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성령님의 내주하심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성령론 2017. 2. 6. 08:17

4장 성령님의 내주하심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기독교는 참으로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섬기는 실재적인 종교이다. 이슬람교와 같이 허황되거나 거짓된 종교가 아니다. 또 로마 신화와 같이 인간이 치밀하게 궁리하여 꾸며 낸 이야기도 결코 아니다. 기독교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증거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참된 신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다른 증거들과는 구별되며서도 훨씬 더 탁월하여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그것은 바로 신자들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심어 주시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다.

 

이 위대한 진리는 너무나 분명하여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하다.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의 궤변이나 사탄의 술책으로도,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뿌리 깊은 악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이 진리를 약화시키거나 제거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증거들을 뒤로하고 친히 증인석에 앉아서 사역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을 대적하여 "누가 정죄하리요?"(롬8:34)라고 외치시는 것이다.

 

이 증언의 갑옷을 입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가장 연약한 제자라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서는 '매우 이성적이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는 있지만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확신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 주는 것은 없다.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신앙이 정직하고도 담대하게 선포되고, 또 이 정직하고도 담대한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에 강력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회의론자들이 그에게 도전할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고, 여러분이 대답할 수 없는 주장을 내세우며 공격할 수도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던지거나,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궤변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증인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적 추룬의 능력이 힘을 얻고, 그의 영혼이 더욱 온유해질 것이다. 또 그 증인으로 말미암아 그 신자의 모든 행동이 진실해지며, 결국 그 모습에 감동을 받은 대적자들이 지난날 주님께서 받으신 찬사를 고스란히 그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마7:29).

 

그는 자신이 선포하는 바를 믿을 뿐만 아니라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어떤 대적도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눅21:15)를 그에게 주셨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주된 이유에 대해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은 분명히 특별하고도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복된 이 교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 더욱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곧 자신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신자들이 경험하는 위로와 거룩하고도 자녀다운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이 주제는 그 무엇보다 위대하고 소중하다. 특히 이 주제의 광대함은 가히 압도적이라고도 할 만하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사57:15)가 사람과 함께, 아니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생각해 보라. 그분이 자신의 피조물인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한 민족을 불러내어 그들을 성령님께서 거하실 장소가 될 만큼 새롭고도 거룩하게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라. 또 이 천상의 방문자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면서 자신의모든 능력, 곧 거듭나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인 치고 위로하는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광대하고 영광스러운지, 이 유한하고도 보잘것없는 마음으로는 절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 주제에서 흘러넘치는 위로가 참으로 크고, 이로써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 너무나 큰 동기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이 주제를 통하여 큰 영광을 거두신다. 그래서 이번 장의 가장 첫머리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부디 성령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자신의 진리를 펼치시며, 그 거룩한 영향력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를 기대한다.

 

 

1. 하나님의 성전으로 창조된 신자, 그리고 타락

~생략

 

2. 성전의 회복

~생략

1)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순종

2)그리스도의 죽으심

3) 그리스도의 부활

~생략

 

 

 

3. 성령의 내주하심

 

이제 성령님의 내주하심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성경의 증언

 

먼저, 이 교리에 대해 성령님이 어떻게 증언하시는지를 보자. 이 진리가 잘 나타나는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특히 신약성경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구약성경을 보면, 그 시대에도 이 교리가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겔서를 보라.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겔36:27).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겔37:14).

 

신약성경에는 이 교리가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펼쳐져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롬8:11).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고후6:16).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

 

더 많은 구절을 찾지는 않겠다. 이 정도로도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성경이 증언하는 교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중생의 역사

 

성령님께서는 언제 영혼 가운데 들어가시는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중생의 순간'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행하시는 첫 번째 은혜로운 역사이다. 중생의 순간 이전에는 모든 것이 어둡고 황량하며 죽어 있었다. 이미 우리는 이 사실을 앞에서 다룬 바 있다. 성령님께서 자신의 교훈과 생명과 빛과 질서를 가지고 영혼에 들어오시기 전에 그 사람이 겪던 도덕적인 몰락에 대한 두려움과 영혼의 황폐함에 대한 공포를 어느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시는 것이 더 정확하고 생생한 묘사일 것이다.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1:19).

 

그런데 성령님께서 들어오셨다.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은혜 언약에 합당한 방식으로 성령님께서 들어오셨다. 그분은 이 언약을 자신의 사랑의 날개 위에 올려놓고, 그 위대한 힘과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구세주께서 피 값을 지불하고 산 성전을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소유하시는 모습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때, 어둠과 적의와 더러움과 죽음은 물러가고, 빛과 사랑과 거룩과 생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때에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는 것이 당연하다(눅11:21 참고). 그러므로 우리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 모든 저항에 맞서 싸워 결국 그 의지를 굽히고 적대감을 없애며 그 마음을 풀어서 우호적으로 대하도록 해야 한다.

 

'여호와께 복 받을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창24:31). 들어 오셔서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취하소서. 제가 오랫동안 주님께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주님께서 저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저를 정복하고 지배하셨으니, 복되신 성령님이시여, 저에게 들어오셔서 저를 주님의 것으로 인 치소서.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룩한 슬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시며, 우리의 영혼을 낮추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재 가운데 스스로 낮아지게 하시고,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양심에 용서와 평화를 선언하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3)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로문이 건축했던 성전의 웅장함과 장엄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 땅에서의 영광일 뿐이다.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는'(행7:48 참고) 성령님께서 설령 그 성전 가운데 강림하셔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더라도, 성령님께서 세우시고 거하시는 새로운 영적 성전과 비교해 볼 때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이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하기에 사도는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그 성전이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명령하신 기준을 충실히 따랐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복음의 경륜과 비교해 보면 그 성전이 가진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인가? 오늘의 복음시대와 비교해 보면, 그 당시에는 성령님의 임재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시대를 그 어떤 시대보다 특별하고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임재가 더욱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성도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고후3:8-10).

 

 이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영광이 탁월한 것은 그 영광이 더욱 영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리시는 역사가 전보다 더 자주, 풍성하게 일어난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고 인 치시는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그리스도와 닮아 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거룩한 역사가 더 자유롭게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더 단순하고 영적인 모습이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거주하시는 역사야말로 이 새로운 시대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특별한 현현(顯現)이 있다.

 

성령님께서는 임마누엘께서 성취하신 광범위한 속죄 사역의 기초 위에서 은혜 가운데 불쌍한 죄인을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거룩하게 만드시고 영원토록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증언하고 역사하시사 그들을 빛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물려받게 될 기업에 합당하게 만드신다. 이런 사실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엡2:22)가 된 영혼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전능한 능력이 영화롭게 되고, 예수님의 속죄 사역과 충족한 은혜와 죄인들을 향한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연민이 영화롭게 되며, 저항할 수 없는 성령님의 능력과 무한한 인내와 효과적인 사역이 영화롭게 된다. 영혼을 회심시키고 그 영혼에게서 일어난 회심이 지속되도록 돌보며, 그가 거룩하고도 정직한 걸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그 긴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그를 보살피고 마침내 그를 영원한 행복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천 개나 더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보여 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4)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성령님께서는 신자 안에 거하시되 영원토록 거하시며, 모든 은혜와 평안의 영으로 거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질 수 있는 진정으로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모든 것이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서 비롯된다. 또 영혼이 거룩한 호흡을 하고 거룩한 것을 열망하며,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뜻과 형상을 닮고자 소망하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이다. 더 나아가 성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모든 것과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것들도 전적으로 영원하신 성령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신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보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런데 10절 말씀을 보면, 이 샘물이 곧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알았더라면."

 

이 '하나님의 선물'이 성령님을 의미한다는 점은 요한복음 7장 38,39절에서 더욱 강조되어 제시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것이야말로 은혜로운 진리이다. 모든 영적인 복이 깊고도 생명력 넘치는 샘물이신 성령님에게서 솟아난다. 성령님께서는 고여 있는 물처럼 영혼 속에 거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날씨가 궂을 때나 좋을 때나 습할 때나 건조할 때나, 그 어떤 외부 환경에도 상관없이 사시사철 항상 흘러 넘치는 샘물이시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맺게 되는 열매들은 절대 저절로 맺힐 수 없는 것들이다. 의에 주리고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려는 것이나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소망하는 것, 죄의 법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나 신자에게 남아 있는 죄의 원리에 대해 슬퍼하는 것 등은 모두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맺게 하시는 귀중한 열매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자연적인 것과 은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해했던 적이 많을 것이다. 또 율법적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의 사역과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비결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청난 차이를 밝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마련이므로, 그것이 처음 시작된 근원으로 다시 올라가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죄인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솟아나는 샘물, 곧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이다.

 

자신의 마음에 임한 재앙을 저절로 알게 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연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재 가운데 엎드려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며 애통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과연 사람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또 자연적으로 은혜의 보좌를 사랑하게 되고, 속죄의 보혈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그것은 절대로, 잘대로 불가능하다. 세상이 저절로 존재할 수 없듯이, 이 모든 일들은 자연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들이다. 여러분이 방금 말한 상태에 있는가? 위를 바라보라. '혈육'은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지 못한다(마16:17 참고). 이것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신 분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복된 성령님을 통해 그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5) 거룩의 영

 

성령님께서 신자에게 내주하시되, '거룩의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서 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사역이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가볍게 여기면, 그분을 증인이나 위로하시는 분으로 찾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도 다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다음 장에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성화의 사역을 다루겠지만, 여기서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관련하여 성화의 사역을 잠깐 살펴보자.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은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감당하시는 사역 가운데 특히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한 부분이다. 성령님께서는 단지 신자 곧 성전의 질서만 회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의 순결도 회복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영혼이 다시금 거룩한 통치를 받도록 만드시고,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확립시키고 율법의 교훈을 드러내시며, 그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신다. 또한 그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널리 전파되어 그 율법이 가진 온유하고도 강력한 구속력 아래서 신자들이 '주의 계명들의 길로'(시119:32) 달려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 안에서 성령님은 '거룩의 영'이 되신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사역을 어떻게 진행하시는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 장(5장)을 참고하라.

 

6) 영원토록 내주하심

 

우리는 성령님께서 신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영원하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은 이 사실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자신의 보좌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요14:16)를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분의 영적 임재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임재를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님께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안심시키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이 진리를 간과하지 말라. 영적 어둠과 불신앙의 역사가 일어나 자신에게 내재하는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그로 인해 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안과 위로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구름과 어둠이 일어나 이 진리를 둘러싸 가릴 수도 있다. 혹독한 시련이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비관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불길한 예감 때문에 두려워 떨 수도 있고, 험하고 꼬불꼬불한 길을 만나기도 하며, 어둡고 차가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믿음이 약해져 불신앙에 뒤덮일 때도 있고, 여러분의 영혼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탄식할 수도 있다.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42:36).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시77:7-9).

 

그러나 이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백성이 기운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안팎으로 모든 것이 어둡고 절망스러운 그때에도, 거룩하게 하시며 위로자 되시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 그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하신다. 여러분이 강력한 부패성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위로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져 다윗처럼 기도하게 될 수도 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그러나 여전히 복되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분의 작고 고요한 위로의 음성이 그 모든 요란한 폭풍우 소리를 잠재우고서 들려올 것이다.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영원토록 동행하신다. 여러분이 아무리 방황하고 게으르며 불친절하고 무가치하며 신실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 무엇도 성령님을 여러분 안에서 떠나시게 할 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피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우리를 향한 위로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또 성령님께서 우리의 경망스러운 모습을 슬퍼하신 나머지 잠시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뇌두시고, 우리를 위해 증언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잠깐 동안 중단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본래대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마음을 깨뜨리셨다면 그 마음을 다시 싸매실 것이다. 상처를 내시고는 치료하실 것이다. 마음을 거룩한 슬픔으로 가득 채우시고는 그 마음을 변화시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이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사54:7).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23:3).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남은 내용들에 대해서는 간단히 요점만 다루겠다. 이 사역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다른 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성령님은 양자의 영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성령님은 증인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성령님은 미래의 영광을 보증하는 증표요 약속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1:13,14).

 

성령님은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시는 분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이 모든 영광스러운 역사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동일하신 한 분 성령님의 역사이다.

 

 4. 적용과 권면

~생략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성령님의 구원사역' 中에서 발췌(143-1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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