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신자들은 참된 의미에서의 경건(pietas)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현대'를 특징짓는 것들 중 하나가 하비 콕스가 우려했던 것인 '세속주의(secularism)'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세속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절대화로서, 그것을 초월하는 영성이나, 종교성 같은 '신비'에 대해 폐쇄적인 가치관을 말한다. 그것은 이성이나, 그것을 토대로 한 과학, 그리고 물질문명들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그런 흐름은 교회의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보다는 세속적인 가치나 기준에 좌우되는 일이 많으며, 신자 개개인들의 생활에 있어서도 세속적 성공이나 부(富)가 우선이고, 참된 신앙과 애써 따르는 십자가의 길과 같은 덕목들은 부수적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가 참된 정신과 신앙, 경건 혹은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주님의 말씀에 바르게 서서, 세상 속에서 본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현대'가 종교간의 '경쟁'이 문제시되고 있을 정도로 다종교사회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더욱 시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그 고유한 특성들을 더 잘 찾아내고, 그것들을 더 잘 발휘해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참 진리와 의미, 그 구원을 전할 수 있고, 믿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2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현대사회는 포스트모던의 사조가 시류를 타고 있다. 그것은 이성 중심의, 물질문명 중심의, 또 개인 중심의 현대문명에 대한 반발이나 비판으로써 대두된 하나의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사회의 "세속주의"에 대한 비판적 극복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교적으로 볼 때는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즉 새로 대두되는 포스트모던의 종교현상 속에서는 이성이나 체계보다는 "영성"이나 "감성"을 강조하며, "개인"보다는 "공동체적" 삶과 실천을 중시하며, "교리"나 "도덕"보다는 "명상"이나 "영성개발"로써 초월성이나 내면적 깊이를 찾아나가는 데 초점을 두는 경향이다. 물론 그런 시도들이 언제나 바르고 훌륭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일차원적인 세속에 함몰된 현대인들에게 그것을 초월하는 종교적 깊이와 신비를 지시해주고, 그것을 추구해보려는 의도자체는 바람직한 것이다. 현재 기독교내의 신학이나 운동 역시 그런 방향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른바 "영성의 신학"이나, 여러 형태의 공동체 운동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형태의 신학이나 운동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들 속에서 문제에 대한 답안을 구해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물론 그런 운동들이 성서적, 교회적 근거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겠지만, 전통적인 용어나 개념들 속에 그 답이 있다면, 그것을 채취하는 노력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선되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는 그런 과제를 주로 개신교의 사상적 기틀을 놓는 데 크게 기여했던 칼빈의 경건 사상을 해석함으로써 이루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의의를 찾아봄으로써, 전통신학의 경건 개념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경건에 대한 전통적 이해

경건(????????)은 칼빈에게서 시작된 개념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고대 사회로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용어이며 개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교와 사회 속에도 존재해서 성서 속에 나타나고 있는 용어이다. 그런 전통을 이어받아 교부들과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에라스무스 등 많은 사람들은 경건의 개념과 의미를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경건에 관한 고대사회와 교회의 전통 모두를 다루기는 어렵다. 단지, 칼빈의 경건을 살펴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전통적으로 경건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기존의 연구들로부터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원래 고대세계는 종적인 체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정을 가장 기본적으로 했다. 그러므로 사회들의 기초단위가 되는 가정 내에서의 구성원들간의 결속은 매우 중시되었다. 그것은 특히 가장과 가속들 사이를 묶어주는 유대를 중심으로 했으며,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다고 할 정도로 중요했다.

그런 세계 속에서 "경건"은, 우선 부모와 자녀들과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자녀들이 부모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그리고 따르는 그런 품성이나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건은 가정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차원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래서 그것은 국가와 국왕에 대한 시민의 경외와 충성이라는 덕목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 고대사회는 다신교 사회로서 각종 종교들과 제의들이 발달했는데, 그 속에서 경건은 신들에 대한 숭배나 열심 같은 것들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로 통용되던 '경건'을 기독교가 사용했을 때, 그것은 원래의 사회적 의미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 차원 높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복종, 헌신 등의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종교개혁자 칼빈도 경건에 관한 그런 전통적인 개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명기 설교들 중에서 말했다. "그래서 이교도들은 '경건'이라는 용어를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 모두에게 우리가 영예를 돌리는 것에다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적절하게 말해서,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하는 경외입니다...."

그런 점들을 볼 때, "경건"은 전통적으로, 부모나, 왕, 신과 같은 상위자들에 대한 아랫사람의 존경과 두려움, 순종, 충성, 헌신들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경건"이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강제적으로 부과하거나 억지로 강요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대세계는 그것이 종적인 사회였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에는 상호간의 "선한 믿음", 혹 "신실성"이 자리잡고 있어서, 어떤 이들은 보호자, 양육자로서, 또 어떤 이들은 그를 따르는 자로서 사는 데 큰 갈등이 없었다. 즉 그들 세계에서 경건은 신뢰에 근거한 것으로서, 어느 정도 자발적이고, 또한 기쁨과 보람도 따르는 그런 종류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건"은 어떤 선한 관계의 개념으로서, 수직적인 차원에 대한 인정과 더 나가서 적극적인 수용이며, 전통사회가 그것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유지시켜 나가는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해석될 수 있다.


칼빈의 경건사상,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인가?!

"경건"은 또한 칼빈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사상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경건'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고,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인의 올바른 예배와 종교, 지식, 삶들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선 칼빈의 경건은 그 이전의 중세기적인 의미에서의 경건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쟝 까디에는 "칼빈이 경건의 영역에서 이루었던 혁명을 동시대에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서 했던 혁명과 비교할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였을까? 그의 말을 더 들어본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사람들이 지구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 천문학자는 정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주에 대한 모든 개념이 바뀌어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경건에서, 그것의 습관적인 중심이었던 사람과 그리고 사람의 필요나 성과들을 들어내었고, 그 자리에다 경건의 진정한 중심인 하나님을 다시 모셨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까디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칼빈의 경건에 있어서 신중심적인 성격이었다. 즉 중세에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주체였으며, 그 인간의 요구나 필요, 종교적 성취에 따라 하나님이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중심의 종교, 인간중심의 경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분만이 홀로 주인이며, 사람들은 그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신 중심적 세계관과 종교, 그리고 그에 따른 경건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에 상응할만한 종교상의 대전환이었다는 시각이다.

사실, 중세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나 구원은 인간의 종교적 수련이나, 자선, 선행 등 행위를 그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의 종교적 수행 등 이른바 '공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이나 선조들의 구원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거기서는 구원을 인간이 공로로써 획득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 구원의 객체인 인간이 오히려 주체로 인식되기까지 하는 오류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의 경건은 참된 의미를 가지기가 어렵다. 실제로 중세기적인 의미에서의 경건은 그런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의미를 잃고 만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그것을 마르틴 루터가 (10년여 동안의) 고통스러운 수도원생활을 통해 체득하고, 깨달았던 것이 아닌가? 루터와 다른 방식이지만, 칼빈 역시 그런 중세기적인 종교관행과 경건이 하나님의 참된 진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기독교강요] 등 그의 여러 저술들 속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나 구원의 전제가 되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나 실천이 아닌 새로운 의미에서, 즉 복음적인, 그리고 성서적인 의미에서 경건을 세워놓았다. 그가 세운 경건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한 경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경건함으로써 의를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그런 경건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경건에 선행하는,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경건사상이 수립된 것이다. 그래서 경건은 칼빈에게서 인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새롭게 전환되었고, 그 점을 주목했던 까디에는 그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칼빈의 경건사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경건에 대한 칼빈의 정의

칼빈은 1536년, 자신의 교의학적 주저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간하면서, 이런 긴 제목을 붙였다. [기독교강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경건에 관한 거의 모든 것과 구원의 교리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함. 경건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읽을만한 저작으로 최근에 출간되었음]. 이 긴 제목 중 부제가 되는 부분은 출판업자가 붙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기독교강요]의 성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부제가 지시하는 것은 바로 [기독교강요]가 경건과 구원에 관계된 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경건"은 "사랑하고", 배워서, "신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점은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 (서문형식으로 포함시킨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서두에서 다시 확인되고 있다. "나의 목적은 단지 어떤 초보적인 내용들을 소개함으로써, 종교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참된 경건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즉 기독교강요의 목적 자체가 신자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기본적인 내용들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경건은 신자들이 교리나 말씀을 배워서, 종교적인 어떤 참된 삶, 또는 덕목이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칼빈은 경건에 관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칼빈이 경건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1537년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i"(신앙지침과 고백서) 안에서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공포심을 일으킨다. - 그러나 참된 경건은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또한 주님으로서 존경하며, 그의 의를 받아들이며, 그분을 거역하기를 죽기보다 무서워하는 그런 순수하고 진정한 열심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런 열심을 가진 사람들 모두는 그런 하나님을 자신들의 무모한 욕구에 따라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참된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알려고 하며, 자신들에게 나타나고 선포되는 그대로 그분을 이해한다."

여기서 보듯이 칼빈이 경건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점이다. 하나는, 경건이, 하나님이 자신의 진정한 주님이라는 것을 믿고, 알고, 그래서 모든 것에 앞서서 바로 그분만을 경외하며 따르는 일(1-1)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런 경건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욕구나 기호에 맞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알려주신 바 그대로 그분을 믿고 이해하는 것(1-2)이다. 이 두 가지 사항은 경건의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시켜 다룰 수 있는 주제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뒤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칼빈의 경건 개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곳으로서 또 한 군데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강요 1559년 판,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 목적을 밝히는 새로 추가된 장이다. 거기서 칼빈은 경건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나의 의도는 이렇다. 즉 그분이 이 세상을 한번 창조한 다음에 그것을 자신의 무한하신 능력으로써 유지시켜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은 자신의 지혜로써 세상을 다스리시며, 자신의 선함으로써 그것을 지키고 보호해주시며, 특히 인류를 의와 공정함으로써 이끌어 나가며, 자신의 자비로써 그들을 지지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더 나가서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즉 그분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지혜나 명철, 혹은 의, 능력, 정직, 또는 진리가 단 한 방울이라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런 것들은 모두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므로, 그분만이 그런 것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전적으로 그분에게서 기대하며, 그분에게서 찾아나가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써 그분에게서 받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런 은혜들에 대한 느낌만이 선한 교사이고, 우리들에게 경건을 가르쳐주기에 올바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종교가 나온다. 나는 '경건'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함께 결합된 것으로서, 우리가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선행들을 알면서 자연스럽게 그리로 이끌리게 된다고 정의한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여기서 언급되는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경건이 (또한 종교가)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가 없다(2-1).

둘째로,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주인이자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이며, 지혜와 명철, 의, 정직, 능력, 진리 등 모든 귀한 것들의 원인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점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그 모든 귀한 것들을 바라고, 얻으며, 그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한다(2-2).

셋째로, 그분의 은혜를 느끼고 아는 것은 경건을 가르쳐 주며, 또 그것으로부터 종교가 파생된 것이다(2-3).

넷째로, 그래서 결론적으로 '경건'은 신자의 그런 느낌과 믿음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라는 것이다(2-4).

이 네 가지 점도 각각의 독립적인 주제로 발전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을 앞의 정의에서 끌어낸 항목들과 함께 살펴보면, 칼빈의 경건 개념으로부터 파생되면서 그것을 구체화시켜주는 주제들은 신앙의 문제(1-1 앞부분, 2-4), 삶의 문제(1-1 뒷부분, 2-2), 인식의 문제(1-2, 2-1), 종교의 문제(2-3, 2-2 뒷부분) 들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이제 그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칼빈의 경건사상의 전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건의 신앙론적 해석

칼빈에게서 경건은 우선 신앙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위의 정의들에서 보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만이 진정한 주님이심을 믿고, 그분만을 경외하는 것이었으며(1-1 앞),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었다(2-4). 그것은 실제로 신앙 속에서만, 혹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죄인이 자기중심적인 오류 속에서, 자신이 자신과 세계의 중심이자 주인이었지만, 그러나 신앙을 통해 다시 태어난, 즉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가 맺어진 현재는, 하나님이 중심이자 주인이고, 그분만이 존경과 사랑으로 믿고 따를 분이라는 새로운 의식과 삶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신앙은 경건을 일으키는, 혹은 경건의 의식과 삶을 갖게 하는 하나의 극적인 전환과 같은 것이었다. 경건은 그런 신앙 속에서 이루어지며, 또 그것을 통해 지속, 혹은 성장되는 것이었다. 그 이유에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III권 신앙론을 다루는 자리에서, 경건을 신앙과 관련지어서 다루었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또한 신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종종 신앙은 '경건에 관한 거룩하고 순수한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신앙은 경건에 관한 거룩하고 완전한 교리, 즉 "가르침"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은 신앙을 통해서, 경건을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의 전부를 배우게 된다는 의미이다. 칼빈이 자신의 회심을 기억하며 고백했던 바도 바로 그 점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므로 내가 참된 경건의 어떤 맛과 지식을 얻게 된 후에는, (비록) 다른 공부들을 완전히 떠날 수가 없어 좀 더 느슨하게 해나갔는데, (경건을) 더 성장시키고 싶은 매우 큰 열망이 마구 솟아올랐다."

칼빈에 따르면, 신앙은 언제나 회개의 원인이 된다. 칼빈은 그런 신앙의 회심을 실제로 경험했고, 그것을 자신의 저술 두 군데서 고백해놓았다. 그중 인용한 시편주석 서문의 고백에 따르면, 회심의 결과로써 경건의 맛과 지식을 얻게 되었고, 또한 그것을 더 성장시키고 싶은 열망에 타올랐다는 것이다. 즉 회심한 뒤에는 이제는 삶의 방향과 관심이 완전히 바뀌어서, 전혀 새로운 관점과 방법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살게 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이 바로 경건이라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하나님 중심적인 의식과 삶, 즉 죄인이 이제까지의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죄로 물든 자신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 또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인이 경건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물론 어떤 의무나 억지로써가 아니다. 죄인이 은혜가운데서 새롭게 태어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은 언제나 감사와 기쁨, 즐거움을 수반한다. 칼빈이 자신의 회심을 전하면서 표현했듯이, 경건에는 어떤 "맛"이 있는데, 그는 그것을 [기독교강요]의 신앙론 중에서 이렇게 잘 표현했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따듯함,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감미로움을 가지게 해주고,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경탄하도록 배워주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그의 권능에 복종하게 된다." 여기 나오는, "은혜의 따듯함", "어떤 감미로움" 너무나 크신 능력과 역사에 대해 크게 놀라는 "두려움"과 "경탄", 그런 것들이 "경건"에 따르는, 혹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신앙인의 내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을 신앙론적으로 볼 때,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것이 있다.

칼빈에 의하면, "경건의 첫 단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아버지인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신앙"이다. 여기서 보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과 신앙은 모두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 둘은 모두 하나님의 "아버지됨(Paternite, 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으며, 그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양가감정(Ambivalance)을 갖는다.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이자 동시에 자상한 존재이다. 칼빈이 이해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존엄하고, 초월적인 분이면서, 동시에 자비롭고, 죄인들을 사랑해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오신 은혜로운 분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런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이 갖는 경건을 "그분을 경외하고, 또 사랑하는 것"이라는 서로 상반된 것으로써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신앙적인 태도이자 삶으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신자가 존엄하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을 경외하고, 복종하며,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을 무한히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물론 경건의 그 두 가지 면, "경외"와 "사랑"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경외하는 그런 동시적인(simul)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빈의 경건에 대한 신앙적 해석의 요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그 아버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바른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죄인이 자기중심적인 무지와 교만을 떠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에게서 경건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으로 비롯되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회심의 체험과 함께 이루어진다. 경건은 그런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응답하는 자발적이고 기쁨이 있는 신앙인의 존재이자, 삶이다.


경건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신앙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더나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교리에 깊이 관계되고 있다. 즉 우리가 정의를 다루면서 보았듯이, 경건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따르는 것이었으며(1-1 뒤), 그분만을 믿고, 모든 선한 것들을 그분에게서 바라며, 그분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는(2-2) 구체적인 삶의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았으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의 전 생애는 경건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서 경건의 실천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지식, 봉사, 예배, 헌신, 복종, 사랑 등 여러 형태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중 칼빈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복종과 사랑이다. 그 두 실천은 앞의 신앙적 해석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아버지됨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와 삶의 두 면모, 즉 경외와 사랑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그 두 가지를 중심으로 경건의 생활적인 면모를 살펴본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를 우리의 아버지로 붙들면서, 그분에게 (돌려야 하는)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며 경외하는 것은 곧 그분에 대해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종은 그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또한 "주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필연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혹은 원치 않는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과 상반된" 우리의 "모든 욕망들을 길들이고, 굴복시켜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전체 요강"인 "자기부정"에 관계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자기부정은 "우리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분을 위해서 살고, 그분을 위해서 죽는 것이며, 그분만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비워서, 하나님의 영에 완전히 변화되어,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자기중심적인 교만 속에 살고 있는 죄인이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게 될 때 수반되는 것이 그런 자기부정과 자기부정을 통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며, 그리고 그것들은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의 필수적인 측면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칼빈은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경건의 정의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함께 합쳐진 것"이었다. 그래서 경건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을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들도 그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즉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거룩함도, 어떤 찬양이나 예배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비롯돼야 하며, 또한 그 사랑이 있어야 그것들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며, 그것을 통해서 그의 모든 생활과 예배를 완성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다.

그런데, 칼빈에 따르면 경건의 표현인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이웃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증거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칼빈의 관점에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즉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삶이다. 그런데 칼빈은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에서 이렇게 썼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우리들 중에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칼빈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그 점을 경건과 관련시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경건, 즉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는 경외와 봉사가 우리의 형제들에게 돌려져야 하는 사랑보다 더 상위의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경건은,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감각들로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식들이 경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식들은 경건을 분명히 증거 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종종 보듯이, 위선자들보다 더 예식들을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 서로 서로가 사랑하도록 권한 형제애를 통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증명하도록 하셨다."

이 인용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경건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고, 또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칼빈은 경건을 통해, 필연적으로 "이웃사랑"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그것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으로서 "이웃과의 자유로운 사랑의 교제"속에서 모든 것을 나누는 섬김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경건을 생활이라는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자기부정, 그리고 사랑, 더 나가서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감사가 외부로 표현되고, 증거 되는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막스 베버가 칼빈 이후의 칼빈주의 속에서 발견했던 이른바 "실천적 삼단논법"(Syllogismus Practicu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외부적 표시로서 내부를 증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내부의 경건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부로 드러나서 내부를 알게 되는 그런 방식의 증거를 의미한다. W. 니젤이 잘 보았듯이, 칼빈의 전체 사상 속에는(그리고 우리가 본 이 항목의 인용구들 속에서도), "실천적 삼단논법"의 의미는 들어 있지 않다.


경건과 신 인식론

정의에서 보았듯이, 칼빈은 "(종교나) 경건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2-1)고 했다. 이것은 칼빈의 신 인식론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알려주는 열쇠와 같은 말이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connaissance, 또는 지식)은 삶이나 실천과 유리된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현실에 관계된 것이다. 그 인용문 앞에서 칼빈은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소박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앎으로써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 바를 알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경건"과 "종교"에 관련시켜 말했다. 즉 바로 뒤를 이어, 그는 "종교나 경건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즉 논리상의 문제인데, 그 말은 논리적인 비약이고, 그 앞에는 생략된 명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생략된 부분에서 우리는 이런 명제들을 읽어야 칼빈의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참된 경건과 종교이다. 우리는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함 속에서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 명제를 넣어서 칼빈의 말을 보충해보면 이렇게 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소박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앎으로써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이해한다(그것은 참된 경건과 종교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함 속에서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칼빈의 인식론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즉 그에게 있어서 인식으로부터 실천이 나오지만, 그러나 또한 실천으로부터도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칼빈이 약간 뒤에서 시사한 바로써 확인된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서는 그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에밀 두메르그가 칼빈의 방법을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 삼단논법의 방법과 경험론적 방법, 그 둘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은 이유를 갖는다. 챨스 파티 역시 그 점을 칼빈의 교리 여러 곳에서 확인했다. 가령 성령론 같은 곳에서, "칼빈은 기본적으로 논리나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아래 사는 신자의 경험에 호소했다." 또 신 인식론에서도 "칼빈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그분이 말씀가운데서 우리와 맺으신 관계를 관심했다. 그와 같이 칼빈은 자신의 신학적 추론의 일관성으로써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인의 하나님 경험에 대한 자신의 설득력 있는 표현들로써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칼빈은 경험에 대한 호소, 경험을 통한 계시이해와 신 인식의 방법을 열어 놓았고, 또 그것을 중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자 길이었다. 칼빈은 그와 같이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한 바에 따라 살고,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또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인식, 혹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적극적으로 작용하면서, 신자의 삶과 이해를 점점 더 완성시켜나가는 그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신자의 끊임없는 과정은 바로 "성화(sanctification)"인데, 의미상으로 볼 때, 그것 자체가 또한 경건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신 인식에 있어서 칼빈이 경건을 적용했던 다소 다른 방식 하나를 도외시할 수 없다. 앞의 정의에서 보았듯이, 그는 "(경건한) 사람들 모두는 그런 하나님을 자신들의 무모한 욕구에 따라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참된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알려고 하며, 자신들에게 나타나고 선포되는 그대로 그분을 이해한다"(1-2)고 했다. 칼빈은 그 점을 매우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다시 말한다.

"그러므로 잘 정리된 사람은 우선, 자의적으로 신을 만들어내지 않고,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인 그분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분을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는 바 그대로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리고 조심스럽게 경계함으로써, 이리 저리 헤매고만 다니게 하는 정신나간 모험이나 과욕 때문에 그분이 선포하신 것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신 인식에 있어서, 경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말씀하는 바를 유심히 듣고, 그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었다. 칼빈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방법이었다. 칼빈은 그런 경건이 없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자주 비판했다. 그는 신명기 설교 중에서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귀를 막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의 벙어리 인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야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런 것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선언한 것을 왜곡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경건"이 없이는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교만이나 허영, 자기 중심적인 망상들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기부정으로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이 말하는 경건의 한 다른 모습이다.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그것보다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 없는 허풍에 너무나 기울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곧 거기에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분께 속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우리가 사로 잡혀있는 헛된 생각들을 우리 속에서 뿌리뽑아야 합니다."

그런 점들을 볼 때,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올바른 신 인식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경건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듣고 받아들이게 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경건은 하나님을 알 때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경건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알게 되는 성격을 가졌다. 그러면서 신자들은 더 올바르고 완전한 인식과 삶을 향해 끊임없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칼빈이 본 경건한 신자들의 생애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경건과 참된 종교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곧 종교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는 경건과 종교를 함께 언급하거나, 혹 서로 바꿔가며 쓰기도 했을 정도로, 그 둘을 밀접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의에서 보았듯이, 종교는 경건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2-3). 즉 경건의 결과로 종교가 생긴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수반한다. 그런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들의 종교로도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칼빈에게 있어서 종교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되는 예배였다. "바로 이것이 순수하고 참된 종교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생생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데, 두려움은 그것 자체에 자발적인 경외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 자체로부터 고유한 그대로의,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율법 안에서 명하고 있는 예배를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서, '창조주이자, 모든 귀한 것들의 주인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는'(2-3) 일이었다. 그것은 경건으로부터 파생되지만, 동시에 경건의 한 표현이자, 그것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건은 아버지 하나님을 감사하고, 영광돌리며 경배하도록 하며, 그것은 바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이 볼 때, 사람들은 그 예배를, 종교를 올바르게 수행하고 있지 못했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주 소수만이 하나님을 존경할 뿐,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그를 공경한다. 모든 이들이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여주지만, 아주 소수만이 마음으로 예배할 뿐이다."

칼빈은 이처럼 형식적인 예배, 왜곡된 종교가 만연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가 왜곡된 종교나 예배 속에서 특히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은 우상숭배였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죄와 오류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예배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뇌는 우상숭배 전시관과 같습니다. 각 사람들이 다 우상들을 만들어대고, 각자가 하나님 예배를 왜곡시키고 있으므로, 거기에는 책임자들마저도 없습니다." 칼빈이 우상숭배에 관해 길게 논의하는 곳은 역시 [기독교강요]이다. 그에 따르면,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왜곡시키는 가장 사악한 죄에 속한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형상이나 물체로 대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우상으로 대체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불경건한 거짓 때문에 훼손된다. 그런 우상숭배는 경건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고,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그에 따라 경외하며, 조심스럽게 그분을 알고, 따르고, 예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식과 우상숭배로 왜곡된 종교를 바로 세우는 일은 동시에 경건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칼빈의 관점에서, 경건을 세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고, 그렇게 세워진 경건 속에서 비로소 신자는 참된 종교와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매우 노력했다. 그런데 그것은 예배와 종교를 개혁하는 일과 함께 일어났다. 즉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고, 동시에 그들이 과거 잘못 세워놓았던 종교를 개혁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칼빈이 전 생애를 바쳐서 했던 일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종교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그 드러나는 영광과 말씀에 따라, 무한하고 존귀하신 모습 그대로를 다시 믿고, 예배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 있는 신앙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빈이 생각하는 참된 종교는 바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그리고 "진리에 부합된" 것이다. 그것은 칼빈이 프랑스에서, 그리고 쥬네브에서 애써 세우고자 했던 교회, 복음적인 종교이다. 여기서 그의 종교개혁을 개괄할 필요는 없겠다. 단지 경건의 문제와 관계해서 본다면, 칼빈은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의 표현인 경건은 종교로 나타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 종교는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 경배인 예배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가, 그 예배가 동시대에 매우 왜곡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개혁하려고 했다. 참된 종교를 세우는 것은 인간들의 죄와 오류 속에서 손상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 즉 경건의 실천과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경건이 종교를 세우고, 또 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역으로 종교는 경건을 보여주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를 수행하는 것을, 또는 예배드리는 것을 봐서 그들의 경건의 수준이나 정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의 현대적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의 경건사상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파악되고 해석된다. 그것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 점을 칼빈의 경건 사상이 갖는 특징과 현대적 의의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칼빈에게서 있어서 경건은 어떤 바리새적인 행동이나 외양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율법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삶의 모델을 만들어내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신자의 내면과 삶의 중심에 관계된 것이다. 물론 경건은 외면적이고, 실천적이며, 행동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판단되고, 평가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신자의 내면상태가 그대로 밖으로 표현된 것으로의 외면이고, 삶의 중심이 다양한 일상사 속으로 확장된 것으로서의 생활이자 실천이다. 칼빈에 따른 삶의 중심으로서의 경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계시된 바에 따라 알고, 따르며, 예배하는 것이다. 경건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점들을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이자, 사상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신자의 의식과 태도, 행동들을 포괄하는 삶 전체이다. 그것은 신자가 자신을 넘어서는, 자신의 시야와 지각과 감각을 넘어서는, 즉 초월적인 하나님, 그 전적 타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수용하며 동시에 타자들인 주변 사람들을 수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들을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역도 사실이다. 주변의 수많은 타자들을 사랑하면서, 그 모든 이들을 존재케 하신 절대 타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벗어나는 타자를 전혀 볼 줄 몰랐던, 혹 보려고 하지 않았던 자신이 이제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 줄 알게 되는 신비, 그 신비가 바로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더 나가서 이기주의적인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타자의 수용은 동시에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즉 자기 속에 함몰되어 있는 자기중심, 자기절대화의 죄와 오류로 얼룩진 자기를 버리거나, 떠나는 자기부정 또는 자기초월의 영성을 의미한다. 영성은 어느 숲 속 나무 곁에 앉아서 침묵과 명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영성은 죄와 허물로 가득 찬 자신을 버리면서, 혹 떠나면서 새로운 자신으로 언제나 거듭나는 그런 자기부정의 영성이다. 그것은 자기의 오류를 인정하고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바로 그 영성이야말로 오늘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미래와 희망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하는 역동적이고, 구원적인 영성이라고 본다. 그 영성은 현재의 자신인 것, 혹 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고, 더 나은, 더 좋은 자신과 세계를 찾아 나서게 하는 초월적, 그리고 세상 변혁적 영성이다.

칼빈의 경건사상은 바로 그런 신비와 영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동시에 수많은 이웃들과 수평적 관계들을 바르게 맺어나가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삶을 조직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타자의 빛에서 자신을 보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현하며, 타자가 잘되면서 자신이 잘되는 길을 모색할 줄 아는 통전적이고, 공동체적인 새로운 인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경건사상은 오늘날, 자기중심적이고, 일차원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속주의의 도전으로 인해 진정한 영성과 신비를 상실해가며, 한낱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속으로 도피하려는 교회들에게, 그리고 또한 새 길을 찾고자 여러 방향을 두드려보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종교운동들에게 문제를 보게 하고, 알게 하고, 그리고 풀어나가게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저자:이오갑 박사/그리스도신대 교수(조직신학)/http://cafe.daum.net/wordlife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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