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영의 절대적인 필요성

사랑의 영은 변함없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누구도 마음속에 하나님의 선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삶 가운데 사랑의 영이 가득할 때 비로소 선하신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통할 수 있다. 사랑의 영은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잘못과 허상, 불순과 부패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선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정결하고 거룩해짐으로써 하나님을 만나고 거룩한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오직 선을 바라시는 분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하나님과 함께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하나 되어 일하실 수 없다. 이것이 사랑의 영이 필요한 절대적인 이유이다. 그 어떤 것도 사랑의 영을 대신하고 만족시킬 수 없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갖가지 거룩한 계획과 경건한 신앙의 모습은 무의미하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모든 예배와 신앙의 완전한 속성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과 함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일할 때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며 경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과 뜻 안에서만 기뻐하실 수 있는 분이다. 따라서 선은 오직 그 안에 있으며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뜻과 영을 좇는 사람은 누구든지 선을 바라는 마음을 저버린다. 그 결과 마음속에 하나님의 빛과 성령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다. 그래서 사랑의 영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하거나 거룩함을 거스르며 행동하실 수 없는 분이다. 또한 모든 피조물을 예외 없이 사랑하신다. 그러나 먼저 사랑의 영과 선이 살아 역사하며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으로 천사와 인간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바로 그 영이 나타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기꺼이 일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선을 바라며 살아가는 삶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인간이 믿음을 단념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본성에 맞선 반역이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이 정결하며 온전하지 않다면 그 영혼에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사랑의 영 안에서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정결하고 온전해질 수 없다.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결하며 온전하고 모든 피조물을 위한 축복이다. 사랑 가운데 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인간의 본성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부도덕, 고통, 무질서를 바라보라. 이것은 본질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이기주의와 아집으로 바꿔놓은 인간의 마음일 뿐이다. 오직 사랑이 그 모든 죄악을 치유할 수 있다. 순수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거룩한 영 가운데 자유롭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분노, 시기, 욕심, 교만이라는 이름으로 악에 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각각의 개념을 구분하며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더 쉽게 악의 본성과 능력, 마음속의 온갖 만행을 인식할 수 있다. 이들은 어떻게 부르고 얼마나 정확히 구분하느냐는 상관없다. 모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위선적인 서기관, 바리새인, 유대인들의 행동은 같았다. 모두 똑같이 행동하면서 표면적인 이름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즉 악행은 하나같이 동일한 일을 행한다.

교만, 분노, 욕심, 시기는 하나님의 진정한 그리스도를 죽이고 못 박았던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들이 가진 능력과 본질이 진정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수백 년 전, 대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 한 번 못 박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 교만, 시기, 욕심을 부리려 할 때마다 거룩한 임마누엘이며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또다시 못 박는 것이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8). 이처럼 인간의 마음속에는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를 거스르고 거룩한 임마누엘이 살아 역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감정과 성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마이며 도살자이다. 그래서 교만, 시기, 증오가 방치되어 활개를 치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옛날 바라바를 살리고 그리스도를 죽였던 일이 같게 나타난다(마 27:20-21 참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로 끌고 갔던 유대인들에 의해 처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가 그리스도를 죽였던 진짜 첫 번째 살인마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던 날, 그들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했다. 즉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거룩한 생명이 죽어버렸다.

사랑의 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본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아담의 생명이며 온전함과 영광이셨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를 회복하고자 결코 두 번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속죄물이며 화목제물이시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실 때 인간은 그분을 통해 처음의 거룩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또한 태초에 인류 최초의 아버지인 아담과 함께하셨듯이 다시 한번 우리와 동행하신다. 이처럼 아담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계시지 않았다면 그 역시 지금 우리의 모습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더러운 본성으로 하나님을 적대하고 구원자의 속죄가 필요한 분노의 자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 사랑하는 아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히 드러낼 수 없다면 주님은 그 누구와도 기쁨으로 연합하실 수 없다. 이것은 타락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타락한 자는 오직 마음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지만 타락하지 않은 자는 구원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만유의 창조자시며 지어진 모든 것이 그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러므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의 경우 마음속에 내재하며 살아계신 주님을 통해 그 모든 선함과 거룩함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 역시 그 선함과 거룩함이 바로 주님에게서 온다. 타락한 인류의 구속자시며 평화와 의가 되시는 주님은 천국의 모든 보좌와 천사를 보호하며 그들의 힘이요 영광과 생명이 되신다. 성경에 그리스도를 일컫는 이름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단 하나, 오직 주님만이 빛과 생명이며 거룩하시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국이든 세상이든 거룩한 모든 피조물의 빛과 생명과 거룩함이 되실 수 있다.

인간의 본성 중 분노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분노는 그 자체가 본성이 되어 엄청나게 자학하고 공허와 끊임없는 불화를 느끼게 한다. 분노는 유일하게 사탄에게서 시작되며, 우리 안에 온갖 저주와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리스도나 사랑의 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즉 분노는 원래 사탄의 본성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리스도를 잃지 않았다면 분노가 우리 안에 시작될 수도,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분노와 증오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제멋대로 화내거나 증오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없는 행동이다. 또한 인간을 향한 구원의 능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그 옛날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눅 19:14)라고 말했던 유대인들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오직 순결한 사랑의 영으로 계셨고, 반드시 그러실 수밖에 없다.

허영, 분노, 고통, 악의 등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지적으로 돌아선 결과일 뿐 다른 이유로 나타나지 않는다. 즉 비참한 고통과 악한 마음에 다른 근거나 이유는 없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과 마음속에 반드시 주님의 행복과 온전함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 당시와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내면에 지옥, 죽음, 저주, 고통이 제거되고 끝날 수 있다. 또한 오직 선을 바라는 사랑의 영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타락한 피조물은 하나같이 탄식하며 고통 속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마음속에 거룩한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사랑의 영이 정결하게 할 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자녀는 누구든지 자기 모습과 소유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얻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과 하나 된 순결한 처음의 모습을 상실하였다. 따라서 모든 반대와 불순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과 연합했던 처음의 모습에 이르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정결함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 이를 대체할 수 없다. 하지만 우선 정욕과 분노가 가득하고, 음란하며 이기적이고, 불완전하며 제멋대로인 모든 성향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전에는 정결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 성향이 죽었을 때 비로소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 가운데 살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불순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결해져야 한다. 그 결과 이들에게서 떨어져 구별되기 전에는 정결해질 수 없다. 정결함과 온전함은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거룩한 본성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한때 인간은 주님 가운데 살며 축복받던 그분의 자녀였다. 따라서 정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또한 불순하고 불완전한 생각과 행동으로는 하나님과 결코 연합할 수 없다.

사랑의 영에 정결함과 온전함을 운운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과 그 거룩한 소산물인 인간의 마음이 함께 일하기를 바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의 정결함과 온전함 가운데 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함께 일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주님을 적대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떠한 삶이나 행복을 소유할 수 없다.

오직 사랑의 영만이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일한다. 다른 것은 그 안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단 한 가지 목적으로 모든 속성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랑은 살아 역사하는 그 깊이와 높이가 한없고 영원하다. 또한 속성상 열심히 힘쓰고 일할 때 그 본질과 기초가 마련되고 생명력을 얻는다. 그 결과 사랑의 영이 나타나고 그 축복된 능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힘과 능력을 타고난 인간은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

사랑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오직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존재하는 삶에서 시작된다. 반면 편파적인 성향은 보편적인 선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능력과 영이 사라진 인간에게서 나타난다. 인간은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야” 하는 식의 태도로 천국에 갈 수 없다. 또한 천국을 잃으면 다른 어떤 곳에도 존재할 수 없다. 항간에 순결하며 보편적인 사랑의 영을 너무 고귀하게 생각한다는 주장이 있다. 말하자면 정결하고 온전한 사랑의 거룩한 속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높고 낮은 정도의 차이란 없다. 사랑의 영은 오직 절대적으로 정결하며 순수할 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로우의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라‘에서(15-24p) /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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