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스라엘 사람
개혁주의 자료 2014. 3. 18. 00:15참 이스라엘 사람(요1:43-51)
요한복음 1장 35-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35절에부터 42절까지에는 세례요한의 소개로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그의 형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인 43-51에 보면, 안드레와 베드로의 전도로 빌립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또 그 다음에는 빌립의 전도로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제자가 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나다나엘이란 사람의 이름은 이 본문에만 한 번 나오고 성경의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성경학자들은 이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바돌로매라고 하는 제자와 동 일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마 10:2-4). 왜냐하면 사실상 바돌로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실제적인 개인 이름이 아니고 ‘돌로마이라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보면 나다나엘, 즉 바돌로매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건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먼저 믿게 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니까, 처음에 나다나엘은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즉 빌립이 말하기를 “성경에 약속되어진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내가 만났는데, 그분은 요셉의 아들로서 나사렛 사람인 예수다.” 그렇게 말하니까, 나다나엘은 “아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정색을 하며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한번 와서 보라”고 권하는 빌립의 말을 듣고 “그럴 리가 없지”하면서 따라갔던 나다나엘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 예수님이 정말로 그리스도란 것을 믿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날부터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 즉 12사도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물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방을 천한 지역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은 그런 갈릴리 지역 중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로서 그런 곳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엄밀히 따진다면 나사렛 예수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대부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멸시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아이라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서 만나보니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처럼 반신반의하며 예수님께 나왔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고 하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 날까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며, 예수님께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까지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처음 보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안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사람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계신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나다나엘의 성품과 인격까지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자기를 알아보시자 나다나엘은 깜짝 놀랍니다. “아니,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번에는 더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나다나엘아,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도 내가 다 보았노라”
여기서 나다나엘은 더욱 놀라서 자기 앞에 서있는 이 분이 정말로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선생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을 제가 이제야 알겠습니다”하고 외치게 됩니다. 이러한 나다나엘의 놀라움에 가득찬 외침, 즉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고 한 고백이야말로 성경에서 나오는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 중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 즉 그리스도이십니다. 조금 전만 해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의심을 했던 나다나엘은 이처럼 예수님을 대면하자 그가 누구신지를 깨닫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나다나엘은 그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영광된 신분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고 한마디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약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약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배척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껍데기만 하나님의 백성인 거짓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 땅에 와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왜 이리도 없는가 하는 슬픔으로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눈앞에 나타난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예수님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이 보여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성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간사함이 그 속에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간사함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을 때 이 ‘간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돌로스(dolos)’로서, 그 원래의 뜻은 고기를 낚을 때 사용하는 미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낚시를 즐기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낚시라는 것이 인간들 편에서는 재미있고 고상한 취미인지 몰라도, 물고기들 입장에서 보면 낚시라는 것은 미끼를 던져서 어리숙한 물고기를 유인해 낚아채는 아주 교활한 속임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돌로스라고 하는 단어는 미끼라고 하는 뜻 외에도 교활함, 속임수, 또는 잔꾀라고 하는 의미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이스라엘 사람은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거짓이나 위선, 또는 잔꾀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간사함이 없는 인격, 이것은 참 이스라엘 사람, 즉 참된 하나님 백성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시편 32:2에서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간사한 사람입니까?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의 면전에서는 간을 내 줄 듯이 친밀하게 굴면서도 뒤로 돌아서서는 흉을 보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으로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진실히 살기보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행동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도 간사한 사람입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얄팍한 잔꾀를 부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 약속을 해놓고서도 형편이 달라지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약속 어기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하는 사람, 그런 사람도 간사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가 없고, 진정한 주님의 일군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때때로 잔꾀를 잘 부리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교회만은 세상과 달라야 하겠는데도, 교회에서도 보면 거짓말할 줄 모르는 진실한 사람보다도 잔꾀를 잘 부리는 사람이 더 인정을 받는 것을 때때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는 순간 그의 중심을 보시고 그가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 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다나엘은 간사함이 없었다고 하는 것과 함께 오늘 본문에 살펴보면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가졌던 또 하나의 귀중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고 “빌립이 너를 만나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왜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자 크게 놀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하게 됩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나다나엘이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임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대 지방입니다. 그래서 그처럼 더운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은 흔히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그늘 밑에서 쉬기도 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거기서 말씀을 묵상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신 것은 나다나엘이 빌립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께 나오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늘 기도하기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알고 계셨다고 하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나다나엘이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한적한 곳을 골라서 늘 기도하기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아니 오히려 골방과 같은 장소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는 자세로 기도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신 데에는 나다나엘이 늘 기도에 힘쓰는 사람인 동시에 자나 깨나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아시고 계셨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열왕기상 4장 25절에 보면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아래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솔로몬 왕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민족의 역사는 조용한 날이 없는 역사였습니다.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이스라엘 민족은 늘 주변 열강들의 침략을 받으며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한때 아주 태평하고 번영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솔로몬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솔로몬 임금의 통치 시대가 마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과 같은 태평성대였음을 묘사하는 표현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아래와 무화과나무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런 태평성대는 오래 가지를 않습니다. 솔로몬 임금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 의지하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번영하고 강대국이 되며 또 태평성대를 누렸지만, 솔로몬이 말기에 우상숭배를 하며 범죄하자 하나님은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열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점점 더 타락하면서 국력도 약화일로의 길로 걷다가 마침내는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남북 왕조가 다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은 그 이후로 독립국가로 살아본 적이 없이 페르시아나 헬라, 또는 로마 제국 등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서 억압을 당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런 전쟁이나 재앙이 없는 태평성대를 다시금 누리게 되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그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편안히 지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런 평화의 나라, 즉 전쟁도 없고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오기 바로 직전에도,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고 하는 말은 나다나엘은 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그처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진실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란 것을 아시고, 그를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오늘 무엇에 대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썩어질 세상과 부패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런 소원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이야 어떻게 되어가든 여러분 육신만 편하고 여러분 가정만 복 받기를 바라십니까?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죄악된 이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오, 하나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렇게 간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오늘 여러분이 예수님 앞으로 나간다면 에수님은 여러분을 보시고 무어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을 보시고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구나. 너의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구나”하고 인정해 주실 것 같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인정을 받을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직까지도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간사함과 거짓됨과 잔꾀를 부리는 옛 습성을 버리고 진실하고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야곱이란 인물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본문의 50절과 51절에서 보면 나다나엘은 자기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는데, 여기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 이 정도로 놀라느냐?” 하시면서 “네가 장차 앞으로는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즉 예수님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것은 구약시대 때 야곱이 형님과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채고 나서 자기를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을 가다가 벧엘의 들판에서 잠을 자던 중 꿈속에서 사닥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던 사건을 빗대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구약시대의 야곱은 사닥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제 이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위로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왕래하는 더 놀라운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다리처럼 우리의 유일한 참 중보자가 되시며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늘의 비밀과 영광을 보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하며 이런 영광스러운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먼저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야곱과 같은 옛 사람의 모습으로서는 이런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볼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야곱에게는 두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갖게된 육신적인 이름으로서, 이 야곱이라고 하는 이름이 갖고 있는 뜻이 “간사하다, 간교하다, 잔꾀를 부린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그 이름대로 간교한 사람이었습니다. 형님을 속여먹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먹은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시키시고, 마침내는 얍복 강가에서 그의 인격을 완전히 변화시키시고야 말았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보내드리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끝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날로써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된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 육신의 지혜와 잔꾀로 살아가던 야곱이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사람으로 변화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야곱은 하나님께 얻어맞아서 환도뼈가 부러져, 그 후 일생동안 그는 절름발이로 살게 되었지만, 그것은 영광의 상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간사한 옛 사람이 변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새 사람이 된 표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 일생에 한번은 하나님과 맞닥뜨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과 같은 우리의 옛 성품이 깨어지고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 위로 천사들이 왕래하는 것을 목격하는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일군으로서 우리의 일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도 야곱과 같이 육신적이고 간사한 성품을 계속 가진 채로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고자 하는 기회에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우리의 환도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간사한 옛 성품이 바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축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꼭 받아야 할 축복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환도뼈가 아니라, 목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축복을 사모해야만 할 줄로 압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난과 환난이 없는 평안함이 축복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축복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아야 할 진정한 축복은 우리의 근본적인 성품의 변화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내면적 성품의 변화를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쩌면 고난은 우리가 반드시 통과하고 졸업해야 할 인생의 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난 없이 옛 사람의 성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제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할지라도 실패한 인생입니다. 반면에 고난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말씀의 연구와 기도를 통해서든지 그런 근원적인 성품의 변화가 이루어져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된 사람은 성공한 인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주님으로부터 나다나엘과 같은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구나”하는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거짓되고 간사한 성품을 하나님께 내어놓으며, “하나님 축복해 주십시요. 이 간사한 성품이 변해서 새 이스라엘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만으로 나의 의지를 삼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진실로 기도하는 참 이스라엘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는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나다나엘이 하나님께 나아가 홀로 기도했던 그 무화과나무 아래와 같은 곳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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