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불씨를 던진 마틴 루터
개혁주의 자료 2014. 12. 28. 03:52종교개혁의 불씨를 던진 ‘마틴 루터’
루터(1484-1546)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교회는 물론 세계 역사가 일대 큰 변혁을 이루게 된다. 루터의 등장과 ‘95개조 반박문’은 처음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했지만 그 불씨에 의해 번진 파장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루터의 독특성은 그의 생애에서 비롯된다. 1505년 22세 때, 훌륭한 대학이었던 엘푸르트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와서 잔치를 치렀다. 그 후 엘푸르트로 돌아가다가 루터는 번개를 맞은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죽음의 공포에 빠지게 되고, 공포 가운데 하나님께 “살려주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 후 루터는 곧장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왜 하나님을 따르고 위하고 싶은데,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있는가’의 문제로 고민했다. 로마에 가서 스칼라 상타라 부르는 빌라도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기도했지만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
스승은 불안해 하는 그를 위해 신학을 공부하게 했다.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그에서 공부를 하고 1513년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어느날 자기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루터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라는 시편 22장 1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도 고통을 당했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게 됐다.
그 후 루터는 계속 공부를 하다가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진리가 바로 ‘칭의’였다. 그때까지 로마 가톨릭은 세례를 받을 때 원죄가 사라지면서 첫 번째 칭의를 받지만, 두 번째 칭의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두 번째 칭의는 첫 번째 주신 은혜의 체험을 기초로 선행을 행하는 우리의 삶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시고 구원받는 칭의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선행과 봉사가 필요하고, 하나님께 능력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듯 지금까지는 행함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배웠는데, 로마서 1장 16-17절을 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비로소 루터가 발견한 것이다.
루터가 칭의의 진리를 발견할 당시, 교회(로마 카톨릭)가 면죄부를 발행해 신자들에게 팔아먹고 그것으로 죄를 감해주는 것을 보았다. 루터는 학자요 목사로서 이처럼 진리를 왜곡시키는 당시 교회의 모습을 95개 조항으로 만들어 1517년 10월 31일에, 전설에 의하면 당시 대학교회인 ‘캐슬 처치’ 입구에 붙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다.
맨처음 독일어로 쓰인 그것을 독일인들은 2주 만에 읽었고, 곧바로 라틴어로 번역돼 두 달 만에 온 유럽이 다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가 제기한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동의했고 같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봇물은 막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갇혀 있었던 울분을 터뜨렸다. 루터가 쓴 글에 온 세상 사람들이 집중하면서, 이 움직임이 대중화가 되고 세상은 서서히 개혁의 분위기로 진행됐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한 ‘츠빙글리’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종교개혁 시발의 전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츠빙글리(1484-1531)라는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루터와 같은 시기에 신부로서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과감하게 개혁활동을 단행한 인물이다.
당시 스위스에는 용병제도가 있었다. 그 용병들과 함께 츠빙글리는 군목으로 생활했다. 그는 1515년에 마리그나노 전투에서 함께 동참한 젊은이들이 1만명이나 죽는 것을 목도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 츠빙글리는 용병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쫓겨났다.
갈 곳이 없어진 츠빙글리는 당시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교회에서 3년 간 설교를 했다. 그러던 중 순례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궐석 상태에 있던 취리히의 목회직에 츠빙글리를 추천했다. 그 때가 1519년이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목회를 하면서 젊은이들을 모아서 성경공부를 시키고 복음적인 내용을 성실하게 설교했다.
당시 스위스는 여러 자치 도시들이 모여 한 나라를 구성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스위스는 프로테스탄트를 따를 것인지 로마 가톨릭을 따를 것인지를 시의회에서 결정했다. 츠빙글리는 시의회와 함께 교회를 개혁해 나가자고 했다.
츠빙글리는 67개 조항으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말했으며,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독교 신앙 개요’ 및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해석’을 출간하고, 개혁은 가톨릭의 종교 의식과 법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며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지킬 필요가 없음을 주장했다.
종교개혁을 체계화한 ‘칼빈’
오늘날 수많은 신학자들은 ‘만약 칼빈(1509-1564)이 없었으면 기독교는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로마 가톨릭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로테스탄트의 칼빈을 대조해서 비교한다. 아퀴나스가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신앙을 총정리했다면, 칼빈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과 신앙을 총정리한 위대한 인물이다.
카톨릭의 신학체계 정립을 위해 아퀴나스는 수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저술한 ‘신학총론’, 다른 말로 ‘신학대전’이 수십 권이다. 반면 칼빈은 단 한 권의 책을 썼다. 그 책이 바로 ‘기독교 강요’다. 그는 이 책 안에 기독교의 기본진리, 무엇을 믿으며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기독교인이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섰다.
칼빈은 프랑스인이지만 스위스에서 목회를 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기독교 강요 초판을 썼다.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도전을 받았다. 이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는 제네바를 지나다가 귀욤 파렐을 만나서 그의 목회를 도왔다.
칼빈은 1538년에 제네바에서 어려움을 당해 스트라스부르그로 옮겨 3년간 마틴 부처와 함께 목회를 하다가, 1541년 다시 제네바 사람들의 후원과 초청으로 제네바에서 목회를 하게 됐다. 그 때부터 말년까지 시종 목회를 하면서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우고, 기독교 강요도 썼다. 그의 모든 설교는 성경 강해였기 때문에 칼빈 주석으로 남아있게 됐다.
칼빈에게는 츠빙글리와 같은 극적인 회심이나, 루터와 같은 극적인 개종의 경험은 없었다. 그는 법학도로서 사리판단이 분명했고 논리적이었으며 내성적이었다. 칼빈이 루터나 츠빙글리와 다른 점은 종교개혁을 체계화한 것이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종교개혁 1세대 인물인 반면 칼빈은 2세대 인물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약 30년 후에 그 속에 뛰어들어 개신교의 신학체계를 정리한 사람이었다.
종교개혁을 체계화한 ‘칼빈’
종교개혁자들은 처음에 가졌던 숭고한 신앙이 사회적 정황으로 인해 정치적인 성격을 띠면서 후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잃기도 했다.
1525년 독일 전역이 농민전쟁의 전운에 휩싸였을 때, 루터는 처음에는 압제적인 귀족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농민 편을 들었다. 그러다가 농민들의 반란이 맹렬해지자, 입장을 바꾸어 농민들이 제시한 12개 조항을 비판하고,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당국의 개입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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