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과 늙은 선지자 -(왕상 13장을 중심으로)

자료실 2018. 11. 2. 05:53
서설입니다만,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인간 저자가 말하고자 한 의미, 나아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에 충실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원어성경에 기록된 원문을 능숙하게 읽고 독해한다고 해서 원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알았다고 단정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얼마든지 자의적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 아래 겸손히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지만 인간의 해석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원어성경을 모국어성경 읽듯이 읽을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학자들이라고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일반 독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원문에 가까운 번역본 성경을 구해서 읽고자 하는 것이지요.

필자는 원문 읽기에 있어서는 어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본문과 씨름하며 바른 의미를 알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왕상 13장을 원문과 대조해서 읽어보면, KJV는 지나친 문자적 번역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RSV는 좀 덜합니다. NASB는 덜 문자적이면서 현대인이 읽기에 좋게 번역을 한 성경입니다. NIV는 역동적인 대응번역을 해서 그런지, 의미는 통할지 몰라도 원문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자면 13장 1절에서 "보라!"라는 감탄사가 NIV에만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장의 구성상 반드시 나타내야 할 13:25에서도 "보라"를 빼먹고 있습니다.(원문에서는 두 곳 다 '보라'로 문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원문을 직역했다고 의미를 바르게 캐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설픈 사역(私譯)을 통해 본문의 의미를 구하고자 할 때 오류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좋은 번역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우리 한글 개역이나 개정판에서는 25절에 나오는 "보라"가 빠져 있습니다. 바른 의미를 도출하는데 있어서 이런 것들이 걸림돌이 됩니다. 이상(以上)은 참고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에게 속임을 당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늙은 선자자가 참 선지자인가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표하게 됩니다. 쉽게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의 흐름과 왕국들에 대해 기술한 사무엘서에서부터 차근히 읽어내려오다보면 이 늙은 선지자가 선지자이긴 한데 본분을 잃은 선지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13:20-23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했다고 해서 그가 선지자 직임을 바르게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늙은 선지자는 삯꾼과도 같은 선지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목숨부지하기에 급급한 자란 말이지요.

한 때는 선지자 노릇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 아래서는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왕국이 분열되고 악한 여로보암이 등장하자 선지자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코자 하는 일반 백성 중 하나처럼 되어버리고말았음을 본문은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여로보암의 악행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집'이라고 일찌기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하나님의 집에 우상을 세우다니요!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자신의 등 뒤로 버린 악한 자가 였습니다(14:9). 이 악한 왕 여로보암 앞에서 그 늙은 선지자는 오직 목숨을 보존하기에 급급해서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로서는 방관도 무서운 직무유기인데 동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을 금송아지 우상 제단에 분향하는 여로보암에게로 보냅니다. 왕의 위세에 눌려서 자기는 늙었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안 했을지라도 자기 아들들은 보냈습니다. 묵인 동조의 작태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참 선지자는 언제나 율법으로(당시 여로암시대에는 율법이 유일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일깨우고 왕일지라도 율법을 어기면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해야 함이 마땅한 본분이요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이 자는 짖지 못하는 개가 되어버렸습니다. 책망은커녕 왕이 제단에 분향하려 왔다고 해서 아들들을 보내다니요! 선지자의 이런 침묵과 방관, 방조, (대리인을 내세웠을지라도) 우상의 제단에 참예함은 더 이상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앞에서 선지자가 아님을 확연히 드러내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백성들이야 선지자도 그러는 마당에 오죽 우상을 섬겼겠습니까. 뭇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더 이상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 늙은 선자자의 말과 행동거지를 통해 우리는 타락한 선지자의 면모를 더욱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 앞에서 제단을 향해 외치면서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왕이 회유하자(자기 왕국을 보존코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칩니다. 그리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13장 전반부(1-10)를 찬찬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우상을 싫어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싫어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노를 격발케 하는 행위가 우상숭배임을 말해 줍니다. 제단을 의인화 해서 제단을 향해 외친 그 말씀은 바로 여로보암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13장의 전반부(1-10)의 광경을 목도한 자들은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입니다.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11절-개정). 이에 대한 그 선지자의 반응은 하나님의 사람을 추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선지자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 바로 반복해서 드러나는 기록입니다. 8절에서,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절에서도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또 15절에서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계속 16절에도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절에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8절에도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19절,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  22절, "...너더러 '떡도 마시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마지막으로 23절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리고,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서 하나님의 사람을 태워 보냅니다.

단순히 떡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그 곳(벧엘)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먹고 마시지 말아야 함을 명령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결코 벧엘에서는 먹고 마셔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우상의 집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우상에 참예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신신당부하신 말씀인 그 명령이 얼마나 엄중한 말씀인가를 반복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우성을 섬기는 것을 눈뜨고는 보지 못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심판을 경고하신 그 벧엘의 제단과 제단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속아서 우상의 제단에 참여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나서는 그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엄중한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노회하고 교활한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아는 자입니다. 속여서라도 그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먹고 마시도록 만들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속임은 단순한 속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부추긴 속임입니다. 직설적인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입니다. 남왕국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려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이는 실로 자신의 목숨을 보존코자 하나님의 말씀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보존코자 하나님의 사람을 시험하여 악에 빠지게 하고 그 결과를 주목하여 보고자 한 악한 자였습니다. 그 결과 여하에 따라 행동하고자 한 자였습니다. 제단을 향해 외친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로 난 것인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남의 목숨을 담보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하는 것으로 자기 목숨을 보존코자 한 어리석은 선지자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육신의 목숨 보존에 있어서는 뗄래야뗄 수 없는 일입니다. 먹고 마셔야 하는 원초적인 문제가 이토록 빈번하게 기록된 이유를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되 주 안에서 먹고 마셔야 할 자들입니다.


뒤에 나오는 그 선지자의 일련의 행동들이 호의적으로 비춰짐으로 해서 우리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는 타락한 그 선지자의 교묘한 거짓을 드러내주고 계십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떠한 분별이 요구되는지를 밝혀줍니다.

벧엘의 그 선지자 집에서 함께 먹고 마실 때 그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맞습니다. 선지자의 입에 말씀을 한 번 넣어주셨다고, 이 전에 선지자 노릇했다고 그 선지자가 지금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참 선지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명령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이 심판의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같지만 실은 그렇게 만든, 다시말해 범죄케 한 늙은 선지자에게도 해당되는 심판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의로 살인한 자가 받는 심판의 말씀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입니다.

속여서 그 곳에서 먹고 마시게 한 후 그를 나귀에 태워 보냅니다. 앞에서 먹고 마시게 한 것이 대접이 아니라 심판을 부른 것이 듯 나귀를 태워서 보내는 행동도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리게 하는 행동입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시던 그 명령을 어기도록 한 것이지요. 왜 냐구요? 그가 사자에게 물려죽어 버려진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이었습니다.

그래서 25절은 "보라"로 시작합니다. 늙은 선지자가 타던 그 나귀는 나귀 타기에 서툰 그 하나님의 사람을 태우고 유다에서 벧엘로 나 있는 길(하나님의 사람이 왔던 바로 그 길)로, 평소에 사람들이 자주 다니고 늙은 선지자도 다니던 그 길로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번에 돌아가던 길은 상수리나무가 있는 한적한 산길이었음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여러분은 이것을 그 선지자의 호의로 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더하여 늙은 선지자는 최소한 두 필 이상의 '탈 수 있는 나귀'를 가진 넉넉한 집안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목사의 집에 차가 두 대 이상 있는 꼴이지요.

25절 이하에 보면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한 사실을 알고 시신을 거두러 갑니다. 거두러 가는 목적이 단순히 슬퍼하며 장사지내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의 속이는 거짓말에 속아 벧엘에서 먹고 마셨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좀 더 깊이 말하자면 우상의 집에서 먹고 마신 죄에 대해 엄중한 심판으로 갚으신 사실을 목도한 그 선지자는 처음 13장 서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해 외친 그 말씀이 반드시 응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자기 묘실에 두고자 한 것입니다. 죽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자 한 것이지요. 뼈가 제단 위에서 태워지는 그 심판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사람이 조상의 묘실에 들지 못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상의 묘실에 들지 못 한다는 것은 조상들로부터 분리된다는 말이요, 또한 조상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한데도 우상의 제단이 있는 벧엘에 뼈가 묻힌다고 달라질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믿음 좋은 마누라 치맛자락 붙잡고 천국 갈 수 는 없는 일입니다. 사후의 명예까지도 생각하는 늙은 선지자이지만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어떤 행동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벧엘에서 나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 자체의 의미를 밝히는데만 치중하다보면 전후 문맥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참된 의미를 놓치기 쉽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삽화처럼 기록된 이야기는 좀 더 넓은 틀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어김없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여로보암이 우상숭배를 버리도록 하셨지만, 여로보암은 이 일을 보고도(알고도) 계속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면서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고 악행을 자행하고 있음을 13장 말미(33-34)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지금은 비록 악한 왕일지라도,그 전에 하나님은 그에게 먼저 선한 약속을 11장 38절에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끝내 돌이키지 아니한 여로보암은 평행구절인 역대하 13장 20절에서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서는 유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심판을 자초했는가를 역사를 통해 교훈하고자 기록한 말씀입니다. 포로생활 가운데서 자신들과 그들 조상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회복을 구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된 정경 가운데 한 권의 책으로서 열왕기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성경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열왕기 중 오늘 본문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구속사의 큰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알고,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은 그 어떤 배역과 훼방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모습을 그림자로 해서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약속하신 구원자의 오심으로 이 땅에 임하였다는 사실을 구약의 예언과 그 성취의 기록인 복음서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해 주십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임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이 말한 대로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하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셧습니다.(딤후3:15-17)

오늘 강해의 본문으로 삼은 왕상 13장은 큰 줄기의 교훈뿐만 아니라 작은 지류의 몰소리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구속사적 언약적 성경읽기와 하나님 나라 관(觀)으로 성경 읽기도 좋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좀 더 풍성한 적용을 해서 우리 삶이 영적으로 풍성해지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일 것입니다.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성경을 가까이 하셔서 이 혼탁한 시대에 거짓 교훈에 빠지지 않고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더하여 벧엘은, 마침내 기름부음 받으신 산돌(Living Stone)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그 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집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거처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하나님의 나라에서 먹고 마시는 여로분이야말로 진정 복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에 걸려서는 안 됩니다. 다시말해 자기 목숨 보존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는 길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죽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우리에게 복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할지라! 아멘!

*누지문서 님의 글에 댓글로 달려고 했지만 너무 길어서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좀 더 풍성한 적용을 할 수 있음에도 약(略)한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출처: 아멘넷, 글/지혜자 님
Trackbacks 0 : Comments 3
  1. Favicon of http://cho9606.blog.daum.net BlogIcon 조혜진 2015.12.01 22:24 Modify/Delete Reply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일독중인데 이 장에 의문이 생겨 검색하다 님의 글을만났습니다 .
    충격적이고도 가슴아픈 해석입니다
    그러나 강력한 메세지가 되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Leigh 2018.10.31 10:35 Modify/Delete Reply

    저도 13장 주석을 찾다가 읽게되었는데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3. Favicon of https://grandma2020.tistory.com BlogIcon 매일 감사 2021.07.14 22:45 신고 Modify/Delete Reply

    안녕하세요~
    성경읽으면서 석연치 않던 말씀이었는데 일목요연한 해석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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