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교와 신천지의 한계

지옥이 없다고 하는 결국  안식교는 부활조차 없다고 하는것과 같다.

첫째사망은 육과 영의 분리요.

둘째사망은 변환된 육과 영이 부활한 후 받는 사망인 것이다.

세세토록 밤낮으로 괴로움을 받는것은 영이 아니라 부활된 몸과 영이다.

그럼에도 지옥이 없으며 괴로움이 없다고 하는것은 피조물인 인간 화잇 아줌마의 한계다.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다.

그러므로 신천지는 교회에서 알곡을 추수한다고 한다.

그러나추수는 곳간에 넣는것인데 신천지는 자기들도 교회라고 한다면 신천지도 밭이다.

그럼에도 교회(밭)에서 교회(밭)로 옮기는것은 추수라 하지 않고 모종을 옮긴다고 한다

추수와 모종을 옮겨 심는것도 모르는 것은
역시  피조물인 인간 이만희의 한계이다.

글/백부현

 


예수의 천국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는 겨자 씨로부터,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또 싹-이삭-열매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 즉 성장의 단계가 있고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문제 많은 나라의 모습을 보며, 나라가 확 뒤집어져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이들이 많겠지만, 그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른, 관계가 없는 신비주의적이고 열광적인 모습일 뿐이다.

천국을 바란다면, 지금 당장 겨자씨 한 알부터 심어라.
그리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땀을 흘리고 인내하라.

휙휙 뒤집어서 세상을 다 바뀔 수 있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셨겠나?

옛날에는 우파 정권 때문에 힘들다고 그랬고, 지금은 좌파 정권때문에 힘들다는 이들도 많고, 그래서 확 뒤집어서 바꾸고 싶다고들 하는데, 뒤집어봐야 별 볼 일 없다.
인간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나?

꼭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실존적인 문제에도 이것은 다 동일하게 적용된다.

세상이 바뀌려면, 환경을 바꾸려면, 인간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인간이 안 바뀌면, 세상이 바뀌어도 그 안 바뀐 인간 때문에 세상이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기는 안 바뀌면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지금까지 지옥을 경험해왔다.

그래서 천국 비유의 또 다른 핵심은, 천국은 바로 내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변화되지 않고서, 당신 안에 천국이 없으면서, 입에서 늘 헬이니 지옥이니 달고 다니면서, 세상을 천국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천국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맛도 못 본 사람이, 무슨 천국을 만든다는 말인가?
천국이, 하나님 나라가, 유토피아가 뭔지 알기나 하냐?

참고로 겨자씨는 하나님 말씀을, 진리를 상징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진리대로 살아가면, 하나님 나라를, 천국을 맛볼 수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 뒤집을 생각하지 말고, 말씀으로 자신부터 뒤집어라.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기 전에, 자신의 내면을 먼저 천국으로 만들어라.

 

페친 노승현 씨 페북포스팅 201711101324 ■

 

 

-낙엽-

낙엽이야 지는 거지만
인생은 스러질뿐이란다

영원의 변곡점에서
운명을 달리하는 인생이여

그 청청하던 나뭇잎 가을빛으로
낙하하면 추풍낙엽이어라

겨울은 그대를 반기지도
고마워하지도 않지

쓸어담아 불태울지라도
혼은 연기따라 승천하는 법

나목의 계절이 오기 전에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그대 영원을 준비하라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가을-호수-4 [목양연가(牧羊戀歌)]

'구자준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택이란 무엇인가-  (0) 2017.11.20
-목사는 목사다-  (0) 2017.11.11
밝은 빛과 지옥, 그리고...  (0) 2017.11.10
주이찌 방언을 아시나요?-  (0) 2017.11.06
-일하시는 하나님-  (0) 2017.02.17

-목사는 목사다-

1.목사는 목사(牧師)여야 한다.

목사란 말 그대로 맡긴 양을 치는(牧-칠 목, 혹은 돌볼 목) '양돌보미'이다. 양치기라 하면 격이 낮은 듯 해서 잘 안 쓰는데, 그러면 목자 혹은 목동이라 부르면 격이 맞을까.

예수님 당시에 목자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단순히 약자이기 이전에 비천한 직업이 목자였다. 예루살렘에 분뇨 처리하는 직업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었던 직업군이었다. 오히려 주인의 양새끼를 도둑질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양새끼를 슬쩍한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와 사회적 편견 속에서 목자들은 밤에 잠도 못 자고 양떼를 지켰다. 혹, 양을 잃거나 이리에 찢기기라도 한다면 물어주어야 했기에 가난한 목자들은 온 힘을 다해 양들을 돌봐야 했던, 실로 고달픈 직업이었다.(세리가 소문난 도둑놈이었 듯이 일설에는 목자도 도둑놈 취급받았다고 한다)

목사는 벼슬이 아니다. 사(師)자 붙어서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사실 '놈(者)' 이상이 아니다. 놈이란 단어가 '사람'을 비하해서 부르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할 직업은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는 '들판에 목자처럼' 밤낮 수고해야 하는 직업 아닌 직업이 목사다. 바울이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고 명예를 얻고 돈과 인기와 명성을 얻고 싶다면 목사직을 내려놓는 것이 어떨까. 목사란 그런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다가 죽어야 할 이름이 목사'란 사실을 한국교회가 진즉에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진 않았으리라.

주인이 맡긴 양들을 목숨바쳐(죽도록 충성하며) 잘 섬긴 목자들은 비록 이땅에서는 고난을 겪고 아픔을 당하고 애통의 눈물을 삼킬지라도 훗날, 주님이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품에 안아주시며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 칭찬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목사라 불리워도 좋다고 본다.

1.목사는 목사(目四)라야 한다.

다시 말해 눈이 '네 가지'라야 한다는 말이다.

눈이 멀지 않아야 한다. 눈이 멀면 사물을 잘 구별하지 못 한다. 육신적으로도 건강한 눈을 가져야 한다. 눈이 침침해서 김집사인지 이집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면 교인들이 시험에 든다. 목사는 사역하는 동안에 건강해야 한다.

상식의 눈이 있어야 한다.
이성적 판단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상식이 풍부해야 바른 이성적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상식이 부족한 목사들이 많은 것같아 안타깝다. 세상사람들은 영적인 눈으로 교회와 목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상식의 잣대로 판단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목사를 사회가 인정하겠는가.

사례비도 사는 모습도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억대 연봉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근로자 평균임금 정도로 사례비를 정하고 그것으로 족하게 여겨야 한다.(70-80% 목회자들은 그 것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성경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서야 어찌 말씀의 꼴을 먹일 수 있겠는가. 말씀을 말씀답게 볼 줄 아는 목사가 바르게 목양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해서 지력(知力)을 키워야 한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혜안(智慧의 눈)이 있어야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말씀의 푸른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사가 되려면 말씀의 눈을 부단히 길러야 한다. 그래야 목사다운 목사가 된다.

주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밝고 상식의 눈이 있고 말씀의 눈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목사로서는 말짱 도루묵이다. 주님의 눈으로 양들을 보게 될 때 양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더하여, 목사는 온 양떼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도양(先導羊)으로서 양무리를 주께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자각해야 한다. 또한 마음이 깨끗하여 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바른 목양을 할 수 있다. 주님의 눈으로 양떼를 돌보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주님의 눈빛만 봐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목사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목자일 것이다.

1.목사는 목사(木死)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십자가(十字架)는 형상화 된 글이다.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로서는 의미를 잘 알기에 그대로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경에는 나무기둥(스타우로스)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니키아인들의 사형법을 로마인들이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형장에 세워놓은 나무기둥을 우리는 십자가로 번역해서 쓰고 있다. 가로목을 지고가게 해서 손과 발에 못을 박고 나무기둥에 매단다. 윗 부분에는 죄목을 적은 판대기를 붙인다. 형상이 '열 십자'를 닮았다.

우리 주님이 이 나무기둥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신약을 눈여겨 보면 나무기둥(스타우로스)이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냥 나무(크실론)라 하고 있다. '사도행전', '베드로서'.. 등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셨다는 것을 강조코자 함이다. 율법에,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우리 주님이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단순한 나무기둥이 아니라 실로 생명나무이다. 자신의 피와 살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과일이 과육과 과즙으로 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무에 달려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나무 과일같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주식으로서-밥 혹은 빵)이요, 생명의 음료(생명을 위한 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생명나무 이전에 선악의 지식나무였다. 모든 사람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실과를 먹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다.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그 나무(크실론)에 달리셨다. 자기와 및 자기를 믿는 모든 자가 선악의 지식나무(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무요, 그것을 기록한 말씀이 십자가의 복음 곧 나무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해(향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선악의 지식나무도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 죽었다.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선악의 지식나무'는 없다.

영적으로 보자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죄악된 세상의 중앙, 에굽 혹은 소돔이였다. 세상 중앙에 우뚝 선 그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무를 지신(달리신) 이유요, 의미인 것이다. 그 나무가 생명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역설적 신비다.(바울의 복음도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죽은 자 살리는 생명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일반 신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목사는 특별히 나무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그 죽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아 날마다 죽어야 하는 직분을 맡은 자이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죽었다는 의미로 목사(木死)라 이름해 보는 것이다.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서 목회하는 자가 누군가. 목사도 안 죽는데 누가 누구보고 죽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발 좀 죽자! 주님 죽으신 그 나무에 함께 달려죽은 우리가 아니던가. 그러데 어찌하여 산 냄새 풀풀 풍기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날마다 죽자. 그래야 부활 할 것이 아닌가.


'구자준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택이란 무엇인가-  (0) 2017.11.20
-낙엽-  (0) 2017.11.11
밝은 빛과 지옥, 그리고...  (0) 2017.11.10
주이찌 방언을 아시나요?-  (0) 2017.11.06
-일하시는 하나님-  (0) 2017.02.17

중동의 예멘 국민 700만 명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2016년 기준 전 인구의 4분의1, 국민 네 명중 한 명이 아사 위기에 직면했다는 얘기다. 
 

예멘 내전에, 중동의 맹주 노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개입해
민간 피해 극심, 대부분 어린이

유엔(UN)은 8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에 대한 봉쇄를 풀지 않으면 수백만 명이 아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크 로콕 유엔 인도지원조정국 국장은 “구호물자 수송을 제때 하지 못하면 전 세계는 엄청난 규모의 기근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다. 

 
심각한 식량부족에 더해 최근에는 콜레라까지 덮쳤다. 지난 7일 욜란다 재퀴멧 국제적십자위원회 대변인은 “콜레라 예방약을 실은 배가 사우디의 통제로 예멘에 들어오지 못했다”며 “이러한 조치가 계속될 경우 결과는 재앙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말 그대로 최악의 위기다.
사우디는 왜 예멘으로 가는 모든 길을 막은 것일까.   
  

 

대체 예멘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이슬람
(11.10)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예멘

★미국내 여아 할례 시술
   50만명 이상 추정

★우리나라

테러예방차원
➡️최초로 보안검색 실시
2018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1. 인구 4분의 1이 아사 위기… 사우디와 이란 사이에 낀 비극

예멘 내전에, 중동의 맹주 노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개입해
민간 피해 극심, 대부분 어린이

중앙일보 2017/11/10
http://iii.im/wqCa


2. "예멘 콜레라 감염자 64만7천명…2010년 아이티보다 악화 우려"

중앙일보 2017.09.14
http://iii.im/rcht


3. 사우디·이란, IS 몰락 후 중동 주도권 경쟁

중앙일보 2017.11.08
http://iii.im/jtg2

4. 백악관, 유엔에 '예멘 사태' 이란 관여 여부 조사 촉구

VOA Korea-2017. 11. 8.
http://iii.im/1T6N


5. IS 가담 호주인 사망자 87명··· 거점 상실로 사상자도 증가

시리아·이라크 사망자 대다수는 10대와 20대

연합뉴스 2017/11/10
http://iii.im/3Stg


6. 국립중앙박물관 국내문화기관 최초로 보안검색 실시

테러예방 차원에서 13일부터 시범 운영

내년 1월 2일부터 정식으로 실시해 보안강화를 지속할 계획

아시아경제 2017/11/10
http://iii.im/wvl1


7.  할례, 없애지 않으면....2050년 세계 여아 3분의 1이 위험

미국내에서도 50만명 이상이 할례 시술 추정..
아프리카 중동 등 피해 여성 2억명 추정

위클리오늘-2017. 3. 28.
http://iii.im/pvQO

 

예멘의 아픈 역사
예멘 내전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을 리 없다.  
불운한 역사의 시작은 19세기 중반이었다. 1839년, 오스만 제국 하에 있던 이들 앞에 영국군이 나타난다. 항구 도시 아덴을 노린 이들이 남예멘 지역을 점령하며, 예멘의 북쪽 지역은 오스만 제국이 남쪽 지역은 영국이 다스리게 된다.  
 
그러다 1918년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자 북예멘이 먼저 독립해, 오랜 혼란을 거쳐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한다. 이후 소련의 지원으로 독립한 남예멘에선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게 된다.  
 
분단된 나라는 끊임없는 다툼 끝에 1990년 통일되지만, 4년 후 내전이 발발한다. 북예멘의 주도로 곧 통일되지만 이후로도 남북 갈등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그러던 예멘에도 2011년, 중동 민주화 혁명의 바람이 닿았다. 독재자 알리 압둘라 살레는 물러났다. 사람들은 민주 국가를 꿈꿨지만, 지독한 가난과 제대로 된 리더의 부재로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밝은 빛과 지옥, 그리고...


29년 전, 제가 20대 때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간혹 개인에게나 몇이 있는 자리에서는 간증을 했었지만 공개적으로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자랑거리도 아니요, 내세울 것도 없는 자의 개인적 체험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말하기가 조심스럽더군요. 제 신앙이력을 간략하게 적어봅니다.

 

외조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지만 십 오리 안에는 교회가 없었고 게다가 가족도 아무도 믿지 않아 교회 출석을 못하고 있다가 중학교를 도회지에서 다니면서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었지요.

 

믿음도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군대 가서 세례를 받았지만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조차도 잘 몰랐습니다. 군대란 곳이 세례 실적 쌓기라도 하듯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더군요. 그 틈에 저도 세례를 받은 셈이지요. 그러니 교회 출석을 제대로 했겠습니까?

 

제대하고 서울 올라와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하숙을 마침 믿는 가정에서 하게 됨에 따라 그동안 잘 나가지 않던 교회도 다니게 되었습니다만 간증서적들을 읽으면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보구나'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저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79년 10월20일 경,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흉탄에 쓰러지기 며칠 전이었지요. 새벽기도라고는 고등학교 때 두어 번 나가고 그 뒤로는 한 번도 안 나가던 제가 새벽기도를 다 나갔습니다.

 

교회 정문이 모서리에 있었는데 양쪽 모서리 기둥보다 키가 더 큰 시커먼 두 놈이 서 있더군요. 2미터도 넘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다가가니까 양쪽으로 부리나케 도망을 가는데 정말 바람처럼 사라지더라고요. 발자국 소리도 안 나고...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분별력이 전혀 없는 저로서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작은 전구 하나만 켜놓고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다들 열심히 개인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기도를 했지요.

 

'주님. 저도 성령 주십시오.' 남들이 예수 믿으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무작정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남들이 들을 새라 목소리도 작게 '주님 저도 성령 주십시오.'라고 딱 한 번 기도했는데 그만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빛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비춰오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온통 빛 천지였습니다. 저도 없고 다른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빛만 보였습니다. 빛이 어찌나 밝은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햇빛보다 만 배나 밝다고 해야 하나....거기다가 그지없이 투명했습니다.

 

빛을 보는 순간 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엄위 롭고 강렬하고 두려운지 지금도 필설로는 형언키 어렵습니다. 두려우면서도 경외감이 넘쳐흘렀습니다.(정확히 2초를 넘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장이 멎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순간 그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이상했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더군요. 그 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집 세고 더디 믿는 제게 그런 체험을 하게 하신 주님의 심정을 세월이 지나서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저 같은 놈한테는 그런 강렬한 체험이 있어야 했기에 그러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 햇수가 좀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중에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몇 마디 나오고는 그쳤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집에서 기도를 하는데 방언이 터졌습니다. 저는 그 당시 방언받기 위해 별로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방언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던 교회였습니다.

 

하숙집 집사님이 방언 받은 걸 축하해 주더군요. 그래서 열심히 방언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개인기도 시간에만....첨에는 유창한 방언이 아니고 마치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하듯이 말을 익혀가는 듯이 서툴게 나오더군요. 한마디가 두마디가 되고 세마디가 되고...그러면서 점차 방언이 익숙하게 나오더라구요.(제법 문장을 이루어 말하듯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도 또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목구멍에서 향기가 올라왔습니다. 달콤하기 그지없고 무척 향기로웠습니다. 세상에서 그런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목에서 입으로 코로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한 열흘간 간헐적으로 향기가 나더니 그치더군요.

 

그러다 80년 1월 5일경, 밤 12시 30분까지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다가 잠이 쏟아져서 잠시 기도하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꼭 자다가 오늘 밤 죽을 것만 같더군요. '이상하네 아직 30도 안 된 나이이고 아주 건강한 내가 자다가 죽는다는 마음이 왜 자꾸 들까?'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전혀 두렵지가 않더군요. 이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였고 나름대로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회개도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전혀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자다가 죽을 것만 같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잠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말입니다.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자다가 꼭 죽을 것만 같습니다. 죽으면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그러자 죽는다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편이 잠이 들더군요. 아~~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옥이 보이더군요. 첨엔 그것이 지옥인지 몰랐습니다. 맨 앞쪽에 있는 것들이 머리가 있고 몸통과 팔 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은 실로 무시무시했습니다. 온통 시커멓고 붉은 불꽃만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내 쪽을 바라보면서 풀쩍풀쩍 뛰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뜨거워 견딜 수 없어 한없이 고통스러워하면서 온 사지를 흔들며 풀쩍 풀쩍 뛰고 있더군요. 마치 고고 장에서 많은 사람이 빽빽이 들어차서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서 광란의 춤을 추듯이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불꽃 가운데서 고통 하는 자들의 숫자였습니다. 멀리 뒤쪽을 보니까 마치 사람들의 머리가 바닷가 모래알처럼 보였습니다. 끝이 안 보였습니다. 지평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좌우가 안 보였습니다. 너무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새까맣게 탄 모습으로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며 (소리는 안 들렸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뛰고 있었습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의 수가 수억 수십억도 더 되는 것 같았습니다. 지옥에 대한 간증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고 성경을 통해 지옥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지옥이 그런 곳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지옥은, 어둠과 붉은 불꽃과 시커멓게 탄 영혼들의 절규하는 모습, 그 세 가지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래알 같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 머리 위로 시뻘건 불꽃이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좀 특이한 것은 지옥에 있는 자들과 저 사이에 빈 공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그 공간을 전혀 침범치 못하고 마치 일렬횡대로 선 것같이 끝없이 좌우로 펼쳐져 보이더군요. 뒤로도 끝이 없이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었고....수많은 영혼들이 한결같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생생히 목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 마침 어떤 젊은 여자(30대 초중반)가 지옥으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저로서는 그 여자가 거기 빠지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팔을 붙들고 얼른 내 뒤로 제쳤습니다.

 

그 뒤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아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 지옥에 갈 것이 아닌가!'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잠이 든 시각이 대략 12시 35분 경 이었는데....그 5분 사이에 엄청난 일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깨어나서도 그것이 생시 같았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그 충격이 장장 6개월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시도 때도 없이 그 광경이 선명히 눈앞에 펼쳐지곤 했습니다. (표현의 한계로 이 정도로 글로 적지만 저는 체험 당시 쇼크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 후 심장병이 생겨 십 수 년을 고생했습니다. 지금은 건강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기까지 주님은 불같은 시련의 용광로에서 저를 연단하시더군요)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 안 믿으면 불 못에 간다'는 사실을...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불쌍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면 좀 과장된 표현이고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뒤 한 보름 지났을 때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향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예사로 생각하고 있는데 또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 마음이 쓸데없는 생각이라 여겨 무시했습니다.


세 번째 그 마음이 들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열흘 남짓이면 구정(당시는 설을 구정이라 했다)에 고향에 갈 터인데 지금 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까...길이 천리인데...차비도 꽤 들고...그러나 마음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3일 휴가계를 내었더니 물어보지도 않고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고향에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을 전도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기에 큰 아버지를 전도했습니다. 워낙 완고하신 분이라 목침에 맞을 각오로 마음을 굳게 먹고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도 선물하고 '예수님 영접기도문도 적어드렸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한 열흘 뒤 구정(설)에 다시 고향집을 찾았습니다. 아! 놀랍게도 가족이 다 교회 나갔다고 하더군요. 생긴 지 몇 해 안 되는 아랫마을 장로교에 출석한다고 하더군요. 더 놀라운 것은 큰 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적어드린 예수님 영접기도문을 읽는데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가 보니까 '아 이것이 내가 살 길이구나'하면서 믿어지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문턱에는 가 본 일도 없는 그 분(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좀 부정적인 면으로 유명한 분이었음)이 돌아오는 주일, 의관정제 하고 즉시로 교회에 나갔으니 온 동네와 아랫마을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두어 번 나가시다가 주변 시선이 좀 뭐해서 그랬던지 수 십리 밖에 있는 교회에 버스타고 다니셨다고 하더군요,

 

설 쇠고 삼월달이 되었을 적에 그만 큰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전보를 받고 울고 있는 제게 성령님은 감동을 주시더라구요. '너희 큰아버지는 구원 받았느니라 그러니 슬퍼하지 말아라'는 마음이 강하게 들더군요..

 

저도 신앙이 어리고 잘 모르던 초 신자라 장례식에 가서 동생들한테 임종 때의 상황을 물어보니까 임종하시기 두 시간 전까지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치다가 임종 두 시간 전에 '내가 두 시간 뒤에는 잘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평온을 되찾고 편안히 숨을 쉬다가 두 시간 후에 잠을 자듯이 고요히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 어떤 죄인도 구원하는 능력이 있구나'

 

그 이후로도 하나님은 예수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 갚을 길 없고 멸망으로 치닫는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지를 12만장 정도 자비로 찍었습니다. A4 양면에 빼곡히 아주 구체적으로 복음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 영접기도문도 적었습니다. 인쇄된 전도지를 붙들고 눈물로 적셨습니다. 땀으로 전도지를 범벅을 했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전도지로 복음을 전하오니 부디 이 전도지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소서'

 

'저 영혼들을 제게 붙이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소서' 울부짖으며 정말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루에 많게는 1500장, 적게는 300장 정도 돌렸습니다. 첨엔 좀 부끄러운 마음도 없잖아 있었으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했습니다.

 

담대히 외쳤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 주로 지하철 안에서, 주로 2호선 1호선에서....그리고 영등포역에서 많이 전했습니다. 서울역 청량리역 강남터미널에서도 전했습니다. 경부선 호남선 경춘선 등등을 통해 전도지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주머니에 넣거나 가방에 넣는 모습을 수없이 봤거든요. 제가 직접 돌린 전도지가 아마도 10만장 가까이 될 것입니다. 옆에서(같은 직장 믿는 직원) 조금 거들어 준 것까지 합하면....'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란 말은 얼추 20만 번 정도 했습니다.

 

1500장정도 전도지를 돌릴 때는 입이 굳어져서 말이 안 나왔습니다. '예수..."하고는 전도지를 돌렸습니다. 전도지 준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세 명에 한 명꼴로 받으니 20만 번 정도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 라는 말을 한 셈이지요.

 

놀라운 것은 그 전도지가 땅바닥에 버려지는 것이 백장에 한두 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버리지 말고 집에 가지고 가서 가족들도 읽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주님이 그것까지 세밀히 응답하시더군요.

 

그리고 전도지를 읽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은 애를 업고서 음료수를 사다가 주시면서 고생하신다고 격려할 때 참 힘이 났습니다.(그런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욕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빗자루로 맞기도 했습니다. 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 죄인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면 지금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구원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복음 전함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고 치부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신 지상명령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이 구령의 열정과 복음전함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전도하는 제게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 같은 응답을 여러 번 주셨습니다. 다음 기회에 간증하겠습니다.

 


글: 열린문 교회 구자준 목사

'구자준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엽-  (0) 2017.11.11
-목사는 목사다-  (0) 2017.11.11
주이찌 방언을 아시나요?-  (0) 2017.11.06
-일하시는 하나님-  (0) 2017.02.17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하나님-  (0) 2017.02.09

하나님의 섭리(2)-존 플라벨-

섭리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룬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도가 직면한 상황에 보편적이고, 효율적이며, 유익하고, 고무적인 영향을 미친다.

먼저 본문은 성도가 직면한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섭리의 보편성을 암시한다. 섭리는 한두 가지 상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아우른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과 관련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신다. 중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까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처리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까운 일이나 먼 일을 막론하고, 성도와 관련된 일이면 무엇 하나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본문은 섭리의 효율성을 암시한다. 섭리는 성도가 직면한 상황을 다룰 뿐 아니라 완전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사역을 시작하시면 계획에 따라 완벽하게 행하신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섭리를 가로막을 수 없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 섭리의 진행 과정이 방해를 받는 상황은 절대로 없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아울러 모든 섭리의 결과는 성도를 이롭게 한다. 섭리는 성도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룬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섭리를 섣불리 판단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곤경과 시련에 처할 때면 우리는 흔히 “모든 상황이 내게 불리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성도의 진정한 유익과 행복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섭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말씀을 이룰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주님의 작정과 약속에 위배되는 상황을 연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은 오로지 성도의 행복을 지향한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이라는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위기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많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마음에 소망과 용기를 주어 큰 시련 앞에서도 기도할 수 있게 만든다.

다윗은 죽음이 목전에 이른 상황이었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도무지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기쁨을 잃지 않았다. 분노에 사로잡힌 무자비한 권력자가 다윗을 바위 동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까지 바짝 쫓아왔다. 다윗은 언제 동굴에서 끌려나와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굶주린 사자들에게 둘러싸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자기를 도와주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떠올리며 용기와 희망을 얻었고, 주님을 향해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로다.”라고 간절히 도움을 호소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항상 묵상하라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특히 시련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이다.”

교회는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셨사오니”라는 말씀대로(사 26:12), 하나님의 긍휼이 풍성하신 섭리의 손길에 의해 인도된다. 경건한 성도는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기억을 늘 귀한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성도의 영원한 안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체험한 경험을 꼭 책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기록해야 한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만 해도 은혜로울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고 경험하면 얼마나 은혜롭겠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기도의 힘으로 아말렉을 물리친 사건을 책에 기록했을 뿐 아니라, 희생단을 쌓고 그곳을 “여호와닛시”(하나님은 나의 깃발)라고 칭했다(출 17:14-15).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각 세대, 각 가족, 각 지방, 각 도시에서 이 두 날을 기억하여 지키고 또 부림의 이 날들을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치지 아니하게 하며 이 날들을 기념하는 일이 자기들의 씨에게서도 없어지지 아니하게 하였더라.”라는 말씀처럼 부림의 날을 제정해 하만의 계략에서 구원을 얻은 사건을 영구히 기념했다(에 9:28).

편에서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지은 시’라는 표제가 달린 시가 발견된다(시편 70편). 또한 자녀에게 지어준 이름을 통해서 자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던 사실을 떠올렸던 부모도 있고(삼상 1:20),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났던 장소에 새 이름을 붙여 그곳에서 경험한 은혜와 구원을 영원히 기념하게 했던 예도 있다. ‘벧엘’ 바로 대표적인 경우이다(창 28:19). 곤경에 처한 하갈도 광야의 샘 곁에서 천사를 만나 도움을 얻고, 그곳을 “브엘라해로이”(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샘)라고 일컬었다(창 16:14).

뿐만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그분의 성호를 새롭게 일컫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라는 호칭을, 기드온은 “여호와살롬”이라는 호칭을 각각 사용했다(창 22:14)(삿 6:24). 하나님께서는 이따금 자신을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오신 하나님”, 혹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신 주 하나님” 혹은 “북쪽 나라에서 그들을 데려오신 하나님”으로 일컬으시는데(느 9:7)(렘 31:18), 이 역시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행하신 은혜로운 섭리를 상기시켜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은 온전하고 완전한 이해이다. 이는 섭리 사역 전체와 세부를 모두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해는 완전한 상태에서나 가능하다. 장차 하나님의 산에 이르면 광야와 가나안(즉,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광스러운 왕국)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종착지에 이르게 된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도는 섭리 사역의 전체와 세부를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린다. 그때가 되면 개개의 섭리 사역이 왜 필요했고, 또 서로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었는지는 물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구원 계획이 효율적이고 질서 있게 이루어진 과정을 낱낱이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배가 나침반으로 올바른 항로를 유지하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약속을 이정표와 북극성으로 삼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나간다. 하우(John Howe, 1630-1706)는 [의인의 축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차 영원한 기록이 공개되고, 우리가 궁구했던 심오한 지혜의 은밀한 계획과 사역의 결과가 밝히 드러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아마도 ‘저것 좀 봐, 저런 계획이 있었다니! 그토록 복잡하고 당황스러웠던 일들이 저렇게 절묘하게 연관을 맺고 서로 의존하고 있었을 줄이야!’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이해이다.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는 동안에는 한 가지 행동이나 혹은 관찰이 가능한 일련의 행동과 몇 가지 상황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릴 수 밖에 없다.

이 두 이해의 차이는 톱니바퀴가 서로 어긋나고 시침과 분침이 제멋대로 떨어져나간 시계와 각각의 부품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질서 있게 작동하고 있는 시계의 차이와 같다. 혹은 절개된 인체의 핏줄 몇 가닥과 관절을 바라보는 무지한 구경꾼과 정맥과 동맥이 흐르는 길을 정확히 알고, 전체 속에서 세부를 바라보며 각 기관의 올바른 위치와 형태와 용도는 물론 그 상호 관계를 꿰뚫고 있는 전문 해부학자 사이의 차이와 같다.

세상에서 알 수 없었지만 장차 섭리의 전 과정을 한눈에 바라보며 개개의 상황이 서로 적절히 관련을 맺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기쁘고 황홀할 것인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3:7).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당시의 특별한 상황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섭리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고 당혹스러운 섭리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분노를 느끼곤 한다. 그럴 때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행복을 짓밟으려는 줄 알고 비통해하며 쓸데없는 불평불만을 쏟아 놓는다. 하지만 험난한 광야 길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사 그들이 거주할 도시에 이르게”하는 통로가 되었듯이(시 107:7), 우리도 장래에는 모든 섭리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와 비교한다면, 현재 섭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시야는 매우 불완전하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벧엘을 “하늘의 문”이라고 일컬었던 것처럼(창 28:17), 현세의 섭리 역시 ‘작은 하늘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놀랍고 은혜롭기만 하다.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의식을 통해서는 물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도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한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이루어낸 뜻밖의 결과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곤 한다.

또한 과거에 겪었던 사건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다면, 나는 설령 죽진 않았더라도 큰 고통을 받았을 거야.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면 난 어떤 피해를 얼마나 많이 당했을지 몰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대로 내버려두어 멸망하게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도로 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린다.

- 하나님의 섭리에서 -

 http://thevine21.hompee.com/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오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유행하는 경건(영성) 훈련들이 대개 하나님의 임재를 표방하고 있으며, 임재의 방편에 관상,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예수 기도(Jesus Prayer) 등이 단골 메뉴로 올려집니다.




기독교 서점가의 스테디 셀러 목록에는 하나님 임재를 주제로 한,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1611-1691)의 '하나님의 임재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프랑스의 경건주의자 '마담 귀용(Madame Guyon, 1648-1717)'의 서적 등이 랭크되고 있음은, 그만큼 임재가 기독교인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
  

임재 자체나 임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존자이시기에 그가 현현하는 곳에 신자가 임재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문제는 그것의 왜곡과 남용 때문입니다. 임재란 정확히 말하면 임재 의식(consciousness of presence)이며, 말 그대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의식하며 경험하는 것입니다.


임재의 기원은 무죄했던 에덴이며, 아담과 하와에게는 임재가 일상적인 것이었고, 그들의 만족의 근원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이를 성경은 모든 성도들의 금생과 내생의 지복으로 칭송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임재가 거두어졌습니다. 범죄 후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죄인에게는 임재가 불허된다는 하나의 징표였습니다(창 3:23).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양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을 통해(창 3:21) 임재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적인 인물들로는 3백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등이 거론됩니다.


    

교회사에서는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로이드 존스(M. Lloyd Jones, 1899-1981) 같은 이들은 탁월한 임재의 경험들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재는 이 분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허락된 보편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임재가 특별한 일인 것처럼 되고,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들이 동원되는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닙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는 이런 비정상의 편린들로 넘쳐납니다.


영지주의, 화체설, 성자의 유물 숭배, 경건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오늘날 에큐메니칼적 영성훈련은 왜곡된 임재 추구의 산물들입니다. 단언컨대 이런 인위적인 수단들로 하나님의 임재를 이끌어낼 순 없습니다.


하나님 임재의 성경적 근거는, 속죄소 위의 하나님 현현입니다(출 25:21). 피가 뿌려진 속죄소는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겠다고 약속한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어디든 안 계신데가 없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심에도, 죄가 세상에 유입된 후에는 오직 그 곳 속죄소에만 임재하셨습니다.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1-22)." 피가 뿌려진 속죄소는 장차 세상에 오셔서 피흘리실 그리스도를 상징했습니다. 또한 이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머무실 유일한 성전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을 예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라는 찬송가 가사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임마누엘의 피'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임마누엘이심을 진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임마누엘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 있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살아계신 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처소가 되어 모든 삼위께서 그들 안에 거주하시고 동행하십니다(조지 휫필드,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작 전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요단강 수세(受洗)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이 그의 위에 임하신 것은, 그의 죽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을 예표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직접 자신의 피뿌림을 받은 자에게만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피뿌림이 하나님 임재의 조건이 됨은, 이방의 미신 종교에서처럼 피에 무슨 영험이 있어서거나, 하나님을 호츨하는 영매 역할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임재의 장애물인 죄를 없이해 준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없이한다는 것은 시종일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히 9:14)'.


그리고 임재를 불러오는 그리스도의 피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뿌려집니다. 2천 년 전 그리스도께서 택자를 위해 흘려 놓으신 속죄의 피가 믿음을 통해 현재적으로 그들에게 뿌려집니다. 모세가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율법을 선포한 후, 송아지의 피를 율법책과 백성들에게 뿌린 것은(히 9:19-21), 언약을 어기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과 아울러, 언약을 어겨 죽을 죄인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아 구속받을 것을 예표했습니다.


이해를 돕는 말씀이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여기서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임재(화목)을 불러 온다'는 뜻이고, '믿음'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피, 임재(화목), 믿음'의 긴밀성으로 인해 '하나님이 믿음에 임재한다(엡 3:17)'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에 임재한다(출 25:21)'가  성경에서 상호 교호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신칭의를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오는 유일한 통로로 주장하는 이유도,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혀 의롭다함을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율법적(행위적) 의(義)가 임재를 불러올 수 없음은, 그것이 임재를 불러올 만큼 완전한 의(義)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적(행위적) 의(義)는 의로우신 그리스도만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의를 소유하는 길은, 그가 이룬 율법의 의를 믿음으로 덧입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율법적 완전을 덧입어 된 의(義)를, '믿음으로 된 의(롬 4:11)',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빌 3:9)'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반면 자기의 율법적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정죄를 이룰 뿐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종말 때까지 칭의가 유보된다고 주장하는 칭의유보자들에게는 종말때까지 하나님의 임재가 유보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타 반(反) 이신칭의론자들 역시 자신들이 추구하는 임재 형태에 따라 나름대로의 임재 수단들을 고안합니다.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을 가진 교인들은 타종교의 수행방법들을 차용해 임재를 실현하려 하고, 자유주의 신자들은 직관이난 신비를 통해 임재를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철학적 종교인들은 명상(meditation)을 통해 임재를 꿈꾸고, 뉴 에이지(New Age)에 세뇌된 교인들은 음악 문학 예술 같은 문화를 통해 임재를 끌어내려고 합니다.


이들이 외면적으로는 매우 아카데믹하고 컬츄럴(cultural)해 보이나, 무당이 접신을 위해 강신술을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저급하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당과 주술사만큼이나 악합니다. 이는 그들이 명분상으로는 하나님임재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실제 만나고 경험하는 것은 자아 우상(ego-god) 아니면 잡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끌어내려고 인위적인 수단들을 고안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믿음을 좌시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것은 고답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구약 시대는 짐승의 피에 임재가 이루어졌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믿음으로 임재를 이끌어냈다면,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21세기 종교다원주의 시대에는 다양한 임재 방식이 동원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한 임재' 방식은 태초부터 세워진 불변의 경륜이고, 시대를 초월한 원리입니다. 이 외에 다른 방안은 없습니다.

임재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죄의 장벽이 하나님의 임재를 막았으니, 피뿌림으로 죄의 장벽을 없이해 임재를 복구시키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외에 다른 임재 방식은 없습니다. 만일 누가 인위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임재를 경험했더라도, 그것은 필시 하나님이 아닌 악령의 임재입니다.


루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만나지 않은 하나님을 악령이라고 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것이라고 한 것(갈 3:2) 역시, 성령의 임재는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의 피뿌림을 받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임재의식이 따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또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임재에 만족하여 별도의 임재를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여기저길 기웃거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오직 의의 복음에 있음을 알았기에, 오직 복음만을 구하고 복음만을 듣고 싶어 할 뿐입니다. 루터에게 천국이 열려지는 경험을 갖다 준 로마서 1장 17절, 시편 22편의 체험 역시 이신칭의의 복음이 갖다 준 임재의 경험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순간, 하나님과 루터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천국도 함께 열려졌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3069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인데, 조금 의학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4-35)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남녀가 서로 육체의 관계를 맺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시는 과정은 좀 달라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이에 태어난 아기는 육과 육의 결합이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아기는 영과 육의 결합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약혼한 사이인 요셉과의 육체적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잉태를 하게 된 것은 육적인 눈으로 볼 땐 기이한 일이지만, 영적인 시야에서 바라보면 전혀 이상한 논리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의 원죄로 더럽혀진 인간의 육체 속에 거하시기 위한 전제조건은 아담의 원죄가 되물림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원죄를 되물림받은 남녀와의 관계 속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죄인된 마리아의 피가 태중의 아이에게 전수되어 마리아가 품고 있는 뿌리깊은 죄성이 아기 예수께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산모와 태중의 아기는 피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기는 철저히 독립적인 피를 가지고 있으며 산모와 피가 섞이지 않기 때문에 혈액형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피를 공유한다면 엄마의 혈액형이 아기의 혈액형과 똑같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되물림받은 원죄와 인간의 죄성을 피하여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신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3)

예수님은 참으로 연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다고 한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 예수님은 잘 생기지도 않으셨고, 체격이 좋지도 않은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보기에 매력을 느낄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약점을 동일시할 수 있으십니다.

그분은 또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가난을 많이 겪으셨으며,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람으로써 겪을 수 있는 모든 아픔들을 다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며, 단지 이해하고 공감할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모든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전부 다 끌어안고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연약함 중에 가장 속수무책인 것은, 바로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죽음 앞에서는 어떤 육체도 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죽음을 예외없이 모든 육체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2000년 전 이 죄와 사망권세를 철저히 깨뜨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와 사망권세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가 주어지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의 권세를 덧입은 자만이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적용>
누가복음 묵상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시야와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만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모든 일, 관계, 사역 속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죄로 물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마리아의 몸을 빌어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겸손하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잘 생기고 좋은 체격에 매력넘치는 사람의 모습도 아닌,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모습으로 오신 주님... 

십자가라는 비참한 운명으로 끝나는 인생이셨음에도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셨던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진정 제 영혼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성육신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아낌없이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웃 블로그: 글/곰팅이 

주이찌 방언을 아시나요?


처음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이나 일본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일어방언인 줄 아실 겁니다.

때는 1979년 11월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입에서 "주이찌 주이찌..." 하고 계속 터져나왔습니다. 아! 저절로 해석이 되더군요. 짧은 일본어 실력(이찌 니 산 시 고 로꾸... 일 이 삼 사 오... )으로 대충 해석을 해보니까, 아! 십일조로구나! 하고서 나름대로 단정을 해버렸지요.

잘못된 성경해석이 끼치는 영향이 평생을 가듯이, 엉터리 예언이나 방언통역의 폐해도 오래갑니다. 제가 '주이찌'를 붙들고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었던지...

세월이 한참 지나고서야 자의적 방언통역이(성령의 은사로서 통변은사 없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을 낳는가를 알았습니다.

'주이찌'가 십일조 많이 하라는 뜻인 줄 알고 무리하게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더랬습니다. 신학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사업해서 물질로 봉사하는 게 더 좋겠다 싶어서요.

한 마디 방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그 결과가 이렇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멋대로 해석한다면 당사자만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은사(방언)에 관한 성경구절을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하지 않고, 교리적 신학적인 이해의 빛 아래서 해석하여 그 것이 마치 성령의 인침을 받은 진리인양 객관화시켜 믿는 이들을 호도하는 행위는 크게 책망받을 일입니다.

'주이찌'란,
'제일'이란 뜻입니다. 첫 째란 말이지요.
열 번이나 넘게 반복하더군요.
하나님 제일!
예수님 제일!
성령님 제일!
말씀 제일!
기도 제일!
믿음 제일!
소망 제일!
사랑 제일!
순종 제일!
충성 제일!
......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제일 먼저 구하라는 귀한 방언을 일본어로 주셨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그 의미를 알게 해주시더군요. (더디 깨닫는 이 놈이 문제로고!)


설교준비가 부족할 때 잠시 방언으로 기도하고 설교하면 설교하는 제가 은혜를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방언의 유익은 이루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세월 수없이 많은 날들을 방언기도로 저축(?)해놓은 그 위력은 실로 대단하더군요.

위에 열거한 대로 은사를 사용하신다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

글: 구자준 목사

'구자준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사는 목사다-  (0) 2017.11.11
밝은 빛과 지옥, 그리고...  (0) 2017.11.10
-일하시는 하나님-  (0) 2017.02.17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하나님-  (0) 2017.02.09
-평안을 빌라-  (0) 2017.02.07

 

 

 

국가원로회 시국선언문

눈이 침침해서인가?
나라를 지켜야 할 용감한 군인들은 어디로 갔음인고 보이지 않고 촛불만 타올라 횃불이 되고 있구나!

귀가 어두워서인가?
대한민국 애국가는 들리지 아니하고
아, 님을 위한 행진곡이 거리를 휘감아 귀청을 뚫으니 제발 환청이거라!

이제 걷기도 힘에 부치는구나!
그래도 나를 삼팔선에 보내다오. 진흙탕 구덩이 참호속에서 적군을 끌어 안고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도록말이다!

자유대한민국 국가원로회는 철저히 좌경화된 조국의 앞날을 통탄하며 지금껏 혈맹의 우의를 간직하고 자유대한민국을 감싸 안아 세계속에 우뚝 솟게 한 미합중국에 감사함과 아울러 트럼프대통령의 방한을 적극 환영하면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함이라!

하나, 우리 원로들은 첨예한 남과 북의 현 시국에서 한미동맹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저지선임을 선언하노라!

하나, 전작권을 환수하고 미군을 철수시켜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가?국민들은 불안하다.문재인은 답하라!아니면 내려오라!

하나, 북한특수군이. 5.18에 개입했다는 실체적 진실은 무엇이며, 누가 유공자이고, 그 처우는 어떠한지 낱낱이 밝히어 희생된 민.군과 유가족의 진정한 명예를 지켜주도록 하라!

하나,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 지정하고 한반도에 전술핵을 배치하라!

하나, 5천 년만에 이룬 세계적 자유와 부의 금자탑을 누구의 손으로도 허물지 말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남겨주도록 하자!

존경하는 애국시민여러분,

살만큼 살아오면서 6.25를 직접 겪은 우리 원로들은 전쟁이 터지면 늙은 몸뚱아리라도 총알받이가 되어 최전선 참호속에서 조국을 위해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지켜온 금수강산인데 이대로 저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국가방위에 가장 힘이 될 한미동맹은 너무나 소중하며, 금번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역사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남길것입니다. 우리 모두 은혜를 갚는다는 한마음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합시다.

                                     2017. 11. 05
                                   
                                         국가원로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