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와 예수님 이름 속의 권위(權威)는 어떻게 다른가? (기독론)

▲서울 대현 교회 예배 설교 모습

1. 들어가는 말

어느 종교(宗敎)나 창시자가 있기 마련이며. 그 종교의 창시자 이름 속에는 그 종교 사상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 창시자 이름 속에는 권위(權威)가 따르게 됩니다. 이 시간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의 창시자 석가모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어떠한 사상과 권위(權威)가 있는 가를 비교 설명(說明)해 보고자 합니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신화적 인물(人物)이 아니라, 실존(實存)한 역사적인 인물(人物)이란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먼저 불교(佛敎)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이름 속에 있는 권위에 대해 살펴본 다음 기독교(基督敎)의 예수 그리스도 이름 속에 있는 권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석가모니(釋迦牟尼) 이름의 의미

불교(佛敎)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란 말의 원래 의미는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부처는 석가모니를 말하는 것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한 사람의 <인간>을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 불교는 다불 사상(하나의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를 섬기는 사상)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아미타불, 미륵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약사여래보살과 같은 신과 같은 영원한 존재로서의 부처님을 더 섬기고 있는 현실입니다. 처음에는 무신론적이었던 불교도 어느 사이에 <영원히 실존하는 부처>의 존재(存在)를 인정하는 형태로 변모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사색을 좋아하는 사상가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80평생 유랑한 선생이며 지도자일 뿐입니다.

이상의 명제들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입증해 줍니다. 석가모니는 어느 날 주위의 요청으로 제자 밧카리를 병문안 한 일이 있었습니다. 병이 너무 위독해서 그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제자 밧카리는 입을 열어 소원하기를 “대덕이시여! 저는 이제 마지막입니다. 병은 더해질 뿐이어서 아무래도 회복될 가망은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 소망으로 세존의 모습을 우러러 뵈옵고 두 발에 정례(최대의 경례)를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밧카리여! 이 나의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고” 이처럼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를 신(神)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청을 거부하고, 죽어 가는 제자에게조차 “너는 나보다는 법(法)을 보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석가모니 부처가 멸도(죽음)에 들어가기 전에 수제자 아난을 불러오게 한 후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아난이여! 너는 스스로 괴로워하여 스승이 멸도에 들어가고 나면 역시 해탈(解脫)할 때도 없을 것이라고 슬퍼할 것은 없다. 내가 도를 이룬 이래 설(설법)해 온 일체의 법(진리)과 계(계율)야말로 곧 이는 너의 스승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석가)를 의지하지 말고, 너의 마음을 의지하라. 나는 세간의 아버지며 세간의 친구이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는 자기를 신격화(神格化) 하거나 신앙(信仰)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는 세간의 아버지 친구라고 하여 인간 이상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었고, 그리고 자기가 죽고 난 후 불상(佛像)을 만들어 섬기는 일 하지 않도록 당부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후세 불자들이 이를 유념치 않고 별의별 불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우상불교가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본명(本名)은 <고타마 싯달르타>이며. 기원전 6세기경 인도, 지금 네팔 지방의 작은 나라인 카필라 성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위와 풍요를 누리지만 20세를 넘어서면서 처음으로 사멸의 세계로 숙명에 지워진 채 태어나는 인생의 본행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서 29세 때 인생(人生)의 생(生) 노(老) 병(病) 사(死)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고 번민하다가 처자를 버리고 출가(出家) 했습니다.

그는 6년 동안 고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수행과 신적인 능력으로 인생의 생노병사의 해결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6년간 동안 고행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되고 결국 극단적인 고행(苦行)이나 극단적인 괘락(掛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에 석가모니는 중도의 명상에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기초로 가르침을 전파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붓타>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붓타>란 인도 고어 산스크리트어로서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붓타> 라는 발음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 <불타>이며 그 약칭이 불(佛)입니다. <붓타>는 원래 종교적 성자를 일컫는 일반적인 말이었는데, 이것이 후세에 와서 불교의 전문 용어가 되었습니다.

1) 석가의 여래(如來) 십호성(十號性)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가 어떤 분인가를 알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불교의 경전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석가모니 부처의 공덕성을 나타내는 열 가지 명칭인 십호(十號) 성 이름이 있습니다. 각각의 명칭은 응공, 전등각자,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타, 세존 등이며 간략하게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1) 응공(應供)
응공(應供)이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응공 이름은 중생들로부터 공양(供養)을 받을 만한 덕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공양의 풍속은 인도에서 종교적 성자(聖者)나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뜻으로 음식이나 옷을 공급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공양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하는 것이 공양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공양을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 하여 응공(應供)이라고 합니다.

(2) 전등각자(傳燈覺者)
전등각자란 “올바른 깨달음 얻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전등각자 이름은 일체(一體)의 온갖 우주간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서, 즉 세간(世間)의 지혜를 두루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전등각자라고 합니다.

(3) 명행족(明行足)
명행족이란 지혜와 실천이 갖춰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명행족 이름은 명(明:지혜)과 행(行:실천)이 갖춰진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지혜로 법(진리)을 밝게 보고, 밝게 아는 지혜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완전히 갖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4) 선서(善逝)
선서(善逝)는 다시는 윤회(輪廻)를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선서 이름은 일체 번뇌(煩惱)로 가득 찬 고해 바다인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윤회세계를 잘 건너서 깨달음의 세계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다시는 생사(生死)의 바다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다시는 윤회(輪廻)를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에서 선서(善逝)로 부르는 것입니다.

(5) 세간해(世間解)
세간해(世間解)란 세상(세간)을 잘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세간해 이름은 세상의 진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윤회(輪廻)를 하지 않으려면 세간을 잘 알아야 하므로, 석가는 세상의 모든 생활원리를 알아서 고통받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깨우쳤다는 뜻에서 불리는 이름이 세간해입니다.

(6) 무상사(無上士)
무상사(無上士)는 “최상의 인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무상사 이름은 중생 가운데서 그보다 더 이상 가는 스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신의 도움이나 인간 스승에게서 배워서 안 것이 아니기에 다른 스승보다 높은 진리를 깨달으셨으므로 “더 이상 위가 없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이보다 더 완전한 이가 없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다른 말로는 무상장부(즉, 최상의 인간이란 칭호를 듣게 되는 분)가 있습니다.

(7) 조어장부(調御丈夫)
조어장부 (調御丈夫)는 “마음을 조어하는데 있어 훌륭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조어장부 이름은 석가모니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조절하여 일체의 번뇌를 버리고 해탈(解脫)에 이르셨다는 뜻으로서 마음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심심불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업보(業)를 제어하지 못하면, 윤회의 속박에서 해탈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8) 천인사(天人師)
천인사(天人師)는 천인(天人)의 대도사, 또는 신과 인간의 스승이란 말입니다. 즉 선과 악을 잘 가르쳐서 도법에 의지하여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게 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천인사 이름은 천인(天人:하늘사람)의 스승이 되는 사람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 천인사입니다.

(9) 불타(佛陀)
불타(佛陀)란 “진리를 깨달음을 얻으신 사람이란 뜻”입니다. 즉 부처를 의미합니다. 부처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붓다”를 한자로 음역한 “불타”가 우리말로 읽혀지면서 부처로 변화된 것입니다. 부처라는 말이 처음에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고타마 싯달르타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부처는 진리를 깨달은 수행자로서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이름은 진리를 깨달음 사람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불타(佛陀)입니다.

(10) 세존(世尊)
세존(世尊)이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으로서, 세상에 있는 모든 스승들 가운데 으뜸이 되며, 모든 인간과 똑같은 인간이지만 누구보다 위대한 수행을 통하여 가장 높은 진리를 깨우치고, 다른 이에게 설법(說法)하여 세존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써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尊貴)한 사람이란 의미가 됩니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의 십호(十號)성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석가모니 부처가 결코 신(神)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불교(佛敎)는 석가모니 부처를 교주로 창시된 종교(宗敎)임이 틀림없지만, 십호(十號)성에서 소개한 석가모니 부처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된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예찬의 극치일 수는 있어도 석가모니 부처가 초자연적인 절대 존재(存在)가 아니고 단지 위대하면서도 뛰어난 <인간>임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이름과 의미

불교(佛敎)의 창시자인 석가(釋迦)는 자신의 신성(神性)이나 권위(權威)를 부정하면서 불교교단을 영도했습니다. 석가는 자신의 지도력을 부인하고 하나의 권위로서 그의 가르침인 교법(敎法)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너 자신이 너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어떤 자신 밖에 있는 것에서 피난처를 구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피난처가 되는 교법에 굳게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석가모니의 교법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서 교법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법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하면 석가모니와 비슷한 불타(佛陀)가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근본적으로 그 자신이 성취했던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권위적(權威的)인 요소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자신의 신격화(神格化) 현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거절하면서 40여 년 동안 자신의 깨달음을 설법하다가 80세에 제자 아난다의 팔베개에 안겨 돌아가시면서 “생사는 필연이니 근행으로써 각자의 마음을 스승 삼아 해탈의 길을 찾으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을 뿐 권위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

불교(佛敎)가 석가모니 부처가 창시한 사상을 믿는 종교라면, 기독교(基督敎)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바로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연대(年代)를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점으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歷史)의 획을 그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을 기원전(B.C.)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는 A.D.(라틴어로 주님의 연대에서 Anno Domini 의 약자)를 사용합니다. 이와 같이 역사의 기원이 되며 분기점을 이루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지지하든 반대하든 오늘의 세계역사는 주님의 탄생의 기점의 연대(BC와 AD)를 쓰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기독교(基督敎)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름의 칭호에 대하여 가족관계를 중요시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쪽이 예수님의 성(姓)이며 어느 쪽이 이름인가를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인 칭호의 뜻을 알아보는 것이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예수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전에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예고할 때에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고 말한 대로 미리 예언된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유대인들의 사이에서 흔한 이름이며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또는 “예수아”라는 인명의 헬라식 발음입니다.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위에 오신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주어진 개인적인 이름입니다.

(2)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로서 예수님의 특별한 직분, “기름 부은 자”라는 뜻을 가진 직명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베들레헴 지경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선포할 때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고 알려 주었고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마16:16)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그 신앙고백을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원래 기름을 붇거나 바르는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거룩하게 쓰기 위하여 구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제사장을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할 때(레8:10)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할 때(왕상19:16)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눅1:18) 그리스도라는 말은 인류의 구세주로서 하나님 앞의 제사장이시며 만민을 다스리는 왕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인 선지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처음으로 분명히 고백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메시아의 역할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는 분으로 보이셨습니다.

(3) 주(主)
초대 교회 때에는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였습니다. “예수는 주이시다”라는 표현은 초기 신앙의 고백 중에 하나이며, 예수를 주(主)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을 유대 지도자들은 신성 모독이라고 반대하였고 로마인들은 황제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주님>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주(主)라는 말은 재산이나 노예의 소유주로서 절대 주권자의 대명사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주(主)라고 불렀는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주(主)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인정하는 말이 됩니다. 누가복음2:11에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고지할 때에 “그리스도 주(主)시니라”고 전하였고, 의심 많은 사도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나의 주(主)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요20:28)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주(主) 되심을 강조하여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롬1:4)라는 복합된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권세를 예수께 돌리는 호칭입니다.

본래 “주”라는 뜻은 “주인”(마20:8)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만드신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예수님의 것입니다(요1:3, 11). 예수님께서 종려주일 아침에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셨을 때에 나귀의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마21:3)는 말에 자기의 나귀와 나귀 새끼를 지체하지 않고 아낌없이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우리 주 예수”라고 할 때 성도는 “성도의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예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라고 신앙과 결심을 가지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주”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여러 이름들 중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주”라는 이름은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통치권과 하나님으로서의 경배권을 뜻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4) 인자(人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말할 때에, 어떤 다른 호칭보다도 인자(人子) 라는 호칭을 더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마태, 누가, 마가 세 복음서에만 70여회나 이 호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칭호를 사용한 것은 당시 메시야란 말이 정치적 구원자로서의 오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메시야라는 표현보다 이 인자란 칭호를 좋아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 자신만이 이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마태16:16에서 주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호칭을 세 가지 경우에 즉 자신의 지상 사역과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장래 영광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이 호칭은 인자를 영원한 왕국을 통치하는 분으로 표현하는 다니엘서에서 끌어온 말입니다(단7:3). 인자란 호칭은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5)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의 뜻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요3:1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1:14)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2:6,7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 같이 되었고”라고 하셨습니다. 요10:29-39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란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께서 기뻐하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6) 임마누엘
임마누엘이란 이름도 예수님의 명칭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은 이사야7:14, 8:8에 예언한 것인데 <마태>사도가 이 곳에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말입니다(마1:28) 천지에 있는 가장 높고 귀한 이름 <임마누엘>, 이것은 신약 성경에 단 한번 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명칭입니다. 그것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는 말씀대로 택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택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것은 믿는 자요(행13:48) 죄인인줄 아는 자요(마1:21)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는 자(눅18:7)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입니다.

(7) 평강의 왕
평강의 왕은 예수님께서 택한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평강)을 주시려고 오셨음을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찬양의 내용입니다. 노아 때 범죄 한 온 세상은 물로 심판을 당하여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죄는 소돔과 고모라 도시를 심판하여 불로 태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 롯과 두 딸은 구원받았습니다. 죄는 인간에게 평화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불안합니다. 초조합니다. 죄의 심판과 결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평화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평강은 결코 땅의 것, 곧 없어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한 평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14:27에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이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 기묘자(奇妙子)
기묘자란 이름의 뜻은 “너무 신기하고 오묘하여 인간으로서는 가히 해석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이런 이름을 가지기에 합당한 이유는 남성의 간섭 없이 처녀에게서 출생하신 일과 죄가 없는 분이 정죄를 받아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과 완전히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과 40일간 부활한 몸으로 계시다가 대낮에 500여 성도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신 일과 같은 기이한 일 때문입니다. 가나 혼인집에 가셨을 때 모자라는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였습니다. 예수님께 오면 병든 자는 모두 치료되었습니다. 죽은 자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에는 인간이 해석 못할 일이었기 때문에 기묘자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9) 모사(謀士)
모사란 이름의 뜻은 “일을 계획하고 설계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누가 이것을 계획하시고 설계를 하셨습니까? 천지만물을 조화롭게 창조하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창조의 순서도 잘 살펴보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들어 인간들이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사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시사 우리가 지혜롭게 인생을 살도록 살펴 주셨습니다. 또한 이 이름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지모(智謀)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2:3에서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11:33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구원은 천국만큼 높고 우주만큼 넓고 영생만큼 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영원한 지모(智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독특한 아이디어까지도 주시는 주님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속의 권위(權威)

(1) 구원(救援)의 권위
마1:21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일러 준대로 예수님의 이름은 인간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자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하여야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요사이 일부 신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를 가르치다가 자기 교단에서 제명처분을 받았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불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요1:12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행4:12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밝혀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라고 하셨습니다.

(2) 치료(治療)의 권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 할 때 한평생 걷지도 못한 자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3:6~8)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동일하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2/3를 치료 사역에 할애하셨습니다. 현대와 같이 의학이 발달한 사회에서도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큰 문제인데, 예수님 당시의 원시적인 의술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질고로 인한 고통이 대단했을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질병은 죽음을 전제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욕망을 꺾고 절망에 빠뜨리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병 고치는 능력은 모든 사람의 비상한 관심거리가 되었고, 그것으로 예수님 당신이 보통 사람 이상의 신적 존재임을 당신의 백성에게 인식시키셨습니다.

4. 나오는 말

예수님의 권세는 부활(復活)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며, 또 이것을 제자들은 신앙을 통해 받아들이는 데에 반하여, 석가(釋迦)의 이름의 권세(權勢)는 교리와 법을 주는 그 자신의 자율적 지위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基督敎)의 권위와 자율적인 자기의 힘을 향한 불교(佛敎)의 권위에는 큰 차이점이 있으며, 석가(釋迦)의 권위란 각성(자각)에 의거하며, 법의 이해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법(진리)은 성경과 같은 권위나 능력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佛敎)의 창시자의 권위는 힘(타력)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基督敎)는 예수 이름의 권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救援)이 불가능합니다.

기독교(基督敎)는 예수를 믿고 죄(罪)에서 속죄함 받아 구원을 얻게 되는 타력(打力)의 종교입니다. 예수의 신성의 권위는 석가 이름 권위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 중심적이고, 석가(釋迦)의 권위는 철학적이고, 지혜서 중심적이었습니다. 예수는 충성과 순종을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합니다. 불교의 석가는 예수와는 정반대로 충성과 복종을 원치 않고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자각(마음)을 스승 삼아 실천을 요구합니다. 십호성(十號性)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창시자의 위대한 덕성을 하나의 이름으로는 다 나타낼 수 없으므로 열 가지 이름이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같이 어느 것도 권위적이고 초월적이고 신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결코 초인간이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으며, 또한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인간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어이없게도 석가모니를 신격화해서 그를 섬기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를 “구원 실현의 부처”라고 믿고 있습니다.

서재생 목사입니다. 강의 안은 본인의 저서인 불교권 선교전략을 위한 불교와 기독교 주제별 비교론 책에서 발취한 비교 종교 특강 입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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