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따를 길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요18:36절)"
빌라도 앞에서 천명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번영신학이 무서운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축복이요,
가장 큰 믿음의 소유자라 부추기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헛된 사상은 성도의 마음을 이 세상에 묶어두려고 하는

이 세상주관자의 계궤에 동조하는 망령되고
괴악한 학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5-8)


역주행...
우리 주님께서 가셨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 모두 따라갔던 길입니다!

바울사도의 고백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절 말씀)


현대라고해서 우리의 가는 길이 달라야 한다면...?
글쎄요,

주님을 진정 따르는 성도라면, 사나죽으나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됩니다!

때로는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배고프고 굶주리며
병들고 슬플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가시밭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의 끝은 먼저가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우리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임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내일도...
주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이 어렵고 힘든 길,
눈물없인 갈 수 없는 이 길,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등에 지고
멀고도 험한 십자가의 좁은 이 길을...
감사하며, 찬송하며, 따라 가려합니다!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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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품서 아트로핀 12정 든 약병 나와"..미처 복용 못한 듯
해독제 소지 이유는..독극물에 의한 암살 우려했나

2001년 5월 일본 나리타 공항에 나타난 김정남의 모습. [AP=연합뉴스]

(자카르타=연합뉴스) 황철환 특파원 =올해 초 말레이시아에서 독살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의 가방 속에 VX 신경작용제의 해독제가 들어있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29일 국영 베르나마 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화학청 소속 독물학자인 K. 샤르밀라(38·여) 박사는 이날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진행된 김정남 암살 사건 22일차 공판에서 김정남의 소지품 중에 아트로핀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샤르밀라 박사는 "지난 3월 10일 오후 4시께 경찰로부터 독성검사를 위해 넘겨 받은 사망자의 소지품 중 아트로핀 12정이 든 약병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약병의 라벨이 한국어로 쓰여 있었느냐는 피고인측 변호사의 질문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아트로핀은 김정남을 살해하는데 사용된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의 대표적 해독제다.

VX에 노출될 경우 혈중 신경전달물질 분해 효소가 급감하면서 근육마비가 초래돼 사망하는데, 아트로핀은 중독 초기에 투여할 경우 이런 작용을 늦춰 목숨을 건질 가능성을 높여준다.

아트로핀을 휴대했다는 것은 김정남이 평소 독극물에 의한 암살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방증일 수 있다.

김정남이 피습 직후 해당 약물을 복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태가 급격히 악화한 점에 미뤄볼 때 미처 복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7년 3월 18일 말레이시아 일간 뉴스트레이츠타임스(NST)가 입수해 보도한 김정남 암살 당시 영상.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독극물 공격을 받고 진료실로 들어가는 김정남(오른쪽)을 신원 불명의 남성이 따라다니며 주시하고 있다. [뉴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연합뉴스]

그는 올해 2월 13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VX 신경작용제 공격을 받고 공항내 진료소로 옮겨진 뒤 발작을 일으켰다.

의료진은 강심 효과를 위해 뒤늦게 아트로핀을 투여했지만, 잠시 증세가 호전되는 듯 보이던 김정남은 인근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사망했다.

샤르밀라 박사는 김정남의 혈액에서는 고혈압과 통풍, 당뇨, 발기부전 치료제 등이 검출됐지만, 통상적인 복용 수준으로 그의 사망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 살충제에 노출된 사람도 VX 신경작용제 중독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다 숨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피고인측 변호인의 질문에 대해선 "그렇기는 하지만 상충제의 경우 훨씬 많은 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VX는 10㎎만 피부로 흡수돼도 숨질 수 있는 반면, 가장 독성이 강한 유기인제 살충제로 알려진 포레이트(phorate)로 사람이 죽으려면 무려 7만2천㎎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김정남 암살범'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과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의 얼굴에 VX 신경작용제를 발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여·왼쪽)와 베트남 국적자 도안 티 흐엉(29·여·오른쪽). [AP=연합뉴스]

샤알람 고등법원은 30일 오전 김정남 암살 혐의로 기소된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여)와 베트남 국적자 도안 티 흐엉(29·여)에 대한 공판을 속개할 예정이다.

이들은 리얼리티 TV용 몰래카메라를 찍는다는 북한인들의 말에 속았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해 왔다.

두 여성에게 VX 신경작용제를 주고 김정남을 살해하게 한 북한인들은 범행 당일 출국해 북한으로 도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현지 경찰관인 나스룰 사인 함자는 범행 이틀 뒤 공항으로 돌아와 출국하려다 체포된 흐엉이 북한인 공범들이 묵는 호텔을 안다며 자신들을 안내했지만, 호텔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hwangch@yna.co.kr

1. '신자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 中에서 영적 부활 / 머레이 J. 해리스



그리스도와 그의백성들의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의 근저에 있는 한 가지 가정은 그의 부활과 그들의 과거와 미래의 부활 간에 완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백성들의 부활을 함축하고 그의 백성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의 영적 부활과 몸의 부활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러면, 신약성경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을 연관시키고 있는가?


(1) 영적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영적 부활 간의 친밀한 관계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골 3:1) 또는 "그와 함께"(엡 2:6; 골 2:12)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전치사구는 기독교인들과 그리스도 간에 운명이 동일하다거나 일치한다는 것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생명에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입각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위에 높이 오르신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없으면(엡 1:21-22), 신자들은 모든 악의 세력들에 대하여 승리한 부활 생명을 주기 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엡 2:1-6; 골 3:1, 5-8).


관계가 이렇게 가깝다는 것은 예수께서 단 한 번 살아나신 것같이, 신자들도 단 한 번 영적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사실이 잘 예증한다. 바울로서는 "그리스도께서(한번) 살리심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계속해서) 살아나도록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쉬웠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정은,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요컨대 "너희가 (한) 세례를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으므로(골 2:12), 부활한 사람들처럼 행동하라"(골 3:1 참조)고 말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세례에 반영된, 단 한 번의 신자들의 일으키심이 단 한 번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상응한다. 비록 죄에 대하여는 끊임없이 죽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롬 6:11-12), 그리스도와 함께 반복하여 살아나는 일은 없으며, 오직 "새로운 생명의영역 가운데서(롬 6:4 MOFFAT) 계속하여 행하는 일만이 있다. 또 하나의 유사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언급 및 기독교인들의 영적 부활에 대한 언급이 변함없이 과거 시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코 다시 죽지 않으실 것이니, 그리스도는 결코 다시는 살아나지 않으실 것이다(롬 6:9-10). 또한 그래서 비록 신자들은 미래의 육체의 죽음 후에 미래의 몸의 부활을 경험하겠지만, 결코 두번째 영적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두번째 ㅇ여적 부활을 경험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부활 사건 뒤에는 부활 상태가 따라온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쉰에조오포이에센, 부정과거)는 것을 주목한 후에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제 구원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 (에스테 세소스메노이, 완료)라는 삽입구를 덧붙인다(엡 2:5). 역시 이 상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 즉 부활 생명을 향유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인 것이다(롬 6:11). 그의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대하여" 사시는 삶(롬 6:9-10)과 신자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롬 6:13) 후에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롬 6:11)로 사는 삶 간에는 단순히 평행 현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의 현재의 삶은 그의 부활에서 나오는(빌 3:10)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능력에 근거한다(롬 5:10).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같이(롬 6:10)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다(골 3:1-4 상반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에 뒤따라 오는 부활 생명은 내주하시는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된다(갈 2:20 상반절).


요약하자면, 영적 부활 사건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과 같이, 뒤이어 일어나는 영적 부활 상태는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머레이 J. 해리스의 '신약에 나타난 부활'에서 발췌(241-243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남은 것은 교회의 통곡 뿐 …

교회와 평양, 무엇이 먼저 무너지느냐


1.

시소게임 중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변혁될 것인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가 종식될 것인가. 자유민주주의가 바뀌어 이른바 민중이 주인이 된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 모든 역사적 사례가 그랬듯 교회는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신(神)이 아닌 인간이 우상이 된 민중신학 형태로 변개되거나 또는 멸절될 것이다.


2.

여당이 추진 중인 개헌안에는 이른바 ‘성 평등 결혼’ 조항이 들어갈 지 여부가 논란이다. ‘양성 평등’이 ‘성 평등’으로 바뀌면 동성결혼이 합법화된다. 정부는 국무총리 산하 ‘양성 평등위원회’을 ‘성 평등위원회’로 변경해 대통령 직속으로 격상했다.


하나같이 생물학적 양성(兩性) 외에 소위 59개에 달하는 사회학적 성(性)을 인정해 소위 차별을 막자는 것이다. 이는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국가의 소위 동성애 권익 보장과 이에 따른 동성애 확산을 부른다. 동성애 확산은 AIDS확산과 함께 성경적 가치의 붕괴를 부른다.


3.

정부는 11월26일 청와대 낙태죄 폐지 청원에 호응해 “실태조사와 그 결과를 토대로 관련 논의를 진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낙태죄는 형법 제269·270조 규정이다.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논쟁이 돼왔고 교회는 전자를, 세상은 후자를 따랐다.


2012년 헌법재판소는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고 낙태죄 존치 판결을 내렸다. 낙태죄가 폐지되면 한 해 35만 건에 달하는 낙태는 더 늘어나, 생명은 더 죽어갈 것이다.


4.

여당의 추미애 대표는 10월9일 경제학자 헨리조지를 인용, “땅의 사용권은 인민에게 주되 소유권은 국가가 갖는 중국식이 타당하다”는 요지로 말했다. 부동산 사유를 부정한 중국식 토지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개념을 내년 개헌에 넣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져간다. 중국식 토지제도는 사회주의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국가, 즉 집권한 세력은 토지를 소유해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교회는 지하로 들어가 신앙의 자유는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추 대표는 11월30일 ‘중국 공산당과 세계 정당 고위급 대화’를 위해 방중한다.


5.

추미애 대표는 11월27일 김관진 전 국방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이 법원의 구속적부심을 통해 석방된 것과 관련, “사법부는 국민적 불신이 높아짐을 직시해야 한다.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우라”고 했다.


앞서 같은 당 송영길 의원은 “(석방 판사는) 우병우와 같은 성향”이라고 했고, 박범계 의원은 “(석방은) 정치적 공세와 궤를 같이하는 것”, 안민석 의원은 “(그 판사를) 국민과 떼창으로 욕하고 싶다”고 했다. 헌법의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규정, 법관윤리강령의 ‘외부 영향으로부터 사법권의 독립 수호’라는 규정을 무시한 노골적인 사법부 압력이자 반(反)헌법적 행동이다.


6.

자유민주주의 근간인 재판과 사법부 독립은 위협을 받지만, 비판할 수 방송과 언론은 숨통이 죄인다. 감사원은 11월24일, ‘전례 없이’ KBS 이사진 법인 카드만 감사한 뒤, 보수야당 추천 이사의 ‘기억나지 않는 카드사용’을 문제 삼아 이사진 해임 등을 방심위에 촉구했다.


보수야당 추천 이사를 교체해 임기가 남아 있는 KBS 사장도 해임할 계획이다. 이미 MBC 방문진 이사진은 노조원들의 온갖 압박으로 교체됐다. 노동부는 ‘부당 노동 행위’를 이유로 MBC 사장을 특별 감독하고, 검찰은 MBC 본관 압수 수색 및 MBC 간부 이메일을 뒤졌다. 이후 사장은 해임됐다. KBS도 권력과 노조가 총력 동원된 방송 장악의 길을 가고 있다.


7.

자유민주주의 전복을 기도한 통진당 이석기 석방 움직임도 격렬하다. 이석기 석방은 서울 도심 촛불시위 단골 주제 중 하나다. 이석기·한상균 성탄절 석방이 검토 중이란 소문도 들린다. 반면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중심인 국정원장은 연쇄 구속 중이다. 군의 상징적 인물인 김관진 국방장관과 임관빈 국방부 정책실장도 “적폐”로 분류돼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8.

이적단체 행사들은 흥왕한다. 11월26일 서울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이적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 27돌 기념대회’가 성대히 열렸다. 참가자들은 “평화협정 체결과 미군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통일 실현, 6·15와 10·4 남북공동선언 이행” 등을 결의하며 “지금이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대남기관인 ‘범민련북측본부’는 영상 연대사를 통해 “우리는 범민련 남측본부가 미국의 침략전쟁 책동을 저지하고, 조국통일의 새날을 안아오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서 선봉적 역할을 다할 것을 확신한다”고 연대의 뜻을 밝혔다. 이날 행사엔 민노총 측 인사들도 참석했다. 민주노총 직선 2기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도 단에 나와 인사했다.


9.

노동계도 거세진다. 최근 민주노총 소속인 현대자동차노조는 수출을 위한 자동차 생산 확대를 요구한 사측에 맞서 생산라인 일부를 쇠사슬로 묶는 등 물리력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노사 간 물리적 충돌이 빚어져 부상자가 발생했다.


촛불로 탄생한 정부는 촛불의 주축인 노조의 절대적 우군이자 노조와 맞선 대기업 총수엔 비판적이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 구속을 필두로 검찰·경찰·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가 총동원돼 롯데 신동빈, 한진 조양호, 효성 조석래 등 대기업 총수를 흔드는 중이다. 친노조·반기업 비판이 일지만 70% 지지 여론을 업은 정권은 이른바 개혁의 칼날을 거두지 않는다.


10.

체제의 안전판 역할을 해 온 한미동맹은 멀어진다. 대통령은 트럼프가 제안한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는 거절하고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에는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3불(不) 약속’이란 이름으로 중국 공산당 정권에, 사드 추가 배치도 안 하고, 북한의 미사일 방어를 위한 미국의 MD(Missile Defense)에도 불참하며, 한미일 동맹도 불참할 것이라 약속해 준 상태다.


주말이면 시위 현장에서 이른바 ‘트럼프 화형식’이 벌어진다. 9월29일 트럼프 방한 시엔 美대사관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 참수대회’까지 벌어졌다. 이른바 보수단체의 김정은 화형식은 경찰들이 저지한다.


11.

대통령은 7월6일 베를린 선언을 통해 평화협정 체결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시민단체 진영에선 소위 ‘한반도 전쟁종식 평화협정 체결 촉구’ 1000만 서명 캠페인을 시작했다. 전국적인 행사도 진행 중이다.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정전협정에 따라 주둔 중인 주한미군이 철수한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핵무장한 북한정권과 연방제로 통일된다. 연방제로 통일되면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될까? 그럼에도 이 백성이 그렇게 원하면 주님도 그렇게 이끌고 가실 것이다.


12.

남은 것은 깨어있는 교회의 통곡,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한 부르짖음뿐이다. 교회마저 죽은 자 가운데 잠들어 버리면 심판의 칼날은 더 예리해 질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그 도시를 바라보고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도 오늘날 너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러나 지금 그것이 너에게 숨겨져 있구나. 네 원수들이 너를 향해 둑을 쌓고 사방으로 너를 포위하여 너와 네 자녀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돌 하나도 그대로 남겨 두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찾아온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누가복음 19:41-45. 현대어성경)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라갔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며 우는 여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몸을 돌이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 앞으로 사람들이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보지 못한 여자들이 행복하다.’ 하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높은 산을 향해 ‘우리 위에 무너져라.’ 할 것이며 낮은 산을 향해 ‘우리를 덮어라.’ 할 것이다. 푸른 나무와 같은 나도 이런 일을 당하는데 마른 나무와 같은 너희 유대인들이야 무슨 일인들 당하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23:27-29. 현대어성경)


회개하며 선포한다. 본디 악의 세력은 의인의 기도로 자멸한다. 기드온 300용사가 나팔을 불 때 미디안 13만 5천 전사는 “동무끼리 칼날로 치며”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450배 많은 적군을 우리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파쇄한 것이다. 이제 기도의 나팔을 불 때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주체사상 본진인 평양의 정권은 자기가 판 함정에 빠져 스스로 무너져 내릴 지어다.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사사기 7:22)



출처: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가을 노래

                  최송연

 

가을의 오솔길 위에는
황금빛 잎새들의 슬픈 노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

땅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 위로
스산한 바람 핥으며 지나가고...

억새의 서걱거리는 소리는
먼 길 걸어온 나그네의 苦歌

그대여 

오늘을 슬퍼하지 말지니

그대 지나온 여름 동안

사랑과 인내로 씨뿌렸다면
이 가을은 아름다운 열매로
그 진실을 드러내리니...

 

열매는 오직 뿌리는 자의 것

눈물로 씨를 뿌린 기쁨을 거둘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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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자들의 부활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 / 머레이 J. 해리스




 부활에 대한 성령의 관계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사실상 바울 서신에 국한하며, 바울 서신에서도 오직 고린도후서에서 그리고 그 후에야 이 관계가 특별한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관련 있는 문절들을 연구하면 우리는 신자들의 부활에 관하여 성령의 네 가지 기능을 인지할 수 있다.

(1) 성령은 미래의 부활 변화에 대한 보증이시다.

세 개의 바울 문절에서(고후 1:22; 5:5; 엡 1:14) 성령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신 아라본(arrabon)이라 불리운다. 이 전문 술어는 그리스 상업 용법에서 두가지 기본적인 의미를 가졌다. 이 말은 더 지불해야 할 필요가 있으나 문제의 물품에 대하여 법적인 권리를 주는, 구입의 첫 불입금 곧 첫 지불액(a down payment) 또는 보증금(deposit)이었다. 때때로 이 부분적인 지불은 전체의 상당히 큰 부분을 지불하는 것이었으나, 다른 경우들에는 단지 명목상의 보증금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말의 다른 의미에 있어서, 아라본은 실제의 지불과는 종류가 다르나 실제의 지불을 의무적인 것이 되게끔 만드는 서약 또는 보증을 표시했다. 바울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아파르케)"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로마서 8:23에 나타나는 상사한 사상을 지적하면서, 많은 주석가들이 전자의 의미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 어구는 단순히 성령이 맺게 하신 처음 익은 열매"(즉 양자됨에서 완성되도록 되어 있는 아들됨의 영, 롬 8:14-16, 23)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라본에 대하여 "첫 지불액"이라는 의미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의미심장하게도, 현대 그리스말에서 "약혼 반지"에 대한 한 가지 말이 아라본 곧 평생의 사랑과 정절에 대한 서약이다. 비록 몇 가지 현대 번역이 두 가지 의미를 다 유지하기를 선호하기는 하지만(예를 들면 MOFFAT. "서약과 불입금"; NIV, "장차 올 것을 보증하는, 보증금"), 우리는 이 술어를 "서약"(pledge) 또는 "보증"(guarantee)으로 번역하는 역본들(WEYMOUTH, GOODSPEED, TCNT, RSV, NASB, NEB)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분명히 이 말의 모든 상업적 뉘앙스들을 다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원은 계약상으로 구속력이 있는 계약에 의해 비준을 받는 상호 흥정의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데, 하나님은 자발적인 선물로 그의 성령을 신자들에게 수여하신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성령을 반환해야 할 담보물(창 38:17-20 참조) 또는 단순한 사전 견본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기독교인이 받는 유업의 열등한 부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1:22과 5:5을 비교하면 바울에게는 "인치심"이 하나님께서 서약으로 성령을 주시는 것을 나타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중대한 질문이 남는다. 무엇에 대한 서약으로 주셨단 말인가? 바울은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고 진술한다. 여기서 언급한 "(이것을) 이루게 하시고"는 1-4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된 신령한 몸을 받고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을 얻는 것(1절).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 것(2절) 그리고 죽을 몸이 삼킨바 되는 것(4절).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한 확증은 "약속의 성령"을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에베소서 1:13-14에서 온다. 하나님의 성령 선물은 그러므로 약속의 성취일 뿐 아니라(갈 3:14; 엡 1:13) 또한 성취의 약속이기도 하다(고후 5:5; 엡 1:14). 기독교인이 받을 기업의 보증이신 성령께서 또한 그 기업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롬 8:23; 고후 5:2, 4-5).


(2) 성령은 하나님이 미래의 부활 변화를 가져오려고 사용하시게 될 수단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고 신약성경이 어느 곳에서도 분명히 진술하지 않는다는 것은 좀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의 능력(고전 6:14; 참조. 고후 13:4) 또는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엡 1:19-20)으로 돌릴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에 대한 강한 암시들이 있다. 그러나 정말 로마서 8:10-11은 신자들의 부활의 출처를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에서 분명히 찾아낸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죽게 되는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살려주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shall impart life to)." 이 "살리시는 것"(impartation of life)이라는 말을 성령이 가져다 주시는 신자들의 매일 매일의 영적 갱신 또는 강림 때에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의 변화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10절과 11절이 다 생명을 육체적 사망(physical death) 또는 필멸(mortality)과 대조하기 때문에, 산 자의 변화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변화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가 10절에서 11절로 지나갈 때 그 생각의 움직임은 현재의 몸의 필멸에서 변화된 몸의 불멸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장차 이렇게 활기를 돋우실 역할은 갈라디아서 6:8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만일 마치 느낄 수 있는 세계와 그들 자신의 자연적 욕구가 우주에 있는 유일한 실제들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들의 심은 것과 일치하여 그 동일한 "육체"(flesh)에서 썩음과 죽음이라는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특히 신령한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신령한 선생들을 부양함으로써(갈 6:6),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시는 영역인(롬 8:16) 인간의 영을 보강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는 자들은 때가되면(갈 6:9) 그 동일한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이라는 최종적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일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활(갈 6:8)과 부활 변화를 가져오시는 일에 나타나는 그의 역활(롬 8:11)을 구별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리라.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은 죽은 자들 또는 죽기로 작정되어 있는 자들에게 작용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다(롬 8:2, 10; 고후 3:6).


(3) 성령은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


바울이 성령은 "살리신다"(고후 3:6)는 것을 말하거나 그를 "생명"(롬 8:10) 또는 "생명"의 성령(롬 8:2)으로 묘사할 때, 요점은 단 하나이다. 성령의 한 가지 특질, 아마도 주요한 특질은 그가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의 원천이시며 영구히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 사실이 이렇다면, 그는 중생 때에 신자가 얻은 영적인 생명과 부활로 말미암아 신자가 얻은 새로운 몸의 생명을 끊임없이 유지하심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의 결과는 그의 다시 사신 생명을 공유하는 것임을 우리가 살펴 보았다. 이 생명은 성령이 중재하신다(롬 7:6, "영의 새로운 것으로," 영이 가져 오신 새 생명<the new life brought by the Spirit>).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고"(갈 5:24),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성령으로 산다"(갈 5:25). 디도서 3:5에서 두 가지 별개의 활동을 구원의 수단으로 묘사한다: 중생을 가져오는 씻음, "중생의 물"(NEB); 성령이 가져오시는 새롭게 하심(아나카이노시스). 중생은 단 한번 일어나며 순간적인 것이다. 새롭게 하심은 연속적이며 점진적인 것이다(롬 12:2, 신약성경에서 아나카이노시스를 사용하는 유일한 다른 곳; 고후 4:16 하반절). 오직 성령께서 신자 안에 영적인 생명을 끊임없이 넣어주심으로만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중생" 때에 받은 새로운 부활 생명이 유지된다. 성령으로 마음을 이렇게 새롭게 하는 것(롬 12:2; 엡 4:23)은 성령으로 "속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 또는 새롭게 하는 것(고후 4:16; 엡 3:16)에 상응한다. 


성령께서 신자의 몸의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직접적인 진술도 없으나, 그러나 성령께서 신자의 몸의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는 이 결론은 여러 조각의 증거에서 이끌어낸 그럴듯한 추론으로 보인다. 첫째, 바울이 부활 몸에 관하여 신령한이라는 형용 어구를 사용할 때 그는 부활 몸의 물질적 구성이 아니라 부활체의 조직 원리 또는 규정 원리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신령한 부활체는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고 하나님의 영의 통제를 받는 몸,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그 초자연적인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영에 완전히 복종하거나 응하는 몸이다. 둘째, 아마도 요한게시록에 나오는 "생명수"(living water) 샘 또는 생명수 강이(7:17; 21:6; 22:1, 17)라는 상징은, 제4복음서에서 물은 성령을 상징하므로(요 4:14; 7:38-39),신령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성령의 영구적인 역할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가능성은 별문제로 하고도,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성령의 기능이 장차 올 시대가 완전히 이를 때 갑자기 끝나게 될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다. 현 시대에서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는 것과 같이 내세에서도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게 될 것이다. 세째,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부활체에 대한 범례라고 바울이 믿었으므로(빌 3:21),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상태에 해당되었던 것이 기독교인의 부활 상태에 해당되리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보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연약하심"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는 지금 "하나님의 능력으로"(고후 13:4) 유지되는 부활 생명 가운데 사신다는 것을 바울은 주목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능력"이 때때로 사실상 성령(the Spirit)과 동의어이다(예를 들면 고전 2:4-5; 롬 8:11과 비교한 고전 6:14을 보라). 만일 성령께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유지하신다면, 그는 또한 신자의 미래의 부활 생명도 유지하실 것이다.


(4) 성령은 신자의 부활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 사이를 연결하는 분이시다


전신약성경에서, 영적인 생명의 초기 단계는 영적인 생명이 장차 얻게 될 완전함과 결코 혼동되거나 동일시되지 않는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영생을 거두는 것"과 아주 구별된다(갈 6:8). 지금(Now)과 다른 그때(Then)가 있는 것이다. 장차 올 세대(the Age to Come)는 여명이 밝았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이 악한 세대"에서 산다(갈 1:4). 기독교인들에게 지금(the Now)과 그때(the Then)의 연결은 인간론적인(anthropological) 것이 아니라 성령론적인(pneumatological) 것이다.즉 지금과 그때의 연결은 자연적으로 불멸한 영혼의 영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유하심과 활동하심에 있는 것이다.


현 세대에서 또는 두 세대의 겹쳐진 부분에서, 신자들은 주의 영광을 응시하고 또 그다음에 반사함에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전과정은 성령의 사역(일)이다(고후 3:18; 차조. 엡 3:16). 그 다음에 또 다시 성령의 작인을 통하여(롬 8:11). 하나님이 장차 올 세대에서 신자들 안에 일으키시는 부활 변화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하는 "좋은 일"이 완성된다(롬 8:29; 갈 4:19; 빌 1:6; 3:21). 그 다음에 이 하늘에 속한 몸은 성령의 생명으로 고동치게 될 것이니.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롬 8:10)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의 목표 곧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는 일을 성취하시자마자 성령께서 갑자기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원을 갖고 살도록 그들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이 지금과 그때 사이의 연속성을 이루는 요소라는 것이 놀라움을 야기해서는 안된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특징지어지므로(롬 8:2, 10; 고후 3:6). 우리는 죽음이 성령의 사역(일)을 종식시키거나 뒤엎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죽음이 성령의 활동을 더 이상 가릴 수 없고 기독교인을 그의 자선심이 많은 영향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죽음이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다(롬 8:38-39).


두 세대(현 세대와 장차 올 세대)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활이 하나의 문절 안에서 넌지시 언급되는 경우가 두 번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바로 이 운명(즉 부활 변화에 대한 경험)을 분비시키셨다"(God himself has prepared us for this very destiny: 한글 개역 성경은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시게 하시고"라고 되어 있다-역자 주)라는 말을 읽을 때(고후 5:4 하반절. 5 상반절), "준비시키심"(preparation)은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주시는 것일 수가 있고(고후 5:5 하반절) 또는 성령께서 가져다 주시는 매일 매일의 내적인 갱신(새롭게 하심)일 수가 있다(고후 3:18; 4:16). 어느 쪽이든, 성령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고(엡 3:16) 그래서 신령한 몸의 핵을 형성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사실상 기독교인에게, 새롭게 하심의 과정의 끝을 표시하게 될, 절정적 변화를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5을 풀어서 말하면: "그런데 그의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 변화를 준비시키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신데, 그는 부활의 행위자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이 최종적인 변화를 가져오시기로 맹세하신 것이다." 그 다음 로마서 8:23이 있다. 창조된 온 우주가 이제까지 해산의 고통으로 신음해 오고 있다는 것을 말한 후에, 바울은 계속하여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아바'라 부르짖게 하는 아들됨의 영(롬 8:14-16)-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롬 8:11)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고 말한다. 현재 아들됨(sonship)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는 그 동일한 성령께서 종말(the End)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인하여 저 아들됨(sonship)을 인치시게 될 것이다.  



머레이 J. 해리스의 '신약에 나타난 부활'에서 발췌(252-25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총살 앞에서 신앙을 지킨 두 소녀!

우리는 감사하며 죽습니다...


추친슈와 호슈추 이야기

중국 대륙, 장시

1966-69, 홍위병 시대


중국 소녀 두명이 예고된 형 집행을 위해 감옥 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감방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다른 동료 죄수가, 그들의 얼굴이 창백하나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고 표현하였다. 무척 슬프지만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고.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추친슈와 호슈추는 신앙을 버리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중국의 한 소녀. 기사와는 관련없음.)


변절한 보초들과 함께, 형 집행인이 손에 권총을 든 채 다가왔다. 그는 그들의 목사님이었다. 그는 이 소녀들과 함께 형 집행을 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회 역사상 수많은 경우에서처럼, 형 집행자들이 그에게 작업을 걸며 그를 유혹하였다. 그들은 이 소녀들을 쏘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녀들은 서로에게 속삭인 후 공손히 목사님께 인사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우리를 쏘시기 전, 우리 목사님이셨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저희에게 세례를 주셨고, 영생을 얻을 길을 알려주셨으며, 지금 권총을 든 바로 그 손으로 주의 만찬을 베푸셨습니다.


목사님은 또한 기독교인이 간혹 약하여 끔찍한 죄를 저지르지만, 다시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목사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일을 후회하게 되실 때, 유다처럼 절망하지 마시고 베드로처럼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그리고 우리가 품은 마지막 생각이 목사님의 과오에 대한 분노가 아님을 기억해 주세요. 누구나 어둠의 때를 지나는 법이니까요. 목사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선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감사하며 죽습니다.”


그들은 다시 인사했다.

목사님의 마음이 굳어졌다. 그리곤 두 소녀를 쏘았다. 그 뒤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예수쟁이들은 가까운 이들에게 배신당할 때 어떻게 하는가? 예수쟁이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5, 7, 개역개정)



출처: 순교자의 소리 (https://goo.gl/UWHK2m)

휴거.. Are you ready?




세상은 성경대로 흘러가고 있으며

마침내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성경의 예언대로 성취되어가고 있는데,
이는 곧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재림"이라고 하며
재림을 두가지로 분류한다면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으로 나뉘어지나
교회에서는 보통 지상재림을 더 강조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지상재림보다 공중재림입니다.


공중재림..

즉 휴거를 그동안 부정적인 일들이 많아서

성도들과 사람들 인식에는

휴거란 말이 웬지 이단스럽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흐름을 비춰볼 때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3년 6개월 평화통치,

후반 3년 6개월은 대환난으로 통치하게 될거라고 합니다.


후반 3년 6개월 시작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이스라엘에 성전이 세워져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가증한 것이 선 것을 본다면
이때부터 대환난이 시작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 마태복음 24:15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마가복음 13:14


휴거가 대환난 전/중/후 중에 언제 일어날지 모르나
이 구절을 보면 대환난 전에 일어날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 데살로니가전서 5:3


대환난 기간에는 결코 우리는

평안하다 안전하다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일 당장 전쟁이 날 수도 있는데

그걸 모르고 일상에 빠져 만족하게 산 것처럼
내일 휴거될지 모르고 지금 이 삶이 너무 좋고

평안하고 안전하다 생각할 찰나
인자가 도적같이, 갑자기 오실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날이 언제 몇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러나 지상재림 때는 대충 계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대환난을 일으키는 그 시점
즉 후반 3년 6개월 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적그리스도와 따르는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제시한 경제방식(666마크)에 동의한 사람들을
잡아 심판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 3년 6개월 (1,290일/마흔두달/한때 두때 반때)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 다니엘 12:11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 요한계시록 12:6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 요한계시록 13:5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 다니엘 12:7


대환난기간 3년 6개월 동안은

순교할 각오로 살아야 하는데
성경의 예언대로 보자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이들을 제외한

거의 대다수가 배반하고 적그리스도에게 굴복당한다고 합니다.


3년 6개월 동안 참고 인내하여 버티는 자는
예수님이 이땅에 내려올 때 데려감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버티는 자는 극히 없다고 합니다.



휴거...
휴거는 대체 누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누가 남겨지는 것인가!


바로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살아갈 때 예수님을 내 삶의 최우선순위 두는 자..
바로 이들이 휴거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알긴 알지만
두 마음을 품은 자들...
세상에 미련을 두는 자들...

삶의 우선순위가 예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인 자들...
이들은 결코 휴거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솔직히 휴거될지 안될지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내 삶을 주께 맡기고 동행하려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자신의 신앙을 과대평가 하지 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하며 믿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을 만날 준비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글 출처:
jeja0612
님 유튜브 채널

제 1장. 성령과 삼위일체(三位一體) / 에드윈 H. 파머


이 책에서는 주로 성령의 다각적인 역사(役事)를 생각하고자 한다. 그러러면 성령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이 첫 장은 성령과 삼위일체에 대하여 진술하되 성령에 관하여 네 가지 명제로 고찰한다.


1. 성령은 인격이시다

그리스도인이시라면 성령을 한 인격으로 믿는다. 교회의 초대로부터 오늘의 현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양으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다한, 소위 기독교 설교자와 신학자들이 성령을 "그분"이라 하지 않고 "그것"이라 한다. 그들은 그분을 제 삼 위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고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우리에게서 몇 가지 구원의 큰 축복들을 빼앗는다. 더구나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령이 인격이심을 보여 준다.

첫째로, 성경은 인격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와 의지와 감정이 그에게 있음을 가르친다. 비인격적인 사물은 이런 성질들을 갖지 못하나 하나님의 영은 가지신다. 바울은 성렁께서 사고력을 가졌음을 전제한다(이하 모든 성경 인용은 '개역 개정판' 성경임).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 11) 여기서 바울은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이 가질 수 없고 인격만이 가지는 지식이 성령께 있음을 밝힌다. 성경도 또한 성령께서 의지의 인격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묘사한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비두니아로 가려 했을 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다(행 16:7). 또 성령께서 많은 선물들을 신자에게 주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곧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또한 성령은 인격이시므로 감정을 가지셨다. 이를테면, 에베소서 4:30은 성령께서 슬픔을 가지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본문은 명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또한 로마서 8:26에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다.

둘째로, 성경은 성령을 다른 인격들과 병치(竝置)시킴으로 그가 인격이심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이 인격이심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을 때 성령께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꼭 같이 인격이심을 지적하셨다. 야고보도 초대 교회에 어떤 지시를 내리면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 15:28)라고 썼다. 성령께서 자기나 사도들과 같은 생각을 하실 수 있는 인격이라고 생각한 것이 명백하다.

 

더욱이 성령께서 비인격적인 세력뿐이라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성령의 권능으로"(눅 4:14) 갈릴리에 돌아가셨다고 말함은 무의미한 말의 중복일 것이다.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하랴! 오직 그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성경을 영감(靈感)하시며, 우리로 깨닫도록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도하시며, 기도를 인도하시고, 우리 가운데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 교회의 직분을 맡기신다.

 

이처럼 성령께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불손하게 대하거나, 그를 대적하거나, 멸시, 훼방 등으로 그를 불쾌하게, 또는 슬프게 한다면 우리 자신이 해(害)를 자취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아무쪼록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지 말고 오히려 믿고 그 사실에서 오는 축복들을 누려야 할 것이다.

 

2.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한 인격으로는 믿되 그를 한 피조된 인격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이 비인격적인 "그것"이 아닌 것은 알면서도 성부보다 낮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적인 특성뿐 아니라 신성도 겸비했음을 보여 준다. 이 신적 속성은 곧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는 표(標)가 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은 전능하사 창조(창 1:2)와 섭리(시 104:30)와 예수의 초자연적인 잉태(눅 1:35)와 부활과 각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선물을 베푸는 일들을 감당하신다.

 

그는 또한 전지(全知)하시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질문함으로 그것을 암시하였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 40:13,14) 사도 바울도 그것을 우리로 믿게 한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나아가 성령의 편재성(遍在性)을 말할 수 있다. 시편 기자(다윗)는 웅변적으로 이르기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하여 그가 하늘에 오르거나, 음부로 내려가거나, 바다로 피하거나, 밤의 흑암 중에 숨는다 해도 곳곳마다 성령(주의 영)이 거기 계셔 결코 그로부터 피할 수 없음을 그는 말한다. 성령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성령은 신도들 안에 거하며, 많은 신도들은 각자 안에 그의 임재를 제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히브리서 9:1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다. 이것은 성자와 동역(同役)하신 성령께서 영원한 신성을 소유했음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이, "성령이 말씀하시기를"과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어구를 섞바꾸어 쓰는 사실도 성령의 신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다.

 

끝으로, 대사명 위임 시(大使命委任時, 마 28:19)와 사도의 축도(고후 13:13)에서와 같이 성부, 성자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을 병기(竝記)한 사실은, 성령께서 다른 양위(兩位)와 동등한 자리에 위치하여 그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 피조물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그처럼 긴밀히 연합된 표현으로 한데 묶는다면 도무지 조리가 맞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이신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창조의 아름다운 역사와 영감의 권위 있는 일과 그리고 각 사람 마음속을 조명하는 일들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타락을 극복하여 중생시키고,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시며 우리를 성화시키지 못하였으리라. 그가 유한자(有限者)가 아니고 하나님의 한 위(位)이신 사실을 고마워함이 마땅하다.

 

3. 성령은 성부, 성자와 구별된 하나님의 한 위(位)이시다

 

교회 역사상에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믿으나 삼위일체의 일체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 각이(各異)한 삼위가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3세기에는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 때에는 성부로서, 그 후 역사상에는 성자로서, 마지막에는 성령으로서 나타나신 분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처음엔 성부로, 다음엔 성자로, 세 번째로는 성령으로 불려지는 셈이다. 즉, 성부가 성자로 변하고, 다시 성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들은 다 성경의 계시에서 이탈된다. 어떤 성경 본문은 한 하나님의 단순한 변모가 아니라 각이한 삼위의 존재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던 때를 예로 들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그와 동시에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와 예수님 머리 위에 앉았다고 했으니(마 3:16-17), 이들 삼위의 동시 현현(顯現)은 하나님을 단순히 단일(單一)하다고 해석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33도 하나님의 삼위 간에 분명한 구별을 짓는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한 위가 아니고 삼위이심은 확실히 우리에겐 축복된 일이다. 그것은 풍성한 삼위일체가 되시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전능하신 아버지가 계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생명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4. 성령은 성부와 상자로부터 나오신다(發出, 發生)

 

삼위일체의 삼위 간에는 일정한 관계와 차서(次序)가 있다. 이 삼위가 똑같이 하나이시라고 해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녔고 서로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제 일 위와 제 이 위 간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영원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셨다. 성령이 아들을 낳으신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과 다른 두 위 간에도 일정한 관계가 있으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하나님의 영의 나오심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성경에서 이 말을 설명해 주지 않으므로 여기에 성경 말씀을 되풀이할 뿐 그 이상 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처럼 아버지가 성령을 낳으셨다거나 그리스도가 성령을 낳으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교부들이 암시하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형제이거나 성부의 손자가 되는 결과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에 관하여 조심성 있게 '낳다'라는 용어를 피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信經)은 이에 대해, 성령은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않고 누가 그를 낳은 것도 아니고 다만 나오신다."고 표현하였다. 이 '나오신다'란 말은 예수께서 사용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성령의 이름이 또한 이 삼위 간의 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암시를 준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아들에 대한 그의 관계를 보여 주며, 아들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의미 하듯이 성령이라는 이름도 다른 두 위(位)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표시하고 있으니 곧 영(靈)이라는 그 이름은 불어넣었다(spirited or breathed)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령이 비록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며 혹은 그로부터 불어넣어졌다 할지라도 그는 온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해도 그 두 위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없음은 마치 성부께서 성자를 낳았다(시 2:7, 행 13:33)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이 아니라 할 수 없음과 같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영원히 낳음을 입은 것같이 성령도 영원히 불어넣어졌다는 사실에 신비가 있다. 그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셨다. 그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또는 '불어넣어졌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보다 낮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삼위의 다른 두 위와 영원히 유지하는 관계를 표시할 따름이다.

 

또한 성령이 다만 성부께로부터만 나오지 않고, 성부, 성자 두 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성부께로부터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15:16에서 분명하거니와,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것은 그처럼 분명치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령을 세상에 보내사 제자들 위에 불어넣었다('숨을 내쉬며')고 하는 이런 구절들(요 15:26, 16:7, 20:22)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한 번 불어넣는 것은 영원히 불어넣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들이 삼위 내의 관계에서도 가지는 일정한 권위를 반영한다. 그 위에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 불려질 뿐 아니라 "아들의 영"(빌 1:19)으로도 불려진다. 이러한 성령의 다른 두 분과의 관계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제일, 제 이 위가 아니고 제 삼 위로 여겨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으니 맨 처음이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낳음을 입었으니 제 이 위이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니 제 삼 위이시다.

이 삼위일체의 차서는 역사 가운데 나타나서, 처음 두 위가 연속하여 전면에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현저하게 되신 것은 주목할 만하다.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세상에서 더 뚜렷하였던 분은 아버지시다. 창조에서 주된 영광을 받으신 분이나, 이스라엘이 구약에서 주로 관계한 분도 그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자 아버지는 그처럼 현저히는 나타나시지 않으셨고, 성령은 아직 충만히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만 더욱 뚜렷한 역할을 담당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시고 승천하시자, 삼위일체의 제 삼 위께서 더 뚜렷이 등장하셨다. 이와 같이 삼위께서는 삼위일체 안에 일정한 차서가 있어서 그 차서는 역사 가운데 현시되어 각 위는 바로 삼위일체 내에 발견되는 차서대로 역사 가운데 나타난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불려 나오기(breathed out) 때문에 오순절에 교회 위에 불려 나온(임재하신) 분도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라 성령이었다는 것을 또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 중 제 이 위는 삼위일체 안에서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땅에서 성육하신 아들이어야 하는 사실과 상응한다. 같은 모양으로, 삼위일체의 제 일 위가 삼위일체 중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또한 믿는 자들의 아버지시다.

 

이상은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몇 가지 면에서 고찰한 것인데, 비록 우리가 이것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성령께서 계시한 것을 무시하여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가 교회를 인도하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과 다른 두 위와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불어진다는 교리의 실제적인 결과는 광범위하다. 1054년 기독교 세계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나뉘었다. 비록 저변의 요소가 많았으나 서방 교회들이 톨레도(Toledo) 회의(589년)에서와 같이, 성령은 아버지 "와 아들(filioque)"=("and the sun") - 이는 논쟁의 소지가 있는 용어 - 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하는 반면에 동방 신자들은, 성령은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믿었던 것은 실족케 하는 걸림돌이었다. 이 차이의 결과로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에서 분리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교리는 거대한 실제적 효과를 발휘하여 만약 1500년 전 교부들이 이것을 작성치 아니하였던들 오늘날 우리의 교회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주시는 지식을 감사해야 한다.

 

더욱이 아브라함 카이퍼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filioque(and the sun)"의 부정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이른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예수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게 되며, 성령의 성화의 일만 내세우고, 예수의 구속은 뒷전으로 돌리게 되며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경으로부터 독립하는 데로 기울어진다. 성화가 칭의보다, 성령과의 주관적인 교통이 객관적 교회 생활보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이 성경보다 더 중요시될 우려가 있다. 카이퍼는 이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동방 교회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옴을 부인하는 결과로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회의와 대회에서 행해지는 긴 신학적 토의가 때로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았다. 비록 그 토론이 언어상의 문제라는 비난을 받을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 결론들은 위로부터 아래 대열에까지 배어든다. 우리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분이라는 고마운 계시에 감사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관념적인 지식만으로 만족하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 위에 성령과 그의 사역을, 체험을 통하여 알도록 힘써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 장(章)과 다음 장들이 씌어졌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19-30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지금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포함, 성도라 이름 하는 우리는 모두 어느 위치, 어느 자리에 있든지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 지금껏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사회생활을 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기독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그 사람의 인격성향, 지식수준의 유무, 환경, 혹은 타고난 성품 등등이 신앙생활에도 작용하는 듯, 정통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분들의 신앙 색깔이 비슷해야 하고 또 비슷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지면 관계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고 신앙생활 상태를 간단히 두 부류로 분류해보면 1. 건전한 신앙인 2. 불(비)건전한 신앙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모두 교회에 등록된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교파별,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각자가 쌓아온 신앙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편의상, 건전한 신앙인,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라 나누어 부르도록 하겠는데, 건전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비바람이나 홍수가 내려도 끄떡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가는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건전하지 못한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을내기보다는 사람(인기도 높거나 자기 취향에 맞은, 말을 잘하는 목사님이나 교사를 더 따름)의 말에 비중을 더 많이 두거나 혹은 신비적 현상,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 이적과 기사 같은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겨 거기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아닐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 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경직되지 마시기를…

이런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나타난 현상인데, 건전하고 바른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말하라면 당연히 바울 사도를 포함한 사도(가롯 유다 제외)들, 사도들을 통해서 전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액면 그대로 믿으며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간 성도들을 칭하는 것이라면, 불건전한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아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추종세력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들(우리들)이 건전한 신앙인과 불건전한 신앙인으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되는 명암의 갈림길,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가 건전한 신앙인으로서 성경 말씀이 원하는 대로 바른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이 있겠지만, 몇 가지로 간단히 요약하면:

1.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건전한 신앙인이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예수님을 천사장 정도로 믿으면 불(비)건전, 내지 이단자가 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성령님을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성령을 부리는 영, 혹은 영향력 정도로 규정하는 자(교리)는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단)으로 규정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 자가 건전한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또 개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생활의 잣대로 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별님의 생뚱맞은 말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으실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 자기 신앙상태를 한 번 점검해보시고 내가 과연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을 하고 설교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성경을 몇 번이나 읽고 신앙생활을 해 나오고 있는지,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해보시기 바란다. 놀랍게도 내 마음과 생각 속에는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말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들은풍월"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보다 훨~ 더 많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아니, 놀라야 정상이다. 

현역 목사님들조차도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이점 오해없으시기를…)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그 말씀이 주는 뜻을 강론하며 풀어 가르치기보다는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좋은 예화들, 인기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들을 듣고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설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몇 구절은 성경 말씀을 양념처럼 집어넣고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보고 아연실색 할 것이다.

댓글 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나타나는 기적과 이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말씀에 착념하라고 권면이라도 하노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무섭게 되받아침을 보고 씁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유대교 랍비들은 하루는 24시간 중 밥 먹는 것,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성경을 읽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함을 알 것이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거나,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그것이 문제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읽은 말씀을 마음에 화합시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모순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은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외형적 신앙생활, 자기 의를 들어내는데만 중점을 두었고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그 정신은 무시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록한 말씀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신학자들의 논란이 많지만, (‘핫지’(Hodge), ‘바레트’(Barrett), ‘메이어’(Meyer))등 ‘기록한 말씀’을 가리키는 원어가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점에 착안, 여기서도 기록된 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킴이라고 했다. 반면, ‘칼빈’ (Calvin)이나 ‘루터’ (Luther)등의 개혁자와 또는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기록한 말씀’이 4장 이전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내용 아니면 1-3장에서 인용된 구약 성경을 뜻하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학자의 주장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66권)을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것을 후대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사랑의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계 22: 18-19절 참조) 어쨌거나, 고린도교회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의 진보에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이었고, 이것은 순전히 영적 교만이라고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책망, 지적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고전 4: 8) 여기에서 “왕노릇..” 이란 영적 교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로, 말세를 사는 우리 성도들은 이런 자들의 패역한 교훈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하며 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다는 말이 맞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힘과 능으로 더하여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이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오늘도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하며 신앙생활의 승리를 쟁취하게된다.

믿는 자는, 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본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다.(고전 12: 3참조)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인가?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절제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죄 또한 이길 힘을 공급받고, 죄를 지으면 개인 교회의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시기에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다. (롬8: 26-27절 참조) 이것을 신학상 용어로 "견인(堅忍(perseverance))"이라고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데 목숨을 걸어라! 기록된 계시 속에 모든 답이 있다. 성경이 text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 신학자들의 깨달음도 역시 성경 속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신학서적들도 무시하지 말고 참조하라, 그러나 그 모든 훌륭한 신학자님들의 말씀일지라도 성경 위에 둘 순 없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날마다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친히 우리들의 마음에 조명하여 주셔서 깨달음을 주셔야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글을 읽는 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아침햇살처럼 각 심령에 두루 비치시사 옳은 길, 의의 길로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 20-21),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거대 마젤란 망원경.....


우주를 살필 지름 25미터가 넘는 거대한 반사망원경이
칠레 아타카마사막 라스캄파나스라는 청정지역에 건설된답니다.
1조원이나 드는 이 프로젝트를 한국을 포함하여 11개국이 참여하는 거대마젤란망원경기구(Giant Magellan Telescope Organization: GMTO)가 추진중이랍니다.

이 반사망원경은 지름이 8.4미터에 달하는 대형 반사경 일곱 개를 붙여서 조합하는데 초정밀 가공기술이 필요한 반사망원경을 제작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가졌던 가장 정밀한 우주망원경은 지구궤도 640 km 상공에 쏘아올려진 허블 망원경이었습니다. 이 획기적인 허블망원경으로 인하여 인류는 우주 저편 머나먼 공간을 훨씬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대마젤란망원경은 지구상에 설치되는데도 워낙 망원경이 거대하여 우주의 빛을 모아 허블 망원경의 10배에 달하는 선명한 영상을 제공할 거라고 합니다. 우주과학자들이 흥분하며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우주에는 천 억 개가 넘는 은하(Galaxy)가 존재하며 은하들은 보통 천 억 개의 항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항성 주위를 도는 혹성들, 위성들을 합한다면 도대체 우주공간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어떤 과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무려 700 해(亥) 개랍니다. 지구상의 모든 바닷가, 강가, 사막의 모래알을 합한 숫자 보다 많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의 수는 60조(兆)에서 100조(兆)라고 합니다.
새끼손가락 끄트머리 정도(1 cc) 부피 안에 10억 개의 세포가 들어있는 셈입니다.
세포의 지름은 1,000분의 1 밀리미터 정도이고요.
그리고 이 세포의 가운데 들어있는 세포핵 안에는 DNA가 들어 있습니다.
DNA는 약 30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들, 아네닌, 티민, 구아닌, 시토닌이라는 네 종류, A-T-G-C 염기들이 이중나선으로 연결되고 접혀져서 염색체를 이룹니다. 너무나 작아서 30억 개나 되는데도 세포핵 속에 차지하는 부피가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체의 DNA 단백질 알갱이 수는 얼마나 될까요?
100조 곱하기 30억 = 3,000 해(亥).....
끝 간 데 모를 저 우주공간의 모든 별들의 숫자 보다 우리 몸 안의 DNA 알갱이가 훨씬 더 많군요.
그 많은 DNA 알갱이를 어떻게 조합하여 무슨 정보를 어떻게 입력시켜 놓았기에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별 위에 생겨나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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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강 막14장22-24절 세례와 성찬 / 박영선 목사

 

 

 

46강 막1422-24절 세례와 성찬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니지만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성례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그분의 백성 됨과 우리가 그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한다. 교회는 성례와 이 예식의 내용을 충실히 가르쳐야 한다.

 

 

Q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형벌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형벌의 자리로부터 그들을 구해내는 것, 즉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대속 죽음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곧 피흘리신 죄 씻음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며 그의 요구가 우리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반대되는 길을 가면 마음이 거북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은 표요 성경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있는 백성이기 때문에 얻게 된 감각인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대속적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8:12) 하나님나라에 관한 일은 늘 예수를 믿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써 죄 씻음을 통과해야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28:31) 또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간의 밀접한 관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사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서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창조라는 공통분모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예수님의 죽음은 직결되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즉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신다는 이 구원의 약속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나라인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나라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 메시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설교의 주제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나라의 선포에서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달라지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16:21, 참조:8:31, 9:31, 10:33). ,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던 그 예수님이 이제는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나라 선포의 대상과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을 위한 성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열매로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와 죽음을 신앙고백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교회는 규칙적으로 세례와 성찬 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 예식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며, 비록 성례 의식이 행해지고 있더라도 참여하는 자들이 그 예식의 내용과 의미를 모른 채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면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로마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를 갖고 있었으나 개혁주의 교회는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만을 가리켜 성례라고 합니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교회에서 지키라고 명하신 항구적인 제도입니다. 신자들은 성례를 시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성례를 통하여 그의 백성됨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례는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시행되며 그 의식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결속되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과 부활에의 동참, 세례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씻는 의식이며,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는 자들에 한해서 비로소 베풀게 되며 신자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12을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를 함께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 아래로 들어가심으로 죄인인 우리와 동일시된 것 같이,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우리가 동질화됨으로써, 이제 우리 역시 죽음을 이기고, 사망이 우리를 붙잡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동일시되고 동질화되면 그와 함께 죽음에도 가지만 그의 죽음은 곧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2:12“‘함께장사한 바 되고 함께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시되어 물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와 동일시되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그가 사망을 통과한 일에 내가 동참한 자가 되고 싶다는 신앙고백의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연합되기 위해서는 동질화되고 동일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연합이라는 말로 많이 일컫기도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6:3-8).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로 다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죽음의 자리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내 이름만으로의 죽음이라면 죄값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아니며, 사망이 그를 붙들 수 없는 분이며,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므로 이제 내가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면 그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갖는 뜻입니다. 이 세례의 효능은 시행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내적 역사는 세례집행 전이나, 그 순간이나, 그 후에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상관없이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또한 이 세례는 오직 한 번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식이 집행될 때마다 그 의미를 우리 마음에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의 의미, 성찬

그러면 성찬은 무엇입니까?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나누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잘 설명하신 부분은 최후의 성만찬 석상에서였습니다. 이 성만찬에서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떡을 떼는 일과 포도주를 붓는 행위이며, 둘째는 그 행위에 이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22:19)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14:24)라는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특별히 잔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구약에서 가르치고 기다려왔던 구원의 내용이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53:10-12을 인용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을 백성들을 위해서 고난받는 종의 역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받는 주의 종이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신 매를 맞고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주어서 많은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잔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드린 언약의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는 장면이 묘사된 출애굽기 24: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24:8).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했던 것처럼 이제 그 다음날 이뤄질 자신의 피흘림으로써 제자들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1:3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고 남은 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세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바로 이 새 언약의 제사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세우리라“ (31:31).

 

이상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고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행해질 때는 반드시 그 행위와 함께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씀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 예식이 행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 죽음심의 공효(功效)가 실제로 적용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기대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참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하나님나라 백성의 창조는 어떻게 성취됩니까?

2. 신자들이 성례를 시행함으로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성찬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행위와 말씀은 각각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 적어 보십시오.

행위:

말씀: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세례받았던 때의 감격과 느낌을 서로 이야기 해봅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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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드 G 캐롤 / 유엔군 사령부 공보실장]
본 초기 화면에서는 북한 차량이 72시간다리로 향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해당 차량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으며 차량이 72시간 다리를 건너 이동함에 따라 주변 건물에서 일부 북한군 병사들이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영상 왼쪽 하단의 시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영상에 보시듯 차량이 빠르게 이동하여 다리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차량 운전자는 빠르게 이동하여 다리를 건너 김일성동상이 북한의 공동경비구역 투어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이 지점을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차량 운전자는 김일성 동상을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넘어오기 위한 의도를 분명히 갖고 급하게 우회전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지점에서는 화면에 보이는 나무 아래에서 장애물로 인하여 더 이상 차량을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음 화면에서 보시면 놀란 북한군 공동경비구역 병사들이 차량이 정차한 지점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일부 북한군 병사들은 인근 초소에서 뛰어왔으며 또 다른 일부 병사들은 판문각 계단에서 뛰어왔습니다.

다음 화면은 북한군 병사가 차량에서 급박히 하차한 후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달려오는 상황이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4명의 북한군 병사들이 도주하고 있는 병사에게 직접 사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 달려가는, 도주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다시 상단 화면을 보시면 우리는 사격을 가하던 북한군 병사 1명이 추격 후 군사분계선을 몇 초간 넘었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이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다음 화면에서는 북한군 신속 대응 병력들이 김일성 동상 인근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화면에 있는 시점을 바탕으로 보면 저희 쪽에 한측 경비대대에서도 신속한 대응을 꾸리고 있습니다.

지금 화면을 보시면 화면이 정지하지 않고 물체를 따라서 이동하고 있는데 이 장면은 저희가 CCTV로 감시를 하면서 물체를 따라서 이동하는 모습입니다. 이 상황 당시 한미 양측 모두 대대장이 대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래 보시면 시간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에 보시는 사진은 부상 당한 북한군 귀순자가 공동경비구역 남쪽 벽에 기대어있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화면에서는 지금 낙엽더미에 북한군 귀순 병사가 건물 벽에 기대어있는 모습을 적외선 카메라로 감지한 열신호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저기 열 감지를 보시면 공동경비구역 JSA대대는 상황을 인지하고 해당 장소로 3명을 급히 파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 JSA 장소에는 다른 팀들도 있으나 지금 저기에는 3명이 급히 파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앞에 2명이 부상 당한 귀순병사를 따라가는 한국의 부사관이고 뒤에 계신 한 명이 경비대대의 한국군 대대장입니다.

그래서 지금 경비대대 한국군 대대장의 인솔하에 병사들은 부상 당한 귀순병사 주변을 신속하게 이동하여 귀순 병사를 대대장이 위치한 곳까지 후송을 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미측 대대장은 이 상황을 전체적으로 모니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2명의 부사관이 먼저 대대장이 있는 곳까지 포복을 하여 데리고 오고 그 후에는 같이 3명이 부상당한 귀순자를 차량으로 탑승시키는 모습입니다. 지금 저 부분을 보시면 저게 굉장히 위험한 상황인 게 북한 쪽 초소에서도 저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비대대 소속 3명이 부상당한 귀순자를 차량으로 탑승시킨 후에 최종적으로 미국 의무후송요원들이 부상 당한 귀순자를 의료시설로 후송하여 거기서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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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말씀은 성경 첫머리, 첫줄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안 믿어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주는 원래 있었고
우연히 생명체가 생겨나서 진화했으며
우리 인간은 그 우연과 진화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만일 우주가 원래 있었고 우리가 우연히 생겨난 생명체가 진화한 고등동물이라면
성경 첫머리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거짓말이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도 아니면서 수 억 년 고생해서 진화한 우리에게 가만히 다가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거짓말하는 사기꾼이 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니라.” 하신 성경의 첫머리 말씀을 믿지 못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사기꾼 거짓말쟁이, 가짜 하나님, 악신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 없으시고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천지를 지은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실 수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요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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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란 무엇인가-

로마서에서 말하는 선택을 이해함에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용어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 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그 분의 뜻'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이 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미 기록해온 대로(전술한 대로) 복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가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한 자를 이 복음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창세 전에 택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주권적인 '무조건 선택-Uncoditional election'을 뜻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용어인데요,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선택과 유기(이중 예정)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왜냐 하면 창세 전 선택이나 예정(혹은 작정)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란 큰 틀(framework)이나 구조(structure) 안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운명론적인 선택이나 예정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운명과 관련된 선택이나 예정이 아닌 인류 구원의 큰 경륜 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나의 복음'의 첫 근거는 창세기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의미를 바울은 깨닫게 되었었지요. 

바울은 창세기 서두에 드러나는 창조 전 계획을 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졌기에 구약 전체를 복음으로 조명하고 신약을 이해함에 있어서 반듯한 '바울 복음'이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이는 물론 성령의 조명과 성령이 친히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따라 정립한 복음입니다.

둘째로는,
선택이란 용어를 이해함에 있어서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을 바울의 문맥, 나아가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리 아신 자들', 그 이하의 기록들은 모두 복수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본디 히브리적인 사고체계로 보자면 단수집합명사입니다. 성, 수, 격이 분명한 문자체계인 헬라어로 기록되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28절 29절 30절과 그 아래 기록들은 한 문장입니다. 한 덩어리로서 개념을 추출해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고구마 - 잎 꽃 줄기 뿌리 잔뿌리, 그리고 그 것을 가능케 하는 흙 공기 물 해빛 바람 등 - 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내포와 외연을 바탕으로 각 구절들을 해석해야 큰 틀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28절에서 말하는 '선'이란 본문의 머릿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나 결과를 말합니다.(창세기 1장 참조)

로마서에서 말하는 영화의 상태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최종적인 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모든 것에는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하심, 영화롭게 하심'이 다 포함됩니다. 또한 ' 그 모든 것'에는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나 피조물도 포함됩니다.

자,그렇다면 이제 선택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해봐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창세 전에 온 인류의 구원과 멸망이 이미 정해졌을까요?

네, 맞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구원하기로 택하시고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는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면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이 것을 바울은 로마서 9장 10장 11장에서 이스라엘의 궁극적 운명(?)을 논함에 있어 그들이 그토록 굳게 붙들고 있는 선민사상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고자 한 그 헛된 생각을 박살내는데 있어서 에서와 야곱을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연이어 모세와 바로를 예를 들지요. 그 다음에 토기장이의 비유-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가 등장합니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선택과 유기를 설명할 적에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증거구절들이지요. 과연 그래도 괜찮을까요?
성령께서 그렇게 조명하셨을까요?

먼저 에서와 야곱을 예로 든 이유는, 창세 전 무조건적 선택을 뒷받침하기 위함이 아니라 야곱의 믿음과 에서의 믿음없음을 논증키 위함입니다. 로마서 9장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여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말씀이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서두에서 말한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이어서 12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13절,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언뜻 보기에는 칼빈주의의 선택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모세와 바로의 예도 그렇게 보이고요.

그리고 토기장이의 비유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호세아의 글과 이사야의 글의 인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논증하고 최종적으로 확증하는 바 결론은 '믿음과 행위'입니다.(30절-33절 참조)

이 믿음과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위 세 가지 예를 든 것이지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을 살펴봅니다. 미리 아신 자들이란 체험적 앎이 아닌 선험적 앎입니다. 달리 말해서 경험을 통해 어느 누구를 알았다가 아니라 특정 부류를 미리 알았다는 말인데요, 아들을 닮은 자들를 미리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그 씨앗을 닮은(똑같은) 열매를 미리 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추수하기로 미리 작정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맏아들이란 유일무이한 씨(여인의 후손로서의 씨)를 말합니다. 계시의 발전과정에서 보자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아들 혹은 씨)입니다. 이 것을 성경은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라 하지요.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미리 정하셨다(예정하셨다)!' 이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택과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 전 무조건적 선택이란 교리가 주는 신앙적 혼란, 예컨대 '내가 혹 택함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영적 혼란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구원얻는 믿음이 우리를 반석위에 세우는 것이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창세 전 무조건 선택이 우리를 세우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시기를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11327#comment16760204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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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누가복음 17:11-19)


여기에는 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이 기사가 없다. 문둥병은 유대인들이 어떤 특별한 죄 때문에 받는 형벌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다른 어느 병보다도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는 표시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없이하려고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길거리에 누워 있는 문둥병자들을 보실 때에 진노하시기보다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약 중간 위치에 이르셨다. 이곳은 예루살렘이나 갈릴리에 비해서는 생소하신 곳이었다. 이곳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국경 지대이다. 주님께서 이 길로 가신 것은 이 문둥병자들을 찾아내어 고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주님을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참아 냄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사 65:1 참조). 우리는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Ⅰ. 문둥병자들이 그리스도께 한 말. 이들은 열 사람이 한 단체를 이루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단절되어 있었지만 문둥병자들 끼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한 촌에 들어가실 때에 만나 뵈었다. 이들은 주님께서 여행으로 인한 피로를 풀으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피로하신 채로 촌으로 들어가시고 계신 주님을 만났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본체 만체하시지 않았으며 그들의 호소하는 바를 뒤로 미루시지도 않았다. 

2. 문둥병자들은 성한 사람과는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멀리 서" 있었다. 영적으로 문둥병자와 같은 우리들도 그리스도께 가까이 하려고 할 때에 아주 겸비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극히 순결하신 주님께 누가 감히 가까이 할 수 있으랴? 우리는 불순하다. 

3. 문둥병자들의 요구는 전원이 일치되고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13절). 그들은 멀리 있었으므로 음성을 높이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외쳤다.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선생님으로 모셔야 하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게 되면 그는 곧 구주이신 예수이시지 다른 분이 아니시다. 그들은 특별히 자기들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하지 않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동정을 구할 때에도 이 말씀으로 족하다. 왜냐하면 문둥병자들은 그것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문둥병자들은 예수의 명예를 듣고 있었다(주님은 이 지방에 대하여 정통하시지 못했지만). 그래서 그들은 용기를 내어 주님께 간청을 하게 되었고, 그 중의 하나가 아주 평범하고도 쉬운 말을 꺼냈을 때에 모두가 가담하여 한 목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문둥병의 감식자인 제사장에게로 보내어 검사를 받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는 적극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순종심을 시험하신 것이었으며 그렇게 시험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나아만에게 "가서 요단강에 몸을 씻으라" 한 경우와 같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주님의 길과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 문둥병자 중의 몇 사람은 주님의 명령을 듣고 "고치면 고치고 그렇지 않으면 못 고치겠다고 할 것이지 헛걸음이나 하게 제사장에게로 가라고 하는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합의가 되어 모두가 제사장에게로 갔다. 의식적인 율법이 아직도 유효한 때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켜야 될 것으로 여기시고, 이에 대한 세평을 지키며 또한 그들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는 제사장들에게 경의를 표하시느라고도 그렇게 하셨겠지만 아마도 보다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제사장들의 판단과 증인이 병을 고치는데 보다 완전함을 기할 것과 제사장은 마땅히 각7성하여 육체적인 질병 이상의 질병에 대한 지도력을 가져야 할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Ⅲ.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래서 제사장에게 보이는 데도 어울렸고 자기들이 깨끗하게 되었음을 제사장에게서 증명을 받게도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도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지 않는다. 가서 제정되어 있는 의식에 순응하자. 가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자.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가서 믿을 만한 성직자에게 너의 사정을 말하라. 그러한 수단이 너의 병을 고쳐 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수단은 성심껏 이행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고쳐 주실 것이다. 

Ⅳ. 그 중의 하나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사례를 하였다"(15절). 그 사람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언 받고, 열 사람 모두가 원하는 감검된 처지에서 해방을 받기보다도 먼저 그 병을 고친 장본인 되시는 분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병고침의 이익을 받기 전에 먼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했던 것이다. 그는 감사함에 있어서 열성적이고 다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하여 자기의 깨끗해짐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감사했다. 그리고 또 그가 큰 소리를 지른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그가 기도할 때에 큰 소리를 냈던 것과 같다"(13절).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어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그의 체험에 의하여 그들도 하나님을 믿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리스도께 특별한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16절).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하고 존경하는 자세를 취하고 "사례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특히 병을 고쳐 주신 일에 감사해야 하며, 그리고 감사를 돌리되 빨리하고 미루적거리지 말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감사의 정이 사라지기 쉽다. 우리는 또한 기도를 드릴 때도 그렇지만 감사를 돌릴 때에 아주 겸손한 자세로 해야 한다. 그래야 야곱의 자손에 어울린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을 추구할 때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을 때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창 32:10 참조). 

Ⅴ.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사람이 출중한 인물임에 주목하셨다. 이 한 사람만이 사마리아인이고 다른 사람은 다 유대인이었다(16절). 사마리아인들은 유대 교회에서 분리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지식과 예배를 잊고 있고, 떠나고 있었는데 이 사마리아인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께서는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이 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목하였으며, 그와 함께 은혜를 받고서도 감사를 돌리지 않은 사람들을 또한 주목하셨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이방인인 오직 한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다(17, 18절). 

(1) 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시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주님께서는 전부를 고쳐 주셨다. 말씀 한 마디도 전체를 호의적으로 치료하였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하시는 치료는 풍성하여 그 환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전체를 다 치료하기에 넉넉하다. 여기서 열 사람이 한꺼번에 깨끗하게 되었다. 우리도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주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2) 그런데 돌아와 감사를 드리기에는 얼마나 인색한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들은 왜 감사를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것은 배은망덕은 바로 죄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많은데도 올바른 자세로 돌아와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은혜에 대하여 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겨우 열에 하나). 

(3) 감사의 정을 가장 많이 가졌던 사람들이 흔히는 가장 기대가 적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는지 모르겠다. 사마리아인은 감사를 돌렸고 유대인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계시 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연 종교에만 지배를 받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경건성과 헌신하는 점에 있어서도 뒤지고 부끄럼을 당하는 일이 많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유대인들의 배은망덕 곧 은헤를 받고도 전혀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말로 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그것을 너무도 경시하는 인간 세상의 배은망덕도 암시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19절에서 그 사마리아인에게 큰 격려의 말씀을 주신다. 나머지 유대인들도 병 고침을 받았다. 그들의 배은망덕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병이 도루 나게 해도 마땅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은혜를 감사하는 좋은 본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았다. 한편 사마리아인은 특별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주님의 찬사를 받으면서 그의 병 고침을 확인 받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여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그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주님께서 그를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하여 보시고 구원해 주셨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일시적인 은혜를 받았을 때에 그것을 믿음의 기도로 받아들이고 믿음의 찬양으로 감사를 돌릴 때에는 그 은혜가 배나 늘어나고 보다 유익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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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흐르는 가을 향기

      최송연

꽉 막혔던 가슴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실바람 흐르는 가을을
조금 느낄 수 있어 정말 좋네

바람을 휘감아도는
가을 노래
향긋한 빛깔로 물들여지는 나뭇잎

내 마음에도
수채화처럼 고운 가을이
빈 공간을 따라 채워지기 시작한다

가슴에 흐르는 이 가을 향기 따라
내 사랑
그분이 오신다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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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말하면 도마의 이름을 도용한 영지주의자가 적은 소설책에 불과한 문서쪼가리가지고 왜이렇게들 난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명인의 이름을 훔쳐서 책을 쓰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무협 소설가인 김용 선생의 이름이 도용된 사례가 있죠.

도마복음도 그것과 같습니다. 원시 기독교회에 있어서 예수님과 다이렉트로 소통했던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가지는 권위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랬기에 영지주의 이단들이 아무리 설쳐도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열두 제자 못지 않은 권위를 가진 바울과 같은 사도들에 의해 영지주의는 그야말로 소수 종파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영지주의자들이 택한게 바로 도용입니다.

어차피 고대 사회에서는 지금과같이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언론이 활성화되지도 않았기에 "이 책은 도마가 쓴 책이다." 라고 한 뒤 그걸 슬쩍 흘리면 열두 제자들이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루살렘 근방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지역(예를 들면 쿰란)에서는 먹힌겁니다.

네, 도마복음이란 그런거에요. 마찬가지로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도 그런거고요.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철학을 관철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권위자의 이름을 도용한게 바로 우리가 아는 위서들이란 겁니다.

 

그런데 그런 과거 기독교사도 제대로 모르는 벌레같은놈들이 "도마 복음이야말로 레알이다! 사복음서는 소설이다! 다 버려라! 도마복음을 따르라! 그것이 곧 예수의 참 모습이다!" 라고 씨부리는 것도 짜증나는데, 거기에 휘둘려 "도마 복음은 현대 기독교를 소생시킬 수 있는 존재다!" 라며 헛소리 지껄이는 인간들은 더 짜증을 나게 합니다.

 

진짜,

이래서 지옥이 괜히 있는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2013년에 WCC가 한국에서 총회를 가지면, 그때부터 한국 교회에도 본격적으로 자유주의 신학 및 종교다원주의적인 경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겠지요.

그때부터가 전쟁인겁니다. 지금은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불과하단거죠.

 

지켜야합니다. 우리의 자식들을요. 다른건 몰라도 자기 자식만큼은 지옥에 가는 일이 없게 해야할거 아닙니까?

가져온 곳 : 
카페 >빛과 흑암의 역사
|
글쓴이 : 空我| 원글보기

스콴토는 인디안 청년의 이름이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년 전 1608년에 헌트라는 함장이 이끄는 영국 무역상들이 이곳에 먼저 도착했다.

그때 그들은 인디안 족을 만나 무역을 거래하는 척하다가 그들을 포로로 잡아 스페인에 노예로 팔아 넘겼다.

그런데 그들 중에 스콴토라는 청년이 끼어 있었다.


그는 스페인의 한 친절한 사제에게 팔려 교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기도하는 것을 배우면서 늘 세 가지를 기도하였는데

첫째는,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 ,

둘째는, 고향에 돌아가면 자기를 잡아간 백인들을 원망하지 않고 백인들과 협력하여

 고향 땅을 스페인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것 ,

셋째는, 자기 평생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했다.


그후 스콴토는 사제의 도움을 받아 진실한 기독교인인 영국의 존 슬랜니(John Slaney)의 집에서 일하게 되고,

슬랜니의 도움으로 고향을 떠난 지 10년 만인 1619년에 미국 자기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하나님께 약속한 그대로 백인을 원망하지 않고, 소수의 인디언들을 이끌고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재건했다.


바로 그 다음 해인 1620년에 청교도들이 그곳에 도착한다.

스콴토는 유창한 영어로 청교도들을 환영하고 청교도들이 그곳에서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당시 청교도들을 인도한 브래포드 목사는 그의 일기에 스콴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준비된 특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는 우리에게 옥수수를 어떻게 심는 것과 낚시를 어떻게 하는 것과 땅을 어떻게 개간하는가를 가르쳤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 우리를 인도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오늘날 미국이 있기까지는 스콴토의 믿음과 감사에서 비롯된 기적이 있었던 것이다.


 

-펌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장차 온 지구상에 임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리라"

(계 3:10)


시험의 때(대환란)를 면하고 들림받는 조건은
× 평안의 말씀이나,
× 평화의 말씀이 아니고,
× 축복의 말씀도 아니라,
○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 인내의 말씀일까?


"신랑이 늦게 와서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마25:5)


인내가 필요한 이유는 신랑이 더디왔기 때문이다.
신랑이 늦게 오는 이유는 정금같은 신부를 가려내기 위함이다.


예측했던 시간에 오시지 않자 일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고,
1년이 지나자 또 떨어져 나갔고 3년이 지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손해본다는 심리 때문일까? 실망감 때문일까?
타이밍에 대한 에러 횟수가 증가할수록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유익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나올 것이다.



신랑이 오는 타이밍을 알 수 없고

그렇다고 기다리지 않고 방심하다가는 신랑을 맞이할 수 없다. 

깨어 준비되지 않은 신자들은 땅에 남게 될 것이다.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 25:10)


여기서 준비한다는 의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촛불신앙을 넘어선 것이다.


대환란이 들이 닦치기 전,

휴거 전초전 기다림의 시간은 신부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신부라면 피할 수 없고 깨어 있어야 하는 숙명의 시간이다.


만약 인내의 시간을 거치지 않는다면, 

대신 대환란을 겪는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인내의 말씀을 지켰던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을 받았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하늘의 문이 열린 이유는 성도들이 들어가기 위함이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나팔소리 같은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휴거가 일어나는 모습이다.


인내의 시간에 신부에게 필요한 덕목은

끝까지 인내하며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필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현대교회에서 말씀을 지키며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신자들이 많을까?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말씀은

"내 말을 듣고 행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듣는 자는 많되 행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주님의 방식을 부끄러워하여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데 급급할 것이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 10:28)


인내의 시간에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앙이다.
온전한 행위는 흰옷을 재료가 된다.


행함이 없는 신자는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둔 게으른 종을 상징한다.


끝까지 충성한 종에게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인내의 시간에도 환란,박해,미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점점 미워하고 적대감의 정서는 증가할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세속화되고 미지근해지고 이탈할 것이다.


인내의 시간에는 

불로 연단한 금같은 순전하고 흠없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인내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는

말씀을 듣고 + 말씀대로 행하고 + 굳게 잡는 것이다.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클럽에 가입한 위장꾼들로

그 날에 공력이 드러나고 불로 태워질 것이다. 

"신랑이 몇시에 오든 상관없이 깨어있는 그들은 복되다" (눅 12:38)


​주인이 혹 이경이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을 것이다.  


로마식 시간계산법에 따르면,

밤은 저녁 6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를 4개의 구간으로 나누었다.


× 1경 : pm 6시 ~ pm 9시
× 2경 : pm 9시 ~ pm 12시
○ 3경 : pm 12시 ~ am 3시
× 4경 : am 3시 ~ am 6시


2경은 잠을 자기 시작할 시간이고,

3경은 대부분 잠이 들었을 시간이다.


그 시간은 신자들이

영적인 잠에 빠져 있을 때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속히 오리라'하신 말씀에서

4경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란 위로를 받기도 한다.


지금은 몇시일까?
신자들이 절반쯤 자고 절반은 깨어 있을까?
아니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잠을 자고 있을까?


교회가 인내의 말씀을 설교하는 비율을 보면

때를 짐작할 수 있을 지 모른다.  ​



출처: 카이로스 / ars (acoloje)

이럴줄 몰랐나요?

혁명하겠다고 광화문에 촛불들고 달려나와서 난리버거지 치는걸 장난으로 봤나요?

지금 강건너 불구경하듯하는그 숙청의 칼날이 머지않아 그 구경꾼들에게도 들이 닥칠것입니다

그렇게 달라붙어 허위선전하고 선동하고  할때 그렇게 피터지게  절규해도  못들은척했잖아요.

촛불은5천명도  5만명. 심지어 50만명으로 부풀려주면서 촛불민주주의 혁명에 힘보태느라  힘썼잖습니까!
광화문광장에  나돌던 체게바라 공산쿠테타를 선동하는 피켓과 현수막과.  청소년이 앞장서서 혁명정부세우겠다며 달려나왔던 10대의 중고등학생들을 보면서도 혁명의 전야라는 것을 몰랐나요?

토지국유화한다고 하니 땅부자들 땅뺏기는것만 좋아서  천지분간을 못하고. 자신의 자유가. 권리가. 인권이 어디까지 짓밟힐지 상상못하셨죠

이제.  당해보세오. 

오늘은. 전직 국정원장들하고. 청와대. 안보실장들이 잡혀가고. 국정원직원들만.

잡혀가지만. 앞으로 언론인들도 머지않아. 줄줄이 잡혀갈겁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제 2의 북한으로. 지옥이. 되겠지요.

그렇게 나라 들어먹고 야만들에게 짓밟혀서 노예가. 되보세요

그때가면.  이승만대통령이. 얼마나 소중한선물을 남겨주셨는지. 좀 깨닫게 될가요?

그때가면. 민주화 투사들이. 한일이. 공산주의 지옥을 불러오는 일뿐이었다는 사실을. 좀 알게 될까요?

하지만. 그때는. 알아도 필요 없습니다.  함이없는데.  그 공산깡패 강도집단을. 무슨수로 몰아냅니까?

이제. 헌법도 바꾸면. 그때에는. 자유니 인권이니  민주니 하는 말자체가. 그야말로 적폐이자. 반동으로 몰려  공기처럼 사라지는 처형을 당하게 될테니까요?

공산악마들의  거짓웃음에 환호하는 미친자들을 보면. 정말. 단세포 아메바같다는. 생각만 듭니다

염통은 썩어가는데. 손톱에 바른 매니큐어 자랑만하는. 촛불민족의. 슬픔입니다.

              11/14일 이애란 박사 페북에서!

 

 

인사 할 때

머리를 조금 더 숙이면

보다 정중해 집니다.

그러나 그걸 아낍니다.


 

도움을 준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하면

 참 좋을 텐데 그걸 아낍니다. 


 실례를 했으면,

죄송합니다. 하면

참 좋을 텐데 그걸 아낍니다. 


 오해를 했으면,

겸손하지 못한 제 잘못 입니다. 하면

좋을 텐데 그걸 아낍니다. 


 칭찬의 말도 아끼고

격려의 말은 더 아낍니다

주어서 손해 볼 것도 아까울 것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아낍니다

이제는 아낌없이 쓰는 하루하루를 살렵니다.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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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4가지 방법!


1.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잘못된 마음의 자세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15:3)

우주는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부르심, 우리의 안수, 우리의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재능, 기술, 심지어 우리의 꿈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분명히 우리의 영광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틀을 깨고, 우리의 삶이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심으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편 115:1)

2.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분의 뜻을 찾으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아닌 그분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세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반적인 뜻을 갖고 계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3. 당신의 역할을 알라.

그렇다면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뜻을 두셨는가? 당신을 부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에 에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의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당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신은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당신은 그분의 말씀을 읽고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있는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있는가?

여기에 한 가지라도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회개하고 순종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 바로 가서 행하라!

만약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면, 염려하지 말라. 이를 계속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4. 기도하라.

너무 당연하게 들리지만, 너무 중요한 것이다. 매일, 매주, 매년, 하나님께 당신의 뜻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라. 조금씩 일들이 연결되고, 문이 열리거나 닫히며, 취해야 할 방향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떠한 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매일 매일의 결정에 대하여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은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려주는 좋은 척도이다. 만약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한 평안이 느껴지지 않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알 수 없다면, 매우 단순하다. 하지 않으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쌓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은 위대한 목자이시다. 그분은 당신을 부르시고, 당신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듣고, 그분을 따르라. 그분에 대해 아는 것보다 그분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출처: 영국 크리스찬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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