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세 가지 간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승구 교수는 마틴 루터의 명언인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되게 하라!" 라는 말을 들고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우리 안에 하나님 자리가 없을 수 있다!"고 강하게 경고한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 중심으로 흘러가야 이 땅 위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히'라는 말을 '무겁다'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승구 교수는 거룩한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는 어느 정도 중심 한 가운데가 무거워야 함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균형 잡힌 삶과 예배가 있어야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삶도 하나님 중심의 '무거움'을 가지고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허물을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무겁게 눌러 다시는 기도와 예배를 중심으로 죄악, 연약함 앞에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든지 이 땅 위의 모든 자녀들이 그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함으로 하나님의 무거운 거룩하심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우리의 삶과 영혼이 그의 거룩함에 가득 차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재배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미소와 감동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받아 개인의 삶이 제대로 정립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가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무거우심"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핵심은 "우리가 무언가 노력한다고 해서 혹은 기도와 예배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노력도 모습을 떠나 그분은 그 영광 자체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더 짙어지거나 흐려지지 않는다. 또한 예배적 측면에서 주일, 수요일, 금요 철야, 새벽기도까지 빠짐없이 나오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목회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발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실수로 인해 긁혀진 유리의 흠집같이 우리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흠집이 더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칼빈 역시 하나님의 '자비·전능·진리·완전함·거룩함'이라는 크고 놀라운 속성을 말하며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들 안에서 거룩하여지기를 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미 완성된 '거룩히 여김'에 대해 다시 한 번 새겨 보아야 한다. 그의 거룩함은 절대 사라지지도 더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에 동조할 수 없다. 다만 그 거룩함을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정치·경제·문화·과학 전체에서 우리의 위치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삶과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극명하게 비추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우리 내면의 하나님을 버리는 일'에 빠져, 전혀 하나님의 영광에는 흠집이 없는데도 삶과 예배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면 이는 되돌아보아야 한다. 균형 잡힌 삼위일체적 하나님 중심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두지 못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을 치유하고 비추는지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그 안타까움과 불편함을 심각하게 자각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내 울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가리지 않는지, 물질에 어두워 예배를 뒤로 미루지 않는지, 모든 것들이 내 중심으로 흐르지 않는지, 이런 내면을 자각하여 '내적 심리적 공황'이라는 심각한 자각을 가지면 이 땅 위를 울리고 대지를 적신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의 두 번째 간구는 완전한 '하나님나라'에 관한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자기 백성 위에 행하시고 다스리어 그의 선하심과 자비의 부요가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속에 나타나도록 하는 일이다"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통제성과 현재성'을 이룩하기 위해 우리 손을 내밀기 바라신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3중적 의미'를 바라보자.

첫째, 예수를 통해 이미 통치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목표를 가지고 전진해 나가는 '하나님나라'를 친히 삶에서 이루도록 기도한다.


셋째, '하나님나라'는 '아직 아니 하심'(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의미)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혼자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하나님나라에 이바지함으로 그의 나라를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통치와 하나님나라에 협조하는 의미로 동참하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이승구 교수는 강조한다. 우리는 '삶과 말'로서 하나님나라가 과거에 이룩했으며 하나님께서 지금 통치하고 있다는 것들을 전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이고 그의 '메시지' 역할을 할 뿐이다.

기독교인들이 아닌 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인 '하나님나라'의 일부분인 이 세상 속에서도 '번창함과 통제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정녕 이 땅과는 무관하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나라'(요17:14)의 성격은, 영적이며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성격을 띤다고 칼빈은 부르짖는다. 진정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정신 차리고 '하나님나라' 메시지 역할을 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번영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야 하나, 일반 사람들은 칼빈에게 선교 사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주님께서 새로 믿는 자들을 날이면 날마다 그의 백성에 더 보태사"라고 주장하면서 선교에 눈뜨지 못한 때부터 이미 선교를 향해 마음을 두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선교적 마인드로 "하나님나라가 어서 오소서!"라고 간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우리가 공동체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들에 회초리를 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계시가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신비한 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예수와 함께 동조한 수많은 선교사, 순교자, 봉사자들과 늘 함께 한듯하다. 비록 몇 십 세대가 지났지만, 마치 과거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문제를 제기하며 동일하게 받은 세례를 통해 연대감과 연합을 이루어 나가는 단계를 말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우리가 이 같은 간구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모두 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애정을 주님께 향하도록 조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작성하신 대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세 번째 간구의 특성을 제대로 드러낸다. 즉 하나님은 개인에게 성령을 주었고 그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하나님이 작성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늘 내면의 깊은 자각이 없이 그저 보이는 대로 간구하며 보챈다. 이에 대한 인간의 심리를 이승구 교수는 "우리는 간구하라고 하면 늘 '바라는 바'를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바라는 바'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헬라어로 "에피두미아 (-epithoumia)", 즉 "~ 하려는 관점이나 의도로"라는 뜻이다. 인간의 보이지 않는 '욕망', '욕구', '탐욕', '정욕'등을 품고 있는 속마음을 일컫는다.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너무 충만하여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고 그 인간적 '에피두미아의 마음'은 쉽게 버릴 수 없다.

나의 잘못된 '바라는 바'대로 흘러가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에피두미아'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 나의 애정이 하나님에게 향하여 나의 성령과 마음이 감화 감동되어 육체의 고집과 연관한 '에피두미아'적 요소는 버려야 한다. 지구상에서 진정 다른 자와 차별되어 아름답고 찬란한 영적 하나님과 연관하며 구별된 자로 거듭난다. 이승구 교수는 이를 두고 "거룩성은 관계의 개념이다"라는 짧은 표현으로 단정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연인과의 대화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교류한다. 그때부터 이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

하나님을 향한 간구에 대해 칼빈은 "우리가 간구하는 이 일들은 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생각이나 바람이나 간구 없이도, 일어날 일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일들을 여전히 바라고 구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면서 간구를 정의한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와 다른 사상을 가진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심지어 회의론자들은 '딴죽걸기'를 서슴없이 구사한다. 하나님이 최선을 모두 알고 있다면 기도할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 '딴죽걸기'는 여기 '예수의 기도' 앞에 소용이 없어진다. 그의 길 앞에서는 모두가 다 겸허해진다. 그는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늘 기도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바대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기도했다.

"Prayer is not only asking, but an attitude of mind which produces the atmosphere in which asking is perfectly natural."
(기도는 '간구'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자연이 되기를 간구하는 공기를 생산하도록 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 Oswald Chambers(오스월드 체임버스)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 <기독교 강요> 기도편: 예수의 기도(중)
출처: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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