하네. 그리고 내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에서 자네가 내 영혼을 위해 행한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자네에게 감사할 것이네.
나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가 선택한 영원한 사랑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네. 그때 자네가 자네의 면류관을 어린 양의 발 앞에 던져 버리는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리고 자네가 지금껏 해 왔던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반대한 것 때문에 자네 얼굴이 온통 거룩한 부끄러움으로 붉어져 있는 모습을 어떻게 볼까 생각하면, 종종 기쁨으로 내 마음이 충만해진다네.
그러나 주님께서 자네가 죽기 전에 이 사실을 보여 주시기를 바라네. 오, 내가 그날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를 아는가! 주님께서 이 편지를 그 목적으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여, 나의 마음이 기쁨으로 흘러 넘칠 것이네.
그리스도 안에서 무익한 형제요 종인,
조지 휫필드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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