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일천번제헌금"은 성경적인가?
자료실 2011. 4. 22. 01:51목사님! 저도 불자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집사입니다. 그런데 절에서 남편 사업이 어려울 때 1000일 불공기도를 드리면 사업이 불길 같이 일어 날 것이라고 해서 1000만원을 드려 1000일 불공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교회로 개종해서 신앙 생활하는데 담임 목사님께서는 일천번제헌금을 매일 만원씩 하면 남편 사업이 잘된다고 합니다. 목사님! 일천번제헌금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1. 성경에서 일천 번제의 의미
다윗의 뒤를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솔로몬이 먼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사실이 “역대하 1장 6절에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불교와 같이 1000일 3개월 열을 동안 기도한 것이 같이, 1000일 동안 희생을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즉 일천 마리를 번제로 태워서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일천이란 수를 제물의 많은 수량으로 보고 있습니다. 번제는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솔로몬이 회중과 함께 그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에 곧 회중의 성막 옆에 있는 놋 제단에 이르러 그 위에 번제 헌물 일천희생으로 드렸더라.(대하1;5-6), 또한 역대상 29장21절과 역대하 7장 4-7절 등 솔로몬의 제사를 다룬 다른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1000마리의 많은 생축을 태워서 제사 드린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받으시고, 꿈에 나타나서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4-5)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에 솔로몬은 자신에게 맡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쁘게 여기셔서 지혜 외에 부와 귀와 장수를 약속하셨습니다.(역하1;7-12)
2. 한국교회의 일천 번제의 의미
한국교회의 유행처럼 퍼져 가는 이 일천번제는 솔로몬 일천번제를 예로 들었기 때문에 매우 성경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불자들이 소원 성취를 위해서 1000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불공을 드리듯이 매일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번제는 왕이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권력자나 재력가가 아니면 일천번제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항한 믿음이 강했음을 보여 줍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지금 한국 교회에서 드려지는 일천 번제와는 분명이 달리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일천번제는 불교인들이 1000일 동안 소원성취를 위해서 드리는 불교의 불공문화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기독교 국가 교회에는 없는 것이 한국교회에 있다는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필자는 승려생활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불교인들이 하는 1000일 불공과 연관에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한국 불교 사찰에서는 1000일 불공 프랑카트를 대웅전에 걸어 놓고 회원을 모집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제는 “사업문제”, “입시문제”, “승진문제”, “질고문제” 등 현실적인 기복적인 소원 성취를 위한 1000일 불공입니다. 한국 교회 일부목회자들이 일천번제 한번 해보라고 합니다. 한 번에 1000만원 헌금하기 힘들지만 매일 1만원씩 일천번제로 1000만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한 매일 5000원씩 하면 500만원 할 수 있고, 1000원 씩 하면 100만원은 누구나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일수 돈 찍듯이 일천번제 드리면 교회 재정문제는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3. 한국교회 행해지는 일천 번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기뻐하시고 솔로몬에게 내가 무엇을 주기를 원하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국민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귀와 장수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사찰에서 1000일 불공 회원을 모집하면서 불공드리는 명목으로 큰 액수의 돈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사찰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천번제 예배가 교회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권유한 다면 기복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의 일천번제는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불자들이 1000일 불공기도 드리는 모습과 너무나 유사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일천번제가 한국교회에 시작된 역사는 몇 십년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불교적인 문화와 사상들이 교회 안에 정착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뜻을 성도들에게 바로 가르쳐야하겠습니다.
출처: usaamen.net: 서재생목사 / 서울대현교회
1. 성경에서 일천 번제의 의미
다윗의 뒤를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솔로몬이 먼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사실이 “역대하 1장 6절에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불교와 같이 1000일 3개월 열을 동안 기도한 것이 같이, 1000일 동안 희생을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즉 일천 마리를 번제로 태워서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일천이란 수를 제물의 많은 수량으로 보고 있습니다. 번제는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솔로몬이 회중과 함께 그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에 곧 회중의 성막 옆에 있는 놋 제단에 이르러 그 위에 번제 헌물 일천희생으로 드렸더라.(대하1;5-6), 또한 역대상 29장21절과 역대하 7장 4-7절 등 솔로몬의 제사를 다룬 다른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1000마리의 많은 생축을 태워서 제사 드린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받으시고, 꿈에 나타나서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4-5)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에 솔로몬은 자신에게 맡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쁘게 여기셔서 지혜 외에 부와 귀와 장수를 약속하셨습니다.(역하1;7-12)
2. 한국교회의 일천 번제의 의미
한국교회의 유행처럼 퍼져 가는 이 일천번제는 솔로몬 일천번제를 예로 들었기 때문에 매우 성경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불자들이 소원 성취를 위해서 1000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불공을 드리듯이 매일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번제는 왕이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권력자나 재력가가 아니면 일천번제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항한 믿음이 강했음을 보여 줍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지금 한국 교회에서 드려지는 일천 번제와는 분명이 달리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일천번제는 불교인들이 1000일 동안 소원성취를 위해서 드리는 불교의 불공문화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기독교 국가 교회에는 없는 것이 한국교회에 있다는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필자는 승려생활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불교인들이 하는 1000일 불공과 연관에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한국 불교 사찰에서는 1000일 불공 프랑카트를 대웅전에 걸어 놓고 회원을 모집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제는 “사업문제”, “입시문제”, “승진문제”, “질고문제” 등 현실적인 기복적인 소원 성취를 위한 1000일 불공입니다. 한국 교회 일부목회자들이 일천번제 한번 해보라고 합니다. 한 번에 1000만원 헌금하기 힘들지만 매일 1만원씩 일천번제로 1000만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한 매일 5000원씩 하면 500만원 할 수 있고, 1000원 씩 하면 100만원은 누구나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일수 돈 찍듯이 일천번제 드리면 교회 재정문제는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3. 한국교회 행해지는 일천 번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기뻐하시고 솔로몬에게 내가 무엇을 주기를 원하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국민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귀와 장수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사찰에서 1000일 불공 회원을 모집하면서 불공드리는 명목으로 큰 액수의 돈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사찰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천번제 예배가 교회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권유한 다면 기복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의 일천번제는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불자들이 1000일 불공기도 드리는 모습과 너무나 유사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일천번제가 한국교회에 시작된 역사는 몇 십년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불교적인 문화와 사상들이 교회 안에 정착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뜻을 성도들에게 바로 가르쳐야하겠습니다.
출처: usaamen.net: 서재생목사 / 서울대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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