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령론(John Calvin`s Doctrine of Holy Spirit) / 이은선

출처 :기독교강요독서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 장칼뱅

 

칼빈의 성령론(John Calvin's Doctrine of Holy Spirit)

이 은 선(안양대 목회학과 부교수)
* 이 논문은 안양 대학교 교내 학술 연구비 지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


들어가는 말

1909년 프린스톤의 유명한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면서, 신학에 대한 칼빈의 가장 위대한 기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교리인데, 그의 성령론의 성격은 구원론적이라고 하였다.. 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John Calvin the Theologian," in his Calvin and Augustine, ed. by Samuel G. Craig(Philadelphia :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56), 484-5. 이러한 워필드의 언급에 대하여 이 양호 교수는 워필드가 칼빈의 신학 구조를 하나님 중심(트뢸취)이나 기독론중심(니젤)과 대조적으로 성령 중심으로 파악했다고 하였다.(Yang-Ho Lee, "The Structure of Calvin's Theology," Yonsei Journal of Theology(1996), vol. 1, 108.) 워필드는 죄와 은총 교리가 어거스틴에게서, 이신칭의론이 루터에게서 온 것같이 성령론은 칼빈에게서 왔다고 했고, 기독교 강요는 구원을 성취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논문이라고 하였다.(op. cit., 484-5)
이러한 워필드의 주장에 대하여 옹호하는 입장에서 린데(Van der Linde)와 크루쉐(Werner Krusche)가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Van der Linde, De Leer van den Heiligen Geest bij Calvijn, Bijdrage tot de Kennis der Reformatorische Theologie, TH.D. Dissertation(Wageningen: H.Veenmam & Zonen, 1943); Werner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57) 이 연구들은 지나치게 논쟁적인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van der Linde는 바르트의 견해를, Krusche는 에밀 부르너와 그 제자들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앞의 논문은 칼빈의 성령론을 일반적 사역과 특별한 사역으로 나누어 논하였고, 후자는 성령과 우주, 성령과 인간, 성령과 교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이들은 칼빈의 성령론이 구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섭리와 우주의 보존에서 성령의 역할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칼빈의 성령론의 구원론적인 성격과 함께 우주론적인 성격을 함께 고찰하고자 한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의 문제와 관련하여 성령의 내적 조명이 강조되고 있다. 정통주의자들은 성령의 영감에 의한 성경의 무오류의 교리를 주장하는 반면에, 신정통주의자들은 성령의 내적 조명에 근거하여 성경의 무오류교리에 반대하고 성경의 내용이 영감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정통주의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가 바로 칼빈의 성령의 내적 조명에 대한 견해이다.. Wilhelm Niesel, The Theology of John Calvin, trans. by Harold Knight(London: Lutterworth Press, 1956), 32-36; Ronald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Geneva: Geneva Divinity School Press, 1982), 102, 110-114.
그래서 본고에서는 칼빈의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내적 조명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칼빈의 성령론이 구원론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목회적 측면이 소홀하게 취급된 느낌이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칼빈의 성령론의 목회적 측면도 아울러 조명하고자 한다. 특별히 오늘날 성령의 은사 문제가 신학계의 뜨거운 논쟁 거리로 계속 논의가 진행 중인데, 은사에 대한 칼빈의 이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칼빈의 성령론의 우주론적 측면, 성경 권위와의 관계, 구원론적 측면, 목회적 측면과 은사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I. 성령과 삼위일체

칼빈은 기독교 강요1권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는데 특별히 성령의 신성(deitatem Spiritus)에 대하여 14절-15절에서 취급한다. 그는 먼저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면서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위격(persona)이란 용어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성자를 그 본체(hypostaseos)의 형상(히1:3)이란 구절에 근거하여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실재(subsistentiam)이고, 이 이론은 성령에게도 적용되어 성령도 성부와 구별되나 본질의 구별(distintio essentiae)은 아니라고 하였다. 칼빈은 히브리서 1장 3절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는 세 본체가 있는데, 이것을 라틴 교부들은 위격(persona)으로 표현하였으며, 직역하면 실재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Inst., I.13.2) 칼빈은 위격이란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환될 수 없는 특성의 의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Inst., I.13.6) 그러므로 칼빈은 삼위일체, 위격같은 그러한 용어들은 성경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용될 뿐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해 구별된다는 점에 일치한다면 용어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Inst., I.13.5)
칼빈은 이와 같이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하나님으로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힌 후에 14절-15절에서 성령의 신성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그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니라(창1:2)는 창조 기사에 근거하여 이 세상이 성령에 의해 창조되었고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에 의해 유지된다고 하였다.(Inst., I.13.14) 이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께만 귀속될 수 있는 여러 사역들, 중생, 칭의, 성화, 예언의 근원,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훼방죄에서 드러난 성령의 신적 위엄 등을 성령에게 귀속시키므로 성령의 신성의 증명된다고 하였다.(Inst., I.13.14-15)
그런데 칼빈의 삼위일체와 성령의 신성에 대한 논의에서의 실제적인 관심은 정교한 신학적 사색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독교인의 생활이었다. 그는 성령의 신성을 논하면서 (성령의 신성에 대한) 우리를 위한 최고의 확증은 친숙한 경험(familiari usu)으로부터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그는 성경이 성령에 귀속시키는 것과 우리가 경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certa pietatis experentia)을 통하여 배우는 것이 성령의 신성에 대한 확증을 가져온다고 하였다.(Inst., I.13.14) 칼빈은 빈번하게 경험을 성경의 확증의 보조적인 것으로 호소하는데, 여기서는 경건에 호소한다. 칼빈은 (삼위일체)의 이 실제적인 지식은 의심할 바없이 쓸모 없는 사색보다 한층 더 확실하고 견고한 것이다(Inst., I.13.1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경우에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도 사색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신앙생활, 즉 경건의 경험과 연관되어 신자들의 신앙의 실천을 위한 힘과 위로의 원천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성령론도 우리의 구체적인 경건의 체험에서 확증되어야 한다. 칼빈에게서 성령은 삼위의 한 위격으로 신성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 사실은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생, 칭의, 성화와 같은 구체적 경건의 체험과 연결되어 확증되어야 한다.
칼빈은 성령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성부, 성자와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제3의 위격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삼위일체뿐만 아니라 성령의 신성도 단순한 사색적 지식이 아니라 성경에 분명한 근거를 가지면서 경건의 경험에서 확증되고, 더 나아가 우리의 구체적인 신앙생활과 연관되어 신자들에게 힘과 위로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II. 성령의 우주적 사역

1960년대 이후에 벌코프(Hendrikus Berkhof)와 몰트만(Jurgen Moltmann)을 중심으로 성령의 우주적 사역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Hendrikus Berkhof, The Doctrine of Holy Spirit(Richmond: John Knox Press, 1964);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Faith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79); Jurgen Moltmann, God in Creation, A New Theology of Creation and the Spirit of God (San Francisco : Harper & Row, 1985).
이들은 공통적으로 칼빈의 우주적 성령론을 주목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전개하였다. 벌코프는 사회적 성화가 교회와 복음의 중재를 통한 기독화의 과정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사를 통해 교회를 가르치는 일을 포함하며,. Berkhof, Christian Faith, 500.
세상의 갱신은 사람들의 갱신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 자신의 길을 따른다고 하였다.. Ibid., 508.
그는 사회적인 민주화, 탈제의화, 세속화, 개인주의화,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과학적-기술적 해방이란 서구 문명의 특징들을 성령의 전진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의 주이자 머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Berkhof, Doctrine of The Holy Spirit, 102.
벌코프의 비전은 창조주 성령(creator spiritus)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구원자 성령(Spiritus Redemptor)에 속한다. 벌코프에 의해 우주적 영역을 제공받은 것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하고, 성화하는 활동이다.
창조 속에 계신 하나님(God in Creation)에서 몰트만은 칼빈이 성령 안에서의 창조라는 신학적 구상을 받아들인 몇 안되는 신학자라고 언급한다. 생기 있게 하는(Nicaenum) 성령은 칼빈에게 있어서 삶의 원천(fons vitae)이다.. Moltmann, 김 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한국신학연구소, 1987), 25.

이러한 개념을 토대로 몰트만은 창조 안에 있는 신적인 영의 임재를 우주적 거하심과 화해하는 거하심과 구원하신 거하심으로부터 구별하였다.
벌코프와 몰트만같은 현대 학자들은, 중요한 점에서 견해가 다르지만, 우주적 성령론을 인간과 자연을 통합한 미래의 하나의 세계를 위한 본질적인 토대로 삼으려 한다. 현대 신학자들의 우주적 성령론은 성령의 우주 질서를 유지하는 사역과 성령의 구원론적 성격을 통합하여 우주 질서의 성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가 칼빈의 우주적 성령론을 올바로 계승 발전시킨 것인가?
워필드가 1909년에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렀을 때, 칼빈의 성령론의 구원론적 방향을 중시하였지만, 칼빈의 성령론에서 성령의 우주적 사역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크루쉐, 밀러(Benjamin Charles Milner), 볼트(John Bolt)가 칼빈의 성령론의 우주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Benjamin Charles Milner, Jr., Calvin's Doctrine of the Church(Leiden: E. J. Brill, 1970); John Bolt, Spiritus Creator: The use and abuse of Calvin's Cosmic Pneumatology, 13-33.
크루쉐는 성령과 우주, 성령과 인간, 성령과 교회로 나누어 성령의 사역을 논의하면서 성령의 우주적 사역을 취급하였고, 밀러는 우주, 사람, 그리고 교회뿐만 아니라 정치 질서에서 성령의 역할을 검토하는 가운데 성령의 우주적 사역을 다루었다. 볼트는 벌코프와 몰트만 등의 현대 신학의 성령의 우주적 사역에 대한 관심에 동조하면서도, 그러나 그들의 관점은 칼빈의 성령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Bolt, "Creator Creator: The Use and Abuse of Calvin's Cosmic Pneumatology," 27.

크루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칼빈에게서 성령의 활동은 성령과 우주, 성령과 인간, 성령과 교회의 삼중적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칼빈은 롬8:14절 주석에서 성령의 활동이 다양하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적절하다. 모든 피조물들이 그것을 통해 보존되고 움직이는 성령의 보편적인 사역이 있다. 또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성령의 사역들이 있는데, 이것들 역시 그 성격에서 다양하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성령에 의해 성화를 의미하는데, 주님은 자녀들로 분리해 놓은 자들 이외에는 성화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 Comm. Rom8:14.

성령은 모든 생명(life)의 장본인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이러한 삼중적 활동은 이 세상에서 모든 생명의 삼중적 수준을 반영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세 등급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첫째 생명은 오직 동작과 감각에만 존재하고 우리가 동물들과 공유하는 보편적인 생명이다. 둘째는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생명이다. 세 번째는 신자들만이 획득하는 초자연적 생명이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그래서 그들의 각자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불린다.. Comm.4:18.
이러한 칼빈의 언급들을 토대로 우리는 성령의 우주적이나 숨겨진 능력(사역)(arcana Dei virtus), 모든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선물들(dona)의 일반적이고 차별 없는 수여, 그리고 양자의 영(spiritus adoptionis)으로서 중생시키는 특별한 사역 사이의 구별을 할 수 있다. 크루쉐는 서로 서로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서 이러한 세 개의 활동 영역을 세 개의 목적론적으로 질서잡힌 동심원적 서클로 적절하게 묘사했다. 가장 넓은 것은 법을 가진 전체적인 피조 세계와 무의식적인 동물의 생명을 포함한다. 둘째로 더욱 좁게 역사적 형식을 가진 사람의 합리적인 생활, 셋째는 내적 원으로 택한 자들의 영적 생활의 영역이다. 우주는 인류를 위해 존재하고, 인류는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 Krusche,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13.
칼빈은 성령의 사역의 가장 큰 원의 사역을 삼위일체와 관련시켜 기독교 강요 1권 13장 14-15절에서 다루었고, 두 번째 원에 대해서는 2권 2장 12절-17절에서 다루었고, 가장 좁은 원은 3권과 4권의 성령론에서 다루었다.
첫 번째 원인 우주 그 자체에서 성령의 활동을 칼빈은 질서를 유지하고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이해한다. 성령의 능력은 첫 번째로 창조 세계가 무질서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조의 질서와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성하기 전에 그것은 엉성한 덩어리였다는 것을 이미 들었다. 그(모세)는 이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통치 혹은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무질서한 덩어리들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 마음에서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덩어리는, 아무리 혼란스럽다 하더라도, 당분간 성령의 비밀한 효율성에 의해 안정된다고 주장한다.. Comm. Gen.1:2.
질서를 보존하는 성령의 계속되는 활동은 고전적으로 creatio continua(계속적인 창조)로 언급되었으나, 크루쉐는 칼빈이 무로부터의 원래의 창조에 대하여 creatio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성령의 우주적 질서의 유지에 대해서는 continuatio creationis(창조의 계속)로 언급하는 것이 낫다고 제안한다.. Krusche,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16.

질서를 유지하는 성령은 역시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온 우주에 편재하시어, 하늘과 땅에 모든 것들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자라게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분은 어떤 한계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만물들에게 그의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그것들 속에 본질, 생명, 그리고 운동을 불어넣으심에 있어서, 그분은 참으로 명백하게 하나님이신 것이다.. Institutes of the Christina Religions trans. and ed. by Ford Battles(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0), I.13.14. 이하 Inst.,로 약함.

이와 같이 칼빈은 성령의 우주적 사역을 삼위일체의 구조에서 창조와 질서 유지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칼빈의 경우에 성령의 우주적 사역은 근본적으로 우주의 창조와 그 질서의 유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의 우주적 사역은 벌코프와 몰트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주의 성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III. 성령과 일반 은총

칼빈은 성령의 삼중적 사역에서 우주의 창조와 질서 유지에 관련된 사역을 다룬 후에 모든 인류와 관련된 성령의 사역을 취급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성령의 은총이기 때문에 일반 은총이라 불리는데, 기독교인과 일반 은총의 관계에 대하여 지금도 견해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일반 은총과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부인하는 바르트의 견해와 인정하는 에밀 부르너의 견해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에 대하여 아브라함 카이퍼와 스킬더의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들은 모두가 칼빈의 견해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고 있다. 그러면 일반 은총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무엇인가?
칼빈은 사도행전 17:28에 대한 주석에서 하나님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영감을 통해 자신이 무로부터 창조한 것들을 보존하신다고 언급한 후에 사람의 생명은 운동보다도 훨씬 더 우월하며 운동은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하였다. 그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야만적인 짐승들과 공통으로 감각과 운동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지 않은 이성과 지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 속에 있는 생명은 짐승 속에 있는 생명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 Comm. Act. 17:28.
이와 같이 사람이 이성과 지성을 소유하여 다른 피조물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에 의해 우리 안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것의 원래의 모습은 그것의 회복으로부터 판단할 수 있다. 골로새 3:10절과 엡4:23에 호소하면서 칼빈은 회복된 형상이 부분적으로 참된 거룩과 의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omm. Gen.1:26.)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의 두개의 기능을 오성(understanding. Inst., 2.2.12-15)과 의지(2.2.26-27)로 본다. 어떤 의미에서 의지에 관한 논의는 5장까지 계속된다.(2.2.26-2.5.19). 칼빈이 의지를 방대하게 논한 것은 주의설(voluntarism)을 강조하기 때문이며, 이런 입장은 후기 개혁주의 정통신학에서 그대로 계승된다.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인 기능은 영혼의 지도자이고 통치자인 오성과 분명한 위계질서에서 정리된 의지이다. 의지는 언제나 그것의 소망에서조차 오성의 판단을 (기다리면서) 오성의 명령을 염두에 두고 있다.. Inst., I.15.7.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범죄했을 때 파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손상되었으나, 칼빈은 사람의 본성적인 재능들을 자연적 재능과 초자연적 재능으로 날카롭게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이성은 자연적 선물이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히 말소될 수 없다. 그러나 이성은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부분적으로 부패되어 이것의 잘못된 파괴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서 칼빈은 일반 은총을 말하며 이 일반 은총의 근원도 성령이라고 한다.. Inst., 2.2.14-16. 칼빈은 이성은 우리의 본성에 고유한 것으로, 우리를 동물과 구별해 준다고 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generalem Dei gratiam)이라고 하였다. (2.2.17)
칼빈에 따르면 오성은 부패하고 기형적인 모습이지만, 지상의 일, 즉 사회 생활을 해 나가는데 필요한 공정성과 질서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 그리고 법의 필요성과 법의 원칙을 이해한다.(Inst., 2.2.13) 그리고 학술과 공예를 배울 인간의 능력은 인간성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독특한 은총(peculiarem Dei gratiam)이다.. 칼빈은 특별 은혜(special grace)라는 용어를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한다. 기독교 강요 2.2.6에서 그 용어는 거듭난 선택자들에게 임하는 은혜를 뜻하지만, 인간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적합한 재능, 성품, 영웅 기질같은 은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더 많다.(2.2.17, 2.3.4) 칼빈은 거듭나지 않은 인간들이 철저하게 사탄적이지 않는(2.2.11)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참조, Inst., 3.7.; 3.14.2)

사람 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이성(ratio)과 오성(intellegentia)의 일반적인 이해력(universalem comprehensionem)은 보편적인 것이다.(Inst., 2.2.14) 칼빈은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인정한다면, 진리가 어디에서 나타나든 우리는 그것을 결코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안된다고 하였다.(Inst., 2.2.15) 이와 같이 칼빈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이루어지는 질서 유지와 학문 연구 등을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반 은총으로 보았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참으로 의지도 타락으로 전적으로 노예화되었다. 오성과 비슷하게 의지도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소멸되지는 않으나 올바른 것을 추구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욕망에 매여 있다. 자연법은 일반적인 원칙에 대한 안내자 역할은 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선을 수행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런데 선을 행할 수 없이 타락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덕이 나타나고 있는데, 칼빈은 이러한 덕을 성령의 역사로 설명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에서 사람의 의지에 대한 논의에서 지속적으로 중생의 역사에 대한 성령의 사역과 불신자들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구별한다. 우리는 중생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령을 가질 수 없으므로, 우리가 본성으로부터 가지는 것은 무엇이나 육적인 것으로 영적 것과 대조된다.(Inst., 2.3.1.) 그러므로 중생하지 않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받을 일밖에 나올 수 없는데, 실제적으로 불신자들도 선을 행한다.
칼빈은 불신자가 행하는 선을 본성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적으로 억제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귀속시킨다.((Inst., 2.3.3.) 칼빈은 이것을 특별한 은혜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본성의 공통적인 선물들이 아니라 사악한 사람들 위에 하나님께서 수여하시는 그 분의 특별한 은혜이다.((Inst., 2.3.4.) 이 점에서 칼빈이 성령에 대하여 말한 것은 중요하다. 칼빈은 성령의 세 가지 사역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는 데서도 삼중적인 구별을 사용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방식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 모두는 그를 힘입어 움직이고 살아간다.(행17:28) 그러므로 여기서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로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특별한 방식으로 사악한 자들을 강요하시고 조종하신다. --- 셋째로 그가 선택한 자들에게 특별한 성화의 성령에 의해 통치하시는 경우를 들 수 있다.. Comm. Isa.10:5.

밀너는 아주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두 번째 사역인 사악한 자에 대한 역사를 성령의 사역으로 언급하고 제네바 요리 문답을 그러한 사례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성령에 의해 그들(사악한 사람들과 마귀들)을 통치하지 않으시지만, 그는 재갈과 같이 그의 능력으로 그들을 억제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자신의 의지의 사역자로 삼으신다.. Milner, Calvin's Doctrine of Church, 41.
불경건한 자들은 성령과 역시 하나님의 비밀한 충동(arcano Dei instinctu)에 의해 하나님의 의지를 행하도록 억제당하고 제지당한다.
칼빈은 이와 같이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성과 의지에서 나오는 모든 선한 것들을 성령의 역사에 귀속시켰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으나, 성령께서 인간에게 학문 연구와 여러 예술 활동에 필요한 재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악한 의지를 억제하여 선한 행동을 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성령의 보편적인 일반 은총의 역사이다.
볼트는 칼빈이 성령의 우주적 활동을 강조한 이유를 성령의 신성의 증명, 하나님의 선물의 향유. 볼트는 칼빈이 창 1:26의 주석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지상에 대한 사람의 지배와 관련된다는 존 크리소스돔의 이념을 명백하게 거부한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하나님의 선물들의 올바른 향유가 창세기 1:28절에 있는 소위 문화 명령보다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고 한다.(Spiritus Creator, 24).
, 하나님의 인간 정죄에 대한 변명 불가능성 등을 지적하면서 성령의 우주적 활동의 결과인 정치 질서의 수립은 지상에서 인간의 활동이고, 시민 정부 그 자체에 구원적 혹은 메시야적 역할을 귀속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Bolt., "Spiritus Creator," 24-26.
이와 같이 칼빈에 따르면 창조의 영역에서 성령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활동은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에서 질서를 보존하고 범죄를 억제하는 활동이다. 칼빈은 일반 은총을 통하여 인류의 공통적인 삶의 토대가 구축되는 것을 인정하지만, 일반 은총을 통한 문화 건설이 구원론적인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일반은총론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Herman Kuiper가 연구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는 칼빈주의, 김 기찬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사, 1996)에 나타나 있고, 바빙크의 견해는 일반은총론, 차 영배역(총신대출판부, 1980)를 보라. Herman Kuiper의 견해는 Calvin on Common Grace(Grand Rapids: Smither Book, 1924)를 보라. C. Van Til은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8 no 1, pp.39-60, no 2, pp.166-200, vol 9 no 1, pp. 47-84 등에 연속적으로 발표한 논문 Common Grace에서 카이퍼, 바빙크, 헤페 등의 견해를 비판하고 칼빈의 견해를 지지한다. Henry C. Vantil은 칼빈주의 문화관에서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스킬더의 세속문화에 대한 은총을 거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문화관을 양극단으로 비판하고 일반 은총의 문제를 반위관계, 그리스도의 왕직,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사명, 그리고 기독교인의 세계관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논의하면서, 칼빈의 견해에 귀를 기울였다.( Henry C. Vantil 칼빈주의 문화관, 이 근삼역(성암사, 1984), 337-361)


IV. 성령의 내적 증거

칼빈은 성령의 우주적인 사역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역과는 구별되는 구원론적인 사역에 가장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구원론적인 사역에게 가장 두드러진 것이 신자들에 대한 성령의 내적인 증거이다. 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신지식, 성경의 권위, 구원의 확신의 세 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워필드는 기독교 강요를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알게 만들고 죄인들을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로 인도하는 성령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논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는 성령의 증언(testimonium Spiritus Sancti)의 위대한 교리로 시작하며, 이 교리는 성령의 내적 활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생생하고 생명력을 제공하는 지식이 전달된다고 가르친다. 성령의 증언이 없으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사람들의 눈앞에서 헛되이 퍼져 가게 된다..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486.
타락한 인간이 신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자연과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므로 결국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를 통한 신지식의 문제는 성경의 권위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칼빈의 성령의 증거 교리는 말씀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구원에 대한 성령의 증거의 두 제목 하에 고려될 수 있다. 이 두 증거는 후자가 전자의 실제적 적용이기 때문에 서로 서로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1. 성령의 말씀에 대한 내적 증거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와 부처같은 종교 개혁자들과 같이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와 논쟁하는 가운데서 성령과 말씀의 밀접한 연합을 강조하였다.. 루터, 츠빙글리, 부처의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지 원용, 루터가 본 성령론과 은사운동, 루터 사상의 진수지 원용편(컨콜디아사, 1986), 307-310; W. P. Stephens, The Theology of Huldrych Zwingli(Oxford: Clarendon Press, 1986), 59-64, 129-138; W. Peter Stephens, The Holy Spirit in the Theology of Martin Buc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129-156.

로마 카톨릭 변증가들은 성경을 정경으로 결정한 것이 교회이므로, 교회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칼빈도 우리가 성경을 보편 교회(Catholic Church)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말씀에 대하여 증거하고 그 기원에 대하여 입증하셔야만 한다고 한다.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으로 그 자체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성경은 흰 것과 검은 것이 색에서 구별되고 단것과 쓴 것이 맛에서 구별되듯이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그 얼굴에 지니고 있으며(Inst., 1.7.2) 성경은 자증한다.(Inst., I.7.5) 성경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타락으로 인하여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칼빈은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에 대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성령의 내적 증언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성령의 권위 인식에서 성령의 내적 증언을 특징적인 교리로 만들었다.. 다른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령의 밀접한 연합을 강조하고,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고 해석자라는 것을 강조하나, 성령의 권위 인식이 성령의 내적 증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칼빈은 성경이 객관적으로 분명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성경은 성령의 내적 증언에 의해 우리에게 인식되기 전에 이미 자체적으로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 단지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먼 눈을 열어 성경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필요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논쟁을 통해서 세워질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 의해서만 세워질 수 있다.(Inst., 1.7.4). 성령의 내적 증언에 의한 성령의 권위 인식이란 칼빈의 주장이 너무 주관적이고 순환적이라는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되었다.(Otto Weber, Foundations of Dogmatics, Vol. 1.(Grand Rapids: Eerdmans, 1981), 242-5를 참조하라.) 이러한 반론에 대해 칼 바르트는 이것은 논리적 순환으로, 이러한 접근에서 주체(성령)와 객체(기록된 말씀)가 연합한다고 하였다.(Church Dogmatics I. 2(Edinburgh: T & T Clark, 1956), 535) 오토 베버는 성령의 증언은 성경의 증인(witness)들의 증언(testimony)에서 우리를 만나며, 그것에 의해 주체와 객체의 양극성은 극복된다고 하였다.(op. cit., 244)
합리적 주장들은 어떠한가? 성령의 증거가 선행하면 그 후에 합리적 주장도 일정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Inst., I.8) 칼빈은 성경의 객관적 권위가 성령의 내적 증언을 통하여 주관적으로 확립된다고 보았다.
재세례파의 성경과 분리된 성령의 역사의 주장에 반대하여 칼빈은 성경과 성령의 연합을 주장하였다.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직분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명령하는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치는 것이다.(Inst., 1.9.1) 말씀과 성령의 통일성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구원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연결되어 있다. 말씀만 강조하고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나, 성령만 강조하고 말씀을 무시하는 것도 위험하다.

2. 성령의 구원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것들이 성령의 비밀한 사역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기독교 강요 제3권의 1장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 사역과 성령의 신자 개인에 적용시키는 사역의 나누어질 수 없는 연결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고 성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David Willis는 Calvin's Catholic Christology(Leiden: E. J. Brill, 1966)에서 칼빈의 성령론을 기독론적 성령론이라 하였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신과 연합시키는 끈(bond)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수행하신 구원 사역의 축복은 그리스도가 우리밖에 머무르면(extra nos) 아무 가치가 없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 안에(in nobis) 거주해야만 한다.. Willem van't Spijker, "extra nos" and "in nobis" by Calvin in a Pneumatical Light," in Calvin and Spirit, 39-62. Spijker는 칼빈의 'extra nos'와 in nobis'의 통일성에 칼빈 신학의 역동성이 있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교류에 대한 칼빈의 중요한 교리를 만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에 참여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아무 것도 우리에게 수여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한 것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우리에게 수여하지 않는다.(Comm. John 16:4) 성령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칼빈이 우리 안에 있는(in nobis) 그리스도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밖에 있는(extra nos)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실성을 손상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칼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면서 신비주의에서 논의되었던 내향성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unio mystica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실제적인 통합도 본질에서의 동등함도 수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의 교제만이 있기 원하는 것이 칼빈의 신비적 연합의 내용이다. 그래서 칼빈은 본질의 연합을 주장하는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의 주장을 예리하게 반박하였다. 칼빈에게서 extra nos와 in nobis의 관계는 우리의 구원의 객관적 확실성을 보장해주면서 동시에 성령의 사역에 의한 생활의 새로운 변혁을 제시한다.. Ibid., 50-51.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III.2.25에서 신앙과 연합에 대하여 간략하게 묘사한다. 그(하나님)가 성령에 능력에 의해 우리를 신앙으로 조명할 때, 그리스도는 동시에 우리를 그의 몸으로 접붙여 우리가 모든 선의 참여자가 되게 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령의 사역과 접붙임을 동시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III.11.10에서 신비적 연합을 언급하며, 이것을 여러 가지 용어로 묘사하는데 그리스도에 접붙임(engrafting)이란 용어를 가장 자주 사용한다. 칼빈은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하나님의 본질의 연합에 대한 어떤 개념도 거부하며, 하나님과 신자의 연합은 성령을 통한 영적인 연합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삼위일체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Dennis E.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 John Calvin and the mysticism of St. Bernard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4), 105-6.

칼빈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연합을 가져오는 믿음이 성령의 역사로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는 믿음은 구원의 확신을 포함하고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믿음이 구원의 확신을 포함한다는 칼빈의 견해와 확신을 믿음으로부터 구별한 청교도들의 견해 사이의 연속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세 가지 의견이 제시되었으며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첫째로 윌리암 커닝햄(William Cunningham),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 그리고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신앙과 확신 사이의 종교개혁 이후의 구별을 칼빈 교리의 질적 발전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칼빈의 견해가 17세기 청교도들에 의해 취급되고 명료하게 밝혀진 목회적 관심들에 무지하거나 혹은 모순된다고 해석한다.. Randall C. Glearson, John Calvin and John Owen in Mortification: A Comparative Study in Reformed Spirituality(New York: Peter Lang, 1995), 21.
둘째로 켄달(R.T.Kendall)과 레인(Antony Lane) 등은 청교도들의 신앙과 확신의 구별이 칼빈의 입장으로부터 질적으로 이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째로 헬름(Paul Helm)과 비크(Joel R. Beeke)는 두 번째 그룹의 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하고 확신을 믿음에 포함시키는 입장과 확신과 믿음을 구별하는 청교도의 입장이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켄달이 1979년에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를 저술하여 칼빈과 청교도들의 신학 사이에 변질이 일어났다고 주장한 이후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하여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켄달은 청교도들은 칼빈이 아닌 베자의 신학의 계승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특별히 칼빈은 믿음의 본질에 확신을 포함시켰으며, 인간 편에서의 믿음을 위한 준비를 부정하였고(믿음의 수동성 강조),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기 위한 자기 검토(실천적 삼단논법)를 부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R.T.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24-28.

켄달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헬름(Paul Helm)은 두 가지를 비판하였다. 첫째로 헬름은 믿음이 확신을 포함해야 한다는 칼빈의 정의는 믿음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인데 반하여, 칼빈은 여기에 약간의 제한을 가하여, 확신 없는 믿음도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믿음에는 확신이 수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Paul Helm, Calvin and Calvinist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서 종대역(생명의 말씀사, 1988), 49, 50.
두 번째로 헬름은 칼빈은 개인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나, 개인적인 구원의 증거는 영적, 도덕적 갱신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지적한다.. Ibid., 54.

그 후에 레인(A. N. S. Lane)은 헬름의 견해를 비판하여 칼빈의 믿음의 본질은 확신을 포함한다는 것과 함께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검토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레인은 칼빈에게서 기독교 강요 1권7장-9장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언과 기독교 강요 3권 2장에서 말하는 복음이 제시하는 자유로운 약속을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만드는 성령의 내적 증언은 동일하고 하나라고 주장한다.. Anthony N. S. Lane, "John Calvin :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 Calvin's Theology, Theology Proper, Eschatology, ed., by Richard C. Gamble(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Co., 1992), 107-121. 비슷한 견해에 대해서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Jelle Faber, The Sav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 in Calvin and the Holy Spirit, ed., by Peter De Klerk(Grand Rapids: Calvin Studies Society, 1989), 2, 6.
성령은 내적인 교사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이 우리 심령에 파고 들어가는 하는 양자의 영으로(Inst., III.1.; III.24.1), 우리의 죄와 구원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킨다.(Inst., III.2.11; III.1.3) 그러므로 레인은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주어지는 믿음은 이미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후에 비크는 이러한 논의를 종합하면서도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칼빈과 청교도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칼빈의 신앙의 정의에 포함된 확신과 신앙의 흔들림, 불안, 의심의 양자의 관계를 신앙의 정의와 경험, 영과 육의 구별, 신앙의 발생 대 신앙의 의식, 삼위일체적 구조와 실제적 삼단논법의 견지에서 논의하였다.. Joel R. Beeke, Assurance of Faith: Calvin, English Puritanism, and The Dutch Second Reformation( New York, London: Peter Lang, 1991), 47-77.

그는 칼빈의 신앙의 정의와 경험의 괴리를 인정하지만, 양자 사이에 말씀 안에서 유기적 통일성을 인정한다. 비크는 칼빈의 경우에 신앙은 성령의 씨이기 때문에 신앙은 확신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확신은 규범적이지만 신자의 의식의 견지에서 정도와 지속성에서 변화한다고 하였다. 칼빈에게서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차적으로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선행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중요성도 강조되어 실천적 삼단논법이 암시적으로 나타나므로, 강조점은 다르지만 청교도와 연속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양호 칼빈: 생애와 사상(한국신학연구소, 1997), 150-4. 이 양호는 칼빈의 신앙과 확신의 관계에서 성령의 역사가 중심적이고 인간 편에서의 실천적 삼단논법에 의한 검토는 주변적인 것이라는 그의 동심원적 해석 방법을 제시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검토해 볼 때 성령의 역사와 믿음의 확신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칼빈은 헬름과 비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앙 속에 의심, 불안의 요소가 나타나는 경우를 인정하지만, 그의 경우에 신앙은 사람 편에서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는 것으로 처음부터 확신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믿음은 근본적으로 성장하여 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노이저(Neuser)는 기독교 강요 3권 1장에서 칼빈이 모든 사람이 복음을 통하여 제공되는 그리스도와의 교류를 분별력 있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비밀한 활동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러한 서술은 신앙의 발생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Wilhelm Heinrich Neuser, "Theologie des Wortes - Schrift, Verheissung und Evangelium bei Calvin," in Calvinus Theologus. Die Referate des Europaaischen Kongresses fur Calvin forschung vom 16. bis 19 September 1974 in Amsterdam, Hrsg. von Wilhelm Heinrich Neuser(Neukirchen-Vluyn : Neukirchener Verlag, 1976), 27-9.
노이저는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2장 1-6절에서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말씀이 신앙의 토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 III.2.33에 있는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말씀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믿음의 발생이 아니라, 믿음의 확신에 적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Fella는 이사야 59장 21절 주석을 추가적인 근거로 제시하면서 이것을 신앙의 발생과 확신의 양자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Fella, "The Sav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 6.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이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장시켜, 드디어 우리의 믿음으로 천국에 가도록 인도한다고 하였다.(Inst., 3.2.33)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믿음의 발생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원의 객관적 사역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신자들이 믿음을 의식하는데서 연약해서 언제나 이 확신을 붙잡을 수 없을 때조차, 믿음의 아무리 작은 씨라도 바로 본질에서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믿음의 뿌리는 신자의 가슴에서 결코 뽑히는 법이 없고 가장 깊은 속에 굳게 박혀서 믿음이 아무리 흔들리고 전후 좌우로 구부러지는 것같아도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으며, 이를테면 적어도 재밑에 있다.(Inst., III.2.21) 이러한 믿음의 씨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선택된 사람의 믿음이 아무리 약해도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양자되었다는 확고한 보증과 날인을 해줌으로써(Comm. Eph.1:4; IICor1:22) 그가 새겨 주신 표징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말소되지 않는다.(Inst., III.2.12)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믿음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인 복음을 신뢰하는 것으로 그 속에 확신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은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도 구원의 확신을 부정하던 로마 카톨릭과 싸우면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의 맹목적 신앙(implicit faith)에 반대하여 확실한 믿음을 수립하고자 하면서 그가 믿음과 확신을 분리시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시대적 필요성에 따라 새로운 강조점을 가져와 그들은 구원의 확신이 나중에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그것에 대한 증거를 자기 검토에서 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칼빈과 청교도들의 신앙관을 대립적으로 파악할 것인가? 칼빈은 믿음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고 청교도들은 그것을 인간의 노력과 자기 검토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이미 칼빈에게서도 비크가 지적한 대로 실천적 삼단논법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었는데 청교도들은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실천적 삼단논법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칼빈과 청교도들의 강조점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지 질적인 것은 아니다.

3. 성령과 성화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3권의 2장에서 믿음에 대하여 논의한 후에 3장에서 회개, 즉 성화에 대하여 논의한다. 칼빈은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회개)과 신앙의 순서 대신에 신앙과 중생의 순서를 따른다는 사실은 구원의 적용에서 신앙의 전체적인 중요성과 위치를 설명해 준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루이스 벌코프는 칼빈의 표현이 형식적으로 신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을 오히려 주관적인 것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칼빈은 사색을 혐오하여 올바르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 신앙의 관계를 강조했고, 신앙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여 주관주의의 덫에 떨어지지 않는다.. Fella, The Sav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 6. Herman Hoeksema는 칼빈의 구원서정론이 논리성이 없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칼빈이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서 일으키는 변화와 의식 가운데 일으키는 변화로 구분될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칼빈은 모든 순서를 의식의 차원에서 논하였다. 칼빈은 모든 순서를 다룸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객관적 사역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주관적 사역을 충분히 구분하지 아니한 때문에 성화가 칭의보다 앞서는 이상한 순서를 제시하게 된 것이다.(Reformed Dogmatics(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1976), 447)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의 구원서정론은 하나님의 역사보다 인간의 활동면에 치중하여 주관적인 경향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였다.(Dictaten Dogmatiek(Kampen, 1910), De Salute, 17) 벌카워 교수는 칼빈은 구원서정을 논함에 있어서 그의 관심을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치중하고 신앙하는 사람에게 두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성령을 통해서만 구원의 약속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였다. 성령은 천국의 열쇠를 우리에게 열어 줄 수 있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은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현상이라는 입장이 칼빈의 구원 서정에 걸쳐 일관된 원리이다.(Faith and Justification(Eerdmans, 1977), 28)

그리고 칼빈에게서 협의적인 의미에서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Inst., III.1.2) 광의적 의미의 중생인 회개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에 일어난다.
칼빈은 복음의 전체 내용은 회개와 죄의 용서 즉 성화와 칭의 인데, 기독교 강요에서 회개를 먼저 논했다. 칭의 후에 성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먼저 다룬 것은 성화를 올바로 이해하면 칭의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영에 의한 성화를 통해서 그들을 진정한 의에 복구시키려는 것이 아닌가?(Inst., III.3.19) 칼빈은 성령은 신앙뿐만 아니라 회개를 일으키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성령이 지배하셔서 믿음을 가진 사람, 즉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체험한 사람이 회개를 한다.(Inst., III.3.2) 회심의 권고의 효과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효과에 달렸기 때문에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Inst., III.3.21) 그러므로 회개는 믿음에 뒤따라올 뿐만 아니라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믿음보다 회개가 선행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Inst., III.3.1) 회개의 근원이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과 회개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은혜가 앞서야 회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령이 지배하시지 않는 곳에서는 올바른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은혜가 선행하지 않으면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없다.(Inst., III.3.24)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하는 것으로 옛 사람과 육을 죽이고 성령에 의한 삶으로써 성립된다.(Inst., III.3.5) 회개는 죄를 떠나고 마음이 변화되어 공의와 자비의 열매는 맺는 것인데, 성령이 우리 영혼을 감화시킬 때에만 일어난다.(Inst., III.3.8)
우리는 그리스도에 참여할 때(ex Christi participartione) 본성을 죽이고 영을 살릴 수 있다.(롬6:6) 그러므로 칼빈은 회개를 중생이라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이 필요하다. 신자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경주를 하게 하시며, 평생을 두고 달리게 하신다.(Inst., III.3.9)
신자들이 성령의 주시는 힘을 받아 죄에 대하여 우세하게 되며 싸움에게 이기지만, 중생한 사람 안에도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fomes)가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정욕의 불꽃이 튀어나와서 죄를 꾀며 자극한다.(Inst., III.3.10) 그러므로 칼빈은 재세례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육의 정욕을 제어할 필요가 없고 지도자인 성령을 따르면 결코 빗나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다. 재세례파는 성령이 시키는 대로 믿고 대담하게 복종하면, 성령은 악한 일을 명령하지 않을 것이라 하나, 칼빈은 성령은 선악을 분별하지 않고 돌진하는 경박한 영이 아니라, 지혜가 가득하고 공정과 부정을 바르게 분별하는 총명이 가득한 분이시며, 사람에게 한도와 절제를 지키도록 가르치시는 영이라고 지적하였다. 성령은 신자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파견되셨으므로,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 싸여 있는 신자들은 꾸준히 계속해서 전진하면서, 죄와 싸워야 한다.(Inst., III.3.14)
회개에서 생기는 열매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성화와 거룩이다. 성령께서는 율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회개를 재촉하신다. 성령은 먼저 우리의 속마음의 원천이 불결한 것을 정죄하시고, 그 다음에 진지한 회개의 표지인 외면적인 증거를 나타내도록 하신다.(Inst, III.3.16) 그리스도인은 일생 동안 죄악된 본성을 죽이려고 노력하고 훈련하여,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주관하시게 하는 것이다.(Inst., III.3.20)
헤셀링크는 칼빈이 성화의 한 특수한 측면으로 성경 혹은 복음의 설교에서 분리된 우리의 일상 생활을 위한 일반적이고 특별한 지혜와 지시를 성령으로부터 얻는다고 말한다.. I. John Hesselink, Governed and Guided by the Spirit - A Key Issue in Calvin's Doctrine of the Holy Spirit, Calvin Studies V, 1990, 29-34. 그는 여러 증거를 드는데, 두 개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은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을 지도하고, 구부리고, 그리고 통치하고 그의 소유로서 마음 안에서 지배한다.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중생하여 그의 지도에 의해 감동받고 통치받는 것은 명백하게 선민들의 특권이다.(2.3.10) 우리가 이러한 시도에서 하나님께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고(conduise) 다스리시도록 간구할 때, 사람들은 자비와 함께 공개적으로 언급된 것에서 화낼 수 없다.(Sermon Deut. 5:20)
칼빈은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삶의 구체적인 측면에 대한 그의 언급에는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성령의 이러한 인도가 성경의 교훈에 모순되는 방법으로 인도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 없는 새로운 계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와 통치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성령을 통해 우리를 부분적으로만 조명하시므로 어떤 기독교인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온전하게 전달하실 때까지 은혜를 더욱 증가시키고, 그러는 동안에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지탱하고 통치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Sermon. Eph. 2:8-10.
우리는 성령에 의해 인도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형성되도록 하나님에 의해 개혁되고 변혁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이러한 특별한 인도에 대하여 밀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령의 비밀한 충동(arcano instinctu spiritus)이란 특별한 기술적 용어(terminus technicus)를 사용한다.. Milner, op. cit., 200-1. 밀러는 불신자의 경우는 성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한 충동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하지 않고 행동한다고 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갑자기 주님을 인식한 것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그가 제자들에게 이전에 제공했던 성령의 비밀하고 숨겨진 은혜의 생생한 인식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하나님은 때때로 잠시 동안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들이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나, 오직 비밀한 충동으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역사한다.. Comm. Luke 24:32.
이러한 언급에서 칼빈은 제세례파의 입장에 근접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칼빈은 기본적으로 성경과 성령의 통일성의 전제 위에서 성령의 일상생활의 인도의 측면을 언급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도록 역사하신다.
칼빈은 구원 과정을 구성하는 개념들을 배열하는 일에 착수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구원 서정의 순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 사역이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논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인간에게 믿어지게 되고(1장), 그 결과 믿음(2장)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회개(3장)가 가능하다. 이 회개의 과정은 6장-10장에 걸친 기독교인의 생활로 전개되며, 그 후에 칭의에 대하여 11-18장까지 다루고 19장 기독교인의 자유, 20장 기도 21-24장은 예정 25장은 최후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 칼빈은 이 모든 과정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은혜가 인간에게 적용되는데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과는 명백하게 구별된다. 그리고 칼빈이 말하는 회개는 중생이라고도 하는데, 회심, 성화, 신앙적 투쟁 등을 포함하고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들의 최후의 소망인 영화도 성령의 사역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축복이라고 설명한다.. Fella, op. cit., p. 7.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때마다, 성령을 하나님의 대행자라고 하여 부활을 기독론적이고 성령론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와 우리를 함께 살리시는 분이신 성령의 능력에 의해 살아나셨다(Inst., III.25.3)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화에서도 역시 생명의 주이고 수여자이다. 칼빈은 결론적으로 성령의 임재 안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없이 기독교는 설 있을 수 없다고 한다.

V. 성령과 교회

칼빈은 기독교 강요 4권에서 교회의 본질, 교회의 정치, 교회의 직제와 권세, 다음으로 성례 등 교회론에 대하여 논하였다. 칼빈의 교회론 중에서 성령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몇 가지 점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칼빈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장로교회의 4중 직제와 조직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1541년의 제네바 교회 법규와 기독교 강요에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4중 직제를 논하였다. 교회 법규와 기독교 강요의 직제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이들의 선출 방식이나 임무 등과 같은 외적인 측면을 다루었고, 그들의 소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 주석과 설교 등에서는 성직자들의 소명을 성령론과 연결시켜 심도있게 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주로 성직자들에 대한 소명과 성령의 관계와 함께 설교와 성례와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 성령과 목회자의 소명

교회의 사역자에 대한 칼빈의 교훈은 공적 사역의 제도적 측면과 영적 차원이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은 목사의 소명을 자신의 내적 소명과 함께 교회의 청빙에 의한 외적 소명을 연결시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Inst., IV.3.11) 칼빈은 공적 사역론에서 4중 직제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성취해야 할 기능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Briam Amstrong, "The Role of the Holy Spirit in Calvin's Teaching on the Ministry," Calvin Studies V(1989), 99-100. Amstrong은 현재까지 칼빈의 4중 직제론이 너무 강조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칼빈은 직제의 숫자는 바뀔 수 있다고 보았고, 기능의 성취를 더 중요시하였다고 보았다.

교회의 다양한 사역은 웬델의 지적과 같이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Francis Wendel, Calvin,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New York: Harper & Row, 1963), 303.
교회의 각 직분의 기능은 성령의 은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칼빈은 4중 직제 중에도 특별히 목사의 소명과 성령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목사의 직분론에서 루터는 만인제사장의 원리에 입각해 있는데 반해, 칼빈은 성직자들의 계급 제도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엄격하게 구분하는 카톨릭의 입장을 반대한 점에서 루터와 동일하게 만인제사장의 원리를 받아들이나, 교회의 직제를 논하면서는 거의 만인제사장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에서 봉사자로서 목사의 권위를 높이고 있다.. 김 영재, 한국 기독교의 재인식(엠마오, 1994), 100-103. 목사직의 위치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이해가 다른 것은 루터가 초기에 회중교회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인제사장직에 입각하여 교직자의 위치를 평신도와 동일한 것으로 보지만,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목회자도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서 목사의 직분은 말씀의 설교와 성례의 집행을 통한 교회의 다스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역을 수단으로 하여 교회를 다스리신다.(Inst., IV.3.3) 하나님은 사람들을 시켜서 자기의 교회를 다스리기로 작정하셨으며, 비천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 말씀의 사역자들을 선택하신다.(Comm. Luk. 10:16) 목사는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직분자로 큰 위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직분의 위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직분의 올바른 수행에서 나오는 역동적인 것이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권을 가진 사신과 우리에 대한 그의 선의의 보증으로 우리에게 파송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엄이 아닐 수 없다. 사역자들에게 권위가 주어진 것은 이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더욱더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올바르게 임명받은 사역자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되셨다는 점을 복음으로 선언할 때,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공적 임무를 수행하고 이것을 우리에게 선언할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사신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Comm IICor. 5:18)
칼빈은 말씀을 통한 교회의 통치자로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 목사의 소명과 공적 사역자로서의 기능 수행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칼빈은 성령의 비밀한 혹은 내적 소명이 없이는 목회 사역에 대한 어떤 근거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고, 영원한 구원의 대사직을 수행하며,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고 사람을 하늘 위로 들어올려야 하는 목회 사역의 성격과 임무의 어려움에서 기인한다. 목사는 사역의 수행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가 그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임명해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셨는데, 유한한 인간치고 그렇게 어려운 임무에 적합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을 받기 전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성령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어져서 그 분은 각자에게 적절하게 성령을 부어 주실 수 있으시다. --- 그리스도는 목회 사역(pastorale munus)으로 부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 주신다.. Comm. Joh.20:22.
하나님께서는 직분자들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먼저 주시고 그들을 부르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는 언제든지 그 직분에 연결되어 있는 은사들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나 목회자를 세우실 때, 그 사람들에게 외면적으로만 자격을 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은사들을 주어서 자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신다.(Comm. Eph. 4: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목회에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 주신 사람들이 목회자로 부름 받게 된다.
칼빈은 교회의 교화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말씀의 선포를 통한 공적 사역을 맡기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목사들의 통치는 세상적인 통치자들과 같이 물리력을 사용하여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 칼빈은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고 교회의 종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면서, 목사와 종이란 용어를 교대로 사용한다.(Comm IICor. 4:5) 목회자는 말씀을 가지고 섬 기는 사역을 감당할 때, 스스로의 능력을 자랑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그의 교훈이 무익하지 않고 열매를 거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Inst., IV.1.6) 칼빈은 목사들의 말씀 선포의 사역의 결과로 성도들의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Comm. Eph. 4:12-4) 이와 같이 목사의 이론적 지위보다 실제적이고 기능적인 지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칼빈 신학의 근본적으로 실천적이고 목회적 차원이 드러난다.

2. 성령과 설교

칼빈은 목사들이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부름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준비해야 할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는 성실하게 준비하고 말씀을 선포하러 나가야 한다. 그는 만일 내가 겸손하게 책이라도 들여다보지 않고 경솔하게 아 좋아, 내가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할 말을 내게 주실 꺼야라고 하면서 선포해야 할 것을 읽거나 생각해 보는 수고도 하지 않고, 성경을 회중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강단에 나왔다면 나는 매우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T. H. L Parker, 김 지찬역,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생명의 말씀사, 1986), 189에서 재인용.
목사가 성실하게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인간의 노력과 합력하도록 하신다.(Comm. Gal.4:19)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기의 사역자로 뽑아 그들의 노력을 자신의 교회 건설에 이바지하게끔 하실 때, 그는 동시에 자신의 영의 숨은 능력으로 그들을 다스려 그들의 노력이 효과적으로 열매를 거두게 도와주신다. .(Comm. Luk1:16) 성령이 교역자를 통하여 열매맺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목회자의 사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차적이요 인간의 노력은 이차적이지만 목회자는 인간적인 노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말씀 선포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결실을 맺는다. 목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설교한다. 목사를 통해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설교자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려면, 설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충실하게 시행해야 하고, 성령의 역사가 수반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길을 열어 주셔야 비로소 설교 말씀이 들린다.(Inst., II.20) 성령께서 내적인 교사가 되어 조명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밝혀 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Inst., III.2.25) 칼빈은 히4:12이 설교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설교의 효율성이 틀림없이 사람의 혀로부터 오지 않고 목소리 자체에도 놓여 있지 않고 전적으로 성령에 귀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Comm. Heb. 4:12)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 사역의 가장 중요한 차원이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결실이다.

3. 성령과 성례

성례는 주께서 세우신 약속이신 언약(foedera)의 표(symbola)로 주신 것으로, 주께서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신 것이다.(accomodat)(Inst., IV.14.3)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성례는 선행하는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비준하는 것으로, 약속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례는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든든히 세우는 믿음의 기둥,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보여주는 거울로 비유할 수 있다.(Inst., IV.14.6) 이러한 성례의 효력은 성례시에 선포되는 말씀을 믿음으로 생긴다. 그러므로 성례에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복음선포가 필요하다.(Inst., IV.14.4)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성례의 효력이 발생하게 만드는 분이 성령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Inst., IV.14.7) 칼빈은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키는 것은 성례 자체의 비밀한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제정하신 목적에 기인하나,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가게 하신다.(Inst., IV.14.8) 칼빈은 성령과 성례를 구별하여,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만 있다고 하였다. 경건한 마음이 성례에 의해서 믿음으로 강화되는 까닭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Inst., IV.14.9) 성령께서는 저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으로 전달한다.(Inst., IV.14.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Inst., IV.14.17)
칼빈은 세례가 성령과 분리된다면 아무런 남는 것도 없을 것이라 하였고, 물세례를 받을 때 양자의 영과 신생의 일반적인 은혜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을 통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뿐이고,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성령이 내린 것에 대해,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물세례받을 때 양자와의 영을 받아 중생한 것이고 성령이 내리신 것은 특별한 은사를 주신 것이라 하였다.. Comm. Acts. 8:14,16.
그는 성찬식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성령의 능력에서 나오는 풍부한 선물을 받는다고 한다.. B. A. Gerrish, Grace & Gratitude: the Eucharistic Theology of John Calvin(Edinburgh: T&T Clark, 1993), 129.

칼빈은 이와 같이 목사들의 소명과 그들의 핵심적 임무인 말씀 전파와 성례의 시행이 모두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목사가 선거를 통하여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지는 공적 사역과 함께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영적 차원이 통합될 때 목회 사역은 실제적인 권위를 가지고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사역자의 위치 보다 오히려 기능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는 칼빈 신학이 이론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기여한다.

4. 성령과 은사

칼빈은 성경에 기록된 은사들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오늘날 많이 논의되는 바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은사들이 초대 교회에 일시적인 은사들이며 그 이후 중단 것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당시에도 계속 된다고 보았는지를 검토해 보자. 칼빈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의는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 사이의 중도의 길로 모색되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모든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교회의 제도에 묶어 버렸고, 재세례파는 말씀과 분리된 성령의 독립적인 계시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빈이 성령의 은사를 논의하면서 제시한 입장을 검토해 보자.
칼빈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의한 방언을 복음 전파를 가장 짧은 시간에 폭넓게 알리시려는 최선의 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말한 방언은 신속한 복음 전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셨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기존의 알려진 언어였다.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령 충만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 Comm. Acts. 2:4. cf. Leonard Sweetman, Jr., What is the Meaning of theses Gift?: An illustration of the contextualization of the Gospel in the writings of John Calvin, Calvin Studies V(1987), 118.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설교를 듣고 세례받은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안수해서 성령받은 사건을 통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한 몸으로 서로 결합하였다.. Comm. Acts. 8:14.
칼빈은 여기서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빌립의 세례에서 중생의 성령을 받았고 사도들의 기도를 통해 성령받은 것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의 가족이 성령받고 방언을 받은 것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으셨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의 방언도 그들이 모르던 언어를 말하는 것이었다.. Comm. Acts 10:44, 46.
여기서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였다. 이것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진정성을 확신시키려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9장 1-7절의 에베소 교회의 사건에 대해 칼빈은 바울의 가르침 후에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 에베소 교인들이 재세례를 받아 중생의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시초에 다양한 방법으로 분배하셨던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했다는 말은 성령의 은사가 있음을 듣지 못했다는 말이다.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안수하였을 때, 이 용어는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는 성령으로 받는 세례(baptism with spirit)를 가리킨다.. Comm. Acts. 19:1-7.
이와 같이 칼빈은 사도행전에서 방언을 신속한 복음 전파를 위해 은사로 주어진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존의 언어라고 보았고 세례 후에 주어지는 성령 받음은 중생의 성령이 아니라 모두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면 칼빈은 고전 12:8-10과 고전 14장의 은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주석하였는가?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에 대해 칼빈은 지식은 거룩한 일들을 깨닫게 하는 깨달음을 의미하며, 지혜는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지식과 지혜가 동시에 사용될 때, 지식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고, 지혜를 감추어진 것을 통찰력을 통하여 더 비밀하고 고차원적인 본질까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Comm. ICor 12:8)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기적에 관계된 믿음이고, 치유의 은사에 대해 칼빈은 간결하게 모든 사람들이 치유의 은사가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로마 카톨릭의 종부성사의 오용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이 종부성사에서 기름을 부어 죄를 용서하고 필요한 때에 병에서 구원한다고 말하나, 이것은 야고보서 5:14-5의 오해한 것이라 보았다. 종부성사에서 기름은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과 은사들에 대한 상징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했다.(Inst., IV.19.18) 그는 치유의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일시적으로 주셨으나 사라졌으며(Inst., IV.19.18). 칼빈은 막16:17절 주석에서 이러한 기적들이 임시적인 은사인지 아니면 그의 교회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 은사인지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이러한 기적이 그 후 얼마 안되어 중지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니 그 실례가 희귀하게 되어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공동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을 내리게 된다고 하였다.
, 주께서 참으로 모든 시대에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옛날과 다름없이 필요한대로 그들의 연약함을 치료하신다.(Inst., IV.19.19) 여기서 칼빈은 치료의 은사에 대해서 로마 카톨릭의 관습을 배경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칼빈은 능력 행함은 마귀를 대적하며 위선자들을 축출하는 능력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하였다.(Comm. ICor. 12:9-10) 영들의 분별은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자와 거짓된 사역자 사이에 예리한 판단을 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Comm. ICor.12:10) 특별히 로마 카톨릭의 공의회들도 오류에 빠지므로 칼빈은 모든 사람의 영을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 시험할 것을 충고한다.(Inst., IV.9.12) 칼빈은 예언의 은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계시하는 유일하고 뚜렷한 은사로, 말하자면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Comm. ICor.12:10)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모두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계시의 특별한 은사를 통해 예언을 문제되는 것에 적용하는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다고 하였다.(Comm. ICor 12:28; Eph. 4:11) 칼빈은 엡 4:11주석에서는 이러한 경우에 선지자에게서 장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을 제외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은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Inst., IV.3.4) 그러나 고전 12:28절에서 칼빈은 선지자를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해석하여 당시의 문제에 적용하는 교회에 대한 사역의 은사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선지자는 성경을 해석하여 당시의 필요성에 적용시키는 사람으로, 목사와 같다고 하였다.(Comm ICor. 12:28) 선지자는 장래 일을 예언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해석하여 교회의 필요성에 적용하는 인물로 보았다.. 칼빈은 교회가 다만 그 흔적과 그림자 정도만 유지하는 정도로 오랫동안 박탈당해 온 은사와 임무에 대하여 우리 마음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사람의 견해도 인정할 용의가 있다고 한다.(Comm. ICor 12:28)
칼빈은 선지자들을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를 바울이 교회 교화의 큰 근원인 예언을 다른 은사들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언은 종교와 믿음에 대한 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배와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책임감을 가지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다.(Comm. ICor 14:3) 결국 칼빈에게서 예언은 영감된 설교로 환원하거나 혹은 상호 관련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칼빈은 사도행전 2장 17절에 인용된 요엘서의 예언한다는 말을 희귀하고 비범하고 뛰어난 지혜의 은사는 주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소수의 예언자들에게만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영적 지혜를 예언자들이 받았던 뛰어난 정도로까지 받게 될 것이란 의미이다.(Comm. Act.2:17) 여기서 예언은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계시를 이해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최종적으로 칼빈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방언 통역의 은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성령의 놀라우신 계시로 받아 알게 되어 자국어로 해석하는 능력으로 보았다.(Comm. ICor. 12:10) 칼빈은 고전 14장에 있는 방언도 사도행전의 방언같이 외국 언어로 해석한다. 그 자체로서 이 은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Comm. ICor 14:5) 이러한 방언의 은사들도 중지된지 오래되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받은 은사들을 야심에 이끌려 자기 과시와 허영에 잘못하였기 때문이다.(Comm. Act. 10:44; 10:46. cf. Inst., IV.19.19)
칼빈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엘버트(Paul Elbert)는 칼빈이 사도 시대와 관련한 어떤 은사들의 가정된 이용 불가능성과 불연속성 때문에 16세기에 은사들을 분배하시는 성령의 초자연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사람들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환원시켰다고 하였다.. Paul Elbert, "Calvin and the Spiritual Gifts,"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An Elaboration of the Theology of Calvin(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2), 123. 칼빈이 그러한 견해를 취한 것에 대해 Elbert는 1) 초대 교회에만 나타나고 그 이후의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초대 교회에 한정된 것으로 보았으며, 2) 성경의 치유 실천과 관련된 로마 카톨릭의 익살스런 주장들의 비극적이고 무익한 사용의 환경적 맥락이었다. 3) 사람들의 불경건의 결점으로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었던(강요1.16) 복음의 설교를 영원히 놀랍게 만들기 위하여(강요4.19.18)였다. 4) 어거스틴은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 있는 은사들의 일부는 하나님이 초대 교회를 세우신 뼈대이며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아마도 더 이상 관찰되지도 않고 어떤 은사들의 시행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뼈대 이론(scaffold theory)을 주장했는데, 이것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137-9)

이러한 해석에 대해 스위트맨(Sweetman)은 첫째로 앨버트가 16세기의 문제가 칼빈의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쳤던 방법을 무시하였다고 하였다. 스위트맨에 따르면 고전12-4장의 방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그 당시 사회 환경에서 상황화되었다.. Leonard Sweetman Jr. "What is the Meaning of These Gifts?: An Illumination of the contextualization of the Gospel in the Writings of John Calvin," Calvin Studies V(1987), 125.
칼빈은 고전 12-14장에서 방언을 사도행전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이전에 몰랐던 다른 언어로 보면서도, 교회의 건덕을 위해 방언을 그 지방 언어로 번역하는 통역의 은사를 언급한다. 칼빈은 14장 14절과 16절의 주석에서 당시의 상황을 반영시켰다. 칼빈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마음과 분리된다는 언급이 당시 로마 카톨릭에서 평신도들이 라틴어로 기도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암송하는 사적 기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보았다. 16절은 공적 기도로, 사제가 라틴어로 기도하여 역시 평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적용시켰다. 이러한 것은 칼빈의 성경 해석이 당시의 상황에 따라 상황화하였다는 증거라고 스위트맨은 보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고전 12장과 14장의 방언을 오늘날과 같은 초자연적인 방언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방언과 동일하게 알지 못하는 기존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고린도 전서의 상황을 당시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예배를 비판하는 근거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주석에서 방언은 중단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로마 카톨릭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기도하는 것을 방언으로 보는 입장과는 조화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칼빈은 고전 14:5절 주석에서도 우리 시대에도 방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부르짖음이 있으며, 하나님이 놀라우신 은혜로 방언들을 구원하여 빛을 주실 때 반대하는 신학자들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14장 27절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같이 예언에 도움이 되는 방언이라 말하는 것을 볼 때, 그가 14장 5절에서 말하는 방언에 대한 지식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방언을 초자연적인 은사로 주어지는 외국어라고 보면서도, 말하는 본인이 이해력을 결여한 것은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는 고전 14:14절 주석에서 성령의 역사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럴 경우에 초자연적인 은사로서의 방언의 중단이 무엇을 의미하며 뛰어난 외국어 능력의 소유와 방언의 은사의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같다.
이와 함께 칼빈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이해력과 분리되어 엑스터시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급진 개혁자들의 말씀과 분리된 성령의 직접적인 신비적 역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Comm. ICor 14:14-16)
둘째로 스위트맨은 앨버트의 성령의 역동적인 초자연적 활동과 능력과 일반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구별하려는 분석이 칼빈에게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Sweetman, "What is the Meaning of These Gifts?" 125.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이성이 사람을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Inst., II.2.12.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 의식 활동의 괴리를 칼빈은 분명하게 거부한다. 헬라어를 모르는 로마인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헬라어를 말하도록 인도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앵무새나 다른 없는 것이라고 한다.(Comm. ICor.14:14) 칼빈의 관점으로부터 성령은 자아의 합리적 활동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자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고 작용한다.
칼빈은 성령에 의해 교회에 다양한 은사들이 분배되는 목적에 대해서는 교회는 세우고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방언과 신유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중단되었다고 본 반면에, 그리스도의 몸인 기독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은사를 받는다고 하였다.(Comm. ICor. 12:8) 왜냐하면 성령이 은사를 주지 않는 성도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받은 은사로 만족하고 전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Leonard Sweetman, Jr., The Gifts of the Spirit : A Study of Calvin's Comments on 1 Conrinthians 12:8-10, 28; Romans 12:6-8; Ephesians 4:11, in Exploring the Heritage of John Calvin(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6), 277-9.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의 개인 구성원들을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키고 자격을 제공하는데 봉사한다. 칼빈은 주님은 사람들 사이에 그의 다양한 은사들을 분배하셔서,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의 은사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모든 사람은 그의 형제의 도움과 원조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 이것이 교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정하신 결속이라고 하였다.. Comm. I Pet. 4:10; Inst., III.7.5.

칼빈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적 은사들로 풍부해진 이유는 그들의 형제들을 세우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Comm. ICor.12:1) 칼빈은 교회 구성원들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교인들을 서로 서로에게 연결시켜 교회를 재활성화시키려는 시도로 은사들의 상호 봉사의 목적을 강조한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의 작용을 통해 강화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개념은 유기적으로 한 몸을 구성하는데서 대단히 중요하다.(Comm. ICor12:20, 27)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집단적으로 그의 교회를 구성함에 따라 신자들의 존재의 모든 측면에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Comm ICor.6:15a; Eph. 5:30; Inst., IV.17.9)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영적 결합은 유기적 연결을 제공하고 여기서 우리에게 흘러나오는 생명을 쏟아 붓는 풍부하고 다함이 없는 샘으로 설명된다. 칼빈에게 주님은 교회가 성령과 밀접한 교제를 가짐에 따라,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그의 몸인 교회와 접촉하고 친밀하게 결합된다.(Inst., IV.17.10)
로마서 12:4-8절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하나님의 주신 다양한 은사의 결과는 통일이고, 기독교의 덕들의 시행이며, 몸 안에서 영적인 성장이라 하였다. 낙관적으로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엡1:22,23참조) 몸의 사지들과 같이 함께 결합되고 짜여져서 한 몸으로 함께 성장한다.(롬12:5, 고전10:17, 12:12,27) 그들은 한 신앙, 소망과 사랑,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살기 때문에 참으로 하나가 된다.(Inst., IV.1.2)
제네바에서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의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 의식과 상호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연합시키려는 것이었다. 칼빈이 인정하는 인간의 몸의 공동체적인 일치를 가진 신자들의 교제는 분명하게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역시 인정되는 성령이 발생시키는 사람들 사이의 공유를 통해 강화되는 이러한 기독교적인 관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상호 사랑의 연합(요13:34)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세대를 위한 목표이다.

나가는 말

칼빈의 성령론은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독교 강요의 거의 모든 주제와 연관되어 있는 포괄적인 주제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거나 특성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카톨릭과 급진 종교 개혁자들 사이의 중도에서 성령론을 정립하면서도 루터나 츠빙글리 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으로 취급하였다. 그래서 워필드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 언급하였고 대부분 학자들도 이에 동감하고 있다.
칼빈은 성령이 단순한 신적 능력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제3위임을 강조하고, 성령께서 창조와 우주 질서를 유지하시며, 모든 사람에 공통적인 일반 은총의 근원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그의 성령에 대한 언급은 주로 교회와 관련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의 역사의 우주적 사역, 인간 사회의 일반 은총의 사역을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관련된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령의 우주적 구원 사역을 주장하는 헨드리쿠스 벌코프나 몰트만의 성령론과는 다르다.
칼빈의 성령론은 당시 새로운 교리를 정립하면서 어디에 최고의 권위를 둘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가 성경을 결정했다는 입장이었고, 재세례파는 성경과 분리된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칼빈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객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객관적으로 기록된 성경은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인식되는데, 이 주관적 인식의 내용은 신앙 안에서 믿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의 견해와 재세례파의 견해를 극복하고 최고의 권위로서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면서, 동시에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신을 정립하게 된다.
칼빈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밖에 있는(extra nos)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intra nos) 그리스도가 되며, 그 이후에 우리는 중생, 믿음, 칭의, 성화, 영화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한다. 교회의 성직자들의 소명도 성령에 의해 주어지고, 교회의 설교와 성례도 성령의 역사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는 은사에 대하여 방언, 치유 같은 특별한 은사들은 사라졌다고 보았고, 세례와 성령에 의한 중생은 연합되어 있다고하여 은사론자들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에게는 은사가 주어져 있는데, 이 은사들의 목적을 교회를 세우고 서로 돕고 유익하게 하려는 것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성령론은 대단히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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