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에 의해, 주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 혼동하기 쉬운 개념이 또 하나 있다.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돈이나 권력, 공로,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오직 주님만이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몇 년 전, 신장결석으로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신장결석을 앓아 본 사람이라면 재앙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은 성탄절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보니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교회의 예배 실황이 중계되고 있었다. 설교자가 누가복음에 기록된 성탄절 본문을 읽고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본문이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느낌이 달랐다.

그 본문을 듣는 순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지금 나는 구세주가 필요해." 영혼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신장 결석의 고통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하나님이 신장결석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물론 실제로 나를 신장결석의 고통에서 구해준 것은 의사들이었다. 그러나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정해 주신 구세주뿐이다. 궁극적인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바로 구원이 주님에게 오는 것일 뿐 아니라, 그분의 진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신장결석, 허리케인,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죽은 뒤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심판의 날에 구세주를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이다. 산을 가리켜 "내 위에 무너져 나를 덮어다오. 나를 가려다오" 하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앞에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주신다. 예수 그리스의 의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며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노아가 살던 시대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온 세상이 홍수에 잠기고 말았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는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의 날은 빛이 없는 어둠의 날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어둠이 없는 빛의 날이다.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이 질문은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쏟아져 내릴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에 재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노를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다.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단언컨대, 이 큰 구원을 등한시한다면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R.C. 스프로울의 '구원' 중에서(28-31p) / 출처: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려면 반드시 "무엇이로부터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장래의 노하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자들에 따라 서기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믿기도 하고,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장차 다가올 진노를 모면하는 것이다. 장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마지막 심판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예수님을 전한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의미 있고, 그 때문에 삶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친다면 당신이나 잘 믿으세요. 나는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이런 말이 과연 옳을까? 마치 집에 불이 나지 않았는데 왜 소방수가 필요하냐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심판의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구세주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라는 논리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장차 심판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마지막 심판을 믿는다면, 아마도 복음전도의 열정이 지금보다 세 배는 강렬해질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참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을 예언한다. 반면, 거짓 선지자는 거짓 평화를 외친다. 이것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다.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거짓 선지자는 주의 날은 기쁨과 빛과 영광이 가득한 날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말로 백성의 비위를 맞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은 심판의 날에 결코 행복한 운명을 맞이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미가, 아모스 등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가 한결같이 전한 메시지였다. 아모스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 5:18-20).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복한 날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재앙의 날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날은 스바냐의 예언대로 환난과 고통의 날이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그날이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날은 환난과 고통, 황폐화 패망, 구름과 흑암의 날이다. 스바냐는 주의 날이 오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 1:18)고 예언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구세주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했다(살전 1:10 참조). 예수님은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시다.


R.C. 스프로울의 '구원' 중에서(25-28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구원의 시제]

지금까지 "구원"이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구원하다"라는 표현 역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는 영어보다 동사의 시제가 다양한데 "구원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도 신약성경에서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시제로 사용되었다. 성경은 우리가 "창세전에" 구원되었다고 가르친다(엡 1:4). 이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과거인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지혜로 우리가 영원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예수께서 임금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말하는 때가 올 거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었다"라는 과거 미완료시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일련의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통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소명,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준비되고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리고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는다"라는 현재시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지금 우리는 구원받은 상태이며, 예수님 안에서 안전하다.

또한 성경은 "구원하다"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다"라는 현재 미완료시제로도 사용한다. 구원이란 단순히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을 갖는 순간부터 구원은 시작된다.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다. 성화의 과정도 구원의 과정으로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미래시제로 사용한다. 우리는 구원받는 중이며, 장차 온전히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마지막 단계이자 완성이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다양한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조금 혼동을 겪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성경이 "구원"이라는 용어를 다양한 의미와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R.C. 스프로울의 '구원' 중에서(22-24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사랑의 영의 절대적인 필요성

사랑의 영은 변함없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누구도 마음속에 하나님의 선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삶 가운데 사랑의 영이 가득할 때 비로소 선하신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통할 수 있다. 사랑의 영은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잘못과 허상, 불순과 부패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선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정결하고 거룩해짐으로써 하나님을 만나고 거룩한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오직 선을 바라시는 분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하나님과 함께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하나 되어 일하실 수 없다. 이것이 사랑의 영이 필요한 절대적인 이유이다. 그 어떤 것도 사랑의 영을 대신하고 만족시킬 수 없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갖가지 거룩한 계획과 경건한 신앙의 모습은 무의미하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모든 예배와 신앙의 완전한 속성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과 함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일할 때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며 경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과 뜻 안에서만 기뻐하실 수 있는 분이다. 따라서 선은 오직 그 안에 있으며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뜻과 영을 좇는 사람은 누구든지 선을 바라는 마음을 저버린다. 그 결과 마음속에 하나님의 빛과 성령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다. 그래서 사랑의 영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하거나 거룩함을 거스르며 행동하실 수 없는 분이다. 또한 모든 피조물을 예외 없이 사랑하신다. 그러나 먼저 사랑의 영과 선이 살아 역사하며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으로 천사와 인간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바로 그 영이 나타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기꺼이 일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선을 바라며 살아가는 삶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인간이 믿음을 단념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본성에 맞선 반역이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이 정결하며 온전하지 않다면 그 영혼에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사랑의 영 안에서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정결하고 온전해질 수 없다.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결하며 온전하고 모든 피조물을 위한 축복이다. 사랑 가운데 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인간의 본성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부도덕, 고통, 무질서를 바라보라. 이것은 본질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이기주의와 아집으로 바꿔놓은 인간의 마음일 뿐이다. 오직 사랑이 그 모든 죄악을 치유할 수 있다. 순수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거룩한 영 가운데 자유롭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분노, 시기, 욕심, 교만이라는 이름으로 악에 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각각의 개념을 구분하며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더 쉽게 악의 본성과 능력, 마음속의 온갖 만행을 인식할 수 있다. 이들은 어떻게 부르고 얼마나 정확히 구분하느냐는 상관없다. 모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위선적인 서기관, 바리새인, 유대인들의 행동은 같았다. 모두 똑같이 행동하면서 표면적인 이름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즉 악행은 하나같이 동일한 일을 행한다.

교만, 분노, 욕심, 시기는 하나님의 진정한 그리스도를 죽이고 못 박았던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들이 가진 능력과 본질이 진정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수백 년 전, 대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 한 번 못 박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 교만, 시기, 욕심을 부리려 할 때마다 거룩한 임마누엘이며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또다시 못 박는 것이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8). 이처럼 인간의 마음속에는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를 거스르고 거룩한 임마누엘이 살아 역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감정과 성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마이며 도살자이다. 그래서 교만, 시기, 증오가 방치되어 활개를 치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옛날 바라바를 살리고 그리스도를 죽였던 일이 같게 나타난다(마 27:20-21 참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로 끌고 갔던 유대인들에 의해 처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가 그리스도를 죽였던 진짜 첫 번째 살인마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던 날, 그들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했다. 즉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거룩한 생명이 죽어버렸다.

사랑의 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본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아담의 생명이며 온전함과 영광이셨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를 회복하고자 결코 두 번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속죄물이며 화목제물이시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실 때 인간은 그분을 통해 처음의 거룩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또한 태초에 인류 최초의 아버지인 아담과 함께하셨듯이 다시 한번 우리와 동행하신다. 이처럼 아담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계시지 않았다면 그 역시 지금 우리의 모습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더러운 본성으로 하나님을 적대하고 구원자의 속죄가 필요한 분노의 자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 사랑하는 아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히 드러낼 수 없다면 주님은 그 누구와도 기쁨으로 연합하실 수 없다. 이것은 타락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타락한 자는 오직 마음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지만 타락하지 않은 자는 구원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만유의 창조자시며 지어진 모든 것이 그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러므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의 경우 마음속에 내재하며 살아계신 주님을 통해 그 모든 선함과 거룩함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 역시 그 선함과 거룩함이 바로 주님에게서 온다. 타락한 인류의 구속자시며 평화와 의가 되시는 주님은 천국의 모든 보좌와 천사를 보호하며 그들의 힘이요 영광과 생명이 되신다. 성경에 그리스도를 일컫는 이름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단 하나, 오직 주님만이 빛과 생명이며 거룩하시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국이든 세상이든 거룩한 모든 피조물의 빛과 생명과 거룩함이 되실 수 있다.

인간의 본성 중 분노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분노는 그 자체가 본성이 되어 엄청나게 자학하고 공허와 끊임없는 불화를 느끼게 한다. 분노는 유일하게 사탄에게서 시작되며, 우리 안에 온갖 저주와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리스도나 사랑의 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즉 분노는 원래 사탄의 본성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리스도를 잃지 않았다면 분노가 우리 안에 시작될 수도,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분노와 증오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제멋대로 화내거나 증오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없는 행동이다. 또한 인간을 향한 구원의 능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그 옛날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눅 19:14)라고 말했던 유대인들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오직 순결한 사랑의 영으로 계셨고, 반드시 그러실 수밖에 없다.

허영, 분노, 고통, 악의 등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지적으로 돌아선 결과일 뿐 다른 이유로 나타나지 않는다. 즉 비참한 고통과 악한 마음에 다른 근거나 이유는 없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과 마음속에 반드시 주님의 행복과 온전함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 당시와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내면에 지옥, 죽음, 저주, 고통이 제거되고 끝날 수 있다. 또한 오직 선을 바라는 사랑의 영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타락한 피조물은 하나같이 탄식하며 고통 속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마음속에 거룩한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사랑의 영이 정결하게 할 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자녀는 누구든지 자기 모습과 소유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얻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과 하나 된 순결한 처음의 모습을 상실하였다. 따라서 모든 반대와 불순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과 연합했던 처음의 모습에 이르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정결함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 이를 대체할 수 없다. 하지만 우선 정욕과 분노가 가득하고, 음란하며 이기적이고, 불완전하며 제멋대로인 모든 성향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전에는 정결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 성향이 죽었을 때 비로소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 가운데 살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불순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결해져야 한다. 그 결과 이들에게서 떨어져 구별되기 전에는 정결해질 수 없다. 정결함과 온전함은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거룩한 본성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한때 인간은 주님 가운데 살며 축복받던 그분의 자녀였다. 따라서 정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또한 불순하고 불완전한 생각과 행동으로는 하나님과 결코 연합할 수 없다.

사랑의 영에 정결함과 온전함을 운운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과 그 거룩한 소산물인 인간의 마음이 함께 일하기를 바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의 정결함과 온전함 가운데 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함께 일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주님을 적대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떠한 삶이나 행복을 소유할 수 없다.

오직 사랑의 영만이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일한다. 다른 것은 그 안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단 한 가지 목적으로 모든 속성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랑은 살아 역사하는 그 깊이와 높이가 한없고 영원하다. 또한 속성상 열심히 힘쓰고 일할 때 그 본질과 기초가 마련되고 생명력을 얻는다. 그 결과 사랑의 영이 나타나고 그 축복된 능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힘과 능력을 타고난 인간은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

사랑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오직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존재하는 삶에서 시작된다. 반면 편파적인 성향은 보편적인 선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능력과 영이 사라진 인간에게서 나타난다. 인간은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야” 하는 식의 태도로 천국에 갈 수 없다. 또한 천국을 잃으면 다른 어떤 곳에도 존재할 수 없다. 항간에 순결하며 보편적인 사랑의 영을 너무 고귀하게 생각한다는 주장이 있다. 말하자면 정결하고 온전한 사랑의 거룩한 속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높고 낮은 정도의 차이란 없다. 사랑의 영은 오직 절대적으로 정결하며 순수할 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로우의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라‘에서(15-24p) /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발췌

CHAPTER 02
사랑의 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앞장에서 우리는 정확히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때때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기에 다시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제 이번 장에서는 우리가 사랑의 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모든 악의와 고통은 그 자체가 본성으로 남아 각자 그 일을 나누어 갈망하고 분노하며 대립한다. 따라서 본래 세상적인 인간은 갈망, 분노, 대립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오직 자신을 부인하고 죽으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반면 지혜롭고 거룩한 인간이 지닌 모든 선함, 온전함, 행복, 영광, 기쁨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 존재하며 인간의 모든 삶 속에서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시는 주님의 빛과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은 사랑과 즐거움이 가득한 삶의 모든 특성을 채우고 축복하며 그들과 연합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복음의 방법이 아니고서는 천국의 행복과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 즉 하나님과 본성이 연합하고 인간이 주님의 말씀과 영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만이 가능하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으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하며 그 안에서 일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 없이 우리의 삶은 결코 처음의 거룩한 상태로 변화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거룩한 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며”(요 1:14),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온갖 악의, 죄, 고통은 틀림없이 각자의 특성대로 본성을 거스르며 일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분명 잃어버린 사랑의 영을 바라고 구하며 열망한다. 따라서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일하고 거하시는 곳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리를 따르라

어쩌면 당신은 순결하고 보편적인 사랑의 영을 얻지 못해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랑을 머리로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랑이 즐겁고 적절하다는 이성적인 확신에서 그것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사랑이란 뚜렷한 생각이 있다고 해서 곧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이성이 흔들리고 사랑이 한낱 상상과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인간 스스로가 범하는 오류일 뿐이다. 마치 본성을 거스르며 손과 발의 일을 눈이 대신하도록 노력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랑의 영은 자연과 생명의 영이다. 자연과 생명의 모든 작용은 그 활동하는 힘에 따라 각각의 때와 장소에 맞게 적절히 성장할 수 있다. 뜻하지 않게 우연히 발생하지 않으며 모든 일이 같은 하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불, 공기, 빛은 어느 때는 이곳에서, 또 어느 때는 저곳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은 늘 어디서나 같은 방식으로 같게 작용하는 자연의 특성을 따른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같은 이유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진정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육체의 힘이나 건강이 실제로 존재할까? 혹은 정말 튼튼하고 건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심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육체의 힘이나 건강은 머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결하고 온전한 사랑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의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성은 인간의 마음속에 나타날 수 없으며, 육체적인 생명과 속성은 물론 영적인 생명과 속성조차 변화시킬 수 없다. 악한 영과 사탄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온전하고 순결한 사랑뿐이다. 그 사랑만이 거센 폭풍우에게 “잠잠하라”(막 4:39)고 말하며, 문둥병자에게 “깨끗함을 받으라”(마 8:3)고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 중의 하나이다. 반면 이성은 키를 단 1cm라도 자라게 하거나 영적인 삶을 변화시키거나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 온전한 삶은 마치 활짝 핀 꽃과 같아서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 겪는 수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엄밀히 말해 온전한 마음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우선 실제로 삶의 모든 특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함께 자라야 한다. 온전함이란 오직 뿌린 씨앗을 통해 피어날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씨앗이 변하여 뿌리를 내리듯 우리 마음 역시 더 고차원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은 마치 꽃을 피우는 씨앗처럼 반드시 죽음을 통과하고 생명에 이르러 하늘의 영, 불, 빛으로 축복받게 될 것이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불, 빛, 대기의 축복으로 죽음을 뚫고 생명을 얻어 향긋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완성된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다른 방법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꽃을 피우는 그날까지 처음의 모습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변화되어 나갈 때 인간의 마음은 온전해진다.


거룩한 사랑의 탄생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실한 진리를 알고 있다. 선은 위로부터 오지 않고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 영혼 가운데 들어오셔야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선 본성의 상태가 적합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탄생 과정이 시작되며 빛이 생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의 영이 싹틀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쁨이다. 따라서 기뻐할 수밖에 없는 즐거운 상태여야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기쁨이 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새롭게 태어나며 필요한 모든 본성을 공급해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기쁨이나 사랑의 영의 역사를 맛볼 수 없다. 우리가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한 하나님은 그 마음속에 존재하실 수 없다. 오직 갈망, 욕구, 대립만이 존재하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소위 지혜, 명예, 정직, 신앙과 같은 거룩함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를 갖기 때문이다. 또한 본성적으로 자신은 물론 상대방에게 교만, 야망, 이기주의, 시기, 복수와 같은 상처를 종종 입힌다. 한편 지혜와 신앙을 고귀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야망과 이기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속성이나 그와 같은 분위기와 성향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본성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나을 수 없으며, 어떤 영적인 존재가 마음속에 들어와야 올바른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어떤 원칙이 바뀌면 성직자와 공직자 모두를 비난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책임 전가는 너무 성급한 처사이다. 지금껏 누구도 위로부터 오는 도움 없이 원칙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럴 가능성조차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옛사람’(롬 6:6)이라고 불리는 본성적인 인간은 그 행동에 수없이 다양한 이름을 붙인다 해도 늘 똑같은 생각과 마음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교회나 국가가 움직이는 방법과 행동에 상관없이 자아는 오직 이기적인 동기만을 갖는다. 분명 교육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가 이기적이다. 따라서 거룩한 생명이 그 안에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이성적인 작용과 본성의 힘으로는 결코 사랑의 영과 거룩한 선을 소유할 수 없다. 사실 이들을 소유할 수 있는 적합한 때와 장소는 따로 있다.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태어나 인간의 본성을 압도할 때 그때와 장소가 마련될 수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분명한 진리가 드러났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님이 인간이 되어 타락한 본성 가운데 태어나 그들과 연합하고 생명이 되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갈급, 고통, 대립, 자학이 가득한 지옥에 영원히 머무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며 분명히 나타나셔야 한다. 그전까지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괴롭히는 갖가지 모습에 불과하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안에서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것이 사랑의 영에 필요한 반응이다. 십자가나 자기를 죽이는 것은 선행을 위한 하나의 도덕적인 원칙이다. 그럼 이번에는 인간이 의지적으로 도덕적인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수많은 규칙을 상상해보자. 그러나 이러한 규칙은 어떤 작용도 할 수 없다. 그 안에 여전히 인간의 본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덕성은 스스로 내면의 죄악을 숨기고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도와줄 뿐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규칙이 본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본성은 스스로 활동하며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항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수밖에 없고, 타고난 것보다 더 나을 수도, 나쁠 수도 없다. 어둠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듯이 본성은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없다. 진정한 도덕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가르침뿐이다. 마음속에 영적인 능력이 임함으로써 거룩한 선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빛을 밝힐 수 있도록 본성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삶은 단 두 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즉 하나는 본성적인 삶이며, 다른 하나는 그 안에 하나님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삶이다. 또한 인간은 본성과 하나님 중 하나가 살아 역사하도록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음속에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세상에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 인생은 계속되며 어떤 식으로든 늘 현실로 나타난다. 선은 일종의 울림이다. 또한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랑의 영으로 호흡하기까지 강렬한 본성과 맞서 투쟁하는 힘에 불과하다. 사랑은 오직 축복과 선이며 하나님의 본성이다. 따라서 하나님인 사랑의 영이 마음속에 살아 역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실제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윌리엄 로우의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라‘에서(25-32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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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1
도대체 사랑의 영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내 글 속에 사랑의 영만큼 생동감 있고 영향력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그저 사랑의 능력과 생명, 혹은 그에 대한 믿음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랑이 순수하고 보편적이라는 가르침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고상하다는 반대의견도 종종 나타난다. 사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좋아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한다. 또한 본성적으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지켜낼 수 없는 것, 바로 사랑의 찬미자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반대의견이란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즉시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사랑의 영도 마찬가지다. 축복으로 가득한 사랑의 영의 본질과 능력, 그 필요성을 뒷받침할 진정한 근거가 드러날 때 사랑에 대한 반대의견들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

사랑의 영은 오직 선을 바라는 하나님의 영에서 시작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통해, 또한 그분으로부터 창조되었던 창세 이전부터 끊임없이 선을 바라보셨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또한 본래 선하고 모든 선이 그에게서 시작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 이외의 다른 것을 전혀 바라지 않으신다. 세상과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하여 무언가 더해지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을 바라셨고, 그 마음은 항상 동일하게 변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분명 모든 피조물을 축복하시고, 오직 은혜와 선, 행복만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밖에 주실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축복과 선이 아닌 다른 것을 행하고 드러내며 존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오히려 태양이 어둠을 발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의 영이 존재할 수 있는 토대이자 근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선을 바랄 때 비로소 사랑의 영을 소유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사랑을 수없이 실천한다. 특별히 불편하거나 형편과 환경이나 분위기가 모순되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기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선 사랑이 살아 있는 영이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롭고 의지적이며 보편적으로 활동할 때 사랑의 영이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 모든 영은 있는 모습 그대로 자유롭고 보편적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라고 명령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화내기 위해 화를 명령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이 살아 있는 영으로 존재할 때 다른 영과 같이 자유롭고 보편적으로 일할 것이다. 사랑은 특별한 환경이나 장소에 상관없이 언제나 사랑 안에 거하며 일한다. 왜냐하면 사랑의 영은 어느 곳이든,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이든 오직 사랑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꽃은 어두운 밤이든 환한 낮이든 간에 오직 위를 향해 날아간다. 사랑의 영도 마찬가지다. 그 경로가 항상 같으며, 시간, 장소,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원래 그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기쁜 마음으로 행한다. 베풀고 용서하든, 고통받거나 고통을 피하든 간에 어떤 경우이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사랑의 영은 어디서나 그 자체로 축복이며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실한 하나님의 모습이고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영은 어디서나 어떤 경우이든 삶의 기쁨과 선이다.

축복 중의 가장 큰 축복에 대해 알고 싶은가?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여 온갖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의 고통과 아픔, 즉 모든 독선의 뿌리가 제거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모든 욕구가 만족하고 인간 본성의 무질서가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삶은 더는 무거운 짐이 아니며 매일매일 평화로운 생활로 이어진다. 보고 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요소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만나는 것마다 모두 유익하다.

사랑은 그 자체가 풍성할 뿐 어떤 숨은 동기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사랑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기름과 같다. 사랑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반드시 가져야 하며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할 수 있도록 모든 게 자연스럽게 돕기 때문이다. 또한 보상을 바라거나 영광과 높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직 스스로 전파되어 사랑이 부족한 모든 이의 행복과 축복이 되고 싶을 뿐이다. 사랑의 영은 분노, 죄악, 증오, 대립에 부딪힐 때 어둠을 마주한 빛과 같다. 그래서 스스로 축복이 되어 어떠한 반대라도 반드시 극복하려고 한다.

화나 악의를 품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의 호의를 얻으려 하는 등 다른 마음을 갖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마음속에 오직 선을 바라는 바람뿐이라면 만나는 사람마다 기꺼이 도와주려고 할 것이다. 원수의 분노, 친구의 배반, 그 밖의 모든 죄악은 사랑의 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 결과 사랑의 영은 더 높은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며 스스로가 가진 축복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의 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온전함이든 행복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한없이 온전하신 기쁨의 하나님이 오직 선을 바라는 변하지 않는 의지, 이것이 바로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외의 다른 마음에 이끌리는 한 타락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는 사랑의 영의 근거와 속성, 그 온전함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윌리엄 로우의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라‘에서(11-15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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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령에 의한 기도

성령은 우리로 기도하게 하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성령에 의한 기도도 있다. 이 사실은 로마서 8:26-27에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에 의하여 그런 기도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연약함 곧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약함이 있음을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나"라고 번역될 것이 아니라 현재대로(위와 같이) 해야 한다. 신자는 자신의 필요를 알지 못하므로 빌 바를 알지 못한다.

성령은 우리가 본 대로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여 주셔서 우리 자신이 정당한 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이 이상의 것을 하신다. 특별한 방법으로 또한 우리 대신 우리를 위하여 비신다. 본문이 말하듯 "성령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이 간구는 그리스도의 간구와 혼동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간구는 하늘에서, 성령의 간구는 땅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것은 우리 마음 밖에서이고 성령의 것은 안에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잘 알만한 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성령은 우리가 모를 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이 간구에 대한 개념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흔들어서 너무 깊어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소원을 발하게 한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우리를 통하여 기도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마음에 거하는 성령께서는 우리와 따로 홀로 간구하신다고 한다. 그는 우리 위해 기도하시나 우리 안에 거하실지라도 우리를 통해서 하지 않으시며, 성령이 하시는 기도요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마지막까지 분석해 보면 실제적인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결과는 꼭 같은데 곧 성령께서 놀라운 길로 우리의 결핍을 채우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면서도 빌 바를 알지 못하였을 때 우리 위해 기도하신다.

이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우리는 때로 우리 앞에 있는 위험을 모르며 어느 길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두 다른 직업에 종사할 소원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어느 처녀와 결혼해야 할지 모른다. 두 가지 매력있는 대학 교육과 과정이 다 우리 마음에 맞을지 모르나 그것들은 우리 생애를 현저히 다른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기독교 서적을 저술하느냐, 교회 시무 장로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이를지 모른다. 이런 모든 경우 "우리는 빌 바를 모른다." 그래도 성령은 무엇이 빌 바인지 잘 알아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내놓으신다.

성령이 간구하시기 때문에 기도가 응답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 한 이유는 바울이 암시하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이 무엇을 비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성령께서 간구하실 때 우리와 따로든지 우리를 통하여서든지) 또한 성령과 하나이신 그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이다.

더욱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 이는 우리 기도의 응답에 필수 조건이니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의 한 가지 이유가 바로 흔히 그릇된 것,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이기적으로 기도한다. 혹은 무지로 하기도 한다. 우리는 빌 바를 모른다. 성령은 그렇지 않으시다. 그는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10). 그는 삼위일체 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지 아신다. 그러므로 본문이 밝히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라."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맞기 때문에 항상 응답을 받는 기도이다. 생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 아버지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효과적인 간구를 하시는 제삼위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랴! 이것이 성령에 의한 기도이다.

3. 성령께 하는 기도

이제는 성령께 하는 기도를 살펴보자. 때로 "성령께만 기도함이 옳은가" 하고 묻는 일이 있다. 이 질문은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에게 할까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아버지 곧 삼위일체의 제일위에게 기도하는가, 하나님 전체로서의 아버지에게인가, 삼위일체 각 위에게 각각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할 때 전체로써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가르치는 곳이 없다. 있다면 삼위일체의 제일위께 한다는 암시가 있다. 아버지란 명칭은 현저히 그분의 칭호다. 더구나 신자들이 믿고 기도하러 갈 아버지께 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아버지는 분명히 삼위일체의 제일위임을 표시하였다. 예를 들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실 때 그는 분명히 자신을 아버지라는 그 말에서 제외하였다. 또 예수께서 부활 후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요 20:17)고 하셨을 때 그 잇닿은 평행구로 보아 마리아의 아버지는 예수의 아버지요, 삼위일체의 제일위 외에 아무도 될 수 없다.

또한 예수의 작별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되 아버지께 기도하라(요 15:16) 권고하신 것을 주목하자. 예수께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위해 성령 자신에게 기도하지 않으시고 보혜사를 보내 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요 14:16)은 눈에 띄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증거와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곧 삼위일체의 제일위)께 거의 국한하여 기도함으로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 하나님께 주로 기도를 올리는 것이 성경적 근거에서 하는 것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그러나 때때로 삼위일체의 각 위에게 기도하는 것이 정당하며 더 좋기까지 한 때도 있다. 각 위가 우리에게 특별한 관계를 가지며 우리를 위해 특별한 사역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각각에게 함이 마땅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과 보호를 원할 때 우리는 아버지께 가야 한다. 우리가 우리 죄의 사유와 씻음 받기를 원할 때는 그리스도께 기도하여야 좋을 것이다. 그는 죄책과 죄의 오염(汚染)을 제거키 위해 죽으셨다.

이와 같이 성령께 기도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면, 누가 친족을 잃었다면 특별히 성령께 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혜사 [곧 안위자(安慰者)-역자 주]로 보내어진 분은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요 주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안위하는 것을 임무로 하시는 분이 그분이시다. 혹은 우리가 자신 속에 성결의 결핍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계속하여 거룩케 하시도록 성령께 기도함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생명 안에서 하시는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에게 따로이 기도할 수 있듯이 우리가 성령께도 기도할 수 있다. 성령께 올린 훌륭한 기도의 예들을 보려면, 많은 찬송가집에서 성령께 드린 수많은 찬송가들의 가사를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4. 성령 받기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께 기도할 뿐 아니라, 또한 성령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전장(前章)들에서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았으며, 아직도 그분에 대한 공부를 끝맺지 않았다. 성령께 관하여는 축도에 포함된 것 이상 말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에 대하여 말할 것이 많음을 보았다. 그의 일은 다양하다. 그는 객관의 세계에서 곧 창조와 보편 은혜와 하나님의 두 말씀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또한 주관의 영역에서 놀라운 일을 수행하셨다.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에게 증거 하시고, 우리의 기업을 인 치시고, 우리의 기도 생활의 원천이시다. 그의 일은 다양하고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는 분명히 이 다양한 성령의 일을 위해 기도함이 좋을 것이다. 사실은 그것은 우리의 의무다.

기도는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성령을 더욱 받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하자. 만일 우리가 성령을 더욱더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 만일 우리가 그를 더욱 온전히 받지 않는다면 이 책은 목적을 달성치 못할 것이다 -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를 구함으로 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항상 죄와 부딪친다면 그것에 대해 이김을 주는 원동력은 성령이시다. 우리가 생의 결단을 지으려 하니 어쩔 줄 모를 때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하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더 큰 확신이 필요할 때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이것은 또한 기도에서도 그렇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무디고 단조롭다면, 기도가 짐이 되고 즐겁지 않다면, 우리 기도가 상달치 못하는 듯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것 같고,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고, 기도가 우리 생활의 능력의 방도가 되어 있지 않으면 - 그러할 때 우리는 간구의 성령 자신께 나가 우리 생명에 더 충만히 임하사 이런 언약 중에 있는 우리를 도우시도록 구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대망(待望) 중 이렇게 하면 그가 들어오사 우리의 기도 생활을 혁신시킬 것이다. 그가 모든 거룩한 생활의 비결임과 꼭 같이 기도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분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못한다. 그러나 그분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변화되어 영적으로 풍부하고 다채롭고, 능동적이며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 성령 안에서, 성령에게, 성령 받기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면 성령은 그대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다.


에드윈 H. 파머의 '성령과 기도' 중에서(231-237p) 

출처: 생명무 쉼터 = 한아름 발췌

 

[개혁교회가 강조하는 부활의 의미]

우리 개혁교회가 강조하는 부활의 세 가지 의미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통하여 어떠한 큰 사실을 선포하신다는 것입니다. 부활로써 선포해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다 이루시고 충족시켰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그 행위의 계약 아래에서도 참생명이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원수, 사망도 정복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죄지은 인생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그 형벌은 그리스도께서 다 받아서 깨끗이 청산되었습니다. 죄값이 완전히 지불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승인하셔서 영광으로 입혀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할 때 필요한 조건들이 다 갖추어졌습니다. 사람의 참된 생명이 약속되기 위해서는 속죄가 필요하고 또 거룩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런 일들이 온전히 완성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사 지옥의 고통을 다 받아 주신 것으로써 속죄의 사실이 완성되고 그리스도와의 신성한 연결이 성취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바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요 우리는 그의 신령한 거룩한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이 다 구비되어서 이제는 부활의 영광이 비치는 것이니만큼 너희도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영광, 영원히 꺼질 수 없는 참소망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큰 사실들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을 상징하는고 하니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인 신자들, 즉 우리들 하나하나가 공로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로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을 대가로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때 그 의롭다 하심을 공로 없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큰 은혜인 것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영생을 가졌다는 이것이 신앙의 한 증거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새 생명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장래에 우리는 참으로 복스러운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을 보면,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영혼과 육신이 나뉘어져 있는 사람이라도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다 같이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약속해 주고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아, 우리도 저러한 거룩한 세계 가운데 들어가기로 작정되었구나'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처럼 신자들에게 의롭다 함을 받은 징표가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동시에 우리들 자신에게는 칭의의 조건 혹은 칭의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들의 중생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그 생명에 상당한 영광의 빛을 나타냄으로써 우리에게도 이미 그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마침내 마지막에 우리가 부활할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하신 일을 보면 주님은 자신을 구경시키러 다니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달아 알게 만들었습니다. 네가 과거에는 잘못 믿었어도 이제 분명히 보고 깨달아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너희 믿는 자들도 나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것이 신자들의 칭의와 중생과 장래의 복스러운 부활과 더불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서 4:25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해서 예수님의 부활과 칭의가 관계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5:10에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신자의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빌립보서 3:10-14을 보면 바울 선생은 어찌하든지 자기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이르겠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겠다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베드로전서 1:3-4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중생하게 해서 여러 가지 것을 약속을 하고 소망을 주며 보증해 준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읽을 때 그분이 어떠한 세상 어떠한 사회에서 어떻게 고생하고 살아나가셨는가, 또 그것은 왜 그랬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의 돌아가심을 좀 더 생각하되 그의 부활과 승천 그것이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이 무엇이며 계시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그 영광의 몸을 생각할 때 우리도 장차 그와 같은 몸을 입을 것을 확실히 믿고, 그 정점을 향해서 우리는 날마다 나아가는 것입니다. 혹은 이 땅에 있다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육신과 영혼이 서로 갈리게 될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 그래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 것이라"(고전 15:42-44)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하늘에 올라가시사 온 우주의 영광의 가장 높은 곳, 곧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바는 예수님의 그 영광의 사실입니다. 그러한 위엄과 영광의 주께서는 마침내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들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 거룩한 생명에 상당하게 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그저 단순히 인간으로서 하는 생명의 활동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그리스도께 속한 그의 지체로서, 그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자로서, 그와 함께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은 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답게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님, 장차 그 거룩한 영광을 저희에게 입히시려고 그 영광의 시작이신 그리스도를 저희와 연결하여 주시고 저희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증하는 바와 계시하는 바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꺼지지 않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부활을 향하여 늘 살아갈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과연 저희는 항상 이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한 영광의 사실들을 주께서 입혀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바 그 거룩한 내용들을 향하여 감사하면서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로소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영광을 입을 사람에 해당한 생활의 열매가 저희에게 있어야 하겠사오니 아버님 앞에서 거룩한 이끄심을 받아서 열매를 맺을 만한 생활 행보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교회가 영광스러운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늘 앙모하면서 나아가되 저희 모든 지체 일만 마디가 다 주께서 내리시는 힘을 얻고, 또한 그리스도의 신의 인도를 받아서 거룩한 생활의 길로 전진함으로 그 신비하고 거룩한 교회의 본질을 땅 위에서 바로 드러내게 하시옵소서.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홍전의 '부활의 영광' 중에서(89-95p) /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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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이러한 일을 위해 땅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증명하셨을 뿐 아니라 부활의 거룩한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 말씀을 우리가 늘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역사(役事)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그 생명을 받은 새사람에게는 또한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받게 했는데 그 유산은 썩지 않고 취하지 않고 더럽지 아니한 것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라는 사실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은 지금 현재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작용하느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그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심으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적인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창조되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땅 위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그 거룩하신 생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급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사실을 향해서 전진하되 건설적으로 늘 작용하고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을 가리켜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하신 그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연합되는 그 순간부터 가지는 것인데 연결이라는 사실은 곧 생명의 공급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먼저는 그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사 우리의 성품을 그리스도의 것답게 변화시킵니다. 성신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일생을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 인격 전체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존재답게 아름다운 인물로 차례차례 올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후패(朽敗)해 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 가서(고후 4:16)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광의 위치에 도달하는 그때까지 거룩한 성신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역사가 우리에게 계속됩니다.

땅 위에 있는 동안 우리는 거룩한 계시와 성신의 유기적인 작용을 계속 받아서 삽니다. 이때 우리는 자기 육신 곧 옛사람을 날마다 죽이는 데서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살아 나가십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살다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부르시면 그 영혼은 잠정적으로 그리스도의 품인 낙원에 가 있게 됩니다. 그것을 보통 천당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정점은 아닙니다. 초창기부터 한국에서는 예수를 믿고 천당 간다는 데 다 주력을 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죽은 다음에 영혼이 가는 그곳이 마지막 완성지도 아니고 또 영구한 자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경과의 지점에 불과합니다. 임시로 거기에 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임시로 낙원에 있다가 예수께서 재림을 하시사 모든 악을 다 심판하시는 날, 옛 하늘과 옛 땅을 다 없이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전체로 나타내실 때 우리는 홀연히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그 몸과 같은 영광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영원 무궁한 거룩한 나라가 확연히 통일된 자태로 그리스도의 통치 대권하에서 명확하게 서 있을 것입니다.


김홍전의 '부활의 참뜻' 중에서(65-67p)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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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과 죽은 후의 천당]

먼저 사람들이 왜 '에이, 죽었으면 좋겠다'든가 '죽고싶다'든가 하는 말을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까닭과 핑계가 있겠지만 참으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란 그리 흔치 않습니다. 흔히 이런 말을 그저 함부로 말하는 데서 나올 것입니다.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어떤 신자에게 '죽는 것이 왜 좋으냐?' 하고 물으면 '죽으면 천당에 가게 되니 좋다'고 대답하곤 합니다. 이런 말로 자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함부로 한 말을 변호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천당에 가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천당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까요?

보통 이야기하는 천당이란 말은 사후의 좋은 세상 전부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영혼이 천당 간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만 임시로 가 있는 낙원을 의미하는 듯도 합니다. 여기 제1부에서는 우선 천당이란 말을 죽은 후의 좋은 세계 전부 곧 낙원과 그 후의 영광의 세계를 다 같이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은 천당에서 사는 것에 비교할 때 훨씬 못한 것일까요? 그렇게 잘못 생각하면 이 세상의 일은 다 뜬구름 같고 이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아서 괴롭고 허무한 것이 됩니다.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역려과객(逆旅過客)과 같으니 어서 죽어서 하나님 앞으로 가서 평안하게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면서 지내야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의 사상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도리와는 크게 어긋납니다.

현세의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천당에 가서는 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도록 배정해 놓으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영광의 위치에 이르는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장소는 천당이 아니라 이 세상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사실, 곧 예수를 믿고 영원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천당이 아니고 이 땅 위에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든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든지 다시 말하면 영광을 얻느냐 멸망을 받느냐를 결정짓는 것은 땅에서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어떤 사람이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힘써 주를 믿고 의지하며 건실한 봉사의 생활을 함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건축자가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터전 위에 집을 짓되 가급적 영원히 변치 않을 재료로 짓습니다. 재료로는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따위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집을 짓는 공사는 천당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 땅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집을 짓다가 완성하지 못했다 해서 그 나머지를 천당에 가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땅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르면 불의 심판이 있어서 어떤 집은 타고 무너지나 어떤 집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곧 나무나 짚이나 풀 같은 것으로 지은 집이라면 심판의 불에 타서 다 없어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공력(功力)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그러나 금이나 은으로 지은 집은 암만 불이 나더라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몸만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 난 속에서 자기 몸 하나만 빠져  나와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금과 은으로 좋은 건물을 짓다가 완성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천당에 올라가서 다시 그것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느냐 하면 그런 기회는 전연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이 세상 가운데 사람을 지어 놓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생활을 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땅 위에 있는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다. 어떠한 잘못으로 또는 우연한 일로 사람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사람을 두신 사실에는 결정적이고도 구체적인 확실한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쩌다가 땅에 떨어졌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고 '거기에 있을 것이 아니므로 얼른 주어다가 천당으로 옮겨야겠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결국 땅이란 하나님께서 아주 치밀한 섭리하에서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만드신 곳이며, 이 땅 위에 사람이 산다는 것도 아주 명확한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땅 위의 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두신 본래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상 생활의 가치도 알 수 있고 그 의미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영원한 문제는 땅의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영광의 상을 받을 기회가 이 땅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만 주어지는 것이고 일단 땅을 떠나면 그런 기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상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잘했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땅에 있는 동안에 내가 너를 땅에 둔 본래의 큰 뜻을 깨닫고 그대로 살았으니 참 잘했다'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천당에 가더라도 그곳에 합당한 생활의 큰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막연하게 앉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천당이 좋은 곳일진대 사람이 천당에 가게 되면 의식이 더욱 분명해져서 좀 더 확실한 목적과 이상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천당에서는 천당의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지 땅에서의 목적이나 의의를 그대로 끌고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의 목적과 의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천당에 간들 얼마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천당에서의 목적과 의의란 그가 땅 위에서 살 때 가졌던 목적과 의의의 수행 정도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당에서 거할 때 그 영의 성숙성과 덕성의 정도는 그 인물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신 안에서 거룩히 장성했는가의 결실 위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천당에 들어갈 때 세상에 있는 동안 장성한 '새사람'을 모두 포기하고서 기본 상태만으로 들어가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영감 있는 말씀과 덕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고 유치한 신자는 유치한 대로 천당에 들어갑니다. 대덕(大德)과 소인(小人)이 완전 동일한 상태로 되어 버린다면 천당은 지극히 불공평한 곳이거나 세상과 아무 상관없는 전혀 별다른 새 창조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천당은 오직 인생 세계와 영원한 영광 세계 간의 중간 세계(interim state)일 뿐입니다.

천당에서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가 천당에 가서 할 일은 무엇일까요? 흔히 말하기를 천군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내는 것이라 합니다(계 15:3-4, 14:1-5, 7:9-12).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계 7:15-17).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은 물론이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언제나 중요한 일입니다. 천당에서 할 일과 관련하여 사람이 가지는 위치의 높고 낮음과 의의(意義)의 깊고 얕음은 그 사람이 땅 위에서 결정하게 되는 것임을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습니다. 거듭 말하면 땅에서 세운 집이 심판의 불로 타버리면 그만이고 그대로 남아 있어야만 상을 받는 것입니다. 천당에서 이런 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이고 책망을 받는다면 그만큼 그 사람의 위치는 낮고 빈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서도 계급의 차이가 있을까?

천당에서도 계급의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보십시오. 천당(낙원)에서 아브라함과 나사로는 완전 평등의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고 아브라함은 높은 위치에서 지옥에 있는 부자 유대인과 대화합니다. 천당이라고 누구나 평등해서 똑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 위의 생활이 천당에서의 위치를 결정해 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실컷 죄를 짓고 아무렇게나 산 사람이나 경건하고 의롭게 산 사람이나 천당에서는 다 평등할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땅 위에서 많은 수고를 한 사람, 곧 바울, 베드로, 어거스틴, 칼빈 같은 사람이나 이 세상에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죽었으면 좋겠다' 하며 아무 의미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이 꼭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영광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천당의 참 의미라는 것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과 같이 "잘했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마 25:23)는 말씀을 듣든지 "너는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9)든지 하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언제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겠는가 할 때에 이것은 적어도 이 땅에서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이야기가 아니라 저 먼 나라, 곧 이생 이후인 내생에서 일어날 얘기입니다. 천당 생활이 내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생이 끝난 후 우리의 생의 결정, 곧 우리의 위치나 영광이나 의미의 중요성은 땅 위에 있는 동안의 생활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땅 위의 생활 여하는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되고 어떻게 하면 하늘에서 빈곤하게 되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서 이생을 보내야 합니다. 덮어놓고 천당, 천당, 하며 올라가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천당에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저 땅에서 선한 행실을 하여 많은 보물을 쌓아놓은 것이 여기 있으니 자, 이 많은 것으로써 너의 활동을 해 보아라'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열 고을의 권세를 차지하게 되었다'든지 '너는 금으로 집을 지은 사람이니 자, 여기서 이 상(賞)을 받고 살아라'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땅 위에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천당에 가서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서의 생의 의의를 절대로 소홀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장래의 일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이 땅에서의 일만 가지고 노심초사하며 애쓰고, 장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원통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자기 앞에 당한 경주 하라"(히 12:1)고 한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다 떨쳐 버리고 목표를 향하여 힘껏 경주로를 달려가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의 생활을 달음박질 마당에서 경주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라고 표현하여 전투하는 사람 혹은 경기하는 사람으로서의 땅 위의 생활을 우리에게 효과 있게 가르쳤습니다.


김홍전의 '부활의 참뜻' 중에서(127-134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세대주의 신학 Dispensationalism
http://www.crosschrist.com/theology/systematic/54.html

1.세대주의 신학의 개념

1)일종의 성경해석의 방법론이다.

세대주의 신학(世代主義 神學)은 엄격하게 말해서 신학체계라기보다는 성경해석방법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성경을 영적이나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떠나서 문자적 내지 여자적(如字的)으로 해석한다. 특별히 세대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들이 하나님은 불변하시나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하시는 계시의 국면이 세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2)전천년설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완전히 별개로 영구히 병존하는 체계라고 주장하는 신학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예외없이 모두 전천년설주의자들이지만 전천년설주의자들 모두가 세대주의자는 아니다. 세대주의자들과 역사적 전천년설주의자들과는 다르다.

2.세대주의 신학의 근원

1)고대신학에서의 세대주의의 근원

Justin Martyr(110-165)는 구약에는 상이한 하나님의 섭리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할례와 율법 이전에도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이 없어도 만족하셨다.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이후 할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필수적이고,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이후 안식일과 제의식과 율법이 필수적이었다. 그런즉 율법이 없었던 때와 율법이 있었던 때로 사람들을 다루어 오셨다는 것이다.

Irenaeus(130-200)는 하나님이 4개의 중대한 언약으로 인간을 대해오셨는데 구약의 3언약과 신약의 복음언약이라고 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 신약시대에는 은혜로 섭리하셨다는 것이다.

Augustine(354-430)은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던 세대와 그것이 적절하지 못한 오늘의 세대를 구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다루어오셨다고 했다.

세대주의 학자 Ryrie는 앞에서 언급한 학자들이 현대판 세대주의자들의 양상은 지니지 못했지만 오늘날 세대주의 신학의 발전을 위한 원초적인 개념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2)현대에서의 세대주의 신학의 근원

John Nelson Darby:
17,8세기의 근원으로서는 프랑스 신비가이며 철학자인 Piere Poiret, John Edwards, Isaac Watts 등이 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성경 전체의 역사를 5,6,7 개의 시기로 구분하고 하나님이 각 세대마다 인간과 관계했던 주변들을 소개한다. 그렇지만 가장 현대판 세대주의의 모습을 확실하게 드러낸 인물은 John Nelson Darby(1800-1882)와 C. I. Scofield(1843-1921)이다.

John Nelson Darby는 인간적으로 천재였다. 18세기에 더블린 트리니의 대학을 졸업하고, 22세에 변호사가 되었으나 예수를 믿고 거듭나자 그 직을 사임하고 영국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는 결국 교회가 아닌 Plymouth Brethren을 형성했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처럼 형식에 매이지 않는 예배참여와 특별성직제도 불인정과 규례 없는 교회생활을 강조했다. 그는 성경 전체의 세대를 7개로 구분하였다.

1.홍수 이전까지의 족장세대
2.노아세대
3.아브라함 세대
4.이스라엘 세대
5.이방인 세대
6.성령세대
7.천년왕국세대

C. I. Scofield:
역시 변호사이면서 성경학자인 C. I. Scofield는 1909년 The King James Version 연구의 스코필드 관주 성경을 인쇄하고부터 본격적으로 세대주의 신학을 시작했다. 그는 세대 구분을 7개로 하였다.

1.무죄시대
2.양심시대
3.인간통치시대
4.약속시대
5.율법시대
6.은혜시대(교회시대)
7.왕국시대

이를 교리학적으로 제시한 신학자는 D. S. Chafer인데 그는 세대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조직신학을 내놓았다. 그 후 강력하게 세대주의 신학을 전개시킨 낯익은 학자들로서는 무디성경학교의 교장이었던 James M. Gray, J. Dwight Pentcost, John F. Walvoord이다.

세대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교들로서는 다음과 같은 학교들이 있다. 달라스 신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탈봇신학교, 웨스턴보수침례신학교, 무디성경학교, 필라델피아성경대학 등이다.

온건파 세대주의 신학자들로서는 독일 비댄이스트 Erich Sauer와 탈봇신학의 L. Talbot의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들 수 있다.

3.세대주의 신학의 주요교리

1)하나님은 세대에 따라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하여 오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세대별로 구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해 오셨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요1:17은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것이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다고 하였다. 모세 시대와 그리스도 시대, 곧 율법시대와 은혜 시대가 있다는 것이다. 롬6:14은 이젠 사람들이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다고 했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 구약은 율법의 시대이다.

2)하나님의 가정으로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그런데 세대주의 신학은 하나의 세계를 하나님에 의하여 관리되는 가정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이 책임자로서 식구들에게 어떤 의무를 부여하면 식구는 그것에 순종해야 되고, 그 때에는 축복을 약속하는 것이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내리신다. 결국 시험(testing), 실패 (failure), 심판(judgement)의 체제였다. 여러 세대의 공통적인 체제가 그러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사람들은 믿음에 의하여 문제의 해결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원은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인함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안심이 된다.

3)성경해석을 문자적으로 한다.

문제는 성경의 해석방법에 놓여 있다. 이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누구인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반대할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영역까지도 (예언서)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한 문자적인 해석 때문에 세대주의에 특별한 교리가 출현하게 된다. 그것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가 도저히 합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영원히 이스라엘로 남고 교회는 막간에 끼어든 것으로 영원히 교회로 남는다. 양자는 결합관계가 아니라 병존(竝存)관계이다. 양자는 연속관계가 아니라 분리관계이다.

구약에는 교회에 관한 예언이 전무하다고 주장한다. 신약교회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아니한 하나의 신비요, 비밀이요, 삽입이요, 추가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전했던 하늘나라는 신령한 교회적 의미의 나라가 아니라 구약 다윗의 왕국적 지상 나라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이 이러한 꿈을 지닌 그리스도를 배척하니 이스라엘의 지상나라는 부득불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스라엘의 지상나라는 틀림없이 올 것인데 이와 같은 연기와 미래의 시작 사이에 끼어든 막간적 존재로서의 교회가 생긴 것이다. 사실 교회와 이스라엘의 지상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야곱의 육체적 후손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비세대주의자들이 흔히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영적 해석하는 것을 만부당한 일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4)교회와 이스라엘을 본질상 판이한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교회관은 롬10-11장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교회와 이스라엘을 본질상 판이하게 다른 것이라 주장한다.

a. 교회는 구약시대에는 알려지지 아니한 하나의 비밀이었다(엡3:1-9,골1:26). 이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방인은 유대후손이 아니지만 유대인과 함께 후사가 되는 것이니 이것은 이스라엘이 우선적인 입장이고 이방인은 종속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교회란 순수한 이방인도 아니고 순수한 유대인만도 아닌 양자의 합작이다.

b. 교회는 행2장이 있기까지는 시작되지 아니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사람들을 연합하고 성령의 세례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환난 이전에 휴거함으로써 지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유대인은 아직 잔존한다(살전4:16).

c. 교회는 신약에서도 이스라엘과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시종 언급되고 있다(고전10:32). 반면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관계는 신약시대에 가지 유효하다는 것이다. 잠시 이스라엘 나라가 연기되자 무료해서 임기응변식으로 교회라는 것을 두셨지만,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부여한 무조건적인 언약을 끝내 성취시킬 것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성취시켜 주실 일들은 무엇인가?

아브라함 언약(창12:1-3)에 의거하여 토지와 후손과 축복이 내려질 것이고, 팔레스틴 언약 (신30:1-10)에 의거하여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고, 다윗 언약(삼하7:12-16)에 의거하여 메시아가 유대에서 나와서 왕국을 얻고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새 언약(렘31:31-34)에 의거하여, 모든 열방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축복과 사죄를 믿게 될 것이라는 것 등이다. 환난의 목적은 교회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관련된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이 환난 전 휴거설을 주장하는 이유가 교회와 이스라엘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4.평가

우리는 세대주의자들의 구원론에 대한 오해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세대별로 인간과 접촉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구원은 결국 은혜에 근거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Harvie M. Conn은 오해를 한 듯하다. 콘은 율법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계시가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사실 세대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세대주의란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 안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해석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것은 어차피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세대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도 양의 피로 구원을 얻었고, 신약에서는 예수의 피로 구원을 얻는다. 단지 상징과 실제 사이만 있을 뿐이다. 세대주의자들의 엄청난 과오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철저히 분리, 불연속, 병존관계로 보는 고집이다. 이스라엘에게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팔레스틴에 귀환해서 그때에 제사는 어떻게 드릴 것인가? 제사를 회복해야 할 것인데, 그때도 양의 피로 들릴 것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는 어쩌자는 것인가? 이들은 상징과 실제의 관계를 무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교회를 위한 전제적 존재요, 수단적 존재요, 상징적 존재이다. 그에 비해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수단이 목적과 병존하거나 수단이 목적보다 더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신랑으로서 그리스도가 만나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교회이다. 이스라엘은 교회를 위해 역사로 존재했던 것이다. 하기는 신랑과 신부가 만날 때 이스라엘은 축하객이라고 세대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으나, 혼인잔치의 주역이 중요한가, 축하객이 중요한가? 이들에 제시하는 성경은 엡1:10이다. 펌/정형수 교수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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