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를 참되이 보속하며 양심에 평안을 준다/ 존 칼빈

 

 

그들(카톨릭)은 말하기를, 죄 사함과 화목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갈 때에 단번에 일어난다고 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범하면 다시 보속을 통해서 회복해야 한다고 하며, 교회의 열쇠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들의 패역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와는 전연 달리 말하고 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라”(요일2:12). 그는 신자들을 향하는 말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제시하면서 거역을 당하신 하나님을 진정시킬 수 있는 다른 보속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너희와 화목되셨으니, 이제 너희 스스로 다른 수단을 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대언자로 제시하며,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에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죄를 사하는 영원하신 화목 제물이시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한 말은 언제나 진리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곧, 다름 아닌 오직 그가 죄를 없이 하시는 것이요, 그가 홀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요, 그가 홀로 유일하신 속죄 제물이시요, 화목 제물이시요, 유일하신 보속이시라는 것이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또 다른 각도에서 제시되고 있다. 곧, 우리가 지고 있는 형벌을 그 스스로 담당하셔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죄책을 씻어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속죄에 우리가 참예하게 될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보속으로 하나님을 진정시키려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있는 영광을 빼앗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보속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고 양심을 괴롭힌다.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순전하게 지키며 그 영광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양심으로 죄 사함을 확신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고(사53:6) 그가 맞으신 채찍으로 우리가 낫게 하였다(사53:5)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고(롬8: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갈3:13)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그 저주와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과 사망의 형벌과 함께- 친히 담당하시고 제물로 드리신 바 되셨을 때에, 그의 육신 속에서 죄의 권세와 저주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처음 죄를 씻은 이후부터는 우리 각자가 회개에 합당한 보속을 드리는 정도만큼만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능을 느낄 수 있다는 그들의 거짓된 이론 같은 것은 여기서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죄를 범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보속을 의지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면에 있어서도, 과연 보속을 통해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에 과연 그 사람의 양심이 편안해지겠는가? 과연 어느 정도 보속해야 충분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과연 긍휼하신 분인지에 대해서 항상 의심하게 될 것이고, 언제나 근심에 싸이고 언제나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사소한 인간적인 보속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가볍게 여기며 죄의 그 큰 짐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적절한 보속을 통해서 몇 가지 죄를 속한다 치더라도, 나머지 무수한 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 죄들을 다 보속하자면, 평생을 죄를 보속하는 데 소비한다 해도 수백 번의 인생을 살아도 모자라지 않겠는가?

 

또한, 죄 사함을 선언하는 그 모든 성경의 말씀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교육 받는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의 품에서 양육 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높이 기리는 사신의 임무, 즉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고 선포하는 일은 외인들에게가 아니라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보속과는 작별을 고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탁하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 자기와 화목되”게 하셨다(골1:20)고 말하는데, 그 사실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평생토록 지속되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55-158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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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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