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13) 기독교인은 사교춤을 추거나 춤추는 모임에 참가해도 괜찮습니까?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춤에 대한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것이 영적 서약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춤을 출 수 있는가 아니면 추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랜 세대를 걸쳐 오면서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교회 지도자들이 언급하기를 꺼려했었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춤을 추는 것이 아무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몇 가지 주장을 합니다. (1) 춤은 자세를 바르게 만들어 주며 사회적 품위를 얻도록도와준다. (2) 성경은 춤에 대해서 이야기 다. (3) 몇몇 비 오순절적 교회들은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춤을 주선하고 후원한다. (4) 춤은 친교를 위한 즐거운 활동이다. (5)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춤을 추며,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에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교인들이 발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이 네 가지 점과 관련하여 개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춤’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까? 개인이 춤을 추는 것을 허락 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이 타락하며 결국에는 구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의 영적 복지에 대하여 위험한 기회를 주는 것입니까? 사교춤을 추는 것을받아들이는 교회는 파괴적 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세상의 모양을 받아들임으로서 영적 쇠퇴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까?
 
먼저 춤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 말이 사용될 때의 문맥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춤에 대해서 24 번 정도 이야기한 것들 중에서 성경은 그 어느 하나도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교춤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춤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것은 (예배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혹은 (다윗과 같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영웅에 대하여 즐겁고 넘쳐흐르는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시내산으로부터 내려왔을 때 무슨 종류의 춤이 추어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백성들의 부적절한 축하와 술 마시고 떠드는 것에 대해서 노(怒)를 발하였었다는 것을 압니다 (출애굽기 32:19). 우리는 또한 마가복음 6:22-29 의 내용으로부터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과 그와 함께 한 술에 취한 사람들 앞에서 추었던 춤이 매우 강렬한 흥미를 돋우는 것이었거나 감각적인 것이어서 왕이 적절한 판단을 못하고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 그 명령은 그가 내리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사교춤을지지해주는 성경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인들이 삼가해야 하는 악과 죄악스러운 행위의 목록에 춤이 특별히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춤이 초대 신약 교회가 세속적인 사회로부터의 구별됨을 표시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했던 그 무엇이 아니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남여 사이에 어떤 육체적 접촉을 함으로 생기는 감정과 정욕에 대한 주의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유혹, 특별히 정욕과 성적 유혹을 피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8; 디모데전서 6:9-11; 디모데후서 2:22).
 
비록 사교춤을 추는 많은 부부들이 결코 부도덕적인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데살로니가전서 5:22 은 우리들이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릴 것을 권면합니다.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쉽게 악에 물들 수 있는 그러한 유혹을 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중석에서 행하는 사교춤이 외딴 곳에서 애무와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남녀들의 행위보다는 훨씬 더 좋은 대안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사교춤은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적 친밀함을 더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성회는 사교춤이 순진한 사람을 유혹과 죄악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교춤을 추는것을 반대해 왔습니 다.
 
그러나 춤을 사절하는 것 그 자체가 비도덕적인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마음이 어떤 잘못된 것에 머문다면 어떠한 주의나 법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남녀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 단순히 춤이 제공하는 우정과 교제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춤을 추는일에 참여하는 것이 모험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의 사회 – 우리들이 부름을 받은 세상 –  의 상태는 중요한 다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도덕적 표준과 순결과 거룩함에 대한 확신이 옛것이 되어버렸으며, 이제는 사람들이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들어왔습니다. 사회는 음행, 단절된 관계, 이혼, 혼외 임신, 성병, 그리고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에 대한 감정적인 폭력,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도덕적 표준에 대한 이러한 방탕한 태도에 대하여 지금 무거운 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낮아진 도덕적 표준때문에 일어나는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는 우리들의 교회에서 그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에 직면하여서, 교회는 그의 백성이 구별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심에 비추어, 자신과 자녀들이 사교춤을 추는 것을 절제할 것을 모든 기독교 성인과 부모들에게 요구합니다 (고린도후서 6:16-18; 디도서 2:11-14; 디모데전서 2:21-22).

 

관심사:
우리나라의 어떤 지역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의 기독교 청년들이 고등학교의 댄스 파티와 무도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청년들을 “진실된 사랑은 기다린다”는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모들의 일부는 또한 사교춤이 자녀들의 발달에 똑같이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은 모순되는 일입니다. 춤에 참가함을 통하여 유혹을 받게 될 때에 성적 순결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적 도덕성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 때문에 단 한 생명이라도 영원히 상실된다면 그것은 결코 어떤 개인, 부모, 혹은 교회라도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교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만들지도 모르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또한 춤을 추는 곳 대부분의 환경이 유혹적이고 꾀는 분위기인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음악, 부적절한 노래 가사, 희미한 불빛, 그곳에 참석하는 어떤 사람들의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 ---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들을 더 큰 유혹으로 이끄는 육체의 접촉의 밀도를 증가시켜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립학교의 춤에 대해서는 이러한 묘사가 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옹호하지만, 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귐은, 나중에 기독교인의 생활 형태에 전적으로 위협을 주는,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행동이 허용되는, 그러한 환경을 통하여 춤에 휩쓸려 들도록 발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흔히 건전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죄악된 환경에서 춤을 춘다는 이유 때문에, 춤추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서 기독교 현대 음악을 이용하여 “기독교인 춤 클럽”을 조직합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춤이 흔히 다른 죄악과 연결된다는 바로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도덕적으로 커다란 위험을 주는 그러한 활동을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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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2) 왜 기독교인이 도박을 하지 않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일입니까?

 

 
비록 “너는 도박을 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십계명 중의 한 가지가 아닐지라도, 도박을 하는 것은 성경이 인정하는 가치를 위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을 순종하는 것 외에, 또한 성경이 분명하게 의미하는 것도 지켜야 합니다. 청지기의 원리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기독교인은 부(富)를 포함한 그들의 모든 소유물과 또한 그들의 소유물이 어떻게 사용되고 쓰여 지는가 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청지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시편 24:1; 마태복음 25:14-20). 도박은 우리들의 자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청지기 직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정직한 노동과 생산적인 일을 존중하는 성경의 원리는 도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일이 아닌 방법으로 부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성경의 진실에 위배됩니다 (잠언 12:11, 28:19-20; 데살로니가후서 3:10). 모든 인간에 대한 기독교인의 사랑의 성경적 원리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마태복음 22:39), 우리는 이웃의 손실을 통해서 이윤을 얻으려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도박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삶 자체가 도박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언제 혹은 어떻게 자기의 삶이 끝날지 모른다고 그것을 합리화합니다. 어느 때라도 대참사와 병마는 일생의 계획을 뒤집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 그토록 모험인데, 왜 교회는 복권과 도박을 반대하느냐고 그들은 질문을 합니다.

 

차이 --- 하나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승마투표(경마) 도박은 정상적인 삶의 환경에서 부딪치는 위험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이익의 유혹 때문에 의도적으로 가지게 된 위험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박이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사건이 일어나는 조건으로 가치 있는 무엇을 넘겨주기로 한 것이며, 그것의 결과로 한 쪽에게는 상당한 이득을 주고 다른 쪽에게는 상대적인 손실을 주도록 두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에 근거하여서, 우리들은 모든 형태의 도박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계획하신대로 사람들 사이의 건전한 관계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것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오락이나 유흥으로서의 도박과, 도박으로부터 얻어진 수익을 정부가 사회와 교육 프로그램에 사용하기로 계획하였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면서 이러한 관점을 갖습니다. 이것은 정부에 대하여 고발하는 것입니다. 목적(즉, 교육을 위한 더 많은 금액을 사용하는 것)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에 공헌을 하고 싶다면, 그들은 직접 그렇게 해야 하며 모든 위험한 요소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도박의 유익한 점에 대해 선전하는 것은 환상적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의도하는 사람들의 이득을 위한 것입니다.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도박에서 돈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는 사실이고 비극입니다. 도박에서 돈을 잃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기업은 도박에서 돈을 딴 사람들에 대해서는 선전을 하지만,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 도박에서 돈을 따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은 큰 유혹에 빠쳐서, 결국에 가서는 흔히 “패자”가 되어 버립니다.

 

관심사:

 

기독교인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는 애매모호한 점들이 있습니다. 증권시장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까? 자신의 돈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어떤 것에 투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떤 신학자들은 운에 맡기는 게임과 결정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술이나 정보를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험이 포함된 사업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청지기직분에 관한 자기의 양심과 서약이 안내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은퇴 프로그램이 현명한 투자회사에서 기술적으로 운영되는 반면에, 적절한 준비와 배경지식이 없는 개인의 투자는 그 투자를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만들며, 그것은 거의 도박과 같은 환경에 처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의 소중한 청지기직분을 통해 맡기신 것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아주 필수적인 것 이상의 자원에 대한 성경적 사용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일에 대한 정직한 윤리를 축복하실 때, 그것은 번영의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에 얼마만큼의 부를 더 저축하거나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예상되는 십일조 이외에 얼마나 더 주님의 일에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물어보는 것은 충성스런 성경적 청지기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1983 년도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표방한 “도박에 대한 성서적 고찰” (1983)에 기록되어 있다.

 

 
역자 주: 승마투표(경마) 도박 (paramutual betting)은 경마에서 경주를 관전하는 관객들이 우승이 예상되는 출전마를 선택하여 돈을 거는 행위로서, 이긴 말에게 건 사람들에게 수수료를 제하고 건 돈의 남은 돈 전부를 분배하는 방법으로 하는 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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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1) 성경은 연장신용장과 같은 개인의 재정 관리에 대해서 어떻게 말합니까?
 
 
또한 기독교인은 개인의 빚을 갚는 것에 대하여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비록 성경이 오늘날 우리들과 매우 다른 문화와 사회에서 씌어졌지만 그것의 원칙은 영원한 것이며 또한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지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이러한 지침과 진리 중에서 어떤 것들은 우리들의 개인 재정 및 사업 거래에 적용됩니다.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만큼 수입을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 도전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특별히 새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들은 인플레의 위협, 빌리는 돈에 대한 금리, 경제에 영향을 주는 정부의 결정,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불안전한 주식 시장,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직업의 유지, 가족에 대한의무,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기대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시간과 돈에 대하여 고려해야만 합니다.
 
위에 나열한 대부분의 항목들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항은 소 비를 수입 이내로 통제하는 것 뿐입니다 – 실상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수입의 90% 이내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 항목의 끝에 있는 관심사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복잡한 일들과 예상 밖으로 생기는 비용들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우리들이 훌륭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현명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가지고 있는 돈 이상은 쓰지 않는 것과 같이 간단할 수도 있고, 미래의 지출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매주 그리고 매달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기록을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45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로마서 13:8)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것입니까? 그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들은 빚에 대하여 적용할 수 있는 바울의 가르침에 대하여 설명을 해줍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빚을 갚지 않는 것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재정적인 빚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여 구입했을 때, 혹은 정해진 시간에 지정된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무엇을 구입했을 때, 그 계약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지불을 하는 한 구매자에게는 아무 빚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약속한 시간에 지불을 하지 않는다면, 구매자는 빚을 지게 되며, 그러한 경우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바울의 훈계를 위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원래의 계약 기간을 지킬 수 없다면, 기독교인으로써 해야만 하는 일은 채권자에게 문제를 설명하고 새로운 계약 체결을 요청하기 위해 그에게 연락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조정할 수 없다면, 지불해야할 의무를 가진 그 구매자는 빚쟁이가 됩니다.

 

할부 구입은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치품이나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기 위해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또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약에 따라 돈을 상환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신용으로 필수품을 사는 것은 실제로 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수년간 월세를 지불하는 것은 물을 땅에 부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집을 구입하기 위한 자격을 가질 수 있게 될 때까지만 행해져야 합니다. 만일 일이나 다른 것을 하기 위해서 차가 필요하다면, 그것 역시도 적절한 신용 구입이 됩니다. 만일 신용카드로 불필요한 것을 구입한다면, 매달 구매한 것에 대한 모든 금액을 갚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반드시 좋은 평판이 있거나 “칭찬 듣는” (사도행전 6:3) 사람이어서, 그가 진 정당한 빚을 갚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자신의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을 사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시편37:21). 연장신용장에 의한 중요한 구매는 흔히 담보물이 보증이 되기 때문에, 구매자가 지불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빚을 없애는 대신에 대금업자가 그 구입한 물건을 다시 가져 갑니다. 계약에 따라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을 갖는 것은 기독교인의 정직성에 위반되는 것이며, 그것은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빌리는 것을 허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 5:41; 누가복음 6:35). 그러나 신자는 신용대부(크레딧)를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개인이나 가족의 예산을 가지고 정기적인 지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까?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잠언 저자의 지혜로운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 (잠언 23:4, 표준새번역) 그리고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언 28:20). 돈과 소유물을 취급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관심사:

 

우리들은 도덕과 윤리가 추락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의무를 피하는 수단으로 파산과 파산법 절차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사는 방법이 되었다고 해서 기독교인도 그러한 방법을 따라야만 하는 아무런 이유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보다 높은 규범을 따라서 살아야만 합니다.

 

또 다른 관심사는 재정, 신용, 빚, 그리고 기독교 가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사치품으로 생각되곤 하던 것을 생활 필수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정은 그들이 필요로 느끼는 것들을 구입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일을 해야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의 영적 성장은 사랑하는 부모가 함께 있지 못하는 대신에 사 주는 더 크고, 더 좋은 장난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실질적으로 가정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합의해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복지는 모든 가정이 필요한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만 하는 사항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시편 127:3). 돈이나 소유물이 자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관심사는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형편 때문에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재정적으로 형편이 허락할 때에 주님의 일을 위해 헌금을 드리려고 계획을 합니다. 또한 그들은 신약성경 어디에서 기독교인들이 십일조를 드려야만 한다고 요구하는가 하고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제거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십일조에 대해서 계속해서 명하심과 함께 그는 또한 그들이 더 중요한 의(義)와 인(仁)과 신(信)(마태복음23:23)에 대한 것을 순종하지 않는다고 책망한 것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십일조를 드릴 때보다 드리지 않을 때가 재정적으로 더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예산을 세우고 지출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돈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역자 첨부: 연장신용장 (extended credit) - 수출업자의 자금조달편의를 위하여 신용장개설 의뢰인의 요청으로 상품을 선적하기 전에 수익자가 신용장개설 은행 앞으로 무담보어음을 발행하면 이것을 통지은행이 매입하고 무담보어음이 발행된 후 일정 기간 내에 해당상품에 대한 일체의 선적서류를 어음매입은행에 제공할 것을 조건으로 한 신용장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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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Q 10) 유물론과 세속성에 대한 성경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성회는 창설 초기부터 일상생활의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신뢰하 며, 우리 주님께 사랑의 표현으로 헌신적으로 헌금을 드리고, 또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것 보다는 영적 가치에 대한 성경의 주제들에 대해서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들을 세상으로 이끌며, 영원한 진리와 가치로부터멀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모두 세속적인 것입니다. 물질주의 혹은 세상에 속한 소유물에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받는 가장 강한 유혹 중의 한 가지입니다. 
성경에서는 부(富) 그 자체를 견책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하나의 선물과 축복으로 인식되며, 특별히 그것을 구하지 않을 때더욱 그렇습니다 (열왕기상 3:13). 그 러나 성경에는 부의 위험과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여러 말씀이 있습니다. 


부는 부 그 자체를 위해서 축적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부정 또는 탄압을 통해 서 얻어져서도 안 됩니다. 부는 흔히탐욕으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단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가난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 그리고 압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을 때 우리 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에스겔22:29). 관대함은 기독교인이 부를 사용하는 표시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부유함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본적인 음식이나 의복 그리고 거주지를 위하여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들은 세상의 대부분 의 사람들과 비교해 볼때 부유합니다. 부와 물질에 대한 유혹은 부자들만의 문제가 아닙 니다. 부자들이 가지는 욕심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는 욕심은 유물론에 대 한 징후입니다. 

 

세속적 사회는 항상 부와 물질의 소유에 높은 가치를 두어왔습니다 (누가복음 16:9, 11 에 기록된 불의의 재물).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 교회의 성격을 나타내야 하는 영 적인 우선권을 물들이고 침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부나 소유물을 축적하지 않고, 겸손하고 낮은 신 분의 삶을 살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 것을 가르쳤는데,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할 것이기 때문이었 습니다 (마태복음 6:25-34). 


신약 성경이 부자에 대하여 강력한 권고와 경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은 물질적 빈곤함이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은 고통을 완화시키는 기독교인 들의 노력을 칭찬했습니다. 어떤 초대 기독교인들은 부유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부유하면 충분할까요? 유물론은 “조금만 더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 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예는 모든 신자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의 중년에 요한 웨슬리는 그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매년 얼마가 필요한가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생활비를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서약했으며, 후에 그보다 많아진 수입은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성회는 모든 회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하여 좋은 청지 기가 될 것을 격려합니다. 


관심사:


현대 사회로부터받는 심한 압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것은 그 들의 성경적 가치와 삶의 우선순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압 력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과도한 평가, 성공의 상징으로서 물질의 축적, 상류상회로 진 출하려고 하는 노력, 그리고 당장 만족을 취하려고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공생애 동안에 이 땅위에서 가지셨던예수님의 삶은 오늘날의 여러 문화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자세와 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8:31-38 의 “복음의 역설”은 생명이 고난과 죽 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원리에 기초하여 사는 제자직분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왕관이 있기 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희생은 기독교인 으로서의 삶의 한 부분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보여주는 선언문 “신자와 적극적인 고백”은 성경적 가르침 을 어떤 은사주의 모임에서 인기 있는 유물론적 “믿음 가르치기 (faith teaching)”와 구분 하는 명확한 선언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신자들을 물질과 재정적인 성공으로 축복하셔 서 그들이 지상명령을 수행하는데필요한 자원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성공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부를 내려줌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 한 것을 하나님이 승인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별로 소유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더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와 유물론에 관 하여 주의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소유물을 유연하 게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믿고 맡기신 것들에 대해 좋은 청지기가 되는 부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반면에, 가지고 있지도 않은 물질적인 것들을 탐내고 움 켜쥐려 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경건의 삶을 이끄는 것은 물질적인 부를 가 지고 있느냐혹은 갖고 있지 않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이 삶에서 우선순위냐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7-19). 

 


*위에 기술한 선언은 “신자와 적극적인 고백”에 기록되어 있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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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윤리
(Q 9) 왜 개인의 이니셔티브(主導)와 강한 직업윤리가 기독교인과 일반 사회 에 대하여 그처럼 중요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 리신 벌이 일이라고 느낍니다. 아담은 먹을 것을 제공하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 (창세기 3:19) 수고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을 유익하고 생산적 인 것이며 심지어는 창조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창조하시고, 지 으시고, 세우시고, 또 심으십니다 (창세기 1:1, 2:7, 19;시편127:1;아모스 9:15).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날에]안식하셨[습니다]” (창세기 2:2). 그리고 그 지으신 모든 것 이 보시기에 심히좋았습니다!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 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 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데살로니가전 서 5:12, 13). 바울은 여러 번 그들에게 게으르지 말 것에 대해서 경고하였습니다 (데살로 니가전서 5:14;데살로니가후서 3:6, 11).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일이 모든 인간을 위해 마련된 소중한 활동이라고 기술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일은 타락한 세상의 체계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활동으로 버릇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더많은 여가를 갖기 위해서 또는 더 나은 생 활수준을 갖기 위해서 부를 축적하는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은 이러한 점에서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일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성경은 일을 회피하는 사람을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라고 말했습니
39다. 신체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일을 하는 대신에 웰페어를 받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성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현대의 일의 모양에 관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은 일에 대해서 어떤매우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 리들은 그러한 말씀을 참고로 해서 오늘날의 일터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아 담에게는 동물을 다스리고 에덴동산을 돌보는 특정한 일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백성 들은 농업과 경작을 통하여 얻은 그들의 소출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은 일상생활에서의 일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게으름과 도 둑질을 비난하고 유용한 일의 활동을 격려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28).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든지 있을 것을 기대할지라도 계속 일을 하라 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4). 


성경은 일에 대한 어떤귀천함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정직한 노동에 대해서는 칭찬을 합니다.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이나 기술직 일은 손으로 하는 일이나 육체적 노동 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눈에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적게 받는 직 업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닙니다. 직업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인 일꾼은 그 일이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받은 특별한 은사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기독교인 부모는 지시하는 일과 본을 보이는 일을 통하여 일에 대한 강한 윤리를 자 녀들에게 양심적으로 가르쳐야만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간단한 “일”을 맡기고 좀더큰 아이들에게는 더 책임감 있는 일을 맡기는 방법은 본을 보이는 일의 아름다운 시작입니 다. 좋은 일에 대하여 적당한 용돈을 지불하는 것도 일에 대한 강한 윤리를 키우는데 도움 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이러한 것이 뇌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느낄 수 있으며, 어 린이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급여를 받아야 한다는 느낌이 없이 일하는 것을 배 워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 대해서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지불 하는 것은 “일”의 경험에 대한 동기유발과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관심사:

일에 대한 세상의 태도가 기독교인의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을 최소한의 노 력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필요한 것으로 보는 대신에, 전도서 9:10 에는 일에 대한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릇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 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그리고 기독교인은 그가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것 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은 고귀하고 하나님께 위임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상 대 명령과 같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는 도구입니다.


적극적인 태도는 가장 실증이 나는 일을 부담이 별로 되지 않는 일로 만들 수 있습 니다. 그러한 태도는 그들의 작업환경을 달가워하지 않는 동료들에게도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일에 대한 세상의 부정적인 태도에 결코굴하지 마십시오. 
적극적인 태도는 긍정적인 생각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들은, 비록 그 일이 매우 만족 스럽거나 성취감을 주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감독이나 상사에게 하는 것처럼 일을 하 지 않고 주님께 하는 것처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의 삶의 모든 곳에서 그 리스도를 모시고 있어야만 하며, 보통 한 주일의 약 25%를 차지하는 일터도 예외가 되어 서는 안 됩니다.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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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지 못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죄입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죄 때문에 용서 못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쌍하고 애처로워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송충이나 구더기나 뱀이나 똥을 끌어안지 못 하고 보기만 해도 진저리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죄를 절대로, 절대로 용납하지 못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반드시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2.
죄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나는 남보다 덜 죄인이니까, 착하니까, 죄 지은 거 없으니까 천국 갈 수 있을까요?
식탁과 똥과 화장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귀한 음식을 차려놓은 식탁에 똥은 못 올라갑니다.
큰 똥이든 작은 똥이든, 똥이 살짝 묻은 화장지든, 똥이 전혀 묻지 않아도 화장지처럼 생기기만 해도 식탁에 못 올라갑니다.
악한 죄인이든 죄를 조금밖에 짓지 않은 사람이든, 죄를 전혀 짓지 않았든,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배반한 아담처럼 생기기만 해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3.
죄의 대가는 사망, 아니 지옥불입니다.
청소할 때, 소독할 때를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염병을 제거하고 깨끗이 하는 방법은 박멸과 소각입니다.
전염병자가 입었던 옷이나 쓰던 물건은 소각합니다.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 소각이기 때문입니다.
소각할 때는 병균이 있나 없나를 정밀조사하지도 않고 병자가 소유했던 물건은 다 불속에 던져넣습니다.
마지막 날, 우주 대청소날, 심판의 날, 하나님은 모든 죄악을 영원히 타는 볼못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단 하나의 더러움이나 악도 남겨두지 않고 깨끗이 소각하실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원수, 사단마귀도 거기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리고 안 됐지만 인간들도 더러운 옷처럼 함께 던져 넣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거룩한 피조세계가 그 때 깨끗함을 입을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인간을 용서하실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신다면 그것은 죄를 그대로 두는 것이 되며
부당한 특혜를 베풀어 봐주는 셈이 될 것입니다.
사단마귀가 달려와 왜 저놈은 봐주느냐고, 자기들도 봐 달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악을 봐주고 눈감아주는 악신(惡神)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고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5.
죄인이 죄의 대가를 면하고 죽음을 면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없는 사람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어주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죄인을 사랑하여 자신이 대신 죽어 죄값을 대신 치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죄 없으며 누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대신 죽어 주겠습니까?

6.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실 구세주에게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소와 양을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인간 하나를 대신하지 못 합니다.
인간은 인간만이 대신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그가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죄 있는 인간은 자신의 죄로 죽어야 하기 때문에 남을 위하여 대신 죽어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셋째는 죄 없으면서 그 가치가 온 인류를 합친 것 보다 귀하신 분이어야 합니다.
설혹 죄 없는 사람이 있어 죄 있는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어준다 해도 그 사람은 단 한 사람만을 대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춘 사람......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대신 죽어주시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구원의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7.
구약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말라기 4장 끝까지 구세주의 약속들입니다.
기원전 7세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기는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왕이시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또한 그가 고난을 받아 채찍에 맞고 찔리고 죽임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어 고난 받아 어린양 속죄제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있을 것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뿌리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밟는 자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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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되신 예수님>

모든 동물에게 암수, 인간에게도 남녀 성별(性別)과 그 역할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성별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는 유일한 동물(?)이 동성애자들일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암수의 역할이 얼마나 명확한지 모릅니다. 새들은 당연히 알은 암컷이 낳지만 암수가 교대로 알을 품고 새끼가 나면 함께 나가 열심히 먹이를 물어와 새끼를 기릅니다. 남극의 펭귄은 암컷이 알을 낳아 남편펭귄에게 품도록 맡겨놓고 자기는 바다에 나가 약 두 달 동안 먹이를 먹고 몸을 불려서 돌아와 남편과 교대합니다. 그 동안 남편펭귄은 아무것도 못 먹어 앙상하게 말라 거의 빈사상태가 됩니다. 가시고기는 암놈이 알을 낳으면 수놈이 알을 지킵니다. 연어는 암컷이든 수컷이든 함께 물길을 거슬러 알을 낳으러 수천 리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정액을 뿌립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의 왕자인 사자를 보아도 암수의 구별이 뚜렷합니다. 사냥은 암사자들이 합니다. 무성한 갈기를 가진 수사자는 온종일 빈둥거리며 놀다가 암사자들이 잡아놓은 먹이를 빼앗아 먹습니다. 그러나 수사자의 진가는 다른 곳에서 발휘됩니다. 하이에나들이 암사자들을 공격해오면 암사자들은 하이에나들에게 쩔쩔 맵니다. 사냥한 먹이를 하이에나들에게 빼앗기고 쫓겨나는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사자가 나타나면 하이에나들은 혼비백산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기 바쁩니다. 암사자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사자의 강력한 한 방에 하이에나들은 그대로 죽음을 맞기 때문입니다. 수사자가 빈둥거리다가 빼앗아 먹기나 하는 것 같지만 보호자 역할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하는 셈입니다. 

우리 세대가 자라던 시절은 여자가 밖에 나가서 일하고 돈벌어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남자 혼자 나가서 벌어 와서 온 가족이 먹고 살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혼자 벌어와 온 가족을 책임지시던 아버지 밑에서 다섯 남매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여성상위시대니, 남녀평등이니 하는 시대사조와 더불어 남자 혼자 벌어서 가족 부양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농사는 기계가 짓고, 일은 컴퓨터와 로봇이 하고, 기업은 해외로 나가 공장을 짓고 일자리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자들이 더 잘 벌기도 합니다. 그러니 여자가 굳이 시집을 가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혼자도 살기 힘든 세상, 내가 왜 너의 아내가 되어 아이 낳아주고 일하고 벌어 와서 먹여 살리기까지 해야 해?” 능력 있는 여자들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시대이기에 부부가 힘을 합쳐 가정을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고 귀한 일이 되어버렸는지 모릅니다.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고, 깨어지는 가정도 많습니다. 경제적인 이유에다 시부모와의 갈등, 혼수를 둘러싼 다툼도 한 몫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따로 세우시고 그 역할을 나누어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남편은 공급과 보호, 아내는 생산과 양육이지요.

오늘 말씀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인류최초의 부부싸움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범죄를 하였습니다. 심판주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고 쫓겨나고 죽게 될 판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하와에게 떠넘깁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로마서 5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하와에 대하여는 전혀 말하지 않고 아담의 죄만을 지적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고 말합니다. 생명을 보호하는 것, 지키는 것, 구원하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아담의 책임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 곧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첫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첫째아담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 하였습니다. 동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수사자처럼 보호해 주지도 못 했습니다. 하이에나같은 뱀에게 물린(?) 하와를 돌봐 주지도 못 했습니다. 더욱더 슬픈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하와를 품어주지 못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 살겠다고 하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꽁무니를 뺐습니다. 그로부터 그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온 인류를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험한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아, 그는 용감한 남편도 온전한 보호자도 못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성도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목숨을 던지셨습니다.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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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8) 왜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는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사용의 절제를 옹호 합니까? 
왜 그것의 절도 있는 사용을 허락하지 않습니까?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 신자들은 역사적으로 고린도전서 6:19-20 을 매우 존중했 습니다. “너희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 을 알지 못하느냐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술 취함에 대해 경고하는 이 말씀과 다른 말씀들은 술, 담배, 또는 마약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는 충분한 이유로 여겨졌 습니다. 인간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 전을 더럽혀서는 안 되며, 이것 외에도 완 전한 절제를 옹호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1) 현대 사회는 이 세 가지 중독성 물 질의 파괴적인 결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며, 또한 (2) 이러한 물질, 특별히 술 과 마약은 심지어 소량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흔히파괴적인 중독성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서 자주 말합니다. 노아의 술 취함은 그의 가정에 수치를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9:20-27). 롯의 술 취함은 그의 두딸과 근친상간의 관계를 야기시켰습니다 (창세기 19:30-38). 술 취한 아하수에로는 공중 석에서 왕후 와스디에게 모욕을 주려고 했습니다 (에스더1:9-22). 술의 소비는 판단을 흐리게 하고, 감정에 불을 붙이며, 폭력을 초래합니다 (레위기 10:8-11;잠언 20:1; 23:19-35; 31:4, 5).

 

술중독과 그것과 연관된 우울증은 흔히 도덕적 저해(沮害)력을 와해시키며, 무분별 한 혹은 포악한 행동, 또는 양심의 상실(술 취함)에 이르게 합니다. 장기간의 음주는 간, 췌장, 뇌, 혹은 심장을 완전히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대학교 교정에서 마시는 폭음은 순 식간의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천 4 백만 명이 술 취함으로 인 하여 문제를 갖게 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치명적 자동차 사고의 절반은 음주 운 전자들에 기인합니다. 매년 술과 관련된 사고, 병, 강력 범죄, 그리고 노동시간의 손실은 천억불을 초과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불법 약물 (마약)


비록 마약의 사용에 대하여 성경에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마약 사용자와 사회에 미 치는 그것의 영향은 음주의 해로운 결과를 훨씬 초과합니다. 어떤 마약의 중독성은 매우 강력하여서 단 한 번만 사용할지라도 그 사람을 평생 동안 마약 중독자로 만들 수 있습니 다. 더 나아가서, 사용하는 사람의 장기와 정신적 수용능력에 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 손상 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마약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위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계속적으로 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개인의 대인 관계와 영적 행 복을 파괴시킴으로서, 그 사람의 삶을 극단적으로 소모시키며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 다. 마약 중독으로 인한 개인의 손상 이외에도 마약은 그들의 가족과 사회에 비참한 짐을 지워줍니다. 
술과 불법 약물의 사용은 가정 폭력, 거리와 직장에서의 격노, 아동 학대, 자살, 그리 고 여러 가지 사회의 다른파괴적인 행동들에 대한 요인이라고 잘알려져 있습니다. 술중 독과 마약중독은 우리 사회 기간(基幹)의 파괴를 위협하는 국가적 위기를 제공합니다. 


담배


담배를 피우고 씹는 것이 그 사람의 판단을 손상시키거나 여러 가지 술과 마약에 연 관된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담배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강의 관심사인 것이 입증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마다 수 많은 젊은이들이 담배를 성숙함과 인기에 연관시키는 효과적인 속임수 광고 캠페인 때문에 그 습관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수 년 동안 미국 연방의무감은 흡연의 위험에 대하여 사회에 경고해 왔으며, 심지어 담배 제조회사들에게 제품에 위험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구강암과 폐암 및 담배중독의 희생자들이 증가할 때까지 사람들은 그러한 경고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금연가가 간접흡연으로 인하여 담배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분명 하게 되었을 때에야 사회는 담배의 사용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의 의학 연구들이 담배가 폐암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교 회는 담배가 성령의 전(殿)인 기독교인의 몸에는 물론 기독교인의 증언에 해로운 습관이 기 때문에 담배의 사용을 반대해 왔습니다.


술, 담배, 그리고 마약의 사용에 관한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보면 이러한 것을 절 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육체적 및 영적인 복지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높은 절제와 자제심의 표준을 가지고, 그것들 을 취하지 말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술, 마약, 혹은 담배를 어느 정도 “ 적당히 사용”하는 것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말씀의 중요함과 우리 사회가 부 딪치고 있는 현재의 위험에 대해 무감각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우리들의 세상 앞에 순 전한 증언을 하는 것이 절실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 2) 


관심사:


위에서 언급한 술, 마약, 담배의 사용은 중독된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약물의 남용은 그 사람을 더넓은 사회에서 생산성 있는 개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 재정적인 짐을 지워줍니다. 중독자로 인하여 생기는 상해(傷害)와 병에 대한 의학적 치료의 비용은 훨씬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소모합니다. 그리고 약물 남용이 흔히 범죄 행위 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는 보험 비용의 추가와 법의 집행을 위해 비용을 두 배로 지불합 니다. 우리들은 중독자들의 생활에서 그들을 노예로 구속하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하는 이 러한 중독성 물질과 싸울 것을 모든 사회에 촉구합니다.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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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삶
(Q 7)

왜 기독교인은 자기 개인의 생각의 삶에 그처럼 중요성을 둡니까? 환상과 상상 그 자체는 죄가 될 수 있습니까? 
언제 그런 생각이 유혹이 되며, 언제 그들이 죄가 됩니까?


성경은 개인의 사적인 생각에 대한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 법은 그 사람의 성품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참고. 잠언 23:7). 믿음과 신앙은 생각의 방법 입니다. 비록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더라도, 우리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향할지 아 니면 세상을 향할지 지시하는 것은 우리들이 선택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


한 유명한 시인이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으로 가득차 있다.”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매력과 산만함 속에서 순수하고 도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어려운 목표가 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에 게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 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 4:8) 라고 그들의 기억을 상기시켜야만 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준 바울의 권면은 우리들이 마음속으 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즉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은 타락 한 쾌락주의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위는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들은 생각의 삶에서 그것을 제일 먼저 직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우리들의 생각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유혹과 죄악


유혹은 생각의 영역을 통하여 인간에게 찾아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죄악된 문화 로부터의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에 섬광같이 비춰지면서 일어납니다. 비록 유혹이 죄악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을 분변하고 거절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 다. 파괴적인 생각이 싹이 나도록 허락하는 바로 그것이 사람의 첫 번째 죄악을 만듭니다.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4, 15) 라고 말씀합니다. 


환상은 사람이 마음에 자리를 잡도록 허락하는 총천연색으로 된 생각입니다. 그것 은 무해할 수도 있고 사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신중하게 판단을 해야만 합니다. 성 적인 감각과 낭만적 매력은 정상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건전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 님께서 주신 욕망이 성경이 금하고 있는 성적 행위의 생각으로 저하될때에 그것은 정욕 이 됩니다. 그러한 포르노 영상과 성경적 도덕의 표준을 범하는 생각에 거하는 것은 궁극 적으로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침체되도록 만듭니다. 성적 환상은 흔히 자기의 육체적인 더러운 것(자위)에 사로잡히게 되며, 또한 그로 인한 죄의식으로 항상 괴로움에 빠지게 되고, 그로 하여금 마침내 영적인 패배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것이 뿌리를 내리도록 허락했을 때, 사악한 성적 생각은 감정적이며 육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남용하는 것과 같은 부정(不貞)한 행동과 때로는 강간, 근친상간, 그리고 어린이 성폭행과 같은 비열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가능성을 가지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 주위에 있는 문화와 세속적인 활동을 통해 풍부하게 심겨진 생각을 통 하여 우리들을 유혹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그토록 엄숙하게 우리들에게 훈계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야고보서 4:7).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가복음 14:38) 


관심사: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염려를 해야만 하는지 질문을 합니다. 사실을 말하면, 즉시로 혹은 어떤 미래의 상 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각 그 자체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섬광같이 비취는 불순한 생각을 통하여 우리들이 유혹 을 받을 때에 우리는 죄악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그러한 죄악 된 생각을 감싸고 그것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되면 우리들은 그에 대한 책임이 있게 되며 또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들은 재빨리 우리들을 유혹하는 각각의 생각을 분변하고, 그것을 쫓아버리며, 의식적으로 우리들의 생각을 순결한 생각으로 바꿀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심지어 우리들의 생각의 삶까지도 거룩해 질 수 있습 니다.


순결한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삶의 영역부터 먼저 보호해야만 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건전하지 못한 잡지, 서적, 음악, 라디 오, 텔레비전, 케이블프로그램, 영화, 비디오, 컴퓨터 소프트웨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하 여 그들의 가정과 주위가 타락된 영향을 받도록 허락합니다. 건전하지 못한 것을 입력하 면 그 사람의 마음도 타락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님이 이러한 분야에서 필요한 변화를 시키는 가운데 그들을 인도하시도록 허락해야만 합니다 (갈라디아 6:7, 8). 


세속적인 유혹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순결하고 하나님의 도덕 적 표준과 진실을 반영하는 것들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일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 은 죄악된 것으로 알려진 모든 것들을 우리의 삶에서 정결케 하며, 또 우리의 행위에 대해 서 성숙한 신자로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와 함께금식하는 것이 하나 님이 우리들의 마음과 영을 변형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사용하시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성경공부와 기도의 경건한 삶을 위하여 특정한 시간을 정해 놓으십시오. 기독교 서점이나 카탈로그들은 기독교인 성장을 위한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을 심으 며”걷는 매발자국에서 우리들은 “의로움을 거두게”될 것입니다. 

 

죄악이나 육신의 생각들이 침범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지키는 것은 신 자들이 계속적으로 가져야할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위 하여 인도자와 파숫군으로서 성령님을 보내 주셨으며, 그분의 도움을 통하여 우리는 덕을 세우며 고귀한 일들을 생각할 수 있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우 리를 끌어내리는 그러한 생각으로부터돌아설 수 있습니다 (로마서 8:6, 12:2).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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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
(Q 6)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슨 해로움이나 위험이 있습니까? 
텔레비전, 연극, 비디오, 도서 등과 같은 다른 세속적인 형태의 오락물은 어떠 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흥물들이 삶에서 점 점 더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때에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성회는 유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것에 대한 신앙과 실천에 관하여 다 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의 대부분은 연령의 차이에 그 원인을 둘 수 있는데, 그것은 젊은 연령의 그룹이 친구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하며 또한 같 은 유흥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 포함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과 나이 많으신 분 들의 그룹은 서로 비슷한 감정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사회의 문화나 혹은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무분별하게 참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 다. 그들은 청년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영적 관계가 부식되거나 손실되지 않도록 청년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종 유흥 매체에 대한 것을 취급한 아래의 사항들은 우 선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성경적 결론에 입 각하여서 특별한 매개체에 대해 가지는 전통적인 태도와 현세대의 태도를 요약하였습니 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성숙해질 수록, 우리는 현대의 여러가지 형태의 유흥이 영적 생명 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 관심이 깊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경 원리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슨 종류와 유형의 유흥이 적절 할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 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4, 45; 20:7;베드로전서 1:15, 16) 라고 하는 명령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거룩함은 “영적으로 순결함”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됨” 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들이 하나 님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허용할 때에 하나님은 그 의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거룩하 게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이 의로움 가운데 지시하신 모든 면에서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며, 또 성령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 는 그러한 일로부터 절제하도록 도우시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거룩하다고 선언하 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로마서 6:12-19;데살로니가전서 4:3, 4). 따라서 적합한 형태의 세속적인 유흥을 선택할 때에, 우리들은 성경이 저주하는 죄악된 활동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모든 것들이 거룩함의 표 준에 어긋난다고 결론을 지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간음, 혼전(婚前) 성생활, 동성애를 찬 양하는 것, 그리고 그밖에 그릇된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 교인에게 특별한 지혜와 지도가 필요한 때는 성경이 저주하지도 않으며 또한 승인하지도 않는 그러한 활동에 관련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조차도 성경에는 기독교인들 이 따라야 할 지침과 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양심에 위반되거나 혹은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게 할 때에 그에게 죄가 되는 행위의 문제에 대해 서 가르쳤습니다 (참고. 고린도전서 8:1-13;로마서 14 장). 그러한 경우에 기독교인은 때 때로, 개인적으로는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나 자 매들에 대한 사랑때문에, 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거나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인이 자신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흔히필요한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 니다 (로마서 14:15;고린도전서 8:13). 


성화나 거룩함의 또 다른 면은 구별됨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거룩”과 “거룩 함”을 의미하는 말은 근본적으로 불결하거나 깨끗지 못한 것들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의 그룹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리 스도의 몸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기억할 것을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  3:1, 6:15). 우리들의 유흥 활동은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우리들의 능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4, 5). 


구별됨과 거룩함의 원리는 하나님의성회의 조례, 9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세속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에서 성경은 다음에 대하여 경고하나니 그들은 아래와 같다. 즉, 육신을 병들게 하고 마음과 심령을 썩게 하는 행동에 동참하는 일;결국 남용케되는 쾌락, 직위와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과 집착;극단적인 태도, 적합지 않은 언어의 사 용, 부적당한 외모;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약화시키는 유혹과 이에 관련된 것 (누 가복음 21:34, 35;로마서 8:5-8, 12:1, 2;고린도후서 6:14-18;에베소서 5:11;디모데 전서 2:8-10, 4:12;야고보서 4:4;요한일서 2:15-17;디도서 2:12) 등이다.”


마지막 원리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그저 빠져나가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과 그들의 삶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완전히 체험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구별하도록 도와줍니다. 어떤 유흥은 명확히잘못된 것이며, 그 러한 일에 참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 유흥의 종류 가운데어떤 것들 은 성경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것에 대한 지침이 주 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율법으로는 가한 것이나 유익한 것은 아닌 것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두 번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 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고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원리는 유흥을 포 함한 모든 활동에 적용됩니다. 그는 조금 후에 그의 편지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
24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말합 니다 (고린도전서 10:23). 
어떤 유흥은 그것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유흥이든지 그것에 지나치게 빠지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귀중한 시간을 빼앗습니다. 기독교 인은 그러한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대신에 그와 같은 일에 지나치게 열중함 으로서 흔히 영적으로 중화되거나 무디어져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하나 님보다는 다른어떤능력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것에 대해서 늘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 이 바라는 바는 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2:3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 이 진리의 말씀에 비 추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유흥이 덕을 세우거나 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굳세게 만들까?”또는 “이 특별한 유흥이 나 의 생활을 일시적 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영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까?”기독교인은 도덕적 으로 허용되는 모든 유흥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건전한 유흥의 장소가 있습니다. 아직 스스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못한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재미있는 시간”을 즐겨야 합니다. 함께웃고 노는 시 간들은 어려운 사춘기 시절에 가족이 결속하도록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유익한 유흥을 통하여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유흥이 항상 교육적이어야 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유흥은 악을 묘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교회의 예배 분위기 도 만들어 주지 않는 그저 중립적인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가족 전체가 함께즐길 수 있 는 중립적인 형태의 유흥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어린이들의 나 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들이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이어야만 합니다. 몇년 후에 친구들이 기독교인들은 재미있게 놀줄도 모른다고 조롱할 때에, 어린이들은 그러한 경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기독교 인은 죄악된 행위를 의미하는 어떤 것이든 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영화와 비디오 유흥을 위해 볼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제품의 내용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 제품 에 적당한 나이 수준을 알리는 레이블을 제품에 부착함으로서 일반인들의 요구를 충족시 켜왔습니다. 이러한 레이블을 붙이는 제도는 세속적인 것이며, 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제품은 폭력, 나체, 성적인 내용, 그리고 모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R” 등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연령 에게 피하도록 경계를 주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PG 13, TV 14, NC 17 등 과 같은 등급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 등급제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이 어린 아이들 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어서 어떤내용은 그들에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그러한 등급제도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나는 지금 그 나이보다 많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으며 또 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조장합니다. 세속적인 검열관이 보 아도 좋다고 말한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 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그러한 행동과 생활양식을 인정하는 것을 묘사하 는 그러한 것들 속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영적 생동력이 더 강하지 않을까요?


“G”등급 영화와 비디오에 관해서 특별히 주의를 상기시켜야만 합니다. 비록 그것에 “R”등급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을런지 모르지만, 등급을 정하는 그러한 제도는 그 이야 기 뒤에 있는 사상적 의도에 대해서는 등급을 매기지 않습니다. 행동주의자 작가나 제작 자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인의 행동에 대하여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부모들과 모든 성인들은 그러한 영화나 비디오 가 어린이들과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 식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문학 비평가들은 이러한 진실로부터의 탈선에 대해서 경종을 울 리고 다른 신자들에게도 그것에 대하여 경고를 해야만 합니다. 


어떤 것들이 기독교인을 위한 여가 시간의 활동에 합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많은 유흥 프로그램과 영화를 직접볼필요는 없습니다. 등급제도 이외에도 여러 유흥 매체에 대해 평론한 인쇄물들은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관해서 경고할 것입니 다.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 염려하는 시청자들이 폭력과 성적인 내용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그러한 등급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러한 것들을 찾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입니다. 
26영화를 상영하는 공중 영화관은 기독교인 –흔히 가족과 함께– 과 그러한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비 기독교인들의 유익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추가적인 관심 요인을 제공 할지 모릅니다. 모든 형태의 유흥에서 기독교인은 그 유흥의 실제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이 조성하는 분위기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유익한 유흥이 저 주하는 말, 술취함, 그리고 폭력적이고 험악한 말을 하는 군중에 의해서 망쳐질 수도 있습니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사회와 기독교인의 삶에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많은 영향을 미 쳐왔습니다. 심지어때때로 값싸고 번지르르한 종교 프로그램조차도 신자들이 지역 교회 에서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뉴스 취재원들이 보도하는 뉴스의 경향 은 사람들과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미묘하게 영향을 줍니다. 광고주들은 여가 를 즐기기 위한 새로운 “장난감”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욕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아주 매력적이고 해(害)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영화나 다른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마 찬가지로 면밀한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연속 코미디극, 심야프로그램, 그리고 코미디프 로그램들은 특별히 유혹적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웃는 것들은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것들이며, 진실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머들은 교묘하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 에 대해서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감각하도록 만듭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텔 레비전이 가족에게 매우 해(害)가 된다고 결정을 하고, 그들의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을 가 지지 않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토록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지라도, 텔레비전은 주의 깊게 감시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코 그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보모의 대용품으로 사 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케이블텔레비전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면에 대하여 염려하는 성인, 부모, 그리고 영 적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가지는 사생활에서 비 기독교적인 주제와 그릇된 행실을 촉진시키는 케이블채널뿐만 아니라 유료 시청을 통해 서 온갖 종류의 호색적(好色的)인 요소들에 관한 것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모 든 성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은 장려하고 악한 것은 피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 교인들은 그들의 유선 방송 회사에게 적절하게 여과되지 않은 혐오감을 주는 모든 프로 그램에 대한 비디오와 오디오 신호를 철저히봉쇄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케이블방송 국들은 그러한 채널프로그램들이 가정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무료로 완전히봉쇄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읽을거리


어떤 지역사회의 공립 도서관은, 검열없이 무제한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미 명(美名) 아래, 인쇄물이나 인터넷접속을 통하여 부도덕한 것들과 심지어 포르노 서적들 까지도 수집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도서관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동안에 일어난 변 화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정숙하지 못한 대중의 태도에 대한 증거가 아니 라, 기독교인들이 관찰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동안에 일어난조용한 변화의 증거입니다. 이와 동시에, 반기독교인의 계획을 가진 행동주의자 그룹들은 그들의 주장을 촉진시키는 서적을 포함하도록 압력을 넣어왔습니다. 책방이나 소매점포의 잡지 진열대는 성경의 가 르침은 물론 공중의 도덕을 해치는 읽을거리들을 뻔뻔스럽게 진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터넷


가장 최근의 유흥 매체인 인터넷은 교회가 청년과 성인들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고투해야 하는 전쟁터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매체의 형태에 대해서 도덕적 표준이 느슨
28하게 설정되어 있는 반면에 (비록 그러한 표준이 최근에 매우 침식을 당하긴 했지만), 인 터넷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어떠한 제한이나 표준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방지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자발적인 것 이며, 또한 그러한 프로그램은 원하지 않는 모든 곳에 접속하는 것을 방지하지는 못합니 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어떤 원거리 통신 학교에서 그 학교의 학생들에 게 추천한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컴퓨터 모니터에 부착해 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 는 특별히 포르노나 부적절한 관계를 위하여 인터넷을 사용하여 접촉하는 것을 피함으로 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순결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께맹세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서만 컴퓨터의 자원을 사용할 것입니다.”


관심사:


거룩함에 대한 개인의 표준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항상 율법주의나 세속적인 것을 촉진시키려 한다는 책임추궁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표준을 정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인 특별한 경우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 것을 거룩함을 지키지 못 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매체의 표현에 대해서 위에서 언 급한 것이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에 반대되는 가치, 표 준, 및 행동에 계속적으로 드러내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헌신에 대해서 계속 맹렬히공격하고 있는 활동을 단지 예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임을 명심해야만 합니 다. 그러한 것들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구한 성품을 지니지 못 하는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휴식, 유흥, 그리고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 님은 우리들의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결정한 우리들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들은 입술로 나오는 모든 안일한 말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마태복 음 12:36), 시간과 자원에 대한 우리들의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일에 대한 깊은 책임감 때문에 육체적 및 정 신적 힘을 유지하기에 겨우 충분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유흥이나 오락을 위해 소비합니다.

 

책임 있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시간을 어떻게 가장 잘 사용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저울질합니다. 신자들은 개인의 삶에서 유흥을 위한 장소를 평가하고 재고(再 考)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성회 조례, 8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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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순결
(Q 5) 성적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왜 그처럼 중요합니 까?


비록 사탄은 우리가 도덕적 순결을 지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협하지만, 도덕적 순결은 결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즐거움을 제거 하기 위하여 잘못설계된 방법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순결은 진정한 행복과 가족의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한없으신 지혜로우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성회의 근본 진리에 대한 선언은 성화(악에서 떠나 하나님께헌신하는 것) 와 “국가의 놀랍게 퇴폐되어가고 있는 도덕적 기준”(세속적인 것)에 관한 선언을 포함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적 순결에 관한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바로 세우기 위 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도덕에 대한 성경의 기준이 가장 보편적이며 또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라 고 믿습니다. 그러한 성경의 기준은 모든 세대에, 모든 사회에, 그리고 모든 문화에 적용 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고린도와 로마에 적용이 가능했듯이, 뉴욕, 로스앤 젤레스, 싱가포르, 그리고 바로 여러분의 지역사회에도 적용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성(性, sex)으로 넘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질문해야만 하는 것 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점점 더 세속적이고 도덕관념이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성적 생활에 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무신 론자나 불가지론자(agnostics)들이 행동하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오늘날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의 성적 순결에 의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성(性)이 넘쳐흐르고, 온갖 종류의 성적 표현이 허락되는 문화 속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 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훌륭한 시험이 됩니다.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 본연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에서 구속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말했던 말씀은 현대의 타락한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이 됩니 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 라”(고린도전서 5: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 느냐?” (고린도전서 6:9).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고린도전서 6:13).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6:18).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 라”(고린도전서 7:2). “우리는 ... 간음하지 말자”(고린도전서 10:8). 첫 번째편지에서 말 했던 권면을 듣지 않았을 때,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두 번째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또 내가 다시 갈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앞에서 낮추실까두려워 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두려워하노라”(고린도후서 12:21). 


바울은 모든 개인들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성욕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발 적인 의상, 성적 파티에 관한 공공연한 이야기, 그리고 성에 관련된 유머들은 정욕과 죄악 을 불러 일으키는 강한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성적 유 혹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든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 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고린도전서 7:5) 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배우자를 유혹과 죄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적 순결을 요구했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 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 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린도전서 7:8, 9). 이러한 여러 말씀을 종합해 볼때, 결혼밖에서 성관계를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
19며, 또한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한 성관계는 개인의 관계 와 사회의 안전을 파괴합니다. 
성적 부도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간통, 음행, 동성애, 근친 상간, 매춘, 강간, 및 음욕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변의 대중적인 문화는 성관계를 갖지 않 는 다른 모든 것들은 죄가 아니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 복음 5: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더젊은 청년들에게 하신 성경말씀은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 후서 2:22) 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적으로 흥분을 자아내게 만드는 접촉과 육체적 친밀함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이 성관계에 이르기 전에 자연적으로 진 행하는 과정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일생을 언약하기 전에 그러한 관계를 갖는 것은 사랑 이라기보다는 정욕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행복을 적절하게 배려해 주는 것보다는 자신 의 쾌락을 위하여 가지는 이기주의적인 만족입니다. 하나님은 신망과 믿음의 아름다운 결 혼생활을 유지하기 원하여 책임있는 기독교인의 결혼생활을 갖기를 바라는 젊은 부부들 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마음과 방황하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연애를 하는 관계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만일 마음이 즉각적인 육체의 만족을 원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사랑과 책임있는 결혼의 기회는 크게 감소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제의 시간이 상대 방의 육체를 탐구하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채워지게 된다면 하 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는 영원한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가능성은 현실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적으로 순결치 못함과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혹을 잘알고 있었 습니다. 그는 청년디모데에게 적어도 세 번 경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 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디모데전서 4:12). 그는 디모데에게 순전한 마음으로 여자를 대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디모데전서 5:2). 그리고 또 한 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청결함으로 순결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 


관심사:


성과 성적 자극에 대하여 현대 사회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하나님이 과거에 심판하 시고 멸망시키신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급속도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 청년들이 성적 순결에 대하여 전심으로 책임있는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자멸을 향하여 곤두박질하는 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과 관계에 대한 이교도의 악한 영향은 심지어 교회의 세계 속까지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며”,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벌도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성경의 기준은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쉽게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지 모릅니 다. 그러나 도덕에 관한 하나님의 표준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가 우리들을 보 존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신 총명한 규칙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결 혼 전이나 결혼 생활 가운데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풍족하게 유익을 주며, 그것은 흔히 성공적인 평생의 결혼 생활로 나타납니다.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성화와 세속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근본진리에 대한 선언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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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6)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슨 해로움이나 위험이 있습니까?

텔레비전, 연극, 비디오, 도서 등과 같은 다른 세속적인 형태의 오락물은 어떠 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흥물들이 삶에서 점 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때에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성회는 유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것에 대한 신앙과 실천에 관하여 다 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의 대부분은 연령의 차이에 그 원인을 둘 수 있는데, 그것은 젊은 연령의 그룹이 친구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하며 또한 같 은 유흥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 포함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과 나이 많으신 분 들의 그룹은 서로 비슷한 감정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사회의 문화나 혹은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무분별하게 참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 다. 그들은 청년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영적 관계가 부식되거나 손실되지 않도록 청년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종 유흥 매체에 대한 것을 취급한 아래의 사항들은 우 선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성경적 결론에 입 각하여서 특별한 매개체에 대해 가지는 전통적인 태도와 현세대의 태도를 요약하였습니 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성숙해질 수록, 우리는 현대의 여러가지 형태의 유흥이 영적 생명 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 관심이 깊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경 원리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슨 종류와 유형의 유흥이 적절 할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 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4, 45; 20:7; 베드로전서 1:15, 16) 라고 하는 명령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거룩함은 “영적으로 순결함”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됨” 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들이 하나 님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허용할 때에 하나님은 그 의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거룩하 게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이 의로움 가운데 지시하신 모든 면에서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며, 또 성령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 는 그러한 일로부터 절제하도록 도우시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거룩하다고 선언하 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로마서 6:12-19; 데살로니가전서 4:3, 4). 따라서 적합한 형태의 세속적인 유흥을 선택할 때에, 우리들은 성경이 저주하는 죄악된 활동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모든 것들이 거룩함의 표 준에 어긋난다고 결론을 지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간음, 혼전(婚前) 성생활, 동성애를 찬 양하는 것, 그리고 그밖에 그릇된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 교인에게 특별한 지혜와 지도가 필요한 때는 성경이 저주하지도 않으며 또한 승인하지도 않는 그러한 활동에 관련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조차도 성경에는 기독교인들 이 따라야 할 지침과 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양심에 위반되거나 혹은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게 할 때에 그에게 죄가 되는 행위의 문제에 대해 서 가르쳤습니다 (참고. 고린도전서 8:1-13; 로마서 14 장). 그러한 경우에 기독교인은 때 때로, 개인적으로는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나 자 매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거나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인이 자신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흔히 필요한데, 그 23 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 니다 (로마서 14:15; 고린도전서 8:13).

 

성화나 거룩함의 또 다른 면은 구별됨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거룩”과 “거룩 함”을 의미하는 말은 근본적으로 불결하거나 깨끗지 못한 것들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의 그룹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리 스도의 몸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기억할 것을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 3:1, 6:15). 우리들의 유흥 활동은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우리들의 능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4, 5).

 

구별됨과 거룩함의 원리는 하나님의성회의 조례, 9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세속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에서 성경은 다음에 대하여 경고하나니 그들은 아래와 같다. 즉, 육신을 병들게 하고 마음과 심령을 썩게 하는 행동에 동참하는 일; 결국 남용케 되는 쾌락, 직위와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과 집착; 극단적인 태도, 적합지 않은 언어의 사 용, 부적당한 외모;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약화시키는 유혹과 이에 관련된 것 (누 가복음 21:34, 35; 로마서 8:5-8, 12:1, 2; 고린도후서 6:14-18; 에베소서 5:11; 디모데 전서 2:8-10, 4:12; 야고보서 4:4; 요한일서 2:15-17; 디도서 2:12) 등이다.”

 

마지막 원리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그저 빠져나가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과 그들의 삶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완전히 체험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구별하도록 도와줍니다. 어떤 유흥은 명확히 잘못된 것이며, 그 러한 일에 참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 유흥의 종류 가운데 어떤 것들 은 성경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것에 대한 지침이 주 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율법으로는 가한 것이나 유익한 것은 아닌 것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두 번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 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고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원리는 유흥을 포 함한 모든 활동에 적용됩니다. 그는 조금 후에 그의 편지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 24 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말합 니다 (고린도전서 10:23)

 

어떤 유흥은 그것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유흥이든지 그것에 지나치게 빠지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귀중한 시간을 빼앗습니다. 기독교 인은 그러한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대신에 그와 같은 일에 지나치게 열중함 으로서 흔히 영적으로 중화되거나 무디어져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하나 님보다는 다른 어떤 능력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것에 대해서 늘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 이 바라는 바는 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2:3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 이 진리의 말씀에 비 추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유흥이 덕을 세우거나 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굳세게 만들까?” 또는 “이 특별한 유흥이 나 의 생활을 일시적 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영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은 도덕적 으로 허용되는 모든 유흥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건전한 유흥의 장소가 있습니다. 아직 스스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못한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즐겨야 합니다. 함께 웃고 노는 시 간들은 어려운 사춘기 시절에 가족이 결속하도록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유익한 유흥을 통하여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유흥이 항상 교육적이어야 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유흥은 악을 묘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교회의 예배 분위기 도 만들어 주지 않는 그저 중립적인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 는 중립적인 형태의 유흥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어린이들의 나 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들이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이어야만 합니다. 몇 년 후에 친구들이 기독교인들은 재미있게 놀 줄도 모른다고 조롱할 때에, 어린이들은 그러한 경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기독교 인은 죄악된 행위를 의미하는 어떤 것이든 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영화와 비디오

 

유흥을 위해 볼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제품의 내용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 제품 에 적당한 나이 수준을 알리는 레이블을 제품에 부착함으로서 일반인들의 요구를 충족시 켜왔습니다. 이러한 레이블을 붙이는 제도는 세속적인 것이며, 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제품은 폭력, 나체, 성적인 내용, 그리고 모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R” 등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연령 에게 피하도록 경계를 주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PG 13, TV 14, NC 17 등 과 같은 등급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 등급제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이 어린 아이들 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어서 어떤 내용은 그들에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그러한 등급제도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나는 지금 그 나이보다 많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으며 또 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조장합니다. 세속적인 검열관이 보 아도 좋다고 말한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 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그러한 행동과 생활양식을 인정하는 것을 묘사하 는 그러한 것들 속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영적 생동력이 더 강하지 않을까요?

 

“G” 등급 영화와 비디오에 관해서 특별히 주의를 상기시켜야만 합니다. 비록 그것에 “R” 등급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을런지 모르지만, 등급을 정하는 그러한 제도는 그 이야 기 뒤에 있는 사상적 의도에 대해서는 등급을 매기지 않습니다. 행동주의자 작가나 제작 자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인의 행동에 대하여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부모들과 모든 성인들은 그러한 영화나 비디오 가 어린이들과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 식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문학 비평가들은 이러한 진실로부터의 탈선에 대해서 경종을 울 리고 다른 신자들에게도 그것에 대하여 경고를 해야만 합니다.

 

어떤 것들이 기독교인을 위한 여가 시간의 활동에 합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많은 유흥 프로그램과 영화를 직접 볼 필요는 없습니다. 등급제도 이외에도 여러 유흥 매체에 대해 평론한 인쇄물들은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관해서 경고할 것입니 다.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 염려하는 시청자들이 폭력과 성적인 내용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그러한 등급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러한 것들을 찾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입니다. 영화를 상영하는 공중 영화관은 기독교인 – 흔히 가족과 함께 – 과 그러한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비 기독교인들의 유익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추가적인 관심 요인을 제공 할지 모릅니다. 모든 형태의 유흥에서 기독교인은 그 유흥의 실제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이 조성하는 분위기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유익한 유흥이 저 주하는 말, 술취함, 그리고 폭력적이고 험악한 말을 하는 군중에 의해서 망쳐질 수도 있습 니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사회와 기독교인의 삶에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 많은 영향을 미 쳐왔습니다. 심지어 때때로 값싸고 번지르르한 종교 프로그램 조차도 신자들이 지역 교회 에서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뉴스 취재원들이 보도하는 뉴스의 경향 은 사람들과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미묘하게 영향을 줍니다. 광고주들은 여가 를 즐기기 위한 새로운 “장난감”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욕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아주 매력적이고 해(害)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영화나 다른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마 찬가지로 면밀한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연속 코미디극, 심야 프로그램, 그리고 코미디 프 로그램들은 특별히 유혹적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웃는 것들은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것들이며, 진실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머들은 교묘하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 에 대해서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감각하도록 만듭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텔 레비전이 가족에게 매우 해(害)가 된다고 결정을 하고, 그들의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을 가 지지 않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토록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지라도, 텔레비전은 주의 깊게 감시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코 그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보모의 대용품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케이블 텔레비전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면에 대하여 염려하는 성인, 부모, 그리고 영 적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가지는 사생활에서 비 기독교적인 주제와 그릇된 행실을 촉진시키는 케이블 채널뿐만 아니라 유료 시청을 통해 서 온갖 종류의 호색적(好色的)인 요소들에 관한 것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모 든 성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은 장려하고 악한 것은 피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 교인들은 그들의 유선 방송 회사에게 적절하게 여과되지 않은 혐오감을 주는 모든 프로 그램에 대한 비디오와 오디오 신호를 철저히 봉쇄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케이블 방송 국들은 그러한 채널 프로그램들이 가정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무료로 완전히 봉쇄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읽을거리

 

어떤 지역사회의 공립 도서관은, 검열 없이 무제한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미 명(美名) 아래, 인쇄물이나 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부도덕한 것들과 심지어 포르노 서적들 까지도 수집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도서관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동안에 일어난 변화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정숙하지 못한 대중의 태도에 대한 증거가 아니 라, 기독교인들이 관찰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동안에 일어난 조용한 변화의 증거입니다. 이와 동시에, 반기독교인의 계획을 가진 행동주의자 그룹들은 그들의 주장을 촉진시키는 서적을 포함하도록 압력을 넣어 왔습니다. 책방이나 소매점포의 잡지 진열대는 성경의 가 르침은 물론 공중의 도덕을 해치는 읽을거리들을 뻔뻔스럽게 진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터넷

 

가장 최근의 유흥 매체인 인터넷은 교회가 청년과 성인들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고투해야 하는 전쟁터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 매체의 형태에 대해서 도덕적 표준이 느슨 28 하게 설정되어 있는 반면에 (비록 그러한 표준이 최근에 매우 침식을 당하긴 했지만), 인 터넷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어떠한 제한이나 표준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방지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자발적인 것 이며, 또한 그러한 프로그램은 원하지 않는 모든 곳에 접속하는 것을 방지하지는 못합니 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어떤 원거리 통신 학교에서 그 학교의 학생들에 게 추천한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컴퓨터 모니터에 부착해 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 는 특별히 포르노나 부적절한 관계를 위하여 인터넷을 사용하여 접촉하는 것을 피함으로 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순결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서만 컴퓨터의 자원을 사용할 것입니다.”

 

관심사:

 

거룩함에 대한 개인의 표준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항상 율법주의나 세속적인 것을 촉진시키려 한다는 책임 추궁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표준을 정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인 특별한 경우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 것을 거룩함을 지키지 못 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매체의 표현에 대해서 위에서 언 급한 것이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에 반대되는 가치, 표 준, 및 행동에 계속적으로 드러내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헌신에 대해서 계속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활동을 단지 예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임을 명심해야만 합니 다. 그러한 것들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구한 성품을 지니지 못 하는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휴식, 유흥, 그리고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결정한 우리들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들은 입술로 나오는 모든 안일한 말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마태복 음 12:36), 시간과 자원에 대한 우리들의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일에 대한 깊은 책임감 때문에 육체적 및 정 신적 힘을 유지하기에 겨우 충분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유흥이나 오락을 위해 소비합니다. 책임 있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시간을 어떻게 가장 잘 사용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저울질합니다. 신자들은 개인의 삶에서 유흥을 위한 장소를 평가하고 재고(再 考)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성회 조례, 8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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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5) 성적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왜 그처럼 중요합니까?

 

비록 사탄은 우리가 도덕적 순결을 지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협하지만, 도덕적 순결은 결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즐거움을 제거 하기 위하여 잘못 설계된 방법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순결은 진정한 행복과 가족의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한없으신 지혜로우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성회의 근본 진리에 대한 선언은 성화(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와 “국가의 놀랍게 퇴폐되어가고 있는 도덕적 기준” (세속적인 것)에 관한 선언을 포함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적 순결에 관한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바로 세우기 위 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도덕에 대한 성경의 기준이 가장 보편적이며 또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라 고 믿습니다. 그러한 성경의 기준은 모든 세대에, 모든 사회에, 그리고 모든 문화에 적용 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고린도와 로마에 적용이 가능했듯이, 뉴욕, 로스앤 젤레스, 싱가포르, 그리고 바로 여러분의 지역사회에도 적용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성(性, sex)으로 넘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질문해야만 하는 것 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점점 더 세속적이고 도덕관념이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성적 생활에 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무신 론자나 불가지론자(agnostics)들이 행동하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의 성적 순결에 의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성(性)이 넘쳐흐르고, 온갖 종류의 성적 표현이 허락되는 문화 속에서 성적 순결을 18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 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훌륭한 시험이 됩니다.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인 간 본연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에서 구속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말했던 말씀은 현대의 타락한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이 됩니 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 라” (고린도전서 5: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 느냐?” (고린도전서 6:9).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6:13).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6:18).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 라” (고린도전서 7:2). “우리는 ... 간음하지 말자” (고린도전서 10:8). 첫 번째 편지에서 말 했던 권면을 듣지 않았을 때,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 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2:21).

 

바울은 모든 개인들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성욕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발 적인 의상, 성적 파티에 관한 공공연한 이야기, 그리고 성에 관련된 유머들은 정욕과 죄악 을 불러 일으키는 강한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성적 유 혹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든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 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7:5) 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배우자를 유혹과 죄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적 순결을 요구했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 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 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7:8, 9). 이러한 여러 말씀을 종합해 볼 때, 결혼 밖에서 성관계를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며, 또한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한 성관계는 개인의 관계 와 사회의 안전을 파괴합니다.

 

성적 부도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간통, 음행, 동성애, 근친 상간, 매춘, 강간, 및 음욕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변의 대중적인 문화는 성관계를 갖지 않 는 다른 모든 것들은 죄가 아니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 복음 5: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더 젊은 청년들에게 하신 성경말씀은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 후서 2:22) 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적으로 흥분을 자아내게 만드는 접촉과 육체적 친밀함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이 성관계에 이르기 전에 자연적으로 진 행하는 과정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일생을 언약하기 전에 그러한 관계를 갖는 것은 사랑 이라기보다는 정욕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행복을 적절하게 배려해 주는 것보다는 자신 의 쾌락을 위하여 가지는 이기주의적인 만족입니다. 하나님은 신망과 믿음의 아름다운 결 혼생활을 유지하기 원하여 책임있는 기독교인의 결혼생활을 갖기를 바라는 젊은 부부들 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마음과 방황하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연애를 하는 관계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만일 마음이 즉각적인 육체의 만족을 원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사랑과 책임있는 결혼의 기회는 크게 감소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제의 시간이 상대 방의 육체를 탐구하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채워지게 된다면 하 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는 영원한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가능성은 현실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적으로 순결치 못함과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혹을 잘 알고 있었 습니다. 그는 청년 디모데에게 적어도 세 번 경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 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 (디모데전서 4:12). 그는 디모데에게 순전한 마음으로 여자를 대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20 하듯 하라” (디모데전서 5:2). 그리고 또 한 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청결함으로 순결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관심사:

 

성과 성적 자극에 대하여 현대 사회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하나님이 과거에 심판하 시고 멸망시키신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급속도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 청년들이 성적 순결에 대하여 전심으로 책임있는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자멸을 향하여 곤두박질하는 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과 관계에 대한 이교도의 악한 영향은 심지어 교회의 세계 속까지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며”,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성경의 기준은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쉽게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지 모릅니 다. 그러나 도덕에 관한 하나님의 표준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가 우리들을 보 존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신 총명한 규칙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결 혼 전이나 결혼 생활 가운데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풍족하게 유익을 주며, 그것은 흔히 성공적인 평생의 결혼 생활로 나타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성화와 세속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근본진리에 대한 선언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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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

왜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개인의 대화와 언어를 그처럼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교회는 정말로 험담을 죄악이라고 믿습니까?

 

언어와 대화는 한 사람의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 12:34).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어떻게 아버지 와 대화를 나누셨는가 하는 것(누가복음 22:41, 42)을 읽음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모독과 음 란한 말은 그들의 마음의 본질을 나타내 줍니다.

 

입으로 나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칼과 화살과 같은 무기로 표 현됩니다 (시편 57:4, 64:3; 예레미야 9:8). 야고보는 혀와 말의 능력을 배의 키나 산불을 일으키는 불꽃으로 표현했습니다 (야고보서 3:2-12). 기독교인은 오늘날 정치적 선전이 나 미디어 뉴스에서 말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성회는 험담이 죄라고 하는 성경말씀에 동의합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그리 고 자주 소문을 퍼뜨리는 모든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비난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레위기 19:1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 보서 1:26).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35, 3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에서 험담은 기독교인과 성령 충만한 삶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위에 완전히 상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험담이 가져다 주는 공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며 가장 강력한 도구 인 언어와 말을 잔인한 무기로 변화시킵니다. 쓸데없는 말 한마디가 진실에 상처를 주며, 지혜로움을 어리석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야고보서 3 장). 험담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6; 갈라디아서 5:14, 15). 그것은 도움 대신에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그 것은 화평 대신에 분노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잠언 16:28; 고린도후서 12:20). 그것은 믿 음 대신에 배신을 가져옵니다 (잠언 20:19).

 

왜 기독교인들 사이에 험담이 존재할까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리고 야고보는 혀의 힘에 대해서 열정적 으로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 모두 험담이 마귀에게 발판을 마련해 준다고 말합니다. 그것 은 지옥의 불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4:25-32; 야고보서 3:6). 그러므로 기독교 교회에 험 담이 존재하는 주된 이유는 험담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또한 마귀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일종의 오락으 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험담은 일반적으로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 님께서 덕을 세우는 방법을 통하여 충족되도록 계획하신 대화와 관계에 있어서의 필요성 을 단지 일시적으로만 만족시켜 줄 뿐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험담을 나누는 것을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또 어떤 그룹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룹 밖 에 있는 사람들을 남용하는 일입니다. 때때로 험담은 노여움의 돌출구가 됩니다. 어떤 경 우에는 사람들은 그들이 노여워하는 사람이나 문제에 대해서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서 그들의 분노를 발산시킵니다. 이 모든 이유들은 주님 안에서 신뢰와 힘을 갖는 사람, 기독교인의 봉사를 사랑으로 감당함으로 기쁨을 갖는 사람의 생 활에는 험담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것이 합법적이거나 허용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적당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강요나 습관이 우리들을 지배하거나, 그 것의 힘 아래 우리들이 얽매이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6:12). 기본적으로 진 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건설적이거나, 다른 사람을 북돋아 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 들에게 친절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서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적절한 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 다 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사려 없이 관여하는 것은 자제심이 결여된 것을 보여줍 니다.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혹은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어떤 말 이라도 삼가하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2).

 

우리들은 험담에 관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를 함으로서 소문을 만들기 시작하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기도를 요청하는 경우 에 있어서도 그러한 요청을 하는 데 필요한 것만을 말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무엇을 암시 하는 질문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불미스러운 일을 캐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2) 비밀을 누설하지 마십시오 (잠언 11:13).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어떤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오직 목사님이나 혹은 적절하게 행동할 위치에 있는 부모 에게만 말하십시오.

(3)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험담을 듣지 않겠다는 당신의 의도를 표현 하십시오.

(4)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불을 끄는 사람이 되십시오 (잠언 26:20).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는 중요합니다.

 

말을 하는 가운데 흔히 간과하는 분야는 사려 없는 표현과 조심없는 맹세의 사용입 니다. 철저히 모독하려는 의도 없이도, 어떤 기독교인은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지 (gee),” “단 (darn)” 그리고 “가쉬 (gosh)” 와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낱말의 어원에 대 한 연구는 이러한 말들이 “예수 (Jesus),” “댐 (damn),” 그리고 “하나님 (God)” 을 의미 없 이 말하는 것이라고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부지중에 사 용하는 어휘 가운데는 이와 비슷한 어원을 알 수 없는 무의미한 낱말들이 포함되어 있습 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어휘들을 평가해 보는 것이 좋 16 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는 것이어야만 하며, 또 신자의 생활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섬세하게 증거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관심사: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개 교회에서, 왜 그토록 긴장되 는 일이 많이 있고, 또 화합하지 못하는 때가 많은지 생각을 해 봅니다. 흔히 그러한 어려 움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성급하게 내뱉는 부주의한 말 때문에 생기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아니 라 할지라도, “말하기 전에 생각하십시오.” 라고 하는 한 옛 속담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 고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명령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 안에, 성령님이 먼저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게 되며, 또한 하는 말이 덕을 세우 며 신자들을 연합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기회를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 충만한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위한 전적인 사랑을 반영하는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 하나 님께 드리는 기도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성령 세례는, 내적 충만과 함께 받는 기도의 언어와 함께, 인간의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게 보일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찬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들은 험담의 유혹에 깊이 빠지지 않게 됩니다. 에베 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익한 말씀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 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 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29).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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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은 신자의 생활과 교회에 대해  파괴적인가? 언제 적절한 자기 존중이 오만함과 죄악 선을 는가?

 

  번째 질문 -------------------------------------------

 

 

교만은 심지어  이전에 늘로부터  타락하도록 만들 문에  번째 라고 어집니다 (두로  교만을 하는 것으로 하여 에스겔 28:14-17   교만을 기록한 에스겔 28 장을 보십시오). 성경에서 교만이나 함으로 번역  리어와 그리 단어는 마음의 못된 , 거만한 영을 묘사합니다.  16:18

  말의 정적인 사용에 대해서  사하고 있습니다. - 교만은 패망 봉이요 만한 마음은  앞잡이니라.”

 

그러나 영어 사전은 교만(pride)이라는 단어의 정적인  아니라 정적인  사용에 대해서도 명합니다. 우리들은 늘날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함, 보화나 정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   대한 사회의 존경함을 표현하기 하여  말을 사용할  있습니다.  단어의 정적인 의미와 정적인 의미 사이의 구별

 인식하지 못함으로 말미, 찬하는 말을 하면 그러한 표현이 그들을 오만하고 거만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 것이라고 두려워하여서 어떤 모들이 그러한 말을 들에게 사용하지 도록  인이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성장할  있습니다. 

 

적절한 르침은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지 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조물에게 두신  하여 이해하는 것을 도울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은사에 대해 감사할 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생각이 이기주의적이며 쟁적인 것으로 변질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에서 그는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대로  생각하라.” (로마서 12:3)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구분 명하게 하면서, 우리들은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의 에는 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무나도 하게, 주의하지  람을 사로는데, 냐하면 그것은 타락  육체의 본질이기 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성경이 인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 속에는 창조물에게 사랑과  하시는 하나님의 정당  하는 생각이 자리  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교만으로   사람은 그로 하여 생존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 해결할  있다고 생각하도록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는데, 냐하면 그러한 교만은 스스로에게

취되 만들어서 자신을 신으로 만들기 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언한 후에,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을 가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들어내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그로 하여, 다른 사람을  내리거나 심지어는 그들에게 상처나  주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개인  위해 그들을 사용하도록 니다 (시편 10:2-4; 모데전서 1:12, 13). 사회에

  소수의 문화권 에서, 총체적 교만은  차별,  차별, 그리고 편견을   있습니다.

 

못된 의식 속에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을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에 기록된 대로 일반적으로 나는 교만을 하는 것은 도움이 니다. 다른 사람의  에서  사람을 헐뜯 (시편 101:5), 교만한  (잠언 6:17),   자들의 교만함(이사야 28:1), 성들을 임으로 주관함 (복음 20:25, 26),   찬을 받아들(사도행전 12:21-23), 다른 사람들보다  여기는 자만함 (고린도전서 4:6, 7), 이기적인 심이나 영심 (빌립보서 2:3, 4),  일에 대한 자만함 (야고보서 4:13-16), 장로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의 권면을 무시함 (베드로전서 5:5,6), 그리고 피차 하기를 (베소서 5:21) --- 랄프 해리 자만의 증상에서 인용함.

 

우리들 스스로가  감시를  하지 으면, 못된 교만은 우리들의  속으 기어들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들이 고의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하기  교만이 겉으로 란스 나지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전히 지함이 주는 우리들의 영적인 삶을 가뜨니다. 때때 우리들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소서. 내게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라고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있습니다.

 

 

관심사: 자신에 대해   오만하고 교만함을 다루기 위한 것으로 사되습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들의   있는 능력 인가 하는  완전히  못하기를 바라시지는 으십니다. 우리들은 신약성경에서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을 습니다. 그러 만일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어주신   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능합니다.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내면의 교만을 감출  있는 가장된 표면적 겸손이 있습니. 우리들은 겸손함에 대한 교만이나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어주신 덕이나 성품에 해서 교만함을 져서는  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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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은  훈련 절제의 삶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강조하는가?

 

 번째 질문 -------------------------------------------

 

우리들은 훈련 절제의 중요성을  가지 면에서 직면합니다. 첫째로는, 성경이 것을 합니다. 둘째로는,  가능하며, 자유분방하고,  이기주의적인 우리 사회의 본질은 바로   것을 부르짖 있는데, 그것은 오직 개인의 훈련 절제를 하여서만이   있는 것입니다.

 보도 , 기독교에 반대하는 주제를 가진 영화, 그리고 하게 도덕을 타락하도록  텔레비전의 연속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세상이  어가고 있는가? 라고    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세상이 게 어가고 있는지, 특별 우리들이  있는  세상의 마지  있을 도덕적인 현상에

대해서  일이 일어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은 결국 내면의 훈련  때문에 일어나는 통제할   회로 결됩니다. 디모데후서 3:1-5   이것을 . 말세에  하는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사랑하며, 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모를 하며, 감사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하며, 자고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인하는 자니 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여러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하게 항목들을 하게 스쳐 지나다면, 아마도 당신은 절제하지 못하며 라는 말을 을런지도 릅니다. 

 

 항목 가운데 있는 다른 모든  행동들은 절제함의 핍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예언을 하고 있는 그러한 ()과는 다른 모습으로 굳게 있어야만 합니다. 수님께서는 너희 서로 사랑하면 이로 모든 사람이 너희 제자인줄 리라.” 라고 말씀하습니다 (요한복음 13:35).

물론, 사랑은  가지 성령의 열매 가운데  번째 열매입니다 (아서 5:22, 23). 절제는  항목에서 마지입니다. 그러나 절제는  있는 모든 다른 성령의 열매  덕을 통제합니다. 제함이  사랑은 정이 니다. 과도한 희락 박한 것입니다. 자제함이   함이 됩니다. 균형   참음은 담함이 니다.

자비는 약점이 되며, 양선은 이기적인 것이 니다. 아무런 이유  충성은 맹목적인 미신과 습니다. 단적인 온유는 겁쟁이가 됩니다. 세상은 사랑과 희락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어두워진 마음은 경건한 삶의  자를  있을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제할   세상 에서, 절제에 대한 본을 보여주어야만 

니다.

 

타락하고  세상에서는, 절제는 신앙심이  에서부터 완전한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 성령의 열매   바로  육체의 일로 기록한 것들 ---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우상 숭배와 술수와 수를  것과 분쟁 시기와 분냄  것과 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함과 방탕함과  그와  것들 (라디아서 5:19-21) --– , 주님 앞에서 걸어가는 우리들의 삶을 성령께서 순화하시도록 함으로, 우리들의 삶에서 배제어야 합니다.

 

훈련 절제는 성품을 표시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사람들에게는 여가와 쾌락 높은 목표를 하는  필요하다는 것을 니다. 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기도, 성경공, 그리고  것들에 대한 명상과 함께 갖어야만 하는 식과 그들이 사하는  사이에 얼마나  균형있는 삶을 져야만 ?

자제는, 편리하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다른 덕에  품목 아닙니다. 그것 성령이 충만한 기독교인을 확인시주는 표시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가지  운데 열하였으며, 그것을 보다도 믿음에 포함시켰습니다 (베드로후서 1:5-7). “이 것이 너희에게 있어 족한즉 너희 우리   그리도를 알기에 게으  

  자가   하려니와 이런 것이  자는 소경이라  못하고 그의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베드로후서 1:8, 9).

 

 

관심사: 자제심은 훌륭 지도 위한 근본적인 자질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자제심에 대해 본이 되어야   아니라, 또한 자제심을 배우고  하도록 은이들에게 권면해야 합니다. 회자가 자제심에 대해 본이 어야할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와  또한 그들이 영적  야하는 사람들에게 자제심을 취시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시대입니다. 엄청난 자의 20  이하 은이들은 그들의 리가 들려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본질 때문에, 그들은 자연적인 험을 해서나  성령님의 역사를 해서  자제심을 개발하지 습니다.  느 보다도 늘날 자제심에 대해 본이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정적인  주기 위해서는 자제심의 본은 그것을 르치 사람의 생활과 일관 어야만 합니다.  들면, 명히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술을 절제하는  대해 호소를 한다면  과는 상당히 절감될 것입니다. 자신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욕설  것이라고 르친다면 그다지 효력  것입니다.

자제심이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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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을 말하는  기독교 신자 중에서 그처럼 중요하게 강조 있을?

 

 번째 질문 -------------------------------------------

 

진실을 말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제일의 성경적 리입니다. 현대 사회의   진실을 부주의하게 취급하거나 고의적으로   결과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에서 들의 정직함에 대해   있는 것은 개인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일입니다.

 

재정과  과정의 세계는 정직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무나   있기 문에사기나 오해가 생기지 도록,  합의  주로 문서로 성해  것을 하고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녀들의 말과 약속이,  약속을 입증하는 법률 문서 이도, 모든 면에서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하십니다.

 

진리가 ? 2   전에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늘날에도 문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실에 대한 절대  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쓰면서 정거리는  그러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실한 인은 그러한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갖을 것을 구합니다.

진실은 입증   있는 정한 사실일? 바르 동하는 것이나 또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자체는 진실함을 의미하나요? 진실은 사람마다 다른 것인가요? 진실은   믿지 아도 참된 것인가요?

 

진실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며, 황마다 다른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보편적인 진실을 아야만 하며, 현대 문화가 그것에 대해 논박할 때라도 그것을 하고, "사랑 에서" 그것을 어해야 합니다 (소서 4:15).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음성 문에  사람들이 수에 빠져  르침 따라니다. 백하게   있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을 조하신 조자께서 선언하시고 믿음과 행위의 도로서 우리를 위해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율법 책인 성경에 기록된 진리 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개인적이며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대해서 말할  아니라 그것에 의해 살도록 우리들에게 니다. 성경의 진리는 사실적일  아니라 도덕적입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입니다. , , 관계,  , 그리고 심지어 개인의  가운데서도 우리들은 위선을 보며 공공연한 결의가 정직과 신으로 보입니다. 위선은 진실과 직함의 외면만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가면은 함과 진리의 용을 숨깁니다. 위선은 실제적인 삶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를  라도

으로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염려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위선은 이기적인 행동  습관이 비밀러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 으로는 하나님께 신하는 것처럼 미는 것입니다.

 

정직은 진실과 정직한 행동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여는 것이나 직하게 말하는  말하는 사람에게    에라도 스스 진실함을 합니다. 약속  약을 지키는 것은 정직의 행위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것은 정직과 진실에 대한 (名望)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지적인 정직함은 마음   직하고 있는 개인적 의견 될지도  그러한 모든 진실에 대해서 까지도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성실함은 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수님은 나다나엘  속에 사한 것이   사람”(요한복음 1:47)이라고 말씀하습니다. 사람은 정직하지 더라도 으로만 정직해 보일  있습니다. 진실로 정직한 사람은 진리와 함께 하며 (고린도전서

13:6) 불의와 위선에 대해서는 화를 내며 슬퍼합니다.

 

사기는 오직 세상에서만 찾아볼  있는 정직함  립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 바울이  당시에 믿는 자들에게   도록 권면해야만 했다면, 우리는 우리들이  신자들을 대할   정직하게 행하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연합 그것을 합니다. 너희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아니하? 너희  행하고 속이는.  너희 제로다.” (고린도전서 6:7,8).

 

마가복음 10:19  기록된  청년에게 하신 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계명을 아나니 인하지 말라, 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증거 하지 말라속여 하지 말라,  모를 공경하라 였느니라.”  5, 6, 7, 8, 그리고 9 계명은 모두 “ 하지 말라 하는 계명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증거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관심사: 

 

어떤 선의의 마음을 가진 기독교인이 약성경에서  말했 것이 나중에  결과를  주었던 사람에 대한  지적합니다. 이러한 부터 그들은  말하는 것이 용되 예외의  있다고 결론을 습니다. 이러한 결론을 받침해주 로서 사적인 사건에 기초를     인용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하는 사가 찾아와서  고소된 사람이나 가족들에 대해서 물을  다른 사람의 생명 호하는 것이  일이 닐까? 성경은 계명에 대해서 외의 경우를  주지  있습니다.

 

짓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말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못된 이기적인 이유를  것을 북돋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못에 대해 주어 하는 형벌 피하는 것은  상대방 사람에게도 생명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종류 정직함을 정당화시키는 교활한  우리들의 사회의 심각한 재해인  상대주의(상대론, relativism) 황윤리(situational ethics) 했습니다.

 

교회에서 특별  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의 성실함과 정직함입니다. 령님을  위한 노력으로, 혹은 지도자로서  사람의 (名望) 높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간적인 방법 사용합니다. 적인 형상이 령님에 인도함을 받은 상으로 표현될  진실은 태롭 니다. 모든 영적 지도자들 바울과 함께 마음으로 우리를 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하지 ,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 일이 없노 라고 증거   있어야 합니.

기독교인은 말과 행동으로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진실함에 대한 본을 보이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  첨부: 상대주의 - 절대적으로 바른 진리 있을   바른 것은 그것을 정하는 기준 의해 해지는 것이라는 주장.

 

상황윤리  1960  말에 겨난 용어로서 보편적인 윤리 규범 정하면서, 구체적인 상황 처한 개인 자신의 윤리적 당위(當爲) 스스로의 직관을  식별해야 하거나 윤리 규범  그대로 따라야 다고 주장하는 윤리 학설이다. , 절대적인 리의 윤리를 따지기 보다는  상황 따라서는   없었다는 것을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기 합리화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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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장 (글롯사와 디알렉토스)

(행 2:1-5) 오순절 날에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는120문도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대 사건이 발생합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던(창11:1) 인류의 언어 체계가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며 구음의 언어가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를 빼앗기고 흐트러지게 됩니다.(창11:7-8) 이렇게 빼앗기고 흐트러졌던 인류의 언어가 하늘의 언어로 회복되는 때라. 요엘2:28에서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 마지막 때에 이러한 일이 있겠다 예언하신 요엘2장의 말씀의 성취가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행2장의 말씀입니다.

어떤이들은 행2장의 방언을 영언이라 부름니다.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였던 (창11:1) 시점에서 (창2:7)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곧 (창11:1)의 언어가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시던 동일한 하늘언어였음이 확인됩니다. 이로써 곧 (행2:1-5)방언을 곧 영언(하늘언어)이라 추리해 낼 수있는 근거가 됩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잃어버렸던 인류의 하나였던 언어 체계가 행2장의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늘언어, 영언이 회복되는 사건이라 주장한다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겠는지요?

행2:4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방언의 원어는 글롯사 즉 ‘혀’ tongue, 언어 language라는 의미로 방언은 혀에서 나는 소리, 혀에서 발생하는 언어라는 의미 입니다.

6 절에는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여기에서 “듣고 소동하여” ‘듣다’의 원어의 의미는 디알렉토스, 들려 오는데로 들었다 하는 의미 입니다. 즉 혀에서 글랏사로 말한 방언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하여 듣는이의 귀에 각각 다른 언어 디알렉토스로 들렸다는 의미 입니다.

글롯사와 디알렉토스를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글롯사)
1. 방언을 본토 말로 할 수 있습니다.
2. 방언을 외국어 말로 할 수 있습니다.
3. 방언을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던 하늘 언어(영언)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디알렉스토)
A. 혀에서 방언을 말하는 대로 들렸다.
B.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로 다른 언어, 또는 하늘 언어로 들렸다

다음과 같은 6가지 형태로 방언으로 말하고 들릴 수가 있다

1A: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본국어로 들렸다
1B: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2A: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외국어로 들렸다.
2B: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3A: 영언 방언을 말 한대로 영언으로 들렸다.
3B: 영언 방언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본국어로 들렸다.

120문도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외국어와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자 오순절 날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하여 모여 온 디아스포라와 현장에 있던 본토인들에게 각각 자기언어로 기도소리를 듣게 됩니다.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던 현장에는 다른 나라에 이민 가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들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번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 와 얼굴을 보이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나라에서 올라 온 사람들을 나라별로 세어보니 대략 17개국의 사람들과 본토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17개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들에게 각각 자기나라 말로 방언이 들렸다.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나라 외국어로 들렸으므로 오순절의 방언은 순전히 외국어 언어였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방언이 다만 외국어로 말하고 외국어로 들리는 각 나라의 방언이었다면 디알렉토스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습

 

체르노빌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Pittsburgh. PA.
러시안 교회의 Victor 목사님의 고국 Belarus 공화국은

우크라이나에서 터진 원자로의 방사능이 바람을 타고 날라와
떨어짐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였답니다.


그런데 구 쏘련의 중심인 러시안들의 대책이라는 것은 고작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나는 물도 마시지 말고,

채소도, 곡물도, 육류와 심지어는 milk와 계란도
모두 위험하다는 경고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이주할 곳을 마련해 준 것도
혹은 안전한 음식과 물을 가져다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죽거나 아니면
방사능에 오염된 줄 알면서도 그것을 먹거나 하는

선택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공산당의 악랄함과 또한 러시안 들의 속국인 벨라루즈인들을
깔보는 마음이 합작으로 저지른 악행이었죠.

아마 그들은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를 관찰하는 실험 대상으로 이 연약한

백성들을 택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당시에 그러한 물과 음식을 먹고 마신 사람들의
대부분은 짧게는 몇 주안에 길게는 수년내로 거의

죽었고 아니면 끔찍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그 곳에서 이미 예수를 믿던 지하교인들도 믿지 않는 자들과
똑 같은 형편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당시 철저한 보안으로 가려져 있어서 서방세계의 기독교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지요. 인간의 도움은 말입니다 …


한데 이들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붙잡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디모데전서 4장3절-5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아멘! 할렐루야!


참으로 이 말씀을 그들은 믿었고 또 이 말씀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이 참됨을 증명하였고
과연 믿는 자들을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과 물에서도
지켜주며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Victor 목사님께서 간증하시기를
자기가 아는 믿는 자들 중에는 한 사람도 죽거나
기형이 된 사람이 없다고 말이죠.


하나님의 자신의 친 백성을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과,
그의 약속을 단순히 믿고 따른 성도의 믿음과 말씀이

스스로 증거하신 그대로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짐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통쾌한

승리의 역사입니다.


 할렐루야!


http://www.systemclub.co.kr/bbs/board.php?bo_table=17&wr_id=3987

윗글은 본인이 "작성자 여이 11-11-02 03:23 조회4,332회 댓글3건"으로 systemclub에 올렸던 글입니다

 

--------------

 

여러분 이런일
도 있어요 !!!
우리 안에
주님만(성령)
계시면 우환
폐렴 바이러스
도 없어집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중국인과 상담한 변호사와 학생도 확진을 받았는데도 숨기고있네요.
중국갔다가 돌아온 코로나 걸린 초등생하고 놀다가 👬

권찰님 딸이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진찰 받아보니 코로나 양성이 나 왔습니다.

 보건당국이 

같이 놀던 아이들도 검사해보니 
양성으로 나왔습니다.

온가족이 놀라워 했습니다.
지난4일 수요예배시간에 기도로 하나님 혜숙이를 살려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목요일 오전에 다시 검사해보니 코로나 양성이 없어 졌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혜숙이만 고침 받고 다른 아이들은 고침받지 못했습니다.

다른학생들 기도를 못했더니 혜숙이만 치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회개하고 다시 다른아이들도 살려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 목요일 오전에 병원 간호사님이 검사해보니 혜숙이 친구 두명도 양성이 없어져서 간호사는 놀라워 했습니다.
이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박길수목사배상
https://m.youtube.com/watch?v=pj7bmG5aS1I

 

(마태복음22:2-10) 본문과 함께 “천국은 마치”라는 제목으로 허락하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천국은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비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의 천국 비유로 오늘의 본문 이외의 다른 천국 비유 말씀 중에서 선택된 마태복음13장 3-9 의 씨앗 뿌리는 비유입니다.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태복음22:2-10) 본문과 함께 “천국은 마치”라는 제목으로 허락하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천국은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비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의 천국 비유로 오늘의 본문 이외의 다른 천국 비유 말씀 중에서 선택된 마태복음13장 3-9 의 씨앗 뿌리는 비유입니다.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한다”는 무슨 말씀입니까?

돌이켜 보면 신앙생활은 꾸준히 잘한다는 교인들 중에도 특히 부흥회나 특별 집회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혹 집회 같은 장소에서 병 고침을 받거나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 무슨 올가미를 당하며 그야말로 꼼짝 못 하도록 더 구속당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더 많이 구속을 당하게 되며 크신 은혜를 받게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강가에서 마음 놓고 헤엄을 칠 수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야말로 찰랑대는 물가에 발을 들여 놓치도 못하는 그런 교인들을 비유하시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24.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결실을 맺는다 하더라도 마음 밭의 상태에 따라 100배, 60배, 30배 역수로 열매로 맺을 수도 있다는 비유입니다.

 

축복의 최고 수가 100배 입니다.

창26:12절에서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역대상21:3에는 “요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도 100배의 영적인 열매로 비유하십니다. 가시떨기로 기운이 막히고, 새들에게 쪼아 먹히고, 돌밭에서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곧 말아버리니 그 씨가 무슨 열매를 맺겠습니까? 당연한 100배의 축복에서 60배로 30배로 줄어들며,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십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 4: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100배, 60배, 30배의 결실로 표현되어 있는데 비해 마가복음 30배 60배 혹 100배로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은 땅에서도 결실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경고의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옥토만이 결실할 수 있습니다. 돌발작 같은 마음 밭에서는 결실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마음이 옥토같은 사람만이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천국 비유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입니다(25-30)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 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첫째 비유에서는 씨가 뿌려지는 우리들의 마음 밭을 말씀하셨는데, 두번째의 비유에서는 뿌려진 씨앗에 관한 말씀입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가라지는 농사 지을 때 보리, 밀, 벼와 같은 곡식과 함께 자라는 것으로 열매를 맺을 때에나 구별되는 악한 것입니다. 가라지는 자랄 때에 곡식과 뿌리가 서로 엉켜 자라는 것으로 가라지를 뽑으려다 오히려 곡식까지 뽑게 됩니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분명 주인이 좋은 씨앗을 뿌렸는데 마음 밭이 악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단이와 벗하여 오히려 가라지를 내면 최후의 심판에서 가라지를 낸 돌밭짝이는 지옥에 갈 것이라는 비유입니다.

3. 세 번째 천국 비유는 겨자씨 비유입니다(31-32)

 

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심었습니다. 이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입니다. 이런 겨자씨가 싹이 나고 자라더니 어느 풀보다도 크고 후에는 큰 나무가 돼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가지에 깃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보니 겨자씨 꽃이 보입니다. 가을 철이면 그곳에서 선물로 겨자씨를 가지고 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며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이 적(작)은 자들아 하셨으니, 큰 믿음도 있는지요? 네! 큰 믿음이 있습니다.

 

마15:28에는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주십사 하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이방인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시며 매몰차게 거부하시는 예수님에게 “여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가나안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의 딸이 즉시 나음을 받게 됩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을 뿐만 아니라 어느 씨앗보다 단단합니다. 순도로 나타내면 100%의 순도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 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어떠한 믿음이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그대로 되겠습니까?

“네 믿음이 크도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주님으로부터 큰 믿음으로 인정받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아마도 소개되는 성경에 열거된 믿음에 해당될 것입니다.

 

거룩한 믿음, 거짓이 없는 믿음, 행하는 의로운 믿음,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 세상을 이기는 믿음, 의심하지 않는 믿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인내하는 믿음, 보배로운 믿음, 세상을 향하여 가난한 믿음, 구원받을 만한 믿음,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는 믿음, 여러 믿음 중에서도 “세상을 향하여 가난한 믿음”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습니다. 보잘 것 없고 가장 작고 연약한 자일 찌라도 이 가장 작은 씨앗에, 100%의 믿음이 들어가기만 하면 뽕나무의 뿌리를 뽑을만한 큰 믿음이 될 것이라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4. 네 번째 비유는 오늘의 본문인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마 22:2-10)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 종들이 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말씀 준비를 하며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얼마나 많은지 무려 49가지가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의 59가지 비유를 따로따로 들으면 알아들을 것도 같고 이해가 될 듯 안 될 듯합니다. 여럿 비유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여야 비유의 말씀이 풀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설교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쉽고 강한 인상을 주는 이야기를 통해 영적인 진리를 쉽게 설명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4번 째의 혼인 잔치의 비유는 다른 모든 비유에 비해 더 강하고 충격적입니다. 자신들을 향한 비유설교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들은 바리새인들이 적대감을 들어내며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잡을까 하여 서로 의논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천국을 임금의 아들을 위한 잔치로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은 잔치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기쁘고 웃음꽃이 피는 혼인잔치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한 임금이 아들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준비하고 하객을 초대했습니다. 미리 초청장을 보낸 사람들에게 결혼식 당일에 종들을 보내 참석해 줄 것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자기 생업을 핑계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또 몇몇은 왕의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왕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 살인한 자들을 죽이고 동네를 불살라 버립니다. 그리고 이왕 벌어진 혼인잔치에 자리를 채울 하객을 아무나 오라 불러들입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눌린 자, 괴롭고 슬픈 자, 삶에 지친 자들 모두 나의 아들 혼인잔치에 나아오라 하십니다.

 

이 혼인잔치 비유는 난해한 비유 가운데 속합니다. 그러나 사실 난해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 정말 보물과 같은 진리가 이 속에 담겨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하시는 대로 영적인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성경은 천국 안내서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천국에 대한 비유는 많은 데 천국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인 모습은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천국에 대한 모습은 겨우 한 장뿐입니다.요한 계시록 21장 꼭 한 장만 천국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어디인가에 같습니다. 꿈에서 어디를 갔습니다. 작은 방에 책상이 있고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그 방에는 창문이 하나 있는데 방 안에 앉아있는 사람이나 창문이나 벽이나 온통 색깔이 옅은 회색입니다. 그 사람 앞에서 무슨 순서를 기다리며 내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한없이 무언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너무 지루하기만 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여서 “예수님 천국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계속 기다립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다림이 너무 지루해서 자다가 꿈에서 깨어납니다.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에서 어디를 갔습니다. 작은 방에 책상이 있고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그 방에는 창문이 하나 있는데 방 안에 앉아있는 사람이나 창문이나 벽이나 온통 색깔이 옅은 회색입니다. 그 사람 앞에서 무슨 순서를 기다리며 내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한없이 무언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너무 지루하기만 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여서 “예수님 천국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계속 기다립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기다림이 너무 지루해서 잠에 빠집니다.

 

다음 날 일과를 모두 마치고 저녁에 리빙룸에서 저녁을 보내고 있는데 지난밤 꿈이 생각이 납니다. 여보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똑같은 꿈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꾸었지, 그런데 그 꿈에서 순서를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여서 예수님 “천국을 보여주세요” 그랬는데 글쎄 지금 보니 “예수님께서 천국을 보여주시지 아니하셨네” 그렇게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내자 집사님 왈! 당신은 좋겠어요! 예수님이 그러한 꿈을 다 보여 주시고요.

혹시 오늘 밤에 천국을 보여 주실 지도 모르니 나는 일찍 들어가 자렵니다. 하면서 혼자 안방에 들어가 잠을 청합니다.

 

다음 날 shop에 출근을 하여 평상대로 QT 시간을 같습니다. QT 시간이 끝날 때쯤 갑자기 그 꿈 생각이 납니다. 아니 지난밤에 예수님께서 천국을 보여주시지 아니하셨네, 덜컥! 처음으로 느껴보는 섭섭함에 빠져 듭니다. 주를 향한 영적 섭섭함에 빠져서 얼마를 눈을 감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섭섭한 상태에서 눈을 번쩍하고 뜨는데, 갑자기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천국이 눈에 확 들어오며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천국에 가지 않고 천국을 맛 본 저의 영적 체험입니다.

 

직장인 저의 Shop에 출근하면 의례히 QT를 하며 성경을 읽으며 일을 시작합니다. 바로 어제 읽은 성경 말씀이 요한계시록 4장의 내용이었습니다. 처음 성경을 읽을 때에는 통독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빨리 읽는데 집중합니다. 처음에 성경을 속독으로 빨리 읽고 나면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고 마음이 갈급해지기만 합니다. 그래서 횟수가 나가면서 통독 대신 정독을 하면서 말씀을 읽습니다. 성경 읽기를 정독하며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나 형상이나 읽는 내용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숫자를 적어 넣고 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영적 섭섭함에 깊이 빠져 있다가 감았던 눈을 번쩍 뜨는데 어제 QT 시간 공책에 그렸던 요한 계시록 4장의 그림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 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요한 계시록 21장이 천국의 모습이면, 요한 계시록 4-5장은 천국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함께 하나님께 영원토록 드릴 영적 예배의 실제의 모습입니다.

 

한영 찬송가 365 장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예수님의 비유에서의 천국은 인류를 모두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인류를 향한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의 비밀한 천국 비유의 말씀은 본문의 10절 이후에 11절로 14절 로 비유가 계속됩니다.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때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비유에서 특히 14절은 그 때나 지금이나 듣는 사람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설교입니다.

 

초대된 혼인 잔치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 대한 비유는 성경에서 마태복음 22장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추지 않고 참석했다면 그 어리석은 자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 수족이 결박되어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져 짐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마땅합니다. 바깥 세상은 어둡고 캄캄한 영원한 저주의 세상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서 제외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의 비유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잔치에 초대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당연한 예복이 문제였다면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 된 신부의 결혼 예복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정작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 갖추어야 할 비유의 말씀은 성경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리워져 있는 천국 비유 말씀 중에서도 정말로 가리워져 있는 비밀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교회와 구원받은 성도들을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細麻布, linen)는 아마 섬유로 짠 천을 말하는데 구약에서 대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이 입는 의복을 만드는 주요 재료였습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구원받은 자들이 깨끗이 빨아야 할 세마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어린 양의 보혈의 피로 구속을 받은 어린 양의 장래 신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의의 옷을 입혀 주시는데, 그 의미는 우리가 여전히 용서는 받은 죄인이로되 예수의 의의 옷으로 덧입혀 주셨기에 더 이상 죄가 없다 인정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교회 형제들과 격렬한 토론을 벌일 때는 예수의 의의 옷으로 죄를 가려 주심을 저는 “깍꿍 구원”이라 표현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까지만 구원받은 자로 인정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의 공로로 덧입혀 주신 의의 옷이 세마포로 불리는 영적 의미입니다. 성도가 세마포를 점이나 흠이나, 꾸김살이나 더러움이 없이 혼인에 입고 나아 갈 정결한 예복을 스스로 깨끗하게 빨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어린양의 신부가 신랑 예수님과의 구원의 사랑을 지키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복음의 중심에서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이 믿음의 절개를 지켜야 함이 신부된 우리의 의무와 약속입니다. 성도들이 지키고 갖추어야 할 주를 향한 믿음을 절개와 정절로 표현되어 성경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마가복음8:38)의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를 공동번역에는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로 번역되었습니다.

 

또한 여자의 정절이 성경의 두 군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와 요한 계시록입니다.

디모데 전서의 정절은 성도들의 단정함과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정숙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죄많은 세대에서 성도가 지켜야 할 Dress Code가 이 말씀에 속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9절-10절)

9절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절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디모데전서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들이 믿음 생활을 정절로서 지키기를 여인의 해산에 비유하셨습니다

주님이 신부 되는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세마포는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정절, 즉 성도들의 구원하신 예수님을 향한 변개치 아니하는 신앙의 절개를 의미합니다.

 

(요한 계시록 14:4-5)

4절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       한 자들이니

5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시편 73:27편)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절_새번역)을 버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 계시록에서 주를 향한 성도가 지켜야 할 정절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22장:11절-14절에서 혼인 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향한 비유를 직접 신부에게 비유로 대입하여 혼인 당사자인 신부가 혼인식장에 더러운 예복을 입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부가 마땅하게 지켜야 할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아니하고 세마포를 더렵혔다면, 신랑이신 예수님을 향한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아니하며 다른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세마포를 더럽혔다면,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엄위하심 앞에 영혼이라도 녹아내리지 아니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천국의 비유는 비밀입니다. 그 많은 비유들 중에서도 특별히 숨기워지고 가리어져 있는 당사자인 신부가 혼인 잔치에 입어야 할 세마포의 숨겨진 비밀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를 살펴보며 성경에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 숨겨져 있던 우리가 혼인 잔치에 입어야 할 세마포에 관한 비밀한 비유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2019. 9월 22일

아래의 글은 2014-07-21 부터 2017-10-09까지 "뉴스M 자유토론장"에서 진행되었던 진리님과 어부님간에 나누었던 방언토론 내용으로 방언(성령세례)에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계에 유익이 될 것으로 믿으며 토론 내용을 공개 합니다. 

토론이 페이지의 맨 아래쪽 부터 날짜별로 진행되며 윗쪽으로 올라왔으며, 토론의 내용이 상대방의 일방적인 삭제로 인하여 매끄럽지 않게 진행 되었음을 미리 알립니다.

출처: http://www.newsm.com/bbs/view.html?idxno=5431

 

어부 2017-10-09 12:41:22

방언에는 골방이나 또는 공개적인 새벽기도 장소에서 각자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기도하는 개인방언이 있습니다. 또한 14장에 나타나는 공적인 예배 중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교회에 예언적인 방언을 말하는 공중방언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성령의 거룩하신 방언의 사역을 이러구 저러구 거짓 증언하는 죄악을 범하지 않으시기를 아무나 설교하는 교회도 아닌 단체의 신성남님에게 권면 드립니다.

지상에 몇천, 몇만?가지, 자기 언어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언어가 많이 있듯이 영계에는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영언(방언)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언어가 무수히 많이 있답니다. 방언의 은사에는 영계의 헤아릴 수 없는 언어들과 수많은 지상의 언어 모두가 사용되어 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지상의 언어는 모두 쏼라 쏼라 영계의 언어는 따락 따락 랄랄라로 들릴 수가 있지요. 하나님과의 비밀한 개인 방언기도를 알아듣는다는 전혀 성격적이지 않은 가짜 은사자들에게 현혹되지 않기를 권면 드립니다. 방언을 모르면 다만 모른다, 겸손해 지시기 바랍니다. 

대개의 성령세례 초년생의 방언으로는 개인적으로 베비 방언으로 부르는 랄랄라 방언이 주를 이룹니다. 갓난아기들이 입을 떼고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떼 떼 떼 하듯이 방언 초년생들에게 나타나는 방언의 은사가 랄랄라 방언이지요. 저의 경우에 초창기부터 베비방언을 사용하여 기도를 해 왔는데 10년쯤 되니 순전한 언어방언으로 바꿔 주셨지요. 유창한 언어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로는 랄랄라 흉내도 낼 수가 없더군요^^

개인방언은 보좌에 좌정하여 계신 하나님과 직통으로 교통하는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기도요, 귀신이라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비밀한 기도입니다. 고전14장에 나타나는 공중방언은 반드시 예언의 은사자가 알아 듣고 교회에 예언을 선포하는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가 함께 나타날 때에 교회가 진리의 영이시요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뜻이 선포되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이시여 걱정할 일이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에는 보혜사 성령께서 공중방언의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신 일이 없습니다. 공중방언의 역사는 오순절 교단인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만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공중방언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아니하는 한국교단의 중생한 자들이 염려할 일이 전혀 못됩니다.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은사중단론자에게 공중방언의 역사? 전혀 나타날 일이 없으므로 왈가불가 할 일도 되지 못합니다.

공중방언과 예언의 역사가 나타나는 예배 현장에서 예언이 끝난 후에 회중 각자가 개인방언으로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공중방언과 개인방언이 동시에 일어나는 예배상황입니다.


어부 2016-10-21 17:31:53

영성(Spirituality,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가?

영성: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또는 정신적 경향, ‘영혼의 품질’, ‘영혼의 성향’ 혹은 ‘영적 센스’라고도 한다.

영성이라는 단어에 속한 “영”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퓨뉴마( Pneuma)이다, 그 의미는 창1-2장에 나타나는 "숨 • 호흡"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기 즉 호흡을 받고 생령이 된 인간은 호흡이 끊어지면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온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생기, 호흡, 생령”이라는 단어는 모두 “영”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중국 여행사 Guide인 어느 조선족 자매의 간증입니다. 남한에서 여행 온 목사라고 하는 group을 안내하는데 그들로 부터는 무시 당하거나 불손한 일이 전혀 없이 예절이 바르고 다른 남한에서 온 여행객들과는 다르더랍니다. 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틀리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던 중에 우리 교회의 선교팀을 만나게 되고 기독교 인에 대하여 자세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만나서 참으로 기쁘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같고 있는 영성으로 공산당원의 마음을 녹이는 힘, 바로 우리가 같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성 입니다. 

90년대초 부터 인터넷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영성이란 단어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2000년도에 [생명의 삶과 소금과 빛]이라는 온누리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앙잡지에 영성이란 무엇인가? 로 소개되면서 기독교계에 영성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성향 또는 정신적 경향을 의미하는 단어로 한마디로 이것이다. 신앙인들이 한마디로 딱 짤라 말할 수 없는 단어가 영성이란 단어이다. 영성이란 단어와 함께 신령이라는 단어를 제시합니다. 신령이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영적인 것” 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것이 구원받은 성도를 통해서 표면으로 나타날 때에 성도의 믿음과 영적인 성품에 따라, 또는 어떠한 교리의 가르침을 받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른 영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칼빈이냐 장로교회냐 성결교 감리교이냐 오순절이냐 하나님의 성회이냐에 따라 영성의 차이가 천차만별로 나타날 수가 있다. 같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한 몸에 붙어있는 한 영성임에도 기존세대들 하고 청년세대의 영성이 또 다릅니다. 또한 영성을 다른 말로 믿음의 색깔(Taste)로도 표현합니다. 믿음의 열심으로는 따라올 자들이 없는 은사가 넘치고 성령충만한 오순절파의 영성에도 각자에게 있는 개성에 따라 믿음의 색깔이 조금씩 다른 모습 입니다.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온 영과 혼과 몸의 상태가 주 앞에서 어떠하느냐에 따라 영성이 다르게 나타난다 볼 수가 있다.

성경적인 영성(靈性,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은 원래부터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적인 목마름과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셨기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인다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성경적인 영성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본래에 넣어주신 영의 성질" 입니다.


어부) 2016-08-17 06:22:50

제13장 동성연애

남자이건여자이건 간에 동성연애 행위는 국가적인 도덕기준의 심각한 침식을 반영하는 영역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전례없는 대담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탈선에 연루된 것을 부인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제는 이러한 사람들의 옹호자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크리스찬들이 깊이 관심을 가지는 한 가지 이유는 동성연애를 국가적으로 용인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국가의 영적 상태의 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표류하였을 때, 그 민족은 남색(sodomy)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악을 용납하였다.(왕상14:2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동성연애는 용인되지 아니하였다.(왕상15:12)

하나님의 성회는 모든 믿음과 행위는 성서에 근거하여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은 동성연애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권위있는 법에 의하여 그 입장이 확립되도록 고려해야 한다.

동성연애는 죄이다.

때때로 인간적인 이유는 동성연애를 심리학적인 문제이거나, 육체적인 상태 혹은 생활방식의 신중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죄라고 한다.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관심은 소수 그룹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다.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한다.


1. 동성연애는 하나님이 태초에 제정하신 성의 원리에 반대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1:27)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창2:18)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남자에게 적합한 배필을 창조하셨다.(창2:18) 남자의 외로움은 다른 남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되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여자를 그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음 “이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라고 하였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성의원리를 제정하셨는데 이 원리에 의하여 인간이 번식하게 되었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관계는 건전하였다. 육체적으로 이 관계는 자연스러웠다. 사회학적으로 이상적인 가정 단위를 세웠다. 성경적인 개념은 인간의 성이란 이성적으로 일부일처적 관계가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성연애를 택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그들의 탈선한 성행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특성에 대한 죄를 유발하는 것이다.(롬1:27) 그리고 그들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
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사회적 단위를 구성하는 것이다.(창2:24) 바리새인들과의 토론에서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원리를 반복하셨다(마19:4-9) 그는 이성 간에 결혼을 제외한 유일한 생활방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생활임을 지적하셨다.


2. 동성연애는 성경이 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독특한 의미로 이스라엘을 그의 나라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이상의 일을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행동을 안내하며 지시하는 한 율법을 주셨다. 도덕에
관계되는 율법 가운데 동성연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있다.


레18:22에서 하나님은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 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레20:13에서는 이것을 위반한 사람에 대한 가혹한 형벌을 명령함으로써 이 하나님의 명령을 보강하고 있다. 즉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금지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롬1:21-27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창조주보다 창조물을 섬기며 경배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따라오는 결과들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기들의 몸을 부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성을 순리대로 쓸 것은 바꾸어 역리로 썼다. 그들은 불의, 음행, 악의, 탐욕, 악독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부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은 자요, 무자비한 자였다.


바울의 시대에 고린도는 부도덕으로 유명하였다. 이 도시는 상업 뿐만 아니라. 악폐와 부도덕의 중심지였다. 교회가 이 도시에 세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부도덕을 어떻게 보시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그 기록은 매우 뚜렷하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계속하기를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고 하였다. 바레트(C. K. Barrett)는 그의 주석 “고린도전서”(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탐색은 미동을 상대로 하는 남색을 의미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탐색과 남색은 남자 동성애 관계에서 하나는 소극적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상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기록하기를 법은 “불법한 자와 순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였다.(딤전1:9,10) 이 사람들은 의롭다고 묘사되는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경건치 않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3.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이다.


고대 소돔이라는 도시는 동성연애에 대한 동이어가 되었다.(영어로 sodom 사람은 남자 동서연애자를 의미한다:역자주) 다른 악한 것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동안 동성연애도 현저하게 되었다. 소돔의 동성연애자들은 매우 타락하여 자기들의 동네에 찾아온 손님들을 욕보이려고 위협하였다. 역사적인 기록은 그들이 난폭해져서 롯이 손님들을 맞아들인 그 집의 문을 부수려고 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의 간섭으로 롯과 그의 가족은 악한 의도에서 건짐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너무 타락하여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창19:4-11,24,25) 이 도시들에 대한 심판의 가혹한 정도는 너무 강렬하여 베드로와(벧후2:6) 유다(유7)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데 사용하였다.


동성연애자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


성경이 동성연애는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또한 동성연애자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동성연애는 도덕적인 문제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인을 도우실 수 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
이 없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는 이전의 동성연애자들이 있었다. 고전6: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는 자 중에 동성연애자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11절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과거시제이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죄로부터 구원받았다.


성경은 속죄의 효력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제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거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죄의 자국은 없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요1:29)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 ”(고후5:21)고 기록했다. 요한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일1:9)고 기록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본질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후5:17)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죄의 심판과 권세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 동성연애자들도 다른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는 회개와 믿음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예수를 주시요, 구세주로서 영접해야만 한다. 이러한 회심의 개념들은 순서적이기보다는 동시적이요(회개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믿음이 오는 순서적인 것 보다는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있을 때 회심의 역사가 있다는 의미이다.:역자주),이 둘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한다. 예수는 그의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었던 교훈 속에서 회개와 죄사함이 반드시 전파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눅24:47)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시점에서 마음이 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에 반하는 다른 자세들과 행위들도 포함된다.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구원을 소원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행16:30,31) 곧 그가 죄의 심판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회개와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믿음도 구원의 조건이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크리스찬의 자세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습관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해 크리스찬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죄들은 타락한 자와 초신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다른 죄보다 더 책망 받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자들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자세를 갖도록 확인해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용인하게 하는 감상주의적인 경솔함을 피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간과해서도 안된다. 증언을 위한 기회가 전개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정직하게 원하는 사람들과 하나의 또 다른 생활방식으로서 동성연애에 대한 동정심을 구하는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5절에 언급된 부도덕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6)라고 성경은 신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계속해서 성경은 신자들이 열매없는 어두움의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엡5:11) 하나님께서 정죄하는 것을 교회가 너그럽게 봐줄 수 없다. 만일 동성연애자들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영역 밖에 놓아 둘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교회의 교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연애 도착증에 빠진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기는 구한다면 크리스찬은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널리 뿌려진 것처럼 이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처럼 신자들도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을 사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은 동성연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행하는 길이 죄의 길임을 깨닫도록 돕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신실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누리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풍성한 생명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축복을 원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럴때 그들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을 아는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약5:20)


어부 2016-07-25 07:47:57

간증이란?

간증은 하나님께로 향한 당신의 순례 기록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효과적인 도구의 하나이다.

간증이 효과적인 증거가 되는 이유
첫째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바를 듣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둘째는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박할 수 없으며, 
셋째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나눌 수 있고, 
넷째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다섯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게 할 수 있다.

효과적인 간증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민감한 부분에 대해 먼저 파악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삶 가운데서 건드리거나 자극을 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영역이나 필요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간증을 나눌 때 자신의 민감한 부분을 중심으로 간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서 사람들은 당신을 진실하며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되어 자신의 민감한 부분도 당신에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부분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에 대해 나누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 믿게 된 경위, 믿음 후의 삶의 변화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에서는 자신을 청중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민감한 부분을 드러냈고, 믿게 된 경위에서는 왜 제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끝으로 믿음 후의 삶의 변화에서는 자신의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간증을 나눌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첫째, 자신의 지난날을 다 이야기하지는 말 것(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 것)
둘째, 바울의 간증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민감한 부분을 상세히 설명할 것, 
넷째, 복음을 명확하게 소개할 것, 
다섯째, 민감한 부분의 해결책을 설명할 것, 
여섯째, 신중하게 나눌 것, 
일곱째, 1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되
설교를 하려 들거나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말 것, 
여덟째, 자신의 간증의 가치를 인식할 것(그리스도와 하신 사역을 높이고 있는가?)
아홉째, 사실을 말할 것, 
열번째,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준비 할 것 등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당신의 간증에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삶 가운데 있었던 민감한 부분을 사실적, 구체적, 그리고 개인적으로 간결하게 써야 한다. 믿게 된 경위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믿은 후 변화에서는 당신의 민감한 부분과 관련 지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설명하되, 설교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


어부 2016-06-25 12:28:36

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12:14, 벧전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3:16, 롬10:11-13, 벧후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3:28, 갈2:20-21, 엡2:8, 빌3:9, 히10:38, 벧전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3:5-8, 고전3:1-3, 히3:12-14, 12:1, 요일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17:12, 딤전4:1, 5:12,15, 히6:4-6, 10:26,27,38, 벧후2:20, 
요일5:16)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지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1:1,2)

이 진리를 또한 롬8:29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2.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10:38, 롬1:17, 갈3:11, 히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
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6:12,13, 8:13, 골3:1-5, 벧후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뿐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장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3.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 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 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8:1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5:9-11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는 위하여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 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
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10:21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
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어부 2016-06-14 07:31:55

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 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 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 때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이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 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행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 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 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으로 부터도 구원 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
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시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잠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학개1:14), 행17:16, 고전2:11 등. 그러나 학1:14, 행17:16에서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성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갈6장)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 눅4:33)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마4:24, 8:16, 9:32,33, 10:1, 막1:32, 3:15, 눅6:17,18, 9:1 등) 이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마8:28,32, 9;32, 12:22, 막5:15-18, 눅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골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엡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엡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롬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눅11:21,22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어갈 수 있다.(눅11:24-26, 마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쓴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행5:13,14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엡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 (고후10:3-6, 엡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마 4장)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약4:7,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엡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골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 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어부 2016-06-11 02:42:28

성령세례 간증

이민 와서 신앙생활 하며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의 은혜를 알게 된 이후 나의 행동반경은 교회, 가정, 직장 삼각지대를 벗어나 본일이 없습니다. 교회 중심적인 생활이지요. 당연히 수십년을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뒤로 잠그고 나오는 그러한 신앙생활로 모든 공예배와 부흥회, 특별집회의 현장에 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예배준비와 예배실 뒷정돈까지 제 담당 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세례 받고 기뻐 어쩔줄 몰라하는 여러 성도님들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1. 그 중에는 한국에서 갓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유학생활로 미국으로 와서 10년동안 공부하며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부부박사 학위에다, 아들 딸 낳고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 부부가 성령세례 받고 금의환향하는 복된 성도의 귀환을 여럿 보아 왔습니다. 성령세례 받고 기뻐서 얼굴에 홍조를 뛰며(신부의 얼굴에 연지 곤지 발라야만 있을법한 그런 홍조) 기뻐하는 모습, 자신이 처음 성령세례 받을 때의 담담하던 기쁨보다도 더한 기쁨으로 다가오곤 하던 기쁨,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런 기쁨 입니다. 

2. 친한 친구 사이인 두 자매가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고 성령세례에 대하여 공부한 이후, 첫 부흥회에서 입니다. 한 자매는 성령세례 받고, 다른 자매는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예배 후 성전에서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이를 아시게 된 목사님이 “모든 죄를 자복하라” 하며 안수를 합니다. 그 자매 “주님! 잘못 했습니다. 주님! 잘못 했습니다” 하며 째지는 듯한 절규의 자복이 있자, 그 자매의 입에서 따라락 하며 금속성 같은 소리로 방언이 터져 나올 때의 그 모습이 선합니다. 그 두 자매의 남편들은 한전에서 wasting house에 파견 나와있는 engineers 님들. 

나는 그 이후로 죄를 자복할 때 성령세례를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고, 집회 후에도 나타나는 성령님의 민감한 역사를 놓치지 않으려 끝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3. 하성의 어느 목사님은 목사가 된지 7년이 되기까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방언을 할줄 몰랐다고 합니다. 성령세례을 간절히 사모하며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서 별을 세며 기도를 해도 방언을 안 주시더랍니다. 오순절 교회의 목사이기에 얼마나 더 간절 했겠나 짐작이 가는 대목 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에 흑인아이 하나가 성전에서 슬피 울고 있더랍니다. 아이가 슬피 우는 것이 어찌나 불쌍한지 그 아이를 껴 앉고 같이 기도하는데, 그리도 간절히 사모하던 방언이 갑자기 터지게 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4.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해 성도들 섬기기를 즐겨 하는 여 집사님, 목사님과 면담을 하는데 목사님이 “집사님은 음식으로 섬기기를 좋아하는데 그 섬김이 주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지 않고 자신의 기쁨을 위해 하기 때문 입니다. ? 아니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할 수 일이라고는 음식 만드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기에 부엌에서 헌신하는데,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시고 야단만 치시다니,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해서 예배실에서 기도 합니다. 독이 올라 주님께 하소연하며 기도를 하는데, 하고자 하는 기도는 안 나오고 말이 꼬이며 바라지도 않던 방언, 성령세례를 받게 된 내자^^ 입니다.

5.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는 감사의 눈물로 밤낮을 지새는 집사님, 성찬예식에서 반주자의 때롱하고 시작하는 반주에 맞추어 성령님께서 눈물 button을 누르셨는지, 동시에 눈물이 펑 쏟아지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성찬위원으로 떡과 잔을 돌리던 집사, 그 후에 성령이란 단어에 눈을 뜨게 되고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가족수련회에서 “방언 받기 원하면 앞으로 나오라” 장로교회에서 오신 강사의 초청하는 소리에 일착으로 앞으로 나가 산 땅바닥에 무릎 끓고 기도를 한다. “성령님이 임하실텐데 모두들 죄를 회개하라” 고 외친다. 집사님 모든 죄를 자복하며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나는 잘못까지도 낱낱이 고백하며 회개 한다. 안수하며 “무엇을 원하느냐”는? 강사목사의 질문에.“방언을 원 합니다” 큰소리로 답하며, 할렐루야를 외친다, 계속되는 할렐루야가 이상한 소리로 꼬이며 이전에 알지 못하던 소리가 입술에서 나온다. 사모하던 방언, 성령세례의 순간이다. 그 도시 교계에 급뉴스, 여야(잠긴동산) 집사가 요~오~란하게도 성령세례를 받았다더라. 

여러 말로 방언 받은 예들을 열거함은, 은혜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에게, 주시고마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역사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여야 집사, 방언 허락하심을 감사함으로 새벽기도, 부흥회 때 열심으로 사용하던 중. 10여년 동안 사용하던 랄랄랄 방언, 한 순간 거두어 가시고 새로운 방언을 주셨는데, 순전한 각종 언어 방언 이다. 

금요예배에서, 당시 가장 사모하던 말씀이 본문으로 선포되는 순간, 내 심장은 쿵쾅되며 온 몸에 전율이 온다. 예배후에 기도 시간이다, 자신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이 무언가에 억제 당하여, 성령님께 붙잡힌 듯한 상태로 기도를 한다, 평소 같으면 기도한지 얼마 후 시간이 지나서 깊은 기도에 들어 갔을 때에야 나오던 방언이, 기도 시작과 동시에 컨트롤 할 수 없는 언어로 나온다, 마치 audio cassette tape이 뒤집혀서 꺼꾸로 돌아갈 때 들리는 소리와 동일하다. 이렇게 새로운 방언을 받게 되었다.


각종 방언 및 방언찬양이, 나의 영, 혼, 육의 상태, 기분에 따라 어떤 언어로 나올 줄을 모른다. 비록 피곤하더라도 입을 열어 성령님께 의탁하면 어느 때는 버벅대는 소리로 시작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아주 맑은 천상의 소리와도 같은 아름다운 찬양이 흘러 나온다. 제가 워낙 찬양 드리기를 좋아하거든요.. 

대학생인 한 형제는 “여야님은 크신 분이시다” 라고 감당 할수 없는 말로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다. 교회에서 “장로님은 교회의 고급인력 입니다” 하는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칭찬 같은 고무 되는 말이지만, 성도이면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좀더 누린다고 “크신 ? 분이시다” 한다면 그 말은 분명 불편한 말이다. 

요한복음21장25절 말씀을 빌려 저의 증언의 참됨을 구성 합니다.
이러한 일어난 일들을 증언하기 위하여 올리는 글이 참된 줄 알며,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나,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곳에 방언이란 무엇인가? 의 공간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기록된 댓글로 두기에 부족한 줄로 압니다.


어부 2016-05-31 17:19:40

제14장 교회의 휴거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은 “복스러운 소망”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변화할 것은 간절하고 복스러운 교회의 소망이다.” (살전4:16, 롬8:23, 딛2:13, 고전15:51,52) 

예수는 그가 다시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그가 다시 지상에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도록 주의 깊게 경고하였다.(마24:42-51, 25:1-13, 막13L37, 눅12:37) 그들은 현재의 시대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끝이 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마24:3) 그의 재림에 대한 확증은 그가 죽으시기 전에 그의 추종자들을 위로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요14:2,3)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하늘을 쳐다보는 무리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그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되풀이 하였다. 그들은 그가 가신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행1:11) 이것은 그의 재림이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서신서가 예수의 재림을 가르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며, 재림의 절박성은 이 주제를 다루는 모든 성경구절을 통하여 나타난다. 비록 초림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의 전체 대의는 재림이 경고 없이 갑자기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며, 신자는 끊임 없이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빌4:5, 히10:37, 약5:8,9, 계22:10)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러한 기대의 상태에서 살았다.(고정1:7, 살전1:9,10) 고전15:51과 살전4:17에서 바울이 “우리”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아 있으리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상으로부터 신자들의 휴거

재림에 관한 성경구절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것은 죄인들의 심판을 수반하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사건으로 말하며, 또 다른 경우는 재림이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며 지상으로부터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후자의 경우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휴거라고 불리운다. 이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는 없으나, 널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웹스터 사건”(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Unabridged)에서 휴거에 대한 정의를 “그리스도가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자들을 그들이 그 주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지구 위의 왕국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라고 내린다. “휴거된다.”는 단어는 살전4:17의 “끌어 올려”라는 표현대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오실 때에 한 장소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을 신자들이 지구에서 갑자기 없어지고, 불신자들은 남아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마24:26-42) 예수께서 그의 재림에 대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를 보고 통곡할 때라고 말씀하셨다.(마24:30) 사도바울은 주의 재림을 악인에 대한 심판과 진노의 때라고 말하였다.(살후1:7-10)

살전 4:13-18에서 바울은 재림의 다른 양상을 생각하였다. 이 간단한 구절은 신약에서 휴거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명백한 가르침이며 이것은 오직 살아있는 신자와 주 안에서 죽은 신자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다. 이때에 재림하는 그리스도를 보는 악한 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바울은 예수께서 공중에 오시는 것을 묘사했으나 슥14:4 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재림시에 그의 발이 땅에 닿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요일3:2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

살전4:17에서 사용된 “끌어올려”에 대한 헬라어는 행8:39에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세례를 준 후에 사용된 “이끌리어”라는 단어와 똑같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단어는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 것을 말하고 있는데 휴거시에 지구에서 신자들을 끌어올릴 능력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살후2:1에서 바울은 휴거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에 대한 헬라어는 히10;25에서 예배를 위한 크리스찬의 모임에 대하여 사용된 “모이기”와 똑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의 주변에 모이는 성도들에 대한 한폭의 그림이다.

경건한 사람들이 지구에서 초자연적으로 휴거되는 것은 성경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에녹의 생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지구에서 기적적으로 없어진 것이다.(창5:21-24) 히브리어 기자는 이 경험을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돌연히 없어진 것을 보여준다.(왕하2:1-13) 고전15:51은 살전4:14-18과 똑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은 휴거시에 살아있는 신자와 죽은 신자에게 일어날 변화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불렀으며(고전15:51), 전에는 숨겨졌으나 성령에 의해서 알려진 진리라고 하였다. 빌3:21에서 바울은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낮은 몸”이 변하게 되는 때와 연결 시키고 있는데 이것 역시 휴거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이다.

휴거에 관한 구절은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주님이 오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구절은 그의 성도와 함께 오시는 주님을 묘사하고 있다. 골3:4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와 함께 나타나는 신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유다서 14절 역시 그의 공적인 나타남과 관련된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을 행하시려고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재림하시는 것을 미리 보고 있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하여 오시는 것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은 그의 오심에 대한 두가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다. 이 두가지 상태 사이의 중간 시기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악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대환란 시기라고 가정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정확하다고 믿는다. (단12:1, 10-13, 마24:15-31, 살후2:1-12)

크리스찬과 대환란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께서 오시기 전에 심각한 환란을 견뎌야 하지만 교회는 대환란이라고 불리우는 시기 이전에 휴거될 것이다. 살후 2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대환란은 주의 날의 일부이다.) 시작되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가리키고 있다.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이라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바울의 시대부터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였으나 참된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는 영이 막고 있다. 오직 교회가 휴거에 의해서 지구에 없어질 때 이 사람은 공적으로 앞으로 나올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있는 휴거에 대한 구절에 이어서, 살전 5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에 대하여 경고하였다.(살전5:2,3) 그리고 그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있다.(살전5:4) 바울이 여전히 주의 날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살전5:9) 바울이 대환란을 포함하여 주의 날의 심판에서 신자들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찬은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신약성경은 여러차례 말한다. 그러나 대환란이나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비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그러한 일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신약에 충만하게들어있는 임박성에 대한 가르침(the teaching of imminence) 시대의 마지막 징조가 나타날 때 그들은 위를 보며, 대환란이 아니라 그들의 구속을 기대하면서 고개를 들어야 한다.(눅21:28)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징조들은 그가 공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이 휴거 이전에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건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임박성의 교리(the doctrine of imminence)와 조화되지 않는다.

교회가 대환란 전에 세상에서 들려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과도 부합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홍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소돔에서 롯을 구출할 때까지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성경의 무게는 환란 전 휴거를 지지하는 편에 실려 있다. 신약에서 재림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 곳마다 절박성이 강조된다. 휴거 이전에 다른 사건을 개입시키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에 위배된다.


크리스찬들이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는 동안 디도에서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1-14)


어부 2016-05-29 13:47:04

제16장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

본문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의 교리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총회의 입장을 나타낸다. 여기서 명백하게 선언되고, 성경적으로 유효한 중대한 진리에 대한 설명이 오순절 운동에 의미 있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설립 당시부터 성령세례를 중생의 체험 후에 일어나며 중생과는 다른 경험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또한 성령세례의 초기의 외적 증거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임을 인정해 왔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제 8항)은 그 헌법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포함하고 있다.

신자의 성령세례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초기의 외적인 표적에 의해서 증거된다.(행2:4) 이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방언의 은사와 같지만(고전12:4-10,28)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 성명은 1916년 채택된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시간과 경과와 함께 각 세대의 평가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이것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입장임을 보아 왔다. 다음과 같은 용어의 정의와 성경의 고찰은 우리가 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라고 믿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용어설명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에 대한 교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표현이 사용될 것이다.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하였다. 그의 지상사역을 마치실 때 예수께서 요한의 말을 언급하셨다.(행1:5)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였다. (행11:16)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며, 중생과는 구별된다. 성경은 성령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과(고전12:13),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을(마3:11)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같은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집행자와 수세자가 세례로 들어가는 요소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독특성은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다.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가 한 예이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 밖에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 후에(행19:3), 바울은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물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바울이 그들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다.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 사이의 시간 경과는 짧은 것이었으나 그들이 물로 세례를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성령세례는 구원 후에 일어나며 구원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령세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신자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신자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위기경험(crisis experience)이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라는 표현은 성령이 채우는 능력으로 임하는 최초의 외적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한 결과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행10:44-48)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그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했을 때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났던 증거를 말하였다. 그는 왜 이방인 신자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주선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것을 말하였다.(행11:15-17)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최초의 증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과거 경험의 증거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을 가질 때와 방언 통역을 동반한 회중의 모임에서 계속적으로 풍성함을 더해준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못한 언어로 말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데 사람이나 천사의 실질적인 언어이다.(고전13:1) 이 단어를 생각하거나 도취도니 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방언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빈센트(M.R. Vincent)가 관찰한 바와 같이 “특별한 단어이며 기적적인 충격 아래서 명백하고 큰 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스트롱(James Strong)은 이 단어가 단순히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능력은 감정이 올라간 상태나 단어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흉내낸 결과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성령이 주시려는 발성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신자는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자극을 주는 능력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며, 성령이 발성을 주시는 대로 말해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기교도 성서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방언을 최초의 외적 증거로 믿는 이유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경우가 다섯 차례 기록되었다. 이중 세 경우는 상세히 다루고 있으나 다른 두 경우는 상세히 기술되지 않았다.

상세히 다룬 경우를 보면 바람의 소리나 불의 혀 같은 것이나 예언 혹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묘사된 각각의 경우에 모두 나타나는 유일한 현상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의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성경적인 경험이 묘사될 때마다 이 경험과 현상과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람의 소리와 불의 혀가 선행되고 그리고 제자들의 경험이 나타났던 것을 또한 유의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의 성령이 부어주신 사건 후에도 반복되었다고 가리킬만한 것은 없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직접적인 결과였고 오순절날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타났다.

상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은 두 경우의 상황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의 경험에 동반된 것 같이 보인다. 사마리아의 마술사였던 시몬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행8:18,19) 만일 그 경험이 동반하는 표적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되었다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된 세 경우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시몬이 보고 들은 것은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논리성이 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 사울이 그의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함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주께서 보내셨다.(행9:17) 시력이 회복된 것은 묘사되고 있지만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9장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러나 고전14:18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언젠가 방언을 시작했을 것이므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상세히 다룬 그 사건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과 동반할 뿐 아니라,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인정하였다. 베드로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도 고넬료의 집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연유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행10:45,46) 이 증거를 근거로 베드로는 편견을 버리고 이 회심자들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증거였다.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및 형제들과 토론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그가 본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행11:17)고 하였다. 사도들과 형제들이 방언을 성령세례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인 것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1:18)고 하였다.

고려할 질문들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에 관하여 여러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음은 그 중에 자주 제기되는 것들이다.

1. 사도행전은 역사를 위한 책인가 아니면 신학을 위한 책인가? 그리고 교리가 선언적인 서술 이하의 것을 근거로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성경 자체가 대답하고 있다. 성경은 바울로 하여금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된 것으로 교훈(교리)...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기록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라고 하였다.
교리는 성경에서 고립된 몇 구절을 근거로 하면 안된다. 오히려 내용이 풍부하게 함축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언적인 서울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비교한 것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같이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는 이 주제에 관계되는 풍부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다.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방언을 성령 충만함 받은 증거로 인정하였을 때 이 모형을 근거로 교리화한 것은 명확한 것이다.(행10,11장) 양적으로나 횟수에 있어서 이 주제의 무게는 교리화를 위한 견고한 근거를 제공한다.

2.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시대에만 속한 형상인가?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는가(고전13:8)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사도시대나 혹은 신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라는 암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또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암시하였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그는 또한 방언이 그칠 때 지식과 예언 같은 것들도 동시에 현저하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새 방언으로 말하며”(막16:17)가 그대로 적용된다.

3. 바울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고 했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의문(rhetorical question)이 아닌가?
바울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방언 말하는 것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최초의 증거 역할을 한다. 
(행10:46, 11:15) 사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14:2,4) 회중안에서 방언통역과 함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위함이다.(고전14:5)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과(고전14:5)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질문한 수사의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성령세례 받을 때 모든 신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개인 기도시에 혹은 자기의 덕을 위하여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께서 회중 안에서 방언과 통역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는 아니다. 회중 안에서 성령은 그 뜻대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다.(고전12:11) 이러한 바울의 서술은 서로 모순된다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4. 만일 증거 혹은 은사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왜 교회사에서 이러한 현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는가?
어떤 성경적인 교리가 태만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사실 위대한 영적 개혁은 자주 교리의 부흥이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는 마틴 루터와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강조할 때까지 거의 완전히 잊혀졌었다. 성화의 교리는 다시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는 웨슬리 부흥운동 때까지 무시를 당해왔다.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한 진리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20번 이상의 부흥기에 나타났었으나, 최근의 부흥운동 안에서처럼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교리의 부흥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초기 사역시의 그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모든 신자들을 위한 지침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살전5:21) 시험의 근거는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행17:11)

5.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교리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성령세례를 추구하기보다 방언을 추구할 위험성이 있는가?
불행히도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리의 남용이 교리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남용과 가짜는 교리를 논박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순수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방언이 성령세례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기를 힘쓰는 것이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방언은 자연스럽게 이 경험에 수반된다.

6. 만일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면 영적 교만의 유혹은 없겠는가?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령세례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 대신에 겸손을 낳게 할 것이다. 신자들은 인격적 고귀함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봉사와 보다 의미있는 사람을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자신의 공로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얻거나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7. 방언으로 말은 못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은 어떤가?
방언을 못하는 헌신된 신자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이런 신자들 중에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가장 헌신된 신자의 경험에 근거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회중 안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개인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말할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성질의 재능과 다양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무엇을 완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공급을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더 많이 성취했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성경은 신자들이 인간 비교에 근거하여 크리스찬의 경험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백히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여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하고 기록하였다. 교리는 항상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결론

요약하면 성경의 기록은 성령세례에 관하여 상세히 다룰 때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언급되는 유일한 현상임을 말한다.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수반되는 경험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도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성경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개인지도와 예배에 있어서 신자를 위한 특권이며 신자들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서 회중의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배제하고자하는 성경적인 제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이 적당히 질서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40)고 말씀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를 위한 특권이다. 바울이 “나는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전14:5)고 기록했을 때 그는 비성경적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부 2016-05-29 13:29:48

성령세례에 관한 포인트

1. 세례의 4가지 종류

1)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
2)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
3) 회개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에게 받으라 명령하신 물세례.
4) 이미 중생한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세례.

2. 물 세례는 명령인데에 반해서 성령세례는 약속이다.

1)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선물”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사모하고 구해야 할 것이다.
“약속”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그 약속을 믿어야 한다.
“얼마든지”라 함은 받는 자의 차별이 없고 제한도 없고 부족함이 없이 모든 구원받은 신자들을 향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2)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이루어 드리려고 애써 본 사람만이 구하게 되어있다. 성령세례를 구해야 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나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구해야 한다.

구약의 스룹바벨 처럼 하나님의 전을 세워 드리려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실패를 통하여 이 사실을 배우게 될 수밖에 없다.
슥4:6절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3) 성령을 구하는 자가 전심으로 구하며, 믿고 기다리되 의심하지 않고 약속을 붙잡고 받을 때까지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할 때보다 성령을 구할 때 기뻐하신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눅11:13)

4) 신자가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이면서 동시에 그 외에 모든 것까지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으면 그 분과 함께 권능이, 지혜가, 성결이, 담대함이, 또 사랑과 기쁨과 희락과 화평 등등의 수없이 많은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신자의 열매로써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그 열매가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하게 드려지는 것이다. (갈5:22/롬15:16-18)

3.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1) 세례는 항상 시작을 나타낸다.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따르며 사랑하고 충성하는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목적도 바로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선물로 구하여서 받는 것에서 그쳐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영어로는 “fill to overflowing”이란 말이다. 꽉 차고도 넘쳐서 흐르는 상태이다. 어느 신자의 삶에서나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다 같은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1. 성령께서 나를 인도(lead)하신다는 상태이고 2. 성령께서 나를 통치하고 주관(governing and ruling)하신다는 상태를 동시에 의미한다. 

3)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갈5:24)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상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 사실을 알며 동의하며 나아가 언젠가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

4) 충만이라는 말이 “fill”이라 할 때는 "내 자신을 채움"이라면 to overflowing이라고 할 때는 “다른 이에게 흘러가 생수가 됨”이란 뜻이다. 성령세례는 나를 세워주는 것인데, 성령충만은 남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타인을 세워주는 것이다(요7:38-39)

5) 물세례도 그 자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3:21에서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것이 매일매일 계속해서 일어나야 할 반복되며 또 앞으로 전진해야 할(process and progress) 영적 순례 여정의 첫걸음인 것을 분명히 한 것처럼, 성령세례도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였다.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단어는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즉 이것은 단회적 사건(성령세례는 한번 받는 것에 반해)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딛3:5절에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역시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NIV는 renewal이라 했는데 좋은 번역은 KJB처럼 renewing이라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과 일치함)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신자의 삶에서 그 능력과 역사가 계속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사모하며 늘 그렇게 되도록 자신의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리며 자기 자신은 오히려 부인함으로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성령충만의 삶이라는 것이다

 

어부 2016-05-29 13:28:23

요14장은 성령장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일이 일어 나리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먼저 약속 하셨고 먼저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실현되도록 하신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붙잡고 이해해야만 행2장의 역사가 일어나며 왜 그러한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된다. 

요14장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어라. 내가 떠나감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기 위하여 내가 가노라. 내가 성령을 보내줄 것을 너희는 믿으라. 성령을 오실 것을 약속 하셨다. 우리들은 성령이 오신 것을 알고 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받은 나와 성령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과 하나되어 연합 된다. 연합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되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과 하나되는 일치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 멀리 계신 것 같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됨이 14장의 말씀이시다

그 다음에 15장에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나를 떠나면 결국은 그 가지는 말라 비틀러지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지게 되며 결국에는 잘리어 불에 던져 지게 된다.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시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15장의 내용이다. 

14장의 말씀을 15장에 풀어 주시는 것이다. 14장과 15장을 이해하고 말씀이 풀려야 행2장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진정한 성령장은 요14장이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라(요15:7, 요14:14, 요1서3:22, 마21:22)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찿을 때니라(호10:12)
그때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나 구하라 그러나 계명을 지켜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이 쉬우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목숨을 내어놓고 라도 지키게 되느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말씀이 그 안에 성령이 그 안에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리라.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한 사람들이 성령님께 구해야 할 것은 거룩이다. 요15:2~ 3 거룩을 구하는 것이 먼저이다. 거룩과 풍성한 가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이다. 거룩해야 가지를 맺으며 거룩하고 더욱 풍성한 가지를 맺게 하기 위하여 더욱 깨끗게 하신다
이 비밀이 풀릴 때, 이때부터 신앙생활이 풀리게 된다. 거룩을 먼저 구하는 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신다. 내가 우리가 거룩하게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과실을 맺는 일이다

과실을 맺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깊은 거룩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거룩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거룩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 이미 충분히 거룩한 사람 이사야의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저서 그를 더욱 참 깊은 거룩으로 인도하십니다. (사6장) 이렇게 맺은 풍성함 열매가 주님께 기쁨이 된다. 이러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아가심이 놀랍고 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validated 으로 확인하며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온 인류를 향한 복이었다.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는 사건이 된다. 어떻게 할 때, 저와 우리의 성도의 삶에서 거룩한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어질 때에, 내가 구한 것 보다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되며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는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 때에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는 이들을 편애하시며 이러한 자들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요. 성령은 우리를 예수와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런 자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이 풀리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따르며 찬송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십니다. 은사를 더 하십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아 그래서 예수를 믿는구나! 그럴 때에 십자가의 사건이 validated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허락하십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을 구하면 거룩을 더해 주십니다 거룩을 구하면 은사가 더해집니다. 그러한 자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황당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께는 제물이 됩니다(롬15:16) 

나에게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라고 영혼구원에 쓰임 받으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예언의 능력을 주시고 병자를 낳게하는 능력을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게 하셨는데 처음에는 받은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다가 언제부터 나중에는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한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며 열매를 맺은 자에게 더욱 큰 열매를 맺게 하시며 더 거룩하게 하시며 그렇게 더 거룩하게 하신 자에게 더 큰 은사를 나타나게 하셔서 더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세례는 내 만족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로 인하여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과 은사와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세상의 기쁨이 아닌 내 안에서 완전하게 될 때까지 넘치고 넘치는 기쁨 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내 안에서 차고 넘쳐서 성령이 내 안에서 기뻐하심으로 우리의 기쁨이 더욱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영원한 기쁨으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어부 2015-09-14 14:38:39

진리님이여. 정이철 목사 논단, [방언(1) – “십자가 복음이 완성된 구원계시임을 증거했던 방언”에서“방언이 영의 세계의 관문이며 모든 은사의 기초라고 주장하는 방언파 은사주의자들까지도 성경의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였다는데? 그러한 말을 하는 소속교단이나 사람의 이름을 밝힐 수 있습니까?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진리님이여 ㅉ ㅉ 예수님의 이 세상 마지막 말씀이시며 최초의 방언 말씀인줄로 알고는 있으되 도대체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까? 이를 어쩔꼬! 진리님 그러하니 그대는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막16:17-18의 말씀은 복음의 불모지에 목숨을 걸고 나아가 전할 때에 인간이 예상치 못하는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을 보호하시며 표적과 이적을 나타내며,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게 하며, 독뱀이 물거나 잘못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안수한즉 나으리라.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방언이 지금의 방언이 아니라면 언제의 방언이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의 방언이 아니라면 주께서 말씀하신 복음을 전할 때에 나타날 표적과 이적, 귀신 쫓음,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않아야 할 때는 언제라는 것입니까? 그 때의 방언이 지금 나타나야 할 방언이 아니라면 당신이 하는 그 말은 예수님의 복음 그 자체가 가짜라는 말 입니까? 주를 시험 할 목적으로 시행하는 자들의 예를 들면서 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가짜로 만드는 그대 진리님이여! 그대로 간다면 당신은 열두 지옥, 무저갱에 영원히 빠져야 할 자임이 틀림이 없소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구요? 방언으로 유추할 수 있는 어떤 내용도 구약 성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진리(정이철)님 과연 그러한가 어디 봅시다. 

요엘서 2장에서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하심은, 그 때에 즉 마지막 때에 나의 성령을 구원받은 만민에게 은사의 기본인 방언의 은사를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 아닌지요!^^ 구약에서의 “내 신”이라 하심은 신약의 보혜사 성령이심을 굳이 부정을 하지는 않겠지요? 칼빈 신학에서는 신약의 보혜사 성령을 부정을 하니 당연히 꼬일대로 꼬인 영성으로 부정하고 보겠지요? 칼빈인 중에서도 그대 진리님은 지옥불 예약 1위 구룹으로 예정되어 있음을 알기나 하시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니 지옥불 구덩이 1순위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믿거나 말거나 구약에서의 “여호와의 신” 이시며, 삼위의 성령하나님이시되 신약에서는 인류의 대 구원의 사역을 일임 맡아 하나님의 성령, 진리의 성령, 진리이신 예수의 영, 보혜사로 오신 성령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대는 삼위 중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믿고 받아 들이되 성령 하나님은 부정함으로 결국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격이 됨으로 그대와 그대와 같은 일당들은 구원이 없는 것이요. 아무리 신학박사를 추구한들 그대에게 구원이 없는 줄로 아시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배척해도 되느니라 하신 말씀이 있는가 성경을 찾아 보시지요. “믿으라” 하시는 말씀은 삼위일체를 유일하신 하나님이 되도록 온전히 믿으라 하시는 말씀 입니다. 삼위일체 중에서 한 분이라도 부정하면 믿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만 그리스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이 이르리라 하신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성령세례 받은 성도가 구원을 성령으로 확증 받은 것이다” 즉 성령세례가 구원의 보증이다. 주장한 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성경 말씀이라는 말 입니다.

80년대 초, 한얼산 기도원장이었다는 그분을 초대하여 연합집회(1981 Colorado Springs, CO)를 주최하였던 주최측 목회자들이 그 강사를 사기꾼이라 하더이다. 그 사기꾼이라는 사람이 내리는 참 방언, 가짜 방언이라는 것을 신뢰하여 위대하신 정이철 님의 칼럼이라는 글에 인용을 합니까? ㅉ ㅉ

이 글을 읽으시는 “뉴스 M” 의 독자들은 이 글을 한 두번 읽고 판단하지 마시고 계속 연재되는 글에 관심을 가지시고 이곳 구석에 있는 자유게시판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정이철 류의 칼럼은 얼마든지, 누구든지, 성도라면, 당연히, 대적하여야 함이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이 됨을 믿기에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어부 2014-09-10 20:16:39

수신자: 진리 님과 만인 성도들에게 어눌한 글로나마 복음(All the Gospel, Whole Gospel)을 전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여 주신 “주께 영광을 올리며” “NEWS M” 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순절 신앙인 사도 바울”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교조주의, 극단 칼빈주의” 주제에 무엇인가는 할 수 있겠는지요” 비로소! 어부가 한 말이지만 “진리님의 주제” 참으로 명언 입니다요. 물론 저의 말에 동의하리라 믿지는 않습니다. ㅎ ㅎ 진리 님 :-)

진리 님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영언 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태생하게 된 시발점이 된 첫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이 주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120문도 모두에게 성령세례가 임하고 방언하는 사건이 신약 최초로 일어납니다. “오순절 날이 임하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불이 혀 같이 갈라지게 보이며 각각 120문도 위에 임하였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저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으되 성령의 임하시는 불의 모습은 혀같이 갈라지며 각각의 사람 위에 일대 일로 임하였다. 구원이 일대 일이듯이, 성령세례도 일대 일 입니다.

방언소리가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각 유대인들이 우거하던 외국 지방의 말(디알렉스토)로 각 사람들에게 들리기도 하였다. 방언이 영언이기에 사람의 귀로 알아 들을 수도, 이해할 수 없는 소리 랄랄라, 따락따락, 돌 굴러가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기에, 조롱하여 새 술이 취한 자들의 소리라 하지 않았는가? 진리 님?은 어찌하여 술 취한 듯한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복음을 전하였노라 망발을 해 대는가? Tongue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소리인 “글로사” 는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영계의 언어일 수도 있는, 성령의 초월적인 현상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소리로라도 들릴 수가 있는 언어였다. 단층인 진리 님의 귀에는 한국어로 들려야만 방언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요? ㅎ ㅎ

허참 님의 글에 달았던 댓글을 진리님에게도 드립니다^^ 
“진리님은 “행2:1-11”의 말씀을 “외국어”라는 잘못된 “key”로 열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잘못된 key로 다른 말씀을 풀어보고자 하시니 열릴리가 없지요 ㅎ ㅎ 고전12:10의 방언과 행2:1-11의 방언이 목적은 다르나 본질은 같습니다요. 곧 방언하는 자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에 덕이 되기 위하여, 또는 주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방언을 해야하는 목적이 다르다. “방언의 본질?”은 ㅎ ㅎ 생략하겠습니다요. 이만하면 익히 아실 분 같아서 더 이상의 힌트는 생략 합니다요.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하고 있지요? ㅉ ㅉ 방언중단론자일 수 밖에 없는 진리 님을 향한 예정이, 잘못된 “디알렉스토key”로 인함이었네요 ㅉ ㅉ

“한마디로 설명을 드리지요!^^ “외국어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듣는 자에게 어떻게 들렸느냐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말 입니다. 첫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에서, 방언소리의 출발점이 tongue 이며 도착점이 듣는 이의 귀 입니다. 천하 각국 13나라?로부터 온 사람들과 현지 유대인들의 귀에 각 나라 외국어로 또는 술 취한 자의 소리와 같이 들렸다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 또는 술 취한 자가 횡설수설하듯 하는 방언소리, 120명의 문도가 한꺼번에 큰 소리로 기도하는 군중 속에서 방언소리가 각자가 살던 나라들의 본토 소리로 똑똑하고도 분명하게 들릴리가 있었겠습니까? 현대 방언에서도 중국방언이나 일본방언을 해 보았다는 간증을 쉽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외국어 방언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소리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방언이라는 것은 혀의 떨리는 현상에 의하여 들리는 소리라는 것 입니다. “방언이 영의 언어” 임이 성도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성경에 의한 바른 이해 임에도 불구하고, 영의 언어가 인간의 귀로 들어 이해되어야만 하는 언어라, 외국어라, 그 뉘가 그렇게 우기던가요? 허참님도 깜빡 속았습니다요!^^ 영의 언어란? 성도가 하나님께 직통으로 고하는 하나님만이 알아 들으시는 신령한 언어 입니다요. 성령의 초월적인 역사로 버벅대거나 랄랄라 방언소리가 언어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부흥회 강사가 자신은 방언을 하는데 상대방은 자기나라 말로 듣더라는, 또는 자신은 영어로 말하는데 회중들은 자기나라 말로 듣더라 하는 성령의 역사도 들어보지 못하였는지요? “

“성경의 방언은 실제 외국어였으므로 그 나라에서 살거나 살았던 사람들은 다 알아 들었다” 이와 같은 헷소리를 다시는 하기 없기요? 진리 님!^^ ㅎ ㅎ ㅎ


어부 2014-09-10 20:15:43

(Now about spiritual gifts, brothers,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12:1)

(in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사람의 방언과 천사(들)의 말로 번역된 (고전13:1) “말(language)의 의미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이 동일한 한 언어(tongues)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천사의 방언”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겠다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사람의 방언(tongue)이 천사가 말하는 언어(tongues) 즉 영언(spiritual language)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천사의 말이 있더라도 사람에게는 각자 개 개인의 방언, 각자가 방언을 해야 한다. 복수(men)로 기록된 단어에는 단수인 남자(man)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9-10-14 정정). (in the tongue of men)복수의 사람으로 기록되었으되 방언(tonue)이 단체로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이 일대 일 이듯이, 방언도 일대 일이라는 숨겨 놓으신 말씀이 아니신가? 믿고 구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으리라!^^ “믿고 구하는 자에게”라는 의미에는 믿고 구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으리라 하는 의미와 동일하다. 지난 많은 나 날 동안의 방언이 영언이니, 그렇지 않다느니, 하는 토론은 이제 종결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현대의 모든 성도의 방언이 귀신으로부터 받은 옹알이다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방언을 우롱하는 “진리 님”에게는 구원이 없다. 결국이 멸망으로 예정 받은 자 임이 틀림 없다. 지옥 갈 자가 누구인가 궁금한 사람은 진리 님의 얼굴을 보라. 진리 님 그대가 목사라고 하니, 고전13:1절의 말씀을 의지하고 세상에 선포한다. 바로 저렇게 생긴 자로 옹알이? 모라? 하는 자가 지옥 불에 떨어 질 자이다. 궁금한 사람은 저 자를 보시요.

ㅎ ㅎ 중국에서 나병환자 선교를 하는 김요석 선교사의 간증 중에서 패러디한 내용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그 간증에 등장하는 지옥에 갈 사람으로 지목된 자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진리 님도 회개하고, 구원 받고, 다시 물 침례 받고, 성령세례도 받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니 저를 너무 탓하지는 마십시요! - - - - - - -지옥 갈 사람을 보고 싶으면 진리 님을 보시요!^^ - - - - - - -

진리 님이시여! 지옥 불에 떨어질 준비는 되었습니까?
진리 님이시여!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으면 죽어서 일뿐 만 아니라 살아서도 지옥 일 것이요!^^ :-)


어부 2014-08-23 00:37:40

진리 님! 내어 놓은 것도 없이 이렇게 유야무야 끝을 낼 것 입니까? 토론에 응하시는 듯하여 기대함이 높았었는데 역시 단층이심을 만인에게 스스로 증거만 하는 꼴이 되고 말았네요. 

“쨍그랑” 소리에 뜻이 있듯이 하물며 방언소리에 뜻이 없겠느냐? 나귀소리에게도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뜻을 분명하게 주셨다? 그러므로 영적인 방언, 성도가 하나님께 직고하는 방언이라도? 사람 귀에 들려야만 하는 외국어였다? ㅋ ㅋ 저! 저! 진리 님이라 불리우는 저 인간이 참으로 귀신도 웃기는 소리를 한다? ㅋ ㅎ 님의 주위를 돌고 있을 마귀님들이 배꼽을 잡고 있겠습니다요? ㅋ ㅎ ㅎ 

“나는 방언 안 해요” 왜냐하면 “신앙을 변질 시키는 더러운 방언”이기 때문이다? _ 진리 님의 유명하신 말씀이지요? _ 그 유명하신 님의 “나는 더러운 방언 안 해요” ? 가 진리가 되기 위하여 그 고매하신 칼빈신학으로 증명을 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강산이 변하도록 전교인, 목사 가족 포함 방언중단론자 달랑 20명] 이라는 유명한 수식어는 뉴스앤조이 댓글에서만도 여러 번 있는 사실인데, 대 칼빈신학자가 되 실 분이, 누가 한마디 정도 더 거들었다고, 뭐라고 흠집이 더 나겠는지요? _ “강산이 변하도록 전교인, 목사 가족 포함 방언중단론자 달랑 20명 “ _ 진리 님에게 붙어 다니는 수식어를 보며 칼빈신학에서 스스로 이룬 열매에 느끼는 바가 전혀 없으십니까? ㅉ ㅉ 워낙 단층으로 영적인 일에는 백리로 도망하는 맹 자이시니, 느끼는 바는 있겠는지요 ㅉ ㅉ ? ?

방언 토론에 응하시겠다구요? 이 외에도 토론하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첩첩산중 인데 어찌 님과의 방언토론 입문을 제대로나 할 수 있겠는지요? 비록 메아리 없는 토론?이 될지라도 어눌하고 저만의 특유(characteristic)의 횡설수설 식 “수신자: 만인” 이 될 토론으로 노력 하겠습니다요. ㅎ ㅎ ㅎ

어부 2014-08-14 23:22:48

그런가요? 의도된 확 까발림은 아니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마지막 열매”니 모니 하는 식의 지금까지도 그의 댓글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여러 다른 비본질적인 댓글들에 대한 종합적인 당연한 반응이 아니겠는지요. ㅎ ㅎ 저는 이론에 약한 자이기에 상대에 따라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약점이 있지요. 극약 처방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ㅎ ㅎ

이론적인 토론보다는 성경적인 토론을 원 합니다 
“방언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 는 발언, 이는 조용기 목사의 말이 아니지요?,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음에도 그는 단층의 알량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기에, 그는 무어라 합니까? “그들의 사단적인 역사에(마치, 바로의 술사들도 모세의 기적을 흉내낸 것처럼),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을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믿고 따른 그 결국이”이라 하지 않습니까?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 을 정상적인 성도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의 ordain받고 목사로 Impartation 받은 것이 아니라 사단의 신내림으로 Impartation 받은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의 출처가 도대체 어디라는 말 입니까? 성경에도, 지상 어디에도 없는 옹알거림, 성경의 말씀보다 사단이 준 깨우침을 우위에 두고 계속 짓꺼리고 있는 그가 아닌지요. 그의 “옹알거림” 사단이 준 깨우침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신봉하는 깨우침대로 결국이 사단이와 함께 제 갈 길을 갈 자가 틀림 없지 않은지요? 

[모세의 기적을 바로의 술사들이 흉내 낸 것처럼,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을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믿고],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이라는 사단이가 넣어 준 거짓말을 대전제로 그의 말이 진리인양 자신의 주장을 성경 앞에 세우며,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신 성경이 증거하는 방언을, 귀신의 흉내 내는 방언보다 못한 것이다. 막말을 하는 결국은 성령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사단보다도 못하다는 망령된 말고 열두 지옥? 에 빠지고도, 사단과 함께 무저갱에 영원히 같혀야 할 무서운 말을 하는 저 저주받을 진리 님을 어찌 대하여 할까요? “꺼꾸로 말”의 귀재인 그를 어떻게 할까요? 

“방언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 는 말은, “성령이 없는 자는 구원이 없는 자이다” 같은 말 입니다. 즉 “성령도 방언도 모르는 자는 구원이 없는 자이다” 하는 소리를 최소한 인간의 청각은 소유한 그 이기에 알아는 듣되, 성경적으로는 풀어낼 능력도 성경 지식도 이해력도 없기에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어 “귀신이 주는 옹알이”의 깨우침을 유일한 무기로 사용하는 그가 아니일런지요!^^ 구경꾼 님!^^ 

위의 쿠오트 된 내용으로 진리님의 심사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진리님의 Sympathy 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찬찬히 다시 보세요!^^ ㅎ ㅎ :-)


구경꾼 2014-08-14 06:10:02

어부님은 끝까지 이론적으로 싸우셔야지 교인 숫자로 그래 버리면 안되죠 진리님의 교회의 교인 숫자가 20명이라고 확 까버리니 진리님이 아무 소리도 못 하자나요? 끝까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토론 하세요.


어부 2014-08-12 07:17:08

진리 님!^^ 제가 시간에 쫓겨 변변한 댓글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거!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것인지 알아 듣지를 못하겠습니다요!^^ 
부연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_._)

그리구요!^^
What is Rev. YongKi Cho got to do with your salvation? Hah?

목사 가족 포함 방언중단론자 달랑 20명?
등록교인 78만명에 출석교인 30만명

나는 입이 “쩍”하여 감히 비교조차 못 하겠네요? ㅎ ㅎ


진리 2014-08-10 13:16:18

어부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같은 성령님께서 우리 믿음의 근간인 말씀의 빛도 함께 활짝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부님께서는 여전히 말씀과는 상관 없는 자신의 감정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자타? 가 공인하는 성령을 받고 세계 최대 규모의 종교 집단으로 성공시킨 조용기 목사님의 마지막 열매를 보시기 바랍니다. 

방언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고, 밑천도 없고 뿌리도 없는 망령된 막말에 가까운 주장과 그들의 사단적인 역사에(마치, 바로의 술사들도 모세의 기적을 흉내낸 것처럼),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을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믿고 따른 그 결국을!

"방언은 믿는 사람이 아닌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 표적으로 주신 것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어부님께서 받은 방언이 지정의, 인격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말씀으로 님께서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어부님께서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임을 증명하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뜻도 없는 옹알거림을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라고 계속 주장하는 한, 어부님도 조용기 목사님의 전철을 되밟을 뿐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라고 자신이 하는 방언을 설마 귀신이 준 것이라고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어찌보면 이 모든 것이, 마귀가 육체의 감정을 이용해 준 아무 뜻도 없는 옹알거림을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으로만 철썩같이 믿고 정작 기독교 믿음의 뿌리인 말씀에는 무지했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방언은 복음 전파, 즉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제자들이 전파한 복음은 곧 말씀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계통계표 2014-08-09 08:12:45

사도 바울이 인정한 방언을 그대로 믿는 교회는 날로 성장한다. 기도도 잘 하는 영적성장과 교인숫자가 날로 늘어난다
반면에 그대로 믿질 못하고 영의 소리인 방언을 부정하는 교회는 날로 쪼그라 들고 교인도 별로 없다는 통계이다. 그러한 교회의 목사도 별 볼 일 없는 목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한 방언을 인정하고 은사로 받아 교회도 부흥하고 교인들도 기도를 쎄게 하여 교회도 부흥하고 교인숫자도 늘고 목사 개인의 영적성장을 도모하도록 합시다.
방언 기도하여 성장한 오순절 순복음 교회를 본 받고 방언을 하여 부흥하는 기타 다른 교회들이 그 증거물 입니다.

어부 2014-08-09 06:19:52

1993년 미 하나님의 성회 Penn-Del District의 Annual Meeting 마지막 예배 시간이다. District의 superindendant의 불과 같은 권면의 설교 말씀이 끝난 후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서서 찬양을 인도하며 모든 예배가 거의 막바지에 도달 했을 때이다. 

얼마 동안 간절한 기도와 찬양이 어우러지며 예배 중에 운행하시는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온 회중 위에 역사하심을 느낄 때, 잠시 고요함이 흐르는 듯 하더니, 갑자기 회중 안에서 낭낭한 소리로 방언소리가 터져 나온다. 갑자기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놀라서 눈을 번쩍 뜨고 회중을 둘러 본다. 그 순간! 통변(예언) 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바로 눈을 다시 감는다. 그런데 그 낭낭하게 들리는 방언소리가 귀에 많이 익다. 바로 2주전 부흥회에서 안수기도가 끝난 후, 모든 순서가 끝나가는 중에도 한 자매가 무릎으로 서서 간절히 기도한다. 그 모습을 본 강사목사님 다가가서 손을 머리에 얹는 동시에 “따따부따, 따따부따” 하며 언어 방언이 터진다. 강사목사님 왈 “방언은 혼자 다 받네” 당시에 언어 방언을 모르던 나에게는 기이하게 보일 수 밖에, 바로 그 방언이 미국인들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진행되는 상황에 놀라 가볍게 감전된듯한 상태로 귀는 쫑긋, 온통 진행되는 상황에 집중 한다.

고린도교회에서 실제로 있었고 사도 바울이 고전14장에 기술한 그 상황이 현재 미국교회 실제 상황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모든 교인에게 성령의 은사가 넘쳐나 모두가 방언하고 예언하고 선지자 노릇 하며, 사역의 분담이 명확히 구분이 안 되었으며 예배에서 무질서 한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남으로 인하여 신자들이 제기한 질문을 당시 에베소교회에 있던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공중예배 부분에 대한 답변이며 Instruction이 고전14장이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변할 것이요. 만일 통변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예배 인도자는 공중예배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여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통제해야 한다. 예언(방언)하는 자를 둘 많아야 셋으로 통제와 제한을 받으며 통변은 회중 안에서 한 사람이 하며, 다른 사람은 분별하라. 분별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배인도자이다. 하나님의 성회 instruction의 가르침은 예언하는 자가 회중 안에서 통변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아예 예언을 하지 말라.

지금 처음 당하는, 공중예배 중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집중한다.

잔뜩 긴장하여 집중하고 있는데 영어로 말하는 통변이 회중 안에서 낭낭하게 울려 퍼진다. 통변의 내용은 “ 담대하게 나가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말씀” 그대로이다. 통변이 나오자, 회중의 여기저기서 여성 성도들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참다가 째지며 터져 나오는듯한 소리로 “Jesus Christ” “Jesus Christ” 하면서 흐느낀다. 우리 한국 회중들 같으면 “주여” “아버지”하고 울부짖을 것 같은데 그들은 “Jesus Christ” full name을 부르며 흐느낀다.

회중에서 나온 예언과 통변을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재차 설명하며 감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closing한다. Praising Pastor가 단에 오르더니 찬양으로 회중을 인도한다. 대다수의 회중들은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어 찬양으로, 기도로, 교회에 권면의 말씀을 주신 성령님을 찬양한다. 이 교회는 해외선교 특히 멕시코 선교에 집중하는 교회로“담대하게 나가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더욱 선교에 힘쓰는 교회임이 분명하다.

이 글을 기록하는 목적은 이러한 공중예배 중에 나타나는 예언과 통변의 역사가 기독교2000년의 역사가 흐른 현재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용하게 나타남을 세상에 알리려 함이다.

이와 같은 공중예배에서 나타나는 예언과 통변의 역사가 현재 오순절 교단, 미 하나님의 성회 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100주년을 넘긴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성회 한국총회를 비롯한 어느 교단에서도 예배 중에 공중방언이나 예언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혹 한국측 신사도 교회에서나 글로리아타임스 측의 예배에서 공중방언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사실이 있었는지, 혹 있었으면 알려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

공중방언의 역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한국교회, 특히 방언을 부정하는 은사중단론자들에게 고전14장의 말씀을 인용하는 선호도가 높은 것을 보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뉴욕에 가본 경험이 없는 자가 뉴욕에 대하여 더 잘아는 척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은사중단론자들에게는 공중방언 성구를 인용할 자격이 아예 없다. 주장한들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성령님이시여! 한국 교회에서도 공중방언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히브리서13장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진리 님! 현대 방언 자체를 부정하는 님에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이 무슨 뜻인지 설명 드리면 받아 들이며 믿으시겠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의 대 반격시대 입니다. 천국까지 활짝 열린 세상이니 원하시면 구하는 답변을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는 참으로 빨리 교통하는 마지막 끝 날 말세지말에 우리가 있습니다. 

원하시면 부족한 저라도 나서서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


진리 2014-08-09 02:11:10

지정의의 하나님께서 뜻도 없는 소리를 방언으로 주셨다고 계속 우기시니...

어부님, 그렇게 해서라도 믿고 싶은 그 심정,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억지가 너무 심하다 싶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혼자 할 때, 통역이 필요 없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자신이 그 뜻을 알지 못하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고 하셔야  하겠지요?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무슨 말인지,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부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만약,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맞다면, 이 말씀의 뜻을 분명히 아실겁니다.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서신학자 2014-08-08 22:03:01

많은 개혁 신학자들도 방언을 지지합니다. 설령 이들도 방언 은사를 못 받앗을지라도 인정하지요.
오히려 다국어 방언은 사라졌어도 영의 음인 방언은 인정하지요.
하나님과 나만이. 통하는 방언은 다른 사람이 절대로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비밀스런 방언 기도이기에 그러습니다.
방언통역은 오직 대중 앞에서 방언기도나 방언에언을 할 때만 필요하지, 홀로 할때는 통역이 필요 없습니다. 진리님은 뭘 제대로 모르면서 틀린 주장만 하는군요. 신학교에 가서 성경을 공부하시길 강추함다.


어부 2014-08-08 21:41:00

진리 님은 새빨간 거짓말을, 한, 글자, 타이핑의 오류도 없이 정확히 쳐 대는지? 그야말로 강심장(신앙양심에 화인 맡은 자)이시네요! ㅎ ㅎ 이러다가 그 거짓말이 단번에 들통이 날텐데요, 

졸지도 않으시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과, 오순절 신앙의 시조이신 초대교회 사도들과, 그 허다한 구름과 같은 증인들과, 앞으로 얼마든지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그 약속을 믿고 주 앞에 나오는 자들, 얼마든지 구원 받을, 헤아릴 수 없는 자들과, 생명책에 기록되는 모든 이름들 앞에서 변함이 없으십니까? 

만 천하에 거짓말이 들통이 나면 개혁교단 목사직을 반납이라도 하시겠다. 맹세라도 하시겠습니까?


진리 2014-08-08 08:31:15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이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이든, 방언은 공히 그 뜻이 분명하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방언의 특징입니다. 

외국어 방언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어부님과 같은 분들이 말하는 영언 역시 그 의미가 분명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주된 골자이기도 합니다. 

어부님,
내용을 분명히 하시든가? 아니면 통역을 세우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야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이렇게 계속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한, 사실상 어부님의 믿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8-07 03:57:27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무슨 방언이 있다는 것 입니까? 진리 님이 귀신의 자식이니 귀신방언이 있다는 소리이겠지요? 그렇지요? 방언부정신학에 빠진 자가 무얼 알아 “방언은 분명히 있다” 말을 하겠는지요? 그 말 자체에 어패가 있지 않은지요 ㅋ ㅋ ㅋ

진리 님! 신학대학원생 답게, 목사님 답게 말씀 좀 하시지요.
하고자 하는 말을 신학적인 말씀으로 뒷받침 정도는 되어야 평생 신학하는 분 답지 않겠는지요? 제시하는 방언 성구말씀의 전 후 문맥과 성경 전체에서 통전적이고, 유기적으로 줄기차게 말씀하시는 그 많은 방언 말씀 절들은 지옥 볼에 태워 버렸습니까? 참으로 지옥 불에 떨어 져야 마땅한 자이십니다. 그려!^^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고전14:7),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14:9),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0-11),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 할찌니”(고전14:13),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14:8),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14:22)]

진리 님이 지금까지 제시하는 방언 성구 구절이 고전14:7-22 까지 입니다

진리 님! 제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한국인 교회의 성도들, 특히 방언부정신학에 빠진 교인들은 고전14장의 방언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없다. 제 개인적인 소신 입니다. 그 이유를 밝히지요!^^ ㅎ ㅎ ㅎ

몇몇 구절만 쏙 뽑아내어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한 성구로 잘도 사용하는데 ㅉ ㅉ 한마디로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 님! 이 공간에는 “진리님과 어부님”만의 단독 토론장인줄로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상천하지에 홀로 하나님이신 분과 구원하신 그의 천국 백성들이 이 곳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하여? 박수를 보낼까요? 

성경 부정신학에 빠진 진리님에게 그렇게 가다가 지옥에 빠지라고 박수를 보내고 있을 까요? ? 오순절 신앙의 선조 님들, 사도 베드로부터 사도 요한, 신약 27편 중에서 13-14편을 기록한 사도 바울까지, 누구를 위하여 응원을 보내고 있을까요? 구름같이 둘러 쌓인 허다한 증인들이, 잘하고 있는 “어부”를 위하여 응원을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진리 님! Cessationalism의 무거운 것과 심판 주로 오시는 분의 경고(계22:19)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던져 버리세요, 우리 앞에 당한 경주에서 탈락자로 영원한 불 구덩이로 들어가지 마시고 좋은 경주로 끝까지 달리며 결국에는 승리하기를 믿음의 선조들이 진리 님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영”이시니 진리 님의 영의 상태를 잘 알고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영”이 아니이니 진리 님을 잘 알지 못 합니다. 알량한 어부의 시각으로 보니, ㅎ ㅎ “진리” 님은 구원이라는 것을 참으로 모르는 자와 같습니다. 무얼 모르는 자이시니, 허우적 거리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성경 부정신학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일런지요? ? ? 진리 님이시여! 그대의 행위는 단연코 구원 받은자의 행위에서 나올 수 없는 가장 사탄적인 짓을 스스럼 없이 하고 있는 줄로 아시요? ? ? 말씀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그 많은 칼럼들을, 그 많은 지옥으로 예정된 무리들이 환호하며 추종함에 뭔가 부족한 자의 우쭐함으로 뭔가 하는 것 같으시지요? ㅉ ㅉ 한국교회의Cessationalism의 대표자, ㅎ ㅎJohn MacArthur 와 함께 지옥 맨션1동 1호에 예정된 자, 21세기에서 가장 저주 받은 자 중에 선두를 달리시는 분들, 입니다. 진리 님을 위하여 지금까지 누군가로부터 이러한 직언을 받아 본 일이 있습니까? ? ?

진리 님을 추종하는 자들이 자신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진리 님을 부추기며 잘하신다 응원들이 대단한가요? ㅎ ㅎ ㅎ 아마도 그들은 최소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죄는 피하여 볼 요량으로 그대를 추앙하는 모양인데 정녕 모르시는 진리 님 ㅋ ㅋ ㅋ 무언가 되는 양 우쭐한 그러한 자들, 거시기 한 자들이 세상에도 참으로 많이 있기는 하지요? ㅎ ㅎ ㅎ

진리 님? 스스로의 심장에 손을 얻어 놓고 자문자답을 해 보세요? 나는 과연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사실이 과거에 있었나 ? 중생의 체험이 있었나 솔직하기 자문자답을 해 보세요. 이 지면에 신앙고백을 적나라 하게 주 앞에 드려 보세요!^^ 아마도 고백 비슷한 것이라도 할 줄조차 모를 것 입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요 ㅎ ㅎ

토론을 잠시 내려 놓으시고 진리 님 자신이 주 앞에서 무엇인가? 먼저 돌아 보십시요? 


하하하 2014-08-06 22:12:57

강병도 박사의 호크마 주석서를 보면 이 시대에도 고린도전서에 그록된 영의음인 방언은 그대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강병도 박사는 이단이며 시탄인가? 또한 모든 신학자들이 인정한 호크마 주석서
는 무엇인가? 
방언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제발 공부도 하고 주석서를 살펴보기라도 해야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만 알 수 있는 영의음인 방언은 잇음으로 두번 다시는 헛소리 하지 마십시요. 성경도 인정한 방언을 없다고 하는 자야말로 이단이요 사이비인 걸 아십시요.


하하하 2014-08-06 22:11:59

강병도 박사의 호크마 주석서를 보면 이 시대에도 고린도전서에 그록된 영의음인 방언은 그대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강병도 박사는 이단이며 시탄인가? 또한 모든 신학자들이 인정한 호크마 주석서
는 무엇인가? 
방언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제발 공부도 하고 주석서를 살펴보기라도 해야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만 알 수 있는 영의음인 방언은 잇음으로 두번 다시는 헛소리 하지 마십시요. 성경도 인정한 방언을 없다고 하는 자야말로 이단이요 사이비인 걸 아십시요.


진리 2014-08-06 11:40:28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님들이 하는 아무 뜻도 없는 소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 아닙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날!
그 때도 하나님 앞에서  지금처럼 계속 옹알옹알 거리기만 하실 겁니까?

이제는 그만 좀 옹알거리고 속시원하게 말을 좀 해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님들이 하는 아무 뜻도 없는 소리는 결단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 아닙니다. 


어부님, 혹시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죠?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방언 .. 유/무 2014-08-06 04:19:49

방언을 받은 사람은 방언이 있다고 하고,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방언이 없다고 한다. 천국에 가본 사도바울은 천국이 있다고 하고, 안 가본 사람은 천국이 없다고 고집한다. 가짜 방언은 뺴고 진짜 영의음 방언은 있다. 진실로 회개하면 진짜 방언을 주시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선 안주시기도 한다.

어부 2014-08-06 01:10:04

쨍그랑 하면 무슨소리? 창조의 법칙에 따라, 쓰임을 다하고, 그릇이 깨질 때, 뜻이 있는 소리, 진리 님의 귀에 쨍그랑, 나는 더 이상 그릇이 아니다~~그러한 의미의 소리이지요. 나귀가 프르~르~르 한다거나 히히~힝, 단층의 귀를 같고있는 온전히 인간이신 진리님의 귀에는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그 막힌 귀에 자연적인 프르~르~르, 또는 히히~힝 소리 뿐 무엇이 더 들리겠습니까? ? ?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이 세상에는 나귀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리님의 세계, 이 공간에서 비로소 단층이라 불리움을 받는 1차원의 세계가 있는데, 진리님이야 말로 단층으로 이루어진 1차원의 세계에서만 보고 듣고 있거든요? ㅎ ㅎ 진리님에게 보이는 단층의 1차원 세계로부터 영원한 천국, 주님의 세계에 까지 몇 차원의 세계가 있을까요? 진리님에게만 특별하게 (퀴즈one)로 드립니다. 퀴즈를 온전히 풀고 나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조금 눈을 뜨실까? 요? 진리님의 믿음의 세계에는 오직 보이고 들려야 하는 현세이므로 영의 세계?, 그런 거? 사두개인의 세계? 영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니?, 달나라 가는 세상에 귀신이노가 어데 있느냐? 귀신이노, 사단이노, 그런 존재 거부, 무당 굿판을 뒤엎을 만한 대단한 엘리트 믿음의 소유자? 세상이 우러러 받들만한 믿음, 70년 대초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우러러 보는 대단한 믿음이 저에게도 있었거든요. ㅎ ㅎ ㅎ 믿음이 대단하더라구요 ㅎ ㅎ ㅎ 그 대단한 엘리트 믿음, 하늘을 찌를듯한 진리 님의 바벨탑 믿음 그 믿음의 최고학문의 학위를 하시겠다구여!^^ 장하십니다 그려!^^ ㅉ ㅉ ㅉ 하나님이 어떻게 내려 다 보시는지, 진리님을 향하여 무어라 하시는지? (퀴즈 two)로 드리지요 ㅎ ㅎ ㅎ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기 전에 이미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진리님 같은 자를 단칼에 치시려 단단히 벼르고 있었든 그 상황을 아십니까? 그가 오죽하였으면 여호와께서 그의 눈을 밝히시기 까지 하며 직접 말씀 하셨을까요?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민22:28),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민22:31),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민22:35) _ 여호와께서 나귀가 인간의 외국어로 말을 하게 하셨을까요? _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2.0 인간의 가장 좋은 시력으로 칼을 들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영)를 볼 수 있도록 하셨을까요? _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갓난아이와 같은 가장 좋은 청각으로 말씀을 듣게 하셨을까요? ? ? 진리 님!^^ 산 세번에 삼 세번을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 ?

진리님을 살리려 애쓰는 누구? 나귀는 “길에서 떠나 밭으로 도망하다 좌우에 담이 있는 피할데 없는 좁은 길에 들어서자,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그 나귀는 발람을 구하려? 깨닫고 알아채게 하고자 하여서? 또는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비벼 일부러 상하게 한 연고가 무엇이였을까요 ? ? ? 나귀만도 못한 진리님은 어떻게 하였는지 말씀을 제대로 보는 눈이 있는 성도들은 익히 알고 있지요? ㅎ ㅎ

진리 님! 해서! 말씀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일이 없다는 것 입니다요. ㅉ ㅉ


나귀의 프르~르륵 소리가 외국어 였다? 인간의 성정으로 끝까지 우기는 진리 님!이시여!^^ “디알렉토스” 외국어로 들리는 방언이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한국 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 남편이 성령세례를 받고 나서 “하나님아부지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저의 죄를 사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본토박이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무주구천동? 지방방언으로 외국어 한국 말을 하더라!^^ 그러한 외국어 방언, 성령님의 초월적인 현상에 의하여 일어날 수 있습니다. 대개, 단어로 또는 쎈텐스로 단발적인 언어 방언을 한다는 간증소리는 많이 들어 보았지요!^^ 

@ 외국에서 강사로 등단하여 영어로 말씀을 열었는데 통역을 하지 않기에 왜 통역을 하지 않느냐 물었더니, 당신이 지금 우리나라 말로 하기에 통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말이 들리면 “아멘”하세요, 강사가 영어로 하였더니 청중들이 자기들 말로 “아멘” 화답 하더라!^^

@ 한국인에게 유명한, 땅따먹기로 시작하는, 원종수 권사의 classic 그 유명한 간증도 못 들어 보았습니까? 저는 초창기 장로교회 입문시절에 들어 보았는데요? ㅎ ㅎ 필라델피아에서 그 나쁜 한국인 부부를 만나 괴 경험을 한 그는 지금도 그 사람들 어디서 사는지 아세요? 간증 때마다 물어 본답니다? ㅎ ㅎ ㅎ 그들이 진리 님 부부가 아니었나요? ㅎ ㅎ 그, 원종수 권사가 나쁜 한국사람을 만나 고생을 하며 우여곡절 끝에 Mckeesport, PA 제가 사는 멀지 않은 지역에 오게 되었는데, 아무도 모르는 미국 시골 구석에 덜렁 떨어져 막막한 상황에서 사도행전의 천사를 보내 주셨는지, 힌 수염을 길게 기르고 하얀 양복, 하얀 모자를 쓴 현대판 천사의 도움으로 정처없이 찾아간 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어찌어찌하여 큰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원하지도 않던 간증을 강제로 하게 하실 때 “하나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입을 열어 방언으로 간증을 시작하였는데 청중은 영어로 듣더라” 방언 간증 후에 강단에서 내려오고 집회가 끝났는데, 여자 한 사람이 닦아와서는 당신이 안수해 주면 병이 낳을 것 같으니 안수를 해 달라 하는 요청으로 안수기도를 하니 그 자리에서 여인이 병고침을 받게 되었는데, 원종수 권사도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진리 님! 위의 두가지 간증의 경우를 어찌 보십니까? 외국어로 나타나는 경우의 실례를 적나라하게 설명을 드렸는데? 두 간증에서 회중들이 들은 외국어가 처음부터 외국어로 혀에서 울려 나온 소리일까요 아님! 두번 째 간증의 인간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천상의 방언소리, 영의 소리였는데 집회를 친히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초월적인 현상으로 “글로~사” “하늘의 언어”가 외국어 “디알렉토스”로 들렸을까요? 강사들이 상대 회중들의 언어로 알아서 말을 전달한 것 일까요? ? ?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예배를 주관하시며 말하는 자의 혀를 주관하셔서 자의로 말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며 성령의 뜻으로 “디알렉토스” 외국어로 들리게 역사하셨다.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십니까? 

진리 님!이 처음에 인용하는 고전14:10-11 말씀은 공적인 예배에서 일어나는 공중방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골방에서 하는 방언이 아니라는 말 입니다. 대개의 성도들이 방언하면 고전14장의 방언을 말하는데 특히 한국인 교회의 성도들은 고전14장의 방언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없다,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입니다. 그 이유는

에이효! 이 댓글을 준비하느라 근 반 나절이 걸렸네요1^^ ㅎ ㅎ 눈치도 보아야 하겠고, 일도 보아야 하고, 나중에 계속 하지요! :-)


진리 2014-08-05 14:20:07

"쨍그랑" 하면 이건 무슨 소리겠습니까?
뜻없는 소리는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겠습니까?

어부님,
하나님께서는 하다못해 단층보다도 못한 나귀에게도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게 뜻이 분명한 말을 주셨습니다. 

님이 계속 뜻도 없는 옹알거림을 방언으로 주장한다면, 님의 말처럼 지정의의 하나님을 barbarian 으로 만드는 망령된 짓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8-04 12:35:29

ㅎ ㅎ ㅎ 나귀를 소리지르게 하셔서 발람이 이해하는 인간의 언어로 들리도록 초월적으로 역사를 하신 일이 구약에 있기는 있지요. 진리 님?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는 단층임이 틀림 없습니다. 나귀의 프르르~르~르 에 꽃쳐서 “모든 방언이 외국어이다” 결론에 도달 하셨습니까? ㅋ ㅋ 어찌하여서 현대의 나귀들은 외국어 방언을 하지 못할까요 ㅋ ㅋ ㅋ 나귀는 나귀일 뿐, 말 못하는 짐승일 뿐이지, 언어 능력이 있는 짐승으로 창조하신 일이 결코 없습니다요. 차라리 앵무새 소리가 방언, 곧 외국어이다. 신학박사 학위 논문을 쓰시지요. 한마디로 기가차는 단층의 머리에서나 나올 수나 있는 인류 역사에서 최초 유일의 대 오류 입니다요 ㅋ ㅋ ㅋ

워낙 야만이시니 성령께서도 방언에 야만?인 줄로 착각 하시는 인간의 야만의 극치를 달리시는 분, ㅋ ㅋ ㅋ 신학박사를 하신다는 분이시니 평신도 장로로서 물어 나 보겠습니다.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 줄은 아시는지요?


진리 2014-08-04 08:15:37

나귀가 사람의 말을 했지만, 나귀 자신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그 말을 알아 먹었지요. 

어부님,
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이와 같이 어부님 자신은 그 뜻을 모를지라도 최소한 듣는 사람들은 알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역을 세우지 못하실거면, 자제하시는 것이 피차에 야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부 2014-08-03 06:29:40

방언이 멍멍이나 냐옹이 소리라는 것 입니까? 영언이라는 말 입니까? 앞으로는 한가지로만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ㅎ ㅎ 댓글을 제가 매번 재 정리를 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해야만 하는지요. 대략 알아는 듣겠습니다요!^^

“방언은 영언이다” 방언을 영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에 속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의미도 분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0-11)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자기의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일이 없습니다요. 말씀은 비록 내 입맛에 쓰더라도 거부하지 않고 삼켜야 내 몸에 양약이 되지요. 제 입맛에 맡지 않는다고 혀 바닥으로 탁 튕겨버리는 우리 집 말티~즈 “공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뜅겨 버리는 그가 바로 사탄적인 자가 됩니다요. 사탄이가 저 멀리 공중에만 있는 줄로 착각을 하시는가 본데요? 바로 진리 님 마음 속 깊이 쳐 박혀서 님을 올가미로 단단히 씌어놓고 눈을 가리우고 말씀을 깨달을 수 없도록 철저히 막고 있습니다요? 누구보고는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시더니 달랑 2절 말씀이 방언 절의 전부인양 들이대는 것을 보니 ㅎ ㅎ ㅎ 그야말로 방언에는 야만인이 틀림 없습니다요 ㅋ ㅋ 

“고전14:10-11” 절이야 말로 님과같이 방언에 야만인 자들이 방언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므로 결국 이러한 자들 앞에서는 야만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적당하고 질서있게 하라는 말씀이지, 야만인이 방언을 알아 듣지 못한다고, 방언하는 자도 진리 님과 같는 자와 함께 야만이 된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이 그리 쉽습니까? ㅎ ㅎ, 고전14장을 유일한 방언 장으로 알고 계시는 진리 님! 좋습니다, 기왕에 “고전14:10-11” 말씀으로 던지셨으니 계속해 보시지요 :-)

진리 2014-08-03 01:15:31

어느 방언에 능통? 한 전문가께서 자신은 평생 외국어 방언를 본 적이 없다고 말을 한 것을, 방언이 영언임을 주장하기 위한 펌글로 올라온 것을 보고 참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방언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냥 소리가 아닙니다.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방언을 영언이라고 하며, 또한 외국어 방언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은 반드시 그 의미를, 방언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야옹"하면 고양이 소리고, "멍멍"하면 강아지 소리임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부님과 같은 분들이 하는 방언은 "야멍"이라고 해 놓고, 어떤 때는 고양이 소리라고 하고, 어떤 때는 강아지 소리라고도 했다가, 또 어떤 때는 그도 저도 아닌 닭울음 소리라고 하니, 지정의가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님들이 하는 방언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최고의 은사는 사랑이니 여기에다 사랑의 은사를 적용시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소리를 계속 옹알옹알 거리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0-11)

방언을 영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에 속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의미도 분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만, 땅에 속한 사람들은 그 뜻을 알 수 없기에 이를 객관적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통역의 은사가 반드시 함께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구요. 

어부님,
뜻을 분명히 안다면 하십시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통역을 세우든지, 그도 아니면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8-02 12:04:54

지브리 지브리 여러 말은 하시려 하는 것 같은데, 다음의 의미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략 정리한, 주신 질문 입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1. 방언을 “왜” 의미도 “모른채”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하느냐? 
2. 순간 감정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2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씀조차 제대로 제시된 일이 없는데 무엇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인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먼저 정리해 주시겠습니까? “순간 감정에 따라 다르게”라 하시면 방언을 인정하시기는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신지요? 딴지식 걸기로 마시고 진지하게 말씀에 의거하여 정리하여 주십시요, 한가지 유의하셔야 할 것은 진리님과 토론을 하는 상대는 신학을 모르는 자 입니다. 가방끈이 워낙 짧기에 정확한 말씀 인용이 아니면 알아 듣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제시된 말씀 내용이 달랑(고전14:9-11) 입니까? ? ? ㅎ ㅎ 저는 평신도이기에 오류가 있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정정하면 될 뿐이겠으나 진리님은 저와는 입장이 다릅니다. 

신분에 걸맛지 않는 ““왜” 의미도 “모른채”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하느냐?” 질문하는 진리 님이 “왜”라는 그 이유를 모른다면 성경은 방언을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 하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주문 외우듯이 중얼중얼 대느냐? 뭐 이런 정도로는 들이대야 긴장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1. 방언을 “왜” 의미도 “모른채”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하느냐?] 이와 같은 질문은 토론하고자 하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요. 님은 지가 어째서 진지하게 응답을 해야 한다 생각 하십니까? ㅎ ㅎ 방언의 의미도 모르며 질문하기에 급급한 님에게 횡설수설 역 질문이 무리인가요? ㅎ ㅎ 

“분명한 계시의 말씀과 방언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성의 있고 규모있는 질문으로 정정 부탁 드립니다.
원하시면 그대로#1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릴 수는 있겠습니다 :-)


진리 2014-08-01 23:32:17

이렇게도 영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영언이라고 하는 방언을 하는데 왜 뜻도 모른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주술처럼 매번 똑같은 소리만 읊어 댈까요? 

지정의의 하나님을 다른 말로 하면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왜 분명한 계시의 말씀을 놔두고 뜻도 모르는 개골개골만 하게 하실까요? 그것은 어부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언이 아니라 사단이가 준 개구리 영이란 증겁니다. 

어부님께 영의 실체를 물은 건, 님께서 하시는 방언이(님의 말처럼 영언인 방언이), 이현령 비현령식으로 순간 순간 감정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로 영의 실체를 대신하고 말았군요. 

이것이 바로 어부님과 같이 뜻도 없는 소리를 방언이라고 믿고 하는 분들이 믿는 것이 말씀이 아니라 문자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9-11)

이가 났고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이제부터는 뜻이 분명한 말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가 나고 밥을 먹은지가 언젠데, 언제까지나 맘마맘마만 하시겠습니까? 


어부 2014-07-31 01:29:23

@ 최소한 내 자신이 영의 실체를 알아야 방언에 마음 문을 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왜 영의 실체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 최소한 영의 실체 정도는 알아야 님들이 받은 방언에 객관적인 무게가 실릴 것 아니겠습니까?

진리 님!^^
영의 실체가 무엇이냐 질문 하신다면? 전혀 답지 않은 질문이거든요?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유일하신 하나님” “I am who I am”라 하시는 분 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서 삼위의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성부하나님”, “성자예수님”, “성령하나님” 삼위가 각각 지정의를 소유하시며, 동일하게 모든 권세와 능력과 위엄을 소유하시며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 진리님이 똑바로 아셔야 하는 “영의 실체” 이십니다. 

자세히 구분하면, 2000년 전에 승천하신 이 후로 재림 때까지 이 땅에는 계시지 아니하시는 [예수의 영으로 마가의 다락방의 120문도에게 오신 “보혜사 성령님”]이 진리님이 궁금해 하시는 영의 실체 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 목적과 사역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재차 설명드릴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평신도 장로다운 설명에 마음이 흡족 하신지요? 듣기 원하시는 영의 실체의 대답이 되었는지요? 진리님이 찾고자 하는 영의 실체는 무엇이었습니까?

“영의 실체 정도는 알아야 님들이 받은 방언에 객관적인 무게가” 정녕 몰라서 물으시는 것인지? 님의 “영”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달나라 가는 시대에 귀신이 어디 있느냐 하는 70년대의 지식인이라 하는 자들의 수준과 같습니다요? 보혜사 성령님은 초대교회 이후 언제나 성도들과 가까이 임재 하셨습니다. 님이 인정을 해 드린다고 해서 객관적인 무게가 올라가시는 성령님이 아니신 분이심을 이제는 눈치라도 채셔야 합니다. 이제 진리님도 “영의 실체”를 찾으셨으면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요.

사도 바울은 고전12:1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권면 합니다. 님이 좋아하신다는 칼빈만의 성령 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절로 계속 됩니다. 믿음도 믿음 나름 입니다. “믿노라”하며 착각으로 믿는 고백?은 커녕, 꿀먹은 믿음, 그러한 고백은 믿는 것이 아니지요? ? ? 사도 바을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자들에게 신령한 것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는데, 칼빈 선조와 그의 후예들은 은사중단론으로 오해를 깊이 했었네요?, 그러고 보니 칼빈 선조 역시 영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는 “단층”이었음이 증명 되었습니다요.

없던 성경 지식, 이전에 전혀 알지 못하였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풀이가 타이핑하는 순간에 깨달아 지며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칼빈)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4절 이후 은사와 직임, 역사는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하는 절은 은사에 열려있는 침례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구절로 선호하여 사용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씀 하셨거든요? 로마교회(롬12:6-8)의 7가지 은사, 고전 12:4-10의 9가지 은사, 고전12:28의 6가지 은사, 12:31절에서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 유명한 가장 큰 은사의 사랑 장인 고전13장인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말씀은 기록되고 있습니다. 13장에서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신령한 성도라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 . .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 .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

진리님!^^ 모든 은사에 능하고 비록 성령충만한자 일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다면 이 말씀이 은사중단론자, 술로 충만한 자들 일찌라도 사랑으로만 충만하면 하늘나라에 큰 유익이 되겠다는, 그래서 구원 받기에 아무 염려 없겠다 하는 말씀인가요? ? ? 결코 그럴 수는 없지요. 칼빈 선조도 단층으로 지독히도 깊이 오해를 하셨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고전13사랑장의 종결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 드린대로 14장으로 연결됩니다 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로 귀결 됩니다. 결국 사랑이 “도루신령한 것”으로 변하였네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로 시작된 말씀이 39절에서는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14장의 시작과 끝이 일맥상통한 권면으로 끝을 맺으며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명령하십니다. 선조의 단층을 닮아 그 모양이시니 누구를 어렵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ㅎ 

피차에 한가지 더 유념해야 할 것은 고전 14:37-38의 말씀 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은 정말로 꼭 “잠긴동산” 에게 하는 말씀 같습니다. 그렇다고 진리님에게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 자 그도 역시 알지 못한 자니라. “알지 못한 자”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긴동산”은 적당하고 질서있게, “진리님”은 기록된 말씀을 믿지는 못할 망정, 역행하며 성도를 견인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해방꾼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질문꺼리가 많으십니까?

@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을 주신 것은, 방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까? 
@ 아니면 요엘서의 말씀이 응하는 것으로, 
@ 곧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방언을 주신 것이었습니까?

@ 다시 말해서, 성령을 부어주신 목적이 방언을 받기 위한 것이냐? 
@ 아니면 성령을 부어줬다는 증거로 방언을 주신 것이냐?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더 설명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 :-)


진리 2014-07-24 12:10:10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신령한 은사(영적 은사)를 나누어 줌에 있어서 성경대로 어떤 이에게는 이것을... 그리고 또 다른 이에게는 저것을...(꼭 방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심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주님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은 은사 중에서도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영의 실체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비하기만 하고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어부님의 신앙이 방언이라고 하는 개인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몸을 볼 수 있는데까지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이제라도 진지하게 토론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자유로우면서도 진지한 토론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부 2014-07-24 00:02:25

Review Time 입니다
1. 좋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신령한 은사 중의 하나이든지, 오순절 믿음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제가 의도한 topic은 Impartation이 지극히 성서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Impartation)하여 영권을 전수한 후에 선교사로 파송 합니다(행13:2-3), 정목사님도 목사로 Ordain(order by virtue of superior authority) 받으셨습니다. 본인도 Impartation을 받으시고는 능력 전수하는 행위를 극 비난하시면, 자신이 받은 안수는 (접신하는 신 내림)을 위한 안수였다는 말 인지요?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자에게, 형님 같은 심정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뒤져라, 차라리 나가 뒤져라, 개나, 소나 다 받는 방언인데, 방언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어느 장로교 부흥사의 일갈 입니다. 목사님도 소나무 뿌리 두어개 정도는 뽑으셔야 하겠네요 (저는 극약처방을 좋아합니다 ㅎ ㅎ) 이 말에 목사님 동료 분께서는 뒤집어지던데요 ㅎ ㅎ, 살아있다고는 하나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 입니다. 혹 살아 본 일이 없는 자일 수도 있겠네요. 정 목사님, 회개하시고, 돌아 서십시요, 제발! 죽지 마시고, 살아 나십시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함께 주셨습니다. 살아나고자 하는 자유의지가 있으십니까. 보혜사 성령님을 영접하시고 신뢰 하십시요. 좋은 길로 인도 하실 것 입니다. 영적 권능을 받고 목회자가 살아나야 교회 성도들도 살아나지 않겠는지요.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삼위일체 교리 입니다. 삼위일체 교리 중에서 성령의 사역을 멸시까지 하시는 님을 위하여 친절하게도 장문의 설명을 준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무답으로 일관하시니, 교리에서 흔들리고 있는 목사님을 지가 어찌 하오리까? 밑의 댓글로 돌아가서 “평신도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해”를 읽어보시고, 문제가 발견되면 바로 잡아 주시고, 문제가 없으면 성령 하나님 부분을 받으셔야 토론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인지요? 성령하나님의 마지막 말세지말의 성도들을 견인해 가시는 사역을 이해 못하면 목사님이 다음 토픽으로 삼으신 “방언이 은사의 기본이며,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하는 말의 뜻을 이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저도 진지해 질 터이니, 목사님도 토론의 주고 받아야 하는 기본 룰을 지켜 주십시요. 기본 룰이 흔들리면 진지해 질 수가 없지요 ㅎ ㅎ

3. 목사님이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 의 말씀은 칼럼에서 인용한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요. 히브리서의 원 저자는 주께서만 아시겠지만, “주후 200년경에 쓰여진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46)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유세비우스에 ... 14), 오리겐은 반복해서 히브리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하였다.” 히브리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예수님은 히브리서가 쓰여지던 초대교회 이후 현재는 물론 재림 때까지 이 땅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당시 히브리서를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히13:8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는” 의 부분을 (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로 변역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도인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가 있습니다.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정 목사님!^^ :)

정 목사님 왈! “죄송하지만, 최소한 내 자신이 영의 실체를 알아야 방언에 마음 문을 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정정해도 되겠습니까? 한마디 말만 더 보탭니다 “성령세례는 목적이 아니라, 성령충만으로 가는 수단이며, 체험만이 아니며 그렇게 사는 삶임을 고백 합니다.” :-)

이 방에는 현재 생명샘 님, 진리 님, 어부 님, 이상 3인의 토론 장 입니다. 생명샘 님만이 홀로 소외감을 느끼게 할 수는 없지 않은지요. “도대체 이 말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답변은 생명샘 님의 Turn으로 돌리기 원 합니다!^^ :-)

이상으로 남자의 수다를 잠시 중단 합니다. :-)


진리 2014-07-23 13:45:23

조금 진지해 진 것 같더니 또 시작입니까? 좀 진지해 지십시다.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도대체 이 말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을 주신 것은, 방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까? 아니면 요엘서의 말씀이 응하는 것으로, 곧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방언을 주신 것이었습니까?

다시 말해서, 성령을 부어주신 목적이 방언을 받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성령을 부어줬다는 증거로 방언을 주신 것이냐? 하는 겁니다. 

어부님과 구요한님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위와 같은,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이런 말은 결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나귀가 하는 말도 사람이 알아 먹었는데, 최소한 한 쪽은 그 방언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믿음에 대한 말만 해도 그렇습니다. 믿음은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영에 속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부님이나 구요한님께서 받으신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왜 영의 실체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최소한 영의 실체 정도는 알아야 님들이 받은 방언에 객관적인 무게가 실릴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성경은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고, 다른 이에게는 믿음도 주며, 또 다른 이에게는 방언도 말하게 한다고 하는데, 왜 님들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받아야만 한다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는 것인지.

죄송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요한님과 어부님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 증거될 때만 온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부 2014-07-23 12:16:05

아예 오순절 사건을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라 하시지 않구요? ㅎ ㅎ

교회의 태생이 오순절 사건으로 인함이지요
"초대교회 사도바울의 시대에는 성도들 모두가 오순절 신앙인, 영언자 들이었습니다" 로 친절하게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할 말이 없으신 것 같은데 한가지만 더하겠습니다.
"지금 하시는 방언을 점집에 가서 그대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락없이 귀신들린 무당이라고 할 겁니다." 하는 님의 말은, 살아 계시며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점집의 무당을 더 신뢰한다는 말 입니다. 어찌 이리도 영적 감각이 없으십니까? ㅉ ㅉ 도대체가 영적 무뇌아 이십니다요 ㅎ ㅎ ㅎ 이 밤도 안녕히 . . . .


진리 2014-07-23 11:58:58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1:11-12)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이는 곧 ~ 믿음을 인하여...

이 토론은 어부님께서 먼저 제기하셔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토론을 제기하신 분께서 본문에는 충실하지 않고 계속 딴 소리만 하시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바울이 오순절 신앙인의 시조? 라는 말도, 방언을 한 것으로만 친다면야, 발람을 태운 나귀가 더 시조 아닐까요?
오순절 때, 바웋은 아직 사울이었으니 말이지요. 

.어부님과 같은 분들을 위해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하시는 방언을 점집에 가서 그대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락없이 귀신들린 무당이라고 할 겁니다.


어부 2014-07-23 11:54:37

초대교회 때의 성도들은 모두가 오순절 신앙인, 영언자 들이었습니다 :-)

어부 2014-07-23 11:48:12

그러니까요!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말하고 있는 본인이 사도바울 자신 입니다. 오순절 신앙인이 "너희와"로 부른 다른 성도들의 믿음을 바울 자신의 믿음과 동일 선상에 올려 놓고,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 . 

진리 님도 자신의 믿음을 사도바울의 믿음의 선상에 올려놓고 동일시하며, 자신의 믿음의 수준에서 바울의 오순절 믿음을 맞추려 하니 핀트가 맞겠습니까? 믿음도 믿음 마련이지요. 본문의 원 저자의 당 시대의 신앙배경을 배제하고 자신 중심의 좁은 시각으로 “믿음”을 대하니 자기 믿음의 경우로 착각 하였지요

정 목사님에게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 목사님은 도대체 "점집" "귀신들린 점쟁이"와 같은 non-biblical한 언어가 아니면 토론을 이어갈 수 없는 분이십니다. 

쿠오트 된 님의 댓글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시는 방언을 점집에 가서 그대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락없는 귀신들린 점쟁이라고 할 것입니다." 

“딴 소리만 하시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라는 토론장에서의 표현은 상대의 주장을 감당할 수 없다는 허탄한 소리에 불과 합니다

알량한 님의 이해력을 돕기 위하여 장문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글에는 일언반구 묵무무답이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


어부 2014-07-23 07:37:56

진리 님은 Serious 하시군요. 정 목사님 자신 이십니까? 임무교대로Take over하셨습니까? 그 좋아하시는 Impart하는 행위, 성경에 없는 단어 "Impartation"을 파생 시키신 장본인 이십니까?

본문 롬1:11을 가져온 이유가 "나누어 주어(Impart)" 에서 파생된Impartation하는 행위가 지극히 biblical 한 것을 알리기 위함인 줄을 정이철 목사님은 이제 인정하시고 바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Some을 무슨” 으로 해석한 “한글번역”의 애매한 의미를 바탕으로 한 애매한 믿음, 참으로 정이철 목사다우십니다. “정이철답다” 신종어가 파생될까 염려 됩니다. 성경을 보는 시야의 깊이가 단층으로 얼마나 알량한지는 아십니까? ㅉ ㅉ

“그러므로 어부님의 주장처럼 신령한 은사가 방언만이 맞다면” 언제 그 누가 그러한 소리를 하던가요? 평소에 익히 알고 있던 대로 진리님은 “억지주장”의 대가임을 스스로 증명 하시는군요? 

“성령세례의 필수가 방언이다” 또는 “방언이 은사의 기본이다”, “방언이 구원의 증거이다” 칼빈니스트에게는 아주 생소하고 도전적일 수 밖에 없는 주장을 지극히 biblical 방법으로 제시한 바는 있지만, “방언만이 신령의 은사” 라는 말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진리 님은 지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끝 날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 죄가 결코 미약하다 할 수 없을진대, 지난 반10년동안 단층인 자의 악행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자각은 하시는지요. ㅉ ㅉ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행위를 자행했는지조차 한번도 생각해 보신 일이 없지요. 이 글이 진리 님의 눈에 보이며, 성령님의 질책하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자신의 행위를 깊이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누구로부터도 질책하는 소리를 들어 본 일이 없으시지요? 이제, 질책하는 소리가 님에게 임하였으니, 듣고, 회개하고, 정녕 살아 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독교' 아닌 '삼위일체의 기독교'다 “ 30%의 빈약한 정답 입니다

삼위일체의 삼위 하나님은 동일하게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고, 아들은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은 아버지가 아니시되, 하나님의 영이시되 예수의 영으로 일임이 되신 보혜사 성령께서, 인류 구원의 마지막 때의 사역의 대 역사의 시대를 , 책임으로 감당하시기 위하여,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서 서로에 사역을 균등하게 분담하신 그 사역을 현재 신약시대에 감당하고 계십니다.

영원 전부터 예정하시고 영원토록 운행하시는 인류구원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운행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여, 달랑 3년간의 공생애를 합한 예수님의 33년간의 역사가 너무 미약하다? 피조물로서 그 누구랴 말 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지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쪼개기 까지 하시며, 피 흘리시고, 몸을 상하게 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시어, 고통을 당하시고, 인류의 죄 삯을 지불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다 이루시므로 드려진 열매가 하나님의 계획과 동일한 공로로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 합니다.

신약 시대에 성령님이 감당하시는 2000년의 사역의 시간이 6000년의 하나님의 시간에 비하여 너무 미약하다? 피조물로서 그 누구랴 말 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지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과 33년 간의 예수님의 시간과 2000년 간의 성령님의 시간이 동일하게 인류 구원을 위하여 분담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로 운행하시는 역사가 삼위 하나님이 동일하고 균등하게 영광을 받으셔야 할 유일하신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계획과 역사 입니다_ 평신도가 이해하는 즉석에서 기록된 삼위일체론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십시요. :)

“신약의 성령은 예수가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오셨다. 그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신 성령은 동일한 제 3의 성령이시나, 예수의 영으로 오신 보혜사 성령이 아니고 구약 시대부터 지상에서 역사하신 성령이다. 본질적으로는 같으나 기능적으로 전혀 다른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마가의 다락방의 120 문도에게 임하신 첫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 이 후 현재까지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기까지는 보혜사 성령의 시대이다. 게시판에서 늘 주장하던 내용을 님이 정리하여 칼럼에 사용하셨지요? 제가 재 정리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일임 받아서 2000년 전에 임하신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예”로 믿고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현재이든지, 장래이든지, 오실 재림의 순간까지도 언제나, 어디서이든지, 영원토록 유효 합니다.

진리 님이 “성경 전체의 맥을 보는 것입니다” 하셨습니까? 그래요? 그렇게 간단한지 다시 한번 봅시다 :)

단층의 좁은 시야로 보면 당연히 “신령한 은사” 가 “믿음”으로 귀결 되겠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칼빈니스트 진리 님의 믿음이 아니지요. ㅎ ㅎ 누구보다도 방언을 많이 하므로 주께 감사 한다는 오순절 신앙인의 시조이신 사도 바울의 “오순절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해를 깊이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오순절 적인 믿음의 소유자이기에 신령한 은사들(gift + s)을 나눠 주기 원한다 한 것이지요. 믿음 안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은사의 유익을 캐어 내시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ㅉ ㅉ

30% 점수의 삼위일체론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말씀의 깊은 숲 속에 있는 생수를 맛 볼 수 있는 은혜가 허락되지 아니 하였습니다요.

저는 신사도나 글로리아타임스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다는 안수행위(Impartation)가 정이철 목사님으로부터 정치적인 교회의 싸움의 대상이 될 만큼 그들의 말씀인용이 이단적이거나 non-biblical하지는 않다는 확신이 있기에 부득불 그들을 지원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이나, 또한 장로교회에서 신봉하는 “교조주의, 극단적인 칼빈주의” 역시 양쪽이 동일하게 경계되어야 할 대상 임을 똑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영의 마음 문을 활짝 여시고 용납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천국을 찾아 각각 제 갈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요. ㅉ ㅉ 강도를 억제하려면 힘이 더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오순절 신앙인 사도 바울”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교조주의” 주제에 무엇인가는 할 수 있겠는지요.

계속 토론을 원 하시면 “무당, 푸닥거리, 쿤달리니, 개소리, 그럴싸하게 ” 등 non-biblical한 잡소리 들이랑, Recycle Bin 으로 보내져야 할 Junk 칼럼으로 마시고, 순수한 성경의 말씀으로만, 그 좋아하시는 조근조근으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진리 2014-07-22 13:50:40

우선은 본문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뜻이 애매할 경우에는 문맥 전후와 더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맥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여길 보면, 성령의 은사들 중 세번 째에 믿음과 여덟 번째에 방언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가지도 믿음이나 방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사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부님의 주장처럼 신령한 은사가 방언만이 맞다면, 성경은 이와 함께 나머지 여덟가지도 함께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롬1:11-12절을 보면, 신령한 은사는 곧 믿음이라고만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성령의 은사들 중에 세번 째로 나오는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부님에게는 먼저 이 둘의 차이에 대한 분별이 급한 것 같습니다. 

어부님,
본문에 그 가리키는 것이 분명할 때는, 그 말씀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말씀을 믿는 크리스찬의 본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7-22 11:50:42

그래요? 그렇게 간단한지 어디 봅시다
Key Word를 선택하라 하신다면 
신령한 자의 눈에는 “무슨 신령한 은사” 나눠 주어” 가 보여야 합니다

Polld을 엽니다

1. 무슨 신령한 은사는 오직 믿음 뿐이다.
2. 무슨 신령한 은사는 고전12:7-10, 엡4:11, 롬12:6-8, 고전12:27-28 의 모두를 포함한다.
3. 믿음은 신령한 은사가 아니므로 나눠 줄 수 없다.
4. 믿음의 은사를 포함한 모든 은사들이 신령한 은사이므로 나눠 줄 수 있다.

@ 주어진 번호 중에서 본인의 믿음대로 2가지를 선택 하시요

어부 님: 2번, 4번을 선택 합니다
진리 님: (__, __ )을 선택 합니다

진리 님은 공란에 몇 번을 선택 하시겠습니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진리 님께 “시비꺼리”를 제공 합니다. ㅎ ㅎ

“어부 님”은 그랜드 주석을 받아 들이며, 
무슨 신령한 은사(some spiritual gift)를 “복수의 은사” 로 믿었음으로 “gift + s” 해석 하였다
“Some을 무슨” 으로 해석한 “한글번역” 이 애매하다. “some” 을 “복수”로 해석함이 마땅하다

“『그랜드 주석』은 롬 1:11의 ‘카리스마’를 (1) 이방인에 대해 복음을 전해 주는 은혜 즉 즉 구원(Harrison)과 (2) 사도의 안수로 주어지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행 8:17, 18, Bengel)의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있다고 해석한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진리 2014-07-22 10:29:09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1:11-12)

어부님,
이 말씀은 님께서 올린 글의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나누어 준 신령한 은사를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본문의 신령한 은사는 영적 은사, 곧 영에 속한 은사를 말하는 것으로 믿음은 영에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11절에서 말하는 신령한 은사는 님들이 말하는 것처럼 방언이 아니라 12절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요한님,
님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무당 푸닥거리 흉내는 그만 내시고 말씀으로 님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또, 이런 식으로 게시판을 계속 더럽히는 것은 님의 인격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밖에는 되지 않음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7-21 21:40:43

정곡을 찌를 줄 모르는 자에게는 "롬1:11-12" 을 논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


어부 2014-07-21 19:41:40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진리 님도 정곡을 한번 찔러 보시지요 !^^ :-)


어부 2014-07-21 10:37:11

유명하신 진리 님! 따라 왔을 뿐인데 굳이 "네티즌의 도"까지 외면하실 줄은 미처 몰랐네요 ㅎ ㅎ 세상에 믿을 넘이 없다니까요 ㅎ ㅎ 당사자가 지 앞에서는 우선 줄행랑을 치기 바쁘시니 이곳까지 원정 올 수 밖에 없지 않았는지요 좋으신 동무까지 대리인 노릇을 자처하고 있으니 바늘 가는 곳에 실이 따라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렇게 당하고도 기력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ㅉ ㅉ 정이철의 신내림을 전수 받으신 모양 입니다. 그려. ㅎ ㅎ 신학을 모르신다구요? 글롯과 디아렉스토 라는 단어의 의미를 지금쯤은 알고 있을텐데, 익히 아실 만한 분이 말씀을 외면까지 하시는지요. 그러면 쓰나요. 크게 경칠 당할 일만 남았네요.


진리 2014-07-21 10:25:33

그러니 말씀을 전하러 다니시면 됩니다. 

사단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말로는 말씀이 좋아졌다고 하면서, 말씀은 전하지 않고 왜 무당 푸닥거리 같은 허튼 짓을 하고 다니십니까?
이것이 님들이 받은 방언이 사단 마귀가 준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님들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말씀을 전하러 다니십시오. 

인자를 거역하는 것과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길래, 하나는 사함을 받고 하나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지?

이 말씀이 님들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올리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왕에 올려 주셨으니 설명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명샘 2014-07-21 08:26:36

진리 님
사탄이 준 방언을 하면 왜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경 말씀이 더 좋아질까?
희한한 사탄도 다 있네.

마태복음 12 장 32 절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출처: http://www.newsm.com/bbs/view.html?reply_page=1&idxno=5431

시민 저항 운동 

하나님의 성회는 하나님의 계명에 도덕적으로 저촉되는 시민 저항 운동에 대하여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원주 감영에 핀 태극기


        성경은 믿는 자에게 가르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로마서 13:1,2).  그 명령 위에 그리고 그것에 대하는 말씀은 민간 권세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명했을 때 말한 성령의 감동된 제자들의 응답이었 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도행전 4:20).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15).  민간 정부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들을 하는 것을 금지 할 때에,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을 하라고 명할 때에, 우리는 정부에 대하여 평화스럽게 저항하는 데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배경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시민적 저항에 대하여 성경으로 보증하는 경우와 불법적 항의를 하기 위하여 이기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경우를 주의 깊게 구별해야만 합니다.  많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가 시민적 저항의 행동이 있기 전에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기도하며 성경말씀에 의지하는 교회는 이기주의 적인 동기로 행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해줍니다.         


1989년 총회의 결의사항 9는 정부가 성경의 적용과 개인의 양심을 침입하는 한 분야에 대해 반대하는 목회자들의 행동에 관한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총회는 목회자들이 모든 성경적 수단으로 낙태를 반대하는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인정하며, 모든 성경적이 아닌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살해”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중재 행위에 비폭력적이며 평화스러운 행동으로 참여해도 좋다는 부분까지 개인 목회자들의 재량에 맡긴다.”         


중요한 표현인 “성경적인 수단으로” 와 “중재 행위에 비폭력적이며 평화스러운 행동”은 명백히 개인의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시민적 저항에 적절한 모양은 무엇입니까?  좀 더 직접적인 대답이 없을 경우에 하나님의 성회는 성경과 성령의 도움을 받은 개인의 양심이 지침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관심사


원주 감영에 핀 태극기


정부는 허락하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일이라고 선언하신 일들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행할 때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중의 반응은 다른 사람이 그들의 개인 신앙에 짐을 지우려고 할 때에 보통 부정적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그들의 확신을 언제나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진리에 대하여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형이어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복음에 반목적 (反目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는) 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위해서 죽으신 영혼인 것입니다.         


또 다른 관심사는 지나치게 영적인 기독교인은 폭력적인 수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예를 사용할지도 모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약속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나쁜 죄인들을 향하여서는 연민과 이해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분노와 판단은 자신들의 의로움은 주장하면서 그들의 논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판단하는 종교적인 위선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냉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폭력과 대치를 피하기 위해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주위에 산재해 있는 악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은밀한 제자는 아마도 결코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17).  균형이 열쇠입니다. 기독교인들 은 예수 그리스도의 감독하에서 성경적인 확신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1989년도 제43차 하나님의 성회 총회에서 채택된 낙태와 시민 저항 운동에 대 한 결의안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이라는 용어는 성경과 현대 크리스찬의 언어에서 자주 발견된다. 아직 이 용어의 의미와 적용에 대한 불일치가 넓게 퍼져있다. 이러한 불일치 가운데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은 점에 대한 해석상의 단순한 문제인 반면, 어떤 것은 전통적인 복음주의와 오순절적인 믿음의 근본적인 교의에 도전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성회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관심을 분명히 하는 것이 적절하다. 


나라의 언어학적 의미


히브리어의 말쿠트(malkuth)와 헤라어의 바실레이아(basileia)의 원래 의미는 왕의 권위, 통치 혹은 지배 등이다. 나라의 영토, 국민, 경영은 부차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지배 범위이다.(시 22:28 참조)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권위에 대항하는 우주적인 반역에 참여하고 있다.(요일 5:19, 계 11:17-18)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사람은 그 반역에서 돌아서고 성령에 의하여 거듭나며 나라와 그 경영의 일부가 되다. 나라에 사람이 참여하는 것은 자원해서 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든지 안하든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다. 


오직 하나님 나라가 있으나 성경에는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즉 천국, 하나님 나라, 인자의 나라(마 13:41, 한글 번역에는 “그 나라”로 되어있음:역자주) 아들의 나라(눅 22:30 한국 번역에는 “내 나라”로 되어있음:역자주),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엡 5:5), 우리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계 11:15) 등으로 표현되어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구약에서 “여호와의 나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말쿠트 야웨(malkuth yahweh)라고 하는데 구약에 한번 나온다(대상 28:5) 물론 지상의 영토 혹은 소유지에 대한 말로써 “나라”라는 말은 많이 나타난다. “주권 혹은 지배”는 자주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의 개념에 대한 번역이다.(시 22:28 45:6, 66:7, 103:19, 145:11-13, 대상 17:14, 29:11) 구약 전체를 통하여(특히 시편과 예언서) 하나님의 개념은 그의 피조물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명백하게 표현되어있다. 비록 구약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왕되심이 분명히 나타나 있지만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가 장래에 성취 될 것에 대한 강한 강조도 또한 나타난다. 이러한 예상은 예수의 초림과 재림과 관련된 메시아적인 기대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9 시 9:6,7, 11:1-12, 24:21-23, 45:22-23, 슥 14:9) 단 4:34 은 하나님의 통치를 “영원한 권세”이며 “대대에 이르는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신약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개념이 구약에 스며있는 반면, 하나님의 나라는 덧붙여진 의미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에서 중요성을 취한다. 예수의 사역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4:17, 막 1:15)는 선포와 함께 시작된다.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천국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신 적은 없지만 그는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셨고 (마 13 장, 막 4 장), 그의 사역에서 천국의 권세를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그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천국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7, 눅 9:2, 10:9,11)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로 묘사한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임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천국이라는 단어의 다양한 문맥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 통치는 ①사람들이 지금 들어가는 왕국 혹은 영역이며 ②시대의 마지막 의인들이 들어가는 장래의 종말론적인 질서로 보여지고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는 현존하는 실재이며 장래에 성취될 약속이다. 천국은 성령에 의하여 예수의 인격과 활동으로 지상에 이미 임하였다. 그러나 충만한 천국은 이 시대의 마지막에 있을 최종의 종말론적인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 


현재 천국의 상태


예수를 따르던 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한 것”처럼 (눅 19:11)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찬들이 지상통치에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로 안내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어느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인지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고 대답하셨다.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자 하시는 분이 지상에서 그의 구속사역을 완수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회복될 하나님의 통치는 곧 현실로 나타날 것이었다. 사단의 지배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미 시작되었다. 


오늘날 구속사역은 완성되었으나 궁극적인 천국의 실재는 한정 되어있다. 현재 천국의 권세는 늙는 것이나 죽는 것을 막지 않고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이 주권적인 활동이나 신자의 기도와 믿음의 응답으로 자연법칙을 파기하시지만 천국은 여전히 연약한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의 재림 이전에 세상을 최종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의로운 정치적 및 사회적 활동도 중요하지만 천국이 주로 힘쓰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이루고 있는 각 사람들의 영적 변화이다. 천년 왕국과 천국의 궁극적 도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눅 21:31) 천국은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것을 현재적이며 또한 미래적이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시기는 (현재시대)천국의 권세와 현재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세 사이의 격렬한 대결로 특징 지워진다. 마귀와 하나님과의 싸움이 현 시대를 특징짓는다. 그것은 싸움의 시기이자 또한 성려의 시기이다. 신자들은 어두움의 세력을 대적해야 한다.(엡 6:12)


우리는 이 싸움에서 와전하고 즉각적인 성공을 보장받고 있지 않다. 질병, 죄 억압 혹은 귀실들림에 대한 승리는 현재의 천국의 권세와 앞으로 다가올 최종적인 승리와 부활에 의해서 확인될 승리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질병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리도록 부름 받았으나 우리는 우리가 기도해준 모든 사람이 다 낫지 않는 현실에 부딪친다. 우리가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하여 질병에 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눈에 띄는 승리에 즐거워하며 어떤 사람이 치료받지 못했을 때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에게 지지 아니하며 현질서의 투쟁에서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에도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아니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생활의 본질은 어두움의 세력에 대항하여 움직이는 것이며 완전한 구원은 항상 가능하지만 매 순간마다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다.(롬 8:18-23 참조)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히 11 장, 행 12:2, 고후 11:23-12:10) 미래로 연기된 구원을 바라보며 고난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우리는 악의 파괴행위를 방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 시대에 천국의 도구로서 우리는 충성스럽게 악과 고통에 대항하는 싸움을 싸울 것이다. 


성령과 하나님 나라


오순절 주의자로서 우리는 천국의 시작과 진행하는 사역에서 성령의 역할을 인정한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임사셨다.(마 3:16, 막 1:10, 눅 3:22)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그의 권세있는 활동은 병든 자를 치료하고 죄 가운데 있는 남자와 여자를 영적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그가 세례받을 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예수의 사역에서 의미있는 점이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광야에 가셨다.”(눅 4:1) 예수의 사역에서 성령의 역사는 천국의 출현을 증명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령의 역할을 묘사하였다. 구약 예언에 대한 성취의 부분으로서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고 말씀하였다. 천국의 권능은 십자가 부활과 승천에서 나타났는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성령의 시대는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의 시대이다. 교회를 통하여 성령은 예수 자신의 천국 사역을 계속하신다. 


미래의 실재로서의 천국


성경적인 은사, 기름부음 받은 말씀의 선포, 적합한 표적과 기사 등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활동 중임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시이다. 사단의 왕국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에 의해서 이미 침략을 당하고 있다.(요 16:11, 골 1:13, 2:15) 그러나 사
단의 최종적인 멸망과 모든 악에 대한 완전한 승리는 미래의 종말론적인 성취에 속한 것이다.(계 20:10)

우리는 계시록 20 장에 묘사된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전천년설을 믿는다. 우리는 현시대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다음에 일어날 성경 예언의 주요한 성취는 지상에서 교회가 휴거되는 것이다.(고전 15:51-52) 우리는 교회의 휴거가 임박하였으며(막 13:32-37) 대환란 전에 휴거가 있을 것이며 (살전 4:17-18, 5:9) 그것이 하늘과 땅의 표적들이 이 시대의 끝이 가까이 옴을 나타낼 때(눅 21:25-28) 우리가 바라는 “복스러운 소망”(딛 2:13)임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의 육체적인 휴거와 이어서 천년동안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가시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을 포함한다.(슥 14:5, 마 24:27,30, 계 1;7, 19:11-14, 20:1-6) 사단은 반역하고 타락한 이후 처음으로 결박당하여 무력하게 될 것이다.(계 20:2) 이 천년왕국의 통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져오고(겔 37:21-22, 습 3:19-20, 롬 11:26-27) 인간의 타
락 이래 처음으로 우주적인 평화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사 11:6-9, 시 72:3-8, 미가 4:3-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방인의 시대가 끝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나라에 불러들이실 것이며,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11:24-26)

천국과 교회

하나님 나라는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인 영적인 몸이다.(엡 1:22-23, 골 1:18) 그것은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것을 데려가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었던 사람이나, 믿을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도 있었고 교회의 사역이 완성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시대에는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고 있다. 교회가 천국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할 때“(마 24:14) 마지막 때의 극적인 사건이 시작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포함한 그의 영원한 나라를 영광 가운데 다스리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들

현재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들은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도 아니며 같지도 안을 것인데 이 세상 나라들을 “우리 주의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된다.(계 11:15)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정치제도 안에서 움직여 나가지만 이 정치제도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천국복음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가서 각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비록 하나님 나라가 현재의 정치적인 실재는 아니지만 천국의 시민은 그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현재 모든 인간의 정부는 어느 정도 악한 자의 영향 아래에 있지만(단 10:13,20, 요 12:31, 14:30, 엡 6:12) 성경은 정부가 악한 자를 벌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가르친다.(롬 13:1-7) 정부의 권세자들은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하나님의 종들이다.(롬 13:6) 정부와 사회에서 발견되는 정의와 예의에 대한 이상들은 이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유산이다.(롬 1:20, 2:14) 그들이 반항적일 수도 있으나 세상 나라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으며 불의와 사악함에 대하여 밝히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야 될 것이다. 

성경은 사회의 구족 속에 침투된 사회악과 싸우는데 있어서 크리스찬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명백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으나 진실한 신자들은 사용하는 수단에 있어서 달라야 할 것이다. 크리스찬들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마 5:13,14) 그들은 가난한 자와(약 1:27, 2:16) 억울한 자(약 5:4-6)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불의한 법을 공격하며(사 10:1,2), 공의와 선을 추구해야 한다.(미가 6:8, 암 5:14,15)

세상의 나라들은 사단의 영향을 받기가 쉽다.(요 12:31, 14:30) 그리스도만이 악의 권세를 초자연적이며 대대적으로 멸망시킬 것이다.(단 2 장, 계 19 장 참조) 현재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자랑하는 좋은 구조일지라도 결국 보다 나은 천국 통치를 이루기 위하여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세속적인 신권정치나 혁명적인 의견에 근거하여 과격한 문화 변혁을 꾀하는 청사진이 아니다. 그 대신에 그것은 이간의 인격과 삶을 급격하게 변화시킨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기준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과 여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흐름을 간섭한다. 이 과정을 메시야의 초림으로 시작되었으며, 교회시대를 통하여 진보되었으며 그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안에 있지만 이에 속해서는 안된다.(요 17:11, 14:16) 롬 14:17 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에서의 하나님의 통치)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됨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잘못된 관점

적극적이 사고방식이나 적극적이 고백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성경적인 실재를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천국의 영광이 임하도록 주장하는 것을 여기서 잘 깨닫고 그것이 진실된 크리스찬들을 오도하며, 혼동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이 천국의 건강과 번영을 소유하고 있다고 단순히 고백한 보상으로서 그 것들이 임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단순한 의미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신자들은 그들의 “신적 권리(divine right)”를 주장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작은 신들(little gods)"이라고 하는 신학적 주장은 명백하게 성경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고 약속하셨지만(빌4:19) 우리의 물질적인 탐욕을 채우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고난과 십자가를 지는 것과 자기부정과 같은 중요한 성경적이 주제를 깍아 내리거나 파괴하는 어떠한 가르침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크리스찬들에 대하여 우월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 가르침은 하나님께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며 공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6:25) 생활의 필수적인 것들로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을 나타낸다. (마 6:30) 그렇다면 호화스러운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느끼시겠는가? 만일에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는다고 약속을 주장함에 있어서 물질적인 소유에만 관심을 집중한다면 우리는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 나라에 앞서 이러한 것들을 구하는 것이 된다.(마 6:33)

나라가 임하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마 6:10)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 천국은 사단의 영토를 침범하였으며 최종적인 승리를 확신시켜 준다. 천국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치료를 받거나 건짐을 받거나 접촉이 될 때 얼마간 임한다. 그러나 장래에 모든 악과 반역이 제거될 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야 말로 크리스찬들의 뜨거운 소망이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함께 우리는 현재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강림하시는 것 즉 교회의 휴거는 영원하고 완전한 천국의 완성과 실재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천사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라고 선포할 것이다 사랑받는 계시자 요한과 함께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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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심판 

영원한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입장을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 선언”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제 15항, 마지막 심판 : 

악한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그들의 행한 대로 심판받는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마귀와 그 사자들 그리고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영원한 심판으로 불과 유황이 타는 못 에 던져질 것인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마25:46, 막9:43-48, 계19:20, 20:11-15, 21:8) 여기서 우리는 심판이 마귀와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며, 둘째 사망이라 불 리는 불못에 있는 것임을 주목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정의하고 설명을 하고자 한다. 

악한 자는 사단과 운명을 같이 나눈다. 

성경은 불못이 사람을 위해 예배된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 되었다고 말씀한다.(마25:41)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선하셨다. 
첫 번째 하늘과 땅은 좋게 창조되었다.(창1:31). 율법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 여 주어졌다.(신6:24)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벧후 3:9) 사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선을 위하여 모든 일에서 역사하신다.(롬8:28)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단이 앞으로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을 더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불못에 그를 가두러 놓으실 것이다. 사단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의 운명을 같이 나눌 것이다.(요16:8,11)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사단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요8:44) 


사단이 받는 벌을 함께 받는 사람들은 “악인”이라고 한다.(마13:49,50) 이것은 그 행동이 악하고 가치 없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자이며(믿음이 부족하여 비겁하게 행한다), 믿지 아니하는 자 들이며, 흉악한 자들이며(혐오스럽고 진저리나는 사람), 살인자들이며, 행음자들이며, 술객들이며(마술을 사용하는 사람과 마약을 쓰는 사람), 우상 숭배자들이 며,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이다.(계21:8, 마8:12, 13:41,42, 22:13, 23:15, 25:30,33, 눅13:27, 계21:27, 22:15 참조) 바울은 이것을 구원에 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와 복음을 계속적으로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자라고 요약하고 있다.(살후1:8) 

악한 자의 심판은 끝이 없다. 

“근본진리의 선언”에서 주어진 첫 번째 성경 인용문인 마25:46에서 “영(헬라 어, anonion)벌”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절대적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영원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서 예수께서 똑같은 말을 “영(헬라어, aionion)생” 이라는 말에서 사용하는데 여기서 이것은 직접적이면서도 정확하게 전자와 병행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생명 이 영원한 것처럼 그 벌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악인을 회복시켜 주 겠다는 어떤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마25:41에서 그 벌은 “영원한(헬라어, anionion)불”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악인이 죽은 후에 가는 중간상태를 하나의 불로서 특정짓고 있다. (Hades, hell, 눅16:23,24)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있을 불과 구분해야 한다. 눅 16장에서 예수의 말씀은 악인이 의식이 있는 상태이며,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 으며,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영원한 불 은 예수께서 게헨나 혹은 “불의 게헨나”라고 부르셨던 것과 같은 것이다.(마 5:22,29,30, 10:28, 18:8,9, 23:15, 막9:43,45,47, 눅12:5) 이 불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꺼지지 않는 특성을 가졌다. 이것은 그 불이나 벌이 끝날 수 있는 가 능성이 전혀 없음을 가르친다. 그 형벌은 불과 마찬가지로 영원하다. 만일에 불 이 악인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라면 불이 영원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는 같은 불을 “풀무불”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13:42,50),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가는 비참한 후회는 “멸망의 자식”으로서 영원한 파멸에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였다.(요17:12, 행1:16-20) 예수께서는 이렇게 울며 이를 가는 것을 “바깥 어두 운데서” 일어나는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마8:12, 22:13, 25:30) 이 어두움은 최종적인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새 예루살렘의 빛이신 어린 양과의 분리를 가리 키는 것이다.(계21:23) 


또 다른 신약성경 구절은 영원한 벌은 영원한 심판으로 언급한다. 즉 영원토록 유효한 심판이라는 뜻이다.(히6:2) 여전히 다른 구절은 “침륜”(문자적으로 파괴, 사망, 분리를 의미함) 그리고 “멸망”(영원한 사망) 이라고 말한다.(딤전6:9) 이러 한 “영원한 멸망”(혹은 분리)은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능력의 영 광으로부터”의 분리이다.(살후1:9) 이러한 구절들에서 “사망”이라는 단어는 영 적 사망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죄인은 현재도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이며, 그리스도와 분리되었거나 그리스도가 없는 자이다. (엡2:1,12) 영원한 심판은 최종적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둘째사망 
성경은 이렇게 최종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둘째사망”이라고 부른다. 요한계시록에서 불못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계20:14)

예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게헨나 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눅12:4,5)고 경고하셨을 때 예수께서 는 게헨나를 둘째 사망과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육체적인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죽음은 상태나 종류에 있어서 판이 하게 다르다. 육체적인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이 몸에서와 우리의 생활환경에서의 분리라고 한다면, 둘째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와 새 창조에서 맛보게 될 생명으로부터 최종적이고 영원한 분리이다. 이 둘째 사망에 던져지는 사람 중에는 짐승의 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있다. (계14:9-11) 이 사람들은 천사들과 그리스도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즉 봇물에 갇혀서 새로운 창조물과 격리되어 있지만 나사로가 음부 (Hades)와 아브라함 몸 사이에 있는 깊은 구렁을 건너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들이 거부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눅16:23) 그들은 결코 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 다....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로다.”(계14:11)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 문이다. 이들은 영원히 성도들에게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 중 어느 것도 최종적인 심판이 선언된 뒤에 복구시키거나 회복시키는 것을 약속하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볼못이나 게헨나와 관련하여 신성한 기관은 나타나 있지 않다. 불은 막9:44,48의 구더기와 병행하고 있다. 그것은 깨끗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형벌로서의 붙인 것이다. 거기에는 또 다른 기회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를 흔들어 깨워“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며 외치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고후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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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 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 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 12:14, 벧전1: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 12:14, 벧전 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 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 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 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 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 3:16, 롬 10:11-13, 벧후 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 3:28, 갈 2:20-21, 엡 2:8, 빌 3:9, 히

10:38, 벧전 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 3:5-8, 고전 3:1-3, 히

3:12-14, 12:1, 요일 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 17:12, 딤전 4:1, 5:12,15,

히 6:4-6, 10:26,27,38, 벧후 2:20, 요일 5:16)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 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

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자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 1:1,2)


이 진리를 또한 롬 8:29 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 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 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 10:38, 롬 1:17, 갈 3:11,히 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 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 6:12,13, 8:13, 골 3:1-5, 벧후 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뿐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장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 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 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 8:1 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 5:9-11 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영
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 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 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 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 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 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 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 10:21 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 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 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 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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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명상


동양과 서양철학 사이의 간격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들 중에 하레 크리쉬나(Hare Krishna)와 초월명상의 시도가 있다. TM 이라고 불리는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은 특별히 최근에 미국 전역에 퍼져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전에는 동양의 신비적인 의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이제 TM 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다. 


초월명상의 특성


초월명상의 표면적인 정의는 매일 두차례씩 20 분 동안 긴장완화를 위한 자연적인 운동이라고 묘사되었다. 이 과정 중에 만트라(Mantra)라는 한 단어가 반복하는데 이러한 리드미컬한 반복이 긴장완화의 노력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생물학적, 심리학적 법칙에 근거한 과학적인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종교인들이 참여해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비종교적인 활동이라고 반복해서 선전한다.


소정의 요금을 지불하고 초월명상에 가입한 후에 초월명상에 대한 세심한 지도를 받고나서 그 기법을 성실하게 사용하면 생활의 모든 영역 즉 신체적, 심리학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인 영역에서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얻는다는 보고가 있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연구 결과라고 하는 것을 제시하며 정치가, 교육가, 운동가, 연극배우, 심지어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수많은 증언을 제시하며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초월명상을 깊이 연구해 보면 그에 관한 모든 것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월명상을 진지하게 조사한 결과 그것은 긴장완화의 도구 이상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활동이다.


초월명상은 그 뿌리를 힌두교에 두고 있다. 실존, 신, 사람, 구원에 관한 이의 모든 가르침은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Vedas)에서 따온 것이다. 초월명상에 있어서 의식적 초입례의 포함과 은밀하게 만트라를 사용하여 동양의 사교에서 행하는 신비적인 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초월명상의 세계적인 지도자인 마하리쉬(Maharish)는 그 기법의 유익을 설명할 때 과학적 언어보다는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초월명상은 심리학적, 신학적, 사회학적인 면에서 의문이 생기게 한다. 이러한 의문들은 교회가 무시할 수 없는 도전으로서 교회에 제시되고있다. 


초월명상의 뿌리


초월명상은 기원상 종교적인 활동임에 틀림없다. 그것의 개념은 힌두교에까지 추적된다. 힌두교 예배에는 수백만의 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중에 셋만이 특출하게 부각된다. 


첫째 브라마(Brahma)인데 모든 것의 창조자이다.

둘째가 쉬바(Shiva)인데 파괴, 질병 그리고 죽음의 신이며 또한 채소와 동물과 인간번식의 신이다. 인도사람의 생각에 죽음은 다시 태어나는 것의 전조일 뿐이다. 따라서 죽음의 신은 또한 생식의 신이기도 하다. 

셋째가 비쉬누(Vishnu)인데 사랑과 자비의 신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모든 곳에 퍼져있고 비인격적인 신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브라만(Brahaman)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있다. 초월명상의 문헌은 창조적지성(Creative Intelligence)으로서 브라만을 언급한다.


힌두교에서는 신들을 예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금욕주의 의식, 의례적인 헌신 그리고 명상 등을 포함한다. 명상은 수세기 동안 예배의 수단으로 주목 받아왔다. 모든 요가의 주된 특성은 명상이다. 힌두교의 전통에 있어서 명상은 신들이 신과 연합하여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순환에서도 피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정의하자면 명상은 초월 혹은 신과의 연합을 경험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초월명상에서 강조된다. 지금까지 초월명상의 마지막 부흥은 중세기에 있었다. 중세 힌두교의 가장 뛰어난 학자로서 상카라(Sankara)가 있는데 그는 힌두교의 뛰어난 옹호자였다. 동양의 명상술을 회복하기 위한 현대의 노력은 스와미브라마난다 스라스와티(Swami Brahmananda Saraswati)라는 사람과 더불어 가장 큰 추진력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 사람은 보통 구루 대브(Guru Dev)라고 하며 인도에 있는 4 명의 주요 종교지도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초월명상의 대중적인 지도자는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Maharish Mahesh Yogi)인데 구루 데브의 제자이다. 보고에 의하면 마하리쉬가 구루 데브의 명령을 받아 간단의 명상의 형식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히말라야에서 은둔한 후에 1955 년 초월명상을 소개하였다.


인도에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자 그는 그의 가르침을 영국에 수출하였다. 가장 괄목할만한 개종자 중에는 비틀즈(The Beatles)가 있다. 마하리쉬는 1959 에 미국에서 그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1973 년에 아이오와주의 페어필드에 초월명상의 교육적인 기관으로서 마하리쉬 국제 대학교(Maharish International University)를 설립하였다.


초월명상의 가르침


초월명상은 그 기법이 세워진 개념 때문에, 성격상 종교적인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것의 신학적 전제는 힌두교의 그것이다. 


신에 대한 가르침
마하리쉬는 힌두교 신학의 전통에 따라서 신 혹은 창조적 지성(Creative Intelligence)은 영원하며, 무한하며, 알 수 없으며, 성이 없으며, 비인격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신은 속성, 질, 특성, 형태 등이 없다. 힌두교의 사상에서는 신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없다.

실재에 관한 가르침
마하리쉬는 모든 창조물이 신과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범신론적인 관념을 버터가 우유에 스며들고 수액이 나무에 스며들 듯이 신이 모든 존재에 스며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설명한다. 기본적 실재(Basic reality)는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들은 단지 한 본질 안에 있는 두 개념이다. 상대적인 것은 신이 창조물 중에 그 자신을 나타내는 모습인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그 속성상 신의 개념이 나타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다. 마하리쉬의 견해에 의하면 신은 그것이 실재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모든 창조물 안에 내재한다. 나무의 줄기, 가지, 잎, 꽃 그리고 열매는 항상 변하지만 신과 같은 수액은 항상 동일하다. 이와같이 이 세상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와 같이 보일 뿐이다. 

 사람에 관한 가르침
이와 같이 마하리쉬의 견해에 따르면 신은 창조물 중에서 여러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거한다. 사실 사람의 영혼은 브라만을 구성하는 거대한 바다 중 하나이다. 각 사람은 자신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일부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주적인 생명과 그의 관계는 전체 몸에 대한 각각의 조직의 관계와 같다. 각 사람은 그가 자신에게 하는 것같이 창조물 안에 있는 모든 신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나와야 한다. 

 구원에 관한 가르침 
마하리쉬에 의하면 이상과 같은 사실을 인간이 무시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그는 환상과 무지의 세계에 묶이게 된다고 한다. 창조물이 실제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그는 신과 동일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가 이러한 무지함 속에 있는 한, “업”(Karma)의 생명에 묶이게 되는데 여기서 업은 탄생,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순환을 끝없이 반복하게 하는 활동이다. 사람의 구원은 생명의 환상을 아는 것과 사람이 신과 하나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사람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것은 그의 업(Karma) 혹은 그의 전생에 있어서의 활동의 결과이다. 혼이 지식에 있어서 창조적 지성(Creative Intelligence)과 합하지 않는 한, 각 사람은 개인으로서 지속될 것이며 전 생애 업(Karma)의 열매를 계속 받게 될 것이다. 모든 고난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 안으로 뛰어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의 결핍은 인간의 생명 안에 있는 모든 질병의 뿌리이다. 그러한 경험이 없이는 사람에게 힘과 지성이 부족하게 된다. 그는 피곤하고, 염려하고 긴장하게된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신적 의식을 접촉하기 위한 마하리쉬의 기술은 초월명상이다. 

초월명상의 방법

초월명상이 긴장완화의 기술 이상의 것임은 보다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것의 전제가 종교적일뿐 아니라 그것의 방법도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마하리쉬는 그의 명상술 자체를 사람 안에 있는 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명상의 기술
마하리쉬는 명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 자신의 정의를 조심스럽게 보여 준다. 명상은 집중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정신집중은 그의 기법이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명상에 있어서 마음은 전적으로 소극적(Passive)이어야 한다. 어떤 의식적인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은 창조적지성의 거대한 바다에 자연스럽게 뛰어 들도록 단지 허용되어야 한다. 인간지식의 내용물인 인간 사고의 모든 활동은 절대가 아닌 실제의 상대적 영역 안에 있다. 따라서 명상 안에 그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신의 능력이 주입되어진다. 성공적인 삶을 살리려 계속적으로 그러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 

신과의 일체감을 얻기 위해서는 사고의 중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마하리쉬는 그의 윤리학에 관한 토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세계의 각 종교마다 윤리의 규약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대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같이 거기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성문화된 절대적 기준이 없다. 초월명상을 통하여 창조적 지성에 의해 영향을 받은 마음만이 불변하는 윤리와 더불어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초입례(Initiation Ceremony)
초월명상에서 초입례는 성격상 분명히 종교적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힌두교의 예배의식 혹은 푸자(Puja)로 되어있다. 그 의식에서 초월명상의 초보자는 6 개의 꽃과 3 개의 싱싱한 과일과 하나의 하얀 손수건으로 된 제물을 가져온다. 교사는 이것을 구루 데브의 사진 앞 제단에 놓는다. 촛불과 향의 분위기 아래서 교사는 산스크리트(Sanskrit)로 떠나간 힌두 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그는 형상이 없는 브라만의 현현으로서 브라마, 비쉬누 그리고 쉬바의 힌두 트리무르티(Trimurti)를 예배한다. 그러나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구루 데브에 대해서인데 그는 작고한 마하리쉬의 교사이다. 그의 사진의 출현은 실제로 예배의 대상으로서 우상의 개념을 암시한다. 

 만트라
초입례의 마지막 행동으로서 초월명상 교사는 개종자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를 위하여 선택한 비밀 만트라를 반복하기 시작한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만트라는 최면적인 유익을 얻기 위하여 선택한 무해하며 의미없는 단어라고 선언하지만 그것은 여러 힌두 신들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베다(Vedas)에서 따온 단어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미없는 말이 될른지 모르지만 만트라는 힌두교 개념에서 분명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월명상의 문제점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 초월명상은 심리학, 신학, 사회학적인 면에서 문제를 야기시킨다. 

 심리학적인 문제
심리학적 문제의 가능성은 초월명상에 있어서 정신적인 소극적 자세를 강조하는 데 있다. 이 기법은 명상하는 동안 사람의 마음이 완전 방임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 일상적인 생각도 함께 초월하게 된다. 초월명상에서 배출되는 것은 지성적인 이해의 도를 넘게 된다. 크리스찬에게 초월명상의 방법은 역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나타났던 침묵 의식의 회복이 아니다. 그 기법은 지식이나 이성과 동떨어진 신비적인 경험을 유발한다. 이와같이 초월명상은 우상숭배 이상으로 해로운 것이다. 성경시대에 귀신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다.(신 32:17, 고전 10:19,20)

초월명상의 또 다른 심리학적인 문제점은 근본적인 문제해결보다는 염려에 대한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심리학적 스트레스의 원인을 무시하고 오직 임시변통만을 제공할 뿐이다. 초월명상에 대한 외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초월명상으로부터 얻어지는 유익은 단기간에 그칠 뿐이었다. 

 신학적 문제
초월명상이 가져다주는 신학적 문제는 다양하다. 마하리쉬는 그의 신학적 가르침을 창조적 지성의 과학(Science of Creative Intelligence) 혹은 SCI 라고 불렀다. SCI 가 가르치는 신, 실재, 사람,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거스리고 있다. 그것은 인격적 신을 부인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임을 보여 준다. 그는 아시고(마 6:8,32) , 사랑하시고(요 3:16), 뜻하시고(마 6:10) 그리고 활동하신다.(창 1:1) 더구나 SCI 는 성경 계시에서 근본적인 창조자-창조물의 구분을 부인한다. 신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하는 SCI 의 범신론적인 전제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과 구분된다. 창조물은 하나님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시 19:1) 하나님은 창조물과 혼동함으로써 SCI 는 옛날 사람들의 죄를 반복하고 있다.(롬 1:23,25).

SCI 는 자신을 계시하지 않은 신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자연에서, 양심, 역사, 기적, 예언, 성경,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확실하게 말한다. 마하리쉬는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성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있다. SCI 의 교리는 인간이 중보자가 필요로 한다는 개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람은 단지 초월명상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 SCI 에서는 회개라는 말이 없다. 업(Karma)에 의하면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 거기에는 자비나 은혜를 위한 공간이 없다. 사람의 현재 상태는 그의 업혹은 과거의 행동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재 상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르침들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하리쉬는 기독교인들이나 어느 종교 추종자도 아무런 갈등 없이 초월명상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그의 신학에 있어서 수만의 선하고 악한 신들을 수용하는 힌두의 배경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을 더 받아들이는 것이그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의 종교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지, 교회나, 절이나 , 모스크나 사원에서 어떤 예식을 따르던지 별로 관계없다고 한다. 

힌두교는 그의 거대한 우상으로 세계의 종교를 덮고 있다는 것이 마하리쉬의 관점이다. 따라서 힌두교는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가장 관대하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베다는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 세계의 신성한 책들이 포함하고 있는 진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베다에 이미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한 종교의 기본적 진리는 모든 다른 종교의 기본적 진리라고 한다. 

 사회적인 문제
창조적 지성의 과한(SCI)을 퍼뜨리기 위한 마하리쉬의 대담한 계획으로 인하여 초월명상과 관련된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 그는 그의 교리를 세계의 모든 질병들 즉 신체적, 심리학적, 영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인 질병에 대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1972 년에 마하리쉬는 SCI 와 초월명상 프로그램을 지상의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세계적 계획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 천명당 SCI 의 교사가 한 명이 있으면 이 계획을 이루는데 충분하다고 계산하였다. 이 사업을 위한 3600 개의 세계적 계획 센터(World Plan Center)를 짓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에 있다. 마하리쉬 국제대학, 비디오 테입 프로그램 그리고 초월명상이 소유하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이 계획을 위해서 쓰여질 것이다. 

대학 외에도 4 개의 다른 기관이 세계적 계획의 가지들로서 형성되었다. 학생들의 국제 사회(Student's International Society)는 젊은이들과 함께 일한다. 국제 명상학회(The International Meditution Society)는 폭넓게 장년층에게 환심을 사고 있다. 영적 갱생 운동(The Spiritual Regeneration Movement)은 생활에 대한 영적 접근에 관심을 가진 사람 중 특히 은퇴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다.

창조적 지성의 과학은 위한 재단(The Foundation for thew Science for Creative Intelligence)은 사업가와 전문인을 위하여 기획되었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건강과 행복 이상의 것에 관심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야망은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고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하리쉬는 주어진 시간에 사회에서 인기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사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 혹은 교육 혹은 정치일 수도 있다. 

이 세대에 초월명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무엇이 가장 적합하겟는가?
마하리쉬에 의하면 그것은 정치이다. 이와같이 그는 정부기관을 통하여 초월명상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그의 정력을 쏟고 있다. 이미 실험적인 조건으로 초월명상에 대한 가르침이 정부의 경비로 미국의 어떤 학교들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 SCI 와 초월명상(TM)학과가 일리노이, 뉴욕 매사추세스, 플로리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공립학교에서 합법적으로 개설 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염려하는 시민들이 그러한 계획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적절한 것인지에 관하여 법적 질문을 하고 있다. 

초월명상의 도전
초월명상은 3 가지 면에서 교회에 도전하고 있다. 
첫째는 교리의 정확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에 관한 것이다. 교리와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의 신학적 잘못을 보고 초월명상 기법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피할 수 있다. 
둘째로 교회는 신자의 생활에서 성령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일을 강조해야 한다
초월명상은 순수하고 성경에 근거한 성령의 경험에 대하여 믿을 수 없는 대치물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로 교회는 성경의 시작부터 가르쳐 온 안식일, 안식의 위대한 원리를 다시 선포해야 한다. 일과 놀이에 미친 현대인들은 점점 안식일의 원리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칠일 중에 하루는 쉬고 예배함으로써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쇄신을 가져다주는 적합한 도구를 인간에게 주셨다. 초월명상을 주장하는 사람들 밖에서 행해진 어떤 사람들의 연구는 그들의 기술은 아무런 신체적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의 원기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따른다면 크리스찬은 초월명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시 1:2 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권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명상의 참된 내용이다. 이러한 묵상의 유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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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무오성 (1970)


제1장 성경의 무오성

  우리는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영감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오가 없으며 오류가 없다.


성경의 의도 


1. 우리는 원본을 참조한다.  본문비평학은 원문이 신빙성이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으며 성경의 무오성은 원문에만 한 한다고 말한다.(렘36:2)   

2. 우리는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생각을 넣어주셨다.(암3:8)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도록 인도하셨다.(출4:12, 25)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조명하심으로 독자가 기자의 마음에 있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고전2:12, 엡1:17, 18) 이와같이 사상과 언어는 계시와 영감으로 된 것이다.  

3. 우리는 영감이 성령의 특별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감에 의해서 성령은 성경의 기자들을 인도했다고 본다.  이와같은 성령의 감독은 기자들의 다양한 배경, 능력, 개성들을 전적으로 포용했고 성경의 정경에 나타낸 것처럼 그들의 쓴 모든 것에 적용된다.   

4. 우리는 “무오성”을 “과오로부터 면제된” 뜻으로 정의하며 “무류성”은 “과오를 범할 수 없는 확실한” 뜻에 근사한 것으로 정의한다.  이 두 단어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오성은 성경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무류성은 성경의 신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오성과 무류성은 모든 성경에 적용 되며 계시적인 무오성과 사실적인 무류성을 포함한다.  성경은 진리이다.(시 119:34,160, 요17:17,19, 골1:5) 


역사적 고찰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논쟁은 주로 최근에 있었던 현상이지만 교회사를 살펴보면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와 함께 영감설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오랫동안 고수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교부시대에는 성경이 신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성령의 독특한 저작품으로 간주되었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영감은 성경의 문체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마 5:18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Protepticus, IX, 82, 1) 그레고리 나지아누스(Gregory Nazianus)는 성경의 작은 선까지도 성령에 의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의미에 대해서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권면한다.(Oat., 2, 105) 순교자 저스틴은 인간과 하나님의 영감을 구분했고, 성경 기자들을 감동시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했다.(Apology I. ch. 36) 이레니우스 성경을 허위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Apology, ch, 18) 초대 교부들이 성경의 영감설을 믿었으며,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세 혹은 스콜라학파 시대에는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논쟁을 위한 자료집 정도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영감설에 관한한 비생산적이었다.  이 당시는 교회내의 다른 권위들과 성경의 위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비록 아벨라드와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인간적인 요소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중세시대의 분위기에 의해서 영감설이 손상을 입었다고 할만한 증거는 없다.   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영감설을 채택하였는데 그 안에는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가 포함되었다.  쯔빙글리는 순수한 기독교 교리를 변호할 때 지속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인용하였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이 바로 그 저자라고 완전하게 확인할 때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남기기를 기뻐하신 유일한 기록이라고 기술하였다.(Institutes, I, 7, 2, 4) 루터는 영감설을 지지하였으며 정경성 문제가 해결되자 성경을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개혁자들이 영감설의 주제에 대한 신학에 몰두했다고 할 수 없어도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성주의 시대에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설을 적용하는 것이 공격을 받게 되었다.  문예부흥의 정신에 의하여 언어학적이며 본문에 의한 연구가 홍수를 이 루었다.  이성주의적인 접근방식으로 성경의 본문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여 성경의 영감설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이 오류로 가득 찼다고 하는 주장에 불을 지르게 되었으며 따라서 비판자들은 영감설의 교리를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불행히도 정통주의는 똑같은 이성적인 방법으로 반발했다.  그들은 성경은 오류가 없으므로 영감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가 낮은 견해의 영감설을 용납 해야 한다거나, 무오성의 교리를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이 단지 성경에 요구하는 것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성경 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 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해야 옳다.  만일에 성경이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방식이며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서적이며 영감설 및 무오성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할 것이다. 


주석학적 고찰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한 시발점은 성경 스스로의 증거이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와 충만한 영감을 분명하게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 안에 는 무오성의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뢰할만한 증인이며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에 의한 것임을 단언하였다.  마 5:18 에서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점은 히브리어 글자중 가장 작은 것이며 획은 글자와 글자간의 차이를 분간하기 위해 긋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의미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일점일획은 성경의 세미한 부분을 가리키지만 의미는 같다.  예수님은 성경을 하찮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의 완전한 영감 과 무오를 믿지 않았다면, 그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   성경은 각 부분의 기본적인 특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장은 요10:34,35 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을 가리키면서 율법의 어느 한 부분만 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음을 증거한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이 부분적으로만 영감을 받은 것이며 어느 부분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여기서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마22:32 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정당한 이유는 성경의 자세한 부분 즉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데 근거를 두고 있기 때 문이다.  마22:43-35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한 질문에서 대화의 강조는 “주”라는 한 단어의 사용에 있다.  갈3:16 에서 사도바울은 그의 논쟁점을 강조하기 위하 여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는데 의존하고 있다.  시제, 특별한 단어, 단수와 복수 등 세세한 예증들은 성경이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없이 완전히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완전 영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말씀 중에서 딤후 3:16이 있다.  이 구절 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혹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 (Breath out of God)것임을 가르친다.  이 구절은 번역할 때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이라고 하거나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해도 의미는 똑같은 것이다.  한 성경에서 진실한 것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에 대해서도 진실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특한 저작품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해 볼만한 구절이 있다.  벧후1:21은 구약의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대로” 말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영감된 말과 비교해 볼 때, 이 문맥에서 이 구절은 성경의 독특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되었고 움직여졌다.  성경 자체의 변함없는 증거는 명확하다.  즉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개념을 말씀하였고(계시), 성령은 이 개념을 객관적인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도록 인도하셨고(영감),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를 통하여(조명)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원래 계시된 것을 받게 된다.   이상의 구절 외에도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 보면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다른 구절에 보면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그리고 “경에 이르기를” 등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반대 의견

 

1. 우리는 원본을 갖고 있지 않음으로 무오성의 교리는 가치가 없다.   이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유능한 학자들에 의하여 발달한 본문 비평학은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본문(헬라어, 히브리어)이 의미상 잘못이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구하는 본문은 신뢰할만하며 주의깊고 세심하게 연구할만하다.  둘째로, 만일 무오성의 교리를 배척한다면 진리에 대한 의문이 객관적인 것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옮겨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어느 부분이 옳고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누가 결정 할 수 있는가? 어느 부분이 신뢰할 만하며, 어떤 부분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을 이성주의 아래 두거나 사람의 평가에 맡긴다면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성경의 주장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2. 무오성의 교리는 성경을 저술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개성을 제거하는 영감과 교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성령의 감독에 의해서 하나님의 그의 말씀을 기록할 사람을 준비하셔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대로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게 하셨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각 저자의 모든 개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성경에 의하여 사용되어 다양성과 개인적 특성이 허용됨과 동시에 하나님이 저자에게 맡기기를 원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파괴시키지 않게 하신다.(벧후1:21) 

3. 성경은 과학, 역사, 윤리, 추론, 인용 등에 있어서 오류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신뢰할 수 없다.   첫째로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주장인 반면에 실증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기도 하나 과학과 시간은 항상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해 왔다.   둘째로 성경은 종교적이 아닌 주제에 대하여 교재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이러한 영역 안에서 말할 때 성경의 진술은 비록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였고 불완전하지만 그 진술은 오류가 없다. 

4. 셋째로 성경은 그 당시의 배경과 함께 연구해야 한다.  문화, 언어, 문화적 진행 등의 문제를 주의 깊게 고찰해야 한다.  만일 신실하고 지성적인 연구자세로 성경에 접근한다면 성경이 무류성을 갖춘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5. 영감설에 대하여 확실한 입장을 가진다면 무오성의 교리는 불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3 가지 방향으로 해야 한다.  보다시피 역사의 증언은 설득 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영감설과 무오설을 분리시키지 않은 채 영감설에 대하여 강한 자세를 유지해 왔다.   둘째로 성경을 연구하면 영감설과 무오설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성경의 기자들이 성경을 단순히 무오하거나 무류한 어떤 책이라고 생각했을 것 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접근방식이다.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한 대로 잘못을 범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시31:5, 100:5, 요7:28, 8:26, 롬3:4, 고후1:18, 요일 4:6, 5:20, 계6:10)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한 도구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을 만드는 작업을 주관하셨고 모든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은 모순이 없다.  그러나 작은 부분일지라도 오류가 있 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모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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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 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 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때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 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 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이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 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 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행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 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 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 (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 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 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 으로부터도 구원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 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시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잠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사 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 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 을 알 수 있다.(학개1:14), 행17:16, 고전2:11 등. 그러나 학1:14, 행17:16 에 서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성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갈6 장) 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 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 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 역자주. 눅4:33)과 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마4:24, 8:16, 9:32,33, 10:1, 막1:32, 3:15, 눅6:17,18, 9:1 등) 이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 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마8:28,32, 9;32, 12:22, 막5:15-18, 눅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엡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엡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롬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 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 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눅11:21,22 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 어갈 수 있다.(눅11:24-26, 마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 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슨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행5:13,14 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엡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고후10:3-6, 엡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마 4 장)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약4:7, 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엡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 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 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골 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 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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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과 재혼: 성경적 원리의 적용


결혼

1. 결혼은 기본적인 인관관계이다.   

①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이 사람을 지상에 살도록 창조하신 것의 특성은 서로에 대하여 남자와 여자를 의도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들의 관계는 사회적이며 또한 육체적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 (창2:18)   처음 여자는 남자에 대하여 돕는 배필(배우자)이었으며, 옆구리에서 취한 자였으며,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었으며 그의 완전한 짝이었다.(창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특권과 책임을 나누도록 의도하셨다는 것이 확실하다.   

②하나님은 평생 일부일처의 연합을 이루는 결혼을 의도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사랑과 충성으로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마태복음 19:5 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연합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아교를 붙이다” 혹은 “가깝게 묶여 있다”는 의미를 지닌 것을 사용 하였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일부다처제의 첫 번째 경우는 가인의 계보이었음을 볼 수 있다.(창4:19) 그러나 여전히 일부일 처제가 이상적임을 보여준다.(시128:3, 잠5:18, 31:10-29, 전9:9) 예수께서도 처음 하나님의 이상적인 결혼도 일부일처제였음을 말씀하셨다.(마19:8) 


2. 결혼은 언약을 포함한다.   결혼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해지는 엄숙하고 구속력 있는 계약 즉 언약이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세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2:14) 에스겔은 결혼의 개념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6:8) 이상에서 살펴 볼 때 남편은 아내에게 맹세하고 (충성을 서약하고) 깨뜨릴려고 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언약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희생의 의미가 없다.  따라서 좀더 신성하고 구속력 있는 “언약을 맺는 것”(cut a convenant)에 대하여 사용된 단어와는 구별된다.  여기서 의미하는 사랑은 근본적으로 히브리어 헤세드(hesed)라는 말로써 “충성스럽게 언약을 지키는 사랑”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아무런 가치도 없을 때에도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혼 

1. 하나님은 이혼을 싫어하신다.   

①“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시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시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말2:1416)   이 구절은 이혼이 자기 배우자에 대하여 궤사(속이는 것, 충실치 못한 것)을 행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것은 또한 잘못된 심령에서 나오는 위법한 일이다.  더욱이 나쁜 것은 그것이 “경건한 자손”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가정이 깨어 지면 건전한 자녀를 양육할 수 없다.   

②“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이혼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멍에를 부러뜨림으로서 해롭게 된다.  이 목적은 짝으로써 그리스도와 서로에게 복종함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엡5:21-31에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다. 


2. 율법은 이혼을 제한하였다.   율법은 이스라엘 가운데 이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고대 사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던 많은 다른 풍습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들의 잘못된 관습에 대하여 제한을 두시고 그들을 지도하시려고 시도하셨다.   그들이 이혼에 대하여 예수와 논쟁했을 때 그들은 아내를 버릴 때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모세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분명한 잘못을 범하였다.  예수는 모세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뿐이지 그 당시에 성행하던 것처럼 모든 경우에 해당하 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마19:3,7,8) 이것은 신명기24:1-4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모세가 인용한 히브리어는 이혼을 명한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결혼을 유추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그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인정할 뿐이었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부정한 것 [이 히브리어 단어는 변을 덮지 않은 것과 관련된 것이며(신23:12-14), 노아가 벌거벗은 것(창9:21-23), 그리고 술취한 여인으로 상징한 에돔(애가4:21) 등과 관련된 것이며, 이는 간음이 아닌 도덕적, 성적 불결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간음을 행한 자는 율법에 의하여 죽이게 되어있기 때문이다.)을 발견했을 경우 이혼증서를 그녀에게 써주어 집으로 내어보내고 그 여자가 집을 나가 남편을 구하였는데도 그 남편이 그 여자를 싫어하여 이혼증서를 그녀에게 써주어 집에서 내어 보내거나 혹은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인 그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를 내어보냈던 첫 번째 남편이 그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다시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기 전에 아무리 타당한 이유처럼 보여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쩌면 그 여자를 다시 받아들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가 이미 재혼했으며 그는 그 여자를 아내 로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3. 예수는 이혼을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 배치되는 것으로 금하였다.  예수는 마 19:5,6 과 막10:6-9에서 이것을 확실하게 하였다. 


4. 바울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금하였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니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7:10,11)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혼하게 될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는 다시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5.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 먼저 이혼을 제기하 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고전7:12-16) 이와같이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이혼할 것을 고집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굳이 막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6. 예수께서는 음행이 관련되었을 때 그리스도인의 이혼을 허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며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①(마5:32, 19:9 참조) 이것은 허용 일 뿐이지 명령은 아니다.   음행에 대한 헬라어 “포르네이아”는 특별히 반복적인 간음을 포함하기도 하나 보통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 습관적으로 행하는 성적 부도덕성을 의미한다(포르네는 창녀를 의미함) 몇몇 학자는 여기서 음행의 의미를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것 으로 제한하지만 이것은 이 단어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뜻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하여 예외로 규정한다  이 사람들은 마태복음에 있는 두 구절을 근거로 교리로 만드는 것이 적합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년왕국의 길이가 비록 성경 한곳(계20:2-7)에만 언급되고 있지만 천년 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같은 원칙이 다른 성경적 가르침에게 적용된다.  어느 한 구절이 어떤 단일 주제에 대한 진리의 모든 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어떠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에 이 르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취해야 한다.

 

재혼 

1. 이혼이 재혼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율법은 용납한다.  이것은 이미 인용한 바 있는 신 24:1-4의 구절로 보아 명확하다.  동일한 구절은 율법이 재혼에 대하여 모종의 제한을 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2:11은 불신자와 재혼하는 것을 정죄하였다.  제사장에게는 이혼한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금지되었다.(레21:7) 


2. 예수는 그의 기본적인 가르침에서 이혼한 사람들의 재혼을 금하였다.  예수는 재혼을 간음행위 즉 첫번 결혼의 언약에 대한 죄로 정죄하였다.(마5:32, 19:9, 막10:11-12, 눅16:18) 그러나 예수는 기본적인 문제가 이혼 그 자체임을 인정 하였다.  왜냐하면 이혼한 사람이 결국 재혼하게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간음을 행하고 새 배우자에게도 간음을 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의 근본 목적은 첫 번째로 이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3. 마5:32은 예외적인 조항을 더해 주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며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이것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여자와 이혼한 남편인 이 여자로 간음하게 아니한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이미 간음하였기 때문이다. 


4. 마19:9 역시 이러한 예외적인 조항을 지니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사본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음행한(습관적인 성적 부도덕)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이혼하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여기서 예외는 성적 부도덕성 때문이지 단순한 한번의 과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성적으로 부도덕한 습관은 회개, 고백, 용서 그리고 회개 과정을 통하여 다루어져야 하며, 이와 같이 하여 그 결혼을 유지시켜야 할 것 이다.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은 이 예외조항이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에 있어서 음행 혹은 성적 부도덕성은 침대와 식탁을 따로 할 수 있는 권리는 부여하지만 결혼관계를 끊거나 그것을 해체시킬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다루고 있는 다른 구절과 맞추기가 어렵다. (고전7:2-5) 그러므로 대부분의 개신교는 예외조항이 “다른데 장가드는 자”라 는 구절에 적용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이혼이 필요한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재혼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마19:9 에서 예수께서 사람이 재혼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구절은 이혼과 재혼을 다루고 있으며 문법상 예외 조항은 양쪽 모두에 적용된다.  “내버리다”는 말에 대한 헬라어 “아폴루오”라는 단어는 마 5:31과 막10:2-12에 인용된 신명기 구절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거기서 “내버리다”는 말은 확실히 결혼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수는 이혼의 본질을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것으로 바꾸지 않았다.  예수는 단지 음행(포르네이아, 습관적인 성적 부도덕) 이외의 다른 변명이나, 이유나 원인을 이혼의 조건으로 하는 것을 거부한 것뿐이다.  또한 롬7:1-3 고전 7:39 은 결혼관계가 죽음에 의해서 해체된다는 선언에 대하여 어떤 예외도 허용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혼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결혼관계가 죽음에 의해서만 깨어진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기본적인 원리를 진술한 것으로 예외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 롬7장은 율법 아래에서 남편이 이혼할 수 있지만 아내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율법에 의해서 남편이 죽을 때까지 메여있었다.  또한 율법 아래서는 간음에 대한 벌은 죽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죽음의 형벌은 결혼관계를 끊기 위하여 가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끊어 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5. 고전7:15 도 예외를 담고 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는 말은 강한 표현이다.  롬 7:2에서 바울이 이혼과 재혼에 관한 주제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야 한다.  바울은 단지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케 해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신자의 종속을 설명하기 위하여 남편이 죽은 후에만 자유케 되는 율법 아래에 있는 여자의 독특한 위치를 사용한 것뿐이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서 남자는 그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으나(신24:1-4), 여자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죽음만이 여자를 남편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건전한 성서해석학의 원리는 여기에 이혼과 재혼에 관한 바울의 견해가 나타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 이혼하고자 할 때 신자가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다면 그는 이에 대해 자유롭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혼하려 하고 주도하는 이가 믿지 않는 배우자이기 때문에 신자의 자유는 그(혹은 그녀)를 떠나게 하는 자유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혹은 그 녀)는 어차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신자가 원한다면 자유롭게 재혼 할 자유가 있는 의미처럼 드려진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는 재혼 할 것을 권하지 않는다.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고전7:27,28) 


6. 재혼은 새로운 계약 혹은 언약이다.  어떤 사람은 재혼한 자는 간음 중에 있다 고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간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지만 진정한 회개는 도적이 도적질을 그만두는 것처럼 그 죄를 그만두는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재혼한 사람이 새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을 계속적으로 간음을 행하고 있다고 논쟁한다.  그러나 결혼과 도적질은 그렇지 않다.    잘못되어진 재혼은 전에 맺은 계약에 대하여 간음행위가 성립된다.  이것은 전에 맺은 계약을 파괴한 것임으로 전 배우자는 자유하게 된다.  한번 재혼한 사람은 또한 새로운 계약에 대하여 충실할 책임이 있다.  신24은 결혼계약으로 돌아 가는 것이 잘못임을 보여준다.(호세아는 다시 가서 아내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것을 타락한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한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과 잘못된 계약을 맺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이 충실히 이행되기를 바라셨을 뿐 아니라 여호수아를 돕기 위하여 우박의 기적과 해를 길게 하는 기적을 행해 주셨다.(수9,10장) 이사야는 아하스가 앗수르와 계약 맺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였으나 아하스는 듣지 않고 맺었다.(사7장) 그리고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그 계약을 깨드리고 도움을 청하러 애굽에 가려는 것을 경고하였다.(사30,31)


교회안에서 이혼과 재혼의 위치 

1. 모든 중생한 신자는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구원받기 전에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을 포함한다.  바울은 할례받은 자, 노예의 신분에 있던 자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법적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구원받을 당시에 지니고 있는 조건을 그대로 받아주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전7:17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은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을 받아주셨다.(행10,11 장) 그 당시 로마인들 중에는 이혼과 재혼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고넬료의 집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일에 관련된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 살기를 원하는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와 계속해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을 주지 않았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 중 대다수가 아직도 이전 배우자가 살아있는 불신자와 결혼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을 받으셨다면 우리가 누구관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은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2. 재혼한 사람은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맡을 수 없다.  장로(목사에 해당)나 집사의 직분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요구에 의하여 제한된다.(딤전3:2,12) 어떤 사람은 이것은 일부다처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 당시 일부다처제는 일반적으로 행해지지 않았지만 이혼과 재혼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굉장히 성행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교회에서 이러한 직분을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장로와 집사에 대하여 특별한 요구를 하고 있다.  그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그들이 교회 밖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의 증거를 위해서나 복잡한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이러한 조건과 다른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도덕성의 기준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집사의 특별한 사역에 대한 자격문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재혼한 사람을 교회의 모든 사역에서 제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몸의 모든 지체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사역은 성령에 의해서 주신 것이다. (롬12:6-8, 고전 12:11, 엡4:16) 

총회에 의하여 수정 채택된 조례에 대한 성경적 원리의 적용 제 8 조 5항

 

회원 

1. 지금 많은 크리스찬들 중에 지난 날 죄악 가운데 살 때 결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이런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지역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복잡한 결혼관계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추천한다(고전7:17,20,24) 

2. 우리는 현재 내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회원으로 받지 말아야함을 추천한다.

 

재혼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 기준을 낮추는 것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그리스도의 일에 많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합법적 수단과 가르침을 통하여 이혼을 배격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음행이나 간음의 연고 외에 다른 이유로 신자가 이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마19:9) 이러한 예외적인 환경이 있었거나,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에 의하여 이혼당했을 경우 우리는 재혼 문제를 신자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결정하기를 추천한다.(고전7:15,27,28) 


개교회의 지도력 

1. 신약성경이 이혼하고 재혼한 신자가 교회의 감독이나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받는 것을 제한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지역교회가 이 기준을 준수할 것을 추천한다.(딤전3:12, 딛1:5-9)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신자에게 적합한 다른 봉사의 기회를 제공할 것을 추천한다. 

2. 추천은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나 지역교회는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특권을 유지해야 한다. (헌법 제11조에 의거하여) 


결혼식 주례 

1. 우리는 조례 8 조 5항 2 목에 기술된 예외적 상황에 해당되는 경우가 아닌 한 하나님의 성회 목사가 이혼한 경력이 있으면 전 배우자가 현재 살아 있는 한 경우 결혼을 주례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정받지 못한(위와 같은 경우) 결혼의 주례를 행한 본 교단의 목사는 결백하게 속아서 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교단에서 제명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성회 목사는 결혼식 집례하기 전에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성경의 지침에 따라 결혼식 신청자와 상담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의 의견에 결혼 당사자들이 적절한 사례나, 지혜나 진지함 없이 결혼을 하려 한다고 판단 될 때 결혼식 집례를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2. 우리는 8조 5항의 2목에 있는 예외적인 환경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의 재혼이 목사의 양심을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사실이 그렇다면 목사는 결혼식을 집례해서는 안된다.


목사의 자격 

  하나님의 성회의 결혼한 목사로서 목사나 그 배우자의 전 배우자가 살아 있는 경우에 그 목사직을 거부한다.(7 조 5 항의 2목과 3 목 참조) 

1. 우리의 한 지역총회가 다른 지역총회에서 자격증을 받은 설교자에게 목사안수를 행할 때 목사 안수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안수 받기를 원하는 지역총회에서 적어도 1 년간 자격을 유지해야 하며, 전에 자격증을 받았던 지역총회의 임원으로부터 확인 증서가 있을 때까지 목사 안수를 보류할 것을 추천한다. 


2. 우리는 결혼한 사람이나 그의 배우자 중 누구든지 그 사람의 전 배우자가 살아 있는 경우 지역총회가 그러한 사람에게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다. (제8조 5 항 3목 참조) 


3. 본부총회 실행위원회는 신청자의 전 결혼의 취소가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거나 유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성경적으로 부합한지, 혹은 이혼이나 결혼해체의 경우 그 상황이 결혼 취소로 분류 될 수 있는 상황인지 결정할 권위를 보유한다.  이러한 신청은 거짓이나 사기에 의한 불법적인 결혼이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하고 만족할 만한 증거와 함께 제출되어야 한다.  본부총회 실행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상소는 본부총회 총대회의에 보내질 수 있다. 


①)어떤 사본들은 “다른 데 장가드는”이라는 부분을 생략했지만 시내 사본을 포함한 다른 사본들은 이 부분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문맥상 적합하다. 이 예외적인 조항을 생략하는 것은 아무런 사본적 증거가 없다.(존 머리, 이혼. ) 

  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처음부터 전인(The whole man)에 대한 신유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해 왔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선포하라 명령하신 복음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의 선언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헌법 제12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신유는 복음의 필수부분이다.  질병에서 놓임 받는 것은 속죄 안에서 제공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이다.(사 53:4-5, 마8:16-17, 약5:14-16). 이 선언에 포함된 모든 사실과 양상을 여기에서 모두 다루는 것이나, 이에 관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성명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것임을 보이고저 한다. 


복음의 필수부분 


  예수와 제자들의 사역을 관할해 볼 때 신유는 과외로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신유는 예수가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자로, 약속된 메시야로 그리고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오신 것을 증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요10:37, 28). 성경은 예수의 신유의 사역과 그의 구원하며 용서하시는 사역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실제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의 권 위에 대한 증거이다.(막2:5-12). 반복적으로 그의 치유의 기적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병행하며 똑같은 동정을 보여준다.(마4:23, 9:35-36)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온 것은 그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병고침을 받기 위함이었다.(눅5:15, 6:17-18)  그는 아무도 거저 보내지 아니하시고(마12:15, 14:14) 그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기형된 것과 불구된 것과 상처받은 것을 고쳐주셨다.(마15:30,31, 21:14) 그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으며 귀신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마4:24) 예수는 질병이 자주 죄의 결과 임을 인정하셨고(요5:14), 또는 사단의 활동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셨다.(눅 13:16) 그러나 또한 예수는 질병이 항상 죄의 직접적인 결과만은 아님을 인정하셨다.(요9:2,3) 이것은 때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 다.(막2:12)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하게 하신 사역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요9:2,3) 이것은 치료하시는 주 혹은 위대한 의사로서 하나님의 계시한 구약과도 일치한다.(출15:26, 시103:3, 여기서 이 두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 분사들은 그것이 치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가리킨다.) 예수는 신유가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과 계획의 중요한 부분임을 보이셨다.   


치유는 또한 예수를 약속된 메시야와 구세주로서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의사로서 예수는 이사야 53:4의 예언은 성취하셨는데 이 구절은 히브리어를 보면 매우 강조적이다. 즉 “그는 진실로 우리의 아픔을 자신이 짊어지셨고 (들어서 가져 가셨고), 우리의 고통을(무거운 짐으로서) 옮기셨다.” (여기서 ‘질고 ’라는 말은 아픔이나 질병과 같은 단어이며 ‘슬픔’이라는 말은 욥 33:19 에서 사용 된 육체적 고통과 같은 단어이다.)   


마태는 이를 예수의 치유사역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아픔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마8:17 을 문자적으로 직역한 것임). 이사야는 이것을 예수의 구속사역과 연계시키고 있다.(사53:5)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즉 “그가 채 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의 문맥과 벧전 2:24,25 의 적용은 특히 치유 혹은 죄로부터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 53:4 의 육체적 아픔에 대한 강조점을 볼 때 이 문장은 우리의 죄나 제멋대로 행한 것에 대한 영적 및 육체적 결과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인지 아닌지 혹은 자신처럼 메시야 앞에 보냄을 받은 자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행하는 메시야적인 사역에 주의를 환기 시킴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셨다. 치유는 복음의 필수 부분이며 중요한 증거였다.(사 61:1,2, 눅4:18, 7:19-23). 신유는 계속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필수 부분이었다. 예수는 12제자와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며 아픈 사람을 고치게 하셨다.(눅9:2, 10:9) 오순절 이후 많은 기사와 이적이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졌다.(행2:43) 누가는 사도행전을 예수께서 사도들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통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의 장으로 취급하였다.(행 1:1,8 2:4)   


그러나 기적은 사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약속은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다시말하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본질과 목적에 맞게 구하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것이었다.(요14:12-14) 하나님은 빌립과 같은 집사를 사용 하셔서 복음을 전하며 치유하게 하였고(행8:5-7), 아나니아와 같은 무명의 제자를 통하여 사울(바울)을 치유하게 하셨다.(행9:12-18) 마가는 신자들의 사역에서 치유를 지지하고 있다.(막6:13, 9:38,39, 16:15-18)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덕을 세우기 위한 성령의 나타남 중에 포함되며(고전12:7),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는 것과도 관련된다.(고전12:3)   


율법 아래서는 제사장이 관심의 대상인데 그 사역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이 위대한 대제사장은 무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히4:14,15)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속한다. 히브리어 성경 안에 나타난 속죄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구속과 회복을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흘리셨는데 속죄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문자적 으로 속죄소)로 세우셨다.(롬3:25)   


속죄소(Mercy seat)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6장에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제사 장이 일년에 한번 속죄제물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기 위하여 들어갔다. 속죄소는 법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금으로 입힌 부분이다. 법궤안에 십계명을 적은 돌판이 있는데 이 계명은 바로 사람들이 어긴 하나님의 법이었다. 율법을 어기면 심판을 초래하고 결국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죄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시고 자비와 축복을 주실 수 있다. 속죄의 원래 목적은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었다.(레 16:30, 롬5:11 여기서 “속죄”라는 말은 롬11:15 이나 고후15:18,19 에서 “화목 ”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과와 벌에서 속죄를 통하여 면제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대한 심판을 사람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보내셨다. 그때 모세는 아론을 회중 가운데로 보내여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더니 그 전염병이 그치게 되었다.(민16:47,48) 우리는 또 한 이스라엘의 수효를 계수할 때 그들의 구속과 그들에게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속전으로 반세겔을 내야 했음을 읽을 수 있다.(출30:12,15) 이 와같이 속죄를 아픈 것을 포함한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다.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구속을 위하여 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속죄를 제공하셨다.(롬3:25, 시65:3, 78:38, 79:9, 롬3:21-28) 이 속죄는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음이 호세아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는데 호세아는 그의 아내가 노예시장에 팔리게 되었을 때 상당한 값을 지불하고 그의 아내를 도로 샀다.(호3:1-5, 13:4, 14:4) 이것은 구리뱀 사건에 의하여 더욱 설명 되고 있다. 즉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살기 위하여 바라보는 것뿐이었다.(민 21:9)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요3:14-16) 거기서 예수께서 전인(Whole man)을 위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속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구속과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롬3:24, 엡1:7, 골 1:14, 히9:15)   


다시 말하거니와 속죄는 죄의 결과를 위하여 드려진다. 질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역시 죄 때문에 세상에 질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께서 오셔서 멸하고자 하시는 마귀의 일들 가운데 있으며(요일3:8), 이와 같이 속죄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오실때까지 우리 몸의 구속을 아직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롬8:2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받게 된다.(고전 15:42-44, 51-54) 그러므로 구속과 속죄 사이의 병행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롬 8:23에서 말씀하시는 구속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구속과 관련지어서 이제 죄의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할 때 우리 몸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15:51-43, 고후5:1-4, 요일3:2) 신유는 이러한 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복음의 모든 축복과 같이 속죄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또 사53:4 은 구체적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 안에서 죄뿐 아니라 속죄가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신유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신자들의 특권 


  구원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처럼(엡2:8), 모든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도 그의 은혜 혹은 공로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을 받을 만한 존재도 아니다. 신약에서 어느 누구도 치유해 줄 것을 당연한 자세로 청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구하기 위하여 예수께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로서 치유를 바라보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은혜스러운 특권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졌다. 신자의 특권으로서 치유의 약속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제외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히5:8, 벧전2:19,21, 4:1214, 19)   


또한 우리는 신유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법칙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대용물 (substitute)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 잠시동안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셨다.(막6:31) 이드로는 모세가 자기의 책임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으면 탈진하게 될 것을 보았다.(출18:18) 또한 신유는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모세는 그가 죽을 때까지 힘이 쇠하여지지 아니하고 눈도 밝았었다.(신34:7) 그러나 이러한 특권이 다윗왕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왕상1:1-4) 전도서 12:1-7 에 잘 묘사된대로 점진적인 노화현상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임하는 공통적인 경험이다. 치유는 여전히 노인에게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유된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과 같이 노화되어 간다. 우리는 아직 몸의 구속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인내로 기다리면서 신음하며 고통중에  탄식하고 있다.(롬8:2125) 우리가 이 몸을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몇 번씩 치유를 받든지 상관없이 만일 예수께서 더디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맛 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낙심 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촉진시키고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소생시키시므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롬8:11) 사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후4:16)   


실제로 신유의 특권을 보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이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혈루증을 치료받은 여인에게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막5:34)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복음을 듣는 것이 앉은뱅이의 마음에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불어 넣어준 것을 보고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였다.(행14:9,10) 마음의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은 (롬12:2, 골3:10)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로마 백부장의 큰 믿음에서도 볼 수 있으며(마8:5-13) 부스러기라도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볼 수 있다.(막7:24-30, 마15:28)   


신유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사렛과 변화산 기슭에서 불신앙이 그 역사를 방해했던 사실을 통해서 증명된다.(막6:5,6, 막17:14-20) 거기서 예수께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계신다.(막 9:29) 기도는 구약에서 중요한 치유의 수단 중 하나였다. 많은 시편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예언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약 5:15 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큰 믿음은 주님의 단순한 말씀을 통하여 치유를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적은 믿음이나 약한 믿음을 가진 자로부터 등을 돌리시지 않으셨다. 병든 자들이 믿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음을 종종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다. 어떤 사람은 만져 주셨고(막 1:41, 8:22),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막1:31, 눅14:4) 혹은 그의 손을 그들에 게 얹으셨다.(막6:5, 8:25, 눅4:40, 13:13)   


그는 여러 가지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데 그중의 어떤 것은 믿음을 요구하였으며, 어떤 것은 순종을 요구하였다.(막7:33, 8:23)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옷이나 그를 만지는 것이 믿음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막3:10, 5:28, 6:56, 눅6:19) 베드로의 그림자로 그 당시 같은 효과가 있었다. (행5:15) 또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마찬가지였다.(행19:12) 그러나 믿음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도록 돕는데 사용된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수많은 수단이 사용된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에 어떤 수단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약5:14도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여기서 아픈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치유하게 하는 것은 기름 (성령의 상징)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그 일을 저도 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요14:12-14, 16:23,24)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의 특성과 성격을 나타낸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이 우리가 그것을 우리 안에 가지게 된다.(요15:7) 그리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과 일치하며, 우리는 우리의 의도하는 바를 구할 수 있고 그것을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치료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정시키려고 한다.(특히 출15:26 의 약속인 치료 혹은 건강의 언약) 그러나 백부장의 종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 대한 치료는 치료가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특권임을 보여준다. 사실 치료를 갈망하며 예수께 반응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의 죄를 아직 다루시기도 전에 치유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의 경우, 요5:2-9, 14) 어떤 사람은 신유를 의학적인 치료와 충돌되거나 경쟁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의사는 자기 기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주님이 위대한 의사이심은 사실이다. 또한 아사왕이 병들었을 때에 저가 여호와 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아사왕을 정죄한 것도 사실이었다.(대하6:12) 그러나 아사는 이미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동으로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그는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부하였다.(대하:16:7) 강조점은 그가 의사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 의사는 이방인 의사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기를 거부한데 있는 것이다.  의사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렘8:22)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약용으로 사용한 것을 말씀하셨다.(눅10:34)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되었을 때 우리는 그녀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아오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여졌 다는”(막5:26) 것을 듣는다.  만일에 그 여자가 의사에게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여기에서 예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안하시고 그 여자가 표현한 그 믿음을 받으시고 그것에 대하여 그 여자를 칭찬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의사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는 또한 열명의 문둥이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보내셨다.(눅 17:4) 율법 하에서는 제사장이 진단, 격리, 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레 13:2 이하, 14:2이하, 마8:4) 이와같이 예수께서는 병을 진단하는 사람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주님의 대리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치료는 즉각적이든, 점진적이든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막8:24) 이와는 달리 성경에서 치료된 사람들이 치료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신유를 간증하지 않았다.   


오늘날 신유에 대한 남용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선포를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도들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3:6)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유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안에 두신 성령의 나타냄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12:4-11, 28,29)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은사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덕을 위하여 몸의 지체들을 통하여 수행되어질 수 있다.(지혜의 말씀이 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신유의 은사가 사람을 치료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신선한 지혜의 말씀이 각각 필요에 따라 주어지듯이 신선한 신유의 은사가 성령에 의하여 각각 아픈 사람에 대하여 주어진다.)   


우리는 또한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환경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치유의 기적이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을 보게된다.  이것을 특별한 기적이 바울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던 경우인 것과 같다.(행19:11) 우리는 신유에 관하여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왜 어떤 사람은 치유를 받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이어서 표적이 따르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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