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봇을 막는 비결 | ▶설교 본문
2013.05.05 17:13
 

이가봇을 막는 비결

 사무엘상 4:12-22

 

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14 엘리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15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사십 년이었더라

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 죽어갈 때에 곁에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는커녕 오히려 버림을 받아서 철저히 이방인들의 발에 밟히는 비참 가운데 처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려하신 결과를 맞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3).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값주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실패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영광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밖에 버려져 세상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까?

 

성경은, 이유는 때문에 그러하다고 합니다. 거룩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운데 있을 ,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십니다.

우리가 가운데 있을 , 하나님의 영은 고통가운데 근심하십니다.  

우리가 가운데 있을 , 우리의 영원한 원수인 사탄이 우리를 짓밟습니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죄이며 나아가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땅바닥에 떨어뜨려 모독을 돌리는 것도 우리의 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있어서 용기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4천명 정도가 죽게 되면서 패전하게 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나라에 패할 수가 있느냐, 아니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하는데 우리를 이렇게 비참케 하시느냐라고 따집니다.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하여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 것이라는 발상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언약궤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져 후에 다시 전쟁에 나갑니다. 이러한 발상이야말로 신앙을 마법의 세계로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언약궤를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의 제사장인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언약궤와 더불어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함께 전투에 내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패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저번 전쟁과는 상대도 되지 않게 3만명이 되는 보병이 죽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패전이었으며 이로 인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좌절과 낭패와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본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별하신 민족으로서 얼마든지 승리와 영광을 누리며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누리기 보다는 블레셋 사람의 발에 밟히며 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군사들은 걸음아 살려라 하고 도망가더니 하나님의 성스러운 언약궤를 블레셋 군사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심한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더불어 죽은 병사들 가운데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끼어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엘리 대제사장! 그는 자신의 아들이 전쟁에서 죽었으며 하나님의 언약궤를 적군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더니, 앉고 있던 의자에서 그대로 쓰러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됩니다.

 

마지막 죽음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습은 구약의 배경에서 때는 비참과 저주였습니다.

 

이때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고 또한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접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인 비느하스의 아내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여인은 당시 임신 중이었고 또한 거의 아이를 낳는 순간이었습니다.

 

21절에 보니, 엘리 대제사장의 며느리요, 비느하스의 아내인 여자가 아이를 낳으며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너무나 슬픔 가운데 갓난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정과 나라에서 떠나는 것을 보며 죽도록 슬퍼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슬픔 가운데 정말로 죽은 여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가봇의 비참한 상태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게 원인을 자세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 제사장이 깨어 있지 못함으로 가정이 타락한 것이 대표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은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3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곳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엘리 제사장은 가정의 아버지로서 가정의 거룩을 지켜야 하고, 또한 제사장으로서 성전의 거룩을 지켜야 하는데 그는 두가지에 있어서 게으른 자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기도와 말씀에 매우 게으르더니 노쇠한 가운데 영력이 감소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무엘상 2 22-25절을 보면 엘리 대제사장은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더러운 죄를 짓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엘리 대제사장의 가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강퍅한 상태에서 계속 죄를 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유의해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용서하기를 기뻐하시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회개하지 않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같은 죄를 계속 지으면서 어떤 선을 넘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시고 죽이기로 작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때는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더라고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도를 넘어서서 같은 죄악을 반복하여짓는 일이 있어서는 됩니다. 죄를 짓게 되면 신속하게 주의 보혈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다시 새롭게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2장에서 신자의 가정이 타락하는 과정과 하나님께서 가정을 심판하시는 과정을 있습니다.

 

먼저 엘리 제사장의 안일함과 영력의 감소는 가정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가정의 타락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현상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제사를 멸시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현대어로 말하면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삼상2:17).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라지면 자녀 가족원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면에서 타락하고, 쾌락적인 면에서 성적으로 타락합니다. 이때 이가봇 현상이 나타나는 가정의 특징은 그러한 죄악들을 알면서도 방관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의 죄악을 방관하는 엘리 제사장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에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치시는 방법은 언제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발에 짓밟히게 하십니다.

 

아무튼 이가봇의 첫째 원인은 가장이 엘리 제사장처럼 하나님 앞에서 바른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가정에 이가봇 현상이 발생합니다. , 가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라면 담임 목사가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 이가봇 현상이 나타날 것이며 국가적인 차원이라면 교회가 죽어갈 이가봇의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 1 절에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도 없고 배우는 자도 없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무지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마치 눈이 어두워진 엘리 제사장과도 같이 국민이 영적으로 소경의 상태, 영적인 암흑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교회와 나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은 함께 거할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사회는 건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마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질 때는 사회는 이가봇 현상,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후에는 주의 심판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도시를 태워 멸하셨습니다. 여기서 의인 10명이 누구입니까? 착한 사람을 말합니까? 도덕적으로 선한 10명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 10명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 사회에서 소금과 빛으로 있어야 그리스도인이 없었다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사회는 이가봇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교회나 나라는 이제 얼마 있어서 이가봇이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가봇의 원인입니다.

삼무엘상 4 4절을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전쟁이 나서 벌써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났음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오늘 사건은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경고한 내용이 발생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2 27 이하입니다.

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28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처소에서 명령한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아들들을 나보다 중히 여겨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집과 조상의 집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 보라 내가 팔과 조상의 팔을 끊어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처소의 환난을 것이요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사람이 눈을 쇠잔하게 하고 마음을 슬프게 것이요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날에 죽으리니 둘이 당할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그러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이 회개하였다는 사실이 없습니다. 만일 이들이 베개를 적시며 회개하고 삶을 바꾸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회개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가운데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거룩한 법궤를 메고 진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고만 하였지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니 신앙이 무슨 마술인줄 착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도 가장 중요한 단어가 서로 연결되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6번이나 되풀이 되는 단어인데 단어는 하나님의 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단어와 관련되어 되풀이 되는 단어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단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가 떠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에 슬픔 가운데 죽은 여인은 새로 태어낫 갓난아이에게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인생의 가장 비극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인생의 가장 비극입니까? 돈이 없어서 비참한 것입니까? 세상이 세상이 나를 알아 주지 않고 교회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며 가족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제일 비극입니까?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비극입니까? 건강을 잃어서 비극입니까?

 

오늘 본문의 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을 최고의 비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비극은 하나님께서 우리는 떠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가장 비극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정이 이상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비극은 아무리 많은 행사를 하고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의 가장 비극은 하나님께서 나라를 버리고 떠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없이 사는 인생은 시체와 방불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사는 같지만 사실은 죽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떠난 인생은 아무런 가치 없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무의미한 인생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실, 숨을 쉬는 동안 죄악을 쌓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떠나고 없는 인생!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하였구나!”

 

에스겔서 10장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위에 덮였더라”( 10:18-19).

 

이스라엘이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하나님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들 위에 머무르는데 구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통해 동편으로 나가십니다. 그리고 후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여인의 고통과 죽음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슬픔 가운데 죽었습니다. 여인은 무엇을 가장 고통으로 느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떠난 것으로 인한 심한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생명을 잃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소중히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을 괴로워 하며 죽은 여인의 죽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한편,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지닌 아기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순진하게 태어난 아기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아이의 인생은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아이를 부를 때마다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이 역시 십자가 상에서 주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십자가 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이가봇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사실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십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우리의 죄로 인하여 이가봇이 되신 죄가 없는 아기! 그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상에서 이가봇이 되심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소유할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찾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신 이가봇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영원토록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언제나 반드시하나님의 새언약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다시 찾아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인하여 다시 이스라엘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에스겔 43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성전에서 내게 하는 말을 내가 듣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곁에 있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보좌의 처소,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제는 그들이 음란과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 43:4-5, 7, 9).

 

그리고 에스겔이 장면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실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붙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믿어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새언약인 복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궤를 찾아와야 합니다. , 말씀이 되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붙들뿐만 아니라 말씀을 담은 하나님의 언약궤인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하나님이 영광이 우리 가운데, 우리 가정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나라 가운데 다시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지라도, 시간에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이가봇의 고통을 당한 여인과 아이가 상징하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붙잡는다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주의 언약에 의하여 우리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우상을 회개하고 주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자녀들과 가족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과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분의 보혈로 덮으시고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씻어주시며 나아가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다시 거할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이가봇으로 버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여러분의 삶과 가정, 그리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위에, 또한 우리 조국 위에 임하기를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에베소 교회가 받은 칭찬과 책망” - 스데반 황 목사

주일설교  2013.4.28

 

주일 본문 ( 계시록 2:1-7 )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가봇을 막는 비결  (0) 2013.05.06
시기하지 않는 사랑  (0) 2013.04.25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는 믿음  (0) 2013.04.10
인간의 욕망에 관한 고찰  (0) 2013.04.09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0) 2013.04.07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의 세 번째 요소는 시기하지 않는 것이다. 시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젤로우”이다. 영어의 젤러시(jealousy)가 이 헬라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젤로우”라는 단어의 뜻은 “질투하다”, “시기하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다”라는 뜻이다. 남의 자녀, 집, 학벌, 인기, 용모 등을 탐내는 것이다. 십계명의 제 10계명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명하고 있다.

 

성경은 “젤로우”를 탐심과 연결시키고 나아가 탐심은 우상 숭배임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다시 말하면 “젤로우”는 하나님을 섬김이 아니라 사탄을 섬기게 되는 요소라는 뜻이다. “젤로우”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우상 숭배다. 사탄이 “젤로우”하는 마음의 뒤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시기심이 있는 사람은 비교 의식이 강하다. 지면 견딜 수 없어 한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거나 내가 가진 것보다 나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시기심이 작동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삐뚤어진다. 마음이 삐뚤어지고 나면 시기의 대상에게 아주 작은 일에도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상대를 비방하며 거짓말을 꾸며대면서 명예를 깎아 내리기에 바빠진다. 시기심에 빠지면 남이 울 때 자신은 기뻐한다. 남이 기뻐할 때는 속이 뒤틀린다. 심지어 시기는 욕심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만 다 갖고 남은 하나도 못 가져야 직성이 풀린다. 

 

성경에서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을 말한다면 구약에서는 사울 왕이 있고 신약에는 가룟 유다가 있다. 사울 왕은 모든 부귀영화를 다 소유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기의 사위 다윗을 향해 심한 시기를 느끼면서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간다. 한편, 신약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는 시기심 때문에 스승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그는 결국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다.  

 

시기에 빠지면 배은망덕을 합리화하게 된다. 시기는 멸망의 시작이며 인간성을 상실하는 시작점이다. 시기는 사람을 포악하게 만든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범죄들은 언제나 그 뿌리에 시기가 있다. 시기는 또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주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6)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장본인도 시기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법정에 넘긴 것을 알고 있었다(마 27:18). 종교 지도자들은 시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성경은 복음을 가로 막는 주인공도 시기임을 증거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자신의 육체의 정욕에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징도 시기다(고전 3:3, 갈 5:20, 롬 1:29). 시기심은 사탄이 우리의 죄성에 뿌려 놓은 가장 깊은 죄악의 뿌리요 출발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기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젤로우”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시기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방법 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성령 충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신앙이 경건한 성도들과 함께 하면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는 사탄의 유혹인 시기심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는 믿음 

 

잠언 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사람이 죄와 사탄에게 가장 많이 속는 순간은 ‘억울하다’는 마음이 드는 때이다. 이러한 마음이 들면 나를 억울하게 한 그 대상을 향하여 ‘보복’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때 그 충동에 따라 행동하면 함께 악에 빠지는 것이며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주의 음성을 듣고 여호와께서 간섭하실 것을 기다리면, 공의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신다. 공의의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함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악에 물들지 않게 보호하시고 죄의 역사에 말려들지 않게 하신다. 공의의 하나님께 맡겼던 자들은 모든 일들의 결말을 보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살아계심을 보며 찬송하게 된다. 

 

성경은 언제나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 중에 하나는 오늘 잠언 20장 22절처럼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이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성경에는 억울한 일을 보복했던 경우가 여럿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동생 디나가 당한 일에 대하여 세겜 사람들에게 보복을 하였는데(창 34장)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복을 매우 싫어하셨다(창 49:5-7). 요압 장군은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어쩔 수 없이 죽였던 아브넬을 살해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은 요압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고 나아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큰 어려움을 겪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세례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의 목을 베게 한다.  

 

성경은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것을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원한 갚는 일이 주님의 손에 있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온전히 악을 제거하는 차원에서 역사하실 수 있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주의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공적인 기관을 세우셨다. 교회의 재판 기관, 사회와 나라의 재판 기관이 주님의 공의를 위하여 일할 수 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나타난다. 그렇다. 우리가 당하는 억울한 일들마다 스스로 싸우려 하면 우리의 인생은 원수 갚는 일을 하다가 마칠 것이다. 원수를 스스로 갚는 삶이 바로 비참한 인생을 사는 지름길이요 가장 어리석은 삶이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17:13).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참으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께 칭찬 받는 일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야 한다. 공의를 완전하게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그 대신 우리가 할 일은 계속 주의 말씀대로 더욱 복음에 속한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선으로 악을 이기며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아는 신자의 삶이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베소 교회가 받은 칭찬과 책망"  (0) 2013.05.01
시기하지 않는 사랑  (0) 2013.04.25
인간의 욕망에 관한 고찰  (0) 2013.04.09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0) 2013.04.07
왜 십자가인가?  (2) 2013.03.31

 

인간의 욕망에 관한 고찰

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이란 무시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곧 육체의 소욕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인간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인간들은 잠시 자신의 욕망을 감출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가둬둘 수는 없다. 잠깐 과거의 죄로 인한 아픔 때문에 그 기억에 의하여 욕망의 소리를 잠재울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 가운데 있을 때는 반드시 욕망은 인간의 망각과 함께 표면으로 솟아오른다. 이는 마치 물속에 비치볼을 누르고 있으면 잠깐 보이지 않지만, 손을 놓는 순간 물의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런지 육체의 욕망은 가장 방심한 때에 가장 엉뚱한 순간에 터져 나올 때가 많다. 

 

세상에서 악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자신의 욕망을 무리하게 추구한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욕망은 합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가 되면 사람들은 그를 악인이라고 부른다. 이때 그 악인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그의 육체의 욕망이 남들보다 더 강하여 절제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죄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인간들은 기회와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기회와 능력이 주어지면 자신의 욕망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채우게 되어 있다. 인간들 간에 그 방법이 고상한지 그렇지 않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안에서 지복(bliss)을 누리는 것이다. 그 지복은 인간의 영혼이 가장 갈망하는 것을 누릴 때 온다. 따라서 그 지복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지복을 누림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3)라고 기도하셨다. 사실, 주님의 기도 응답은 우리가 지복을 누리는 최상의 상태로 보아도 하자가 없다. 완성된 천국은 다름 아닌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지복을 누리는 상태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복을 누리는 자들만이 ‘비로서’ 더 이상 죄의 욕망을 탐하지 않게 된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말한다. 그것은 성령이시다. 이 땅에 사는 한 성도라 할지라도 육체의 욕망은 여전히 있다.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옛사람의 본성으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살 수 있다. 이는 거듭난 사람이기에 가능하다. 즉, 거듭난 속사람으로 성령 안에서 살 수 있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살면 자동으로 지복을 누리게 된다. 지복을 누리는 한 육체의 소욕을 즐거워하지 않게 된다.  

 

이로 보건대 삶의 가장 큰 문제는 권태이다. 단조로움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삶의 단조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이 우주의 가장 큰 기적이라고 말한다. 이 기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하다. 바로 성령의 충만이다. 존 파이퍼가 말한 것처럼, 일시적인 쾌락에 노예가 된 심령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은 영원하고 최고로 높은 ‘거룩한 쾌락’을 계속 누리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맛보는 것이라 하겠다.  

 

인생을 돌아보니 죄의 쾌락에는 일시적 중독성이 있음을 본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기에 주님 안에서의 복음의 약속을 믿을 때, 즉, 성령을 의탁할 때, 중독된 죄마저도 힘을 잃고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이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기하지 않는 사랑  (0) 2013.04.25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는 믿음  (0) 2013.04.10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0) 2013.04.07
왜 십자가인가?  (2) 2013.03.31
각자의 죄성  (0) 2013.03.30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사무엘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대부분의 설교는 암소에 초점을 맞추어 성도들에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암소처럼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혹은 암소의 최후에 초점을 맞추어 암소처럼 하나님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공동체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설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제 멋대로’의 설교라 하겠다.  

 구속사적 입장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 말씀을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는 매우 부패한 상태이다. 성경은 언제나 한 사회의 영적 부패를 설명할 때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를 묘사한다. 그래서 어리석고 우둔하고 악한 제사장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사무엘상에서도 사회의 영적 부패와 상태를 알리기 위하여 엘리 제사장,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의 모습이 나온다. 특히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보다는 언약궤 자체를 우상시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매우 못마땅하시기에 자신의 영광을 가리시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블레셋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신다. 이는 수천수만 명의 생명을 잃더라도 그들에게 주시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셨던 것이다. 

 한편 블레셋 백성들은 전쟁을 이긴 후 언약궤를 빼앗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도 승리한 줄 알았다. 자신들이 믿는 다곤 신이 승리를 준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언약궤가 들어온 이후 블레셋에는 재앙이 온다. 그들이 믿는 다곤 신이 매일 자빠져서 팔이 부러지고 목이 부러진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언약궤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주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참 신이며 역사하는 신이며 살아계신 전능자인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온 발상이 새끼를 낳은 두 암소에게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만일 두 암소가 함께 이스라엘을 향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이라고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 사건이 바로 벧세메스의 암소 사건이다.   

 신앙은 실체를 향한 신앙이 있고 그림자를 향한 신앙이 있다. 보이는 것은 그림자이고 보이지 않으시는 인격체는 실체이다. 영원한 실체는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없다. 그림자를 향한 신앙은 마침내 허무함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실체를 향한 신앙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보이는 언약궤에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는 미신이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라는 종교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반드시 만났다고 볼 수 없다.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차고 다닌다고 하여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러한 미신적 행위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대치해 버린다면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궤를 들고 그 언약궤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믿고 전쟁에 나가는 종교적 행위와 똑같다.  

 두 마리 암소는 각각 새끼를 두고 있었다. 두 마리가 본성으로 벧세메스를 향하여 갈 수 없다. 암소의 본성에 의하면 새끼에게로 가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암소를 이끌어 벧세메스로 가게 하신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유 없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왜 기적을 행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주길 바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하나님 그분을 대치하여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더욱 분명하게 하시기 위하여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셨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다. 나아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즉, 우리 대신에 죄 값을 치러주시고 우리를 주의 피로 사셔서 참으로 자유롭게 하셨다는 말이다. 왜 이러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는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참된 사랑으로 반응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주를 향한 사랑 가운데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주신 계명에 순종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우리 하나님께서 맘껏 우리를 축복하시며 사랑하시도록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과 순종을 통하여 깊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아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는 믿음  (0) 2013.04.10
인간의 욕망에 관한 고찰  (0) 2013.04.09
왜 십자가인가?  (2) 2013.03.31
각자의 죄성  (0) 2013.03.30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0) 2013.03.16

 

[2013. 3. 29. 고난 주간 금요 설교] 왜 십자가인가 | ▶설교 본문
2013.03.30 10:22
 

십자가인가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비록 한절이지만 너무 영광스럽고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 의로운 자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다.”

 

오늘 간단한 한절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여 성령의 구원의 역사, 성화의 역사가 나타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분 속에 있는 모든 불의와 미움과 죄악을 제거하는 복음의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인가? 답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시기위함입니다.

무엇을 대신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의로운 예수께서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뜻은 대신 죄값을 지불하셨다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까?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화목 제물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구속(Redemption) 또는 속죄(Atonement)라고 합니다.

 

한번 세상에서 생각해 봅시다.

만일 재판관이 간음죄, 살인죄, 도둑, 사기, 유괴 등의 무서운 죄악들을 무조건 용서한다면 어떨 같습니까?

 

유괴 살인범이 잡혀왔습니다. 재판관이 유괴 살인범을 보니 젊은 사람인데 앞길이 창창합니다. 이에 징역 30년을 선고하자니 너무나 불쌍해서 갑자기 법정에서 유괴 살인범을 용서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 나는 사랑이 많다. 죄를 졌구나.  그래 그럴 있지. 내가 용서하마. 이제 그만 집에 가라.’

이후 재판관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간음범, 방화범, 도둑놈, 강도 , 어떠한 죄수에 대해서도 너희들이 감옥에 들어가면 불쌍해서 안되겠다라고 하면서 전부 풀어 주며 용서한다면 어떨 같습니까?  

 

만일 이러한 재판관이 있다면 그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이요, 사람들은 의로운 분노로 재판관을 제거하려 것입니다. 그러한 재판관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사회의 공의가 살아날 것입니다.

 

사람 세계도 그러한데 만일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관이시라면 절대로 죄를 그냥 묵인하고 지나가실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냥 넘어가신다면, 그러면서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상 하나님일 없으며 또한 의롭고 거룩한 재판관의 자리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근거 없이 무조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없습니다. 만일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상 거룩한 분이 되실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온유의 하나님, 오래참으시는 하나님, 겸손한 하나님 그러나 성경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품으로 거룩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죄의 가장 반대편에 서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어떤 죄라도 그냥 지나갈 없습니다. 이유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냥 지나가는 순간 하나님의 완전하신 공의와 거룩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재판관으로서 죄에 대하여 언제나 형벌하셔야 공의와 거룩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공의롭고 의로우실 아니라 사랑이시며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려면 동시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방법은 죄는 벌하셔야 하고 우리는 살리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성상 죄인이요 날때 부터 죄성을 타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모든 행위들, 생각하는 모든 것들, 뱉어내는 모든 말들에는 언제나 죄로 가득찰 밖에 없습니다.

 

신문을 보면 하루라도 죄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살인, 음란, 술취함, 방탕, 마약 중독, 폭행, 변태 , 인간이 있는 곳에는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지독한 죄인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죄에 대하여는 지독히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에 주의 백성들의 죄를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계획을 갖게 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공의한 벌을 내리고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용서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방법은 대속(Substitution) 입니다. , 누군가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십자가의 대속 계획은 사실 창세 전에 이루어진 일이고, 그리고 구약 때에도 많은 부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를 보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첫번째 히브리인입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로서 신실한 사람이요, 모든 인류의 찬란한 영웅입니다. 그는 모든 믿는 이들의 믿음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대속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자녀가 전혀 없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아들은 너의 후손이 것이다.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것이다. 아들이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그는 너의 마음 속에 한없는 기쁨과 웃음을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99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는 경수가 마른 벌써 수십년째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라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길,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음해 사라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말로 표현 못할 기쁨 가운데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는데, 아들은 사실 언젠가 땅에 오실 메시야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약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라나던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아!”

, 부르십니까? 주님!”

네가 사랑하는 너의 독생자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너에게 보여줄 곳으로 가라.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탁을 하시는 지는 없지만,  그러나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니 분명히 어떠한 기적을 통해 이삭을 살릴 것이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1:17-19).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고 증거합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지 이유를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장소는 바위로 가득차고 아주 거친 곳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입니다.  후에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곳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산이기도 합니다.

 

모리아 산은 거칠고 흉악한 산이었습니다. 젊은 이삭이 나무 장자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보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위하여 타오르는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죄에 대한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으로 올라 갔을 이삭이 질문합니다.

아버지! 장작도 있고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나요?”

 

아브라함은 눈물로 가슴이 막힙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발언을 합니다.

나의 아들아!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하셨단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마침내 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산의 꼭대기였습니다.

이삭! 손을 내밀어라.”

이삭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손을 밧줄로 묶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늙은 노인이었습니다. 반면 이삭은 힘이 철절 넘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아무 때라도 아버지를 밀어내고 거부할 있는 힘을 가진 상태입니다. 분명히 그럴 있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순종하는 아들이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상황은 얼마든지 발버둥치고 거부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손을 묶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나는 생명을 스스로 주노니 누가 나의 생명을 취함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말씀하시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합니다. 모습 역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하던 예수님의 고백을 듣는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칼을 들고 이삭을 향하여 걸음 나섭니다. 순간에 이삭은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정신적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고통만큼이나 고통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머금은 ,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아들의 가슴을 향하여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급하게 외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마음을 알았다. 네가 참으로 나를 경외하는구나

 

아브라함이 내리치던 손을 멈추고 눈을 드니 수양 한마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고 수풀에 뿔이 묶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양을 취하고 이삭 대신 양으로 내게 번제로 드리라.”

 

사실, 그날 아브라함도 모리아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양은 하나님의 정하신 장소에서 아브라함과 정하신 때에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양을 보며 기쁨을 감출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다시 살아난 이삭을 안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구나

아브라함은 당장 양을 잡고, 대신 이삭을 붙들고 얼싸 안으며 기쁨에 겨워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들 이삭 역시 자신 대신 나타난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며 한없이 기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양을 잡으면서, 양의 피를 흘리면서 깨달았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하여 어린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삭 대신 번제를 드릴 대속의 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과정을 통하여 양은 상징일 뿐이며 실제로는 이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메시야의 날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대속의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의 특별한 장소를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이 나의 아들 이삭을 대속하였다.”라는 뜻입니다.

 

모세 때에는 출애굽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양을 알려 주셨습니다. 수천수만의 양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유월절 희생양으로 드려졌습니다.

 

유월절 날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하신 심판이 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로 바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지나가서 생명을 구원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피를 때에 내가 넘어 가리라.”

또한 대속의 진리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양을 따로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을 유월절 양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여 길렀습니다.

어디서 유월절 양들을 따로 길렀습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유월절 양을 길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예루살렘 지경에서 목자들이 양을 칩니다.

이들은 어떤 양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바로 유월절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성탄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작은 양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짜 유월절 양이었습니다.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월절 양들이 많지만, 지금 예루살렘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기는  유월절 양입니다. ‘ 유월절 희생양입니다.

 

세례 요한이 양을 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외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때도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감람산에 오르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동문을 지나십니다.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가실 때에 무리들이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할렐루야! 다윗의 자손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동시에 같은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한 유월절 양들도 정확히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없이 많은 유월절 양들이 베데스다 연못 곁의 양의 지나고 있었습니다( 3:32, 12:39). 

 

갈보리 산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도 오르시고, 실제 예루살렘에서 길려진 유월절 양들도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양을 검사합니다. 유월절 양은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합니다.

동시에 제사장들과 심지어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비난하고, 묻고, 따지고, 조사하면서 어디 흠이 있나 찾으려고 온갖 심문을 하지만 아무 죄나 흠을 찾을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법을 대표하는 로마 법정의 총독 빌라도에게까지 끌려가 흠이 있나 조사를 당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고백합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아무 흠도 발견할 없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완전하고 흠이 없는 유월절 양으로서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유월절 3, 지금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사람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아 죽이는 시간입니다. 시간에 로마 병정들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었습니다. 장소도 예루살렘이요, 시간도 같습니다.

 

그리고 산은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모리아 산입니다.

내가  산에서 내가 준비하리라.”

여호와 이레!

바로 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 상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고통과 범벅 속에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예수께서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19:30).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내가 지불하였다.”

 

제사장들은 이제 이상 성전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상 동물 유월절 양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그림자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림자로 상징되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계획은 끝난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용서할 있게 되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어린양을 의지하는 자마다 아무리 불의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대속 제물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하여 그들을 의롭다 하실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을 믿는 자들마다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나아올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관례에 따라 무리의 요구에 따라 죄인 하나를 풀어줄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의로운 예수를 석방하길 원하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십자가 형벌에 넘기기로 결정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빌라도는 의도적으로 무서운 죄수 하나를 무리들 앞에 거론합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거론하였습니다.

 

바라바는 도둑이며 반역자, 살인자, 악한 자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바라바는 너무 무섭고 잔인한 악독한 죄수이기에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예수와 바라바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자신있게 질문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들 군중이 악명 높고 무서운 바라바보다는 분명히 예수를 사면하여 것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희 무리들아! 너희는 누구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누구를 석방하랴!”

그러나 빌라도의 기대와는 달리 군중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사주를 받아서  예수를 십자가에 박으라! 바라바를 놓아주라!” 외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줘? 그러면 예수를 어떻게 하랴?

, 예수의 형벌이 결정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박으라. 십자가에 박으라.”

 

따라서 예수는 도둑놈이요, 반역자요, 살인자요, 온갖 악을 행한 무서운 죄수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에 박히게 됩니다.

 

군병들이 예수님를 잡아 십자가에 달아 멥니다. 그런데 곳에는 세개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세개의 십자가는 사실, 정확시 세명의 강도를 십자가에 박으려고 의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옆에는 무서운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정확히 바라바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메어 달리자, 훼불을 군병 하나가 깊은 로마의 감옥으로 내려갑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지납니다. 쇠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냄새가 아주 퀴퀴합니다. 한참 어두운 복도를 지난 군병 간수가 드디어 어떤 독방으로 찾아 갑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창을 들고 키를 들고 방간을 하나 엽니다.

 

안을 들여다 보니, 인생 동안 내내 무서운 악을 행함으로 얼굴이 흉악하기가 말로 없는 어떤 남자가 벽을 향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수는 군병을 보자 기겁을 하며 귀퉁이로 기어서 숨어들어갑니다.

 

훼불을 군병이 가까이 남자에게 가서 훼불을 얼굴에 비치며 말합니다.

바라바야! 일어나라. 이제 시간이 됐다.”

싫다! 나는 이곳이 좋다. 나를 내버려 두라!”

군병을 피하여 기겁하여 도망치는 바라바!!!

이때 군병이 외칩니다. “이놈 조용히 해라. 이놈아. 내가 간수로 있는 동안 같은 행운아는 처음이다. , 죽지 않게 되었다. 너는 십자가 상에서 죽지 않게 되었단 말이다. 생전에 너처럼 행운아는 처음 본다.”

아니, 군졸 나으리?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없는데요.”

이리 나와 ! 나쁜 . 너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놈인데, 세상에 이럴 수가!”

군병은 바라바를 끌고 복도로 나와 멀리 갈보리 언덕이 보이는 곳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저기 보이지. 언덕. 보여 안보여?  저기 갈보리 언덕의 세개의 십자가가 보이냐! 그리고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사람 보여 안보여? 원래 이놈아 십자가는 너의 자리 아니냐? 십자가는 너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너를 곳에 못으로 박으려고 만들어 십자가이지. 그러나, 너는 이제 자유자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대신 자리에 달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사건 이후에 바라바가 구원을 받았는지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을 정확히 전개해 나가고 계시는데 모든 전개의 내용이 바로 대속을 알려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죄많고 불의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바로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라바를 등장시키셔서 우리가 바라바인 것을 알리고 싶어하십니다.

 

바라바는 도둑놈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도둑놈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까?

 

바라바는 반역자였습니다. 우리도 반역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반역하며 살아갑니까?

바라바는 살인자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살인자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우리야 말로 우리의 죄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무서운 죽음에 넣은 주인공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까?

 

바라바는 죄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 앞에서 영원한 죄값을 치러야 죄수들입니다. , 영적으로 하면 바라바는 바로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로 여겨지는 챨스 스펼전 목사님께서 임종하시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목사님의 신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때, 챨스 스펄젼 목사님께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미소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인간 역사 속에서 최고의 신학자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박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에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을 만분지 일이라도 이해할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의 육체적인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로마 군병들이 채찍하며 고문을 가합니다. 그들의 고문은 상상할 없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채찍은 끝이 갈쿠리로 되어 있어서 사람의 살점을어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당시의 게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놓고자신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으로 간주한 후에 모든 악독한 말들과 무서운 폭행을 가하는 게임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모독합니다. 굴밤을 때립니다. 곤봉으로 예수님을 후려 갈리고, 그리고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선지자라면 누가 너를 때렸는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실컷 장난을 하며 게임을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갈보리 , , 모리아 산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손을 옆으로 후에 대못을 박습니다. 예수님 머리에는 조롱의 표시로 가시 면류관을 씌우더니,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 이제 십자가를 들어올립니다.

이때 모든 몸의 무게가 발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발로 견디지 않으면 십자가의 고통이 몸에 이르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발로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못에 박힌 발이 몇분 견디지 못하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몸의 무게는 박힌 발에서 손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면 손이 고통을 덜어보려고 힘을 다하지만 역시 몇분 견디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후 십자가의 고통은 온몸에 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장 많이 고통을 받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의도적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로마 법을 어긴 가장 악한 죄수들에게 가장 고통을 주어 공의를 세우겠다고 개발한 형벌이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형을, execution , ex: out of: cross: 십자가:   ex-cruciating! 인간의 모든 것이 튀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십자가의 형벌은 율법의 저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 앞에서 인간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숨을 없습니다. 심한 현기증과 함께 피가 터져 나옵니다. 구역질과 견딜 없는 구토와 함께 몸의 모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몸에 있는 모든 땀이 흘러나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는   안에 있는 모든 액체가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몸에 고통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시간에 또한 예수님의 정신적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22:42).

이는 예수님이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을 말합니다.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가 기도하는 중에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 같이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땀이 핏방울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몇년 미국의 권위 있는 의사가 의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할 사람의 피가 구멍을 통하여 흐를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땀이 피가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함께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받으시는 잔에는 모든 죄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로 부터의 인류가 지은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잔에 담겨 있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값이 예수님의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살인죄, 변태, 도적질, 거짓말, 폭행, 사탄 숭배, 우상 숭배, 욕설, 남의 등을 , 언약을 깨뜨림, 유괴, 음란, 마약 등등,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지실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루시는 대속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사건으로써 그분의 마시는 잔에 우리의 모든 죄를 넣고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메네 기도에서 정신적 고통이 너무 무거운지라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잔이 무엇입니까? 잔은  인류 역사 가운데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친히 담당하는 형량인 것입니다.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땀이 핏방울이 되어 흘러내릴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영적인 고통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안에 영원히 계셨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영원토록 한번도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 , 그가 대속하여 담당할 잔으로 인하여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재판관 앞에서 잔의 형벌을 담당하셔야 하는 죄수가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잔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 공의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영적인 고통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아버지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는 지옥 자체의 고통입니다. 사람의 지옥의 고통이 아니라, 수천 수백만의 지옥의 고통을 홀로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아버지는 차마 장면을 수가 없어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셔서 하늘이 어두워 지고 바람과 태풍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장막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가 만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루신 단번의 제사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Once-for-All. 이번 한번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끝났습니다. 구속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Once-For-All)이라는 용어는 법정 용어입니다. 죄에 대하여 내가 치루었다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법적으로 만족되었습니다.  이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계획대로 맘껏 역사하실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영적인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답은 때문입니다. 대신에 ….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공의로우신 법을 만족시키셔야 했는데,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덕분에 영원토록 나의 죄로 인한 죄값을 갚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갚으셨습니다. 아니 내가 지은 죄의 수백배, 수천배를 갚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완전한 자유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에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최고 법정에서의 선포입니다. 누구도 법정의 선포를 바꿀 자가 없습니다. 이는 한번 선포되면서 영원히 바뀔 없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 8:38-39).

 

바울이 외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6-17).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의 기쁨을 소유하라고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적 축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분의 희생에 대해 감사치도 않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보혈만을 믿고 언제나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 되시길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욕망에 관한 고찰  (0) 2013.04.09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0) 2013.04.07
각자의 죄성  (0) 2013.03.30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0) 2013.03.16
기만의 일시적 형통  (0) 2013.03.10

 

각자의 죄성 | ▶칼럼
2013.03.28 07:21

 

각자의 죄성 

 

야고보서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모든 사람은 각각의 죄성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은 양심으로 자신의 죄성과 싸우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으로 죄성을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죄성의 근원은 인간 속에 있다. 그 죄성을 죄악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의 사탄의 유혹이 있다. 그러나 죄성은 가만히 있지 않고 유혹 거리를 찾아 헤맨다. 즉 사탄을 스스로 찾아 헤맨다. 이러한 죄성은 끊임없이 인간의 본성에서 쉬지 않고 나오는 것이니 성경의 선포대로 모든 사람이 죄인임에 틀림없다.  

 

사도바울은 죄성으로 인한 삶의 열매를 뚜렷하게 선포한다. 현저하다고 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죄악을 볼 때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죄악의 열매들이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면 그 열매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땅바닥에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뿌리 깊은 죄성으로 인하여 각 사람들에게 되풀이 되는 죄악들이 나타난다. 습관적인 죄악이 나타난다. 각 사람마다 어렸을 적에 자라나면서 만들어지는 깊은 죄성이 각각 있다. 이 죄성은 인간의 힘으로 제거할 수 없다. 마치 DNA처럼 그 사람의 기질처럼 되어 버렸다. 개성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각 사람의 개성이 죄성과 맞물려 있다. 그리스도를 알고 새사람이 되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지은 죄악으로 인하여 뿌리 깊은 죄성의 기질(성격, 성품)이 각 사람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죄성의 기질이 두개 이상만 되어도 사회 속에서 아주 큰 문제아가 된다. 혈기의 죄성, 음란의 죄성, 거짓말의 죄성, 미움의 죄성, 시기의 죄성, 쾌락을 추구하는 죄성 등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러한 죄성이 가정과 사회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다루기 힘들고 악한 사람들인가! 흔히 기질이 되어버린 죄성은 삶의 중독과 연결되기도 한다. 습관적인 구타, 습관적인 음행, 습관적인 도벽 등이 있겠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러한 죄성의 기질이 ‘평생’ 좇아다닌다는 점이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자신 속의 죄성의 기질과 싸우라고 말한다. 어떻게 싸우는가? 그렇다.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기질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사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죄성의 기질과 같은 편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자신의 죄성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나의 지정의를 포함한 전인격적인 순복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실 때만이, 즉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사실 때만이 나의 죄성의 기질로 살지 않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들이 ‘늘어나면’ 나의 기질이 점차 성령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면 죄성의 그림자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0) 2013.04.07
왜 십자가인가?  (2) 2013.03.31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0) 2013.03.16
기만의 일시적 형통  (0) 2013.03.10
언약의 사자(Messenger) 우리 예수님  (0) 2013.02.27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 대한항공 신우회 말씀 선포 | ▶설교 본문
2013.03.12 17:19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누가복음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본문은 누가복음 10-18장까지 계속되는 예수님의 진리 강론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가장 평범한 이야기로 깊은 영적인 세계의 진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특히 본문의 비유, 즉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는 사후의 세계가 어떠한지와 또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부자에 대하여 소개를 하고 있는데 19절을 보면 부자는 자줏빛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이 표현은 이 부자는 세상에서 신분이 높고 호화로우며 유명하고 부요한 삶을 살고 있음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악하다라는 의도를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가지고 부자는 죽여야 한다,” 또는 부자는 이 세상에서 잘 살았기 때문에 죽으면 반드시 고통을 받는 지옥엘 갈 것이다. 그러므로 잘 살 때 좋은 일을 많이 해 두거라라고 가르치면, 이는 성경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을 아주 곡해하는 것으로서 괜히 부자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조장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본문의 부자는 악한 부자가 아닙니다. 그냥 잘사는 평범한 부자입니다. 단지 자기 돈을 열심히 모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대학과좋은 직장을 다니며, 그래서 좋은 집에서 살고 또한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위치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하면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본문의 부자는 흔히 현대의 부자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합니다.

 

이 부자 집 앞에는 거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나사로라고 합니다. 20절에 보니 그는 헌데를 앓고 있습니다. “헌데는 몸에 나는 심한 부스럼병입니다. 피부에서 진물이 나고 냄새가 나는 병입니다. 너무 가려워서 계속 긁어야 하고 긁으면 그 자리에서 피가 곪아터지는 피부병입니다. 물을 대면 매우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아주 더럽고 악독한 피부병입니다.

 

나사로는 부스럼 병에 걸리게 되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일이 안 풀려서 가난하던 차에 부스럼 병까지 생겼지만 치료도 하지 못하고 더욱 악순환의 고통 속에 빠져, 할 수 없이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지금은 직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지입니다. 또한 부스럼이라는 병 때문에 사람들이 멀리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도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기에 그 부자집의 문전에 누운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관습을 보면, 부자 집에서 잔치가 끝난 후에는 남은 음식을 거지나 가난한 자를 위하여 대문 밖에 내어 놓았습니다. 이 부자도 그 관습대로 행하였습니다. 따라서 나사로는 이 부자집을 택하여 그 곳의 문 앞에 누워 있기로 한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보면, 물론 이 부자가 나사로의 병을 보고 나사로를 사랑하여 자기 아들을 삼거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의원을 만나게 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거지 나사로가 남은 찌꺼기 음식이라도 먹는 것이 싫어서 심통을 부리며 개를 풀어서 물게 하며 못먹게 했다는 그런 내용도 아닙니다. 그냥 이 부자는 그 당시의 다른 부자처럼 행동하였을 뿐입니다.

 

오히려 24절에 보니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호소를 하는데, 이 구절을 통하여 보면 이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기억하여 잘 알고 있으며 나사로를 통하여 심부름 부탁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24절로 볼 때는 이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게 더 자선을 베푼, 어쩌면 다른 부자보다 더 착하고 다른 부자보다 더 많은 관용과 사랑을 가진 부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28절을 보면 부자가 말하길 내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로서 우리는 그 부자가 상당히 가족적인 사람이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형제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악한 사람이라면 심보가 이렇지 않습니다. ‘나도 이러한 고통 받는 곳에 왔으니 너희도 전부 이곳에 와라. 나 혼자 억울하고 심심하구나.’ 그런데 부자는 가족들을 생각합니다. 사실, 고통 중에 남을 생각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부자는 지극한 고통 속에서 가족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얼마나 사려가 많고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까? 얼마나 가정적입니까?

 

심지어 24절과 27절을 보면,“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릅니다. 이로 보건데 그는 평소에 세상을 살면서 소위 신앙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나아가 이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사실을 볼 때 어쩌면 그는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줄로 믿었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유대교에 열심히 있는 부자의 모습이요, 소위 현대로 말하면 교회의 문을 밟고 다니며 스스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아무튼 본문에서의 부자는 세상에서 뚜렷한 선행을 행한 흔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짓을 했다거나 남에게 큰 폐를 끼친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가지고 자기를 위하여 열심히 잘 사는 것 뿐이요, 심지어 교회도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가정적이며 매우 부자였고 사회적 지위가 있었으며 가끔은 고와와 과부에게 몇푼씩 던져 주는 아량도 있는 그러한 부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세상이 일반적으로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돈으로 인생을 즐기고 또한 종교 생활에도 관여하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도덕이나 또 법적인 기준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고 남에게 규탄을 받거나 비난을 받는 그러한 사람도 아닙니다. 특히, 이 비유에서는 그가 지옥을 갈 어떤 뚜렷한 악행이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지옥에 가 있습니다.

 

부자는 지금 자신도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며 구원 받을 줄 믿었는데, 의외로 죽음을 통과해 보니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있는, 고통이 심한(23), 또한 불에 타는(24) 지옥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현실을 보며 이 부자는 놀라움과 좌절과 고통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옥에서 물 한방울마저 먹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봅시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아니 나를 모르십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한방울만 찍어 내 혀에 넣어 주소서. 이 불꽃 가운데서 너무나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하나이다.”

 

제가 번역한 책 중에 청교도 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리차드 백스터의 <영원한 안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번역하면서 얼마나 많이 지옥을 체험하였는지 모릅니다. 한 번은 너무 무서워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 자신이 구원을 받은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서 몇 일 동안 눈을 감고 주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지옥의 깊이보다 더 깊고 넓은 영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구원했음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 그 책의 5장과 6장은 지옥에 대해 집중해서 쓰고 있습니다.

5 . 성도의 안식을 잃는 자들의 큰 비참

6 . 즐거운 시간을 잃고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비참

1. 저주 받은 자들이 잃는 즐거운 시간들

2. 저주 받은 자들이 당하는 너무나 큰 고통들

그 중에 지옥은 영원한 고통이다라는 부분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지옥의 고통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수천만 년이 지나도 지옥의 고통은 언제나 처음과 똑같다. 만일 고통에 끝이 있다면 저주 받은 자들은 그나마 바랄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고통이라니, 생각을 하면 감당할 수가 없다! 그들이 죄를 짓는데 지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형벌하시는데 지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죄를 회개한 적이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형벌하심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에 영원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거절한 것이 영원한 나라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라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불멸의 영혼들은 죄를 지었으므로 정죄 선고를 받아 불멸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일 무덤에 누워있거나 다시 무덤으로 돌아갈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한다! 그들은 소리 질러 외치길 “오 죽음아, 너는 어디로 날아가 버린 것이냐? 이제 와서 서글픈 삶을 끊어주렴. , 고통이 나를 무너지게 하고 나의 존재를 끝낼 수만 있다면! , 마침내 내가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면! ,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라고 외칠 것이다. 이러한 신음들은 그들이 어쩔 없이 고통의 영원함을 떠올릴 때마다 터져 나올 것이다. 그들은 설교와 기도가 길다고 생각했었다. 하물며 끝없는 고통을 당할 그들은 얼마나 고통이 길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들이 누린 쾌락의 길이에 비교하여 그들의 고통의 길이는 얼마나 것인가! 하나는 순간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영원히 이어진다.

 

죄인들이여! 때가 거의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은 영원의 앞에 있다. 죽음은 문을 열고 당신을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가서 밤을 자라. 땅에서 날을 즐기라. 그러다 보면 당신의 밤과 낮은 끝이 나게 것이다. 당신의 생각과 세상 관심들과 쾌락은 영원에 의해 삼킨바 것이다. 당신은 영원히 변함없는 저주의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천상의 기쁨을 우리가 없듯이 지옥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고통은 상상조차 없는 고통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가르침은 당신에게 공포가 아니라 위로가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면 지옥에 대한 내용은 물론이고 천국이나 구원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걱정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올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천국과 자비를 설교하는 것은 당신이 천국과 자비를 거부하지 말고 구하라고 부탁하려 함이며, 지옥을 설교하는 이유는 당신이 단지 그것을 피할 있도록 설득하려 함이다. 만일 당신이 지옥을 피할 가망이 전혀 없다면 내가 당신에게 지옥을 말하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직 이곳에 살아있는 , 당신이 회복할 있는 기회는 아직 있다. 따라서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당신을 당신의 무감각 상태에서 깨우려고 하는 것이다.

아아! 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는 영혼들의 고통을 지금 땅의 사람들이 어찌 있겠으며 어떻게 표현할 있겠는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 1:6).

 

당장 결심을 하여 영혼을 망하게 하는 죄악들을 멀리하고 그리스도께 당신 자신을 전부 드리도록 하라. 그러면 당신의 얼굴은 성도 중에 사람이 되어 당장 천상의 안식을 누리게 것이다. 이상 지체하지 말고 복음의 언약을 붙들기를 바란다! 만일 당신이 죽기까지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그때는 회복이 있을 없다. 다른 날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신에게 진실하게 경고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라. 그러면 당신의 저주를 막아준 영원한 친구 하나를 얻을 것이다.

 

*****

 

지옥의 고통 가운데 부자가 던진 부탁에 대해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안타까움 가운데 대답을 합니다.

부자야. 미안하구나.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있어서, 여기서 너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너는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구나”(26).

다시 말하면, 죽음으로 인하여 갈라지는 영원한 운명은 영원토록 바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만 지옥으로 가느냐 천당으로 가느냐 하는 둘중 한 길을 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고,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지난 후에는 다시는 그런 기회가 일절 없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당하는 이러한 지옥의 영벌, 혹은 나사로가 누리는 영원한 복락은 이 세상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죽으면 각각 결정된 대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거나 아니면 고통의 장소인 음부, 곧 영원한 불꽃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누구를 가르쳐 부자라고 말하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당시에 부자들의 모습이 꼴불견이라 그들을 향하여 이놈들, 지옥에나 들어가라저주한 것일까요? 아니면 너희는 이 땅에서는 평안했고 나사로는 고생했으니, 이제 신세가 바뀌어야 공평하다는 것을 말하시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자, 너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준 부귀로 거지 나사로에게 약 한번 안 지어 주고, 친자식처럼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일까요? 사실, 이 본문에 대한 도덕주의의 가르침은 언제나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가르침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거지 나사로를 봅시다. 거지 나사로! 그는 빈곤과 고독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부스럼 병이 없고 여러가지로 평범하고 건강하게 살 때에는 많은 정답던 사람들, 친하던 사람들, 심지어사랑하는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스럼 병에 든 이후로는 그는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이제는 보고싶은 사람마저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솔직히 지금 이 거지는 이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요,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며, 귀찮은 빈대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또한 혹시 부스럼 병이라도 옮을까 두려워하며 모든 사람이 멀리 멀리 피해 다니는 아주 싫은 사람입니다.

 

지금 그 거지의 입장에서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한끼 때우며 생명을 연장할 뿐입니다. 절망적 인생입니다. 큰 슬픔과 고통의 현장속에 있습니다. 심한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하루의 삶이라고는,부자 집 대문 밖에 누워 있다가 떨어지는 음식이 있으면 그 음식 찌꺼기를 먹을 뿐입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며 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야하니 거지로 구걸할 뿐입니다.

 

아마 이 거지가 죽었을 때는 짚으로 만든 멍석으로 누군가 둘둘 말아서 똥 치우듯이 쓰레기장에 던져 버리고 다른 쓰레기와 함께 불로 태웠을 것입니다. 누가 부스럼 병이 든 혼자 남은 그 거지를 장사나 치뤄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지금 가 있습니까? 이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가 선을 행한 모습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빈곤하고 가난하고 거지였기 때문에 이제는 좀 편안하게쉬라고 하나님께서 천국에 보내신 것입니까? 세상에서 이 거지처럼 지독히 고생하면 죽은 후에는 자동으로 반드시 천국가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만일 이러한 원리로 하면, 거지마다 천국가고 부자마다 지옥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자가 누구이며 거지 나사로는 누구입니까? 주님은 지금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진심으로 이 부자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지옥가지 않을 보장이 있으십니까? 솔직히 우리의 인생이란, 이러한 부자들의 인생이 부러워서 더 열심히 일하고 날마다 지치도록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왜 부자는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을 갔습니까? 여러분, 그 답을 아십니까? 그 답이 나오셔야 성경을 바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바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예수님의 긍극적 질문인 것입니다.

 

29절이 답입니다. 모세와 선지자가 답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네 형제들이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믿고 들으면, 그곳에 가지 않는다.”

그들에게 들으면,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가지 않고 천국가게 되는 것은모세와 선지자들이 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천국 갈 수 있도록 모세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고통 받는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하여 모세와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부자가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여, 그들로 불충분합니다. 혹시 나사로가 가면 그들이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서 말하면, 저들이 회개할 것입니다.”(30)

 

이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31절입니다. 이것은엄청난 진리입니다. “부자야, 만일 네 형제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을 듣지않는다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본문의 핵심을 찾았습니다. 그 핵심은모세와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을 들으면 아브라함의 품이요, 그들을 듣지 않으면 지옥인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자명하고 확실한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모세와 선지자들이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그것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키가 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모세와 선지자라는표현은 구약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모세와 선지자들은 무엇을 말한 것일까요?

 

오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자신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가르쳐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24:25-27).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한 제자들이 함께 모여있고 그들과 함께 모인 성도들 앞에서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24:44-48).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5:46).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10:43).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26:22-23).

 

모세와 선지자가 무엇을 증거하였는지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무한하게 깔려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1:2).

로마서 3: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라고 증거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율법과 선지자는 다른 표현으로 할 때 모세와 선지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가 모세와 선지자가 말하는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모세와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아 구원 받는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메시야시며,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은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이요,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성령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주님께서 부활을 앞두어 약 두달 정도 전에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께서 말씀하시길, 모세와 선지자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볼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약하면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다리며 믿게하신 하나님의 계시였음이요, 이를 믿는자들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생의 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핵심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어리석음은 그가 세상으로 볼 때 특별한 어리석음이 있어서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부자와 누가복음 12장의 비유의 부자는 한결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공통점은 이 세상이 보기에 아주 좋은 것들을 누리기 위하여 열심히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지나면서 천국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의 결론을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2:21).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취하리니,네가 수고하여 이 땅에서 예비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어리석은 자들아.”

 

세상에만 미쳐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준비치못한 영혼들을 다 묶어서,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어리석은 부자, 본문에서는 지옥에 내려간 부자로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 왜 구원을 받았습니까?

22절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고 되어 있고, 23절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나사로의 구원과 관련한 핵심 단어는 아브라함의 품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대해 갈라디아서 37-9, 그리고 갈라디아서 329절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4:2-8, 로마서 422-24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3:7-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3:29).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2-3).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4:22-24).

 

이로 보건데, 거지 나사로가 천국간 이유는 딱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복음을 듣고 믿은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 속에서 그는 이러한 죽음과 고통의 원인이 죄였음을 알았으며,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속죄를 필요로 하였고, 결국 모세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실 어린양을 믿으며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가 대표하는 복음의 소리를 듣고 속죄의 도리와 복음의 도리를 믿고, 대속과 사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부잣집 대문간에 누워 구걸할지라도 마음 가운데는 항상 죄사함을 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늘 바라고 기다리며 불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의 문제 깨닫고 메시야를 통한 속죄를 믿은 것입니다. 나아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이 괴로운 인생 속에서 잠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으로 안긴 것입니다. 본문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는데 부자가 죽을 때는 천사가 인도하지 않지만, 주 안에서 죽은 나사로는 천사가 영광스럽게 호위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거지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와 구원하신 은혜로 천국에간 것입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거지였던 부자였던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국으로 그 영혼이 가게 된 것입니다.그 외에는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님의 비유는 나를 믿으면 천국이요, 나를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하려는 핵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죽으면 곧 바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영원히 바뀔수 없는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운명은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아무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주 예수께 속하였는가 아니면 아닌가.다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에 피를 토하듯이 외치고 싶습니다.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영접하면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천국백성이 되었으며 언제 죽어도 천국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외칩니다. 예루살렘 큰 광장에서 외칩니다.

다른 이로써는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

 

이제 다 같이 성경 한 구절을 찾읍시다. 데살로니가후서 18-9절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우리의 삶이 모세와 선지자를 잊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말씀에 근거를 내리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까이 하며 성경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천국으로 인도하시지만, 하나님을 잊고 망각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고 살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고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어 영벌을 받게 됩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은 죄를, 그래서 하나님을 망각하는 죄를 최고의 악한 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 안에서 영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다시 한번 복음을 깨닫고 주께 나오시며, 우리의 짧은 여생을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그의 보내신 독생하신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의 품을 알립시다.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가 전한 주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립시다. 남은 여생에 더욱 복음을 알리시며 복음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출처]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 대한항공 신우회 말씀 선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작성자 스데반 황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십자가인가?  (2) 2013.03.31
각자의 죄성  (0) 2013.03.30
기만의 일시적 형통  (0) 2013.03.10
언약의 사자(Messenger) 우리 예수님  (0) 2013.02.27
하나님의 능력과 죄사함  (0) 2013.02.25

 기만의 일시적 형통

 사무엘하 15: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차지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세우지 않았음에도 상관없이 자신의 꾀와 힘으로 왕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주님의 역사가 아닌 인간의 꾀로 마음의 우상 및 야망을 이루려는 자들은 언제나 기만이 나타난다. 철저한 음모를 꾀한다. 오랫동안 생각하며 악한 일을 도모한다. 이 기간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거나 순종하려는 자세가 없다. 계속 죄악을 자신의 머리 위에 쌓을 뿐이다.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할 때까지 끝없이 죄악을 쌓는다.

 

압살롬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속인다. 그 첫 단계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정한 방법으로 사로잡는 것이었다. 다윗 시대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왕께 호소할 수 있었다. 압살롬은 이러한 사람들을 겨냥하여 그들이 왕을 만나기 전 왕을 오해시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으로 “왕의 이름으로” 억울함을 해결해 준다. 억울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야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압살롬의 동기는 왕의 권한을 가로채고 자신의 권한을 늘리려는 속셈이기에 악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압살롬은 왕인 아버지를 속였으며 왕의 재판을 찾는 군중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다윗을 나쁜 왕으로 만들었다.

 

무려 4년간 이러한 일을 하다 보니 (참으로 오랜 기간 자신의 동기와 음모를 감출 수 있는 압살롬을 볼 수 있다!) 압살롬을 따르는 자들이 허다하게 많아졌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보살핀 압살롬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드디어 자신의 숨은 야망을 이룰 때가 되었다. 반란을 일으킬 날과 장소를 잡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빈틈없이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을 만나 헤브론으로 “여호와께 예배 드리러 가겠다”고 말을 한다.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린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마저 자신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는 압살롬이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께 진실한 예배, 애통하는 예배를 드린 흔적이 압살롬에게는 없다. 아무튼 그의 반란은 치밀한 계획 가운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그는 누구에게도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아서, 특히 영특한 다윗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다윗의 입장에서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는 아들 압살롬을 그 어찌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었으랴!

 

이 와중에 간신이 있다. 아히도벨이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에게 총애를 받아 지극히 높은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이 못마땅하기에 압살롬 편에 서게 되었을까! 그는 압살롬이 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며 그러기에 약삭빠르게 신의를 저버린 것이다. 이제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긴밀하게 만난다. 그 장면이 위의 구절이다.

 

“제사 드릴 때에” …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가짜들은 신앙을 탐욕의 도구로 삼는다. 그들의 신앙은 언제나 거짓과 동반된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우상을 이루기 위한 종교 형식이며 위선의 껍질일 뿐이다. 압살롬에게서 종교와 신앙이라는 명목 하에 철저하게 진행되는 거짓과 모함과 위선을 본다. 나아가 그들의 계획이 잠시 형통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누가 이들의 계획이 완전한 멸망이 될 것을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완벽한’ 궤계를 엎으신다. 신기한 능력으로 엎으신다. 압살롬이 이길 것 같으나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의 기만과 궤계를 부끄럽게 만드신다.

 

다윗은 연약한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진실하였다.’ 한때 밧세바로 인하여 무서운 죄악에 빠졌던 것 외에는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진실하였다.

 

오늘 우리는 내 힘으로 내 원함을 위하여 사는 삶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삶은 신앙을 수단으로 삼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반드시 기만과 거짓과 악을 도모함이 진행된다. 따라서 철저하게 우리의 삶의 목표부터 점검하자.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 그분만이 나의 삶의 목표요 나의 삶의 기쁨인가? 하나님이 나의 삶의 면류관인지 분명하게 하자. 매일 순간마다 내 삶의 목표와 동기를 점검하며 살아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며 그토록 깊고 질긴, 그리고 완벽하게 기만을 진행시키는 우리 속의 죄성에게 우리 자신도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각자의 죄성  (0) 2013.03.30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0) 2013.03.16
언약의 사자(Messenger) 우리 예수님  (0) 2013.02.27
하나님의 능력과 죄사함  (0) 2013.02.25
가시떨기 밭  (0) 2013.02.21
101. 언약의 사자 (Messenger) 우리 예수님

 

말라기 3: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당신은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약간 어려운 질문인데 그 답은 세례요한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점은 세례요한은 구약에서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이사야 선지자도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하였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말라기 선지자는 이사야의 예언과 함께 여호와의 음성을 알려준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말 3:1).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선지자로서 구약 선지자들이 외쳤던 똑 같은 주제인 죄, 회개, 구원을 외쳤다. 그는 그 당시에 너무나 영적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꾸짖으며 광야에서 외쳤다.

 

중요한 것은 말라기 3장에서는 세례 요한 말고 또 다른 사자 (Messenger)를 언급한다는 점이다. 바로 언약의 사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사자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다 포함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초림하신 예수님을 원치 않았다. 시므온이나 안나와 같은 ‘남은 자’ 외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야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능력 가운데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린다. 그 때가 되면 주께서 우리의 죽을 몸을 구속하실 것이다(참조: 고전 15:51-54). 그때 그는 “갑자기 (KJV 은 말라기 3:1절의 히브리어 피쏨갑자기로 옳게 번역하였다) 오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36-37)고 하셨다. 

 

말라기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그의 성전으로 오신다. 초림 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또한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냄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 그러나 “홀연히” 주님은 주의 살아있는 성전인 주의 교회를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말 3:2).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지금 우리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 속에서 연단을 받고 있다. 우리는 주의 성령에 의하여 깨끗하여지며 주의 말씀과 여러 불같은 연단에 의하여 거룩하여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질문하길 말라기가 예수님을 언약의 사자라 말하였다면 어떤 언약을 의미하느냐고 질문한다. 그 대답은 물론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언약을 말한다. 주님은 모든 언약을 다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아담의 행위 언약을 완성하셨다. 우리 주님은 믿음의 아브라함의 은혜의 언약을 이루셨으며 모세의 율법의 언약을 다 이루심으로 의를 획득하셨고 그 언약 속의 의식 및 제사 제도가 예표하는 바를 다 성취하셨다. 우리 주님은 다윗의 언약을 완전하게 이루셨다. 예수님은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실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새언약도 완성시키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1-34)

  

예수님은 모든 언약의 주가 되신다!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남은 마지막 언약은 복음의 새언약이다.  

    

지금까지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 보았다. 이 놀라운 연구를 마치면서 필자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구약 성경의 매 페이지에서 우리의 귀한 구세주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각 성경마다 예수님을 발견하여 만나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0) 2013.03.16
기만의 일시적 형통  (0) 2013.03.10
하나님의 능력과 죄사함  (0) 2013.02.25
가시떨기 밭  (0) 2013.02.21
성령의 검을 가지라  (0) 2013.02.19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죄사함

 

누가복음 10:17-20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칩십 인을 임명하시고 주께서 친히 방문하시려는 동네와 지역으로 그들을 미리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칠십 인에게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10:9).

 

이에 칠십 인이 각 동네와 지역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들은 또한 병자들을 치유하며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메시아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라.

 

칠십 인은 맡겨진 동네와 지역을 다 돌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 후에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역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엄청난 역사들이 자신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병든 자가 일어나고 심지어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이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흥분하였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기뻐하며 보고하였습니다.

주님!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18-19).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진 사건은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나 다시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계시록 12장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2:10).

 

이는 완전한 의를 이루신 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십자가 상에서 보혈을 흘리셨을 때 자기에게 속한 모든 백성을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사건과 연결됩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하늘에 올라가 주의 백성들을 참소할 수 있었는데 십자가 대속 이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 참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11).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3-34).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를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선명한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빛의 나라인 반면 사탄의 나라는 어둠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태양과도 같습니다. 감히 태양을 이길 수 있는 어둠이 어디 있습니까? 태양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칠십 인의 제자들은 마치 휏불이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어둠은 휏불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휏불 앞에서 어둠은 물러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에 하나님 나라와 사탄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하는데, 어두운 밤의 커다란 축구장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년이 작은 성냥개비로 불을 켭니다. 어둠이 짙지만 그 빛이 멀리서도 보입니다. 그럼에도 성경개비의 에너지가 약하여 어두운 축구장을 전부 환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작 소년의 손바닥 만큼 희미한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0개의 5000 와트 할로겐 램프가  환하게 켜지는 것입니다. 전력 공급을 강하게 받으며 20개의 할로겐 램프가 켜지자 축구장은 당장 대낮처럼 환해졌습니다. 이에 그 밤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축구를 하며 신이 나서 즐겼습니다. 영적으로 잘 훈련되어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과 어린 양 보좌로부터 강한 은혜를 받아 뿜어내는 그러한 할로갠 램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 중에 대낮이 생각이 났습니다. 끝없이 타오르는 가운데 무한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태양이 지구를 밝힙니다. 그러면 가려진 곳 외에는 전부 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어두운 구덩이는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 구덩이에는 박쥐들과 뱀들과 더러운 곤충들이 우굴거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빛으로 드러나기만 하면 빛이 너무나 싫어서 어쩔줄 몰라하다가 죽게 됩니다.

 

마귀들의 모습이 이와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구약 시대라는 밤이 지나고 커다란 태양이 떠오른 대낮이 신약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밝은 빛 가운데서 바람처럼 왕래하시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빛이 싫어서 무정갱이라는 어두운 구덩이에 다들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범죄함으로 인하여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들면 마귀가 어둠 속에서 기다리다가 공격하여 낚아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빛과 같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빛 앞에서 어둠의 세력은 물러갈 수밖에 없으며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에 거하면 마귀들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빛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면 귀신들이 황급히 도망치느라 자빠지며 난리가 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죄를 좋아하여 어두운 구덩이로 들어가면 마귀의 밥이 됩니다. 비록 마귀는 무저갱이라는 어두움에 갇혀 있을지라도 누구든지 스스로 범죄하여 어둠의 구덩이로 들어오면 얼마든지 그 영혼을 사로잡아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불신자들은 한결같이 어둠에 속하여 있다고 알려줍니다. 따라서 마귀는 그들을 얼마든지 주관하며 협박하여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2-3).

 

따라서 마귀는 불신자들의 마음 가운데서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죄로 인하여 어둠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빛의 생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 안에 실제로 거하십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주께서 보내신 칠십 인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알든 말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과 함께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권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빛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신기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  

 

이 말씀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귀신 축사보다 무한하게 귀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귀신 축사 권능과 죄 사함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하늘 생명책은 어린양의 생명책이며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다름 아닌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된 자들이라고 증언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깨닫고 그 효력을 누리는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의 특징은 마귀에게 결코 절하지 않습니다. , 죄의 세력에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속된 것과 가증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 7:14).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0:15).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21:27).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나타내는 자들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7:20-23).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나타내면서도 얼마든지 불법을 행할 수 있으며 하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을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수표는 아닙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할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라면 그들은 하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 불법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죄 사함 및 죄을 이기는 거룩의 비결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 거룩을 이루는 복음의 능력을 가르치지 못하는 선지자들은 귀신 축사를 할지라도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마귀의 나라는 뚜렷합니다. 그 나라에는 언제나 더러움과 어두움과 속임수과 거짓이 있습니다. 심한 미움과 심한 질투가 있습니다. 모함이 있고 협박이 심하고 진실함이 없습니다. 결코 죄성이 제거될 수 없습니다. 신경질과 거만함과 뻔뻔함과 이간질이 마귀 나라의 특징입니다. 놀랍게도 거짓 영이 활동하는 곳에는 깊게 숨겨진 음란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사탄의 세계는 철저한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사탄은 폭력과 어둠의 세력으로 그 조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악령들의 세계는 여러 계급이 있으며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권세가 크고 간교함이 더욱 깊습니다.

 

특히 귀신 세계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인류를 속여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류를 속여 자신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탄은 세상 종교를 만들었으며 또한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는 죄사함을 얻지 못하도록 하여 구원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힘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복음을 가립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복음을 가리기 위해 사탄이 하는 가장 간교한 일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입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사탄은 이 사역을 이루기 위해 최고층의 악령들을 풀어 거짓 선지자들로 활동하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심지어 사탄은 인간들을 유혹하기 위해 덜 영리하고 덜 힘이 센 천박한 귀신들을 쫓아내어 사람들의 신임을 얻습니다. 바로 귀신 축사 현상입니다.

 

특히 무당이 굿을 하자고 하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는 신유 및 귀신 축사 모임으로 가자고 합니다. 무당처럼 점을 봐주거나 개인의 앞날을 예언해 주는 것 등은 전부 마귀가 하는 일들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생명을 담보로 하여 예언해 주고, 헌금을 담보로 하여 협박하며 예언한다면 이는 무당이 굿을 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이러한 집회에는 성령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으로 모임을 갖는다고 해도 실상은 고차원의 귀신들이 우굴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귀신을 내어쫓는 현상은 좀더 높은 귀신을 믿게 하여 사탄의 종이 되게 하려는 사탄의 전략일 뿐입니다. 따라서 귀신 축사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나 영을 따르면 사탄에게 속기 안성맞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부터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는 귀신 축사는 사탄의 장난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이 세상에는 귀신 축사 집회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다 가짜들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탄이 거짓 기적과 속임수를 행할 수는 있어도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제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거룩으로 나타나는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사탄은 인간들로 하여금 죄악과 거짓으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결코 거룩과 진리로 인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거짓 영들을 분별하는 원칙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복음,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다른 예수를 제시하거나 다른 영을 부르거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가짜들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이 땅에 임하여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권능이 보혈 흘리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통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 귀신들의 역사를 물리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귀신으로 인한 병마와 폭행과 더러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능력이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14:17).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오는 것이며 또한 죄성을 이김으로 오는 빛의 열매들입니다.

 

이미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의 최종 영적 전쟁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계시록 20장에 의하면 악령들의 두목인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하여 성령께서 그를 결박하셔서 무저갱에 가두어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우리 신자들의 싸움은 마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총 사령관 아이젠아워의 노르만디상륙 작전에서 승리의 대전이 지난 후 남은 전쟁을 치루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의 예로 보면,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이기도록 되어 있던 전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께서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전쟁을 뒷마무리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이미 승리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 개인은 공갈과 위협에 속아 패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남은 싸움을 이 땅의 교회에게 허락하심으로 교회가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 주님의 남은 싸움에 동참함으로 면류관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24)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마귀의 역사라고 치부하고 마귀 쫓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얻은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며 전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우리에게 패배가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영광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한편 이미 패배한 사탄의 세력은 마지막까지 발악할 것이지만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 앞에서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6:20).

 

성경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보좌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누리면 평강을 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평강은 우리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인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속히 믿음으로 나아가는 신자들의 발 아래에 사탄을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여 거룩을 향한 영적 전쟁을 기꺼이 치르고 있습니까? ,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상황 속에서 거룩한 주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인내하며 순종하십니까?

 

쓸데없이 빛의 나라에서 나와 다시 어둠의 나라에서 서성거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위험한 뒷골목에서 서성거리다 보면 반드시 악한 자를 만나 어둠의 포로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빛에서 나와 일부러 어둠 속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는 사자 마귀가 어둠의 세력 속에서 삼킬 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어둠 속에 갇힌 사탄은 결코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행여 사탄이 불법의 사람들과 불법의 제도를 통해 주의 백성을 박해하고 어려움을 준다고 해도 성도의 머리털하나까지 세신 바 되시는 주 하나님을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가 주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주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완벽하게 보호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병이 임할 수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올 수 있으며, 타락한 사회 속에서 많은 심적인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거룩하여질 것이며 또한 언제나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와 희락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승리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사탄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마귀에게 겁먹지 말고 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스스로 짓는 죄입니다. 사탄이 깔아놓은 유혹에 스스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 자신을 망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나와의 싸움이 우리 신자들에게는 가장 큰 영적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빠지지 말고 더욱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의식하면서 이미 승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전진하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군사로서 믿음으로 이겨나가며 영광의 주를 닮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예수보혈교회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만의 일시적 형통  (0) 2013.03.10
언약의 사자(Messenger) 우리 예수님  (0) 2013.02.27
가시떨기 밭  (0) 2013.02.21
성령의 검을 가지라  (0) 2013.02.19
교조주의란?  (0) 2013.02.11

 

가시떨기 밭

 

마가복음 4:18-19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에 한 동안 그 말씀을 잘 따른다. 그러나 세상 염려가 들어오면 그들의 마음에는 말씀을 위한 여유가 사라진다. 또는 재물에 대한 탐욕이 들 때, 그리고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게 될 때 그들이 마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새 그 흔적마저 남지 않는다.

 

“누구든지 내 입장이 되어 보면 어쩔 수 없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렇게 좋은 것을 어떻게 내려놓으라는 것이지. 나는 할 수 없어.” 이러한 변명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그 사람의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다.

 

자아 연민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하는 주범이다. 자아 연민은 우리 안의 성령을 소멸한다. 자아 연민은 나의 모든 관심이 주님과 말씀이 아니라 오직 내 자신을 향해 집중하도록 만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나를 보는 대신에 너의 문제를 보기 시작하면 나의 말씀은 네 마음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나의 문제를 보게 만든다. 문제를 보며 두려움과 염려에 빠지게 만들면서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질식되도록 한다. 사탄은 만일 그가 당신의 눈을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문제들을 보게 하는데 성공하면 당신의 신앙생활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경이 얼마나 자주 염려하지 않기를 경고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의 염려를 주께 내려놓고 주를 의지하라고 부탁하신다. 또한 염려 대신에 그 상황에서 주님께 순종하기를 힘쓰다 보면 어느새 염려의 상황들을 해결해 놓으신다.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도록 막는 가시들을 주의하라.

 

 

생명수나무 쉼터/한아름 


성령의 검을 가지라

 

에베소서 6 17

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de,xasqe kai. th.n ma,cairan tou/ pneu,matoj( o[ evstin r`h/ma qeou/Å)

 

바울 당시의 로마 군사에게는 다섯 가지 종류의 칼이 있었습니다. 먼저 큰 칼이 있는데 그 칼은 주로 두 손으로 사용하는 칼이었습니다. 로마 병사는 그 칼을 주로 등에 차고 다니다가 원수가 나타나면 두 손으로 그 칼을 들고 공격하였습니다. 주로 상대의 방패를 내리치거나 또는 말이나 수레를 탄 적을 향하여 공격할 때 큰 칼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작은 손 칼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 말로는 단도라고 합니다. 그 칼은 한쪽 면에만 날이 있거나 또는 앞 부분에 날이 있는 단도였습니다. 로마 군사들은 그 칼을 사용하여 땅을 파기도 하고 과일을 잘라 먹기도 하며 짐승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종류 칼이 더 있었는데 길이와 두께가 달랐습니다. 이러한 칼 들은 원수를 죽이기보다는 여행할 때 필요한 장비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검이라고 말한 마카이라라는 칼은 매우 독특한 칼입니다. 이 칼은 원수를 반드시 죽이려 할 때 사용하던 특수용 칼이었습니다. 이 칼은 많은 연구 끝에 만들어 진 칼로서 약 50 센치, 즉 성경 표현으로 일 규빗의 길이가 되었습니다. 손가락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정도의 길이입니다. 이 칼은 특공대들이 사용하였고 그 칼의 특징은 좌우에 날 선 검이었습니다. , 본문의 검은 마카이라는 칼이며 좌우에 날선 검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칼로 어떻게 적을 공격합니까? 이 칼은 칼자루를 잡을 때 일반 칼과 반대로 잡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칩니다. 또는 칼 날을 정면으로 하여 찌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 검은 복부를 공격하는데 사용됩니다. 복부를 찌를 때는 주로 칼자루까지 몸 속 깊숙이 꽂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의 복부에 칼을 꽂으면 약 10 30초 가량 기다린 후에 그 칼을 끄집어내는데 그때 돌리면서 잡아 당깁니다. 그러면 적의 창자 및 간, 내장 등이 칼에 딸려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그 칼이 한번 꽂혔다 빠지면 적군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칼이 바로 이 마카이라 검입니다.

 

이 칼을 사용한 예가 사사기 3장에 잘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에훗이 그에게로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이르되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나니 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3:15-22).

 

아무튼 신자의 공격 무기중 원수 마귀에게 가장 큰 치명타를 주는 것이 바로 마카이라, 곧 한 규빗의 좌우의 날선 검인 성령의 검입니다. 이 검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한 규빗의 좌우에 날선 검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검으로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반드시 비참하게 제거하십니다. 사탄의 깊은 내장까지 도려내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성경의 검을 흐레이마 쎄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쓴 헬라어는 아주 정교하게 선택된 단어로서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 즉 객관적인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성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하여 로고스가 우리 각 개인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될 때 사용되는 레이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성령이 역사 하셔서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의 말씀은 원수 마귀를 죽이는 엄청난 무기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검은 영적 전쟁에서 적군 마귀를 향하여 치명적인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성령의 검이 무엇인지를 요한복음 14 26절에서 알려 주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4:26).

,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우리 각자에게 성령의 검인 것입니다. 성령의 검은 특히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에게 가장 필요한 영적 무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모두에게 꼭 필요한 영적 무기가 있다면 바로 성령의 검입니다. 여기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은 성령의 검이 우리 가운데 있으려면 먼저 로고스를 아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하고 성경을 잘 알아야 성령의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로마 병사는 이 마카이라는 검을 언제나 허리띠에 차고 다녔습니다. 또는 사사 에훗처럼 바지 옆에 차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어찌하든 허리띠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 성령의 검은 진리의 허리띠인 성경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및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성령의 검을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 레마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떤 특별한 만남에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나에게 기억나면서 그 순간에 적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를 내게 적용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며 적용된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 말씀에 힘입어 의지하고 순종하면 반드시 사탄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의 음성이 들리면 곧바로 순종하기 바랍니다. 그 음성은 성령의 좌우에 날선 검이며 바로 그 검으로 어둠의 원수를 찌를 때 엄청난 승리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의 검이 주어질 때 불순종하면 그때는 적에게 당하게 되어 매우 비참하게 됩니다.

 

제 인생에 이러한 경험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기억났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을 무시하고 제 맘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사탄의 공격에 무너지게 되면서 결국 엄청난 치욕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어떤 상황에서는 그 반대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날 때 순종하며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큰 손해를 입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검을 휘두르고 나면 당장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탄의 역사가 물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내 개인 및 가정을 비롯한 주변 전체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검은 짧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떤 짧은 말씀으로 내 마음 속에 계속 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음성을 또는 그 강한 생각을 성경에 즉시 비추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음성이 성령의 검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성령의 검이면 주저없이 검을 들어 적을 내리치기 바랍니다. ,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전 백승이며, 적의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하는 백발백중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하는 목사님의 음성이 여러분 각자의 마음에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말씀이 여러분의 성령의 검입니다. 그 많은 성경의 내용중, 여러분 개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검은 때와 상황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각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검은 특이하며 각각 다르게 임합니다. 그 검을 받으면 놓치지 말고 마음에 품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검을 항상 가지고 다니다가 적군을 치기 바랍니다. 그 말씀은 원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 자신도 성령의 검으로 마귀와 싸우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며 주리셨을 때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아주 간교한 유혹이며 엄청난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말씀을 끄집어내셔서 그 상황에 맞는 말씀으로 변화시켜 마귀를 대적하셨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4:3-11).

, 예수님께서도 기록된 말씀 중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그의 상황 가운데 주시는 말씀으로 사탄을 공격하는 검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무나 신기한 것은 본문의 마카이라 검에 대하여 신약은 더욱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 16절을 보면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성령의 검이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나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데, 이는 로고스로부터 성령의 검 레이마가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록 2장에는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2: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 예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심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주의 복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지혜를 주십니다. 이 성령의 검의 주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성령의 검을 항상 차고 다니는 사람은 그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깨어 근신할 수 있으며 적에게 공격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특별히 성령의 검을 그 입으로부터 내어 놓는 하나님의 종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회개하게 하고 태양같은 주님의 권세 앞에 두려워 떨게 만듭니다. 그러한 주의 종은 그에게 주어진 성령의 검을 통해 청중의 마음 안에 숨겨진 모든 죄악들을 밝히 드러냅니다. 마치 내장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사람들의 더러운 죄악들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한 후에 회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4장은 성령의 검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4:12-13).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할 때 성령의 검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37).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검은 원수 마귀를 제거하고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공격용 무기입니다. 이 무기가 없으면 우리는 실제로 사탄에게 조롱과 시달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탄은 죽지 않고 계속 공격하고 또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검으로 사탄의 공격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사탄은 그 상황에 관한한 완전하게 패배하기 때문에 한 동안 다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성령의 검을 자유롭게 구사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

 

첫째, 말씀을 깊게 묵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 읽는 시간과 그 말씀을 개인적으로 묵상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새벽 또는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그 하루를 위해 성령의 검을 취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또는 밤에 잠들기 전에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는 것도 하루를 주님과 함께 정리하며 성령의 검을 예리하게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둘째, 말씀을 암송해야 합니다. 토씨 하나까지 외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또한 성경 번역도 많아졌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말씀이 어떤 성경, 어떤 장, 어떤 절에 있는지 알 만큼 성경을 잘 아는 것은 특별한 상황에서 원수 마귀를 만났을 때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인생이란 삶의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지금은 다 평탄한 것 같지만 건강을 잃거나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사람 관계가 너무나 힘든 상황이 올 때 성령의 검이 없는 자는 사탄에게 져서 매우 비참하게 되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평소에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던 사람은 위기가 왔을 때 성령의 검을 휘두르며 하나님의 크신 승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 예로 다니엘을 봅시다.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바벨론의 모든 박사와 지혜자들을 다 멸하라고 명합니다. 따라서 모든 박사들과 지혜자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친구 셋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그 상황에 적용합니다. 그는 친구 셋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느브갓네살의 꿈의 비밀을 알아내어 그 해석을 알려줍니다. 결국 가장 열악한 상황을 도리어 하나님을 알리는 최고의 기회로 만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귀의 가장 강한 공격에 승리하여 최고의 승리를 얻어낸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살다가 위기 때에 주의 말씀을 적용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    

 

셋째, 말씀을 향한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갈급함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절대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시편 119편을 보니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19:130-131)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같이 우리 주 예수님의 생명수를 갈급해 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갈급함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이 이미 강퍅하여진 것을 인정하고 간절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한 후 말씀을 향한 갈급함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붙든 분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성경 공부란 두 가지인데 성경을 여러번 반복하여 통독하는 것이 있고, 또한 복음을 정확하게 붙든 주의 종을 통해 설교를 듣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세월이 지나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로고스가 체계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삶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한 훈련이 되면 수시로 성령의 검을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검을 휘둘러 영적인 승리를 얻은 체험을 얻게 되면 다른 성도분들과 함께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검을 서로 나눠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 공동체가 더욱 말씀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한국에 와 보니 이 시대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영적으로 쉬운 싸움이 아닌 것을 발견합니다. 사회 곳곳에 우상과 미신이 판을 치고 있고 점쟁이들과 무당들이 더욱 기승을 얻고 있습니다. 대기업 같은 경우도 돼지 머리 놓고 고사 지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며 그 일에 동참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또한 고위 공무원일수록 부정부패가 심하며 또한 사회 전반에 걸쳐 비리가 만연하여 있습니다. 위로 갈수록 부정부패가 있으니 함께 하지 않으면 승진하지 못하는 등의 손해를 보거나 대인 관계가 깨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지나친 사치와 과소비로 사람들은 정신이 없고, 노인들은 건강하고 돈은 있는데 할 일이 없으니 더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또한 자녀 교육이 우상화되어 있는 점, 나아가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심각한 음란과 음행, 간음, 간통등은 가정을 무너뜨리고 이혼을 합법화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물건이든 짝뚱이 많아서 속는 일이 많고 어디서나 믿고 살 수 없는 음식, 상품, 물건들이 없습니다. , 신용을 잃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이제 더 이상 참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교회인데, 이미 여러 교회들이 마귀에게 무너져서 오히려 세상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는 더 이상 정직과 진리와 거룩의 대명사가 아니라 세상 복을 얻기 위해 교양과 정직과 상식을 잃은 광신자들의 모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세상 복을 추구하느라 복음과 성령의 검을 잃고 어둠과의 싸움을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나 종교 개혁이 있던 시대, 또한 청교도 시대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정직과 거룩의 대명사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성령의 검을 힘차게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 어둠과 더러움을 차단하였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장래는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장래가 의인 10사람이 없어서 멸망한 것처럼, 요나가 탔던 배가 요나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그 많은 사람이 풍랑의 위기에 처하여졌던 것처럼, 현재 한국의 장래는 북한의 핵 개발도 아니고 미국, 중국, 일본과의 대교 정책도 아니라, 한국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 우리가 성령의 검을 휘두르면 대한 민국이 멸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도구가 될 것이지만, 교회가 배도하여 세상과 같아지면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기 바랍니다. 성령의 검의 위력을 믿기 바랍니다. 성령의 검의 위력은 그 험한 십자가의 보혈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성경을 자주, 많이, 깊게 읽기 바랍니다. 함께 성경을 읽고 깨달은 바를 나누기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외치는 주의 종의 설교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음과 같은 그러한 사모함이 없다면 이 시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그러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성령의 검을 차기로 결정하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검이 주어질 때 곧바로 휘두르는 것입니다. , 신속하게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참으로 게으르고 악한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원수 마귀가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의 검을 휘두드기를 거절하는 죄성이 실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다짐합시다. 성령의 검이 주어질 때 곧바로 순종하겠노라고 결단합시다. 이러한 결단과 함께 성령의 검, 즉 레이마 세우,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능력과 죄사함  (0) 2013.02.25
가시떨기 밭  (0) 2013.02.21
교조주의란?  (0) 2013.02.11
종교 다원화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0) 2013.02.09
사탄을 알고 대적하라  (0) 2013.02.04

 

필자의 신학은 소위 '칼빈주의'에 속한다. 즉, 개혁주의이다.

하지만 필자는 개혁주의를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말에 대해 절대 공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공간 복음서를 통해 만나 구원하신 자들은 대개 가난하거나 무지하거나 죄 많은 세리들과 창녀들이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바울이 이를 증거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26-31).

 

개혁주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필자는 그들을 "교조주의자들", 또는 "교단주의자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못지 않은 악한 자들이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와 다르다고 하여 구원 문제까지 들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도전하는 거만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가 아닌 자들은 '이단'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어찌 더 악한 말이 있겠는가! 이들 중에는 칼빈주의의 5대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며 구원을 못 받았다고 확신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 칼빈의 5대 교리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리치는가? 성경 어디에서 우리의 구원 조건은 그 많은 교리를 정확하고 자세히 다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구원은 성령의 독자적인 역사로서 성령에 의해 거듭나게 될 때 영적 아기처럼 갓태어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처음부터 생기는 가장 중요한 의식은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한 하나님과 예수님께 갖게 되는 감사이다. 하지만 어찌 영적으로 갓태어난 아이가 칼빈의 5대 교리를 상세하게 다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수년 걸리는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자요 이단이 되는 것인가? 그럴 리 없다.

 

바른 교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지식이 늘었다고 하여 아직 그러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거나, 자신들과 다른 이해를 하는 자들을 향하여 서슬이 퍼런 자세로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대단히 악하고 무서운 행위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이다. 구원 받은 자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교제하면서 그분의 말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배우기 시작한다. 자신은 무서운 죄인이며 오직 구원하실 이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구원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겸손하게 의지하여 믿는 자세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성장하는 과정에 종말론이나 교회론 등... 교리적으로 틀리게 배우거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처럼 그대로 배우고 깨닫지 못한다고 하여 이단이 되는 것일까?

 

십자가 곁의 강도를 생각해 본다. 평생 무서운 죄만 짓고 살아온 살인자요 강도이다. 그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짧은 한 두 시간 내에 개혁주의 교리를 다 배웠을까? 제한 속죄를 깨달았으며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간파하였을까? 우리는 구원 받은 자라도 교리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문제가 있고 모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필자는 개혁주의 및 나아가 복음주의 진영(칼빈의 TULIP 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는 자들)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녕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자 되심과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사는 믿음이

있다면 비록 칼빈이 가르친 교리를 다 배우거나 알지 못해도 구원 받았다고 본다.

 

어떤 교리가 더 성경적인지를 따지는 문제와 더 성경적이라고 믿는 교리를 믿고는 '나처럼 믿지 않는자'는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전자는 더 성경적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제이지만, 후자는 교만한 교조주의가 되는 바리새인의 길에 서는 것이다. 내 의견과 다르다고 하여 아무나 '이단 정죄' '이단 사냥'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는 자신의 명예욕과 이권을 따지는 정치꾼들이나 하는 짓이다.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시떨기 밭  (0) 2013.02.21
성령의 검을 가지라  (0) 2013.02.19
종교 다원화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0) 2013.02.09
사탄을 알고 대적하라  (0) 2013.02.04
말세 고통하는 때의 20가지 특징  (0) 2013.01.23

종교 다원화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 ▶칼럼

2013.02.04 13:27

 

신명기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며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주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계시 가운데 기도 드린다.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이때 귀신들에게 제사한다는 것은 이방 신들을 의미한다. 타 종교의 신들을 의미한다. 없다가 생기는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을 의미한다.

 

뉴욕에서는 목사회가 나뉘었다. WCC 를 지지하는 목사들과 반대하는 목사들이다. 한국 교회와 교단도 나뉘었다. WCC 를 지지하는 교회와 교단, 그리고 반대하는 교회와 교단들이다. 타 종교를 두둔하는 목사들이 많아졌다. 부처의 말을 설교 시간에 인용하고 논어, 맹자, 공자의 말을 인용한다. 특히 가톨릭의 테레사 수녀, 김수환 추기경 등을 언급하는 것을 무슨 멋인줄 안다. 이 땅의 종교들은 서로 합쳐지고 있다. 길은 달라도 목적지는 같다고 하면서 서로 인정하는 추세다. 나아가 뉴에이지의 신 개념이 교회에 깊숙하게 들어오고 있다. 요가 및 관상 기도를 수단으로 하여 중세 교회로 돌아갈 뿐 아니라 힌두교 등과 길이 열리며, 따라서 뉴에이지와 같은 색깔을 띄고 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러한 추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귀신과 나를 함께 섬긴다"고 가장 분노하신다. 이 땅의 교회는 가짜들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순결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생명바쳐 섬기는데 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검을 가지라  (0) 2013.02.19
교조주의란?  (0) 2013.02.11
사탄을 알고 대적하라  (0) 2013.02.04
말세 고통하는 때의 20가지 특징  (0) 2013.01.23
가짜 신자와 진짜 신자를 구별하는 점검  (0) 2013.01.17
사탄을 알고 대적하라 (4) - 사탄의 조직과 그의 나라 | ▶바른 신학 /스데반 황 4. 사탄의 조직과 그의 나라 마귀는 셀 수 없이 많은 악령들로 구성된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 영적조직은 마치 거대한 군대처럼 철저한 계급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 6:12). “혈과 육”은 보이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싸움은 보이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싸움이다. 이때 바울은 보이지 않는 세력에 대하여 “통치자들,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언급한다. 원어로 볼 때 각 단어는 어떤 방대한 조직의 계급을 의미하거나 혹은 어떤 대상을 향하여 영향을 끼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곧, 우리의 싸워야 하는 대상은 영적 대상들로서 그들은 악한 세력들이며 영적 계급 및 영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아무튼 사탄은 자신의 지혜와 권능으로 자신보다 못한 영적 존재들을 철저히 다스리며 영향을 미친다. 또한 사탄은 악령들의 도움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성경은 가르친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사탄의 지혜와 권능은 인간에 비교할때 상상할 수 없이 크고 어마어마하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지혜와 권능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전지하지 않으며 전능하지 않고 또한 피조물이기에 무소부재하지 않다. 즉, 사탄 및 악령들은 어떤 순간에 어떤 장소에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만 전지할 수 없다. 다른 인격체의 마음을 추측할 수는 있어도 그 깊은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수천 수만 수억의 악령들로 구성된 조직을 통하여 그가 원하는 모든 정보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사탄은 악령들의 도움을 받아 끝없이 인간 세상에 죄악을 만들어내며 복음을 가림으로 구원의 길을 막고 사람들의 마음에 오해를 만들고 그들의 죄성을 부추김으로 하나님을 저주하며 대항하게 한다. 특히 주의 백성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향하여 사탄과 그의 악령들은 끝없는 분열과 방해와 죄악된 관습들과 이단과 어지러움 등을 끌어들인다. 가장 중요하게는 복음을 잃은 교회를 만들어 냄으로 교회의 본질을 잃게 만든다. 이를 위해 사탄과 그의 악령들이 일삼는 가장 주된 일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형제’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 11:2-4).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말세 고통하는 때의 20가지 특징

디모데후서 3:1-9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마지막 전도여행 중 갑자기 체포되어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 디모데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이때는 네로 황제가 로마의 왕으로 있었고 기독교를 향한 탄압은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A.D.68년 경에 로마시에서 약 5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오스티안 가도'에서 참수 당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 16절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쓰는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처음 재판관 앞에 끌려갔을 때,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들이 비난 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 복음이 핍박 받는 상황에서 다들 바울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혼자 쓸쓸히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변론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도망친 그들이 그 일 때문에 하나님께 벌받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디모데후서는 A.D.67 또는 68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홀로 있었습니다.

1 16절을 보면 바울을 찾아 방문한 사람은 멀리 에베소에서 로마 감옥까지 찾아온 오네시보로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 때문에 대단히 기뻐하며 그 가정에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에도 많은 도움과 위로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바울을 버렸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딤후 1:15).

또한 디모데후서 4 10절을 보면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마저 바울을 버렸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데마는 바울과 매우 가까운 동역자였지만 복음이 핍박을 받는 고통의 때가 오자 이 세상을 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버렸습니다. 그는 바울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신앙마저 버린 것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볼 때 데마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예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섬기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내며 두려워말고 복음과 함께 담대하게 고난을 받으라고 마지막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은 복음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을 때는 어렵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1980년대와 1990년 정도에는 교회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 당시 여성들의 결혼 선호 대상에 목사가 2위까지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와 복음이 사회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핍박을 받을 때는 신앙 생활이 어렵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때에는 신앙을 버리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로 나뉘게 됩니다. 그것이 디모데후서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도 복음은 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재산을 몰수 당하거나 심지어 원형 경기장에서 사람들의 노리개감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당부합니다. 어떠한 시련이 올지라도 겁내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참교회의 역사 가운데 고통의 때가 있을 것이며 고통의 때에는 배도자들이 일어나 복음의 편에 선 자들에게 악한 짓을 할 것을 말합니다. 복음이 핍박을 받을 때는 세상도 핍박을 하지만 소위 교회라고 불리는 거짓 교회도 참 교회를 핍박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로, 바울은 디모데후서 4 14-15절을 통해 구리 세공업자인 알렉산더에 대해 말합니다.

또한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 14-15).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디모데전서 1 20절에도 나오는 인물입니다. , 바울과 함께 교회를 섬기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파선하고 양심을 버렸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 1:19-20).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그리스도를 믿다가 배교한 자로서 심지어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에 불리한 증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알렉산더에게 직접 보복하지 않고 오직 모든 심판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자신의 모든 상황을 의탁하는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디모데에게 알렉산더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는 알렉산더가 끊임없이 복음에 대적하며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알렉산더는 철저한 배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거짓 목사와 거짓 교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내용이 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이러한 배경 가운데 바울은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각오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생명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복음 안에서 이미 영생을 누리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세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조롱하고 핍박하더라도 복음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0-12).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장난이 아닙니다. 취미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형통하기 위해 하나님을 달래어 신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그러한 미신이나 무당같은 종교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죄사함을 받고 그후 죄를 이기며 거룩하게 변화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참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불이익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미래 언젠가 참 교회와 참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대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바울이 살던 로마 시대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을 잃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며 카타콤 같은 곳으로 숨어다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다(1).

여기서 말세란 마지막 날들이라는 의미로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반면 마지막 이라고 하여 단수로 표현되면 심판의 날, 또는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뚜렷하게 말세와 마지막 날을 나누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8절을 보면 정확하게 마지막 그 날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마지막)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그러므로 말세의 끝은 마지막 날이며, 마지막 날이 가까울 수록 말세에 대해 언급한 특징들은 더욱 뚜렷하여질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제가 성경을 통해 아는 것은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전 세계적인 교회의 배도가 있고 그 다음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인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참조, 살후 2:1-12).

아무튼 바울이 경고한 말세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이 이를 때까지 참된 그리스도인과 참 교회가 고통을 받는 때가 종종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참교회의 고통의 때는 로마 시대에도 있었고, 중세 시대에도 있었으며 지금 시대에도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 역사만 하더라도 일제신사 참배와 함께 일본의 핍박이 있었고, 6. 25 동란과 함께 공산주의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세의 고통의 때를 야기시키는 특징 20가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특징은 교회에나 사회에나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절대로 20가지의 사항에 해당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이 20가지 중에 하나라도 걸린다면 철저한 회개 가운데 그 죄성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성이 없어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20가지를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최고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내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 이기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예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무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26-27).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목숨까지 미워해야 합니다. , 내 자신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천국을 누리며 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돈을 사랑하며: 돈을 가장 사랑하는 자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이유가 돈 때문에 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돈입니다. 이들은 돈 때문에 부모도 미워하고, 형제도 미워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의 특징은 삶의 목표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말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3) 자랑하며: 썩어질 세상의 미와 명예와 돈과 권력과 인기를 쉬지 않고 떠벌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자랑하는 자의 자세는 도도하고 상대나 남을 멸시하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허탄한 자랑은 악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4:16).

4) 교만하며: 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사탄은 교만하여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되려고 하였고, 하와 역시 사탄에게 속아 교만하여져서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여신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의 끝은 멸망과 비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한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교만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5) 비방하며: 참람하며: 비방보다는 권위 모독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윗 권위에 대해 항상 그 권위를 허물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부모의 권위, 남편의 권위, 사회에서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모독스러운 말을 뜻합니다. 함이 자기 아버지 노아의 실책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며 모독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는 비방의 끝은 결국 최고의 권위자인 하나님에 대해 모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저주하거나 욕하는 것은 참람한 죄입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느니라(벧후 2:12).

6) 부모를 거역하며: 부모에서 불순종하며 대드는 것에 대해 성경은 큰 죄악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 십계명에도 내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으니 이를 범하면 하나님 앞에 공식적으로 범죄한 것이 됩니다. 살인죄, 간음죄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 부모에게 거역하는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사고 방식이 세상에 물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부모 공경에 대해 대단히 엄격합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21:18-21).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7:16).

신약도 어김없이 부모 공경에 대해 너무나 마땅한 계명으로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6:1-3).

7) 감사하지 아니하며: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혜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의 가장 큰 특징은 감사입니다. ,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든 자들에게 감사하는 자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복음과 무관합니다.

8) 거룩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제 멋대로 죄악을 저지르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특히 성적으로 마음과 육체가 더러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고 창기들처럼 마음과 몸을 아무렇게나 더럽히는 것이 거룩하지 않은 삶입니다. 구약에서 거룩이란 언약에 따라 행함이며 언약에서 벗어난 행동은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최고의 언약은 결혼입니다.

9) 무정하며: 동물 중에 가장 무정한 동물은 뱀이나 파충류라고 합니다. 뱀은 새끼를 돌보는 일이 없고, 새끼 뱀은 날때부터 혼자 살며 스스로 살기 위해 속이는데 전문가입니다. 무정한 사람은 자연적인 애정마저 없는 사람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애정이 없고, 부부 간에도 애정이 없다면 무정한 사람입니다. 거짓과 쾌락에 깊게 물든 사람들의 보편적 특징은 무정한 것입니다.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앙심을 풀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가 용서를 빌어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수심이 강하며 복수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독이 많고 시기가 항상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가족이나 교회 공동체, 나아가 사회에 있으면 항상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11) 모함하며: 비방 또는 중상모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미움과 악의를 가지고 어떤 대상의 명예와 영광을 모독하는 발언을 뜻합니다. 종종 거짓과 과장이 동반되어 사실을 왜곡합니다. 비방 중에 하나님을 비방하는 말은 가장 무서운 죄악입니다. 또한 나의 유익과 목적을 위해 어떤 대상의 연약함이나 과거의 상처나 죄악 등을 들춰내어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며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의도의 발언이 비방입니다. 비방이라는 단어는 사단이라는 뜻과 같으며 비방은 대단히 무서운 죄악입니다.

12) 절제하지 못하며: 감정이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혈기가 이에 해당하고, 술에 인 박히는 것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대부분의 중독은 절제하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게임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갑작스러운 더러운 욕정에 조정을 당하여 음행 및 음란을 범하는 것도 절제하지 못하는 죄성입니다. 자연적인 욕구, , 식욕, 수면욕, 성욕, 대화, 교제 등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죄성입니다. 요새는 문자를 주고 받는데 중독이 되어 있어서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면서도 카톡을 한다고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상태는 어떤 종류이든 돌발적인 큰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13) 사나우며: 싸우기를 좋아하고 말다툼하기를 일상으로 하는 습관입니다. 약자에게는 폭언과 폭력을 쉽게 일삼습니다. 항상 이기는데 관심이 많고 손해 보는 것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멋이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의도적으로 어두움과 악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죄악이 멋인줄로 착각합니다. 모든 정상적인 것은 싫어하고 그 대신 왜곡되고 뒤틀린 것을 좋아합니다. 진리보다 거짓을 더 선호합니다. 선한 사람보다 악인을 더 멋지게 여깁니다.

15) 배신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 약속을 밥먹듯이 어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으로서 거짓이 늘 따라 다닙니다. 가장 큰 배신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져버리고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배신은 간음 및 간통입니다. 우정을 저버리는 것도 배신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16) 조급하며: 늘 세상 일로 인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조급한 사람은 늘 서두릅니다. 세상이라는 우상과 염려가 가득할 때 조급하게 되어 있습니다. 조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진리의 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조급한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시대 사람들의 특징은 조급함입니다. 따라서 인내력도 없고 분별력도 없습니다. 무조건 인스턴트가 제일 좋습니다.

17) 자만하며: 허세와 체면으로 우쭐한 상태입니다.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입니다. 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지 않습니다. 자만의 상태에서는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자만한 상태에 빠지면, 사랑이 전혀 없고 거룩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늘 자기 생각과 깨달음만 옳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자만한 사람은 근처에 가기가 불편한 사람입니다.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팥죽 한 그릇에 가장 소중한 것을 던져 버리는 망령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경보다 쾌락을, 기도보다 오락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알기 보다는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을 더욱 따라는 것이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에서와도 같으며 또는 데마와같은 배도자가 됩니다.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외적인 부분과 형식적인 부분에서는 경건한 척 보이지만, 실제로 가까이 가보면 죄악에 물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늘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십년 교회를 다녀도 신앙 인격에 있어서 변화가 없습니다. 그냥 교회 놀이와 종교적인 습관에 익숙해져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 복음을 대적함으로 어리석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18절에 보니 모세를 대적한 얀네와 얌브레가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부패하고 믿음에 관하여 저버리게 되면서 알렉산더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벌써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던 데마와 알렉산더와 같은 복음 훼방꾼들이 더욱 교계 내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지키며 전하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돈과 권력과 인기와 아성을 쌓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능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능력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귀가 가려운 자들이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이 세상의 축복을 얻고자 구름떼처럼 모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곳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아십니까?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만큼 복음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소드, 즉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목숨을 걸 만큼 힘차게 달려갈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도에 참으로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맹세하셨습니까?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하게 당부합니다.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라(1:5).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1:8).

주께서 주를 의지하는 자들을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하라(1:12).

주 예수님께 충성하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2:8).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라.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2: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1-2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2-17).

그후 죽음을 앞둔 바울은 마지막 위대한 선포를 우리에게 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우리는 기회가 날 때마다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늘 성경을 가까이 하며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나의 죄 값을 치르시고 내게 죄 사함과 영생을 허락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또한 그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시사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힘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내 죄성과 죄악을 이겨내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며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의 신앙이 참된 신앙이기를 바랍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20가지의 죄성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난 때에도, 복음이 이 세상에서 부끄럽게 여겨지며 패배자처럼 여겨지는 때에도, 종교 통합이 되어 복음만을 외치는 참 신자를 핍박하는 때가 될 때에, 나아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에도 날마다 바른 신앙을 붙들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하며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가 죽기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주께 충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 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짜 신자와 진짜 신자를 구별하는 점검 - 리차드 백스터 좋은 글들

다음 기준으로 당신의 신앙을 점검하라.  

1)  우리는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는가?

2) 우리는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주와 구세주로 모시는가? 

 

이제 당신이 성도의 안식에 들어갈 자격이 되는지 시험해 볼 수 있는 두 가지의 기준을 말하려고 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유일한 구세주와 주로 진심으로 모시는가 하는 것이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모든 영혼들은 그들의 최고 행복을 하나님께 둔다. 이 안식은 하나님을 충만하게 그리고 영화롭게 즐거워함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며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 않는 사람은 이방인 및 악한 우상 숭배자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참으로 영광의 주를 즐거워하는 것을 당신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는가? 당신은 “주께서는 저의 분깃이니 하늘에서 제게 주 밖에 누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제가 바라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이 영원한 안식의 상속자라면 그 안식은 지금 당신과 함께 한다. 육체의 쾌락이 당신에게 애걸하고 세상이 당신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해도 당신이 일반적으로 안정된 가운데 내리는 유력한 결정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선호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당신의 소원과 노력의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당신이 듣고 기도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주된 이유는 바로 이것, 즉 주를 구하고 당신의 영원한 안식을 확인한 후 지금 그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비록 당신이 당신에게 마땅한 만큼 그렇게 열정적으로 영원한 안식을 구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가장 중요한 소망이며 수고의 이유다. 따라서 이것보다 더 바라거나 좋아하는 것은 없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와 고난을 당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육체가 쇠잔할 때는 당신은 그 모든 과정을 뚫고 지나갈 것을 다짐한다. 당신은 영원한 안식을 대단히 귀히 여기며 매우 좋아한다. 따라서 당신은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그 어떤 것을 준다고 해도 영원한 안식을 누릴 자격이나 그 소망과 바꾸려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한 편으로는 세상적인 영원한 즐거움을 두고 다른 편에는 성도의 안식을 두고 당신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당신은 세상을 거절하고 이 안식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아직 중생을 통해 거룩하여지지 않았다면 당신은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 당신의 입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아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그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는 세상이 당신의 최고 소망이며 당신이 노력하는 최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의 마음은 세상에 고정되어 있다. 당신의 가장 큰 관심과 수고는 명성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죽은 후에는 세상을 위한 당신의 수고와 노력은 헛수고가 된다. 당신은 한 번도 하늘나라의 보이지 않는 뛰어난 영광을 인식한 적도 없고 마음이 끌린 적도 없으며 그것을 위해 온 맘을 다해 수고한 적도 없다. 혹시 하늘나라를 구실로 하여 조금이라도 수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즉, 하나님은 당신에게 세상보다 못한 쓰레기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은 세상에서 실컷 쓰고 남은 찌꺼기 시간과 수고를 드릴 뿐이다. 당신은 이 땅의 것들에 대해서는 항상 열심을 내며 반갑게 맞이했으나 하나님을 위해 남는 것은 냉담과 무관심 밖에 없다. 당신이 만일 세상을 붙들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천국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세상을 더 이상 붙들 수 없는 때가 오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 할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당신은 하나님의 법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복음의 원칙마저 거절할 것이다.  

 

당신에게 그리스도 또는 당신의 세상 행복을 버려야 하는 시험이 오면 당신은 세상보다는 천국을 포기할 것이며 세상 행복을 위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 땅에서 건강하고 부요한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해 준다면 당신은 그 상태를 천국의 안식보다 훨씬 좋다고 여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천국을 구하든 말든 당신은 이 땅의 부요함을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면 당신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며 따라서 성도의 안식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당신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준은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는 것 외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당신의 유일한 구세주와 주로 모셨는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 기준은 율법의 첫째 되며 가장 큰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를 요약한 것이고, 둘째 기준은 복음의 명령,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를 요약한 것이다. 이 두 기준을 실행하는 것이 바로 경건과 기독교의 전부다. 이 두 기준은 단지 믿음의 정의일 뿐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구세주라는 사실에 동의하는가? 당신의 의무나 행위는 주께 순종하기 위한 지정된 수단일 뿐 당신에게 구원을 주는 구세주는 아니다. 즉, 당신의 의무나 행위는 조금이라도 율법의 저주를 해결해 줄 수 없으며 율법적인 의나 그 부분이 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의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만을 의지하기로 동의하는가? 당신은 또한 주님을 당신의 유일한 왕이요 주로 모심으로써 그의 법과 성령에 의해 통치를 받고 인도함을 받기로 동의하는가? 주께서 아무리 어려운 의무를 맡겨도, 당신의 육체의 정욕들을 대항하는 명령들을 내리실지라도 당신은 주를 순종하기로 동의하는가? 

  

당신은 이와 같은 다짐을 지키지 못할 때 슬퍼하겠는가? 당신의 기쁨은 주께 온전히 순종하는 데에 있는가?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주와 선생을 바꾸지 않겠는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질문에 진심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위선자라면 훨씬 달라진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와 구세주로 부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분이 없더라도 외로워하지 않는다. 당신은 주를 찾고 신뢰하고 그분께만 구원을 두는 그런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다. 당신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로 모셔 당신을 통치하도록 동의한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께 당신의 영혼과 삶을 인도하시도록 맡긴 적이 없다. 또한 주의 말씀을 당신의 생각과 행동의 규칙으로 삼은 적도 없다. 물론 당신은 당신이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바란다. 하지만 당신은 죽는 그 날까지 당신의 명성과 쾌락과 다른 세상적인 목적을 추구할 것이다. 만일 주께서 당신에게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신다면 당신은 말씀과 성령보다 세상과 육체를 훨씬 더 추구할 것이다. 당신의 행동과 모습은 때때로 당신의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로 보일 때가 있지만 전반적인 당신의 모습과 행동은 주로 세상을 택할 것이다. 이는 당신의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비록 말로는 주님을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주를 부인하는 사람이니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참 신자가 아니라 단지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딛 1:16)이다. 이들은 성도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질문할 때 특히 마음의 동의 또는 의지를 강조하는 점을 염두 하라. 나는 당신이 구원을 확신하는지, 당신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지 등의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질문들은 당신의 믿음이 구원을 얻는 믿음인지를 확인하는 내용이 아니라 당신의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하늘의 열매들이다. 이러한 열매들을 누리는 자들은 그 열매들로 인해 위로를 받는다. 따라서 당신이 그러한 열매들을 누린다면 아마 이미 영생을 얻었으며 안식의 참된 상속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죄 사함이나 용서함 등은 구원하는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에 “나는 내 죄가 용서함 받은 것을 믿을 수 없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믿을 수 없구나. 그러므로 나는 참된 신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가장 흔한 오해로 생기는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위해 물어야 할 질문은 당신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구원을 얻는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속하셨으며 당신을 주님 자신의 방법으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에 동의하는가? 이것이 당신을 의롭게 만드는 구원하는 믿음이다. 이 기준에 의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점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동의는 진심이며 사실이어야지 가짜이거나 마지못해 한 것이면 안 된다. 당신의 동의는 진의를 숨기고 “아버지,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가지 않은 아들의 말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참, 마 21:28-29). 만일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이 당신을 다스린다면 당신은 주의 제자가 아니다.

 

나는 이 두 표준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믿으며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두 표지가 반드시 있다고 본다. 오, 주께서 지금 당신을 설득하셔서, 당신이 이 자기 점검을 철저하게 실행하게 되기를 바란다. 당신이 이 두 표준을 합격하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재판장이 당신을 시험하신다고 해도 당신은 두려움으로 떨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당신은 영원한 안식에 자격이 되는 사실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또한 죽음과 심판이 다가와도 오히려 당신의 영혼은 고취되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겠다. 만일 당신이 구원의 안전을 확인하고 참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면 이제부터 은혜 안에서 자라갈 수 있도록 더욱 수고하라. 당신의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한 유익을 증진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해 더욱 힘쓰라. 반면에 육체의 유익을 도모하지 말고 육체의 정욕을 제압하라.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으니 나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하라.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이기기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무장한 채 서 있어야 하고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 이러한 싸움은 우리의 확신과 구원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참으로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으면서 함께 받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이러한 거룩한 의무들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는 사이비 그리스도인이다. 주께서는 거짓으로 믿는 자들을 한 사람도 천국에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기는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 이기는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할 것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 앞과 주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다. 이기는 자는 주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될 것이며 그가 그곳으로부터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주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할 것이다” (계 2:17; 2:7; 2:11; 계 3:5; 3:12).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주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그리스도께서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21-22).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복음 안에서 율법의 역할

스데반 황 목사

I. 서론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복음”을 강조하다가 율법의 존재와 그 역할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율법주의”와 율법의 바른 기능을 혼돈함으로 율법이 없는 복음을 외치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복음이란 사실 성경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율법이 없는 복음은 “무법주의” (Antinomianism)로 향하게 되어 복음을 아주 값싸고 능력없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도 바울의 복음을 오해하여 바울의 복음을 “무법주의”로 만든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들은 “마음껏 죄를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드러날 것이니 죄를 짓자. 더 이상 율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관하여 바울은 탄식하며 부르짖는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롬 3:8)

사실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율법과 은혜에 바른 인식은 치명적으로 중요하며 나아가 우리의 개인적 구원에 대한 인식과 연결된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 받은 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복음과 율법의 바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본인은 이 글을 통하여 복음과 율법은 서로 상충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하나님께로서 온 선물로서 율법은 복음의 절대 필요성과 위대함을 드러내고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이루어 간다는 진리를 롬 3:19-31을 통하여 주장하려고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로마서 3:19-31 )

II. 본론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은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곧,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 개혁의 창시자였던 마틴 루터(1483-1546)의 대 발견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귀한 진리가 불법을 행하여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불법 (”lawlessness”) 기독교로 크게 오해 되는 일이 번번히 있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 내부에는 언제나 두개의 큰 이단이 있었다. 첫째는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란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어떻게든지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다.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이 필요 없게 된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모범 정도가 될 뿐이다. 이들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둘째 이단은 무법주의(antinomianism)이다. 이들의 주장은 율법이란 구약에나 필요한 것이지 지금은 은혜 시대이며 따라서 율법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오직 믿음”을 주장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를 제안한다. “오 주님! 은혜를 감사합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신나게 죄를 지으면서 죄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흔히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방종하는 집단을 이루게 된다.

이 두 가지 이단을 향한 교회의 대책과 성경의 균형 잡힌 답은 다음과 같다. 곧, 율법은 우리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회개케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게 하고, 반면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은혜는(믿음은) 율법을 세우고 율법을 지키게 한다는 것이다.

먼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의” (righteousness)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의”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이 지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가 “의”로와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율법의 요구를 완벽이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의”를 이루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에게 율법이라는 것은 19-20절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곧, 율법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으로 모든 인간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으로는 율법 앞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절대기준에 의하면 롬3:10 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가 되는 것이며 율법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율법아래서 의로울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그 누구라도 율법에 의하여 지옥에 보내더라도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이다.

이때 “복음” 이 등장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복음,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은혜로만 얻는 구원의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다. 이 구원의 길이 얼마나 중요하면 이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갈 1:7-9을 통하여 경고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서 멈춘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복음에 관하여 그 은혜와 복음의 능력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저질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타락하는 사례가 이 땅에 너무나도 많게 되었다. 나아가 복음을 빙자하여 죄를 합리화시키면서 죄를 계속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믿는 “복음” 때문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음과 동시에 자신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구원과 믿음에 관하여 정리하여 보자.

(1)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곧 십자가의 은혜로 받는다. 이 진리는 영원한 진리이다.

(2) 그러나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속고 있는 점이 있다. 이는 자신들의 “믿음”에 관한 착각이다. 흔히 우리가 오해하는 점은 우리의 지적 동의를 믿음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단지 어떤 내용에 지적인 동의를 한 후, 우리는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한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그리고 은혜에 대한 오해이다. 성경은 “바른 믿음”은 필히 우리를 구원한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죽은 믿음, “거짓 믿음”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곧 많은 사람이 거짓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 믿음에 관한 착각은 자신의 거짓 믿음을 통하여서도 자신은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3) 고전 6:9-10을 읽으면 이 내용은 고린도 교회에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거짓 믿음의 교인들이 발견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갈5:19-21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4) 그러므로 로마서 3:31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아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구나.!”로 이해하여 율법주의자가 되고, 결국 바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여 저주 받는 자가 된다.

바울의 주장을 좀더 확실히 이해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연구하여 보자.

(1) 요한복음 14:15를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한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이다.”가 된다. 사실 예수의 계명을 요약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를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계명이다. 예를 들어 고전 13장을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가르쳐 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이러한 계명이 없이 우리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2) 요한복음 15:10도 계명을 지키는 것을 강조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 일서의 강조점을 보아도,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입증된다. 계명은 성경에 있어서 율법이며 이는 곧,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음을 말한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랑은 가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그 사랑은 율법을 알고 지킴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바로 율법을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랑 없이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율법이 없이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과 믿음의 관계는 바로 사랑과 율법의 관계와 유사하고, 이는 율법과 은혜는 (믿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증명한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사람에게 명령하고 그 내용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어디까지 요구하는가?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만큼 너희도 완전하라.’를 요구한다.

(2) 완전히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합격”을 말하면서 축복 및 상급을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히 못 지키는 자에게 “정죄”를 말하면서 “벌”, “심판”등을 선고한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는 율법의 정죄와 함께 그들은 죄의 저주 아래 있게 된다.

(3) 율법은 죄를 고발한다. 가장 깊은, 숨겨진 죄라도 드러낸다. 마치 흠이 없이 깨끗한 양심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의 양심은 사실 죄로 인해 더럽혀져서 자신의 더러움과 죄악을 보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율법을 볼 때, 율법은 마치 영혼의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더러움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이다. 곧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Doctor M.R 디한의 책 “율법이냐 은혜냐”에서의 설명에 의하면 율법의 기능이란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유리컵의 먹물을 젓가락으로 젓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인간들의 숨겨진 죄악들을 다 드러내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 그 정체를 알려주는 일을 한다.

(4) 율법은 죄로 더욱 죄를 짓게 하고 반항하게 만든다. 율법과 죄는 사이가 전혀 좋지 않다. 율법이 항상 먼저 죄에게 시비를 건다. 그러면 죄는 더 큰 죄를 지으며 율법에게 반항을 한다. 예를 들면 “죄라는 못된 놈”이 침을 튀기면서 말한다고 하자. 율법이 말한다. “침 튀는 것은 실례입니다.” 죄라는 놈은 이 지적을 듣고 율법에게 가래침을 뱉으면서 더욱 반항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율법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거나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주인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 독재자인지 그 본색을 드러내게 한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은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곧 우리를 구원하는 일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안에서 주어지는 은혜가 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율법을 어긴 자를 용서할 수 있거나 율법 아래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죄인을 나오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을 감옥에 넣는 역할은 하지만 그 사람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2) 율법은 죄로부터, 죄라는 주인으로부터 죄의 노예들을 풀어 주거나 해방 시킬 수 없다. 율법은 죄를 폭군 주인으로 드러내고 그 악함을 드러내지만 그러나 그 주인에게서 그 노예를 구해주지는 못한다.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율법이 하지 못하므로 다른 것이 해야 하는 데 바로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요 “믿음”이다.

(3) 따라서 “은혜와 믿음”은 율법과는 상대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곧, 죄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진다. 은혜와 믿음은 그 무한한 능력으로 죄라는 폭군과 싸워 우리를 그 암흑과 악의 세력에서 구출해 내어 승리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구원” 또는 “구속”이라 하며 오직 은혜(믿음)로만 가능하다.

(4)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바로 왕은 “죄”의 왕이요 사탄을 상징한다. 출애굽을 위한 유월절 피는 그 피를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혜요, 그 은혜는 엄청난 능력으로 그 강한 바로 왕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이루어낸다. 곧 은혜는 유월절의 피를 믿고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구원의 대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나타나 “죄”라는 폭군과 싸워 승리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는 내 힘 가지고 사탄과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드러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은혜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은혜요,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역동하는 힘이 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드러나는 유일한 통로,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이다.

(6) 따라서, 은혜는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래서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그 것, 즉 죄인을 해방하고 그로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죄를 짓지 않도록, 율법을 지키도록, 율법을 완성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겠다.

(7)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며 믿음을 통한 같은 이 능력의 은혜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간다. 이는 내가 율법을 이룸이 아니고 (율법주의)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율법을 이루어 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은혜 속에 있는 자가 아니며, 동시에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님이 판명된다.

(8) 야고보서는 율법과 믿음 (은혜)의 관계를 정리한다. 율법주의가 야고보서를 읽으면 행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불법주의자 (즉, antinomian)들은 야고보서는 성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두 주장이 틀림을 알 수 있다. 사실, 야고보서는 가짜 믿음을 구별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참 믿음은 행위(순종)로, 열매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고 은혜를 얻은 자는 모든 삶에서 선행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과 믿음의 바른 관계에 관한 이해를 통하여 야고보서 3:11-12에서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하고 야고보서 2:26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9) 아무튼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입은 자들은 율법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제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그 안에 사시사 율법을 완성해 나가는 삶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과 부활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리하면

(1) 은혜로 우리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다. 주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죄의 세력이 틈 탈 수 없다.

(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는 율법을 폐기 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 시킬 수 있도록 돕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율법의 요약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 믿음의 삶이란 이웃을 향하여 선한 삶과 사랑의 삶으로 나타난다.

(3) 은혜는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도록 하며, 새 주인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 속에 나타나 죄와 사탄과 대항하여 싸우는 능력으로 표출된다.

(4) 은혜를 받았는지, 참 믿음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율법으로 그를 평가할 수 있다. 곧 그들의 삶의 열매를 볼 수 있다.

(5) 그러므로 “은혜”를 빙자하여 죄를 지어도 된다는 방종된 가르침을 성경은 결코 허용치 않는다. 롬6:15 “그런즉 우리가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 이유는 우리가 구원 받을 때, 실제로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의의 은혜의 상태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죄의 노예 상태 : 죄악된 노예생활. => 의의 은혜 상태 : 의롭고 거룩한 하늘나라의 삶.

죄의 종 => 의의 종

사탄의 종 => 하나님의 종

율법을 어기는 상태 => 율법을 지키는 상태

사형 선고 => 하나님의 자녀, 결혼 축제

(6) 율법은 근의 공식처럼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우리가 지금 죄의 종인지 의의 종인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종된 상태를 발견하면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기능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히 변함없는 율법의 절대적 역할이다.

(7) 다시 말하면, 율법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냄새나는 부패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우리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나는 지옥불에 떨어져 합당한 자이구나.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이구나”를 깨닫게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그리스도를 발견케 돕게 몽학선생인 것이다.

(8) 이 때 주님을 발견하는 자마다 주님 안에서의 주어지는 은혜를 체험한다. 그 은혜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거룩한 삶을 살게 도와준다. 은혜로 말미암은 거룩한 삶 속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있고 모든 하나님의 영광과 약속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은혜는 계명의 대 강령인 “목숨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9)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0) 이에 바울은 로마서 3:31을 통하여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III. 결론

예수 안에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끝이 있다. 곧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구원을 얻은 모든 신자들에게 지금도 죄와 싸워 이길 은혜를 주시는 분은 예수이시다. 오직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승리의 능력을 얻는 은혜를 입는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서로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예수 안에서 이미 얻게 하고 또한 예수 안에서 그 의를 이루어 가게 돕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명수 쉼터/한아름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 ] – 개혁주의 목회자 연대,  2013 1 10

 

 

마태복음 6:33-34, 사무엘하 7:12-16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성경에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천국(Kingdom of heaven)이란 말이

혼용되어 사용되는데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다. 마태복음 11 11-12절과 누가복음 16 16절을 보면 같은 내용에 대해 마태는 천국으로, 마가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하고 있고, 누가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 24 14절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하고 있고 누가복음 4 43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고 말한다. , 천국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며, 이에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 19 23절과 24절은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것임을 강력하게 입증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므로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계시록 4장을 읽으면서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과연 계시록 4장이 성경 전반에 걸쳐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일까? 필자는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 나라의 핵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경이 의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보좌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계시록 21장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열두 문이 있고 벽옥으로 쌓였고 정금이 있고 맑은 유리 같은 그곳! 벽옥과 남보석과 옥수와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수정이 있는 그곳, 열두 진주 문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된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

필자는 계시록 21장의 내용은 새하늘과 새땅으로 완성된 전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임을 인정한다. 특히 계시록 21장은 하나님의 보좌가 새 땅에 내려오는 새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로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며 절정이라고 동의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여하여 설명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계시록 21장에 대한 것이 아니다. 계시록 21장은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부분일 뿐이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새하늘과 새땅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나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이전에 완성되는 나라인 것을 말하여준다.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이 갔던 3천층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적이 있는데 성경은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필자는 셋째 하늘 혹은 낙원은 하나님의 보좌 또는 하늘로서 성도가 죽음을 지나 그 영혼이 하나님 곁에 가 있는 상태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낙원, 즉 셋째 하늘을 의미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낙원을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지 않고 따로 구별하고 있다.

 

  

성경 전반에 걸쳐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렇다면 성경 전반에 걸쳐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통치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를 두 차원에서 구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창조주이며 주권자인 하나님으로서의 통치가 있고, 만물의 대표자인 언약의 사람을 통한 통치가 있다. 성경이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의 통치는 언약의 사람을 통한 코스모스, 즉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예를 들어,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통치는 우리의 머리털하나까지 우연하게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없다. 개미 한 마리가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와 작정에 들어 있다. 박테리아가 하나 증가하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이 우주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심지어 마귀의 지독하게 간교한 스치는 생각조차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피조물의 왕이 있어야 하고, 피조물이 서 있는 땅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피조물의 대표와 세우는 언약이 있어야 하고, 그 언약을 완벽하게 따르는 왕과 백성이 있어야 한다. 만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인 영원한 왕이라고 한다면 피조물의 왕으로서 하나님 통치를 영원히 따르는 왕은 부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인류의 대표자가 피조물의 대표자가 되어 언약 가운데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완전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인 개념 속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최초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은 창세전부터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마태복음 25 34절이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여기서 창세로부터라는 원어의 의미는 “From the foundation of the Cosmos”라고 하여 온 우주를 만드는 때부터라는 뜻이다. ,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주 또는 세상을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원하신 것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경적인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오직 생명과 복과 선함과 은혜를 무한하게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상태이다. 이를 위해 피조물의 대표자인 인간의 왕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때 하나님의 세계는 피조물의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맘껏 피조물의 대표자를 통해 모든 만물에 무한한 축복과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것이 천국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피조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과 은혜와 선함이 영원히 나타나는 영역을 말한다. 그 영역 안에는 사탄이나 마귀들, , 저주, 죽음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작하지만 그 나라가 서는 대상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곳은 피조물의 토대인 이 이며 그곳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영원히 받아들이는 죄 없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피조물의 대표자인 부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피조물의 세계, 즉 시간과 공간으로 진행되는 역사 가운데 임하여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 재림 때에 그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원수가 역사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원수는 처음에는 사탄이었지만,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이 사탄 편에 서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적한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원수는 죄와 저주와 사망도 포함되게 되었다.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피조물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피조물의 머리인 사람을 통해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요약하면, 하늘과 땅이 통일되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이다(참조, 1:10).

 

그러므로 맨처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서려고 하던 때는 아담의 때로서 에덴이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시고 만물의 대표자로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만물의 대표자가 되게 하셨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복하고 개발하며 다스렸다면 온 세상은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였다면 그들은 영생을 하였을 것이며 그들의 손길과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이 넘쳤을 것이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부왕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였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에덴으로 시작하여 온 우주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을 통하여 세우려고 하였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서지 못하였다. 아담은 피조물의 왕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기보다 도리어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켰다. 만일 아담이 순종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담을 통해 이루어지고 아담은 영원한 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는 천국이 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실패로 인하여 정반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였던 에덴은 세상으로 퍼지지 못하고 감추어졌고 도리어 이 세상은 죄와 사망과 사단이 지배하는 영역이 되어 버렸다. 이에 동물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저주가 임하였고 무질서와 신음과 고통과 저주가 온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뜻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끝내지 않으시고 계속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준비 작업을 하셨다. 먼저 노아를 통해 옛세상을 쓸어 버리셨으며, 나아가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자녀들을 낳기 시작했다. 그리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삼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은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 왕조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다윗 왕의 후손을 통해 세우겠다고 언약하셨다. 다윗에게 하신 언약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영원히 세워질 것인지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예언이었다.

 

  내용이 바로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무엘하 7장이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다윗 언약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국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세 때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다윗의 어떤 후손으로 하여금 왕을 세워 영원한 나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이다. 물론 솔로몬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순종하였다면 그의 나라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솔로몬이 완전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리어 솔로몬은 타락하여 우상을 섬겼고 다윗의 통일 나라는 남북으로 찢기게 되었다. 결국 불순종의 죄악으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멸망하여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남유다는 바벨론 포로가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다윗과 하신 일방적인 언약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며 다윗의 그 후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후손을 메시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사야 55 3-5절을 보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메시아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은 취소될 수 없고 또한 실패할 수 없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언약은 그 메시야가 부활하여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줄 것이며 그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까지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도 여행 중에 안디옥에서 설교를 할 때 다윗의 언약을 인용하여 메시야의 부활을 증언하였다.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13:34).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은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포로가 된 후이 땅에 약속의 나라가 전혀 보이지 않는 그 때에 다니엘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계시로 나타났다.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신상을 통해 다니엘이 그 해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느브갓네살 왕에게 말한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2:44).

 

또한 다니엘은 환상 중에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계시를 매우 구체적으로 받게 된다.  

"내가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14).

, 다니엘이 본 환상에 의하면 다윗에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인도될 그 인자에게 멸망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와 권세가 주어지는 것으로 다윗의 언약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무엘하 7장 및 역대상 7장의 다윗 언약과 다니엘을 통해 알려진 계시에 의해 그 인자또는 메시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 장래에 누군가 어떤 왕이 와서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것을 기다린 것이다. 다윗의 언약에 의하면 그 왕은 마땅히 인자, 즉 사람이어야 하며, 다윗의 후손에서 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 왕을 인자또는메시아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에 신약으로 넘어오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마태복음 1 1절이 말하고 있고, 또한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실 때 유다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극소수의 사람이 등장한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므온과 안나를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라”( 2:25-26).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18:38-39)고 기록되어 있는데 맹인은 구약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메시야, 즉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예수께서 친히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주장하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일 수 밖에 없음을 입증하신다.

( 22:41-46)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성육신한 후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외치셨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14-15).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은 이 땅에 공식적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외치셨다. 

 

그런데 공생애 사역 중에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11:20-22).

이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하였다는 뜻이다. 이는 자신이 다윗 언약이 말하는 그 왕임을 분명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다윗의 후손임을 나타내셨고 또한 자신이 바로 다니엘이 말한 그 인자라는 사실을 무척이나 강조하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장본인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해서 하신 가장 중요한 말씀은 마가복음 4장이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4:26-29).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서는 도구는 복음의 씨앗이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의 속량과 부활이었다. ,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국 복음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공식적으로 이 땅에 도래할 것이며 그 나라는 추수할 때까지 계속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왕위를 받는 그때에 공식적으로 출범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왕위를 받았는지가 대단히 중요한 이슈이다. 예수님께서 인자와 그리스도로서 왕위를 받는 때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후에 십자가 상에서 그의 귀한 보혈을 흘려 자기 백성의 죄값을 대신하여 치르신 직후였다.

성경을 살펴보면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과 다니엘 7장의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신 예수님의 선포에서 확증되어진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8:18-20).

"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16:19).

 

그런데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때가 언제인가? 바울이 설명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8-11).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 직전에 말씀하셨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4:46-53).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오른 편의 영광을 얻으신 후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 사건은 인자이신 둘째 아담이 왕위에 오르신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성령을 통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 강림 사건으로서 사도행전 2장 사건이다. 또한 스데반 역시 순교하면서 보좌 곁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도 이를 증거한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5-56).

예수님은 사람인 인자로서 철저하게 순종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얻으셨다. 그 나라는 성령의 오심으로 공식적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 나라는 민족에게 국한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온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 나라는 죄사함의 복음과 함께 영혼을 구원하여 통치하면서 진행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죄와 마귀를 이기는 권능으로 임하는 것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써 구속을 마침으로 인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이제 법적으로 당당하게 권능 가운데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역을 성취하신 후 왕위에 오르신 이래로 그리스도의 나라로 불린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11:1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5:5).

 

그러므로 지금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한 상태이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 나라를 누릴 수 있다. 이는 바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권능으로 이 땅에 영적으로 임재하여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

 

개혁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인하여 성령과 함께 이 땅에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물리적으로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아직 물리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아니한 미래적 나라이며(3:2), 동시에 성령 안에서 이 땅에 와있는 나라이다(17:21). 사실, 하나님 나라는 창세이래 예비되어 있었던 나라로서( 25:34),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 땅에 영원히 서게 되는 나라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에덴에서 시작하였다가 멈추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어 성령 안에서 이 땅에 영적으로 임하였고 이제 주의 재림과 함께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나라로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도래하였고, 성령은 주님 재림 때까지 그 나라의 백성을 복음으로 모으고 있다. 이에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으면 성령으로 거듭나서 당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3-5).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 나라는 현재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는 나라이다. , 십자가의 도를 통해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죽은 영혼들이 그 나라에 들어오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또한 그 나라에 들어온 자들은 성령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희락과 평강과 만족을 누리는 나라이다.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 때문에 더욱 죄와 사탄을 물리치는 순종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도록 순종하고 말씀과 기도로 더욱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땅에 도래하여 있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나라의 공식적인 왕으로서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시다. 우리는 그 나라의 시민이 되어 있고 왕의 백성이 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며 큰 행복인가? 따라서 헨델의 메시아처럼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한 것을 찬양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여러분에게 남긴 편지를 읽고 설교를 마치자.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11).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인자의 날과 우리의 관심

 

누가복음 17:20-30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자의 나라, 즉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말씀드렸다. 인자 되시는 예수님은 죄없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인류의 대표자로 오셔서 완전한 의를 이루시고 그의 백성을 위해 십자가의 구속을 마친 후에 부활 승천하심으로 왕위를 얻게 되셨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위를 얻으신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나라는 공식적으로 이 땅에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사건, 즉 왕위를 얻으신 증거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성령이 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와 계시기에 이 시대는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 중에 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첫번째 설교제목이다. 마가복음 1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직후에 처음 설교를 하셨는데 그 설교 내용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0)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의 백성들은 줄기차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기도할 것을 교훈하셨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두개의 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축은 25절과 30절이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 지니라.” 그리고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다. , 십자가에서 대속을 이루는 사건과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 재림이 인자와 관련한 두개의 축이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인자라고 말씀 드렸다. 인자라는 용어는 다니엘 7 13-14절에 나타나는 사람 같은 이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주인공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을 인자라고 불렀다. , 다니엘이 예언한 그 인자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주인공이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로 임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표현은 이곳으로 가니 애굽 나라가 있다. 저곳으로 가니 로마 나라가 있다는 식으로 이 땅에 실제 보이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답하신 예수님은 우리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바리새인들을 향해 크게 외치셨다.

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임하여 있다.”라고 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메시아와 함께 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나라는 로마와 같은 눈에 보이는 나라였다. 권력이 있고 무기가 있고 땅이 있고 왕이 있고 부하들과 군병들이 있는 나라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온 세상의 다른 민족 위에 우뚝 세울 강력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했다.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로마 제국을 무찌를 그리스도의 유다 제국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들처럼 당장 이 세상에 임하게 될 줄로 생각하고 그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높은 지위를 구하고 있다.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방 나라들처럼 집권자가 권세를 부리는 그러한 세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그러한 영적인 나라라고 하면서 그 나라의 왕이신 인자가 먼저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어야 그 나라가 서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백성 대다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당장 임할 것을 믿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이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19:11).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게 곧바로 이 땅에 도래할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러한 식으로 이해한 후에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까라고 질문한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해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라고 답변하셨고, 인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게 이 땅에 임하여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30절이 말하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임하는 날이다. 그때는 이 세상 모든 나라가 다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눈에 보이는 영광스러운 형태로 이 땅에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질문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없는 영적인 상태로 이미 와 있으며 볼 수 있게 임하는 때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라고 답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인자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때를 말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말한다.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바울의 계시에 의하면 인자가 나타나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날까지, , 인자의 날까지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으로 이 땅에서 계속 진행하면서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유하는 영생을 주는 복음의 능력이 계속 나타날 것을 분명하게 하신 것이다.

 

거듭남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나라

현재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는 다르게 보이지 않게 임한 영적인 나라로서 성령이 운행하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오직 거듭난 자들에게만 체험되어지는 나라이며 거듭난 자들이 영적으로 누리는 나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3:3, 5-7).

, 하나님의 나라는 인자가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이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고 받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거듭나지 못한 상태로는 그 나라가 이미 임하여 있어도 이해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21절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내용이다. 어떤 사람들은 21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마음 안에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완전하게 틀린 해석이다. 그 이유는 21절의 예수님의 답변은 마음에 모든 악과 의심이 가득한 바리새인에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원어와 문맥을 함께 보면 21절은 너희가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임하여있다 , 너희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실제로 이곳 이땅에 임하여 있다는 의미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22절이다. 22절에서 인자의 날들은 제자들이 인자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날들을 말한다. 인자의 날들 중 어떤 하루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을 말한다. , 인자의 날들 중 특정한 또 다른 하루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의미한다.

 

따라서 22절이 의미하는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하다. 

지금 너희는 나를 직접 눈으로 보는구나. 그러나 이제 곧 나는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부활한 인자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일 것을 기대할 것이며 또한 인자의 날들을 계속 보고자 할 것이지만, 내가 어떤 날 다시 올 때까지는 너희는 나를 직접 눈으로 만나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셨다.

“‘인자가 나타났다. 저기 어디 갔다가 인자를 직접 만났다. 보라 이곳에서 내 눈으로 직접 인자를 보았다는 소문이 날 것이지만 다 거짓말이요, 인자가 자기 날에 나타나는 방법은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그렇게 나타날 것이다.라고 하셨다. , 인자가 다시 나타날 때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다 볼 수 있도록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인자가 나타나시는 때에 대해 알려주시는데 여기서 날들로서 어떤 시대가 죽 진행되다가 어떤 에 이르러 큰 대형사건이 터지는 것을 말한다. , 그 대형 사건이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또는 날들이라고 번역하여 놓았다.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 알 수 없지만 인자의 나타나는 날까지 계속 진행되는 시대의 특징을 말씀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위대한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왕위에 오르심으로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그분의 나라와 이름은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는 날까지 배척을 당하며 고난을 받으며 버림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셨지만, 또한 인자가 나타나는 날까지 그분은 계속 이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어느날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인자의 날이란 어떤 날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도래하는 날이다. 그러면서 온 세상 나라를 심판하는 날이다. 인자에게 속한 자들은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부활하여 멸망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인자의 날이 어떻게 임하게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날이 어떻게 임하게 되는지를 본문에서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예로 들면서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17:30)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인자의 날이 마치 노아의 시대와 롯의 시대에 일어났던 것과 같이 그러한 방식으로 임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17:26-29).

인자의 날은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그리고 “롯의 때와 같이” 임하여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멸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인자 되시는 주 예수님은 본문에서 그 때의 사람들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다 멸하였다고 하였다. 노아의 때에 여러 가지 사건들도 많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죄인가? 그러한 일들 자체는 죄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먹고, 마시며,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다. 롯의 때를 보면 먹고, 마시는 일 외에 사고, 팔고, 집을 짓는 일을 말하고 있다. 사고파는 행위는 경제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집을 짓는 일도 역시 살기 위하여 필요한 일들이다.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이 죄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대단히 지독한 악이 난무한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성적인 범죄와 폭력과 살인, 그리고 불의와 부정과 부패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운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극심한 죄악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행하던 평상시의 행동을 지적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그들이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았느냐 하는 것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 노아의 때나 롯의 때의 사람들은 에녹이나 노아, 아브라함이나 롯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과 사고파는 경제생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노아시대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는 홍수로 다 죽게 되었고, 롯의 때에는 롯과 그의 두 딸 외에는 불로 심판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자가 나타나는 때의 특징 역시 노아 및 롯의 때처럼 인자의 심판에 대한 관심이 극도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18:8)고 탄식하신 것이다.

 

 

인자의 날에 대한 준비

 

인자의 날이 임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우리가 읽은 본문 30절은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라고 하셨다. 따라서 그 날을 준비하는 방법은 노아의 때와 롯의 때의 사람들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자의 심판을 피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영원토록 누릴 수 있다.

 

미래 어떤 때에 반드시 이 세상에 인자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온 세상 나라과 권력은 다 무너질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이 땅에 임할 것이다. 이때 멸망 당하는 자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오직 먹고 마시는 것을 목적으로 살았던 자들이다. ,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살던 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때에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 사람들의 관심은 어디에 집중이 되어 있는가? 불행하게도 주님이 관심을 기울이도록 도전한 인자의 날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인자의 날에 이들은 노아 및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인자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정산의 날이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앞으로 신자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이유는 대다수가 오직 먹고 마시고 결혼하며 심고 짓고 세우면서 이 세상만을 위해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 또한 배척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산다는 것은 외롭고 지치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체험되어지면 또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 가운데 항상 의와 평강와 희락이 넘칠 수 있다. 이것이 신자의 위로이다.

 

그러면서 신자들은 인자의 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날에는 우리가 부활하여 지금까지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교제해 온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면서 교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교제하였던 것처럼, 우리 역시 부활체를 입고 완전한 영광과 영화를 누리시는 인자이신 우리의 왕과 무한한 교제를 나누면서 눈에 보이도록 임한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나라는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비실제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또한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만 누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우리 눈으로 목격하고 경험하게 되는 실제 현실이 될 것이다. 이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부활체를 입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의 궁극적인 소망과 믿음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게 도래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 시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단순하게 먹고, 마시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인자의 날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소망하면서 우리의 생활 영역 전체를 말씀으로 조명하면서 그 말씀에 따라 조정하며 살아야 한다. , 우리의 관심은 썩어질 이 세상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오늘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들어보자.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 13:44-50).

 

인자의 날이 이르기까지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세상의 것들을 투자하여 그 나라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인자가 돌아와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실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의 인생이 왜 있는지 돌아보자. 우리의 인생은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준비하는 청지기의 삶일 뿐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이 세상의 먹고 마시며 사는 일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늘 인자의 날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사는 인자의 백성이 되도록 하자.

 

 

 

 
역사에서 본 쿠란의 허구과 성경의 진실성 스테반 황 | 미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목사 서론 필자는 한국의 이슬람 공식 사이트 www.quran.co.kr 에 실린 글들을 기초로 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이슬람의 허구를 지적하고자 한다. 특히 인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사건에 대해 성경와 쿠란이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 본 진실을 증빙 자료들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성경의 진실성을 변호하고 쿠란의 거짓을 폭로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쿠란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크고 확실한 사건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거짓 주장을 함으로써 쿠란 자체의 신빙성을 무너뜨리며 따라서 쿠란이 주장하는 모든 내용은 믿을만한 내용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 본론 1. 한국 이슬람교 공식 사이트 www.quran.co.kr 한국에서의 이슬람 활동은 해마다 더욱 활성화되고 있으며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또한 쿠란이 공식적으로 한글로 번역되어 한국 사회에 신속하게 보급되고 있다. 『성 꾸란과 의미 번역의 출판: 두 성지의 수호자 파하드 븐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으로 번역 편집되어 만들어진 한국어 쿠란은 인터넷 상에서도 pdf 파일로 무료 보급하고 있다. (주 - http://www.quran.or.kr/Korean%20Quran.pdf) 아래 도표는 한국의 이슬람교 공식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들이 믿는 이슬람교 믿음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이해한 가운데 쿠란과 성경이 주장하는 차이점을 요약하고 있다. 대상 기독교 이슬람 신 신은 하나의 신으로 통합되는 삼위이다. 이 한 분의 신은 소위 삼위일체라 불린다. 삼위일체의 각 신들은 모두 동등하며 똑같이 영원하고 같은 존재다. 이러한 이유로 이 교리는 하나의 신비로써 설명된다. 신은 오직 한 분이며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며 기초적인 단어다. 그 분은 자식이나 부모가 없으며 어느 것과도 동등하지 않으시다. 이슬람에서 신은 알라, 자비로우신 분 등 99가지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예수 삼위일체의 제2위로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되면서 동시에 모든 면에서 완전한 신이다. 신의 사도 중 한 명으로 매우 높이 평가된다. 성령 삼위일체의 제3위로 모든 면에서 완전한 신이다. 천사 가브리엘을 가리킨다. 마리아 정결하고 신앙심 깊은 여인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한 전지전능한 신인 예수를 낳았다. 정결하고 신앙심 깊은 여인으로 세상의 모든 여성 중에서 선택되어 신의 명으로 아버지없는 의로운 선지자 예수를 낳았다. 말씀 신의 일부분이지만 또한 완전한 신으로 신의 아들인 예수가 되었다. 신의 말씀 '있어라'는 마리아가 남성의 개입 없이 예수를 낳게 한다 예수 이전의 예언자들 모두 존경하며 믿는다. 모두 존경하며 믿는다. 성경 100% 모두 신의 오점 없는 말씀으로 받는다. 무슬림들은 모세에게 계시된 토라, 다윗에게 계시된 자부르, 예수에게 계시된 인질,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꾸란을 비롯하여 예언자들에게 계시된 모든 성서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꾸란을 제외한 모든 성서들은 인간의 손으로 수정되었으며 성경은 오직 꾸란에 의해 확증되는 부분만 옳다고 믿는다. 꾸란의 절과 확연히 상반되는 내용들은 인간의 손으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무함마드 다양한 믿음이 산재한다. 어떤 이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거짓 메시아라고 믿는다. 전 인류에게 보내진 신의 마지막 사도다. 그 분이 신의 첫 계시를 받기 전에는 진실되며 신뢰받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분은 모든 생명체에 신의 자비로써 보내졌다. 꾸란 성경의 복사본이라는 믿음에서 무함마드가 쓴 책이라는 것까지 다양한 믿음이 산재한다. 또 어떤 이는 무함마드와 공모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작품으로 믿기도 한다. 신이 인류에게 계시하신 마지막 성서다. 꾸란은 신으로부터 보호받아 인간의 개입으로 수정되지 않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꾸란의 문학적 위치는 어느 곳에서도 그 비등함을 찾을 수 없다. 오늘날까지 아랍어로 쓰인 어떤 위대한 작품이라 해도 꾸란에 견줄 수 없다. 꾸란은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의 지도서로써 심판의 날까지 인간의 개입으로부터 안전히 보호될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 신에 의해 보내진 예수는 아담의 죄로부터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의 희생 없이는 전 인류가 아담의 죄로 파멸되는 운명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의 십자가 죽음 이후 인류에게 남겨진 것은 선행 없는 믿음이다.  예수는 신에 의해 유대인에게 보내진 한 명의 사도이며 모세의 순수한 참종교를 회복시키고 고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규범의 일부를 경감시켜 주고자 했다. 예수는 유대인에게 믿음뿐만 아니라 선행도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리고 장님과 나병환자를 치료한 것 모두 믿는다. 예수는 이 기적들 모두를 행했다. 신의 아들이며 또한 동시에 완벽한 신이며 신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모두 믿는다. 이 기적들은 신의 뜻으로 행해졌다. 마치 모세나 노아, 고대의 다른 예언자들이 신의 뜻에 의해 기적을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십자가 죽음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넘겨졌다. 유대인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그의 몸에 상처를 내고 굴욕을 주며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수는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학대당하고 살해되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에게 그런 것처럼 보이게 꾸며졌을 뿐이다. 신은 예수를 그 분 가까이로 승천시켜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구제했다. 예수의 재림 현재 예수는 세기말 무렵에 도래할 것이라 기대된다. 예수는 죽지 않고 신에 의해 승천했다. 그는 심판의 날 직전 지구에 내려와 거짓 메시아를 없애고 평화와 정의를 설립할 것이다. 예수는 돼지를 죽이고 십자가를 부수며 전 인류를 이슬람으로 초대할 것이다. 원죄 전 인류는 아담의 죄를 안고 태어난다. 오직 신의 죄 없는 자손의 죽음만이 원죄를 제거할 수 있다. 단 하루만을 살았던 사람이라도 깨끗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죽음에 대한 믿음과 세례만이 원죄의 운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원죄 따위는 없다. 인류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인간이 불신하여 신의 자비를 거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천국으로 가도록 운명지어졌다. 인간의 죄가 하늘의 높은 곳을 전부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 해도 신은 쉽게 그 죄를 용서해 주신다. 신에게 있어 용서의 문제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신은 우리가 보고 듣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고 그 이상의 일들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신은 피조물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기 좋아하며 가장 사소한 선행에도 커다란 보상을 주신다. 신의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을 갖고 선행을 해야 한다.  아담의 회개 아담의 죄는 너무나 큰 것으로 신은 단순하게 그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았다. 아담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히려 죄 없는 순수한 신인 예수의 피를 필요로 아담은 그의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회개했다. 주여 저희가 저희 스스로를 욕되게 하였나이다 당신께서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지 아니 하시고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아니 한다면 저희는 잃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신은 아담을 용서해주셨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면 모두 임종 시까지 용서의 문이 열려있다. 인간과 신 사이에는 어떤 중재자도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신에게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마지막 시간이 오기 전에 악행을 멀리한다면 신은 그들을 용서하신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만큼 신이 좋아하시는 것은 없다. 구원의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에 대해서도 예수의 보혈의 피를 믿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오직, 믿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신을 믿고 그 분의 사도들을 믿고 그 분의 명에 순종한다면 신은 사람들이 행하는 조그마한 선행을 몇 배로 늘려주시며 악행을 지워 주신다. 심판의 날까지 신의 자비는 사람들의 선행이 악행을 압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천국과 기쁨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다. 천국은 상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곳으로 영원히 그 곳에서 거주하게 된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의 선행은 필요 없고 오직 보상만이 있을 뿐이다. (주 - http://www.quran.or.kr/Islam/chris2.html ) 필자는 위 내용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하는 쿠란과 성경을 비교 분석할 생각이다. 먼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이슬람교의 공식 사이트에서 분석한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성경: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넘겨졌다. 유대인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그의 몸에 상처를 내고 굴욕을 주며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는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슬람교 쿠란: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학대당하고 살해되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에게 그런 것처럼 보이게 꾸며졌을 뿐이다. 신은 예수를 그분 가까이로 승천시켜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구제했다. 요약하면 성경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실을 절대적으로 말하며, 반면 쿠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거짓이라고 말한다. 이에 우리는 어떤 것이 진실을 말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쿠란의 주장 쿠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쿠란 제 4장 니싸아 157절을 보면 “마리아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선지자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해하였다라고 그들의 주장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그를 살해하지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했으며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라. 이에 의견을 달리 하는 자들은 의심이며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추측을 할 뿐 그를 살해하지 아니했노라”고 한다. (주 – 한국 이슬람 공식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한 한국어 쿠란에서 인용하였다.) 한국 쿠란을 번역한 이슬람.이슬람기금.선교와 지도부 장관 출판청 총감독인 쉐이크 살레 븐 압둘아지즈 븐 무함마드 알 쉐이크는 한국어 성쿠란 내에 쿠란 제4장 157절의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다. “예수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던 주요 3년을 제외하면 그의 생애는 물론 그가 탄생해서부터 성장에 이르기까지 또한 성장이후 그 후 사생활은 너무나 신비에 싸여있는 것들이 많다. 특히 예수의 마지막 생애에 관하여는 더욱 그렇다. 정통 기독교 학파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생을 마쳤으며, 장사 지낸지 3일 후에 상처 입은 그대로 일어나 주위를 걷다가 그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먹은 후 그의 몸이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학파는 예수가 십자가에 살해되었다고 믿지 않고 있다. ‘바실리단’ 학파는 예수 대신 어떤 누가 십자가에 살해되었다고 믿고 있다. 한편 ‘마르시오니트’ 복음 (A.D 138)에서는 예수가 태어난 것까지 부정하고 단지 그가 인간의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 - 한국어 쿠란, p 167; 쿠란 4:157절 하단 주석에서 가져왔다.) 즉, 쿠란은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라”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추측이며 단지 예수께서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조작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예수님께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설명하려는 여러 다양한 ‘설(theory)’을 끄집어낸다. 어떤 무슬림들은 로마 군인들이 바라바를 예수로 오해하여 그를 체포해서 감금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라바는 사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 처형을 받은 사람은 바라바라고 말한다. 또한 예수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서 제자들을 만났는데 (눅 24장), 사실 그때 예수는 군병들이 엉뚱한 사람을 체포한 것이 들통날까봐 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 - Larry A. Poston with Carl F. Ellis Jr., The Changing Face of Islam in America (Camp Hill, PA: Horizon Books, 2000), p. 188.) 또 다른 유명한 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은 가룟 유다라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후에 알라신이 유다의 모양을 변형시켜서 예수처럼 생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롯 유다가 예수로 오인되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게 되었고, 그 대신 예수님은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하늘로 그대로 승천했다는 주장이다.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이슬람 선교에 힘쓰는 압둘학크는 그의 책 『당신의 믿음을 무슬림과 나누라』에서 <이슬람 세계> CD ROM의 내용을 말한다. 이슬람의 많은 학자들이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의 모양이 예수처럼 되어 그들은 가롯 유다가 예수인줄로 착각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 사건이 있은 후 3시간 후에 하나님은 예수를 취하여 하늘로 올리셨다” 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주 - Abdiyah Akbar Abdul-Haqq, Sharing Your Faith with a Muslim (Minneapolis: Bethany, 1980); cited in The World of Islam CD-ROM.) 이때 예수님이 하늘로 오르심은 구약에서 엘리야가 불마차 가운데 오른 사건과 유사한 것으로보며 예수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것으로 본다. 『바나바의 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유대인 단체가 예수를 조롱하였다. … 그 후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모였다. 이 사실을 알라신이 예수에게 알려 주었고 또한 예수 그를 하늘로 데려가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 중에 누가 내 모습으로 변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천국에 들어가겠느냐?’ 제자 중에 하나가 예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알라신은 그를 예수 모습으로 변하게 했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위선으로 예수에게 행했던 제자였는데 유대인들을 끌고 예수께로 온 자였다. 그러나 알리신은 그를 예수처럼 생기게 만드셨고 결국 그는 군병에게 잡혀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주 - David Sox, The Gospel of Barnaba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84), p. 96.) 또 다른 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긴 했어도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기절’한 것인데 죽은 것으로 오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도망쳤다. (주 – Bruce A. McDowell and Anees Zaka, Muslims and Christians at the Table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1999), p. 117-118.) 왜 무슬림들과 쿠란은 예수가 절대로 십자가상에서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일까? 그 주된 이유는 무슬림들은 알라신이 절대로 자기의 선지자 예수를 그렇게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런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알라신의 전능하심과 모순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알라신은 반드시 위험에 처한 선지자를 구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의 운명을 정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가 원수에 의해 모독을 당하며 죽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주 - McDowell and Zaka, p. 118). 무슬림 학자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주장은 마귀의 주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어, 이븐 타이미야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마귀의 음성이라고 주장한다. “마귀의 맨 처음 목표는 거짓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특히 마귀는 사도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가 그리스도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주 – Ibn Taymiyya. A Muslim Theologian’s Response to Christianity. Edited and translated by Thomas F. Michel. Delmar. (N. Y.: Caravan Books, 1984), p. 110.) 따라서 무슬림의 관점으로는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에 못박힌 적이 없으며 승천은 하셨지만 부활한 적도 없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다음과 같이 믿는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여 하늘로 오르셨으며 어느 날 이 땅에 다시 돌아와서 미래 사건에 주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을 믿는다. 선지자 무하마드(Muhammad)가 말한 내용에 근거하여 예수는 종말이 오기 직전에 이 땅에 다시 돌아와 적그리스도를 죽이고 돼지들을 죽이고 십자가의 복음을 무너뜨리고 회당들과 교회들을 파괴시키며 이슬람 종교를 다시 세우고 이 땅에서 40년을 살다가 선지 무하마드가 묻힌 도시 메디나에 묻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주 - Norman L. Geisler and Abdul Saleeb, Answering Islam: The Crescent in Light of the Cros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3), p. 65.)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성경의 주장 십자가의 실제적 고통 (마 27:35-50) 신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실제적인 고통은 고대 역사 가운데 가장 분명한 사건 중에 하나다. 자유주의 신학자이든, 이방인이든, 타종교의 사람들이든, 보수 계통의 신학자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고, 주의 죽으심으로 인해 제자들이 절망하게 된 것에 거의 다들 동의한다. 사복음서의 십자가 사건 요약 그리스도의 신체적 외상이 실제적인 사실이었음에 대하여는 고대나 현대나 의학적으로 전혀 의심 받지 않는다. 유월절 전날 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고 베드로에게 버림을 받은 후 성전 군병들에게 체포된다.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예수님은 조롱을 받고 매를 맞고 침 뱉음을 당한다. 그 다음 날 아침, 매를 맞고 멍에 든채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은 관정(Praetorium)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거기서 예수님은 옷을 벗기운 채 잔인한 로마 병정들의 채찍을 맞기 시작했다. 면도날처럼 예리한 납덩어리와 동물의 뼈로 만들어진 채찍은 채찍이 주어질 때마다 예수님의 몸을 떼어내며 피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뒤범벅이 되자 군병들은 자주색 겉옷을 예수님의 어깨 위에 두르고, 손에는 홀(scepter)을 쥐어주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눌러 씌웠다. 예수님을 질리도록 조롱한 군병들은 그의 손에서 홀을 빼앗은 후에 그것으로 예수님의 머리를 계속 갈긴다. 지금 예수님은 중상을 입은 상태다. 그럼에도 무겁고 두꺼운 긴 나무토막을 피를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운다. 그리고 골고다라고 하는 곳으로 끌고 간다. 그곳에서 주님은 십자가상에 매달려 이 땅에서 가장 지독한 신체적 고통을 당하셨다. 로마의 십자가형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고안된 처형 방법이다. 사실, 십자가형이란 “excruciating”, 곧 문자적으로 “십자가로부터” 라는 뜻으로서 인간의 모든 것을 끄집어내어 가장 큰 고통을 줄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주 - Strobel, The Case for Christ, pp. 197-198.) “해골” 이라는 곳에서 로마 군사들은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는다. 그 못은 두꺼우며 길이는 약 18 Cm다. 대못이 주님의 신경 계통을 잡아 찢자 그리스도의 온 몸에는 고통의 파장이 흐른다. 십자가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는 그 몸은 약간의 숨을 들이키는 것조차 너무나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된다. 십자가에 매어달려 있으면 주기적으로 뼈마디가 끊어지는 고통을 체험하며 간헐적으로 질식한다. 발의 힘이 빠져 십자가의 나무 판에서 위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온 몸을 도려내는 고통이 임한다. 죽음이 다가온 것을 느끼신 주님께서 부르짖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이 고뇌에 찬 절규 속에는 이 세상의 가장 큰 고통이 다 들어 있었다. 이는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류의 죄와 고통을 담당하신 것이었다. 그의 대속의 고통을 통해 사명을 마치시자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주께서 숨을 거둔 직후에 로마 군병 하나가 달려와 창을 들고 예수님의 시체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 창은 심장 막을 지나 그리스도의 심장을 관통하였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고통을 당하여 죽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듯 피와 물이 쏟아졌다. 성경의 모든 증거는 예수님의 죽음을 절대적으로 본다. 그분의 죽음의 사실에 성경의 권위와 진실성이 서 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이 없다면 그를 믿는 자들을 향한 죄의 대속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에 의한 죄사함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 영혼들은 자신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는 논리적으로 볼 때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지옥 심판 밖에 없다. 그 이유는 죄를 해결할 길이 형벌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4. 예수의 죽음이 거짓이라는 무슬림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기절했다고 보는 설은 황당한 추측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 설을 믿고 있다. 결론적으로 기절설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후에 아무 의학적 치료 없이 삼일 동안 살아있었으며, 엄청나게 무거운 묘지의 입구 돌을 홀로 움직이셨으며, 묘비를 지키는 무장된 군병들을 굴복시키셨으며, 못 박히셨던 그 발로 활보하셨으며, 그 후 자신의 남은 삶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아가면서 제자들에게는 그가 죽음을 이겼노라는 신화를 만들도록 유혹했다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가룟 유다가 예수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바나바 복음』은 이슬람교가 기독교를 비판하고 무너뜨리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문서다. 이 문서는 16세기 말에 이태리어와 스페인어로 쓰였는데 무슬림들이 만든 것으로 의심되는 문서로서 그 내용이 사실로서 믿을만하다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무슬림들은 『바나바의 복음』을 기독교의 위경 『바나바의 서신』과 연결시키려고 하지만 이것도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의학적 판정 뛰어난 의사로 알려진 알렉산더 메써렐 박사(Dr. Alexander Metherell)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한 사건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그 후 기절설의 허점을 정확하게 찌르는 증거들을 마련하였다. 메써렐 박사는 주장하길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러한 지독한 십자가의 고문을 당한 사람이라면 “결코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감동시켜서 자신이 죽음을 이긴 생명의 주라고 선포할 것을 부탁할 수 없다”라고 지적하였다. 메써렐은 계속 주장하길, “그러한 끔찍한 고통과 혹사를 당하면 치명적으로 피를 다 흘리게 되며 중환자의 상태가 된다. 만일 제자들이 그러한 주의 모습을 보았다면 너무나 불쌍하고 비참하게 느꼈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을 모습을 보고 죽음을 이긴 승리자로 그를 환영하기보다 너무나 불쌍한 마음에 오직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예수께서 그러한 비참한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는데 만일 제자들이 자신들도 어느 날 그러한 비참한 모습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세상에 나아가 부활을 외치는 운동을 하였다고 본다면 이는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주 - Strobel, The Case for Christ, 202.) 따라서 기절설은 아무 근거 없는 황당한 추측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확실성 철학자이며 신약 역사가인 게리 헤버마스 박사(Dr. Gary Habermas)는 몇 가지 근거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절대적이 사실임을 증거한다. 첫째, 사도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 군병들이 예수께서 죽으셨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고 그때 물과 피가 나왔다 (요 19:34). 요한은 서기 1세기 사람으로서 최근의 의학을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최근의 의학에 의하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진 현상은 심장 주변에 물주머니인 “심낭(pericardium)”이라고 불리는 것이 터지면서 물이 나왔고 또한 심장이 찔리면서 피가 흘러나온 것이다. 헤버마스는 “만일 예수께서 만에 하나 창으로 찔리기 전에 살아 있었더라도 창에 찔린 후에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옆구리가 창으로 찔려 피와 물이 나온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분명하게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주 - Habermas, The Historical Jesus, 74. 참조하라. Davis, “The Crucifixion of Jesus: The Passion of Christ from a Medical Point of View,” 183-187; and Edwards, Gabel, and Hosmer, “On the Physical Death of Jesus Christ,” pp. 1455-1463.) 성경의 역사 기록에 대한 진실성 신약 성경은 호머(Homer), 플라토(Plato), 아르스토틀(Aristotle), 시저(Caesar), 타시투스(Tacitus) 등의 다른 어떠한 문학 작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본이 많다. 신약 성경에는 헬라어로 쓰인진 약 5천개 이상의 사본이 남아 있으며 라틴어(Latin), 콥틱어(Coptic), 시리아어(Syriac)로 된 번역본들은 2만이 넘는다.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는 서기 120년에 기록된 것이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최초의 사본은 1세기 중엽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들이 있다는 점이다. (주 - Carsten Peter Thiede and Mathew d’Ancona, Eyewitness to Jesus (New York: Doubleday, 1996), 29-31, chap. 5; Philip Wesley Comfort, ed., The Origin of the Bible (Wheaton: Tyndale House Publishers, 1992), pp. 179-207.) 현재 존재하는 플라토의 사본은 겨우 7개 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경 사본의 수는 엄청난 것이다. 또한 원본으로부터 직접 복사한 사본과 마지막 사본 사이에는 약 1300년의 차이가 있다. 또한 신약의 내용에 있어서 최초의 사본과 수세기 후에 쓰인 사본을 비교할 때 거의 같다. 더욱이 성경의 신빙성은 성경 저자가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어, 누가는 목격자들의 증거를 모아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눅 1:3)고 증언한다. 또한 사도 요한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고 증언한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그의 독자들에게 편지하기를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험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고 증언하고 있다. 성경의 신빙성은 예수님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들이 다 이루어진 사실에 있다. 한때 자유주의 신학자들 및 성경 비평학자들은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먼 훗날에 편집되어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이 기록된 그 당시보다 수백 년 뒤에 발생할 일들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론을 내리길, 사건이 발생한 후에 성경 편집자가 성경을 거슬러 올라가 원래 내용을 미래의 사건을 예언한 것처럼 뜯어 고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틀리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의 예언 및 그 정확성이 증거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신약 성경의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은 다른 예언들보다 훨씬 많으며 만일 예수님께서 이 예언을 섬세하게 완성하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예언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에 의하면, 메시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어야 하고 (창 12:3; 17:19; 마 1:1-2; 행 3:25), 그의 탄생은 베들레헴이어야 하며 (미 5:2; 마 2:1, 6), 죄인과 함께 형을 당해야 하며 (사 53:12; 마 27:38; 참조, 눅 22:37), 십자가상에서 그의 손과 발이 찔려야 하며 (시 22:16; 요 20:25), 그의 옷을 놓고 군병들이 주사위를 던져야 하고 (시 22:18; 마 27:35), 그의 옆구리가 찔려야 하며 (슥 12:10; 요 19:34), 그의 뼈는 죽을 때에 부러져서는 안 되고 (시 34:20; 요 19:33-37), 그의 묘지는 부자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 (사 53:9; 마 27:57-60). 통계적으로 볼 때 성경의 이러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예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진 사실은 우연일 수도 없고, 그 예언들이 추측이라고 할 수 없으며, 철저한 속임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더더욱 주장할 수 없다. 위의 인용된 예언들의 내용은 그 역사성과 확실성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예언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회의론자들이라 하더라도 거절할 수가 없다. 이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 되며,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실제적 고통에 관한 성경 기록은 수백 년 전의 분명한 예언으로서 다른 예언의 완성과 함께 예수님께 실제로 발생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고고학적 증거들 사본의 증거처럼, 고고학은 신약 성경의 정확성에 관하여 힘 있는 증거가 되어 준다. 끊임없는 방대한 고고학적 발견은 성경 기록의 신빙성을 확증한다. 따라서 성경 비평 학자들도 어쩔 수 없이 견고한 고고학적 증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신들의 의심과 비평을 접게 된다. 성경 회의론자인 윌리암 람세이 경(Sir William Ramsay)은 잘 훈련된 고고학자였는데 그는 신약 성경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없다고 증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생스러운 중동 고고학 여행을 다니면서 그는 누가의 역사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주 - William M. Ramsay, The Bearing of Recent Discovery on the Trustworthiness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53), 겉장.) 더욱이 고고학자들이 최근에 다량으로 발견한 고고학적 증거들은 그 동안 그리스도의 십자가 및 장사 사건에 관한 성경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던 학자들에게 할 말을 잃게 하였다. 특히 제프리 쉘러(Jeffrey Sheler)가 1999년 10월 25일에 발행된 U.S. News and World Report 에서 제시한 최근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는 서기 1세기에 십자가 처형을 당한 시체들의 잔재들인데 성경의 기록을 철저하게 뒷바침한다. 다음은 고고학적 발견에 관한 쉘러의 기록이다. “탐험가들은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는 나불루스(Nablus) 도로 근처의 기바아트 하미트바(Giva’ at ha-Mitvar)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의 뼈들을 발견하였다. 이 발견은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다. 그 이유는 구세기와 신세기가 바뀌는 약 200년 동안 로마 사람들이 반역자, 강도, 도망자, 간신들에게 집행하였던 십자가형에 있어서 십자가형을 당한 잔재가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잔재를 발견한 후 분석한 결과 그들의 상태는 성경이 묘사하는 로마 군인들의 십자가형의 집행과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뼈는 납골당이라고 불리는 돌로 만든 상자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뼈의 주인은 키가 165 센티미터 정도이고 24세에서 28세의 남자로 보였다. 그의 팔은 십자가형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십자가 모습의 나무 판에 못 박혔던 자국이 있었다. 무릎은 접혀서 양 옆으로 펼쳐져 있었고 큰 대못이 양쪽 발꿈치를 관통하고 있었다. 형을 집행한 사람들이 죽은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놓았지만 대못은 여전히 양쪽 다리의 발꿈치에 박혀 있었다. 대못은 휘어 있었는데 십자가 나무의 옹이에 부딪힌 것처럼 보인다. 정강이뼈는 부러져 있었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기록한 로마 형의 통례와 정확하게 일치하였다.” (주 – Jeffrey L. Sheler, “Is the Bible True?” U.S. News and World Report, 25 October 1999, p. 58). 마지막으로 고고학에서는 최근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재판과 관련한 구체적인 증거들을 발견하였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및 가야바(Caisphas)와 관련한 자료들이 발견된 것이다. 빌라도는 로마법으로 십자가형을 언도하였고 가야바는 종교 재판에서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1990년, 쉘러의 기록에 의하면 성전산(Temple Mount)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서 서기 1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묘실을 발견하였다. “묘실에서 고고학자들은 석회로 만든 12개의 납골당을 발견하였다. 어떤 납골당은 60세의 남자의 뼈가 들어 있었는데 “Joseph, Son of Caiaphas”라고 새겨있었다. 전문가들은 이 뼈가 예수님의 체포를 명령하고 예수님을 심문한 후에 십자가형을 집행하게 하기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그를 넘긴 가야바의 것으로 믿는다. (주 - Sheler, “Is the Bible True?” pp. 58-59.) 5. 쿠란과 성경 외의 역사적 문서 증거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성경 외적인 증거들을 살펴보자. 특히 개리 하버마스가 쓴 『예수의 삶에 대한 고대 증거』는 이 부분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주 - Gary Habermas, Ancient Evidence for the Life of Jesus, (Nashville: Thomas Nelson, 1984), 87-118.)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지방에서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 - Tacitus, Annals, 15:44. cited by F. F. Bruce, Jesus and Christian Orijins Outside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4), 22.) 2세기 경 저스틴 마터는 “본디오 빌라도의 행적”에 대해 언급하면서 “예수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후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처형을 당하고 집행관들은 그의 옷을 차지하려고 주사위를 던져 제비를 뽑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주 - Justin, First Apology, 35, in The Ante-Nicene Fathers, vol. 1, 175).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셉푸스는 “예수라고 불리는 지혜로운 자가 있다. … 빌라도가 그에게 십자가 처형으로 죽음을 선고했다.” (주 - Josephus, Antiquities, 18:3). 유대교 탈무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유월절 전날 밤에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다.” 라고 말한다. (주 - Michael L. Rodkinson, The Babylonian Talmud, “Sanhedrin,” 43a (Talmud Society, 1918).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가장 오랜 기록은 팔레스틴 역사가 탈루스(Thallus)가 서기 52년에 쓴 것이다. 그 기록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함께 어둠이 임했다”고 말한다. (주 - Bruce, 30). 또한 대영 박물관에 있는 시리악 사본 마라 바 세라피온 은 질문하길 “그들의 왕을 처형해서 유대인들이 얻을 것이 무엇인가?” 라고 말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 (주 – Bruce, 31). 이들은 전부 기독교에 대항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나사렛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다. 6. 쿠란의 주장의 논리적 모순과 성경의 논리적 진실성 이븐 타이미야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유대인들 곁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오히려 사도들은 두려움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사도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십자가 사형을 목격하지 않았다.” (주 - Ibn Taymiyya, p. 305)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븐 타이미야의 주장과 상충된다. 복음서는 사도 요한이 십자가형이 집행될 때 십자가 곁에 바로 서 있었다. (요 19:26). 특히 여인들 중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지켜 본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요 20:25-26), 다른 여인들 (눅 23:27; 요 19:25)이 있었다. 심지어 이븐 타이미야의 주장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한 사도들이 없다고 해도 그 주장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당시 로마 병정들은 만일 십자가 처형에 있어서 어떤 실수라도 하게 되면 죽음을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으며 이 사실에 대해서는 로마 병정들이 증인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전문 집행관들이며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두 강도가 있었고 (마 27:38), 많은 군중들이 있었다(마 27:39; 눅 23:27).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미워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조금의 착오도 발생하지 않도록 가장 분명하게 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실제로 죽으셨다는 증거는 대단히 많다. 첫째, 구약이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있다 (사 53:5-10; 시 22:16; 단 9:26; 슥 12:10).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여러 차례 미리 선언하셨다 (마 12:40; 17:22-23; 20:18; 막 10:45; 요 2:19-20; 요 10:10-11). 또한 성경이 예언하는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한 부활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확실하다 (시 16:10; 사 26:19; 단 12:2; 요 2:19-21; 마 12:40; 17:22-23).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입으신 상처와 십자가에서의 고통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장한다. 특히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죽은 것을 확인할 때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요 19:34)가 나온 것은 그가 실제로 죽었다는 의학적 증거다. 마지막으로 십자가형과 죽음에 대해 전문하는 로마 군병이 예수의 죽음을 선포했다 (요 19:33). 무엇보다도 빌라도는 예수의 시체를 요셉에게 장사지내도록 시신을 내주기 전에 다시 한 번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 (막 15:44-45).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시체가 봉인된 무덤에 3일 동안 놓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못 박는 것이다. 바울은 이 부분을 복음의 핵심 내용에 의도적으로 삽입하고 있다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주님은 실제로 죽으셨기 때문에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쿠란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부인과 성경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주장을 비교 분석하면서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증빙 서류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절대적으로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따라서 쿠란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이에 쿠란의 다른 모든 내용들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역사적 사실과 함께 그 진실함과 신빙성을 신원 받았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물과 피”로 증거한다. 요한복음 19:34절을 보면 물과 피는 메시야에 대한 특이한 예언 성취인 것을 본다.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곧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36절)는 의미는 메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인 하나님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보내신 메시야가 틀림없으며 그의 죽음은 절대적 사실임이 확실하다. 특히 물과 피는 의학적인 증거 및 예언 성취의 증거도 되지만 성경은 ‘물과 피’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의 증거임을 선포한다. 따라서 이를 부인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며, 이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 같은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없다. 즉 ‘물과 피’로 증거하시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실과 의미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고서는 죄사함과 영생의 선물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이며, 그가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임을 증명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 따라서 물, 피, 성령의 오심은 인간의 실제 역사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야이심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 하시는 증거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는 자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 즉, 물과 피와 성령의 오심의 이 세 증거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 자신께서 친히 예수님을 증거 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에서 엄청난 증언을 한다.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완전하게 공의하시다. 따라서 죄를 조금이라도 간과하신다면 하나님은 완전하게 공의로우실 수 없다. 쿠란은 인간의 선행이 악행보다 많기만 하면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결국 그들의 주장은 인간의 삶 가운데 50%의 죄를 하나님께서 간과하신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50% 미만의 죄를 간과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완전하게 공의하실 수 없다. 오직 100%의 의가 있을 때만 구원을 허락하셔야 하나님의 절대 공의는 영원히 설 수 있다. 따라서 50% 이상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슬람의 주장은 그들이 믿는 알라신을 불의의 신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쿠란은 다른 사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영생을 방해하는 가장 큰 마귀의 작품이다. 따라서 거짓말로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복음과 영생의 길을 방해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거짓말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예수님의 역사적 죽음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3-4). 출처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원문보기▶ 글쓴이 : 익명회원 입니다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 안에서 율법의 역할  (0) 2013.01.16
개혁주의 목회자 연대  (0) 2013.01.13
주님은 나의 최고의 선물  (0) 2013.01.04
죽음 이후의 상태  (0) 2013.01.02
메시야의 어머니  (0) 2012.12.27

1월 2일 구원을 얻게 하는 의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영적인 삶은 좋은 자리에서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가고 더 나은 자리에서 최상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삶은 오직 최고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차선이라는 것이 없다. 오직 최선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최선을 구할 때 이를 가장 많이 막는 것은 죄악이나 부정한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옳고 선하고 고상한 것들이다. 사실 성령의 역사로 눈이 열리면 우리의 인간의 미덕이 하나님께 가장 항복하기를 거절하는 최후의 대항 세력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대부분의 영혼들은 하나님의 최선에 닿기 전에 심한 영적 갈등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은 야비하고 악한 것들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논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옳은 것에 대하여 논쟁한다. 그 이유는 인간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자연적인 덕에 대해 끝까지 변론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대항할 정도로 자신의 미덕을 강조하며 붙든다. 그래서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종종 복음을 멸시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허락하시는 의는 자연적인 덕으로 만든 의가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완전한 의를 쌓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받으시는 완전한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 의는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하신 일이다.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의를 소유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완전한 의를 얻게 되는데 있어서 자신을 의지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다. 물론 아브라함의 삶에도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여러 고상한 덕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 고상함이 아브라함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든 것은 아니다.

위 구절은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주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의 뿌리가 되는 구절이다.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의롭다고 증거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인한 의로운 삶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한 의로운 삶을 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모욕을 끼치는 존재가 된다.

[출처] 1월 2일 구원을 얻게 하는 의|작성자 스데반 황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혁주의 목회자 연대  (0) 2013.01.13
역사에서 본 쿠란의 허구성과 성경의 진실성  (0) 2013.01.11
죽음 이후의 상태  (0) 2013.01.02
메시야의 어머니  (0) 2012.12.27
성도의 심판  (0) 2012.12.24

[2012. 12. 31. 송구 영신 예배] 죽음 이후의 상태 | ▶설교 본문

2013.01.01 01:58

 죽음 이후의 상태

 요한계시록 7:9-17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7: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왔느냐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7: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시록 21장을 보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납니다. 노아의 홍수를 지나면서 이전 하늘과 이전 땅에 사라지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늘과 이 땅이 생겨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지금 이 하늘과 이 땅은 사라지고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날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이 땅에 하나님의 보좌가 임하는 장면으로서 하늘과 땅이 통일되는 그림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완전하게 임하는 그림이 계시록 21장입니다. 죄와 저주와 마귀와 악령들과 불신자들은 다 불못에 들어가고 아무런 해나 죽음이나 병이나 고통이나 슬픔이나 저주가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전 세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통일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서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에는 부활체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천사에 대한 묘사나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사망이 없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망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부활체를 입은 주의 백성들이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망이 없는 것입니다. ,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 날에 하늘이 땅과 완전하게 통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에 임하는 날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3:2-3)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또한 계시록 21장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한다는 내용이 나오고, 새롭게 된 만물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업으로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들은 불못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둘째 사망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21 3절에서 하나님의 장막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 7 15절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란 하나님의 성전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구약 광야에서 지어졌던 성막은 하늘의 장막의 모형 또는 그림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8:1-2, 5; 참조, 9:23-25).

 이처럼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및 지성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장막이 새하늘과 새땅의 세상에서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는 사람이 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보좌가 실제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1:22-23).

 이때 하나님의 장막인 새 예루살렘 성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21:27).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 7장은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에 대한 언급이 있고, 하나님 보좌 주변에 대해 구체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장막이 언급되고 있지만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감으로 그들 위에 그 장막이 쳐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의 백성이 죽음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인 지성소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성령과 함께 영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이 땅에서는 믿는 자들을 향한 배척과 핍박이 진행될 것입니다. 특히 역사 끝에 이르면 대환난이있어서 그때 교회가 겪게 될 고통과 핍박은 로마 시대보다 더 심할 것이며,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심한 핍박이있게 될 것입니다.  

 한국만 하더라도 일제 식민 기간에 기독교는 심한 탄압을 받았고,6.25 사변 등과 함께 공산당이 임시적으로 한반도를 차지할 때 그때 교회가 당한 핍박은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핍박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순교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마저도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사업을 할 때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어려움을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분위기를 깨는 예수 쟁이라는 등, 함께 부정직하게 살지 않기에 미워하는 등, 예수님 만이 길이라고 외치는 점에 대한 미움, 지옥을 말할 때 혀를 차며 어리석게 여기는 조롱 등, 사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고난은 인류 역사 끝에 있게 될 대환난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불편과 고난은 대환난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살다가 죽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장 하나님의 보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그 그림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 7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계시록 7장은 신자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계시록 7장을 듣게 될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주를 향한 믿음의 정절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에 자신의 운명이 어떠할지 정확하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7장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보좌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는 구별되는 영적인 세상으로서 천사가 있고 네 생물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당장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영적인 세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세상이 바로 계시록 7장이 묘사하는 세상입니다. 그곳에는 어린 양이 있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봅시다.

먼저 9절에서 말하는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은 계시록에 반복되는 표현으로서 이는 꿈의 장면이 넘어가는 것처럼 요한이 보는 환상이 장면을 바꾸며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 환상은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1:2)

 사도 요한이 이 환상을 보는 때는 밧모 섬에 있던 때로서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때입니다. 대략 A.D 95년 이나A.D 96년 경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A.D.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이 유다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여 유대 민족이 로마의 식민국이 된지 대략 20년 이상이 지난 때입니다. 따라서 이 때는 예루살렘 핍박 때에 유대에서 도망친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로 다 흩어져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세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황제들의 핍박은 계속 진행되는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세상 모든 민족으로부터 허다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환상을 보며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하 엄청난 핍박이 성도들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진행되지만 도리어 모든 민족과 나라로부터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름떼처럼 많구나!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하늘의 별들처럼, 땅의 모래알 처럼 많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12:3).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도다( 15:5-6).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어떻게 이방 민족 가운데 성취되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은 모든 이방 민족 가운데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3:7-8, 14, 29)

 그러므로 계시록 7 9절에서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와 환상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으로써 모든 나라와 족속, 그리고 온갖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하늘의 별들처럼, 땅의 모래알처럼 많은 백성이 구원을 얻는 사실을 묘사인 것입니다.

 또한 9절에서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14절에 보니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씻겨주시고,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를 믿음 가운데 옷 입은 자들이 흰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완전한 의의 옷을 입고 죽음을 지나기 때문에 승리의 상태가 됩니다. , 영광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 상태가 바로 손에 종려 가지를 든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자신들에게 승리를 안겨준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감사와 영광과 환호를 외치기 위해 손에 종려를 든 상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종려 나무를 들고 환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큰 무리가 따르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12:13)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는 불신자들도 끼어서 덩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였고 또한 예수님이 세상 나라의 왕으로서 오신 것이 아닐까 하여 환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7장에 등장하는 흰 옷을 입은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진정 거듭난 자들로서 영원토록 그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환영하며 외치는 자들입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흰 옷을 입고 이 세상에서 죽게 되면 곧바로 하나님의 장막이 있는 하늘로 들어가서 감사와 감동 가운데 그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큰 소리로 외치게 될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이들은 무엇에 대한 승리를 외치고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승리입니다.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율법의 저주에 대한 승리입니다. 사탄에 대한 승리입니다.

 이들이 승리를 확신하는 100% 증거는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하는 영원한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였지만, 죽음을 지나고 보니 어린 양을 믿고 따르던 우리들은 하나님의 장막이 있는 그 보좌로 나아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보니 장로들이 있습니다. 24장로입니다. 구약의 12지파 대표이며, 신약의 12사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네 생물이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보좌 바로 곁에 영원토록 서 있는 존재로서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다 알 수 없습니다. 보통 우리는 그들을 그룹 이라고 부르며 가장 뛰어난 천사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네 생물이 어떤 존재들인지 우리는 지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들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큰 소리로 찬양하며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들과 모든 천사와 네 생물이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외쳤습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아멘

네 생물과 장로들과 천사들은 흰 옷 입은 큰 무리의 찬양에 화답하는 찬양을 돌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보좌와 나라는 구원 받은 백성들과 모든 천사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찬양으로 계속 울리면서 영원한 영광과 복이 차고 넘치는 상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장로 중에 한 분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요한에게 알려주었습니다.그 장로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있는데 그들이 누구인가?라고 물은 후에 친히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그들의 옷을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15절의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 하나님과 쉬지 않는 교통과 사랑을 나눈다. 하나님의 장막이 그들 위에 있다. 그들은 다시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상함도, 해함도 없다. 또한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왜요? 바로 14절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14절에서 언급되는 큰 환난은 역사 끝에 있게 될 특이한 환난으로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이 세상의 모든 교회를 철저하게 탄압하는 때를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이 환상을 본 그때부터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큰 환난이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온 세상에 진행될 것이며 또한 계속 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대적을 당하면서 곳곳에서 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완전한 위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 직후에 우리가 어떤 상태에 이르는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지나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는 내 영혼 전체가 완전한 만족과 평강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염려도 사라질 것이며 그 어떤 실패가 속상한 일들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영혼의 목자가 되어 우리 영혼은 끝없는 생명수를 마시며 감사와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안식의 상태로 있다가 인자의 날에 부활체를 입고 하나님의 장막이 이 땅에 내려오는 새하늘과 새땅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부활하여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면 다시는 죽음도 애통도 아픔도 상함도 없을 것입니다. 온 땅의 모든 피조물들도 완전한 평화와 건강과 사랑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모든 동물을 포함한 만물 역시 인자의 날을 기다리며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8:18-23).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더 늙어갑니다. 이렇게 한해 한해 보내다 보면 어느날 반드시 죽음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생각보다 세월이 너무 빠릅니다. 우리는 원하지 않더라도 세월이 지날수록 죽음 앞으로 성큼 성큼 다가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얼마 후에 죽음을 지날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죽음을 지나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병에 걸려 죽음을 지날 수 있고,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죽음을 지날 수 있고, 자연스럽게 늙어서 죽음을 지날 수 있고,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안전 사고에 의해 죽음을 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늘 주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가 죽음을 지날 때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만 오늘 이 밤에 점검합시다.

여러분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의의 옷을 입고 있는가?
나는 흰 옷을 입은 그 큰 무리에 속하고 있는가?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흰옷을 입은 것을 의식하는 자들마다 행동이 매우 조심스러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수천만원짜리 고급 양복과 양장을 입은 과소비형 신사 숙녀는 그 깨끗하고 비싼 옷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운지 모릅니다.

하물며 완전한 의인이신 어린양 예수께서 그 피로 값주고 사셔서 주신 흰 옷을 입은 우리들!만일 그 흰옷을 의식한다면 과연 그 흰 옷이 더러워지도록 함부로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그 흰 옷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결단코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2012년 한 해를 보내며 2013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죽음이 한 걸음 더 가까이 왔구나 하는 것을 의식하며 어린 양 예수님 앞에 설 날을 더욱 준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메시야의 어머니

 

룻기 4:9-12, 16-22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히브리어로 고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번역하면 .Redeemer 이고 한글로 번역하면 구속자라는 뜻입니다. 그 뜻은 '대신 지불하여 내 것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어떤 아무개가 룻의 고엘역할을 포기하자 자신이 룻의 고엘, 즉 룻의 Redeemer가 되었음을 모든 사람 앞에서 선포합니다. 이때 보아스는 그 지역의 10명의 장로들을 불러 증인으로 세워 선포합니다.

"제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샀습니다. 더불어 제가 룻을 제 아내로 삼을 것이며 그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보아스가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룻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하길, 보아스가 룻을 사랑하기때문이라고 말합니다. , 보아스는 룻을 사랑한 것입니다.그래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그녀를 합법적으로 자기 아내로 삼기 위해 자신의 모든 희생과 수고를 다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붙드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예수님을 믿는 이 자리까지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우리가 이렇게 큰 은혜를 얻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성탄의 이 시간에 한량없는 주의 사랑을 헤아리며 그 사랑 앞에 감사의 무릎을 꿇기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랑을 알고 주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튼 보아스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엘리멜렉의 땅을 사서 나오미와 룻을 위하여 고엘한다고고백하자 베들레헴의 장로들이 보아스의 믿음과 희생 앞에 감동을 하였습니다. 이에 장로들이 보아스와 룻을 축복하는데이 축복은 장로들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장로들의 축복 내용을 보면 룻을 향한 축복,그리고 보아스를 향한 축복,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아스의 후손을 향한 축복으로 구분됩니다.

 먼저 룻을 향한 축복을 보면, 룻기4 11절 초반에 "여호와께서 네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길 원한다라고 축복합니다.

 왜 장로들은 룻으로 라헬과 레아 같게 해달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레아와 라헬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 룻이 라헬과 레아 같게 해 달라는 축복의 기도는 라헬과 레아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시조였던 것처럼 룻 또한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시조가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의 기도입니까?

 그러면 이 축복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마태복음 1장을 보면 라헬과 레아의 이름은 예수님의가문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룻은 다윗 왕의 조모로서 메시야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 라헬과 레아는 민족 이스라엘의 어머니이지만 룻은 메시야를통하여 구원 받은 모든 믿는 자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1:5-6).

 두 번째 축복은 보아스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4:11).

 장로들의 축복은 보아스가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는다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들레헴에서 유력하게 되고 유명하게 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먼저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목동 출신이었습니다.그는 이스라엘을 통일 시켜 하나님께 순복하는 멋진 나라를 세운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도 베들레헴 출신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예수님은모두 보아스의 후손들입니다. , 장로들의 축복이 성취된 것은 베들레헴에브라다 작은 고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아스의 허리를 통하여 오게 된 사실입니다.

 세 번째로 장로들이 축복한 대상은 룻을 통해 태어날 후사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4:12).

 여기에 다말이 등장합니다. 다말이 누구입니까?창세기 38장에 다말 사건이 한 장 전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12아들중에 넷째 아들입니다. 다말은 본래 유다의 첫째 아들 엘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엘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이에 다말은 둘째 아들 오난과 아이를 낳기 위해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는 율법에따라 오난이 형수에게 들어가서 형의 이름으로 후사를 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난은 형의 후사를 잇기가싫어서 형수가 임신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악한 짓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것도 하나님의 목전에 너무나 악하여 하나님께서 그도 죽여버리셨습니다.

 그러자 다말의 시아버지 유다는 겁이 났습니다. 마지막 셋째 아들 셀라가 있었지만 그 아들도 죽게될까 싶어서 그는 계속 다말에게 기다리라고만 했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자신을 통하여 대를 잇지 않으려는 시아버지 유다의 의도를 알고는 창녀로 분장을 한 후 시아버지 유다에게 접근해서 결국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이때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그 아들들의 이름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히 이 내용은 도덕적으로 보면 아주 지저분하고 추잡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장로들은 룻의 자녀들이 베레스의 집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을까요?

 이는 유다를 통해 영원한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창세기 49:8-11의 예언 때문에 그러합니다. 창세기 49장의 예언이 다말의억척스러운 행동으로 인하여 그녀가 낳은 베레스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적인 예언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49:8-10).

 따라서 장로들의 축복은 룻을 통하여 참으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요 메시야가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메시야의 대를 잇기 위하여 믿음으로 행한 다말처럼,그래서 베레스를 얻은 것처럼, 룻도 보아스에게 믿음의 대를 잇는 자녀를 낳아 그자녀가 메시야의 조상이 되기를 바란다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메시야를 향하여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사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은 죄가 없어서 믿음의 영웅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세우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과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영원한 나라의 왕으로 보내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때문에 믿음의 영웅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됩니다.

 

사실 장로들이 다말이 나은 아들 베레스를 언급하면서 룻이 나을 자녀들을 축복한 것은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의나 공로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은혜로 되는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말의 아들베레스가 유다의 자손이 된 것이요, 나아가 기생 라합의 아들 보아스가 유다의 대를 잇는 자손이 된 것이며,더 나아가 이방 모압 여인 룻의 증손주인 다윗이 유다의 대를 잇는 자손이 되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실 하나님 나라의 대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혈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요 약속을따라 성령으로 되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자랑으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앉으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된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요 하나님의 주권이지 어떠한 세상적 조건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로마서 4 16절은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깊은 비밀을 장로들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은 보아스의 자녀들에 속합니다. 룻처럼 죄인이었고 이방인이었으나 보아스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그리고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믿음의 세계에서 볼 때 보아스의 진정한 자녀들은여러분과 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룻기 4:14-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보아스와 결혼한 룻이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로들이 아니라 동네여인들이 찾아와서 나오미를 축복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이 얼마나 큰 영예이며기쁨입니까? 나오미는 지금까지 행복을 찾아 떠났던 사람입니다. 행복을위해 하나님과 약속의 땅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나오미에게는 비참과 저주만이 찾아왔습니다.그러나 복음을 듣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때 그녀에게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비록 빈손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지만 그때부터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 어떤 비참,어떤 실패와 죄악 가운데 있더라도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의 손길이 시작됩니다.

 

이제 회복된 나오미를 유대 여인들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의 축복처럼 이 여인들의 축복도 세 가지를 축복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기업무를 자를 주셨다는점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기 기업 무를 자는 보아스를 통하여 태어난 아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무를 자라는 의미보다는 기업을 이어갈 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래 나오미에게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지만 먼 이방 땅에서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가문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룻이라는자부가 끝까지 따라와서는 이렇게 "기업을 이어갈 자"를 낳은  것입니다. 이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두 번째는, 룻이 낳은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축복했습니다. 이 고백은 11절에 장로들이보아스에게 한 축복과 동일한 축복입니다. 실제로 이 축복은 이 아기의 후손인 다윗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나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룻이 낳은 이 아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네 노년의 봉양자라는 축복입니다. 네 생명의 회복자라는 말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던 나오미에게 생기를 되찾아준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죽음과 같은 고통에서 소망과 기쁨을 회복시켜준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네 노년의 봉양자라는 말은 이제 손자가 생겼으므로 노년에 손자의 봉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아기는 오벳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생명의회복자요 봉양자는 나오미가 안고 있는 그 아기의 대에서 오시게 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가 손자를 가슴에 안고 행복에 가득한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우리 하나님의 회복은 이처럼 완전한 회복입니다. 이렇게 행복에 가득한 나오미에게이웃 여인들이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4:17).

그 이웃 여인들이 룻이 나은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은 오벳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첫 아들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지어 주셨습니다.그 이유는 먼 훗날 정말로 이 이름을 가진 후손이 오벳에게서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의로운 여호와의 종으로 불리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섬기는 자로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대속 제물이 되셨습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53:11).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28).

 

따라서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성경은 룻이 낳은 이 아들에 관하여 17절에서 말합니다.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그리고 먼 훗날 이 모든 사건을 포함하여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1:3-6).

 

그리고다윗의 후손 중에 요셉과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오늘 보아스와 나오미와 룻을 향한 장로들의 축복과 여인들의 축복을 따라서 베들레헴에서 종으로, 섬기는 자로,주의 백성의 죄악을 대속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태어 나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한 왕, 즉 다윗왕의 후손에의하여  세워질 것을  룻기는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의 모든 성취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룻은 이스라엘의 회중에 결단코 들어올 수 없는 모압 족속인데 그녀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 땅 베들레헴에 들어온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실 메시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죄인이라도 오직 은혜의 복음으로 들어오는 것임을 알려주고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여러분!

룻이 살던 시대는 사사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유명한사사들이 많았습니다. 기드온, 삼손, 드보라, 입다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위대한 자들을 통하여 다윗 왕 및 메시야를 보내지 않으시고 그 대신 작은 땅 베들레헴의 시골 청년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메시야를 보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은 시끄럽고 요란하며 사람들에게 크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보다언제나 조용하고 은밀한 가운데 깨어 기도하는 소수의 무리들을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깨어 준비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을 이뤄가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이 되기 위하여 언제나 믿음을 잃지 않고 조용히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이 보기에 인기가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 보다,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나의 행적이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인정하는 삶을 살기 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마음과 인격과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사사시대와 같이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별력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받는인생이 될 수 있습니까? 그 길은 나오미와 룻처럼 오직 예수님만 붙드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에 룻기를 대하면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이 죄인을위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우주 보다 귀한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8:32).

따라서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피난처이심을 믿기 바랍니다.

 

세상 것에 욕심내지 말고, 또한 자신의 이름을위대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인기를 추구하지 말고, 크고 유명한 일에욕심내지 말고, 오직 룻처럼 그날 그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하나님이지켜 보시는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삶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보아스와 룻의 사건이 발생하게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그러한 자들을 찾아내어 인정해 주시는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하나님께서 귀하고 크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2012년의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여생을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주님만 붙잡고, 주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고 진실하게 감사함으로 순종하는,그래서 우리의 삶이 삶이 정녕 하나님 나라에서 귀히 쓰임받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의 심판  

고후 5:1-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대부분의 세상 종교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 하나님 앞의 심판대에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보기
전까지는 내가 지옥으로 갈지, 천국으로 갈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슬람의 경우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의 저울 위에서 선행이
악행보다 많아야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캐톨릭의 경우도
그 누구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앞의 심판대에 가
보아야 그들의 선행으로 천국에 들어갈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갈 지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지옥으로 가게 될지 아니면 천국으로 가게 될지 그
결정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는지 아니면 맺지 않는지에 따라 이미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이 땅에서 복음을 통해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에서 옮겨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선포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2-24).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당하게 될 때 지옥과 천국을 결정하는
심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편,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자들은 자신들의 지은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고통을 받는 장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인이든 불신자든 죽음을 지난 후에는 그들에게 똑같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부활 사건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행24:15)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영생의
부활로 부활하고,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마지막 때에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의 영생으로 부활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영원한 수치로 부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1-3).

또한 성경은 두 종류의 마지막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고 불신자를 향한 심판으로써
하나님의 흰 보좌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5:10절이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한편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흰보좌 심판은 계시록
20:11-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20:11-15).

그러면 다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살펴 보길 원합니다. 로마서14:8-12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바울을 통해
주신 계시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해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행한 모든 행위의 마음
속 깊은 동기와 의도까지 정확하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 심판대는 운동 경기 시합과 연결되는 개념이었습니다.
경기나 운동이 끝날 때 판정의 권위를 부여 받은 심판자가, 또는 판정이
매우 어려운 때는 황제 자신이 경기 장에 있는 보좌에서 심판을 했습니다.
승리한 사람은 보좌로 나아와 상을 받았는데 일반적으로 나뭇 잎으로
만든 관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하여 그 분 앞에서
서서 상을 받거나 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상급은
단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상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이 행한대로 각각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의 심판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
천국행인지 지옥행인지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맺어진 사람들은 구원과 영생을 이미 얻었으며,
한번 얻은 영생과 구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잃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그 증거로 에베소서4:26절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심판은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아니라 상을 받을 것인지 못 받을 것인지의
심판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많은 성도들이 상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을 알려줍니다. 요한일서2:28절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실제로 어떤 성도들은 상을 받지 못하는 한편,
다른 성도들은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은 믿음의 행위나 봉사나 마음의 동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공의로우심 가운데 각 성도에게 가장
공의하게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이서 8절은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영원히 거하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가장 큰
기쁨이지 상급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의 즐거움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입어”는 정확하게 맞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즐거움과 상을 잃을 때의 비참과
부끄러움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비참하고 부끄러우면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허만 호이트
라는 분이 가장 멋진 비유로 설명한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졸업식을 예로 듭니다. 졸업식에서 모든 학생이 졸업하면서
마음이 다 즐겁고 가볍기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이 상을 받는
것을 보면서 더 열심히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 못한 점에
아쉬움이 남으며 또한 최선을 다하지 못한 학교 생활에 후회를 합니다.
그럼에도 고통이나 비참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을 받는 학생들을
향하여 증오와 미움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졸업의 기쁨보다
상을 받지 못한 슬픔이 더 크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해 상을 받거나 잃을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와 있지만 이 세상에서 주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점에 못내 아쉬움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3:11-15절에 신자에 대한 심판의 그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곳에는 어떤 자질로 건물을 짓는지를 심판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11.이닦아둔것외에능히다른터를닦아둘자가없으니이터는곧예수그리스도라
12.만일누구든지금이나은이나보석이나나무나풀이나짚으로이터위에세우면
13.각사람의공적이나타날터인데그날이공적을밝히리니이는불로나타내고
그불이각사람의공적이어떠한것을시험할것임이라
14.만일누구든지그위에세운공적이그대로있으면상을받고15.누구든지그
공적이불타면해를받으리니그러나자신은구원을받되불가운데서받은것
같으리라

중요한 점은 건물을 짓는 자질이 불에 타는 것과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에 타는 것은 나무, 풀, 지푸라기가 있습니다.
반면 불에 타지 않는 것은 은이나 금이나 보석입니다. 그렇다면 불에
타지 않는 재료들은 무엇을 의미하며, 불에 타는 재료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불에 타지 않는 재료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들로서 소위 성령의 열매 내지 성령으로 인하여 내 삶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영향력들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동기를 가지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것들이 불에 타지 않는
재질들입니다. 반면에 불에 타는 것들은 자신 또는 인간들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들로서 이기적인 동기, 교만한 동기, 우월해지려는 동기
가운데 수고한 것을 말합니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불로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위배되는 모든 것은 다 타고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헛수고지요. 갈라디아서6장을 보면 불에 타지 않는 재료와
불에 타는 재료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6).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주의 불을
지나는 공적을 쌓으려면 오직 성령에 따라 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세 가지 면에 대해 내려질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행위입니다. 재능과 은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귀하게 여겼는지, 모든 관계 속에서 주께서
명하신 책임을 제대로 감당했는지를 봅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는 주께서 귀하게 평가하시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다”(시62:12).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또한 바울 사도가 말합니다.
에베소서6:7-8절입니다.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이로 보건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분명합니다.

또한 주님의 심판은 우리의 생각을 포함합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깊은
마음의 동기를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그 동기와 생각을 보십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10). 또한 고린도전서4:5절에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5).
계시록을 보면 주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동기와
마음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셋째는 말입니다. 말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영생을 주는 도구로도 사용되지만, 공동체와 나라와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3:6-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사실 말은 행동에 포함될 수 있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뱉는 말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들을 나타내는지 알려 주시면서 말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따라서 우리는 한 마디를
할 때도 주님 앞에서 주의 심판을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25-32).

이제 마지막으로 상급과 면류관에 대해 상고해 봅시다. 성경은 면류관에
대해 말씀합니다. 면류관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었는지에 따라 여러 다른 종류의 상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많이 전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교로 멀리가서 수고하는
사람도 있지만, 학생들과 이웃를 향해 중보 기도로 영혼 구원의 사역을
맡는 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모든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한 일들은 무한하게 다양하며 또한 수고한 사람의 정성과 마음 자세가
다 다르기 때문에 면류관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상급도 다양한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어려운 환난을 인내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특히 죽음의 지경까지 견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야고보서1:11절의
말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또한 계시록2:10절이 말합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한편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성스럽게 양들을 먹이는 자들에게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벧전5:4). 복음을 위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삶을 절제하면서 온전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썩지 않는
면류관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3-27).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주께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사는 모든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4:8).
이 외에도 감추었던 만나, 흰돌 등, 많은 상급들과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계시록4장을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0-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십사 장로들이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린다는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상급으로 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점을 말씀하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은 결국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님께서 한없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상급을 받는 자들의 마음 속 가장 깊은 동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상급이 자기를 위한 영광을 구하는 동기에게
추구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받기에 부적절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무엇을 하든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할 때, 심지어 주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과 상급 마저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는 진심이 있을
때만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영화롭게 하심과 더불어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함을
얻은 이후에 그의 인생의 목표는 상급이었습니다. 빌리보서3:12-14절에서
그는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상급을 추구함은 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11장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께서 주실 상을 바라며 나아가고
그리고 그 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을 가질 때 주께
무한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 지옥의 문제, 하나님의
흰보좌 심판을 통과한 우리들은 단 한가지를 목표로 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주실 상급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모든 동기도,
우리의 에너지도, 인생도, 주님 앞에 서게 될 심판대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우리는 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공의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에 의해 우리의
영원한 영광이 결정날 것입니다.

이 귀한 진리를 마음 속에 두시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그리고 그분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면서 남은 여생을 달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USA아멘넷 게시판/교제

 

76.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 예수님   

시편 130편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시편 130편은 15개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 중에 11번째 노래이다. 이 노래들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에 의하여 불린 노래라고 한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위치하였으며 따라서 순례자들은 산을 올라가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주장은 이 노래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른 노래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올라가는”(Ascent)이라는 용어와 함께 15개의 시편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여인의 뜰에서 성전에 가까운 뜰로 가려면 15번의 발걸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이라고 지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추측할 필요가 없고 단지 올라가는”(Ascent)이란 의미를 죄로 인한 절망의 늪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기쁨으로 옮기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시편 130편은 마치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하듯이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하심이 은혜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포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죄와 그 죄의 결과 때문에 하나님께 울부짖고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절). 그는 자신의 죄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흉악한 것인가를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자비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은 불법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참 복음을 거절해왔다. 내 노력이 없이 구원을 얻는다면 내가 맘대로 죄를 지어도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울은 이러한 오해를 로마서에서 다루고 있다(롬 6:15). 중요한 내용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이다(참조: 잠 1:7).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경외함(FEAR)에 대하여 요약해 보자. 각 영어 문자에서 그 의미를 요약해 볼 수 있겠다.

(FEAR)

F: Faith in Christ.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직 주님과 그의 말씀만을 믿는 것이다.

E: Enjoyment : 웨스트 소요리 문답 1문 1답을 보면 사람의 제일가는 본분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가는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주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졌다는 뜻이다.

A: Active Obedience : 우리가 만일 정말로 구원 받았다면 우리는 자비하신 하나님께 모독이 되는 행동을 피할 것이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순종하길 원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소원을 우리 마음속에 넣으셨기 때문이다.

R: Reverential Awe : 우리는 전능하시고 자비가 많으신 창조주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길 원한다.

 

이러한 의미로 시편 130편의 기자는 사유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믿고 있다.

 

제임스 보이스는 그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의 시편 130편의 강해 설교로부터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4가지 주요 특성을 끄집어내었다.

첫째, 하나님의 용서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제한이 없다. 모든 죄가 다 용서된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는 한번 용서하시면 영원하다. 그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위한 용서이다.

셋째, 하나님의 용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넷째,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 받은 그 사람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한다.

필자가 한 가지만 더 추가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하여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우리는 오직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만 두어야 한다. 이는 오직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완전한 구속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얼마나 위대한 구세주이신가!

 

[출처] 76.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 예수님|작성자 스데반 황
생명수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시야의 어머니  (0) 2012.12.27
성도의 심판  (0) 2012.12.24
거짓 선지자에게 대한 경계  (0) 2012.12.06
가장 좋은 친구이신 우리 예수님-  (0) 2012.11.23
바른 신앙과 위험한 신앙  (0) 2012.11.20

 

거짓 선지자에게 대한 경계 스데반의 한절 묵상

2012/12/05 06:32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에 대한 '특징을' 분명하게 하셨다. 그들은 '악한 일'들을 하는 자들인데 그 '악한 일'이 다름 아닌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행하며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필자는 거짓 선지자들의 '불법'이 무엇이었을지를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은 그들의 '불법'은 다름 아닌 '예언', '귀신 내어쫓음', '많은 기적을 베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1절에서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만일 이 구절을 거짓 선지자와 관련해서 적용한다면 믿음과 순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지 않은 예언,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귀신 내어 쫓음, 주의 능력으로 행함이 아닌 기적 행함으로 군중을 미혹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이 성경에 많이 있지만 주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주신 가장 쉬운 방법은 거짓 예언, 귀신 내어쫓음, 많은 기적을 베푸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의 행위를 주 예수께서 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한다고 하는 자들, 귀신을 내어쫓는다는 자들, 많은 신유 및 기적들을 베푼다고 하는 자들이 있으면 일단 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무조건 경계하라. 그 이유는 주의 백성이 바른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예언이나 신유나 귀신 내어쫓는 요소는 전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믿는 믿음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하여지는데 온 맘을 기울이도록 하라. 그것이 성도의 본분이다. 

 

[출처] 거짓 선지자에게 대한 경계|작성자 스데반 황/ 생명수 쉼터/한아름


 

58. 가장 좋은 친구이신 우리 예수님 구약에서 예수 보기

 

58. 가장 좋은 친구이신 우리 예수님

 

사무엘상 18:1-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가장 깊고 진실한 관계이다. 물론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관계, 마리아와 그녀의 사촌 언니 엘리사벳과의 관계도 대단한 사랑이지만 그럼에도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을 자였다. 성경을 보면 왕들과 왕자들의 심각한 시기를 본다. 누군가가 그들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위험 요소가 된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무서운 악을 행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사사기 9장 5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왕이 되기 위하여 칠십 명의 형제들을 살인하는 것을 본다. 열왕기하 10장 7절에서는 예후 왕을 따르는 자들이 아합 가문의 칠십 명의 왕자를 살해한다. 헤롯왕은 베들레헴에서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당할 수 없는 시기심 가운데 빠진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르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시기하고 죽이려는 다윗의 친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윗을 자신처럼 사랑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레위기 19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사랑의 계명이 모든 규율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지지하셨다. 바로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킴같이 주의 계명을 향한 온전한 순종을 의미한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one in spirit)는 점을 주목하자. 그리고 그들은 언약을 맺었다. 따라서 그들의 우정은 네가 최근에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느냐는 것에 서 있지 않다. 대신 그들의 우정은 충성스런 거룩한 언약에 서 있다.

 

필자가 믿기는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윗의 왕권을 통하여 올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 이를 위하여 요나단은 왕권을 다윗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그가 다윗에서 자기의 겉옷(robe)을 준 점을 보라. 왕자의 겉옷은 그가 왕위를 이을 것이라는 증표이다. 따라서 그의 겉옷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의 왕위 계승권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뜻이다! 또한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의 칼과 활과 허리띠도 주었다. (고대 시대에 다른 사람에게 칼을 주었다는 뜻은 보통 정복자에게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 뜻이다.) 이렇게 요나단은 자신의 왕위를 다윗에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윗과 거룩한 언약을 함으로 인하여 다윗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쳤음을 맹세한 것이다. 곧 요나단은 다윗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것이다.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상대의 기쁨을 위하여 나의 기쁨을 포기함을 말한다. 우리 구주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주님은 하늘의 왕좌를 포기하셨다. 그리고 그의 교회가 참된 기쁨을 소유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바울은 이에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그의 친구(교회)와 언약을 하셨다. 그분의 언약은 그분의 친구인 우리들이 그분과 함께 영원히 다스릴 수 있는 왕이 되게 하는 언약이셨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생각해 보자. 이 우주의 왕이 당신과 나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신다. 그래서 이 땅에 종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드리셨다! 만왕의 왕께서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왕이 되길 원한다. 자신의 인생 및 남의 인생의 왕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주의 자녀라면 요나단처럼 우리는 우리의 왕위를 그 분께 넘겨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의 왕권을 주님께 넘긴 적이 있는가?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왕은 너무나 어리석을 만큼 자신의 왕권에 집착하였으나 그의 아들 요나단은 우리에게 진정한 왕이 되는 유일한 길 그리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자신의 왕권을 예수님께 완전하게 넘기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수 쉼터/한아름 님

 

바른 신앙과 위험한 신앙 스데반의 지나가는 생각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신앙이 있다.

특히 바른 복음과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한 설교자는 거짓 신앙을 외친다.

 

1)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인간의 의를 부추기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이 말이 바른 삶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바른 삶이란 내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은혜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되어지는 것으로서 언제나 순종 그 자체가 기쁨이 됨을 말한다. 인간적으로볼 때 야곱은 에서보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로운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야곱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살았고 에서는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2) 영원한 것이 아닌 없어지는 것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이아니다. 이 땅에서의 안녕과 부귀와 출세와 권력과 인기를 추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은 바르지 않다.오히려 믿음이란 모세처럼 세상의 것을 다 잃어도 영원한 것을 잡으려는 것이 바른 믿음이다. 세례 요한은 인생의 안일을 구하기보다 영원한 것을 붙잡기 위하여 목 베임을 당하였다. 아벨은믿음으로 인하여 가인에게 돌로 맞아 죽었다. 이들은 세상에서 보면 실패자요 다 잃은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볼 때 영원한 것들을 얻은 자들이다.

 

3) 여호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의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힘이나, 자신의 정신력 또는 세뇌, 잠재 의식, 주문, .. 등을 신앙이라고 오해시키는 가르침은거짓 가르침이다. 적극적인 말을 많이 하면 복이 된다는 "믿음 신학," "형통 신학"등은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찬 가르침들이다. 

 

4) 하나님이라는 막연한 가르침, 순종하면 이땅에서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 받는다는 인과응보적 가르침은 결국 타종교와 구별되지 못하고 복음의 차원까지 이르지 못한 종교 다원화적,도덕적, 교훈적 가르침이다. 초등학문에 속한것이며 율법적인 가르침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는 복음적 가르침과 전혀 관계가 없다.이 땅의 대부분의 교회가 어린아이에게 도덕을 가르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도덕적으로 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데 있어서 보통 이 땅에서의 형통과축복을 미끼로 삼는다. 이러한 가르침은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의 도와는 거리가 먼 천박한 차원의유치원적 가르침이다.

 

5) 하나님의 주권 및 사탄의 역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고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무한한 지혜 가운데 사탄의 역사가 있다. 특히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뜻이 깊다. 그러나 싸구려 거짓 가르침들은 인간 중심적으로 볼때 어려운일이나 싫은 일, 아픔, , 실패 등이 임하면 전부 사탄의 역사로 치부한다. 그리고 성령을 부르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불러 자신이 싫어하는 모든 대상, 모든 사건등을 제거하려고 한다. 고난을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찾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내가 잘되고 내가 안녕해야 한다는이기적인 자세가 사탄을 내어 쫓아야 한다는 거짓 가르침과 신속하게 연결된다. 이러한 가르침에 빠지면 너무 쉽게 모든 문제의 주범을 자신의 죄성이 아닌 사탄에게 뒤집어 씌운다.그래서 자신의 죄성을 절대로 수술받으려 하지 않고 언제나 사탄을 제거하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광적으로 기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 신앙의삶은 온유함도, 깊음도 없는 주술적, 마술적, 신비적 신앙이다. 대부분의 이단 신학이 이러한 신비주의 계통에 빠져 있다.

 

 6)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와야한다. 영원한 세계를 보며, 부활을 바라보며, 주실 상급을 바라며, 이 땅에서의 고난을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으로 풀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한다. 매일의 삶을 주님과 순간 순간 동행할 수 있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항상 맺고 의식하며사는 삶을 배워야 한다. 

 

참으로 복음적 사고, 복음적 가르침이 희귀한 시대가되었다.

생명수 쉼터/한아름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