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5대교리 다섯번째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좐 칼빈 2014. 11. 20. 01:26

칼빈의 5대교리 다섯번째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5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1.도입   

 

   이제 본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주제 하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계획’에 관해 연속적으로 공부해 왔습니다. 처음 강의에서 밝힌 바 있듯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어디까지나 소위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인본주의적 구원관에 대한 오류와 부당성을 역사적 개혁주의 입장에서 접근해 그 내용의 허구성을 성경적 변호와 반론을 통해 지적하여 성경의 본래적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의 어떠함을 체계화시킨 교리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성도의 견인(牽引)교리는 달리 ‘성도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는 성도가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기에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결코 중도에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저들의 구원의 정체성을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기에 구원받은 인간이 남은 생애의 기간동안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날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위와 의지의 발동 여부에 따라서 구원의 향배(向背)가 좌우될 수 있다고 보기에 이런 견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이와 같은 저들의 주장의 반증(反證)으로 나와진 종교 개혁자들의 성경적 증언입니다. 곧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속성과 지속성 말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성도의 견인교리 또한 독립적인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앞에서 전개시켜 나온 제반 교리적 내용인 인간의 전적타락, 하나님에 의한 주권적 선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제한적 속죄사역과 이에 대한 구체적 적용인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불가항력적 은혜)과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그 성격과 시작이 철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주권)으로 말미암는 신적기원에 근거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엡1:4-6). 따라서 성도의 구원이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 구원교리의 뒷받침(오직 믿음)과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실제적 경험(변화된 행위)을 동반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이상 성경적 구원은 어떤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결코 취소되거나 방해를 받거나 상실될 수 없음이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오해해서 구원은 믿음과 행함의 이중적 요건의 충족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호리라도 행함이 개입될 때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개념은 사라지고 선물의 의미는 상실되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검증과 진단의 필요성으로 제기되는 ‘변화된 경험적 행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에 인간 편에서의 일말의 선행이나 공적이 개입되거나 참작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성경적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이기에 말입니다(롬3:28, 엡2:8-9, 딤후1:9). 따라서 이 표현은 은혜의 선물로 대가없이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의 새생명적 새인격의 활동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됨으로 한 사람의 불가시적 구원의 실질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얘깁니다(롬6:11-14, 12:1-2, 갈2:20, 엡4:1-3, 22-24, 골3:1-3). 야고보 사도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는 지적은 이상의 구원과 행함의 함수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적 배경 속에서 나와진 결론입니다(약2:17, 26).


    그렇습니다. 성도의 구원의 실상은 변화된 새인격의 구체적 활동으로 확인됩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성격을 옛자아의 사망선고와 더불어 새생명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적 활동의 전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고후5:17, 갈2:20, 엡4:22-24).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성경적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처음부터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향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통해 영생하는 구원의 새생명적 활동을 전개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의 에덴의 삶을 묵상해 보십시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선악과 금령법의 내용을 삶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 영생의 실질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창2:16-17).


    오늘 강의는 오직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수여되는 구원의 영원성과 영속성이라는 차원에서 흔히들 표현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교리인 성도의 견인교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전개


    성도의 견인교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중도에서 어떤 이유에서라도 결코 취소되거나 중단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성도의 견인은 성도들이 끝까지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음을 포함합니다. 물론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를 발휘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지속적으로 믿음 안에서 보존, 보호,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간섭과 능력으로 말입니다. 이런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총체적 구원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얻게 하십니다.


    다른 한편 성도의 견인이 ‘한 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다’는 말을 가리킨다고 할 때, 이 말은 단순히 죄책(罪責)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 나머지 지옥의 형벌을 피하게 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일체의 죄책에서 사면될 뿐 아니라 이후 남은 생애의 기간을 살아갈 동안에 경험하게 되는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함을 받게 될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구원은 이렇게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둘 다를 내포합니다. 사람이 죄책에서는 구원을 받고 죄의 권세에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곧 성령의 내주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넉넉히 죄를 굴복시킬 수 있는 권세 또한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생명의 능력을 성령을 좇아서 발휘시켜 나갈 때 육체의 욕심을 넉넉히 제어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롬6:11-14에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따라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서의 의미를 발휘하는 바 중도에서 실수하거나 실패할 수는 있을 망정 근본적으로 구원을 잃거나 믿음에서 아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창세전 은혜로 선택하신 구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구원하심은 철저히 은혜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은혜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호리라도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편의 선의적(善意的) 호의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아직 세상 가운데 태어나거나 어떤 선악간의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당신 편에서 일방적으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 창세전이란 말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조건적 보상이 아닌 하나님편의 호의적 선물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아울러 여기서 구원이 보상의 개념이 아니라 선물의 개념으로 설명됨은 구원의 성격이 철저히 하나님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무조건적 사역임을 시사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 여부와 무관하게 주어진 선물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구원 이후의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서 취소되거나 파기될 수 없는 독특한 성격적 특징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롬9:10-13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얘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 아직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근거가 인간편의 선행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사실 출생 이후의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성격면에서나 행동면에서 결코 형 에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점을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오히려 내성적이면서도 약삭빠르고 매사에 계산적이며 일면 교활한 면까지 갖고 있어서 번번이 형 에서의 비위를 건드리기가 일쑤였습니다. 한 번은 형 에서가 허기져 들어온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팥 죽 한 그릇으로 차지했을 뿐 아니라, 노년에 기력과 시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아비 이삭을 속여 형 에서로 가장한 채 이삭의 축복을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에서를 피해 어미 리브가의 본향인 하란의 라반 삼촌에게로 피신해 살면서도 그의 상업적이고 계산적인 사고방식은 여전해서 끊임없이 삼촌과의 첨예한 재산상의 갈등과 대립은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그의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행위와 무관하게 야곱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먼저 택하셨습니다.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과 예정에 기초해서 말입니다. 이 선택은 사람의 행위와 무관한 것으로 인해 그의 출생 이후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사랑의 징계는 가해질 망정(히12:5-6) 이로 인해 아주 버리시거나 구원을 다시 거두지는 않으십니다. 사람의 구원은 그 근본이 신적기원에서 찾아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번 하시고자 한 바는 결코 중도에서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음이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절대 주권자의 속성이며 성품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는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속죄 효력의 영원성


    성도의 견인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속죄 효력의 무한성과 영원성, 그리고 영속성에서도 찾아집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구약의 짐승제사는 제물 자체의 열등함과 제사계시의 모형론적 성격으로 인해 처음부터 대속물의 실체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全)구속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시적이고 제한적으로 주신 예표적 제사제도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구약 제사제도의 계시적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제사의 희생제물은 새언약 안에서 자기 몸을 한 마리 어린양 같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히9:11-14, 요1:29). 한편 구약제사에 드려진 제물은 그 가치의 열등함으로 인해 그리고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예표론적 성격으로 인해 불완전 할 뿐 아니라 한시적으로만 효력이 미치는 것으로 인해 해마다 다른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가 없었습니다(히10: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제사의 경우는 다릅니다. 구약제사의 참 형상이며 동시에 실체적 계시사건입니다. 따라서 제사의 효력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며 영속적인 특징을 가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9:12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여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해마다 드리는 반복적인 제사를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시기에 가치적 측면에서 무한하시고 제사의 계시적 성격상 구약제사의 실체로 오신 분이기에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확증하면서 ‘영원하신 성령’(히9:14)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히10장에서는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언급합니다. 12절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절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7-18절입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상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제사가 갖는 효력이 영원하고 지속적이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더 이상 사라졌음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영단번(once for all)에 드려진 제사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무한하셔서 그 효력이 미치는 범위와 시간이 무한정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죄사역에 의해 한번 죄사함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결코 그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구원을 결코 잃거나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롬8:1)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3:23-24, 4:25).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사면령(赦免令)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칭의적 구원선포는 교리적이고 원리적 측면에서 우리를 죄 없다고 여겨 주신다는 내용이지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부터는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적 죄성은 여전히 우리를 옛사람이 종노릇했던 죄의 법 아래로 이끌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고 짓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기자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갈등과 대립과 긴장을 설명함이 이런 배경에 근거를 두고 기술한 내용입니다(갈5:16). 그도 역시 롬7:21-25에서 보면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이 상호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음을 솔직한 심정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장으로 넘어가면 로마서 기자가 새롭게 발견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도를 해방시켜 준 사실로 인해 죄책의 면제 뿐 아니라 죄의 권세까지도 이길 수 있는 영적 힘을 공급해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까지도 넉넉히 이루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수행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경험은 기계적으로 되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거듭난 새인격의 새생명의 능력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발휘해 나가는 것을 통해 가능해 집니다. 성경은 이를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갈5:16). 거듭난 새생명적 활동이 발휘되기에 이런 사건이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통해 죄의 권세를 넉넉히 제어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삶 말입니다. 빌립보서 기자는 이런 성화의 삶을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적극적으로 권면합니다(빌2:12). 우리 안에서 능력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넉넉히 죄를 굴복시키는 것을 통해 보다 진전된 성화의 삶을 지향해 나갈 수 있게 됨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이끌어 가실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빌1:6, 4:1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功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뿐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승리할 수 있는 은혜의 왕노릇 하는 권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롬5:21). 성도의 견인교리의 보장이 이런 구원의 원리와 실제적 적용을 통해 나옵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잃어지거나 취소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효력 또한 영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시키는 것을 통해 우리의 구원 또한 영원하고 지속적이어서 어떤 경우라도 절대 안전함을 보장해 줍니다.


                               성령의 인침과 보증의 약속


    성도의 견인이 구원의 영원한 안전과 지속적인 보장을 의미한다 함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과 예정에 근거함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는 시기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인간편의 행위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하나님편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롬8: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창세전 예정은 구원에로의 현재적 소명과 칭의로 연결돼 종말론적 영화의 단계까지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중도에서 취소되거나 포기될 수 없는 일관된 내용임을 파악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택자들을 세상 가운데서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원해서 그 최종적 완성인 영화의 단계까지 인도하실 것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6:39). 그렇습니다. 성도의 견인교리인 ‘한 번 구원의 영원성과 영속성’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속에 이미 처음부터 보장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자연히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의한 대속적 구속사역의 효력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무한한 것임을 증거합니다(히9:14). 다시 죄에 대해 제사드릴 여지가 없는 영(永)단번의 일회적이고 영구적인 속죄사역이었음을 피력합니다(히10:12-18). 때문에 이런 주님의 속죄사역의 실제적 적용대상인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는 동일하게 죄의 문제가 영원토록 도말 됐기에 다시 죄에 대해 추가적으로 드릴 대속적 희생제사의 필요성이 전무(全無)하게 됩니다(히10:18). 구원 이후 성도들의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범할 수 있는 죄의 문제는 상한 심령의 자백을 통해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아울러 밝히고 있습니다(요일1:8-9). 따라서 구원 이후에 성도들이 계속해서 지을 수 있는 범죄(갈5:16-21, 골3:5-10)는 구원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과 성격이 영단번으로 마감된 것이기에 말입니다. 다시 죄에 대해 추가적으로 드려야 되는 제사의 필요성이 영원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범죄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화목을 해치는 요소로 작용하는 바 지속적인 인격적 교통과 사귐을 위해 철저한 자백을 통한 용서를 구하는 일이 뒤따라야 될 줄 압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6-7).


 

    성도의 견인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완벽하게 적용시키시는 성령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해 다시 한번 보증됩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성령님을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 소개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인치시는 작업을 통해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공효를 구체적으로 적용시키셔서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십니다(엡1:13, 고후1:11).


    이런 과정을 통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자들인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면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요14:16-17, 고전3:16, 6:19). 이후 지속적으로 성도들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 까지 이르는 성화의 삶을 부단히 추구해 가는 일에 유기적으로 역사하십니다(갈5:16). 이때 죄를 책망하시며(요16:8) 주님의 뜻을 더욱 밝히 나타내 보이시는 사역을 담당하시는 것을 통해(요14:26, 16:13)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시는 사역을 충실히 수행하십니다(딤후3:16-17). 성도가 신앙의 중도에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믿음에서 떠날 수 없음이 이런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적극적인 구원사역으로 말미암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들을 다시 정죄 하거나 송사 할 수 없습니다. 사단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가당치 않습니다(롬8:33-39). 왜 그렇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이며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창조자이시고 주권자이시기에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성경은 엄히 증거합니다(요10: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성도의 구원은 절대 안전합니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보증하시고 보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결론


    성도의 견인(牽引)교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결론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 5대 교리의 내용인 ?인간의 전적타락,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예수님의 제한속죄, ?성령님의 유효적 부르심(불가항력적 은혜)의 결과로 …성도의 견인교리의 성립이 가능해 집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구원과 믿음의 영원성과 영속성을 보증하는 바 한 번 구원받은 성도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중도에서 결코 구원을 상실하거나 아주 믿음에서 떠날 개연성(蓋然性)은 전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그가 처음부터 성경이 말하는 정상적인 구원에 접촉된 것이 아니거나 일시적인 실족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성도의 구원은 그 성격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의한 신적기원에서 출발하고 있기에 인간 편에서나 다른 어떤 피조물에 의해 결코 영향을 받을 수도 받지도 않습니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인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혹자(或者)는 이를 두고 성도의 삶을 방종으로 유도하는 왜곡된 가르침이라고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반증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된 것을 가리킵니다(고후5:17).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갈2:20). 따라서 옛 사람적 육체의 소욕을 좇던 삶에서 새 사람적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삶에로 방향전환이 일어납니다. 천상의 본질적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지상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무익한 가치관을 점진적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라고 설명합니다. 천상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가치관을 부단히 추구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른 기독교적 신앙의 관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만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적 관점이 총체적인 방향에서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 지향적이며 현실적인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제아무리 신앙적 열심을 발휘한다 할지라도 그런 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바른 신앙관은 아닙니다. 그런 신앙의 정체성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적인 바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으로 판정됩니다(마7:21-23).


    성경적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자기부인을 통해서만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로 나갈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때문에 자아와 자존과 자만과 자긍의 요소들은 죄로 인해 타락한 본성과 밀접하게 연루되고 있는 것으로 인해 항상 사단의 유혹에 노출돼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마16:22-24).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궁극적 관심으로 삼는 것을 통해 신앙의 순수성과 진리성이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진리에 이르는 지식에 근거한 신앙이 아닐 때, 제아무리 기독교적인 모습과 모양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종교심을 부추기며 구름같이 몰려든다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거기에 참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온전한 성경적 순종은 발견되지 않습니다(롬10:2-3). 대신 인간의 부패한 종교심만 난무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적 무속신앙일 뿐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부추기는 이교도적 제사행위이며 가나안의 종교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그 내용과 성격의 특징상 신적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이에 신실히 접촉된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향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것에서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과 진리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코 방종과 이기적 욕심에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이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성도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 드립니다.(*)

 

  

    지금까지 칼빈의 5대교리를 여러분들과 함께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分辯)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이레이네...

 

 

출처: keeper77 | 조회 68 |추천 0 |2004.10.14. 14:46 http://cafe.daum.net/keeper77/AWW/13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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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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