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에 대하여
좐 칼빈 2013. 4. 4. 06:58칼빈에 대하여
1.칼빈과 제네바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아버지는 이름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빈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가정교사 역활을 했다.그러다가 14세가 되어서 드 몽트모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의 길에 나섰다.
칼빈은 파리의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해서 프랑스와 라틴어를 배우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부모의 걱정에 못 이겨서 더 보수적인 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여기서 토론술을 배웠다.
1528년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칼빈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쥬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쥬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칼빈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빈의 동역자가 될 베자를 사귀었다.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빈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 갔는데 이곳에서 부데,콥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 하였다.
1532년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 하였다.
이 무렵 칼빈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으며,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린시스 1세는 개신교도인 휴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사이에 1533년 칼빈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소르본느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으로 제소 하였으며,국회는 이에 동의 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년 10월18일 밤에 열광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 하였다.
칼빈은 1533년 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르의 여왕인 마가리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이 기간동안에 칼빈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개신교주의의 대가인 르 페브르와 사귀었다.
1534년 10월에 칼빈은 고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기도 하였다.칼빈은 프랑스의 개신교도 망명잗ㄹ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슈트라크 부르크를 방문하였으며,그곳의 목회자인 부처로 부터 환영을 받았다.그곳에서 바젤로 옮겨 갔으며,거기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저술하였다.
1) 칼빈의 개혁
파렐은 27세의 칼빈보다도 20세가 더 많았다. 그러나 아직도 젊은 피가 끓은 사람으로서 칼빈과 한 마음이 되기에 충분 했다. 칼빈은 성베드로성당에서 매일같이 바울의 서신들을 가르쳤다.
그러는 사이에 1536년 10월 베른은 새로운 점령지역에 대한 개신교와 로마주의 사이의 대토론회를 개최 하였으며,칼빈은 이 자리에서 교부들을 낱낱이 열거 함으로서 로마주의자들을 납작하게 만들었으며,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 1537년 1월에 칼빈은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 하였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만찬,공중예배에서의 찬양,어린이의 종교교육,결혼등 4가지 였다.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 하였다. 성만찬은 일년에 4차례 집행하며,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 하였다.
2) 칼빈에 대한 배척과 칼빈의 이동
제네바 시는 파렐과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파렐과 칼빈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 시의 간섭과 더불어서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빈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 하였다.베른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을려고 하였으며,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 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꼬로우,파렐,칼빈은 제네바시를 떠날것을 명 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으며,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 하였다.
3) 다시 돌아온 칼빈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오히려 악화되는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1539년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칼빈은 윔스국회에 참석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채 번민에 있었다 이 때 파렐릐 충고가 크게 작용 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 하였다.
2. 제네바의 개혁추진과 칼빈의 신학
칼빈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 이었다.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개혁을 추진하기는 이루 말할수 없이 힘들었다.다시 돌아온 칼빈을 그들은 조직적으로 괴롭혔으며, 칼빈과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뿐만 아니라 제네바로 많은 이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칼빈의 개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 하였다.이들의 출현은 칼빈을 더욱 힘들게 하고 개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 하였다. 마치 루터에게서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 하였듯이 칼빈도 이들을 맞이해서 개혁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간다.
1)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빈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이단성이 있는것은 정죄 하였으며,자유주의자들을 맞이 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칼빈을 괴롭혔던 교리적인 문제는 미카엘 세르베투스 와의 신학적 논쟁과 그에 대한 처형에서 야기 되었다. 칼빈은 그를 처형시킴으로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아 왔지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수 없었던 결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많은 형편이다.
3)훈련을 강조하는 칼빈의 개혁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 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나라 였다 그래서 오히려 이것이 방종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제2세대 사람으로서 상당히 문란해 있던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다. 이 4가지 개혁안 중에서 교인들의 생활규범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이 가장 중요하였다.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 가는듯하였으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요구 하였다.
[1] 생활규범 강조
제네바 시를 이끌어 왔던 사보이 가문의 자유주의자들은 종교개혁과 더불어서 자신들의 방탕한 호기를 펼칠 기회를 맞이 하였다.그래서 이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방종에 빠지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제네바를 바로잡기 위해서 칼빈은 무릅을 쓰고 훈련을 강요하기 시작 하였다.
훈련의 목적은 교회를 오염과 세속화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인들이 악한 자들과 접촉함으로서 타락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범법자들로 회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케 하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3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훈련을 시키는데 첫단계는 개인적인 권면 둘째 단계는 공중앞에서의 권면 세째단계는 주의 만찬에 참여치 못하게 했다.
엄중한 죄를 지은자는 감독ㅇ나 목사가 개인적으로 출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전체의 회의를 거쳐서 출교를 명했다 그리고 회개하였을 경우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특히 칼빈은 목회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평신도들 처럼 엄격한 훈련울 받아야 했다. 목회자는 선발에서 부터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였다. 성경지식과 교인들의 교화능력 여부를 시험을 통해서 알아본 다음에 품행에 대한 심사를 통해서 선생이 될수 있는가를 분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선발되면 후보자를 소회의에 넘기고 소회의는 주민들 앞에서 설교케 한 다음에 주민들은 설교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받았다고 보고케 했다. 이렇게 3단계를 거친 심사에서 합격하면 목회자로 세웠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생활규범은 생활전반에 걸쳐서 실시 되었다. 춤,도박,주정,술집출입의 횟수, 방종,사치,분수에 넘치는 접대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등 금지,혹은비난,구금형을 가하였다.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웠다.
주민들의 교회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일년에 한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밷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칼빈의 훈련은 방종에 빠진 제네바를 바로 잡기에 충분 하였다.물론 칼빈도 힘들었지만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델란드와 스코틀랜드,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좋은 전통이다.
[2] 학교 설립
칼빈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소요리문답을 작성해서 어린이들에게 교육시켰으며,모든 목회자들이 책임을 지게 했다.그러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559년 6월5일 제네바 아카데미 라는 학교를 세우고서 유럽의 유명한 교수들을 초빙하였다. 이 학교는 일반학 과정과 신학과정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유럽의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그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요한 녹스가 있었으며,네델란드의 아르미니우스는 베자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제네바에서 칼빈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에 임했었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던 1536년으로 부터 3년간 의욕에 찬 목회를 감행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쫒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541년 다시금 제네바로 부임해서 처음14년 동안은 반대자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그러다가 1555년부터 1564년 사망시까지 최후적으로 9년동안 소신 있는 목회를 할수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월급의 증액을 거부 하였으며,그나마도 구제와 헌금으로 거의 다 바쳐 버렸다.
그는 매일같이 저술활동,설교,강의,교회법원의 회의참석, 목사회의 참석,손님접대,각종 자문등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벅찬일을 했다. 그는 종합병원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병을 지니고 있었다.그가 걸을수 없게 되자 설교단 의자로 옮겨줄것을 부탁 하였다. 1564년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하였으며,4월 2일 에는 교회로 옮겨가서 베자로 부터 마지막 성찬을 받았다.
그는 1564년 4월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표현 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고서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4월 26일 소위원회로부터 친구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작별인사를 하였다. 5월19일에는 목회자들을 다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었다.파렐은 80세가 넘은 나이로서 칼빈의 임종을 보러 왔다.칼빈은 마지막 몇일동안 기도와 시편의 위로의 시를 암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5월27일 동녁에서 뜨는 해를 받으면서 54년간을 이 세상에서 살다가 조용하게 하는나라로 옮겨갔다.
<칼빈의 사상정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속에 있는 구원
칼빈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능력과 뜻 ⁃에 의해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마치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귀하게, 한 그릇은 천하게 그 뜻대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 달려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구원받을 자의 예정’을 발전시켜 한 걸음 더욱 나아가 구원받을 자의 예정과 멸망 받을 자의 예정도 말하는 ‘이중예정론’을 말한다. 따라서 칼빈에게서 인간의 의지는 노예적이며, 성령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 마치 인간 의지는 두 기사 앞에 놓인 짐승 혹은 말과 같은 존재이므로 성령이 타면 천국으로, 악령이 타면 지옥으로 달려간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 1백%, 인간의 의지 0%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중세 신학에 영향을 미친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 50%, 하나님의 은총 50%를 말하는 신인협조설을 주장하며,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 1백%, 인간의 의지 1백%를 말하는 복음적 신인협조설을 주장한다.
행동주의로 나타나는 성화 신앙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행동주의적 성화(聖化) 신앙을 강조한다.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행동주의 신앙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칼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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